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신기함 2004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5. 1. 10:32
2020-04-16 07:30:18 조회 : 229         
신기함 스가랴 1:3 200416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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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175.♡.135.128) 20-05-01 10:14 

안양20200416a슥1:3(신기함)-이 근호 목사

오늘부터 스가랴라는 선지서에 대해서 시작하겠습니다. 이 선지자라 하는 것은 메시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 메시아의 영이 이미 들어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인간 속에 장차 올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다는 것. 그렇게 될 때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한다. 그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성령,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의 영이. 이 사람과 예수님의 영이 없는 사람과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는 사람은 이 우주, 그리고 우주밖에 있는 하나님나라와 다 이것이 연관성이 있어요.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영이 있는 사람은 이 사람의 행동과 말씨, 태도, 이 모든 것이 우주의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구성에 있어서 영향을 주고받게 되어있어요.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이 우주가. 프로야구 한다고 우주가 변화고 그런 거 아니잖아요. 성령이 없는 사람한테는 이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그리스도한테는 변화가 일어나요. 그러면 이 선지자에게 예수님의 영이 계시고, 그 말은 곧 예수님이 그 안에 있다 하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어떤 근거에 의해서 주장할 수 있느냐, 라고 이야기하실 텐데요.

베드로전서1장10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리 되어있어요. 모든 선지자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었으며 그 그리스도 영이 고난과 영광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선지자는 예언을 했고 거기에 맞추어서 대자연도 그렇게 질서 잡혔고 구성이 된 근거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 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여기 베드로전서12절에서는 그것을 성령의 힘입어, 성령이라고 이야기했고, 그러니까 성령이라 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인간의 영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이 영향을 받는다든지 자연재해가 바뀌고 그런 것은 없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영광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데 성령이 들어있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스가랴 해석은 어떻게 됩니까, 라는 질문의 답은 딱 나왔지요. 스가랴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면 선지자가 외치고 있는 모든 예언의 말씀은 어디에 다 집중이 되고 응집이 될까요? 어디에 다 거기에 한 곳에 모일까요? 모든 예언은 그리스도의 영이니까. 예를 들어 스가랴 선지자의 모든 예언은 결국은 예수님에게 모인다. 그럼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다 이루었다 하는 지점은 어느 지점입니까? 십자가지요.

예수님이 하는 모든 것은 십자가. 이걸 다시 이야기하면 십자가의 사건 중심으로 온 우주는 그렇게 변화되고 움직였고 나름대로의 십자가를 쳐다보고 살았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집중이라고 해요. 집중. 십자가를 향한 집중력. 집중. 그래서 이 성경해석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그 때 그 당시에 자연세계나 인간 세계 속에서 보여준 자가 누구다? 스가랴가 되는 겁니다.

스가랴는 역시 물론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그 당시에는 북이스라엘 나라가 없기 때문에 유다사람이다. 유대인이다. 유대인입니다. 일반 유대인과 선지자 유대인 스가랴하고는 차이가 나지요. 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 말이에요. 그럼 여기서 지금껏 요렇게 된 이야기 가운데서 이 존재를 제가 한 번 거론해 보겠습니다.

가브리엘. 자, 가브리엘이라 하는 이름은 이건 사람이 아닙니다. 천사지요. 제가 갑자기 천사를 거론한 이유는 뭐냐 하면 흔히 성경에서 선지자가 성령 받았고 오늘날 성도들이 성령을 받아야 성도가 된다, 라는 그것을 제가 언급을 할 때에 그 이야기를 듣고 누구나 ‘나도 성령 받아 성도되고 싶어.’ 또는 ‘성도 일거야.’ 라고 생각하겠지요.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에요. 나는 성령 받았으니까 성도다. 라고 한다 말이죠.

그럼 성도다. 인지 제가 한 번 시험을 해보겠습니다. 가브리엘 천사.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십니까? 이게 지금 스가랴에 보면 왜 갑자기 천사를 거론하느냐 하면 스가랴의 내용이 천사 내용이에요. 천사 내용이 등장한다는 말은 인간은 빠져라 이 말이거든요. 인간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말씀을 지키고 해봐야 전부 다 헛방이었다는 겁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특징은 천사들이 자주 등장해요. 천사들이. 천사의 존재를 인정한다 했습니다. 천사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나님이 저기 계신 거 인정한다. 같은 뜻이겠지요. 천사의 활동을 인정하십니까?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십니까? O, X에서 O 했습니다. 그럼 천사의 활동은 인정하십니까? 왜 조용하지요. 천사의 활동은 인정하십니까? 인정하지요.

그러면 적금은 누가 부었습니까? 사람이 자기를 의식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자기가 뭔가 행했을 때. 행한 것이 어떤 결과가 있을 때, 결과물이 나타날 때, 여기에 집중하게 되어있어요. 아까 내가 집중이란 말을 쓰지 않았습니까. 인간은 어떤 일에 집중하느냐 하면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성경에서 하나님, 천사이야기해도 그 사람의 하루 일과가운데 주로 관심 두는 것은 본인의 행한 것입니다. 본인의 행함. 본인의 존재와 본인의 활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들이 공부는 안하고 맨날 노래만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그 아들한테 전화 와가지고 “엄마, 저녁8시에 TV 한 번 틀어보세요.” “왜?” “내가 거기에 노래 가수가 되어서 거기에 가요 톱10에 나옵니다.” 이렇게 하면 그 엄마는 그 날 하루 종일 어디만 집중하느냐 하면, 어디만 관심 두느냐 하면, 내 아들이 TV에 나와서 자랑스럽게 아들로 부각되는 거기에 집중하겠습니까? 아니면 가브리엘 천사의 활동에 대해서 집중하겠습니까? 자동적으로 자기 아들이 스타 되는 거, 자기 아들이 영웅 되는 거에 거기에 집중하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존재하고, 그 천사가 부지런히 활동한다고 아무리 언급을 해도 인간은 자기가 집중하는데 그거 신경 쓰기에 바빠요. 천사가 바쁘게 활동하던 말든 신경 뚝, 관심 없습니다. 그래서 망한 거예요. 그래서 유다나라가 망한 겁니다.

인간이 자기 하는 일에 집중한다는 거, 이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역사라고 이야기  해요. 역사. 인간은 역사를 자기가 만들어내고 또 미래라는 것은 곧 내 지금에 있는 역사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그 어떤 시점. 그걸 미래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지금 역사적인 내 중심의 역사적인 내 인생이지요. 그냥. 내 중심의 역사적인 것에 집중해서 활동하는 게 그것이 그동안 역사를 만드는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라고 의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 역사 때문에 망했다. 다른 말로 하면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 두고 그거 신경 쓰다 보니까 망했다.

그러면 이 역사라는 것은 뭔가 가리는 역할을 하게 되지요. 뭘 가리느냐, 역사라 하는 것은 무엇과 반대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 스가랴 쪽으로 이야기하면 천사의 일. 천사의 일을 누가 방해한다? 역사라는 명목으로 인간이 천사의 일을 방해하고, 그 인간이 천사의 일을 방해했다는 그 증거가 뭐가 되느냐 하면 역사가 됩니다.

그러면 스가랴 예언서에서 역사를 만약에 뭉개버린다면 역사를 부정한다면 이것은 곧 인간의 관심사, 인간의 의도를 뭉개버리는 것이고 반대로 그것은 무엇을 부추기고 내세우느냐 하면 천사의 활동과 천사의 업적과 천사의 결과 그것을 부각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 된다 이리 되겠지요.

그러면 인간이 고만 고만한 인간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일에 집중하고 열중하고 거기에 몰두하고 열심을 낼 때에 제가 만약에 천사의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들은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해해요. “참, 신기하다!” 이렇게 할 겁니다.

그래서 스가랴의 내용은 이게 신기함에서부터 시작해서 신기함을 통해서 신기함으로 끝나는 거. 이게 스가랴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인간의 뭘 부정한다고 했습니까? 인간의 모든 역사, 인간의 활동을 부정하는 겁니다. 참, 신기하다! 다른 말로 하면 참, 기이하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참, 이상하다! 이런 신기하다는 것은 이건 인간의 측면에서는 뭐냐, 예상 못함이에요. 예상 못함.

선지자가 예상 못한 내용을 스가랴의 선지지가 예상 못한 내용을 계속 언급하는 것은 이게 뭐냐 하면, 믿으라는 거죠. 믿으라. 신기함을 믿으라. 천사의 활동을 믿으라. 이 말은 같은 말로 너의 활동은 믿지 마라. 니는 너 자신의 하는 일에 거기에다가 몰두하거나, 거기에다가 애달아하거나, 미련을 두거나, 집착하지 말라. 그런 뜻이에요.

