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선 매래 2003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3. 15. 20:32
2020-03-12 15:11:23 조회 : 105         
선(先)-미래 야고보서 5:9 200312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btWmlDl8I_w"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ef4AVWSSsJk"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공은주  (IP:175.♡.135.128) 20-03-15 15:20 
안양20200312a야고보서 정리3 :선(先)미래-이 근호 목사

지금부터 안양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입니다. 야고보서5장부터 보겠습니다. 지금 안양강의 야고보서를 다 마무리한 가운데서 총 정리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정리하는 가운데서 야고보서 전체 내용이 어떻게 연결되어지고 어떻게 연관되느냐를 우리가 살펴보면 되겠지요. 이 야고보서4장에 보게 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누구로부터 간섭받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 야고보서4장11절에 보게 되면,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라고 해서 인간 대 인간만 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 중간에 율법이 개입되고 있어요. 인간 대 인간이 마주보고 있는 그런 상황. 그런 상황에 있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서로가 서로를 마주본다. 이게 현실의 전부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니까요. 인간 대 인간의 눈에 보이니까.

그런데 야고보는 뭘 강조하느냐 하면 여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율법을 집어넣어요. 율법이니까 율을 괄호 하니까 법을 집어넣는 겁니다. 이 법의 특징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에서는 서로 융통성이 용납이 되지요. 융통성은 합의 또는 협의에 의해서 조정 가능합니다. 이렇게 조정 가능한 것이 뭐가 되느냐 인간의 미래 또는 인간의 역사로 계속 이어질 수 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융통성.

그러니까 이 미래나 역사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 대 인간끼리 잘 의사만 조정이 된다면 거기에 따라서 미래와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서4장에서 율법이라 하는 것은 인간하고 협상하거나 타협할 의사가 전혀 없어요. 그러면 인간들은 평소에 사람하고 상대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인생을 유리하게 가져가려고 하는데 전혀 융통성이 없는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차고, 치고 들어오게 되면 율법 같은 것은 이건 안보면 그만 아니냐. 치워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TV뉴스나 이런데 율법내용이 안 나오지요. 이건 걷어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야고보서5장에 들어오면 이 율법이 뭘 하느냐 하면 인간은 강제로 율법을 걷어내고 싶어 하지만, 율법이 인간 전체에 심판자로 개입한다는 거죠. 율법이 인간 세계에 심판자로 개입해버리면 인간과 인간들이 정답게 협의하고 잘 마무리 되었던 인간의 그 합의체가 그 조정한 것이 인간의 미래와 역사가 이건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심판에 의해서 완전히 파탄 나는 겁니다.

율법은 조정이 되지 않고 인간들은 인간 눈에 보이는 인간들과 협의하고 싶고 그런데 율법은 눈치코치도 없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관여한다 말이죠. 자, 율법의 이러한 관여는 인간들이 이 율법의 개입을, 개입에 대해서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그러한 방식은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인간하고 협의하고 하는 대신에 율법과 의논해서 뭔가 자기 인생을 따로 꾸려나가겠다는 이러한 모든 시도를 한다 할지라도 율법이 주는 심판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에서 제외되지를 않지요. 율법은 아주 단호한 겁니다.

옛날 출애굽 할 때에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나올 때에 그 어린양 피를 바른 자들만 맏이가 죽지 않고 살아나온 거 그걸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시면 금방 이해가 될 겁니다.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언급할 때에 인간들은 그냥 아무 맹탕으로 율법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방금 제가 설명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어떤 자기 자신에 대한 미래, 역사, 자기의 운명 같은 것을 스스로 그것을 만들려고 시도하겠지요. 미래 역사는 우리 손에 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는 우리가 정해진다. 라고 하지요.

거기에 대해서 율법은 뭐냐 하면 율법은 선(先)미래라고 할 수 있는데 선(先) 미리, 미리 미래를 현재 속에다가 율법 안에 담아서 미리 줘버리는 거예요. 확정된 미래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주는 확정된 미래와 인간들이 어떤 가능성을 생각해서 미확정된 미래를 꾸려나갔던 그 미래상하고 여기서 의견충돌이 일어나겠지요.

내가 생각하는 미래와 율법이 이미 정해 놓은 미래 사이에 마찰이 일어난다 말이죠. 당연히 사람들은 율법이 정해 놓은 미리 상을 좋아하지 않고 본인이 유리하도록 조정된 미래에 대해서 좋아하겠지요. 그러면 율법이 선 미래라고 여겼던 그 미래는 그걸 율법 쪽에서 먼저 제시를 해주게 되면 인간들은 그 율법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내가 알아서 하겠다. 우리가 보통 이런 식으로 또 율법에 대해서 대처하려고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돼요. 왜냐 하면 율법이 말하는 선 미래는 감추어져 있어요. 감추어져 있고.

그것이 나타나는 경우는 인간이 자기 욕심대로 자기 소원대로 일을 꾸려나가는 그것을 계속해서 저지하고 부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미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미래는 이렇게 전개된다. 이렇게 알려주면 좋겠는데, 그런 방식이 아니다 말이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주식을 샀다. 주식이 오를지 내릴지를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을 보니까 ‘야, 한 달 후에는 주식 값이 오르겠다.’ 이렇게 미리 알려주게 되면 ‘오, 그러면 많이 사놓으면 되겠네.’ 라는 이게 대체가 가능하지요. 그런데 율법의 미래는 그런 것을 주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있다가 ‘아, 주식을 샀으니까 내 주시만 다 오르고 남의 주식은 다 떨어져가지고 나만 떼돈 벌어야 되겠다.’라고 시도하는 순간 그것을 방해하고 훼방하고 그러한 목표가 되지 않도록 아주 부정해버리면 작살내버리면 그런 방식으로 율법은 작용한다 말입니다.

초치기죠. 다 된 밥에 초치기 하는 것처럼 인간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가 인간들의 하는 의도대로 되지 않게 하는 방식이 율법 안에 들어있는 미래입니다.

미래라 하는 것은 나중에 올 것이라 하지만 율법의 이런 선 미래는 인간에 의해 뜻대로 되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이미 우리 속에 율법의 선 미래가 우리 인생 속에 또는 이 세상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왜 율법이 그런 식으로 나오느냐 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 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충분하게 우리가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 여기 있고, 여기는 지상의 인간들의 세계입니다. 인간들의 세계인데, 그동안 인간들의 세계 가운데에서 유독 특이한 민족이 있다면 그건 이스라엘이 되겠지요. 이스라엘을 인간들 속에 핵심으로 여기 있다고 치고, 그동안 하늘나라에서 조용히 계신 게 아니었지요. 하늘나라에서 계속 이스라엘에게 뭘 줬느냐 하면, 언약을 준 겁니다.

율법은 바로 그 율법을 그 언약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야고보서에서의 선지자나 모세 전체를 언약이라고 또는 이걸 같은 말로 율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을 계속해서 주셨다 말이죠. 주셨는데 마지막 때는 누굴 보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오셨지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 아들이 하나님이 되시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 땅에 왔다. 말이죠. 이 아들이 왔을 때는 율법 따라, 언약 따라 오신 거예요.

그 시대 사람에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뭐냐 하면 미래가 아니고, 선미래. 미래보다 일찍 앞서 온 미래. 현재 속에 삽입된 미래로 예수님께서 오신 거예요. 인간들의 세계는 자기만의 세계가 구축되어 있고, 예수님이 메시아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 같아서 계속해서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우리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이야기해요.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품고 있는 장래 계획에 대해서 궁금해 하면서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항상 심판에 대해서 언급했어요. 내가 온 것은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고 이 땅에 불을 질러버리러 왔다.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심판에 대해서 왜 선 미래적으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어떤 세계를 단호하게 거절하느냐 하면 우리 세계가 심판받는 세계다. 라는 사실만큼은 그들이 극구 거부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렇게 길을 가는데 마지막에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절벽으로 떨어진다면 누가 이 길을 가겠어요? 이 길이 천국으로 이어진다고 여길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길 따라 산 넘어 천국이 있다면 이 산속으로 가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오신 분이잖아요.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이 이야기하기를 그쪽은 아니고 이쪽이라는 겁니다. 그쪽은 니가 알지를 못하고 바로 너희 세계는 지금 천국이라고 여기는 그 세계가 사실은 지옥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세계로 너희들이 가고 있다고 언급을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왜 그런데, 왜 그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심판받아야 하는가, 에 대해서 납득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왜 그러면 안 되는데?” 라고 나오는 거예요. “왜 그러는데? 니가 지옥 안가야 될 이유가 너한테 있느냐?” 라고 되묻지요.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왜 우리는 심판받아야 됩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니가 왜 심판 안 받아야 될 건데?”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차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기적과 행위와 말씀은 이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는 겁니다.

