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7강 타이밍

아빠와 함께 2020. 1. 18. 18:39
2020-01-18 12:15:31조회 : 6         
202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7강-에스더 강해: 타이밍이름 : 이미아 (IP:122.43.170.138)

202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7강-에스더 강해: 타이밍

 

금식하는 대목이 나왔습니다. 금식에 대해서 우리가 복잡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에스더 4장에 금식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금식은 한마디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크게 쓰겠어요. 금식이라는 의미는 뭐냐, “어쨌든, 나는 아닙니다.”에요. “어쨌든, 저는 아닙니다. 제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금식의 의미에요. “내가 열심히 밥 먹고 내가 설친다고 주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밥을 굶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설침으로 방해가 되는, 다른 분의 활동을 내가 훼방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내 인생이나 내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이 세상을, 내 운명을 개척하는 이런 것은 아닙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금식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밥을 굶는 금식이 있고. 첫 번째는 밥 굶는 금식. 두 번째는 밥 먹는 금식. 뷔페에 가서 접시에 이만큼 담아놓고 그거 먹으면서 금식을 하는 거예요. 그것도 세끼를 먹어가면서. 배터지도록 먹는 금식. 어쨌든 이 밥이 온 것은 제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맛있는 뷔페 음식을 먹게 된 것은, 이 뷔페 음식이 부패한 음식인지, 뷔페음식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음식을 먹게 된 것은 제 뜻이 아닙니다, 라는 마음가짐. 그게 바로 금식정신이에요.

 

그래서 주께서 이제는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금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면 이래요. 제가 그림을 잘 못 그립니다. 구득영 목사님이 저한테 했던 이야기가 있어요. “목사님, 그림을 그렇게 그려도 그림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라고. 이거 늘어서 뭐 할 건데요? 어쨌든 저는 아니거든요. 금식정신을 알아야죠. 그림 잘 그려서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어쨌든 저는 아니니까. 이게 블랙홀이거든요. 블랙홀. 빠져드는 것. 블랙홀의 특징은 여기 뭐 개미가 있다든지 이러면 모래가 빠질 때 개미는 어~~~! 자신도 모르게 본의 아니게 빠져들고 말려드는 겁니다. 그 당기는 힘에 의해서.

 

이 당기는 힘이 무슨 힘이냐 하면은 타이밍이에요. 모든 것이 때, 때가 있어서 그 '때'가 우리를 자꾸 밀어 넣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성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게 계속해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하는 일은 인간 대 인간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계산해서 저 사람이 이렇게 나오면, 이 사람이 저렇게 나올 것이고 나는 이렇게 대처하고. 그렇게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니고. 이게 희생물을 드러내는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에요.

 

이거는 공중권세 잡은 악마와의 싸움이에요. 에베소서 6장 12절에 보면 나오죠. 이 싸움은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다. 악한 영들. 악한 영들인데, 이거는 환상현실, 가상현실에 속한 우리가 할 일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 눈에 가상현실로 말미암아 전혀 느끼지 못한 리얼리티reality, 실제로 있는 그 세계를 주관하시는 주님과 거기에 대적하는 악마의 싸움에, 그 전쟁터에 우리는 말려든 거죠. 말려들었는데, 뭐로 말려들었느냐 타이밍으로 말려든 거예요. 타이밍으로.

 

그래서 모든 것은 때가 있다고 했어요. 때가. 주님도 하는 일에 모든 때가 있듯이 인간도 그 때가 있는데, 그 때에 그럼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 라고 하는데, 이 때는 주님이 주관하는 때기 때문에 우리 성도가 그냥 여기에 멈출 수가 없어요. 오늘 이 강의의 제목을 한다면 어~~~~! 이거죠. 뭐. 어~~~~~! 막 빨려 들어가죠. 타이밍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타이밍에 의해서. 이걸 적용시키면, “어~~~~! 이거 머리카락이 왜 길었지? 이거 이발해야 되겠네.” 이발하는 타이밍. 범사에 감사.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어~~~~! 버스 갔어.” 그러면 지하철 타라는 이야기죠. 지하철.

 

모든 매사가 목적이 뭐냐 하면은 주님이 마련한 때이기 때문에, 이 싸움은 육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싸움에 우리가 말려든 겁니다. 그 목적은 뭐냐 희생물을 희생물답게 드러내는 거예요. 주께서 이 땅에서 희생물을 통해서 피벗pivot, 회전해서 천국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신다. 그러니까 이 피벗pivot, 회전축을 심어놓은 그 중앙에는 블랙홀이 있고,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밝혀지는 것은 이 세상은 두 세력이 싸웠다. 하나는 언약의 완성자, 또 하나는 그 언약의 완성자를 대적하는, 에스더에서는 대적자를 하만이라고 이야기해요. 대적자 하만. 그냥 하만이 아니고 대적자.