인간이 활동하게 되면 그냥 활동합니까? 기대를 하게 되지요. 그게 아까 역사라 했잖습니까. 니가 하는 일에 니가 기대하지 말라. 니가 기대를 하나 안 하나 일은 누가한다? 하나님이 가브리엘로 해서 천사한테 지시해서 세상의 모든 운명과 세상의 모든 진척은 인간의 손이 아니라 천사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서 모든 걸 마감 처리한다. 이게 스가랴입니다. 이게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굉장히 신기해하는데 들어보면 되게 기분 더럽지요. 완전히 인간을 개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이 스가랴 선지자도 환영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언제부터 활동하느냐, 그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하는 것을 왜 말씀드려야 하느냐 하면, 스가랴 선지자가 이러한 신기함과 천사를 언급하는 것은 그 바탕이 역사라는 바탕에서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식으로 인간을 공격적으로 언급을 해버려요. 공격적으로. 공격적입니다.

역사에 미련을 갖고 있는 인간들에게 의도적으로 공격하고 부정하는 쪽으로 스가랴 선지자가 언급을 하지요. 그럼 역사를 제가 이렇게 네모로 그렸는데요. 보통 시간의 흐름은 네모로 그리지 않지요. 뭐로 그리겠어요? 네모겠습니까? 아니면 선이겠습니까? 선으로 그리지요. 선으로. 선으로 이렇게 그어요. 위에서부터 이렇게 아래로. 위에는 과거고 아래로 점차로 갑니다.

그러면 스가랴 선지자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BC 그러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에 BC520년 그때에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역사는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간다. BC520년. 520년 해서 30년 동안 활동해요. BC490년. 자, 위쪽이 과거입니다. 이게 미래에요. BC니까. 숫자를 거꾸로 헤아려 나가니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숫자가 적어져요. BC제로가 되면 예수님시대로 BC제로가 돼요.

여기에 천사를 거론하는 스가랴 선지자가 등장한 거예요. 초친다 이 말이에요. 역사에 대해서 공격하고 부정하고. 역사는 가봤자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거대한 강물인데 나이아가라 폭포 되면 완전히 떨어지지요. 끝이 나지요. 역사도 마찬가지다.

요 이야기가 스가랴가 520년인지 어떻게 아느냐, 스가랴 1장에 보면 다리오왕 2년 8월에(8월하는 것은 지금의 11월 달에서 12월쯤 돼요.) 8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라고 되어있어요. 여기에 스가랴1장1절에 다리오 왕이 나와요.

다리오 왕인데 뒤에 또 다리오 왕이 나왔어요. 이 사람을 다리오 왕1세라고 합니다. 다리오 왕은 BC522년부터 BC490년까지니까, 성경에 보면 2년 후에 스가랴가 드디어 예언을 계시하니까 이게 BC520년부터 시작 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리오 왕이라 하는 것은 이 사람은 천사이야기를 못해요. 천사라 하는 것은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나 천사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학 작가들이 천사를 언급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천사의 실제성을 인간의 실제성보다 천사의 실제성에 관심을 두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 세상은 천사가 일하지, 인간은 일해 봤자 소용없다. 오히려 천사한테 구박만 받는다. 그런 관점이 아니고, 인간 세계가 있고 천사는 뭐 부록으로 넣어주자. 귀신도 있고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고, 그냥 있지만, 별 허락도 없이 뭐 세상 역사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천사는 그냥 왔다, 갔다하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천사를 언급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선지자는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해봤자 소용없고 모든 일은 천사가 다 알아서 한다. 그리고 천사의 배후자는 누구냐, 하나님이 천사에게 지시를 한다. 그 하나님이 지시할 때, 지시하는 내용은 뭐냐 하면 기존에 있던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이 스스로 철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명백성이지요.

너희들이 언약을 위반하고 너희들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방 민족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기로 되어있는 내 백성이 언약을 어겨버릴 때, 언약은 과연 실패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 스가랴가 하는 말이 “인간이 실패한 거 천사가 다 마무리 짓는다. 오히려 인간들은 우리는 실패했네. 우리는 못했네. 우리는 하나님께 멸망해도 마땅하네.” 라는 그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 이제 그런 용도로 자기 이스라엘 유대 나라는 쓰임 받는 거예요.

천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가브리엘 천사하면 얼근 생각나는 게 있을 건데. 어떤 천사지요? 누가복음1장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는데. 요새 같으면 우체부 집배원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어떤 편지나 서신 소식 같은 것을 알려주는 메신지 역할 하는 게 가브리엘 천사에요.

누구한테 오느냐 하면, 바로 세례요한 어머니와 마리아에게 나타나지요. 가브리엘 천사가 엘리사벳에게 등장하고 마리아에게 등장해서 이 복된 여인이여, 니가 하나님의 구세주를 임신했다. 그런 이야기죠. 그리고 사도행전에 천사들이 그 옥문을 연 사람이 누굽니까? 맥가이버입니까? 누가 열어요? 천사가 옥문을 열지요. 요한계시록에는 천사 범벅이로 나오고요. 눈에 안 보인다고 눈에 보이는 인간이 일 다 했다고 하면 안돼요. 주께서는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거든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일을 할 때, 천사를 통해서 사도요한에게 언급을 합니다. 해놓고 막상 요한계시록에서 내려 보면 모든 일은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천사들이 등장해가지고 다하지요. 그래서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천사의 존재도 신기하지만 하는 일도 신기함으로 해서 신기함을 통해서 신기함으로 마감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성도는 무엇이 나와야 되느냐 하면 본인이 한 게 아니고 천사 또는 성령, 하나님이 하신 일이 나오기 때문에 성도의 일상이나 성도의 생활이란, 무엇을 찾는 생활이 되겠습니까?

내가 예상 못하고 하지도 않았는데 어떤 일? 신기한 일이 나오는 것을 보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 이게 성도의 삶이라 하지요. 신기한 일이 나오는 것. 요즘 같은 경우에는 우한에서 얼마나 신기한 일이 나타났습니까. 우한에서 실험실에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나와 가지고 얼마나 신기해요. 지금 미국에서 하루에 몇천명 죽어가고 있잖아요. 죽어가는 사람들 얼마나 살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나도 그렇게 걸려버리면 죽어가고 있는데, 그걸 성도는 죽어간다고 하지 말고 뭐로 봐야 된다고 했습니까? 예상 못했으니까 무슨 일이 되겠어요? 신기한 일이 되는 겁니다.

돌아보면 봄이 되어서 꽃이 피는 것도 신기하지 않을 수  없어요. 사람들은 그걸 대자연이라고 하는데 그 대자연, 대자연하지만 인간들이 주로 관심 두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이 역사지요. 역사. 한진그룹이 주주총회 할 때, 벚꽃구경하는 겁니까. 아니면 다음 차기 총수가 누가 되느냐, 어느 것에 관심 두겠어요? 다음 차기 총수가 뭐가 되겠어요? 그게 역사에 속하는 거예요.

다리오 왕. 다리오 왕 앞에 캄비세스2세라는 왕이 있어요. 그 다음에 나온 왕이 뭐냐 하면 바로 고레스 왕이에요. 고레스 왕. 캄비세스2세 그 위에 고레스 왕입니다. 고레스 왕이 시작된 것이 기원전559년부터거든요. 559년부터 530년까지 통치를 합니다. 29년 동안 통치를 합니다. 559년부터 530까지 하는 이 역사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천사 앞에서는 이런 역사, 연대하는 게 의미 없어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천사 쪽을 어려운 말로 역사의 반대말을 뭐로 보느냐 하면, 묵시라 하거든요. 묵시. 묵시라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는 게 묵시에요. 어떤 지역에 소낙비가 온다면 고 지역 안에서 어느 곳에 있던지 소낙비를 다 맞게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이 묵시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예언이라 할 수 있는데 예언은 시대를 초월해서 어떤 시대든 간에 뿌리고자 하는 그 예언의 말씀은 한결같이 한결 같은 내용으로 뿌려진다는 뜻이 묵시라는 겁니다.

역사의 반대는 비 역사, 반역사이래야 맞는데, 묵시라고 하는 것은 내용을 더 깊이 있게 한 거예요. 역사 반대말은 역사를 반대한다. 가 아니라 다른 식으로 다른 관점으로 봐요. 역사적 지상의 시간흐름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시간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묵시, 예언이지요. 예언 말씀 중심으로서 세상을 보자 할 때는 묵시라서, 역사의 반대를 묵시라 할 수 있다 말이죠.

“지금 몇 시입니까?” 가 아니라 “지금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그리고 그 말씀대로 천사가 어떻게 활동을 합니까?” 에 관점을 두는 것이 묵시다 이 말입니다. “몇 살입니까?” 이게 문제가 아니고 “그동안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이게 묵시적 관점이에요. “실례지만 지금 외손녀가 몇 개월 됐어요?” 이거 그렇게 물을 수도 있지만, 그건 관점이 역사적 중점이고 “그 외손녀가 크면서 어떤 은혜를 누렸습니까?” “처음에는 눕지도 못하고 기지도 못하고 이젠 지가 눕기도 하고요.” 앉아가지고 TV보고 손 흔드는 그런 활동.