인간들에게는 차이를 이렇게 나타나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어디에 갇혀있는데 출생에서부터 쭉 가다가 어디에 막혀있다 또는 갇혀있다. 어디에 막혀 있느냐 하면 이 죽음이라는 것에 인간은 출생에서 막혀있어요.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지금 계속해서 야고보서4장에 나오는 율법이야기하고 거기에 5장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협의해서 이루어지는 이런 평화스러운 인간세계에 대해서 그냥 무단으로 개입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율법 따라 오신 분이 예수님인데 예수님 역시 율법을 가지고 무단으로 개입하고 성령께서도 무단으로 개입하는 겁니다. 개입할 때,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차이나기 때문에 개입하는 그 모습이 무슨 모습이냐 하면 아니다, 틀렸다, 하는 평가하겠다는 심판의 모습으로 오게 되어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더 진도 나가게 되면 인간들의 세계가 어디에 문제 있는가 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죽음에서 항상 쭉 세계에 대해서 관찰하다가 죽음 문제에 와서는 되돌아가는 거예요. 죽음 문제에 대해서. 좀 상세히 설명하면,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유리한 것들은 다 정보들을 모아서 삶을 영위하는데 도움 되라고 온갖 지혜를 끄집어내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죽음 뒤가 불확실하다. 무조건 뒤가 불확실하다, 에요.

남은 것은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고 있으니까 확실하다고 우길 수 있는데, 문제는 죽고 난 뒤에 불확실한 거예요. 죽고 난 뒤에는 선배들 보니까 그냥 구더기하고 한패 돼가지고 썩어 가고 있더라 말이죠. 그렇다면 흙이 되어가는 모습만 볼 뿐이지 죽고 난 뒤에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다면 문제는 살아있을 때, 살아있는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죽음 문제를 나중 문제로 돌리고, 죽을 때는 죽더라도 지금은 산 사람이나 살아야지. 하는 식으로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개입할 때, 이 죽는다는 것은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에 완성의 일환으로서 하나의 절차로서 인간에게 죽음이 왔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계획에 이미 계획이 포함되어있다고 보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이 자기가 죽음이 오던 자기 일이 뜻대로 안되던 그건 자기 자신에 계획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할 게 아니라 그걸 좋게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자기에게 어떤 일이 발생되더라도 이미 요지부동 확정된 율법이 제시한 그 미래의 선 미래. 미래가 일찍 현재화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바로 야고보서4장에서 후반부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4장 13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익을 보겠다. 그건 자기가 생각한 아까 말한 자기 미래지요. 자기 계획이고. 자기 운명이고.

그런데 그 다음에 14절에, 내일 일은 너희들이 알지 못한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 대 인간세계 같으면 미래라 하는 것은 인간이 결정한 개입만 하면 되는데, 여기에 누가 개입했다고 하는 겁니까? 율법이 그냥 개입한 거예요. 율법이 개입하니까 세상은 율법 따라 가게 돼있지.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어가는 거 아니다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한다고 인간들이 또 자기 계획을 철회할 그런 위인들이 아니잖아요. 오기가 있어가지고 고집대로 밀어붙이지요.

그러면 주워지는 것은 뭐냐 하면 점점 뭐가 가중되는가, 율법이 준 심판이 가중되는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살게 될 것이냐, 하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이미 율법이 다 결정지어져 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율법대로. 말씀대로. 이미 결정지어진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그러면 율법만 공부하면 되느냐, 그게 아니고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하면서 그것이 좌절되고 또는 좌절의 비슷한말 예상 밖의 어떤 일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참 많이 있지요. 아주 쉽게 해서 이렇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이게 기적이라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사는 것 자체가 당연한 것이 아니고 기적이라는 거예요. 안 살아도 되는데 지금 내가 살고 있으니까 이 어찌 신기하지 아니하리요,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는 거예요. 내가.

그런데 정답은 뭐냐, 신기한데 정답은 뭐냐, 율법이 여기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율법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게 야고보서에서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성도의 인생관입니다. 내 인간으로 자체를 생각할 때, 내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몰라요. 내가 왜 있어야 하는지. 없어도 되는데 왜 있어야 되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하지만, 율법이 개입되게 되면 바로 율법이 품고 있는 그 미래 또는 그 과거, 지금 현재 그 운명을 위해서 성도는 율법과 연관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정답이 나오는 겁니다. 그 정답에 대해서 야고보서4장에서는 끝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5절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도 한다.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그 뒤에 말은 주의 뜻이면, 이것저것 하다가 죽을 때 되면 죽기도 한다는 것도 포함되는 거지요.

주의 뜻은 주의 뜻으로 선 미래이기 때문에 지금 선 미래라는 말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두 주의 뜻에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주의 뜻이 벗어난 적이 없는 주의 뜻이 이 성도에게 도달되게 되면 성도는 주의 뜻에 포섭이 되어서 어디에 합류하느냐, “주의 뜻대로 되었음을 감사하나이다.” 로 이렇게 감사하는 것으로 포섭이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이 하는 가운데서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할 수도 있고, 장사 성공할 수도 있고, 주식 투자할 수도 있고, 말아먹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마저 주의 뜻의 일환으로서 이미 그런 일이 꼭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뜻이면 주의 뜻 앞에서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여기에 16절에 보면 허탈한 자랑은 하지 마라. 허탈한 자랑.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 있어서 이 현재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자랑거리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내세울 것은 전무하다는 없다는 거예요. 어떤 자랑거리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래도 고집스럽게 자랑한다면 이것은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인이라, 라고 되어있어요.

자, 율법부터 시작한 율법이 인간 세계에 개입해서 또는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니까 개입해서 결국은 나타난 그 결과는 뭐냐 이 세상에 왜 하나님이 인간하고 의논하지 않는가, 그것은 인간이 악하고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거예요. 죄를 죄로 드러나는 율법의 기능을 하나님께서는 멈추지 않고 충실하게 이행하시는 거예요. 주의 뜻은 죄인을 들추어내게 함으로서 우리가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원래 율법의 개입이 그러한 목적과 취지를 품고 율법이 이 땅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다 완성으로 찾아 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생각해야 될 것은 율법이 그런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도대체 우리 인간이 뭐가 잘못됐는데? 왜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왜 안 받아주는데? 왜 인간이 인간끼리 협동해서 협의해서 인간세계의 미래 이루는 대에 대해서 왜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그걸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먼저 율법이 여기 개입해서 하나, 하나 그걸 좌절시키는 이유가 뭔가’ 라는 그런 생각을 가질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야고보서5장에 보게 되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5장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 그 다음에 제가 요걸 크게 중요합니다. 까지. 그 다음에 5장 3절에 보면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너희가 크게 쓸게요. 에, 부자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요걸 큰 글자를 빨간 글자로 쓴 것을 네모지어 보겠습니다. 말세에, 까지, 또 하나 더 해볼게요. 8절에 보게 되면,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가깝다. 말세, 까지, 가깝다. 주의 강림이 가깝다. 그 다음에 9절에 보면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심판주가 문 앞에 계신다. 자, 여기까지만 하지요. 요 빨갛게 쓴 4개의 공통점은 전부 다 뭐냐 하면 시간에 관한 거예요. 시간.