 

하나님의 다윗언약의 결과물에 대해서 표적공격하기 때문에 하만은 대적자가 되는 겁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거기에 하나의 봉사자에요. 언약백성, 다윗언약의 성실성에서 나타나는 언약백성의 봉사자지, 뭐 아하수에로 왕이 그걸 안 것이 아니고 타이밍 맞춰서 봉사하지만, 이거는 노골적으로 대적하는 하만은 대적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싸움은 아하수에로 왕과의 싸움, 바사왕국과의 싸움이 아니고 그 안에 숨어있는 독소조항, 대적자의 싸움에 에스더가 나서게 됩니다.

 

에스더가 싸우는 것이 아니에요. 에스더는 그냥 어~~~~! 밀릴 뿐이에요. 타이밍 맞춰서 밀릴 뿐이고, 그걸 할 때 금식을 해서 자기의 의사표시는 하죠. 어쨌든 내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냥 하나님이 하신다는, 계시지 않는 신이 나타난 신의 표식으로서 에스더가 움직여나가죠. 그래서 이 에스더의 움직임을 통해서 우리가 “진짜 이런 일이 있었나?” 할 정도로, 의심될 정도로 놀라운 일들이 타이밍을 맞춰서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그 타이밍을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에스더가 나갈 때, 자기 오빠 만나고 사흘 뒤에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갈 때, 첫 번째 놀라운 타이밍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예복을 갖추고 왕 앞에 등장했을 때, 왕이 눈이 삐었는지 뭐 어떻게 됐는지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는 거예요.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지금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애인이 아니에요. 지금 아내죠. 세상에, 아내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일 경우가, 이런 기적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거 정말 미친 거 아니에요.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뭐 타이밍이 이런 타이밍이 있어요?

 

이 일은 영적싸움, 사람 대 사람, 남편과 남편의 만남이 아니고, 육과 육의 만남이 아니고, 이거는 혈과 육의 만남이 아니에요. 공중권세 잡은 언약과 비-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타이밍을 맞춰주는 겁니다. 뭐 예복을 입어서 이쁘다고요? 에스더가 꽃뱀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꾸몄다고 이쁜 것이 아니에요. 이 남편 되는 아하수에로 왕이 이거 돌아버린 거예요. 미쳐버린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얼마나 미쳤는지 자기가 한 소리도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여기에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성경에 나왔는데 보고도 못 믿을 이야기지만. 에스더 5장 2절에,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사랑스러워도 그냥 사랑스러운 게 아니고 심히 사랑스러운데, 그 심히 사랑스러움이 어느 정도냐 하면은 나라의 반을 주겠다는 거예요. 나라의 반을. 여러분 진심은 돈입니다. 현찰로 이야기해야 돼요. 헌금 한 푼 안 내면서 “주여, 사랑합니다.”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진심은 현찰이 말해주는 거예요. 현찰이. “여보, 참 아름다워요.” “그럼 내가 신상 하나 사 입을까?” “미쳤나? 그냥 아름다운 걸로 때우자. 그만.” 이런 일이 되면 이게 앞뒤가 맞는 소리가 아니죠. 맞지를 않죠.

 

남편 되는 그 아하수에로 왕이 그 아름다움에 얼마나 황홀해졌으면, 나라의 반을 바치겠다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나의 반, 내 몸뚱아리의 반을 주겠다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짐이 국가니까. 자기가 곧 국가니까. 내 몸을 맘대로 갖고 놀라는 이야기에요. 그래도 나는 좋다는 거예요. 왕이 무슨 자냐면 권력자입니다. 권력자에 대해서 제가 초반에 말씀드렸죠. 예외에 두 가지가 있다고 했죠. 하나는 뭡니까? 왕이 예외상태에요. 자기는 법을 뛰어넘는 사람이에요. 또 한 사람이 있죠. 이 여자. 지금 왕과 여자가 같이 만났어요. 지금 배틀battle이에요. 누가 더 예외적인가? 이걸 집합론으로 하면, 누가 더 무한적인가? 공부했으니까 어렵게 써먹어야죠. 누가 누구를 셈하는가? 셈하는 권력을 갖고 있는가? 헤아림의 권력을 갖고 있는가?

 