그런 활동이 노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속적인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의 묵시적 계획, 예언된, 약속된, 예정된, 계획에 의해서 할 때, 우리는 그걸 보고 뭐냐 하면 신기함. 아이고~ 참, 신기하다. 아이고, 잘한다. 당연하다고 보면 안돼요. 그럼 예상되니까. 신기하다. 참, 놀라워라. 할 때, 그 존재를 하나님의 품으로 넘겨주는 존재로 인식하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성경을 안 보느냐 하면, 역사에 내가 하는 일에 어떤 결과나 목적에 거기에 목을 매달다 보니까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다 까먹지요. 까먹어버리면 신기함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거예요. 신종 코로나 언제 끝나노. 언제 끝나노, 하면 무심코 말한 것이 역사적 관점이에요. 지금도 신종코로나를 통해서 주께서는 은혜를 주시잖아요. 죽을 인간 죽으라고.

이 성경에서 스가랴를 하면서 다리오 왕 2년에 딱 나왔다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와 묵시 또는 인간의 일과 천사의 일이 어떤 차이점을 갖고 성경을 봐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다리오 왕 2년에 BC520년에. 이제 BC빼겠습니다. 520년 그냥.

520년에 스가랴를 통해서 세상은 어떻게 흘러간다는 것이 나타난다. 뭘 통해서 나타난다? 천사의 뭐라고 했습니까? 천사의 활동 활약에 의해서. 자, 천사의 활동, 활약은 무엇을 부정한다고 했습니까? 모든 인간의 노력은 다 헛방이었다. 죄였다. 거짓이었다. 를 고발용입니다. 고발용으로.

인간의 활동을 고발하면서 스가랴 예언이 시작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다리오 왕의 존재는 또 의미가 뭐냐, 그 다리오 왕은 캄비세스2세하고는 별 영향이 없고요. 고레스 왕에게 줬던 게 있어요. 캄비세스2세는 성경에 안 나오지만 고레스 왕은 이사야에 나오잖아요. 이사야에 하나님이 지시한 게 있습니다. 뭘 지시했느냐 하면, 필히 이 백성은 바벨론에 잡혀 간다 에요. 잡혀간다.

잡혀갈 때 이유가 있지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하나님의 묵시적 조치에 의해서 그들은 포로 잡혀가야 되는 거예요.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는 거예요.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면서 그러면 그것이 끝이냐. 아니야! 아니야! 다시 내 백성을 불러 들일거야. 라고 한 거예요.

그 불러들인 것이 바로 BC536년에 불러들여요. 536년에 1차 귀환이 돼요. 1차 귀환. 돌아온다 말이죠. 그런데 포로 잡힐 때는 바벨론의 통치하에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는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 다음 제국에 의해서 돌아오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일단 그 다음 제국을 하나님의 지시에 있었지만, 뜻에 있었지만, 그냥 유대인들을 다시 본국으로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낸다 해서 일단은 착하다고 봅시다.

그러면 이 바벨론은 이건 나쁜 제국이라고 보고. 바벨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잡아 죽이고 포로 잡혀가고 이스라엘 나라를 뭉개버렸으니까 나쁜 제국이라고 본다면 요 다음의 제국은 착한 제국. 잡혔는데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 돌아가! 라고 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요 제국이 뭐냐, 바사제국이에요. 바사제국. 제국이라 하는 것은 왕들이 계속 이어지니까.

바벨론제국은 이스라엘을 포로 잡아가는 그러한 역할 나쁜 역할이지요. 그 다음에 바사제국은 그걸 다시 풀어주는 착한 역할. 요 간격이 몇 년이냐 하면, 70년이에요. 70년. 그런데 바벨론이 그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고 남쪽나라가 BC586년에 포로 잡혀가거든요.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포로 잡혀가면서 예레미야나 에스겔에게 약속하기를 70년 뒤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어요. 70년. 역사적으로 70년.

그러니까 BC586년이 70년 흘러가게 되면 몇 년입니까? BC516년이 되겠지요. 그런데 1차 귀환해서 성전 지으라 하는 것은 516년이 아니고 536년이에요. 20년 차이가 나네요. 586년에 쫓겨 났고 요 틈이 70년이라고 했거든요. 예레미야, 역대하 마지막에 보면 나와요. 예레미야에 약속하기를 70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 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약속에.

그러면 70년 후에 돌아오게 되면 돌아올 때, 바사 나라 제국에 의해서 착한 제국에 의해서, 사실은 착하지도 않아요. 바벨론은 나쁜 제국도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제가 이미지 상 착하다, 나쁘다 했다 말이죠. 이 착한 제국에서 70년 만에 돌아오는 겁니다. 요 70년이 중요해요. 70년. 여기 간격이 중요해요. 간격이.

뭐냐 하면 역사를 중간에 끊어놓고 역사에다가 묵시를 집어넣는 대목이 70년이에요. 이걸 저는 뭘로 보느냐 하면 이걸 ‘기억상실증’이라 해요. 기억상실증. 어떤 남자가 결혼해놓고 갑자기 회사일하다가 차사고 나가지고 쓰러졌다. 쓰러져가지고 10년 뒤에 치료받고 어떤 오지에 가서 치료받고 다시 10년 후에 나타났습니다. 기억나는 것도 있고, 기억 안 나는 것도 있는데. 자기 집에 가보니까 어떤 여자가 있는데 자기 아내인 줄 몰라요. 아내는 자기 남편이라 하고. 애들은 자기 아버지라 부르는데, 자기는 아버지를 자기 자신으로 보지 않고 몰라요. 기억상실증 되어버린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 남자에 있어서의 역사가 중간에 끊어졌어요. 역사가 끊어졌다는 말은 역사가 결국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신약에서 역사가 끊어지는 지점이 있는데 그 지점이 세자입니다. 앞에 첫 자가 십. 그 다음에 두 번째 자가 자. 뭐겠어요? 십자가잖아요.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나의 육의 역사가 기억상실증에 끊어졌고 깨어보니까 육에서 영이 되어버렸어요. 그게 십자가에요. 그게 성령에 의해서 알게 되는 십자가입니다. 성령이 오지 않고 지식으로 아는 십자가는 기억상실증에 안 걸렸어요. 내 역사가 그대로 가버려요. 그런 자기 역사를 계속 고집하는 단체가 있었으니 그게 뭐냐, 구원 파에요.

구원 파는 뭐냐,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물으면서 접근하면서 꼬시는게 구원 파에요. 당신 144,000됩니까? 그건 신천지에서 하는 거고. 교회 다녀야 구원받습니다. 하는 것은 기존교회에서 하는 거고. 전부 다 묵시가 아니고 전부다 그냥 당신의 역사를 지금 과거역사가 이리 되는데 미래도 이 역사 그대로 갈 건데, 좋은 역사 만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걸로 꼬시는데. 이건 성경적 방법이 아니에요.

성경적 방법은 그동안 나를 붙들고 내가 나를 구원하려고 내가 나를 천국 보내려고 그렇게 애썼던 모든 것이 다 헛수고로 끝나는 순간이 와야 돼요. 나라는 인생은 애초부터 끝장나야 될 인생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시점. 그게 바로 나의 죽음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는 거예요.

혼자 자살해서 죽는 죽음이 아니라 진정한 죽음은 예수님과 더불어서 같이 죽어버리면 나의 옛사람은 죽어버리는 겁니다. 나의 육은 죽어버리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죠. 그걸 지금 구약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해봅시다. 586년에 쫓겨나가지고 70년 후에 돌아오면 516년이 되어야 되는데 돌아오기는 이 착한 제국의 시작이 고레스부터 시작이 돼요. 그럼 이쪽에 그 바벨론은 뭐냐, 마지막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 때 잡혀갔거든요. 느브갓네살 이후에 여러 가지 제국이 있는데 마지막 왕이 뭐냐, 벨사살 왕이에요. 벨사살이 언제 망했느냐 539년에 망해요. 539년에 망한다고요.

그러면 고레스는 559년부터 시작해서 530년까지 끝난다 했는데 그러면 559년에도 바사나라 착한나라 고레스 왕이 있을 때에도 바벨론 제국은 아직 안 망했다는 말인가, 안 망했어요. 끝부분에 레임덕인가, 안 망했다니까요. 안 망한 이유가 두 제국이 싸우고 있는 중이니까 망할 뻔하지만, 아직 다는 안 망했어요.

