제 8강 재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것이 율법 안에 들어있죠. 근데 왜 이 율법이 룻기에 등장해야 되고 또 창세기에 여러 가지 들어있는가? 율법 안에서 인간은 죽은 존재가 되죠. 율법이 인간을 볼 때에 뭐로 보느냐 하면은 이 인간의 모습은 이미 죽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인간을 죽은 존재로 보면서 율법 안에 시형제 결혼법, 혼인법, 시형제 혼인법도 율법 안에 들어있다는 말은 죽은 존재를 율법 안에, 시형제 혼인법을 적용을 시키면 이 죽은 존재가 살아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죽은 존재가 자기가 잘나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혜택으로 살아있기 때문에, 여기 살아있다는 내용 안에는 무엇이 살아 있느냐 하면은 율법은 계속 살아 있다가 산 사람 속에 포함이 되겠죠. 이 시형제 결혼법에 있어서 적용되는 그 환경은, 부모가 결혼해서 자식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자식이 없어요. 이것은 자식이 없다는 말은 아버지 어머니는 있는데 자식이 없죠. 아버지와 어머니는 있는데 그 자식이 없을 경우에 이 아버지의 어머니의 혼인 관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복 받은 결혼인가, 아닌가가 확인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은 자식이 있을 때 우리의 혼인 관계가 정상이라는 복된 결혼이라는 것을 마치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셨다고 그렇게 이해를 했어요. 그건 아브라함 언약에 있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게 되면 자식이 생긴다. 그럼 자식이 안 생기면 이거는 복이 아니라 복의 반대로 우리 가정을 저주했다고 그들은 이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자식이 없기 때문에 저주받은 자라는 규정, 여기에 하나님의 시형제 결혼법이 들어오게 되면 없던 자식이 새로 발생되죠.
그럴 경우에 이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생긴 자식은 거꾸로 부모님, 특히 아버지. 아버지 중심으로 된 이 가정에 어떤 과오가 있는지, 어떤 잘못이 있는지 지적할 수 그러한 근거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자식이 없어버리면 여기에 그들이 정상적인 생활인지를,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생활인지를 알 길이 없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자식을 낳는다면, 여기에 자식이 생겼다. 또는 그들의 자손이 생긴다고 하면 이 기대했던 자손이, 이걸 자손1 또는 자식1이라고 하고,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새롭게 자손이 생겨버리면 이건 없는 자식이 생겼으니까, 자손2 또는 자식2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시형제 결혼법이 추가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냥 흔히 부모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면 이 자식은 새삼스럽게 아버지에 대해서 문제 삼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없는 데서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새롭게 자손이 생겨버리면 이 자손은 아버지 어머니의 문제점과 그리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율법이 적용되었다는 이 두 가지가 자손 안에 내용으로 둘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지적함으로서 자손이 있다든지, 내가 살아있다든지 그것보다도 뭐가 부각되어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율법이 부각되어 있다. 하나님의 율법이 부각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 안에는 저주와 복, 사망과 죽음의 근거도 같이 율법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게 되면 이 룻기 4장에 나왔듯이, 그 대목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18절에,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그렇게 되어 있죠. 여기에 베레스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 베레스가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나온 자식입니다. 하지만 베레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라라는 자식이 있어요.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나왔어요. 자식이 둘이 나왔으니까, 이 자식 둘로 인하여 어느 자식이 제대로 하나님의 시형제 결혼법의 결과로서 나온 자식인가를, 둘이 나왔으니까 이게 분간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만 나오면 이 하나가 하나님의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나온 자식이라는 것을 알겠는데, 이게 둘이 나와 버리면 이 둘 중에서 하나는 장자가 되고 하나는 장자가 되지 못해요. 베레스가 유다와 다말 가운데서 장자가 되었다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목하는 자식은 차자도 아니고 셋째도 아니고 넷째도 아니고 바로 장자입니다. 이 장자 안에 인간은 비록 죽어 마땅하지만 율법은 계속 살아있어야 함의 증거로서 장자는 부모에 의해서 계속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율법이 살아있음에 대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이 자식은 후보가 둘이기 때문에 하나가 끊어지고 하나가 나타나게 되어 있죠. 여기 룻기 4장에서 1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11절에 보게 되면 뭐라고 축복을 하게 되느냐 하면은, 중간에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성경에 룻 이전에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그 하나님의 언약, 말씀 또는 율법. 율법에 적용을 받았던 그런 자식이 드러난 사례를, 주위 사람들이 축복하기를 하나는 뭐냐 하면은 라헬과 레아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 베레스의 교훈을 들고 있다 이 말이죠. 베레스라고 하는 것은 아까 말씀한 것처럼 세라와 같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적용시킬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인간이 율법을 지키게 되면 그게 율법의 재현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바로 베레스와 세라 두 자식을 낳는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그래서 약속된 복을 받아낸다는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에서 생각하는 그 자식을 자식1이라고 합시다.