아까 이야기한 선미래. 인간에게는 선 미래라는 건 없습니다. 미래는 아직 도달되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겁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고 바라고 상상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미래, 미래에 일어날 것을 심판의 형식으로 인간의 시간대를 덮쳐버리지요. 뭐 뭐 까지, 가까우니라, 문 앞에, 말세에, 하는 이것은 두 겹이 있어야 가능한 거예요.

미리 아는 자에게만 이게 인내, 길이 참고가 성립이 돼요. 미래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면 미리 참고가 안 되잖아요. 미래가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통해서 미리 아는 자. 미리 내가 안다는 것은 그 미래에 가서 확인해 보는 것이 아니에요. 확인하나 마나 율법이 내 안에 성령을 통해서 내 안에 들어와 버리면 장차 일어난 일이 벌써 내 안에서 개시가 된 거예요. 시작이 된 거예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성경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성과 합리성으로 논리성으로 이해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큰 잘못이에요.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영이 오지 않으면 성경은 이해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미래라 하는 것은 그냥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막연함이거든요. 막연함. 한 번 해보고 없으면 그만이고. 이런 식이란 말이지요. 죽어서 천국 있으면 좋겠지. 없어도 그만이고. 이런 식이란 말이지요.

죽어서 꼭 주의 음성을 듣고 지옥에 갈 사람은 지옥가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 간다. 꼭 그렇다. 라는 것이 있어버리면 그것이 현재의 그 사실이 현재에 선 미래로 개입해버리면 현재 삶이 확연하게 달라진다는 거예요. 참고가 되고, 가까이, 말세에, 문 앞에, 이게 전부 다 말씀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리고 어디 가서 장사할 때 그냥 잘 되어야 할 텐데, 가 아니라 잘되든 못되든 이 장사하게 하신 것도 예수님의 하나님의 선 미래의 개입으로서 시작을 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랑 자체를 포기했기 때문에 그렇지요.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기적이라고요. 낯설고 기적이고. 기적보다 더 같은 뜻입니다. 신기하지요. 신기한데 왜 신기하느냐, 그건 내가 꾸려나가는 미래가 아니라 율법의 개입으로 이미 그쪽으로 쏠려나가야 되고 몰아세워져 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신기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진도를 더 나가보겠습니다. 인간의 시간관에 문제가 있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이걸 알려면 인간의 시간관에 문제 있다. 문제 있어요. 왜? ①인간의 시간은 어디서 나오느냐, 인간의 기억에서 나오거든요. 인간의 살아온 기억. 체험된 것 중에서 뽑아낸 기억. 그 기억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기억이 어떤 기억이냐, 지식 기억이 있어요. 또 하나의 기억은 뭐냐 하면 이런 용어는 잘 안 쓰는데요. 자서전 기억 또는 일화. 어떤 일이 있었다. 일화, 보통 이야기, 스토리라는 뜻 아닙니까. 자서전 기억.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자, 예를 들면 쉬워요. 내가 옛날 고등학교 졸업한지 아주 오래 된 사람에게 “당신의 출신학교 위치와 이름을 압니까?” 라고 물으면 알아요. “예, 알지요. 학교 이름은 무슨 학교고, 위치는 여깁니다.” 이런 것이 지식 기억이에요. 그런데 자서전 기억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좀 어려운데요. 그 때 그 학교 입학식 할 때, 또는 그 학교에서 운동장에서 축구하다가 발 다친 거. 또는 그 학교에서 청소하면서 왁자지껄 친구하고 청소하고 유리창 닦다가 유리창 깨지고 여러 가지 일이 있지요. 그걸 감정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때 감정 또는 감흥. 청소할 때 왁자지껄 하면서 나오는 그 소음뿐만 아닙니다. 손에 걸레질할 때 닿았던 그 손에 촉감과 냄새까지 그 어떤 친구와 짝이 되어서 당번이 돼서 물걸레질 할 때 물걸레의 그 냄새. 그 냄새마저 수십년 지나도 그 냄새가 잊혀지지 않지요.

자식은 찾아보면 되지만 그 감정은 내 몸에서 우러나는 거예요.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이 지식기억은 내 머리가 기억하고 있지만. 이 몸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그냥 하지 않고 자서전 기억이라는 말은 인간의 기억과 인간의 시간이 지금 현재 내 몸에 나의 자아에 장, 필드, 자아의 영역, 또는 자아의 숭고한 나만의 세계를 형성시키는 결과물로서 현재 이 인간의 시간은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나는 과거가 집대성된 지금의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과 경쟁하는 우상이 되어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심판 받을 만하지요. 연구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어요.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의논하듯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우리는 현재에 있는 나라는 것. 나에 대해서 그 율법과 같이 협의하고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면 만사가 잘 풀릴 줄 알았지요. 내가 어떤 상태인지 율법이 보시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 십자가에서 보시기에 나는 어떤 상태인가를 본인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모르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4장 끝에 나오지만, 자기자랑을 내가 자꾸 부정해야 되고, 거두어야 될 이유에 대해서 본인이 도통 그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아니 자랑하고 싶어서 자랑하는데 그게 무슨 문제이냐는 거예요. 인간이 결국 모든 시간은 어디로 흘러 들어가느냐 하면 현재의 나를 정당화하고, 현재의 나를 절대시하고, 현재의 나는 우수하다고 여기는, 대단하다고 여기는, 여기에 모든 기억과 시간을 여기에 다 투자가 되고 몰입된 거예요.

그러나 아까 했던 말세에 보세요. ~까지, 가까우니라, 참아라, 심판주가 문 앞에 있다. 이 말씀은 만약에 우리 자신이 우상화된 상태라면 이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자,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 자신에게 모든 미래를 안 맡겼다는 거예요. 안 맡겼기 때문에 미래에 결정한 것은 니가 지금 그 주님 오시는 미래를 니가 곱게 자라서 기다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 자신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자신을. 주님을 기다리겠다는 내 자신을 향하여 지금 주께서 심판을 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꾸준히 단순히 지식만 모운 게 아니고 나를 주인공으로 한 자서전을 꾸준히 써왔기 때문에 인간에서는 이러한 반율법적인 행위에서 스스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어느 인간이 말세를 좋아하겠습니까. 어느 인간이 주의 강림을 요청하겠습니까. 참고, 기다려라. 심판이 가까웠다. 주님께서는 어느 인간이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을 야고보서5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부유한 자라고 해요. 부유한 자.

그러면 반대로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냥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유한 사람에게 억울함을 당한 가난한 자. 다시 말해서 자신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 것은 누구나 그렇게 그런 속성이 있는데 그게 자기 마음대로 안됐다 이 말입니다. 자기가 절대화하고 싶은데 부자한테 호되게 당해버렸어요.

여기 5장에 나온 말씀대로 일은 했는데 품삯을 못 받았다 이 말이지요. 일은 했는데 품삯을 못 받았으니까 무엇에 차질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의 나 우상화 작업에 큰 차질이 일어난 거예요. 이건 자아의 붕괴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인생 망한 거예요. 부자 때문에. 품삯을 못 받았으니까. 자기 정당화, 우상화에 여기에 계획에 실패한 거예요.

자, 그 실패한 경우, 이 경우라는 말은 자기를 위한 시간에 흐름 자체가 결국 자기로 하여금 실패한 인생으로 몰아세웠다면 이건 내 시간, 인간의 시간 말고 다른 계획에 준해서 움직이는 시간이 따로 있음을 적절하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된다는 것이 야고보서5장의 내용입니다. 전개과정이에요.

나를 위한 시간. 나를 위한 세상. 그것이 처참하게 망가지고 실패로 끝나고, 좌절될 때,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고 다른 분을 위한 시간일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거예요.

