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디도.빌레몬

딤전후제3강110801

아빠와 함께 2013. 5. 8. 08:09

 

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딤전후(교회를 잊어라!) 제3강(둘날오전1)
 
                                                           2011,08,01  강의 이근호, 녹취 한윤범

◈ 하나님의 오른편 자리 !!

이제 세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성령이 함께 계셨고, 사실은 성령께서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지시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의 배후에는 성령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 즉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주님의 자리가 곧 성령을 보내주는 자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오른편' 이라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하늘나라의 새로운 구조였는데, 즉 오른편의 하나님이 일을 한다는 아이디어는 그 어떤 우상에게서도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도 이 오른편을 무시해버리는데, 왜냐하면 사실 자기들조차도 이해가 안 되니까 말입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 하나님, 또 인간, 인간" 이라고, 그렇게 하는데, 즉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라는 것에만 집중했지, 하지만 하나님의 오른편이 하는 역할, 즉 구약의 시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왜 오른편이 필요한지를, 그 오른편을 잘라내면 하나님의 일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사실 신학자들 자신도 그것을 모르니까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니까 주가 되고, 주가 되니까 하나님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 주의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고, 그건 하나님의 오른편 자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오른편의 자리가 왜 필요한지, 그것을 따지고 물을 수 있는 아이디어조차도 인간들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성경의 중요한 개념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주의 오른편,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 등등, 이런 개념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데, 사실상 그러한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성화론으로 구원시킬 수 있고, 이런 것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을 천국에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런 중요한 개념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말입니다.

◈ 오잉, 하나님의 형상 ??

그래서 골라잡은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래서 그 형상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하지만 이 '형상' 이라는 것은 기독교가 오기 이전에 플라톤의 형상론에 이미 나와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그렇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그 다음에 성경을 들춰가면서 하나님의 형상론과 결합해서, 어떻게 인간들을 천국에 보낼까 싶어서 교인들을 이용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의 오른편과 같은 개념은 기존 인간들이 생각했던 모든 신학과 아이디어를 전부 다 묵살해버린다는 겁니다. 이 주님의 오른편의 자리는 그야말로 감추어진 자리인데, 즉 인간들이 신을 향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오른편 자리에서 그 중간에 차고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신을 이야기할 때, 신과 서로 주고받으면서 분명히 자신들의 이득을 생각하는데, 현세에서 이득뿐만 아니고 내세에서의 이득까지 생각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주의 오른편이 차고 들어와 버리면, 인간이 신과 거래하는 모든 흥정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오른편이 차고 들어와서, 그 오른편이 신과 합의해서 이 세상을 이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 오른편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원수가 보여 !!

그렇다면 이 오른편의 자리가 무슨 자리인고 하면, 오른편의 자리에 있을 때만 유일하게 보이는 게 있다는 겁니다. 오른편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면 보이지 않는 게 있는데, 즉 인간의 자리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게 있다는 겁니다. 이 오른편 자리에서 무엇이 보이는고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보인다는 겁니다. 즉 숨어있는 악마가 보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악마가 보이는데,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해코지하고 사기를 치고 돈을 떼먹고 도망가면 악마인 줄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자리는 주의 오른편의 자리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방적인 오해인데, 즉 하나님에 대해서 큰 오산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 '주께서 내 주에게' 라는 언약구조를 !!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오산을 하지 않으려면,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하는, 즉 주님께서 주님의 오른편의 자리에 위치해서 언약을 완성한다는 구조를 파악해줘야 하는데, 이 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나'의 자리에서의 구원의지, 즉 인간의 자리에서 구원을 시도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서는 전부가 탈락이 된다는 말입니다.

(마 22: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그렇게 되면, 구원이 바로 오른편 자리에 계신 주님의 소관으로 이관되는데, 즉 담당자가 이동된다는 겁니다. 즉 구원을 받아야 될 '내'가 그 구원에 대해서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구원을 받고자 하는 '내'가 '나'의 구원에 대해서 개입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는 말입니다.

