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강-엡 5장 20-21(감사와 복종)1912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20-21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20-21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사도바울에 나오는 편지내용은 일상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제가 뭘 희생하면 됩니까, 라는 질문부터 시작하게 만드는 세계지요. 어떡하면 내 것 손해 안봅니까, 라는 질문이 용납되지 않는 세계. 본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쉬지 말고 감사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뜻이거든요.
이게 우리가 경험하고 있던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성사될 수 없는 현상으로 비춰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지요. 네가 너를 보는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너는 누구에게 속고 있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8절에 우리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보여주는데요.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을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단정적으로 나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조작된 것이라는 말, 엉터리라는 말이지요.
갈라디아서 4장 8절에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는 악마의 종이 된 채로 살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면, ‘항상 감사하라’는 이 새로운 낯선 세계의 요구와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요구와 대조를 해보니까 안 맞는 거예요.
안 맞으니까 우리가 어떤 억지를 부리느냐 하면,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한 감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 자신을 보고 ‘너 자신이 지금 악의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거부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도록 시도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그냥 봐주소’ 하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결국 이 말씀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속아 넘어가라, 그 말이지요. 속지 아니하려는 자가 지옥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날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속이는 어떤 세력 안에 우리가 놓여 있기 때문에 차라리 속임수에 대해서 속임수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속임수인지 제가 말씀드릴 테니 여러분도 이 말에 좀 속아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아예 수월하게, 목에 걸치지 말고 그냥 넘기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이유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말은 너는 이미 종착점을 찍었다는 거예요. 네가 이미 종착점에 도달해 버렸다는 겁니다.
지금 안속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살 이유도 없고 뭔가 시도할 필요도 없어요. 마지막 깃대를 잡았으니까요. 인생이 최종적으로 가야될 그곳이 이미 도달해버렸어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다. 인간이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의미 없어요. 이미 다 도달했는데 뭘 추구합니까?
종착점에 왔다는 그 증거가 뭐냐? 더 이상 자기를 설득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를 변호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계산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익이 얼마냐, 하는 그것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이미 종착점에 와 버렸으니까. 사람이 종착점을 이만큼 남기고 있고, 지금 내가 노력하고 시도하려 하다보니까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계산해야 되고, ‘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 더 착해져야 할 것 같아.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 자꾸 미흡함이 남아 있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선은 취하되 악은 버리는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류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거 지금껏 여러분을 속여 왔던 악마의 속임수입니다. 그 속임수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른 속임수로 딱 들이대는 거예요. “너는 벌써 다 왔다.” “꼬라지가 이런데요?” “그 꼬라지 생각하지 말고 다 온 거야.”
스스로 자기를 변호할 이유가 없어요. 적어도 종착점에 와 줘야 모든 일에 항상 기뻐함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하는데 이 감사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감사의 반대말이 뭐냐? 그것은 ‘불안불안’한 거예요. 모든 일에 불안하기 짝이 없는게 감사가 안나옵니다.
그리고 그 감사가 나오게 되면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 이게 말이 됩니까? 피차 서로에게 복종하라. 복종하라는 이 의미를 우리는 악마의 속임수 속에 살다보니까 이 ‘복종하라’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내 타입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복종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피차 복종하라는 이런 말씀이 나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그런데 이 복종의 의미가 뭐냐? 반대말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복종의 반대말은 주저함입니다.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헌금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봉사할 수 있을까, 뭔가 주저주저 하게 만들 때 그것은 영 복종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종할 생각을 하지 마시고, 감사할 생각을 하지 마시고 도대체 지금 내 신분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어떤 자리에 있는가, 그것부터 먼저 구축하면 돼요.
그동안 우리가 갈라디아서 4장 8절의 말씀처럼 본질상 엉터리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도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고 여겼고 악마의 종노릇 했는데, 이럴 때 우리 자신을 구축하고 내가 누구라고 항상 싸잡거든요. 내가 나를 싸잡아야 내 몸을 천국에 집어넣을 수가 있기 때문에 항상 신경을 거기에 몰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알아야 될 것은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환경 바뀌면 같이 따라 바뀌는 것이 인간의 자아에요. 군대 가기 전 20대 누구 집 아들의 자리, 군에 입대하기 직전과 군에 입대하고 난 뒤에는 인간이 휙 빨리 바뀌지요. 남자는 군대에 갔다 와야 돼요. 물론 갔다 와도 도로 마찬가지 되는 것은 일단 인정하더라도 군에 있을 때 그 마음가짐 같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습니다.
