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겨울수련회 에스더 제 6강(악마 속으로 : 이 근호 목사)
이 환상의 구조가, 이 환상의 세계가 너무 단단하기 때문에 들어갈 틈이 없어요. 남성의 세계라 하는 것은 항상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에 미흡함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요. 예를 들어서 군산 바닷가에서 파도가 넘쳐서 방파제가 파손되었다. 그러면 방파제를 수리하면 그만이에요. ‘에이, 이 나라 팔자 말아먹었다.’ 그러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훼손된 부분만 수정하면 된다는 말이지요. 애가 몸이 아프다. 그러면 병원에 가서 약 먹으면 되지 ‘너는 이제 내 자식 아니다.’ 이렇게 과격하게 나올 이유가 없지요. 항상 흠집이 생기면 흠집만 수습하면 그만이니까요. 기존의 현실에서, 이걸 가상이라고 했는데 이 현실은 수정과 보완을 통해서 진화하고 발전을 도모하면 그만이라는 말이지요.
“갈 때까지 가보자.” 하잖아요. 완전 이 스타일이 무슨 스타일입니까? 강남스타일이죠.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끝이 무엇인지는 몰라요. 그런데 가봐야 뻔한 미래가 미리 도달되면 이 사람은 주님의 이스라엘, 언약의 사람, 희생물이 되어야 될 운명을 지닌 사람에게만 일어날 일이지 그렇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사람은 그냥 갈 때까지 그냥 가보는 거예요.
‘가보면 뭐가 있겠지.’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제가 무한 이야기를 할 때 가무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계속 희망을 보는 거예요. 1, 2, 3, 4, 5, 6 …… 57425, 뒤에 또 뭐가 있겠다, 해서 그 현장에 가보면 그 뒤에 ‘+1’만 있을 뿐이지요. ‘+n’만 있을 뿐이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 때나 이 앞에서 희망만 품었다 뿐이지 희망을 달성하는 그 시점에 와 보면 ‘애걔? 기껏 이거야?’ 그것뿐이지요.
만약에 젊을 때 나는 그리스 지중해 크루즈 여행 하고 싶다 했는데 그래서 무려 30년 짜리 적금 붓고 계획 잡아서 나이 60넘어서 크루즈 여행 갔다. 멀미나지요. 그 많은 해산물은 동네 횟집에 가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이고 ‘애걔? 이거야?’ 멋들어진 집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따라라라라~, 포카리스웨트 광고에 나오는 그런 집에 살고 싶다. 살아보지요. 살아보면 계단 올라간다고 헥헥거리고 엘리베이터도 없이 언덕길 오른다고 힘들지요.
이 세상 전체가 내가 스스로 환상쟁이기 때문에, 환상가기 때문에 어딜 가도 실망스럽다는 말이지요. 베네치아를 가든 어딜 가도. 베네치아에 사는 아저씨의 하루 일과를 보면, 식당에 출근해서 종일 파스타 만들다가 저녁에 퇴근하고 또 뭐 있어요? 별다른 것이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무한을 추구하기 때문에, 환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욕망을 따라 살기 때문에 욕망이 그렇게 헛되다 해서 죽을 욕망이 아니에요.
계속 욕망을 창작해 내는 겁니다. 끝까지 계속 창작해 내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작가들이고, 문학가들이고, 예술가들이고 영화에요. 그들의 희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걸 픽션이라 하지요. 그걸 꾸며낸 환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스스로 그렇게 가정하는 거예요. 환상이라고. 그런데 현실은 그 정도로 단단하게 방어막이 쳐져 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이 환상을 현실로 바꿀 수가 없어요. 환상을 절대로 환상으로 보지 않고 현실 그 자체로 간주하기 때문에 결코 이걸 환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죽으면 안 돼. 나는 죽기 무서워.’ 벌벌 떨지요. 막상 죽은 예수님은 그거 아무것도 아닌데요 뭐. 죽은 예수님의 영이 무슨 영입니까? 성령 아닙니까? 죽은 예수님이 살아난 그 영, 그 영이 오니까 아,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니고 실재가 되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만 실재가 돼요.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없다.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이것은 뭐냐? 지금 내가 버티고 있는 이것이 전부 다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사에 반해서,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우리는 희생물을 품고 살아가는, 마치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한 것처럼 우리는 희생물을 내 배안에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럴만한 권리가 있음을 우리가 계속해서 확인해 주는 겁니다.
이렇게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지요. 인간의 행함으로 통하지 않는 이것을 저는 뭘 로 보느냐 하면, 이걸 거울표면으로 봐요. 아주 단단하지요. 딱딱한 유리로 되어 있으니까. 뭘 시도하느냐 하면,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 거울은 반사되고 반영되지요. 거울이 보여주는 것을 가지고 물리학에서는 대칭성이라고 해요. 물리학은 대칭성이 아니면 설명이 안돼요. 모든 것이 대칭되어 있어요.
