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딤전후(교회를 잊어라!) 제6강(둘날오후2)
2011,08,01 강의 이근호, 녹취 오용익
◈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
율법에 있어서, 율법이 필요치 않은 그런 의인은 없다는 겁니다. 즉 의인이 따로 있고 또 죄인이 따로 있어서, 죄인들만 율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항상 사태가 일어나면 졸지에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자기는 율법이 필요 없는 의인이라고 우겨도, 결국 어느새 여기에 있는 이런 항목에 해당되는 것들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원래 예수님 자체가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하게 되면 우리의 주체는 전혀 감당이 되지를 않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냥 놀라서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을 통해서, 즉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고마운 줄로 알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주여, 제가 주제넘게 환상과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죄인임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합니다" 라고, 그러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되어버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니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피를 왜 흘려야 되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는 말이 "누가 주님을 보고 피를 흘리라고 했습니까? 왜 본인이 피를 흘려놓고 나에게 책임을 묻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주님께서는 "오, 그래 너 잘났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한 대화가 바로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난 뒤에 떠난, 즉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관계가 없이 사도바울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인데, 그들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나의 것을 포기하지 못하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나'의 자존심, '나'의 가치, '나'의 의(義) 등등, 그렇게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 이근호를 떠난 사람은?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이 조금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도바울은 움직이는 계시가 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자기를 떠난 사람들을 두고 사단에 속했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을 떠난 자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근호를 떠난 사람은 사단에 속했습니까? 속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속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근호는 전혀 계시의 중심에 서있지 않다는 겁니다. 분명히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을 떠났다고 해서 사단에게 돌아갔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밖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 사도바울 당시는 성경의 형성과정이기에 !!
하지만 사도바울 당시에는 성경이 형성과정에 있었는데, 그래서 방언이라는 것은 불신자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예언과 통역은 신자들을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두 개가 합쳐지면 말씀의 완성이 되는데, 물론 지금은 말씀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방언이고 예언과 통역이고 간에 따로 분류가 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말씀의 형성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방언을 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 신비적이고 묵시적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방언을 했다는 겁니다. 즉 "너희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롱?" 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언과 통역은,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이 "야, 주님의 계시인데, 그 뜻을 모르겠다" 라고, 그렇게 주님의 계시의 뜻을 모를 때 그 은사가 제공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전부 다 능력자인데, 하지만 방언과 예언과 통역을 주도하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제일 첫째가 사도가 되고, 그 다음이 선지자이고, 그 다음이 교사가 되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능력을 행하는 자, 그렇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데 말입니다.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 12: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그러니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을 행하는 자, 그렇게 될 때, 여전히 사도가 무엇을 갖고 있습니까? 즉 계시의 범위를 고정시키는 중심축으로서의 사도가 살아있던 그때 그 시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도가 죽었는데, 그렇게 사도가 죽어버렸으면 "지금은 그 계시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이 문제인데 말입니다.
◈ 이제는, 성령께서 완료된 성경책으로 !!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가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도를 사용하셔서 성경의 완료성으로서 그렇게 했고, 그리고 사도가 죽고 난 뒤에는 사도가 죽어도 성령께서 살아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완료된 성경책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씀이 무생물이 아니고 생명체임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디모데전후서의 모든 강의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어떤 분은 아직 1장도 안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제 강의가 몇 시간 남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디모데전후서를 다하는데는 빠르면 한 시간이면 되고, 더 걸리더라도 한 시간 반이면 다 끝난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고 하면, 만약에 디모데전후서를 일일이 따로 따로 설명해버리면, 나중에는 응축된 주체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셈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즉 "성경에 이런 것이 있다", "그것을 안다", "2장에 이런 것이 있다", "그것도 안다" 라고 한다면, 즉 '안다' 라고 하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성경 본래의 사도중심축으로 전환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 당시의 사도들에게 말씀을 들은 사람이라고 하면, 그들로 하여금 "아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구원이 되네. 그렇구나" 라고, 그렇게 그리스도 안으로, 즉 십자가 중심으로만 모아지도록,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성경읽기' 식으로 해버리면, 사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내가 이것을 안다" 라는 지식으로 머물러서, 자기를 응축하는데 보탬이 되는 성경지식정도로, 그 정도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지식들이 있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그냥 지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엇이 어떻게 지금 현재 살아있는 현실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있는 것들인데, 그래서 제가 그 뒷배경의 모든 사실들을 길게 설명함을 여러분이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디모데전서 1장 12절과 13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했다 !!
