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9강-이사야 강해: 말씀의 성취
마지막 시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8장을 한번 봅시다. 6절에 보게 되면, “네가 이미 들었으니 이것을 다 보라 너희가 선견치 아니하겠느뇨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노니” 7절, “이 일들은 이제 창조된 것이요 옛적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렇지 않았더면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였으리라” 8절,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었나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하나님께서 역사 외곽에 주도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의 진행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간다면, 역사 외곽에 주님께서 여기에 계획하시고 주둔해 계셔가지고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날리는 거예요. 날리게 되면, 역사에 속한 인간들이 역사에 정신이 팔리게 되면 이 하나님의 계획이 전혀 들리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소리가 가득하잖아요. 가득. 소리가 가득한 거예요. 굉장히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막상 인간세계에서는 주님의 소리가 들리지를 않는 겁니다.
시편 19편에 보면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절,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가득 차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는 굉장히 지금 시끄럽게 이야기하시고 할 일이 많은데 이 땅은 조용해요. 이 땅은. 가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을 뿐이지 조용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쪽 역사에 침투를 했을 때에, 하늘의 소리를 듬뿍 담고 침투를 했을 때에, 역사에 빠져있는 인간들은 여기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여기 침투하면서 침투하는 지점이 이사야 9장에 보면 나옵니다. 제가 빨리빨리 읽고 넘어갈 테니까 따라오려면 따라와 보세요. 흑암에 있는 자들이, 어두움에 있는 자들이 큰 빛을 보았다. 9장 2절에. 그러니까 이 역사 자체를 외곽에서 보면 짙은 어두움이 되는 거예요. 어두움이 되었을 때에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인격화되어서, 인물화 되어서 침투가 될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이사야 52장 1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시간에 성경구절 한 스무 개 이상 나올지 싶어요.
이사야 52장 1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절, “이왕(지금)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좋아서 놀란 것은 아니죠. 15절,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이 어두운 세상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기가 있고 한 아들이 여기에 접속이 된다면, 그 모습은 이 어두움이라는 환경 때문에, 어느 인생보다도 더 천하고 처참하게 그렇게 이해되는 겁니다. 목소리의 침투가. 그래서 그 아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이 역사 속에 뭘 뿌리느냐 하면은, 군데군데에다가, 이사야 전체에다가 뭘 뿌렸어요. 그 뿌린 것이 뭐냐 하면은 인류의 모든 프로젝트 그 계획의 파편들. 파편인데, 무슨 파편이냐 하면은 계획의 이미지 파편들을 전부다 여기다가 군데군데 다 뿌려놓습니다.
하나님의 창세전 계획의 이미지들이 이미 이사야가 오기 전에 많이 뿌려졌어요. 그 뿌려진 것을, 형편없이 망가진 모습으로 온 그 예수님을 구심점으로 해서, 그분의 활동을 통해서 전에 있던 이미지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두움 세계에서 어두움과 극히 대조되는 방식으로 살아나기 시작하죠. 시편 19편에서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시편 19편에 보면 이 우주는 이미 알고 있어요. 인간 말고 다른 쪽은 하나님의 소리가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럼 이거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은 이 역사라는 가공적인, 인위적인 그러한 현실관이 있다면, 역사라는 것으로 구성된 가공적인 현실관이 있다면 여기에 스크린이 있고, 이 스크린 바깥에 주님의 계획이 있다면 이 스크린에 비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마치 영화관에 자막같이 문자로 쫙 깔리는 것입니다. 그 문자의 집합이 이사야에요. 문자의 집합이. 그냥 문자로만 그래요. 말씀으로만. 문자로만 깔려 있다가 그 문자가 집합해서 하나의 인물로 집약되어서 이 어둠속에 왔을 때에, 온 그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납득되지 않는 모습이죠. “인간아! 왜, 니 그리 사냐?”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그 나타나신 인물은 모든 이미지들의 종합이에요. 종합. 종합해서 인물 안에 응축돼서 나타났습니다. 그럼 그 분은 바로 주의 이름이고, 그 주의 이름이 전에 깔아놨던 하나님의 계획을 다 최종마감해서 완성시킬 분으로 등장하시는 겁니다. 그런 것은 이사야에 군데군데 뿌려놓은 이미지들이 있는데, 이미지들을 지금부터 보겠습니다.