그래서 고레스 왕이 이 제국을 마지막 무너뜨린 것이 539년에 망해버리고 그리고 온전한 주도권이 나쁜 나라 바벨론 제국에서 착한 나라 바사 제국으로 바뀝니다. 그게 고레스 왕이에요. 이 고레스 왕이 하자마자 뭐했느냐 하면, “가라! 너희 집에 가라!” 진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야! 유대인들! 너희 집에 가! 너희 고향으로 가라.”해서 536년에 드디어 거기에 누가 오느냐, 스룹바벨이라는 사람의 총독인데 이 사람의 인도 하에서 포로1차 귀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536년에 귀환하는데 그것보다 약간 3년 앞에 539년에 에스라가 먼저 3년 앞당겨서 자기 고향으로 와요. 에스라는 선지자가 그렇게 하는데. 그건 딴 문제니까. 여기서는 스룹바벨이 옵니다.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586년에 와서 536년 같으면 이게 몇 년 차이에요? 50년 만에 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니까 성전 짓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예언에 70년 만에 온다고 했는데, 이거 뭐 잘못되지 않았는가, 그리 생각하는데. 이게 성전을 잘 짓다가 에스라, 느헤미야에 보면 성전을 방해 공작, 그 가나안 땅에 있던 사람들이 질투심에 의해서 방해 공작을 해가지고 20년 가까이 성전을 못 지어요. 그리고 성전을 언제 짓느냐, 516년에 지었습니다. 그 말이 맞아요. 586년 이후에 70년 만에 516년 그 때는 뭐냐 하면 바로 다리오 왕 때에요. 다리오 왕 때에 드디어 성전이 완공이 됩니다. 완공이 되는데 나중에 또 성전 또 방해해가지고 또 그 뒤에는 느헤미야 시대 때가 와요.

그 다음에 왕이 아하수에로왕이 그 때는 전에 우리가 공부했잖아요. 에스더. 에스더 시대에는 아하수에로왕이에요. 그 뒤에는 483년 에스더가 있고, 그 뒤에는 예레미야가 나오는데. 그건 나중 문제고.

지금 여기서 봐야 될 것은 성전을 짓는데 방해공작으로 성전을 못 짓는다 말이죠. 성전을 지으라 했잖아요. 자, 다시 봅시다. 처음부터 다시 봅시다. 스가랴가 언제부터 했지요? 520년이지요. 520년이니까 이건 성전 짓기 시작했는데 성전이 다 지었을 때에요? 중단되었을 때에요? 중단 되었을 때 성전을 재건해야 될 촉구하게 되는데 촉구할 그 시점에 선지자가 두 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학개 선지자. 스가랴 선지자. 학개 선지자도 520년부터 505년까지 15년 동안 활동하는데. 학개 선지자는 노골적으로 성전 지으라고 이야기하고. 스가랴는 성전을 지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성전을 너희들이 안 짓고 있는 그 마음자세가 너희들이 옛날 포로 잡힐 때 마음 자세하고 똑같다. 틀려먹었다 이 말입니다.

너희들이 성전이 중단되어서 빨리 지어야 될 텐데 그들은 하나님의 옛날에 포로 잡혀가기 전에도 말씀을 신경 안 쓰고 말씀도 관심 없는 거 마찬가지로 성전 지으라고 다 깔아줘도 안 짓고 있는 거예요. 저 사람들이 막 방해 놓는다고. 성전을 안 지으니까 학개는 성전 지으라고 촉구하고. 노골적으로. 적극적으로.

스가랴는 뭐냐 하면, 그래, 너희들 마음가짐이 그것밖에 안되니까 장차 올 성전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된 성전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해 버려요. 자, 이렇게 보니까 어떤 점이 중요하냐 하면 이 간격이라는 것. 아까 16년 동안 못 짓게 된 이 간격. 뭔가 틈. 여기에 이스라엘 역사가 죽 되다가 70년이란 간격. 이 간격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기억상실증. 역사라 하는 것은 연속적이에요. 끊어짐이 없어야 돼요. 역사란 항상 촘촘히 이어져요. 촘촘히 이어지는데 그게 촘촘히 이어졌다고 해서 그게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진짜 촘촘히 이어지다가 중간에 누가 개입해야 돼요. 이게 카이로스라 하는데. 급작스러운 사건. 다른 어떤 이 역사를 두 동각 끊어버리는 잘라 내버리는 이런 일이 벌어져야 돼요.

자, 역사가 있다는 것은 곧 내가 살아있다는 거예요. 역사의 주인공이 나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뜻이고, 역사가 끊어졌다는 말은 누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내가 죽었다는 말이에요. 십자가는 모든 역사의 마감이 십자가에요. 십자가 앞에 죽으라는 말은 니가 살아온 모든 인생은 여기서 끝! 아무리 훌륭하고 착하고 거룩하고 성화되고 신앙생활 잘해도 다 끝! 다 소용없어요. 다 끝이에요.

끝이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요. 누가 한다 했습니까? 아까 배웠지요. 스가랴에서 누가 합니까? 인간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가 하고 스가랴는 천사가 하고 신약에 오면 성령이 일을 하시고.

그러면 우리의 몸은 뭐가 되겠어요? 하나님의 성령이 일하시는 지은 집을 뭐라고 하지요? 두 자로. 성전, 템플이라고 해요. 성전.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성전이 된다는 것은 고린도후서에도 나오고, 고린도전서에도 나오지요. 성령이 임한 몸이 성전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성전이 너희 몸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니까 너무 생뚱맞지요. 너무 논리적인 비약 같은 걸 느끼지 않습니까. 성전이 거기서 왜 나와. 성전 용어가 갑자기 거기서 툭 튀어나왔다 말이죠. 고린도전서3장 같은 경우에.

고린도전서3장 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고린도전서는 간단히 되어있지만, 고린도후서6장에 보면 길게 되어있어요.

고린도후서6장15절,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리 되어있다 말이죠. 사람을 가지고 코나 눈 해부해가지고 심장, 콩팥 따지는 것은 역사적인 거예요. 인간이 하는 일은 인간이 집중하니까.

보자, 인간은 어디서 병이 났지? 내가 한번 해부해볼까. 아, 여기 십이지장이고, 창자고, 대 창자, 소 창자, 요건 간이고 쓸개고, 이렇게 눈으로 목격하는 거 그걸 통해서 인간을 알 수 있습니까? 두뇌를 보자. 두뇌를 쪼개가지고 요것은 신의 영역이고, 요거는 운동의 영역이고, 이거는 냄새 맡는 영역이고. 이거는 숫자를 계산하는 수학적인 영역이고, 이것은 문학하는 영역이고, 음악 하는 듣는 영역이고, 이건 걷는 영역이고, 현재 뇌 과학자들은 뇌를 쪼개가지고 전부 다 그런 식으로 각 파트별로 국지적으로 그렇게 분류를 하거든요. 그러면 그게 인간입니까?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이라는 거예요. 육.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성경은 신기함으로 시작해서 신기함으로 말미암아 신기함으로 끝나야 된다고요. 내가 내 자신을 볼 때 신기한 것이 나와야 된다 말입니다. 그걸 느껴야 되고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러면 신기함은 어떻게 나온다 했던가요. 아까 이야기했는데.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내가 기대하지 못한 그런 것들을 우리가 찾아가고 늘 그걸 발견하는 기쁨이 성도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같이 살면서 또 애들과 살면서 왜 애들이 갓난아기 일 때는 귀엽잖아요. 4살5살 되면 까불어도 이쁘지도 않는데 왜 자꾸 애들을 보고 귀엽냐하면 애들은 하루, 하루가 신기한 게 나와요. 그래서 동영상 사진 찌고 흔들고 좀 있으면 기게 되고. 아이고~ 기는 거 봐! 또는 아이고~ 서는 거 봐! 모든 게 그 변화 조짐이 굉장히 강렬하잖아요. 그래서 애 낳고 또 애 낳고. 계속해서 애 키우는 재미가 있다는 거예요. 애 키우는 재미가 났겠습니까? 치매 걸린 어른 모시는 게 낫겠어요? 어른들은 갈수록 냄새나고 신기한 게 없어요. 진짜 빨리 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요.

사람도 살아가면서 사는 보람의 행복이 신기하고 짜릿하게 새로운 것을 찾는 것처럼 그런 새로움은 바로 스가랴 천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 자신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이 드러나는 거. 그걸 선지자가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10분 쉽시다.

 

 공은주  (IP:175.♡.135.128) 20-05-01 10:14 
안양20200416b슥1:3(신기함)-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 천사의 실제성과 인간의 실제성 그 둘 다 언급하면서 경쟁관계에 놓여있어요. 내가 실제냐, 아니면 천사가 실제냐. 내가 너무 실제성이 강해버리면 천사의 존재는 허구가 되어버려요. 그건 동화책에 나오는 실제로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그것이다. 라고 생각하지요.

의자 하나 옮긴다던지 난로 옮긴다고 할 때, “천사님! 옮겨주세요. 도와주세요. 뽀빠이.” 하는 식으로 한다고 해서 난로 옮겨지는 게 아니잖아요. 힘을 써야지요. 우리가 근육적인 힘을 길러가지고 난로를 옮긴다 말이죠. 그러면 아까 첫째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바울과 실라 또는 베드로하고 그 일행이 옥에 갇혔을 때에 누가 옥문을 열었습니까? 누가 옥문이 열리도록 지시를 내려줬습니까? 베드로 같은 경우는 옥문을 열었고, 바울과 실라는 지진이 일어났거든요. 지진을 누가 일으켰어요? 지진을. 누가 지진을 일으켰느냐, 에요. 천사지요.

