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지혜(엡5;15-17) 1911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1. 25. 18:10
2019-11-24 12:35:28조회 : 69         
   지혜 191124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지혜(에베소서 5:15-1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iu0uG8-XFTo, Hit:5
 이근호19-11-24 13:28 
지혜

2019년 11월 24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5:15-17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지난 시간에, 모든 인간은 다 어두움에 놓여 있으며 ‘죽은 자’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새삼스럽게 주님께서 “일어나라”하지 아니하면 죽은 자 그대로 있습니다. 자신이 과연 ‘죽은 자였음’을 말할 수 있는 자는 이미 주님에 의해서 살아난 사람입니다. 이 ‘살아난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되나요?

고린도후서 5:15에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참으로 다시 살았으면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삶’이 된다는 겁니다.

이는 곧 ‘나의 구원’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초부터 ‘예수님을 위한 구원’만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다시 살아난 사람에게만, 지혜없는 곧 죽음임을 압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무엇입니까? 잠언 8:22-26에,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곧 ‘지혜’를 의미합니다.(잠 8:1) 그러니까 창조세계란 지혜의 운용체계입니다. 물 밑 속, 은밀하게 악어가 다니는 것처럼, 사람들이 각자 자기 일에 몰두할 때, 하나님께서는 따로 은밀한 일을 진행시켜 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혜입니다.

창조 때 지혜를 감안해보면, 지혜란 여러 개가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이 ‘하나됨’을 잘 반영한 것이 갈라디아서 1:7-8에 나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른 복음’이란 아예 존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마다 각자 아는 지혜로 제각기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공동되는 지혜로 구원됩니다. 착한 사람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선한 영역’이란 없습니다. 악한 자라는 이유로 천국 못가는 것이 아닙니다. 새삼스럽게 죄라고 말하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뭘해도 죽은 자요 어두움이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지혜가 눈에 보이는 식으로 물질성을 띠게 했는데 그게 할례입니다. 할례는 문신처럼 이스라엘의 남성들을 모두 난지 8일만 행해야 하는 겁니다. 즉 몸에 새겨진 창조의 원리, 곧 지혜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이러한 물질성이 무효가 되고 ‘마음의 할례’만이 인정됩니다. 할례란 두 개의 분리된 피부를 갖는 겁니다. 하나는 끊어 떨어져 나가야하는 표피와 그 제거작업으로 인해 비로소 드러난 속 피부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는 성도는 ‘이미 죽은 나’와 ‘새로 살아난 자’의 두 과정의 증거를 가진 자가 됩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자기를 위해 사는 삶’과 ‘주님을 위해 사는 삶’ 두 가지 의식을 지니게 됩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삶’으로 인해 자신은 지혜없는 자였고 그리고 죽은 자 맞다는 겁니다. 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통해서 지혜가 작동함을 압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이 할례언약은 다음과 같이 예시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부여하고서는 그 사명받은 자를 되레 죽이려 하십니다. 아내되는 십보라의 처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 아이의 표피를 잘라다가 피가 흐르는 그 피부조직은 모세의 사타구니에 던지니 모세가 살아났습니다. 즉 모세는 사명을 받은 자가 아니라 사명이 모세를 붙드는 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사명이 없는 모세는 죽은 자입니다.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죽고 내 살자”는 식으로 야곱은 적에게 달려들어 양보없는 싸움을 했습니다. 결국 이겼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그제사 ‘건드리지 말라야 할 분’을 야곱의 이름으로 건드린 겁니다. 야곱의 본성이 바로 그런 성질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야곱은 울면서 따나려는 천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합니다. 천사는 그냥 살려두지 않습니다. 야곱의 인간존재는 죽이고 ‘이스라엘’ 존재로 살려두십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지혜의 증거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다리를 저는 불구자로서의 증거입니다.

