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우상의 역효과(겔14;1-6)130501

아빠와 함께 2013. 5. 1. 22:31

 

우상의 역효과(에스겔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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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5-01 21:24 
우상의 역효과

2013년 5월 1일                             본문 말씀: 에스겔 14:1-5

(겔 14:1, 개역)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겔 14:2,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4:3, 개역)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겔 14:4, 개역)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리니』

(겔 14:5, 개역)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에 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우상 섬기는 장로’라고 나오지만 막상 에스겔을 찾아온 장로는 자신을 우상 숭배자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여호와의 선지자에게 나아가 하나님께서 올 계시를 미리 알려고 왔을 뿐이니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한 신앙심이고 겸손한 마음이라고 자부할 것입니다.

다른 신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해서 조언을 구하는 것조차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상이라고 간주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게 나올 때는 조언이나 정보를 얻기 위해서 나와서는 아니되고 하나님의 경외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 보다 자기 자신의 몸이 더 중요시 여깁니다.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 위주로 살기보다는 자기 살리기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데 여기에 연관된 여호와라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히 우상적 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입니다. 이들 장로가 홀로 있을 때는 자신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인이라고 여기지만 막상 선지자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들 속에서 이미 우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우상이란 새삼스럽게 신을 골라 섬기겠다는 마음 이전에 인간의 본래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치밀어 올라오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의 자리는 곧 인간 본인이 자아를 느끼는 그 자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나올 때, 말씀에 준해서 자신의 우상성을 지적받을 마음가짐으로 나와야 합니다.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인간의 자리가 곧 우상의 자리인지라 이 점을 분명하게 노골적으로 잘 보여주는 첫 대목이 출애굽기 32장에 나옵니다. 모세는 시내산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남아 있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을 중간에서 전달할 전달자가 누락된 상태에 놓이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인간들 쪽에서 신에게 나아가겠다는 사도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우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우상을 어떻게 규정해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표준적 사태가 됩니다. 그들은 신을 만들었는데 그 신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그들은 자기네들과 함께 하면서 자신들의 갈 길을 지도한 신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겁니다. 과연 그들이 여호와라는 이름 중심으로 일치된 마음으로 가졌다고 그 속에서 참된 하나님 섬김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실패합니다.

도리어 그들을 통해서 나온 것은 우상이었습니다. 우상이란 이처럼 ‘언약’이 누락된 상태에서 신을 거론할 때 튀어나옵니다. 비-언약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언약이란 인간들이 제조할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 주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구상하고 생각해놓은 모든 아이디어에 근거한 신들은 다 우상입니다.

모세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인간은 어김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놓았습니다. 이로서 우상은 참된 신이 자리를 비운 그 공백을 인간의 마음가짐에서 야기된 것으로 채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반(反)-언약이요 비-언약입니다. 사람들이 공백을 채우려는 의도는 알 수 없는 공포가 늘 엄습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쫓기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항상 납득이 되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는데 이 채움에 동원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을 나름대로 극복하려는 요소들입니다. 돈이 바로 그것이요 번창이 바로 그것이요 가정 화목이 바로 그것이요 늘 건강한 신체와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과 만사 형통으로 이어지는 인생살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악에서,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언약의 최종적인 상태를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만이 두려움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요한일서 4:10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4:16-18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나올 때나 눈 떠서 하루일과를 시작하면서 밀려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 두려움에 대처하여 자기 나름대로 풍요한 것으로 해결지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인간들은 우상적인 삶을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최종 해결책은 오로지 사랑입니다.

