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 해외가을특강 : 생명의 은행 - 이 근호목사
네 번째 강의 합시다. 마태복음 18장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경말씀이 그냥 도덕적인 교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세계에서 구성할 수 없는 새로운 현실을 따로 만든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있는 곳에 들어오시면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돼요.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 따로 이 세상과는 다른 현실을 만들어서 들어와 버린다는 말이지요. 들어와 버리는 이유는, 인간 쪽에서 내가 있는 곳에 주님과 접촉을 할 수 있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이나 그런 노력, 모든 것이 무산되는 거예요.
우리가 현실인데 주님이 들어왔다. 그러면 우리는 이 현실에 앉아 있다가 주님 만나면 그만이에요. 이것은 복잡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현실인데, 주님께서 들어왔다는데, 들어왔다는 그것이 마치 캡슐처럼 동그랗게 되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내 쪽에서 주님과 만나야 되는데, 내 쪽에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현실은 내 쪽의 인간세계의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이라는 말이지요.
처음 제가 강의할 때 성경말씀은 도덕적인 말씀이 아니라 했지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고 했지요. 마태복음 18장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기서 ‘곳’ 두 세 사람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있는 그 곳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교회 힘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못 만들지요. 못 만드는 이야기가 성경에 이렇게 있다 이 말이지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이렇게 착한 것을 하고, 바르게살기만 합시다.” 해서 대충 넘어가면 신앙이 헛방이에요. 그건 자기 정당성을 성경을 통해서 확보하려는 수작밖에 안됩니다. 하나의 수작이에요. 인간의 짓거리가 된다고요. 성경에서는 그게 아니고 인간이 해낼 수 없는 현실 같은 것, 아까 제가 물방울이라고 했고, 비눗방울이라고 했고, 하나의 캡슐이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걸 따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 와서 아무리 기도하고 애써도 그 물방울이라는 하나님이 만든 캡슐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어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어요. 교회에서 충성 봉사해도 그걸 뚫을 수가 없어요. 그 내용이 성경에 있는 거예요. 그냥 이것을 모르고 넘어가자 하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제 말은, 이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까 그냥 우리 아는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그걸 어려운 말로 방기한다, 내버려둔다, 그런 뜻이거든요.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이걸 왜 뺍니까? 누구 좋으라고 빼요? 이걸 빼버리고 나머지 가지고 믿는다 하면 그 믿음이 정당화가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오늘 이걸 생각해 보자는 거예요. 그렇게 어렵다는 이 내용이 무슨 뜻인지 그걸 대충 넘어가게 하지 말자 그 말입니다.
너는 어떤 식으로 이 현상, 다시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가 어떻게 이게 실제로 이루어지는가를 꼼꼼하게 생각을 하고 그냥 대충 넘어가지 않기로 우리가 마음을 먹읍시다. 꼼꼼하게. 어렵더라도.
본문 보면 두 세 사람이지요. 세 사람이라고 보고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했으니까 이걸 인간적으로, 교회에서 하는 식으로 시도를 한 번 해보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집사님 세분이 모이는 거예요.
세분, 세 사람이니까 모였다 치고 뭐라고 주문을 외우냐 하면, “예수 이름으로 여기 계시옵소서.”라고 일곱 번 하든지 아니면 일곱 번의 일곱 번인 49번을 부른다 칩시다. 한 열 번 부른다 칩시다. 그렇게 부르면 뽀로롱, 짠, 하고 주님이 그 가운데 계시냐 이 말이에요. 그럴 수 있어요? 여섯 번 해서 안 되면 일곱 번을 해야 돼요. 여덟 번 해서 안 되면 아홉 번을 해야 돼요.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이라 했으니 일단은 두세 사람 모아놓고, 내 이름, 예수 이름이죠,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 했으니까 그 예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예를 들면 두세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같이 삼창을 하는 거지요. “쭈여~, 쭈여~, 쭈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부르면 뾰로롱~, 만화영화에 나오는 요술공주가 나타나는 것같이 “내가 여기 있노라.” 이것은 연극이지요.
이게 너무나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연극이잖아요. 자기 속임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놀라운 사실은 교회가 이 본문을 가지고 그렇게 해요. 두세 사람보다 숫자가 많아요. 수십 명, 수백 명이 모여서 제창을 해요. 주여, 삼위일체를 세 번 부릅니다. 하게 되면 갑자기 막 뜨거워지는 거예요. 여럿이 불렀으니까. 온천에 안 들어가도 뜨거워지는 거예요.