야곱의 ‘축복된 불구자’입니다. 이처럼 지혜는 옛 자아를 죽어있음과 관련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잠에서 깨나서 그 앉아 크게 웁니다. 엄마 없다고 크게 웁니다. 인간 어른들은 ‘자기를 위한 삶’을 위해 필요한 지혜를 갖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1:25-26에, “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폭신한 이부자리가 아닙니다. 엄마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로서 밥먹고 살도록 해주시는 것은 밥값하라는 겁니다. 즉 남들에게 엄마, 아빠 찾아주는 일을 하라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삶을 위해 밥을 주시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결핍을 느끼지 못하고 자꾸만 본인이 서서로 자립하면 그것으로 상당히 잘 살은 인생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마 8:22)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곳곳이 일어나서 이 세상이 왜 악하며 지옥 위에 층층히 건설되고 있는 가를 꼭꼭 찍어서 노출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파인 곳에서 지혜의 넓이와 높이와 길이와 충만함이 크게 드러납니다.

곧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추진하고 계신 작업들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악한 세상임을 이런 식으로 성도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은 죽은 자의 삶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11-25 13:30 

51강-엡 5장 15-17(지혜)1911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15-17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15-17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기서 ‘너희’라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다시 산자’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어두움에 있었는데 주께서 손잡아 일으킵니다. 일으키면서 그냥 일으키는 것이 아니지요. 음성이 들렸지요. “잠자는 자여, 잠자는 자, 죽은 자여. 깨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라.” 주께서 일으키기 전에, 주께서 우리를 손대기 전에 성경은 우리를 죽은 자로 본 겁니다.

 

우리가 죽어 있었던 거예요. 다시 살아났을 때 , 아, 복음을 몰랐을 그 때 그 모습, 증명사진에 나와 있는 그 모습, 여권사진에 나와 있는 그 모습, 복음 모르고 결혼했을 때의 그 동영상, 이게 죽은 시체 둘이 붙들고 부케 던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자는 자에서 깨어보니까 세상에 돌아다니는 이 모든 것들이 귀신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 살려줬으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라고 했을 때 고린도전서 5장 14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고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주께서 손대서 “달리다굼, 일어나! 소녀야, 일어나라!” 하는 것처럼 직접 끄집어냈을 때, 우리 인식은 주께서 오기 전에 나는 죽은 자였음을 알았을 때, “주께서 다시 살려줬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할 때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직업을 바꾸라는 이야기 아니에요. 뱃살 빼라는 이야기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서 전도하라는 그 이야기 아니에요. 전도를 하든, 농사를 짓든, 직업을 바꾸든 그 어느 것 하나 이제 너를 위한 일은 일체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너를 위한 일. 네가 새사람 되어서 신학교를 가든, 목사가 되든, 그 목사마저 너를 위한 목사라는 것을 내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 왜? 처음 너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준 그 주님께서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관리해나가시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왜 우리를 관리하느냐?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의 구원을 위해서 교회 나왔어요. 그러나 죽은 자를 다시 살려냄을 당하고 보니까 주께서는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자신의 몸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은 자기만 구원해요. 나를 버리고. 구원파 없습니다. 구원파라는 이것은 거짓말이에요.

 

내 구원 없습니다. 끝났어요. 죽은자를 살릴 때는 나를 위해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마저도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게 만들었어요. 주를 위한 구원이 되게 나를 다시 살린 겁니다. 이게 지난 시간의 이야기였어요. 무려 네 번씩이나 들었다는 분도 계시는데, 한 번 더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섯 번.

 

내 구원을 계속 꾸준히 유지하려 하니까 설교를 백번 들어도 모르는 거예요. 나 좋으라고 살고 있다는 것을 포기 못하겠다. 그러나 이미 그 자체가 죽은 자거든요. 그러고 난 뒤에 오늘 본문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주님이 함께 있다는 말을 여기서는 ‘지혜 있는 자로서 살아가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이 제혜가 뭐냐? 이 지혜는 지혜들이 아니에요. 여러 가지 지혜들이 아닙니다. 지혜는 하나밖에 없어요. 저는 그것을 강남강의에서 ‘공동구매’라고 했는데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우리를 죄용서 하실 때 개인마다 죄용서를 하는 것이 아니고 죄용서의 기준은 공동적이에요.

