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룻기1강(구득영)

아빠와 함께 2020. 8. 24. 04:00

2020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룻기) 1강, 경계
강의 이근호 목사, 정리 오용익 목사

지금부터 십자가마을 수련회를 시작하겠는데, 기도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겨냥한 그 말씀을 주셨사오니, 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하나님에 대한 그 관점을 우리도 같이 공유하게 해주셔서, 주님처럼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경계선, 왜 넘어갔는가?

룻기 시작하겠는데, 룻기 1장 1절에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라고 한다는 겁니다. 첫 번째 시간의 강의제목은 '경계' 인데, 즉 이쪽과 이쪽을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룻기 1장 1절에 보면 두 종류의 경계가 나온다는 것이죠.

(룻 1: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하나는, 이스라엘 땅에서 모압 땅으로 경계선을 넘어가 버렸는데, 엘리멜렉 가문이 말이죠. 두 번째 경계는 뭐냐 하면, "왜 넘어갔느냐?" 라는 겁니다. 흉년이 들어서 넘어갔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은 첫 번째의 경계를 넘어간 것이 위반이라는 말이죠. 약속의 땅에서 이방 땅으로 간다는 것이 위반인데, 왜냐하면 흉년이라는 자연재해, 그런 자연조건이 위반을 정당화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에 왔는데, 그런데 그 율법에 의해서 위반이 된다는 말이죠. "율법이고 뭐고 간에 지금 내가 먹을 것이 없어서 죽게 되었는데, 그까짓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래서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그 어떤 법도 위반할 수 있는 권한이 허용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 나는 견딜 수가 없어 !!

다시 말해서, "내가 굶어죽는 판에 하나님이 어떤 법을 정했든 간에, 어디에 살든 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부터 살고 봐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모압에서 좀 살았다. 어쩌라고?"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흉년이라는 이 조건에 대해서 견딜 수가 없는데, 견딜 수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율법이 우선이냐" 생존 생계가 우선이냐?" 라는 딜레마가 1장 1절부터 시작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이 우선이냐? 아니면 내 목숨을 부지하는 그것이 우선이냐?" 라고 하게 될 때, 여기서 엘리멜렉 가정은 무엇을 했느냐 하면, 여기서 법이 있는 '나'에서부터 법이 없는 '나'로 그 경계를 넘어섰다는 말이죠. 땅의 경계선을 넘은 것이 율법의 경계를 보여준다면, 이것은 기본적인 '나'의 경계를 보여준다는 겁니다.

이 경계라는 것이 룻기 1장 1절부터 두 종류가 시작되는데, 예를 들어서, "고3인데 교회에 갑니까?" 라는, 그런 것이란 말이죠. 고3이면 당연히 시험준비를 해야지 교회에 가면 안 된다는 것인데, 시험준비도 하지 않고 교회에 갔다가 나중에 성적이 나빠지면 누가 책임을 지느냐는 겁니다.

부모가 책임질 겁니까? 아니면 목사가 책임질 겁니까? 목사가 대신해서 수능시험을 찰 수 있습니까? 쳐봐야 점수도 별로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ㅋㅋ),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자기 문제를 그렇게 대신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쳐놓은 율법의 경계선을 "나는 견딜 수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나는 얼마든지 법이 없는 곳으로 갈 수 있다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나는 언제든지, 즉 '나1'은 '나2'로 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그런데 '나1'보다도 '나2'가 내 생존에 유리하다고 할 때는, 그 '나2'로 언제든지 옮길 수 있다. 따라서 '나1'과 '나2' 사이의 경계보다도 이것이 더 근원적이고 기본적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이 지상에 하나님이 격자처럼 깔아놓은 법이란 것은 어디에 해당되는고 하니, 이것은 이스라엘 땅에만 해당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 땅에만 해당되는 법이라는 것, 이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왜냐하면 법보다 자기가 더 중요하니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법이 있다는 점을 무시하지 않지만, 내 생계가 더 우선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법 없는 곳으로 갈 수 있다" 라는 겁니다. 그게 모압 땅인데, 사해를 너머 법이 없는 곳으로, 베들레헴에서 모압까지는 별로 멀지도 않는데 말이죠. 그렇게 지금의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건너와 버렸다는 것인데, 이것은 누가 결정했다는 겁니까? "이것은 내가 결정한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법이 있으면 좋은데, 하지만 자기가 살기 힘들 때는 어떻다는 겁니까? "살기 힘든 나와 그보다 여유가 있는 나, 그 사이의 경계를 항상 타넘을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이 나에게 있다"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둘 사이에 어느 것이 우선하는 것이냐?" 라고, 그 질문을 룻기 1장 1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 잠시 이스라엘의 지도를 살펴보면 !!