그러면 왜 인간들은 평소에 난로 옮기는 거 이렇게 힘쓰고 농사짓는 거, 다 내가 했지 나는 가만히 있는데 천사가 와서 전부 다 밭을 갈아주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에 아까 간격이라는 말을 했는데 끊어짐, 단절. 인간의 역사가 진행하다가 끊어지고 난 뒤에 여기에 주님의 일이 본격적으로 개시가 되는 것처럼 예언은 그렇게 이야기되는 것처럼 예언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인간의 역사가 끊어진다는 사실을 인간은 믿지도 않을뿐더러요, 왜? 끊어져도 그 다음에도 시계는 째깍 째깍 가고 있으니까. 하늘의 시계. 해와 달과 별의 시계 가고. 실제 손목시계도 가고 있으니까. 이걸 안 믿었지요. 그리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일이 온 사람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전에는 내가 농사지은 저거조차도 주께서 힘을 주신 힘으로 농사지었다는 것을 알고, 내가 숨을 쉬는 것과 내가 길을 걷는 것도 주께서 힘을 주셔서 살아왔다는 것을 뒤늦게 소급해서 그걸 아는 거예요.

참,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참, 어려운 이야기이죠.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이렇게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단절됐음을 이야기해도 그래도 시간은 흐르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냐, 여기서 여기까지 끝이라 해도 시계는 째깍 째깍 가고 있으니까 시계 중에서 제일 큰 시계가 해와 달과 별이에요. 창세기1장에 나와요. 원래 시계라 하는 것은 해와 달과 별에 맞추어서 그렇게 시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해시계. 물시계 다 그런 거잖아요. 자연자체가 시계 역할을 한다고요.

시간이 멈춘다는 말이 인간들은 이게 진짜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시간이라는 것은 객관성을 지니고 이게 흐르느냐, 안 흐르느냐 이게 문제가 아니고
누굴 위한 시간이냐. 누구 중심이냐. 누구 중심으로 시간을 의식하느냐,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시간을 의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주의 언약적인 일 중심으로 시간이 진행하게 되어있어요.


언약을 언약답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의 시간이 끊어져야 되지요.
인간중심의 시간이 끊어지고
그 다음의 시간은 흐르는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의미가 없어요. 무의미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십자가 자체가 종말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아무리 연도가 2000년, 3000년 돼도 그건 의미 없습니다. 라고 말을 해도 이 의미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베드로후서3장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이렇게 했는데 이게 또 무슨 뜻이냐 하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이것은 이미 모든 것이 종말 체제에 들어가 버리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이것은 예수님 중심에 시간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의 시간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중심의 시간이란 말도 이건 잘못됐어요. 사실은 이렇게 해야 돼요. 예수님의 중심의 시간이라 하지 말고 이걸 합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까 했지만, 묵시라 해야 돼요. 묵시. 하나님의 예언의 세계 또는 말씀의 세계에요. 관심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관심사가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는 그 다음부터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몇 년 됐느냐, 여전히 관심이 옛날에 내가 인간들이 인간중심으로 시간을 관심 두는 측정하는 방식 그대로 예수님 중심에도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몇 년 됐나, 예수님 몇 년 그거 의미 없다니까요.

예수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가 지금 어떻게 작용하느냐, 이게 중요한 겁니다. 어떻게 작용하느냐, 기능하느냐, 예를 들면 성도에게는 예수 믿고 난 뒤에 몇 년 더 사는가, 성도한테는 이게 해당이 안돼요. 왜냐하면 성도라 하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 그리스도가 죽었기 때문에 그 안에 사는 것은 성도 본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 안에 살고 있거든요.

빌립보서1장에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까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왜냐하면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라.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 빌립보서1장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주님께서 “그만 됐네. 죽으라.” 하면 죽는 것도 주님한테 유익이 된다면 그걸로 오케이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몇 년 살았고, 십자가를 알고 난 뒤에 내가 목 베어 죽으나 사형당해서 죽으나 교통사고로 죽으나 연탄가스 중독에 죽으나 그냥 늙어죽으나 폐렴 걸려 죽으나 그건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것은 내 것이 아니라 값을 주고 산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몸을 어떻게 굴리느냐, 그것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굴리고 있는 나는 어떻게 되는데? 라고 그렇게 신경 쓰면 안돼요.

그래서 이미 십자가에 있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이미 천국이라 보면 돼요. 천국이 뭡니까. 주와 함께 사는 생활이 천국 아닙니까. 사도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자기 목숨 아까워했습니까? 스데반집사가 성령 충만 받고 난 뒤에 저 쪽에서 돌 던지니까, “돌 던지지 마세요. 살고 싶어요.” 그랬습니까? 당신들 세계에서는 돌을 던지면 아파서 근육 터져가지고 세포가 활동이 정지되어 죽는다는 것이 당신들 너희들에서는 그게 굉장히 무섭고 공포스럽고 의미 있는 줄 모르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한테는 이게 의미가 없다 이 말이에요. 왜 더 기쁨이 있기 때문에.

따라서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지금 성도의 상태가 어떤 상태냐를 알리기 위해서
바깥에서 성도가 되지 못한 인간들이 자기 세계를 유지하면서 공격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신다. 그리 보면 됩니다.


자, 성도의 세계는 어떤 세계냐, 스데반집사가 어떤 세계냐 하는 것을 성령을 받지 않은 유대인들이 짱돌을 들고 때려 칠 때 그들 입장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냐 하면 죽는 게 제일 무서워요. 죽으면 안 무서운데 죽는다는 이 생각이 무서운 거예요. 왜? 평생을 살아오는데 열중했기 때문에. 죽음이라 하는 것은 살아오는데 열중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은 거기에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버티고 있는 내부에 힘이 있어요. 그게 악마의 힘인데.

악마의 힘은 계속 더 살게 하지도 못하면서 계속 뭐라고 하느냐 하면, 더 살아야 돼! 살아야 돼! 니가 살면 살 수 있고, 죽으면 죽는 거야. 이런 식으로 악마가 이야기해왔다 말이죠. 그 악마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한테 죽음이 부들부들 떠니까 자기에게 무서운 것도 성도한테도 무섭다고 착각하고 오해한 거예요. 그래서 짱돌 들고 때려 친 겁니다. 

그래서 스데반집사는 죽었지요. 죽으니까 누가 나타났습니까? 성도는, 스데반집사는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그렇잖아요. 이게 성도의 위상입니다. 위상. 현재 처지 형편이에요. 형편. 이런 형편에 있어요.

그럼 우리는 왜 이걸 못 느낍니까.
성령의 충만함이 없으니까 이걸 못 느끼는 거예요.
세상 자기 역사에다가 자기 하는 일에 충만하다보니까 이 성도의 충만함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에베소서5장에 보면 성령 취함을 뭐에 비유하느냐 하면, 술 취함에 비유해요. 술 취함. 술을 안 먹어봤겠지만, 술을 이렇게 취해버리면 기분이 회롱 회롱 좋아져요. 여기가 천국인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늘 인위적으로 천국을 만드는 방법은 술 처먹는 방법밖에 없어요. 술 먹는 게 아니고 술 처먹는 방법밖에 없어요. 술 처먹으면 인위적으로 그게 천국이 돼요. 술로도 안 된다. 그러면 마약 해야지요. 약해야 됩니다. 프로포필그거 하지요.  그게 천국인 거예요. 모든 고통이 없어지고요. 헤로인 같은 거 하지요.

성령 취함을 술 취함으로 비유한다고요. 둘 다 공통점이 뭐냐 하면 자아를 놔버려요. 그럼 성령이 충만하지 않다는 것은 자기가 너무 의식될 때, 자기가 자기 사수 방어에 나갈 때, 성령 충만이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간격 때문에. 첫째 시간에도 강조했습니다만, 이 간격이라는 것. 크게 쓰겠습니다. 이 70년 간격. 그러니까 16년 동안 성전 건축이 중지된 그 간격. 시간의 간격. 역사와 묵시사이의 간격. 이걸 가지고 고난이라고 합니다. 고난. 같은 말이 뭐냐 하면 고통이지요.

스가랴 선지자는 무엇을 품고 있는 사람인가 하면 바로 이 간격을 품고 있는 사람이에요. 고난과 고통.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고난과 고통에 합류되어 있는 사람.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도 같은 인간이기에 백성들의 고난과 고통에 합류되어있는 사람이 스가랴에요.