모든 우주가. 양이온이 있으면 음이온이 있고 양에너지가 있으면 음에너지가 있고 항상 반대되는 것이 있어서 회전을 이쪽으로 하면 한쪽은 그 반대방향으로 해요. 시계방향, 반시계방향, 두 개가 소멸되면 여분의 것이 남아서 물질이 되어서 그것이 수소가 되고 헬륨이 된다. 이 이론을 물리학에서 하고 있거든요. 이게 전부 다 대칭성이라는 말이지요.
대칭성이기 때문에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 봤자 거울을 들여다보는 누구의 모습만 반사되어 나옵니까? 내 모습만 반사되겠지요. 그러니까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성경보기에요. 성경을 아무리 봐도 거울 보는 것처럼 나의 욕망 나의 희망만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속으로는 뭐냐? 제발 나를 다치게 말게 해주시고 나의 인생이 흠집나지 않게 해달라는 그런 인간적인 욕망, 타고난 아담계열에 속한, ‘나는 절대로 다치며 안 돼. 나는 손해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그걸 저주라고 하지요. ‘나는 절대로 저주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미 선입견자체를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성경에서 은혜를 받았다, 복 받았다, 하는 것은 다 이익 얻었다, 이렇게 되지 예수님처럼 성경을 볼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원천적으로 다 막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 가상현실 속에서 실재세계를 거기에 심어버렸느냐? 그것은 악마로 하여금……, 이 가상현실을 만든 배후자가 악마거든요.
악마가 아가리를 벌릴 수 있도록 자극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악마가 목구멍을 열어줘야 수류탄 투척이 가능하거든요. 던져 넣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지난 시간 끝에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무엇을 그리워하고 무엇을 원하느냐? 돈이고 떡이거든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거예요. 사람은 돈으로 사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메시아처럼, 혹은 남을 인도하려면 깜짝 놀랄만한 기적, 높은데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때 거기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겠지요. 그러면 살맛이 나는 거예요. 어떤 강원도 할머니는 평생을 살아도 제주도 한 번 못 가본 사람이 있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어떤 할머니는 심지어 죽을 때까지 자기 동네를 떠나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에게 5.16사태니 그런 말 무슨 말인지도 몰라요. 자기 동네를 벗어나 본적조차 없으니까요. 아무것도 모르지요. 그리고 tv에 나오는 것들은 이미지고 환상에 불과하고 실재하고는 다르다는 말이지요. 광화문에서 재야의 종소리를 치지요. 우리는 tv를 본다는 말이지요. 막상 우리가 그 현장에 갔을 경우에는 tv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있어요. tv나의환상을 보여주는 반사하는 거울에 지나지 않으니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가면 소매치기 당한다든지, 옆에 술먹고 참석한 사람의 냄새가 난다든지, 몰래 저쪽에서 담배피우니 그 냄새가 나서 짜증이 난다든지, 그러한 일들은 실제로 거기에 가봐야 알아요. 유-튜브 봐서는 이 현장을 모른다고요. 어떤 사람은 코풀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과자를 먹고 있다는 것, 이 분위기는 유-튜브에서는 안보이잖아요.
그러니 그 현장감에서 난 그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이 왔다든지, 그런 것까지 다 세미하게 있는데 화면만 봐버리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반사되는 겁니다. 나의 환상의 확장용으로 무슨 일 하나 치른 것뿐이에요. 결코 환상을 깰 수 있는 기회는 아닌 거예요. 생생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우리교회 어떤 분들은 이야기해요. “목사님 설교 듣고 참 잘 자고 있습니다. 목사님 설교 들으면 10분도 안되어서 곧 잠이 듭니다.”
교회 오면 그 현실에서는 잠을 못자잖아요. 잠을 잘 수가 없지요. 그만큼 누락된 것이 있다는 말은 실재와 달리 자기 얻고 싶은 것만 바라보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현실은 인간에게 그냥 반사되니까 그냥 이걸 현실이라고 보는데, 이 현실 속에 가상현실이 아니고 실재현실 같으면 여기에 뭐가 추가되는가? 악마가 추가돼요.
자, 악마라고 하니 여러분 생각하기는, 몸 색깔이 파랗고 예를 들어 <아바타>같은 영화에 보면 외계인의 몸이 파란 것이 있지요. 원래 몸의 피부가 파란 것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힌두교 신중에 시바라는 신이 있어요. 그 신의 온 몸이 파란 이유가 인류의 죄를 위해서 독약을 마셨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 같아요. 힌두교, 그리고 거기서 나온 불교가 이런 아이디어를 다 갖고 있다고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들이 뭘 요구하느냐? 그들이 희생물을 요구한다는 겁니다. 내 죄를 위해서 내 대신 속죄할 사람을 찾는다는 이것이 악마가 복음을 가로막기 위해서 대체한 유사복음입니다. ‘나를 위해서 누가대신 죄 씻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누군 안다쳐요? 나는 안다치지요. 기어이 자기자신을 환상에 안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복음을 의식해서 악마가 마지막 내민 필사의 카드입니다. ‘기독교에 있는 것 우리 종교에도 다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모든 종교는 하나다.’ 그렇게 나와요. 나를 위해서 주께서 죽으셨다는 그 자체는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해서 죽었지 우리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에요. 죽고 난 뒤에 생긴 주체가 새로운 우리가 등장하는 거예요.