왜? 군대는 복종을 가르치거든요. 군대에서의 신분은 본인에 의해서 변경이 안돼요. 쫄따구로 확정되었습니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이 하는 말이, 나에게도 종이 있는데 그 종의 위치가 뭐냐 하면, “내가 시키는대로 무조건 따라갑니다.”라고 이야기해요.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9)
그 믿음이 주님에게 칭찬받은 믿음이고 천국가는 믿음이에요. 그처럼 나도 주님의 종이라는 거지요. 확정된 거예요. 종착점을 찍었어요. 그동안 우리가 악마에게 속아가지고 자꾸 자율성, 자율성, 이렇게 하는데 그 자율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허황된 것이고 철저하게 악마가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서 거짓된 신분으로 우리를 계속 인질로 삼았던 겁니다.
좀 더 깊게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 악마를 낚기 위해서 자기가 만든 인간을 악마의 세계에 미끼로 인질 삼으라고 던진 거예요. 악마는 그것도 모르고 덥석 바보같이 그걸 물은 겁니다. 악마가 하나님이 던진 인간이라는 미끼를 물음으로 말미암아 악마는 숨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세계 전면으로 들어와서 인간세계를 통제하는 지배자 노릇을 하면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주님과 악마의 전쟁이 개시되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3장 15절의 인류의 역사인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사. 성경에 이것 빼고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악마와 예수님과의 전쟁사. 그 전리품은 구원되고 전리품 되지 못한 자는 지옥가고. 악마와 함께 있기에. 그것뿐이거든요. 제가 울산강의하면서 질문을 던졌는데 그 질문을 여러분에게도 던져보겠습니다. 속으로 생각해 보세요.
여호수아 7장에서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점령한 뒤에 아간이 하나님의 전리품을 훔쳤어요. 그 때 하나님께서 전리품 훔쳐 숨긴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아이성을 치게 했는데 그 때 36명이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제가 이걸 설명하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36명이 무슨 죄로 죽었습니까? 본인이 어떤 잘못을 해서 죽었습니까?
그 답변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보기에는 그 36명이 아간 찾아낸다고 죽었으니 억울한 죽음을 죽은 것처럼 보이지요. 해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 36명은 원래부터 죽은 자였어요. 그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습니다.(눅 13:4)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참 측은하게 여겼어요. ‘가족들이 얼마나 애곡하겠느냐?’
하지만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18명은 원래부터 죽은자였어요. 그들이 죽을 때까지 주께서 친히 그 사람들을 살려온 거예요. 살려온 것은 생각 안하고, 살아온 것은 자기 힘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죽을 때 되니까 원망은 전부 다 하나님께 해대고. “멀쩡한 망대는 왜 무너지게 하십니까?”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인간은 미끼입니다. 하나님과 악마의 전쟁에서 인간은 미끼에 불과한 거예요. 악마가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악마의 세계에 인간을 하나의 미끼로 집어넣고, 악마는 덥석 그걸 물었고, 인간은 인질이 되었고,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악마와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나는 죽어도 안속는다.’ 하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께서는 환경을 바꾸니까 내가 누구냐가 환경 따라서 날마다 달라져요. 자기변명하기 급급하고, 남에게 ‘이것은 내 잘못 아니야’ 설득하기 급급하고, 자기설득과 남을 설득하고, 그리고 자기변호하고, 그리고 계산하면서 내가 이만큼 살아남았으니 남는 장사 아니냐, 하고 있고요. 이 모든 것이 다 거짓입니다.
인간의 변명과 설득이 나오는데 변명과 설득과 계산하는 것, 이걸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자기사연과 자기사정.’ tv의 어떤 프로에 보면 노래 한곡 부르기 전에 자기가 살아온 사정을 이야기해요. 한 5분 동안. 이야기한 다음 노래를 부르고 또 사연 이야기해요. 그 사연을 들어보면 사람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어요. 다 사정들이 있어요. 그것 들어보면 누가 누가 고생을 많이 했는지 시합하는 것 같아요.
