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00312b야고보서 정리3, 선(先)미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중단 없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되어있습니다. 시간에 준해서 계속해서 이어진다고 되어있어요. ‘자아란 의식의 중단 없는 흐름’ 중단 없는 흐름이니까 결국은 여러 가지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경우를 겪더라도 하나의 일화에요. 하나의 일화로 구성되게 됩니다. 내 인생은 이렇다. 라고 그걸 자서전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요.
그러면 이게 중단 없다는 게 문제가 되는데. 중단 없는 흐름이기 때문에 과거까지 현재 자신에 의식 속에, 중단이 없기 때문에 과거까지 겹겹이, 첩첩이 누적이 되어있어요. 쌓이게 돼요. 그러면 현재에 정신적 중량, 또는 책임감 같은 것이 너무 무겁습니다. 너무 무거워요. 현재 인간의 모든 상항이.
그래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자기 중량의 무게를 이렇게 짓눌려 살게 됩니다. 과거에 내가 이런 인간인데. 라는 그것에 계속해서 강한 중량에 의해서 눌려서 낑낑거리면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인생이라는 것이. 눌려 사니까 여기서 인간은 갈수록 더 큰 힘을 요구하게 되어있어요. 인생이란 자체가 자기 큰 짐이 되니까. 자기 무게 되니까. 그걸 이렇게 떨쳐버리려면 더 큰 힘을 본인이 원하게 되어있어요.
더 큰 힘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장담하는 거예요. 장담하는 것이 실제 현실이 될 때 자기는 큰 소리 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된다고 했지? 거봐! 나 잘났잖아.”이리 되는 거예요.
그걸 야고보서5장 12절,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장담하는 이걸 가지고 뭐냐, 맹세라고 하는 거예요. 맹세.
그런데 여기서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장담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그것은 아까도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율법의 끝이 어디로 이어진다고 했던가요? 심판으로 이어지지요. 이 땅에서. 그래야 이 땅이 제거될 만한 대상이 된다는 것이 드러나니까. 율법의 끝은 심판으로 이어져요. 심판. 심판주인데, 이게 뭐냐 하면 결국 인간이 제대로 율법을 안다는 것은, 자칫하면 율법가지고 더 큰 힘을 도모할 수가 있어요. 내가 말씀 지켰으니까 큰 복 주시옵소서. 큰 힘으로 나를 용기 있게 붙잡아주옵소서. 이렇게 나올 수 있다 말이죠.
하지만, 율법이 가는 그 마지막 방향. 선미래. 미래는 결국은 어디에 도달하느냐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을 통해서 다 보여줬어요. 율법의 끝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십자가를 만날 때까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바 없다. 이렇게 보면 돼요.
내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결합이 될 때까지는 내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 수는 없게 되어있어요. 전부 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오해와 곡해와 그리고 오인. 오인 잘못 생각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 오해하고 있고 곡해하고 있고 오인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달릴 때까지. 십자가 만날 때까지.
율법은 예수님이 율법 따라 살았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거예요. 예수님이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십자가 진 게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 따라가다 보니까, 예수님이 율법대로 따라가 보니까 십자가에 도달된 겁니다. 심판의 자리까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리까지 오게 된 거예요.
따라서 그 코스, 율법을 줬다는 것은 성도가 율법에 따른 코스로 따라 간다는 것은, 그 마지막 미래가 미리 우리에게 주워졌다면 그 마지막은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그 곳으로 우리를 성령께서 늘 데리고 가시고 이끄시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이 세상이 복음에 비해서 저는 지금 복음의 정반대를 종교로 봅니다. 물론 복음의 반대가 과학일 수 있고, 정치일 수 있지만. 종교라 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의 모든 집대성한 것이 종교기 때문에 종교 안에 모든 인간의 시도와 소망과 그리고 기대치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종교를 복음의 반대로 봐요.