이 세상은 율법,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일하심을 위한 시간이지, 나는 이 땅에서 이렇게 성공 했니, 잘했니, 그것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까 제가 자서전적 기억이라고 했지요. 자서전 기억.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이런 식으로 살아가요. 지식기억도 이 자서전기억을 전부 다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걸 내포하는 이 순간,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진행시키는 이 세상의 의미, 예수님의 강림하시기 위해서 심판의 대상으로서의 이 세상을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들의 세상을 꾸려나가게 했다는 그 내용은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 야고보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사, 하늘의 은사 또는 성령.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이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특히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두둔하고 품삯을 받지 못한 두둔하는 모습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은 가난한 자가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가난하던 부자던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바가 이 세상이 추구하는 바가 스스로 절대화 되는 것. 부유한 존재를 자기의 미래상으로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사전에 언급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과 짝하는 자는 하나님께 원수라고.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가. 그건 부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자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부자한테 당한 자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마치 율법이 이 땅에 왔을 때, 당했던 그 모욕과 그 무시당함과 그리고 천대 받았던 그것을 이 가난한 자를 통해서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5장11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자, 인내하는 자. 이 인내하는 시간에 서로 다른 시간. 하늘의 시간과 하늘나라의 시간이라고 했지요. 이 땅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미래가 아니고 이미 미리 온 선 (先)미래지요.

이 하늘나라의 시간과 자신의 시간, 양쪽을 다 알고 있는 사람, 이게 바로 여기에 욥이라고 보고 그가 욥이 이 땅에 대한 어떤 기대나 부자 되겠다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은 전부 다 욥은 생각하지 않는 존재라고 보는 겁니다.

다시 야고보서4장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도리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한다는 그런 마음을 가진 자가 욥이라는 이 말이죠. 어차피 어떻게 해도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의 소망대로 굴러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확정된 율법대로 굴러가기 때문에 욥의 입장에 있다면 욥은 기다림뿐이지요. 그걸 욥의 인내라고 하는 겁니다.

둘 다의 시간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여기서 뭐가 발생된다? 진정한 인내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 인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몸 딛고 있는 이 세상은 결국은 작살난다는 겁니다. 이미 작살나는 걸로 확정지어졌다는 겁니다. 미래는 심판 받는다가 아니라 미래가 심판받고 이 세상이 멸망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 심판과 멸망이 지금 현재로 느껴지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성도라는 뜻이에요.

7, 8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농부가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너희도 마음을 굳게 하라. 그 마음은 이게 두 개의 시간을 다 알고 있는 사람에 해당되는 마음이에요.

이거 하늘나라의 시간을 모르는 사람, 율법의 완성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끊임없이 그냥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뿐이지요. 주님께서 강림하시겠지 뭐. 나중에 세상 멸망하겠지. 그게 그런 식이 아니고 그리되면 그건 인내가 아니에요. 그냥 막연함이고 모호함이지요. 불확실한 믿음이지요.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삶 자체가 율법을 율법 되게 하기 위해서 선미래적 작품으로서 이 세상에 지금 박혀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꽂혀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자, 요점을 가지고 좀 더 개인적으로 이어져 가면 이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아까 그림을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협의해 살아간다. 그런데 어디에 막혔느냐, 죽음이라는 벽에 막혀있지요. 죽음이라는 벽. 더 진도 나갈 수가 없어요. 왜? 완전벽이니까. 죽었다 살아난 사람 없잖아요. 아무리 협의해도 전부 다 아직 죽기 전의 지식만 아는 사람끼리 자기들끼리야 그 정도 선에서의 정보를 교환할 뿐이지요.

그런데 이 죽음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꾸 상상하는 거예요.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산다는 식으로 여기서 자꾸 자신을 끄집어내는데 문제는 죽고 난 뒤의 천국 있고, 영생하는 나라가 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갑자기 자기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느냐 하면 불멸의 존재로 자기를 인식하게 돼요. 불멸의 존재.

무슨 근거에 의해서 자기가 불멸의 존재입니까? 불멸의 존재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심판 받을 대상이 아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불멸의 존재에요. 심판을 받을 대상이 아니다. 나 원래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안 받을 거야. 뭐 이런 고집 같은 게 있다 말이죠. 이게 얼마나 마귀 적 입니까? 악마적이에요.

율법은 분명히 심판한다. 심판주가 계시다고 했는데, 심판이 없이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막연하게 죽은 뒤의 세계를 상상해서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서 그걸 믿겠다는 것이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종교라는 거예요.

종교를 갖겠다는 이것조차도 율법 앞에서, 주님 앞에서, 이것조차도 심판의 대상인 것을 인정해야지요. 자칫하게 되면 이 종교를 가진 본인이 자기 자신이 자랑거리로 여길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인내하는 것이 아니고 자꾸 대비하고 준비하는 식이 되어버리면 이건 율법의 뜻이 아닙니다. 이건 심판 받을 대상의 태도가 아니에요. 내가 뭘 얻겠다는 식은 안 된다 말이죠.

지금 이미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율법이 있기에 그 율법의 선 미래적인 증거물로서 내가 여기 있다. 그렇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여기 11절에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이 나와 있어요.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지금 강의한 것이 바로 결말을 보았느니라. 이걸 제가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선미래. 미래를 미리 여기 우리가 도달했다, 도착했다는 겁니다. 장차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대로 주께서 필히 그렇게 이루신다는 거예요. 따라서 인내라고 해가지고 울고, 불고, 짜고, 그게 인내가 아니지요. 그냥 막 사는 거예요. 막 사는 것. 왜냐, 막 살아도 내 뜻에 막사는 주께서는 허용을 안 한다는 것을 뻔히 아는 가운데 막 사는 거예요. 사람이 어떻게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게 아니거든요. 항상 미래를 예상하면서 나한테 유리할 것인가를 고려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엄밀하게 막 사는 게 아니지요. 나를 빼놓고 생각 안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성도는 나를 빼놓고 주님의 율법대로 되어 지기를 바라면서 사는 것. 이게 막 사는 거죠. 자기를 빼놓고 사는 거예요. 왜냐 하면 자기 자신은 주께서 몰아세우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입장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야고보서에서 이런 자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늘의 은사를 받은 자라. 성도가 되겠습니다. 이걸 야고보서1장에서는 마지막 때 나타날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4장 뒷부분에서 5장 11절까지 내용을 이렇게 언급을 했습니다. 5장 2절을 다시 보게 되면, 너희 재물은 썩었고. 부한 자들아, 너희 재물은 썩었다는 것은 분명히 부자 집에 있는 재물은 안 썩었어요. 하지만, 선 미래적으로 보게 되면 이미 썩은 것을 모으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말이죠. 누구 안목으로?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에 너희들이 모은 것은 쓰레기를 모은 거예요. 썩어질 것이 아니라 이미 썩은 것으로 단정 지어지고 규정된 것을 계속 집구석에 모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모았던 썩어진 것은 누구 것이냐, 바로 남들에게 돌아갈 몫을 본인이 다 횡령해서 착취해서 썩어놓았다. 이렇게 몰아세우는 이유는 어떤 사람이 특정사람이 그렇다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지향하는 방향, 그리고 소망, 이 모든 것이 부자 되기 위한 것으로 소망한다면 이 부자 됨이라는 것은 남의 것을 착취하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공은주  (IP:175.♡.135.128) 20-03-15 15:20 

안양20200312b야고보서 정리3, 선(先)미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중단 없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되어있습니다. 시간에 준해서 계속해서 이어진다고 되어있어요. ‘자아란 의식의 중단 없는 흐름’ 중단 없는 흐름이니까 결국은 여러 가지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경우를 겪더라도 하나의 일화에요. 하나의 일화로 구성되게 됩니다. 내 인생은 이렇다. 라고 그걸 자서전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요.

그러면 이게 중단 없다는 게 문제가 되는데. 중단 없는 흐름이기 때문에 과거까지 현재 자신에 의식 속에, 중단이 없기 때문에 과거까지 겹겹이, 첩첩이 누적이 되어있어요. 쌓이게 돼요. 그러면 현재에 정신적 중량, 또는 책임감 같은 것이 너무 무겁습니다. 너무 무거워요. 현재 인간의 모든 상항이.