 

“너 잘했나? 구원해줄 게.”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잘잘못을 따지러 오시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점심이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우리교회에서 카레라이스를 한다면 카레를 한 솥 먼저 해놔요. 밥이 어떤 접시에 있더라도 그 위에 담기는 것은 노란 카레만 담기는 거예요. 카레는 누가 만드는가? 주님이 만드시거든요.

 

그리고 그 카레로 덮이기 위해서 접시로 오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말이지요. ‘너는 못되게 살았으니까 지옥가라. 나는 착하게 살았으니 천국 간다’는 그런 것이 없어요. 이 땅에 선한영역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나는 죄지었다.’하는 자체가 그게 죄에요. 죄지었다는 것이 성립이 안됩니다. 죄 아닌 것이 없는데 무슨 새삼스럽게 죄를 언급합니까? 모든 것이 죽은자인데, 어두움에 속했는데.

 

나 죄 있어요.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죄짓기 전에는 나는 선한 영역에 있었는데 나는 죄 지은 것을 회개하기 때문에 주님이여, 내 회개를 보고 나를 용서해달라고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용서가 없어요. 잘난 자 못난 자 관계없이 주님이 만든 카레를 가지고 그냥 덮어씌우면 그게 구원이 되는 거예요.

 

지혜가 여러 개가 아닙니다. 사람이 백 사람 같으면 지혜가 백 개가 있을 수가 있어요. 내게 적합한 지혜, 네게 적합한 지혜, 이렇게 되면 지혜가 백가지가 되는 겁니다. 지혜는 하나밖에 없어요. 이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잠언서 8장에 보면, 지혜가 뭘 했느냐? 신학생들은 알아요. ‘아, 성경에 이런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대목이 있다니.’ 하고 깜짝 놀라요. 신학교 가서 알아요. 잠언서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모든 세상을 무엇으로 지었나? 지혜로 되었다고 했어요.

 

22, 23절에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32, 33절에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모든 세상을 지혜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어요.

 

지혜가 둘이나 셋이 아니고 단 하나에요. 쉽게 말씀드릴까요? 지금 은밀하게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농사하는 사람이 가을되면 추수한다고 바쁘고, 감 딴다고 바쁘지요. 본인의 일이 굉장히 바빠요. 본인일이 바쁘다 보니 하나님보고 내 일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바쁜 것과 별개로 하나님 본인이 바빠요. 하나님 본인이 꾸준히 어떤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고요. 마치 물밑에서 악어가 소리 없이 나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사적인 일에 너무 바쁘기 때문에 신경을 거기에 다 쓰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밀한 그 일의 진행이 뭔지를 몰라요.

 

미리 말씀드려서 12월 7일에 우리 이종성장로님 아들이 결혼식이 있습니다. 본격적인 광고는 다음 주에 할게요. 문제는 그 자식 결혼식에 정신 팔다 보면 은밀하게 하나님께서 따로 진행시키는 그 일을 놓칠 수가 있어요. 모든 정신이 아들 장가보내는데 있다 보니까 신경이 거기 다 쓰이는 거예요.

 

은밀한 그 일이 뭐냐? 그게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을 하는데 지혜가 뭐냐? 세상을 운행하는 원리원칙입니다. 우리는 내 일에 바빠서 그걸 신경 못쓰지요. 어렵게 하지 않고 쉽게 하겠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어요. 여러분 교회 올 때 운전해서 오셨잖아요.

 

운전하면서 빨간 차 몇 대 만났습니까? 운전하면서 빨간차가 몇 대 지나가는지 그거 신경 안씁니다. 운전하는 중에 은행잎에 몇 개가 떨어졌습니까? 제가 전에 여러 번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영주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면 눈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시골의 교회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만약에 미장원을 하시는 분이 운전을 하다보면 미장원 간판이 눈에 들어올 수가 있을 거예요. 저는 그 때 전도사였기 때문에 나도 저런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교회를 봤다는 말이지요. 만약 여러분이 벤츠를 타고 교회에 왔다면 여러분이 오는 가운데 벤츠를 몇 대 만났는지를 기억하실 거예요.

 

이걸 인간들의 자기프레임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관심 있고 생각하는 대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지혜가 아닌 거예요. 하나님이 은밀하게 행하는 것이 지혜인데 우리는 내 일에 신경 쓰다 보니까 나 나름대로의 프레임, 그 틀 안에 갇혀 있게 돼요.

