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9강 시간의 종결

아빠와 함께 2020. 1. 18. 18:42
2020-01-18 12:18:13조회 : 12         
202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9강-에스더 강해: 시간의 종결이름 : 이미아 (IP:122.43.170.138)

202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9강-에스더 강해: 시간의 종결

 

에스더 9장을 보게 되면 여기에 날짜들이 나오죠. 날짜들이 나오는데, 1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아주 작살나는 날이에요. 이 3일 동안. 3일 동안 작살을 내는데, 이게 뭐냐 하면은 유대인들 이쪽에서는 언약의 승리, 이쪽은 패배가 아니고 반-언약, 반대하는 언약, 또는 비-언약의 패배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냥 바사나라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대적해서 유대인들한테 졌다는 말이 아니라 언약의 완성에 방해하다가는 이러한 작살이 난다는 것을 보여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언약이 개입을 해줘야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원초적인 악이 나와요. 악마의 실재성이 이 세상에 잠복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요. 언약이 개입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언약을 갖고 있는 유대가 개입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그냥 아무 문제가 없이 정상적인 세상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겁니다. 에스더에서 이야기하는 것, 에스더 오늘 마지막 시간인데, 정리를 제대로 어렵게 한번 해봅시다.

 

12월 13일~15일은 어떤 날이냐 하면은 악마가 언약의 나라 유대를 완전히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정해놓은 날이에요. 12월 13일이. 근데 이것이 재밌게도 뭐가 됐느냐 하면은, 이게 부림이거든요. 제비뽑은 거예요. 제비뽑기 위해서는 뭐냐 하면은, 이거는 유한이 무한에게 그냥 일임한 거예요. 신의 뜻으로 우연히. “우리가 우연히 하는 타이밍에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라는 뜻으로 이 비-언약에 맡겨놓으니까, 그 맡겨놓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악을 악대로 드러나게 하고 그 악은 반드시 언약이 드러나는 하나의 바탕이 되는 겁니다. 악이 없으면 언약이 출현되지 않아요.

 

악이 먼저 발생되어야 악은 악답게, 악은 반드시 처벌되어야 마땅하다는 언약 본연의 본질이 악이 있어줘야 생겨나는 거예요.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는 저주받잖아요. 그 저주라는 것이 등장하려면 저주받을 악이 여기에 편재되어 있어야 하고, 이게 저주가 저주답게 드러나려면 그 저주를 저주답게 드러내는 그 요소인 언약이 여기에 있는 이상 거기에 같이 맞닥뜨려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저주의 끝은 뭐냐 지옥이고, 언약의 끝은 반대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없어버리면 이 세상이 해석자체가 되지를 않아요. 단군의 자손가지고 일이 안 됩니다. 뭐 도올 선생가지고 이야기가 안 돼요. 언약이 개입되어야 해요. 언약이. 유시민이 가지고 현실을 해결 못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어야 해요. 약속이. 이 언약이 개입되면서 여기 피벗pivot지점. 그러니까 악마에서 승리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결정적 그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이 남성의 세계에서, 아담의 세계죠. 첫 번째 아담입니다. 아담 계열. 남성의 세계는 모든 것을 전부 다 알고 있어야 성이 차는, 마음이 차는 그러한 세계거든요. 그걸 느긋이 쳐다보는 예외의 자리가 왕의 자리거든요.

 

그러면 왕 말고 나머지기는 뭐냐, 이게 전부고 전체라면 나머지기는 부분이 되는 거예요. 부분이. 그런데 에스더가 개입이 되면서 에스더는 왕비기 때문에 왕의 입장에서는 부분에 해당이 되거든요. 근데 전체가 부분한테 반해버린 겁니다. 역전이 생겨버린 거예요. 역전이. 전부라고 여겼던 것이 시시하게 봤던 그 부분한테 이게 반해버린 거예요. 자진해서 굴복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이 뭐냐 하면은 새로운 전체로서 등장하게 된 거죠.

