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재앙속에서

아빠와 함께 2020. 5. 26. 18:13

안양20200514a슥1:8(재앙 속에서)-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1장7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열한째 달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내가 밤에 보니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내가 말하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천사하고 선지자의 만남입니다.

천사와 선지자의 만남. 선지자의 만남으로서 여기서 뭐가 배제되느냐 하면 보통 인간들은 여기서 배제가 됩니다. 배제가 되면서 선지자 안에 두 요소가 중첩되어있어요. 하나는 천사적 요소와 인간요소 두 개가 같이 여기에 중복되어 있습니다. 이 선지자 안에. 선지자는 천상 하늘과도 접해져 있고 그리고 인간요소, 인간과도 접해져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천사가 바로 인간에게 찾아오지 않고 선지자를 통해서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세상 인간이 천국 인간으로 어떤 식으로 변할 것인가에 대해서 선지자한테 전달된 하나님의 예언과 계시의 그 역할을 우리보고 알려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되게 되면 이 선지자는 성신을 받았지요. 성신을 받았다는 말은, 보통 인간은 성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신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성신도 받지 못하고 아무것도 받지 못한 인간세계에서 성신을 받은 사람이 인간적인 요소 때문에 이 안에 들어있는 계시나 말씀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고 기능을 하게 되어있어요. 역할, 기능을 함으로 말미암아 세상 인간이 천국 인간으로 변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면서 여러분들이 지금 이게 하는 것이 구약이거든요.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구약이거든요. 그러면 구약과 신약의 차이성이 많은데, 그 차이성에 대해서 먼저 여러분에게 물어볼게요. 물어보면서 이해합시다.

여러분, 천국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부활되고 싶습니까? 어느 쪽이에요? 이런 질문 처음 들어봤지요. 천국가고 싶어요? 부활되고 싶어요? 어느 쪽입니까? 지금 천국가고 싶다는 것은 이건 낭설입니다. 인간이 천국갈 수 없어요. 인간은 천국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천국 쫓겨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천국 가고 싶다는 것은 아직 자기가 주제파악이 안 된 상태에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천국이 아니고 천국을 넘보지 마시고 이게 되어야 돼요. 부활이 되어야 됩니다.

부활은 단독적으로 돼있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중요한 것이 나와요. 부활은 단독적인 것이 아니고 부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죽음과 결부되어있어요. 부활이 죽음과 연결되어있다 말이죠. 그러면 이 죽음이 두 종류의 죽음이 있어요. 죽음에 두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 죽음은 부활에 이르는 죽음. 부활 될 수밖에 없는 죽음이 있고, 또 하나의 죽음은 두 번째 부활에 이르지 못하는 죽음이 있어요. 둘 중에 어느 죽음이 좋습니까? 물어 본 내가 나쁘지요.

부활에 이르는 죽음과 부활에 이르지 않는 죽음이죠. 부활에 이르지 않는 죽음을 이걸 치욕스러워 해요. 치욕스러움. 모든 인간은 요한복음5장에 보면, 무덤에 있는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에 부활은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치욕스러운 죽음은 치욕스러운 부활, 부끄러운 부활로 나오겠지요. 여기서 제가 죽음과 부활 결부되어있다고 했는데.

인간들의 인식과 인간들의 쓰는 단어에 의하면 죽음과 부활 성경에서는 이렇게 되어있지만, 인간들의 언어구조에서는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죽음이 부활입니다. 죽음이후의 또 다른 부활. 지난 수요일 제목이 끝의 끝이지요. 인간세계에서는 끝이라면 그게 최종이기 때문에 뒤 이후는 남는 여지가 없는 걸 끝이라고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는 그 인간들이 보는 세상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지몽매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상이 끝. 또는 내 목숨이 끊어지면 끝. 이걸로 끝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그 이후에 또 다른 상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물리학에서 코끼리 상(象)이라는 것. 상이라는 게 있어요. 상. 프리즈. 물리학에서 연구한 분야 중에서 고체, 액체, 기체라는 그걸 연구하는 물리학 분야가 또 있어요. 고체, 액체, 기체. 분명히 어느 지점까지 온도 올라가면 분명히 액체였는데, 갑자기 여기서 액체가 기체로 변해버리지요. 대표적으로 수증기인데, 100도를 되게 되면 갑자기 뭐로 변합니까? 액체 되기 싫대. 전부 다 분자들이 날라리처럼 다 올라가버려요. 흩어져버려요. 기체가 되어버려요. 그 지점 변곡점이 생기는 거예요. 그걸 특이점이라 하는데. 특이점.

그리고 또 어떤 지점에서 마치 나이아가라폭포처럼 강인데 갑자기 나이아가라폭포가 여기 51m 폭포가 떨어지듯이 우주가 그냥 가다가 갑자기 여기에 빙빙 도는 소용돌이 같은 블랙홀에 빠지는 경우도 있거든요. 블랙홀에. 어떤 특정 공간에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그러면 이쪽에 작용하는 물리법칙이 이쪽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아요. 물리법칙이.

지금 우리는 어디 살고 있느냐 하면 죽음 이전에 내 몸이 살았다, 하는 이 원리원칙에 우리는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거기에 맞춰나가는 삶을 살아요. 그러니까 이걸 첫 번째 죽음이라면 이 첫 번째 죽음에서, 이 첫 번째 죽음은 제가 쓰는 게 아니고 요한계시록2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첫 번째 죽음에서 인간의 죽음은 죽음의 개념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느꼈던 그 원칙에 준해서 그것이 마감되는 끝. 마감되는 최후. 마감되는 죽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원리원칙이 살아있어서 죽어버리면 이건 어떤 죽음이냐 하면 부활에 이르는 죽음이 아니고 치욕적인 죽음이 되어버립니다. 새로운 하나님이 준비한 새로운 원리원칙을 구경도 못해봤기 때문에, 맛도 못 봤어요. 이 땅에 살아갈 때에 살아가는 원리원칙에 대해서는 이미 창세기3장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규정을 했어요. 선악. 선이냐, 악이냐, 나는 선한 존재냐, 악한 존재냐를 따지면서 그 사이에 왔다 갔다 하면서 긴장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의 원리에요. 선과 악, 이것을 가치론이라 합니다. 선이냐, 악이냐, 가치가 좋냐, 나쁘냐, 이리 보는데. 그 원리로서 그동안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굴었지요. 계속 타박하고 핍박하고, 내가 나를 핍박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 원리에 의하면 죽음을 뭐로 보느냐 하면, 죽음을 패배로 인식 돼요. 패배. 그러니까 이게 죽는다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고 악해 보이고 수치스러워 보입니다. 죽는다는 게. 그런데 여러분, 성도님들이 죽어서 부활되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일까요? 남편은 교회 안 나가고 자기는 교회 다니는데 내가 교회 다니면서 이불 푹~ 덮어 씌고 밤중에 일어나서 “주여, 죽고 난 뒤에 부활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편이 있다가 잠 안자고 뭔가 하고 있으니까 이불을 확 들치면서 “니, 지금 뭐 하고 있어?” “아~ 덮어. 나 부끄러워 죽겠어. 자던 잠이나 자. 남 관여하지 말고. 아휴, 부끄러워 죽겠네. 정말. 주여, 죽어서 부활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어서도 영광스런 부활되는 게 그렇게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남한테 입 다 물어야 될 그런 사실입니까? 뭐 N제곱의 방인가요? 그게. 죽어서 부활하는 게. 로마서1장에 보면 복음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했거든요. 복음은. 왜 죽어서 부활하는 그게 어떻게 순간적으로나 일상적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 뭐를 고집하느냐 하면 선악적인 의식이 너무나 스폰지처럼 내 인생 전반에 걸쳐서 강하게 영향을 줬기 때문에 이 살아있을 때는 어쨌건 살아남는 것은 기쁜 일이고 죽는 것은 패배요, 수치스럽고, 슬픈 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받은 성도는 죽음과 부활이 결부되어있지요. 부활되려면 죽어야 돼요? 안 죽어야 돼요? 죽어야 부활이 있다고요. 죽어야 부활이 있다 이 말이죠.

어떤 꼬마가 안경점에 갔는데 꼬마가 6살, 7살 먹은 애가 안경점에 가니까 안경을 파는 바에 사탕이 거기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래서 애가 이 사탕이 먹고 싶은 거예요. 사탕이. 사탕이 먹고 싶어서 안경은 이건 그냥 덤이고, 사탕이 먹고 싶어서 안경 선글라스 얼마 합니까? 묻는 겁니다. 십 만원한다. 주인이 있다가 너는 십 만원만큼 돈이 없기 때문에 못 사. 하니까 애가 막 고민이 되는 거예요. 사탕을 못 먹으니까. 그래서 십 만원한다고 하니까 십 만원정도는 자기한테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우선 십원짜리를 냅니다. 십원짜리 내고 + 만원짜리를 내요. 애 계산이 십만원이 된 거예요. 십만원 된 겁니다. 십만원내고 안경이 어떻든 관계없어요. 아저씨, 이제 사탕 먹어도 되지요. 이리 되는 겁니다. 사탕 먹어도 되지요.

