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묵시의그릇2(이근호)110616

아빠와 함께 2013. 5. 14. 07:37

가락교회110616요한계시록12장-(묵시의 그릇)-17강b-(이 근호 목사)

제 17강b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여기서 세상을 보는데 그것이 빙글빙글 돈다면, 내가 여기 있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뭐가 움직여요? 달과 해와 별이 움직이죠. 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주어’라 하고 움직이는 것을 ‘술어’라 하는데 나는 항상 어디서나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오셔서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너가 움직인다고 이야기 해버려요. 그러니 우리는 멀미나죠. 내가 종잡을 수 없죠. 내 해석도 아무리 해석을 잘 해봐야 주님 앞에서는 ‘놀고 있네.’ 이러신다 말이죠. 같은 움직임 속에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로 차원이 낮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예요.

개미가 있는데 큰 개미가 작은 개미한테 명령을 내리는 거예요. ‘야, 해.’ 그런데 이걸 누가 보느냐 하면 인간이 보면서 ‘아이쿠, 놀고 있네.’ 한다 말이죠. 같이 이걸 들어서 엎어버린다 말이죠. 자기(큰 개미)는 움직이지 않고 이것(작은 개미)만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걸 엎어버리니까 둘 다 움직이죠. 자기가 움직인다는 것을 큰 개미는 모르는 거예요.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세상은 말씀으로 만들어졌죠? 말씀 안에 누가 포함돼 있습니까? 인간도 포함돼 있는데 감히 인간이 뭐를 해석한다? 말씀을 해석한다 하니까 모든 해석이 다 어지러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적인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누구만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절대적인 움직이지 않는 그 분이 말씀의 해석자요. 완성 자가 되고 나머지는 예수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살해할 수밖에 없는 악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 세상은 뭐다? 빛이 아니고 처음부터 전체적으로 어두움이죠. 국회의원, 교수, 전부 다 목사나 집사나 다 어두움 이예요. 이 어두움을 어두움이라고 파악한 사람은 빛이 온 사람에게만 바로 어두움, 누가 말해도 어두움이라는 걸 아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 그래서 어두움이라고 아는 이것은 하나님께로 난 자만 이 세상이 예수님과 똑같이 어두움이고 예수님만이 빛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일단 자기를 빛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자기 맘에 안 들면 어두움으로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출발점이 문제가 되는데 여기서 말씀에서 하나님도 나오고 인간도 나온다. 그런데 말씀에서 나온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이걸 묵시로 본다는 근거는 바로 자연물을 가지고 역사를 통제하니까 자연물 속에 있는 뱀이나 여자, 아들, 이런 용어를 끄집어내어서 도리어 역사 전체를 담아버리죠. 여기 묵시가 있죠. 묵시는 그릇이다. 여기에 역사를 담으면 묻습니다. 역사는 흐릅니까? 흐르지 않습니까? 흐르지 않죠. 어떻게 해도 어디에 들어가 있다? 묵시 그릇에 담기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시간적 의미가 흘러가는 시간적 의미가 아니고 뭔가 사건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을 숫자로 표기하기 위해서 나타난 시간 숫자예요. 666도 그렇고 144,000도 그렇고 한때 두 때 반 때도 그렇고 이것은 이 세상은 현재 가마솥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밑에서는  불을 때죠. 부글부글 끓죠. 끓어버리면 그동안 안보이던 불순물들이 같이 섞여서 올라오는데 그게 뭐냐, 실은 이 세상은 점잖은 인간들 세상이 아니라 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악마가 설치고 이단들이 설치고 그리고 어린양이라고 위장은 했지만 보니까 적그리스도들이 어린양으로 위장해서 양의 탈을 쓴 사단의 일꾼들이 설친다는 것을 밑에서 가마솥에 불을 때니까 이것들이 가만있지 못하고 벌벌 끓는 거예요. 그 가마솥이라는 그 환경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은 자연세계를 가지고 사용합니다.

하늘의 별 3분의 1이 떨어지고 바다가 쑥이 되고 이 모든 것은 진짜 태평양에 떨어져서 3분의 일이 날라 가는 게 아니라 이 자연물 전체가 뭔가 새로운 해석, 요한계시록에 입각해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해석해야 된다는 겁니다. 묵시 말씀에 입각해서 다시 한 번 역사를 해석해 버리면 이 세상 우리 눈에 자연세계가 요한계시록의 구체화로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이 우리 안에서 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온 몸으로 절절하게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겁니다. 아주 신나죠.