그거 말고,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실천해서 율법이 약속한 복을 따낸다는 그 사고방식에 의해서 도리어 대립이 되고 핍박을 받으면서 등장하는 자식을 자식2라고 봅시다. 그러면 이 자식1과 자식2 사이에서는 그 원천에 대해서 심하게 대립이 되는 거예요. 베레스와 세라가 출생하는 그 과정 속에서, 이렇게 베레스와 세라 자식 둘을 낳았다는 말은 바로 한쪽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는 모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숨겨져 있는 율법의 계통의 자식을 통해서 기존의 인간들이 야망, 욕망에 기대하는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그 인간적인 욕망을 지적하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인간에게, 약속의 백성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라헬과 레아도 마찬가지에요. 이게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죠. 라헬과 레아가 누구냐 하면은 야곱의 부인들입니다. 야곱의 부인이 한명이 아니고 둘이라고 하는 것은, 라헬과 레아 이 두 사람을 생각해 볼 때, 야곱 자신은 아리따운 아내를 원해서 라헬을 원했건만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주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라헬과 레아 사이에 바로 두 부인이 경쟁자 위치에 있어요. 납달리. 납달리 라는 자식도 경쟁자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이 경쟁자 위치에 있으면서 정작 하나님의 율법의 개입으로 얻고자 하는 부인은 레아가 아니고 라헬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라헬이라는 아내를 잃을 때에 야곱의 이름이 바뀌어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육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상으로 보지 않는 육적인 인물이 야곱이라면,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 준해서 나타나야 될 축복의 원천은 조상으로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①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먼저 인간들의 육적이 속성이, 그 비정상성이, 그 악함이 드러나게 만드는 환경을, 율법이 등장하기 이전에 먼저 조성되고 ②그 다음에 율법이 개입해서 인간의 죄를 어떤 식으로 율법 안에서 그걸 받아들여서 극복해 나가느냐, ③그리고 나온 극복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바로 새로운 자식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과 유다에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과 언약백성들에게 일어났던 상황이 그대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룻기에도 그대로 재현이 돼요. 룻기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율법, 그 당시에 이스라엘이 제사법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율법이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율법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갱신하고 재편하는 방식을 사용해서 약속의 자식으로 등장시켰다. 그 약속의 자식이 룻을 통해서 태어난다. 마치 베레스와 세라의 경우와 같이.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베레스와 세라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창세기 38장에 유다는 가나안 여자와 혼인을 합니다. 혼인을 해서 자식을 세 명을 낳아요. 엘과 오난과 셀라. 세 명을 낳게 되는데, 역시 엘은 맏이죠. 맏이인데, 엘 역시 가나안 여자 다말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마치 미국에 청년들이 왔을 때 같은 미국 사람과 결혼한 것이 아니고 인디언 처녀들과 결혼하는 그런 꼴이라 이 말이죠. 인디언 처녀들은 기독교도 모르고 청교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겠죠. 그냥 자기가 살아왔던 그 환경, 배경을 그대로 가지고 결혼하는 겁니다. 결혼을 하는데, 아브라함이 준 약속에 의하면 그 약속 속에, 언약 속에 있는 이 야곱이나 유다에게 자식이 하늘의 별만큼, 땅의 모래만큼 이렇게 자식이 많이 번창해야 해요.
