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5 12:40:19 | 조회 : 620 | 말씀의 중앙 190915 |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 | | | 이근호
| 19-09-15 13:31 | 말씀의 중앙
2019년 9월 15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4:25-27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해하는데 참 쉬워 보이는 대목이지요. 하지만 건너 뛰지 말아야 될 게 있습니다. 그것은 ‘지체’라는 단어입니다. ‘지체’란 지체 자체가 단독적인 몸이 될 자격이 없음을 전제로 한 겁니다. 이 세상 인간 세계에서 타인을 보도 ‘나의 지체’라고 할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몸을 단독적으로 최종적인 ‘1’로 간주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1이 바로 자신의 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읽어도 ‘〜지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안 보려고 합니다. 그 대신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훌륭한 신자인자를 드러내는 기회가 오늘 본문에 제공해 주리라 여깁니다. 우선 거짓을 버리면 되고, 이웃에게 거짓말 하지 않으면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어릴 때부터 가정 교육을 철저히 받으면 이 정도는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지 않을 자신도 있다고 여깁니다. 오후 6시 46분 이후에만 마음놓고 분을 품어도 이 본문 말씀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화를 내지만 않는다면 악마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 전부가 ‘지체’가라는 것을 빼놓았을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즉 최종적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나 자신 뿐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나만 구원받으면 성공이다’는 의식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없애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아 있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예수님의 한 몸’입니다. 이 예수님의 몸의 하나(1)성과 인간들의 하나(1)성이 성도 내부에 내내 다투고 경쟁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나의 하나됨을 돋보이게 도움을 요청할 거냐 아니면 주님의 몸이 하나됨을 드러내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이 뭉개질 것인가를 두고 다투어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나의 하나됨을 유지하겠다는 정신이 바로 이미 악마이 틈이 탄 사고방식입니다. 사람들이 어디서 분노하고 화를 내는지를 생각해보세요. 자기 것 건드리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겁니다. 그동안 평생 쌓아올린 자기 의로움과 자기 정당성을 건드릴 때 인간은 화가 나는 겁니다. 즉 ‘내 것은 내가 지킨다’ 정신을 무시하지 말라고 하면서 화를 내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궁극적으로 ‘자기 의로움, 자기 정당성에 기대를 걸고 의지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인간들의 의가 예수님의 의를 가리게 됩니다. 인간들이 이 정당성을 위하여 스스로 규칙을 만듭니다. 스스로 만든 규칙에 의해서 죄와 의를 본인식으로 결정짓습니다.
‘나를 위한’ 규칙이요 나를 천국 보내주기 위한 규칙입니다. 하지만 이 준칙과 규칙은 애초에 악마가 인간들에게 장려해 온 것들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까지 메시야 노릇을 하면서 인류의 마음을 달랬고 희망을 주고 왔습니다. 악마의 정신은 오직 하나, ‘너의 의를 포기하지 말라’입니다.
흔히 말해서 ‘자본감’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악마가 이 자존감을 지키라는 당부하는 이유는, 죽기 전부터 지옥에 합당한 삶의 스타일을 조성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자존심에 근거해서 들어가게 됩니다. 스스로 망하겠다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죄를 짓더라도 반성하고 회개하면 다시 나만의 자존감이 만회된다고 여깁니다.
죽어서도 지옥가게 해주는 식의 삶의 자세에 모든 인간은 푹 젖어있습니다. 몸에 배겨있습니다. 이러한 악마의 세계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가는 방법이 어떠한 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방식이었습니다.
인간들이 이해하는 것은 대충 이런 식입니다. 기록이 되는 글들을 보세요. 그리고 순서적인 변화가 적혀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설프지만 나중에는 개과천선해서 훌륭하게 인격이 변모되었다는 점에 있어 모든 인간들이 납득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겁니다. 인도의 어느 공주는 인물을 이쁘지만 성질을 고약해서 나라가 위기에 놓여 있지만 나중에 과일을 통해서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내려옵니다.
어떤 홀로 된 노인네가 84일 동안 아무 고기도 잡지 못하고 젊은 이로부터 ‘가장 운이 나쁜 자’라는 핀잔을 받지만 나중에서 큰 고리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납득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납득 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는 시간을 흘러가면서 순서적으로 좋은 쪽으로 변화를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드냐”고 말입니다.(갈 3:1) 즉 시간이 가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제도 십자가, 오늘도 십자가, 내일도 십자가 뿐입니다. 즉 부모가 먼저 죽고 난 다음에 자식이 죽더라도 부모, 자식 모두가 살아 있더라도 죽음 속에 있다고 보는 겁니다.
왜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죄와 구원, 천국 이런 모든 성경 개념들이 한 중심지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구약에 나오는 제단입니다. 죽음의 제단입니다. 죽음의 힘이 산 자들의 힘을 이겼기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탈출 성공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특이한 민족입니다.
사람들은 애굽에서의 탈출을 꿈꾸지 않습니다. 도리어 모든 나라가 그 애굽나라의 시민이되는 것이 소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힘이 그 애굽으로 다 들어오고 쏠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있는데 구태여 이 세상에서 탈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모든 오늘날 현대 사회에 큰 성 바벨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쏠려서, 더는 더 쪼개질 리가 없는 최종적인 세상 표현이 음녀, 큰 성 바벨론입니다.(계 17:5)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탈출하겠다는 의도가 낯선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체적으로 힘이 없고, 힘을 추구하지 않는 새로운 나라를 애굽 나라 속에서 만들어내십니다.
