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허망한 것(엡4;17-20) 19090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9. 2. 08:29
2019-09-01 12:42:43조회 : 312         
   허망한 것 190901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허망한 것(에베소서 4:17-2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otWRlNAU0dA, Hit:9

 이근호19-09-01 13:24 

허망한 것 

2019년 9월 1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4:17-20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4: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이방인’이라는 말은 ‘인종적 존재’를 일컬어 말하는 겁니다. 자연적으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눈 두개, 코 하나, 귀가 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 흑인에 대한 미국의 백인의 태도 같은 겁니다. 거기에 맞추어 흑인들은 그 백인을 따라 붙이기 위해, 즉 같은 종류의 인간으로 인식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합니다. 

백인들이 자동차 사면 흑인들도 백인들이 타는 자동차를 구입해서, 전에 백인들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그 평을 자기네들도 끼어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백인들은 주택지를 멀리 외곽에 두고 ‘그들의 사회’를 구성합니다. 도심은 비록 흑인들 차지가 되지만 외 딴 곳에 따라서 사는 그 사람들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심한 ‘인종차별적 발언’을 내뱉은 것으로 보일 겁니다. ‘이방인=허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허망이 무엇인지 궁금하냐? 이방인들을 보아라”라는 식입니다. 이방인들의 특징은, 자기 인생을 자기 책임 하에 살아가는 겁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선과 악을 판단할 자질을 갖추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허망하게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욕심 부리지 않기 위해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충실하고 정직하게 살아 왔노라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남들은 비록 욕심쟁이라 할지라도 본인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들은 욕심내어 본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허망을 찾는 것은 더더구나 자기에게는 용납될 수 없다고 여깁니다. 진실, 진실, 오직 진실된 것만 다지고 다지듯이 살아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는 달리 봅니다. “이방인들의 의식은 전부 다 허망하다”고 선언해버립니다. 자 그렇다면 사도는 어떤 식으로 욕망과 허망을 찾아낼까요? 

그것은 바로 ‘진실의 등장’으로 인하여 반대편에 같이 등장하는 것이 ‘허망한 현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해하는 ‘허망’이란 ‘소속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소속이 없다는 말은 개인 책임 하에 개인적으로 살아오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기에’ 구태여 소속이 필요 없다는 것이 이방인들의 의식입니다. 

평생을 욕심 없이, 허망하지 않고 바르게 살아오기에 소속이 따로 필요치 않다고 보는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욕심쟁이나 허망한 것은 모두 남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욕심을 부린다’가 아니라 ‘욕심이 나를 부리고 왔다’가 됩니다. 

따라서 ‘내가 욕심을 부렸다, 아니 부렸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내가 허망한 짓을 안했다’가 아니라 ‘허망이 나를 그동안 나를 다루어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겁니다. ‘이방인’이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분류하신 분류방식입니다. 인종차별적 발언입니다. 

그렇다면 ‘허망하지 않는 자들’ 즉 ‘이방인이 아닌 자’는 누구겠습니까?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출애굽기 22:21-24,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땅의 환경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로 취급합니다. 스스로 그 ‘사람의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사람의 환경’이란 ‘권력의 환경’입니다. 인간들이 힘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 바탕 자체가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수치심’을 가리고 자기 정당함과 마땅히 살 권리 있음을 알리는 쪽으로 사태를 전화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붓습니다. 

마치 흑인들이 동등한 취급받기 위해 백인들의 삶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난해도 수치요, 아파도 수치요, 교도소 가도 수치도, 집안이 해체되어도 수치입니다. 이런 수치심이 제대로 감추지 못하고 만회하지 못하면 인간은 주위를 향하여 횡포를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분노요 분노는 ‘복수심’으로 해소하려고 합니다. 악마는 배후에서 계속 인간들을 정신적으로 조정하고 있습니다. “너희 수치가 들키지 않도록 더욱 많은 성경 지식과 종교 행위와 선행과 부지런함으로 중무장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선택하는 천국과 구원이 곧 지옥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뒤에서 누가 도와줍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후견인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후견인 앞에서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본질이 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5:2에 보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이스라엘은 오해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줄 알았던 겁니다. 그들이 본디 허망한 자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마땅히 자신들을 구원해야만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이스라엘에 대해서, ‘열매없는 백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멸망시켜 버립니다. 