 

전체를 가져버리면 이게 유한이 되는데, 유한 안에 무한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유한 안에, 이 전체라고 여겼던 인간들이 “이 세상이 어때서? 이 세상 보이는 것이 전부지.”라고 하는 그 안에, “전부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전부라고 여겼던 그 안에 하나의 부분으로 왔다면, 하나님이 일개 하나의 사람으로 오신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전체 인류 중에서 예수님도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데, 이 부분이 전체를 정복하고 만 겁니다. 이게 승리에요. 언약의 승리입니다. 부처도 개인이고, 공자도 개인이고, 보살도 개인이고, 전부 다 이게 하나의 부분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설명하지 않으면 인간들이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 지혜를 짜내가지고 이 전부의 세계를 보다 더 살기 좋은, 보다 더 좋은 세상으로 사회를 개혁시켜나가자!” 이게 정치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나갈 뿐이에요. 이거는.

 

이건 바로 바사나라 아하수에로 왕의 사고방식이고 하만의 사고방식인 거예요. 언약은 있으나마나 한 걸로, 유야무야한 걸로 치워버리자. 그래서 인간세계가 갖고 있는 이 법적인 것이 전부를 표시했다고 자신만만한 법적인 이것이 인간에게는 뭐냐, 권세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갔을 때에 빌라도가 건방떠는 소리를 하죠.

 

“나는 너를 놓아줄 권세도 있고 체포할 권세도 있는데 나한테 살살 빌어라”(요19:10)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네 권세위에 다른 권세가 있어서 지금이라도 나를 풀어줄 수 있다.”(요19:11) “하지만 나는 너하고 상대 안 해. 내가 온 것은 진리를 위해서 왔다.”(요18:37) 빌라도가 하는 말이 “진리가 뭐꼬요? 뭐요?”(요18:38) 그러니까 “안 가르쳐줘. 니가 감당할 수 없는 입장이다. 진리를.” 베드로도 감당 못해요. 제자들도 감당 못해요. 나중에 성령이 와야 이게 감당이 되면서 감사가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우위에 서면서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이번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개시가 됩니다. 갈 사람은 가시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죠. 어려운 이야기 쭉쭉 나갈 테니까 어떻게 처리하세요. 주기성이에요. 반복적 주기성. 인간들이 생각하는 비-언약적인, 언약에 반대하는 이 사람들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로 점점 이어집니다. 미래가 어디까지 가는지 몰라요. 그냥 무작정가기만 하는 거죠. 추락하는 거죠. 추락.

 

근데 거기에 이스라엘이 언약을 승리하면서 여기에 주기가 발생됩니다. 주기성이 발생돼요. 드론 띄운 거예요. 시간이라는 지평위에, 공중에 드론을 띄운 겁니다. 이 주기성은 뭐냐, 바로 부림절이에요. 부림절. 날짜가 12월 13일부터 15일까지 그렇게 하겠다고 정한 겁니다. 이렇게 정해놓고 이걸 부림절로 지키는 거예요. 주기성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반복되는 것을 주기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승리의 시간에, 축제의 기간의 시작이, 곧 축제 기간에 모든 승리의 마감이 되는 거예요. 시작은 악에게 쫓겨 다녔으나 마지막 축제의 끝날은 최종적인 악을 척결하고 기어이 하나님께서 승리하셨다는 것을, 악에 대해서 의의 승리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은 이 주기적인, 이 드론 띄운 주기 안에서 시작이 되고 끝이 되는 거예요. 이 땅의 시간이 어떻게 시작 되냐, 끝이냐, 하는 것은 이 지평선에 있는 인간들은 몰라요. 하지만 이스라엘 내부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 절기를 통해서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담겨지는 겁니다.

 

드론처럼 띄워진 이 주기를 다시 펼쳐버리면 인류역사가 돼버리죠. 시간은 바로 주기에서 온다. 이 반복된 주기 안에서, 반복된 주기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우발적인 사건이 터졌고요. 사건을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타이밍이라고 했죠. 이상한 타이밍이 등장하면서 사건이 주기성을 만들고, 주기성안에서 한 점으로 나아가는데, 이 주기성이 나중에 신약으로 오게 되면 고정적인 한 점이 돼버립니다. 한 점. 고정적인 한 점이 돼버려요. 최종사건입니다. 최종사건.