자기목청을 높이고 에너지가 집중되어서 온도가 뜨거워지니까 마치 주님께서 이 현장에 계시는 것처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걸 인정을 못하지요. 조금 전까지 그냥 우리끼리 있는데 주님께서 갑자기 뾰로롱, 나타날 일이 없다. 목사들이, 혹시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할까 걱정이 되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18장 20절을 믿으세요.”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또 묻지요. 확인 작업 들어갑니다.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믿으세요, 라고 했지요? 믿습니까”하고 물으면 교인들이 또 안 믿는다고 할 수가 없잖아요. 주의 종이 그러니까. “예, 믿습니다.” “그러면 되었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이게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연출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수작이 그런 수작이 다 있어요?
그리고 랄랄라, 하다가 헤어지면 그냥 가기 미안하잖아요. ‘주님 우리 50명 이제 헤어지니까 주님도 볼일 보세요. 우리 헤어지니 주님도 집에 가셔야지. 밤도 늦었으니 주무시러 가셔야지요.’ 그 모인 곳은 예배당이 되고. 그런 겁니까?
마태복음 18장 20절 다시 읽어볼게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이 말씀을 현실로 연출할 때 연출하는 방법이 뭐냐를 지금 언급한 거예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그 교회들이 하는 것 말고 다른 아이디어 있습니까? 다른 것 있으면 끄집어내 보세요.
없어요. 없다고요. 이 본문을 현실화시키는 그 방법 외에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보통 어려운 말씀이 아니지요.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두세 사람이 모였다 치자. 그냥 계신 것으로 치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천주교 성당에서 떡을 떼지요. 떡을 떼면서 뭐라고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이 떡은 예수님의 살이요.” 그 다음에 포도주를 주면서 “이것은 예수님의 피요.”
“신부님,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믿으세요.” 믿으면 뾰로롱, 이 말은 제가 지어냈지만, 뾰로롱, 갑자기 이 떡과 포도주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뀐다고 믿으라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화체설이라고 합니다. 화(化), 변한다. 체(體), 몸이. 떡이 몸으로 바뀐다. 그걸 화체설이라고 하고 천주교의 정통교리입니다.
그리고 그 화체설이나 오늘날 기독교 임재설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별 차이 없이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인다는 이런 식으로 또 거짓말을 해요. 믿는 사람은 느끼고, 안 믿는 사람은 못 느낀다고.
그래서 성만찬의 떡과 잔을 함부로 먹으면 병들거나 죽거나 하고, 혹시 성만찬 하기 일주일 전에 죄를 지으면 죄를 지었다고 반성하고 먹으면 병들거나 죽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먹으면 병들거나 죽는다. 이게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권면이다.
신앙이고 뭐고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이 살과 피를 제대로 먹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가시적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체험을 하게 함으로서 없는 믿음을 유발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요. 어디에서? 성당에서, 교회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성만찬이나 오늘 본문 이야기나 모두 다 인간들이 조작한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자꾸 조작하려고 하느냐? 마태복음 18장 20절이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딴 것은 착하게 살아라, 사랑하면서 살아라, 하면 돼요. 그런데 이것은 실체화되고 현실화 되어야 하니까 이것이 뭔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뭔가 설명이 되어야 되거든요.
실제로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 현장에 주님이 계셔야 돼요. ‘계시다고 치자’가 아니라 계셔야 된다고요.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그래서 이 어려운 문제라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고 이제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생각할 것은, 본문에 보면 두세 사람이라는 것이 한 사람입니까 다수입니까? 두세 사람은 다수에 해당되는 거예요. 내 이름은 다수의 이름입니까, 한 분의 이름입니까? 한 분이지요. 결국 이것은 뭐냐? 다수와 하나의 만남인 동시에 그 다수가 하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두세 사람이라도, 다시 말해서 서너 사람이라도, 또는 5, 6십 명이라도 하나님은 그 전체를 뭐로 본다? 하나로 보는 겁니다. 두세 사람이 있는데, 세 사람이 여기 있는데 예수님이 합세하면 여기 총 몇 명 됩니까? 네 명이 되잖아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섯 명이 있는데 예수님 하나 더 추가되니까 여섯 명 되는 것이 아니고, 천명이 오든 만명이 오든 두세 사람이 오든 그걸 하나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로 보는 방법은? 고급호텔에서 음식이 나올 때 쟁반이 그냥 쟁반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음식이 식거나 먼지 타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서 쟁반을 덮는 동그란 통이 있지요. 투구같이 생긴 통.