누가 인생 더럽게 살았는지 내기하는 것 같아요. 자기사연, 자기사정에 몰두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거기서 자기소원이 생기고, 자기 소원이 생기면 거기서 감사가 다 날아가 버리지요. 아직 종착점에 도달 못해서 혼자 깨나 애쓰고 있는, 아직도 악마의 속임수 안에서 몸부림 맘부림을 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가룟유다 아시지요. 가룟유다가 주님을 만났을 때 가룟유다 안에 사탄이 들어갔어요. 가룟유다가 주님 만나는 것은 안에 사탄이 들어갔으니까 사탄이 주님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정면으로 보기를 굉장히 두려워한 겁니다. 자기의 허점이 다 드러 날까봐. 사람들 왜 교회 안나옵니까? 사람들 왜 복음 안받아들이지요?
복음 앞에 오게 되면 내 사적인 개인의 사연과 개인의 사정이 하나의 짜증스러운 것이 되어버려요. 자기 딴에는 상당히, 굉장히 목숨 바칠만큼 중요한 사연과 사정이 주님 앞에서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 무서운 거예요. 내가 쥐고 있는 것이 헛것 쥐고 있다는 것이 하루아침에 들통 나면서 내가 쥐고 있는 것이 다 무산될까봐, 그래서 나라는 기댈 것이 없는, 내 것이 없어지는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어요?
차라리 가룟유다는 자살을 택해버립니다. 마지막 남아있는 작은 잠막같은, 아주 최소한의 자기의를 가지고 장렬하게 자기와 더불어 자기자신을 껴안고 자살하고 말지요. 이게 악마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말로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가룟유다들, 그 사람들 자연사해도 자살이에요.
마지막 남아있는 어떤 것, ‘이것만큼은 나는 잘났다. 내가 못난 것은 인정하겠는데, 내가 신이 아니고, 천사가 아닌 것은 충분히 인정하겠는데 그러나 이것만큼은 내가 못놓겠다.’ 다시 말해서 ‘다른 것은 속임수라도 내가 착하다는 이 사실만큼은 제발 속임수가 아니기를, 제발 속임수가 아니고 이것만큼은 진실하기를!’
주님은 “이 쓰레기야. 이 죄인이야.”라고 하지요. 그 소리가 무서워서 주님의 낯을 피해버립니다. 악마 속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주님의 모든 말씀을 피해버린다는 거예요. 주님을 똑바로 보기를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최종점에 와 있다는 이 사실을 마태복음의 경우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지요. 베드로가 갈릴리바다 위를 걷습니다. 자 물어보겠습니다.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쉽습니까, 죄사함이 쉽습니까? ‘일어서 걸어가라 하는 것이 쉬우냐, 죄사함이 쉬우냐’ 하는 질문을 지금 다시 변형해서 한 거예요. 바다 위를, 물 위를 걷는 것이 쉬울까요, 죄사하는 것이 쉬울까요? 죄사함이 쉽다고 하는 말은 물 위를 안 걸어봐서 그래요.
최종점에 왔다는 인식이 없어서 그래요. 진짜 최종점에 왔다는 이것은 ‘내가 두 번 다시 나에게 속는가 봐라.’ 이런 마음을 갖고 있어야 돼요. 나한테 의가 있다는, 이 악마에 속한 육신이 날마다 이야기하는 이것, ‘너는 잘났어. 너는 훌륭한 거야. 너는 누구보다 한평생 고생 많이 한거야, 라는 그 말에 내가 두 번 다시 속으면 내가 마귀다.’라는 그런 자세.