사랑을 대체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언약의 보따리 안에 사랑 말고 딴게 들어있다면 그것은 가짜 언약입니다. 가짜 언약이 곧 우상의 본질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을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질까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장로들의 징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는 그들이 새삼스럽게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벌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상 섬김 자체가 곧 징벌이요 심판이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십니다. 세상 끝날에는 결국에는 지옥과 천국으로 나뉘어집니다. 이 나뉘어짐의 현실적 증표는 오직 우상이냐 언약이냐입니다. 우상은 인간의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언약은 이미 심판자와 구원자가 확정된 채 이 지상에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단순히 징벌 자체를 위해서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근거가 되는 언약이 무엇이냐를 말씀하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징벌과 심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묵시적 심판으로 죄악된 역사를 간단하게 심판하고 종결지으셔도 되지만 그렇게 아니하시고 그 역사와 묵시, 틈 사이에 언약의 완성을 삐져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고난 가운데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구원자 스스로 징벌자로부터 도리어 심판과 징벌을 받으신 흔적을 지니고자 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만, 사랑이 사랑답게, 즉 화해의 제스쳐가 오로지 하나님에게서만 나온다는 사실이 정착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자들이 아니라 매일같이 우상의 생활을 하고 있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에스겔 14:1-5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에 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니라.”

사람이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종한테 묻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나님을 찾아서, 내 장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종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인도되는지를 묻는 것이 상당히 신앙적이고 경건한 모습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물으러 나오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겠다고 나올 때에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우상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를 못해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매일같이 우상을 생산해내는 겁니다.

늘 우상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왔기에 우상은 저절로 내 안에서 사라질 것이다, 라는 오해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와서 묻는 것이 다 자기 잘되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회개하러 나오겠습니까? 자기라는 덩치가 이게 실감나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것이 실감이 나서 하나님께 나올까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경배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 자신을 경외하고 싶어요. 따라서 자기 자신이 잘되는데 필요한 정보들, 자기 앞길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한 사실들을 얻어 챙기려고 하나님께 나오는 그 마음자세, 이것이 평소에 우상을 섬겼던 그 마음자세와 똑같은 마음자세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는 이렇게 나와야 돼요. “하나님 아버지, 지금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 제 안에 어떤 종류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이것을 말씀으로 캐내 주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돼요. 이것을 더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항상 회개하는 마음자세로서 나와야 돼요. 회개할 경우에만 하나님께 경외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영광 하나님 경외라는 이름을 걸치지만 회개하는 대신 하나님을 경외하겠다, 회개하는 대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고 나온다면 그것은 평소에 우상섬기는 그 버릇을 그대로 유지한채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자세가 되는 겁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이 장로입니다. 장로란 말은 요즘말로 하면 지도자, 어르신네죠. 그 집단의 어른 그 공동체의 지도자를 장로라 합니다. 늙었다는 뜻이 들어있는데 그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대표하는 사람 둘이 에스겔을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왔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질문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너희들 속에 우상이 있다.” 몰랐지요. 그 장로들은 그런 것을 몰랐어요. 자기 안에 우상이 있는 것을 몰랐다는 말이지요. 하나님한테 나오니까 들통 난 겁니다. 요즘 교인들이, 요즘교인들이나 옛날 교인들이나 마찬가지지만 자꾸 말씀을 안 듣고 복음을 안 듣게 되면 자기 신앙이 그냥 유지되는 줄 알고 있어요. 얼마 전에 신앙이었던 것이 하루만 지나면 이것이 뭐로 바뀌는가, 우상으로 바뀝니다.

우상은 같이 협상하고 타협하면 되지 회개할 필요는 없어요. 우상을 섬기면서 회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회개한다는 것은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지만 여기 있는 나를 위해서 살지 않겠습니다, 하는 것이 회개거든요. 우상은 뭐라 하느냐 하면, “여기 있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뭘 도와줄 겁니까?” 이게 우상이라는 말이지요. 성경에서 우상의 시작이 어디 나오는가, 출애굽기 33장에서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모세가 훌쩍 산으로 올라가버렸어요.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한 사람이 눈앞에 없어요. 시내산위로 올라갔는데 간지 40일이 되도록 소식이 없습니다. 자,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쉽게 말해서 성경을 덮어버리고 신을 섬기겠다고 나오는 게 우상이에요. 출애굽기 33장에서 우상이 나왔는데 그들은 그 우상 이름을 여호와라고 했어요. 자기 딴엔 여호와에요. 요새말로 자기 딴엔 예수 잘 믿기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고 안 읽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니고 말씀을 듣고 회개할 마음자세가 없으면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예요.