요한계시록을 느껴 버리면 요한계시록 3장, 4장, 5장에 나오는 그 대자연의 붕괴도 느끼지만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나오는 천국의 삶도 우리가 미리 맛보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에 바벨론이 나오잖아요. 그 바벨론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이 세상이 곧 바벨론이라고 이미 일방적인 해석을 지신만만하게 내릴 수가 있는 겁니다. ‘자, 세상은 바벨론이다.’ ‘어째서 바벨론이냐?’ 새삼스럽게 그걸 찾아내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이 세상이 왜 바벨론이냐고 따지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이건 말씀에 의해서 바벨론이야,‘ 왜? 묵시의 그릇에 담겼으니까. 묵시라는 그릇이 이 세상을 뭐로 본다? 바벨론으로 보더란 말이죠. 이미 봤기 때문에 우리가 그다음부터는 바벨론을 확인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감사원에서 토지공사를 감사한다 할 때, ’여기는 감사해보고 비리가 나오면 너희들 징계한다.‘ 이게 아니라 ’처음부터 토지공사는 썩었어.’ 하고 감사해보세요. 감사 굉장히 쉽습니다. 하나, 하나 쉽게 다 밝혀지죠. 봐주는 것 없이 처음부터 결론이 났잖아요.

예수님이 이 땅에 메시야로 왔지만 이 세상은 합세해서 주님을 죽여 버렸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이 세상을 보는 해석은 아주 간편한 해석이고 그 해석을 우리 성도가 받아야 마땅하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죽였던 세상은 그 어떤 세상이든 심판의 이유가 담겨있는 세상이다. 그걸 묵시적으로 풀어보자.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흐르고 흘러서 발전의 기미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요한계시록대로 멸망의 또 하나의 징조의 징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 벌써 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천국에 가서 내려다보는 식으로 해석이 되기 때문에 해석이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밑에서 찾아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귀납적 방법으로 밑에서 증거 찾아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이미 결론이 난 입장에서 거기에 맞춰서 해석해 나가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방금 시간이 없다 했어요. 이것은 지금 강의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묵시에서는 시간 자체가 없어진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없어지는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어렵지만 쉽게 설명하면 이해되실 겁니다.

인간은 지금 여기를 현재라고 봅니다. 현재가 고정되고 난 뒤부터는 지난 것을 과거가 되고 점선으로 해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미래로 간주합니다.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관이었죠. 그런데 인간자체가 묵시에 휘둘린다고 봅시다. 그러면 시간이 없는 것은 묵시가 맞는데 시간이 있는 것은 아까 말씀한 대로 우리 안에는 역사가 있고 시간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묵시 안에서 나만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도 시간이 있고 이 사람도 시간이 있다 말이죠. 그러면 이 보는 시간이 묵시의 역할에 따라서 다 다르게 돼 있어요. 아! 어렵다, 어렵다. 정말.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사랑할 때는 커피숍에 앉아 두 연인은 ‘자기 시간가는 줄 모르겠어.’ 그러고 있고, 이 안에 팔십 노인은 심심해가지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고 있고, 같은 장소에 있어도 시간이 다 다르죠. 역할이 다 다르니까. 여기서 현재, 과거, 미래가 돼 있는 이것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이 사람이 현재일 때 다른 사람은 과거가 되고 또 다른 사람은 미래가 되는 거예요. 이걸 각자, 각자의 시간이 뭉쳐서 전체가 하나의 시간관을 드러내게 돼 있어요. 일체 인간의 이것은 드러나지 않고, 그러면 하나의 시간관이 뭐냐 하면 이 전체를 미래고 보고 과거로 보고 현재로 보고 이걸 묶어버립니다.

그럼 이걸 끄집어 내봅시다. 여기 A라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이 과거에 행동을 했으면 묵시안의 그릇 속에서는 과거에 자기가 한 행동이지만 주님 보시기는 미래에 어떤 사람에게 일어날 행동을 미리 과거에 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 사람한테는 미래의 행동이 어떤 사람한테는 과거가 되는 거예요. 반대로 어떤 사람한테는 자가가 미래에 일어날 행동을 어떤 사람은 과거에 이미 한 게 되죠.

바로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보기는 나만의 과거, 현재, 미래가 구축돼 있지만, 이게 묵시세계에서는 이건 인정해 준다? 인정해 주지 않는다?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그렇게 본다면 요한계시록에 둘째 나팔을 불 때의 일이 내년에 일어나도 묵시 안에서는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다? 가능한 거예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우리는 과거 이야기죠. 그런데 15년 후에 스데반 집사와 똑같은 일이 중국에서 일어날 수 있다? 없다?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목사님, 요한계시록이 우리가 알기에는 이미 지나간 것은 지나가고 두 번 다시 안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남아 있는 그런 일만 있어 그것만 소망한다고 믿었는데 그럼 그게 아닙니까? 그게 아니에요. 묵시 안에서는 과거, 미래, 현재가 섞여 있어서 어떤 구역에는 이미 터진 일이 아마 과거가 돼 버리고 어떤 곳은 과거가 안 되고 현재가 되고 어느 곳에는 미래가 되고 이게 뒤섞여 있는 거예요.

이걸 모르고 요한계시록 주석하는 학자들은 666을 로마라 하고 로마 네로황제라 해요. 로마 네로황제, 666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간 계산에서 지나갔고 나머지는 7년 대 환란만 남았다고 하는 겁니다.ㅎ 7년 대 환란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7년 대 환란입니다.