 

한 점이 돼버리면 깔아놨던 주기성도 날아가 버리고, 이 주기성을 축제, 다른 말로 절기라고 하는데, 반복적인 이 반복성도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 이 밑에 있는 시간의 지평선도 날아가 버리고, 주기도 날아가 버리고, 남는 것은 한 점 안에 모든 영원이 다 담겨있습니다. 사건은 주기를 낳고, 주기는 고정적인 점을 낳고, 점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성이고, 어떤 경우라도 동일하게 일어난 일이고, 그것이 바로 천국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주기성마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대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14절부터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절,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여기에 승리가 나오죠. 16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구약에 있던 모든 주기적인 축제일은 십자가 안에서 종결, 다 끝나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한 사건으로 마감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주기성을 생각하면서 제일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주기성이 뭐냐 하면은 안식일이에요. 안식일. 안식일은 6일 노동하면서 7일에 하나님이 쉬었다는 것을 기념하죠. 그러면 이것은 드론처럼 계속해서 1234567, 1234567... 계속 돌아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운명은 이 안에 담겨있습니다. 이 돌아가는 안식일을 놓쳐버리면 이스라엘은 멸망해요. 그리고 안식일이 언약의 완성이거든요. 안식일이.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니까요. 창조자니까요.

 

지금도 유대인들은 부림절을 지켜요. 그것은 십자가로 모든 것이 마감되었다는 것을 몰라서 그래요. 이 주기성은 모든 언약이 완성이 돼버리면 이 주기성을 아직 찾고 있는 것도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대적이 되는 겁니다. 언약이 완성이 됐는데 아직도 옛날 언약가지고 거기서 주기성을 발견하는 거기서 하나님의 축제일을 기념하자고 이렇게 돼버려요. 그러면 주기성이라 반복되어있다. 반복된 절기다. 이런 시간성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지금 이 주기성을 가지고 두 개로 나누어야 해요. 하나는 뭐냐, 공간이 없어도 무방함. 공간 없이 구원이 무방하기 때문에 그래요.

 

왜냐하면 지금 에스더는 이 약속의 땅에 안 돌아왔기 때문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약속의 땅에 돌아가지 않고, 약속의 땅에 돌아간 사람은 뭘 집착하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해서 다시 우리는 이 땅에 돌아왔다가 중요한 것이 돼버려요. 여기에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가 이야기한 것처럼 여기에 성전을 지으면 이 성전은 영원히 보존할 것이다. 성전이 있다는 말은 아직까지 공간성이 유효하다는 말이 되거든요.

 

그런데 그 바사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사건화된 것을 겪게 된 유대인한테는 이미 언약의 마지막 적을 만났어요. 악마가 갖고 있는 그 정체성을 이미 경험했다 이 말이죠. 그 악마의 정체성에 대해서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악마의 위세를 당해낼 수가 없어요. 그냥 금식하면서 기다릴 뿐이죠. 타이밍을. 금식한다는 것은, 밥을 끊는다는 말은, 이미 우리는 이 세상의 권세에 눌려서 죽었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래, 죽으면 죽으리라. 죽어라.” 죽어도 생기는 것이 있어요. 내가 죽어도 생기는 것이 뭐냐 하면은 주기요, 축제다. 절기다 이 말이죠. 내가 죽어도 말씀은 알아서 생생하게 달려가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사나죽으나 의미가 없는 거예요. 사나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다 이 말이죠. 니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에 너무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말라 이 말이죠. 너를 위해서 뿜어낸, 니가 하나의 필름이라면 너를 환등기에 집어넣어서 니 모습을 통해서 뭐가 나오느냐, 그 바사나라에 있는 유대인들은 뭐가 나오겠어요? 주기성이 나오고 절기가 나오겠죠. 늘 반복되는.

 

반복되는 절기가 나오는데 이 절기는 어떤 시간의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의 방향성. 이건 어려운 거예요. 시간에 방향성이 있다는 것은. 시간의 방향성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볼게요. 하여튼 여기까지 한 것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죽어도 하나님께서 남긴 것은 부림절이라는 것을 남겼어요. 그 부림절 안에서 하나님께서 악을 악대로 들추어내는 작업과 그 악은 인간의 힘으로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이 조치하시는 말씀의 타이밍으로 이겼다.