그러면 고통 받는데서 다른 백성하고 똑같잖아. 다른 것은 뭐가 있느냐, 다른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선지자는 고난과 고통만 있는 게 아니고 뭐도 있느냐,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의 계시 또는 언약, 예언, 이것이 함께 있어요. 고통가운데서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고통 없이, 고난 없이 말씀 전하는 게 아니고 고통 가운데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반드시 어떤 예를 들 때는요, 선지자의 예를 들 때는 선지자를 제대로 못했을 때의 예가 확실히 다가와요. 선지자이면서도 도망친 선지자 있지요. 이름이 요나지요. 요나가 니느웨성에서 하나님이 지시를 했는데 하나님의 지시를 안 따랐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하고 도망친 이유가 뭐겠어요? 자기한테 말씀이 있고, 계시 있고, 언약이 있고, 하나님의 예언이 있잖아요. 이건 있는데, 무엇을 거부한 거예요? 백성들의 고난과 고통을 거부하고 자기는 산 위에서 그냥 이 니느웨성 망하라고 관람자, 구경꾼으로 있는 거예요. 구경꾼으로.

지난 주 수요일이지요. 수요 설교에 수영강사 이야기했잖아요. 수영강사 이야기가 자기는 수영복을 입고 물속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수영 배우러 온 아줌마들은 집에서 홈드레스 입고 노트하나 들고 와가지고 이론 한다 했지요. 그들은 물에 뜰 마음이 없는 거예요. 자기는 고통과 고난 속에 들어갈 마음이 없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이론상 배우고 싶은 거예요. 어떻게 해서 내 죄를 용서 받는가. 머리로 지식으로 이해하겠다는 거예요. 이론적으로 지식이 되어서 지식으로 그 다음에 지식을 현실화 시킬 때는 나의 윤리성과 나의 도덕성과 나의 착함과 나의 양심에 호소해서 성경 말씀이라는 이 이론을 실천을 실천해 보겠다는 거예요. 이건 지금 어디에 어긋납니까? 나의 실천과 나의 윤리, 도덕에 치중하면 이걸 뭐라고 했지요? 이걸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역사지요.

그런데 스가랴는 지금 뭘 이야기하는 겁니까? 역사의 반대. 묵시를 이야기해요. 묵시는 본인이 하는 거예요? 천사가 하는 거예요? 천사가 하지요. 오늘날 누가 합니까? 성령님이 하시지요. 스데반 집사가 돌 날아올 때, 이참에 순교하겠다고 지가 노력했습니까? 돌 날아오니까 일부러 들이박았어요? 그렇지 않았지요.

그건 천사의 몫이고, 그건 성령의 몫이에요. 순교하려고 나대는 것도 그것도 행함입니다. 그것도 불신앙이에요. 제가 어느 댓글을 쓴 게 있는데. 오기가 불신보다 난감하다고 했습니다. 천당가려고 막 오기부리는 거예요. 자기 조정하고. 난감하네. 이게 난감한 지경이에요. 차라리 안 믿으면 되는데. 기어이 믿지도 않으면서 자꾸 어떤 자기한테 자기 자신을 자꾸 다독거리고 채찍질하고 때리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천지에서 무슨 훈련합니까? 겨울에 뭐해요? 훈련하지요. 산악훈련. 몰라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게 오기라니까요. 오기. 일반 교회는 안하는 줄 압니까? 부흥회 한다고 해가지고 금식하고. 그렇게 하게 되면 이게 바로 그것이 유대인이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였어요. 망하는 이유.

신기함이 없이 자기가 신기함을 조장해 내려고 하는 거예요. 신기함을 자기의 행함으로 집중시켜가지고 정신일도하사불성이다. 정신이 하나가 되면 못하는 게 없다는 그런 정신에 의해서 자꾸 신기한 성령의 일을 지가 뽑아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이건 신앙이 아니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극기 훈련이라 합니다. 극기 훈련. 그러나 이게 있는 신기함이 있는 스가랴는 선지자는 뭐냐 하면 고통과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 말씀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고통이라는 게 뭐냐, 이 고통이라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고통에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선악체계에서의 고통이라는 것은 나에게 해로운 것이 고통이에요. 병이 든다든지. 신종코로나 든다든지. 내 돈을 누가 사기를 쳐서 내가 부도를 난다든지. 내게 스트레스가 되는 그러한 불행이 일어난다든지 이걸 고통이라 해요. 어떤 심리학자가 인간의 고통의 치수를 죽 재봤어요. 어떤 때 가장 심적으로 아프냐 해보니까 제일 큰 게 뭐냐 하면, 바로 배우자의 죽음이었습니다. 배우자의 죽음. 수치가 나와 있어요. 온갖 것 다 있지요. 직장 잃은 것. 짤린 것. 시험에 떨어진 것. 아들이 아픈 것.

제일 아픈 게 배우자의 죽음. 이것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이 중에는 밑에 가면 이혼도 있지만, 이혼보다 더 아픈 게 배우자의 죽음이었어요. 그러니 노인네들 배우자 죽고 난 뒤에 치매 걸리기 쉽지요. 선악체계에서, 선악체계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현재 인간들이 느끼는 고통은 뭐냐, 나에게 해로운 것이 고통이란 말이죠.

그런데 생명책에 다시 말해서 선지자의 고통은 뭐냐 하면 백성들이 언약을 위배하는 것. 위반하는 것. 언약을 아주 개무시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성경 말씀을 무시하는 것. 이게 가장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 언약을 무시해도 잘만 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말이죠. 떵떵거리면서. 온 가정이 하하 호호 밤마다 저녁마다 웃고 행복이 넘치는데 그런데 그 가정에는 복음이 없어. 언약이 없어. 이게 선지자의 고통인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음악 성악 하는 사람인데 돈을 사기 당했어요. 104억 사기를 당했어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 사람 결혼도 안했기 때문에 배우자 죽은 건 없지만. 얼마나 고통  당하겠어요. 그러나 성도가 보기에는 뭐가 고통인가, 104억 사기 당해도 복음을 몰라. 이게 더 고통스러운 거예요. 자, 그러면 선지자에게는 고통과 계시가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약속이 있다고 했지요. 그럼 제가 첫째시간에 선지자 안에 누가 들어있다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다 했지요.

그러면 이 고통과 계시가 실제로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이 누구였지요?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언약을 위배하는 그 고통을 품고 이 땅에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그 전에 오신 사람들이 선지자고.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난 사람이 성도고.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세상적인, 선악적인 고통, 그러니 나, 나 중심. 내가 절대자 되어야 되는데 그게 뭔가 방해가 된다. 이것 때문에 고통 하는 스트레스가 아니라 정말 성도한테 근심은 사도바울에게 근심이라 하는 것은 너희가 복음을 거부하는 게 고통이고 근심이 된다. 그리 이야기해요. 선지자에게 이런 계시가 고통이 있습니다.

그 다음 문제. 고통이 있는데, 그러면 이 고통은 누가 당하느냐, 이게 중요해요. 고통은 누가 당하느냐,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자,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을 위반한 그 자체가 고통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건 구원받은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지금 포로 잡혀서 고통당하고 지금 못 먹고 살아서 남의 나라 쫓겨 가서 고통당한다는 것은 이건 이스라엘 아닙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가 외치고 외치면서 찾고자 하는 대상자는 누구냐 하면 진짜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언약을 처다 보면서 언약을 위반한 당사자가 우리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언약의 연속성에 의해서 우리가 언약을 위반한 우리마저 죄를 용서해주시고 다시 언약백성으로 삼아 주신다,
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위하여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남은 자가 되고 이걸 스가랴에서 순. 봄 되면 가지에 매끄러운 가지에 갑자기 볼그스름하게 연두색 순이 올라오지요. 그걸 순이라고 해요. 순. 순 난다. 순으로 유명한 것이 옛날에 CCC. 순조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봄철에 순 올라오는 것. 이게 스가랴에서 따온 거거든요. 남은 자에요. 남은 자. 렘넌트! 남은 자.

남은 자라는 말은 현재 이스라엘이 포로 잡혔다고 다 구원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 속에 추가된 계시. 선지자를 통해서 추가된 이 계시 고통에 합류하는 사람만이 장차 구원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다고 해서 지옥 가는 건 아니에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간다고 모세가 지옥 간 거 아니잖아요. 변화산에 나타난 거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어떤 기능을 할 때, 그 역사적으로는 기능이 일어나요. 하지만, 그 기능 속에서 그 시대 속에서도 자기가 범죄한 가운데서 제대로 언약의 중요성.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자기 약속을 통해서 반드시 모든 것을 이 세상 우주 질서를 유지하시고 마지막도 언약의 완성으로서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만든다는 것을 관심 있는 사람은 비록 그 사람이 범죄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선지자라고 해서 완전하지는 않으니까요. 선지자 노릇했다고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그도 자기 죄를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신 것은 어떤 인간도 의인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의가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안 되지요. 그래서 제가 다시 하겠습니다. 고통은 누가 당하는가, 포로 잡혔다고, 살기 힘들다고 고통당하는 게 아니고 언약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의 고통이기 때문에 스가랴와 같은 고통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스가랴의 말씀에 대해서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겠지요. 하나같이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지적해 주는 그 말씀이 굉장히 고마운 겁니다. 고마운 거예요.