나는 나한테 안속아야 돼요. 나한테 안속아야 남한테 안속는 겁니다. 사람이 남에게 폭력을 행하고 남에게 죄를 짓는 이유는 자기자신한테 충실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자신을 안속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잘난 나를 왜 건드리냐 그 말이거든요. 안 잘났거든요. 안잘났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내 마음에 있는, 과거의 시공간에서 성립된 내 자아는 잘났대. 남보다 더 잘났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이 또 과도하게 한다. 언제 우리가 남보다 내가 잘났다고 했습니까?’라고 하실 것인데 그 반발에 대해서 또 준비가 되어 있어요. 여러분 자식이 남보다 잘났지요? 그게 바로 여러분이 잘난 거예요. 보고 싶어하지도 않는데 스마트폰 꺼내서 외손녀 외손자 사진 열어가지고 남 운전하는데 옆에다 들이대듯이 보여주면서 “지금 얘가 말을 한다고.” 이것은 뭐예요?
지금 문재인 외손자사진 가지고 들이대는 겁니까? 내 외손자 외손녀 사진 들이민 거예요. 이게 내 자랑이라는 말이지요. 잘났다, 그 말 아닙니까? 옆에 있는 사람은 ‘애가 다 그렇지 뭐.’ 하면서 겉으로 말은 차마 못하고 슬슬 호응은 해주는데 그게 속고 속는 세상 아닙니까? 서로 속고 속는 세상. 매일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속지 않으려고 하지 마시고, 남에게 속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됩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다는 말이지요. 베드로는 지금 중력이 없어요. 자기 몸무게를 못느낍니다. 왜냐하면 주님만 바라보기 때문에,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자기라는 자리에 주님의 시선이 이미 점령하고 있어요. 이미 종착점입니다. 점 찍었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갑자기 물 바라보다가 ‘내가 미쳤지.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이건 나답지 않은데?’ 나답지 않다는 이것을 계속 악마가 인질로 잡고 있는 거예요. 나답지 않은 것이 뭐예요? 내가 아예 없는데 왜 또 나답지 않은 것이 생기느냐 그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환경 바뀌면 나다움이 자꾸 바뀌기 때문에 나다움을 믿을 수가 없어요.
지금 이 환경에서 또 저리로 가면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고요, 딴데로 가면 또 무슨 소리 할지를 몰라요. 인간은 그 때 그 때 달라요. 시공간에 의해서. 예수님의 시공간은 뭐냐?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신분을 보장해 줍니다. 그 감사와 기쁨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이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복종’인데 ‘피차’니까 주인 없는 자발적복종을 말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인이 아닌, 스스로 움직이는 복종들, 그리고 이 복종이 되려면 종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이제부터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데요. 시작하기 전에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할 때 ‘주’라는 개념은 어디서 나온 개념이냐 하면 바로 구약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신약 보면서 구약 제키고, 구약을 잊어버리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하게 되면 해석 하나도 못해요. 구약이 있으면서 형성된 그 구조가 있어요. 그 구조 안에서 신약이 성취를 하는 것이지 구약의 구조 버리고 신약에 예수님 오셔서 아무나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나오는 구조를 버리지 않고 일하시는 겁니다.
그 구조가 이스라엘 구조에요. 이스라엘에 선택의 두 가지 과정이 있어요. ‘선택1’이 있고 ‘선택2’가 있는데 ‘선택1’은 버림받기 위해서 선택된 거예요. 이스라엘이 버림받는다는 이 말은 쉽게 말씀드려서 해변가의 모래사장에 모래를 쌓아서 그 중앙에 중국집 젓가락이나 긴 작대기 세워놓고 모래를 조금씩 긁어내는 거예요.
조금씩 긁어내다가 마지막에 넘어뜨리는 사람에게 벌칙을 세우는 게임이 있지요. 이 작대기가 무슨 바탕위에 세워졌는가를 긁어내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한 겁니다. 개념은 멋져요. ‘너는 내 아들이다.’ 이스라엘이 자기 아들 아니에요. 바알의 아들이고 악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작은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 내 거룩한 백성이다.” 개념 하나는 멋있어요. 개념은 작대기로 세워두고 밑에서 긁어내는 겁니다. 긁어내는 그것을 여호와전쟁이라고 해요. 전쟁하는데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하는 전쟁과 이스라엘이 하는 전쟁을 달리 가져갑니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대표자기 때문에. 인류에서 택했거든요. 인간에서 택했다는 말이지요.