애초부터 예수님 이용할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은 악마가 쫒아 와서 그렇게 할 거예요. 성경을 볼 때 내가 원하는 것, 필요한 것, 내가 이성적으로 따져서 ‘아, 율법으로 봐서 내가 너무 죄가 많구나. 죄가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천국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믿음의 세계가 온다? 그러면 율법은 뭐냐? 율법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그러면 내가 그걸 따라가게 되면 믿음세계에 들어가겠네. 난 율법 못지킵니다.’ 하고 ‘죄인입니다.’ 치고 ‘주님이여, 이 죄를 십자가로 용서하옵소서.’
이 모든 공작이 어떤 공작입니까? 누굴 살리겠다는 거예요? 기어이 나를 구원시키겠다는 그 구원욕구잖아요. 그러면 너는? 그렇게 하는 너는 누구냐? 몰라요. 나는 당연히 구원받아야 될 사람이라고 본인이 본인을 그렇게 악마에 속아서 자부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구원받을 자격이 아무도 없어요. 구원되고 안되고는 어디까지나 주님소관이지 우리가 끼어들 입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추락만 하면 돼요. 추락하면서 온갖 생각 다 한다고요. 이쯤에서 그물이 있어서 받쳐야 되는데……. 그것은 네 생각이고. 그것은 가상현실이에요. 실재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복음 전하면 복음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것 우리교회에서 다 이야기하는데요. 내키지를 않지요. 십자가만 사랑하자. “그거 우리교회도 다 이야기하는 건데요.” 그렇게 한다고요.
그런데 그 교회 가면 예수님중심이 아니고 교회중심이에요. ‘우리 교회는 복음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이 세상 교회 다 망해도 우리교회는 멀쩡해야 된다.’ 그런 주의를 내세운다는 말이지요. 마귀가 바보가 아니에요. 아주 뱀처럼 지혜롭다 하잖아요. 인간자체를 꾀었던 자가 누구입니까? 악마지요. 아무리 인간이 뛰어나도 악마의 지혜를 당해낼 수가 없어요.
이런 아이디어, 이런 신학적인 아이디어, 이런 교리, 이런 정교한 구원의 방식, 그거 다 마귀가 제공한 거예요. 주님이 오 시게 되면 그러한 꼼수 있잖아요. ‘주여, 이게 다 제가 스스로 살고자 하는 나의 꼼수였습니다.’ 라고 고백할 뿐이지요.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주님 부활해서 우리한테 찾아오라고 누구 손든 사람 있어요? 인간에게는 주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조차도 역겨워지는 소리에요.
부활해버리면 부활이라는 것은 이 가상현실의 바깥의 이야기기 때문에 가상현실에서 안넣어줍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있어. 인간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부활하신 분이 다시 이 동네를 방문해?’ 갔으면 간 것이지 주님께서 이 동네를 재차 방문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재차 방문하는 이유는, 이것이 가상현실이고 가상현실인 이유는 여기서 진짜 실재적인 존재, 악마가 이 가상현실을 늘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주께서 오신 겁니다. 성령을 보내신 거예요.
pivot플레이라니까요. 회전축을 돌리는 거예요. 기독교의 지혜, 기적, 나는 기도해서 이런 기적을 받았다는 것은 다 헛방이에요. 중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위해서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주체가 되고 우리는 하나의 객체일 뿐이지 내가 십자가를 가진다는 것, 소유한다는 이것은 말도 안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벌건 쇳덩이를 내가 가질 수 있습니까? 대번 손을 떼지요. 우리 힘으로 다가서면 십자가를 만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이미 십자가 안에 들어 있음을 확인하는 거지요. 십자가를 새삼스럽게 매치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십자가라는 사건을 위해서 창세전부터 나는 너를 태어나게 했고, 그동안 너를 꾸준히 이용해왔다는 것을 십자가 안에서 우리에게 통보해주는 겁니다.
이제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면 악마가 목을 벌려줘야 돼요. 악마가 목을 벌리는 것은 뭐냐? 악마가 악마답게 행동하도록 악을 자극시키는 겁니다. 악을 자극하는 방법은 뭐냐? 악마가 인간에게 넘겨준 것이 선악이에요. 선악체제에 해당되지 않는 다른 이야기를 해버리면 악마는 자극을 받는데 그 다른 이야기를 하는 방법에서 반드시 인간은 자기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을 해야 돼요.