이 이스라엘 속에서 ‘죽음의 힘’이 나옵니다. 모든 것을 없애는 힘입니다. 속죄제가 그러하고 속건제가 그러하고 화목제가 그러합니다. 제단에서 저주의 불을 끄트리지 말아야 하고(레 6:12) 모든 것은 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즉 구약에서는 죄를 율법으로 끄집어내고 제사의 피로 용서하십니다.
반면에 신약에서는 ‘이미 용서를 해주시고’ 그 다음, 이 용서받은 죄가 우리 자신을 통해서 얼마나 무한한 깊이를 가지고 나오는지를 평생 겪게 하십니다. 따라서 도둑질을 따로 할 필요도 없이 우리 자신의 모든 자세나 모습이 다 도둑질이요 탐을 내는 일입니다. 출애굽기 11:7에서, 하나님은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용서받았기에 말씀 단어나 개념을 통해서 하나된 저주의 칼날을 뽑아볼 수 있기 하십니다. 이것이 같이 지체 사이요 같은 형제사이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보이시고 그분이 시키는대로 살면 됩니다. 사랑이란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말씀을 찔려주옵소서. 피묻은 칼로 찔려서 십자가를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 | 이근호
| 19-09-16 12:00 | 41강-엡 4장 25-27절(말씀의 중앙)1909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25-27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25-27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방금 읽었던 이 말씀 속에서 여러분이 별로 어려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를 놓쳤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없다고 그렇게 오해하는 겁니다. 뭘 놓쳤느냐? 25절 끝에 있는 단어 하나를 놓친 거예요. “지체가 됨이니라.” 지체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인간은 지체가 아니에요. 인간은 개인입니다. 개체라 하고 지체라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의미와 가치의 최종성이 본인이기 때문에 지체가 성립이 안돼요. 먹는 것도 나를 위해서 먹고, 모든 하는 것도 내가 최종적인 의미에요. 내가 죽으면 하나님도 의미 없어요. 예수도 마찬가지고. 예수 믿는 것도 나 좋으라고 믿는 거예요. 나 이익 되라고 믿는 거지요.
나 챙겨주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한테 의미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명절날 친척집에 가서 ‘아무나 만나라’ 하고 벼르고 있는데 한 사람이 걸려들었어요. 그래서 외쳤습니다. “얻으려고 하는 교회는 이단입니다. 하나님 앞에 얻으려고 하는 교회는 이단이니 다니지 마세요.” 그것부터 해서 한 10분간 복음 전했습니다. 내 할 일 했다는 생각, 자부심이 들었습니다만.
내가 뭘 얻으려고 하는 하나님이 왜 이단이냐 하면, 그동안 꾸준히 악마가 구세주노릇을 해왔던 겁니다. 인간이 이미 악마로부터 범죄해서 주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주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의 메시아, 하나님, 누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겠어요? 악마, 마귀외에는 구세주나 하나님 역할을 할 자가 없어요.
그 악마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빼앗기지 말아라. 망하지 말아라. 네가 실패하면 안 돼.” 꾸준히 교회에 있으나 없으나, 교회 나가나 안 나가나 꾸준히 그런 이야기만 배후에서 강요해 왔었습니다. “성공해야 된다.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되면 안 된다.” 그러나 성경 오늘 본문에서 ‘지체’라는 것이 어려운 이야기인데 지체가 뭐냐?
하나님께서 나를 없애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있어요. 내가 없어지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있다고요. 사람이 자기가 없어지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이게 현실의 종결인 줄 알아요.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하나님이나 예수 전부 다 현재 있는 나, 없어져서는 안 되는 나, 절대로 사라져서는 안 되는 그 나를 위해서 교회가 생겼고, 하나님이고, 예수고 모든 아이디어들이 다 쏟아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사건을 일으켜서 ‘이 땅에서 사람이 사는 방법은 이렇다.’라는 것을 보여준 거예요. 이 땅, 다시 말해서 너희가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멀쩡하지가 않은 세상이에요. 멀쩡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곧 길이다. 내 방식대로 해라. 나는 이 땅에 죽으러 왔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없애는 거예요. 없앰으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말은, 내가 있다고 우기고, 있다는 이것이 현실의 일부라고 우기는 순간 우리는 계속해서 가려지는 것, 진짜 진리는 가려지는 겁니다. 나를 없애야 나타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지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체는 둘이 모인다고 해서 지체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둘이 있을 때 각자 하나가 하나라는 의식이 사라질 때 비로소 등장하는 지체라는 새로운 하나에요. 새로운 하나. 네 명이 모여도 하나의 지체고 열 명이 모여도 하나의 지체죠. 그걸 하나의 지체라고 하지 않고 보통 하나의 몸이라고 하는데 하나의 몸에 달린 열 개의 지체, 스무 개의 지체가 되려면, 14만 4천이 되려면 그 몸의 하나와 나라는 최종적인 나의 하나와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됩니다.