◈ 어린양의 생명책에만 기록된 자만 구원을 !!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은, 여기서 주의 자리에 계신, 즉 오른편에 계신 분과 하나님이 의논해서,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듯이 창세 전에 결정한 대로만 하니까, 즉 분배가 나가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어린양의 생명책에만 기록된 자만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 그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그러니 자기가 '데쓰노트'를 쓴다고 될 문제가 아닌데, "이건 죽여야 돼. 이건 살려야 돼" 라고, 자기가 일기를 써도, 그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주의 오른편 자리에도 있지 않는 것이, 언약의 완성도 아닌 것이, 그렇게 자기 소망을 담아서 쓴다고 해서 그게 남에게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왜 흑막술이라고, 장희빈이 왕비를 죽이려고 짚으로 인형을 하나 만들어서 바늘로 콕콕콕 찌르니까, 몇 키로 떨어진 곳에서 왕비가 '윽윽윽'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 마을에 힘들게 말도 안 되는 글을 쓰지 말고, 인형을 하나 만들라는 겁니다. 그리고 바늘을 가지고 콕콕콕 찌르면 되는데, 아니면 여기에다가 아예 대못을 박든지 말입니다(ㅋㅋ).

◈ 이 세상은 그분들의 회사 !!

그건 그렇고, "죄 사함의 권세는 내게 있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즉 "모든 만물을 내게 주셨으니" 라고 하시는데, 즉 아버지가 원하는 자, 그리고 그 아들이 원하는 자,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두 분이 모두 다 해먹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에 전혀 관여할 수가 없는데, 바로 거기에 동조해서 영으로 일하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세 분이 다 해먹는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원래 이 세상에는 주주가 그 세 분밖에 없는데, 즉 이 세상은 그분들의 회사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그분들의 세상이기 때문에, 즉 우리는 그냥 여분의 것으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더불어서 태어난 혹과 같은 존재가 중앙지에 개입한다는 자체가, 그것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고 하면, 악마의 사주를 받고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주일 오전시간에 "인간은 뱀의 앞잡이다" 라고 했는데, 제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과격한 용어인데 말입니다(ㅋㅋ).

◈ 하나님의 원수를 척결하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

아무튼 주의 오른편의 자리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주의 오른편에 있을 분은, 즉 하나님의 원수를 척결하시기에 합당한 분은 오직 서른 세 살을 먹은 청년인 나사렛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나의 구원은요?" 라는 질문자체가 날아가 버리는데, 개인적인 구원문제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그런 말씀이 있는데,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해놓고도, 오히려 복음을 전한 내가 복음에 잘릴까 염려된다" 라고 말입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그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사도바울은 복음에 잘릴까 염려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여지는 어떤 것인고 하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을 자기의 구원으로 챙길 수 있는 여지인데, 그것이 바로 구원에 잘릴 여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 사도바울이 곧 선교본부 !!

구원이란, 그 구원이 나간 본부가 있는데, 그러니 본부로 되돌아와야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행전의 선교본부가 '안디옥'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안디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선교의 본부가 어디입니까? 움직이는 사도바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면 로마가 선교본부가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계시를 만든 사람인데, 즉 사도바울이 있는 곳은 말씀이 있는 곳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죽고 난 뒤에 남아있는 결과물은 말씀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이 전파되는 모든 현장이 선교지의 본부가 되고, 그것이 곧 예루살렘이 되고 동시에 땅 끝이 된다는 말입니다.

◈ 왜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

그렇게 해서 성령께서는 사도바울로 하여금 땅을 다니면서 무엇을 말하게 하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하여튼 어디든지 따라간다는 겁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죽이려는 이유가 다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같은 유대인이라고, 즉 예수님을 자기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본 겁니다. 그게 오해였는데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그것이 유다의 힘, 즉 유대나라의 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생애를 되풀이해야 되니까, 사도바울의 모든 여행지에서 그를 죽이려고 했던 자들이 전부가 유대인들이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밤빌리아를 거쳐서 바나바와 첫 선교여행을 나섰는데,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죽이려고 하니, 그만 도망을 쳤다는 겁니다. 