그 사탕에 꽂혀버린 거예요. 그 애가 누구냐 하면 미달이에요. 순풍산부인과에 나오는 이야기이거든요. 이 이야기가. 애들 입장에서 사탕이 먹고 싶은데, 어른 입장에서 사탕은 우선순위가 아니에요. 안경이 우선순위가 되지요. 이게 이 세상 삶이라 하는 것은 뭐가 우선순위고 뭐가 우선순위가 아니고, 말 다시 합시다. 뭐가 부끄럽지 않은 삶이고, 뭐가 부끄러운 삶인지를 이 세상 살면서 인간들은 이미 자체적으로 그걸 정해놓고 그걸 유포시켜버렸습니다. 죽고 난 뒤에 뭐가 있어도 천국이 있어도 일단 죽는다는 것은 이건 패배자다. 이건 낙오자다. 그 인간은 말종이다. 이런 규정들이 이미 유포되고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복음을 외칠 때, 그들이 얼마나 인기가 있을까가 아니라 반대로 생각해야 돼요. 얼마나 인기가 없었을까. 팔리지도 않는 물건을 팔겠다 하는 것처럼 그것처럼 안쓰러운 일이 없잖아요. 애처로워. 저거 누가 좋아한다고? 저 아무도 안 좋아하는 걸. 살아생전에 얼마나 텅텅거리면서 부자 되고 건강하고 잘 먹고 가정 화평하고 여기에 인간은 몰두한 거예요.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 교회 가서 기도하는 것도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모든 것을 거기다가 기도내용에다가 그걸 포함시키지요. “어서 죽어서 부활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하면 정말 정신적으로 남한테 욕 얻어먹어요. 교회에서도. 욕 얻어먹는다고요. 그러니 복음이라는 것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능력이지만, 안 믿는 자한테는 이건 발성하지 말아야 될 사회에 규범과 예의에 도덕에 어긋나는 돌발 발언이 되는 겁니다.

안동권씨나 안동 지방에 가면 대대로 가문에 큰 제사 같은 거 드리잖아요. 전부 다 유교의 전통에 따라서 한복 유니폼 다 맞춰 입고 일 년에 큰 제사 드리고 음식을 해놨는데, 거기서 “여러분, 죽으면 부활됩니다.” 그 이야기해보세요. 그 맏이, 장손, 장녀, 다 잘립니다. “호적에서 빼라!” 이리 나오는 겁니다. 호적에서 빼라 이 말이지요. 왜 그러느냐 이 세상에서는 죽는다는 것은 이건 하다 하다 안 되면 자살 쪽으로 갈 때나 죽음을 결단하는 것이지 애초부터 널름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건 세상에서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돌잔치 할 때 마이크, 실, 돈, 책 있는데 여기다가 죽음. 죽음이 있으면 애가 잘못해서 죽음 쪽으로 가게 되면 얼른 손을 떼어가지고 마이크 잡고 아나운서 되라. 의사되라, 이런 쪽으로 한쪽으로 몰치잖아요. 하여튼 처음부터 애는 엄마가 애를 완전히 잘못 길들이고 있는 겁니다. 돌 잔치할 때부터.

인간들은 여기에 부활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스스로 죽음에 갇혀있습니다. 부활 같은 것은 인간이 안중에도 없어요. 스스로 안전함을 도모하는데 만전을 기합니다. 안전함을 도모하는데 만전을 기하지요. 자기 안전을. 너나 할 것 없이 다 그래요.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은. 항상 예민하게 작용하는 것은 자기 안전에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과 어떻게 하면 멀리 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내가 어떻게 하면 조성할 수 있느냐.

돈이 없어서 공장 근처에 집을 사가지고 시멘트 공장 근처에 집이 있다 합시다. 그럼 날마다 시멘트 가루 날아오지요. 그럼 죽음의 위협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로또를 맞았는지 집을 샀으면 또 시멘트 공장 옆에 작은 집 살다가 돈 생기면 시멘트 공장 옆에 있는 큰 집 사겠어요? 아니면 아예 전원주택 사겠습니까? 전원주택으로 가지요. 아예 이제는 그 시멘트 공장과 바이, 바이 하겠지요. 냄새나는 공장과 바이, 바이 하겠지요. 인간이 타고난 본능이 이런 겁니다. 자기 안전을 도모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목숨은 자기 목숨은 목숨에서 뭐가 빠졌느냐, 부활의 조건이 빠져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지키고 싶은 그 목숨 생명 안에 그렇게 지키면 지킬수록 부활되는 조건하고는 점점 먼 거예요. 살고자 하는 본인의 의지가 자기를 치욕스런 지옥으로 계속 밀어 넣고 있는 거예요. 바보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바보짓을.

천하에 뭐 똑똑하고 좋은 대학 나오고 해도 좋은 대학 나와도 결국은 뭐냐, 자기 목숨을 누가 망치느냐, 남 탓하지 마세요. 본인이 자기 목숨을 망친 다고요. 본인이. 죽음에도 부활과 관련된 죽음이 있고, 부활에 조건이 없어서 부활에 이르지 못한 치욕스런 죽음에 이르는 죽음이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이 죽어있는 목숨, 이 생명에다가 무슨 요소가 미리 들어와야 되느냐 하면 부활의 조건이 미리 여기에 침투되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장차 죽어도 다시 사는 조건이 아직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 그게 침투되는 것이 어떤 것보다 집에 귀한 보물, 폐물 가득 찬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장 시급한 문제에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 만날 때 그 대목을 해석하는데 굉장히 난해해요. 왜 난해 하느냐 하면 천사하고 야곱하고 밤중에 시름을 했는데 천사가 야곱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가 나를 이겼다.” 이긴 쪽이 야곱이고 진 쪽이 하나님이 졌다. 이렇게 해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거든요. 그 대목을 사람들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왜 야곱이 이기는 상황이 되어야 되는가. 어떻게 하나님하고 인간하고 누가 이겼다? 왜 굳이 인간이 이겨야 되는 그런 상황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가 선, 다른 말로 이김이에요. 아까 했던 죽음은 패배니까. 선악 중에서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나는 죽기 싫다. 나는 살아남아야겠다. 그래서 나는 적이 왔을 때는 내가 살아남을 것은 적을 쳐 부셔야 적을 제압해야 내가 살아남는다. 하는 그런 본색으로 완전 무장되어 있음을 그런 조건이 나한테 이 목숨이라는 이름으로 구비되어 있음을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그걸 까발리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면.

복음을 들으라 해도 외면하고. 복음 들으라, 문자 보내도 기피 하는 걸. 이건 결국 뭐예요? 내가 생각하는 내 목숨을 수치스럽게 안 만들겠다는 거예요. 죽음으로 내모는 그러한 어리석은 짓은 내 사전에는 없다는 겁니다. 왜? 나는 남한테 지기 싫어하니까. 지기 싫어하는 사람은 복음이 그다지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면 묻지요. “왜 이겨야 됩니까? 왜 굳이 살려고 합니까?” 답변이 없어요. 거기에 대해서 답변이.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답변이 없습니다. 뭐 타고난 본성이 어떻다, 저렇다. 그런 이야기하고.

오늘 본문에서 천사가 스가랴에게 찾아온 것은 인간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살고자 하고 남한테 안지고자 하는 그 고집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이게 개인 개인의 자질 문제가 아니고 인간이 속해있는 세상 환경 자체가 바로 그런 어두운 힘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천사가 그걸 말해줍니다. 천사가. 오늘 본문에도 천사 나오지요. 그 다음에 18절에 보면 네 개의 뿔이 나오지요. 그것도 그 이야기에요. 그 다음에 또 4장에 보면 천사 나오지요. 여러분들이 천사 나올 때, ‘목사님, 천사 나오는 뜻이 뭡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쉽습니다. 천사는 인간이 모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인간은 코앞에 밖에 모르지만, 천사는 모든 걸 알고 있어요. 그럼 천사가 우리가 모르는 천사가 뭘 더 안다 말이냐, 천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압니다. 우리는 나밖에 모르지만. 나의 생존에 관련된 몇 몇 변수만 알고 나머지는 모르지만, 천사는 개개인을 탓하지 않고, 니가 어떤 세상 전부에 니가 그냥 담겨있다. 갇혀있다. 그걸 봐요. 그러면 천사가 와서 우리를 치겠습니까? 환경을 치겠습니까? 환경이 수상하고 환경이 좋지 않음을 알리는 방법은 나를 치는 거예요? 아니면 환경을 치는 거예요? 환경을 치잖아요.

환경을 치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신종코로나 때문에 못 살겠다고 난리를 치지요. 코로나 없을 때는 4월 달 아카시아, 라일락이 그렇게 향기로웠어요. 상큼한 비누냄새에요. 제가 아침에 산책하면 상쾌한 비누냄새가 확 풍겨 나와요. 아카시아 산에 보면. 4월 달에는 전에는 마땅히 누릴 자연의 선물이고 혜택으로 여겼거든요. 그런데 마스크를 이렇게 껴가지고 왜 거저 주는 아카시아, 라일락 향기까지 신종코로나가 방해하는 겁니다.