내가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나라는 이름의 하나를 마감처리하기 위해서 내가 행동하느냐? 아니면 나 말고 내가 기어이 가리고 있는, 내가 살아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가려져 있는 그 하나, 그 하나의 몸을 위한 나의 행위냐? 그러한 다툼과 경쟁이 성도 안에서는, 성령이 있는 사람에서는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지체라는 말이 너무 어려우니까 이걸 그냥 뛰어넘어요. 지체는 제키고 “거짓을 버리라.” 하면 ‘우리 집안에서 교육상 거짓말 하는 것은 돌아가진 부모님 앞에서 용서가 안 돼. 거짓말 안하는 것 하나는 내가 괜찮게 해낸다.’ 그런 생각이 있을 것 아닙니까?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거짓말 할 필요 없다 이거지요.
그 다음에 지체는 모르니까 넘어가고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그래. 성날 때 조심해야 돼. 에베소서 4장 26절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어. 화날 때 착하게 살아야 돼.’ 그 다음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지금 대구의 해지는 시각이 오후 6시 46 분경인가 그래요. 그러니까 오후 6시 46분 이후는 좀 화내도 괜찮아요. 9시 뉴스도 좀 있다 할 거니까 그 때 화낼만한 사람들이 죽 등장하잖아요. 5촌 조카 뉴스부터 해서 나오는데 그 때는 화내도 괜찮아요. 그 전에는 안 된다는 식으로 그거 지킬 만 하잖아요. 이거 어렵지 않아요.
본문 27절에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아, 화를 낼 때는 마귀가 틈을 타니까 화만 안내면 마귀는 나하고 상관없다.’ 이렇게 정리를 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니 복을 받겠지.’ 하는 식으로 계속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복의 최종수여자가 누굽니까? 그 택배를 받는 사람이 누구에요? 나잖아요.
결국 모든 의미, 성경 지키는 모든 의미가 나에게 실익,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교회 다닌 거예요. 하나님 앞에 얻어 챙기기 위해서.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하니까. 그러면 뭐가 빠졌는가? 지체라는 것이 빠져버렸어요. 지체가 빠졌다, 안 빠졌다는 것을 어떻게 점검할 수 있는가? 지체가 빠져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내가 지킬 규칙과 법칙을 내가 자꾸 제정해 내는 경향이 있어요.
‘나는 이런 선을 안 넘어야지. 나는 이것만큼은 지켜야지.’ 징크스라고 하는데 ‘이거 어겼다가 나 혼났다. 이것만큼은 앞으로 지켜야지. 이 선은 안 넘어야지.’ 넘지 못할 선이 있다면 이미 여러분은 시험 드신 겁니다. 마귀가 그런 식으로 이끈 거예요. 본문에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데 마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마귀는 뭐냐? 죽어서도 지옥에 살 수 있도록 지금부터 길들이는 일을 마귀가 합니다. 죽어서 지옥에 가서도 지옥맞춤 삶을 살도록 살아생전에 지옥에나 딱 적합한 스타일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마귀에요. 왜냐하면 본인도 지옥가기 때문에 그래요. 원래 지옥은 마귀 들어가라고 만든 것이 지옥이거든요.
너하고 나하고 같이 들어가자는 식으로 맞춤인데 지옥에 들어가는 악마가 하나님한테 하는 최종적인 것이 뭐냐? 내가 기댈만한 나만의 독자적인 의로움을 장착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기대할 수 있는 나의 정당성. 한평생 이렇게 살아왔다는 그 정당성. 딴 것은 다 잃어버려도 그것은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계속해서 살아생전에, 교회에서나 교회 밖에서 우리에게 마귀가 교육을 시켜 왔습니다.
내가 마지막 기댈 수 있는 나의 의로움, 그것을 흔히 쉬운 말로 자존감이라고 이야기해요. “네가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너의 자존심만큼은 네가 포기하지 마라.” 그러나 성경은 네가 자존심과 자존감이 있어버리면 뭐가 구성이 안 되느냐 하면, 지체라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지체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를 표현하기 위한 이미지로서의 지체인데 지체가 없어버리면 최종적인 1이 결국 나로서 종결이 됩니다.
최후적인 하나는 역시 나 외에는 하나에 들어설 것이 없어요. 마지막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달려갈 목표점은 뭐냐? 나의 나됨이에요. 나의 스스로 됨. 선악과 따먹고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한 그 악마에게 평소의 행세를 교육받아서 우리가 그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고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고치는 것이 아니고 대조를 시킵니다.
대조시킬 때에 모든 인간이 전부 다 마귀의 종이 되었으니까, 로마서 5장의 말씀처럼,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마귀의 종이 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분을 이 땅에 보내셔서 대조를 시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그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서 대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위상이 뭐냐?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가 뭐냐? 예수님처럼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말은, 이 세상에 있는 지옥 가는 사람과 천국 가는 사람을 대조시키는 역할을 하라고 성도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최종적으로 내가 구원받으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또 나로 마감이 되니까. 지체가 되려면 한 몸이 하시는 일의 연관성, 또는 연속성이 있어줘야 그게 성도다 그 말이지요.
지체면 지체답도록 한 몸에 매여 있어야 되거든요. 한 몸 되게 하시는 그 몸이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반복시키는 겁니다. 그러한 성령을 통한 반복이 신약에 있지만 구약에서 이미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1장 7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애굽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애굽나라는 그 당시에 모든 국가의 이상적인 모델이었습니다.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말은, 어떤 나라도 애굽나라에서 탈출에 성공한 나라가 없다는 뜻이에요. 왜 애굽나라에서 탈출에 성공을 못하느냐? 애굽나라에 있던 시민들, 백성들이 애굽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탈출이라는 개념자체를 끄집어낼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온 세계를 애굽이라고 하고 또는 큰 성 바벨론이라고 했거든요. 큰 성 바벨론, 애굽, 음녀, 공통점이 뭐냐? 전부 다 하나로 마감이 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하나가 되어버리면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탈출한다는 그 개념자체가 성사가 안 됩니다. 가장 좋은데 왔는데 탈출할 이유가 없잖아요.