여기 13절에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사도바울이 자기가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누구의 책임이라는 겁니까? 자기 책임입니까? 아닙니까?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알고 믿지 않은 것이 아니고, 몰랐기 때문에 믿지 않았기에 말입니다.
물론 우리도 이러한 점을 불신자들에게 이야기해야 되는데, 즉 "이전에 내가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은, 내가 몰랐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이야기하지 말고 그 앞에 것도 해야되는데, 즉 "내가 전에는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라고, 그것까지도 이야기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것은 어디론가 그만 '쏘옥' 빼놓고, "내가 무엇을 알아야 믿지, 몰랐는데 뭐?" 라고, 그것만 달랑 이야기를 해버린다면, 그만 자기가 잘난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잘난 사람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마땅히 지옥으로 가야만 될 자인데, 그런데 주님 때문에 구원을 받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나는 몰랐기 때문에, 내가 지옥에 간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어불성설이고 전혀 잘못된 조치이다" 라고, 그렇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식에서 지식으로 머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전에는 예수님을 몰랐는데,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알고 나서부터는 이것이 소급되어서, 즉 예수님을 몰랐던 시절까지의 자기의 상태를, 마치 파도가 덮치듯이 그렇게 한꺼번에 모두 다 덮쳐버린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수해가 났다는 겁니다. 원래 물은 하수구로만 빠지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수해가 나서 부엌과 안방까지 다 차버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넘치는 수해, 즉 물의 넘침,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은혜이고, 또한 용서라는 겁니다. 또한 앞으로 우리의 남아있는 인생까지도 은혜라는 물이, 또한 긍휼이라는 물이 가득히 차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아니까 우리는 즐겨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하면서 입가에 웃음이 늘어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웃음이 늘어지면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그것을 좋다고 하면서 이야기하면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만가지 인상을 다 찡그리면서 이야기하면 성도가 아닌데, 틱틱거리면서, 또는 씩씩거리면서, "그래, 나는 죄인 중에서 괴수가 맞다" 라고 한다면, 아주 수상하고 사단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사단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쉬운데, 왜냐하면 사단은 항상 옆에 붙어서 따라다니니 말입니다.
이제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
여기에 보면 그냥 믿음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반드시 이러한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면, 그 안에서 나온 믿음과 사랑은 마치 용수철이 되어서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갑니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의 응축된 주체를 묵사발을 만들고 어디 안으로 끌어당긴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랑이 나왔던 예수 안으로 우리를 잡아당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믿는 것 자체가, 사랑하는 것 자체가, 그리고 믿음과 사랑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이 전부 다 자기 자신의 능력 바깥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자기 혼자 존재한다면, 즉 그것이 우리의 능력 바깥에 있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하지만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 바깥에 있다는 것을,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누구에게 돌립니까?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주님에게로 돌린다는 말입니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나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__
그렇게 계속해서 나온다면, 우리는 그 계속해서 나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한해서는, 자기가 전혀 보탠 것도 없고, 행한 것도 없이, 그냥 주신 믿음과 주신 소망과 주신 사랑으로 살면서 즐기고 있으니, 그래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하면서, 너무 좋아서 이렇게 눈동자도 안 보이고, 또 입도 너무 좋아서 이렇게 벌리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안동의 하회탈처럼 말입니다(ㅋㅋ).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하면서 좋아서 입이 '쩍' 벌어지는데, 그런데 이것을 유지시키는 것은 주님의 몫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안에서 죽은 자로서 다루어지기 때문에 말입니다. 계속 그러한 은혜가 나오는데 어떻게 나온다고 했습니까? 넘치도록, 마치 이번에 서울이 수해를 당하는 것처럼, 그렇게 '넘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풍성하다' 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잠겼다' 라는 겁니다. 머리카락까지도 "야, 들어가" 라고 해서, 그 머리카락 이상으로 푹 잠겨버리게 하는데, 무엇 안에 말입니까? 하나님의 긍휼 안에 말입니다. 두 번 다시 우리의 행함을 내세우지 말라고, 주께서 마구 마구 눌러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미쁘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믿음직스럽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라고 하는데, 이 구절은 설명을 제대로 하고 지나가야 되는데 말입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먼저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모든' 사람이 구원을 ??