에스라, 느헤미야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 그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운 절차에 의해서 인 맞은 사람은 헤아림을 당하죠. 이거는 하나님께서 헤아리시는 거죠. 에스더의 헤아림은 뭐냐 하면은 악한자의 헤아림이 나와요. 악한 자 75,000명을 한꺼번에 다 죽여 버렸으니까. 유대인들이 그 죽인 숫자 보고가 나온다고요(에9:16). 지옥을 보낸다, 천국을 보낸다는 것은, 그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성경을 통해서 지옥 보낼 자를 헤아릴 수 있는 자격자, 무한자, 주님이죠. 주님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천국 가는 사람, 144,000명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은, 그것도 천국 가는 것은 본인의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의 결실물로, 내가 누구는 천국 보내고 누구는 지옥 보내는 그러한 고유한 권한이, 나의 헤아림으로 보낼 권한이 있음을 그 헤아림 속에서 증거케 하는 거예요. 특히 인 받는다는 이야기는 제가 고린도후서 1장도 이야기를 했지만, 어디에 주로 많이 나오느냐 하면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인 받음이 굉장히 자주 나와요. “그리스도로 인 받은 자들은” 이게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 예외의 포지션, 이 위치에서, 여자가 왕 앞에 왔을 때, 에스더는 첫 번째 만남에서 뭘 확인하고 싶은가 하면은 전에 와스디, 와사비 말고 와스디를 소위 자기만이 예외라는 것에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 가차 없이 자기 왕비를 법적으로 처단시켰잖아요(에스더 1장). “이 땅에 태양은 둘이 될 수가 없다. 어디 내 명령대로 안 해! 고분고분 안 해! 그렇다면 나의 예외자 됨을 보여주는 식으로라도 너를 왕비에서 퇴위시키겠다.” 해서 퇴위시켜버린 거예요. “나가라!” 이래 되는 겁니다. 그때는 왕은 왕만이 예외자죠. 그러니까 그 인간이 그 인간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에스더 입장에서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라는 이 말은, “어쨌든 나는 아닙니다.”라는 뜻으로 가는 거예요. 그냥 타이밍 맞춰서 가는데, 그 블랙홀 주위에서 미끄러지듯이 빨려 들어갈 뿐이에요. 최후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 들어갈 뿐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 그 죽음의 자리가 뭐냐 하면은, 이미 확정된 것이 뭐냐 하면은, 유대인은 어떤 민족이냐 하면은 죽어 마땅한 민족으로 확정되었어요. 유대인은 죽어 마땅한 거예요.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이렇게 생각해야 옳아요. 우리와 함께 사실 분이 아닌 분. 우리와 함께 살아야 될 분이 아닌 분. 죽어야 될 분으로서 예수를 믿어야 돼요. 유대인은 그 당시의 이방민족에게 꼭 죽어야 될 민족이에요. 진짜 특이하죠. 유대인과 예수님의 공통점모두 다 희생물이라는 그러한 구조 속에,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태어난, 출현된 그러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제가 모르드개에 대해서 이야기했듯이, 모르드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타난 하나님이다, 라고 했죠. 뭐로 나타나느냐, 바로 죽음으로 나타나요. 죽어야 될 민족,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살라고 오신 분이 아니고 죽어야 될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애초부터 죽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애초부터.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따라가겠다는 것은, 사실은 나도 같이 이 땅에 살 마음이 없다는 것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유대인들이 죽어야 된다는 것이 이미 확정된 마당에서 그 유대인들 속에 누가 포함이 되느냐 하면은 에스더도 포함이 되는 거예요. 아직까지 하만은 에스더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몰라요. 하만은 모르고. 그러나 모르드개는 “네게도 파급되어 나중에는 네가 색출될 것이다. 네가 왕궁에 있다고 해서 언제까지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에4:13). 왜냐하면 왕의 예외적인 조치에 의해서 모든 법은 유대인은 죽어야 될 법으로, 이 나라가 그렇게 법적 구조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에스더는 말하기를, “그 법적구조를 가지고 이미 죽어야 될 것이 아니라 나는 죽었다 치고, 이런 상황의 타이밍마저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그 뜻을 따라서, 타이밍 따라서 진척해보겠다.” 그냥 맡기는 거죠. 맡기는 것.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런데 첫 번째 희한한 타이밍이 뭐냐, 에스더가 왕 앞에 나타났을 때 왕이 너무나 자기 아내가 사랑스러웠다는 거예요. 별로 오랜만에 만난 것도 아닌데. 그저 뭐 그냥 30일 동안 안 봤는데(에4:11). 여러분 한번 시험해보세요. 30일 안 보면 사랑스러운가? 글쎄요, 뭐 출장을 한 30일 갔다가 오면 그럴지 모르겠어요. 첫 번째 에스더가 한 것은, 첫 번째 여자 와스디를 대신해서 또 하나의 왕비가 된 것이 아니고 빈자리에 들어간 거예요. 빈자리에. 빈자리에 들어갔을 때, 그때 그 남자, 왕이 에스더 전에 왕비 와스디한테 했던 행세대로 똑같이 치르지 않을까가 항상 의심스러웠던 거예요.

 

그래서 네 요청이 뭐냐고 할 때에, 지금 나한테 완전히 빠져버리고 반해버린 그것을 내일 또 유지될 수 있는가를 내가 확인해보겠다고 해서 말을 일체 안 하고 잔치를 또 열 테니 하만과 더불어 오라고 제안하는 거예요(에5:4). “나라의 반을 주세요.”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 밥 먹고 도망가면 그거는 꽃뱀이죠. 그게 아니고,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니까. 나라의 반을 주겠다는 그 마음이 다음 잔치에도 유효하고 지속될 수 있는가, 했던 겁니다. 첫 번째 희한한 일은 남편이 자기한테 뿅 갔다는 거예요. 그래도 안심이 안 되죠.