종교라 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신으로 불멸의 존재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모든 아이디어와 계획이 그 종교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러면 인간의 종교의 내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옛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냥 사람들은 이렇게 보게 돼요. 옛날 고대 사람들은 사냥을 많이 했거든요. 사냥, 수렵 또는 사냥, 채집 그냥 열매를 따먹는 수렵, 채집 사회가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정착해서 정착 농경시대 이리 되는데. 수렵 채집이 하는 사냥하는 이때에 인간들의 종교. 신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저 강 건너편에 순록 떼가 원래 작년과 3년 전과 4년 전에 의하면 항상 이때에 순록들이 요 강나루 여기에 늘 거쳐야 되고 오게 되어있는데 올해는 그 때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순록 떼가 사냥감이 오지 않을 때는 우리가 신이 뭔가 노했다, 라는 식으로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냥하는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신이라 하는 것은 동굴에도 그 그림이 나와 있는데요. 신이라 하는 것은 동굴의 그림에 의하면 신이 이 땅에 작용할 때 순환성, 또는 주기성으로 나타난다고 그들은 믿었어요. 이걸 이제 오늘날 과학에서는 대자연의 순환성, 주기성 하는데. 대자연속에 신이 여기서 관여한다고 보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순수하고 순진한 믿음처럼 그렇게 보이겠지요.
그런데 복음과의 차이는 뭐지요? 왜 순환성과 주기성 이 대자연이 순환되고 주기성을 갖고 있어야 되느냐, 그 이유에 대해서 인간들은 뭐냐 하면 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복음이라 하는 복음은 어디를 만나야 복음을 안다고요? 복음은 율법이 개입됐고, 선미래로. 율법이 결국 어디로 인도한다고 했습니까? 율법이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죠.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죽어 마땅한 존재인 것을 알려준 이것이 복음이잖아요.
그럼 죽어 마땅함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돼요. 왜 죽어 마땅하냐, 그것은 이 세상 전체가 바로 이미 가짜 신에 의해서 그동안 인간과 신이 한 식구처럼 한 마음가짐이 한 식구처럼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인류의 모든 역사가 그걸 증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과거만 그렇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교회를 다니나 안 다니나 종교가 없는 무교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기본적으로 내가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대자연은 어떤 질서와 법칙을 갖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순환성과 주기성이 있어야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야 신이라는 것이 이성적으로 안정적으로 신 나름대로의 어떤 성격이 갖추어져 있는 그러한 초월적 존재라야 인간이 믿을 만하거든요.
말이 그만 길어졌는데. 쉽게 말해서 신이란 누가 만드는가, 인간의 여망, 인간이 자기 살기 위해서 어떤 일정한 법칙과 원칙을 가진 초월적 존재이었으면 좋겠네. 라는 그것을 인하여 신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있는 이상은 신은 없을 수가 없지요. 종교를 교회를 안가도 신이 있다니까요. 주기성고 순환성, 원칙성, 합리성, 세상은 혼돈이 아니야. 어떤 질서가 있을 거야. 그런 자체가 전부 다 무얼 의식합니까? 초월적 신을 의식하고 있는 거예요.
그동안 얼마나 인간들이 이 초월적 신에게 앞에서 맹세를 하고 장담을 했겠습니까? “하나님, 우리가 드리는 제물과 우리에 대한 이 착함을 받으시고 제발 우리가 설정한 그 원칙과 주기성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때가 되매 순록 떼가 사냥감이 그 날 꽃피는 계절되게 되면 고 시점에 그 강 건너에 나타나게 하옵소서.” 사냥 시대니까. 또 농사지으면 농사짓는 나름대로 또 뭐가 있겠지요. 고기 잡는 사람은 고기 잡는 사람대로 뭐가 있을 것이고.
신의 세계가 과학을 통해서 과학 질서로 바뀌었지만, 과학 질서가 이게 굉장히 추상적입니다. 신이 갖고 있는 신의 대자연의 질서를 응축한 거예요. 왜 이렇게 응축하고 싶어 하느냐, 왜 질서를 찾고 싶어 하느냐, 뭐 대자연이 궁금해서가 아니에요. 내가 밥 먹고 사는데 그래야만 대자연은 그래야만 한다는 겁니다.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야만 한다는 거예요.
