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책망하라(엡5;10-13) 1911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1. 11. 18:52
2019-11-10 12:33:43조회 : 63         
   책망하라 191110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책망하라(에베소서 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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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 : https://youtu.be/Z6fOfTBL6YA, Hit:12
 이근호19-11-10 13:28 

책망하라 

2019년 11월 10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5:10-13

(5: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5: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5: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주님께서 따로 지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로 통해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인간이 해내지 못했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시행된 바로 그것만 하나님께서 지키고 싶어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곧 ‘십자가 의의’만을 하나님께서 지키고자 하십니다. 바로 이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뽑아놓은 자들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결코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하면 아니됩니다. 성도는 그저 주님의 귀함이 지나가는 통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키고 싶은 것을 가리는 방해물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이 취지에 준해서 하나님께서 책망을 시도하십니다. 이 책망은 우리 인간의 우수함이 아니라 초월적인 빛의 세계의 것을 가리고 있다는 이유로 책망이 주어집니다. 빛이란, 이 세상에 여전히 초월적인 요소가 작용하고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완료’요 ‘미완료’가  아닙니다.

‘문제 없음’이지 ‘문제 있음’이 아닙니다. 사람이 책망 받아야 될 이유는, 자신에 대해 자진해서 주인공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곧 사라져야 될 대상인 자신에 대해서 완전와 완벽을 도모하고 있고 그것을 끝까지 붙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여기에 집 나간 일곱 귀신들이 달라붙는 겁니다.(마 12:45)

문제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계속 미련을 갖고 혼신을 힘을 다해 자기 가치를 도모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날카로운 칼이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건들이면 마구 주위를 향해 흔들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든든한 칼집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본인들이 얼마나 자기 위주로 사는지 책망하십니다.

인간들이 사는 동기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것도 최종적으로 가면 홀로 사는 겁니다. 이러다 보니 인간들의 주관심는 밥심이요 그 다음은 건강이요 그 다음의 사랑입니다. ‘밥심’이란 곧 돈 힘을 말합니다. 건강이란, 자기 육체에서 오는 고통으로 인해 갈수록 자기 집착이 강렬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이란, 무조건 나의 가치를 보호해달라는 외부에 대한 호소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통하는 관심사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자기 터전 마련과 늘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싶어하고, 게다가 곁에서 자신을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하라고 하나님께서 세월을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하루치만 허락맡고 생을 삽니다.
매일 하루씩 연장됩니다.
이는 살아가면서 죽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즉 성도에게는 ‘내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살아 있을 때 듣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죽었다고 보는 자신을, 본인은 자꾸만 살아있다고 우길 때 여기서 허구가 발생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 마르다, 나사라 가정이 나옵니다. 그들은 서로를 보면서 다들 ‘살아 있다’고 여겼고,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도 자신과 같이 살아 있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나흘만에 다시 살아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죽지 아니하면 진정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 앞에서 죽지 아니하면 자신이 허구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자기만 허구가 아니라 타인들도 허구입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진정한 실체입니다. 


이 사실을 나사로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라”는 것은 마치 거친 지우개로 종이를 문대다 보면 종이마저 구멍이 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없애시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없애 자리에는 주님의 지시만 남겨지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분명 우리 자신이 매개체에 불과함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시는  안목에 대해서는 욥이 이 지상에서 제대로 보여줍니다. 욥기 7:5에 보면,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살점의 틈 사이에서 올라온 구더기가 우리의 신체를 몽땅 다 덮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거두어 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물으십니다.

“너는 ‘빛의 자녀니, 아니면 어두움의 자녀니?’” 인간의 정체성이란 이미 결과다고 알려진 그 표현 때문에 소급해서 구성되는 겁니다. 성도는 그저 계속해서 주님의 속죄의 사랑이 나오는 우물입니다. 성도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자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우물에 물 길러 왔던 여인이 도리어 우물 자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관계 자체가 완전하고 문제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는 것 보다 사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미지의 죽음이라는 현상이 공포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목숨 지키는데 급급합니다.

지켜야 될 주님의 가치는 안 지키고 그저 자키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킵니다. 다 된 밥에 모래 뿌려서는 아니됩니다. 주님의 책망은 우리에게 다음을 요청합니다. “너 내하고 운명을 같이 하라” 성도는 결코 홀로 사는 것을 허락받지 못합니다. 명절날 놋그릇 닦듯이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묻힌 선입견들을 책망을 통해서 닦아내십니다.

