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악한 영(엡6;12) 2001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1. 27. 19:55
2020-01-26 12:43:16조회 : 75         
   악한 영 200126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악한 영(에베소서 6: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fGy-5bqL8w, Hit:6
 이근호20-01-26 13:37 
영적 전쟁

2020년 1월 26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6:12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악한 영’이라는 단어는 일상생활에 필수적이지 않다고 여깁니다. 사람들이 이 ‘악한 영’이라는 개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모든 의미의 시작을 자기 자신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 뒤에는 아무 것다. 있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잘되는 것이다. 모든 가치가 나에게 다시 소환되는 중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인간 배후의 뭐가 있는지를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현상은 실은 ‘악한 영’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배후에 그 ‘악한 영’이 항시 있어 인간들 평생 조종하며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을 고려하지 아니하면 인간에게 남아 있는 바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에 준해서 인간은 자꾸만 ‘옳은 판단과 옳은 결정’을 내리려고 합니다.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의 미래와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고들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 배후에 악한 영이 실제로 있다는 증거는, 인간은 한시라도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지 아니하고서는 살아가지 못하고 딱 들어붙어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늘 혼자서 중얼중얼거립니다. “정해진 운명아 비켜라!, 내 운명은 내가 앞으로 개척한다.”고 자신을 설득하며 삽니다.

문제는 과연 자기로부터 의미를 출발시킬 때에 그 자기를 나쁘게 보느냐 아니면 좋게 보느냐 하는 겁니다. 일단 자기 자신을 좋게 봅니다. 악마가 그렇게 시켰습니다. 즉 ‘나 자신을 나쁘게 볼 하등의 근거가 없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악한 영’의 존재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싸워라”고 하십니다.

이는 무엇과 싸워서는 안 된다 는 것을 전제로 하느냐 하며는, ‘혈과 육과의 싸움’은 소용없다는 겁니다. 혈과 육은 바로 눈에 보이는 나를 비롯한 같은 인간들입니다.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는, 모든 인류의 뒷배를 파악하고 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본 모습을 타인에게 묻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50에, “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떡하란 말입니까? 모든 인간이 썩어질 육신을 켜 안고 살아가는 중인데 어떻게 이 일을 중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이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사흘 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인간의 혈과 육으로 건널 수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자기에게 온갖 것을 다 투자해서 구원은 성사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간격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에도 틈이 있습니다. 이 틈은 틈대로 항상 열려져야하고 절대로 덮여질 수가 없습니다.

육이 육에게 하는 모든 시도가 다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바로 이 간격 때문입니다. 이 간격이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같이 십자가 달린 한 강도는 예수님의 용모를 아무리 요조모조 훑어봐도 도저히 구세주 같은 면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믿을래야 믿을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다른 강도는, ‘믿음을 수 없는 분’이라는 바로 그 점이 참된 메시가임을 증명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두 강도 사이에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한 쪽 강도는 자신의 판단을 ‘나는 잘났으니 나는 여전히 살 권리가 있어’라는 점에서 출발한 반면에, 구원받은 강도는 자신을 악한 자로 본 겁니다.

즉 구원받은 강도는 자신이 뒷배를 예수님을 통해서 안 겁니다. 자신은 도저히 이 악함에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안 겁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일방적으로 천국에서 날아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마치 집에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천국으로 날아온 돌멩이를 얻어맞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자기 잘남을 위해 쌓아놓은 모든 것은 와장창 유리창 깨어지는 소리와 더불어 산산조각 나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세 전에 정해놓은 다른 운명을 돌멩이와 더불어 덮여씌우신 겁니다. 창세 전의 운명은 곧 세상 끝날의 운명과 동일하게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빈 허공에 갑자기 하나님의 주먹이 날아와서 얻은 맞은 사람은 앞으로 죽게 되어도 동일한 신분자인 것이 드러납니다.

새삼스레 구원을 위해 추가될 새로운 체험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이처럼 일방적으로 하나님에게 얻어맞아 난데없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세상의 모든 욕설과 손가락질이라는 능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순간적 구원을 변동시킬 경우가 더는 없기 때문입니다. 날아간 돌멩이가 최종 결정난 상황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1-3에 보면,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이처럼 균등합니다.

성도는 노력하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증인입니다. 성도로서의 악한 영과의 싸움이란 실은 ‘형제 만나기’의 일환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님의 일방적 사랑만 자랑합니다. 아가씨가 친구들 모아놓고 하늘의 새신랑 혼사가 성사된 것을 마음껏 자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자들이 형제입니다.