묵시 세계에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도 이미 과거의 한 세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홍해 사건이 또 일어나요. 유리바다 건너는 홍해사건이. 이제 요한계시록에 시간관이 없는 이유를 아시겠죠? 이게 한 그릇에 담겼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과거가 어떤 사람에게는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된다 말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같은 묵시 속에 있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다 같이 계속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이걸 받아들이면 우리는 시간 속으로 남아있다는 소리를 안 하고 그냥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랑을 맞이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해석이 됩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푹 자면서, ‘주께서 언제와도 괜찮습니다.’ 왜? ‘약속대로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늘 기름 준비하면서. 그런데 어리석은 처녀는 ‘아직 안 왔어. 오면 기름 준비하지,’ 이렇게 되죠. 결국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무슨 시간을 믿습니까? 묵시적 시간의 의미를 모르고 자기의 느끼는 시간을 쥐면서 그 시간 스케줄에 주께서 어느 시점에 올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이 장림처럼 1998년 10월 18일에 온다고, 안 오니까 계산 잘못 했다고 집어 치우고, 얼마 전에 미국 어느 이단도 그렇게 돼 있죠.

다시 정리하면 묵시세계에서 인간의 시간관을 이용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인간의 시간관을 무시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시간관을 충분히 이용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 어떤 사람은 과거, 어떤 사람은 현재를 생각할 거예요. 충분히 생각하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시간관에 합당한 사건을 일으켜 버려요. 어떤 사람한테는 이미 예수님이 심판을 받은 사람이 돼 버리고 어떤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돼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 이 사람에게도 아직 묵시에 남아있는 사건이 터진다? 안 터진다? 터질 수가 있는 겁니다.

아,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해 안 된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지금 요한계시록 12장을 한번 봅시다. 23장 1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으니까 그들이 생각하는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의 재림은 곧 오신다? 안 오신다? 곧 오죠. 그러나 오늘날 이것을 보면 먼 과거의 일이 되겠죠. 당시 그 사람들한테는 곧 예수님 재림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 했죠? ‘주께서 곧 오십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오십니다.’ 라고 말했다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죽은 지 몇 년 됐어요? 거의 이천 년이나 가까이 됐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아직 안 왔잖아요.

그러니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이야기 했죠? 그 말  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천년이 하루 같다’ 하니까, 이천 년이니까 이틀 됐다고 해요. 그렇게 이틀 됐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번역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이 생각하는, 여기 순교하는 그 사람들의 마지막은 뭡니까? 지가 죽은 그 순간이 자기 시간관에 의하면 그게 자기 마지막이고 또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마지막 때 환란이 심하니까 내가 죽는 동시에 내가 죽고 나서 얼마 후에 주께서 재림 한다 생각하잖아요.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닌데 그게 우리가 보기에는 그게 묵시 안에서 사건의 전부는 이다? 아니다? 아닌 거예요. 바로 고러한 경험이 우리 과거에 둠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우리의 현재로 똑같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생각했던 마지막 종말이 틀렸습니까? 맞았습니까? 틀린 게 아니에요. 그들은 그들 시간 나름대로의 주께서 곧 오시고, 우리는 우리 시간대로의 주께서 내일 올지 몰라요. 곧 오시고, 이것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겁니다. 뭐냐,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주의 약속은 누가 이야기 하듯이 더디 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룬다.’(벧후 3:9)는 것을 그 시간대에 그 시대별 모든 성도에게는 동일하게 똑같이 적용하는 거예요.

그걸 전체로 모아버리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의미 없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아이, 어려워라, 참 어렵죠?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인간들이 나름대로 수평적인 시간관을 유지하고 있고 거기서 나오는 게 언어기 때문에 그래요. 단어고. 인간이 갖고 있는 사적인 시간관의 단어,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걸 한 가마솥에다가 집어넣어놓고 ‘그래, 니 말이 틀린 게 아니야, 주께서 오시는 거 맞아.’ 하지만 제 3자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죽고 난 후에 천년이 지나도 안 왔어요. ‘에~에, 구라, 구라, 구라,’ㅎ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거는 그쪽 시간 따로 있고 나는 주께서 나를 다루시는 시간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 시간, 그 역사와 역사가 하나로 뭉쳐버리면 뭐가 된다? 묵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묵시에서는 개인적인 시간관은 의미가 있다? 없다? 없는데 주께서는 우리가 개인적인 시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의미 있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마지막 때다‘ 만날 마지막 때라는 거예요. 만날, 벌써 마지막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만날 마지막 때라. 그래서 자기 시간대를 유지하는 사람은 ’에이, 어디서? 안 온다, 안 온다.‘ 하고 드러누워 자버릴 때 오시잖아요.ㅎ

이것을 기존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해석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석을 해요. 원거리, 근거리로 해석을 합니다. 예루살렘 멸망은 이스라엘의 성전이 깨어지는 것은 근거리, 가까운 거리의 종말이고 원거리, 멀리 있는 종말은 이렇게 돼요. 그 말이 맞는지, 거짓말 이예요. 잘못된 거예요. 산을 보게 되면 앞에서 보게 되면 산 있고 산 있고 점점 뒤쪽 산은 짙어지죠. 앞의 산은 옅어지고. 그래서 원근감이 생기면서 짙은 색의 산은 멀리 있는 산이고, 이 산과 이 산 거리는 2키로 미터인데 이쪽에서 보면 딱 붙어있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그래서 요 고개 너머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마지막 최후의 멸망이 저 끝에 있는 산이라면 현재 예루살렘 성전은 요걸(제일 앞산)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해요.