이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이 진정 귀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보다 더 귀한 것이기에 완전하고 완벽하고 흠이 없고 문제없습니다. 그 완전함 앞에서 당연히 우리 자신을 사라져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모든 책망이 빛으로 드러난다는 말씀은, 세속적인 우리 자신이 사라지면서 초월적인 것이 드러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살려고 몸부림쳐도 가을은 주님의 지시 따라 벌써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무심한 가을  ….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탓하지 않게 하옵소서.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말고 주님과의 동행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19-11-11 17:41 
49강-엡 5장 10-13절(책망하라)1911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10-13절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10-13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오늘 본문 내용은 주님께서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말은, 너희들이 하는 모든 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내가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알려준 바가 있다는 거지요. 그걸 빛의 열매라고 이야기했는데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서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의 내용이 궁금한 것이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뭐냐?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 종교적인 행위마저 기쁘시게 못하고 영광이 되지 못한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보고자 하시고 얻고자 하시고 찾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는 겁니다.

로마서 3장 25, 26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찾고 있고 기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지키시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완료된 겁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완료된 것을 줬는데 인간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보다 자기 기뻐하는 것을 추구하다 보니까 완료된 것은 제쳐놔 버리고 미완료를 자꾸 쥐고 있어요. 그러면 미완료는 뭐겠어요? 본인이겠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죄에다가 십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화목제물을 심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문제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심히 성경보고, 기도하고, 교회 다니면서 자꾸 자기자신의 문제있음을 굉장히 슬퍼하고, 애닳아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사는 동기가 자기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지켜야 될 것인데 지키지 말아야 될 것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덕분에 내가 잘되었다, 내가 천당간다, 그런 것만 지키려고 했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지킬 생각이 없어요. 주님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책망하라”는 것은 뭐냐? 완료와 미완료의 싸움이에요.

‘문제없음’과 ‘문제있음’의 싸움입니다. 주님은 문제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자꾸 우리는 문제 있다고 스스로 자기를 자책하고 있어요.
남들 보기에 굉장히 믿음 좋은 것처럼 보이는 거지요. 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개념들, 성도라는 개념부터해서 모든 개념은 주님께서 문제없다고, 제품에 하자 없다고 합격도장 찍힌 거예요.

그것을 ‘성령의 도장찍힘’이라 하는데 성령께서 ‘합격, 수출해도 되는 물품’ 이미 통과가 되는 물품으로 찍어놨다는 말이지요. 정말 다 된 밥에 모래 뿌린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의 하루하루가 주님께서 문제없다고 이미 선언했고 완료되었다고 선언한 것에다가 계속해서 우리는 모래를 뿌리는 겁니다. 주님, 내 인생이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주님께서 뭐라고 하겠어요? “네가 아직도 네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있나? 아직도 네 자신에 대해서 계획이 다 있구나.” 왜 주께서 버린 카드를 왜 네가 자꾸 끄집어 당겨서 “나 어때요? 나 어때요?” 맨날 아침 눈만 뜨면 “하나님, 저 어때요?” 이런 식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책망하라고 이야기하시는 이 과정 속에서 너는 하나님의 완료와 하나님의 문제없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매개체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냥 통과하는 파이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매개체라 하는 것은 뭔가 그냥 쑥 지나가는 거예요 그냥. 우리를 통해서 뭔가가 지나가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주께서 이미 완료된 것, 성도 자체가 이미 완료된 거예요. 문제없음이기 때문에 인생을 살면서 주님의 지시만 있고 우리는 사라져야 돼요.

우리가 하루하루 산다는 것, 그리고 왜 우리가 사라져야 되느냐? 죽는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 계속 하루하루 지연된 시간들, 그게 바로 우리의 남은 인생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하루치만 목숨이 연장돼요. 매일 하루치의 목숨만 계속 연장되고 있을 뿐이에요.

“아직도 너 자신을 지키려고 하느냐? 하나님보시기에 네가 안중요해. 안중요한데 자꾸 하나님의 중요한 것, 완료된 것 가지고 얼쩡거릴래? 자꾸 얼쩡거릴거야? 그러면 하루 더 살려줄게.” 살려주면서, 왜 나는 없어져야 되고 사라져야 되는지의 그 이유를 알라고 또 하루를 연장시켜주지요. 그래도 모르면 또 하루 더 연장시켜 주는 겁니다.

오후예배 때 욥기를 하는데 욥은 그걸 한꺼번에 알았어요. 성령이 오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성령이 오신 이유는 네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살아 있을 때 들으라고 성령이 오시는 겁니다. 욥 7장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문자로 이렇게 쓰였으니까 별 감흥이 안 오는데 그 징글징글한, 꾸물거리는, 아침부터 이런 이야기는 죄송합니다만, 구더기가 우리 몸에 다 덮였다고 봅시다. 그리고 중간중간 터져버린 살 속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온다고 봅시다. 우리의 몸에 좁쌀처럼, 이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요.