진정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열매의 모델은 예수님 자신뿐입니다. 대신 지신 자기 백성들의 수치가 그분을 통해서만 공개적으로 드러났고 그 결과로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결말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결말을 예수님의 이 땅에서 최종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나 위주가 아니라 말씀 위주였던 겁니다. 천국에서 내민 양식 용지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을 위한 삶의 형식용지는 찢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민 천국 용지에 우리 자신의 이름이 기재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 인간에 개입하셔서 우리 한 가운데를 찢어버립니다. 거기에 빈 자리가 나오겠지요. 그 빈자리가 주님의 자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한 가운데 주님이 계시고 우리는 그 분의 소속이 되게 하옵소서. 개인적으로 살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9-02 12:03 
39강-엡 4장 17-20절(허망한 것)1909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7-20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17-20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이 ‘이 세상에는 허망함이 있다, 또 욕심이 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너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허망함과 욕심을 이 땅에 있도록 허락하시고, 그 존재를 인정하시고 그걸 방치하시는 분이 누구지요? 우리 인간입니까?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이 허망한 것을 집어넣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욕심이 있도록 용납을 하신 겁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어요. 하나님이 집어넣어놓고 우리보고 조심하라고 하려면 애초부터 집어넣지를 말아야지요. 애초부터 깔끔하게 욕심 안 들어오고 허망한 것 없게 하시면 안 됩니까? 전능하신 분인데. 이런 점을 우리가 생각을 왜 안 해봅니까? 하나님이 그 욕심과 허망함을 집어넣었다는 생각을 안 하는 이유는 내가 욕심과 허망함을 이길 수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꾸 건드려 보는 거예요. 네가 나에게 종속적인지 아니면 독자적인지 계속 건드려보는 겁니다. 학교 선생님이 초등학교 애한테 “산수 10문제 풀기” 그냥 건드려 보는 거예요. 애들은 말합니다. ‘그까짓 거 10문제 후딱 풀지.’ 그렇게 나옵니다. 그 다음에 선생님이 “50문제 풀기” 또 해보는 겁니다. ‘그까짓 거 열심히 하면 풀지.’ 

그 다음에 백 문제 풀라고 합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달려들어서 이구동성으로 “선생님 우리는 그거 못합니다.” 그렇게 나오겠지요. 진즉에 그래야지요. 진즉에 왜 건방지게 자기 혼자 살아요. 모든 것을 자기목적에 자기를 수단으로 집어넣습니까? 내 목적을 위해서 나를 수단으로 집어넣어서, 앞뒤 안 가리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왜 그렇게 살았느냐는 말이지요. 허망함과 욕심을 주께서 일부러 허락하셨는데. 

사람들에게 있어서 허망한 것도 없고 욕심이라는 것도 없어요. 어떤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욕심쟁이, 우후후~” 하면 “아니. 나 욕심쟁이 아니야. 나는 성실하게 살고 있어.” 어떤 사람도 욕심쟁이 아니에요. 돈 많은 재벌이라도 욕심쟁이 아닙니다. 왜?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판단하기를, 이것은 최선이기 때문에. “나보고 욕심쟁이라고 지적하지 마. 나보다 더 욕심 많은 사람이 있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드럼 치는 자기 딸을 의학전문대학원에 보냈으니까 당신은 욕심쟁이” 하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그게 뭐가 욕심쟁이인가? 나보다 더 심한 사람이 있는데.” 인간은 남들이 아무리 욕심쟁이라고 해도 본인이 본인생각하기에는 결코, never, 결코 욕심쟁이가 아닙니다. 남들이 아무리 너는 허망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루하루 절대로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지 절대로 허망하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뭐라고 해도, 에베소서 4장 18절에서 뭐라고 해도, ‘나는 욕심쟁이 아니고 나는 허망하게 산적 없음. 성경 덮자. 집에 가자.’ 그리고 덮어버려요. ‘내게 해당되지도 않는 사항인데 뭐. 나는 허망하지도 않고 나는 욕심쟁이도 아닌데 뭐.’ 그래서 복음 듣고 교회 안 나오는 거예요. 나는 잘났으니까. 

인간은 말씀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아, 내가 주의 말씀을 알아야 되는데. 성경, 이것이 주의 말씀인데 좀 더 알고 싶어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혼자서 살아도 너~무 잘살아요.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것이 있잖아요. 혼자서도 너무 잘하는데, 나는 말씀 없이는 못살아요. 그런 사람? 그런 사람 있으면 정말 아, 정말 내가 존경하고 싶다. 그런 사람 찾기 힘듭니다. 

자기는 욕심 줄이고 살았고, 제대로 살려고 애를 썼었고, 따라서 성경 따위, 말씀 따위, 복음 따위는 나한테는 없어도 그만이고 그거 없이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이러한 인간들에 대해서 정리할 것은, 인간은, ‘남들에게는 욕심이 있고 허망하지만 나에게는 욕심도 허망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욕심과 허망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할 것은, 사도는 어떻게 허망을 알고 어떻게 욕심을 알았습니까? 이게 궁금해야 돼요. 이게 왜 궁금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욕심이라 하는 것은 나 빼고 남들의 이야기에요. 내 돈 떼먹고 도망간 그들 이야기에요. 내 이야기가 아니고 남들 이야기에요. 그리고 허망하다는 이야기도 남들 이야기에요.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들.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저들 이야기. 

‘아이고, 인간들, 허망한 것들 찾고 다니네.’ 남들의 이야기지 내가 지금 허망한 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까마득히 생각조차 안하고 있어요. 조심에 조심을 했기 때문에. 철저에 철저를 다 기했기 때문에. 설마 내가 허망할까, 설마 내가 욕심쟁이일까, 이런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 그 당시 못된 인간들의 이야기구나. 나한테 하는 이야기가 아니구나.’ 하고 외면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안 나와요.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 허망한 것이 없는데, 욕심이 없는데 어떻게 욕심과 허망함을 거론할까? 도대체 사도바울이 말하는 허망이 뭐고, 욕심이 뭐고, 그것이 무엇이며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우리는 그쪽부터 더듬어가야 돼요. 