 

따라서 너희들이 살아있는 목숨들은 하나님이 개입한 그 결과물로 살아있기 때문에 너는 하나님을 축하하는 절기를 지켜라. 그게 부림절이다. 이 부림절이라는 뜻은 제비뽑았다. 따라서 제비뽑음에 대해서 악들도, 그리고 너희들도 이미 나한테 일임했잖아. 제비뽑았으니까. 우연에 맡겼잖아요. 우연에. 그래서 우연에 맡기니까, 그 우연이 우연대로 드러난 결과가 뭐냐,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가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 가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도 수련회 오는 것도 이게 우연입니다. 제비 뽑히신 거예요. 모든 것이 주께서 준비한 타이밍의 골, 시냇가에 물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고 골 따라 흐르죠. 여기에 우리가 보이지 않는 시간의 골이 어디로 이어지느냐 천국까지 이어지고, 천국까지 이어지기까지는 이 주기성에다가, 구약 같으면 부림절이나 유월절, 정기적인 안식일에다가 먼저 모아지고, 그 모아진 것의 그 끝에 주기적인 것도 모든 것을 종결시킬 십자가사건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뭐가 어렵다고 하느냐, 뭐가 어려우냐 하면은 반복되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그 반복되는 그 드론이 어떤 방향을 가진다는 이게 어려운 거예요. 방향. 시간이 어떤 방향을 가진다는 이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점을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해드리고 싶은 거예요. 시간이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할 때에, 시간이라는 것을 있느냐 없느냐 말하기 전에, 있을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로 그 질문을 그렇게 바꾸어야 되겠죠.

 

자, 우주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봅시다. 바운더리boundary를 갖고 있는 하나의 시스템. 시스템으로 봤을 때, 단자 또는 단일자, 하나밖에 없는 입자, 단독입자. 단독입자밖에 없다면, 이 광활한 우주에 단독입자 단 하나만 있다면, 여기에서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변화가 있을 수 없죠. 왜냐하면 변화가 있으려면 뭔가 비교되는 것이 있어서 바꾸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혼자 있다면 이게 변화가 없죠. 변화가 없으면 뭐가 없느냐 하면은 시간이 없는 거예요. 변화가 없으면. 우주에 단독입자만 있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시간이라는 말은, 시간이 있다는 말은 변화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해가 이렇게 변화하잖아요. 해가 이렇게 변화한다고요. 달이 변한다고요. 창세기 1장 봅시다. 땅이 있고 아침에 해가 떠서 저녁에 지죠. 별들도 같이 우주를 운행하죠. 별들이 있을 때 땅에 인간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인간이 없죠. 인간이 없다는 말은 이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측정자, 관찰자가 없다 이 말이에요. 없는데 지금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사시四時(사계절), 시간, 계절이라는 것으로 만든 시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측정자에서 인간은 빠져야 되죠. 인간은 생기지도 않았으니까 빠지고, 누가 관찰하고 누가 측정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완성을 위한 시간들로 인간보다 먼저 앞서서 해와 달이라는 이런 거대한 시계를 만드신 거예요. 변화가 있어야 시간이 있어요. 시간이라는 것은 이쪽 변화와 저쪽 변화의 간격이 시간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을 위한 해와 달과 별과 모든 시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악마의 유혹을 받고 난 뒤에는 자기가 신처럼 굴리기 때문에, 이 모든 시간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냐 하면은 자기 몸을 위한 시간으로 전부 다 잘못되게 해석해버린 겁니다. 내 몸을 위해서.

 

내 몸을 위해서 해와 달과 별과, 나는 수명이 90세까지 살았으니까 잘했다. 너는 30살에 죽었으니까 졸지에 망했다. 전부 다 자기 몸 위주로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내 몸 앞에 낯선 몸이 등장했다고 칩시다.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 몸이 내 옆에 딱 붙어가지고 같은 시간을 보고 같은 공간을 봐도 예수님은 달리 해석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최초의 관찰자고 측정자기 때문에. 시간은 예수님의 몸을 위해서 있는데, 바로 옆에 있는 우리는 나 중심으로 시간을 측정하고 판단한 겁니다. 거기서 생긴 게 뭐냐 하면은 바로 물리학이에요. 물리학. 이 세상의 모든 과학이다 이 말이죠.