형제는 성도가 전도해서가 아니라 악한 영에 의해서 저절로 모아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 2:7) 가만 있어도 불신 세계쪽에서, 악한 영이 알라서 모아줍니다. 대화가 안 된다고 배척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즉 성도는, 그동안 자신의 운명을 장만하려고 노력한 모든 재료들을 다 걷어 차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악한 영이 선/악, 그리고 승리/패배, 성공/실패, 천국/지옥 사이에 나있는 틈을 극구 덮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건널 수 없는 틈대로 남겨두어야 하는데 세상의 인간들은 기어이 이 틈을 자신의 노력과 지혜로 덮어서 본인이 본인의 운명을 결정지으려 합니다. 고린도전서 2:4-5에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이로서 모든 죄를 능가하는 차원에서 내민 손길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여 오늘밤에 제 영혼 도로 찾을거지요? 기꺼이 가겠습니다.”(눅 12:20) 이런 자세로서 세상을 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만든 운명을 날마다 걷어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20-01-27 14:58 
60강-엡 6장 12절(악한 영)2001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6장 12절입니다. 신약성경 315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성경에 나오는 현실과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현실은 엄청난 차이가 나지요.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나름대로 죽고 난 다음의 대책 같은 것을 늘 수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 죽고 난 뒤에 천국 가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죽어서 저 천국에, 영원한 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을 우리가 늘 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여주면 되는데 이미 천국 갔다는 사람들만 붙들고 자꾸 강권하고 있어요. “당신이 천국 갔다는데, 당신이 갔다면 나도 갈 수 있다는 말인데 당신은 어떻게 천국 갔습니까? 한수 배우기를 바랍니다. 한수 가르쳐 주세요.”라고 매달리는 경향이 있어요. 그 사람과 똑같이 되면 자기도 천국 갔다고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짐작을 한 겁니다.

그러나 정신 차리고 다시 한 번 보세요.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성경자체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악한 영들과 싸우라.” 오늘 본문 이야기가 그거잖아요. “네가 성도 맞냐?” “맞습니다.” “그러면 네가 악한 영들과 싸워라. 우리의 씨름은, 우리의 싸움은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다.” 이미 나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왜 사람 붙들고 그렇게 애를 먹이냐는 말이지요.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하여튼 사람을 붙들고 그래요. 인간은 계시가, 진리가 아니거든요. 성경이 있으면 성경내용과 본인이 딱딱 맞아떨어지면 된다는 그 말입니다. 굉장히 간단한 문제지요. 성경에 나와 있는 그 인간성과 본인이 아귀가 딱 맞으면 되잖아요.

성경말씀과 본인이 생각해도 합치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면 옆에 아무리 친한 사람이 “당신도 구원받았어요.” 혹은 “당신도 구원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런 소리해도 그것 믿지 마세요. 본인이 성경말씀과 합치가 되어야 됩니다. 일단은 굉장히 쉽지요. 일단은 굉장히 쉬운 거예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뭐가 나오느냐? 악한 영이 나왔다 그 말이지요.

악한 영이 어디 사십니까? 악한 영을 보신 적이 있어요? 악한 영이 사는 그 동네에 가고 싶고 그래요? 재개발지역인가요?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남들이 뭐라 하는 것은 무시하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죽어서 구원받고 하는 그 문제는 성경말씀에 일치되면 된다.’ 여기까지는 잘 왔습니다.

자, 성경말씀을 보자 그 말이에요. 딱 보니까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악한 영이 나왔어요. 그런데 악한 영은 우리나라 교육체제에 악한 영이 없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수능시험에 ‘악한 영에 대해서 기술하라’ 이런 것이 나오지를 않는다고요. 이 현재의 세계가 악한 영을 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악한 영과 싸우라고 했는데, 악한 영과 싸우는 자가 성도라 했는데 우리가 평소에 매일 살아가는 삶 속에서는 악한 영이 눈에 띄지를 않아요. 우리가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갑자기 딜레마가 발생되는 겁니다. 어떡하면 좋겠어요? 악한 영이 안보이는데. 악한 영 멱살 쥐고 한 번 싸우고 싶은데 악한 영이 안보이는데 어떡합니까?

악한 영을 모르고 있다는 말은 평소 일상생활이 악한 영의 존재를 빼고 살아가고 있음을 그대로 티내고 있는 겁니다. 악마의 존재를 전혀 계산에 넣지 않고 그냥 살아온 거예요. 남들 눈에 괜찮아 보이면 자기도 괜찮은 줄 알고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성경에서는 악한 영을 거론하는데 성경에서 거론하든 말든, 하나님이 거론하든 말든 ‘나는 남들 보기에 괜찮은 존재 같으면 나는 괜찮다고 언급하자. 교회에서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본다면 그걸로 되었다.’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살아온 거예요. 성경은 그게 아닌데.

그래서 목사님이 “아이고 집사님 구원받았습니다.” 하면 구원 받은 것으로 본인이 그렇게 인식하고 옆에 있는 다른 권사님이 “아이고 집사님 믿음 좋습니다.” 하면 믿음 좋은 것으로 얼렁뚱땅 넘어간 거예요. 성경이 뭐라 하는 것은 모르고. 남들이 그렇게 우샤우샤 하면 구원되는 줄 알았지요. 악한 영 나오는데. 여기 성경에 나오거든요.

물론 교과서에는 안 나와요. 세상 시장에도 악한 영 안 팝니다. ‘악한 영 두 마리에 500원.’ 이런 식으로 팔지를 않아요. 시장에 없는 것은 요새 같으면 비현실로 보거든요. 시장에 안 나오는 것을 사람들은 비현실로 봐버려요. 따라서 여러 번 말씀드립니다만 이 성경이라 하는 것은, 악한 영이 나온다는 것은 평소에 악한 영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다시 말해서 성도지요, 이 성경이 성도를 위한 책입니다.