 

거기서 관심 있는 것만 계속 평생 동안 추적해 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은 눈에 안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안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바꿨어요. 물질성이라 하는데 보이지 않는 지혜를 물질로 바꾼 겁니다. 물질로 바꾼 것이 뭐냐? 할례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법칙을 아예 인간 몸에다가 문신처럼 새겨버리는 거예요.

 

이스라엘사람들은 굉장히 하나님의 뜻을 청종하는 것을 쉽게 생각한 거예요. 왜냐하면 난지 팔일 만에 남성에게 할례를 행하면 그걸로 주의 뜻은 통과했고, 구원은 합격됐고 이제부터 하나님이 나를 지켜준다. 굉장히 간단하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할례언약이 간단한 것이 아니에요. 남성의 생식기를 끊음으로서 이스라엘은 전부 다 할례를 했다는 조건하에 하나의 공동지혜 속에 들어가요.

 

보이지 않는 지혜가 인간 제각기의 신체 속에 전부 다 새겨지는 거예요. 신약에서는 마음의 할례로 새겼다고 했어요. 육의 할례는 시효가 끝났어요. 인간의 눈에 보이는, 물질에 있는 구원의 증험, 시효는 끝난 거예요. 세례 받는 그것 의미 없습니다. 성찬식하는 그것 의미 없어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돼요.

 

할례는 두 가지 과정을 포함시킨 것이 할례입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전에는 내가 죽은 자였는데 표피가 끊어져 나가서 속살이 나옴으로서 그 속살을 주께서 건지셨다. 거기서 구원의 과정은 뭐냐? 겉의 것을 잘라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할례언약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오늘날 신약에서 성도는 두 가지의 마음이 있어야 돼요. 한 가지 마음은 뭐냐? 옛날 아담으로부터 받았던, 조상, 부모로부터 받았던 그 마음가짐, 그것이 나의 프레임이거든요, 내가 관심 있는 것에만 신경을 쏟고 그것으로 살아가면 그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 내 일에 몰두하는 그것. 천지 창조는 지혜가 아니고 나를 위한 그 마음으로 구성된 프레임, 그 틀이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틀을 가지고 지혜 없는 것으로 보고 그걸 죽은 자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여, 깨어나라”고 해놓고 지혜를 언급한다는 것, 지혜라는 것, 공통지혜, 우리를 구원하게 되는 공통지혜는 오직 죽었다가 산자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이 말은, 죽은 자한테는 뭐가 없느냐 하면, 지혜라는 것이 없어요.

 

죽은 자에게 없는 지혜가 너에게 있느냐고 오늘 본문에서 묻는 겁니다. 타고난 인간들이 갖고 있지를 않고 죽었다가 살릴 때만 생겨나는 그 공통지혜를 공동구매 하듯이 네가 갖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그것은 두 개 세 개가 아니에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얼굴은 너와 내가 다르지만 너와 나의 공통점이 딱 한 개있어요.

 

죽었다가 살아나서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말은, 전에는 어땠느냐? 교회를 오나, 예수를 믿으나, 삼위일체하나님을 믿으나, 모든 것이 누구 좋으라고? 나 이익 되라고 믿었던 신이었어요. 그게 지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걸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을 제가 읽어봅니다. 6절부터 보면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리고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두 개 세 개 아니지요. 사도바울 고집 세지요? 사도바울 독선적이고 독단적이지요? 멱살 잡힐 만하지요? “너만 알아?” 하고 공격당할 여지 있지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른 복음 없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 해봤자 천국 못가는 신앙생활, 그거 무슨 소용 있습니까? 천국 못가는 교회생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적어도 교회 왔으면 다른 복음과 복음이 차이가 뭐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아셔야 되는 것 아니에요? 사람 좋더라. 사람 좋으면 천국 갑니까? 이 세상에 선한 영역 없어요.

