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숙경

은혜의 구체성

아빠와 함께 2020. 4. 18. 10:06
2020-04-17 22:02:05조회 : 23         
The Specificity of Grace 은혜의 구체성이름 : 함숙경 (IP:121.149.196.6)
title : The Specificity of Grace 은혜의 구체성
preacher : pastor Lee Geunho
text : Philippians 1:25-26
date : April 12, 2020

25.Convinced of this, I know that I will remain, and I will continue with all of you for your progress and joy in the faith, 26.so that through my being with you again your joy in Christ Jesus will overflow on account of me.

SUMMARY

‘Joy’ is emphasized a lot in Philippians. But the joy is, paradoxically, related to 'death'. By linking 'death' with 'joy' and 'glory', the apostle Paul confirms to the recipients of his epistle whether there is joy in them based on "I'm already dead in Christ." 빌립보서에는 ‘기쁨’이 많이 강조되어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역설적이게도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죽음’과 ‘기쁨’과 ‘자랑’을 연결시키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이미 죽었음’을 근거로 하는 기쁨이 그들 안에 있는지를 그의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If there is enough joy in us to say, "You can die," it is because there is something to boast about in us that wins death. In today's text, the apostle reminds brothers in Philippi that the saints are those who are proud of knowing Jesus to such an extent that they have no other pride ; Jesus is their best and only glory. ‘죽어도 좋아’라고 할 만큼의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이기는 자랑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빌립보지역 성도들에게 성도는 다른 어떤 자랑거리도 자랑이 아닐 정도로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을 자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다. 즉 예수님이 성도들의 최고의 그리고 유일한 자랑거리다.

Before he was called to be an apostle - when Paul was "Saul"- he considered Jesus to be just "abandoned by God, unselected, cursed" ; he regarded Jesus as the one having been excluded from God. on the other hand, he regarded himself as a "man without flaws as for legalistic righteousness(Phil.3:6)" and therefore considered himself a man worthy of being chosen by God. 사도로 부름받기 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는 예수님을 그저 ‘하나님에 의해 버려진 자, 선택받지 못한 자, 저주받아만 하는 자’라고만 여겼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에게서 배제된 분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이며 그러므로 자신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아 마땅한 자로 여겼던 것이다.

But after encountering with the resurrected Jesus, Saul found that not only himself but all universal human beings had made the wrong choice. Now, to Saul, Jesus who had been excluded by humans came as “the only one chosen by God” (Luke 9:35). Choice means that everything else is excluded except the thing chosen ; Heavenly Father excludes all the humans except Jesus.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예기치 않은 만남이후에, 사울은 본인뿐 아니라 모든 보편적 인간류가 다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사울에게는 인간이 배제해버린 그 예수님만이 ‘하나님에 의해 유일하게 선택된 분(눅 9:35)’으로서 들이닥친 것이다. 선택이란 곧 그 외의 나머지는 배제된다는 의미다. 이는 곧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제외하고 모든 인간을 배제하신다는 의미이다.

At the time of the Old Testament, God also carried out the work of choosing and excluding on the peoples. By God's choosing Israel, the Gentiles were automatically excluded. While the excluded Gentiles had a prominent hero among them sitting in the king's place, while having the kingship continue their kingdom, Israel had to be a nation where Jehovah became king without any human king ; thus, the throne of Israel could not be approached or dealt with by any man, having to be left vacant only for the one who was to come to the earthly human world through Moses구약 때에 하나님은 이 선택과 배제의 작업을 민족들에 대해서도 시행하셨다. 곧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으로써 자동적으로 이방민족들은 배제되었다. 배제당한 이방민족들은 그들 가운데 탁월한 영웅을 왕의 자리에 앉히고 그 왕권을 세습화시켜 자신들의 왕국이 이어나가도록 하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그 어떤 인간 왕 없이 여호와께서 왕이 되시는 나라가 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보좌는 그 어떤 인간도 접근할 수도 없고, 상대해서도 안 되었으며 오직 모세를 통해 지상의 인간 세계 속으로 들어오시는 분을 위해 그 자리는 비어져 있어야했다.