여기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방금 읽은 15절에도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라고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15절을 보지 않고 2장 4절을 바로 본 사람들이, 특별히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라는 구절을 굉장히 강조한다는 겁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뭔고 하면, 하나님의 마음은 한 명도 지옥에 안 보내고, 모두 다 천국에 가도록 하고 싶은데, 그런데 인간들 종내기(종자?)가 하도 성질이 더러워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렇게 건지려고 애를 써도, 그들이 싫다고 싫다고 하니, 하나님은 할 수 없어서, 즉 "나를 싫다는 너 같은 놈들은 그냥 놔두고, 나를 좋아하는 자들만 데려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는 사람은 천국이 좋아서 천국에 가는 것이고, 또한 지옥에 가는 사람도 결국에는 스스로 자처해서 가는 것이기에,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즉 모두가 자기 책임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 의하면, 천국과 지옥에 가는 사람의 리스트는 어디에서 결정이 나다는 겁니까? 이미 창세 전에 이미 결정이 난 것이, 아니고 창세 후에 한번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한번 쑤셔보는 겁니다. "갈래? 안 갈래?" 라고 해서, "갈래요" 라고 하면 데려가고. "갈래? 안 갈래?" 라고 해서, "안 갈래요" 라고 하면, "지옥에 가거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강원도에서 평생을 감자만 캐면서 한 번도 예수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단 한번도 "갈래? 안 갈래?" 라는 말조차도 못 들어봤다는 겁니다. 평생토록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주위에 단 한 사람도 없었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 천주교의 '연옥'은, 일종의 패자부활전 !!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패자부활전을 준비해놓았다는 겁니다. 그게 곧 '연옥' 이라는 것인데, 천주교에서 그렇게 말했는데, 어떻게 멋지지 않습니까? 즉 어떤 강원도 할머니가 평생토록 생전에 예수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막상 죽고 나서 도착해보니까 그 곳이 연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연옥은 중간 기착지인데, 지옥이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서, 한번 떨어지고 다시 거기서 또 떨어지는데, 그 중간 기착지가 연옥이라는 겁니다. 평생토록 한 번도 예수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 또한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들, 그리고 신생아실에서 사고로 죽은 아이들이 여기에 해당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그리고 단군 할아버지나 부처처럼, 예수님이 태어나기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 그리고 그 다음에 태어났더라도 복음을 미처 듣지 못하고 죽은 강감찬이나 낙랑공주, 또한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과 성춘향과 심청과 홍길동과 같은 자들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는, 쉽게 말해서 계절학기나 보충수업인 셈인데, 물론 회비는 조금 더 내어야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환경을 아주 더 빡세게 해서 일종의 고문실 역할을 담당하는데, 즉 "이래도 예수를 안 믿을래? 정말 이래도 안 믿을 거야?" 라고 해서, "이제는 믿을게요" 라고 한 사람은 천국으로 보내주고, 그래도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는 놈들은 마귀와 함께 지옥에 보내버린다는 겁니다.
◈ 물론 개신교에도 있어 !!
사실 이런 아이디어가 개신교에도 있는데, 그것을 '전천년주의' 라고 하는데, '세대주의'도 그런 주장을 하는데 말입니다. 즉 천년왕국의 기간동안에 먼저 믿은 사람은 휴거를 해서 천국에 올라가고, 그 나머지는 아직까지 주님의 무서움의 본때를 맛보지 못했는데, 그래서 따로 수용소를 만들어서 마귀에게, 즉 황충의 침으로 따갑게 쏘임을 받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이제는 못살겠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힘듭니까?" 라고 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정말 힘들지? 니가 요한계시록이 이런 내용인 줄을 미처 몰랐지?" 라고 하면, "예, 미처 몰랐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진즉이 요한계시록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되는데, 왜 믿지 않았어? 이제 니 잘못을 알겠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갑자기 요한계시록이 나오니까 신천지와 같은 느낌이 드는데(ㅋㅋ), 아무튼 그런 식으로 혼을 내면서, "아직 마지막 7년 대환란이 남았어. 믿을래? 안 믿을래?" 라고 해서, "예, 믿을게요" 라고 하면, 거기에서 빼주는데, 그 대신에 상급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상급이 없으니, 팬티바람으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고 기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예 소설을 쓰는데, 물론 '휴거' 라는 소설도 실제로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들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고 하니까, 창세 전에 이미 결정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새삼스럽게 탐색을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여러분,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를 탐색했습니까? 과연 그렇게 했습니까? 아마 사도바울이 그렇게 탐색을 했다고 하면, 사도바울이 그런 고난과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방종교와 똑같기 때문에 말입니다.
◈ 당신의 운명은 창세 전에 이미 '땡' !!