그들이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왜 율법을 무시하느냐?" 라는 것인데, 자기들의 율법을 무시하게 되면 어떤 논리에 빠지는고 하면, 즉 사도바울이 율법을 무시해서 "율법이 없이도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해버리면, 이것이 그만 제로게임이 되어서,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게 자동적으로 이단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이단이 안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식대로 하지 않는 쪽을 어떡하던 악마로 몰아세워야만 하는데, 그래야 자기들 산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데, 그런 사적인 원한관계가 아니고, 유대인들의 정체성 자체가 이단으로 드러날 판이란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율법 때문에 죽이려고 했는데, 그런데 이런 시도가 처음이 아니고 예수님도 역시 율법 때문에 살해한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놓고는, 신명기에 나오는, 즉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는다" 라는 하나님의 뜻 그대로 맞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죽이려고 할 때도, 성경말씀에 있는 "한 사람을 죽임으로서 다른 사람은 산다" 라는 원칙대로, 예수님을 하나의 제물로 제거해야만 자기 민족이 산다는 말입니다.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 유대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성전이 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주신 율법이 무시를 당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없는 존재가 되니까, 이것은 하나님 뜻에 근본적으로 모순된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선택된 민족이 있을 것이고, 그 선택된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다할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구조인데, 그런데 만약에 이것을 전부다 무시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자기들이 그동안 수천 년 동안 믿어왔던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아닌 것이 되니까, 그러면 그들이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즉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는 자체가, 자기들 뿌리를 스스로 부정해야된다는, 그런 딜레마에 그만 빠져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데, 자신들의 모순적인 한계로 인해서, 즉 자신들의 세상을 보는 한계로 말미암아서 그만 딜레마에 빠지고 마니, 그런 딜레마를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런 자신들의 한계에 대해서 까밝히며서 도전하고 공격하는 그쪽의 세력을 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해서 예민할 수밖에 없어 !!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해선 그렇게 예민한데,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감수성이라고나 할까?(ㅋㅋ) 감수성이 그렇게 높다는 겁니다. 즉 "다른 것은 다 치되 율법은 건들지 말라"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모세가 하나님과 독대해서 만든 거니까 말입니다. 사람에게 나온 것도 아니고, 직접 하나님께서 친히 수고스럽게 만들어서 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민족의 역사를 파탄시켜버리면, 그러면 그들이 시내산에서 받은 것은 허깨비 귀신이 준 것이 되고, 그게 산 할아버지가 준 것이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계시의 전체적 흐름을 통일시켜 나가려고 하면, 그 통일성을 깨트리게 만드는 것은 과감하게 척결시키는 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훌륭한 사명인데, 그 사명의 선봉에 선 자가 사울, 즉 바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그들의 수를 다 아는데, 예를 들어서, 9급끼리 바둑을 두고 있으면 이세돌이나 이창호가 보고 있다가, "그것은 좀 틀린데요" 라고 하는데, 왜 훈수를 합니까? 그들이 바둑을 최고로 잘 두니, 그 수를 안다는 겁니다. 그렇듯 사울이란 사람은 그들의 수를 다 아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이미 그런 것을 다 겪었단 말입니다.

말을 하고 보니, 꼭 십자가 마을 사람들을 보는 것 같은데(ㅋㅋ), 한국교회의 수를 다 안다는 겁니다. 목사들이 써먹는 수법들을 말입니다. 목사가 하는 말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입니다. 앞에서 목사가 "하나님께서" 라고 하면, 뒤에서 "돈 내라" 라고, 그렇게 아예 추임새를 갖다 붙인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사도바울의 전도여행은 동영상으로 !!

아무튼 사도바울이 이고니온에선 죽을 뻔했는데, 또 루스드라에선 그냥 죽었고 말입니다. 이고니온이 LA나 뉴욕 근처가 아니고, 요즘은 여기가 터키인데, 이 동네는 그 이름이 뒤에 '아'가 많아요. 여기는 바다가 있고, 이 바다를 건너가면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세상의 테마여행'과 같이 여행지를 소개하는 프로를 보면 이쪽이 나오는데, 경치가 좋다는 겁니다. 북쪽의 넓은 지역을 마케도니아, 그리고 여기 남쪽지역을 아가야,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강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루살렘이 자기가 노는 동네가 아니고, 터키 남쪽의 '다소' 라는 동네 사람인데, 그리고 여기에 큰 도시가 안디옥이 있고 말입니다. 이 사람이 다소에 있으면서 로마의 시민권을 얻고 당당했는데,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권한을 받아서 안디옥으로 가는 순간 그만 말에서 떨어진 겁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이것이 약 AD 32년으로, 대충 그렇게 계산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안디옥으로 가서, 그 다음에 3년 정도를 아라비아에 가게 되는데, 거기는 이쪽 지금의 이라크가 아닌 대략 남쪽지역으로 보면 되는데, 즉 시내산이 있는 소위 명승지라는 겁니다. 계시를 받는 곳이니 말입니다. 거기에 갔다가 다시 다소에서 8년 정도를 있었다는 말입니다.