 

두 번째 타이밍, 또 희한한 일은 뭐냐 하면은, 하만과 같이 와야 돼요. 두 번째 타이밍은 정말 에스더도 예상 못한 거예요. 두 번째 잔치에서 만났을 때도 에스더가 입을 다물었는데, “자기 민족이 유대인이고 지금 몰살당하게 생겼다.” 그 이야기를 안 했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는데 두 번째 일어난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이 하만 쪽에서, 이 하만의 아내 이름이 세레스인데, 아내 세레스가 남편 하만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당신은 권력자다. 법을 가진 자다. 따라서 임금님이 잔치를 베푸는데 이 나라 중에서 당신만 잔치에 참석하라고 했으니까, 이 기회에 당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기회로 삼으세요. 어떻게? 모르드개를 제거하세요. 제가 아이디어를 내겠는데, 23~24미터(50규빗)되는 그런 나무에다가 모르드개를 죽이기로 결정이 나거든 그냥 오는 대로 모르드개를 죽입시다.”(에5:14) 이렇게 했는데, 아내가 그렇게 하기 전에 궁궐 문 앞을 보니까 여전히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하고 있고 꼴보기 싫은 모르드개가 앉아있으니까(에5:9), 그걸 상당히 기분 나쁘게 생각했는데 아내가 격려차 이렇게 이야기해주니까 좋았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에스더는 모르고 그냥 두 번째 잔치에 참석한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에스더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에스더는 “어쨌든 나는 아닙니다.”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타이밍을 그렇게 몰아세운 거예요. 어떻게 몰아세우느냐 하면은 악을 칠 때는 악이 관영해야 돼요. 악이 관영해야. 왜냐하면 이 싸움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복수를 갚는 그러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창세기 15장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16절에,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죄가 무르익지를 않았다. 지금 생각 같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충분히 인구수가 늘어났으면, 자기백성을 생각해서 “이제 애굽에서 고생 그만하고 내가 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넣어줄게. 너희들 고생 많이 했지.”라고, 충분히 그렇게 배려해 줄 수도 있는 문제인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고생 하나, 안 하나에 관심이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들이 얼마나 이 땅에서 고생하는가에 관심이 없어요.

 

하나님의 관심은 혈과 육이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언약과 비-언약의 싸움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힘들다고 해서 기도해봤자 그게 타이밍이 안 되면요, 그거는 때가 안 되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어요. 우리부터가 정신을 우리 쪽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늘 금식하는 마음으로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고 음식 퍼먹고 이래야죠. “이거는 내가 아니라 내가 먹을 타이밍이 되어서 먹습니다.”하는 마음으로, 금식하는 마음으로 해야죠. “어쨌든 간에 나는 아닙니다. 내 미래, 내 운명은 내 손에 달린 게 아니라, 어쨌든 나는 아닙니다.”라는 뜻이 금식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 죄악이 관영이 되니까 정당한 처벌이, 지옥 갈만한 죄가 무르익을 때 처단하는 것이 주님의 자기 뜻을 달성하는 거예요. 에스더 같은 경우에는 이 하만이 자기 집에다가 나무를 꽂아놓은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정확하게 말씀드린다면 에스더가 왜 두 번째에 나타났을 때에 “저 하만이 우리 민족을 몰살시키려고 했습니다.”라는 말을 왜 세 번째에 만날 때에 하고, 두 번째에 만났을 때는 왜 안 했는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게 에스더의 계획대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도 다 계획이 있어요. 주님께서 지금 에스더하고 협약을 맺은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 그냥 주께서 못하게 하신 거예요.

 

못하게 하시고, 그리고 주님에게는 쉬는 타임이 없다고 했죠. 주님은 나름대로 열심히 이렇게 모르드개 죽이려고 두 번째 날에 이미 계획을 한 거예요. 첫 번째 그런 게 없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인내를 가져야 해요. 내가 논다고 주께서 같이 놀고 계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 남편 빨리 복음 알아서 천당 가야 되는데.” 그거는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무르익어야 되겠죠. 남편이 더 나쁜 짓을 하든지, 복음에 대들든지, 무슨 반대를 하든지, 격렬하게 하든지, 무르익어야 돼요. 숙성 돼야 해요. 모든 게. 주님의 이러한 타이밍 맞춤을 우리가 신뢰해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밤에 또 이게 숙성에 필요했던 조건이 에스더는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한 조건이 있었어요. 기적이 나타납니다. 두 번째 날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안 와요(에6:1). 잠이 안 올 때는 설교 들으면 되는데, 하여튼 잠이 안 왔어요. 잠이 안 오고 뒤척거리면서.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런 거 들으면 잠이 더 안 오고. ‘꿈과 음악 사이에’ 뭐 이런 거 있잖아요. 하여튼 잠이 안 왔어요. 잠이 안 와서 뭐 TV보고 그런 게 아니고 뭘 봤느냐 하면은 궁중일기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이 타이밍이 기가 막힌 타이밍입니다.