산 밑에서 그들이 한 짓은 이것이었습니다. 자기 자리로부터 신에게 나아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출발점이 자기 자리에요. 그래서 우상이 어디서 생기는가, 나의 자리에서 우상이 나옵니다. 나의 자리가 확대된 것이 우상인겁니다. 이 말은 달리 해서 우상은 내 안에서 생산되는 거예요. 생산되는 그 동기가 뭐냐, 공포, 두려움입니다. 신약성경은 인간의 해답을 미리 내려줬습니다. 그 해답중의 하나를 지금 읽어드리겠습니다. 이게 해답이니까 그 해답과 우리 자신들의 입장을 비교해보시면 성경말씀이 왜 해답이며 우리는 왜 성경말씀을 대해야 되는지를 알겁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상태를 요한일서에서는 사랑이라고 하고 그 사랑이 있는 증거가 뭐냐,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 안에 있다는 그 말을 두 가지 다른 표현으로 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으로 표현했고 또 하나는 심판이 없다고 같은 말로 했습니다. 심판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졌네요, 같은 말입니다.

“당신은 두려움이 없네요.” 같은 말이 “당신에게는 심판이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이 알고 있네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개 합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사랑이고 그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랑을 주시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함을 주시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두려움이 없나니, 하는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사랑은 예수 믿고 재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예수 믿고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예수 믿고 나서 교회 부흥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가족이 화목 한다든지 만사형통한다든지 하는 일 다 잘되고 시집 잘 가고 장가 잘 가고 취직 잘 되고 그런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냥 사랑일 뿐이에요. 사랑에 곁들이지 마세요. 사랑안의 내용에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한 것을 집어넣지 마세요. 사랑의 보따리에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화목제물, 피 밖에 없습니다. 사랑 안에 부동산이 들어있고, 사랑 안에 예금 통장이 들어있고, 사랑 안에 애 공부 잘함이 들어있고, 교회부흥이 들어있고, 선교사파송이 들어있고, 그러면 안돼요. 그런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죽었다 깨어나는 것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오직 예수님의 화목제물이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 우리는 안 들어있고 주님만 들어있다는 말은 사랑을 받으면 우리 자신으로부터 떠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두려움과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 했거든요.

욥기를 아시지요. 구약의 욥기를 보게 되면 마지막에 드디어 사랑을 알았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너 자신에서 떠나면 돼요. 그 마지막에 오기까지 욥은 자기 몸이 아팠고 자기 가족이 죽었고 자기 몸이 환란 속에 있었기에 자기 몸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자력으로 자기 몸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오니까 재를 뒤집어쓰면서 자기가 시꺼멓게 죽어야 할, 그냥 한줌의 재가 될 수밖에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 “제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나온 거예요.

그 순간 욥은 사랑을 느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욥이 그 때 뭐가 우상인 것을 알았어요. 바로 자기 자신이 우상이었고 우상은 다른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자리에서 우상이 나오는데 그 우상은 알 수 없는 공포가 자기로 하여금 우상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게 되어있어요. 알 수 없는 공포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든 부처를 믿든 알라를 믿든 간에 뭔가 두려움에 쫓기다 보니까 그 두려움에 밀려서 ‘그래, 믿을 것은 주님밖에 없어.’라고 주님을 믿을 때 그 주님이 바로 우상입니다.

성경 출애굽기 33장의 이야기, 왜 그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지도자가 없을 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 매개체가 없을 때 자체적으로 그들은 신에게 나아가고자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에게 나아갈 때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했습니다. 서로가 서로 보기에 믿음이 서로 좋아요. 왜, 너도 여호와, 나도 여호와, 우리는 모두 여호와의 공동체이니 얼마나 서로서로 자부심을 갖겠습니까? 하나님 잘 믿는다고. 한국교회보고 우상단지라고 하면 사람들은 “너만 잘 믿나?” 이렇게 나옵니다.