 

과학의 이유는 기어이 인간들이 측정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왜? 몰라요. 그러고 싶어. 그걸 공리라고 했죠. 공리. 무조건 그러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측정자가 되려면 인간은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전체를 다 조망할 수 있는 예외자가 되어야 해요. 그래서 인간은 땅 끝까지 정복하기 위해서 자기가 시간과 공간을 임의로 정하는데, 그 목적과 해석이 뭐냐 어쨌든 이 세상의 오야붕이는, 대장은 우리 인간들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걸 흔히 선교단체에서는 창세기 1장 28절을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문화 창조자다. 이렇게 하죠. 문화사명자다.

 

개혁주의 신학은 뭐냐, 하나님의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것이 본래 네덜란드 칼빈주의의 신학의 모토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를 구분해서 칼빈주의는 문화혁명까지 나아가는 것. 다시 말해서 복음을 가지고, 진리를 가지고 사회, 경제, 정치 모든 면에 변혁을 일으키는 것 까지 나아갈 때, 이걸 진정한 칼빈주의로 보는 거예요. 흔들어라! 전광훈 목사. 지금 칼빈주의하고 있는 거예요. 정치에서 좌파를 우파로 바꾸자. 그거 한다고 태극기 흔드는 겁니다. 전광훈 목사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제가 더는 말을 못하겠습니다만.

 

개혁주의 신앙은 다소 이런 게 있어요.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자. 근데 이건 대승불교죠. 성화론이라고 하는 것. 성화론. 마음을 정결하게 해서 구원받는 것은 기본이고, 정결하게 성화하게 되면 살아서 복 받는다. 중요한 것은 이 칼빈주의가 고객을 많이 끌어 모으느냐, 개혁주의가 장사가 잘 되느냐, 그걸로 측정하겠죠.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위주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구원론에 집착해가지고 나온 것이 뭐냐 하면은 재림스케줄 짜기가 소설로서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7년 대환란, 3년 반 후 환란, 3년 반 전 환란 나오고, 스케줄을 촘촘히 짜요.

 

드디어 이스라엘 제 3성전이 만들어지고 메노라, 금 촛대가 설 때가 언제냐? 이란은 빨리 미사일을 쏴라. 이스라엘은 반격해가지고 쏘고. 그래서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라. 그럼 우리는 마지막 때가 오기 때문에 손목에다가 666표 받지 말고 마트에 현찰내고 들어가고. 문신 그런 거 새기지 말고. 베리칩 받지 말고. 그래야 산다는 거예요. 개판됐어요. 개판. 144,000이 어떻고 저렇고. 144,000은 천국의 임원들이고 그 뒤에 온 사람들은 그냥 직원들이고. 신천지도 그렇고 여호와증인도 그렇고. 고객확보하기 위해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환장을.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그리 생각하죠.

 

시간은 우리가 관찰자가 아니고 우리가 측정자가 아닙니다. 어떤 변화가 주어지면, 하나님의 창조에 있던 이 변화, 그러면 인간을 만들기 전에 이미 측정자가 있었고 관찰자가 있어요. 그러면 이 세상은 단독입자, 단일입자가 아니라 다른 분이 여기 같이 계시는 거예요. 다른 분이. 그게 하나로 해서 시간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관찰자의 눈에, 관찰자가 주체인데요. 예외적인 주체. 무한에 속하죠. 두 분이 있어줘야 거기서 시간의 의미가 있고 공간의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그 두 분이 누구냐, 하나님 둘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그분이 누구냐,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세요. 성경에서 오른편에 있다는 말은 바로 그 의미입니다. 스스로 관찰자가 되시고 스스로 관찰 받는 자가 되셔가지고 둘 사이에서 모든 것을 시마이, 마무리지어버린 거예요. 완성을 해버린 거예요.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거예요(롬11:36). 모든 것이 오른편에 계신 분으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시간은 무엇에 시간이냐, 오른편에 자기 아들을 오른편의 자리에 앉히는 기간이 시간의 본래의 의미에요. 본래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될 때까지, 그때까지 필요한 것이 시간과 공간이에요. 구약에서는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 두 가지의 차원을 가지고 이해했는데,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에스라, 느헤미야가 성전 지어봐야 그거 불타버리고요. 헤롯성전도 불타버리고. 진짜 다윗 언약의 완성태로 다음까지 이어지는 것은 바로 에스더에 나오는 무성전형성전. 그 안에서 공간은 포기하고, 이제 시간에 승부 거는 그런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이동수단이 나타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구약을 보면서 역대하 다음에 에스라, 느헤미야 나오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에스더 나오죠. 다 의미 있는 배치에요. 그게.