첫 번째, ‘창조이미지.’ 이사야 45장에 나와요. 지금 우리가 스크린의 자막을 보고 있고 자막과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행적과 비교해보면서 파악하시면 되는 겁니다. 성령 받으신 분이죠. 이사야 45장 7절에 보게 되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창세기 1장입니다. 창세기 1장.
창세기 1장 다음에 창세기 2장이 나오겠죠. 그거는 뭐냐 하면 두 번째 ‘낙원이미지’입니다. 낙원이미지는 이사야 51장 3절에 나와요.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하나님은 전에 던졌던 이 낙원이나 이런 이미지에 대해서 그냥 과거에 한물 간 걸로 나는 버려두지 않겠다는 거예요. 반드시 거기에 담긴 취지를 예수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완성해내겠다는 거예요.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한다. 낙원이미지. 창세기 2장이잖아요.
그러면 이 낙원이미지가 무엇과 결합이 되었느냐 하면은, 나중에 다윗언약의, 다윗의 시온성과 같이 결합이 되면서, 시온이 낙원동산으로 변화되어서 그쪽에 사람들이 살게 됩니다. 시온과 낙원이미지가 이사야 35장 5절에서 10절에 나오죠. 이사야 35장 5절에 보면,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절,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며” 7절,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쭉 이야기해놓고 9절에,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이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절,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래 되어 있어요. 창조이미지를 나는 포기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에덴동산 화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창세기 2장 지나면 몇 장이죠? 3장이죠. 3장에 보면 악마가 나옵니다. 악마이미지가 나와요. 이사야 24장에, 지금 우리가 이사야 다 떼는 거예요. 그 악마라는 것, 바벨론이 짐승이죠. 악마, 짐승 다 한통속입니다. 바벨론이 왜 그렇게 멸망당하느냐 하면은 이게 건방떨어서, 교만해서 그래요. 이사야 24장 21절에 보면, “그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22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같이 모음을 입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23절,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
이사야는 마지막에 지옥으로 끝나는데요. 왜, 지옥의 불은 꺼지지 않아야 되느냐 하면은 시온성, 천국의 기쁨이 유지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천국의 기쁨은 그냥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수가 복수답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천국에서 기분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천국의 기쁨이 끊어져야 된다면, 만약에 그럴 일이 없지만, 천국에서, 시온성에서 기쁨이 없어진다면 그때 지옥은 해방이 되는 거죠. 이 말은 천국에서 기쁨이 계속되는 한, 지옥은 영원한 형벌이 계속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이사야 27장 1절에 보면,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바다에 뭐가 사느냐 하면은 바다는, 이거는 격납고, 비행기 놔두는 곳이 있죠. 마지막 모든 역사가 종결될 때 처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알파요 오메가니까. 시작이고 끝이니까. 처음에 인간이 6일 만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마지막 때에 모든 역사가, 굳은살처럼 끼어있는 역사가 뜯겨져나갈 때, 그 역사의 원천이, 어디서부터 그 뿌리가 나왔느냐 그걸 마지막 때에 보여주죠.
물론 창세기 3장의 이미지에서는 뱀과 여자가 싸운다고 언급되어 있지만, 이거는 문자로, 자막으로 처리되어 있고, 이 자막이 현실화되는 것은 이 역사의 굳은살이 뜯겨져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모든 인간들은 어디에 숨어있겠습니까? 역사 속에 숨어있죠. 역사 속에. 역사가 시루떡이라면 층층이, 시대 시대에, 2018, 2019, 2020..., 전부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가득 다 숨어있어요. 그걸 확 뜯어버려요. 뜯어버리면 역사 속에 숨어있는 모든 민족들과 모든 국가들도 짐승이라는 이름으로 다 뜯겨져나가죠.