 

만약에 두 번째 날에 에스더가 입이 싸가지고 우리 민족에게 이랬다고, 아직 죄가 관영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을 했다면, 이 나무에 하만의 열 아들이 달릴 일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일이 나 복수심 풀라고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에요. 내 원한을 푸는 용도로 주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일에 관심이 하나도 없어요. 왜?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혈과 육에 대한 생각이기 때문에. 관심도 없는데 철야기도 하고. 참 가관이죠. “주여,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래, 안 돌아본다. 니가 뭔데 내가 왜 돌아봐야 해? 니가 뭔데?” 꼴랑 죄인주제에 어디서 데모하고 시위하고요. “저를 왜 안 돌아보십니까?” 너는 죽어야 될 민족이거든요. 주님께서도 죽는데 네가 뭔데 살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거는 주님은 죄 때문에 돌아가셨지만 우리도 죄 때문에 죽어야 돼요. 거기에 대해서 다른 토를 달지 마세요. 너무나 당연하고 정직하고 합리적인 처사입니다. 죄 때문에 죽는 거,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면 되지, 큰소리 칠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어쨌든 이 두 번째는 내가 이야기를 끄집어낼 정도로 아직까지 남편이 나에게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사랑이 유효하고 유지되고 있는지를, 하여튼 두 번째까지 확인한 거예요. 본인 마음도 그러는데, 실제로 하나님께서도 쉬지 않으시고 이렇게 하만으로 하여금 악에 받친 행동을 하게 했어요.

 

세레스가 자기 남편 하만에게 그런 조언을 한 것은요, 이미 남편이 남성형 타입에서, 남성형 지배체제에서 모르드개 마저 자기의 손 안에 넣으려고 하는 그 시도, 그 시도에 대해서 아내가 꾸준히 동조하고 있으니까, 그 아내는 사실은 이런 전체를 장악하는데 동조했기 때문에 여성성이라고 할 수 없어요. 예외라고 할 수 없어요. 제가 이번 수련회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남성은 예외 없이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남자고, 여성은 거기다가 초를 치는 것이 여성이라고 했죠. 그래서 이런 남편이 하는 일을 전적으로 도와주게 되면 그건 여성의 자리라고 할 수 없어요. 예외의 자리라고 할 수 없어요. 그냥 동조하는 거죠.

 

그래서 잠이 오지 않았던 거예요. 잠이 오지 않았으니까 이 타이밍도 참 희한한 타이밍이에요. 에스더가 예상도 못한 타이밍이었습니다. 그래서 뭘 했느냐 하면은 궁중일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읽고 있는데, 마침 에스더 2장 끝에 나오는, 사실 모르드개가 왕을 해코지하는 것을 미리 적발해가지고 신고해서 나무에 매달리게 하고 그 다음에 왕을 살렸다는 그 혁혁한 공적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 있죠.

 

그래서 아하수에로 왕은 자기 아내한테 반했고, 아내한테 반했으니까 이 두 명의 예외에서는 누가 갑이 되어버렸어요? 예외 중에서도 누가 갑이 되어버렸습니까? 자진해서 바치겠다고 했으니까 보나마나가 아닙니까? 에스더가 왕보다 위에 선 거예요. 왕은 에스더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움직일 때, 전에 이야기했듯이 예외에서 예외자가 움직일 때는 뭐로 움직인다고 했습니까? 여기서 폭력으로 움직이죠. 폭력으로. 가차 없는 폭력이죠.

 

법이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 없으면 법의 권위가 서지를 않아요. 반드시 법은 폭력이 따라줘야 합니다. 강제성이 따라줘야 해요. 좋은 게 좋고 은혜로 합시다, 라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법에는 강제성이 따라줘야 해요. 실제로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죽잖아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잖아요. 이게 얼마나 주님의 폭력이고 강제성입니까? 이걸 당연한 조치로 인정해줘야 해요.

 

그 궁중일기에 보면 모르드개라는 사람에게 자기가 이런 도움을 받았으니까 이제 그 사람을 총애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가지고 “밖에 누가 있느냐?”라고 해서 보니까 하만의 진짜 나무가 완공됐어요. 완공해놓고 허가만 받으면 돼요. “저 모르드개를 잡아 죽일까요?”라고, 입을 먼저 떼려고 하니까, 타이밍이 멋있죠. 하만이 입을 떼기 전에 왕이 먼저 이야기했어요. “이렇게 내가 큰 혜택을 입은 사람에게 어떻게 대우를 하면 되느냐?”라고 했을 때, 여기에 또 세 번째 타이밍이 뭐냐 하면은 하만이 곡해를 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나라에 충성을 하니까 임금님이 나한테 반했나? 반해가지고 나한테 미처 하지 못한 충성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정말 나는 이런 사람을 좋아 한다, 최고 권력자가 이런 사람을 내편으로 삼았다고 만 천하에 보이려고 그렇게 하는구나.’ 이렇게 자기가 상상해서 그 혜택이 나한테 주어진다면 나의 권력이 강화가 될 것이고 모든 것을 내 손아귀에 쥘 것이라는 그런 상상의 계획을 가지고 왕한테 이야기를 합니다. 이 하만이라는 사람은 얍삽해가지고 금 일만 달란트를 가지고요, 왕한테 뇌물로 바친 사람이에요. 물론 왕은 안 받고 돌려줬지만.