그래서 복음 전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죄인 중에 괴수가 되기에 어떤 의미가 도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성도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의미는 주로부터 나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야 되지 ‘나 구원 드디어 챙겼다’는 식으로 환호성 올리는 쪽으로 돌아오면 안돼요. 평소에 구원을 원했는데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식으로 하나님은 거래한 적 없습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주께서 쓰시고자 하기에 성령이 온 것뿐이지요. 일어나는 모든 앞으로의 모든 일도 주님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일이지 나를 드러내기 위한 일이 아니에요. 이 이야기는요, 여러분이 이 이야기의 논쟁이 궁금하면 25년 전의 십자가마을 질문답변에 다 올라와 있어요. 하여튼 십자가마을 용량도 많아요.
25년 전의 질문답변을 보게 되면 십자가마을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이 근호 목사는 왜 예수 믿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느냐? 우리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명쾌하게 성경에 나와 있는데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냐?’라고 자꾸 질문을 해대는 거예요.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왜 동조하지 않느냐?’ 이런 공격을 해대는 거예요.
그래서 했지요.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버리면 이것은 결국 누구 증인되느냐? 그것은 예수님 증인되는 것이 아니고 본인 잘나서 내가 구원되었다는 본인증인밖에 안된다고 제가 답글을 이십 몇 년 전에 올려놨어요. 사람들이 제일 이해가 안되는 것이, 물론 우리는 이해가 되지요, 사람들이 이해가 안되는 것이 복음 앞에 딱 서버리면 평소에 자기가 뭘 노리고 있는가가 들통 나 버려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들통 내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하나의 옵션 상품이 되어버려요. 우리교회에서 팔고 있는 상품 중 하나가 복음 되어 버려요. 복음도 팔고, 기도하고 복 받는 것도 팔고, 그저 “오세요. 손님 원하는 상품이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신상 막 나왔어요. 좋은 아버지 되기, 좋은 가정되기, 다 있습니다. 골라잡으소.”
이것은 우리 교회 잘났다는,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자기 잘났음의 증인을 하는 것이지 십자가의 증인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이게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받은 사람을 흉내 내는 사람의 차이점이에요. 마지막은 뭐냐? 잘난 나 증인을 할 것이냐, 아니면 주님 증인 할 것이냐?
“목사님, 그런 것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여러분들이 가까운 일가친척에게 복음 전해보세요. 복음 전해보면 여러분이 화가 나지요. 안먹히니까. 사전공작처럼 빵도 사주면서 좀 들을까 싶었는데 챙길 것은 다 챙겨놓고 “우리교회에서 다 하던 이야기인데?” 이런 식으로 하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그게 화가 나지요. 왜 화가 나는지 알아요? 복음 전하는 나를 증거하고 싶은 욕심이 들통 나서 그래요.
주께서 마주쳐야 되는데 공작을 벌린 거예요. 내가 꾀어서 이렇게 하게 되면 그래서 복음 전하면 ‘복음을 전했으니까 나는 주의 증인이 맞다.’ 자기가 주의 증인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계기를 본인이 자꾸 꾸역꾸역 만들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전도 안해도 주님은 자기백성을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믿습니까!
주님이 능력이 없어서 우리가 전도를 안한다고 “너 때문에 두 명 놓쳤잖아.” 그런 분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를 이용하지, 우리가 주님을 이용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주께서 알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인간을 그동안 장악해온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선악으로.
경제적으로 군림해서, 네가 착하면 경제적으로 부자가 될 것이고, 네가 가난하게 사는 것은 나쁜 일을 한 것이니까 어쨌든간에 그 틈을 메우기 위해서 너는 선한 일을 하게 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한테 이미 세뇌를 시켜놨다는 말이지요.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그것의 pivot이지요, 반대로 가버려요.
악마가 이미 사람은 떡으로 산다는 것을 세뇌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주님께서 뭘 하셨습니까? 에스더에도 나옵니다. 뭘 하셨습니까? 40일 동안 금식하셨지요. 금식은 뭐냐? 굶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에요. 굶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를 보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시범보이신 거예요. 올바른 해석으로서.
따라서 신명기 8장에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그 뜻을 인간이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것은 거울에 투영된 자기의 선입감만 되받아 올 뿐이지 거울 속에 들어가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보여주는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이 말은, 예수님은 거울 속, 다른 말로 하면 악마의 아가리속으로 들어가신 거예요. 유일하게.
“잡아먹으라, 나를. 내가 죽는 것은 너희가 죽여서가 아니라 내가 알아서 죽겠다.” 중요한 것은 죽는 장소가 가상현실의 장소가 아니고 실재의 장소에요. 가상현실에서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공동묘지에 가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니까 그냥 죽어요.