 

자, 그러면 지금 시간이 있다고 설명을 했어요. 시간은 뭐가 있어야 된다? 변화가 있어야 된다. 그 변화가 있기 위해서는 변화를 관찰하고 측정하는 측정자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있다, 변화한다, 이렇게 돼버리면 시간이 한쪽 방향으로 흐른다는 그것은 증명되지 않아요. 한쪽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은 몰라요. 이게 뒤로 갈 수 있고 앞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꼭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간다는 것은 방금 설명한 것으로는 설명이 다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시간에 변화가 있다, 한쪽 방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가 있느냐, 그것은 바로 혼돈에서 이루어집니다. 안정에서 혼돈으로 가는 이 방향 말고 이 세상에는 다른 방향이 없다는 말입니다. 안정되어 있는 것에서 혼돈으로. 혼돈은 점점 더 경우의 수가 많아지는 거예요. 많아지고. 안정되어 있는 것은 경우의 수가 이것보다는 적어지는 겁니다. 이것보다는 적어지는 거죠. 이게 바로 혼돈의 법칙입니다. 이걸 열역학 제2법칙의 엔트로피라고 해요. 엔트로피. 볼츠만이 발견한 거예요. 혼돈이 있어줘야, 점점 더 혼란스러워야 시간은 강약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가 될수록 악은 설쳐줘야 되는 겁니다. 아, 이거 정말 혼돈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가지고 안정된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혼돈의 수, 혼란의 경우의 수를 더 확대해버리는 겁니다. 확대해버리면 이 세상은 점점 더 혼란에 빠지겠죠. 혼란에 빠지는 것이 시간이 최종지점에 거의 다 왔다는 뜻이에요. 이걸 저는 평소에 강의할 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선 죄를 더욱 죄 되게 한다 이 말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 소개했죠.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짠~~ 나 이쁘지? 잘났지?” 이래 오시는 것이 아니고,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오시는 이유는, 이 십자가를 유발 할 정도로 세상은 극악의 혼돈 상태에 빠졌다는 거예요. 거기 혼돈 상태의 그 센터 중심에서 뭐가 나오느냐, 영원한 고정된 것이 나오는데, 창세기부터 성경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라고 하는 거예요. 빛. 모든 시간과 공간은 그 고정된, 안정된 빛에서 나온 거예요. 십자가에서 나온 거예요. 십자가에서. 지금 전혀 촬영이 안 됩니까? 전혀 안 돼요? 1분 남았어요. 1분만 하겠습니다. 혼돈스러워서 안 되겠다.

 

우리 보고 빛의 아들이라고 했잖아요. 빛의 아들은 모든 것이 동시성이에요. 우리가 미국 가든, 어디 가든 공간은 치우고요. 내가 20대 때, 30대 때, 60때든 관계없어요. 어떤 것도 주께서 주신 그 타이밍 안에 있는 거예요. 그 타이밍. 그 시간성 안에서 동일하게 은총을 받고 왔던 거예요. 언제부터? 창세전부터. 성도는. 창세전부터 그렇게 온 겁니다. 우리는 그걸 성령 받아야 소급해서 알 수 있는 거예요. 성령 받으면 안목이, 시각이 주님의 시각으로 바뀌면서, “아, 뭐든지 주께서 하셨구나!”라고 하는 것. 모든 것이 ‘아니오’가 아니라 약속은 항상 ‘예’와 ‘예’로 연결된 사건의 점철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완전히 촬영이 끝났으면 끝났다고 이야기하세요. 기도해버릴 테니까요. 바로 에스더, 바사나라가 이러한 내용입니다. 기도합시다. 조금 더 해요? 예. 알았습니다. 또 금방 바뀐다.