 

저 사람 나쁘다. 나쁘면 지옥 갑니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다 지옥가야 돼요. 중요한 것은 “다른 복음은 없나니” 진짜 복음이 우리에게 공동용서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는 거예요. 말을 쓰는 품새를 한번 보세요. 사도바울이 말을 쓰는 품새. 진짜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죽을 만하고요, 우우, 달려들어서 짓밟을 수 있어요. “너하고 나하고 뭐가 다른데? 너는 왜 그런 건방진 소리 하느냐.”고 짓밟을 수 있지요.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그러면 너는? 너는 돛대야? 너는 최고야?” 할 때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저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용하게, 은밀하게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저주를 유발하는 일을 하셨어요. 마치 물속에 있는 악어처럼. 사람들은 악어가 가까이 오는 것도 몰라요 자기일에 몰두해요. 사람이 자기일에 몰두할 때 그것이 복음이 아니고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리 복음, 복음 외치고 뭘 해도 그것은 다른 복음이에요. 


어디서 나를 잃어버릴 수 있어야 돼요. 뭔가 나를 잃어버릴 수 있는 그 복음, 그 지혜, 나하고 복음하고 바뀌는 그러한 계기가 있어야 됩니다. “나 아니고 복음입니다. 그동안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았는데 이제는 다른 복음이 아니고 진짜 복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고 바꿔치기가 되는 그 계기가 있어야 돼요.

그게 지혜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지혜에요. 지혜가 둘 셋이 아니에요. 그것은 네 지혜고 나는 내 지혜 따로 있다는 그런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것은 세상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지혜는 하나밖에 없어요. 네 지혜 내 지혜 없어요.

 

그러면 지혜가 뭐냐? 누가복음 16장 8절에 보면 주님께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절부터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불의한 청지기에요. 요새로 하면 회계 보는 과장쯤 되는 모양입니다. 회사의 회계 보는 과장, 경리과장쯤 되는 모양인데 이 사람이 횡령을 했습니다. 안들킬줄 알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들키게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제는 자기의 앞으로의 일은 뻔합니다. 밥 못 빌어먹게 되었어요. 이걸로 그동안 밥 빌어먹고 살았는데 이제 끝났어요. 그가 머리를 씁니다. 아직 사직서 내기 이 전에, 거기서 잘리기 이전에 자기하고 거래했던 하청업체 직원들 불러서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테니 내가 퇴직하고 난 뒤에 도움 줄래, 안줄래?” “오케이.”

 

요새 같으면 둘 다 횡령죄로 걸려야 되지요. 예수님께서 단서를 달았어요. 불의하다는 거예요. 선하지 않고 악하다. 악한 직원인 거예요. 본문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8절에 보면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자, 지혜라는 것은 자기주제파악을 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보시기에 십자가 앞에서 잘린다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었다는 사실을 미리 당겨서 알게 된 거예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지혜가 왔으니까.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주께서 “소녀야” 하고 내 손을 잡아줬으니까.

 

내가 나를 위해서 내 한 몸 위해서 산다는 이것은 원래 천지를 창조했던 원리, 지혜가 빠진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죽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죽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청지기는 내가 이 정들었던 회사, 별로 정든 것도 아니겠지만, 그 회사 떠나고 난 뒤에 자기만의 다른 세계를 마련한 거예요.

 

이틀 전에 제가 새벽에 꿈을 꿨어요. 우리 외손녀가 방에서 잠을 자다가 막 울고 있는 거예요. 가보니까 앉아서 울고 있는데 우는 이유가 뭐냐? 엄마가 없다는 거예요. 그 순간 내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엄마가 없다. 왜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남들에게 엄마 찾아주는 일을 안했을까? 아빠 찾아주는 일을 왜 소홀히 했을까?

 

주께서 하는 말이 “네가 밥값을 하나 안하나?” 자 밥값을 한다는 말은, 밥을 왜 먹느냐?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밥값이 아니에요. 그것은 광야에서 악마가 요구하는 거예요. 떡이 있어야 산다고. 주께서 우리에게 밥을 먹게 해줬을 때는 남들에게 엄마를 찾아주라는 거예요. 왜? 외손녀가 울고 있으니까. 엄마 없다고 우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거 뭐 어린애잖아요.” 하는데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네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간다는 그 말은 결함을 느끼는 거예요. 결핍성을 느끼는 거예요. 이대로는 안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남들처럼, 삼성그룹, 현대그룹, 재벌들처럼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그들은 부모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르고 엄마도 모르고 자기를 만들어준 피조물도 모르고 지혜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세상 속에 악어가 움직이고 있는 것도 몰라요.

