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숙경

십자가 증거

아빠와 함께 2020. 5. 1. 10:30
2020-04-30 10:56:20조회 : 39         
Testifying to The Cross 십자가 증거이름 : 함숙경 (IP:121.149.196.6)
title : Testifying to The Cross 십자가 증거
preacher : pastor Lee Geunho
text : Philippians 1: 28-30
date : April 26, 2020

28.without being frightened in any way by those who oppose you. This is a sign to them that they will be destroyed, but that you will be saved--and that by God.
29.For it has been granted to you for Christ's sake not only to believe on him, but also to suffer for him, 30.since you are going through the same struggle you saw I had, and now hear that I still have.

SUMMARY

The apostle Paul sends a letter of his kindness and affection to the saints at Philippi, but some of the readers of the letter may feel that the apostle hurls abuse at them ; that's because the apostle put the word "destruction" into his letter. The reason why the expression of the apostle is unpleasant is that "those who will be destroyed" may not be someone else but those who have friendly relations with "me", such as family, neighbors, friends ; since they are people of the same nature as "I" and share a sense of comradeship with me, the attack on them is understood to be an attack on "I.". 사도 바울은 자신의 친절과 애정을 담은 편지를 빌립보 지역 성도들에게 보내지만 그 편지를 읽는 자들 중에는 사도가 자신들을 모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도가 그의 편지에 ‘멸망’이라는 말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사도의 표현이 불쾌감을 주는 이유는 ‘멸망 받을 자’에 해당하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이를테면 ‘가족이나 이웃, 친구’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와 동질의 사람들이며 나와 동지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된다.

From a human point of view, the apostle Paul's method of preaching the gospel, or the way of exhortation, that puts the word 'destruction' can be said to be the worst. This is because it is best to avoid extreme expressions such as “destruction” if you intend to encourage members to accept the gospel and thrive the church. However, the human way and tricks are unacceptable to the apostle. Because the church should not be a human work.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멸망’이라는 단어를 집어넣는 사도 바울의 복음증거 방식, 혹은 권면방식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교회를 번창시키려고 의도한다면 ‘멸망’과 같은 극단적인 표현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에게는 그런 인간적인 방식과 꼼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의 작품이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The phrase “the grace of God -what has been given to you on behalf of Christ” in verse 29 of the text contains the apostle's intention -the gospel. Believing in the gospel, or being saved, is never such a nature that human beings can achieve or possess individually, and this should not be tolerated, either. This is because ‘the grace of God’ is given unilaterally from the outside, while the conditions on the human side are completely excluded. John 1:13 also makes this clear ; “children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 In this respect, God's grace implies the meaning of attack and judgment on things not through the grace. 본문 29절에 나오는 ‘은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주어진 것’라는 말이 바로 사도의 그러한 의도 -복음-을 담고 있다. 복음을 믿는 것, 혹은 구원받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달성하거나 개별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그 같은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며 이것은 용납되어서도 안 된다. ‘은혜’는 인간 편에서의 조건은 완전히 배제된 채,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요1:13절도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은혜에는 은혜로 말미암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공격과 심판의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Therefore, we now need to look more specifically at the “destruction”, “salvation” and “the grace of God” delivered by the apostle. The apostle Paul says about salvation in Roman 9:11-16, "Yet, before the twins were born or had done anything good or bad--in order that God's purpose in election might stand: not by works but by him who calls--she was told, "The older will serve the younger." Just as it is written: "Jacob I loved, but Esau I hated." What then shall we say? Is God unjust? Not at all! For he says to Moses, "I will have mercy on whom I have mercy, and I will have compassion on whom I have compassion." It does not, therefore, depend on man's desire or effort, but on God's mercy." 따라서 이제 우리는 사도가 전하는 ‘멸망’과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1-16에서 구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There are two different ways of salvation competing here. one is to rely on 'human wants and efforts accordingly' and the other is based on 'God's mercy'. Needless to say, God's way of salvation is the latter. Then why does God refuse what man brings to him to dedicate to God and rather despise it? That's because of the human situation. Hebrews 2: 14-15 says: “Since the children have flesh and blood, he too shared in their humanity so that by his death he might destroy him who holds the power of death--that is, the devil--and free those who all their lives were held in slavery by their fear of death.”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구원의 방식이 경쟁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원함과 그에 따른 노력’에 의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후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그분께 가지고 나오는 것들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것을 가증스럽게 여기시는가? 그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 때문이다. 히브리서 2:14-15은 이렇게 말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Human beings are being controlled and bound by the devil who holds the power of death. In such a situation, ridiculously, humans regard their behavior valuable and mistake themselves as dignified and independent beings. They also are confident that they are "the ones who must not be treated carelessly" and "not be criticized" without justifiable reasons. Thus, if someone mentions hell or ruin to such them, they regard it as an insult to them and resist fiercely. 인간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에게 속박되어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는 형편에 처해있다. 그런 주제에 어처구니없게도, 인간들은 자신들을 존엄하고 독자적인 존재로 착각하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가치 있게 여긴다. 또한 자신들은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존재’이며 정당한 이유 없이 ‘비난받아서도 안 되는 존재’라고 자부하고 행세한다. 그러한 그들에게 누군가가 지옥이나 멸망을 언급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고 거세게 저항한다.