이 설명이 잘못된 이유가 뭐냐 하면, 그럼 예수살렘 성전이 끝나버리면 어쨌든 간에 멀리 남아있든지 간에 이 사건은 이미 과거가 돼 버렸죠. 그럼 예루살렘 성전이 깨졌다는 것은 성경에서 신경 써도 됩니까? 안 됩니까? 신경 쓸 필요가 없죠. 과거 이야기니까. 그때는 안식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런 이야기 우리한테 소용없죠. 그럼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말씀 속에서 십자가를 끄집어 낼 필요가 없죠. 아, 이건 과거 이야기니까 십자가가 필요 없고, 치워버린다 말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그렇지 않죠. 분명히 지나간 과거를 다 끄집어 동원해서 전부 다 그 사건들이 지금의 사건, 또 미래의 사건, 과거의 사건이 미래의 사건이 되면 우리가 미래라고 했던 것이 이미 과거에 버려졌을까요? 안 버려졌을까요? 버려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신학자들이 미래에 남아있다고 한 사건이 이미 우리 과거에 일어나버린 겁니다. 그거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합리적으로. 그들은 돌아버립니다. 그들의 요한계시록 해석은 거짓말 한 거예요. 왜 거짓말 했느냐 하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시간관이 있잖아요. 과거, 현재, 미래를 가지고 거기에 맞춰서 요한계시록에 필요한 것을 마작 하는 것처럼 딱딱 집어넣어서 종말 프로그램 스케줄이 짜있으면 그것대로 하면 구원 받는다고 그렇게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어서 그 짓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바로 개미가 자기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기는 개미가 인간이 개미집마저 흔들어버리면 같이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는 말씀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말씀 속에 있는 우리 인간들은 마구잡이로 계속해서 흔들림을 당해야 그게 말씀에 안 움직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풀이나 꽃처럼 사라져줘야 그게 확실히 말씀이 말씀다운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도구가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주여, 작년에 하나님 복음 때문에 많이 애 썼습니다. 골치 아팠습니다. 아휴, 이제 지나갔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요거 무슨 스케줄입니까? 과거에 환란 있었으니까 ‘올해는 평안이 올 것이다.’라고 생각하죠. 주님께서는 ‘아직 안 왔는데?ㅎ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니가 왜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더 심한 게 옵니까?‘ ’작년에 일어났던 것은 평안에 해당 돼.‘ 그러니까 우리가 갖고 있던 시간관을 주께서 다 생각해 놓고 그걸 용납하지 않고 그걸 뒤집는 식으로 우리 중심이 아니고 구원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신실한 분, 내가 신실하게 믿는 내 중심의 신실함이 아니라 우리는 만날 부실하고(신실의 반대)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신실하심이 항상 예수 안에서 ’예‘가 되고 ’아니오‘가 없음을 늘 깨닫게 하는 식으로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그 사건들을 묵시적으로 종합한 것이 요한계시록 이예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내용은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때까지 전부 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 1260일이라는 이 기간이 주석에 보면 예수님 죽으시고 재림할 때까지라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다를 포함하는 겁니다. 괜히 인간의 시간 론과 연결 지을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1260일이라는 것은 결국 뭐하는 시간입니까?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예수님)에 속한 사람들과 뱀의 후손과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 이 전쟁을 이야기할 때 전쟁의 이유와 어떻게 진척되었으며 어떻게 결말이 나느냐, 거기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2장에서 계속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여기 무대가 있는데 관객이 앉아있고 위에 무대 막이 있는데 지금 배우가 무대 앞에 나오기 전에 뒤쪽에 있는 배우는 뭐로 보이겠습니까? 그림자로 보이겠죠. 무대 뒤에 보이는 그림자로 우리가 바라보면서 위에 전개되는 일에 우리는 움직입니까? 안 움직입니까? 안 움직이죠. 이게 바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근본적인 오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무대 커튼을 벗겨 버려요. 벗겨버리면 뒤의 그림자가 무대 뒤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관객은 가만히 있고 무대만 움직이는데, 이미 우리 자신이 무대 전체가 전쟁터로 돌변돼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유라는 것, 우리의 권리라 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체 없고 우리는 전쟁 통에 말려든 그런 입장에 돌입이 되죠.