그런데 사도바울이 전하는 모든 복음은 비웃음을 당하는데, 왜냐하면 창세 이후의 인간들에게 나올 수 없는 이야기가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와버리니 말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들이 줄줄줄 나온다는 겁니다. 즉 "당신의 운명은 창세 전에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라는 소식이 바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어떤 인간인지, 당신이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다고, 나의 운명을 미리 결정하는가?" 라고 치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곧 디모데전서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죄인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구원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다음과 같이 말하면 되는데, 즉 "구원은 당신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께서 은혜를 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주시는 방법으로만, 천국은 그런 자들만 모이는 곳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게 천국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와 혜택을 입은 사람만이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 천국은, 아들의 나라 !!
그러면 그쪽에서 "천국은 예수 지 마음대로이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딩동댕!" 이라고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 즉 아들의 나라라는 겁니다. 천국은 우리가 가고 싶은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 본인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아들은 한 분밖에 없는데, 즉 예수님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친아들이 아닌 양자이니,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만든 놀이동산에, 예수님의 공로로만 된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양자인 우리가 오직 예수님 공로로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 복음으로서만 비로소 등장한 하늘나라인데, 바로 그것이 천국의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율법을 지키면 들어가는 줄로 알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 자손은 모두 쫓겨나고, 예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백부장과 같은 이방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 이방인들은 행한 것이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천국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그러니 사실상 이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천국을 '예수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 라고 하는 것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아니고 그 이름을 '박철수' 라고 하면, 즉 "천국은 박철수의 나라다" 라고 해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엄연히 '내' 이름이 따로 있는데, 왜 박철수의 이름을 불러야 되느냐는 말입니다. (요즘은 안철수가 대세인데, ㅋㅋ)
그런데 박철수의 영이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데, 즉 예수의 영이 씌워버리면, 예수의 영으로 귀신 씌워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주님은 나의 구주십니다" 라고 하는, 그야말로 희한하고 불가능한 고백들이 튀어나온다는 말입니다.
◈ 없는 의미까지도 집어넣어서 구원을 !!
여러분, 그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 첫사랑을 말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이 나쁘다고 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에다 의미를 부여해가면서 구원했다는 말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한다는 그 의미를, 없는 의미까지도 집어넣어서 끄집어내면서 구원을 하셨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된 것은 너거들 뜻이 아니고 아버지하고 다 의논된 바이다. 그러니 걱정할 게 없다. 앞에서 내가 극장표 값을 이미 다 치렀으니, 너거들은 그냥 따라와서 영화를 보기만 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우리를 질질 끌고 가신다는 말입니다.
물론 끌려가면서도 우리가 곱게 가는 것은 아닌데, 양 사방을 두리번두리번하면서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런 옛 행세가 그대로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엄청 얻어터지지만 그 때리는 회초리는 하나뿐인데, 즉 "이미 다 이루었는데, 왜 자꾸만 미완성을 생각하느냐?" 라고 것 말입니다.
◈ 성도의 삶 -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날마다 되풀이되는 것' !!
그래서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날마다 되풀이되는 것인데, 그것은 전혀 성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즉 날마다 "다 이루었는데, 다 이루었는데, 왜 자꾸 내가 그런 걱정을 할까?" 라는 것을 계속 되풀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아무도 감당하지 못하는데, 그것을 어느 정도로 감당하지 못하는가를 보려고 주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극한 환난 가운데 계속 집어넣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아서 쫓기면서 어려움을 당하고, 심지어 돌로 침을 당하고, 세 번이나 태형으로 맞고, 도적의 위협, 강도의 위협, 그렇게 엄청난 수모와 환난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어지간하면 포기할 만도 한데, 하지만 사도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해가면서, 그렇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고 외치면서, 그렇게 끝까지 끝까지 역사와 묵시의 만남의 사건을 전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이제는 그 일을 누가 감당하리요?
그러면 이제는 그 일을 누가 감당하리요?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감당케 하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감당케 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함부로 못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감당케 했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성령을 받고 안 받고는 전혀 저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악인의 경우에도, "악인은 이렇다, 저렇다" 라고 할 때, 그 악인은 정해놓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모든 사람 - '인간들의 차별은 인정하지 않는다' !!
아무튼 여기서 '모든 사람' 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인간들이 사람들을 차별하는 그 차별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모든' 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한 이 '모든' 이라는 구체적인 의미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12장 32절인데, 즉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라고 말입니다.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여기서 이 '모든'에 해당되는 과연 사람이 누구이냐는 것은 요한복음 11장 52절에 나오는데, 그러니 여기 요한복음 12장의 '모든' 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흩어져 있는 택하신 자녀들을 끌어 모아서 만든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모든' 이라는 말입니다.
(요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 '하나'에서 나온 '모든' !!