The structure in which the people were to be governed by the law given from this vacancy, this was the structure of Israel, a country chosen by God. This "chosen country" is a country where God's intention of "choosing" should be alive, saying, - “I will be gracious to whom I will be gracious, and will show compassion on whom I will show compassion(Ex. 33:19).” In this country, thus, the people themselves, who are members of the country, are left out, and they have the meaning of existence only as an 'empty form'. 이 빈 자리로부터 주어지는 율법에 의해서 백성들이 다스림을 받는 구조,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나라, 이스라엘의 구조였다. 이 ‘선택받은 나라’는 오직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의 의도가 살아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는 그 국가의 구성원인 백성들 자체는 빠진 채, 그들은 그저 ‘공허한 형식’으로서만 그 존재의 의미를 지닌다.

But human nature refuses to accept such a national structure ; This is due to human desire to become a "main agent" and "presence" whose their own choices and actions are recognized and respected. Despite such a circumstance of the human being, the meaning of Israel's existence is to prove that the invisible one in their center is the only "Being" and that His people surrounding Him are being maintained only as a sort of accidental and temporary event which testifies Him. They are only allowed to live within the limits of God's permission ; thus, personal personality doesn't work in this country.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이런 국가 구조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이는 자신들의 선택과 행위가 인정받고 존중받는 ‘주체’이자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인간의 형편이 이러함에도 이스라엘의 존재의미는 그들의 중앙에 계시는 보이지 않는 분만이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과, 그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그분의 백성인 자신들은 그 존재를 증거 하는 하나의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사건으로서만 유지되고 있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만 살아가도록 되어있다. 이 나라에서는 개인적인 개성이란 통하지 않는다.

However, for the Gentiles, they themselves are the only and solid beings ; if you think of yourself as being, you will live your life in your own way that "everything's fine with me if it works out for me". This is because existence is bound to pursue the eternity and immortality of its existence. This is the reality of humans being played by the devil. "Being" refuses to remain a "form." It tries to fill its existence with its own somehow : this was Saul's attitude before encountering the resurrected Lord. 하지만 이방민족에게 있어서는 그들 자체가, 개개인이 유일하고 견고한 존재인 것이다. 자신을 존재로 여기게 되면 자신만 잘되면 그만인 방식으로 삶을 살게 된다. 이는 존재란 자기 존재의 영원성과 불멸성을 추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점이 바로 악마로부터 농락당하고 있는 인간의 실태이다. ‘존재’는 결코 자신이 ‘형식’으로 남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것으로 존재의 내용을 채우고자한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의 모습이었다.

But the saints are those who have been newly born of the blood of Jesus - abandoned by man but chosen by God. They are those who are from the flesh and blood of Jesus who said, “unless you eat the flesh of the Son of Man and drink his blood, you have no life in you(John6:53).” Therefore, these are Jesus-centered people composed of Jesus' blood : these are the very church and Israel. 그러나 성도는, 예수님 - 인간에게서는 버려졌으나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 의 피로부터 새롭게 시작된 자들이다. 그들은 “누구든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살과 피에서 나온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피를 중심으로 구성된, 예수님 중심의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곧 교회이며 이스라엘이다.