전쟁을 하게 되면 그 전쟁의 목표가 있는데 그게 뭐냐? 히브리어로 ‘헤렘’이라 하는데 이게 뭐냐? 거룩한 것, 구별된 것, 하나님이 가장 찾고 싶은 것, 그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다 긁어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스라엘이다.’ 이 말은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스라엘 통해서 태어난다.’ 같은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스라엘 속에 있다. 바깥에 있는 껍데기를 벗겨야 나타난다.’ 이게 바로 구약입니다. 그리고 구약은 신약을 필요로 하고요. 하나님의 아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요.
구약의 준비단계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그림자와 모형이라고 하는 거예요. 긁어내는데 이스라엘은 아주 발악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래, 사랑하지.” “사랑하는데 왜 버립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버린다.” 모든 말이요, 하나님이 설정한 그 개념과 땅에 있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율법이라는 말씀을 해석하는 그 해석의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미 악마의 미끼가 되어있고 인질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스라엘이 내뱉는 말은 악마의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택한 백성이고 사랑했으니까, 저 이방민족과 다르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한 줄로 알았지요. 자기자신은 문제가 없기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했다는 거예요.
문제 있는데 사랑한 것이 아니고 문제없는데 사랑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사랑을 들춰내기 위해서 그 문제 있음을 끝까지 들춰내겠다는 거예요. 그 문제 있음을 들춰내는 방법이 뭐냐? 전쟁, 다른 말로 해서 궁지에 몰아넣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지로 몰아넣는 겁니다. 벌벌 떨게 만드는 상황으로 몰아넣어요.
뒤에서는 애굽군대가 따라오지요. 앞에는 바다가 있지요. 오도 가도 못하는 지경에 빠집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자연적으로 자기의 문제성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삼고 살려놓을 때는 언제고 왜 죽이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일관됩니다. “제발 내가 죽음으로 몰아넣을 때 죽어라. 죽음으로 몰아넣을 때 죽어라. 생명? 그거 죽음 안에 있어.” 내가 인위적으로 만든 죽음 안에 있다고요. 네가 자살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일부러 만든, 약속에 의해서 만든 그 죽음 안에 있는 거예요. “사지로 몰아넣을 때, 궁지로 몰아넣을 때 그냥 몰아넣어져. 그냥 가.” 그야말로 에스더의 말씀대로 “죽으면 죽으리라.” 이 말은 뭐냐? ‘애초부터 우리는 살권리가 없음. 뭔가 나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살아야 된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은 선악과 따먹을 때 우리는 죽은 존재야. 저주가 그걸 증거하는거야. 사는 것이 힘들고 내 사정이, 내 사연이 힘들다는 것은 뭔가 우리는 이상해. 하나님이 본래 만든 그 인간이 아니야.’라고 알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걸 눈치채야지요.
창세기 1장에서 세상을 만들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을 만들고 난 뒤에 뭐라고 나오느냐? “심히 좋았더라.” 인간을 매개체로 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려는 그 취지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현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림받도록 선택한 이것이 이스라엘의 ‘선택1’입니다. 첫 번째 선택이에요.
그들은 전쟁하기 위해서 선택받았지요. 이스라엘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과 거룩, 그리고 귀함, 소중한 것은 너희 안에 있는데 그것을 들춰내기 위해서는 전쟁이라는 과정을 치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사기 7장 20절에 보면, “기드온의 칼”이라는 말이 나와요.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기드온의 칼이여, 하나님의 칼이여. 하나님과 기드온의 칼을 동일시하는 전쟁을 벌입니다. 기드온은 달랑 3백명이에요. 이것은 300명으로 13만 5천명의 엄청난 군대를 이겼는데 이것은 차라리 죽었다고 봐야 되지요. 그런데 조건을 바꿔봅시다. 저 13만 5천이 죽은자고 3백명만이 기드온에 속해서 산자라면 이것은 이미 종착점을 찍었던 사람 앞에서 자기주변에 있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는 겁내거나 불안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요. 주저주저할 이유가 없지요.
주저주저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발적복종이고 자발적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종착점, 하나님의 개념, 사랑,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너는 택하신 백성이라는 그 개념에 합류가 되어버리면 나머지기는 뭐냐 하면, 자기가 과거에 살면서 벌벌 떨었던 과거풍경이 같이 덩달아 보이게 되는 거예요. 그야말로 제가 말하면서도 참 이상한 말이에요. 이거 물 위를 걷는 겁니다.