악한 영 빼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아니에요. 악한 영을 의식하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비밀책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바르게 살면 된다면 성경 덮어버리고 유교경전이나 불교경전 들이대면 돼요. 그렇게 살면 돼요. ‘아, 인간은 이렇게 살면 착해질 수 있다.’ 성경은 그게 아닙니다. ‘훌륭하게 살 수 있다.’ 그게 성경이 아니에요.

“네가 악한 영에 대해서 알아?” 그겁니다. 전에 cf에 그런 것이 있었지요. “네가 게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악한 영이 어떻게 설치는지 네가 알아?”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묻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악한 영이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실질적권력은 악마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인간하고 다투고 재판하고 하지 말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그 배후에서 인간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음을 의식하고 그걸 늘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에요. 정치문제, 민주당이니 한국당이니 그런 문제에 신경 쓰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궁금할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은 악한 영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악한 영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을 거예요. 출발이 우리의 몸에 있잖아요. 이 몸이 있고 이걸 육이라 하고 또 혈육이라 한다는 말이지요. 이미 혈육이 있는 사람은 악한영이 느껴지지 않고 보이지 않게 되어 있어요.

혈육이 있는 인간은 그 출발점이 인간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인간배후에는 뭐가 없어요. 모든 시작을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일까, 내게 만족스러운 것이 무엇일까, 항상 그걸 출발로 해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교회 나오고, 놀러가기도 하고, 설 명절 쉬고. 전부 다 나 좋으라고 하는 겁니다.

출발점이 나부터 출발한다 그 말이에요. 그런 나를 뒤에서 악한 영이 조종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를 못해요. ‘내가 편하고 내가 만족하면 그것이 전부지 또 뭐가 있어?’ 이런 식이에요. 인간은 닫힌 존재라니까요.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배후에 인간을 그런 식으로 누가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자체도 인간을 모욕하고 모독하는 것처럼 인간은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게 되면 옆 사람이 “그 사람 참 잘 죽었다.” 하면 대번에 멱살 쥐고 싸울 거예요. 그 사람이 죽을 때 되어서 죽었는데 그 자체가 잘못된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죽을 때 되어서 죽었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해서 죽인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왜 화를 내고 멱살을 쥐고 싸우려고 덤벼드느냐?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뭐든지 나부터 출발하는 나한테는 썩 기분이 나쁘다 그 말입니다. 나한테서 출발하는 것, 내 가족은 오래 살아야 해, 이렇게 나부터 출발하면 그 이야기가 굉장히 무례하기 짝이 없고 기분 나쁜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지금 제가 답변을 늦추고 있어요. 악한 영이 어디에 있느냐?

악한 영이 어디 있는가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악한 영은 혈과 육이 있는 이상은 파악이 안 되고요. 악한 영에 의해서 혈과 육에 주어진 것이 있어요. 그게 운명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운명은 인간이 어디에 가도, 미국에서 살든 호주에서 살든 어디에 있더라도 인간에게서 떠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요.

그게 운명입니다. 유럽에 가서 살면서도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장차 어떻게 될까?’ 북한에 가도 ‘나는 어떻게 될까?’ 이게 운명이거든요. 그 운명감각, 인간들이 그렇게 장래를 생각하는 그 생각이 인간 말고 인간에게 덧붙여진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아무리 잘나도 운명에 시달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잠을 못 이루게 되어 있어요. 잠도 못자요. 꿈자리가 사납고 뒤척입니다. 알 수 없는 불안, 알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성, 그게 공포로 작용하지요.

그래서 인간은 싸우지 않더라도, 성경을 덮고 교회 안다녀도 인간은 매일같이 싸우는 무형의 상대가 있어요. “운명아. 길을 비켜라.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리라.” 이게 모든 인간에게 다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옆 사람이 “넌 혼잣말로 무슨 소리를 하느냐?” “몰라도 되고 나 혼자 하는 말이다.” 자꾸 인간은 밤이나 낮이나 자기가 자기보고 자꾸 혼자 하는 말이 있어요. ‘내일은 잘 되어야지. 내 자식은 내가 잘 챙기고 잘 키워야지. 이가정은 내가 일으켜야지.’ 내가 나 자신보고 ‘힘내라 힘. 너는 일곱 번 쓰러져도 여덟 번 일어나야 돼.’