근데 번창할 수 있는 씨, 그 장자, 자식이 없습니다. 자, 유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다라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히 복을 줬다고 언급을 했는데 유다는 복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는 거예요. 왜? 자식이 없으니까.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처럼 이렇게 자식이 없으니까, 도대체 왜, 뭐가 문제가 있어서 자식이 없는지를, 그 문제를 유다가 감을 못 잡고 있는 거예요. 엘과 다말이 결혼을 했는데 자식이 없다. 유다는 자기 자식 엘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자식이 없다면 그 원인은 이방여인인 다말에게 문제가 있어서 자식이 없다고 그런 마음을 굳히게 됩니다.
맏이 엘에게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엘은 죽어요. 그런데 자식은 장자가 죽었으니까 다음 차자나 세 번째가 장자의 자식을 낳아야 될 책임이 있다는 것이 바로 시형제 결혼법이죠. 그래서 이 다말은 시동생인 오난과 혼인을 해서 자식을 낳아야 되는데, 오난은 하나님의 율법보다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더 우선시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보다,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보다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그게 더 실제적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오늘날 모든 사람이 오난과 같이 마찬가지죠. 내 기쁨이 되지 못하고 내 즐거움이 되지 못하는 일을 내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그럼 내가 자식을 낳아도 내 자식이 되지 못한다면 나만 손해 보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 거예요.
그래서 일단은 법대로 혼인을 해서 법대로 동침을 했는데 오난이 그만 땅에다가 자기 정액을 설정을 해버렸어요. 그런데 이 사실은 같은 인간들 같으면 충분히 이해를 해요. 자식을 낳아도 자기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삼촌이라고 불러야 되는 그 서글픔을 어떻게 감당할 거며, 애를 볼 때마다 얼마나 자기 신세가 처량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괴로움을 받기 싫어서 자기 정액을 형수 다말에게 주지 않으니까, 이거는 뭐 유다가 그런 것도 아니고 다말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께서 오난을 죽여 버렸어요. 하나님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얼마나 괴로운가, 슬픈가, 얼마나 서러운가에, 인간이 얼마나 행복을 원하느냐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 죽어야 되고. 아니, 태어날 권한도 없고. 그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기본이에요.
기본인데, 인간은 태어나게 되면 자기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태어난 건 당연하고 이왕 태어났으면 행복해야 된다는, 이런 오기를 부리는 겁니다. 유다도 마찬가지죠. 유다의 죄가 엘과 오난과 셀라에게 다 전수되어가지고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잘해보자는 그런 거죠. 유다가 자기한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셀라마저 다말이라는 이방여인의 저주로부터, 부정 타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이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습니다.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장자가 중요하지, 둘째 셋째 넷째 이거는 보조배터리 같은 그런 경우밖에 되지를 않아요. 주지를 않았어요.
여기서 다말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 집에 시집을 와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 시아버지에게 주신 언약이 무엇이며 말씀이 무엇인가를, 이걸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유다의 일정을 파악해서 어느 지역에 외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지역에서 창녀로 변장해서 유다와 동침을 합니다. 이렇게 동침을 했을 때, 유다는 다말이 창녀로 변장을 했기 때문에 자기 며느리인줄 몰랐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여기서 한번 딱 동침을 했는데 놀랍게도 임신이 되었습니다. 참, 이거 신기한 일이죠.
룻기 2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 속한 밭에 있었더라” ‘우연히’입니다. 우연히. 우연이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 인간의 언어, 인간의 예상, 이 모든 것이 서로 포착되지 않는 거예요. 붙잡을 수 없는 거예요. 우연히 했다고 하는 것은 그걸 사건이라고 하는데,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나타났다고 저절로 사라져요. 붙잡을 새도 없이 그냥 사라집니다. 또 나타날 수도 있고. 우연이죠. 임신이라는 것도 그야말로 우연히 된 거예요. 우연히.
유다 입장에서는 다말이 이방여자기 때문에 무시하고 율법도 모르고 그리고 우리 집안을 거덜 낸 책임이 있는 여자. 우리 가정을 하나님의 복에서 끊어내는 현상을 일어나게 하는 유발자. 원인제공자. 그렇게 유다는 다말을 무시했어요. 그리고 유다는 자기가 하나님을 알고 이방 여인 다말은 모른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지금 유다는 무엇과 대결하고 있느냐 하면은 다말하고 대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유다는 무엇과 대결하고 있느냐 하면은 율법과 대결하고 있습니다. 율법. 유다는 자체적으로 율법을 안다고 생각하고 율법에 의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처럼 자식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 자식1이. 이 자식1이 없어서, 죽어서 문제인데.