하지만 정말 모든 세상의 중심이 되는 장소, 세상을 시작한 그 장소에 유일하게 가신 분,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센터, 안으로 들어가요, 모든 권력이 시작된, 악마의 권력이 시작된 그 악마의 속 안까지 들어가시는데,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것을 이루셨고 그것의 모형으로서 지금 에스더에서 그 깃발 앞에 가는 사람을 뒤에서 떠미는 사람은 모르드개고, 떠밀려서 억지로 가야 될 사람은 여자 에스더, 에스더가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악마의 목구멍에 들어가는 겁니다. 얼마나 이게 위험한 일인지 몰라요. 전에 이야기했지만 에스더는 처음에는 예쁨이라고 했지요. 그 예쁨은 모든 남성의 세계에서 위에 올라갈 정도로, 남성의 세계가 다 우러러 볼 정도로 독보적으로 예쁜 여자였습니다. 그 예쁜 여자가 그 다음에는 독한 여자가 되고, 독한여자에서 악한 여자가 되는 겁니다.
세상에, 하만의 가족을 나무꼬챙이에 달라고 명령한 사람이 바로 에스더입니다. 그 얼굴 예쁜 에스더의 입에서 그 명령이 나온 거예요. 악마도 이런 악마가 없지요. 악마를 닮았어요. 사람을 고문하는 채찍질 하는 악마가 독한 존재입니까, 예수님의 등짝을 때리는 그 악마가 독한 존재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지옥불에 던져 넣는 그 하나님이 독한 분이에요? 어느 쪽이에요?
하나님이 독하지요. 악마는 흉내나 낼 뿐이지 진짜 독한 맛을 못봤어요. 인간은, 악마의 꾐에 빠진 아담의 계열은 전부 다 죽기를 무서워해서 벌벌 떨면서 악마의 그 마지노선에서 다시 환상의 세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그 안으로는 못들어가고. 지난 시간에 한 제목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희생물. 자, 희생물이 성립되려면 누가 와서 희생물이 되도록 도와줘야 돼요.
누가 돕는가? 악마가 도와줘야 돼요. 그래서 악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겁니다. 나쁜 존재가 있어줘야 희생이 돼요. 예수님 혼자 자살하면 안되고 번개탄 피우고 죽으시면 안돼요. 모든 악의 극단적인 내용이 그 안에 있어줘야 그래야 텀, 3일 만에 부활했다는 그 텀의 의미가 이 악마의 모든 것에서 이미 벗어난, 해방된 존재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만끽하게 하시는 거예요.
너를 더 이상 협박하거나 공갈칠 어떤 요소도 너에게는 없다. 그동안 벌벌 떨었던 이유가 뭡니까? 율법이 자꾸 쏘아대기 때문에 그래요. 율법이 쏘아대는데 그 율법이 계속 화살을 쏴봤자 이미 죽었던 우리의 옛모습에, 껍데기 표적에다 화살을 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흑마술, 백마술 그런 것 있지요. 못된 장희빈이 죽을 때 뭐 먹고 죽었습니까? 콜라 먹고 죽었잖아요. 안마시겠다고 막 발악을 했는데.
콜라 먹고 죽은 그 장희빈이 인현왕후인지 정확치는 않습니다만 왕후를 해코지 할 때 짚으로서 꼴사납게 만들어놓고 계속 화살을 쏘는 거예요. 유사성의 원리에 의해서 실제로도 뭔가 병이 난다는 이런 아이디어를 누가 줬겠습니까? 이런 아이디어가 모든 인간에게 다 잠재되어 있어요.
괴롭히는 시어머니가 “너는 이거나 빨아라.” 하고 자기 옷을 주게 되면 며느리가 시어머니 옷 빨면서 빨래방망이로 내려치면서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옛날이야기죠. 고추당초 맵다 하되 그 때 이야기고 요새는 반대로 되었어요. 사람이 스트레스를 왜 받느냐 하면, 본인의 복수가 제 때 제 때 안되어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 12장에 보면 모든 복수는 누구에게 있다? “너 하지 말라. 내가 알아서 할게. 너도 엉터리면서 뭘 누구에게 복수할 자격이 있다고 하느냐?”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 모르드개가 계속 시도하는 것은 악마로 하여금 악마의 극을 달리게 만들어요. 지난번에 했지요. 첫 번째는 뭐냐? 모든 재정적인 것을 다 말살시키는 거예요.