 

그 정도로 이거는 권력욕에, 남성형에 미쳐버린 사람이에요. 아주 도취된 사람이에요. 그래가지고 빈칸만 남겨놨어요. “이런 사람은 말을 태워가지고 공개적으로 임금님이 입던 옷을 입히시고 이렇게 나가시면 수산 수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역시 나도 저처럼 왕께 총애를 입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부러워하고 왕에게 더 칭송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고 이렇게 한 사람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 사람, ( )입니다.” 하고 결재를 올렸죠. 괄호에 자기 이름, (하만)만 쓰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만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 아닙니까? 독일축구팀 선수이름이 하만인가. 그런 게 있었는가. 아, 축구팀에는 발락이 있구나. 발락이. 왕이 “그래, 결재판을 도!” 해서 이름을 썼는데 누구 이름을 썼느냐 하면은 모르드개의 이름을 써버린 거예요(에스더 6장).

 

이게 뭐냐 하면은 피벗pivot현상이에요. 회전축으로 방향이 반대로 바뀌어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깜짝깜짝 놀라게 일을 해버려요. 왜냐하면 자기백성이라도 죄인이기 때문에 은근히 원하는 것이 있고 노리는 것이 있다고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여, 저한테는 맛있는 귤을 주시옵소서.” 하나님한테 이렇게 한 거예요. “안 돼! 어디 귤을 달라고 해? 여봐라! 이 사람에게 단팥빵과 크림빵을 마음껏 주고 사과 한 쪽 이상을 줘라!” 이게 피벗pivot이에요. 피벗pivot.

 

내가 달라고 한 것은 죽어도 안 주고, 달라고 하지 않은 것만 계속 갖다줘가지고 나로 하여금 주도권이, 하나님을 다룰 수 있는 주도권이 나한테 없음을 확인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해가지고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번 기도응답이 되었다고 해서, 그게 기도응답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도응답 됐다고 해서 계속 주님을 부려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주님이 너 보기에 만만하냐고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이게 피벗pivot이죠. 회전축을 돌려버립니다.

 

집에 가서 부인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부인이 우리가 드디어 밀리기 시작했다. 그 권세를 누가 당하랴, 하고 탄식의 말을 하는 겁니다(에6:12-13). 부인의 이름이 세레스가 맞죠. 세레스 하니까 여러분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죠. 앞에 붙는 것이 있죠. 윌리엄스 세리나. 테니스 선수에요. 흑인선수. 나쁜 이름인데 또 나왔네요. 세레스가 “이제는 당신 끝장났어. 우리 집이 끝장났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기는요? 이게 바로 뭡니까? 악이 극도로 관영해서 사람을 볼 때, 모르드개를 볼 때, 그냥 보통 여러 민족 중에 하나로 시시하게 본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또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게 뭐냐, 헤아림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유대인을 권력자가 헤아림의 대상으로 본 거예요. 그러나 권력이 있다는 이 하만, 이 하만이 누구의 초청으로, 이 유대인과 유대인 사이에 지금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몰라요. 에스더와 모르드개에 끼인 존재에요. 이 사람이. 앞뒤로 완전히 압축시켜버립니다. 에스더는 왕을 조정해가지고, 남편을 조종해가지고 계속해서 호시탐탐노리고 있죠. 이 하만의 계획이 무산되도록.

 

그러면 하만은 뭐냐 하면은 바로 법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죠. 왕의 반지로 해서(에3:10) 군말하지 말라고 법으로 움직이는 반면에 에스더와 아하수에로 왕은 법의 관계를 뛰어넘어요. 법의 예외조치가 되죠.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스러웠더라? 사랑스러웠더라. 심히 사랑스럽더라. 그래서 법을 뛰어넘는 완성은 뭐냐, 사랑스러운 거예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아가에도 나오고. 또 누가복음에 나오죠.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로다(눅2:14). 사랑한다는 거예요. 사랑한다는 것은 법을 제켜놓고 사랑하는 거예요. 법을 제켜놓고. 이거는 반칙인데, 우리는 반칙을 좋아합니다. 반칙에 의해서 특혜를 받은 거예요.

 

법의 완성자가 되면 예외자가 되고, 법은 유한에 속하지만 예외는 어디에 속하느냐, 무한에 속한다 이 말이죠. 유한과 무한은 만날 수가 없어요. 무한에 의해서 유한은 헤아림의 대상이 되고 셈하기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뽑으면 뽑히는 거예요. 여러분들에게 제가 강의에서 집합에 대해서 소개할 때 상당히 어려워서, 아니, 강의 시간에 왜 저런 수학이야기를 하는가, 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죠. 저 어려운 것을 왜 하는가 하고. 근데 별로 어렵게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요. 왜 하느냐 하면은, 누군가 이 세상에는 주인공이 있다는 거예요. 이 우주에. 그 주인공은 그냥 주인공이 아니고 헤아려요. 헤아리고 셈하고. 그게 하나님의 인맞힘, 인매김이에요.