Jacob and Esau are a typical example of these people. According to Genesis 27:36, "Esau said, 'Isn't he rightly named Jacob? He has deceived me these two times: He took my birthright, and now he's taken my blessing!" Then he asked, "Haven't you reserved any blessing for me?" 이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실례가 야곱과 에서이다. 창세기 27:36에 보면,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되어 있다.

Esau used to regard his birthright as 'a blessing for himself.' In other words, he considered his birthright be a natural right that conforms to his nobility. It abruptly happened that he was deprived of his birthright by his trickster brother Jacob. To interpret this from the perspective of Chapter 9 in Rome, the right of the eldest son in Esau was bound to be passed on to his brother Jacob, according to God's will established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 It is that he older brother Esau was to be hated by God, and his younger brother Jacob was to be loved by God for no reason. This is the final criterion for determining destruction, salvation, blessing and curse ; if it is a standard other than this one, it will only be revealed as a criterion to be destroyed by this criterion. 에서는 평소에 자신의 장자권은 ‘자신을 위한 축복’이라고 여겼다. 즉 그의 장자의 지위는 자신의 고귀함에 부합되는 당연한 권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속임수를 쓴 동생 야곱에게 그의 장자권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을 로마서 9장의 관점대로 해석하면, 에서의 장자권은 창세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동생 야곱에게 필히 넘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즉 형 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미움 받을 자로 정해져있었고, 동생 야곱은 이유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도록 정해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멸망과 구원,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최종적인 기준이다. 이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이라면 그것은 이 기준에 의해서 멸망 받을 기준으로 드러날 뿐이다.

It should be noted, however, that the incident did not end with Jacob taking over the birthright from his elder brother Esau, followed by the next incident prepared by God. This time Jacob is attacked by God. This is because he no longer should remain as “Jacob” and had to be “Israel” (Gen. 32:28). This is because even Jacob, who was taken over the right of the eldest son, has no basis in himself for the birthright as the eldest son ; the basis of the blessing had to be known to Jacob.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사건은 야곱이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넘겨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다음 사건에 닿아있었다고 하는 점이다. 이번에는 야곱이 하나님에 의해 역습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야곱’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 되고 ‘이스라엘’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창 32:28). 이는 장자권을 넘겨받은 야곱조차도 장자가 되는 근거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축복의 근거는 야곱에게 알려져야 했다.

In Jacob and Esau, these two were born to one root. The cutting surface was clearly exposed when the criteria were applied that split them from one source to the man of blessing and the man of curse. Now, even a fraction of the crumbs of blessing should not remain for Esau. Because blessing is not something that can be picked up and eaten even its crumbs by human "desire" and "efforts." It is the Lord's gift given only to those whom He desires as a result of the Lord's Word, the work of itself. It is 'the Cross' that marks the beginning of the gift. 야곱과 에서 이 둘은 한 뿌리에게 난 자들이다. 한 근원에서 난 그들을 축복의 사람과 저주의 사람으로 갈라버리는 기준이 적용되자 그 절단면이 선명하게 노출되었다. 이제 에서에게 돌아갈 여분의 축복은 아주 약간의 부스러기라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축복은 인간의 ‘원함’과 ‘달음박질’로써는 그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그 자체의 작업의 결과로서 주님이 원하시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주님의 선물이다. 그 선물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사건’이다.