옆에 있는 친구가 “거기 누가 있나? 누구하고 이야기하지?” “아니야. 이것은 나보고 하는 소리야.” 자기보고 하는 소리 아니에요. 악한 영과 싸우는 거예요. 운명이라는 이름의 악한 영이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모든 인간에게 다 달라붙어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7장 3절에서 4절에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형제가 있거든요. 배다른 형제지요.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이게 뭐냐 하면, “우리의 형님, 예수님이 뜨는데 물들 때 노저으라고 한참 뜰 때 출세해야지요. 형님, 여기 이 촌구석에, 갈릴리에 계시면 안됩니다. (그 당시 서울격인)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유명세를 떨칠 기회가 왔습니다.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소서. 스스로를 pr해야 됩니다. 요새는 피알시대입니다.” 하고 옆에서 강권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운명이라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발하고 개척해야 그게 내 미래가 보장이 된다는 겁니다. 확실한 내 미래가. 이게 목적으로 이끄는 삶 아니에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닙니까? 그냥 바보등신같이 눌러 앉아 있지 말고 싸대야 된다는 거예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헌금하고, 봉사하고. 왜? 나와 내 가정을 위해서 뭔가 투자를 해야 우리 가정의 미래와 구원이 보장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쉴 새 없이 싸워요. 뒤쳐지는 나를 자꾸 채찍질해서 주저앉지 않고 남보다 앞장서도록 나를 독려하는 어떤 힘이 있어요. 지금껏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 동조했습니까? “그래 동생들아. 네 말이 맞구나. 요새 좀 내가 잘나가지? 유-튜브에서 유명하게 되었지? 이 참에 한번 확 세상 뒤집어봐? 새로운 스타가 등장했다고.”

예수님께서는 안갑니다. 안가고 뭐라고 하느냐? “내가 세상에 나타날 때는 때가 있어야 돼.” 때가 있다는 거예요. 동생들도 예수님보고 “형님, 운명은 내가 만드는 거예요. 가만있으면 안돼요.”라고 하는 반면에 예수님도 운명 이야기를 하는데 내 운명은 타이밍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정해진 때가 있다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예수님이나 예수님 동생들이나 뭔가 본인 말고 본인을 압박하는 다른 요소가 항상 내 인생에 둘러쳐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알 수 없지만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뭔가 바다 속 물고기처럼 끊임없이 헤엄쳐야 될 당위성, 그럴 필요성 같은 것을 계속해서 느끼는 거예요.

서른에 힘들게 취직해서 살아가면서 신입사원이 애쓰는 것이 있어요. ‘이렇게 야근하면서 내가 회사에서 죽겠다. 하지만 견뎌야 돼. 왜? 나중에 내가 60이 되어서 그냥 크루즈 여행이나 다니면서 노후를 편안하게 지내려면 그동안 돈을 좀 벌어놔야 돼. 돈 없으면 나중에 놀러 못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참아내는 겁니다. 60 되어 봤습니까?

편안히 놀러만 다닐 환경이었던가요? ‘내가 이렇게 예수 믿으면 나중에 구원받을 거야. 죽으면 천당 갈거야.’라고 주장하는데 죽어봤어요? 그것은 네 생각이고요. 정작 죽고 난 그 다음의 상황을 미리 체험했습니까? 안했지요. 얼마나 빈말입니까. 자기 소망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자기운명개척에 자기가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쥘 수도 없어요. 그 때가 안되었으니까. 인간은 그냥 무지막지해요. 그냥 나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요. 그냥 나댈 뿐이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 천국에서 돌멩이가 날아왔다 칩시다. 돌멩이가 날아와서 나를 지키는 내 집의 유리창이 와장창 다 깨지면서 그 돌멩이가 나를 쳤다고 해 봅시다. 도대체 난데 없이 날아든 거지요. 그게 구원입니다. 구원은 이유도 없고 원인도 없어요. 몰라요. 난데없어요. 돌발사태로 그냥 당한 거예요. 아무 생각 없는데 구원되었어요. 아무 생각 없는데 구원되었다는 생각만 확 들어왔어요.

그래서 본인은 알아요. 이것은 내가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인만 알아요. ‘기적도 우째 이런 기적이!’ 그러니까 어떤 힘을 쓰고 애를 쓴 것이 아니라니까요. 구원이라는 게 힘쓰고 애쓴 것이 아니고 빈 허공에서 주먹이 날아와서 나를 난데없이 쳐버린 겁니다. 원인 결과의 고리 없이 그냥 쳐버린 거예요.

그 순간 느끼는 것이 뭐냐? 내가 개척하는 운명 말고 다른 운명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내가 개척하는 그 운명과 다른 운명이 그동안 투쟁하고 싸워왔던 거예요. 악한 영은 항상 우리에게 ‘운명은 네가 개척해야 된다. 교회 다녀서 예수 믿어야 된다.’ 항상 우리에게 그걸 부추겼고, 우리는 그걸 쪼개듯이 그래야 되는 줄 알았어요.

교회 가서 예수 믿고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줄 알았어요. 구원은 그렇게 해야 쟁취해서 손에 쥘 수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돌멩이가 날아오는 순간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손가락질과 욕설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책임이 없어요. 죄의 기능을 능가하는 차원에서 나에게 주먹이 날아왔기 때문에 ‘나보고 이게 죄니 아니니, 똑바로 하라든지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내가, 내가 아니에요. 내가 꾸려가는 내가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그 전에 내가 생각했던 운명은 내가 꾸려나가야 얻을 수 있는 천국이었어요. 그런데 천국이 먼저 나에게 주먹질하고 돌멩이질 할 줄은 내 머릿속에는 그런 계획이 없었지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 도움들을 다 걷어차 버립니다. 그 사다리를. 가거라. 참고서 필요 없어요. 다 버려버립니다.