그러나 율법이 생각하는 자식이 등장할 때는 자식2가 되는 겁니다. 자식1과 자식2가 둘 다 다 나와요. 그래서 이게 경쟁적이고 이것이 대결적이에요. 마치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활동하면서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제시한 것이 뭐냐 하면은 너희들이 믿고 있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야, 나 예수가 하나님이냐,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는 거예요. 대결적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다. 그러니까 여호와가 우리 신이라고 하는 것과 너희들이 생각하는 신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예수님. 그들은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죠. 오늘날에게 우리도 하나님이냐, 예수님이냐를 하나님께서 묻고 있는 겁니다.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뭐냐 하면은 우리의 실천에 따라서 우리에게 복을 줄 수 있는 나를 위한 하나님이 우리가 그동안 인간적으로 본성상 찾고 있는 하나님이에요. 나의 기도를 응답하고 나의 헌금을 받으시고 나의 예배와 찬송을 받으시는,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보상을 주시는 하나님. 이게 우리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이 예수님하고 충돌하고 대립하고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면 복이 온다고 생각하는 이 생각, 사고방식이 유다가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고. 거기에 낯설게 옆구리 치고 들어오는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은 진짜 숨겨져 있는 율법이 제시하는 율법의 완성은 유다를 통해서가 아닌 다말을 통해서 들어오는 거예요. 둘이 되니까.
그래서 임신을 해가지고, 유다가 어떤 소문에 의해서 자기 며느리가 배불러서 임신을 했다는 것을 듣고, 유다는 “역시 이방여자니까 행세하는 것을 알아봤어. 저 이방여자는 집안의 웃음거리니까 불태워 죽여라.” 이렇게 과격하게 이야기합니다. “니 누구하고 동침했냐? 아이 아버지가 누구냐?”라고 유다가 다말에게 물어볼 때,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내놓으면서 “바로 이분하고 동침했습니다.” 보니까 이 분이 유다 본인이거든요. 그럴 때 유다가 하는 말이 뭐냐, “네가 옳도다.”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다말이 옳다고 하는 말은 다말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진짜 숨겨진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을 대하게 되어 있거든요. 따라서 율법 앞에서, 다말 앞에서, 말씀 앞에서, 언약 앞에서 유다는, 나는 바로 죄인임을 지적받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믿다가 예수님의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 들어와 버리면 내가 나를 위해서 믿었던 신이 바로 우상이었다는 것을 지적받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이 유다의 지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식을 낳는데, 자식이 하나가 아니고, 그 뒤에 유다와 다말이 같이 혼인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한번 동침만 했을 뿐이죠. 베레스와 세라가 자식이 둘이 나왔다 이 말이죠. 자식이 둘이 나왔으니까 둘 중에 누가 장자냐 하는 문제는 정해져야 해요. 세라가 마치 장자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둘 사이에 자기들끼리의 문제에요. 장자로 느껴지는 그 마지막 순간에, 쇼트트랙 경기하는 것처럼 갑자기 베레스가 칼날을 들이미는 거예요.
세라를 제치고 베레스가 장자로 먼저 나와 버려요.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베레스가 장자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중요하죠. 그 과정이. 그 과정 속에서 율법이 하는 기능은 인간의 육, 인간들이 생각하는 율법의 완성을 진짜 율법의 완성이 제쳐버린다는 사실. 그걸 비난하고 지적하고 정죄하면서, 그걸 극복해버리면서 뭐가 되느냐, 자식이 탄생하는 겁니다. 따라서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면 부모,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는 정상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자식을 낳아야 한다. 이게 자식1이라면, 율법에 새롭게 등장한 자식2가 둘 사이에 경쟁을 함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과오가 있고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자식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한 자식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자식이에요.