그렇게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그 '모든'이니, 결국 그것은 뭡니까? 그것은 '하나'에서 나온 '모든'이기 때문에, 그것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오직 구원받은 자기를 겨냥하지 않고. 구원해주신 한 분의 행함만 생각하는, 그러한 모임이 된다는 겁니다. 즉 오직 한 분의 행함인데, 그러면 그 한 분이 누구입니까? 물론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께서 들려주어서 들리게 된, 즉 예수님이 뽑아줘서 뽑히게 된, 예수님이 오라고 해서 온, 바로 그러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행함만을 이야기하다보니, 누구의 행함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까? 주님의 행함만이 가득 차있는데, 알아서 눈치를 보고 낄 데 껴야지, 거기에 자기의 행함이 왜 끼느냐는 겁니다. "미리 아시고,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라고 하신, 그 모든 행함은 누구의 행함이라는 말입니까? 주님에게서 나온 행함인데, 거기에 왜 자기가 끼느냐는 말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로마서 8장 32절을 보겠습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오직 한 분에게만 시선이 모이는 '모든' !!
여기서 이 '모든' 앞에 무엇이 붙습니까? '우리' 라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 '우리'에 해당되는 자들이 이 '모든'에 해당되는 자들인데, 즉 주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전부라는 겁니다. 그러니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 '모든'에 집어넣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낼 때는, 이 아들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아들을 믿을 수 있는 은사, 즉 성령의 은사를 주는데, 그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께서 그냥 줬잖아요. 제가 행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냥 줘서 왔잖아요" 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들인데, 그러한 자들은 '너'와 '나'를 비교하지 않고, 전부 시선이 어디에 모인다는 겁니까? 오직 한 분에게만 모이는데, 그것이 바로 이 '모든(all)'의 의미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오는 말씀의 의미인데, 그러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라는 것은,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택한 자기 백성들을, 그 모두를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6장 39절에도 역시 나오는데, 즉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사람은, 모두 내가 책임지고 예수의 이름으로 찾아가서, 그 잃어버린 양을 반드시 필히 천국에 도달되도록 만든다" 라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예수 안에서 평안과 안정을 !!
그렇게 되면 우리의 무엇이 그만 무가치하게 되어버립니까? 자기가 자기의 행함을 동원해서 천국에 가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그 모든 애씀이 한 방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만 그것을 믿을 수 있는데, 성령을 받지 않으면 여전히 자기 행함의 가치를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즉 응축된 자기 주체를 놓쳐버리면, 그 동안의 자기휴식과 안정을 어디서 찾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은사를 받아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자기 때문에 안정과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때문에 원한다는 겁니까? 예수 안에서 영원토록 평안과 안정과, 그리고 행복과 휴식을 즐긴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 안에서의 기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안이다" 라고 하는데, 즉 안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 자리에서 안정이란 말입니까? 자기 자리에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안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그런데, 주님은 그 안정성을 흔들어서 !!
그 안정된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 안정성을 흔들만한 여러 가지 시험들을, 즉 사태를 계속 일으킨다는 겁니다.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도 뺑소니 사건에 휘말렸다고 하는데, 계속 이러한 사태를 일으켜서, 이 안정성이 주님 안에서 안정성인지, 아니면 예수를 믿는다고 우기는 자기 안에서의 안정성인지를 계속 흔들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흔들면, 우리는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렇게 흔들리다가도 이상스럽게 인간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는 안정성, 즉 "이것도 주님의 뜻인데, 뭐 어때" 라고 하면서, 다시 마치 오뚜기처럼 일어서서 중심을 잡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아하, 이게 바로 되풀이되고 있는 묵시적인 안정성이고, 그것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의 효과에 대해서 만끽하게 만드는구나" 라고, 그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일사천리인데, 즉 디모데전서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1장 18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 성도에게는, 무기가 없는 그 자체가 곧 무기 !!
여기서 "아들 디모데야, … 선한 싸움을 싸우며" 라고 하는데, 얼마든지 싸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에게는 무기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무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아예 필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 게 전혀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무기가 없는 그 자체가 곧 무기이니 말입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내 세울 것이 없는, 그래서 창녀는 창녀 자체가 무기고, 세리는 세리 자체가 무기라는 겁니다. 창녀에서 포주로 발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기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자체, 즉 "나 같은 인간도 구원이 되었습니다" 라는, 그 자체로 악마를 이기는 무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평신도가 성령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곧 주님만 내세우는 것인데, 그 사람이 나중에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된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즉 장로가 무기가 되고, 목사가 무기가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것이 무기가 된다면, 그것은 이미 사단에게로 다시 돌아간 셈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19절을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다음에 보면 명단이 나오는데, 20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 결국, '분류작업' !!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 후메네오 있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그리고 알렉산더도 손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당신들을 사단에게 내준 것은 당신들이 징계를 받아서 훼방하지 않도록 함입니다" 라고 하는데, 사실 사도바울의 이런 행동은 현재의 법으로 보면 명예훼손에 해당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왜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는고 하니, 이런 사람들이 믿음에 파선하는 것도 무엇에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로 꼭꼭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포함이 되어야 합니까? 왜 그들이 믿음에서 파선이 되었는고 하니, 사람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이성이 있으면 납득이 될 만한 이야기를 사도바울은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도바울은 무엇만 확인하는고 하니까, "당신은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라는, 그것만 확인한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의 복음을 아십니까?" 라는 것만을 확인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없이 전적으로 자기 행함으로만 버티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은 자기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명단을 기록해두는 것은, 결국 선한 싸움의 결말이 '분류작업'에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부류작업을 말입니다.