사도바울이 허망이라고 할 때는 어떤 전제가 있느냐 하면, 진실됨이 등장했을 경우에만 반대편에 허망이 등장합니다. 진실의 그 현장이 드러날 때. 누가 진실이냐? 누가 진실이겠어요? 길과 진리요 생명. 누가 진실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등장함으로서 비로소 없던 허망이 등장하고, 없던 욕심이 욕심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우리가 허망과 욕심을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판단할 잽도 못돼요. 우리가 어떻게 남을 ‘허망하다. 너는 이단이다.’ 판단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동반해서 같이 등장하는 현상이 뭐냐? ‘아, 세상은 허망하구나. 욕심이구나.’라는 것이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마치 동굴 속, 침침하고 뭔가 습기 찬 것밖에 없는데 동굴 속에서 그 벽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자연동굴인 줄 알았지요. 

세상에, 성경을 딱 펴보니까 동굴에 고대인간들의 사냥하는 그림이 나오고 주술 그림들이 나올 때 ‘아, 동굴에 이런 그림이 있었어?’ 하고 있는데 그만 불이 꺼져버렸어요. 꺼지니까 다시 동굴 안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성냥불을 켜니까 환해지면서 잠시나마 아, 내가 허망 안에 들어 있고, 욕심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예수님 빼놓고 이야기했어요. ‘너 잘났다. 나 잘났다.’ 이야기했습니다. 너는 허망한 길 가지만 나는 정통길 간다고 우겼습니다. 전부 다 이것은 세상을 일거에, 한꺼번에 밝힐 어떤 빛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빛도 아니면서 빛인 척 하면서 자기잣대에 의해서 남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온 우주, 온 인류의 빛이 되신 예수님이 와서 성냥불을 그어버리니까 예수님 빼놓고 다 허망하고, 예수님 빼놓고 다 욕심쟁이 우후후, 다 그래요. 

그전까지 인간은 뭐냐 하면, 내가 욕심을 낸다고 했습니다. 내가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고 욕심이 나를 이끌어갔지요. 내가 허망한 것은 제키고 허망하지 않는 것만 골라잡는다고 했습니다. 그게 아니었어요. 허망이 그동안 나를, 인간자체를 꾸준히 착각과 망각 속에 싸잡아서 농락하고 있었어요. 

사도가 말하는 허망과 욕심이라는 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허망과 욕심과 다릅니다. 사태를 완전히 일거에 다 파악을 시키는 겁니다. 사도가 허망과 욕심이 있다는 말은, 너희들이 그 안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살고 있으면서 그 사태를 밝힐 어떤 불빛이 없기 때문에 모르고 살아온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선택한 구원, 내가 선택한 믿음, 내가 선택한 메시아, 그 선택이 곧 우리로 하여금 지옥가게 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올바른 선택이라 생각해서 예수를 믿었고, 올바른 선택이라 해서 교회 왔지만, 그것 자체가 허망한 선택이고 욕심에 이끌린 선택이라는 것을 까마득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교회 안 나오는 사람 지옥가고 교회 나오는 사람 천당 간다고 그렇게 우리는 착각들 하면서 살아왔던 거예요. 

자기만큼은 욕심에서 빼달라는 거예요. 자기만큼은 욕심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거예요. 왜? 똑똑하니까. 괜찮으니까. 믿음 좋으니까 빼달라는 거예요. 본인들이 메시아이십니까? 아니지요. 본인들이 죽으시면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습니까? 앞앞에 한 사람씩 붙들고 묻고 싶어요. 시범조로 장로님부터 붙잡고 물어야 돼요. 장로님이 돌아가시면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습니까? 부활됩니까? 아니지요. 아니면 메시아 아니지요. 

메시아 아니면 입 다물고 있어야지요. 나는 허물과 욕심 속에 있다고 인정을 해줘야지요. 내가 메시야 아니잖아요. 왜 메시아를 경유하지 않습니까? 왜 직접 남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지를 이야기해야지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내가 선택한 구원은 지옥입니다. 우리는 지옥 외에는 선택할 재주가 없어요. 지옥만 선택해요. 

내가 선택한 천국이 곧 지옥이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약간 상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17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여기 이방인이라는 단어 나오지요. 이방인이라는 것은 쉽게 예를 들면 흑인이라. 흑인의 허망한 마음, 그렇게 예를 들면 됩니다. 

흑인이 이방인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쉽게 예를 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백인과 흑인이라 하는 것은 자연적 평가에 의해서 인간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종적구분이라 합니다. 자연적 인간, 말을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갑시다. 1950년대 이야기입니다. 지금 그런 식으로 하면 큰일 나지요. 

미국남부 지역에서 경찰이 흑인을 잡았어요. “당신 코가 몇 개야?” “한 개.” “귀가 몇 개야?” “두 개” “그러면 눈이 몇 개야?” “두 개” “이거 인간이네. 우리하고 같은 인간이네.” 이렇게 이야기할 경찰이 있습니까? 아니지요. 자연적으로 코가 몇 개냐, 눈이 몇 개냐, 그런 자연적인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덧붙여진 것이 있어요. 이게 인종적인 차이라는 겁니다. 

흑인들이 그 때 화가 나서 노리는 것은 ‘나도 돈 벌어서 백인처럼 자동차 타고 다녀야지.’ 그러거든요. 지금에 와서 자동차타고 다니는 흑인, 그것도 좋은 차타고 다니는 흑인은 백인입니까? 아니지요. 흑인들이 열등감에서 백인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해요. 남자 흑인이 백인여자친구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가 백인을 이겼다고 과시할 때 백인들이 하는 짓은 뭐냐? 