부모는 자식에게 죄를 물려주지만, 약속된 자식은 그 부모가 모르고 있는 죄를 지적하면서 그 죄의 결과, 죽음마저 극복해내는 요소가 이 자식의 희생에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베레스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룻4:12) 하나님의 율법의 개입이 실제적으로 적용이 될 수 있는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디다 적용시키느냐 하면은 룻기 4장 17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이웃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여러분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오벳이라는 뜻은 나오미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나오미가 아들을 얻었다. 이게 누가 봐도 상식에 위배됩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오벳이라는 자식을 낳은 것은, 이것은 나오미가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에요. 룻이 자식을 낳은 거예요. 룻의 아들이에요. 이 오벳은 나오미의 손자가 돼요. 나오미가 보아스하고, 늙은 나오미가 젊은 보아스하고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면 그때는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나오미는 결혼을 안 했어요. 애기 못 낳아요. 며느리가 애기를 낳았죠. 그러니까 이건 손자죠. 자기 아들의 부인이 자식을 낳으면 자기한테는 손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나오미가 자기 아들을 낳았다고 할 수 있느냐? 그거는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 네모가 비어있습니다. 비어있는데,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율법의 자녀,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만큼 율법이 스스로 개입해서 나온 하나님의 귀한 약속된 자녀가 이 빈 네모 칸에 온다고 예상이 됩니다. 현재는 없죠. 현재는 없는 겁니다. 없는 자식이죠. 그러나 칸은 만들어둡시다. 자, 없는 자식인데, 없는 자식이 되려면 아버지가 있어야죠. 그 아버지도 엘리멜렉이 되기 때문에 없어요. 그리고 엄마도 없어요.
지금 이 가정이 누구의 가정이냐 하면은 엘리멜렉의 가정입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이니까, 여기에 엘리멜렉이 들어가고 여기에 나오미가 들어가는 거예요. 엘리멜렉이 들어가고 나오미가 들어가는데, 현재 엘리멜렉은 죽었어요. 그럼 없는 거예요. 아버지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있어도 남편이 없기 때문에 자식을 못 낳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여기 없는 장소에다가 오벳이라는 자식을 여기에다 집어넣기 위해서 이 엘리멜렉의 자리에 보아스가 들어가고 이 없는 엄마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은 여기에 룻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후보감이 둘이 되는 겁니다. 엘리멜렉이냐 보아스냐, 나오미냐 룻이냐. 없는 자식이냐, 아니 있는 자식 오벳이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올 때는 율법이 개입되죠. 율법이 끼어서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럼 현재 있음은 뭐로 바뀌어야 하느냐 없음으로 바뀌어야 돼요. 부모가 없는 데서 생긴 자식이, 왜 죽은 부모에서 자식이 생길 때, 왜 이 부모는 죽어야 마땅한가를 지적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포함된 자식이어야 하는 겁니다. 없던 자식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엘리멜렉과 그리고 보아스를 한번 비교해보라 이 말이죠.
엘리멜렉은 율법으로 준 그 은혜의 땅에서 자기의 생존과 생계가 위태롭다고 해가지고 율법을 훌떡 버리고, 쉽게 버리고 율법이 없는 모압 땅으로 간 사람이에요. 이름은 거창하게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고 지어놓고. 하나님이 나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그거는 빈껍데기고 실제 안에는 뭐냐, 살고보자에요. 나는 내 위주다. 그걸 다 여과 없이 보여준 사람이 엘리멜렉이에요. 부인 나오미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떠난 것을 가지고 율법으로 집어넣는데, 그 율법을 가지고 집어넣었다는 말은 룻을 가지고 이들을 다시 약속의 땅에 합류해서 오게 했습니다. 우연히 보아스를 만나게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이방 여자 룻을 만나게 했고.
그러니까 이 모든 율법의 개입은, 율법 자체가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율법은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어디에 근원적으로 문제 있는지를 지적하면서 율법은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이 부모를 살려내는 겁니다. 이러한 룻의 경우가 이게 왜 엘리멜렉의 집안에서 생겼느냐 하면은, 엘리멜렉의 이름이 하나님은 나의 왕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제의중심의 이스라엘을 왕 중심으로 통합되는 이스라엘로 바꾸기 위해서 엘리멜렉의 가정을 이용하신 거예요.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니까.