물위를 걷는 것보다 죄사함이 더 어려워요. 정말 종착점을 찍은 것이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고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오죽했으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우라고 해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더 큰 믿음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게 뭐냐? 네 죄사함받는 거예요. 네가 종착점을 찍는 거예요.
하나님과 종의 관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본래 이스라엘구조에 부합된, 그 개념에 합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그 신분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게 정말 귀한 겁니다. 찾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었어요. 그런데 가룟유다는 그걸 무서워했습니다. 사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외면하고 ‘나는 나 따로 살래’ 하고 그냥 죽었지요.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결국은 다 버림받습니다. 이사야 5장 4절에 보면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 말씀은 뭐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에 안찬다는 뜻이거든요. 자기가 설정한 개념, 너희는 거룩한 내 언약의 백성, 제사장백성이라는 말에 지금 그들이 부합되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이 말을 이스라엘보고 할 입장이 안되지요. 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했다면 그 책임도 하나님이 지셔야 되는데 이제 와서 하나님이 누구 탓을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황망하다고나 할까? 뭔가 배신당한 느낌이에요. 믿던 도끼에 왕창 발등을 찍힌 거예요.
그걸 가지고 버림받았다, 하는 거예요. 첫 번째 선택은 뭐? 네가 버림받기 위해서 선택된 겁니다. 우리가 버림받지 않으면 구원은 없어요. 우리가 주님에 의해서 버림받아야 돼요. 그래야 ‘선택2’가 남아 있습니다. ‘선택1’과 ‘선택2’에서 우리의 상태가 어떠냐? ‘선택1’은 하나님과 내가, 하나님도 나고 나도 나, 나와 나 사이에 좋은 관계처럼 느껴지는 것이 ‘선택1’이었어요.
그러나 ‘선택2’는 하나님만이 나가 되고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예레미야 46장 27부터 보면 그 버림받은자에서 두 번째 선택이 주어집니다.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제와서 또 두려워말라고 해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구약을 보면서 혼란스러운 이유가 하나님이 이랬다저랬다 해요.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 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라. 일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포로 잡혀가게 하고 약속의 땅에서 버림받게 합니다. 포로 되게 하고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히, 정온히 거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그 때부터 야곱은 뭐냐? 주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개인적인, 나를 위한 나는 존재하지 않아요. 예레미야 18장 6-7절에 보면, 이 상황, 버림받고 택하고, 택해놓고 버리고, 버려진 것을 또 택하고, 선택을 두 번 하시면서 그 취지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이야기합니다. 18장 6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토기장이기 때문에 토기장에게 토기라 하는 것은 깨어지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실을 진즉 이야기하지 않아요. 출애굽기 4장에서 이스라엘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없어요. 버림받고 난 뒤에 이런 이야기를 해요. 너희들이 버림받는 것도 주의 일이니까 그걸 믿느냐 하는 거예요.
땅에서 걷는 것이 인간인데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한 것은 네가 땅에서 걸으나 풀에서 걸으나 물위에서 걸으나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스케줄 안에 포함된 것을 네가 믿느냐? 네가 물불을 가릴 입장이 안된다는 거예요. 종이니까.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분이냐를 보여주는 기능, 아까 그 기도처럼 기능만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기능만 보여주게 된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가만 보니 수월하네.’ 하겠는데 이게 수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종의 버릇을 갖고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 8절을 다시 읽어보면요.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미 우리는 악의 종,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입장입니다.