왜 나는 아카시아 향기를 마음껏 들이 못 쉬게 환경이 이렇게 코로나가 이렇게 설치느냐 할 때, 처음부터 니가 아카시아, 라일락 향기를 맡을 어떤 자격이 있다는 것을 니가 서류를 작성해서 나한테 제시해 봐라. 도대체 너라는 존재의 조건 안에, 나는 아카시아 나무, 라일락 향기 그런 거 조건 달아가지고 나한테 이 하나님한테 제시해 봐라. 하나님께서 이런 조건을 당위성, 마땅히 이런 조건이 있다는 것을 니가 무슨 근거해서 이 조건을 내미느냐, 하고 주께서 오히려 되받아 칠 걸요. 되받아 친다 말이죠.

천사가 야곱과 해서 야곱이 이긴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죽기 싫어하는 그 본성이 어디까지 다치게 했다는 말입니까? 어디까지 패배하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하나님까지 영향을 줬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나오신 천사에 의해서 그걸 까발려주는 거예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무턱대고 무심코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인정받고 통용되는 그 원리원칙에 준해서 나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음을 성령을 받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아! 그렇고 그런 삶의 원리를 나는 계속 그 안에 소속되어있구나!’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혈과 육’이라고 합니다. 혈과 육. 족보대로. 부모한테 받은 성깔대로. 성질대로 그냥 살뿐이다. 자식 낳으면 부모 닮았지요. 첫 번째는 부모 닮은 거 알지요. 좀 애 키우다 보면 성질도 부모 닮았어요. 성질도 부모 닮을 때 부모는 그 때부터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쟤가 내 성질 닮으면 안 되는데. 즈 아빠 닮아야 되는데. 제발 이 성질은 나를 닮지 말고 아빠 닮아라. 왜냐 하면 인간은 패배하기 싫어요. 자기가 승리할 만한 조건만 골라서 하고. 자기가 패배이유가 되는 것은 전부 다 발로 차가지고 전부 다 마치 내 탓 아닌 것처럼 밀어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의 원리라 하는 것은 제가 간단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 가훈, 교훈, 온갖 교훈들 많이 있는데 요 한 문장으로서 모든 것이 정리가 됩니다.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 ‘까이기 전에 까라.’ 딱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까이기 전에 까는 거예요. 자존감입니다. 스스로 자존심입니다.

인간은 자존심 고집이 있어요.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권투시합해서 지는 한 방도 못 때리고 상대방 선수가 마구 쥐어 패 면 코치가 “왜 너는 맞고 있어?” 하면, “그래도 무릎은 안 꿇었잖아요.” 2회전 들어가 가지고 무릎을 꿇으니까 “두 무릎은 다 안 꿇었습니다. 코치님.” 3라운드에 가가지고 완전히 KO로 뻗어있으니까 “니가 왜 일어나지 않았어.” “그래도 죽지는 않았잖아요.” 이게 뭐예요? 이게. 까이기 전에 까는 거예요. 그냥.

이유를 불문하고 나는 무조건 정당하다는 거예요. 나는 무조건 정당한 거예요. 그걸 복잡하게 철학으로 윤리로 꾸미지 마세요. 다 떼어버리면 뭐냐, 까이기 전에 내가 까자. 왜? 내가 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 인간의 싸움은 그런 혈과 육의 싸움은 하지 말라 말이죠. 같이 죽을 놈끼리 싸우는 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같이 죽을 놈끼리. 보통 6번하고 15번 하고 싸운다. 권투하거나 아니면 축구하거나 지금 6번 선수가 드리볼 할 때, 15번 선수가 막습니다. 축구할 때는 그게 가능하잖아요. 주님 보시기에는 뒤에 등 번호 죽을 놈이 죽을 놈한테 쫓기고 있고, 죽을 놈은 드리볼 슛 골인! 드디어 죽을 놈이 죽을 놈 골대에 넣었습니다. 둘 다 죽을 놈이에요. 부활의 조건이 없어요. 부활의 조건이. 그것도 영광스러운 부활의 조건이 없어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치욕스런 죽음은 공통점입니다. 공통된 거예요. 다 마찬가지에요.

등번호 높아하고 그런 것은 뭐냐 하면 혈과 육에 관한 거예요. 그리고 혈과 육에 관한 것은 가로하고 뭐라고 했습니까. 족보대로. 여기서 너 자신에게 책임지지 마라. 이건 부모로부터 받은 성깔이기 때문에 이게 뒤늦게 내가 고친다고 부모를 고칠 수 없잖아요. 내가 부모한테 잔소리한다고 부모가 말 듣던가요? 이게 어딜 어른한테 대드노? 핀잔만 들을 뿐이지요. 내가 가까운 사이 부모라도 내 말 듣지 않는 것처럼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내 자식 말을 안 들어요. 그리고 자식이 내 말 안 들을 뿐더러 나도 내 자식 말을 안 들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자식이나 부모나 우리 둘 다 어떻게 손 댈 수 없는 그러한 속성을 대물림하고 있는 상황인 거예요. 우리가 대물림. 그리고 집안 이야기했잖아요. DNA이야기하지만, DNA 그거 별거 아니에요. 모든 탓을 DNA로 돌린다는 그 자체가 모든 인간이 똑같은 죄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까이기 전에 까는 거예요. DNA탓이었습니다. DNA로 까버리고 자기는 자기 DNA빼고 자기 자아는 빠지는 겁니다. 그게 에베소서5장에 나오지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싸움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이 부활에 이르지 못하는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그 증거로서 모든 인간은 혈과 육에서, 족보대로 물려받은 대로 혈과 육을 싸우는 그 안에 그들은 모두 갇혀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이야기해줍니다.

로마서3장에서 그걸 뭐라고 이걸 표현했느냐 하면, 모든 인간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느니, 관계를 끊어짐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부활에 이르지 못한 조건에 혈과 육을 부모로부터 대물림 받은 거예요. 그러니 이건 대물림 받았기 때문에 주신 그대로 있기 때문에 이걸 내가 수정이 안 되고 개선 못하고 회개 못한다고 해서 탓을 내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이걸 만약에 내 탓으로 돌려버리면 이건 마치 자기가 전지전능한 신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마세요. 같은 말이지만 쉬운 말이 뭐냐, 과거를 묻지 마세요~. 나 어릴 때 과거를 묻지 마세요, 해가지고 과거시험 몇 점이냐, 그거 안 묻는 줄 알았어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마세요. 묻는다고 될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부활에 이르는 조건은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두 개의 심판을 내렸습니다. 하나는 육에 대한 심판과 하나는 관계에 대한 심판. 요것을 같이 중첩한 거예요. 아까 중첩이라는 말이 나왔지요. 선지자는 뭐의 중첩이다? 천상계와 그리고 이 지상계의 중첩된 내용을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부여받은 겁니다. 이렇게 중첩됐다는 말은 붙어있다. 서로 지상과 하늘이 서로 통하는 사람이 선지자거든요.

그러면 선지자 아닌 다른 사람은 그것이 지상으로 향하여 그 관계성이 차단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선지자가 필요한 거예요. 선지자가 왜 필요하냐, 선지자는 천상회의를 그걸 주재하지는 않았지만, 관람하고 온 사람이에요. 천상회의. 천상회의는 뭐하는 곳이냐, 앞으로 하나님께서 계획을 어떻게 잡을 것이냐를 그걸 알려주는 회의에요. 제3차 국가5개년개발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걸 먼저 계획을 확보한 자들이 고급 공무원들. 그리고 그 고급 공무원 부인들은 강남에 사는 경북여고 출신 사모님들. 이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초창기 잠실 땅을 샀던 주류세력. 남편이 따온 중요한 개발 정보를 부인한테 패스하고 부인은 그거 해가지고 일가친척으로 이름 다 바꿔가지고 조카, 사촌이름으로 아파트 7채, 8채 사놓고 되파는 그런 식으로 옛날부터 그렇게 했었어요. 강남에는.

부활이란 죽음을 뛰어넘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부활의 요건이 없이 펄쩍 뛰어 넘어봐야 늪 속에 그냥 엎어져버리는 거예요. 얼굴에 진흙 다 묻어버려요. 죽음 다음에 뭐 좋은 거 있을까봐서 뛰어봤는데 이거에요. 지옥에 얼굴 다 파묻고 전부 다 이리 있는 겁니다. 왜냐, 살아생전에, 죽기 전에, 부활의 요건이 미리 삽입이 되어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 삽입은 바로 선지자가 다른 인간보다 미리 받았던 중요한 정보.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 정보를 미리 알아서 그것을 같이 선지자와의 운명과 같이 하면 돼요. 선지자 중심으로.