그래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자기 중량의 무게를 이렇게 짓눌려 살게 됩니다. 과거에 내가 이런 인간인데. 라는 그것에 계속해서 강한 중량에 의해서 눌려서 낑낑거리면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인생이라는 것이. 눌려 사니까 여기서 인간은 갈수록 더 큰 힘을 요구하게 되어있어요. 인생이란 자체가 자기 큰 짐이 되니까. 자기 무게 되니까. 그걸 이렇게 떨쳐버리려면 더 큰 힘을 본인이 원하게 되어있어요.

더 큰 힘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장담하는 거예요. 장담하는 것이 실제 현실이 될 때 자기는 큰 소리 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된다고 했지? 거봐! 나 잘났잖아.”이리 되는 거예요.

그걸 야고보서5장 12절,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장담하는 이걸 가지고 뭐냐, 맹세라고 하는 거예요. 맹세. 

그런데 여기서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장담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그것은 아까도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율법의 끝이 어디로 이어진다고 했던가요? 심판으로 이어지지요. 이 땅에서. 그래야 이 땅이 제거될 만한 대상이 된다는 것이 드러나니까. 율법의 끝은 심판으로 이어져요. 심판. 심판주인데, 이게 뭐냐 하면 결국 인간이 제대로 율법을 안다는 것은, 자칫하면 율법가지고 더 큰 힘을 도모할 수가 있어요. 내가 말씀 지켰으니까 큰 복 주시옵소서. 큰 힘으로 나를 용기 있게 붙잡아주옵소서. 이렇게 나올 수 있다 말이죠.

하지만, 율법이 가는 그 마지막 방향. 선미래. 미래는 결국은 어디에 도달하느냐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을 통해서 다 보여줬어요. 율법의 끝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십자가를 만날 때까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바 없다. 이렇게 보면 돼요.

내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결합이 될 때까지는 내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 수는 없게 되어있어요. 전부 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오해와 곡해와 그리고 오인. 오인 잘못 생각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 오해하고 있고 곡해하고 있고 오인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달릴 때까지. 십자가 만날 때까지.

율법은 예수님이 율법 따라 살았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거예요. 예수님이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십자가 진 게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 따라가다 보니까, 예수님이 율법대로 따라가 보니까 십자가에 도달된 겁니다. 심판의 자리까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리까지 오게 된 거예요.

따라서 그 코스, 율법을 줬다는 것은 성도가 율법에 따른 코스로 따라 간다는 것은, 그 마지막 미래가 미리 우리에게 주워졌다면 그 마지막은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그 곳으로 우리를 성령께서 늘 데리고 가시고 이끄시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이 세상이 복음에 비해서 저는 지금 복음의 정반대를 종교로 봅니다. 물론 복음의 반대가 과학일 수 있고, 정치일 수 있지만. 종교라 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의 모든 집대성한 것이 종교기 때문에 종교 안에 모든 인간의 시도와 소망과 그리고 기대치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종교를 복음의 반대로 봐요.

종교라 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신으로 불멸의 존재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모든 아이디어와 계획이 그 종교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러면 인간의 종교의 내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옛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냥 사람들은 이렇게 보게 돼요. 옛날 고대 사람들은 사냥을 많이 했거든요. 사냥, 수렵 또는 사냥, 채집 그냥 열매를 따먹는 수렵, 채집 사회가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정착해서 정착 농경시대 이리 되는데. 수렵 채집이 하는 사냥하는 이때에 인간들의 종교. 신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저 강 건너편에 순록 떼가 원래 작년과 3년 전과 4년 전에 의하면 항상 이때에 순록들이 요 강나루 여기에 늘 거쳐야 되고 오게 되어있는데 올해는 그 때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순록 떼가 사냥감이 오지 않을 때는 우리가 신이 뭔가 노했다, 라는 식으로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냥하는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신이라 하는 것은 동굴에도 그 그림이 나와 있는데요. 신이라 하는 것은 동굴의 그림에 의하면 신이 이 땅에 작용할 때 순환성, 또는 주기성으로 나타난다고 그들은 믿었어요. 이걸 이제 오늘날 과학에서는 대자연의 순환성, 주기성 하는데. 대자연속에 신이 여기서 관여한다고 보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순수하고 순진한 믿음처럼 그렇게 보이겠지요.

그런데 복음과의 차이는 뭐지요? 왜 순환성과 주기성 이 대자연이 순환되고 주기성을 갖고 있어야 되느냐, 그 이유에 대해서 인간들은 뭐냐 하면 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복음이라 하는 복음은 어디를 만나야 복음을 안다고요? 복음은 율법이 개입됐고, 선미래로. 율법이 결국 어디로 인도한다고 했습니까? 율법이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죠.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죽어 마땅한 존재인 것을 알려준 이것이 복음이잖아요.

그럼 죽어 마땅함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돼요. 왜 죽어 마땅하냐, 그것은 이 세상 전체가 바로 이미 가짜 신에 의해서 그동안 인간과 신이 한 식구처럼 한 마음가짐이 한 식구처럼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인류의 모든 역사가 그걸 증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과거만 그렇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교회를 다니나 안 다니나 종교가 없는 무교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기본적으로 내가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대자연은 어떤 질서와 법칙을 갖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순환성과 주기성이 있어야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야 신이라는 것이 이성적으로 안정적으로 신 나름대로의 어떤 성격이 갖추어져 있는 그러한 초월적 존재라야 인간이 믿을 만하거든요.

말이 그만 길어졌는데. 쉽게 말해서 신이란 누가 만드는가, 인간의 여망, 인간이 자기 살기 위해서 어떤 일정한 법칙과 원칙을 가진 초월적 존재이었으면 좋겠네. 라는 그것을 인하여 신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있는 이상은 신은 없을 수가 없지요. 종교를 교회를 안가도 신이 있다니까요. 주기성고 순환성, 원칙성, 합리성, 세상은 혼돈이 아니야. 어떤 질서가 있을 거야. 그런 자체가 전부 다 무얼 의식합니까? 초월적 신을 의식하고 있는 거예요.

그동안 얼마나 인간들이 이 초월적 신에게 앞에서 맹세를 하고 장담을 했겠습니까? “하나님, 우리가 드리는 제물과 우리에 대한 이 착함을 받으시고 제발 우리가 설정한 그 원칙과 주기성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때가 되매 순록 떼가 사냥감이 그 날 꽃피는 계절되게 되면 고 시점에 그 강 건너에 나타나게 하옵소서.” 사냥 시대니까. 또 농사지으면 농사짓는 나름대로 또 뭐가 있겠지요. 고기 잡는 사람은 고기 잡는 사람대로 뭐가 있을 것이고.

신의 세계가 과학을 통해서 과학 질서로 바뀌었지만, 과학 질서가 이게 굉장히 추상적입니다. 신이 갖고 있는 신의 대자연의 질서를 응축한 거예요. 왜 이렇게 응축하고 싶어 하느냐, 왜 질서를 찾고 싶어 하느냐, 뭐 대자연이 궁금해서가 아니에요. 내가 밥 먹고 사는데 그래야만 대자연은 그래야만 한다는 겁니다.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야만 한다는 거예요.

그런 어떤 질서가 갖추어지고 원칙이 있어야 이 맹세할 맛이 나거든요. 맹세라 하는 것은 질서가 갖추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요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어떤 곰이 청년이 우연히 길을 가다가 곰이 길가에 청년이 가는데 저 한 10미터 밖에서 숲에서 나와서 도로를 가로질러서 이쪽 반대 숲으로 지나갔다. 지나갔으면 옛날 고대인의 사고방식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에요.

그럼 마을사람들이 웅성웅성하지요. 곰은 신성하다고 공통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곰이 지나가고 난 뒤에 그 청년이 시름시름 아파요. 그 아픈 이유를 찾는 겁니다. 아플 때는 이유를 알아야 병을 고칠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유가 뭐냐, 신성한 곰이 지나가는데 곰과의 만남 때문에 몸이 병이 났다. 따라서 곰에게 어떤 먹잇감을 주던지 해서 곰을 달래야 니 병이 낫는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고대인들이. 그걸 토테미즘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동물이 인간의 조상이다. 정신적 조상이다 이리 보는 겁니다.