 

십자가도 모릅니다. 다른 복음이 없다는 것도 몰라요. 우리는 그것 쳐다보면서 따라가는 거예요. ‘아이고, 잘산다. 행복하다. 나는 언제 저렇게 행복해보나?’ 그래놓고 ‘행복하려면 지혜로워야 된다. 강해야 된다. 지식을 많이 알아야 된다. 공부해야 된다.’ 공부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선한영역이 없는데요.

 

마태복음 16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다 외우지요? “무엇이 유익하리요”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지요. 그놈의 온천하에서 우리는 빠져나올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그 외손녀는 이불이 있고 베개가 있지만 외손녀에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엄마가 없다는 거예요, 엄마가! 아, 참…….

 

우리는 지금 하나님 없이도 너무 잘살고 있어요. 왜 사는지도 모르고 세끼 먹고, 맛있는 것 찾아먹고. “왜 먹습니까?” 하면 그 이유를 몰라요. “직업을 바꿀까?”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어떤 직업이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농사를 짓든, 고기를 잡든 관계없어요. 백수가 되어도 관계없어요. 무엇을 하든 간에 더 이상 나를 위해 사는 인생은 끝났다. 그런 인생은 죽은 인생이거든요.

 

출애굽기 4장에 모세한테 위기가 찾아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자기백성을 데리러 갈 때 하나님께서 갑자기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모세한테 달려들어서 모세를 죽이려고 해요. 모세가 죽을 지경이 되니까 그 부인 십보라가 어떤 행동을 했느냐? 침놓고, 마시지하고 그런 것 안했어요.

 

아들의 할례를 행했어요. 할례를 행하면 그 껍데기가 나오잖아요. 그 껍데기에 피가 그냥 묻어 있어요. 그 피를 남편의 사타구니에다 던져버립니다. “당신은 피남편이다. 피를 위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위해서 일할 사람이다.” 그러니까 희한하게도 그 모세가 죽었다가 살아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이야기가 출애굽기 4장의 모세이야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창세기 32장 얍복강의 야곱이야기에도 나옵니다. 밤에 얍복강에서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등장하니까 야곱은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결사적으로 싸웠어요. 야곱을 지키기 위해서. “나 야곱, 나 야곱이야.” 야곱은 야곱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야곱을 위해서 결사적으로 싸웠습니다.

 

싸웠는데 보니까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건들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거예요.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야곱이 승리했습니다. 꼴 좋습니다. 천사는 야곱에게 짐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본성을 있는 대로 다 들춰낸 거예요. 야곱이 ‘나 야곱의 결말은 하나님을 때려죽이는 그것이다. 그것이 이 야곱이 나도 모르게 품고 있던 것이다.’

 

이 정도로 내가 악한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 이것이 당연하고 이게 정상적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나의 프레임이 전부였던 거예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야 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하나의 표피가 달아나야 속살이 나오는 것도 몰랐고, 그저 하나님이 내편인줄 알았어요. 그것뿐이에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야곱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렸다고 한 그 때부터는, 당신 없이는 못살겠다고 붙들고 살려달라고 합니다. “살려주세요, 하나님! 나는 당신이 없으면 못삽니다.” “왜? 너 혼자 잘 살지 왜?” “당신 없이는 못살겠습니다.” “놔라 이거. 지금 해 뜬다. 너는 이 세상 사람인데 지금 해가 뜨니까 너는 이 해 아래서 그냥 살아. 나는 떠난다.”

 

울면서 못 떠나게 발목을 잡고 기어이 매달립니다. 나의 속사정이 다 들통 난 마당에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주여, 살려주옵소서.” “살려주되 나는 너 안 살려준다. 야곱을 살려줄 의사가 없다.” 그런 식으로 묻습니다. “네 이름이 뭐지?” “야곱입니다.” 야곱이 하는 짓이 그 짓 외에는 뭐가 있겠어요? 안지려는 짓밖에 더 하겠어요?