현재 세계 월드컵에 가담된 나라가 한 이백나라가 넘어요. 200나라. 월드컵에. 유엔은 참석 한하는데 월드컵은 참석해요. 참 희한해요. 그 한 나라가 다 뜯겨져나간다면 그들의 뿌리가 훤히 다 드러나겠죠. 그것은 바로 바다에 있던, 격납고에 있던, 저장고에 있던 이것이, 바다에 있어야 될 위인이 언약을 파괴하면서, 언약을 공개하면서, 땅에 언약에 시기가 나서 언약을 집어먹기 위해 짐승이 땅에까지 올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땅에까지 올라오면 땅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백성 데리고 피신한 이후에 짐승이 올라오죠. 타이밍이 짐승이 올라오고 자기백성은 언약의 완성을 위하여 하늘로 가버리고. 우리는 땅에서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나라에 있다. 땅은 니 맘대로 가뭄을 하든, 지진을 하든, 영덕에 지진이 나든 맘대로 해. 그것은 어차피 짐승과 더불어서 파멸되어야 될 어두움의 세상이니까. 마음껏 짐승이 휘젓도록 그냥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겁니다. 마음껏.
주님은 이미 하늘에 계시고 성도도 하늘로 갔기 때문에, 땅에서 인간들 뭐 유린하고 하는 것, 하늘나라한테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어차피 한통속이니까. 역사하고 한통속이니까. 짐승하고. 그러면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 큰 성, 바벨론,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 도대체 뭐가 문제이기에 그렇게 하나님께 시달리고 된통 당해야 되는가? 그거는 뭐냐 하면 바벨론 자체가 교만덩어리고 항상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는, 이 세상은 나만 있고, 그걸 불교가 대표해줘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만 가장 시급한 문제고, 내가 최종적인 다급한 그러한 대상이 된다는 것을 바벨론이 주장한 겁니다.
그다음에 나온 것이 노아이미지죠. 노아이미지는 이사야 54장 29절에 나옵니다. 전에 있던 언약들을 다 무효로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처음에 낙원이미지에서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는다고 나올 때에 눈치 빠른 분은 마태복음 11장에 나오는 그 이야기, 세례요한이 오실 메시야입니까? 라고 할 때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나오죠. 그게 뭐냐 하면 이사야가 판을 다 깔아놓은 거예요. 예수님은 그 판 위에서만 제한되게 활동할 뿐이에요. 이사야 속에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벌써부터 시작한 거예요.
노아이미지는 54장 9절에 나오죠.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미 노아홍수라는 그것이 홍수로 말미암아 이 땅은 땅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땅에서 흘려진 정결한 짐승의 피를 보호하는 입장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는 그러한 보조적인 재료로서 땅의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는 겁니다. 땅의 운명이 이미 끝난 거예요. 이미 노아 때.
아까 뱀 이야기는 했고요. 자, 그러면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죠. 그런데 이사야에서는 뭐냐 하면은, 우리가 아는 시온은 어떤 부동산이고, 땅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사야 61장에 보면 그 시온이 여자가 되어 있어요. 그럼 여자가 할 일은 뭐냐 하면은 자식을 낳는 거죠. 이사야 66장 7절에 보면,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며”
시온이 남자를 낳는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신약적으로 정확하게 말해서 남자를 낳은 것이 바로 시온이다. 이렇게 순서를 바꾸어서 이해하는 것이 좋아요. 엎치나 메치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하는데, 마찬가지 아니에요. 신약이 먼저 있고 구약은 나중이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역사관을 완전히 뒤집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전에 이야기했죠. 내 뒤에 오신 분이 나보다 먼저 계시다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이미 신약 자체를 위하여 구약이 모형과 그림자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면 그건 릴을 감는 거죠. 구약아! 빨리 오너라! 이 감는 역할을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는 것이 이사야에요. 미리 군데군데 던져놓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자막들을 이걸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잡아 땡겨 역사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으면 역사 속에서 현실화된 하나의 인물로 구체화되고, 여호와 종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되고, 그 종은 아무도 못 알아보죠.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도 못 알아본다는 것은 평소의 역사들이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몰랐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이사야 66장 8절에 보면,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 하였도다” 9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시온 자체가 처녀가 돼버렸어요. 시온 자체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시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죠. 성전이라는 것은 임마누엘,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그런 구조체제를 말하죠. 이 시온에서 한 아기가 나오고, 한 아기가 나왔다는 것은 시온 자체가 한 아들을 위한 하나의 여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온이 아기를 낳았다는 말도 맞지만, 신약적으로 볼 때는 예수님을 출발점으로 해서 시온이 누군가를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시온 찾아가봐야 지금 이슬람인들이 장사하고 있습니다. 서문시장이에요. 복잡해요. 여기에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이 곧 시온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곳이 곧 시온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임신해서 태어나게 한 그 환경 자체가 시온이에요. 하나의 도시가 여자로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이 참 신기하죠.