그러면 첫 번째로 이스라엘에서 모압 땅으로, 이것이 율법의 경계인데, 왜 모압 땅으로 가면 안 되는 겁니까? 왜 율법에 위배가 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말이죠. 이스라엘의 지도를 그릴 때는, 여기가 갈릴리 바다, 그리고 그 아래는 사해인데, 그 사이를 연결해서 흐르는 강이 요단강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요단강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이죠.

지중해가 여기 서쪽에 있는데, 처음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을 때 시나이 반도를 지나 이리로 들어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들어올 때 이 땅에는 원주민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창세기 15장에 보면 여러 족속들이 나오는데, 히위 족속, 옆이 시돈이고, 그 밑으로 헷 족속인데, 이 민족들이 한 곳에 모여도 살지만 흩어져 사는 경우도 많다는 겁니다.

* 겹치는 가나안 원주인과 이스라엘 12족속 !!

이쪽 해변가에는 가나안 족속, 서쪽방향으로 그 옆에 브리스 족속, 갈릴리 바다 옆에 기르가스 족속, 그 밑에 여기도 다시 가나안 족속, 지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말이죠. 여기를 '서안지구' 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벽을 세웠다는 겁니다. 가나안 밑에 여기에 히위 족속, 위에도 있지만 여기도 있다는 말이죠. 그 밑에는 여부스 족속, 예루살렘 근처가 여부스라는 겁니다.

그 밑에는 겐 족속, 사해동편으로는 아모리 족속, 그리고 해변가에는 가나안 족속, 밑으로 가면 여기가 블레셋 족속이고, 아래쪽으로 내려와서 여기에는 악명이 높은 아말렉 족속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사해동편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에돔, 모압, 암몬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 땅에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그 뒤에 여러 족속들이 많이 나왔는데, 창세기 15장에 그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이미 열 족속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두 족속으로 갈아치워 버렸다는 말이죠.

(창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 15: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창 15: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창 15: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까만색으로 표시된 원주민 족속 이름들 위에 빨간색으로 겹쳐서 이스라엘 지파들을 표기해보겠는데, 그러면 입체적으로 비교가 되지 싶다는 겁니다. 먼저 요단강 동쪽에 동 므낫세, 그 밑에 갓, 다시 그 밑에 르우벤, 갈릴리에서 내려오는 요단강 서편으로 잇사갈, 해변가에 아셀, 그 동편 옆으로 납달리, 아셀과 납달리 밑으로 스불론 지파는 말이죠.

그리고 요단강을 중심으로 해서 서쪽에는 다시 므낫세, 그 밑에 에브라임과 단, 물론 나중에는 저기 위쪽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아직까지는 단 지파가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제일 작은 지역을 차지한 베냐민 지파, 그리고 유다지파, 제일 밑에는 시므온, 이렇게 해서 열 두지 파가 이 땅을 다 차지했다는 겁니다.

*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이스라엘 12지파 !!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열 두 지파가 그냥 쳐들어 왔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을 하셨는데, 그래서 제비를 뽑아서 죽죽 그어서 일방적으로 경계를 정해버렸다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요단강 건너편에 갔다가 책망은 좀 들었지만, 어쨌든 차지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 까만 글자로 되어있는 이 원주민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동안 잘살아오던 자기들의 동네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마구 몰려와서는 "여기서 나가세요 - 왜요? -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 ???" 라고, 일이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시므온 지파가 여기 사는데, 겐 족속이 먼저 와서 살면서 그 땅을 다 개간을 해놓았다는 말이죠. 먼저 와서 인테리어도 하고 입주도 했는데, 그런데 "나가라. 우리 가게야" 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 원주민들이 정당하다는 겁니다. 오랫동안 그들이 먼저 살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이 땅은 우리가 개척하고 개간했기 때문에 공들였기 때문에, 우리의 땅이야. 그런데 너희들은 애굽에 살다가 우르르 몰려오더니, 무슨 깡패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빼앗아서 살려고 하느냐?" 라고 했을 때, 그들은 방금 전에 이야기했듯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여기에서 살라고 했다. 그러니 나가라. 맞고 나갈래, 그냥 나갈래?"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 아브라함 언약대로 !!