 

“이름을 바꿔라. 네가 이제 이겼다. 하나님마저 네가 이겼다.” 그리고 야곱은 장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장애자가 된 그게 뭐냐 하면, 까불다가 맞은 거예요. 얼마나 영광인지요. 갈라디아서 6장에 나와요.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가 여기 있다.” 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사도바울도 이름이 바뀌었어요. 사울에서 바울로. 자기가 죽은자인줄 몰랐지요. 주님 찾아오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겁니다. 이게 지혜가 갖고 있는 일방적인 원칙입니다. 그냥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으면 내 구원을 취하기 마련이에요. 이 잘난 나를 천국 보내달라고 멋도 모르고 계속 가요. 까불이 같아요.

 

주께서 찾아와서 죽었다가 다시 살려줄 때, 아, 더 이상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나에게 없다는 사실,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신약에 와도 그런 예가 있는데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청년이 나와요. 부자청년이 자기가 선하다고 여겼습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 선한 나를 천국까지, 영생까지 이어보려고 애를 썼어요.

 

이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통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말하기를, 그 부자청년에게 뭐가 누락되어 있느냐? 그렇게 십계명을 지켰던 자기자신을, 주께서 안받는 그것을 자기는 쥐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하는 그 사실을 하나님이 안 받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에 부합되는 것만 받아요. 개인구원을 안받습니다. 자기가 상실되어야 된다는 사실이 없으면요, 상실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반대로 나가요.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보고 “네 모든 것을 바치고” 결핍이지요. 비어있지요.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2절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자기 옛날 자기가 잘났던 그 자리로 되돌아갔어요.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재물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버릴 수 없는 요소를 건드린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이 깜짝 놀라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 하고 아주 걱정을 늘어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그렇게 단정하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결국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인생으로 영원한 제 2막이 시작된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서.

 

마태복음 8장에, 또 당황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21절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할 때 주님께서 하는 말이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오라는 이러한 원리를 주님께서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테니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실제로 영화화된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자가 차사고로 정신을 잃었을 때 어떤 아저씨가 자기를 납치했어요. 나중에 깨어나서 자기가 납치당한 것을 알아요. 어떤 지하벙커에 갇혀 있어요. 어떤 영화이야기입니다.

 

“아저씨, 날 집에 보내주세요.”라고 하니까 그 아저씨가 하는 말이 “지금 벙커 밖은 방사능으로 오염이 되어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 이 벙커 안에 있는 우리 세 사람만 남았다. 지금 내 말을 믿어라. 밖에 나가면 다 죽는다. 나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부러 차사고도 낸 것이다. 몇 년 후 오염된 공기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여기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을 때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과연 그 말이 진짜냐, ‘거짓말입니까, 아니면 진실입니까?’ 하는 거예요.

 

이게 정말 어려운 이야기에요. 납치된 아가씨의 생각은 뭐냐 하면, 납치되기 전의 바깥세상은 날씨가 굉장히 좋았고, 공기도 좋았다는 그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지하실에서 눈을 뜬 거예요. 그런데 웬 낯선 남자 둘이서 하는 말이, “바깥은 지금 다 오염되었고 다 지옥이 되었다. 여기 있어야 산다.”고 했을 때 과연 옛날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내가 그걸 받아들일 여지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그게 없다는 거예요. 노아방주에 들어갔을 때 방주에 들어가고 난 뒤에 심판이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주에 탔지만 오늘날, 아까 말한 갈라디아서 1장, 다른 복음을 믿으면 저주받는다는 사도바울의 말이나, “아가씨는 지금 밖에 나가면 곧 죽어,” 그 말이나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우리는 양다리를 걸치고 싶지요. 어느 것이 옳은지 내가 선택하고 싶지요. 그러나 선택하는 순간 죽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어떻게 지혜롭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불의한 청지기가 횡령하다가 들켜서 하청업자들 연락해서 살궁리하는 그 모든 것이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런 사람 예를 들면서 하는 말이, 이 불의한, 분명히 나빠요, 그 불의한 청지기가 이 세대의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고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벙커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 안이 벙커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구경만 하잖아요. 예수님이 믿을만하면 믿고 안 믿을만하면 안믿는다 하잖아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다시 말해서 그 벙커가 과연, 그 아저씨의 말이 맞는지?