고 3 되어서 수능 60일 남았거든요. 고 3애가 엄마에게 자꾸 고민을 이야기해요. “엄마, 고민이 있어” “무슨 고민인데?” “나 서울대학 안가면 안 돼?” 이게 성립이 될까요? “나 점수는 너무 넉넉해? 그런데 엄마 미안한테 나 서울대학 안가면 안 돼?” 친구가 들었으면 많이 맞았을 거예요. 건방지다고.
최종적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은 모든 세계를 하나로 봐요. 큰 성 바벨론, 없는 것이 없는 곳, 가장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여겼던 것, 지상의 낙원이지요. 그게 큰 성 음녀거든요. 모든 재화, 사물, 상품들이 다 집결하는 곳이에요. 그게 마지막 네 번째 짐승 로마의 모습이에요. 없는 것 없이 전부 다 가졌습니다. 탈출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탈출이 있을 수가 없는데 거기서 탈출했다는 말은 뭐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이성을 가진 민족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새로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구별한다는 것. 성도라 하는 것은,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닙니다. 성도는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이 의미가 아니고 도저히 이 세상 사람들로서 다른 천국백성이 없는 것이 마땅해요. 천국 갈사람, 영생 얻을 사람이 없는 것이 마땅한데, 그런데, 그게 마땅한데 천국 가는 사람이 생겼다는 거예요.
생길 때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탈출이라는 것,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탈출이라는 개념을 품고 꼼지락거리면서 탈출을 시도하는 특이성을 가진자가 등장한다는 그것이 바로 이 땅 일에 포함되지 않는 예외적인 일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 몸에 지금도 현존하시는, 몸이 죽은 몸이 아니고 지금도 성도라는 이름으로,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니까, 소자라는 이름, 작은 자란 이름으로 살아 있는 거예요.
구별되는 겁니다. 구별되어서, ‘악마가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그 말은, 너희들이 마귀한테 속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백성이라는 거예요. 옛날 같으면 이스라엘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자기들 힘으로 빠져나왔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은 뭐냐? 뿌리가 없어요. 뿌리가 없는 백성들.
뿌리가 없다는 말은, 스스로 설 수 있는 에너지나 힘이 전혀 없다, 전무한 백성이 이스라엘, 히브리민족이에요. 힘이 없기에 그들은 탈출이 가능한 겁니다. 애굽은 힘의 집결성이니까. 모든 힘들은 다 그 중심으로 모였는데 거기에는 오직 힘을 가진자만 있을 뿐만이 아니고 힘을 사모하는 자, 더 큰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자들, 세상 힘은 거기에 다 응축이 되어 있으니까 거기서 경쟁하고 빼앗기 위해서 다 찾아들겠지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 전혀 힘없이 살아가는 특이성 있는 민족을 이스라엘 이름으로 만들어내시고 뽑아내십니다. 힘이 없는 채로 뽑아냅니다. 힘으로 사는 세상에서 힘이 없다는 것은 곧 탈출 불가를 이야기하지요. 성사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탈출할 때 이스라엘에 내장된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살아있는 자들이 가진 힘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죽은 희생제물의 힘이 그들로 살아 있는 애굽에서 탈출을 성사시킵니다.
문장이 좀 길지요. 그들과 함께 죽어 있는 자의 힘이 살아 있는 자의 힘보다 더 세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힘이, 살았다고 우기는 조국의 힘보다 더 센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탈출할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를 이유가 없어요. 산자의 힘은 결국 지옥가게 만들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가게 만듭니다.
이 세상을 제대로 알아야 되는데, 바로 지체가 아닌 자들의 세상은 산자들이 더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런 세계,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사는 거라고 너무나 익숙해져서 몸에 배어버린 우리, 이 우리가 천국가고 영생 얻는다는 이것은 구라지요. 거짓말입니다. 그동안교회에서 악마가 메시아 노릇했고 악마가 온갖 짓들을 다 했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착각들을 하고 예수한테 힘을 뽑아내려고 그 짓을 한 거예요. 자기 자신은 그냥 멀쩡하게 있으면서.
자기를 부인하라 할 때 그 뜻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그냥 십자가 걸치면 그것은 목걸이가 되지요. 달랑달랑. 그것은 목걸이지 십자가 아니에요. 십자가는 내가 없어야 비로소 등장하는 힘이 십자가잖아요. 그러면 십자가가 찾아왔다는 말은 나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무엇이 없어져야 되는가? 도대체 무엇이 없어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가? 그걸 지금부터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제가 이 설명하면서 보통 성경에서 하나님의 원수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원수를 먼저 생각하지 말고 악마의 원수가 뭐냐를 먼저 생각해야 되지요. 악마한테 원수가 있어요. 악마의 원수가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내뱉는 단어, ‘말’하고 악마가 만들어내는 단어하고 다르지요. 다르다 하니까 여러분이 중립지역에서 그 다른 것을 골라잡을 생각을 하는데 제가 이런 예를 들게 되면 골라잡을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게 될 거예요.