토테미즘, 인간의 조상들은 다 동물이었다. 그 말입니다. 왜냐 하면 신은 감추어진 곳에서 오는데 그 감추어진 곳이 뭐냐, 수풀이에요. 숲이다 말이죠. 마을 뒤편에 숲에 신이 살고 있고 숲에서 신의 졸개들 정령들이 살고 있는 거예요. 또 요정들이 살고 있고. 북유럽의 오딘 신화든 모든 신화가 다 그래요. 우리가 신화를 가지고 과학시대에는 그게 미신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 합리성이 오늘날 과학에 그대로 다 녹아져 있습니다.

과학질서를 위한 과학탐구가 아니에요. 인간의 삶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과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문제는 왜 그래야 되느냐는 것이에요. 인간이 곧 뭐냐 하면 인간이 곧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신이다. 인간이 곧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곧 최고다. 절대자다. 이런 의식을 인간들이 갖고 있습니다.

동네에 가가지고 동네 같은 아주머니들끼리 이야기하면서 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인간이 최고여야 되고 인간이 우선이어야 되고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놓아야 된다는 그 의식으로서 서로 정답게, “요새 나물 나왔습니까?” 라든지 “요새 이거 얼마 합니까?” 이리 죽 물어보는 바탕에는 전부 다 이런 게 깔려있다 말이죠.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 사회는 인간과 인간만 의논한다고요. 여기 율법이 개입되지 않아요.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이 개입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 구약 이스라엘 나라의 특징이지, 다른 이방나라에서는 그것은 언급이 없어요. 그런 것은 그들의 특징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1장이 뭐라고 되어있던가요? 흩어진 열두지파로 되어 있잖아요. 다시 말씀드린다면 성경은 인간이 그렇게 곱게 믿을 책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보면 미쳤다 할 정도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가 성경을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니에요. 모든 율법의 완성되신 십자가 되신 주님과의 만남에서 십자가 앞에서 주님 앞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신으로 굴림하고 신으로 행세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아까 이야기를 다시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출생을 했다. 그리고 죽 살았다. 어디에 막혔다고 했던가요? 인간은 죽음에 막혀있지요. 그 다음 죽음 이후는 상상력이 막 동원됩니다. 확인되지 않은 상상력.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을 십자가로서 역사적으로 분명히 했습니다. 십자가로 분명히 죽었어요. 예수님의 무덤이 있어요. 비록 빈 무덤이지만. 예수님 무덤이 있다 말이죠.

그러면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은 땅에서 부터가 아니라 하늘에서 온다고 했어요. 하늘에서 온다는 말은 십자가 그 이후의 세계로부터 선미래. 미리 도달한 미래지요. 이 땅에 현재에 미리 도착한 미래. 죽음 이후의 결과를 미리 여기 현장에다가 집어넣은 겁니다. 은사라는 게.

그러면 이쪽 십자가 이후의 세계가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바로 인간들이 알 수 없었던 죽음이후의 세계가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지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 그러면 성도에게 있어서 성도의 삶이 뭐냐, 어느 삶이 더 중요하냐 말이죠. 하늘나라가 분명히 있음을 안다면 이 나라가 분명히 있음을 안다면, 이 나라의 입장에서 이 나라의 안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해서 평가도 이 천국의 입장에 준해서 평가를 내려야지, 그냥 이 세상 국한해서 자기를 책망한다든지 평가내리는 것은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여기 야고보서5장에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맹세하지 말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장담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모든 해답과 결론은 주님에 의해서 지어지고리고 너희들 자체 존재가 주님의 완성하신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이 땅에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살아가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아까 이야기한 종교적인 우리의 심상 또는 마음가짐이 죄로서 다 드러나는 거예요. 이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 이 죽음이 끝이라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고대인들은 무슨 문화가 있느냐 하면 장례문화가 있어요. 이것은 우리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를 보면 장례문화가 문화를 통해서 당시에 어떤 신을 믿었고 어떤 종교를 가졌느냐가 다 드러나는 겁니다. 요 장례문화에 요즘하고 차이점은 고대인의 차이점은 사람이 죽을 때 옆에 같이 가는 물품들이 있어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부장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후대사람들이 나중에 택지개발 한다든지 건설 회사들이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다 보니까 옛날 무덤 같은 것이 발굴됐다 말이죠. 보게 되면 사람은 뼈 조각이 다 깨어졌어요. 그런데 뭐는 그래도 생생하냐 하면 부장품물은 생생하다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사라지고 물품은 남고. 이게 얼마나 인간이 허망한 겁니까.

그 전까지는 인간이 이 물품을 자기가 소유했다고 했지만, 소유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물건이 인간보다 더 오래있어요. 인간이 물품보다 더 쇠퇴해진다 이 말입니다. 이게 장례문화거든요.

거기에 비해서 우리의 주님께서는 부장품은 필요 없어요. 우리 자신이 소실되고 소멸되는 우리 자신이 무엇의 작품이냐 하면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작품이란 오래 산다는 게 아니고 죽을 때는 죽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그 하늘나라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출생되고 그리고 죽을 때까지 눈에 보이는 이 세계에서는 뭐로 등장하느냐 바로 십자가 복음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 율법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그런 것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죽었다가 부활했다. 라는 이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자기백성을 출생시키고 살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곧 인간이라 하는 것은 살다 죽는 게 아니고 이게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적어볼게요.

 ‘인간이란 살다 죽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죽음이 창조한 거예요.’ 죽음이 창조. 

더 정확히 해서 죽음후의 세계가 창조한 거예요. 죽음후의 세계가.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창조주를 찾아가는 필수적인 절차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성도가 죽는다는 것은 진짜 자기의 본래의 창조주를 찾아가는 그런 과정으로서의 당연한 겁니다. 

죽음이 창조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말을 안 하는 이유는 이 인간세계에서는 종교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종교는 살아있다고 여기면서 그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하는데, 

그런 식으로 신과 인간이 엮이는 것이 아니다 말이죠. 

왜냐 그런 신은 인간 본인이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가짜 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짜 신은 이 땅에 와서 사람에게 와서 십자가로 죽었다 말이죠. 

그렇다면 이게 뭐냐 하면 죽음이 인간을 창조한 거예요. 성도를 창조한 거예요. 

죽음 쪽으로 간다는 것은 창조주를 만나러 가는 거죠.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호하다 이 말입니다. 

보다 내용을 의미를 분명하게 짚어주려면 죽음이 우리를 창조했다고 하는 말이 옳아요. 죽음이. 

십자가 죽음이지요. 나의 죽음이 아니고. 십자가 죽은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창조주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창조했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고 예수님의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자기 죽음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으니까 

죽음이 우리를 창조했다, 이끈다, 인도한다, 그 말이 성립이 된다고 저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굳이 하나님이 창조했다, 예수님이 창조했다, 하지 않고 실질적인 현실성 있게 죽음이 우리를 창조했다고 하는 그 말을 왜 굳이 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야고보서5장 13절에서 마지막 20절까지 내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로서 야고보서 정리를 마감하겠습니다.