그렇게 신기하기 전에 그러면 결혼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혼을 해야 뭐 아기를 놓든지 하죠. 그 결혼이 이사야 62장에 나옵니다. 그전에 61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61장 10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이래 되어 있어요. 둘이 지금 살림차려놓고 있는 거예요. 둘이. 11절,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리 것을 움돋게 함같이” 이렇게 해놓고, 남편이 누구냐가 궁금하죠.
62장 4절에,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헵시바, 나의 기쁨은 너에게 있다는 뜻이고.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쁄라, 이는 결혼한 여자라는 뜻이고.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5절,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이 신랑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가 누구냐, 버리운 자, 버리운 시온과 결혼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시온은 애초부터 이 땅의 세계에서 문자로 들어왔을 때는 이 시온의 개념은 뭐가 되냐 중첩이 돼요. 중첩. 인간들이 자기 현실을 구성하기 위해서 날아다니는 것의 언어체계가 있는 그 시온, 그 시온은 땅에 붙박이 되는 시온이지만, 이 땅에 붙박이 된 시온을 바벨론을 통해서 멸망시키고 난 뒤에 이걸 제거하고 삭제할 때 비로소 그때 천상의 시온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천상의 시온과 하나님이 그 안에서 자기 신부를 삼으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낳는 거예요. 시온이, 예루살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오신 걸로 되어있지만, 아까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 미리 중첩된 개념을 갖고 있는 예루살렘은 망해야 되는 거예요.
그 중첩의 의미, 즉 망해야 진짜 천상의 시온은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시온은 땅에 속했기 때문에, 아담의 혈통에 속했기 때문에, 이 현실에 속했기 때문에, 악마의 유혹 이후의 세계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이 세상 여기에 배치되어 있고 나타난 모든 것들은 중첩의 중위적 의미를 품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의 몸은 중첩된 몸을 갖고 있습니다. 이 몸이 죽어야 새 몸이 되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이 왔을 때에 이 몸 말고 딴 몸이 있다는 거예요. 이 몸 말고 딴 몸.
이 몸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을 제가 설교 시간에 무슨 죄라고 했습니까? 이 몸 가지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승진하고 성공하려고 하는 그것을 무슨 죄라고 했죠? 야고보서에 나오는데요. 그것을 제가 설교시간에 율법에 의해서 무슨 죄라고 했거든요. 야고보서 4장 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세상에서 이 몸을 추스르고 이 몸을 잘 키워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그것이 무슨 죄에 해당이 되느냐 하면은 그게 바로 간음죄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간음죄. 간음죄에 중첩의 의미가 들어있다고요.
왜냐하면 이 몸은 빨리 벗어야 될 몸인데, 그래야 새 몸을 입거든요.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바울의 소원이 그거였어요. 이 육체를 가지고 못 견디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대구경북지역에 폭염주의래요. 34도, 35도. 내가 온유해야 된다, 자비해야 된다, 삐질삐질 땀이 나는데? 이게 온유가 됩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럼 주께서 뭐라고 하느냐, “그 약한 육신 한번 처리해줘?” “아니 되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자식 때문에 더 살아야 됩니다.” 이러고 있다고요. 부모들이 맨날 아프면 “나 같은 것은 죽어야 돼, 힘들지? 힘들지?” 마음은 뭐 곧장 죽을 것 같은데, 죽을 때 되면 어데~ 죽기 싫다. 본심이 나오죠. 그게 다 육체의 욕망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에 보면 땅 자체가 욕망을 더 키웠다는 대목도 나와요.