그게 에스더 3장에 나옵니다. 13절에 보면 “십이월 곧 아달월 십삼일” 숫자로 시작하지요. 13이란 숫자, 불길하지 않습니까? 12월 13일 날 그 나라의, 인도에서 이집트까지의 모든 유대민족은 그 날에 다 처단하는데, 홀로코스트라 하지요, 나치가 유대인들 다 잡아 죽인 그것을 하는 거예요.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 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재산이고 뭐고 이 땅에서 다 작살내버려라. 왜? 그럴 때 뭐가 되느냐 하면, 전부가 돼요. 이게 남성의 세계입니다. 남성의 세계는 여분이라는 것을 용납하면 안돼요. 그러면 남성의 세계에서는 영 잠을 못 이룹니다. 온전하게 다 내 통치아래 있어줘야 돼요. 아담이 남자잖아요. 악마가, 악이 아담을 덮칠 때는 모든 인간은 죄의 왕노릇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죄일 때 죄다운 거예요. 전에 스가랴 보셨지요. 이미 이 세상 전부가 악이에요.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공간이 다 악이에요. 교회 간다고 악이 안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가든 절간에 가든 모든 것이 그냥 집에 있거나 등산가거나 전부 다 악이에요. 의인은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이 희생물의 가치가 충분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냥 가상현실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복음을 모르는 인간들은 자기가 나서서 이야기합니다. “주님, 앞으로 잘할게요.” 본인이 왜 나서요, 본인이? 악마하고 이야기하는데 선을 행할 능력도 없으면서 “앞으로 잘할 테니까……” 하면서 그 다음에 거래조건은 뭡니까? “제발 우리 아들만큼은 건강케 해주옵소서.” 이렇게 나와요. 흥정하는 것도 아니고 거래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앞으로 십일조 안빠트리고 반드시 하고, 교회도 안빠지고, 수련회도 꼭 참석할 테니까 올 한해는 잘 펴게 하옵소서.” 펴는 것은 다리미로 하면 잘 펴지지요. 차라리 달을 보고 빌지요. 달이나보고 빌지 주님하고 어떻게 그런 거래를 합니까?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라 하는 것은 달이 되든 예수님이 되든 그것은 상관없어요. 내가 빌고 싶은 것만 비는 겁니다. 거울은 반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도를 거울 속으로 따라오게 만들어요. 따라가게 되면 내가 모아놓은 재산과 내 귀한 생명을 이 세상이 가만두지 않고 작살내는 현장에 갑니다. 그 현장에 가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침묵이지요. 원래 말을 많이 하게 되면 아직도 펄펄 내가 살았다는 증거에요. 아파요. 너무 아파요. 이게 아직 살만하다는 뜻입니다. “이러면 우리 가정은 파탄 납니다.” “아직도 말할 여유가 있는 것을 보니까 아직까지는 괜찮구나.”
그냥 아무소리 못하지요. 욥기 마지막에 나오지요. 그렇게 잘났다, 나는 정당하다, 내가 이런 고난 받을 이유가 없다, 쟤들은 나보다 나빠도 멀쩡한데 나는 이렇게 아프냐, 하다가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재를 뒤집어쓰지요. 재와 나는 동일합니다. 자아이상, 이상자아, 이런 것 모든 것이 다 날라 가고 그냥 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한테 문제를 낼 테니까 알아 맞춰 보세요. 문제는 좀 심오하게 보일뿐 심오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재가 되기 전의 인간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무엇입니까, 하면 “인간은 재입니다. 재에 불과합니다.” 할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약간 피해서 인간이 재가 되기 전에 인간은 뭐냐는 말이지요.
여기서 두 가지가 나눠지지요. 하나는 희생물을 증거할거냐? 아니면 희생물을 반대하는 악마를 증거할거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정의내리겠습니다. 악마는 비언약이지요. 이게 정답이죠. 악마는 비언약입니다. 그래서 잘 먹고 잘살아도 거기에 주 예수 사랑이 빠져버린 가정은 지옥 가는 가정이에요. 예수님이 언약의 마지막이고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가정이라면 그것은 복 받은 가정이에요.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시 1:5) 2학년 2반은 아무리 학부모가 돈을 넣어도 2학년 1반에 안 넣어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을 반편성하는 기간이라고 봐요. 염소는 염소대로 양은 양대로 편성을 하는 거예요.
양의 특징은, 구원받는 사람의 특징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이 결국 되돌아보면 주께서 하셨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언제 주님께서 먹을 것을 드렸습니까? 목마를 때 언제 제가 주께 물마시게 했습니까?’라고 주님께서 하셨다고 하는 사람은 양에 속하고, 하나부터 끝까지 전부다 자기가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학년 2반, 지옥 가는 사람으로 편성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희생물이 살아 있어서 어떻게 이 악마의 핵심까지 파헤쳤느냐, 라는 그 점을 우리가 그냥 목격자, 또는 증인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강남모임에서 요한복음이 끝났습니다.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요한복음 21장 24절에 “이 일을 증거하고……” 이일을 증거하고. 그러니까 사도가 훌륭하다, 착하다, 이런 개념으로 사도를 이해하면 안됩니다.
사도는 훌륭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아요. 중요한 것은 사도는 분명한 자기존재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겁니다. 직업이 있든 없든 관계없어요.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자기가 어떤 일을 해도 주께서는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고 그 원치 않는 길이 뭐냐? 자기가 예상 못한 주님을 증거 하는 길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주님을 증거 했다고 한다면 내가 주님을 증거했다고 나서면 안되기 때문에, 주님이 증거 되었음이 주어가 되고 나는 거기에 뒤따라 갈 뿐이지요. 그래서 문장을 이렇게 바꾸면 되지요. ‘나는 주님을 증거했다.’가 아니라 ‘주님증거가 나를 끌고 간다.’ 그렇게 하면 되지요. 주님증거는, 성령께서 나를 끌고 가면 되지요.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되고 모든 것이 ‘아니오’가 아니라 ‘예’가 되는 거예요.