흑인들이 백인들 따라왔거든요. 막 따라오니까 백인들이 하는 짓은 외곽지역으로 주택지를 옮기는 겁니다. 우리 백인들만 사는 동네라고.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자연적으로 백인들이 빠져버리니까 남아 있는 뉴욕의 핵심지역은 전부 다 흑인들 지역이 되고 말았어요. 기어이 같이 못하겠다는 거예요. 제가 지금 굉장히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저보고 탓하지 마세요. 사도바울은 더합니다. 이방인. 인간으로 쳐주지를 않아요. 거룩한 복음에 인종차별적인 “너는 이방인이야. 이방인안에 뭐가 들었다? 허망한 것. 따라서 허망한 것을 네가 보고 싶으냐? 이방인을 쪼개면 거기에 허망한 것이 들어 있어.” 지금 이런 이야기를 일관되게 하고 있다고요. 

인간에게는 영원한 인권이라는 것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급철폐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아요. 그것은 인간이전에 악마의 품성으로, 마음으로 살아가기에 그렇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또는 사도바울의 설교를 통해서 네가 허망하지 말고 욕심내지 말라고 당부했을 때 얼른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허망한 것을 피하고 욕심을 피하는 그 정도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 네가 잔소리 하지 마라. 성경을 통해서 사도라고 해서 잔소리하지 마라. 그 정도는 이미 잔소리하기 전에 나는 그렇게 살아 왔었어.”라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하지만 인간이 꾸깃꾸깃, 숨겨놓은 것이 있어요. 그것은 허망이 싫어서가 아니라,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것은 뭐냐? 아프다는 겁니다. 사는 것이 아파요. 

인간은 아픔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갱년기 되면 아프지요. 나이 들면 온 골조가 다 아프고 당기지요. 마음으로는 주께 영광 감사하고 싶어요. 아픈데 어떻게 합니까, 아픈데. “이 귀한 아들 낳았으니 하나님께 돌리겠습니다.” 얼마든지 교회 와서 그런 종교 코스프레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애가 만약에 아프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가 되겠습니까? 

“인간아, 욕심내지 마라.” 참 좋은 이야기지요. “욕심내지 않겠다는 것도 욕심이다.” 불교에서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지금 욕심내고 안내고가 문제가 아니고 그 불교나 오늘날 인간들은 가장 근원적인 것을 꼬깃꼬깃 숨기고 있는 거예요.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사는 것이 그냥 곱게 살지 못하고 하루아침 눈만 뜨면 아프고, 저녁까지 아프고, 집에 오면 또 아프고, 늘 아파요. 

아프기 때문에 여기서 인간은 아픔을 감추는 방도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아픈데 안 아픈 방법은 뭐냐? 힘을 모으면 된다는 아이디어를 마귀로부터 배우기 시작합니다. 마귀한테 배우는 근원적인 것이 뭐냐?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욕심을 내는 그 이유가 창세기 3장에 보면 이미 악마의 마음을 품은 이상은 인간이 자기의 수치심을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어서 욕심을 내는 겁니다. 

몸은 멀쩡한데 그래도 마음은 아파요. 왜냐하면 수치심을 어떻게 당도리하고 관리할까, 거기에 정신 팔리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내부에 보이지 않는 악마라는 괴물이 들어 있는데 그 괴물은 우리에게 이런 지시를 해요. ‘네가 수치를 알아서 가리면서 살아라.’ 그거 하면서 인간은 아프고 힘들어지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담이 하나님 만날 때 이야기에요. 성경에 없는 이야기 아닙니다. 

항상 예민하게 정신 차리는 것은 이 수치심이 어떻게 바깥으로 노출될까, 그것이 염려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서 한평생 자기에게 투자를 하게 되는데요. 점점 이야기가 어려워지는데 여러분이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 투자하는데 그걸 제 때 제 때 못할 때 나오는 것이 뭐냐? 어렵더라도 죽 가겠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눈물이에요. 눈물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말로 차마 설명할 수 없는 거예요. 언어로서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눈물이 되는 겁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원한, 내 품위, 내 수치심을 안 들키기 위해서 나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발악을 하면서 감추고 있는 겁니다. 오토바이 “빠라빠라바라빰~” 하고 타고 다니는 것 있잖아요. 

애들이 드럼치고 돌아다니고, 춤추고, 길에서 춤 배틀하고. 전부다 뭐냐 하면, 알 수 없는 열등감 수치심이 있어요. 기도했다 하면 두 시간 반. 우리교회는 전혀 해당 없으니까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남들 앞에 몸을 나타내기가 힘들어져요. 남 앞에 몸을 나타내게 되면 행여나 타인이 나의 수치심을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너, 당신’ 이렇게 할 때 그냥 2인칭이 아니에요. 그걸 가지고 접촉성 2인칭이라고 해요. 아예 몰랐던 거면 부를 이름도 아닌데 내 앞에 접촉하기 때문에 “차 너무 가까이 대지 마세요.”라는 식으로 “너무 가까이 하지 마세요.” 이웃집 있더라도 “나에게 떡 줄 생각하지 마세요. 나 당신 모르고 살 테니 떡 주고받고 하지 맙시다.” 