이제 2장으로 넘어가겠는데, 먼저 사도행전 26장 29절을 보겠습니다.
(행 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이것은 아그립바 총독 앞에서 사도바울이 말대꾸를 하는 대목인데, 일단은 그렇게 아시고 디모데전서 2장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딤전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보다 높습니다 !!
여기 2절을 보면 "높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하라" 라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제가 방금 의도적으로 사도행전 26장 29절을 봤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오늘날의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권력이 있거든, 그 앞에 고개도 좀 숙이고 아부를 해라. 복음을 전파하는데 평안하도록 너무 대들지 말라" 라는 쪽이라고 하면, 사도바울은 자기가 한 말을 사도행전에서 본인 스스로가 위반하는 셈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만약에 그렇게 된다고 하면 사도바울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그립바님, 좀 봐주세요. 물론 복음을 본인은 안 믿겠지만, 그래도 정말 좋은 겁니다" 라고 나와야만 하는데, 그런데 아그립바 총독 앞에서 사도바울이 무슨 말을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당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전파만큼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없는데, 그런데 인간은 역사적 존재고 이미 죽어있는 상태가 아닙니까? 그러니 죽어있는 상태를 보고 "잘 지내세요" 라는 것은, 그냥 방치하는 것이고, 정말이지 그 높은 사람을 사랑한다면 "좀 도와주세요" 라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 좀 도와주세요 ??
이것이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뜻이기도 한데, 즉 "니가 높은 사람 앞에 있을 때 기죽지 말고 단호하게 복음을 전하라"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즉 "선교 정책상 잘해서 도움을 받아라" 하는 차원이 전혀 아니고, 적극적으로 "대통령 당신도 은혜만 받으면 지옥으로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라는 식인데, 바로 그런 시선으로 그들을 대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예수도 모르면서,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인생에 성공한 줄 아는데, 하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신과 같은 인간도 내 말을 들으면 구원될 수가 있습니다" 라는 식으로 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 모든 권세보다도 더 높은 권세로서 성도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손을 들고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 권세보다 더 큰 권세가 덮쳤기 때문에, 그래서 성도가 되었기에, 이런 성도의 자긍심과 고귀함은 시시한 세상권력 앞에서 조금이라도 기죽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과감하게 그렇게 했는데, 그게 사도바울의 행적을 보면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제 2장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 '속전(贖錢)'으로 주셨으니 !!
여기 6절에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전으로 주셨다" 라고 하니까, 어떤 교단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보는고 하면, 즉 "속전으로 이미 죄용서가 다 되었는데, 물론 죄용서가 되었지만, 실제 효과를 내는 것은, 우리가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그것을 믿지 아니하면 비록 다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게 접촉되지 않아서 지옥에 간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꿍꿍이속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떤 교단에서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디에 어긋나는고 하니, "새 언약의 효과가 십자가에서 멈추는가? 그게 아니면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을 구원받는 사람의 심령에 집어넣는 것까지도 이 새 언약에 포함이 되는가?" 라는, 그 문제로 결정이 난다는 겁니다.
◈ 내 법을 저희 마음에 !!