모든 움직임이 말씀대로 움직인다. 앞에 붙이면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세상은 움직인다. 더 구체적으로 하면 요한계시록 12장의 말씀대로 이 세상은 전개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말씀대로 될 것 같으면 우리는 이 세상 살기에 마음이 편합니까? 편하지 않습니까? 되게 편하죠. 그동안 우리는 행동을 해도 ‘왜 나에게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주어졌는지, 내 몸이 왜 아픈지, 우리는 이유를 몰랐잖아요. 아무 원인도 없이 이유도 모르고 우리는 그냥 당하기만 하는 거지, 우리는 지쳐버렸어요. 또 내일 되면 주식 값이 오를지, 땅값이 오를지, 내일 되면 장사가 덜 될지, 알지 못했잖아요.

그 이유가 그 답답한 이유는 우리는 뭐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우리 자신이. ‘누가 감히 나를 움직여? 나는 내가 움직여도 내가 알아서 움직일 거야.’ 우리는 나는 고정돼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걸 뭐로 만든다? 이걸 자리로 만들어요. 무슨 자리? 전쟁터, 우리가 이건 우리 인간만의 세계고 이것은 따뜻한 내 가정이고 이것은 조용한 내 회사고, 이처럼 모든 자리가 움직이지 않는 내가 움직이지 않듯이 고정된 내 자리라고 우기는 이 자리를 허락도 없이 주께서 뭐로 사용합니까? 영적 전쟁을 벌이는 전쟁터로,  임대차 계약도 없어요. 그냥 사용해 버리는 거예요.ㅎ

그러면 우리 회사에 우리 가정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결국은 영적 전쟁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스파크의 결실들이 소복이 쌓여 있습니다. TV나 냉장고 가스레인지, 김치냉장고, 전부 다 그냥 이유 없이 된 것이 아니고 영적 전쟁을 하면서 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시험 문제를 낸다면 김치 냉장고가 그 자리에 있는 이유는 뭡니까? 목사 시험에, 여러분 집에 김치 냉장고가 있는 이유는? 그걸 영적으로 쓰면? 야~! 문제 어렵다. 정말 문제 어려워요. 제가 하나 예를 들게요. 오늘 아침에 SBS뉴스에 이게 나왔어요. 다단계 판매해서 사무직 뽑아놓고는 막상 찾아오면 보증금 2500만원을 받고 영업직원을 시키는 사기로 십 몇 억이나 챙긴 사람을 체포했습니다. 방금 뉴스가 끝나고 그 뒤에 이어서 ‘이번에 서울시에서는 반딧불을 양성해서 서울시를 반딧불로 아름답게 합니다.’라고 했다 말이죠.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좋은 일이고 어느 것이 나쁜 일입니까? 바로 다단계 사기 치는 것은 나쁜 일이고 반딧불로 좋게 하는 것은 좋은 일로 보는 거예요. 그럼 SBS 같은 세상은 나쁜 일도 있지만 좋은 일도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SBS가 보는 오늘날 세계예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인식, 반딧불을 양성하는 좋은 일만 해버리면 좋은 나라로 발전할 것이고 사기꾼이 많아지면 나쁜 나라가 된다는 거죠.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지평이죠.

역사적 지평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나라, 우리나라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영원토록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영원토록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애초부터 움직여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집에 김치 냉장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역사적 이유에서 보는 해석과 그것이 잘못이라고 보는 영적 해석, 두 가지 해석이 나와 줘야 ‘딩동댕’ 정답이 되는 거예요. 우선 역사적 해석, 김치 냉장고 있음으로써 오랫동안 시원한 김치를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면 이 움직이지 않는 나를 더욱 더 행복하게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게 만드는 그래서 좋은 김치 냉장고라서 그런 의미에서 돈을 들여서 김치 냉장고를 들여왔다. 이게 역사적 해석이었습니다.

묵시적 해석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바로 악마의 생각이다.ㅎ 그게 바로 마귀의 생각이었다. 왜? 누가 존재해야 되요? 요한계시록이 살아있어야 될 때에 누가 살아있어요? 김치 맛있게 먹은 내가 살아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럼 나는 출발점이 나에서 나와서 도로 어디로 갑니까? 나에게 귀향하는 그러한 악마의 편에 속한 그 오는 과정에서 어떤 것도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사실이 삽입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떤 목사가 교인을 신방한다. 왜 신방하느냐, 그 교인을 신방해서 잘 관리하면 그 사람이 나중에 내 교인이 된다. ‘딩동댕.’ 이게 뭡니까? 이건 남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남아야 되는 자기의 지평 안에서 해석하는 거죠. 묵시적 해석을 하면 간단하죠. 그게 바로 죄였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죽게 만든 죄였습니다.