멕시코 만에서 작은 배를 타고 있는 외로운 노인네가 있어요.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40일 동안 청년이 같이 고기를 잡으려고 있었는데 40일 동안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그래서 부모가 그 청년보고 “너는 그 노인하고 같이 있지 말고 나와라.” 그 청년이 나오면서 하는 말이, 이 세상에서 가장 운 없는 사람이 당신이라고 해요.
헤밍웨이가 썼던 소설 <노인과 바다>의 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그 대목을 보면 이해가 돼요. 왜냐하면 순서적이니까. 84일 동안 고기를 못 잡았고 함께 40일 동안을 있었던 청년도 이제는 희망을 버리고, 기대를 버리고, 당신과 함께 있으면 희망이 없다고 하면서 노인을 버리고 나왔다. 순서가 있지요.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했습니다. 이것은 순서가 아닙니다. 순서적인 것은 마귀적이고 순서가 없는 것은 ‘동시성’이라고 보면 돼요. 순서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보면서 죽 이해가 되고 납득이 돼요.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이해가 될 수가 없지요.
그래서 또 예를 들겠습니다. 인도설화에 이런 것이 있어요. <페리움과 카츠바>라고 있어요. 페리움은 키르티라는 작은 왕국의 공주인데 너무 예뻐요. 너무 예쁜데 성질은 개떡 같아요. 너무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까 아주 성질머리가 어릴 때부터 아주 더럽게 된 거예요.
우리교회에 애들 좀 주의해야 될 것이 있어요. 다들 예뻐요. 성질머리 주의해야 됩니다. 다들 예쁘다고 해줘서. 나라는 작지요. 공주는 예쁘지요. 다른 큰 나라에서 저걸 삼키기 위해서 막돼먹은 공주가 성깔을 더 부리게 만들어요. 이웃나라에서 여자 친구들을 보내서 잘났다, 잘났다, 계속 했습니다. 그래서 페리움 공주는 명품가방부터 온갖 사치를 떨었어요.
하다하다 안되어서 아버지가 이러다가 나라에 위기가 온다 싶어서 결혼을 시키려고 이웃나라 하미르왕자를 소개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미 첩자로 왔던 이웃의 큰 나라 여자 친구들이 하는 말이 “파미르 왕자가 얼마나 못생겼는지 거북이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람을 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나는 거북이하고는 못삽니다.”하고 버틴 거예요.
아버지가 안 되겠다 싶어 페리움을 옥에 가뒀습니다. “밥도 안준다.” 처음에는 반항하면서, ‘설마 이렇게 예쁜 딸을 아버지가 그렇게 하겠나?’ 했는데 결국은 밥도 안줘요. 나중에 두리안이라는 과일을 집어넣었어요. “내가 이딴 것이나 먹을까!” 하고 발로 차버렸어요. 그래도 계속해서 밥을 안주니까 나중에 자기가 버린 과일을 주워서 먹어보니까 너무 맛있거든요.
거기서 깨달았어요. ‘겉만 예쁘다고 해서 내면이 좋지 않으면 안 된다. 내면이 아름다워야 된다.’ 그걸 깨닫고 난 뒤에 정신을 차리고 하미르 왕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 왕자는 이웃의 큰 나라의 왕자라서 나라를 이웃나라들의 위험에서 잘 구했다는 인도의 설화입니다. 모든 것이 순서적이에요. 납득이 된다고요.
그 이야기 자세히 알려면 유아실에 동화책이 꽂혀 있어요. 모든 것이 순서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냐? 갈라디아서 3장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이 말은 뭐냐? 어제도 십자가, 오늘도 십자가, 내일도 십자가. 자식하고 아버지하고 누가 먼저 죽는가? 대체로 아버지가 먼저 죽고 자식은 나중에 죽지요. 그러나 십자가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자식죽음과 아버지죽음은 동시적이다. 다 같이 죽음에 속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성경자체가. 우리가 평소에 알던 멋진 교훈 아닙니까? 사람이 겉만 예쁘면 안 되고 속도, 내면도 아름다워야 된다는 그 교훈. 그 교훈을 듣게 되면 ‘그래, 나도 정신 차리고 바른 인간되어야지.’라고 자기의 시간 순서적으로, ‘옛날에는 철딱서니가 없었지만 나도 이제 철든 사람이 되어야지.’ 순서를 지니고 있는 것,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시간성을 내부에 갖고 있으면 이것은 마귀적입니다. 이것은 지옥 가는 거예요.
성화론, 이거 지옥 갑니다. <노인과 바다> 노인은 잡은 고래하고 사투를 벌이다 잡기는 했지만 결국 고래는 상어에게 다 뜯어 먹히고 자기도 죽는다는 그런 것. 헤밍웨이의 그 소설이 납득이 되는 이유는 평소에 우리가 그렇게 이해가 되는 식의 환경 속에서 죽 거기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베소서 4장을 딱 보면서 ‘그래, 옛날에는 내가 도둑질을 했지만 이제는 도둑질 안할 거야. 전에 화를 냈지만 이제는 화 안낼 거야. 옛날에는 마귀가 틈탔지만 이젠 그렇게 안하게 할 거야.’