◈ 바나바 - '소문을 듣고 왔어요' !!

그런데 그때 남쪽에서 "소문을 듣고 왔어요" 라고 하면서 찾아온 착한 '바나바' 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 바나바는 굉장히 설치는 쪽으로 열심이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어디서 누군가가 믿음이 좋다는 소리를 들으면 항상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는 겁니다. 꼭 저와 같은데, 그런데 칭찬하고 나서 나중에 보면 다른 데 가서 이상하게 되어버리고 말입니다(ㅋㅋ).

이 바나바가 사울을 예루살렘에다 추천해서, 그렇게 해서 안디옥에서 3년 동안을 같이 일을 하면서, 결국 이 둘이 여기 온 동네 전체를 한 바퀴 돈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 처음에는 안디옥의 교인들이 이 두 사람을 정해서 그렇게 하는데, 그때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바나바가 또 속셈이 있는데, 이 사람이 원래 키프로스 섬의 사람인데, 그래서 자기 고향으로 먼저 가지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돌자고 해서 같이 간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마가' 라는 사람을 데리고 가는데, 이 양반은 집에 가스 불을 켜놓고 왔는지 몰라도 그만 돌아가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되어서 아시아로 해서, 이고니온에서는 돌에 맞았고, 루스드라에서는 죽었다는 겁니다. 본인도 죽은 줄로 알았는데, 물론 다른 사람이 그렇게 보았는데, 그런데 나중에 깨어났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보고 "이 놈은 율법을 어긴 인간이니 치워라" 라고 해서 다 치웠는데, 그런데 나중에 슬슬 깨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죽을 뻔했다" 라고 고린도후서에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더베' 라는 곳인데, 이곳에 가서 한 바퀴를 돌고, 그리고 예정된 코스대로 배를 타고 시리아와 두로 지방에 가서 도착하는데, 이때가 언제인고 하니, 사도바울이 AD 32년경에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14년 후에 이렇게 한 바퀴를 다 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AD 46년?)

그렇게 돌면서 여기에 '갈라디아' 라는 동네가 있어서, 여기서 선교를 하게 되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이 선교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유대인들의 회당에 가서, 즉 남의 영업소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들어가서 무엇을 합니까? 남의 장사를 방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선교라는 게 다른 것이 아니고, 꼭 여호와 증인들 같은데 말입니다. 꼭 교패를 보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우아한 선교는 없다는 겁니다. 남들이 장사하는 곳에 가서, 즉 "여러분, 여러분의 조상들이 잘못 섬겼습니다. 저도 이런 것을 다 해봤는데 엉터리였습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곧 선교라는 말입니다. 

◈ 선교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 !!