스가랴 시대 때에 왕이 없어요. 왕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민족이 없다는 뜻이에요. 왕이 없다는 것은 민족이 없다는 뜻입니다. 민족이 없다는 것은 민족 구성원이 없다는 거예요. 왕이 이리 있으면 백성들 할 때, 아~ 참, 이런 것도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는데. 이런 논리들이 참 어려워요. 진짜 이런 논리가 굉장히 어려운데요. 어렵더라도 여러분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 백성들과 왕 사이는 연결고리가 다 되어있습니다. 백성들이 갖고 있는 토지라든지 재산, 가족, 식구라 할지라도 왕이 달라고 하면 이게 줘야 돼요. 사무엘상8장에 나옵니다. 왕의 위치라 하는 것은 모든 건 일단 왕의 것이 되고, 백성들은 그냥 분양받은 거예요. 분양. 서구에서 12세기에서 15세기까지 번창했던 경제구조가지고 무슨 구조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봉건제도라고 해요. 봉건제도. 봉건제도는 장원제도라고 해가지고 왕이 있고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인데 왕의 것을 신하들에게 분배하고 기사에게 분배하고, 분양을 하고 여기서 임대차계약을 해가지고 경제가 돌아가는 구조. 그걸 봉건주의 사회라고 해요.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때 들은 거 기억납니까. 모르면 무조건 안 배웠다하고.

성경에서는 왕 중심으로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성경이 도대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아~ 내 팔, 내가 흔들지. 왜 왕이 지가 뭔데? 지가 뭔데? 왕 니가 뭔데 왜 우리에게 관여하느냐. 니는 니 몸이고 나는 내 몸이야. 니는 니 할 일해서 살고, 나는 내 할 일 해서 살란다. 지금은 개인플레이거든요. 현대인은. 개인플레이. 그렇지요.

개인플레이가 시작된 것은 봉건주의 사회 15세기, 16세기부터 서양에서 처음으로 봉건제도가 해체되면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주체의식이거든요. 이 주체의식에서 나온 것이 인간위주로 단합된 것이 아니고 돈 위주, 자본위주로 국가가 형성된다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홉스, 존 로크, 존 스튜어트 밀, 이런 사람을 통해서 계속해서 그 사상이 나오고 그 사상이 존 로크의 사상에 의해서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존 로크 사상이 거기에 들어가 있어요.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늘에서 준 거지만, 땅은 인간의 노동한 자의 몫이 되어야 된다. 사유재산을 거기다가 문안에다가 집어넣었어요. 꽂아 넣었어요. 왕 제도에는 사유재산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런데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무릇 몇백년 밖에 안됐어요. 우리는 거기에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경제가 봉건제도에서 벗어나야 그 봉건제도 벗어나서 사유재산에 부합되는 정치제도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민주주의라 해요. 민주주의.

민주주의 그냥 맹탕으로 민주주의가 되지를 않아요. 반드시 사유재산 있는 자들끼리만 민주주의가 유효한 겁니다. 법을 정해서 내 재산 뺏지 못하게 하자. 그래서 그게 법이에요. 민주주의 법이에요. 재산 없는 사람은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것은 헛바퀴 도는 겁니다.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빌어먹어야 되지 민주주의하면 안돼요.

북한은 민주주의입니까? 아닙니까? 북한은 신천지지요. 북한을 규정할 때 유교적 봉건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라고 사회주의라고 그렇게 길게 이야기하는데, 쉽게 말하면 종교단체라는 뜻이에요. 컬트라니까요. 컬트. 통일교. 신천지. 이런 사람은 컬트거든요. 컬트는 교주하나 위대한 태양의 지도자 교주 하나 보고 사는 거예요. 교주 하나 보고.

여러분, 조선시대 때 왕이 종기나면 왕을 왕 제도를 없애야 됩니까? 아니면 왕을 자리에서 갈아치워야 합니까? 어떻게 합니까? 왕을 자리에서 갈아치우면 되겠지요. 왕의 그 임무를 바라면 되겠지요. 그러나 뭐는 유효해야 돼요? 뭐는 계속 남아있어야 되겠어요? 왕 없이는 조선시대도 그렇고 고려시대도 그렇고 왕이 없이는 왕 없는 나라를 상상도 못했습니다. 상상도 못했어요.

고종 죽을 때 그 장례행렬이 얼마나, 순종 죽을 때도 마찬가지고 장례행렬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일본이 고종부터 상투 자르라고 했잖아요. 왕이 곧 백성이니까. 왕이 곧 백성이거든요. 우리나라도 왕 같은 대통령 되도 왕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대를 이어야 되고. 북한도 물론 북한은 신천지이니까 대를 이어서. 통일교니까 하겠지만. 이쪽에도 박정희 대통령. 왕입니다. 이천만명이 박정희 대통령 죽고, 육영수여사 죽었다고 장례식 참석했거든요. 나는 안 갔어요.

그리고 그 딸이 대를 이어서 대통령했고. 왕조라 하지요. 왕조. 왕권. 왕이 좋아서 그렇겠습니까? 국민들이. 박근혜대통령이 그렇게 좋아서 그랬겠어요? 왜 그걸 원했습니까? 그냥 내가 살고 있는 니가 왕이 다 알아서 하고 나는 그냥 편안히 기대는 재미로 살자. 그게 일반 백성들이 남한테 미루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나보다 더 뛰어난 전능하신 왕에게 책임을 다 짊어지우고 자기는 편하게 행복하게, 왕의 넓은 파라솔 밑에서 편히 쉬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그런 거예요. 누구한테 기대서 살겠다는.

따라서 인간이 갖고 있는 이 죄에 대해서 두 가지가 있어요. 육에 대한 심판이 있어야 되고요. 그 다음에 무슨 심판이냐 하면, 관계, 관계란 영이지요. 영적인 심판이 또 있어야 돼요. 두 개의 심판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제가 두 개의 심판을 할 때, 무엇을 말씀드리고자 하면, 이 땅에 우리가 육으로 있잖아요. 육. 육이 아직 있잖아요. 늙어죽을 때까지 있다고요. 이 육이 죽을 때, 영이라 했고 다른 말로 뭐라고 했습니까? 관계지요. 관계인데 하나님이 살아계신 숨어있는 하나님과 나하고 어떤 관계일까에 대해서 그 심판성을 순위가 먼저 1번 2번이지만, 2번이 먼저 1순위에요. 먼저 순위를 1순위로 내가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결국은 나이 90, 100살다가 육이 호흡에서 숨이 끊어지면서 죽는 육의 심판으로 이어져야 됩니다. 2번이 먼저여야 돼요.

그러니 현재 모든 인간은 신자든 신자 아니든 모든 인간은 죽어요. 이 절차, 이 순서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요단강에서 성령이 내려왔잖아요. 성령이 내려올 때 요단강에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해서 관계가 이어져있어요. 예수님만이 관계가 이어졌다고요. 관계가 이어졌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육은 죄로 인하여 죽었지만, 3일 만에 이 예수님의 육이 어떻게 됐습니까? 부활의 육으로 바뀌었잖아요. 3일 만에.

마리아는 나름 동산지기인줄 묘소 지키는 아르바이트하는 아저씨인줄 알았다니까요. 옷은 기어입고. 주님께서 미리 앉아있었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우니까 울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말이죠. 이게 사실이거든요. 울지 마라. 사흘 만에 부활한 거예요. 그래서 이 예수님께서 관계가 정상적인 자에게는 육의 부활이 보장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어요. 장차 부활되는 죽음은 어떤 죽음입니까? 할 때, 물으면 1번을 생각하지 말고, 2번. 다시 관계가 정상화되게 되면 죽어도 다시 산다는 그러한 공식이 뽑혀져 나오는 거예요. 죽어도 다시 산다. 죽는 것이 수치가 아니고 오히려 이런 조건이 구비된다면 우리는 이 자랑을 떠버려야 돼요. 떠버려야 돼요.

이불 뒤집어쓰고 혼자서 주여! 하지 말고 이걸 정말 자랑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만 자랑한다. 또는 십자가외에는 나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에 부합되는 현상이 바로 이 현상이에요. 제가 지금 오늘 강의에서 첫째 강의에서 신약을 많이 이야기했잖아요. 지금 두 번째 시간에 스가랴이야기할 건데 스가랴에 나오는 이 천사의 활동은 바로 신약에 나타나는 이러한 새로운 원칙이지요.

부활될 수 있는 요건을 앞당겨서 자기 백성에게 준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면 스가랴에서의 천사의 기능은 천사는 어떻게 이런 기능을 하느냐, 천사는 접점 만들고 떠난다. 천사의 특징은 떠나는데 있어요. 떠나버려요. 이 땅에 오고서는 바이 바이하고 떠나버려요. 마치 폭격기가 B29호 미군폭격기가 나가사키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터트리고 거기서 삽니까? 못 살지요. 방사선 있는데 살면 안 되지요. 후딱 본국으로 내빼잖아요. 천사가 이 세상에 폭탄 터트리고 후딱 빠지는 거예요. 망할 세상 있어봐야 아무 이익 없거든요.

접촉점 만들고 없는 자리 만들고 어비야! 하고 후딱 이곳을 떠나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을. 마리아에게 와가지고 니 임신했다. 하고 후딱 소식 전하고 가브리엘 천사는 후딱 떠나버리는 겁니다. 동방박사한테 와가지고 다른 길로 가라. 오던 길로 가면 죽어. 다른 길로 가야 살아. 하고는 떠나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천사를 만난 사람은 무엇을 믿음직스러워 해야 돼요? 누구 말을 더 신뢰해야 돼요? 천사의 말을 듣고 그 길로 가야지 지가 물려받은 이 세상의 원리에 대해서 합리적인 의심을 해봐야 되지요. 10분 동안 의심을 해볼는지 한 번 해봅시다.