그게 오히려 구원을 방해했어요.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그런 아이디어는 다 버리세요. 그거 주워 모은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한 대 얻어맞은 겁니다. 어떤 모욕감도 괜찮아요. 왜? 내가 구원받은 이 운명은 내가 모욕감을 이겨냈다는 대가로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모독하는 어떤 것도 내가 구원된 것과 상관없어요. 그걸 이렇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창세전의 체험으로 우리가 이미 그 속에 들어가 버리면 더 추가된 체험은 필요치 않습니다.

다음에 나는 또 구원받을 것이라는 체험이 추가적으로 더 필요치 않아요. 창세전의 체험, 이미 구원이 결정된 체험이 날아왔기 때문에 더 보탤 구원의 체험은 일체 필요치 않아요. 그런 것이 없어요. 시작과 끝을 한꺼번에 다 품어버린 겁니다. 시작과 끝을. 안 죽어도 괜찮아요. 살아있어도 괜찮아요. 사나 죽으나 관계없어요. 죽어서 생길 체험을 미리 다 받아 버렸어요.

‘내가 나 된 것은 내 뜻이 아닙니다.’ 그런 안도감, 그런 완성감, 최종결정감,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는 느낌. 그런 사람의 안목으로 볼 때 비로소

운명이라는 것은 없었고
예수님의 힘과 그리고 악한 영의 힘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쟁취할 운명이 없어요.


그냥 주님께서 주시면 내가 생각하지 않은 나가 되어서 주 안에 있는 주의 백성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사실을 남들에게 자랑질하는 거예요. 물론 자기가 잘해서 한 것이 아니니까 마음껏 자랑해도 돼요. 마치 어느 아가씨가 하늘나라 왕자님하고 혼사가 결정되고 난 뒤에 자기 친구들, 아가씨들 다 모아놓고 원 없이, 한없이 이번 혼사에 대해서 자랑질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 주님이 나에게 웨딩드레스 입으라고 옷 줬다. 너에게는 없지~롱.” “너 너무 자랑한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니까 자랑질 좀 해 보자.”

왜! 내가 한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십일조해서 한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목사 되어서 얻은 것이 아니잖아요. 신학공부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교회 봉사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 말이지요. 자랑질 좀 하면 어때요? 성도는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증인이지. 자랑질하는 거예요. 자랑질 할 때 네가 받은 것 나에게 좀 나눠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데 이걸 나눠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 보게 되면 십자가가 세 개였거든요. 일단 예수님 십자가는 빼고 합시다. 강도질 하다가 사형선고 받은 두 강도가 대충 마주보고 있어요. 그런데 자기들만 사형당하는 줄 알았더니 그 현장에 예수님이 쑥 끼어들었습니다. 그러면 3명이 한 세트가 되어서 같은 날 사형집행 당합니다. 강도가 예수님이 누군가 보니 전에 자기가 구세주라고 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강도가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 봐도 처참하고 죽어가고 있고 망가지는 그 모습을 부정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봐도, 위아래를 훑어봐도 믿고 싶어도 믿을 건수가 있어야 믿지요.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다른 강도가 보더니 “당신은 구세주 맞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쪽 강도 입장에서는 믿을 수 없는 증거지요. 그 믿을 수 없는 증거가 바로 메시아의 유일한 증거에요. 인간을 믿을 없는 증거를 통해서 메시아를 믿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를 거부하는 악한 영과 휘감겨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들통나버린 겁니다. 그 현장에서. 따라서 십자가는 믿으라고 주는 것이 아니에요. 믿지 못하는 자만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설득대상이 안돼요. 고린도전서 2장 4절의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일체의 설득용이 전혀 없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쉽게 말해서 목회 크게 할 의사는 전혀 없다는 그 말이에요. 설득할 것은 전혀 없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나타남이다. 악한 영들과의 싸움을 아주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형제 찾기.’ 이것은 너무 놀라운 결과기 때문에 형제 찾기가 쉽지 않아요. 흙에서 보석 찾는 것이 쉽습니까? 못 찾지요. 나처럼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을 여러분이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아, 기적의 기적을 더한 거지요.

누가 그렇게 만나게 해주는가? 우리가 노력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에요. 악령에 속한 불신자들이 형제를 만나도록 도와줍니다. 마귀가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에요. 사도행전 2장7절에 보면,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사도행전 2장이 뭐냐? 오순절날 갑자기 성령이 하늘에서 불의 혀같이 임했어요. 하늘에서 성령이 임했다는 말이지요.

임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다 한패라는 거예요. 불신자들이 보기에. “전부다 예수를 따르는 갈릴리패 사람들이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불신자들이 형제를 찾아줘요.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자들이 전도한다니까요. 이번 명절에 일가친척이 모였지요. 그 많은 불신자들이 전도를 이렇게 합니다.