성경을 보는데 인도의 설화 보는 것, 그리고 <노인과 바다>를 보는 것과 차이점이 뭐가 있어요? 차이점 없어요. 이거 구원 안 됩니다. 성경을 백날 보니 뭐합니까? 아무 소용없어요. 훌륭한 교훈집으로, 내가 천국 가기 위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참고서적이에요. 성경을 좋은 이야기, 선한 이야기를 모은 문집정도로 봐요.
우리가 이 세상이 뭐가 문제인지, 왜 하나님이 나를 제거해야 되는지, 그 이유도 모르면서 교회 나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제거하려고 해요. 유일한 의미를 갖고 있는 나, 그 나를 제거하려고 해요. 내가 진짜 하나를 자꾸 가리고 있으니까. 진짜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는데 내가 자꾸 얼쩡거리면서 살아가요.
그냥 얼쩡거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규칙을 만들어요. ‘나 이거 지킬 거야. 주일 아침은 꼭 참석할거야. 십일조는 할 거야. 나쁜 짓, 거짓말 안해야지. 어느 선은 지켜야지.’ 그거 지켜서 뭐할 건데? 누구 좋으라고 지킵니까? 지키다, 지키다 안 되면 또 순서적으로 나갑니다.
이번엔 여러분이 이해가 되실 거예요. 어떤 노래 가사인데요. 송 춘희라는 분이 불렀던 노래에요. 젊은 사람들은 송춘이 몰라요.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에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입니다.
야, 얼마나 이게 가슴에 와 닿는지. 머리는 깎았는데 임을 잊을 수가 없어서 법당이 우는 장소가 되어서 웁니다. 밤새도록 울었어요. 그렇게 우는데 새벽 염불종이 울린다는 가사. 인적 없는 수덕사 밤은 깊은데. 송 춘희 노래 한 번 들어보세요. 이 노래 아니면 <산장의 여인> 그런 것. 그것도 안 되면 <잊혀진 계절>의 가사 “시월의 마지막 밤을……” 또 <마이 웨이>
이 모든 것이 뭐예요, 결국은?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최종적인 하나는 나뿐이라는 거예요. 과연 성경이 그걸 용납할까요? 아니면 없앨까요? 우리는 애굽입니다. 탈출할 마음도 없어요. 하나뿐인 나에서 탈출할 마음을 우리는 먹지를 못해요. 마지막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나뿐인데 그런 “나를 제발 좀 박살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여러분이 해본 적이 있어요?
좋게 기도해도 아멘소리가 안 나오는데 나올 리가……. “마지막 남은 나를 언제 좀 부숴줄 거예요?” 이런 것. 이별보다 더 힘든 게 결혼입니다. 오랜만에 좋은 소리 해서 미안합니다. 결혼, 이별보다 더 힘든 것이 결혼이에요. 이혼보다 힘든 것이 결혼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끼리가 안 되거든요. 결혼하면서 “우리끼리 잘살자. 우리 보는 눈 맞잖아. 추석 명절 되면 잘사는지 물어. 그러니까 우리끼리 잘살자.”
우리끼리, 민족이에요? 뭐예요? 우리끼리가 안 된다니까. 안 되는 것을 왜 자꾸 억지를 부려요. 인간은 부부생활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서로 자기가 최종적인데 어떻게 부부가 됩니까? ‘아멘’ 한 분 나왔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도 안 되는데 오늘 본문에 이웃이 나오지요. 이웃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옆에 있는 아내 사랑도 안 되는데 어떻게 주님과 하나가 돼요? 구라지요.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척,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까 믿는 척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 속에 들어가라고. 성경 속에 들어가라. 성경 속에 이 죄라는 게, 악마가 틈타는 것, 악마의 노림수가 있어요. 레위기 5장 5, 6절을 보겠습니다.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라고 했거든요.
하나님의 그 중심은 뭐냐? 속죄제에 있어요. 내가 도적질 안하고 내가 분을 품지 않는 그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속죄제에 있다고요. 이스라엘백성 중에 제단이 있는데 그 제단이 하나지 제단근처에 있는 남성 50만 각자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내 사유재산과 내 생명이 최고에요. 이걸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라고 해요. 정치학에서.
사유재산이 근거가 된 내 독립적인 자율성을 자유민주주의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 마지막 제일 중앙을 속죄제, 제단이 쥐고 있어요. 제단을 거부하고 제단의 그 피의 효과를 외면해버리면 그게 마귀의 틈타는 거예요. 그게 죄라는 거예요. 인간은 개인적으로 죄를 규정하게 되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의 정당성을 늘 확보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정당성이 훼손되는 그 선까지를 죄라고 보는 겁니다.
아무리 내가 죄를 지어도 내가 회개하고 반성해버리면 그 자체가 죄가 아닌 게 되어버려요. ‘역시 나는 잘났다.’로 계속 남아 있어요. 어떤 경우라도 ‘나는 못났다.’로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죄 많이 지었는데 얼마 전에 회개했잖아. 그러니까 회개한 나를 봐주세요.’ 그러니까 나는 잘났지요? 그지요? 참 대견하지요. 그지요?’ 이게 마지막 남는다고요. 교회 50년 다녀도 소용없어요. 역시 잘난 나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옛사람입니다. 새사람 아니에요.