 

안양20200514b슥1:8(재앙 속에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혈육은 물려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수정불가하고요. 관계라 하는 것은 아예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우리 손으로 관계를 잇는 것도 이건 소용없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에게 천사를 보냅니다. 천사를 보낼 때, 이스라엘이 그 당시에 왕이 없었어요. 대표자가 선지자니까. 선지자 불러다가 천사를 만나게 해 준겁니다. 천사한테 인수 인계받는 게 있어요. 그건 천상회의 계획이라 했잖아요. 그 계획이 뭐냐 하면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약속이지요.

약속인데 어떤 약속이냐 하면 일방적 약속이지요. 한 쪽은 못 지키고 한 쪽은 다 지킬 수 있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는 지킬래야 지킬 수 없고 약속을 제시한 쪽에서 약속이 다 지켜지는 그런 약속. 그래서 이 언약의 특징은 인간배제입니다. 인간의 행함 배제. 흉내 내지 마라. 모방하지 마라. 그거 엉터리다. 인간의 행함을 배제하고 그 다음에 거기다가 언약을 이루어주신 분. 언약을 이루신 분 여기다가 메시아죠. 메시아가 여기 행함에 집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배제와 주님의 투입. 주님 행하심의 투입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이 투입돼서 예수님이 하신 언약의 완성이 투입되고 개입된다는 말은 이건 곧 같은 뜻으로 뭐라는 말입니까? 우리의 모든 행함은 다 바깥으로 배설물로 내버려야된다는 뜻이죠. 나의 행함. 그래서 주님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바깥으로 뭐가 계속 나오느냐 하면 나의 행한 것들의 치사함과 그리고 터무니없음. 얄팍한 소망, 기대. 이런 것들이 그냥 바깥으로 다 배출이 되는 겁니다. 땀구멍으로 땀이 배출되듯이 그게 나오는 거죠. 그걸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걸 배설물로 하지요. 배설물.

배설물이 나오는 겁니다. 배설물이 나오거든 이걸 이렇게 보시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네! 살아있어! 있잖아요. 우리 행함이 쓰레기로 나올 때 그거 살아있는 거예요. 생명 있기 때문에 이 배설물이 부활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배설물로 쭉쭉 나오는 겁니다.

이러한 논리구조에 있어서 인간의 행함을 배제하고 주님의 행함을 투입하고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약속 자체가 일방적 약속이라 했지요. 일방적 약속이라 하는 것은 풀이하게 되면 약속을 제시한 쪽이 약속의 완성된 내용을 유일하게 안다가 됩니다. 출제자가 정답을 알지 출제자 아닌 자는 정답을 몰라요. 그리고 이것은 삼손에 보면 이걸 가지고 수수께끼라고 해요. 수수께끼. 이걸 신약에 오게 되면 수수께끼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숨겨진 시크릿, 숨겨진 비밀. 숨겨진 비밀 같은 겁니다.

사실은 구약에도 비밀이 있어요. 아가서를 여러분이 아시지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 아가서에 보게 되면 거기에 가득 가득 수수께끼가 거기에 담겨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남자나 여자가 서로 보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아름답다. 세상에 어느 꽃보다도 아름답다. 라고 이야기해요. 이건 미쳤거나 수수께끼거든요. 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아름답다고 본다는 것은 이것은 수수께끼에 해당되는 거예요. 비밀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걸 실습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랑의 교제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아름답데. 제3자가 봤을 때는 어쩔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아름답다고 우기는지. 그걸 주관적 미적 감각이라 하는데. 지 주관에 의해서 아름답다. 그럼 다른 사람이 그거 몇 달 가겠느냐, 몇 년 가겠느냐 이렇게 나오지요. 영원토록 시간이 흘러도 변화지 않는 아름다운 사랑인데요. 이 사랑의 아름다운 속성을 아가서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이걸로 표현했어요. 죽음.

그러니 죽음이 꼭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에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뭐를 대변해주느냐 하면 고정된 상태를 표현하거든요. 죽음을. 죽어서 이렇게 관속에 넣어보세요. 오필리아 같은 죽음이 유명한 명화에 그런 거 있잖아요. 죽어있다 말이죠. 죽어있다는 것은 그걸로 더 이상 진척이 없다. 그 상태로 동결됐다. 계속 죽 간다. 이리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남자나 여자나 세월이 지나도 계속 아름다운 거예요. 아름다움에 변화가 변동이 없어요. 이걸 구약 아가서에서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사랑이에요. 사랑은 뭣과 같아야 된다? 사랑=죽음의 상황과 동일해야 된다는 겁니다. 고정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의 아가서에서 그 사랑이야기하면서 야~~ 그 사랑. 어떻게 한 번만 딱 보고 아름답다, 좋다, 사랑한다는데 그것이 세월이 천년이 흘러도 영원토록 계속 유지가 된다면 정말 이건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어떤 사랑보다 그걸 뛰어넘는 사랑이겠지요. 그 사랑, 구약 아가서대로 신약에 주어집니다. 그게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이에요. 주님의 사랑.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사랑은 죽음같이 박혀있다. 또는 죽음, 도장같이, 인같이, 인 받아버려요. 인처럼 찍혀버린 거예요. 인처럼. 등기계약서 도장 찍혀있지요. 2년 뒤에 이름이 막 스스로 바뀝니까. 아니지요. 처음에 있던 도장 그대로 박혀있지요. 한결같아요. 차라리 그 옆에 있는 계약서등기 있는 그 장롱은 세월에 이기지 못해서 낡아질지라도 그 도장만큼은 있어줘야 법원에 가서 내 소유가 증명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소유가. 그건 아주 비닐 포장을 하던지 해야지. 그냥 내던져 버리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서류를 46조각으로 찢을 수가 있어요. 스카치테이프로 붙인다고. 물론 따로 등기소에 있기는 있지만.

변화지 않고 죽음처럼 죽는다는 것은 이미 확정된 신분을 냉동 수준으로 동결시키는 그렇게 되어버리면 세월이 2020년도 신종코로나가 뭐가 오더라도 도리어 변화 있는 환경 속에서 이것만큼 변화지 않는 것을 제대로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세상은 계속해서 변동 일어나도 괜찮아요. 환난이나 핍박 곤고, 어떤 것이 있더라도 세상 따라가지 않는 절대 요지부동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있음을 성령을 통해서 인식하게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랑이 아까 했잖아요. 아가서가 주관적이고 사적이 되면 안 된다고요. 우리는 그럴수록 오해해서 해석하면 안돼요. 사적이 아니고 주관적이 아니라면 이 사랑은 어떻게 신약에서 사랑은 어떻게 설명되느냐 하면 온 우주가 망하더라도 유효한 사랑이어야 하겠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온 우주를 망해버립니다. 온 우주를. 어떤 아가씨가 남자한테 “뺨이 불그스레 이쁘니까 당신 나 사랑해.” 남자가 “아니야, 뺨이 이뻐서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 소리 듣고 그냥 믿으면 되는데, 이거 아가씨가 지가 뺨를 때리고 김치싸대기를 해가지고 지가 때리고. “자, 이래도 사랑해?” 남자가 “이제 그만해. 니 뺨에 칼질 있다 해도 나는 사랑해.” “그럼 내가 다리 부러져도 사랑해?” “사랑해.” 갑자기 차에 뛰어들어가지고 깁스해가지고 “이래도 사랑해?” 그걸 왜 자꾸 측정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걸.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지.

조건을 다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조건이 무의미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조건을 달 때만 조건이라고 부합되는 거예요. 사랑 앞에서는. 그러면 주님께서 아가서에 나오는 일방적으로 신랑 되신 주님께서 신부되는 교회를 향하여 나는 완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할 때는 영원히 고정되고 불변한 어떤 요소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 증거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죽음인데, 죽었다가 부활되는 것.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냐, 십자가의 죽었다가 살아난 걸 통해서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알게 하고 십자가를 부각함으로 말미암아 너라는 인간이 어떤 조건하에 하나님과 통한다는 조건하에 너는 구원받은 거예요. 십자가를 소유하는 게 아니에요. 천주교처럼 십자가 피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하나님과 죄인사이에 죄를 용서하는 중간 루트가 막히지 않고 동맥경화증 걸리는 게 아니에요. 피가 흐르듯이 막히지 않고 그 파이프가 유지되는 그것이 십자가에요.  유지되는 십자가.

좋다고 하니까 돈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사랑하는데 얼마면 되겠어? 이런 식으로 돈 주고 사랑 살 필요 없어요. 그냥 십자가와 주님과의 이미 통한다는 그 사실. 그 사실 안에서 우리는 십자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가 우리를 소유한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감사는 사유재산처럼 가져서 감사하지 말고 오히려 나를 점령하고 지배했다는 데서 오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고정적인 약속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고정적인 것. 전에 주일설교에서 그런 얘기 했지만, 지역화폐는 백화점에서 안 받습니다. 북한 돈은 우리나라에서는 받지를 않지요. 북한이든 중국이든 어디에도 다 통하는 “자! 돈. 상품 내놔! 돈 여기 있어.” 내놓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달러겠지요. 기축통화라 하거든요. 기축통화. 전 세계를 통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통화. 그건 미국연방국에서 찍어낸 화폐로 찍어낸 달러입니다. 그게 변화면 안 되지요. 변화지 않는 가치.