“나는 너하고 이야기가 안된다.” 이게 전도라니까. 그쪽에서 성도를 평하기를 “치우자 치워. 명절날 모여서 정치 이야기 하고 종교 이야기는 하는 법이 아니야. 밤새도록 떡국이나 먹고 고스톱이나 치자.” 그것뿐이라니까요. 그쪽에서 우리를 알아본다니까요. 사람이 대화를 하려면 논리적으로 대화가 되어야 되거든요. 성도는 주님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있습니다.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성도가 남들에게 자기사정을 이야기하고 저 사람도 나처럼 구원해보려고 아무리 시도를 해도 그 틈을 메울 수가 없어요. 성경에서 유명한 틈이 세 가지 있는데 아주 중요한 틈이에요. 하나는 강도와 강도사이의 틈, 지옥 가는 사람과 천국 가는 사람의 틈이 메워지지 않아요. 그리고 또 틈이 뭐냐?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나사로와 부자의 틈, 이틈을 메울 수가 없습니다.

부자가 요청하지요. “그 틈을 넘어서 저 거지가 나에게 물 좀 찍어주게 해주세요.”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그 틈은 아무도 넘어설 수가 없어요. 그 틈은 틈대로 유지되어야 됩니다. 이러한 틈의 가장 기초가 뭐냐? 선과 악의 틈이에요. 선과 악. 서로 대비가 되지요. 그러나 그 틈은 엮여져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선과 악에 매일같이 시달리고 꿈속에서도 선악에 힘들게 괴롭힘을 당하는 거예요. 모든 정신병은 선악에서 나오는 거예요.

양심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모든 정신병과 모든 범죄는요, 죄짓지 않기 위해서 죄를 지어버리는 거예요. 죄를 감추기 위해서 칼 가지고 남을 찌르는 겁니다. 네가 왜 나를 무시하느냐고. 네가 말을 왜 그렇게 나에게 함부로 하느냐고. 에이 죽어라, 하고 죽여 버리는 거예요. 나의 잘남, 나의 선함을 지키기 위해서 죽이고 욕설하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내 가치 지키기 위해서. 선악이라는 것 때문에,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양심이 있는 한 인간은 죄 안 지을 수가 없어요. 남들 들으면 ‘저 큰아버지가 나 욕하는 것 아니야?’ 이걸 염두에 두고 대화를 한다니까요. ‘저 동서가 지금 나 비꼬는 소리를 한 것이 분명한데.’ 동서가 고스톱 치면서 “형님은 수입도 만만치 않은데 내 돈이나 가져가세요.” 무심코 하는데 ‘너 우리 집 못산다고 지금 비꼬는 소리지?’ 명절에 모였다 하면 전부 다 예민해져 있어요.

‘나는 너보다 더 잘났어.’ 이런 것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다니까요. 만남이 우연적인 만남이 아니고 전부 다 칼을 갈아서 품속에 품고 만난다니까요. 생전 전화 한 번 안하던 큰 동서가 정종 큰 거 사왔어요. 젊은 사람들은 정종이라면 잘 모릅니다. 청주지요. 정종 한 병 사서 “어머니 아버지 잘 계셨습니까?” 하면서 용돈 주게 되면 부엌에서 다른 동서가 전 굽다가 ‘저거 오늘 머리카락 나한테 다 쥐어뜯겼다.’ 인간은 칼 품고 만나는 거예요.

왜? 잘났거든요. 잘난 것이 보람이에요.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는 거예요. 그동안 개척해 왔었고. 선과 악,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틈을 내버립니다. 선도 악도 아닌 제 삼의 틈 자리를 주님께서는 두 강도 사이에 십자가를 세웁니다. 내가 너에게는 선악차원에서는 책임을 안 물을게. 이게 바로 두 강도사이의 예수님이십니다. 죄의 차원 말고 그것을 능가하는, 죄 차원을 능가하는 다른 차원이 있어요. 그게 생명나무의 차원입니다.

그걸 허락하신 거예요. 어제인가 전화가 왔었어요. “안녕하십니까?” 목소리부터 뭔가 불안불안하지요. “거기가 우리교회입니까?” “예 우리교회입니다.” “제가 우리교회에 헌금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헌금이 잘못 들어가서 되돌릴 수 없습니까?” 보이스피싱 냄새가 살살 났어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 준영입니다.” 이름도 급조한 느낌이 들어요. 명절이니까 노름 돈 던진 모양이지요.

딱 보니 노련하지가 않아요. 신입이에요. 보이스피싱 신입. “그런 계좌가 없습니다.” 하고 점잖게 끊었거든요. 만약에 내가 주님을 몰랐다면 누가 그것을 지적질 할 수 있습니까? 누가 그 사람을 욕할 수 있어요? 보이스피싱이라 욕하지 마세요. 우리 일반회사 모든 업무는 보이스피싱 아닙니까? 사기 아닙니까? 목적이 뭐예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일합니까? 돈 때문에 일하는데요. 몸 팔아서 돈 버는 창녀하고 다를 바가 뭐 있어요?

최종마감이, 의미의 마감이 나라니까요, 나. 내 배후에 아무도 없어요. 운명은 나부터 시작해서 내가 알아서 개척해서, 나중에 죽어서 천당까지 가겠다는 그 야심과 오기로 똘똘 뭉쳤는데 누가 누구보고 욕합니까? 왜? 나는 잘났으니까. 어디에 기준해서? 선악기준에 의해서. 잘났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 악한 영?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악한 영이 있다니 내 인생에 그런 용어는 없었는데.