종이 된 입장이기 때문에 우리가 종이라고 한다면,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죄의 종이라는 인식을 못해요. 악마의 종이라는 인식을 못합니다.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가 없고요,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우리는 악을 몰라요. 내가 아는 죄라 하는 것은 내가 아는 선의 맞은편에 있는, 내가 악을 저지를 수도 있고 선을 행할 수도 있다는 자율성을 갖고 있는 죄지 근원적으로 선악을 아는 그 자체가 죄라는 인식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가 없이 자유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그게 바로 죄의 종이에요. 따라서 죄의 종의 상태가 어떤 상태냐? ‘내 인생 내 맘대로 산다. 왜?’ 이게 죄의 종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런 인간이 성경을 백독 만독을 해도 ‘내가 예수님 섬기고 안섬기고는 내 맘대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하건 말건 내 맘대로 할게요. 헌금하고 봉사하고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게 바로 전혀 지금 성령 안받은 상태에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강남강의에서. 중세 때 음악이 발전을 한 것을 보세요. 교회음악부터 시작해서 고전음악, 낭만주의, 베토벤 거쳐서 현대음악, 쇤베르크까지 죽 보게 되면 중세의 교회음악 자체가 나름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음표나 성가대조직을 하고 작곡을 그렇게 했어요. 그게 뭡니까? 그게 죄의 종이에요.
환경 달라지면 사람 달라지잖아요. 그렇게 하다가 뉴턴 이후로 과학이 발달해서, 사람들이 돈맛을 들여서 피렌체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니까 슬슬 자본의 맛을 들여서 교회 말 안듣고 돈이 교회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던 거예요. 그게 근대주체사상이라 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이 좋아해야 교회에 사람이 모이니까 교회에 성가대 조직한 거예요. 루터가 찬송가도 작곡하고. 시편의 구절을 가사로 옮기면 그것이 찬송이 되는 줄로 알고요. 본인이 날마다 악의 종노릇 한다는 것은 생각 못하고 시와 찬미를 드리면 그것이 죄 아닌 줄로 알고 있어요. 어떤 분은 말하기를, 찬송가의 뒷부분의 것들은 부르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미국의 부흥운동당시에 불렀던 것들인데 대중가요의 가락에다 가사만 입혔기 때문에 안 좋다. 그러면 뭘 부르는가? 찬송가 앞부분의 찬송들은 고전주의 당시의 음악이기 때문에 괜찮다.
괜찮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헨델이 작곡한 <메시아>도 죄인데요. 크리스마스 때마다 불러대는 그것도 죄인데요. 내가 감동받는다는 것은 본인이 자기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우리는 감동받을 필요도 없어요. 감동과 감사가 다릅니다. 감사라 하는 것, 감사의 반대말은 불안한 거예요. 하루에 찬송 몇 곡 불러야 됩니까? 이렇게 묻는 이유가 불안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저주저, 자꾸 주저하게 돼요. 주저하지 말고 그냥 살면 되는데. 막국수 한 번 해 볼까요? 그냥 막 살면 되는 거예요. 막 살면 되는데 주저한다는 것은 아직도 챙길 자기가 있다는 거예요. 아직도 남한테 설득하고 싶고, 변호하고 싶고, 핑계대고 싶고, 뭔가 나름대로 ‘나는 얼마나 악하냐, 선하냐’를 계산하고 싶은 거예요. 그 자체가 바로 죄의 종이기 때문에 그걸 유지하는 겁니다.
인간은 ‘…… 이다’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인간은 ‘…… 이다.’가 아니라 ‘…… 되다.’ 에요. ‘토기를 가지고 악마의 저주의 그릇이 되다.’ 또 ‘같은 토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긍휼을 담는, 사랑을, 주님의 십자가를 담는 사랑의 그릇이 되다. 천국백성이 되다.’지 ‘…… 이다’는 없어요. 주님께서 버림받은 자를 택할 때에 그들이 뭐가 되느냐?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이사야 50장 6절에 보면, 종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기절할 모습이지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게 바로 주님의 자유함, 여호와의 원래 종의 모습이에요. 이사야 53장 3절에, 그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여호와의 종은 이미 종착점을 찍었잖아요. 하나님과 함께 있잖아요. 함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이사야 53장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왜 생각합니까? 생각할 권한도 가치도 없는 인간이 왜 생각해요? 생각하니까 그 생각이 나오는 것이 죄의 종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조치는 뭐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찔림으로 말미암아, “찔렸다. 너희는 허물이다. 허물 가져와. 너 잘난 것 말고, 헌금한 것 말고, 교회봉사 말고 허물 가져와. 왜? 허물 가져와야 찔림의 개념에 부합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계 5:6) 어린양이에요. 이미 천국에 있는 예수님을 표현할 때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 찔림을 당하신 어린양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천국 가느냐? 허물덩어리로서 오직 바라보는 것은 이 허물 때문에 채찍을 맞으신 그 분을 찾아가는 것. 딴 길이 없어요. 다른 희망도 없습니다. 그 분을 찾아가고 드디어 그분과 같은 관계에 놓여있는 사람.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호와의 종이라는 개념을 구성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여호와의 종을 이스라엘 속에 만들어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도대체 우리는 누굴 믿습니까? 나를 인간취급하지 않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사람취급하지 않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누가복음 17장 7절부터 나옵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대가를 너에게 지불하겠느냐? 너에게 줄 대가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피차 넉넉하게 자발적으로 복종만 할 수 있습니다. 왜? 사례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생한다고 보상주는 것 아니기 때문에. 이미 끝점을 찍었잖아요. 허물을 가지고, 우리의 죄악을 가지고 끝점을 찍었잖아요.