그 이유를 들어볼 생각도 안 해요. “너만 잘 믿나? 네 교회만 구원받나?” 이렇게 나와요. 그 이유는 들어볼 생각도 안하고. 주의 말씀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우상이란 하나님의 언약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공포심에서 자기가 만들어낸 신, 그 이름이 어떤 신이든 관계없이 우상이 됩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우상의 조건은 하나님의 언약이 첨부되지 않은 상태, 하나님의 언약이 지배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새 언약을 이야기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새 언약이었습니다. 언약이 없는 자리에는 뭐가 있는가, 나만 달랑 있어요. 그 나만 달랑 있는 나가 뭘 만드는가, 우상을 만들어냅니다. 왜, 혼자 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휩쓸리게 되기에 그렇습니다. 연세 많은 분이 그러잖아요. “외로워서 못살겠다.” 나는 외로워도 마땅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지를 않아요. “외로워서 못살겠다, 무서워서 못살겠다. 무서워서 무섭다고 하는데 그것이 뭐가 문제냐, 외로워서 외롭다고 하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대할 때 우리는 거기서 그러한 고백, 무섭다, 겁난다, 두렵다,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상을 만들고 있는 본부라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방침이었고 환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몰아세운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느 것 하나 버리지를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언약 적 계획안에 이미 들어 있는 겁니다.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우상, 하나님의 이 모든 계획은 어떤 식으로 의도적으로 우상을 끄집어내는가?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를 해 봅시다. 나중에 죽으면 천국과 지옥이 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알지요. 성경에 한두 번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이야기가.

그러면 물어봅시다.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있습니다. 있는데 천국과 지옥은 이 땅에서 어떻게 분류되고 결정 나는가? 거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 에스겔 14장은 답변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면 이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기에 지옥이고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면 이것은 천국이 되는 겁니다. 한 번 정리해봅시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판정 나는가? 우상을 섬기면 지옥가고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면 천국 간다,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됩니다. 그러면 또 정리해봅시다. 우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어떻게 판가름 되는가?

여호와라는 이름인가? 아니죠. 예수라는 이름인가? 그것도 아니죠. 그러면 뭔가? 하나님의 언약을 담고서 언약을 펼치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고 언약이 나오지 않는 신은 그게 예수든 삼위일체든 뭘 해도 그것은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나오는가, 이게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역사에서 묵시로 나오는 그 틈새에서 언약이 삐져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의성에 빙계리 얼음골이 있어요. 여름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얼음이 언다는 계곡입니다. 기압의 차이로 인해서 온도가 낮아져서 찬바람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신기해서 방송국에서 취재도 나옵니다.

그게 틈이죠, 틈, 간격, 차이, 틈이라는 말이지요. 본문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께 나왔을 때 입 꽉 다물고 “에스겔아, 저것들 상대도 하지 말고 그냥 멸망하게 놔 둬버려라. 저들은 우상을 섬기니까 아무소리 하지 말고 너는 너대로 가고 에스겔 너나 구원받아라.” 이렇게 한다면 이것은 역사와 묵시가 그냥 아무 틈 없이 만나는 것이 되어버려요. “그래, 너희들은 우상을 섬기니까 지옥 가거라. 에스겔만 구원받자.”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겼다고 언급을 하면서도 기어이 그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니 우상숭배에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구태여 해주는 이유는 그들이 벌 받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요 그 하나님의 묵시와 역사사이에, 우상과 참 하나님 사이에서 틈을 비집고 비로소 언약이라는 말씀이 비어져 나오는 것처럼 빙계, 얼음골처럼 찬바람이 솨, 하고 나오는 겁니다.