 

이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겁니다. 그분의 셈하기의 권한을 돌려드려야죠. 돌려주고, 그리고 거기서 온 관계,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무한의 세계, 그 무한의 세계가 이 유한의 세계에 새로운 예외적 주체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예외적 주체로서. 그러면 그분만이 예외적주체기 때문에 우리는 동심원처럼 그분 주위에 몰리게 되어 있고, 그것이 뭐냐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거예요. 헤아림을 받았고 인치심을 받은 사람의 모임. 이 안에서는 뭐냐 하면은 율법이 침범할 수가 없어요. 율법이. 법을 능가하는 것들이 여기에 있으니까. 이웃을 사랑하라, 탐내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이룬다?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이루느니라. 사랑이.

 

“그러면 목사님 그런 사랑을 소유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데, 사랑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고 끌려가는 것이죠. 오히려 소유를 버리고 끌려가는 거예요. 사랑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기 자신이 엷어지고 습자지처럼 얇아지죠. 내게 일어난 일은 별반 전혀 중요하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랑 앞에서. 여러분들이 구약에 아가를 보면 사랑이 나오죠. 아가서에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대화를 보세요. 자기자랑하기 바쁩니까? 상대방 자랑하기에 바빠요? 상대방 자랑하기에 바빠요.

 

자기 자신은 그 사람 앞에서 나는 없는 존재로 생각하는데, 상대가 자꾸 나를 있는 존재로 만들어줘요. 나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데, 나는 지옥가도 되는데, 우리 주님이 꼭 천국가야 된대요. 그러니까 내가 말릴 수가 없지요. 감사히 받죠. 그게 아가입니다. 스스로 내가 이쁘다고 하지 않아요. 상대방 솔로몬 왕이 자기보고 자꾸 이쁘대. 안 이쁜 구석이 없대요. 뭐 자기가 이쁘려고 화장을 하고 그런 것이 없어요. 그냥 맨얼굴 그 자체가 예쁘답니다. 그리고 솔로몬도 보면 이쁘고. 그런데 거기서 왜 이쁘냐를 물으면 안 돼요. 왜 이쁘냐를.

 

그거는 내가 또 주체가 돼요. 나한테 있는 이거 때문에 이쁘다는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내가 또 마치 상대방을 셈하는 주체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돼버리니까. 이거는 그냥 이유 없이 사랑받았고 이유 없이 그냥 이쁨을 받은 거예요. 이렇게 하게 되면, 목사님 참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랑받은 꼬라지하고 집구석 꼬라지하고는, 자꾸 자기 처지가 내가 예상한 사랑의 환경이 아니니까, 나는 사랑 안 받은 거 아니에요? 사랑 받았다고 착각한 거 아닙니까?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뭐냐 하면은 사랑받아놓고도, 성령 받아놓고도 자신의 욕망이 자꾸 이렇게 날씨가 흐려져서 가리어져서 그래요. 내가 너무 금식한 것이 아니고 설치려고 하다보니까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보다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걸 하나하나 깨부수죠. 절대로 내 뜻대로 안 해주는 이유가, 내 뜻보다 더 고귀한 것이 내 안에 상주해있음을 우리로 발견케 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여기에 있는 에스더를 여러분들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에스더라고 생각해서, 에스더 생각한다는 것은 이쁘다는 그런 것보다도, 여러분! 이쁘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주관적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이쁨을 가지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주관적으로 이쁜 거예요. 왕이 미친 거예요. 그냥 이뻐서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내세운 겁니다.

 

여기서 또 희한한 기적이 있는데, 그래서 세 번째 날, 첫 번째, 두 번째 날은 악이 관영했고 에스더는 확인을 했어요. ‘아, 내 남편의 사랑은 한결같구나.’ 세 번째에, 이 사정을 모르고, 하만이 나무를 만들어놓은 것도 모르고 했죠. 에스더는 그것을 몰랐어요. 모르고 세 번째에 결정적인 시간에 제발 하만만큼은 참석해달라고. 이렇게 했는데, 세 번째의 기적이 뭐냐 하면은 이게 정말 희한한 기적이에요.

 

에스더가 왕에게 이야기합니다. “임금님, 내가 유대인이고 우리 유대인들이 나라에 경제적으로 많은 보탬을 줬습니다. 그런데 하만 저 사람이 만약 노비를 삼으면 임금님의 경제적 여건이 취약하게 되고 그게 손실이 많게 됩니다. 저 하만은 우리 민족을 다 말살시키고 죽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노비로 팔렸다면 감사한데, 그게 아니고 아예 다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다.”라고 한 거예요(에7장). 아, 이 대목도 아슬아슬한 대목인데요. 여기서 여전히 이 왕이 에스더를 자기와 같이 예외의 자리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인지, 정말 또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예외의 자리를.