사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실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자기들도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좀 미안스럽기도 하다는 겁니다. 누구의 말이 설득력이 있느냐 하면, 먼저 살고 있던 이 가나안 원주민들이 불쌍해 보이고, 그들의 말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죠.

자기들은 그냥 들어간 것이 아니고, "우리는 여호와께서 앞장서서 전쟁해서 이겼다. 그래서 이미 살고 있는데 쫓아내고 들어간다" 라고 하게 될 때, 도대체 그 차이점, 즉 이 빨간 것과 까만 것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율법대로, 언약대로, 아브라함 언약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땅을 차지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이스라엘은 명심해야 한다는 말이죠.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이 땅이 원래 자기들의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들의 땅이 아닌데,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즉 율법이란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시행하기 위해서, 또는 율법에 의해서 땅을 차지했다면, 그러면 이 땅에 사는 자들은 자신의 생계나 생존문제보다 무엇을 우선해야 되느냐 하면, 이 율법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 하나님 이름의 땅 !!

만약에 자기생존과 생계가 우선이 된다면, 여기 있던 본래 원주민과 자기들의 어떤 정당성이나 차이점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오히려 원주민들이 더 정당하다는 겁니다. 들어갈 수 없는데 들어갔다는 말은, 그것은 다른 구실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나도 밥을 좀 먹고 삽시다" 라는 것말고, "우리 가정도 어렵습니다" 라는 것말고, "나도 애를 키우는데 봐주세요" 라는 것말고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다른 이유가 있어야 되고, 또한 그 다른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 원주민 당신들이 밥을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라는 이야기이어야 하는데, 침입자, 즉 정복자가 그 뜻에 일치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원주민들이 보기엔 억지인데, 그런데 이스라엘 자기들도 억지인줄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억지인줄 알지만, 여기가 자기들의 소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소원이 "땅을 차지해서 너희들이 가져라" 라는 게 아니고, 이 땅이 자기들 땅이 아니고 누구의 땅이냐 하면, 언약을 주신 '하나님 이름의 땅' 이 된다는 겁니다.

* 악이 관영했다. 이제 들어가라 !!

하나님이 언약대로 시행하기 위해서 악이 관영했다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원주민들 악이 관영했다. 그러니 싹쓸이하고 너희가 들어가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악이 관영해서 이 원주민들, 이 땅에 원래 살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추방된다면, 그 다음에 이 땅을 차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을 영원히 점유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게 어디에 달렸느냐 하면, 원주민을 추방했던 원리원칙을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원주민들은 악하기 때문에 쫓겨났다면 너희도 마찬가지야" 라는 것인데, 원주민들이 왜 쫓겨났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고, 그저 자기들이 개척해서 혈통으로, 즉 자기 자식, 후손들에게 대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 그 땅을 차지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되고 악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스라엘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생명보다 딴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때 하나님과의 계약관계가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밥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계속 이 자리에 모실 수 있고, 또한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지, 그 여부를 놓고 지금 이스라엘은 여기 이 땅에서 테스트를 받고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어렵지만 중요한 공식을 하나 세운다면, 기업은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기업 ≠ 땅" 이라는 것인데, 기업은 땅이 아니라 백성이라는 겁니다. 즉 "기업 = 백성" 인데, 그러면 어떤 백성인가요? 하나님의 언약, 율법을 지닌 백성이 기업이 된다는 말이죠. "기업 = 백성(하나님의 언약, 율법)", 땅이 아니고 기업이라는 겁니다.

* 흉년이 들었다. 모압으로 가자 !!