변화지 않는 가치를 로마서에서는 수치스럽지 않는 소식이다. 그게 뭐냐, 기쁜 소식, 복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만 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피. 니가 어디서 무얼 하든 묻지를 않아요. 기축통화를 갖고 있느냐. 십자가의 고정성, 확정성에 대해서 니가 아직도 거기에 대해서 인정하느냐를 묻는 겁니다. 십자가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십자가에 의해서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계속 니가 다루어지고 있는가. 그 십자가를 증거 하는 방식은 바로 천사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정리해봅시다. 천사는 공격한다. 뭘 공격하는가, 이 세상을 공격한다. 이 세상을 공격해요. 이 세상은 인간의 물려받은 환경인데, 이 세상을 공격한다. 그러니까 이건 개인적인 소관이 아니지요. 객관적으로 이 세상 전부를 공격하게 되지요. 마지막에는 베드로후서3장에 보게 되면 이 지구가 녹습니다. 이 지구가 불에 타서 녹아버려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아이스크림 위에 살고 있어요. 7월달 되면 여름 되면 다 녹을 거예요. 여기 이 아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스크림이에요. 녹아있는. 다른 말로 하면 배인데 물이 계속 차는 밑바닥에 구멍이 나서 물이 계속 들어와서 침몰하는 배위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노아의 방주 같은 그런 것은 옛날이고, 지금은 천사가 이 세상을 공격할 때에 드러나야 될 구원으로 드러날 사람은 나고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서 배제될 사람은 배재하라는 그 구분 작업에 우리는 아주 신바람 이박사 되어야 되지요. 원숭이가 나무에 올라가야 신이 나는 것처럼, 신바람 이박사처럼 우리는 신이 나야 돼요. 그래서 이 성경은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이 음울한 책, 침울한 책이 아니에요. 환하게 밝은 책입니다. 아주 신바람이 나는 책이에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여유. 이런 식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여유.

사우나탕에 가가지고 사우나 다 하고 나오는 그 여유 있잖아요. 등짝에 근지러운 것도 없이 말끔하게 해가지고 뒤늦게 땀 흘리고 오는 사람한테 ‘아이고, 안 됐다. 고생해라. 니. 나는 이미 깨끗이 씻었다.’ 하고 나오는 그 가벼운 여유. 그런 여유 만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어려운 것은 뭐냐, 환경이 환경을 공격한다면 그 다음 문제는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느냐?’그 문제에 들어가겠지요. 여기 공식 들어갑니다. 나x나=나의 제곱이 돼요. 나+나=2나가 나의 2가 됩니다. 나-나=0,가 되고요. 4가지에요. 나-주님=-나가 되어요. 딱 요거 4가지에요.

나x나=나의 제곱이라 하는 것은 뭐냐, 이건 위선자입니다. 진짜 나를 가짜 나를 동원해가지고 이걸 감춰버리는 거예요. 거기에x나하면 3제곱 되겠지요. 계속해서 가짜 나를 너무 많이 사기꾼처럼 가짜 나를 너무 많이 세워가지고 본인도 헷갈려. 내가 어느 게 진짜 나인지 본인도 헷갈려 해요. 그래서 세상에서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나x나=2제곱, 이건 주로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부동산 사업하는 사람이에요. 좋은 개발지 나왔는데 이거 투자해 보실 랍니까. 부동산 사업이나 그냥 사업하는 사람이나 다 있다고 보면 돼요. 개인 사업이던 치킨 집 하던 전부 다 위선자로 사는 거예요. 이거 백종원한테 걸리면 혼납니다. 청소부터 다 시킵니다. 군포에 떡볶기집 청소부터 다하고 영업합니다. 족발집도 청소까지 다 당했잖아요.

그러면 나+나=2나, 이건 뭐냐 하면, 그냥 평소 직장 없이 시집=취직이 되어가지고 그냥 집구석에서 아파트에서 한평생 다가도록 뒹굴고 사는 사람. 젊을 때 나와 지금의 나와 비교하면서 큰 욕심 없이 남편 잘 봉양하고 자식 잘 키우고 나의 근사함을 그냥 유지하는 쪽으로 만족하는 사람. 2나입니다. 3나, 4나. 이 사람은 왜 이러느냐, 밖에 나가 사업하면 위선자가 되기 싫어요. 구라를 쳐야 돈이 되거든요. 남편이 잘 벌어다주는데 구라치면서 까지 나의 존엄함 품위까지 손상해가면서 돈 벌기 싫다. 여름에는 덥다고 못 나오고, 봄에는 바람 분다고 안 나오고, 가을되면 해외 여행한다고 시간 없어서 못 나오고, 겨울에는 춥다고 안 나오고. 일년내내 집구석 앉아가지고 TV나 보고 이찬원이나 보고 트로트나 보고 하는 거예요.

나-나=0은 이건 일반교회입니다. 도 닦는 사람이에요. 부족합니다. 주여! 맨날 부족하데. 맨날 부족하데. 부족합니다. 왜 새벽기도하면서 부족하다고 하느냐 하면 나 하나 희생해서 자식 좋은 대학 들어가라고. 나 하나 희생해서 남편 사업 잘 되라고. 그게 자기 가정 아우바리를 지키는 자기의 거룩한 희생물로 여겨서 내 하나 기도 열심히 해서 교회도 안 나오고, 기도도 안하는 자식들 몫을 내가 다 짊어지고 십자가 졌어. 아예. 십자가해가지고 그래, 니 그렇게 살지만, 내가 대신 두  나 곱빼기나 니 대신 내가 기도할 거 다해주고 헌금할 거 헌금  해주고 충성봉사 다해가지고 주여! 가족들이 하지 않는 충성과 봉사를 제가 했으니까 저 하는 걸 봐가지고 너무 우리 가족들 심하게 안 다뤘으면 좋겠다고 이리 하는 도 닦는 사람. 도인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낮추고 비우기 바빠요. 나-나=0에요. 제로에요.

그냥 자식에게 해주기를 바라고 나 하나 엄마로서 희생하는 것이 엄마로서의 도달할 수 없는 순결의 최고 경지 수준에 그걸 목표로 삼고 내 영혼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질주하자. 해가지고 지가 지 맘대로 문제내고 답을 지가 알아서 달려가 가지고 남보다 더 고상하고 훌륭한 성품을 갖추어서 그  상으로 내 가족들이 잘 되고 내 교회가 부흥되기를 바라는 이러한 도 닦는 도인들.

그러니 이 세 가지의 특징은 뭐냐, 잘났어. 정말. 1번, 2번, 3번 전부다 잘났어요. 1번은 돈 빼먹기 위해서 티를 내는 거니까 그 스트레스 때문에 퇴근하고 항상 소주하고 돼지 삼겹살 궈 먹어야 돼요. 본인이 너무 사기 친다고 너무 힘들어가지고. 2번은 이것도 힘들어요. 힘드니까 가끔 동창생 만나가지고 시집 욕하고 시누이 욕하고 풀어줘야 돼요. 풀고, 가끔 해외여행가서 풀어줘야 돼요. 3번 도 닦는 이건 가끔은 집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자기의 상태가 너무 예상외로 우수함에 자기 스스로 자가 만족하는 사람이에요. ‘어머, 놀래라, 이렇게 고상할 수가 있나.’ 이런 거. ‘내가 이렇게 우아해도 돼?’ 이런 거. 자기 착각에 빠진 사람.

4번째는 뭐냐, 나에서 주님이 나를 빼버린 사람. -나. 이건 뭐냐 하면, 죄인이에요. 죄인 중에 괴수되는 겁니다. 죄인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아까 천사는 환경을 치는데 환경을 치게 되면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죄인이 등장하는 거예요. 죄인이. 마태복음16장봅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인간의 인식이지요. 인간의 인식의 한계 또는 인식의 범위를 미리 말씀드리고, 그렇게 너희들이 천기를 잘 분별하면서도 4절에 봅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

3절에 보면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시대의 표적. 전체를 보는 주관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안목은 왜 너희에게 없느냐, 그러면 우리가 전체를 알까요? 알 거 없어요. 왜냐하면 4절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악하고 음란한 정신으로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세대가 그 악하고 음란한 인식으로 인하여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참으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 있다는 겁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가지고 진짜 이 세상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너희들 중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어요. 그런 형편에 있는 거예요. 그럼 악하고 음란한 세대 같으면, 그걸 보여주는 표적은, 악하고 음란을 보여주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지요. 요나가 니느웨성에 뭐라고 했습니까? 너그 40일 지나면 멸망한다 했지요. 멸망. 심판. 멸망에 대해서 언급할 때, 아까같이 아가서에서 사랑. 사랑의 고정성이 있는 사람은 이런 멸망조치에 대해서 반깁니다. 반겨요. “에이, 못 먹는 감 찔러나 주세요.” 이런 식으로. 삼성그룹 내거 아니라면 망하게 하던지. 이런 식으로. 어차피 내거 아닌데 뭐. 챙길 거 다 챙겼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되든 신종코로나보다도 더 센 변종이 오든 말든. 그거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상관없어요. 멸망하면 멸망해주세요. 이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여유 만만한 태도를 가져야 된다 말이죠.