찬바람이 나오면서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라는 말을 해요. 우상 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 회개하거나 경외하는 마음은 없고 “에스겔 당신은 하나님의 선지자니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하나님께 물으러 왔다. 나 참 굉장하지, 그렇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에게는 그 우상의 값을 치르겠다는 식으로 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추가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들이 에스겔에게 나오는 그것을 기회로 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정보가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갈 때 무슨 원리가 들어가느냐 하면, 우상을 섬겨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상을 섬기는 자체를 심판으로 간주하시는 겁니다. 우상 섬겼으니 벌을 받아라, 가 아니라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찾는 그 자체가 그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의 용도로써, 수단으로써, 심판을 보여주는 영역으로써 활용하시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래, 십자가도 모르면서 교회를 다닌다고, 지옥이나 가거라.’ 이럴 수가 있어요. 하지만 생각을 달리해야 됩니다. 그것은 역사가 묵시에서 그냥 튕겨져 나오는 것이고 우리 성도는 우리 혼작 구원받기 위해서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언약, 그 틈, 얼음골의 돌과 돌 틈새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것처럼 난데없는 십자가라는 그 언약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성도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나오게 되면 “에이, 저런 인간은 벌 받아라.”가 아니라 이미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안에 있기 때문에, 심판을 이미 받기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들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그들은 그저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역할? 때려죽여도 십자가복음을 거부하는 그 역할에 충실한 거예요. 초등학교 특활시간에 어떤 애들은 음악 하는 애가 있고 어떤 애는 미술 하는 애가 있어요. 음악 하는 애가 “얘, 특활시간인데 미술 안 해?” 하니까 “우리는 그 대신 미술 하잖아.” “그래? 그럼 그림 그려라. 나는 음악 할게.”

이처럼 특활시간인데 음악이 있고 미술도 있고 또 그 시간에 공차는 애 있듯이 역할이 뭐냐 하면 십자가를 기어이 안 믿고 십자가복음을 대신해서 어떤 종교적인 것, 경건해지기, 성화되기, 개혁주의 믿기, 이런 것을 해야 될 역할인 거예요. 특활시간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미술이고 우리가 십자가 복음 믿는 것은 음악이고 그런 거예요. 그렇게 되면 누가 누구를 미워할 수가 없는 거예요. 북한의 김 정일이가 그렇게 하는 것, 우리는 자기 역할입니다. 그것을 뭐 회개하겠다고 북한에 들어가서 선교하고 전도하고 하면서 쓸데없는 짓들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 역할을 해 줘야 되는 거예요.

여기 온 장로 둘은 뭘 대표하느냐하면 멸망하는 유대나라를 대표하는 거예요. 멸망하는 유대나라를 대표하기에 그들의 역할은 뭐냐, 이래서 멸망한다, 우상을 섬기면 멸망한다는 그 역할을 충실하게 톡톡히 수행을 해야 되는 겁니다. 제 말은 이런 뜻입니다. 괜히 내 전도와 복음전함을 안 받았다고 해서 화를 벌컥 내면서 “내말도 안 믿고 말이야. 내가 십자가복음 전하는데도 안 받아들이니 나가 죽어라.” 이런 식으로 괜히 억한 심정이나 질투심이나 자기분노로 저주하거나 하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복음 믿으니까 잘됐는데 저건 복음 안 믿어서 저주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줄 알아요? 복음 믿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세상일이 잘 안되고 복음 안 믿는 사람들이 세상 적으로 더 잘되는 식으로 우리에게 해주거든요. 그럴 때 우리가 얼마나 시험 들면서 ‘내가 지금 복음 믿는데 잘 안 되는 것을 보면 뭘 내가 잘못 믿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혼자 절망하고 스스로 헷갈린다는 말이지요. 제가 사전에 그런 것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십자가복음은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을 믿는 사람은 우상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십자가복음 말고 그 언약대신 다른 것을 하는 거예요. 그 다른 것, 설교처음에 했듯이 다른 것이 뭐냐 하면, 공포심을 피하기 위해서 뭔가 다른 것으로 위장하고 걸치는 세상적인 것들, 내가 목회하니 교회가 부흥되었더라, 너무 신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아,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언약 속에는 십자가 피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 믿으니까 교회가 부흥되더라, 예수 믿으니까 결혼도 잘하고 예수 믿으니까 돈도 잘 번다, 이런 식으로 자기의 공포심과 두려움을 메우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저주는 퍼부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 자체가 저주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서 누누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안다고 그렇게 누누이 이야기했건만 사람들은 성령이 임해서 십자가를 아는 이것, 돈 주고도 못 사는 큰 행운을 받아놓고는 오히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을 더 부러워하면서 살아가니 이것은 스스로 시험을 자처하는 것밖에 안돼요. “하나님, 복음 아는데 몸이 왜 이렇게 아픕니까?” 어쩌라고! 그게 두려움이고 공포잖아요. 그게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나로부터 출발하거든요.