룻기에서 나오미 가족이 이 땅에 흉년이 들어서 율법이 없는 나라인 모압, 지금의 요르단인데 말이죠. 그렇게 모압 나라로 갔을 때, 그것은 이 땅의 원리를 버리고 쫓겨난 이방민족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갔기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망할 수밖에 없는 이방민족의 사고방식이 무엇인고 하면, 이전에 이방민족이 대대로 자기들의 혈통과 혈족을 종족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그게 어떻게 하는 겁니까? 아빠 엄마가 결혼해서 아기를 놓고 또 아기를 계속해서 낳으면, 그렇게 하면 종족이 유지가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룻기에서는 아버지란 아버지는 다 죽는데, 아버지도 없이 무슨 자식을 낳습니까? 못 낳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집안이 무너지게 되는데, 그렇게 집안이 무너지는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땅이 있고 거기에 가족이 사는 것이 기업이고, 이 기업은 상속인데, 그것이 그냥 하나님의 상속분이 아니라 이 땅에 백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백성이 율법대로 될 때 하나님의 상속분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바로 이들의 무너짐 자체가 율법의 실현상태라면, 그것이 율법이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라면, 분명히 외형적으로 무너졌는데, 형식적으로 남자가 다 죽어서 무너졌는데, 그런데 그 무너짐이 도리어 율법의 소생의 모습, 율법 완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이것이 룻기 전체의 주제라는 겁니다.

* 룻기 주제 - 망했는데 잘되었다 !!

다시 말해서, 망했는데 하나님은 잘되었다는 말이죠. 가정의 뿌리가 다 죽었는데 잘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잘 된 것인데, 왜 "잘 될 거야" 라고 하잖아요? 남자는 다 죽었는데, 그 집안 너무 잘되었다는 말이죠. 그게 나오미네 가족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모압에 갔다가 견디다 못해 다시 돌아오는데, 그렇게 돌아올 때 그 돌아온 나오미의 가정이 율법적인지, 그게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 버티고 있던 이 이스라엘 가정이 율법적인지,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비교시킨다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 이웃의 지계표 !!

그런데 놀랍게도 망한 쪽이 율법의 완성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러한 이야기가 전혀 희망이 되지 않는데, 이게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십니까? 이것은 바로 함부로 경계를 옮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경계라고 하는 것은 신명기 27장 17절의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라고 하는, 즉 이웃의 '지계표' 라는 말이죠.

(신 27: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다시 말해서, "네가 공로로 이 땅 하나를 얻은 게 아니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상속자 되게 하기 위해서 땅을 준 게 아니고, 율법의 열매를 줬다고 생각해라. 따라서 너희들은 이방인처럼 '아, 땅이다. 야, 우리 집을 얻었다' 라고 하면서 좋아하지 말고, 그 부동산이 오기까지 무엇이 거기에 담겨 있는지, 그것을 봐라" 라는 겁니다.

* 천국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나?

쉽게 생각한다면 "야, 나는 천국에 간다" 라고 하면서 좋아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렇게 좋아하지 말고, "천국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나?" 라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올 수 없는 자리를 오게 했다는, 그 올 수 없는 자에게 플러스(+), 즉 무슨 요소가 여기에 같이 결합되어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천국에 가게 되었는지, 그 사실을 미리 이 땅에서 알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요건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택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것은, 항상 주님께서 보시는 것이, "네가 얼마나 성공했느냐?" 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점이 성공적으로, 그 하나님의 요소가 살아 있느냐?" 라는 것인데, 즉 "너로 하여금 무능자라는 것을 티내는 요소가 네 안에 계속 살아 있느냐?" 라는 겁니다. 신명기 8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말이죠.

(신 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신 8: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신 8: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 야, 물어라 !!

다시 말해서, "나중에 너희가 이 땅에 와서 집을 짓고 농사가 잘될 때, 너희가 갑자기 하나님의 것, 율법의 것인데, 그런데 너희 것이라고 하는 순간, 너희는 이방민족이 쫓겨난 것처럼 너희도 여기에서 추방된다" 라고, 그렇게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방민족이 별로 멀리 가지도 않았는데, 마치 셰퍼드처럼 경계선 주변에서 딱 노리고 있다는 말이죠.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물어, 물어" 라고 하면, 이 셰퍼드는 평소에 많이 굶겨놨는지 확 물어버린다는 겁니다. 개한테 물리면 또 물렸다고 "주여, 어찌 이럴 수가 있어요?" 라고 하면서 빌면, 다시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서 "됐다, 그만해라. 빨리 네 자리로 가야지" 라고 하면서 다시 보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또 다시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기면 "어서 물어라"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유동적으로 나오신다는 겁니다.

* 율법의 경계, 그리고 6군데의 도피성 !!

이것이 바로 율법에 의한 경계인데,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의 경계를 중요시 여긴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가나안 땅, 즉 율법경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켜주시는데, 그렇게 지켜줄 때 하나님께서 율법과 함께 지켜준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게 여섯 군데 있다는 겁니다.