자, 그러면 스가랴에서 추가된 예언이 뭔지를 한 번 들어봅시다. 3절 봅시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게로 돌아오라. 적어볼게요. 내게로 돌아오라. 이 말은 여전히 줄이 이어져있다.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이 하나님과 너희들 사이에 여전히 줄이 이어져있다. 그 이 줄이 뭐냐 하면 이게 언약이죠. 너희들이 범죄 했다고 언약마저 끊어진 건 아니다. 이 말이에요.

내가 죄 지었다고 주님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관심사가 내 죄 지은 거 생각하지 말고 끊어지지 않는 언약에 관심을 두는 자가 주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그러면 언약이 끊어지지 않았다. 끊어지지 않았다. 역시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역사적으로 아니면, 묵시적으로 어느 게 정답이 되겠습니까. 묵시적으로 끊어지지 않았어요. 왜? 역사적으로 끊어져버리면 아까같이 교통사고 나서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든지 교회 다닌 기억도 없어. 성경은 물론 성경은 하나도 모르고. 두뇌에 충격 받아가지고. 치매에 걸린다든지.

또 그런 거 아니더라도 설교 말씀을 하는데 잠이 온다던지 딴 생각해버리고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끊어져버리면, 역사적으로 끊어지거나, 이런 것을 문제 삼는 거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치매에 걸린다 할지라도, 나, 치매에 안 걸려야 구원받는다고 자기 역사적인 존재에 대해서 신경 쓰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나는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돼! 라고 자기 싸잡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성도는.

성도는 뭐냐 하면 나는 애초부터 개판이고, 기대할 것도 없고,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주님의 묵시적 언약, 하나님의 약속, 십자가밖에 없음을 이게 성령을 통해서 이렇게 가능한 거예요. 성령이 없으면 자꾸 예수 믿는 자기 자신에게 자기 자신을 싸잡고 그걸 관리하려고 한다. 말이죠. 성령 받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그래요. 자기 관리에 급구해요. 자기 관리. 내 행동을 어떻게 똑바로 관리하느냐 그거에 신경 쓰고 있다니까요.

돌아오라는 말은 줄이 연결되어있다. 아직 돌아가고 돌아오는 연결이 아직도 유효하다. 파이프가 남아있다 이 말이지요. 그 다음에.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돌아오고 돌아가는 그 관계가 그 루트는 아직도 안 죽었다. 이 말이거든요. 스가랴 선지자가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점을 구약 유대인들이 알아서 유대인들이 제일 겁을 내는 게 뭐냐 하면 우리 가운데 선지자가 없는 걸 제일 겁을 내요. 유대인들이. 선지자가 없는 것. 그러니 세례요한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반가워했다고요. 선지자가 끝나는 것이 말라기가 마지막 선지자인데 BC415년에 끊어져요. 다리오2세 시대인데, 아직 바사나라 시대에 있어요.

그래서 모든 선지자는 착한 제국, 바사나라에서 모든 선지자는 거의 마감이 돼요. 그 다음에서는 없어져요. 바사나라 그 다음에 헬라나라 되는데, 그 때는 선지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라기가 마지막 선지자에요. 말라기는 BC435년부터 BC415년으로 20년 동안 활동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말라기 끝나고 부터는 더 이상 선지자 없어요.

우리 가운데 선지자 나타나기를 유대인들이 굉장히 기대했어요. 선지자 나타나야 그 다음에 그 뒤에 메시아 오기 때문에. 그래서 세례요한이 먼저 자기가 메시아 오기 전에 선지자라고 세례요한이 자기를 그렇게 소개해요. 나는 소리다. 장차 뒤에 오실 메시아가 오실 소리다. 참, 신기해요. 그 분은 나보다 뒤에 오지만, 실은 나보다 앞선 자다. 이리 하지요. 역사보다 묵시가 앞선다는 뜻이에요. 역사적으로는 내 뒤에 나이가 적지만, 사실은 그 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이렇게 소개하는 겁니다.

인간의 시간의식으로서는 참 듣기 민망할 정도로 굉장히 황당하지요. 원래 이 성경말씀이 황당해요. 제 정신으로서는 이해도 안 되고 믿을 수도 없어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선지자가 없는 것이 가장 공포스러운 이유는 바로 이 선지자의 예언이 인간들에게 구원받을 희망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구원받을 희망이라고 제가 언급했는데요. 구원받을 희망이라는 말은 그 전부터 자기가 구원에 대해서 뭐 알고 있다고 지금 자부하는 자에게 해당되겠지요. 줄곧 구원받았는데 뚝 끊어졌다. 뚝 끊어졌으니까 끊어진 이 상태. 이 상태에서 지금 구원을 희망하는 거예요.

아까 스가랴 말씀 전한 게 언제라고 했습니까? BC520년이지요. 성전은 언제 건축되는가, 516년부터 건축되지요. 아직까지 여기는 성전이 완공이 안 된 상태에요. 방해공작 때문에. 성전이 완공이 안 된 상태에요. 학개는 성전 지으라고 촉구를 해요. 그러나 스가랴는 역사의 지평 말고, 역사의 끝을 바라보고 있어요. 역사가 끝났을 때에 그 역사는 누가 만드는가, 누가 인도하는가, 누가 주도하는가, 천사들이 주도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스가랴가 돌아오라. 돌아오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갈게. 라고 했을 때에 그 주체가 돌아오고 돌아가는 그 주체는 누구 손에 달린 겁니까? 인간들 손에 달린 게 아니고 누구 손에 달렸어요? 성신 또는 성령, 천사 손에 달린 겁니다.

4절에 봅시다.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날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날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라, 아~~ 이게 참 어려워요. 이게 어렵다고요. 옛날 선지자들이 선조에게 이미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은 그걸 안 들었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들이 참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이야기에요.

사람은 항상 지난주 수요일에도 이야기했지만, 현재만 보고 있거든요. 현재만. 현재만 보기 때문에 현재 자기가 뭔가 선택하고 결정할 때는 그냥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이건 나는 잘못된 선택이야.’ 이러지 않잖아요. 그 많은 선택 중에서 옳은 선택이다. 옳은 선택을 선택해요. 옳은 선택을, 옳은 결정을 한다고요. 그러면 본인이 하는 것은 결코 이게 악한 일이 아닙니다. 악한 일이 아니에요. 자기는 옳은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고, 반듯한 일이라고 자부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뭘 아느냐, 과거에 체험이 있고 과거에 경험이 있고, 거기서 얻은 정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과거에 자기가 했던 것을 그걸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근거로 해서 가장 정답, 가장 옳은 것을 정답으로 결정하고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이렇게 모든 인간이 현재만 보기 때문에 그렇게 삽니다. 현재를 본다는 말은 현재에 주어진 환경과 상황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이 그렇게 몰아간 거예요.

예를 들면요, ‘아, 요새 나 라면 먹기 싫어.’ 이거 뭔 뜻이에요? 라면 먹는 거 말고 다른 선택지가 많았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군에 가가지고 한 일주일 굶었다. 그런데 누가 어디서 라면 끓이는 냄새가 난다. 그때는 가장 옳은 결정이 뭐냐 하면 라면 먹는 거예요. 왜? 그렇게 맛있으니까.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나 옛날 욕 얻어먹는 선조들이나 전부 다 그 시점에서는 환경과 상황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몰아세운 겁니다. 어떻게 몰아세웠습니까? 악한 일을 하도록. 이게 무슨 기능이냐, 이게 바로 율법적 기능이에요. 악한 일을 하도록. 선한 일에서는 인간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큰 글자로 쓸게요. ‘최선을 다했다.’ 나름.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최, 해놓고 뒤에 하는 말이 악이에요? 선이에요? 선자지요. 나름대로 옳은 일을 했다는 거예요. 나는 최악을 다했다. 이런 사람 없지요.