그다음은 아브라함의 이미지를 해야 되죠. 아브라함 이미지. 이사야 51장 2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잉태치 못한 자를 천국으로 돌려보내주신다는 거예요. 이사야 51장 2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이거하고, 이사야 54장 1절을 한번 보세요.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거기서 나오죠.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식보다 많음이라” 이거 우리보고 뭐 어쩌라는 말입니까? 아니, 병원에 가서 자궁 드러내라는 말이에요? 이거 무슨 뜻이에요? 대책이 없어요. 우리는 대책이 없어요. 자궁 드러내고 기도해서 자식 낳으라는 이 이야기입니까?
지금 외곽에서 어떤 계획이 있다할지라도 이 어두움의 역사하고는 이게 연결성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종교도 많고 신도도 많아요. 그것들이 인간의 육체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의 육체의 욕망.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자기가 잘되기 위한 모든 소망으로서 점철된 그런 내용들이 모든 종교의 신학적인 내용에 다 들어있다 이 말이죠. 기독교도 포함이 되어 있고. 그런데 그것들이 전부다 소용이 없는 내용이라 이 말이죠.
잉태치 못한 자! 그 한 마디로 끝난 거예요.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난 인간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게 뭐냐 중첩된 의미입니다. 우리의 몸을, 우리의 중첩된 것을 내가 스스로 뜯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알아서 죽음을 통해서 뜯어내게 해주십니다. 죽음을 통해서. 일종의 우리의 육신은 한 석 달 만에 목욕탕 때밀이 아줌마 앞에 간 몸이라고 보면 돼요. 알아서 때가 줄줄 나오죠. 아이고, 더러워라. 이 아침에. 괜히 했어. 괜히 했어.
이사야 11장 봅시다. 11장 16절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출애굽이죠. 출애굽 이미지가 이사야에 나옵니다. 아까 제가 성경 볼 때 노래한다고 했죠. 시온산에서 노래한다. 노래한다는 것은 출애굽 이미지에 나옵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출애굽하고 난 뒤에는 마음껏 노래 부르죠. 갈무리라는 노래를 누가 작곡했는가, 제가 알기로는 나훈아가 작곡하고 나훈아가 작사하고 나훈아가 부른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면 그 노래는 나훈아만 불러야 되고 다른 사람이 부르면 안 됩니까? 그 노래 송가인도 부르고, 용두산아~ 용두산아~ tv만 틀면 용두산아~ 나오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 노래도 아닌데 부르죠. 노래를 복제해서 부르죠. 그걸 이제는 저와 여러분의 담당이에요. 주님이 불렀던 그 노래를 계속해서 우리도 불러 제키는 거예요. 왜? 같은 편이기 때문에. 그 노래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시온이라는 노래 속에 갇힌 존재가 되어서 천국에서 그 노래를 부를 거예요.
그래서 역사 속에 나타난 그 이미지들은 지금 오늘날 우리의 육체를 통해서, 이사야의 몸에다가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전부다 그 이미지가 실현되고, 실현된 것을 예언했다면 지금 우리의 성도는 보잘 것 없는 썩어가는 육체지만, 여기에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창세기부터 예수님 십자가의 마지막까지 이미지가 우리를 통해서 재현되는 겁니다. 노래 속에서. 용두산아~ 용두산아~ ‘용두산 엘레지’ 이거 1950년대에 만들었는데 그걸 후배가수들이 자기노래라고 부르잖아요. 이젠 주님의 노래, 모세 누나의 노래만의 노래가 아니에요. 이게 우리의 노래에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유리바다 건너갈 때 어린 양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같은 노래를 부른다고요.
그다음에 민수기 이미지를 봅시다. 민수기 이미지. 이사야 41장 15절을 봅시다.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시온에 있는 우리 성도를 향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기계,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잘라버리고 부숴버리고 파쇄 하는 타작기계로 만드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을 전쟁하는 기계로 삼는 이미지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기계로 사용하죠.