그런 어떤 질서가 갖추어지고 원칙이 있어야 이 맹세할 맛이 나거든요. 맹세라 하는 것은 질서가 갖추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요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어떤 곰이 청년이 우연히 길을 가다가 곰이 길가에 청년이 가는데 저 한 10미터 밖에서 숲에서 나와서 도로를 가로질러서 이쪽 반대 숲으로 지나갔다. 지나갔으면 옛날 고대인의 사고방식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에요.
그럼 마을사람들이 웅성웅성하지요. 곰은 신성하다고 공통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곰이 지나가고 난 뒤에 그 청년이 시름시름 아파요. 그 아픈 이유를 찾는 겁니다. 아플 때는 이유를 알아야 병을 고칠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유가 뭐냐, 신성한 곰이 지나가는데 곰과의 만남 때문에 몸이 병이 났다. 따라서 곰에게 어떤 먹잇감을 주던지 해서 곰을 달래야 니 병이 낫는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고대인들이. 그걸 토테미즘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동물이 인간의 조상이다. 정신적 조상이다 이리 보는 겁니다.
토테미즘, 인간의 조상들은 다 동물이었다. 그 말입니다. 왜냐 하면 신은 감추어진 곳에서 오는데 그 감추어진 곳이 뭐냐, 수풀이에요. 숲이다 말이죠. 마을 뒤편에 숲에 신이 살고 있고 숲에서 신의 졸개들 정령들이 살고 있는 거예요. 또 요정들이 살고 있고. 북유럽의 오딘 신화든 모든 신화가 다 그래요. 우리가 신화를 가지고 과학시대에는 그게 미신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 합리성이 오늘날 과학에 그대로 다 녹아져 있습니다.
과학질서를 위한 과학탐구가 아니에요. 인간의 삶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과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문제는 왜 그래야 되느냐는 것이에요. 인간이 곧 뭐냐 하면 인간이 곧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신이다. 인간이 곧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곧 최고다. 절대자다. 이런 의식을 인간들이 갖고 있습니다.
동네에 가가지고 동네 같은 아주머니들끼리 이야기하면서 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인간이 최고여야 되고 인간이 우선이어야 되고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놓아야 된다는 그 의식으로서 서로 정답게, “요새 나물 나왔습니까?” 라든지 “요새 이거 얼마 합니까?” 이리 죽 물어보는 바탕에는 전부 다 이런 게 깔려있다 말이죠.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 사회는 인간과 인간만 의논한다고요. 여기 율법이 개입되지 않아요.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이 개입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 구약 이스라엘 나라의 특징이지, 다른 이방나라에서는 그것은 언급이 없어요. 그런 것은 그들의 특징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1장이 뭐라고 되어있던가요? 흩어진 열두지파로 되어 있잖아요. 다시 말씀드린다면 성경은 인간이 그렇게 곱게 믿을 책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보면 미쳤다 할 정도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가 성경을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니에요. 모든 율법의 완성되신 십자가 되신 주님과의 만남에서 십자가 앞에서 주님 앞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신으로 굴림하고 신으로 행세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아까 이야기를 다시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출생을 했다. 그리고 죽 살았다. 어디에 막혔다고 했던가요? 인간은 죽음에 막혀있지요. 그 다음 죽음 이후는 상상력이 막 동원됩니다. 확인되지 않은 상상력.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을 십자가로서 역사적으로 분명히 했습니다. 십자가로 분명히 죽었어요. 예수님의 무덤이 있어요. 비록 빈 무덤이지만. 예수님 무덤이 있다 말이죠.
그러면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은 땅에서 부터가 아니라 하늘에서 온다고 했어요. 하늘에서 온다는 말은 십자가 그 이후의 세계로부터 선미래. 미리 도달한 미래지요. 이 땅에 현재에 미리 도착한 미래. 죽음 이후의 결과를 미리 여기 현장에다가 집어넣은 겁니다. 은사라는 게.