그럼 묵시적 해석에서는 어떤 해석을 하면 되요? 누구는 움직이지 않는다? 예수님만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돼 있죠. 그럼 요한계시록 12장의 전쟁에서 이미 전쟁의 의미는 돼 있죠? 아들과 여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또는 패배하지 않는다. 또는 마지막에 승리한다.  이미 결론이 나 버렸죠? 오늘 강의 끝나버렸어요. 왜, 이미 요한계시록 12장 말씀에 의하면 그 말씀 현실을 보면 누가 결국 승리하게 돼 있어요? 우리는 나이가 백 살이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는 여든 살까지도 안 살아봤어요. 안 살아봤지만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현재 속에 과거도 포함돼 있고 미래도 다 포함되고 다 포함돼 있죠? 공존, 혼재. 하이브리드, 하이브리드 뜻이 뭐냐, 공존, 혼재돼 있죠. 우리는 나는 과거는 아는데 뭐는 모른다? 미래는 모른다. 이것밖에 모르죠. 그러면 안 돼요. 미래 사건이 이미 우리 속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잖아요.

왜 우리 안에 과거, 현재, 미래를 쑤셔 넣느냐 하면 결국은 새로운 과거, 현재 미래에 위반되는 완전한 해답은 뭐냐, 아들과 그 여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 정답이 보잘 것 없는 우리 안에 삽입시키는 거예요. 삽입시키면 결국은 김치 냉장고가 집에 있는 이유는 뭐냐, 그것은 우리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샀는데 성령이 오고 보니까 이 김치 냉장고는 내가 얼마나 내 힘으로는 악마를 이길 수 없고 뱀을 이길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저 우리는 김치 맛있는 거만 정신 빠져서 또 딴 거 살 거 없나 정신 팔려서 예수, 십자가는 다 잊어버리고 나 영원토록 동해물과 백두산이 나와 내 가족만 번창하도록 평소에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내뱉어지는 모든 행동들이 이것은 패배당해야 마땅한 내 바탕에, 세상에 그러한 우리 바탕에 우리를 대신해서 아들이 죽으심으로써 이걸 집어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여자의 남은 자 되게 하신 이 은혜를 김치 냉장고 바라볼 때마다 찬미하는 그것이 영적으로 승리한 가정입니다. 그러니 김치 꺼내면 맛있게 잡수시기 바랍니다.ㅎㅎ

어차피 그거 안 먹어도 죄고 먹어도 그거 상관없이 구원은 이미 요한계시록 12장에 우리는 구원 받기로 됐기 때문에, 왜? 구원 됐기 때문에, 구원자기 때문에 승리자인 사실을 주께서 김치 냉장고와 더불어 알려 줬잖아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2장만 성경책이 아니고 우리 가정이 그 순간 뭐가 됩니까? 요한계시록 12장의 덩어리인 채 가정의 아파트가 되는 겁니다. 저기는 빌라. 살아있는 우리가 말씀의 구체화 현실화가 우리가 되는 겁니다. 문제 어렵죠? 문제 다시 한 번 해 볼까요? 집에 있는 김치 냉장고를 영적으로 해석하라. 묵시적으로 해석하라.

그렇다면 여기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나오는 “여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이끼지 아니하였도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자기가 살고자 하는 그것이 마귀가 한 짓이기 때문에 주께서 승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죽이겠다는데 그냥 죽죠.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승리자가 돼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 사흘 만에 살아 부활한 증거로 인하여 이미 살았기 때문에 나의 죽음은 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나의 죽음을 통하여 주님이 드러난다면, 주께서 그렇게 쓰시겠다는 데 누가 그걸 거부해요. 구차히 살고자 할 이유가 없죠. 내 임무가 그 순간 죽는 역할이라면, 죽는 역할은 죽어야 그게 영화가 되기 때문에, 드라마가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 믿고 잘 죽었다고 해서 그걸 대단한 걸로 여기지 마라.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이걸 흉내 내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밥 많이 먹고 죽읍시다. 그것도 순교예요. 이미 예수님이 승리한 걸 믿으면 밥을 먹고 사우나에 가든지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볶든지 말든지 그게 순교하니까요. 참 쉽다 그렇죠?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12장 말씀이 성령이 와서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좁은 우리 안에 요한계시록 12장이 다 담깁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는 뭐가 펼쳐지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2장의 내용이 다 펼쳐져요. 우리는 만날 ‘경험하지 말자. 경험하지 말자.’하는데 우리는 경험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경험케 하실 겁니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강의한 핵심이 이겁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가 행하지 않더라도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게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겁니다. 이웃을 사랑하게 하실 겁니다. 간음하지 않게 하실 겁니다. 술 취하지 않고 성령에 취하게 하실 겁니다. 그걸 사람들은 뭐라 하느냐, 해야 된다는 거예요.ㅎ 그 차이예요. 그 차이!!!!