자, 아까 했던 걸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인간은 자기 중량에 눌려산다. 자기 중량에 자기 무게에 눌려산다. 만약에 그 인간이 죽어버리면 더 이상 눌릴 게 없겠지요. 이걸 가지고 야고보서에서는 뭐냐 하면 이걸 가지고 15절에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

야고보서에서 또는 성경 전체에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나의 자리가 없어지는 겁니다. 나의 자리가 사라지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건 간단한 이유를 들 수 있어요. 구약에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구출의 의미인데, 구약에서 구원이란 구출의 의미입니다. 신약에서의 구원이란 죄를 씻어주는 의미지만, 구약에서는 구출의 의미에요. 지역적으로 애굽에 살 거냐, 약속의 땅에 살거냐, 지역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으니까 지리적으로 애굽에 있는 인간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해요. 히브리서에서도 그렇게 안식의 때가 남아있다 해서 광야의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구출의 의미인데,
구출이란 말은 구출이 되려면 압제하는 자. 억누르는 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자, 히브리인들은 홀로 있는 게 아니지요. 히브리인들에게는 구약의 출애굽기에 보면 그들이 누가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함께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히브리인이라는 것이 성립이 돼요. 그들이 만들어졌다 말이지요. 그러니 히브리인들을 건드리는 것은 뭘 건드리는 것이냐 하면 아브라함 언약과 이삭 언약과 야곱언약에 도전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구출이라고 하는 것은 압제하는 것을 먼저 선제로 해요. 압제하는 것.
언약이란 아브라함 언약과 이삭 언약과 야곱 언약의 해당되는 어떤 대상이 있는데 히브리인들입니다. 야곱의 후손들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뭔가 압제하는 거예요. 강제하는 거. “내 권한 속에서 너는 못 빠져나와.” 라는 압제하는 상황이 여기서 형성되어있어요.

언약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느냐 하는 것은 바로 구출하는 방식으로만 설명이 되는데, 구출하는 방식은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가, 압제하는 것. 억누르는 것. 

억누르는 것과 억눌림으로 구조가 마련되어있어요.

그렇다면 이 압제하는 이 세력은 그냥 억누르는 게 아니고 의도가 있다 말이지요.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의도가 뭐냐 하면 언약이 실제화 되지 못하게 하나님의 언약이 실제화 되지 못하게 실제로 현실화 되지 못하게 뭔가 “가만히 있어! 튀어나오지 마!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죽은 자로 있어.” 라고 압제하는 언약에 압제하는 세력, 이걸 저는 반대한다. 반 언약. 언약에 저항하는 세력이 실존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 그들이 또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고 있고요. 악마가. 이 세상 신이니까. 세상 신인 악마가 나중에는 그게 악마가 되지요.

출애굽기 4장 같은 경우 그걸 모세의 지팡이와 뭐와 대비되느냐, 뱀과 대비가 됩니다. 이쪽에는 뱀이 있다면 이쪽에는 지팡이가 있지요. 가운데 드러난 모습은 모세고요. 모세가 뱀도 쥐고 있고 지팡이도 쥐고 있는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왜냐,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될 것이라. 했으니까. 도로 꼬리를 잡으면 도로 지팡이가 되고.

그러니까 모세가 하는 기능 안에는 이 세상에 서로 상반되는 대치되는 두 세력이 영적 세력이 존재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기능적으로 어떤 일들을 기적들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자, 구출이라 하는 것은 억제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언약이 결국 히브리인들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 자체가 이 땅에 실제적으로 구출되는 양상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특정 무리들이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놓은 특정 원리가 이 땅에 등장했다. 이게 구원의 의미가 된다 말입니다. 특정 원리가.

그럼 처음부터 이 특정원리가 활기 치면 되지 않겠느냐, 왜 억눌린 상태에 있느냐, 그것은 바로 억눌림과 탈출했다는 요 계기를 통해서 무엇을 끄집어내느냐 하면, 이 세상에 실제적인 악한 권세가 실제적으로 이 땅을 통치하고 있음을 악한 세력의 존재성을 이런 언약이 투입되고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이 세력에 존재성을 확인하고 증명하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악마가 지배하고 있음을 자기 백성을 미끼로 사용해서 끄집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병들었다와 야고보서에서는 이걸 병 들은 거와 뭐와 관련시키느냐 하면 여기 15절에 이걸 구원과 관련시킵니다. 병든 자를 구원할 때 이 병듬을 무슨 현상으로 보느냐, 죄 지은 현상으로 봐요. 그래서 죄에서부터 구원이라는 것은 실제적이다. 이 세상에서는 이건 어떤 인문학자나 작가나 소설가, 종교, 과학 그런 교리로 만든 게 아니고 실제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죄에서의 구원이 가능하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서 병들었음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가 병들었다는 말이 아니고 병들었다 하는 이 사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인간에 신체라든지 삶의 정황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하지 않고 정상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비정상적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하늘나라에서는 병듬이 없겠지요. 그러나 이 땅에서는 병듬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병들은 것으로 인해서 병이 낫게 되면 도로 이 세상 사람이 되니까 이건 진정한 억압의 압제에서의 벗어남이 안 되잖아요. 그냥 한 때 아팠는데 지금 몸은 멀쩡해. 그리되면 여기에서 어떤 악한 존재의 실제성이 폭로되지 못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병들었을 때에 간구하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자, 기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기도할 때 뭐로 기도하느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하고 있어요. 여기 14절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은 

주님이 여기 계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현실이 지금 현실모습입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알라는 거예요.

병들었다든지 누가 이루어진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이 어떻게 건강하게 될까, 초점 맞추는 게 아니고 병들게 했던, 낫게 했던, 우리가 모든 것이 주님께서 여기서 일으키신 일이라는 거예요. 일으킨 일. 병들었던 안 들었던. 어떤 인간도 건강하다 나중에 병들 때 있잖아요. 병 든 사람만 병이 듭니까. 멀쩡하다고 우기던 사람도 피곤하면 감기 몸살 들리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건강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감기가 들었던, 피곤하던, 멀쩡하던, 그것은 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건강한 사람은 평생가도 병원에 안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본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죄 없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병든 자에 대해서 주님의 어떤 뜻이 있을 겁니다. 라고 다른 사람들이 병들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라는 말이지요. 이 사람의 나타난 경우를 보고 주께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라는 그런 묻는 자세를 가지고 하라는 말입니다.

그걸 통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하신 일, 곧 병 고침이 아니고 구원에 관한 일. 구원에 관한 일 다시 말씀드릴까요. 구원에 관한 일이란 뭐다? 현재 압제하는 세력에 대한 인식. 이 세상은 계속해서 인간의 정신을 주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방해하는 세력이 있음을 병든 사람을 통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이러한 감추어진 현실을 재삼 확인하고 느끼도록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병이 낫던 말든 그 사람은 주의 이름을 확인하는 그 순간 어떤 상태를 확인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상태인 것을 감사하고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찬송한다는 것은 우리 기도한 당사자가 훌륭한 뜻이 아니고 주께서 지금 여기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케 하셨고 병들게 하셨고 구원하셨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 계획이 아니고 주님의 일하심의 현장성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 그것이 바로 찬양의 찬송의 내용이 되겠지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선미래, 오늘 여러 번 합니다. 이게 선 미래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거. 우리는 죽어봐야 안다는데.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 십자가 죽음 이후에 계신 분이 십자가 이후에 일어날 원칙을 여기에 교회 내에서 현장성으로 실제적으로 일들을 일으켜 주시는 거예요. 무슨 일? 구출.

구출이란 바로 압제하는 세력을 존재를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 하나의 예가 되게 되면 또 예가 뒤에 나옵니다만. 다른 예를 제가 미리 말씀드립니다. 바로 한나라는 사람. 사무엘의 엄마지요. 여기 한나라는 여인의 라이벌이 브닌나에요. 브닌나. 이 사람은 아들이 있어요. 아들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나 한나는 아들이 없어요. 남편이 한나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브닌나가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자꾸 뭐냐 하면 정신적으로 압제를 하는 겁니다.

압제를 하니까 한나에서의 구원에는 뭐냐, 아들 없으니까 저주 받았고, 나는 아들 있으니까 복 받았다, 하는 이 원칙을 뒤엎어 가지고 그 원칙 자체에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아들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아들 없음과 있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다는 사실. 그것을 한나가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한나는 아들을 낳고 난 뒤에 도로 아들을 하나님께 아들을 바칩니다. 이름을 사무엘. 하나님께 바친 자라.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 원칙이 나중에 이사야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가 구원을 받는 거예요. 잉태치 못한 자. 브닌나 라는 것은 너무나 세상 적으로 하나님의 복을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거죠.