그다음에 할례에 대한 이미지가 나오는데 이 이미지는 이사야서에서는 특별히 역사적으로 이걸 표현해놨어요. 이사야 37장 30절,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이것은 히스기야 때 앗수르 침략을 받고 난 뒤에 이사야가 장래에 대해서,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해서 하나님의 율법적인 의미를 담고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한 결과로서 앗수르가 물러갔습니다.
앗수르가 물러간 것이 히스기야 본인의 뜻 때문에 물러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어떤 인간의 뜻도 받지 아니하고, 전에 던져줬던 하나님의 그 말씀을 성취하는 차원에서 히스기야 당신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당신은 거기에 이용당하고 결과로서는 말씀은 말씀대로 성취의 효과를 보인다는 것을 하나님의 자기 증명으로 나가는 거죠.
오랜만에 교재를 잠깐 볼까요? 교재 7페이지를 봅시다. “결국 언약이란 인간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도한 하나님 자신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의 만남이다. 인간은 배제되는 거예요. 빠져야 되는 거예요. 구원, 천국, 영생, 우리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던져준 말씀을 자기가 그걸 회수하면서 일어나는 부수적인 현상이, 부수적인 결과가 천국이고 구원이에요. 우리는 그런 계획이 없었는데 그 기계에 말려든 거죠. 하나님의 자기 증명에 우리가 말려든 거예요.
둘째 시간에 공식하나 말씀드렸죠. 그 공식에 보면 모든 것이 마지막에 괄호 바깥에 뭡니까? ‘1-x’라고 했잖아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은 이게 바로 하나님이라는 자기 증명을 위해서 그동안 부지런히 인간들을 갖고 노신 거예요. 악마도 갖고 노신 겁니다. 이건 아니야, 라는 것이, 이거는 아니지. 이거는 교회가 아니지. 이거는 아무것도 아니야가 충분히 필요했던 거예요. 다시 두 번째 시간에 했던 것을 해보면, ‘1+x’ 여기 ‘1’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은 자기가정이에요. 이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된 가정이다. 거기에 나는 가장으로서 기여했다. ‘+x’거든요.
그럼 교회 같으면 ‘1’이 뭐가 되겠습니까? 목사 같으면 교회가 되겠죠. 자기 교회니까. 이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진짜 교회라고 하면서 나라는 목사는 말씀으로 기여했다고 우기는 거예요. 교인들은 돈으로서 이 부동산을 장만했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러면 정치하는 사람이나 사회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1’은 뭐가 되겠습니까? 나라가 되겠죠. 그럼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은 뭐가 되겠어요? 자기회사가 되겠죠. 그것을 절대화한다 이 말이죠.
나를 절대화하기 때문에 그게 필요하니까. 바로 그러한 악마적인 발상을 주께서 충분히 활용해서 결국 하나님은 말씀은 말씀대로 악마까지 끄집어 땡기면서 말씀은 말씀대로 다 완성시켰다. 큰 괄호 옆에다가 그걸 뭐로? 십자가로. 이게 십자가를 딱 뜯어보면 그런 세상 내용이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거예요. 너희들의 지혜, 기적 받은 것은 아무소용이 없다. 진정한 지혜는 뭐냐 성령으로 주신 십자가뿐이다.
그러면 아까 이사야 37장 30절을 읽었던 이 말은 뭐냐 하면 레위기 19장 찾아봅시다. 좀 힘들더라도 찾아보세요. 시간 몇 분 안 남았습니다. 손가락 좀 돌리고. 23절에서 25절. 23절,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24절,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절,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삼년이라는 게 텀term, 간격, 이거는 바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금방 벌떡 또 일어나시는 것이 아니고, 삼년이라는 텀을 두신 것은 이 땅에 대해서 구원받을 자는 이 땅에 할례라는 그 약속과 결부된 자만이 주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왜? 약속은 약속이어야 하니까. 너희들 이뻐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할례 받은 자만이 이 땅의 거룩을 보장하겠다는, 전에 던져준 약속을 성취하는 그런 재료로서 자기 백성을 거기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결부시킨 거예요. 이게 나중에 호세아에서도 나와요. 호세아도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요. 이거는 텀입니다. 나 인간하고 다시 거래 안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거죠. 그걸 히스기야는 역사적으로, 실증적으로 보여준 겁니다.