그러면 이쪽 십자가 이후의 세계가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바로 인간들이 알 수 없었던 죽음이후의 세계가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지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 그러면 성도에게 있어서 성도의 삶이 뭐냐, 어느 삶이 더 중요하냐 말이죠. 하늘나라가 분명히 있음을 안다면 이 나라가 분명히 있음을 안다면, 이 나라의 입장에서 이 나라의 안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해서 평가도 이 천국의 입장에 준해서 평가를 내려야지, 그냥 이 세상 국한해서 자기를 책망한다든지 평가내리는 것은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여기 야고보서5장에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맹세하지 말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장담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모든 해답과 결론은 주님에 의해서 지어지고 그리고 너희들 자체 존재가 주님의 완성하신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이 땅에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살아가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아까 이야기한 종교적인 우리의 심상 또는 마음가짐이 죄로서 다 드러나는 거예요. 이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 이 죽음이 끝이라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고대인들은 무슨 문화가 있느냐 하면 장례문화가 있어요. 이것은 우리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를 보면 장례문화가 문화를 통해서 당시에 어떤 신을 믿었고 어떤 종교를 가졌느냐가 다 드러나는 겁니다. 요 장례문화에 요즘하고 차이점은 고대인의 차이점은 사람이 죽을 때 옆에 같이 가는 물품들이 있어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부장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후대사람들이 나중에 택지개발 한다든지 건설 회사들이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다 보니까 옛날 무덤 같은 것이 발굴됐다 말이죠. 보게 되면 사람은 뼈 조각이 다 깨어졌어요. 그런데 뭐는 그래도 생생하냐 하면 부장품물은 생생하다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사라지고 물품은 남고. 이게 얼마나 인간이 허망한 겁니까.
그 전까지는 인간이 이 물품을 자기가 소유했다고 했지만, 소유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물건이 인간보다 더 오래있어요. 인간이 물품보다 더 쇠퇴해진다 이 말입니다. 이게 장례문화거든요.
거기에 비해서 우리의 주님께서는 부장품은 필요 없어요. 우리 자신이 소실되고 소멸되는 우리 자신이 무엇의 작품이냐 하면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작품이란 오래 산다는 게 아니고 죽을 때는 죽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그 하늘나라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출생되고 그리고 죽을 때까지 눈에 보이는 이 세계에서는 뭐로 등장하느냐 바로 십자가 복음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 율법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그런 것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죽었다가 부활했다. 라는 이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자기백성을 출생시키고 살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곧 인간이라 하는 것은 살다 죽는 게 아니고 이게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적어볼게요.
‘인간이란 살다 죽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죽음이 창조한 거예요.’ 죽음이 창조.
더 정확히 해서 죽음후의 세계가 창조한 거예요. 죽음후의 세계가.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창조주를 찾아가는 필수적인 절차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성도가 죽는다는 것은 진짜 자기의 본래의 창조주를 찾아가는 그런 과정으로서의 당연한 겁니다.
죽음이 창조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말을 안 하는 이유는 이 인간세계에서는 종교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종교는 살아있다고 여기면서 그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하는데,
그런 식으로 신과 인간이 엮이는 것이 아니다 말이죠.
왜냐 그런 신은 인간 본인이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가짜 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짜 신은 이 땅에 와서 사람에게 와서 십자가로 죽었다 말이죠.
그렇다면 이게 뭐냐 하면 죽음이 인간을 창조한 거예요. 성도를 창조한 거예요.
죽음 쪽으로 간다는 것은 창조주를 만나러 가는 거죠.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호하다 이 말입니다.
보다 내용을 의미를 분명하게 짚어주려면 죽음이 우리를 창조했다고 하는 말이 옳아요. 죽음이.
십자가 죽음이지요. 나의 죽음이 아니고. 십자가 죽은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창조주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창조했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고 예수님의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자기 죽음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으니까
죽음이 우리를 창조했다, 이끈다, 인도한다, 그 말이 성립이 된다고 저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굳이 하나님이 창조했다, 예수님이 창조했다, 하지 않고 실질적인 현실성 있게 죽음이 우리를 창조했다고 하는 그 말을 왜 굳이 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야고보서5장 13절에서 마지막 20절까지 내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로서 야고보서 정리를 마감하겠습니다.