 

예수님께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 십자가를 믿어야 천국가고, 십자가외에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는 방법이 없다고 분명히 했거든요. 제 이야기 아니겠지요. 고린도전서 1장 20-24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집안에는 좀 미안하지만 지금 주께서 은밀하게 이 일을 추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뻔히 안다고 했지요. 아는 것이 아니에요.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릴 것은, 과연 예수님만이 진짜 벙커고 예수님 밖에 나가면 죽는다는 그 증거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증거가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두 사람의 죽음을 대비했어요. 하나는 다윗의 죽음이에요. 27절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예수님이 무덤은 빈무덤입니다.

 

그런데 29절에 베드로가 하는 말이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사도베드로나 사도바울이나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의 빈무덤입니다. 그 빈무덤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이 죽은 자들의, 시체들의 집합체라는 이것이 맞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십자가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이 맞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다른 복음전하면 저주받는 것, 우리의 행복이라든지 교회 부흥, 이것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이것이 맞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내가 노력해서 따로 내가 구원받으려고 어떤 조치를 하는 이것이 지옥가는 일이라는 것이 맞는 이야기에요.

 

사적으로 나만이 나를 구원하는 것을 따로 챙기는 것이 아니고 공동으로 마련된 것이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카레라이스가.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빈무덤, 이거 수능에 안나옵니다. 세상은 그걸 감추기에 급급하지요. 만약 수능시험에 제가 문제 내볼까요? “다윗의 묘와 예수님의 묘와의 차이점은?” 이거 내 볼까요? 난리 납니다. 왜냐하면 수능을 쳐도 그것은 시체가 치는 것이 발각되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왜 우리에게 지혜롭게 행하라고 하느냐? 이 지혜가 굴삭기입니다. 굴삭기가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어느 지점에 보내요. 또는 어느 장소에 보냅니다. 대구라든지 서울이라든지 그 사람 사는 특정장소가 있어요.

 

그 장소에서 뭘 하느냐? 계속 그 자리를 파버립니다. 파버리게 되면 1년 전 상황과 두 달 후의 상황, 그 사람 속에 지혜가 살아 있으니까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그 사람을 지혜굴삭기로 파게 되면 이 세상이 왜 지옥에서 올라온 지옥의 표피층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옛날에 써먹었던 원리원칙이 오늘에는 전혀 먹히지 않고 오늘에 먹힌 원리원칙이 내일 되면 또 먹히지 않아요.

 

지혜는 멈추지 않고 늘 새롭게 창조되고, 새롭게 우리를 통해서 작용되는 겁니다. 여기 있을 때는 진리를 몰랐는데 저기 있을 때는 진리를 알고, 저기 있을 때는 진리를 몰랐는데 또 딴 데 가니까 거기서 진리를 알고,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십자가가 다시 한 번 새롭게 느껴지고요.

 

세월이 가면 갈수록 부딪히는 모든 상황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못난 우리를 하나의 굴삭기, 포크레인으로 사용해서 쪼아대게 되면 그 현장에서 그동안 몰랐던 주님의 용서와 주님의 하신 일의 일관성이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전도하는 중입니다. 이 세상과 달리 때가 악하다는 것을 고발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에베소서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다른 복음이 아니고 진짜 복음을 아는 너를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지옥이고 악한 세상인 것을 우리가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메뚜기처럼 지금도 계속해서 그 자리를 파고 또 파고 파서 주의 십자가가 왜 우리를 이 지옥에서 건졌는가를 감사하면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른 복음은 없는데 우리는 복음에 대한 관심보다도 꾸준히 나만 살기 위해서 시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여, 죽은 자인 것을 다시 한 번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님의 빈무덤을 생각해서 우리가 하는 일이 막연한 이론이 아니고, 학습이 아니라, 실제상황인 것을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