 

시간이 이렇게 모든 것이 정지가 돼버리면 이 시간은 누구의 시간이 되느냐 하면은 주님의 시간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우리 타이밍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속하느냐, 그냥 과거현재미래로 가는, 기존의 우리 몸이 잘 되는 희망을 품고 지평적인 시간 열차를 타고 있었던 거예요. 그 열차는 반드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미리 성령께서 오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혼돈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미리 미래에 완성된 그 시간이 언약을 통해서 죄 속에 묻혀있는 우리를 마중을 나오죠. 마주치는 거예요. 복합열차처럼 두 입구가 마주해서 충돌하게 되면, 이 충돌의 사건이 바로 그때그때마다 십자가사건이고, 십자가사건에서 영원히 지옥 갈 사람과 영원히 천국 갈 사람이 이렇게 구분되어지는 겁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절기 안에 내용이 다 담겨요. 절기 안에서. 절기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계속된, 절기는 드론이라고 했죠. 시간은 저 끝에서 만나자가 아니라 위에서 만나는 거예요. 드론. 그리고 이 절기가 하나의 시간으로 정지가 되는 때까지 위로 가서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성도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당시에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으로 구원받습니다.”라고 이렇게 해야 되지, 어떤 사람은 양심으로 구원받는다고 해요. 무슨 양심으로 구원받아요. 노아는 양심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은 십자가 복음이 없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언약으로 구원받죠. 아브라함은 위로 올라갈 때, 거기에 누가, 예수 그리스도가 장차 오신다는 것을 마중 나온 시간을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세상은 혼돈이지만 혼돈을 마감시키고 정지시키고 찾아오신 최종 완성을 언약 안에서, 절기 안에서 이미 바사나라 유대인들은 맛보고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안정성을 오늘날 우리성령을 통해서 미리 맛봅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죽고 사는 이것은 다 사소한 문제라는 거예요. 죽고 사는 것, 몸이 아픈 것, 가난한 것, 이런 것 다 사소한 문제에요.

 

방금 이렇게 이야기하고 이제 마감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커튼 이쪽에서 일어난 일이죠. 성경에서 이야기한 이야기에요. 다시 커튼 이쪽으로 잠시 돌아오면, 뭐 잠시가 아니죠. 앞으로 강의마치고 쭉 계속 가면서 경험하시겠지만. 이 안의 시간은 어떤 시간이냐 바로 일상의 시간이에요. 일상의 시간에서 관찰자는 누구냐, 내가 관찰자고 내가 측정자에요. 올해 선거하게 되면 국회의원 분포가 어떻게 될 거냐? 북한 핵은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이란의 민주문제는? 이것이 그냥 뉴스시간과 모든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계속 오는 거예요. 또 홈쇼핑에서 신상은 어떤 제품이 나왔는가, 전부 다 나에 관한 문제들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을 우리가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많이 안심이 되죠. 우리는 못 이긴다는 것에서 안심이 되죠. 이길 수가 없어요. 일상이니까. 몸에 체화됐으니까. 이길 수가 없는데, 이것이 혼돈이고 혼란이고 이게 어수선한 인생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것은, 바로 전에 우리가 건성건성 알았던, 대충 알았던 십자가가 이 무능한 우리를, 악마에 놀아난 우리를, 거뜬하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가를 더 깊이 아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기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마을의 수련회강의의 끝은 항상 이렇게 합니다. 막사세요! 우리는 막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막사시고 원하는 대로 사셔야 돼요. 스스로 자기를 조종하는 것도,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기 관리하는 것도 옳지 않아요. 주께서 준비된 부딪힘이 있을 것이에요. 그 타이밍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보다 선재한다는 것, 내가 말씀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느끼신다면 그것은 이미 완성된 예외에 있는, 무한의 세계에 있는 성령께서 완성된 모습으로 우리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예수 십자가라는 주님의 희생물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그러한 시스템 속에 우리가 같이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귀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 그리고 십자가가 중요하지. 우리는 그 십자가가 중요한 것을 아는 복을 받은 사람이죠. 그러한 인식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승리의 나날이고 부림절 맞이한 기쁨의, 살아있는 유대인들의 기쁨의 축제나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주신 귀한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나의 자존심과 나의 체면과 위신을 한시라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것이 바로 악이요, 악마의 노림수요, 혼돈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런 혼돈가운데서도 침착하게 흔들리지 않는, 십자가의 한결같은, 십자가에 다 이루심이 우리를 장악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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