당신이 내 집에 떡 준다고 쟁반 들고 오는 순간, 내 집 옷은 어디에 걸렸고, 식기는 몇 개고, 탁자는 얼마짜리인지 벌써 들통 다 나요. 그 우세스러움을 어떻게 감당해요. 그것도 괴롭다고요. 차라리 모를 때는 부부싸움을 해도 본적도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안면 트고 난 뒤에 부부싸움이라도 하면 ‘저 집에 싸움 났다.’ 이러면 가짜 뉴스 나오기 시작합니다. 

“왜 싸웠느냐 하면……” 이렇게 상상을 해서 아파트 옆 동까지 확 퍼져버립니다. 특히 복도식 아파트에서 다 퍼져버려요. 그걸 우리가 경험삼아 아는데 어떻게 인사하고 지내겠습니까? 안주고 안 받기. 점점 우리가 거기에 길들여져 갑니다. 그 방식을 여러분이 제대로 이해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걸 상징이라고 합니다. 상징적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좀 더 설명하면, 나라에서 힘을 가할 때 우리는 그 힘이 무서워서 꼼짝 못하고 벌벌 떱니다. 그 다음부터는 힘을 가할 필요가 없어요. 알아서 기니까. 이걸 상징이라고 합니다. 의식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접촉되고 난 뒤에는 접촉성 2인칭이 나중에 나에게 연락 안 해도 늘 그 사람을 의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연락 올 까 싶어 늘 조마조마 하는 거예요. 내 약점을 나타낼까 싶어서. 이게 뭐냐 하면,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다시 정리합시다. 나는 내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서 온갖 무장을 하는데 그 무장중 하나가 성경지식도 포함되어 있어요. 성경지식 가지고 ‘나 이정도야’ 그걸 지키는 것은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그 수치스러움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악마에 정신적으로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악마가 건드렸기 때문에 이제는 악마에게 기죽어서 악마가 시키는 대로 어떻게 하든지 수치심이 노출되지 않으면 나는 뭐가 된다? 의인이 된다. 의인이 되면 나는 천국 갈 수 있다. 그런 식이에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뭐냐? “너희가 수치심을 안 밝혀? 그러면 내가 밝힐게.” 하고 십자가에서 발가벗고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공개적으로 사형 당했습니다. 가시면류관 쓰고, 희롱당하고, 희롱과, 구박과, 채찍질과, 침뱉음과, 조롱, 모든 우세, 웃음거리는 다 당했어요. 우리가 뭐 예수를 믿는다고요? 십자가를 믿는다고요? 한번 해 볼래요, 그렇게? 한때 모방은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평소 무심코 살아가는 일상이 그러냐는 거지요. ‘남들에게 나의 수치가 노출되어도 나는 상관없어.’ 그런 식으로 살아가느냐, 그 말입니다.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위선자지요. 겉으로는 예수쟁이고 신자인데 속으로는 불신자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제 힘으로 욕심 이겨내고 허망한 것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에 있어서 허망과 욕심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이유가 뭐냐? 여러분, 동사무소나 은행에 가면 서류의 어떤 양식이 이미 나와 있고 빈칸들이 있지요. 

정기예금이나 펀드 넣을 때 서류들이 많고 빈칸들이 있잖아요. 빈칸이 있을 때 질문도 일방적으로 해놓고 그 질문에 답변만 하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허망과 욕심이라는 빈칸을 마련해 놓아요. 빈칸을 마련해 놓고 현재 그 빈칸에 너를 집어넣으라는 거예요. ‘너를 지킨 내가 나를 지켜야지.’라는 그런 식의 내 형식, 양식을 찢어버리고, 내가 나 괜찮음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사수한 그 양식 같은 것, 그걸 찢어버리라는 말이지요. 

‘하나님, 나는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헌금했습니다. 이렇게 전도했습니다.’ 그걸 찢어버리라, 그 말이지요. 내가 만든 틀은 내 수치심을 교묘하게 가리기 위한 악마가 만든 양식이에요. 스타일이라고요. 지금 사도바울은 ‘이방인 = 허망’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 자기가 안 허망하다고, 그렇게 자기가 만든 양식은 천국에서 반려됩니다. 그 서류 안 받습니다. 사도바울이 제시한 서류만이 천국으로 패스가 돼요. 내가 작성한, 내가 만든 서류양식은 공식적 양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사적이기 때문에 안 받습니다. 마귀적이기 때문에. 

주께서 빈칸 마련하셨으면 이제 내 손을 떠나서 그쪽으로 가야지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바로 개인적 허망, 개인적 욕심쟁이가 아니고 집단허망, 집단욕심, 욕심은 악마와 관련되니까, 자기 수치심을 가리기 위한, 집단, 집단종교, 그걸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개인적으로 잘못했다고 해서 너희 안 나무랄게.” 왜 모든 죄는 아담의 죄고 너의 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치당해도 아담이 수치를 당해야지 왜 우리가 수치를 당하겠습니까? 선악과 구경해 본적 있어요? 선악과 따먹어본 적 있습니까? 맛있던가요? 바나나맛 나던가요? 아니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죽잖아요. 