주께서는 구더기가 덮여 있는 채로 우리가 결국 죽는데 살아있을 때도 그 모습이라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보는 거예요. 구더기가 덮여 있는 것으로 보는 거예요. 욥기 7장 5절에서. 그 구더기를 손으로 걷어내면서 하는 말이 “네가 빛의 자녀야, 어둠의 자녀야?”라고 묻는 거예요.

“너의 완료된 신분이 뭐야? 빛이야, 아니면 어둠쪽이야?” 라고 묻는다고요. 구더기를 생산할 요소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면서도 우리는 그 구더기의 모습이 안보이니까 계속해서 자기 잘난 재미로 나를 지키려고 그렇게 발악을 하고 발작을 한다고요.

그래서 주님이 지키고 싶은 것은 주님이 기뻐하는 것만 지킵니다. 우리가 분명히 합시다. 딴소리하기 없기요. 주께서는 뭘 영광으로 하느냐? 주께서 우리에게 꽂아놓은 것, 징처럼 심어놓은 것을 원해요. 어떤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의 자질을 안본다고요. 성령께서 주신 것을 그냥 회수하기를 원해요.

“너 내가 성령 줬잖아. 그 성령 간직하고 있지? 내가 준 것을 간직해야지 엉뚱한 것을 가지고 지키면 되겠어? 하루하루 살면서 도대체 뭘 지키려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내가 준 성령 있잖아. 그 성령을 내가 회수하겠어.” 그러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거 지키면 돼요. 주님이 주신 성령만. 그게 어렵습니까?

“교회 몇 년 다녔습니다.” 그런 것 지키지 말고. “이 교회 내가 세웠다.” 그런 것 좀 하지 말고. “이 자식 내가 키웠다.” 그런 것 좀 하지 말고요. 구더기 덮인 주제에 무슨 딴소리하고 있어요. 주께서 이미 완료한 거예요. 문제없어요. 문제없는데 자꾸 자기를 지키려 하니까 자기자신에게 자꾸 회한이 오고 후회가 되고 ‘아이고, 이거 지키고 싶은데 너무 아까워서 못버리겠다.’

버릴 카드를 왜 쥐고 있느냐는 겁니다. 맨날 싸움이 뭐냐 하면, 주님은 문제없다고 하고, 우리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문제없어요. 주님께서는 문제가 없다니까요. 잘나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고 구더기덩어리기 때문에 아예 우리한테 문제를 삼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어떤 짓을 하든지 내가 나에게 문제 삼지 마세요. ‘내가 그런 실수를 하다니.’ 너는 원래 태어난 것이 실수에요. 태어난 것이 실수인데 무슨 실수를 또 해요. 자꾸 문제를 삼으니까 이단들이 오는 거예요.

“이것 지켜야 됩니다. 저것 지켜야 됩니다. 당신은 이런 모습을 보여야 됩니다.” 일곱귀신이 와가지고, 악마들이 와가지고 당신 영혼을 혼란케 하잖아요. 늦게 오신 분들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습니다. 다 이룬 것이 우리에게 징으로 꽂혀 있는 겁니다.

성령 안에 다 이루심이 우리한테 들어온 거예요. 나중에 죽을 때 그 다이루심을 회수해서 그냥 가져가면 되는 거예요. 문제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문제없음이 쑥 내려가는 매개체에 불과하거든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책망하라” 얼마나 날파리들이 들끓겠어요? 구더기가 있으니까 날파리가 끓지요.

계속해서 책망을 하는데 책망을 하는 것도요.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는 그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아는 내 식대로 책망해봐야 또 내식대로 내 잘남을 지키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책망을 하는데 뭐로 책망을 하는가? 빛으로 책망한다는 거예요.

저의 은밀한 것, 부끄러운 것, 그러나 책망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했어요. ‘아, 책망하는 것이 빛으로 책망하는구나. 내가 나를 책망할 그런 자격이 없구나. 빛이 와서 책망하는구나.’ 책망한다는 것은 구더기를 걷어내면서 “네가 빛의 자녀야, 어둠의 자녀야? 신분을 밝혀라.” 이런 식으로 책망하는 거예요.


우리 빛의 자녀에 덮여 있는 쓸데없는 것들을 걷어내는 거예요. 저 어릴 때 우리 집은 교회를 안다녔으니까 제사를 많이 지냈어요. 보통의 제사하고 추석이나 설 때의 제사하고 달라요. 절대군주인 할아버지가 명령을 해요. 할머니하고 며느리한테 명령을 합니다. 딸한테는 안하고.

추석전날 제사에 필요한 놋그릇 꺼내서 멍석 펴놓고는 볏집으로 잿물 묻혀서 서른 몇 개의 놋그릇을 다 닦아야 돼요. 할머니하고 우리 어머니하고. 물론 고모들, 그 요령꾼들은 빠졌을 거예요. 지난 명절에 쓰고 넣어 둔지 6개월 되었으니까 누렇지요. 그런데 닦아놓으니까 반짝반짝 윤이 나는 거예요.