갑자기 얼굴 보니까 어렵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면 쉽게 할게요. 물에다가 약을 탔을 때, 예를 들어 발포산을 넣으면 물에서 보글보글 올라오겠지요. 물이 중요합니까, 약이 중요합니까? 약이 중요하지요. 물을 마시려고 약을 넣지는 않잖아요. 우리 안에 희생물이 들어왔을 때 희생물이 보글보글 해서 어떤 상황을 낸다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악의 센터 안에 자꾸 집어넣는 일이 되는 겁니다.
악의 센터, 악마의 센터인데 방금 우리가 배웠으니까 악은 뭐가 악마라 했습니까? 고생되는 것, 북한 가는 것, 그거 아니지요. 뭐가 악마입니까? 비언약, 곧 언약이 들리지 않는 곳, 하나님의 십자가가 들리지 않는 곳, 그게 바로 악마의 센터입니다. 복음이 들리지 않는 곳. 우리가 좋아서 가든 나빠서 가든 자기 탓은 하지 마세요. 주께서 그렇게 집어넣은 거예요.
만약에 어떤 청소년들이 가서는 안 될 클럽에 갔다. 그런데 나이트클럽의 dj가 틀어준 노래가 뭐냐?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그런 나이트클럽에 갔다면 그것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승리를 얻겠네~.” 그런 나이트클럽이 혹시 있습니까? 물론 그걸 틀어줘도 좀 그렇지만.
계속 진도 나가겠습니다. 잠자고 있는 악을 깨우는 거예요. 약을 올리는 거예요. 계속해서 약을 올려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에스더 4장을 봅시다. 1절에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재를 무릅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자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누굴 원망하고 싶으냐 하면 모르드개를 원망하고 싶어요.
‘그 때 모가지 한번 숙여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뭐 잘났다고 버티다가 이제 와서 대성통곡 하느냐? 하만을 그렇게 약 오르게 만든 것은 바로 너잖아. 약올려놓고 이제와서 원망하면 돼? 뭘 베옷까지 입고 대성통곡하느냐?’ 자, 그렇게 함으로서 어쨌든간에 이러한 심각한 분위기에 접어들지요.
지금 하만은 표적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만은 반지를 갖고 있어요. 바사의 전체권세를 갖고 있고 아까 하만은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라 했지요. 악마가 뭡니까? 비언약이죠. 그러면 하만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것은 뭐냐? 이스라엘이 왜 쫓겨났는가? 이스라엘은 무슨 죄 때문에 쫓겨났는가?
그것은 이스라엘내부에 비언약적요소가 들어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못사는 거예요. 아까 역대하 15장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도 않은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죽이라. 하나님께서는 희생물이 있다는 조건하에 계속 유지할 생각이지 그것 없으면 없앨 요량이고 그게 하나님 뜻이라는 그 말이지요.
그러한 이스라엘이 쫓겨나면서 자기를 똑 닮은 요소가 바로 하만이 발작을 일으키듯이 하고 있는 거예요. 하만이 그런 발작을 일으킬 때 하만의 모든 횡포는 옛날 이스라엘이 했던 행세라면 하만에 의해서 피해보는 이 자리는 누구 자리가 되어야 돼요? 언약을 주신 누구의 자리입니까? 하나님의 자리가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진해서 스스로 여기서 희생물이 되고자 하는 겁니다. 희생물 되는 작전에 성공. 그냥 거울로 보면 환상현실이에요. 그러나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게 말이 돼요? 이 세상 자체가 그 표면이 매끈해서 절대로 이 세상은 현실 안에 있는 실재세계로 못들어가요. 그냥 환상의 세계일뿐입니다. 그 세계에 뭐가 있느냐 하는 것은 악마가 맞닥트릴 때나 비로소 알 수 있는 거예요.
악마가 맞닥트린다는 것은 언약의 작용에 의해서만 가능하지 언약 없이는 그 속까지 들어가 볼 수가 없어요. 그 속에 들어가면 뭐가 있느냐? 희생물이 되신 주님과 동참해야 될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거기에 있겠지요. 이제는 주님께서 일을 벌이시고 모르드개, 유대인들, 그리고 에스더로 하여금 하만으로부터 표적수사의 대상이 되도록 조치에 나섭니다.
그러면 그들의 모든 고난과 고통은 뭐냐? 장차 오실 예수님이 가져야 했던 딜레마를 미리 맛보게 하는 거예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도대체 주님은 뭘 보시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냥 사시면 되는데 “이 잔을, 이 쓴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왜 지금 없는 이야기를 미리 하셨는가요? 주님이 보는 시각과 제자들이 보는 시각이 달라서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기도시킬 때 그들은 기도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기도하게 함으로서 인간들은 사실은 기도할 것이 없는 존재인 것이 드러나고 기도하는 체만 했지 졸고 있었잖아요. 주님이 그 시간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아픔과 고통의 기도를 하셨던 겁니다. 피가 속에서 나올 정도로 기도를 하셨던 거예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다른 말로 하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은 이 잔을 마실 수가 없나이다.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셔서 기어이 이 잔을 마시게 하소서. 악마가 내민 그 저주의 잔을 내가 악마가 내밀었다는 이유 때문에 마시게 하옵소서.’ 악마 속에 수류탄 집어넣어서 나와 악마가 폭파되도록. 그래서 더 이상 악마에 의해 시달리지 않는 자기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는 희생물이 되신 겁니다.