주님의 양식 몰라요? 우리는 주님의 양식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은 그 주님의 양식을 우리에게 놓고 그 빈칸에 네 이름을 쓰라는 거예요. 이제는 네 양식을 버리고. 주께서 하신 그 포괄적인 범위 속에 우리를 집어넣으라는 말이지요. 집어넣으면 우리는 일괄적으로 허망한 것이 됩니다. 왜,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자연인이 아니고 인종적평가의 대상이 돼요. 

‘너는 이방인. 따라서 너는 지옥.’ 개인적인 원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잘잘못을 따져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주님 앞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어떤 분류기준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거예요. 결국 싸움이라 하는 것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주님이 제시한 그 분류기준과 내가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 내 분류기준과 대결상태에요. 

누가 힘들겠어요? 우리 쪽에서 힘들지. 수치스럽게 살지 않겠다는 그것이 얼마나 긴장도를 높이는지 몰라요. 이렇게 나오면 우리가 가만있지 않지요. “우리는 이방인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말해서 흑인이라는 이름으로 차를 사도 차 산 흑인에 지나지 않지 그저 같은 인간으로 안쳐준다면, 그것이 미국의 옛날이야기라면, 우리는 이방인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인간취급도 못 받고 지옥 간다면 그러면 우리 같지 않은 인간은 뭐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지요. 

화가 나서.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이방인 반대말이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같은 인간인데 니들은 뭐가 잘났느냐, 하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나를 공박하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그냥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분노를 갖고 있고, 분노는 복수심을 나타내요.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이점이 뭐냐?” 

이스라엘은 소속사가 있어요. 연예인처럼 소속사가 있고, 이방인들은 전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이스라엘역사의 특징은 전부 다 소속이에요. 소속사가 있다고요. 네 소속이 어디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질문자체가 낯설어요.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왔지 어느 소속에 속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느 소속에 속하느냐? 성경자체가 이스라엘을 하나의 소속단위로 봅니다. 출애굽기 22장 22절, 23절에 보게 되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집단적으로 봐요. 이스라엘 개개인 불러서 “네가 부모한테 어떻게 효도했느냐?”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단체로 봐요. 

이스라엘을 단체로 본다고요. 개인적인 행운과 복을 얻는 개인적인 신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단체로 본다는 그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내가 구원받는 것이 없어요. 이스라엘은, ‘우리’가 구원받지 내가 구원받는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은 전부 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아요?” 질문자체가 “내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자기 개인적으로 나가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나오니까 그게 이방인의 습성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이스라엘은 독특하게 개인적이 아니고 집단적입니다. 소속사가 있어요. 제가 몇 번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강조하는데, 강조해도 또 이상한 질문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방금 읽은 것이, 너희도 애굽땅에서 고아였고 과부였고 나그네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고아였고 과부였고 나그네였다면, 고아 과부 나그네는 땅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살 수가 없어요. 그 때 ‘고엘’이라고 해서 우리말로 번역하면 대속자라는 뜻인데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의 차이점은 대속자, 다른 말로 하면 고엘, 다른 말로 하면 후견자가 있어요. 후견자는 자기친척가운데 유력한 사람이 후견자가 돼요. 

어떤 아버지 어머니가 차사고로 죽었다면 남는 애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삼촌이 조카들을 다 건사해서 살릴 때 그걸 후견인, 또는 후견자, 또는 히브리말로 ‘고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고엘사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스라엘은 이방인에게 없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후견자제도로서 거기에 하나님이 개입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타날 때 후견자로 개입하는 겁니다. 후견자로 개입했다는 말은, 나는 너의 아버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너는 고아와 과부인데, 그리고 나그네였는데 내가 너를 내 자식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내 신부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너는 나의 패밀리,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게 이방인과 이스라엘의차이점이에요. 개인으로 몸부림친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후견자를 언급해야 되고, 자신의 후견자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이야기해야 돼요. 나는 우리의 메시아,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못하는 것을 다 해주신 분이 나의 후견자가 되는 거예요. 그분은 세상이 주는 수치감을 공개적으로 나타냈어요. 

그럼 나는 뭐냐? 매일같이 내 수치를 감추는데 급급했고, 그게 마음대로 안 되면 복수심을 나타내서 남들에게 화풀이했고, 자기집안 가난한 것을 정권 탓하고 대통령 탓하고. 가난을 수치로 인정하기 때문에. 대통령 잘못해서 나라꼴이 엉망이 되었다. 이것은 분풀이인데 이것은 ‘나 살기 빡빡하게 힘들게 되었다.’ 

전부 남 탓하는 것, 그게 뭐냐? 자기는 이럴 위인이 아닌데 남 때문에 이렇게 조져놨다는 거예요. 그것은 후견자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넉넉한 후견자가 있다는 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을 맘대로 해야 돼요. 맘대로, 자유롭게. “너 쫄딱 망했다.” “그래 망했다. 망해도 괜찮아. 후견자가 든든해.” 

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못합니까? 왜 자기 잘남을 자꾸 증거 하려 해요? “나도 예수 믿는다. 나도 성령 받았다.” 그런 것 증거 하지 마세요. 그것은 후견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수치를 감추려는 하나의 교만이고 마귀 짓에 불과하다고. 아까 했잖아요. 내가 선택하면 그것이 지옥이라고. 내가 천국을 선택하면 그 천국이 지옥이에요. 