과연 어느 쪽이겠습니까?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새 언약의 효과가 무엇입니까? 옛 언약은 마음 바깥에 있는 말씀이지만, 이제 새 언약이 오게 되면, 마음속까지 주께서 다 이룬 것을, 본인도 전혀 손을 대지 못하는, 즉 본인도 철거하지 못하는 깊숙한 곳까지 그것을 집어넣는 것까지도 다 해버린다는 겁니다. 주께서 말입니다.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그러니 포장이사도 이런 포장이사가 없는데, "그냥 놀다가 오세요. 퇴근하고 오시면 깨끗하게 다 이사해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라는 겁니다. 물론 요새는 말만 그렇고 제대로 하는 포장이사도 잘 없는데, 옆에서 지켜봐도 개판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진짜 포장이사는 "그냥 몸만 오세요. 우리가 다 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다' 라고 하는 것은, 그냥 하늘을 쳐다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들어온 것을 보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즉 "아니, 웬 낯선 것이 나에게 들어왔지? 이건 내가 만든 것이 아닌데, 이건 전혀 내가 구상한 것이 아닌데, 그런데 이것이 왜 들어왔지? 아하, 주님께서 집어넣었구나. 정말 감사합니다. 믿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다는 겁니까? "주께서 주신 선물임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선물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피와 부활이 하나의 선물로서 저에게 장착되어 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즉 자기가 손댄 일도 없는데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은, 진짜 자기 안에 뭔가가 들어있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물론 없으면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데, 그런데 진짜 있다는 겁니다. 있기 때문에 "절대로 내가 행해서 유지하거나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착하게 살면 유지되고 나쁘게 살면 왔다가 그냥 가버리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 마치 도둑처럼 들어와서 !!
그러면 들어올 때 타협을 했습니까? 오징어에 구멍을 내서 얼굴에 쓰고, 봉투에서 만원 짜리를 하나씩 끄집어내면, 그때야 한발자국을 떼면서 "함 사세요" 라고, 그렇게 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는데, 그냥 쑥 들어왔다는 겁니다. 마치 도둑놈처럼 해서 들어와서는, 그리고는 나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주인이 되고, 또한 우리는 주의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됩니까? 그분이 의인이니, 우리는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혀 주의 의(義)를 소개할 수밖에 없는데, 즉 "비록 나는 죄인이지만 주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는, 그러한 소리밖에 다른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 완전히 제대로 틀어박혀서 나가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 예, 주님의 선물입니다 !!
그래서 "어떻게 예수를 믿었습니까?" 라고 하면, "주의 선물입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나에게는 왜 그런 선물을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뭐라고 해야되겠습니까?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이야기를 해야지, 왜 나에게 합니까? 나는 받았을 뿐이고, 당신은 받지 않았을 뿐이고"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은 사단에게로 다시 되돌아가고 마는데, 즉 뭔가가 있는가 싶어서 왔다가는, 자기가 기대한 것이 전혀 없으니 그냥 가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가 받은 게 있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주께서 그냥 주셨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주님만 이야기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나는 받은 선물이 없어요 ??
그런데 왜 예수도 끄집어내고, 또한 자기 행함도 끄집어내느냐는 것인데, 도대체 자기 행함이 왜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거기서 왜 행함이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참 이상한데, 그것은 바로 자기 힘, 즉 자기 행함으로 예수를 믿어서 집어넣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행함으로 행함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내놔봐' 라고 하면, 당연히 자기 행함만 내놓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받은 선물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구색을 갖추면 신자가 되는 줄 알고 생각하는데, 물론 이해는 되지만, 오죽 없으면 그런 식으로라도 집어넣고 싶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한 구석에는 피도 집어넣고, 또한 행함도 집어넣어서, 그렇게 균형을 맞춘 신학을 한다고 다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것을 치면 저리 피하고. 저것을 치면 이리 피하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막사나?" 라고 하면 행함을 내놓고, 또한 "행함으로 구원받나?" 라고 하면 피를 내놓고, 얼마나 편리한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편리해서 좋을 지는 몰라도, 그런 것들이 바로 인간들 쪽에서 가능한 것이란 말입니다.
◈ 십자가를 믿었으면, 십자가 삶이 나와야지 ??
그렇게 인간들이 가능한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육의 열매인데, 지식으로 그렇게 포장을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를 믿었으면, 십자가 정신이 나오고, 십자가 삶이 나와야 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바로 피로 왔다가 행함을 내놓으라고 하는, 그런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삶, 즉 성령의 삶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하회탈처럼 입이 옆으로 째져서 그렇게 고백을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무 너무 좋아서 말입니다.
자기가 죄인이기에 사는 일이 부담이 없는데, 자기는 피보험자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상조회사에서 다 와서 알아서 해주고, 전혀 장례식에 부담이 없다는 겁니다. 도우미도 세 명씩이나 와주고 말입니다. 일오사사 공사사육, 2년 만기인데, 보험료 인상도 없고 말입니다. 그냥 그것으로 끝인데, 아무런 부담이 없다는 겁니다. (사기를 당할 수도, ㅋㅋ).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디모데전서는 계속해서 꾸준하게 하는데, 그것을 정리해보면, "한 분 때문에 다 되었다. 제발 그 한 분의 자리에 니가 제발이지 좀 끼어들지 말라. 우리가 바라보는 이는 그 중보자 한 분이면 된다" 라고 말입니다.