그러면 이 왕의 되는 원칙은 기존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냥 혈통적인 왕만 다루겠죠. 그것이 바로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면은 마태복음 1장 6절에 나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래 되어 있죠. 이것을 한번 도표로 그리겠습니다. 솔로몬이 여기 있습니다. 솔로몬에 다윗이 나오고 여기에는 우리야(아)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볼 수 있어요. 솔로몬의 아버지가 누구냐, 다윗이냐? 우리야냐? 우리야의 아내가 누구냐 하면은 밧세바거든요. 만약에 우리야의 자리에다가 밧세바를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럼 다윗과 밧세바가 결혼해서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이거는 너무 상식적이고 의아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남자인 다윗이 여자인 밧세바를 만나서 자식을 솔로몬을 낳았다. 이게 뭐가 문제죠? 아무 문제가 없죠. 문제는 뭐냐 하면은 뭐가 율법적으로 봐서, 하나님 쪽에서 봐서 뭐가 문제냐? 이 자식 솔로몬이 다윗과 밧세바의 혼인에 대해서 문제 있음을 지적할 거리가 없다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주신 자식1이 아니고 자식2죠. 여호와가 아니고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 자식2에 의해서 그동안 죽어 마땅한 조상들이 자식2의 정신이 주어지게 되면 이게 다 살아나는 거예요. 마치 화투장이 엎어져 있다가 마지막 화투장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다 살아나는 것처럼 그렇죠. 그런 방식인 겁니다.
마태복음 1장 6절에서는 이 밧세바라고 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의도적으로 남자이름을 집어넣어요. 그리고 묻습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자식이냐 우리야의 자식이냐를. 어떤 자식으로 인하여 아버지 대가 자신의 문제점과 율법의 위반자라는 것을,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없고 저주를 받아 합당하다는 것을 지적당할 수 있는 자식이냐를 묻는 겁니다. 우리야가 죽은 자인데요. 우리야를 누가 죽이느냐, 다윗이 우리야를 죽였어요. 그 죽은 자의 아내가 밧세바에요. 그러면 이 죽은 자의 아내라면 이 밧세바가 살아있는 한, 죽은 남편이 밧세바에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선지자를 보내죠. 나단선지자를 보낸다는 말은 하나님의 율법의 개입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개입을 의미하니까, 다윗의 자기 과거사가 나와요. 간음했고 그리고 살인했고. 간음하고 살인한 그 증거가 다윗과 밧세바가 간음했을 때 임신이 되고 자식이 등장합니다. 그 자식이 낳자마자 죽는 게 아니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그 자식을 위하여 놀란 마음으로 간곡히 자식이 살아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시름시름하게 함으로서 다윗으로 하여금 죽은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게 만드는 그 모습을 절실하게 다 보여주게 하십니다. 보여주면서 하니까 막상 그 자식이 죽고 나니까 도리어 다윗은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생기발랄하게 다시 돌아왔어요.
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자기의 기도로 자식이 사는 게 아니고, 자기의 기도로 자식이 살게 되면 아직도 내 기도가 먹히는 셈이 되죠. 그러나 내 간절한 기도, 금식기도마저도 먹히지 않는다는 말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개입하신 것으로 보는 겁니다. 시편 51편에 보게 되면 다윗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죄지은 것이 아니고 대대로 흘러내려온 어미의 죄 속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겁니다. 죄 덩어리로. 따라서 나의 살인, 간음 이 모든 것도 이거는 내가 행해서가 아니라 내 죄가 내 인생에 개입한 거죠. 개입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죄의 개입은 곧 무엇의 개입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율법의 개입이에요. 율법의 개입. 율법의 개입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개입입니다. 그 말씀의 개입을 통해서 자기와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그 자식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그것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주께서 꺾으신 뼈라고 보는데, 왜냐 하면은 본인의 죄를 듬뿍 담은 자식1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식1. 첫 번째 자식이 그렇게 죽는 것은 다 내 죄가 근원적으로 있음을 알려주면서, 그 내 죄의 결과로 자식이 죽는 거죠.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께서 꺾으신 뼈로 나로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기쁘게 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가 자신한 것을 죽여 버림으로서 다윗에게 다윗 자체적으로 자식을 낳을 권한이 없음을, 박탈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율법적으로 다윗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저주받은 사람이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윗이 새로운 자식을 낳는데 이게 밑거름이 되고 재료가 되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시편 51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번제와 속죄제를 원치 아니하시고. 16절에,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17절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이라”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 드리고, 속죄제, 번제 드리라고 누가 지시합니까? 율법이 지시하거든요. 율법이 지시하니까 인간들은 자기 몸이 율법을 실천할 수 있는 정상적인 몸이라고 착각해가지고, 율법을 지키면 그 율법대로 복이 오리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자식 낳는 것도 하나님의 율법 지킨 정당한 대가로서, 보상으로서, “참, 너 착하구나. 자식 줄게. 이게 복이다. 받아라! 이런 식으로 내 자식이 생긴 줄 알았죠. 다시 말해서 자식은 내 부모의 정당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물로서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의 간곡한 실천의 열매로서 말이죠.