어떤 가훈에 보면, 액자에 보면, 최선을 다하라. 이런 거 있잖아요. 가훈에 최악을 다하라. 이런 거 없다 말이죠. 그런데 최선이 결국 자기는 뭘 몰랐어요? 최선이 뭐다? 최악이라는 사실을 모른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세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옛날 언약을 율법이라 해요. 율법. 내가 예수 믿는다. 그러면 그건 최악이에요. 최악입니다. 진짜 신앙은 이건 뭘로 이해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되지, 내 결정으로 이해된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꾸 믿으려고 하는데 안면 받쳐서 믿어주지요. 같은 가족끼리. 또는 아는 사이에 또는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혹시 또는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눈빛을 보이니까 믿어라. 예,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놓고 그게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은 신비로움이에요.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이걸 믿다니! 오히려 본인이 믿음에 신기해야 돼요. 본인이 본인의 믿음에 신기하다는 말은 본인의 남은 일생도 어떤 일생이겠습니까? 신기하고 가볍고 고맙고 감사한 일생이에요.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진짜 신기해요. 니를 만나서 내 팔자 조졌다. 물어내라. 이게 아니고. 모든 결정은 최악입니다. 최악이 되어야 돼요. 모든 결정은 최악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이미 범죄 했기에, 죄의 이유를 몰라요. 죄는 짓는데 왜 내가 죄를 짓는지를 이유를 몰라요.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뭐냐 하면 자기가 죄를 뭐로 보느냐, 최선이라고 그렇게 포장하고 변명하고 핑계대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이 최선들이 모아서 집대성되어서 이걸 하나로 집대성해서 모든 것을 집대성해서 그 하나의 힘으로서 모아졌는데 여기에 최악이라는 것을 드러난 증거가 뭐냐 하면 바로 누가 죽었어요? 예수님 십자가 피 흘려 죽지요. 예수님이 피 흘려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 죽은 것이 이방민족에게 몽골사람에게 죽었습니까? 일본 사람한테 죽었습니까? 어디 로마사람한테 죽었습니까? 누구한테 죽었어요? 바로 유대인들에게 죽었지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은 뭐가 있다고 자부합니까? 하나님의 언약, 율법, 약속이 있다고 하지요. 율법이 있는 유대인에게 있는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은 살해당함으로서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보고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악마의 정체는 십자가 앞에서만 드러나요. 십자가 빠져버리면 악마의 정체 안 드러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왜 모든 최선이 최악이냐, 그것은 십자가가 드리댐으로서 비로소 알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은 의로움이 없는데 자꾸 의롭다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어떤 것도 자기 행함에 대해서 어떤 혜택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뭘 잘했다고 하나님께 달라고 해요. 주는 것도 오감인줄 알아야 되지요. 그래서 여기 말하기를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했는데 그 열조들이 그냥 바보들이고 병신들이 아니에요. 나름대로의 자기의 과거에 축적된 정보와 체험, 경험, 지혜, 이런 것들을 총동원해서 지금 옳다고 생각해서 결정 내렸는데 스가랴 보기에는 그게 뭐가 되었다? 그들이 언약을 위배해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야기한 악한 일이었다. 라고 결론 내린 겁니다. 누가? 스가랴. 스가랴 본인 뜻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요.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에서 돌아오라 했어요. 자, 이것도 어렵습니다. 그들이 악한 길, 악한 행실이다. 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해 버려요. 악한 행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성전을 지어야 하는데 지금 뭐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성전을 안 짓고 있다 말이죠. 성전을 536년에 성전 지으라 했으면 벌써 다 지어야 할 텐데. 지금 520년 돼도 아직 안 짓고 있는 거예요. 안 짓고 있어요. 지금.

그럼 10년째 그냥 놀고 있는 겁니다. 물론 예루살렘 가본 사람은 알지만, 그게 돌무더기 큰 무더기 올리는데, 그 돌 기중기 봤지요. 올리는데 얼마나 힘들어요. 그렇게 쉬운 건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은 중단하고 말았어요. 그러면 악한 길이다. 악한 행실로 갔다. 했으면 뭐 악한 길이면 악한 길인 줄 알아야지 뭐. 악한 행실이면 악한 행실인 줄 알아야지 뭐. 이러면 됩니까? 뭔가 이유를 알아야지요.

무조건 악하다 하니 “예, 악합니다.” 이러면 안돼요. 뭔가 이유가 있어야 돼요. 이유가 되려면 그들이 어떤 자리에 있느냐 하면 우리가 이렇게 이방나라에 고난 받는 것이 이게 마땅하고 합당하다는 의식이 있어야 돼요. 우리가 벌 받을 만해서 벌 받는다는 생각이 있어줘야 됩니다.

그러면 그걸 있으려면 선조들은 악한 것도 모르고 악한 길로 갔다면 본인들은 비록 악한 길을 해도 내가 악할 수밖에 없는 어떤 근거, 어떤 바탕의 이유가 제대로 갖춰준 채 역시 나는 악해. 이렇게 되어야 되거든요. 그게 근거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근거가.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 라는 명령을 통해서 그들이 주저하고 성전의 가치와 성전의 고귀함을 다른 더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 때문에 지금 여기서 이걸 뒷전으로 처리해버린 거예요. 밀어버린 거예요. 그럴 때 도대체 그들이 뭘 생각하느냐, 나는 왜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중요시 여기지 않고 내 자신의 안일함과 편안함에 몰두하고 있느냐, 그러니까  자신의 안일과 현재의 내 편안함만 생각하는 이것이 꼭 선조들이 갔던 그 길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음이 이게 들통 난 거죠. 그러면 그들은 뭘 이해 못하느냐 하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대변해 주는 선지자, 선지자들의 그 통찰, 그 뜻을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그러면 선지자는 뭐가 다른가, 다시 합니다. 첫째 뭐가 있다고 했어요? 그들에게 뭐가 있다고 했어요? 고통과 고난이 있다 했지요. 두 번째는 말씀이 있다 했지요. 이 선지자의 고통과 고난은 이디서 직수입한 겁니까? 어디서 온 겁니까? 구약의 선지자 고난은? 베드로전서1장11절 이야기했지요. 누구의 고통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영광이지요.

그러니까 선지자들은 미리 아는 거예요. 미리. 미래에 아는 게 아니고 미래가 과거를 방문해서 선지자 속에 미리 집어넣어준 거예요. 그러니까 장차 올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을 선지자는 알았기에 현 상황이 고통과 고난스러운 겁니다. 이 말은 이미 천국에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기에 이 세상이 꽃피고 아름다워도 이 세상에 더 눌러앉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예요.

이 생각이 없는 이 사람이 아는 죄와 그냥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와 죄의 그 클래스가 다르지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서 주께서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 안 짓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장차 올 예수님 오실 메시아가 어떤 고통을 품고 너희들에게 선지자 스가랴 입을 통해서 너희에게 그 십자가의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는지를 그들을 알리기 위해서 이렇게 너희 열조나 너희들이나 마찬가지로 악한 길로 가고 있다고 이렇게 말씀을 해주시는 거예요.

그럼 돌아오라. 돌아온다는 말은 돌아올 지점을 알려주고 돌아와야 될 거 아닙니까. 돌아오라. 너희들은 지금 이 지점에 있어야 할 너희들이 이 지점이 아니고 엉뚱한 데 정신이 팔려있고 관심이 거기에 있고 온 신경을 거기에 쏟고 있다. 돌아오라. 이렇게 할 때, 왜 이 사람들이 관심을 여기 돌아올 자리, 하나님의 언약에 두지 않고 딴 데 왜 둡니까.

이게 재미나거든요. 이게 편하거든요. 이 환경자체가 이래야 사람 사는 것 같고, 숨 쉬는 것 같거든요. 사람답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외로운 거예요.

선지자는 그렇게 돌아오라. 어느 지점에 돌아오라 라는 말입니까. 결국은. 선지자가 있는 지점에 돌아오라 이 말이거든요. 그럼 선지자가 있는 지점은 어느 지점입니까. 선지자에 뭐가 있다고 했지요? 첫 번째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고통과 고난이 있지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지요. 바로 선지자의 고통과 합쳐버리면 뭐다? 십자가.

그러니까 선지자에게는 뭐가 있느냐, 십자가가 있는 그 신기함의 세계. 묵시적 세계로 돌아오라 이 말이에요. 현 그 당시 유대인들이 무슨 재주로 이 묵시의 세계로 돌아옵니까. 그래서 뭐하느냐 하면 천사를 동원하고 또 하나님의 성신 그러니까 성령을 동원하는 거예요.

스가랴에서 나오는 모든 예언은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해가지고 어디 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오른편에 가요. 하나님의 오른편이 어느 위치냐 하면 자기 백성을 자기 임의대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만이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에요.

그 말은 그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믿어서 내가 구원받고 싶은 열망이 너무 심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너와! 너는 내 사람이야!” 라고 찍어버린 거예요.

찍었다는 말이 약간의 속된 말 같으면, 찍었다는 말은 속된 말이 아닌데, 약간의 거친 말이 있다면 고상한 말로 하면 인 맞았다. 또는 도장 찍었다. 뭐로? 성령으로. 성령으로 도장을 팍 찍어서 “니는 빼도 박도 못해. 니는 내 사람이야.” 내 사람이라고 팍 찍어버린 거예요.

옛날에 드라마에 그런 거 있잖아요. “너는 왜 내 사람이라고 말을 못해.” 하는 그런 대사가 나오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너는 내 사람이라고 꽉 찍어버렸어요. 이거 진짜 홈드레스입고 이론만 하면 안돼요.

꽉 찍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아무리 내가 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도 주께서는 내 원하는 대로 해주지를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일평생 성과보다도 더 우선되고 더 선행되고, 더 귀하고, 값어치 있음을 깨닫는 그 신기함이 성도의 몸을 통해서 성도의 일생을 통해서 발산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발산되도록.

그러니 이 스가랴의 내뱉는 모든 것은 묵시적이고 노골적으로 천사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살아가면서 진짜 귀한 것과 귀하지 않는 것도 제대로 분간 못하는 어리석은 저희들 눈이 막힌 저희들,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스데반집사처럼 진짜 중요한 게 뭔가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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