책망하라는 말은 뭐냐? 이미 문제가 없어요. 다 구원된 거예요. 그런데 벌벌벌벌 떨면서, ‘그러면 나는요? 남들이 나 욕하는데 어쩌면 좋아요?’ 이런 때가 있잖아요. 그 때를 “책망하라”로 다 밀어내는 겁니다. 그 덮여 있는 세상적인 윤리도덕적 기준이 있잖아요. 세상의 기준 같은 것.

그걸 자기정체성이라 하거든요.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다 조작된 겁니다. 이미 결과라고 알려진 그 표현 때문에 거꾸로, 순차적으로 그걸 구성하는 것이 정체성이에요. “너는 이 집의 며느리다.”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며느리니까 며느리답게 살아야지.”라고 시가에서 그걸 요구를 해요.

그런데 주님의 지시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진다면 내가 며느리라는 그 정체성도 없어지는 동시에 나도 같이 없어져야 돼요. 시어머니가 와서 “너는 뭐냐?” “저는 ‘없음’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고요. “저는 이 집 며느리입니다.” 하는 순간에 그 다음부터 시어머니가 하는 말은 “며느리 같으면 며느리답게 살아야지.”라는 추가적인 나의 정체성을 꽉 잡는 새로운 인간적인 지시가 들어와요.

그러나 그 며느리가 완료되겠습니까? 그 며느리가 문제없겠어요? 며느리답게 되어야 된다는 정체성이 설정되는 순간부터 일곱 귀신이 다 달려들어서 ‘나는 며느리답게 살았을까? 나는 며느리 노릇을 잘 못했어.’ 모든 하루의 관심사가 ‘나는 남들 보기에 그들이 규정한 정체성에 부합되는 인간인가?’ 그 거리를 좁혀가려고 쓸데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다 소비하는 거예요.

목사가 “이제 그만 집사하세요.” 하면 ‘집사가 뭘까? 처음 듣는데? 먼저 집사가 된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나? 아, 저렇게 하는구나.’ “나 집사 못하겠어요.” 갑자기 못하겠다는 미완료가 등장해버리고 또 “나는 집사로서 문제 있습니다.”가 등장해요.

집사라는 그 정체성은 누가 준겁니까? 주님이 줬습니까? 아니에요. 옆사람이 줬다고요. 내가 누군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일방적으로 줬는데 거기에 휘둘리면서 살아온 거예요. 빛이라는 말은 뭐냐? 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초월적인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빛으로 드러난다는 말은, 이 세상이 인간들과 인간들이 머리 맞대고 한 번 살아보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런 것은 다 헛방이고 백날 맞춰봐야 천당 못간다, 지옥간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천국가는 것은 인간이 짜낼 수 있는 지혜의 총합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요. 다른 초월적 요소가 작용을 해줘야 돼요. 지금 사도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닙니까? 문제없음이 천국가게 되고 완료됨이 천국가는 것이지 옆 사람, 같은 인간끼리, “너는 모자란다, 너는 미흡해, 너는 신자답지 않아.”라는 이런 잔소리들이 모여서 우리를 천국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기에 같이 휘둘린다고요. 왜냐하면 우리가 배운 가락이 그들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내가 서울강의에서, 도대체 인간들이 왜 성경을 안보고 설교도 안듣고, 복음도 안듣고 날이 가면 갈수록 왜 말씀에 관심이 없는가? 이것은 뭔가 따로 지킬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제 결론이에요. 따로 지킬 것이 있다는 것.

지킬 것이 뭐냐? 제가 의존교회에서 세 가지를 결합시켰다고 했어요. 하나는, 인간은 밥심으로 산다. 돈힘으로 산다는 그 말이지요. 두 번째는, 인간은 건강 때문에 산다. 몸 아프면 못사니까. 세 번째는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 날 지켜줘, 날 보호해줘, 날 위로해줘.

첫 번째의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어떤 지역에서 재개발을 하는데 세입자로 들어갔어요. 재개발한다는 것은 이미 주인들은 다 알고 있는데 세입자한테는 그걸 안알려주는 거예요. 아주 못됐어요. 세입자에게 건물 세주고 자기는 다른데서 삽니다. “싸게 내놨으니 잘 사세요.” 하면서 계약은 2년 해놓고 1년도 채 안되어서 재개발하네요.