그다음에 소돔과 고모라 이미지가 나옵니다. 이사야 13장 19절,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 이 바벨론 나라가 바벨론 현지인이 아니고, 바벨론 옆에 있는 갈대아 라는 민족이 바벨론을 점령해놓고 이름을 바벨론이라고 한 거예요. 옛날 고대 바벨론. 함무라비 B.C17, 18세기에 있던 그 바벨론의 영광이 그리워가지고, 그래서 이름을 갈대아라고 하지 않고 바벨론이라고 한 겁니다. 주인은 자기가 갈대아 사람이라고 해놓고. 마치 옛날 고구려영토가 그리워서 신라 통일한 이후에 고려라고 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자고 한 거예요. 문제는 역사가 문제에요. 굳은살을 갉아내든지 목욕탕에 가서 대충 밀든지 해야지. 역사에 숨어들어가서 역사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시간 의식의 한계에요. 옛날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 이게 전에도 제가 이야기했지만 이게 정통개혁주의신학의 딜레마입니다. 치명적인 약점이에요. 성경을 통해서 교훈을 얻어서 목회 잘하자. 이거잖아요. 성경을 통해서 우리 망가진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거룩한 인간 만들자. 이게 바로역사주의의 한계에요.
그 짓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안 했겠습니까? 이사야에서 너희들이 금식 안하고 딴 짓했다고 하니까, 그걸 참고로 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성전 앞에서 옆에 세리 있는데 바리새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이레에 두 번씩 뭐한다? 금식한다고 했죠. 왜 그런 아이디어를 합니까? 딴에 이스라엘을 안다 이거거든요. 역사한테 교훈을 배워가지고 그런 실수를, 과오를 두 번 다시 하지 말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뭔가 잃어버린 하늘나라를 회복해주겠지. 로마가 물러나겠지.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고정도.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철저하게 자기위주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처는 어떻게 되는가? 이사야 65장. 참, 소돔과 고모라처럼 갈대아 사람이 이렇게 됐는데, 그 이유가 이사야 13장 11절에 보면,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이래 되어 있어요. 모든 바벨론의 잘못은 뭐냐,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은 없다는 그 교만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 교만이.
이사야 65장은 좀 있다가 보고요. 시편 68편을 먼저 봅시다. 15절을 보게 되면,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높은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16절,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17절,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이 말은 산과 한번 높이 비교해보자. 너희들이 추구하는 높은 산, 거만한 산, 높아지려는 그 의미, 최고가 되려는 그것은 이미 시온에 의해서 작살날 그러한 대상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이고, 목사님 이 세상 얼마나 살기가 좋은데요. 사람들 다 좋아요. 이 세상에 무슨 악마가 있습니까?”라고 하는데,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전부다 악마에요. 높아지려고. 주님은 처참하게 망가졌는데, 원래 말씀과 부합된 인물은 처참하게 너무나도 망가져서 사람들이 있어도 돌아보지도 않을 정도인데. 우리는 그 악마에 속한, 어둠에 속한 속성은 뭐냐 반대로 나가는 거예요. ‘누가 누가 잘하나’에요. 목요일 다섯 시에 애들 노래 자랑하는 것하고 똑같아요. KBS에서 하는. 맨날 ‘누가 누가 잘하나’에요. 게임하고 스포츠하고 그렇게 스트레스 풀고. 그런 거죠.
그럼 하나님의 대책은 뭐냐, 이사야 65장 봅시다. 1절을 보게 되면,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신세와 동일한 신세에 있는 자를 내가 한 그룹으로 묶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신세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더라도 이방인이에요. 왜?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했으니까. 이거는 거부당한 사람이에요. 그 거부당한 사람이 이스라엘 내에서는 어디에 있느냐, 바로 이스라엘 유대인에 의해서 거부당한 사마리아 사람들. 갈릴리 나사렛 사람들. 이사야 9장에 나오는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찾아가서 복음을 전파하죠.