성경은 말합니다. “네 혈과 육하고 싸워라. 네 몸뚱이하고 네가, 네 인생하고 네가 싸워라.”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나인데 어떻게 나를 나의 적으로 간주합니까?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어떡하면 좋아요? 그렇게 지키고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고 꽉꽉 쥐고, 평생토록 품고 가는 이 혈과 육이 도리어 나로 하여금 더욱 더 배나 지옥백성 되게 만들었던 거예요. 내가 나를 지옥 가도록 강권한 거예요. 강권, 강하게 권한 거예요. 매일같이.

추가적으로 더 노력할 필요도 없는데 자꾸 내가 나보고 닦달내면서 노력하래요. 그래야 네가 출세하고 성공한다고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선과 악이 있으면 사람들은 성공한 것을 선이라고 보고, 출세 못한 것을 악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과 악에 늘 휘둘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생명나무에서 틈을 만들게 되면 그 틈에서 주께서 손길을 내밉니다.

손길을 내밀어서 성공도 필요 없고 실패도 신경 쓰지 말고, 성공실패에 대한 그 중압감에 눌리지 않는 제 3의 영역에서 손길이 와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건져버린 거예요. 선악에도 신경 안 써도 되고, 네 인생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제 3의 틈이 주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에게 손 내밀어서 주어진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세상 교회들은 그 틈을 메우려고 합니다. “교회 오셨잖아요. 오셨으면 복 받아서 성공해야지요.” 이건 뭐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딱 들어맞아요. 성공하려고 교회 온 거예요. 기도해서 응답받아서 자식들 출세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는 거예요. 내 구원받는데 성공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구원받는데 실패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왜? 나니까.

나는 지옥 가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이러한 두 구조에 대해서 그 틈을 메우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틈이 벌어져야 되는데 내가 그 틈을 깔고 앉았다는, 그래서 내가 나의 적이라는 사실을 인식을 해야 되는데 자꾸 그 틈을 내가 덮으려고 하는 거예요. “형님, 이 참에 세상에 나서서 형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야 됩니다.”

자꾸 동생들이 되어가는 모든 것을 자기들의 위신중심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마귀는 어떻게 활동하느냐? 실제로 마귀가 활동하는 것은 누가복음 22장에 아주 쉽게 나와 있어요. 누가복음 22장 31, 32절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제가 아까 ‘형제 찾기’라 했지요. 싸움은 ‘형제 찾기’입니다. 우리가 찾는 것이 아니에요. 마귀가 우리를 한 부류로 그렇게 규정을 해서 모아줘요. 자동적으로 형제가 찾아지지요. 그 일을 마귀가 해야 되는 거예요. 베드로는 지금 마귀를 전혀 의식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를 보고 있어요. 지금 사탄이 너희로 하여금 주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기위해서 계속해서 격렬하게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달리 말해서 주께서는 이 세상 선악세계의 틈을 갈라지게 하는데 인간들은 그 틈을 용납을 안하고 그걸 자기의 선행으로 틀어막으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 저 잘났지요 그지요? 저 착실하게 살지요 그지요? 저 주님한테 봉사 많이 했지요 그지요?’ 자꾸 자기로 그 틈을 막으려고 해요. ‘저 예수 믿는 거 맞지요, 그지요?’ 틈을 막으려고 해요. 그게 혈과 육에서 나온 소리에 불과한데, 배후의 악마가 그 따위 짓 하는데 인간은 자꾸 노력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냥 막 살면 되는데 자꾸 노력하려고 하는 거예요. 노력한다는 말은 현 상태가 영 내 마음
 에 안든다는 겁니다. 불만족스럽다는 거예요. 결핍이 있으니까 악마의 유혹을 받는 거예요. 예수님한테는 악마가 이런 식으로 근원적으로 도전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없고 오직 영적존재들만 만났는데 예수님과 악마 둘 사이의 만남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셨고요.

성령, 예수님, 악마 이 세분이 함께 만난 장소가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께 첫 번째, 뭐라고 하느냐? 3절에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대목이 어려워요. 분명히 악마는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대꾸하기를 예수님이 이렇게 합니다.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이게 동문서답 아닙니까? 악마는 사람이 떡으로 산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악마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요. 돌이 떡 되게 하라고 했지 사람이 떡으로 산다는 이야기를 악마 쪽에서 예수님한테 먼저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존립의 바탕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거예요. ‘악마야, 네가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나에게 부추기는 그 의도가 뭐냐’는 그 말이지요. 악마는 항상 인간편이에요. 인간의 친구입니다. 인간은 악마에게 놀아나는 것도 모르고 놀아나고 있고 항상 격려 받고 있거든요. ‘네 운명은 네가 개척해라. 네가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네 미래는 결정된다.’

그러나 악마는 어떤 경우라도 내 뒤에 누가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왜? 악마 본인이 있기 때문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안가르쳐줘요. ‘열심히 살아라. 너 배불러야지.’ 예수님한테도 동일하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여,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착각을 하는데 정말 예수님이 맞다면 돌이 떡 되게 하는 기적을 베풀면 내가 인정을 해줄게.”