그동안 가게까지 세 얻어서 인테리어도 다 해놨는데 재개발이 되어서 그만 갈 데가 없어졌네요. 자기 몸 하나 둘 터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밥심 없이는, 돈의 힘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아요. 이사비용 가지고는 어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재개발 안될줄 알고 모든 돈을 다 집어넣었는데, 단골도 생겼는데, 지역주민의 75퍼센트가 찬성했다고 다 나가라고 하니까. 촌에서 올라와서 서울에서 살아보려고, 서울특별시민 되어보려고 애쓰다가 사기당한 것처럼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고민이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를 지키겠다는 거예요. 제가 하는 이야기가 없는 이야기입니까? 지어낸 이야기입니까? 다들 겪는 이야기고 그렇게 될까봐서 불안불안한 이야기잖아요. 그 원인이 뭐냐? 내가 지킬 것이 뭐냐 하면, ‘앞으로 내가 더 잘 되어야 돼. 더 부자가 되어야 돼.’ 그런 미완료를 지키는 것이고 나한테 문제가 있으니까 빨리 문제없는 인간이 되겠다는 그 문제 있음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빛의 세계, 이미 시작된 천국의 세계의 백성들은 지킬 것이 없어야 돼요. 그런데 우리의 하루 일과는 뭐냐 하면, 내 부동산이 어느 정도고, 내 돈이 통장에 얼마 있고, 금융상품은 어느 정도고, 그것만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두 번째, 서울에서 올라와서 취직해서 동생들 공부시킨다, 자식들 키운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지나 40대에 이르도록, 잔업해가면서, 잔업하고 야근까지 해야 돈이 더 되니까, 50대지나도록 자기의 청춘과 건강을 다 쏟아 부었어요. 50대 되면 회사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그럴 때 이 아픈 몸 가지고 어디 갑니까? 그동안 동생들 도와주고, 여동생 시집보낸다고 목돈 떼 주고, 촌에 있는 어머니 땅 사라고 돈 줬는데 아픈 몸 가지고 더 이상 일을 못해서 집에 들어앉으니까 한식구라도……,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도 있지만, 같은 가장이라도 하루아침에 벌레가 되니 온 식구가 다 싫어하는 것처럼 어느 집안에 아픈 사람 하나 생겨버리면 그 다음부터 왕따당합니다.

‘네 몸 하나 간수 못해서 남의 인생까지 조져놓나.’ 이런다니까요. 그런데 지금 누구 때문에 아팠습니까? 장남이 되어서 집안 건사해보겠다고 자기의 모든 정력을 회사에 다 집어넣었잖아요. 제가 옛날 다니던 회사도 실내기온이 50도였고요, 미세먼지 가득찬 곳이었어요. 선배들이 이야기했어요. 당신은 소주 먹고 돼지고기 먹어야 시커먼 먼지가 내려간다고.

원래 공대출신이 다 그래요. 에어컨 틀어놓고 그런 것 없어요. 그냥 환경오염 그 자체에 들어가는 거예요. 청춘을 거기서 30년 보내보세요. 속병 다 듭니다. 그리고 공장환경이 나빠서만 건강해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노는 가락이 술먹는 가락이에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닮아가지고 건강을 다 버리는 겁니다.

재개발한다고 돈 한 푼 제대로 못건지고 쫓겨나서 걱정이지요. 젊을 때 돈번다고 건강 다 소비해서 늙어서 회사에서 쓸모없어지니까 내쳐졌지요. 이 두 가지가 걱정이 안되겠습니까? 지키고 싶은데 지킬 수가 있습니까? 온 정신을 거기에 쏟아부으니까 빛이고 성경이고 복음이고 들어오지를 않지요.

세 번째, 돈 잃고 건강 잃고, 다 없어도 내가 좋아하는 남자 하나 만나면 이 아픈 것도 보듬어주고 돈 없는 것도 다 용납해주면서 “너는 살림만 해라. 내가 돈 다 벌어다 줄게.” 라고 하는 그런 남자 어디 없는지? 자기 몸 아프고 돈 떨어지니까 돈 많은 남자 하나 붙들어서 평생을 살림이나 하면서 살아보려고 시도를 하는데 모든 것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지요.

사랑한다고 말이야 하는데 사랑하는 그거요, 레몬쥬스 단맛 빼먹고 퇘, 하고 버리면 그것이 태권도 돌려차기거든요. 한 방 먹이면 그 남자하고 결혼하려고 집어넣은 것 심지어 향수병까지 다 날려버렸지요. 그 다음부터는 ‘사랑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랑했다는 그것에 마지막 희망을 가졌는데 그것마저 차일 때 인간의 모든 감정은 거기서 다 터져나옵니다.

그래서 사랑이 깨졌을 때, 차였을 때 나오는 감정들을 모아봤어요. 후회, 미움, 자책, 기대, 분노, 미련, 위로, 현실인정, 배려, 절망, 다짐, 변명, 결심, 자기연민. 이런 것들이 사랑이 깨지고 난 뒤에 줄줄이 왁 다 살아났어요. 돈 없지요. 건강 잃었지요. 이제 마지막 희망으로 사랑을 붙들었는데 사랑도 다 깨졌지요. 노래 가사에 그런 것이 있거든요.