우리는 묵시의 그릇에 들어가는 종이에 불과해요. 그런데 누가 빡빡 버티느냐, 내가 버텨요. ‘주여, 좀 있다가 죽겠습니다. 요것만 봐 주세요.’ 주께서 싱긋이 웃죠. ‘니가 전에는 행동 잘했는지 아는가봐. 니는 행동 잘 한 적이 없어.’ 왜, 악마와 싸웠기 때문에. 악마와 싸운다는 것은, 악마 편이 아닌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이 땅에 오셔서 부활하신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악마와 싸운 겁니다. 예수님을 배태한 여자는 뭡니까? 예수님 때문에 생겨버린 교회, 여자죠.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생겼다고 믿는 단체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교회가 있는데 뭘 교회를 만들어요? 뭐 예배당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고 간판을 세운다 해도 교회를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만들어요.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만들 수가 없는 교회를 유지할 수도 없는 교회를 유지 하겠다 만들겠다는 자체가 가짜 교회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12장 7절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여기 미가엘이라는 천사가 누구의 지시를 받고 합니까?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하죠. 그럼 지시자가 누굽니까? 놀랍게도 땅에 있는 아들로 되어 있죠. 그러니까 이게 이상하죠. 하늘에 전쟁이 있는데 미가엘과 전쟁하는 전쟁 통에서 ‘누가 뱀을 이기고 누가 뱀을 추방시켜 놨지?’라는 정체가 땅에 있는 교회 안에서 누군가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아요. 그런데 하늘에서 주인공이 어디서 나타납니까? 하늘에서 뱀이 하늘에 있다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써 지상에서 기이한 현상을 여기서는 이적이라 했죠. 이상한 이적이 있으니, 그 이적이 뭡니까? 여자가 아들을 배태해서 낳더라는 일이죠.

예수님이 갓난아이로 태어나는 게 왜 이적이죠? 오히려 갓난아이가 태어난 걸 이적으로 보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아들의 출현을 단지 예수라는 사람의 아들이 태어난 출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아기 출현과 동시에 현재 지상에 있는 모든 체제자체가 모조리 무너지고 붕괴한다는 겁니다. 예수라는 아기 하나가 태어났는데 온 우주의 영과 기가 다 동원시켜서 그 아들의 출현을 출생을 저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에 나오잖아요. 헤롯왕이..., 그게 참 신기한 거예요. 거기에 다 말려든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세상의 모든 만물이 예수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고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그런 거예요. 아들이 뭐길래, 결국은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에, 진짜 하늘에서 영적 전쟁이 있었고 뱀이 쫓겨났다는 그 증거는 하늘에서 찾는 게 아니고 어디서 삐져나온다? 지상의 약하디 약한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주 연약한 아기 하나 출생이 사실은 양파처럼 뜯어보면 그 안에 하늘의 영적 전쟁의 내용이 다 포함돼 있는 겁니다.

그걸 설명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12장5절에는 이렇게 돼 있죠.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이래 돼 있죠? 이게 시편 2편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맞죠? 그렇다면 아기 예수 태어나는데 시편 2편까지 동원되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가 누구 하나, 우리나라 나라 호 발사할 때 온 국민의 시선이 나라 호에 쏠리듯이, 아기 예수 하나 태어나서 솟아올라오는데 온 성경이고 온 우주가 다 집약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어디에 말려들었습니까? 그 집약하는 그 사건에 우리 성도가 말려든 거예요. 성도의 존재 이유, 살아가는 이유는 이미 판가름 나버린 겁니다. 뭡니까? 아들을 낳은 여자라는 자리가 누구자리다? 우리의 자리기 때문에 그 여자라는 자리에 주어지는 구원의 승리, 구원의 최종 확정이 바로 누구 자리다? 이제는 우리가 소속돼 있는 우리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중요합니까? ‘아버지 자리’가 중요합니까? 아버지 자리가 중요하죠. 우리가 전에는 무슨 자리였습니까? 육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육의 자리였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천국 갈지, 지옥 갈지, 내가 결정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고 난 뒤에 육의 자리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영의 자리로 바뀌었죠. 바뀌니까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결정은 이미 우리 주님께서 결정을 다  했다고 믿어지는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자리기 때문에 주님의 자리가 승리한 것이 곧 누구 승리다? 우리 승리가 다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유산을 받은 사람이고 주님의 기업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이뤄놓고는 기업을 우리가 누리는 겁니다. 주님이 만든 천국을 우리가 누리는 거예요. 이것은 이 자리를 요한계시록 20장 마지막에 보면 이 자리가 뭐냐 하면 ‘생명책’이라 돼 있고 여기에 중요한 건 그리스도의 인, 그리스도로부터 도장을 이마에 받은 사람만 여기에 하늘나라에 입성이 됩니다. 이마에 도장 맞은 사람!!

그러니까 이 자리가 우리 행함으로 얻은 자리입니까? 아니죠. 이 자리는 처음부터 창세전에,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리거든요. 그 자리가 이제 사 우리가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겁니다.ㅎ 창세의 자리를 물려받은 거예요. 지금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여기 우리 있는 자리가 1평이라 합시다. 33밀리미터, 33밀리미터, 맞습니까? 이 자리를 연장해 보니까 창세전까지 이어졌어요. 결국 이 자리가 천국이나 다름없어요. 우리는 1평짜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 안에 있는 거예요. 이미 예수 안에 십자가 안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겁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천국 안에 있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이제 주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자리를 누가 마련했어요? 내가 행함으로 마련했어요? 이 자리를 내 행함으로 마련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냥 주신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나온 행함이 뭐냐, 절대로 이 자리는 내가 한 게 아닙니다.‘라는 자기 행함을 부정한 자리죠. 그게 교회 아닙니까? 무슨 교회서 행함을 이야기해요? 그 이야기 왜 합니까? 뭐 새로 자리 마련하겠다고? 아예 돗자리를 짜지. 짤 것도 없어요.