본문 다시 이야기합니다. 에스겔에게 장로가 찾아왔는데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지도 몰랐어요. 에스겔을 만나니까 비로소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 들통 났고 그것을 에스겔에게 이야기를 해 봐야 그들이 듣지도 않습니다. 에스겔에게 그런 소리 들으려고 왔겠습니까? “에스겔이 미쳤구나.” 하지요. 그렇더라도 그들이 마주침으로 말미암아 에스겔과 그들이 마주치는 그 차이, 그 틈 사이에서 새 언약이 삐져나오는 거예요. 빙계, 얼음골 바위틈에서 찬바람이 솨, 하고 나오는 것처럼 거기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바람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서는 처참한 몰골로 깨졌습니다. 그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사야 53장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정말 아무도 그 사람을 믿을 맘이 싹 가시게 만든 것이 바로 그 틈새에서 나온 우상이 아닌 진짜 언약의 결정체입니다. 누가 믿습니까? 아무도 못 믿습니다. 왜, 모든 인간은 우상을 날마다 생산하기 때문에. 언약은 없고, 그저 머릿속에나 있고 내가 뭔가 잘되어야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느끼는 이것이 우상공장이에요, 우상공장! 이게 아침에 눈만 뜨면 나오는 우상공장이에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어쩌고, 기도하게 되면 “우선 네 우상부터 살펴볼까? 말씀 다시 봐라. 너 지금 뭔가 겁나지? 뭔가 오늘 하루도 두렵지? 부들부들 떨고 있지?”

특히 목사한테는 새벽에 일찌감치 전화 오면 가슴이 덜렁 내려앉지요. “목사님,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전화가 오잖아요. 새벽에 오는 전화는 주로 그런 전화가 많아요. 무슨 일이 터졌어요. 이처럼 우리는 아침 눈 뜨면서부터 걱정 반 두려움 반, 어떤 사람은 공기 반 소리 반 하는데 걱정 반 두려움 반, 이래서 우리의 우상의 일과가 시작됩니다. 그럴 때 다시 한 번 말씀을 보면서 내가 또 내 자랑 질을 증거 하는 하루, 나 자체를 우상시하는 하루를 내가 서서히 시작했었구나, 주께서 찾아와서 이 우상덩어리를 언약으로 부숴버리고 욥처럼 그냥 재를 뒤집어쓰는 마음으로써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면 그것은 두려움 없는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저 늘 생각하는 것이 “주여, 한 시간 뒤에 뭐 할까요? 30분 뒤에 뭐 할까요?” 항상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지시를 받으면서 하루하루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언약이 침투되어 있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신다는 데 우리는 건성건성 들었습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니 매일같이 우상 적인 하루가 시작됩니다. 이건 이렇게 되어야 되고 저건 저렇게 되어야 되고 내가 시나리오 짜고 소설 쓰고 내가 계획 잡고 안 해주면 하나님 앞에 대들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우상의 생활, 그러나 그 틈새에서 십자가 피 흘려주셨으니 주여 이제는 모든 것이 주님이 사랑인 것을, 용서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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