나를 위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잖아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기능자로 이 땅에 선택받았고, ‘선택1’, 그 다음에 버림받고 다시 선택된 ‘선택2’, ‘선택1’(버림받고), ‘선택2’, 그 모든 절차를 지금 남아 있는 우리 육신에다 마저 다 채우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했어요.
내게 채운다. ‘선택1’에서 ‘선택2’로 가는 그 절차를 다 채우는 거예요. 그래도 사도바울은 모든 일에 넉넉하고 감사할 뿐이었어요. ‘내가 너희를 위해서 고생하는 이것이 나의 상이다.’ 내게서 비춰나오는 것, 내게서 발산되는 것이 나의 상이다. 내 안에 이분 들었다. 내 안에 십자가 들었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고백이 왜 우리한테는 안됩니까? 그것은 빌립보서 3장에 보면 해답이 나와 있어요. 빌립보서 3장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 말은 배설물들이 육신과 포함된, 옛날에 악마의 인질이 되었던 그 배설물들이 십자가를 꽉 질식하도록 덮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하는가? 그걸 하나하나 다 떼 냅니다. 그래야 십자가가 보일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십자가만 자랑하거든요. 어제 식당에서 누구한테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마지막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교회에서 봉사를 다 같이 해야 될 것인데 자기만 봉사하고 남은 봉사를 안해요. 교회 가면 짜증이 나. 식사하는데 음식을 같이 만들든지, 혹은 밖에서 먹을 때는 돈을 내야 되는데 음식값도 자기가 안내지, 무슨 그런 배짱이 있어요? 그래서 낸 사람이 왕짜증을 내서 범사에 감사는 개코도 무슨 감사, 이제 복종하기도 싫어.
이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그 작대기를 밑에서 긁어낼 때에 도대체 내가 했다는 것, 나는 하는데 저 사람은 안한다는 그 비교의식,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장 고귀한 십자가 드러내기 위해서 긁어내야 될 배설물인 거예요. ‘너는 오줌 색깔이 나보다 더 짙다.’ 이런 비교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침부터 더러운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네 똥은 냄새가 더 더럽게 난다.’ 이럴 필요가 없어요. 다 똥이기 때문에. 다 같은 입장에서 버려져야 되고 없어져야 될 버러지 같은 존재인데 버러지하고 버러지끼리 대장질할 필요 없다는 말이지요. 비교할 필요도 없잖아요. 모든 정신병은 비교에서 오는 거거든요. 우울증도 비교에서 오는 거예요. 잘났는데 잘났다는 이야기를 누가 안해줘요. 그래서 짜증나는 겁니다.
여러분, 물위를 걷는 마음으로, 그리고 불 속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땅위를 걸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았습니다. 참 엄청 속았습니다. ‘나는 이런데 너는 어떻다.’ 악마의 마음이 서슴없이 튀어나왔습니다. 주여, 이 속임수가 참 힘듭니다. 하지만 이미 성령께서 하나 둘 그 배설물을 벗겨줄 때 우리 눈앞에 광채 비취면서 나타나는 그 십자가, 그 십자가 앞에서 늘 주님만으로 족하다는 진실된 고백이 한번이라도 터져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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