근데 다윗은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레위기의 제사, 번제 다 드리라고 하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그런 제사, 번제가 아니라, 그런 것이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이라 이 말이죠. 상한심령.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다윗은 상한심령으로 개입하게 되면 율법은 자체적으로 스스로 재편되고 갱신되어서, 여기서 율법에 합당한 율법의 자식으로 솔로몬이 주어지는 겁니다. 이걸 다윗은 기뻐하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스스로 율법 되게 하고 갱신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 죄인은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 말이죠. 죄인으로 가담하게 된 것에 대해서.
그래서 여기에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그 증거를 머금은 그 아내와 기어이 혼인을 해서 자식을 낳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죄인임을 계속 드러내는 그 아내와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이 솔로몬은 내 자식이 아니고 율법의 자식이고 하나님의 언약의 자식인 것을 결혼을 통해서 알리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 합당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 합당한 이 위상은, 이스라엘 나라에 속한 진정한 백성들에게 전부 다 확대되는 것이 너무나 마땅한 거죠.
신약에 들어와서 교회들이, 사람들이 십자가보다도 부활의 새 생명을 자꾸 언급해요. 교회에서. 왜 그러냐 하면은 사람들은 부활이라는, 죽었다가 살아난 그 결과, 괜찮은 결과에 눈독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라는 것이 왜 부활을 맛볼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한 것을, 그것을 노선 변경해줘야, 족보변경이죠. 교체. 그 노선교체를 통해서 알아야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나를 위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스스로 본인이 부정할 수가 없어요. 빠져나가고 싶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라는 것이 너무 지독하게 나에게 집착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든 예수든 삼위일체든 뭐든 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상이고, 이거는 율법에서 주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인간들의 악마성에서 나온 거짓된 관계거든요. 연결고리다 이 말이죠. 이 자리에 주님께서 십자가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경쟁이 일어나죠. 나를 위한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냐? 나를 버리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야? 나로 하여금 상한심령, 오류가 있는 심정,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지적질 하시는 하나님이 진짜 구원의 하나님이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율법의 완성으로 우리에게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인의 입장에서 주의 일관된 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자기의 죄를 머금은 여자와 결혼함으로서, 사실이니까. 십자가에 의해서 죽은 내가 생명을 얻는 근거가 나에게 있지 않고 내가 죽인, 내가 가해자가 된, 나로 인해 피해자가 된 바로 그분에게 내 생명의 원천이 있음을 우리는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령이 온다는 것은 우리를 죄인의 입장에서 끄집어낸 그 예수님의 인식을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도로 받게 되는데요. 그러면 우리 자신은 주님 앞에 영원한 죄인이 되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인생 망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십자가에 참여시킨 대단한 재료들이 되는 거예요. 된다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개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복음을 알면서도 자살한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왜 훌륭한 하나님의 작품을,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고자 합니까?