순서대로 보면, 동 므낫세에 한 군데, 갓 지파에 한 군데, 르우벤 지파에 한 군데, 여기까지는 요단강 동편이고, 요단강 서편으로 납달리에 한 군데, 그 다음에 므낫세에 한 군데, 유다에 한 군데, 그렇게 해서 모두 1번에서 6번까지 여섯 군데가 되는데, 이게 '도피성'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 도피성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제사장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도피성이란 이름 자체가 피난처의 의미인데 말이죠. 도피성을 '쉘터(?)' 라고, 즉 보호한다는 겁니다. 죄 없이 죄를 지은 자를 보호하는데, 참 특이하다는 말이죠. 죄를 지었으면 죄가 있어야 되는데, 죄 없이 죄가 나온 사람을 보호한다는 겁니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데, 죄가 있어야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죄가 없는데 죄가 나왔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개입여부 !!

이것은 뭐냐 하면, 죄 없는 자를 의도적으로 죄를 짓게 만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하나님의 개입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죄 없이 사는 사람도 죄를 짓게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죄를 짓게 만든 이유를, 여기서 인간 대 인간으로 보지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말고, 그 가운데서 누가 개입했느냐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 개입여부를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개입하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무심코 도끼질을 하면서 나무를 찍는데 갑자기 도끼날이 빠지면서 세 바퀴 반을 돌아서 저 건너편에서 고추를 심고 있는 아줌마의 뒤통수를 쳐서 그만 죽여버렸을 때, 이것은 자기가 그 아줌마에게 어떤 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죄를 짓고 난 뒤에 온 사람에 대해서는 도피성에서는 추방시켜 버리는데, 죄를 지은 주제에 왜 복을 받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너무 이기주의인데, 죄가 없는 사람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죄가 없이 죄를 지어야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되냐 하면, 그래야 하나님의 개입을 언급할 수 있는 계기를 그 사람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죄 없이 지은 죄 !!

제가 보니까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다 그런 것 같은데, 죄인이 아닌데 죄를 짓고 있다는 말이죠(ㅋㅋ). 사는 것이 그렇게 복잡한데, 죄도 없는데 망가졌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개입으로 되는 것인데,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위로하고 정당화한다면서, "나는 죄가 없는데 죄를 지었다" 라고 하지말고, 그것은 "여기에 누가 개입했는가?"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누가 개입했습니까? 제사장이 개입한다는 겁니다. 이 제사장 그룹이 무엇을 했는고 하니,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여기에 무슨 강이 있느냐 하면, 요단강이 있다는 말이죠. 그 요단강이 범람하는 그때를 기다려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범람한 요단강 중간에 길을 낸 것은 누구 때문이냐 하면, 대제사장 플러스(+), 즉 제사장들이 짊어졌던 언약궤 때문이란 말이죠. 언약궤 때문에 자연현상이 요단강이 홍해처럼 갈라져서 길을 내서 약속의 땅에 무사히 들어왔다는 겁니다.

* 대제사장에게 철저하게 종속된 존재가 이스라엘 !!

그렇다면 도피성에서 있던 사람이 "나는 죄가 없다" 라고 하면서 마구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언제 다시 도피성에서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하면, 대제사장이 사망했을 때는 자유를 얻어서 다시 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도피성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도피성의 죄인은 대제사장에게 무엇이 되느냐 하면 종속된 존재라는 겁니다. 죄가 없이 죄를 지었다고 했을 때, 이 사람은 뭐냐 하면, 죄로 인하여 누구에게 종속되었는고 하니, 바로 대제사장의 사죄, 즉 용서하는 것, 그 속량하는 속량기능에 전적으로 종속된 사람이 1번에서 6번까지의 여섯 개의 도피성에 살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이 이스라엘 땅의 운명은, 처음 요단강에 들어올 때 대제사장 덕분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그 시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살고 있어도 여전히 대제사장의 활동에 따라서 이스라엘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인데, 그것을 그들은 이 도피성을 통해서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대제사장은 신약의 누구인지 다들 알지요? 우리에게 대장이 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인데,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른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존의 인간 혈통이 아니라, 하늘의 혈통을 따라서 대제사장의 가치와 그 존재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철저하게 종속된 존재, 그것이 곧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이들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 더 이상 그가 지은 모든 죄, 죄가 없는데 지은 죄기 때문에 다른 가정이 파탄이 났다는 말이죠. 그 죄로 인한 불행한 사태는 대제사장의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면제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죄를 지었든 무엇을 했든 간에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이죠. 혹시나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면, 이것은 대제사장이 이미 대신해서 다 처리했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이 계속해서 모아지고 저축이 되는 상태, 그것이 바로 약속의 땅 천국이라는 말이죠. "너는 어떻게 들어왔어? - 대제사장 예수님 덕분에 들어왔어 - 너는? - 우리도 마찬가지야" 라고, 각자가 사는 동네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시간이 다르고, 모든 것이 다 달라도 공통적인 것은 단 하나, 즉 대제사장의 죽으심의 효과를 본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오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율법의 경계라는 말이죠. 왜 율법이라는 것이 경계선을 갖고 그것을 넘어서는 안 되는지를 지금까지 제가 설명을 해드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생존이 우선이지만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율법의 성취가 우선이라는 것을,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나옵니까?