이 소리가 악마의 소리입니까, 평소에 내가 나에게 하는 소리입니까? 내가 신자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를 때는, 나의 이 일이 성사되면 나는 신자 맞고 아니면 아니라고 내가 얼마나 나에게 이야기해요? 나에서 나로 와서 나로 가는 그 닫힌 구조 안에서 우리는 못 벗어나잖아요. 누가 와서 “그런 이야기 들을 필요도 없고 그런데 놀아날 필요도 없어. 너는 이미 창세전에 끝! 창세전에 이미 종결된 존재야.”라고 그렇게 돌멩이 던진 분이 계시다면 그런 일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입니까?

악마의 싸움은 간단합니다. 내가 나를 상대하지 않으면 돼요. 내가 나를 닦달내지 않으면 돼요. 그냥 내가 나를 내버려 두세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성도는 성도입니다. 늘 틈이 나와서 그 틈, 잘났다 못났다, 성공했다 실패했다, 천당 간다 지옥 간다, 선과 악, 그거 하지 마시고 그 틈에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거예요.

어느 날 여름 휴가철에 의성에 간 적이 있어요. 의성 비안골에 가니까 한 여름에 시원한 얼음이 언다는 거예요. 가 봤어요. 옛날일입니다. 가보니까 진짜 얼음이 있고요 구조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 틈 사이에서 냉기가 흘러나와요. 성도는 그 냉기 맞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선도 악도 아니에요. 성공이니 실패가 아니에요. 그냥 주님 살아계시기에, 부활하셨기에 그냥 냉기가 나오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와 부활사이를, 사흘의 간격을, 그 틈을 덮으려고 해요. 자꾸 연속성을 두려고 합니다. 우리한테는 그런 것이 없어요. 십자가로 끝. 인간의 모든 노력도 끝. 그리고 성령이 와서 구원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고유권한이에요. 오순절 성령이 오는 것은 예수님의 고유권한이에요. 인간이 건너갈 수 없어요. 신학해도 안돼요. 어떤 노력을 해도, 어떤 착한 짓을 해도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그 틈이 늘 유지되어야 돼요.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니 얼마나 피곤한지. 피곤하고 힘들고. 특히 믿음 있는 성도라도 살아가는 것이 참 외롭습니다. 외로울 때 기도하면서 “주여, 저 상처받았어요.” 이런 이야기 하거든요. 주님은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네가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고 온 인류의 상처 속에 네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상처 아닌 것도 상처에요.

다만 그게 타이밍이 되어서 터져 나왔을 뿐이지 우리는 내가 존재하는 것이 나에게 상처에요. 내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지옥 갈 이유가 되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곱게 살아도 지옥가요. 생전 세상 밖으로 나간 적 없는 강원도 할머니가 죽고 보니 지옥에 와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한테 따집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나쁜 짓도 한 적도 없는데 왜 지옥 갑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지옥에서 태어났으니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에서 태어난 것을 네가 왜 몰랐느냐?”

네가 악한 영, 혈과 육에 속했다는 자체가 악한 영에 속하고, 악한 영에 속했다는 자체가 가만있어도 지옥으로 모셔갑니다. 명절에 이 이야기를 하니까 도대체 명절분위기가 싸하지요. 의성 얼음골 냉기 나오는 것처럼. 무슨 이야기가 통해야 말을 하지요. 모르는데요.

2018년도에 영국에서 장관을 하나 뽑았는데 그 부서가 외로움을 다스리는 장관이에요. ‘Minister of loneliness’ 그 여자장관의 이름이 트레이시 크라우치(43)입니다. 얼마나 영국이라는 나라가 사는 것이 각박했으면 외로움을 다스리는 장관이 있겠어요. 우리나라는 우리자신들이 대신합니다만.

광야에서 주님이 악마 만났을 때 성령께서 ‘이놈 잘됐다. 악마의 정체를 밝히리라.’ 악마의 정체는 우리의 뒷배를 감추는 거예요. 우리부터 시작하게 하는 겁니다.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네가 성공한 인간이냐 내가 성공한 인간이냐.’ 맨 날 이것만 비교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 왜 살려고 하는데? 살 이유가 없잖아.” 살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돼야 돼요. ‘주여, 오늘밤에 내 영혼 데려가실 거지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려니 힘들어 죽겠는데 이제 그만 거두어주옵소서.’ 주님께서 “아직 할 일 남았다. 까불지 마라. 더 살아야 돼, 힘들어도.” 월 1500에 80평 아파트에 살면서 “힘들지? 더 살아.”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더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기도는 하나밖에 없어요. ‘오늘 밤에 내 영혼 데려가 주실 거죠? 제가 여기 있을 곳이 아니잖아요, 주여.’ 선과 악을 초월한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놀아났는지, 얼마나 거짓말에 휘말렸는지. 내가 나를 속였습니다. 우리가 가짜인 것을 왜 진즉 몰랐어야 되는지. 악마가 진짜라고 자꾸 거짓말 해왔었습니다. 주여, 이제는 내 생각하지 말고 주님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