어떤 율법이나 어떤 간섭에서도 벗어나는, 어떤 지적질에도 구애받지 않는 천국의 사람 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런 희생을 하신 거예요. 그 희생이 있는 장소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여기 골로새서 3장에 그런 말씀 나오잖아요. 들어보면 알아요. 하도 많이 해서. 3장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어야 위를 쳐다보지요. 위에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계신 곳이 위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는 말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그 다음에 뭡니까? “생각지 말라”고 하지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것이 율법이 아니에요.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어주마 하는 뜻이지 이거 율법 지키면 구원 받는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맨 날 위만 보다가는 하수구에 빠지는데요? 그게 아니고 어떤 일이 있을 때 주께서 주님의 희생을 증거하라고 이 일이 벌어졌음을 소급해서 생각나게 하면, 이 말씀대로 주께서 주의 증인되라고 이 말씀을 생각나게 만든다, 그 말입니다. 아, 오늘도 위엣 것을 생각하게 하시고 위엣 것 생각하다 보니까,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저절로 땅에 것은 생각 안하게 되는 거예요.
땅엣 것은 뭐냐 하면, 땅엣 것은 자식생각, 남편생각, 이것이 땅엣 것이 아니에요. 왜 이거 생각 안해요? 밥은 해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땅엣 것은 비언약적 세계에요. 비언약적 세계는 뭐냐 하면, 남이 나를 지적하는 세계라는 말이지요. 비언약이니까. 율법을 쏘아대고 타인을 의식하게 만드는 세계가 땅의 세계라 그 말이지요.
‘너 그렇게 하면 안 돼. 너 그러면 우세당해. 너 망하면 어떻게 살려고? 너는 몸 아프면 안돼. 너는 괜찮은 사람인데 몸 아프면 안되잖아.’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의 자존감과 자존심을 건드려주는 세계가 땅의 세계라는 말이지요. 비언약의 세계. 그동안 하만이 바사제국을 권세로 다스려서 ‘꼼짝 마라’ 했던, 그것에 주눅 들었던 그 세계가 땅의 세계에요.
우리 힘으로 못벗어납니다. 내 힘으로 벗어나면 안돼요. 벗어날 수도 없고. 왜냐하면 나는 희생물이 아니잖아요. 희생물 증거하는 사람이지 희생물이 아니잖아요. 희생물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아, 땅과 하늘이 구분이 되는 겁니다. ‘아, 이게 땅이고 이게 하늘이었구나.’ 그 모형을 지금 에스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스더가 해야 될 것은 뭐냐하면, 그동안 가상현실 속에서 하늘의 것이 무엇이냐? 말을 바꾸겠습니다. 언약이 무엇이며, 땅의 것이 뭐며……, 말을 바꾸겠습니다. 비언약이 무엇인지를? 무엇 때문에 우리는 지금 남의 땅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하고 포로 잡혀 살아가는가를 다시 한 번 우리가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비밀은 ‘내 속에 죄 있다.’ 이거거든요.
‘내가 아담에 속해서 이런 죄의 왕 노릇 하고 있다.’ 자기 비밀을 아는 거예요. 이미 알기 때문에, 희생물이라는 그 언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아는 그 자체가 이미 하늘에 속한 사람의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하늘에 속했기 때문에 나를 증거하는 것은 땅의 일이기 때문에 주님만 증거하게 돼요. 주님만 사랑하게 되고, 주님에게 고맙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여러분 생각하기는 ‘주여, 이거 몇 분 동안 해야 되요?’라고 생각하는데 이 하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께서 시작했기 때문에 주님의 시간이 적용돼요. 주님의 시간은 어떻게 적용되느냐 하면, 몇 분 동안, 몇 시간동안이 아니고 때가 있어요. 사랑할 때가 있으면 사랑하면 되고, 미워할 때가 있으면 미워하면 되고, 안을 때가 있으면 안으면 되고, 헤어질 때 있으면 쿨하게 헤어지면 되는 거예요.
누가 돌아가시면 때가되어서 돌아가신 거예요. 누가 태어나면 주님이 알아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주의 때는 시간에 저촉 받지 않는, 주께서 주에게 필요해서 만든 사건 사건들의 연속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서 전혀 몇 분합니까, 한 시간 하면 성도입니까, 이런 식으로 지적받거나 구애받지 마세요. 그것은 비언약입니다. 우리는 저녁 먹을 때가 되어서 저녁을 먹을 뿐이고. 그러면 되는 거지요. 밥 먹으로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