* 룻기, 그리고 사사 !!

그러면 이제 룻기를 볼게요. 1장 2절에 보면,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와 아들인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지방에 거했다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사를, 아니 이민을 갔다는 겁니다. 왜 율법을 버리고 모압으로 갔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생존이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이 법이 우선인데, 그런데 왜 모압으로 갔느냐는 말이죠.

그것을 룻기는 1절에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라고 하는데, 이 사사라는 것은 있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만 있어도 충분해야 될 상황에 사사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들이 제멋대로 살고 있었다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룻 1: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룻 1: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성경에서 룻기 앞에 사사기가 있는데, 사사기에는 반복적으로 나오는 형식문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룻기 직전에 나오는 사사기 21장 25절에 보면, 이게 사사기 제일 마지막 구절인데,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쉽게 말해서, 자기 성질대로 살았다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이죠. 고정적인 왕이 없으니 각자가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엘리멜렉이라는 사람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겁니다.

* 나의 경계 !!

이것을 적어보면 "내 마음대로 산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뭐가 나오는고 하니, 아까는 율법의 경계를 이야기했는데 말이죠. 두 번째로 '나의 경계'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겁니다. 율법은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에서 경계선인데, 이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나의 경계'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그것은 곧 '욕구적인 나'와 '욕망적인 나'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육신을 가진 인간이 이 둘 사이에 평생동안을 갈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나의 경계' 라는 것이죠.

* 욕구적인 나, 욕망적인 나 !!

그러면 먼저 '욕구적인 나' 라는 것은 뭐냐 하면, 모든 짐승이나 모든 자연물과 인간을 같이 봤을 때, 인간의 신체 60조의 세포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인간은 뭐로 사는고 하니, 그것이 즐거움이냐, 불쾌함이냐는 것인데, 여기서 쾌(快), 이 쾌락이란 것은 육체의 즐거움이라는 겁니다.

짜릿함, 그런 것인데, 이 육체의 쾌에 의해서 인간들은 움직이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짐승이고 동물이니, 즉 욕구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쾌' 라는 이것은 어디에서 발견하느냐 하면, 갓난아이, 막 태어난 아이들이 어떻게 삽니까? 혹시 주위에 아기가 있으면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애들이 어떻게 살아요? 배가 고프면 밥을 달라고 하는데, 그리고 잠이 오면 칭얼댄다는 말이죠. 엄마가 없으면 엄마를 찾아 우는데, 그리고 젤리를 달라고 떼를 쓴다는 겁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말이죠. 예배를 드리거나, 음악회에 갔거나,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는데, 자기가 아픈 것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장소가 지금 참아야 될 장소인지 그런 것은 관계가 없는데, 중요한 것은 지금 자기가 아프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배설물도 기저귀에 자기 마음대로 싸버리는데, 방귀도 함부로 뀌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아이뿐만이 아니고 노인들도 마찬가지인데, 점점 나이가 들면 애로 변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본능인데, 그러니 그냥 본능대로 산다는 겁니다.

* 인간은 자기 욕구대로 !!

그렇게 인간은 욕구대로, 그 본능대로 살면서 점점 자라게 되는데,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혹은 "인간은 자아실현에 목적이 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건강에 있다"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그야말로 개코같은 소리라는 겁니다.