 

두 사람이 예외의 자리를 공유한다면 하만과 나머지기는 뭡니까? 예외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법의 자리에 들어가겠죠. 그 법의 자리에 들어간다면 이 사람은 뭐냐 하면 사랑의 대상이 아니에요. 법이란 다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지금 에스더가 걱정하는 것은 남편이 나를 전에 와스디처럼 법적인 대상으로 본다면, 이런 법이 있거든요. 왕이 부르지 않고 와버리면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근데 만약에 왕이 죽이지 않고, “그래, 오늘은 내 침소에 들어라”하고 홀을 내밀면, ‘후유! 살았다’가 되는 거예요. 하도 왕비가 많으니까. 왕의 정력을 조정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국력이 낭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고, 홀을 내밀 정도가 아니고 아예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뿅 가버렸으니까요. 근데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가 궁금해서 첫째 날, 둘째 날 확인하고 세 번째 날 결정적인 이야기를 했을 때에 그때도 역시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어요. “저 하만이 우리 민족을 다 말살하고 치려고 했습니다.”라고 했을 때에 임금님이 “야, 에스더야! 사(私)는 사고 공(公)은 공이지. 내가 저 하만을 얼마나 아낀다고. 그래, 내가 좀 나무랄게. 나무라서 다시 원상복귀, 이정도로 해주면 되겠니?” 이렇게 돼버리면 왕은 에스더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하만을 관리하는 셈이 돼요. 에스더도 가지고 하만도 가지겠다는 욕심을 세웁니다.

 

그런데 현재 왕은 에스더한테 뿅 갔어요. 이거는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에스더가 내린 명령은 그야말로 하명이 돼요. 하명이 돼가지고 왕은 그대로 따라서 해요. 그렇다면 에스더가 생각하는 그 감정을 왕도 같이 느끼고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같이 느끼는지가 희한한 일이라니까요. 같이. 남편이 느끼는 감정을 아내가 같이 느끼고 아내가 느끼는 감정을 남편이 같이 느낄 때, 얼마나 이게 서로가 기쁘겠어요.

 

남편이 운전하는데 옆에 과격한 차를 모는 운전사가 있을 때, 남편이 창문열고 “야! 그러지 마!” 이렇게 하면, 조수석에 앉아있는 아내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고만 그냥 가라! 그냥 가!” 감정이 교류가 안 됩니다. 교류가. 그랬던 아내가 처갓집에 명절이 돼서 같이 갔는데 처갓집에서 뭔가 일이 있었단 말이죠. 그럴 때 기분나빠했는데, 아내가 물어요. “당신은 내가 굉장히 기분나빠한 거 알고 있지?” 그럼 남편이 하는 말이 “아이고, 당신이 참아야지.” 이거는 감정의 교류가 안 되는 거예요. “당신은 내편이 되어줘야지. 이 세상에 내편이 당신밖에 없는데 당신마저 나를 이렇게 나무라면 나는 누구를 의지하나?” 엉엉 울면서 당신은 그럴 줄 몰랐다고 해요. “나는 당신만 믿고 그런 소리를 했는데 당신은 내편이 안 되면 이 세상에 내편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뭐 믿음이고 뭐 영적전쟁이고 없어요. 그런 거 다 오락이고 굿이고 다 떠나버리고 지금 당장 내편 안 된 그 서러움에 붙잡혀서 어떻게 할 줄 몰라요. 이혼해버릴까? 이 감정으로.

 

지금 이게 왕이 희한한 게 에스더가 화를 냈다고 해서 왕도 같이 화를 낸다는 것이 희한한 거예요. 이게 주님의 타이밍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타이밍이에요.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다음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거 이야기하지 하지 말까? 정말 희한한 일이 벌어졌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왕이 화를 내니까, 이 하만은요 에스더한테 관심 없어요. 뭐 에스더가 예쁘고 관심 없어요. 자기는 법 지키는 남성형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거 없고. 자기 목숨만 부지하고 싶어서. ‘아, 권력이 바뀌었구나!’ 왕은 삐져서 밖으로 나갔고요. 하만이 뭔가 사정을 해야 되잖아요. “왕후님! 부탁합니다.”하면서 껌 씹으면서 껄렁껄렁하게 이럴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왕후님! 부탁해요.” 이래도 안 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이거는 아무 사심 없이 그냥 “왕후님, 살려주세요!”라고 했는데 그걸 먼발치에서 뒤늦게 등장한 왕이 보기에, “네가 이게 교만함이 극에 달아서 내가 극히 심히 사랑하는 내 아내까지 강간하고자 하는구나!”(에7:7-8)라고 했을 때에, 여러분! 이거 얼마나 억울합니까? 이 억울한 사람이 지옥가게 되어 있어요. 악마는 억울하다. 악마는 억울함을 당했다. 영어로 네버never, 네버never에요. 큰일 났네. 시간이 다 됐네. 전혀 큰일이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시간이 넘어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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