그 통이 쟁반 위에 여러 음식을 담았다 할지라도, 두세 가지 요리라도 덮는 뚜껑이 하나가 되면 그 안에 폭 덮이겠지요. 하나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한 분, 한 사람을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한 몸으로 덮게 하는 겁니다. 덮어버리면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게 한 곳이 돼요. 참 어려워지지요. 진짜 어렵게 하겠습니다.
두세 사람이 있으면 이것은 사람 숫자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장소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두세 사람이니까 사람이 몇 명이 모이나,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것을 쟁반위에 있는 음식 덮개로 덮어버리면 그곳이 이 현실에는 없는 특이한 한 곳이 돼요. 그러면 그 한곳이라는 장소는 지상에 있는 어느 장소가 아니에요. 특이한 장소에요.
이것은 주님께서 덮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 이상한 장소에요. 장소 위의 장소, 또는 초월적장소가 되는 겁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장소는 이렇게 탁자가 있듯이 눈에 보이지요. 그런데 이 장소를 넘어선 초월적 장소에는 눈에 보이는 장소가 아니고, “눈에 보이니까 이곳이 여기에 있네.”라고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계시느냐로 표현하는 거예요. 주님이 계신 곳이 여러 곳이 아니고 한 곳이 되는 겁니다.
이래가지고 이해되면 그것은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거예요. 이해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 제가 은행(bank)개념을 사용할게요. 은행개념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골로새서 3장 3절이요. 먼저 찾으신 분이 읽어볼까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하나님 안에, 그 다음에 뭐지요? 감취어졌지요. 은행입니다. 은행금고, 그냥 은행이라고 합시다. 은행에는 고객 돈을 다 넣어놨어요. 그렇다면 내가 만약에 미국에 있는데, 뉴욕에 있는데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내 은행은 한국에 있다. 그러면 돈 찾으러 한국에 가야 됩니까? 은행은 한국에 있더라도 전화 한통이면 뉴욕지점에서 돈을 빼낼 수가 있지요.
장소가 어디입니까? 나는 뉴욕에 있지만 내 돈이 있는 곳은 어디지요? 한국이지요. 한 곳이죠 한곳. 내 생명은 어디지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내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나는 뉴욕에서 죽었고 그 죽은 놈이 왜 있느냐? 은행에서 계속 생명이 공급되기 때문에.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렇게 말을 해도 너무 터무니없는 말처럼 느껴져서 이게 믿기지 않을 정도에요.
나보고 탓하지 마세요. 골로새서 3장 3절 보고 탓하세요. 우리의 한 곳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곳이에요. 내가 이 지점에 있다고 이게 내 곳이 아니에요. 곳이 달라요. 장소가 두 개입니다. 그걸 중복현실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강의할 때 중복현실이라고 했거든요. 현실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있거든요.
그 다음에 눈에 보이는 현실로 소속될 수 없는, 소속될 수는 없지만 포함이 되는……, 진짜 어려운 이야기에요. 속하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이렇게 설명하면 되겠네요. 속하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 것을 포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지만 인간에게 그 손에 잡히지는 않는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속했다, 포함했다. 그 용어는 너무 골치 아프기 때문에 제가 그냥 쉬운 쪽으로 할 테니 따라와 주세요. 우리는, 이 세상의 현실 속에 속하지 않는 다른 현실이라고 해도 되고 더 쉽게 해서 한 곳이 있어요. 한 곳, 은행이 두 개의 은행이 아니고 단 하나의 은행이라고요. 다시 마태복음 18장을 봅시다. 18장 18절을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라고 되어 있지요.
은행의 개념 잊지 마세요. 은행개념 생각하세요. 뉴욕의 지점 단말기에서 돈 액수를 치면 한국의 은행의 내 잔고에서 미국 뉴욕까지 돈이 보내진다니까요. 신라시대, 고려시대, 대한민국의 삼국시대는 이걸 못 믿었어요. 전산체제가 안되어서. 대한민국 조선시대는요. 사람이 한양에 있으면 한양에 있고 제주도에 있으면 제주도에 있었어요.
두 사람의 곳이 따로 있어요. 두세 사람이 한 곳에 있다는 것이 성립이 돼요 안돼요? 안 돼요. 옛날에는. 지금도 성립이 안 되지만 같은 은행의 고객이라는 점은 성립이 돼요, 안돼요? 되잖아요. 이걸 ‘믿습니다.’ 해야 됩니까? 내게 준 성령이 집사님에게 준 성령과 동일하게 한 곳에서 왔다는 것이 믿어지잖아요. 왜? 뱅크. 은행개념이니까.