자, 아까 했던 걸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인간은 자기 중량에 눌려산다. 자기 중량에 자기 무게에 눌려산다. 만약에 그 인간이 죽어버리면 더 이상 눌릴 게 없겠지요. 이걸 가지고 야고보서에서는 뭐냐 하면 이걸 가지고 15절에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
야고보서에서 또는 성경 전체에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나의 자리가 없어지는 겁니다. 나의 자리가 사라지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건 간단한 이유를 들 수 있어요. 구약에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구출의 의미인데, 구약에서 구원이란 구출의 의미입니다. 신약에서의 구원이란 죄를 씻어주는 의미지만, 구약에서는 구출의 의미에요. 지역적으로 애굽에 살 거냐, 약속의 땅에 살거냐, 지역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으니까 지리적으로 애굽에 있는 인간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해요. 히브리서에서도 그렇게 안식의 때가 남아있다 해서 광야의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구출의 의미인데, 구출이란 말은 구출이 되려면 압제하는 자. 억누르는 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자, 히브리인들은 홀로 있는 게 아니지요. 히브리인들에게는 구약의 출애굽기에 보면 그들이 누가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함께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히브리인이라는 것이 성립이 돼요. 그들이 만들어졌다 말이지요. 그러니 히브리인들을 건드리는 것은 뭘 건드리는 것이냐 하면 아브라함 언약과 이삭 언약과 야곱언약에 도전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구출이라고 하는 것은 압제하는 것을 먼저 선제로 해요. 압제하는 것. 언약이란 아브라함 언약과 이삭 언약과 야곱 언약의 해당되는 어떤 대상이 있는데 히브리인들입니다. 야곱의 후손들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뭔가 압제하는 거예요. 강제하는 거. “내 권한 속에서 너는 못 빠져나와.” 라는 압제하는 상황이 여기서 형성되어있어요.
언약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느냐 하는 것은 바로 구출하는 방식으로만 설명이 되는데, 구출하는 방식은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가, 압제하는 것. 억누르는 것.
억누르는 것과 억눌림으로 구조가 마련되어있어요.
그렇다면 이 압제하는 이 세력은 그냥 억누르는 게 아니고 의도가 있다 말이지요.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의도가 뭐냐 하면 언약이 실제화 되지 못하게 하나님의 언약이 실제화 되지 못하게 실제로 현실화 되지 못하게 뭔가 “가만히 있어! 튀어나오지 마!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죽은 자로 있어.” 라고 압제하는 언약에 압제하는 세력, 이걸 저는 반대한다. 반 언약. 언약에 저항하는 세력이 실존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 그들이 또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고 있고요. 악마가. 이 세상 신이니까. 세상 신인 악마가 나중에는 그게 악마가 되지요.
출애굽기 4장 같은 경우 그걸 모세의 지팡이와 뭐와 대비되느냐, 뱀과 대비가 됩니다. 이쪽에는 뱀이 있다면 이쪽에는 지팡이가 있지요. 가운데 드러난 모습은 모세고요. 모세가 뱀도 쥐고 있고 지팡이도 쥐고 있는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왜냐,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될 것이라. 했으니까. 도로 꼬리를 잡으면 도로 지팡이가 되고.
그러니까 모세가 하는 기능 안에는 이 세상에 서로 상반되는 대치되는 두 세력이 영적 세력이 존재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기능적으로 어떤 일들을 기적들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자, 구출이라 하는 것은 억제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언약이 결국 히브리인들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 자체가 이 땅에 실제적으로 구출되는 양상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특정 무리들이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놓은 특정 원리가 이 땅에 등장했다. 이게 구원의 의미가 된다 말입니다. 특정 원리가.