“그럴려고 그랬어 돌아가려고
 너의 차가움엔 그래 다 이유 있었던거야
 나를 만지는 너의 손길 없어진
 이제야 깨닫게 되었어. 네 맘 떠나간 것을

 설마하는 그런 미련 때문에……”

여기에 미련이 나오거든요.

“그래도 나는 나를 위로해
 나 이제 이러는 내가 더 가여워
 이제라도 널 지울꺼야 기억의 모두를

 이제 다시 사랑안해 말하는 난 너와 같은 사람
 다시 만날 수가 없어서 사랑할 수 없어서
 바보처럼 사랑 안해 말하는 널 사랑한다
 나를 잊길바래 나를 지워줘

 바보처럼 몰랐어 너희 두 사람
 아직 기억하려던 그건 그래 다 욕심이야
 다짐했건만 매일 아침 눈을 떠……”

헤어져놓고 또 기도를 한다고요.

“지나간 너에게 기도해 나를 잊지 말라고
 제발 지금 내가 바라는 하나
 내 얘길 너무 쉽게 하지마
 차라리 나를 모른다고 말해줘
 시간지나 알게 될꺼야 내 사랑의 가치를

 이제 다시 사랑안해 말하는 난 너와 같은 사람
 다시 만날 수 가 없어서 사랑할 수 없어서
 바보처럼 사랑안해 말하는 널 사랑한다
 나를 잊길 바래 나를 지워줘……”

백지영이 불렀던 <사랑 안해>라는 가사입니다. 여기에 미움, 자책, 기대, 다 들어있어요. 끝부분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없는 내가 아닌 그 자리에 사랑 채우지마
 혹시 만날 수 가 있다면 사랑 할 수 있다면
 아프잖아 사랑한 널 지켜보며 사랑한다
 그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이렇게 끝나요. 결국 그저 내 생각만 해요. 미완료된 나, 문제 있는 나를 지키는 것이 전부에요. 나 지키는 것, 밥심 지키는 것 이게 마귀의 역사입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 시험할 때 했던 세 가지입니다. 돈, 건강, 그리고 세상권세. ‘밥심 + 건강 + 사랑.’

이 모든 것을 누가 책망하느냐? 가을이 책망합니다. 봄, 여름, 가을 할 때 그 가을 말입니다. 내 사랑이 깨졌고, 내가 갈 곳이 없고, 내 몸이 아픈데 왜 가을은 찾아오지요? 가을은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빛의 세계의 말을 듣기 때문에. 가을 온 것에 문제가 있습니까? 팔공산 단풍 든 것에 문제 있습니까? 문제없지요.

가을이 온 것이 완료잖아요. 가을이 완료라고요. 자기 사랑이 깨졌건, 차였건 관계없이 가을은 꼬박꼬박 오잖아요. 그처럼 주님께서 모든 계획대로 우리에게 덮친다고요. 이 빛의 세계가. 도대체 우리가 뭘 지키고 있습니까? 왜 엉뚱한 생각을 자꾸 해요?

주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책망합니다. “제발 수월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 이 세상이 수월한 곳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대로, 우리는 눈물 콧물 다 빼다가 결국 죽게 되어 있어요. 아까 한 것 다시 할게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살아 있을 때 알려주는 거예요. 그것도 초월적으로.

요한복음 4장 1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참 중요한 말씀인데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걸 누구보고 하느냐 하면, 사마리아 여인보고 해요. 사마리아 여인은 벽돌로 쌓아놓은 동그란 우물이에요. 지금 사마리아 여인은 나 하나 배부르기 위해서 우물에 물 길러 온 사람입니다. 자기가 주인공이거든요. 주님께서는 “너를 주어로 하지 마.” 문장에서 주어는 시작점이거든요. 네가 주어가 아니고 매개체가 되는 거예요.

물 길러 와서 나의 목마름을 채우겠다는 그 여자에게, 너는 주어가 아니라 하나의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주어가 통과하는 매개체가 되는 거예요. “나에게 끊임없이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는 하나의 기능인이에요. 우물 쌓은 그 벽돌의 테두리가 너라는 거예요.

너는 하나의 우물로서 머물고 네 속에서 성령이 날마다 나오는 겁니다. 문제없음이 나오고, 완료되었음이 나오는 살아 있는 샘물이에요. 이게 초월적입니다. 주께서 책망을 하시는 이유는, 네가 나와 운명을 같이 하자고 책망을 하시는 거예요. “전에는 너 혼자 살았잖아.” 혼자 살지 말고 나랑 살되 이제는 문장의 주어가 너에서 나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지시만 남기고 그 주님의 지시를 가리는 나 자신은 날마다 옅어져야 되고 없어져야 돼요. 저도 나이가 좀 들었는지 자꾸 옛날이야기를 하는데요. 옛날 우리 초등학교 때 우리나라가 지우개 하나도 제대로 못만들었어요. 물론 종이 질도 안좋았고요. 그래서 글씨 틀리게 쓴 것 지우려고 지우개로 문지르면 종이가 다 찢어지곤 했어요. 지우개가 너무 딱딱해서.