오늘 강의에서 첫 번째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뭐냐? 모든 내 존재의 개념은 무슨 개념이다? 뱅크, 은행개념이에요. 제 이야기 같으면 저를 욕하세요. 하지만 이것은 골로새서 3장의 이야기니까. 골로새서 3장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두 개의 현실가운데서 어디서 죽었고? 땅에서 죽었고요.
땅에서 죽었다니까 ‘왜 죽었어? 이렇게 숨 쉬고 있는데?’ 아니에요. 늙어죽어요. 조금씩 죽어요. 어제보다 우리는 이만큼 죽음에 가까이 왔고 죽음이 우리를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발목을 잡아당겨서 기어이 죽게 만들기 때문에 죽게 된다는 말은 이미 죽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에요. 성경에서. ‘아직 살았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그 때 죽는다면 살았더라도 이미 죽음 쪽으로 가기 때문에 죽은 사물로 보는 거예요.
그걸 아담은 흙이라고 봤잖아요. 성경적 개념을 가져야 돼요. 일반개념 말고. 온천에 가면 죽을 사람이 온천에 가는 거예요. 실컷 헤엄쳐야 되지요. 죽을 거니까. 맛있는 것을 먹으면 살려고 먹는 것이 아니고 죽을 인간이 맛있는 것을 먹는 거예요. 맛탕을 먹는 거예요. 왜? 곧 죽을 거 맛탕 먹지 뭐. 고구마맛탕. 애 키우세요. 왜? 살고자? 죽기 전에 애 키우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라는 지점, 그 나라는 지점에서 무엇이 살아나느냐 하면, 골로새서 3장 3절이 얼굴을 내밀어요. 나는 죽었고, 내 생명은 눈에 보이는 여기 있지 않고 다른 한곳 거기에 우리의 생명이 있는 겁니다.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교체를 해요. 죽일 것은 죽이되 생명은……, 옛사람은 죽이고 새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되고. 교체작업 하는 거예요.
들어보면 이게 진짜 어렵지 않습니다. 이게 정말 죽어가는 우리를, 현실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는 거예요. 은행개념 이해하셨지요? 은행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성도는 한 곳에, 쟁반의 뚜껑 안에 주님의 자기성도는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다. 그리고 ‘우리는 죽는다. 끝났네.’ 그러면 이야기할 것 더 뭐있습니까? 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모이고 왜 그런가? 그게 뭐냐? 환승센터에요. 환승센터 알지요? 한 곳에서 출입이 가능한 것, ‘들어가고 나오고’가 가능해요. 환승센터, 타는 것도 가능하고 내리는 것도 가능한 곳. 그리고 차도 다른 방향으로 가는 차로 갈아탈 수 있는 곳. 이게 뭔 뜻이냐?
요한복음 17장 14절, 15절, 여러분 피곤할까 싶어 제가 대신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지요. 자 뱅크, 은행 이야기해 봅시다. 은행 이야기에서 주님은 한 곳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이냐 하면, ‘주님이 빨리 데려가시든지’ 그러면 이야기 끝났네요.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네요. ‘빨리 데려가시면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고 싶습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런데 제가 그게 아니고 환승센터라고 했잖아요. 환승센터가 뭐냐?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이 있어요. 할 일 끝난 사람들은 한 곳에, 천국에 갈 것이고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뭐합니까?
이미 죽었고 생명이 하늘에 있지만 이 세상에서는 할 일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할 일이 있는데 그 할 일이 뭐냐?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셨다는 그 사실을 증거하는 그 일을 이 지상에서 기도라는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모여서 증거해야 되는 겁니다. 그걸 저는 환승센터라 하는 겁니다.