잉태치 못했다는 것은 없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선 미래라고 하는 것은 죽음 이후에 다시 말해서 여기 눈에 보이는 인간들에게는 없는 사실이 죽음 이후에나 있을 이 사실이, 사실이니까 

이 땅에서는 없음이 이미 있음으로 작용하는 그 현장이 바로 교회고 

바로 그것이 거기서 찬송이 나와야 된다 말입니다.

이 없음과 있음의 이야기가 또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야고보서 마지막에 엘리야의 기도 가운데 나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는 그 시점에 기도할 때에 엘리야의 기도로 인하여 다시 한 번 아까 한 거 복습하지요.

기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뭐 함이라? ①구출함이다. 구출함이라 하는 것은② 압제하는 쪽이 있고, 압제 받는 쪽이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압제 받는 쪽에서 압제 받는 것에서 벗어나면서 과연 ③압제하는 그 세력에 실제가 정체를 밝혀내는 그 과정 속에 성도가 놓여있습니다.

현재 그 엘리야가 속한 나라는 북이스라엘이에요. 북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것을 우상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빠진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빠진 그 신은 우상이 돼요. 그게 여호와가 되던 예수가 되던 삼위일체 되던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들어있지 않은 명칭상 예수가 되던 성령이 되던 여호와가 되던 그건 전부 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 인간세계에서 없음으로 나와요. 없음으로. 없는 거예요. 인간이 찾아도 언약을 찾지를 못합니다. 언약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주도권을 쥐고 일하시거든요.

인간 구원하라고 언약이 있는 거 아니에요. 언약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죽음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을 한 거예요. 언약의 세계, 천국의 세계를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면 이 언약은 없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없음에서부터 있음이라는 언약 절차를 알리기 위해서 북이스라엘의 통치자가 아합이에요. 아합왕이 정치적으로 우상을 섬겼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을 주도해서 아합을 섬겼고 온 백성들도 다 아합 왕이 그렇다 하니까 다 따라갈 수밖에 없지요. 왜? 정책적이니까. 만약에 아합을 바알신을 안 섬기면 죽는 수가 있기 때문에. 나라가 법으로 정해놓으면 전할 수밖에 없지요. 아무도 끽소리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바로 그 시대에 선미래지요. 주께서 선지자에게 계시를 줬습니다. 그 계시가 행동이 뭐냐 하면 기도를 해요. 어떤 기도를 하느냐 하면 현재 없음에서 있음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있음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없음으로 바꾸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겁니다.

엘리야가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았다는 말은 농작물이 없다는 뜻이에요. 농산물을 없앤다는 것입니다. 모든 있음의 은혜성을 모르니까 이게 여호와로부터 오는 걸 모르니까 주께서는 다시 여호와의 은혜가 없는 상태를 만들어버려요.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그러니까 가뭄이 들어서 기도한 게 아니고 가뭄이 안 들었는데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거예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어요.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 게 아니고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어요. 엘리야가. 그러니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거예요.

엘리야가 심술이 사나워서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그래요.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소위 있음을 있다는 것, 이스라엘 아합왕이 있다는 것을 전부 다 바알 신의 은혜로 다 돌린 거예요. 바알신은 언약이 없기 때문에 바알신과 인간 사이는 언약 요소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정성과 열심히만 관계를 이어나가면 그 신과의 관계가 좋게 유지된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종교입니다.

그러니 이건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다고 보면 돼요. 언약이 없으니까 언약 자리에 인간이 열성으로 다 채워 넣어 들어가는 거예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하게 되면 교회에 부흥되면 그게 천국인 줄 알고 있다 이 말이죠.

모든 건 없음의 자리로. 이게 원위치거든요. 

없는 자리에. 없어야 마땅한 자리, 내가 죽어야 마땅한 자리, 산다는 것이 기적적이고 신기한 그 자리, 

그 자리 출발점이 그게 하나님의 찬송을 드리는 기본 자리다 이 말입니다.

병들지 않은 사람이 병들어서 기도한다고 해서 병 들은 사람은 착하고, 병들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라는 뜻이 아니고 바로 마음을 하나로 같은 심정으로 하는 거예요. 주께서 일이 있어서 병들게 했다면 그렇다면 우리도 주를 아는데 있어서 우리도 병들지 않았지만, 병들은 마음과 같은 심정이 있어줘야 구출, 구원이라는 의미가 새롭게 감사로 다가오는 거예요. 

기도하라니까 비가 안 오니까 농산물이 없겠지요. 다시 기도하니까 비가 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시 기도한즉 18절에 하늘이 비를 주고, 하늘이 비를 주는 거예요. 땅이 열매를 맺지요. 주시는 거예요. 언약은 없는 건데 줘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함부로 장담하거나 맹세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이미 율법을 줬어요. 주님이 줬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인내로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주의 사람이 이미 된 체로. 이게 우리 안에 있는 선미래. 주께서 하신 일에 모든 종결이 우리에게 이미 포함이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태도의 확장이 오늘날 교회이어야 하고 오늘날 참 이스라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뭐냐 형제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19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 오게 되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러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엘리야 같은 입장,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친히 놀랍게도 하늘의 은사를 줬어요.

야고보서1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은사를 줘가지고 이 땅에 형제라는 자들을 이스라엘이지요. 흩어진 이스라엘 형제라는 자들을 하나님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신기하게 만들어준 거예요.

정리하면, 인간이 아니라 인간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형제가 되는 거예요. 형제가 되려면 여기에 주님의 율법에 개입되어야 돼요. 율법의 개입, 완성의 개입, 예수님의 개입이 되는 거예요. 야고보서5장  주의 이름이 개입되는 거예요.

그러면 개입되게 되면 인간이 예수님을 이용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지시를 받게 되어있어요. 지시 받는 자가 누구냐, 형제 됩니다. 그럼 지시 받았다, 안 받았다, 내용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그 내용이 언약 적이어야 됩니다.

언약 적이라는 말은 선미래 적입니다. 미리 장차에 우리가 심판받아야 마땅함을 미리 일찍이 우리가 알아채는 거예요. 영안의 눈이 열려서.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미혹이라는 것은 바로 언약이 진리가 되면 바로 아까 이야기한 구원이 성사되는 환경에서는 압제하는 자들이 있다 했지요. 그게 반 언약. 언약에 반대하고 언약을 적대시하고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늘 강의 처음에 시작했잖아요. 인간 대 인간으로 사이좋게 의논하면 일이 잘 풀린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협의해서 협동해서 지혜를 짜내서 우리의 성실과 열성과 지혜로서 미래를 만들어 나가면 될 게 아니냐, 하는 이러한 분위기, 풍토, 이게 바로 야고보서에서는 그게 바로 율법을 빼놓은 이 세상, 악한 세상에 분위기라고 이렇게 야고보를 통해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이걸 진리라고 하고 여기서 떠난 것을 믿음에서 떠났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까 시간적으로 말해서 이미 마지막의 결과를 이미 함유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 중에 한 사람을 아까 했지요. 욥이라고. 결말을 안다. 욥은 어떤 사람이다? 결말을 아는 사람.

결말을 아는 사람의 대표자가 뭐냐, 대표적인 인물 중에 하나가 뭐냐 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욥처럼 살면 된다. 그게 바로 믿음이고, 이러한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분명히 압제하는 자들이 그 실체가 드러날 건데 그게 뭐냐, 미혹하는 자. 진리를 떠난 자. 그렇게 되지요.

20절에 보면, 죄인을 미혹한 자에서 돌아선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한다.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라. 이 야고보서의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너희로 하여금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 언약 말씀, 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돌아서게 하라. 그래서 야고보서를 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귀한 성경 말씀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모든 결과를 다 아는 입장에서 해석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안양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앙속에서  (0) 2020.05.26
신기함 200416 이근호  (0) 2020.05.01
혀 200212 이근호   (0) 2020.02.22
꿈과 현실 191212 이근호   (0) 2019.12.23
부정성 191108 이근호   (0) 2019.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