주님께서 계속 책망하는 거예요. 책망을 왜 하느냐 하면, 내 자리를 구멍 나게 만들기 위해서. “너는 애초부터 없는거야.” 주님은 나쁜 지우개 같아요. 계속 매일같이 우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의 속에서 반발이 굉장히 심할 거예요.

물론 성경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과 너무 괴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반발을 하고 싶을 것인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죽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무섭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으면 아무 생각이 없지만 살게 되면 죽을까 싶어서 사는 것이 더 무서워요. 사는 것이 무섭다고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어요. 주님께서는 답답한 거예요. “아이고, 죽는 것이 무서워요.” 하면 그것은 마귀가 겁박, 협박, 공갈을 친 것이고 “인간아! 내가 네가 사는 똑같은 세상에 살아봤잖아. 사는 것이 더 무서워 사는 게. 죽는 게 났다 차라리.” 자살하지는 마시고요. 번개탄피우지 마시고요.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백날 들어도 우리는 돌아서면 또 내 몸 하나, 정체성……, 아까 이야기 다 했지요. 남들이 나를 며느리라고 하고, 남들이 나를 남편이라고 하니까 거기에 마땅한 노력을 해야지, 라고 하면서 벌벌벌벌 떨면서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킬 것은 안지키고 소위 잘나지도 못한 나 지키는데 미련을 가지고 계속 지키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이러한 문제, 아무리 이야기해도 못알아듣는 이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가 마리아 마르다 집안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예수님께서 마리아, 마르다에게 대접을 많이 받았어요. 마리아, 마르다도 자신들이 주님과 괜찮은 사이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 마르다가 뭘 몰랐느냐? 자기자신이 허구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자기자신이 허구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유가, 자기가 눈 뜨고 보니까 저 사람들도 실재하고 있거든요. 옆 사람, 이웃사람들이 실재하고 있으니까 ‘저 사람이 살아있는 것을 보니 나도 살아있구나.’ 하고 상대방을 통해서 나 자신도 이렇다고 정리를 하다보니까 예수님도 그렇게 본 거예요.

예수님도 나처럼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고, 예수님도 살아 있고, 저 사람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 있고, 우리오빠 나사로도 살아 있고. 전부다 아무 하자 없이, 문제없이 살아 있는 사람의 집합체가 세상이다, 라고 편하게 생각한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어느 철학가도 문제 삼지 않아요. 그들은 다 바보니까. 복음도 모르니 다 바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오빠 나사로를 죽여 버립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알지요. 주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허구들의 집합체가 이 세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오빠는 예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났을 때 비로소 나사로는 예수님이 보는 세상관을 같이 공유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 앞에 죽고 다시 살아났을 때 지금 예수님은 우리를 얼마나 헛방으로 보고 있는지 동감하게 되어 있고 공감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그 말입니다. 나는 죽고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는 말이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입장이고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보는 입장이에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너는 죽고, 헛방이고, 너는 허구요 허망한 것이고, 네 안에 누가 살아계시다?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칼집이 있을 때 이것은 칼을 보호하는 것도 있지만 칼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을 보호하기위해서라도 칼집이 있는 것처럼 그 칼집을 저는 ‘외장피’라고 표현하겠어요.

뭔가 감싸고 있는 바깥의 외피. 뭔가 주님께서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칼 같은 존재에요. 나는 항상 재개발 지역에서도 살아남아야 되고, 나는 항상 건강해야 되고, 누가 항상 나를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이 마땅한 존재고, 그런 식으로 나밖에 모르고, 나만 지키면 그만이라는 이 사실이, 같은 집안 식구들을 비롯해서 내가 가는 모든 단체가 교회나 어느 곳에서도 칼을 마구 휘두르는 장면밖에 안돼요.

지난 강남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눈먼 장님한테 기관총을 들려주고 그 다음에 누가 와서 막대기로 그 장님을 건드려보라고요. 그러면 그 장님은 아무것도 안보이니까,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니까 그냥 총 들고 마구 쏴버린다고요. 이게 우리의 평소의 마음자세입니다. ‘건드리기만 해봐라. 다 쏴죽여버린다.’고.

그런 게임도 있지요. 애들 눈에 안대를 해서 안보이게 해놓고 막대기 쥐어주고 풍선을 놓아주고 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애가 풍선 치려고 마구잡이로 막대기 휘두르지요. 그 마구잡이 인생, 그게 타고난 우리 성격이에요.