오늘 강의를 정리해 봅시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했어요. 내가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사랑하려고 왔는데 나는 내 맘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죠. 내 맘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면, 주님은 오실 때 절대로 흠모할 모양도 없고 사랑할 만하게 오지도 않았죠?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랑 행위에 주님이 개입돼요? 개입되지 않아요? 오히려 배척받죠. 배척받은 주님께서 사랑한다면 이 처음의 사랑은 지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를 사랑했죠. 그러면 나온 결론은 뭡니까? ‘나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사랑해도 절대로 내 힘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날 사랑하시고 왜? 주님은 사랑으로 온 것이 아니고 사랑의 자리, 아예 주님이 만드신 돗자리, 손수 짠 십자가 피가 담긴 자리를 깔아버리니까 사랑 안 받으려 해도 안 받을 수가 없어요.

‘니 창녀가?’ ‘창녀입니다.’ ‘니 세리인가?’ ‘세립니다.’ ‘니 깡패인가?’ ‘깡팹니다.’ ‘니 강도야?’ ‘강돕니다.’ ‘니 죄 다 사해줄게, 니 이제부터 내 아내다.’

그렇다면 그걸 익히 아시고 남편으로서 사랑해줬으면 ‘니 왜 강도야? 니 강도 같으면 사랑 안 할 거야.’ 이런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래서 그걸 알고 사도바울은 만날 하는 소리가 ‘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께서 ‘안다.’ ‘죄인입니다.’ ‘안다니까.’ ‘난 죄인입니다.’ ‘안다니까.’ 만날 이러는 거예요. ‘나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안다니까.’ㅎ

이미 그 자리가 우리로 하여금 곤고한 사람 만들고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정죄함이 없는 자리가 우리가 만든 자리가 아니고 주께서 우리 밑에 깔아놓은 자리예요. 그걸 바탕 바꾸기. 성령을 통해서 바탕을 바꿔 버리는 거예요. 그 바탕 안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오늘과 같은 미가엘 전쟁이 깔려있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서 무슨 역할? 여자의 역할, 어떤 역할? 교회로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예수님을 임신해서 해산시키는 그 역할을 매일같이 하는 겁니다. 이거 지난 거 아니에요? 지난 거 아니에요. 이건 2008년도? 아니에요. 2012년도에 우리는 또 예수님을 배태할 거예요. 그 자리가 요한계시록 12장의 자리기 때문에, 내가 12장을 쥘 수 있는 게 아니고 12장이 나를 쥐어 버렸어요. 12장이 12장의 내용이 나오도록 나를 계속 이용하는 거예요. 주의 말씀이.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복습을 해야 돼요. 말씀이 인간을 이야기하고 말씀이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이 말씀 자리에 누가 들어갔습니까? 예수님이 들어갔죠. 인간의 말씀은 말씀 같지도 않죠. 인간의 말씀은 사회에서 구성된 것이고, 주의 말씀은 숨어있는 묵시세계의 천국에서 통하는 말씀이죠. 그 말씀이 와 버리니까 우리는 어둠이 돼 버렸죠. 그렇다면 말씀이 있는 곳에 항상 우리는 어둠이 되는 거예요. 어둠이 되도 괜찮아요. 왜냐, 우리가 어둠인 줄 아는 것은 이미 말씀이 들어왔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와 버리면 인간에게는 사랑이 ‘너는 나의 신부, 또는 사랑, 또는 천국의 유산.’ 하나님에게는 ‘주여 다 이루었나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말씀되신 주님이 있던 그 관계, 이것이 무슨 자리? 말씀의 자리 속에 우리는 인간으로서 주님이 생각하는 참된 인간으로서 이미 우리가 새겨져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 이마에는 요한계시록 12장이 새겨져 버렸어요.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에 속한 말씀의 종이기 때문에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말씀의 종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계시록 12장의 내용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악마를 이길 수 없었다. 우리는 악마에게 지배받았다. 그런데 우리 속에서 튀어나오는 여자에게서 나온 아들이 기어이 마귀를 이겨서 우리로 하여금 여자를 여자 되게 하는 자리를 안에다 우리를 데리고 다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는 요한계시록 12장이 되는 겁니다. 다음에는 요한계시록 13장을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의 사랑이 저희들을 찾아왔을 때 우리는 전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었던 그냥 나만 사랑한 그런 인간임이 다 들통 났습니다. 이 들통이 죽을 때까지 계속 가서 오직 주의 사랑만 찬미하고 공로를 영광으로 돌리고 모든 공로를 주께만 돌릴 수 있는 살아있는 그런 여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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