우리는 선택당한 것이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욕심을 낸 것이 아니에요. 욕심이 나를 끌고 다녔고 이방인이, 공통적인 허망한 것이 나로 하여금 뭔가 의젓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흉내 내는 것처럼 인생을 살게 만들었어요. 개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하나의 인간으로 넣어 줘.’ 하는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그냥. 

허망한 것이, 소속이 없으니까, 나라도 내가 나의 사장님 되어야 되니까. 바닥이 그 바닥 외에는 없잖아요, 인생 살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후견자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자체의 착각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줬기 때문에 나를 위한 하나님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게 잘못이에요.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이스라엘은, 자기가 어느 정도로 망가졌고, 어느 정도로 인간도 아닌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냥 정치적으로 애굽에서 우리를 불러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했다고 한 겁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나를 안 망가뜨리는 사랑으로 오해한 거예요. 그 사랑이 나를 철저하게 망가뜨린다는 생각을 사전에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보냈지요. 그래서 뭘 했느냐? 젖과 꿀이 흐르는, 다시 말해서 포도나무가 잘되는, 작물이 잘 되는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신 거예요. 이사야 5장 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건만 이스라엘에 들포도가 맺힌 거예요. 이사야 7장 23, 24절에 “그 날에는 천 주에 은 일천 개의 가치 되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온 땅에 질려와 형극이 있으므로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질려와 형극이라는 것은 뭐냐? 가시와 엉겅퀴가 넘친다는 그 말입니다. 이 약속의 땅을 버려놓은 거예요. 저주로. 누구 잘못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예레미야 2장 21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묻습니다. 내가 분명히 포도나무 심어놓았는데 왜 악한 가지가 되었느냐고 나와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뜻은 뭐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포도나무 심어놓아서, 포도주 마시고 잘 살라는 식으로 농산물 잘되게 하려고 이스라엘을 심은 것이 아니고, 열매 자체가 농산물이 아니고, 인간성 자체가 천국에 합당한, ‘하늘나라에 합당한 인간성이냐’의 그것을 열매라고, 하나님께서 서서히 의미를 전환시키고 있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이방인은 아예 버린 자식이니까 그것은 말도 안하고, 그냥 제켜버리고요. 하나님이 함께 있을 때 나온 결과를 보라는 말이지요. “나는 너희들이 천국에 합당한 열매 같은 인간들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열매는 되면 되지요.” 이 꼬락서니가 열매냐, 그 말이지요. 열매가 아닐 때 그게 허망한 것이고 그 허망한 것이 뭐냐? 바로 네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 욕심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에서 나의 수치심을 어떻게든, 나 개인적으로 나를 자랑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짓거리를 다 한 거예요. 

그게 욕심이 되고 잘 안되니까 그게 복수심이 되어가지고 부모 탓 남 탓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딱 우리 모습이에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34절에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인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본문 가지고 헌금하라고 하는 식은 안 통합니다. 시간 바치라는 그런 것이 아니고, 여기서 열매라 하는 것은 인간성 자체에요. 인간성 자체라면 그러면 “손 양원 목사가 열매입니까, 주 기철 목사가 열매입니까, 한 경직 목사가 열매입니까? 열매가 누구입니까? 있으면 우리가 따라가겠습니다.” 열매가 누구냐? 십자가지신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에요. 그런 인간들 찾지 마세요. 그런 바리새인들 찾지 마세요. 

우리 자신이 어떤 소속을 헤아릴 생각은 안하고, 주님이 주신 양식에 허망한 것으로 사인할 생각을 안 하고, 안 허망하려고, 난 욕심쟁이 아니라고 우기려고 따로 내가 만든 그 양식을 포기를 못해서 “목사님, 누굴 닮으면 됩니까? 우리교회 누굴 본받으면 믿음 좋은 사람입니까?” 그것을 찾아다니면서 그걸 흉내 내기 하고 있어요. 

아직도 자기 힘으로 신앙 좋을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자꾸 내비치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34절에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 자신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외 어떤 나무도 죽어야 마땅한 겁니다. 열두제자라 할지라도. 좋은 나무 아니에요. 좋은 실과 아닙니다. 예수님 빼놓고 혼이 나가서 다 도망쳤어요. 

십자가 여기에 한번 꽂아볼까요? 도망 안치는가? 여기 서른세 살 먹은 그분을 한번 꽂아놓아 볼까요? 병 고치러 왔고, 복 받으러 왔다가 그거 꽂아놓으면 기겁하고 도망갈걸요? 왜 우리가 자꾸 이방인 흉내를 냅니까? 이방인은 무당을 찾습니다. 무당의 특징은 뭐냐? 내가 잘되는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 무당의 특징이에요. 

내가 복 받는 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 무당교회의 특징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무당교회의 특징이에요. 그것은 아무 소속이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교회로 소속이 되면 되지 않느냐? 교회로 소속이 되려면 내가 허망한 인간이 되어야 돼요. 우리는 이방인자격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나는 욕심쟁이고, 욕심내는 솜씨밖에 없고, 나는 허망한 것만 찾아다닙니다. 왜? 나는 나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하는 짓거리가 지옥 갈 짓거리밖에 안됩니다. 