나만 건드렸다 하면 마구잡이에요. 부모고 자식이고 없어요. 아내고 남편이고 없어요. 그냥 마구잡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뭐가 필요합니까? 그런 위험한 칼을 그냥 두면 안되잖아요. 지옥 가잖아요. 주님께서 완료된 칼집, 문제없는 칼집을 딱 꽂아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게 하시는 겁니다.

너는 죽고 죽은 나를 주님이 지켜주는 거예요. “네가 칼로 칼질을 해도 예수님, 나를 찔러라. 그건 나를 찌르는 것이다.” 주님한테 칼질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위장을 해대요. 구더기 이야기했지만 이사야 41장 14절에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했거든요.

벌레종류에요. 계속해서 쓸데없이 버릴 것을 가지고 자기자신을 위장하고 조작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어요. 그래놓고 누구하고 대화할 때는 칼을 휘둘러요. 기관총을 가지고 두두두둑 쏘고, 또 막대기를 가지고 “전부 다 네 탓이야. 네 탓이야!”

때리면 폭력으로 걸려서 경찰서에 가니까 그렇게는 못하지만, 막대기는 안 들지만 말로서 “네 탓이야, 네 탓이야! 목사님 탓이야. 다 네 탓이야!” 하루 종일, 24시간, 꿈속에서도 ‘다 네 탓이야.’ 멈춰라, 정숙하라, 조심해야지,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마귀들이 그런 식으로 해요. “절제해야지. 너 때문에 이웃사랑이 그르면 안되지.” 그게 마귀들의 방식이에요.

“조심해야지, 조심해야지, 성도답게 살아야지.” 욱, 하는데 어떡합니까, 욱하는데. 누른다고 스프링이 없어집니까? 나중에 튀어오르면 더 크게 튀어오르는데요. 주님보고 “다 주님 탓이야!” 하면서 튀지요. 주께서는 이야기합니다. “문제없다. 문제없는데 네가 돌았구나. 내가 문제 없다잖아, 내가! 내가 문제없다는데 네가 왜 자꾸 문제 삼아. 내가 완료했잖아. 네 구원이 완료되었잖아.”

요한1서에 나오지요. 죄 없다고요.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은 죄가 없어요. 죄라는 것은 죄를 생각할 때 그 때 생기는 겁니다. 바보같이 맨날 자기가 자기한테 속아요. 자기한테 속고 허망한테 속고 허구한테 속고 남들이 요구하는 우리 정체성문제에 속아놓고 벌벌 떨고. 목사가 목사다워야지, 장로가 장로다워야지, 집사가 집사답고 남편이 남편답고, 아내가 아내답고, 맨날 그 소리에 우리는 시달리고 있어요.

내가 뭐 있어야 뭐답든지 하지요. 없는데요. 우리는 주님의 지시만 있을 뿐이지 그 자리는 거친 지우개 때문에 다 닳아서 없어졌어요. 주님의 지시만 있을 뿐이에요. 내 자리에 주의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죽고 주님의 지시만 그 죽은 자리에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 말씀이 날마다, “네가 주인공이 아니야. 너는 하나의 얇은 매개체 지나지 않으니까 제발 내 완전한 길을 막지 말라. 얼쩡거리지 말고. 다 이루었고 문제없는 것을 네가, 매일같이 걱정근심인 네가 왜 자꾸……” 바람 넣어서 춤추는 입간판처럼 왔다갔다 흔들어대지 말라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내가 어지럽다. 좀 그러지 마라.” 주님의 칼집은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이 됩니다. 그 칼집을 누가 만들었어요? 주님이 만들었어요. 아담이 부끄럽다고 “부끄러워요.”하면서 치마를 해입었거든요. 주님께서 그치마를 확 벗겨버리고 가죽옷을 친히 입혔습니다.

“네가 하는 짓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고 하나님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야.” 그래서 그것을 벗겨버리고,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손수 내가 너에게 해준 것, 내가 피흘려 가면서 너에게 ‘끝났어. 걱정하지 마. 염려하지 마’라고 너에게 입혀준 그 칼집, 완전한 칼집, 성령, 십자가에 다 이루심” 그거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도 그 십자가가 우리를 책망합니다. 어렵습니까? 그러면 말 바꿀게요. 가을이, 이 가을이 우리를 책망합니다. 우리가 굶어죽든 자살하든 관계없이 아, 가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일이 없는데 호들갑은 온 호들갑을 다 떨면서 못살겠다, 괴롭다, 죽겠다, 막대기 들고 주님 치고, 이웃치고, 나를 치고, 참 부질없는 발악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이 구더기로 덮여 있는 시체의 모습인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인간 자질 따지지 않고, 죄 문제 삼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익히 아셔서 다 용서하심만 회수하는데 저희들 하나의 매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