왜? 본인은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이 죄인이 되게 되면요,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이유는 아쉬울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잃을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죄인이라면. 죄인이라면 잃을 게 없는 정도가 아니고 여기에 있는 시몬케익부터 해서 전부 다 감사거리지요. 모든 게 하나가 감사거리지요. 시몬케익 이거 지옥에서 단가 얼마 나오는 줄 알아요? 아니 물 한 방울 지옥가면 얼마인지 알아요? 돈 주고도 못 산다니까요. 지금.

그런데 우리는 지옥가도 마땅한 존재가 이 물을 막 마시잖아요. 감사 안할 수밖에 없어요. 정말 고마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똑같이 물을 주고 똑같이 빵을 줘도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갈 티를 내요. 부활의 요건이 없어요. 그러나 부활될 요건이 있는 사람은 벌써 이 땅에서부터 자기가 죄인인 것을 마이너스인간인 것을 이미 익히 아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미리 침투했기 때문이에요. 마지막 멸망이 있기 전에 미리 침투한 거예요.

언약의 효과는 바로 유월절 출애굽 때에 마지막 열 번째 재앙 때에,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하겠습니다. 재앙 속에서 비로소 언약이 빛이 나요. 하나님의 약속이 십자가가 빛이 나고 피 흘림이 빛이 난다고요. 재앙 속에서. 그래서 이 천사는 어디에 향하느냐, 이 재앙을 활성화시키고, 활성화시키기 전에 먼저 예고하고 활성화시킵니다. 작살난다. 망한다. 그렇게 되지요.

그러면 아까 나라고 했는데, 개인적인 나는 이미 육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1번, 2번, 3번째, 1번은 나 제곱이고, 2번째는 2나였고, 3번째는 제로였고, 4번째는 –나지요. 마이너스 나. 죄인이다 말이죠. 그러면 이 1번, 2번, 3번째는 자동적으로 돼요. 혈육으로부터 물려받은 게 이런 속성이기 때문에 이건 못 고쳐요. 못 고치는데 이 4번째는 특이하거든요. 누가 왔어요? 주님이 찾아와서 나를 죄인으로 삼게 했다 말이죠.

이럴 경우에 여기에 해당되는 장차 부활의 조건이 요 마이너스 나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 형성되느냐, 이걸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활의 조건이 있어야 되는데 부활의 조건은 주님이 찾아와서 주신다는데 어떤 식으로 우리 안에 부활의 조건을 유발해내고 만들어내고 거기다가 뭘 심고 장착하시는 방법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 말씀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아들을 통한 아버지 뵙기 또는 아버지 알기.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서 이것이 성립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육과 영의 차이점은 영이라 하는 것은 신비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귀신 뭐 수증기 올라오고 그런 걸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말하는 영이라 하는 것은 언약입니다. 언약. 구체적인 언약이지 뭐 흐물 흐물 밤에 귀신 나왔다 그런 신비주의를 영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건 귀신의 장난이니까.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육과 영에서 육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정해버립니다. 정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위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다. 아버지가 아들로, 아들로, 계속 나가지요. 그러면 아들이 부여받은 모든 속성은 이미 아버지 하나로 결정되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를 새롭게 정해버리면 이 아들로 인하여 기존의 누구 아버지가 있습니까? 집안 식구 아버지. 육의 아버지 있겠지요. 육의 아버지를 뭐로 하고? 배제해버리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고 육의 아버지 말고 다른 아버지에 의해서 내가 아들이 됐는데 그 다른 아버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가 새롭게 정해지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방식으로 언약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게 무지무지하게 참 어려운 문제지요.

두 문장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나는 나의 아들이다.’ 이게 상당히 말이 어렵지요. ‘나는 나의 아들이다.’ 같은 말로 ‘나는 아들을 소유할 수 없다.’ 같은 말로 ‘아들이 나를 낳았다.’ 예수님이 만인의 아들로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만인하는 것은 택한 백성의 만인. 모두. 전부. 전부의 아들로 오신 거예요. 아들로 왔다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뒤에는 아버지가 따로 있어요. 이 아버지는 숨겨진 아버지고.

인간이 이렇게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누가 먼저 있어요? 아버지가 먼저 있지요. 아버지 아들로서 인자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나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 육의 세계에서는 나는 내가 아니고 아버지라는 말을 해도 같은 말이에요. 아버지가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다. 라고 말을 해도 같은 말이에요. 아버지처럼 높다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에서 못 벗어난다. 아버지의 육의 범위에서 조금도 이탈할 수 없다. 이미 규정된 조건이기 때문에 이 조건을 내 쪽에서 수정이나 변경할 수 없어요. 나는 성형수술해도 아버지의 피가 흐르게 되어있어요. 아버지 피가 내 안에 흐르는 겁니다. 아버지가 먼저 있고 그 다음 차례에 내가 있다 보니까 나는 아버지의 범주 밖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오셨느냐, 아들로 오셨거든요. 아들로. 예수님이 사랑하는 아들로 왔다 말이죠. 그러면 육에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아들 개념 하나와 새롭게 예수님의 아들과 아들 개념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아들이 등장한 거예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아들이 있다는 말은 두 종류의 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뜻이에요. 두 종류의 아버지가.

그렇다면 성도에게는 기존에 이미 육의 아버지가 있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성도에게 찾아와버리면 이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아버지를 이제부터는 나의 아버지로 아바아버지로 부르게 된 거예요. 로마서8장에. 내 아버지여!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께서 뜻이 있어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가 되는 거예요. 왜 자꾸 복잡하게 이야기합니까? 라고 여러분이 짜증을 내신다면 단독적으로 구원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단독적으로.

내가 도를 닦고 성실하게 산다고 구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누가 이렇게 접붙임을 해야 돼요. 접붙임을. 로마서11장에 나오는 것처럼. 참감람나무 돌감람나무처럼. 접붙임이 있어야 돼요. 누가 와서 이쪽 노선 말고 내가 알고 있던 노선은 말고, 다른 노선이. 다른 노선이에요. 단독 자가 아니고 다른 노선이 와서 낚아채야 된다니까요. 낚아채야 돼요.

그 유명한 재미있는 영화가 있는데. 퇴역된 특수부대 해병장교가 핵폭탄을 실고 가는 그 범인들의 열차에 뛰어들어서 핵폭탄도 제거하고 범인도 다 빼내는 영화 <언더 씨즈> 1,2,3까지 나왔지요. 스티븐 시걸이 했는데. 지금 철도에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 여기에 핵폭탄 실은 범인들이 있는 거예요. 위에서 헬리콥터로 해가지고 범인을 처벌하고 빼가는 겁니다. 다른 노선에서 이렇게 덮쳐오는 거예요. 또 다른 노선이 와서 이 노선은 노선대로 그냥 쳐 박도록 그냥 멸망하도록 가버리라는 말이죠. 그 중에서 언더 씨즈의 영화처럼 헬리콥터가 와가지고 해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거 하기 전에 헬리콥터 타기 전에 이 안에서 막 싸우고 그래요. 자기는 그런 사명이 있는 줄 모르고 조카하고 여행가고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범인이 이걸 기차를 납치했다고 하고 한바탕 싸우고 창고가 싸우고 화물차에서 싸우고 그러는데 빼내는 거예요. 주님께서 빼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가랴에게 누가 덮쳤다? 천사가 왔다는 것은 스가랴의 원래 소속된 노선이 천사를 통해서 모든 앞으로 할 계획들을 미리 앞당겨 제공하는 거예요. 그 제공된 내용이 뭐냐 하면 세상은 망한다. 세상은 망한다, 에요. 환경은 망한다. 이 인간세상은 망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약속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봐! 내가 너를 찾아왔다. 스가랴에 받아 적어라. 계시를.”

그러니 이 스가랴가 받은 계시는 뭐냐 빼내주는 절차와 그 방법에 대해서 하나님이 계획한 내용에 대해서 이 스가랴에 표시가 되어있어요. 스가랴 내용대로 누가 그렇게 사시느냐 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사신다 보시면 여러분이 정답은 이미 아신 거예요. 스가랴가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 겁니다.

스가랴를 어떻게 해석할 거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활동을 할 것이냐를 보면 돼요. 예수님은 어떤 활동을 하고 천사가 또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 제가 아까 잠시 설명하다가 미리 설명을 드렸는데 다시 하면, 접점을 만들고 그 다음에 빠진다. 위로 빠진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떠난다 했지요. 접점 만들고 빠져버려요. 누굴 닮았어요? 천사가 이렇게 했지요. 누굴 닮았습니까? 예수님도 접점 만들고 십자가 만들고 하늘 아버지 곁으로 떠나버리죠. “가서 내가 기다릴게. 처소가 마련되게 되면 그 처소에 데려가기 위해서 너를 다시 찾아올게. 데려가마.” 그 처소가 성령이거든요. “성령이 마련되게 되면 내가 다시 올게.” 라고 빼가는 거예요.