그럼 처음부터 이 특정원리가 활기 치면 되지 않겠느냐, 왜 억눌린 상태에 있느냐, 그것은 바로 억눌림과 탈출했다는 요 계기를 통해서 무엇을 끄집어내느냐 하면, 이 세상에 실제적인 악한 권세가 실제적으로 이 땅을 통치하고 있음을 악한 세력의 존재성을 이런 언약이 투입되고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이 세력에 존재성을 확인하고 증명하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악마가 지배하고 있음을 자기 백성을 미끼로 사용해서 끄집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병들었다와 야고보서에서는 이걸 병 들은 거와 뭐와 관련시키느냐 하면 여기 15절에 이걸 구원과 관련시킵니다. 병든 자를 구원할 때 이 병듬을 무슨 현상으로 보느냐, 죄 지은 현상으로 봐요. 그래서 죄에서부터 구원이라는 것은 실제적이다. 이 세상에서는 이건 어떤 인문학자나 작가나 소설가, 종교, 과학 그런 교리로 만든 게 아니고 실제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죄에서의 구원이 가능하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서 병들었음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가 병들었다는 말이 아니고 병들었다 하는 이 사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인간에 신체라든지 삶의 정황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하지 않고 정상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비정상적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하늘나라에서는 병듬이 없겠지요. 그러나 이 땅에서는 병듬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병들은 것으로 인해서 병이 낫게 되면 도로 이 세상 사람이 되니까 이건 진정한 억압의 압제에서의 벗어남이 안 되잖아요. 그냥 한 때 아팠는데 지금 몸은 멀쩡해. 그리되면 여기에서 어떤 악한 존재의 실제성이 폭로되지 못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병들었을 때에 간구하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자, 기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기도할 때 뭐로 기도하느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하고 있어요. 여기 14절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은
주님이 여기 계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현실이 지금 현실모습입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알라는 거예요.
병들었다든지 누가 이루어진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이 어떻게 건강하게 될까, 초점 맞추는 게 아니고 병들게 했던, 낫게 했던, 우리가 모든 것이 주님께서 여기서 일으키신 일이라는 거예요. 일으킨 일. 병들었던 안 들었던. 어떤 인간도 건강하다 나중에 병들 때 있잖아요. 병 든 사람만 병이 듭니까. 멀쩡하다고 우기던 사람도 피곤하면 감기 몸살 들리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건강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감기가 들었던, 피곤하던, 멀쩡하던, 그것은 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건강한 사람은 평생가도 병원에 안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본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죄 없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병든 자에 대해서 주님의 어떤 뜻이 있을 겁니다. 라고 다른 사람들이 병들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라는 말이지요. 이 사람의 나타난 경우를 보고 주께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라는 그런 묻는 자세를 가지고 하라는 말입니다.
그걸 통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하신 일, 곧 병 고침이 아니고 구원에 관한 일. 구원에 관한 일 다시 말씀드릴까요. 구원에 관한 일이란 뭐다? 현재 압제하는 세력에 대한 인식. 이 세상은 계속해서 인간의 정신을 주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방해하는 세력이 있음을 병든 사람을 통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이러한 감추어진 현실을 재삼 확인하고 느끼도록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병이 낫던 말든 그 사람은 주의 이름을 확인하는 그 순간 어떤 상태를 확인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상태인 것을 감사하고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찬송한다는 것은 우리 기도한 당사자가 훌륭한 뜻이 아니고 주께서 지금 여기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케 하셨고 병들게 하셨고 구원하셨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 계획이 아니고 주님의 일하심의 현장성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 그것이 바로 찬양의 찬송의 내용이 되겠지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선미래, 오늘 여러 번 합니다. 이게 선 미래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거. 우리는 죽어봐야 안다는데.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 십자가 죽음 이후에 계신 분이 십자가 이후에 일어날 원칙을 여기에 교회 내에서 현장성으로 실제적으로 일들을 일으켜 주시는 거예요. 무슨 일? 구출.
구출이란 바로 압제하는 세력을 존재를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 하나의 예가 되게 되면 또 예가 뒤에 나옵니다만. 다른 예를 제가 미리 말씀드립니다. 바로 한나라는 사람. 사무엘의 엄마지요. 여기 한나라는 여인의 라이벌이 브닌나에요. 브닌나. 이 사람은 아들이 있어요. 아들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나 한나는 아들이 없어요. 남편이 한나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브닌나가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자꾸 뭐냐 하면 정신적으로 압제를 하는 겁니다.