전에 이야기했던가? 독일의 유명 칼 세트, 칼집과 칼 가는 것, 거기에 독일가위까지 세트로 들어있는 택배가 집에 왔어요. 상표는 잊어버렸는데. 이 상현 목사님이 가고 난 뒤에 택배가 와서 이 상현 목사님이 보내준 줄 알았어요. 전화를 했지요. “목사님이 보냈습니까?” “아니요.” ‘누가 보냈지?’ 하고 뜯어봤어요. 너무 좋은 거예요. 특히 나무로 만든 칼집이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택배 배달하는 사람이 주소를 잘못 봐가지고 4동으로 갈 것이 우리 동으로 왔어요. 다 뜯었는데 다시 다 넣어서 전화 걸어서 보내줬습니다만. 칼집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날카로운 칼이 위험하지 않게 칼집이 칼 바깥에 있어요. 그게 마치 말씀의 단어 같아요. 한국말로 번역된 것, 또는 히브리어 헬라어도 관계없어요.
이 단어들이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칼집에 툭 튀어나온 손잡이 부분들이에요. 그런데 칼집을 딱 빼내보면 날카로운, 손이 베일만한 칼날이 들어 있잖아요. 성경은 뭐든지 뽑아내면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해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 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라, 하는 이 모든 단어를 끄집어내면 거기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속죄제 제단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저주의 피와 연결된 칼날의 피가 묻어 있어요.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는 말씀들이 칼집에 꽂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칼날은 뽑아내지 않고 칼집의 손잡이만 뽑아내서 자기 잘남을 더덕더덕 붙이면서 교회 다니고 있는 거예요. 레위기 5장 17절, 1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하나라도 범하면 허물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속죄제를 드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속죄제가 중앙부분에 있어요. 우리는 그 중앙부분을 빙 둘러서 있는 거예요. 마치 몽고의 유목민 주택처럼 원형으로 둘러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해석 할 때 어디로 가야 됩니까? 저주 쪽으로 가야 돼요. 왜 내가 살아 있는 게 저주인지를? 무엇과 만나야 되는가? 중앙에 늘 반복하고 있는 십자가가 보임이라. 어제도 십자가, 오늘도 십자가, 내일도 십자가, 자식이 죽어도 십자가, 내가 죽어도 십자가, 내 손자가 죽어도 십자가.
왜 십자가의 동시성이냐? 지체 안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지체 안에는 동시성, 예수님의 십자가죽음과 우리 죽음과 같은 시간대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지체에요. 예수 안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으로 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레위기 7장 20절, 21절에 보면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요.”
그 다음에 화목제를 드리라고 했거든요. 제사가 있다는 말은 네가, 네 몸 자체가 멀쩡하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너는 모르지만, 너는 아무리 공부해도 ‘내가 왜 문제 있어? 이렇게 괜찮은 사람을.’ 맨 날 이런 식인데 하나님의 화목제 앞에서는, 십자가 앞에서는 네 몸이 문제 있다는 것이 들통 난다는 거예요.
구약에는 죄 짓고 난 뒤에 속죄가 일어나잖아요. 신약에는 속죄부터 해놓고 그 다음에 그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도로 하여금 죄를 더 깊이 아는 절차를, 순서를 밟는 거예요. 그게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7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피 중심이고 또 레위기 6장 12절에 보면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 여러분 올림픽 할 때 성화대의 불이 꺼지던가요? 안 꺼지지요. 올림픽 기간 내내 안 꺼지지요. 세상 끝날 때까지 제단의 불은, 그리고 십자가의피는 꺼지지 않습니다. 모든 범죄는 바로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힘없는 자가 되어야 될 텐데 힘을 소유하고, 힘을 갖기를 원하고, 그래서 그 힘이 나의 정당성으로 작용하는 세계 속에서 누가 천국을 갑니까? 못가지요.
그게 좋은데요. 힘이 좋은데 왜가요? 안 나가지요. 누가 구원받습니까? 못 받지요. 이 세상이 좋은데 왜 구원을 받아요? 말도 안 되지요. 악마가제시한 천국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악마가 제시한 천국이란 이 땅에 사는 식으로 똑같이 살아가는 것을 그대로 익숙하도록 양육을 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도 갈 수 없는 천국인데 주께서는 힘을 빼지요. 자, 힘을 뺀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도둑질을 한다, 안한다가 아니라 내가 도둑질을 해도 도둑놈이고, 도둑질을 안 해도 도둑놈이 되는 이유가, 지금 내게 미흡한 힘을 누가 갖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그 자체가 도둑질할 가능성이 나에게 발동하고 있다는 증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움직이는 도둑놈이에요. 그게 실제로 도둑질을 하나 안하나 상관없이 눈만 뜨면 도둑질이 개시됩니다. 해가 져서 눈 감아도 꿈속에서 하는데요. 우리는 도둑질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실 때에 칼자루에 피 묻었는지 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응용문제 하나 들어갑니다.
20장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유명한 십계명 나오지요. 도둑질하지 마라.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 십계명의 경우에 10번째 계명을 보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했잖아요.
탐내지 말라는 것도 있고, 그 앞에 보면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도 나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십계명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출애굽기 20장 2절을 해석해야 돼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애굽에서부터 분리되었느냐, 의 여부를 십계명 가지고 탐색에 들어가는 거예요.
만약에 너에게서 도적질이 나온다면 애굽에서 배웠던 그 몸에 익힌 습관과 버릇이 도적질로 나오는 거예요. 간음도 마찬가지고, 도적질도 마찬가지고, 거짓말도 마찬가지고, 부모 공경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우리는 도적질하지 말라는 그 계명,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듣는 순간 잠자고 있던 애굽적성향이 마구 마구 여기서 본격적으로 발동이 되고 발휘가 됩니다. 이게 말씀의 역할이에요.