떠나야 될 사람은 떠나되 안 떠나야 될 사람은 이 지상에서 하늘과 연결된 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주의 하시는 일을 계속 해 나가야 된다는 그 말이에요. 그러면 왜 그걸 환승센터라고 했는가? 환승센터라 하는 것은 은행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되거든요. 환승센터를 통과하게 되면 하늘의 은행에 들어간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하늘의 은행의 지시를 받은 사람은 그걸 통해서 지상에 사명을 받아서 이 땅에 태어나서 또 일을 해야 되거든요. 그 출입구가 환승센터라고 보시면 돼요. 들어갈 사람은 들어가고 일할 사람은 나오고. 그러면 그 출입구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 신분확인 작업 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신분 세탁할 때 내 이름으로 하게 되면 이것은 하늘나라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들어가요.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지요. 그런데 우리 이름은 몇 개입니까? 다섯 명 같으면 다섯 개 열 명 같으면 열 개가 되겠지요. 그 10을 뭐로 바꿔야 돼요? 1로 바꿔야 되겠지요. 줄이는 것이 아니에요. 10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1과 10을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뉴욕의 은행지점에서 한국 본사의 돈을 인출하듯이 주의 이름으로 돈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그 돈을 받을 때 주의 이름으로 그 돈을 받으면 주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에 내 이름을 위해서 쓰라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위해서 써야 되겠지요. 그냥 데려가면 되는데 왜 안 데려가느냐?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할 일이란, 주님의 그 세계가 있음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알려주는 거예요. 알려줄 때, 일할 때 ‘내 이름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주께서 받은 힘으로 일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모인 사람들은 특징이 뭐냐? 각자의 일은 달라도, 모습은 달라도 전부 다 하나같이 하나님나라의 은행을 증거하는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게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세 번째는 뭐냐? 그렇다면 그렇게 일하는 사람과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교회에서 사람들 모아놓고 “쭈여~” 주의 이름을 불러놓고 주님이 여기 있으니까 억지로 믿으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과의 차이점이 뭐냐?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미 이 땅에서 죽었지요. 죽을 때 죽는 이유가 있어요. 왜 죽느냐? 선악적인 마인드, 선악적인 사고방식, 착하면 천당 가고 악하면 지옥 간다는 이 마인드 때문에 죽어요.
그 선악은요, 악마의 사고방식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하나님께서 내가 만든 인간이 아니라고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를 죽인다는 말은 우리 안에서 뭘 죽인다는 말이냐 하면, 선과 악의 마인드를 죽여 버려요. 선과 악의 마인드를 죽인다는 것은 윤리도덕을 죽이는 거예요.
윤리도덕을 죽여 버리면, 이미 하늘나라 생명을 받았으니까 선악과 말고 생명나무 과실이 있잖아요. 생명나무 체계가 각 사람마다 주의 이름으로 분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잘했나 못했나’가 되겠어요, 아니면 이것이 주의 은혜라고 알겠습니까? 주의 시킨 일이 될까요, 아니면 ‘잘했나, 못했나?’를 내가 따질까요?
주의 시킨 일이 되겠지요. 그것이 바로 주께서 이 지상에 함께 있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아까 한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진짜 주님이 함께 있는 모습인지 아니면 구라, 거짓말로 억지를 부리는 것인지 어떻게 분별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지요?
그들 둘이든 셋이든 다섯이든 모일 때 그들이 내 뱉는 것이 선과 악을 내보이면 그것은 가짜고,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가 모여 버리면 그것은 진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 왜 하게 하셨습니까?”라고 한다면 “나는 이 지상에서 죄로 죽고 내 생명은 주님생명에 의해서 살았습니다.”를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간에 그 행동을 통해서 내가 이미 죽었고, 죽었는데 그냥 죽었다 하면 안 되지요. “선과 악을 따지기 때문에 죽은 자고, 선과 악에 관계없이 그냥 은혜로 공짜로 주께서 생명을, 뉴욕의 지점에 한국에서 공짜로 돈을 보내주듯이, 생명을 공급해주셔서 그 생명으로 삽니다.”를 증거하게 되면 그것은 주와 함께 있는 모임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주여, 이렇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저 구원받습니까?” 나온다면 그 자체가 자기의 선행으로 느껴지지요. 선행으로 느껴지거나 악행으로 느껴지게 되면 이것은 백프로 성령의 일도 아니고 주의 일도 아닌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주와 함께 있다고 할 때 이것은 정말 터무니없이 들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연출할 수가 없어요. 없는데 이상하게 모여서 이야기하다보면, 내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벌써 두 사람이지요. 그런데 또 한사람이 있어요.
제가 묻는 것은 ‘누가 그렇게 두 사람 세 사람을 모이게 했는가?’에요. 이미 그들 중에 쟁반위의 뚜껑을 덮듯이 주께서 하나이기 때문에 만나도 형제인 것을 알아보게 되어 있어요. 생각하고 내뱉는 고백이 특이하기 때문에. 자기 잘난 척을 안 하거든요. 특이하고 이상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거저주시는 십자가의 공로만 이야기하니까 그 자체가 이미 하나가 되지요.
그러면 세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 하나 더 보태서 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전체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있고 그들은 지체가 되는 거지요. 바로 그 이야기를 마태복음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그 당시 사람들과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는 그들은 ‘아, 교회라는 것은 주께서 친히 만드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은행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가 깨닫게 해주시고, 그 은행에서 오늘도 영생을 분배받아서 우리의 윤리도덕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영생을 가지고 형제로 가족이 되어서 기뻐하니 감사합니다. 이 특이한 사실을 통해서 또 하나의 천국이 있음을 남에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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