압제를 하니까 한나에서의 구원에는 뭐냐, 아들 없으니까 저주 받았고, 나는 아들 있으니까 복 받았다, 하는 이 원칙을 뒤엎어 가지고 그 원칙 자체에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아들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아들 없음과 있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다는 사실. 그것을 한나가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한나는 아들을 낳고 난 뒤에 도로 아들을 하나님께 아들을 바칩니다. 이름을 사무엘. 하나님께 바친 자라.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 원칙이 나중에 이사야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가 구원을 받는 거예요. 잉태치 못한 자. 브닌나 라는 것은 너무나 세상 적으로 하나님의 복을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거죠.
잉태치 못했다는 것은 없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선 미래라고 하는 것은 죽음 이후에 다시 말해서 여기 눈에 보이는 인간들에게는 없는 사실이 죽음 이후에나 있을 이 사실이, 사실이니까
이 땅에서는 없음이 이미 있음으로 작용하는 그 현장이 바로 교회고
바로 그것이 거기서 찬송이 나와야 된다 말입니다.
이 없음과 있음의 이야기가 또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야고보서 마지막에 엘리야의 기도 가운데 나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는 그 시점에 기도할 때에 엘리야의 기도로 인하여 다시 한 번 아까 한 거 복습하지요.
기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뭐 함이라? ①구출함이다. 구출함이라 하는 것은② 압제하는 쪽이 있고, 압제 받는 쪽이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압제 받는 쪽에서 압제 받는 것에서 벗어나면서 과연 ③압제하는 그 세력에 실제가 정체를 밝혀내는 그 과정 속에 성도가 놓여있습니다.
현재 그 엘리야가 속한 나라는 북이스라엘이에요. 북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것을 우상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빠진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빠진 그 신은 우상이 돼요. 그게 여호와가 되던 예수가 되던 삼위일체 되던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들어있지 않은 명칭상 예수가 되던 성령이 되던 여호와가 되던 그건 전부 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 인간세계에서 없음으로 나와요. 없음으로. 없는 거예요. 인간이 찾아도 언약을 찾지를 못합니다. 언약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주도권을 쥐고 일하시거든요.
인간 구원하라고 언약이 있는 거 아니에요. 언약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죽음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을 한 거예요. 언약의 세계, 천국의 세계를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면 이 언약은 없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없음에서부터 있음이라는 언약 절차를 알리기 위해서 북이스라엘의 통치자가 아합이에요. 아합왕이 정치적으로 우상을 섬겼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을 주도해서 아합을 섬겼고 온 백성들도 다 아합 왕이 그렇다 하니까 다 따라갈 수밖에 없지요. 왜? 정책적이니까. 만약에 아합을 바알신을 안 섬기면 죽는 수가 있기 때문에. 나라가 법으로 정해놓으면 전할 수밖에 없지요. 아무도 끽소리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바로 그 시대에 선미래지요. 주께서 선지자에게 계시를 줬습니다. 그 계시가 행동이 뭐냐 하면 기도를 해요. 어떤 기도를 하느냐 하면 현재 없음에서 있음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있음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없음으로 바꾸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겁니다.
엘리야가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았다는 말은 농작물이 없다는 뜻이에요. 농산물을 없앤다는 것입니다. 모든 있음의 은혜성을 모르니까 이게 여호와로부터 오는 걸 모르니까 주께서는 다시 여호와의 은혜가 없는 상태를 만들어버려요.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그러니까 가뭄이 들어서 기도한 게 아니고 가뭄이 안 들었는데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거예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어요.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 게 아니고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어요. 엘리야가. 그러니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거예요.
엘리야가 심술이 사나워서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그래요.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소위 있음을 있다는 것, 이스라엘 아합왕이 있다는 것을 전부 다 바알 신의 은혜로 다 돌린 거예요. 바알신은 언약이 없기 때문에 바알신과 인간 사이는 언약 요소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정성과 열심히만 관계를 이어나가면 그 신과의 관계가 좋게 유지된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종교입니다.
그러니 이건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다고 보면 돼요. 언약이 없으니까 언약 자리에 인간이 열성으로 다 채워 넣어 들어가는 거예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하게 되면 교회에 부흥되면 그게 천국인 줄 알고 있다 이 말이죠.
모든 건 없음의 자리로. 이게 원위치거든요.