결국 선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인데, 이것이 중요한데 말입니다. 즉 성령을 받은 쪽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공격하고, 세상에서 기존의 세력을 주장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죽여서, 즉 서로가 서로를 죽여서 죽음의 도탄에 빠지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작전인데, 왜냐하면 주의 오른편의 자리에서는 무엇이 등장한다고 했습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원수와 병행해서, 그렇게 원수가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공격하는 원수와, 그리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원수와는 개념이 다른데, 인간들은 그냥 자기 원수를 갚아달라고, 즉 복수를 해달라고 신에게 빌지만,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하나님만이 아는 원수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원수는 신약에 나오는데,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해서 반발하는, 그런 영적 존재가 곧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뭐고, 기독교가 뭐냐 하면,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은 주시다" 라는 겁니다. 인간은 별 볼일이 없는데, 그냥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된 피조물에 불과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했는데, 그것을 사도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 십자가에 대한 두 가지 해석 - ①, ② !!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이 땅에서의 접촉 부분에 있어서, 십자가 이외에 다른 계시를 준 적이 없다는 겁니다. 반드시 십자가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인간의 눈에는 개인의 죽음으로, 즉 어떤 한 젊은이가 피를 흘리고 죽은 죽음으로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숨어있는 편에서 바라보면, 그것이 곧 숨어있는 구원의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법의 완성, 즉 계시의 완성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 쪽에서 보면 사랑이고, 이쪽 인간들에게는 잘 죽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 쪽에서 보는 것과 인간 쪽에서 보는, 그런 양쪽 편을 다 이야기하다보니까, 성경해석이 굉장히 어려운데, 그렇게 어려우면서도 나중에 두 패로 갈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면, 십자가가 있는데, 그러면 이쪽 하늘 패가 있고, 그건 주의 자리고, 그리고 이쪽은 땅이라고 하면, 땅에 있는 사람이 구원을 받고자 나오다가 십자가라는 벽에, 그러니 십자가가 하나의 벽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가락교회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문이 있으면 그 문을 열면 바깥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데 바깥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폼만 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떠합니까?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여기 이 안에 있는 이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겁니다.

◈ 울렁증에 시달리는 인간들 !!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살아가는데, 희망이 없으면 못 산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인간 자체가 정지가 아니고 흐름이니 말입니다. 인간은 울렁증이 있는데, 즉 "내일은 뭐하지? 오늘 오후에는 뭐하지? 내일 아침에는 누굴 만나지?" 라고 하는, 그런 울렁증이 매일매일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애를 낳고서 "집구석에 처박혀서 애나 키우지" 라고 해도, 그건 몇 달이 못 간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애를 안고 친구들을 만나서 누구 애가 더 예쁜지 시합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시간에 보면, 유아실에 앉아서 어릴 때는 아이를 앉고서 서로 밀어 부치고 하는데(ㅋㅋ), 그리고 약간 크면 피아노 레슨을 이야기하면서 예배시간 다 보내버린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은 울렁증이 있어서 뭔가 자꾸만 움직여야 된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죽은 것처럼, 즉 시체처럼 느껴지니 말입니다. 그래서 문에다가 '천국문' 이라고 적어놓으면, 이 자체가 성공하는 힘, 즉 활력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부흥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이 문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냥 폼인데, '폼생폼사'가 여기서 나온 말인데(ㅋㅋ), 그냥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가본 놈도 없고, 물론 가봤다고 주장하는 놈은 있는데, 아무튼 "뭐가 있겠지" 라고 하는데, 그 '있겠지' 라는 것이 사람을 살린다는 겁니다. 사실은 죽이는 것인데 말입니다.

◈ 예, 그러면 지옥에 갑니다 ??

예를 들어서, 지금 병원에 말기 암으로 누워있는데, 목사가 심방을 가서 "평소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라고 하면, 환자는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런, 이제 몇 시간이 지나면 지옥에 갑니다" 라고 하는, 그런 목사는 없다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시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회개하십니까?" 라고 하지 말입니다. 그러면 환자는 겁에 질려서 "예, 회개합니다" 라고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뭘 안다고 회개를 합니까? 십자가를 알아야 회개를 하든지 말든지 하는데 말입니다. 주의 원수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회개한단 말입니까? 기껏 회개해봐야, 자기에게 돈을 떼어먹은 놈을 저주했는데, 그것을 회개하는 수준인데, 하지만 그것은 주의 원수가 아닌 자기 원수라는 말입니다.

회개는, 주의 원수를 알아야 !!