The moment someone encounters ‘the Cross’, it becomes to be known that he himself is already dead. And the dead man gets filled with the word of the Lord. Now he emits the standard of blessing and curse called ‘the Cross’ in which the Word infused by the Lord is manifested. God's grace is involved in this whole process. Grace is a gift. As far as the gospel is concerned, however, there is no such a thing as a gift without suffering for you in its hands. This suffering is a "painful suffering" and an unjust one that Jesus suffered. Believing in Jesus means joining the pain of unjust suffering of Jesus. Therefore, "I am no longer a cursed Esau, but a blessed Jacob." Attempts to minimize suffering are unacceptable to the Lord in the saints ; it is the reality of the saints on earth that the elements of the cursed Esau coexist in the blessed Jacob. Boasting 'my salvation' is evidence that I still hold 'my value'.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이닥치는 그 순간 그 자신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 죽은 자에게 주님의 말씀이 채워진다. 이제 그는 주님에  의해 주입된 말씀이 발현되는 ‘십자가’라고 하는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발산하게 된다. 이 전체 과정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어있다. ‘은혜’란 선물이다. 그러나 복음에 관한한, 손에 든 고난 없이 찾아오는 선물 같은 그런 것이란 없다. 이 고난은 예수님이 당하신 ‘애매한 고난’이며 억울한 고난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억울함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저주받은 에서말고 축복받은 야곱 될래요.”가 성립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고난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는 성도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용납하지 않는다. 축복받은 야곱 안에 저주받은 에서의 요소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 땅에 있는 성도의 실상이다. ‘나의 구원’을 뽐낸다는 것은 여전히 ‘나의 가치’를 견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Now the only thing that needs to come out of Jacob is to testify the Word that made him from a man of cursed to a man of blessing - that is ‘the Cross’. The only thing that has to be shown out of Jacob is the route of 'holiness(separation)' which converted him from a curse to a blessing, and God's actions taken in the course. The death of Jesus' cross and his resurrection is the prototype of the route. 이제 야곱에게서 나와야 할 것은 자신을 축복의 사람이 되게 한 말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것뿐이다. 그에게서는 에서에서 야곱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전환되는 그 ‘거룩(분리)’의 경로와 그 과정에서 취하신 하나님의 조치만 보여 져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이 경로의 원형이다.

Those who join this route that Jesus has passed are saints who share homogeneity with Jesus, and are those who are supplied with the characteristics of one body with Jesus through the Holy Spirit. Thus, the saint is a blessing person with a curse embedded in himself, but also evidence of both destruction and salvation. Their characteristics focus more on the elements of the curse within them than on the blessings given to them. Eventually, they were co-located in a new spiritual environment because of other peculiar traits injected from outside, in addition to innate physical properties -they firmly reject what is deemed to be harmful to them, and only carefully open and accept what is deemed to be profitable to them. 예수님이 지나가신 이 경로에 합류되는 자가 예수님과 동질성을 공유하는 성도이며 예수님과 한 몸의 특성을 성령을 통해서 공급받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따라서 성도는 그 자신 안에 저주가 내장 된 축복의 사람이면서, 또한 멸망과 구원 양쪽 다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된다. 이들의 특성은 자기에게 주어진 복에 주목하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저주의 요소에 더 주목한다. 결국 이들은 자연적인 신체적 성질 - 그들은 자기에게 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은 단호히 배격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여겨지는 것에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받아 들인다- 외에 외부에서 주입된 특이한 다른 성질로 인하여 새로운 영적 환경 속에 공동으로 놓이게 된 자들이다.

 이근호 (IP:119.♡.87.190)20-04-30 12:44 
“자신들은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존재’이며 정당한 이유 없이 ‘비난받아서도 안 되는 존재’라고 자부하고 행세한다. 그러한 그들에게 누군가가 지옥이나 멸망을 언급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고 거세게 저항한다.”

이 악마의 표정들로 세상이 범람하니 누가 뭐래도 지옥이 생중계되는 중이다. 매일 멸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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