없는 자리에. 없어야 마땅한 자리, 내가 죽어야 마땅한 자리, 산다는 것이 기적적이고 신기한 그 자리,
그 자리 출발점이 그게 하나님의 찬송을 드리는 기본 자리다 이 말입니다.
병들지 않은 사람이 병들어서 기도한다고 해서 병 들은 사람은 착하고, 병들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라는 뜻이 아니고 바로 마음을 하나로 같은 심정으로 하는 거예요. 주께서 일이 있어서 병들게 했다면 그렇다면 우리도 주를 아는데 있어서 우리도 병들지 않았지만, 병들은 마음과 같은 심정이 있어줘야 구출, 구원이라는 의미가 새롭게 감사로 다가오는 거예요.
기도하라니까 비가 안 오니까 농산물이 없겠지요. 다시 기도하니까 비가 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시 기도한즉 18절에 하늘이 비를 주고, 하늘이 비를 주는 거예요. 땅이 열매를 맺지요. 주시는 거예요. 언약은 없는 건데 줘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함부로 장담하거나 맹세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이미 율법을 줬어요. 주님이 줬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인내로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주의 사람이 이미 된 체로. 이게 우리 안에 있는 선미래. 주께서 하신 일에 모든 종결이 우리에게 이미 포함이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태도의 확장이 오늘날 교회이어야 하고 오늘날 참 이스라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뭐냐 형제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19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 오게 되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러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엘리야 같은 입장,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친히 놀랍게도 하늘의 은사를 줬어요.
야고보서1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은사를 줘가지고 이 땅에 형제라는 자들을 이스라엘이지요. 흩어진 이스라엘 형제라는 자들을 하나님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신기하게 만들어준 거예요.
정리하면, 인간이 아니라 인간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형제가 되는 거예요. 형제가 되려면 여기에 주님의 율법에 개입되어야 돼요. 율법의 개입, 완성의 개입, 예수님의 개입이 되는 거예요. 야고보서5장 주의 이름이 개입되는 거예요.
그러면 개입되게 되면 인간이 예수님을 이용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지시를 받게 되어있어요. 지시 받는 자가 누구냐, 형제 됩니다. 그럼 지시 받았다, 안 받았다, 내용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그 내용이 언약 적이어야 됩니다.
언약 적이라는 말은 선미래 적입니다. 미리 장차에 우리가 심판받아야 마땅함을 미리 일찍이 우리가 알아채는 거예요. 영안의 눈이 열려서.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미혹이라는 것은 바로 언약이 진리가 되면 바로 아까 이야기한 구원이 성사되는 환경에서는 압제하는 자들이 있다 했지요. 그게 반 언약. 언약에 반대하고 언약을 적대시하고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늘 강의 처음에 시작했잖아요. 인간 대 인간으로 사이좋게 의논하면 일이 잘 풀린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협의해서 협동해서 지혜를 짜내서 우리의 성실과 열성과 지혜로서 미래를 만들어 나가면 될 게 아니냐, 하는 이러한 분위기, 풍토, 이게 바로 야고보서에서는 그게 바로 율법을 빼놓은 이 세상, 악한 세상에 분위기라고 이렇게 야고보를 통해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이걸 진리라고 하고 여기서 떠난 것을 믿음에서 떠났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까 시간적으로 말해서 이미 마지막의 결과를 이미 함유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 중에 한 사람을 아까 했지요. 욥이라고. 결말을 안다. 욥은 어떤 사람이다? 결말을 아는 사람.
결말을 아는 사람의 대표자가 뭐냐, 대표적인 인물 중에 하나가 뭐냐 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욥처럼 살면 된다. 그게 바로 믿음이고, 이러한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분명히 압제하는 자들이 그 실체가 드러날 건데 그게 뭐냐, 미혹하는 자. 진리를 떠난 자. 그렇게 되지요.
20절에 보면, 죄인을 미혹한 자에서 돌아선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한다.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라. 이 야고보서의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너희로 하여금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 언약 말씀, 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돌아서게 하라. 그래서 야고보서를 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귀한 성경 말씀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모든 결과를 다 아는 입장에서 해석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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