여기서 아까 그 나에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나가 되지요. 마이너스 나가 된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다. 따라서 죄인의 값은 뭐냐 이 땅에서 죽어야 되겠지요. 먼저 죽는 거예요. 먼저 귀신 되는 거예요. 미리 먼저 죽는 겁니다.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남은 모르지만 본인은 미리 아는 거예요. 내가 죽는 이유는 나쁜 짓을 해서 죽는 게 아니고 나의 살던 고향이 문제가 있는 거예요. 나의 살던 고향은 문제가 있어~~, 문제가 있는 고향이에요.

그걸 아무도 안 가르쳐줘요. 학교에서도 그걸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침몰하는 배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어요. 예수님이 와서 얘기해 주는 겁니다. 헬리콥터가 와서 빼줄 때에 내가 살던 그 고향에 미련두지 말고 두발 딛고 위로 올라가야 돼요. 헬리콥터에 낚여야 되겠지요. 베드로보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 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지요. 내가 전에 주일학교 설교할 때 했어요. 사람 낚는 어부가 될 때, 베드로는 어떻게 낚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낚을 때 방법을 사용하신다. 베드로가 낚일 때 베드로가 뭐냐 “제가 죄인 맞습니다.”라고 했지요.

왜 베드로가 그렇게 했느냐 하면, 자기는 미리 고기 잡는 방법을 안다고 했던 거예요. 오른편도 넣어 보고, 왼편도 넣어봤는데 베드로가 오른 편에 딱 던지니까 주님께서 “오른편에 있는 물고기 다 왼편으로” 다 빠져나간 거예요. 없어요. 그물 무게만 덜렁한 거예요. 이번에는 왼쪽으로 던지니까 “왼쪽에 있던, 왼쪽에 있던, 물고기 오른쪽으로 다 빠져!” 못 잡는 거예요. 앞쪽에는 있겠지. 앞쪽에 던지니까 “앞쪽에 있는 물고기, 앞쪽에 있는 물고기 뒤로 빠져!” 밤새도록 했어요. 밤새도록. 밤새도록 내가 살던 고향에서 내가 생존에 생존을 유효하게 했던 그 모든 체험과 경험이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럴 때 베드로가 뭔가 내가 모르는 세계와 접하고 있지 않느냐는 낌새는 얻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했지요. 내가 밤새도록 던졌지만 못 잡았는데 주의 말씀에 순종해서 던지겠습니다. 던지니까 주님께서 “오른 쪽에 있는 물고기, 왼쪽에 있는 물고기 차 빼세요. 왼쪽 있는 물고기 오른쪽으로 전부 집합!” 하니까 고기가 너무 잡혀가지고 배가 침몰할 때, 베드로가 주님하고 동업했습니까? 아니면 죄인이라고 했습니까? 죄인. 죄라는 것은 그 때 사용하는 거예요.

내가 소속되어 있는 세상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내가 죄 안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거예요. 인지하는 거. 이 땅에서 내가 철야하고 어떻게 하고 아무리 희생 봉사해도 죄 안 되는 방법은 이 세상이라는 이유 때문에 생기지 않는 겁니다. 오직 처음부터 우리는 죄인이었고, 중간에도 죄인이었고, 끝도 죄인이고, 끝까지 죄인이고. 죄 아닌 방법이 없었는데, 우리는 그동안 선악이라는 그 잣대를 가지고 세상에 통하는 방법으로 하니까 마치 때로는 훌륭하고, 복 받을 짓을 한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착각한 거죠. 착각했지요.

사람이 복 받을 짓을 했을 경우에는 갑자기 어디에 미련을 두겠습니까. 와~ 이거 뭐, 내가 인간 되네. 인간답네. 라고 미련 갖겠지요. 화투 치다가 그 노인정에 할머니들 십원뺑이 하자 해가지고 나중에 이십만원 날아간 사람도 있지만. 또 돈 잃으면 나중에 야쿠르트에 농약 넣을 수도 있습니다. 화투 치다가 “에이, 오늘 재수 없다.” 털고 나오는데 마지막 판에서 갑자기 대박나면 다시 주저앉지 않습니까. 이런 일은 우리한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끝까지 죄인 되어야지. 교회 한 30년 다녔다고 갑자기 착한 사람 되고 술 담배 끊었다고 인간되고 이런 거 없어요. 끝까지 우리는 죄인이라는 확인하는 차에 확인하라고 우리는 교회 다니고, 세상 아직까지 안 떠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방법이 그 주님께서는 그 죄인을 구원하지요. 주님으로 인하여 몰랐던 새로운 감각. -나. 주님보시기에 마이너스 나니까 인간도 아니지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한 것을 주께서는 건지는 식으로 자기 언약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펼치십니다. 새로운 세계를.

아버지와 아들에서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아들은 뭐 없이는 없어요? 아버지 없이는 아들이 없지요. 아버지가 아들 낳으면 아들은 필연적으로 아버지 앞에 좋든 싫던 종속되게 되어있습니다. 묶인다. 묶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뭐로 봤습니까? 아들로 봤지요. 그런데 이 아들 예수님과 맞출 수 있는, 이 예수님의 아들 됨에 맞출 수 있는 아버지는 이 땅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어머니는 있지만, 아버지는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어머니는 있음이 되니까 기존에 우리가 속해있는 상황과 구별이 안돼요. 엄마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 다 있지.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가 있어요? 없어요? 아버지가 없어요.

그러면 아들이던, 딸이던 마찬가지에요. 성도는 어머니 소속이 아니고 항상 아버지 소속이거든요. 결국 이 성도라는 말은, 성도라는 신분은 이 세상에 있는 존재가 아니고 없는 존재로서 이 땅에 미리 출현한 거예요. 나타난 거예요. 성도가 없는 존재에요. 성도가. 교인들은 많아도 너무 많아요. 교인들은.

성도라 하는 것은 없는 존재에요. 기적이에요. 이건. 그런데 아들은 뭐를 증거 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아들이 되었지요. 그렇죠. 없는 아버지 증거 하라고 예수님이 아들 됐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성도잖아요. 성도는 성령을 받게 되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뭡니까? 이 땅에 없는 것을, 없는 것을 인하여, 내가 여기 출생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 땅에 없는 것. 이 땅에 뭐가 없어요? 부활이 없지요. 이 땅에서는 영원한 천국도 없고.

그 없다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그것이 “아니야, 있어!” 라고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일찌감치 성령을 우리한테 주신 거예요. 남들은 눈에 보이는 거, 있는 거, 그것을 목표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역사, 철학, 그리고 신학, 과학, 이 세상의 모든 학문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여기서 기대치가 여기서 발생한다는 것이 이건 결정적 엉터리에요. 이 세상에 있는 기대치. 기대치 있는 거예요.

우리 모임에서 모였다 하면 누구나 생각하기를 ‘아이, 숫자 좀 더 모였으면 좋겠다.’ 만약에 그런 생각을 여러분이 안 갖겠지만. 우리 십자가마을에나 우리 이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여가지고 누구 복음 알면 복음 알지 말라고 아주 닦달 내. 니가 건방지게 복음을 왜 알아. 막 쏘아대면서 내만 알았지 니는 몰라도 돼. 이런 식으로 이상한 단체지만.

여기에 한 10명 됐다 하면 갑자기 하게 되면 좀 시몬케익 좀 준비해가지고 30명 왔으면 좋겠다, 하겠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미 10명이 눈에 보인다는 뜻이에요. 10명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20명이 더 낫지 아니 하냐, 이리 되는 거죠. 그게 왜 더 나아야 돼요? 이미 그런 기대와 희망을 계속 갖는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이 세상에 육을 입고 살고 있다는 배설물이 남아있다는 뜻이에요. 애가 머리를 길었다. 깎았으면 좋겠다. 깎았어. 공부 좀 잘했으면 좋겠다. 공부 잘해. 나중에 의사되면 좋겠다. 의사 됐어. 계속 뭔가 기대, 이 땅을 떠날 마음이 없고 계속 기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 뭐냐 하면 미흡하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에 기대치를 갖는다는 것은 기대치라는 그 폭이 있잖아요. 지금 기대하는 것과 어떤 도달될 이상적인 모델사이에서 이게 결핍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감사, 기쁨 다 날아가 버리지요. 없지요. 그냥. “주여! 좀 더 힘을 실어주세요. 주님. 기도할 테니까 좀 도와주세요. 제 소망 이루어주시옵소서.” 이러고 있다 말이죠. 이게 뭐냐, 거기서 시간 요소 역사지요. 철학, 신학, 과학,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실적과 업적을 내가 눈으로 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건 있음에서 있음이죠.

그러나 주님의 성령은 뭡니까? 있음 속에서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음 있다는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수치스럽게 여기는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너희들은 세상에 보이는 게 전부지만, 주님께서는 나를 점령하사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의 세계. 부활의 세계. 그게 곧 천국이거든요. 그 천국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 천사가 온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천사가 적색, 흰색, 그리고 자색, 이런 색깔로 이렇게 오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뒤에 있는 또 다른 계시까지 이야기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어떤 논리가 있어서 십자가 믿은 것도 아니고 납득이 되어서 믿은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로 다 완성되었음을 더 이상 내 인생에 책임질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사오니 세상에 없는 것을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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