아무리 말을 고상하게 한다고 해도, 이것이 모두 개코라는 말이죠. 흠흠, 그렇게 냄새를 맡는, 인간은 원초적 쾌락의 작용에 의해서 산다는 말이죠.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아이 때부터 갖고 있던 원초적인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육신 때문에 그러하다는 말이죠. 인간의 육체가 그것을 원한다는 겁니다.

* 욕구가 욕망으로 대체가 됨으로서 !!

그래서 육신적으로, 욕구적으로 사는 아이가 점점 크면서 어떻게 합니까? 예를 들어서, 아이가 자기가 먹고 싶은 젤리를 달라고 떼를 쓰는데, 왜 그렇습니까? 아이는 아는데, 손님이 왔을 때 떼를 쓰면 잘 들어준다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간파해서, 손님이 왔을 때 일부러 마구 떼를 써서 엄마에게 반드시 자기 의사가 관철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때 엄마가 야단을 쳐도 안 되는데, 그럴 때는 "그 대신에 뽀로로를 봐라" 라고 하면서 만화영화를 보여준다는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대체' 라는 겁니다. 즉 욕구가 욕망으로 대체가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너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 엄마가 시장에 갔다올 테니까" 라고 하면, 아이가 하는 말이 "그러면 엄마가 시장에 갔다올 때 뭘 사줄 건데? 내가 원하는 것을 사줘"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인간이 욕구를 발산할 때는 옆에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즉 젖을 달라고 할 때는 주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있지 않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데, 그러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아기가 젖을 달라고 보챌 때 엄마가 젖을 주는 게 문제라는 말이죠.

* 타인, 그리고 결핍과 보상 !!

젖을 주게 되면 그 아이는 이 땅에 사는 자기 욕구를 펼칠 시간이 자꾸만 늘어난다는 겁니다. 그게 늘어나서 12개월이 되면 돌이 되었다고 난리인데, 돌잔치를 해준다는 말이죠. 자꾸 늘어나는 겁니다. 그렇게 늘어나게 될 때, 그 아이는 '나' 라는 욕구를 누가 채워주느냐 하면, 가장 가까이 있는 타인이 자기의 욕구를 들어준다는 것을 간파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타인, 즉 엄마인데, 그 엄마가 늘 자기를 챙겨주지 못할 때 아이는 여기서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이게 중요한 것인데, 인간의 욕구는 여기에서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이 남아있으면 무엇을 원하느냐 하면, 보상을 원한다는 겁니다. 보상을 말이죠.

이런 보상을 원할 때 "네가 조금만 참으면 이것을 해줄게" 라고 타자, 타인, 즉 엄마나 아빠가 어떤 제안을 했을 때, 그 엄마와 아빠가 사는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자기보다 더 넓은 세계, 이게 바로 공동체, 즉 인간사회 공동체의 현실세계라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아이는 하나의 사회인으로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데, 그러면 이 사회에서는 결국 무엇을 얻느냐 하면, 원초적인 쾌락을 제때 만족하지 못한 그 결핍에 대해서 보상을 받는 것, 그것을 이 사회에서 찾는다는 말이죠. 하나님이든 예수든 교회든 뭐든 간에, 그게 친구도 될 수 있고, 취미활동이나 조기축구회라도 좋은데, 사우나도 좋고, 뭐라도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그 목적은 하나인데, 말릴 수 없는 육신이 쾌를 보충해줄 수 있는,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대체물을 찾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인간은 욕구적이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 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참을 때 참아야 하는데, 억눌러야 된다는 겁니다. "아, 이럴 때는 좀 점잖은 체를 해야 나에게 돈이 들어와" 라고, 이럴 때가 있다는 말이죠.

* 욕구하는 나, 욕망하는 나 !!