Now they have no more condemnation of the law or sting of death(Rom. 8:1 ; 1 Cor. 15:55). Therefore, the meaning of their existence in this world is to serve as a function to testify that there is ones chosen or excluded by the Lord, and to serve as witnesses and products of God's judgment and grace poured out on those who deserve to die. For the sake of it, the saints exist as a fleeting fog.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의 정죄도 사망의 쏘는 것도 없게 되었다(롬8:1 ; 고전15:55). 그러므로 이들의 이 세상에서의 존재의미란 주님에 의해 선택된 자 혹은 배제된 자가 있음을 증거 하는 기능으로서, 그리고 죽어 마땅한 자들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은혜의 생산물로서 그리고 이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서 봉사하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결국 성도는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To add to this, the meaning of the saints is a temporary trajectory drawn by a diver from a cliff, and is nothing more than a few drops of water that bounce up the moment you fall into the water. They perceive themselves as dogs(Matt.7:6) who have suddenly bitten the pearl of the gospel thrown by the Lord, being driven to death which is the extremes of existence and regard themselves as those whose lives have already ended by the judgment of the fearful God, who says, "you cannot see my face, for no one may see me and live(Ex.33:20)." So now they are free and blessed who no longer have to put meaning on their deeds of fogs - regardless of whether it's something proud, commendable, regrettable, shameful or not. 여기에 덧붙이자면, 성도의 의미는 절벽에서 다이빙하는 자가 그려내는 일시적인 궤적이며, 물에 빠지는 순간 튀어 오르는 몇 개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주님에 의해서 던져진 복음이라는 진주를 덥석 물게 된 ‘개(마태복음 7:6’)로 인식하며, 존재의 극단인 죽음으로 내몰려서,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출애굽기 33:20).”고 하시는 그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일찍이 자신들이 생명이라고 여겼던 것이 끝나버린 자들로 여긴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안개에 불과한 자신들의 행위에 더 이상 의미를 둘 필요가 없게 된, 자유하게 된 자이며 복 받은 자들이다. 그것이 그들의 눈에 자랑스러운 것이든, 칭찬할만한 것이든,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것이든 상관없이.

The last extreme that existence can show is that "I died on the cross with Christ." There is no more extreme than this. To those who have come to this extreme, the one who possesses them becomes their Savior, directs them using the gospel and gives orders. As long as the Lord's instructions and commands are alive to them, it is joy to live on this earth in a “empty form”.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극단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심한 극단은 없다. 이 극단에 이르게 된 자들에게 그들을 소유하신 분이 그들의 구주가 되셔서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지시하고 명령을 내리신다. 그들에게 주님의 지시와 명령이 살아 있는 한,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하나의 ‘공허한 형식’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기쁨이 된다.

The meaning of " knowing Christ" is that "for my sake, my life on my own has never existed, it doesn't now, nor will it does in the future." That is, the life I thought was "my time" in the past was not "my time," but "the time of the Lord," and it is confirmed at the moment of knowing Christ that even the future anxious due to uncertainty is the world of Christ that has already entered into Christ.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의 의미는 ‘내가 나를 위해서, 내 힘으로 사는 삶이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즉 과거에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인생이란 ‘내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이었고, 현재의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며, 불확실성으로 인해 초조해하는 미래조차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버린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순간 확인된다.

The apostle Paul is a person who has obtained the joy that cannot be obtained anywhere in the world, that is, the joy of being able to die. Therefore, his joy is a sort of tractor that has pushed everything that he eagerly gathered because he considered it good and profitable for him before ; "But whatever was to my profit I now consider loss for the sake of Christ. (Phil. 3:8)," says his confession. 사도바울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 즉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의 기쁨을 ‘죽음’이라고 하는 존재의 극단에서 얻게 된 사람이다. 그랬기에 그의 기쁨은 예전에 그가 자신에게 좋고 유익한 것이라고 여겨서 열심히 끌어 모았던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밀어내버리는 일종의 트렉터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을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3:7~8)”라고 하는 그의 고백이 말해주듯이.

His joy overcomes all the sufferings and makes him boast of "every day's death" (1 Cor. 15:31). Paul is writing this letter in the hope that all the saints at Philippi in the midst of the suffering, along with himself in prison, will enjoy the joy that transcends the fear of surviving. 그의 이 기쁨은 환란을 이기고, ‘매일의 죽음’을 자랑하게 한다(고전15:31). 바울은 옥에 갇힌 자신과 더불어, 지금 환란가운데 있는 모든 빌립보 성도들이, 살아남고자 하는데서 오는 공포를 초월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금 이런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근호 (IP:119.♡.87.190)20-04-18 06:07 
기쁨이란, 내 일이 아닌 일에 어느새 내가 관여하고 있음을 반가워하기 때문이다. 이 기쁨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나 위주'로 기획한 모든 인생 설계를 세밀하게 찾아내어 망치게 하신다. 한치의 흐트려짐도 없는 하나님의 친절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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