따라서 고엘, 나의 후견자. 얼마나 감사한지. 나같이 지저분한 인간, 인간도 아닌 이게 뭐라고 후원해주시고 자식도 아닌 것을 자식으로 받아주잖아요. 도대체 교회 와서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소속이 어디 있어요? 묻고 싶다. 소속이 어디입니까? 내 소속인데요? 내 소속이 어디 있어요? 죽은 자인데. 어떻게 죽은 자가 소속이 될 수가 있습니까? 

“나는 주안에 있습니다.” 주 안에 있다면 당신은 허망한 자고 당신은 욕심쟁이 맞아요. 왜? ‘고엘’이 중요하지, 대속자가 중요하지 당신은 안중요해요. 마태복음 21장에, 성경 중에서 참 어려운 대목에 포함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 하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에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주님께서 시장할 때에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는가 싶어서 가봤는데 그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때가 열매 맺을 때가 아니라서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 잘못이 아니에요. 단지 아직까지 무화과열매를 맺힐 때가 안 되어서 열매가 없었을 뿐이에요. 주님께서 “내가 실수다. 아직 열매 맺을 때가 안 되었구나.” 이게 아니라 “내가, 이 주님이 필요로 할 때 열매가 없는가?” 

무화과나무는 입만 있으면 “주여, 왜 이렇게 횡포십니까? 아직 무화과철인 5, 6월이 안되었잖아요.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두십니까?” 막 하고 싶겠지만 “그 입 다물라.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열매를 내 줘야지. 왜 네 생각, 네 정당성만 생각하느냐?”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름대로 나는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억울한 무화과나무만 저주받은 거예요. 이거 무화과나무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당시 유대나라 이스라엘, 그 당시 제자들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주께서 쓰시겠다, 하면 언제든지 나귀를 내주는 것처럼 너희들은 너희 자체 소속이 아니라 너희들은 나의 소속이라는 말이지요. 

나의 소속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허망한 것을 버리고 욕심 안내려고 애썼습니다.” 하는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주께서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내 놔라 그 말이지요. 네가 하는 짓거리 스톱하고.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옆에 보면서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이랬다고요. 네가 남한테 손가락질 할 잽이 못 된다는 거예요. 내가 저들과 같지 않다고. 양쪽 다 허망하면서도.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의해서 해체되어야 돼요. 여러분이 김치 먹을 때 젓가락 가지고 헤집지요. 저는 젓가락질을 잘 못하는데 숟가락 가지고 김치를 쫙 째버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빈자리가 나오지요. 커다란 김치줄거리가 한 입에 못 들어가니까 째는 거예요. 째버리면 구분이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도 닦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째버립니다. 

해체당해야 돼요. 말씀으로 해체당해 버리면 내가 나라고 여겼던 그 하나가 중간에 균열이 일어나서 더 이상 나라고 할 것이 없어요. 꼭 죽 같아. 꼭 내가 아닌 듯이 흐리멍텅하게 되어서 없어요. 없을 때 거기서 빈자리가 나와요. 오늘 마지막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대목입니다. 그 빈자리를 사랑하세요. 주께서 헤집은, 주께서 만들어낸 빈자리입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주님이 주인공이라고 우리를 빈자리 만든 거예요.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사회입니다. 이 경쟁사회가 왜 이렇게 힘드는가? 내가 내 수치심을 남에게 안 들키기 위해서, 잘난 인간되기 위해서 그렇게 쓸데없는 경쟁들을 해 온 거예요. 누가 젓가락 들이밀면 우리는 용서가 안 됩니다. 분노의 복수심을 갖습니다. 

“왜 우리 가정을 엉망 만듭니까? 왜 내 인생을 이렇게 헤집습니까?” 이제는 그렇게 나오지 마세요. 그거 열매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망했어요. 진짜 주님의 열매는 고엘의 자리, 대속자의 자리입니다. 헤집어야 돼요. 완전히 해체되어야 돼요. 욥이 그렇게 잘난 체 하다가 주님이 보낸 마귀에 의해서 완전히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빈자리, 내가 몰랐던 빈자리가 바로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것. 이 죄인을 위해서, 이 지옥 갈 인간을 강제로 천국 보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젓가락질을 하셔서 강제로 김치줄거리를 헤집어버린 거예요. 이제는 더 이상 너라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전에 네가 욕심 따라 살아왔다면 이제는 말씀 따라 살아가는 거예요. 

말씀 따라 살아가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마세요. 말씀 따라 살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욕심쟁이 우후후~’가 되고, 말씀 따라 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살아도 허망한 거예요. 김 집사, 박 집사, 최 집사, 같이 이야기할 때 허망한 집사, 최 허망, 김 허망, 허망과 허망을 주고받는 거예요. 그거 외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허망해요. 

아버지 허망하시고, 어머니 허망하시고, 허망한 어머니가 날 낳으시고, 허망한 아버지 날 기르시고. 전부 다 허망한 것들이에요. 그런 가족, 그게 주의 가족입니다. 소속이 고엘 소속, 대속자의 소속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누구다” 하지 말고, “나의 소속은 이수만 엔터테인먼트” 하지 마시고 “나의 소속은 주님입니다.” 이런 증거, 주님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감춰도 감출 수 없는 주님 앞에서 뭘 더 감추겠습니다.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기 정당한 맛으로 남에게 안 지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우리, 그것이 도리어 마귀에게 얻어맞는 순간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 이젠 주님의 빈 공간에, 하나님의 후견자의 공간에 우리가 사인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