그게 뭐냐 하면, '욕망으로서의 나' 라는 겁니다. 욕구는 터뜨리는 것이지만, 욕망은 무엇을 갈구하느냐 하면, 자기 결핍에 대해서 자기 보상을 갈구한다는 겁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간구할 때 자기 욕망으로서의 자기가 사회인으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이것을 억압해줘야 한다는 말이죠. 발로 콱 밟듯이 "여기서 이러는 것이 아니야" 라고, 이렇게 억압해줘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나중에 7살 정도가 되어서, 엄마가 "손님이 오셨을 때는 조용히 해야지. 이러는 것이 아니야. 손님이 너를 얼마나 나쁜 아이라고 하겠어? 네가 조용하게 있으면 적당하게 보상을 해줄게. 이번에 손님이 오셨을 때 조용하게 있으면 휴대폰을 바꿔줄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아이에게 손님이 뭐가 되느냐 하면, 자신의 원수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원수가 되면서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아하, 저 원수를 잘만 이용하면 내가 원하는 휴대폰을 조기에 얻을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경계를 갖고 있는데, 즉 이중인격인데, 하나는 참을 수 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짐승적인 본능, 그리고 그것을 억누를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자기에게 쾌락을 줄 수가 있는 어떤 희망, 기대, 소망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욕구하는 나', 또한 '욕망적인 나', 이 두개의 '나' 사이에 항상 경계선이 쳐져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직장생활을 함에 있어서 상사가 부하직원을 아주 심하게 나무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상사가 그 전날에 부부싸움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겁니다. 남에게 잔소리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어서 하는 것인데, 자기의 즐거움을 배우자가 침해를 했기 때문에 그 앞에서 공격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공격을 받은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또 풀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상사가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크게 야단을 쳤다고 하면, 그렇게 야단을 맞은 부하직원은 짜증이 나서 "오늘 저녁에 소맥이든 뭐든 한 잔을 해야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풀지 않으면 억압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말이죠.

* 직설적인 욕, 그리고 결여 !!

그래서 술을 먹으면서 욕을 하는데, 평소에 안 나오던 욕을 없을 때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상사에게 욕설을 하게 되면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 억압이 사라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말을 할 때는 뭔가 약간의 억압을 해주면서 하게 되는데, 그 사람에게 나갈 의미와 그 표현이 너무 밀착이 되었다는 겁니다. 직설적이라는 것이죠. 보통은 우회로 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때는 직설적으로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너무 밀착되어버리는 것, 그러면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결여' 라는 것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모자람이 없어져 버리면, 이 사람은 오늘 살고 끝날 사람이라는 말이죠. 술을 먹으면서 상사를 욕하고 있는데, 상사가 뒤늦게 들어오다 그것을 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불려 가면서 "내가 너무 심했지. 좀 참을 걸"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 쾌락의 공통적인 대체물이 곧 '돈' !!

그래서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모든 면에 있어서 억압하는 것인데, 즉 '억누르기' 라는 겁니다. 눌러주고 눌러주면서 그들에게 보상을 바라는데, 그게 놀랍고 희한한데 말이죠. 억압하면서 "네가 잘되는 것이 있을 거야" 라고 하는데, 그 잘되는 것이 전부 다 뭐냐 하면, 그것이 공통적인 것, 그런 공통적인 것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통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참으면 승진을 시켜줄게. 승진하면 월급이 많아진다" 라고 하게 되는데, 돈이라는 겁니다. 이상하게 모든 인간이 다 다른 집에서 태어났는데, 모이는 것은 어디에 모이느냐 하면, 돈에 모인다는 말이죠. 그 돈은 무엇을 표현하느냐 하면, 자기가 육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이 쾌락의 공통적인 대체물이 돈이 된다는 겁니다.

모든 문제가, 교회나 진리문제를 말하다가도 나중에 가면 목사를 보고 "당신, 이제 나가세요" 하는데, 결국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목사는 "그래, 나갈게"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줄래?" 라고 하는데, 모든 문제가, 이혼문제나 전부 다 무슨 문제나 하면, 이혼뿐만이 아니라 결혼도 돈 문제라는 말이죠.

* 돈 벌 곳이 있습니다 !!

그러면 왜 돈이 자기의 대체물이 되느냐 하면, 그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자기에게 매여있지만, 이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는 공통요소로서 구성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사람과 대화할 때, "대화가 안 통하네" 라고 하는 것은, 각자 각자 자기 주장을 하기 때문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화가 통하는 경우가 있는데, 돈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오랜 시간을 차를 타고 왔더니만 너무 피곤하다" 라고 하다가도 돈 이야기가 나오면, 즉 "어디 돈을 벌 곳이 있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정신을 바짝 차린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공통적인 그 대체물, 그 돈의 정체는 뭐냐 하면, 돈의 정체는 바로 '일자(一者)' 라고 하는데, 절대, 즉 최후의 일인자를 통해서 인간은 그 모든 것과 교환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즐거움을 원할 때마다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인데, 그것은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죠.

이제 10분을 쉴 타이밍이 왔습니다.


2020,8,8 재정리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