말씀은, ‘지켜볼까? 명령권자가 주님이니까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주님의 백성이 되는구나.’ 지켜보려고 손잡이만 쥐고 잡아당겨보니까 그 날카로운 칼자루가 있고 그 칼자루엔 피가 묻어 있고 그 피가 나의 가슴을 팍 찔러버리는 거예요. 이미 너는 구원받았기에, 속죄, 죄씻음 받았기에 도대체 그 속죄의 가치가 무엇을 겨냥하고 무엇을 위함인지, 너의 최종적인 하나 됨이 예수님 몸의 하나 됨을 가리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푹 찔러요. 그냥 찌르는 것이 아니라 푹 찔러버려요.
“이 수덕사의 여승아.” 하고 푹 찔러버려요. “노인과 바다야.” 팍 찔러버려요. “이 페리움 공주야.” 푹 찔러버려요. “이 성화하려는 인간아.” 푹 찔러버려요. 우리의 근거는 없어요. 내가 마련한 근거는 내 의밖에 없어요. 교회 나온 의, 십일조 한 의, 선교하고 전도한 의, 내가 목사 섬긴 의, 교회에서 누적되고 또 누적되고 쌓고 쌓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지옥사람으로 변모되고 있어요.
교회 와서 지옥 가는 거예요. 교회 와서 본격적으로 지옥 가는 거예요. ‘나 목사 섬겼다. 이만큼 하나님나라 확장하는데 보탬이 되었다. 선교회비 다 냈다. 아팠는데 기도하고 병 나았다.’ 그래서? 그래서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그게 마귀거든요. 자기부인이 안되잖아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지금 네 꼴이 그 꼴이야. 네 꼴이.” 그런 뜻이에요.
고칠 수가 없습니다. 타고난 인간 자체가 죄에서 태어났는데 죄가 어떻게 죄를 다스립니까? 말도 안 되지요.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4:25)고요? 이웃이 없는데요? 이웃 없어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처음에 놀러갈 때 열 사람이 갔다. 너무 많다고 다른 데로 다섯 사람 빠지고 다섯 사람이 갔다. 그것도 많다. 이제 세 사람이 갔다. 세 사람이 가는데 한 명이 삐지니 ‘맘 편하게 둘이나 가자.’ 해서 둘이 갔다.
세 사람이 갈 때는 몰랐는데 둘이 가니까 또 서로 마음이 안 맞네. 제가 이스라엘 갈 때 세 사람이 갔습니다. 도중에 나 때문에 삐져서 싸웠어요. 누구라고 말은 안합니다. 현장에 없으니까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만. 역시 사람은 결혼이고 뭐고 간에 혼자 사는 게 최고에요. 같이 살다가 떨어지면 그립지만 혼자 살다가 같이 있으면요, 예의상 받아주지만 가고 난 뒤에 기분 더러워요.
사람이 만났다 떠나는 자리가 기분 더러우면요. 정말 만난 것도 후회스러워요. 기분 더러운 것을 뻔히 알거든요. 감사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뭐냐? 개인구원입니까? 개인구원 아니고 주님께서는 개인죄인이지요. 개인구원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옆에 사람이 있으면 저 잘난 줄 알지만 혼자 있으면 마지막에 주님만 보이도록 합니다.
“서류 가져와” “예” 이게 어렵습니까, 여러분? 성도의 삶이 훨씬 쉬워요. 회사 갔는데 “서류 가져와” “예” “커피 한잔 가져와.” “예” 이렇게 사는 게 어려워요? 문제는 “커피 가져와” 또는 “서류 가져와”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그분이 계신다는 겁니다. 그분이 계셔요. “서류 가져와” “몸이 아픈데요.” “가져와!” “예” 얼마나 좋은 관계입니까?
그분만 있으니까 그분 앞에서 심부름 하는 나도 안보여. 사랑이라는 것은 자발적인 종이 되는 겁니다. “교회 가” “예” 말이 필요 없어요. 성화될 필요도 없고 죄짓지 말아야 될 필요도 없고. “분을 품지 마.” 우리는 못 지키지요. 분을 품지 않도록 해줘요. 왜? 주님만 보이니까. 분을 품는 것도 그렇게 전부 다 내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 들여다보니까, 분을 품지 않으려 해도 분을 품을 수밖에 없고 마귀가 틈탈 수밖에 없어요.
나만 생각한다면 이 모든 것이 평생토록 우리의 무거운 짐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어떤 법칙을 만들고, 법칙 지킨다고 스스로 착한 일 쌓고 또 쌓아가지고 그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 그것은 지옥 가서 실컷 하세요. 지옥가면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냥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고, 모든 것이 ‘노’가 아니고, ‘안 됩니다’가 아니고, “예, 예, 예…….” 얼마나 편한 삶인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리를 찾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리라는 것이 이미 속죄의 자리, 십자가로 다 이룬 자리인 것을 모르고, 따로 내 자리 구축하려고 악마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자기의 쌓았습니다. 주님 십자가 죽으신 것이 내 의 때문인 것을 머리로만 알지 말고 실습에 나서서, 진짜 주님이 나로 인해 가려졌음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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