이제 2장 7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2: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 전혀 소통이 안 돼 !!
여기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것이 참말이고 전혀 거짓말이 아니다. 이것을 위해서 내가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후메네오 등등, 그런 인간들은 사도바울이 아무리 이런 말을 해줘도, 그들이 분명히 사도바울의 복음을 들었어도 떠나버렸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소통이, 즉 대화가 안 된다는 겁니다. 즉 "니 속에 들어있는 것과 내 속에 들어있는 것이 차이가 나니까, 니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 라는 것인데, 이럴 때 그들은 "믿음이 없다" 라고 하지를 않고 뭐라고 합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 '아담한 옷'이 과연 어느 수준인가?
여기에서 아담한 옷이 얼마 짜리입니까? 얼마 짜리 옷을 아담하다고 합니까? 무슨 메이커가 아담한 옷입니까? 옷가게를 하는 집사님이 어디 가셨는지 안 보이는데, 아담한 옷이 도대체 몇 만원 이하를 말하는 겁니까?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죄인 중에 괴수인 '나'에게 주신 은혜가 유지되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즉 "이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넘칩니다. 감사함으로 입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은 "이것은 내 주제에 해당이 안 돼. 이것은 나에게는 어처구니가 없어. 감히 나를 어찌 보고" 라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남자들의 혈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은혜에서 벗어났다기보다 아예 은혜를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은혜를 잊어버리면 다시 혈기가 나오고 하는데,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말씀이 율법적 기능을 하면서 계속해서 야단을 치는 겁니다.
◈ 똥, 똥, 똥 !!
서로 같은 동창생인데, 누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으로 감아놓았다는 말입니다. 모자, 스카프, 신발까지 몽땅 다 똥으로 쳐발라 놓았다는 겁니다. 무슨 똥, 무슨 똥, 그렇게 말입니다(ㅋㅋ). 그럴 때 갑자기 "나도 그동안 똥칠을(?) 많이 하면서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데, 그러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감 잡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전도서의 말씀이 맞는데, 즉 "너무 선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라"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선하려고 하면 그것도 또 하나의 경쟁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는 명품으로 도배를 한 불신자 동창생을 만났는데, 이번에는 또 누구를 만나는고 하니, 수녀 동창생을 만났다는 겁니다. 소위 유기농법으로 간장과 된장 등을 만들어서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그런 수녀를 말입니다.
그런 동창생을 만나게 되면 "아,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도대체 나는 뭐지?" 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면 또 다시 우울해져서 "아, 나는 죄만 짓는구나" 라고 하면서 하회탈이 그만 우울탈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 스마트하게 살면, 'OK' !!
그저 그야말로 아담하게, 요즘말로 하면 스마트하게, 그냥 그렇게 살려주는 데로 살면 되는데, 주어진 형편대로, 너무 오버하지도 말고 말입니다. 너무 악하지도 너무 선하지도 말고 말입니다. 즉 "그쪽은 그쪽 스케줄이 있고, 또 나는 내 쪽 스케줄이 있다"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아이가 서너 명씩이 딸려있는데, 그런데 뭘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언제 그런 것을 하느냐는 겁니다. 아이를 세 명씩이나 집에 놔두고 무슨 사회봉사를 합니까? 자기 아이를 잘 키우는 게 곧 봉사인데, 부녀회에 가서 봉사를 한다고 나대지 말고, 또 4대강 사업에 반대한다고 피켓을 들지 말고, 자기 아이나 잘 키우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에게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주어지면, 그때 가서 하면 되고 말입니다.
◈ 첫사랑의 은혜를 잊지 않고 !!
그러므로 항상 복음의 기준이란 무엇인고 하니, 첫사랑의 은혜를 잊지 않고서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입니다. 더욱이 요즘과 같이 힘든 세상에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사람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러운데, 노는 것을 다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둘 명씩이나 키우겠습니까?
물론 세 명을 키우는 것은 초월적인 묵시의 차원인데(ㅋㅋ), 그것은 너무 심한 것이고, 아무튼 둘만 키워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키우면서, 또 거기에서 자기 죄가 펄펄 흘러나오는데, 그렇게 응축된 주체가 솜씨를 발휘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또 나름대로 낮추고 낮추시는 환경을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제 저녁을 먹고 합시다.
2011,10,03 오후 3시에 재정리를 함 - 녹취 '구'
예찬아, 예준아, 예랑아, 밥 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