율법이라는 것은 너의 율법 나의 율법이 아닌, 율법은 율법을 위한 율법이고 주님을 위한 율법이에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사이로 갔을 때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었어요. 그것을 보고 지적하던 바리새인 하나가 너는 왜 안식일을 어기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안식일이다. 내가. 내가 안식일인데? 이 말은 바로 대립되는 겁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냐?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걸 분명히 하자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런 십자가가 있는 성도는 무엇이 기쁘고 감사하느냐 하면은 나의 관찰, 나의 해석, 나의 선택이 주님의 관찰과 주님의 해석과 주님의 선택 앞에서 이게 무용지물이 된다는.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가볍게 하는지 몰라요. 주님이 관찰자가 되고 주님에 의해서 해석당한 자가 되고 주님의 의해서 선택 당한다는 말은 주님이 하는 일에 우리가 감히 죄인입장에서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그동안 우리가 놓쳐버린 감사와 고마움을, 바로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 속에서 우리가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끝으로 고린도전서 15장을 보겠습니다. 55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절,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래 되어 있죠. 율법. 성도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가담했다는 말은 우리가 의인된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의. 내가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묻게 되게 되면, 이것은 루터의 잘못인데요. 루터가 여기까지 몰랐죠. 루터는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묻는 답변에 답변을 못했어요. 이거는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의인이 돼버리면 이거는 나의 숨겨진 욕망의 자아를 또 발휘하는 거예요. 의인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기쁘냐? 기쁨을 자기가 예상하고 노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이용해서.
그러나 의가 돼버리면 이거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당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관찰당한 거예요. 해석당한 겁니다. 내가 굳이 나를 해석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주님 앞에 십자가로 죄인으로 규정됐잖아요. 됐으면 새삼스럽게 어떤 사람들이 율법을 가지고 나를 죄인이라고 이렇게 쏘아대고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인민군이 와가지고 너는 죄인이라고 쏘아대는 것하고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우리를 공격한다면 우리가 이미 벗어놓은 더러운 옷가지에다가 총을 두두두두두~ 쏘는 것하고 마찬가지라 이 말이죠.
우리는 율법으로 지적을 받아요. 그거는 뭐냐, 이미 구원받은 그 구원이 얼마나 주님의 큰 사랑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율법으로 지적을 받죠. 그러나 새삼스럽게 율법에 의해서 죄인 될 필요가 없고,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즐겁게 주님을 증거 하면서 고백하면 되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살면 되느냐, 그것은 타인에게 물을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주님과 함께 있다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많은 교회에서 십자가보다도 부활을 이야기해요. 십자가는 그냥 간이역처럼, 작은 역처럼 지나가고 후딱 부활로 가는데,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분명히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깊은 뜻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에요. 하나님의 깊은 뜻은. 그러나 교인들은 뭘 요구하느냐,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을 사람들이 요구하는 걸 알기 때문에 부활 쪽에서 가는 걸로 해버립니다. 이거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사람의 종이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에요.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복음만을 전해야 하는데, 이 복음은 하나님이 가장 감추어놓은, 하나님의 비밀의 막, 달달 뜨거운 비밀, 더 이상 비밀이 없는 최고의 비밀. 십자가만을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고 그것을 증거 하는 것, 그 개입을 증거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이런 것을 받지 못하고, 이런 것을 모르게 되면 그 사람은 저주받는 거죠.
다시 한 번 말씀을 정리하고 8강의 재정리를 마치겠습니다.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할 때에 이 오벳이 죽은 아버지도 살리고 죽은 어머니도 살리듯이, 바로 이러한 효과가 이방인 다말이 등장함으로서 이스라엘 전체에 이 효과가 확대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계통은 바로 이 원칙이 반복되면서 왕 자리까지 이르게 되죠. 그러면 진짜 생명은 율법의 완성 사랑에 의해서, 더 이상 율법에 지적받지 않으면서, 이미 율법에 의해 죄인 됨을 규정받은 자유함과 그리고 감사함과 고마움. 그런 것들로 인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이 왕 중심으로 다시 재편되는 겁니다.
성도가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관찰해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할 수가 없고요. 그것도 하나의 자기 의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오게 되게 되면, 십자가 앞에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던 그 처참한 몰골이 바로 현재 주님께서 우리를 관찰하고 해석하는 그 자체인 것을, 그 인식인 것을 우리가 도로 가질 때,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세계에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서 초청해준 것, 그것만 해도 우리는 감사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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