출생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예루살렘을 거쳤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뭐냐 하면은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을 바로 가지 않고, 한번은 갔을 거예요. 요한복음하고 마태복음 예수님의 순서에 보면. 한번은 잠시 들를 수 있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갈릴리 바다, 그 근처의 동네에서부터 시작한 겁니다. 야, 이거 십자가마을 이스라엘 답사 한번 해야 되는데. 오백만원 들고. 햇반 사들고. 먹을 거만 잠깐 들고 한번 가야되는데. 갈릴리바다를 제가 우리교회에 동영상으로 올려놨으니까 한번 참고해보세요. 음악 깔아가지고. 또 음악 깐다고 욕도 얻어먹었지만.
그 갈릴리 바다부터 시작하는 것은 뭐냐, 내가 구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미리 던져주지도 않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지도 않은 백성들이에요. 이거는 개 같은 이방인들이에요. 언약이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던져놓고 언약을 회수하는 식으로 구원한다면, 이거는 이스라엘만 구원이 되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척을 빌미로 해가지고 언약이 없는 곳을 하나님은 건지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이 없는 곳을 어떻게 건지느냐, 언약을 만들면 되죠. 언약, 그때 추가하면 될 게 아닙니까? 왜? 주님이 법의 주인이니까. 내가 내 사람 뽑겠다는데? 니가 왜?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저 개 같은 단군의 자손들은 왜 구원합니까? 내 맘이다 왜? 니 맘이가? 이런 거요. 이거는 고발용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렸다. 내 백성이 나를 버렸다. 안 버릴 수가 없죠. 인간 자체가. 범죄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뭐냐 하면은, 이사야 65장 1절, “내가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이래 되어 있어요. 이사야 55장 5절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집구석에 가만히 앉아있어라. 내가 가서 부를 때에, “예, 여기 있나이다.” 오면 되는 거예요. 열두 제자들 뽑을 때도 그렇게 뽑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는 방식도 그 방식이에요. 우리는 늘 평소에 제 갈 길로 갑니다. 어떤 게 제 갈 길인지 제가 말씀드렸죠. 십자가 피 믿어야지. 교회 다녀야지. 이게 제 갈 길이거든요. 나름 천당 가려고 온 몸을 다하는 거예요. 이게 주님은 모르고 내 쪽에서 할 도리는 해보자는 식으로,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니까. 교회 나와서 성령이나 한번 받아볼까? 이런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그거는 구원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랬던 생활을 이 교회, 저 교회, 온갖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했는데, 어느 날 순간,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불러준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는 순간, 달리다굼이죠. 소녀야 일어나라! 죽은 데에서 살아난 거예요. 아, 이거는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불러줘야 하는구나! 왜? 불러줘야 나보다 먼저 존재하신 분이, 주님이 엄연히 지금도 살아서 활동하고 있구나! 그 활동 앞에서 나의 존재, 나의 활동은 주여, 개 무시해주시옵소서. 이거 또 개 나온다. 개시리즈다. 주여, 나 같은 것은 개로 취급해도 저는 즐겁기가 한량없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개를 개로 취급하는 것을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그래서 예수님의 활동 가운데 이방인들을 개라고 취급하면서 자기가 뽑는 거예요. 이사야 55장 5절을 성취하기 위해서. 진작에 유대인들도 그렇게 살 것을. 나는 뭐 혈통이 아브라함의 혈통이고. 그따위 소리하지 말고 진작에 이방인들을 찾아올 때,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캐리어도 없어. 비행기 표도 없어. 전에 인천공항에 가보니까 그냥 아무것도 없이 반바지만 입고 걸어와요. 비행기 탔어요. 저건 좀 심하다 싶었는데.
그래서 모인 곳이 뭐냐 하면 시온성입니다. 이사야 2장 2절 봅시다. 아, 이거 시간 좀 지났는데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마지막인데 다같이 2장 2절을 제창해볼까요? 노래한번 불러볼까요? 새 노래로. 곡조는 마음대로 하시되 가사는 이겁니다. 자막이에요. 시작!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고 모여들 것이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렇게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그저 기뻐하신다는, 내 신부라는 그런 명목으로 불러주셔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를 펼쳐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게 하나의 꿈이고 몽상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의 확실성과 부활의 확실성으로 역사 속에 증거를 남겨 주셨사오니, 이제부터 우리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