분명한 것은 주의 원수를 알아야 되는데, 그러니 원천부터 소급해서 회개해야 되는 겁니다. 즉 "나는 악마의 앞잡이였고, 예수라면 죽기보다 싫었고, 예수 없는 곳에 도망쳤고, 예수쟁이라고 하면 의도적으로 이상하게 싫었는데, 그러나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고 착하겠습니다" 라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나는 원래 그렇고 그런 인간입니다" 라고,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는 다시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 상대방은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면, 목사는 십자가의 복음을 설명해주고, 과연 그것이 믿어지는지 물어보고, 서로 그런 대화가 오고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면, "이제 사도신경을 외워보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더듬더듬하는데, 그러면 목사가 다시 "잘 모르겠습니까? 보고 읽으세요. 다음에는 주기도문을 읽으세요.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그런 구원이라고 하면, 미리 당겨서 열두 살 때 다 해놓으면 되지, 그렇게 해서 나중에 죽을 때가 되어서 천당에 가면 되지, 굳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죽을 때가 되어서 힘들게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걸 미리 당겨서 하면 안 됩니까? 즉 장래에 해야 될 일을 미리 당겨서 해놓으면 편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지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겠습니까? 자기가 죽을 때 침대에 누워있을 때 목사가 하는 이야기를, 스무 살 때에 미리 당겨서 해놓으면, "그건 옛날에 다했습니다" 라고 하면, "그래요? 그렇다면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서로 간단하게 끝내면 되니 얼마나 좋으냐는 말입니다. 굳이 이순재 보험에 들지 말고 말입니다(1544-0744, ㅋㅋ).

◈ 십자가가 과연 소망의 문인가?

아무튼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데 있어서 두 가지 해석이 나오는데, 지금 여기가 제일로 중요한 대목인데 말입니다. 인간들은 성경말씀을 보니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되어있으니까, 그러한 십자가를 자기들의 하나의 소망의 문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소망의 문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로 접근하면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금 무엇을 노리느냐 하면, 이 땅에 사는 버릇이 나오는데, 즉 '권력' 이라는 말입니다. 그 권력이 바로 교회가 아닙니까? 즉 십자가를 이용해서 교회를 하겠다는 것으로 되돌아간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십자가에 접근하는 사고방식에 대해선, 내가 스스로 부정하진 못하겠다" 라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 하지만, 그것이 곧 죄 !!

그런데 그것이 이쪽 하늘에 계신 주님이 보시기에는 어떠합니까? 그것이 바로 죽어 마땅한 짓이라고 보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십자가 자체가 곧 죽음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규합하고 모아지면 결국에는 죽어서 마땅한 일로 규정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종적인 마지막 언약으로서, 더 이상은 언약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최종적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니가 한 모든 짓은, 그것은 바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고 살이 찢겨지도록 해야할 일이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렇게 최종적으로 규정이 나버렸다는 말입니다. 최종 언약으로서 말입니다.

◈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예수님 부활하셨을 때 도마가 참석을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부활해서 처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제자들은 있었는데, 그런데 도마는 없었다는 겁니다. 도마는 팔 일이 지난 뒤인 다음 번 모임 때에 들어왔는데 말입니다.

그때 들어와서 도마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라고 했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여줬는데, 그때 도마가 "이제 보이니까 믿어지네" 라고 했습니까? 그게 아닌데, 그러면 뭐라고 했습니까?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부정하는 것입니까? 보아야 믿겠다는 것 자체가 결국에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창자국에 피를 흘리게 했고, 또한 못자국이 손에 박히도록 한, 즉 기존의 자기가 구원에 접근하고자 하는 그 고집스러운 접근방식조차도 주님을 죽게 만드는 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방향이 자기 쪽에서 이제는 천국 쪽으로, 즉 그때부터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발생되었는데, 즉 "이제 내가 본다. 안 본다" 라는 자체가, 믿음이 생기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뒤에 해석을 붙이는데,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라고 말입니다.

아마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도마를 처음에 그 자리에 끼지 않게 하신 것 같은데, 나중에 도마를 등장시켜서 "보고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모든 인간들의 생각들조차도, 예수님을 십자가 피로 죽게 만드는 허접스러운, 그야말로 신앙도 아니면서 신앙이라고 우기는, 하나님의 원수가 제공한 신앙의 종류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주님 !!

그러니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그러면 전 세계가 무엇이 됩니까? 이쪽에서 이야기한 사람들도 죽이고, 즉 유대인들도 사도바울 죽이고, 또한 사도바울도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다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것을 로마서 11장에서는 "불순종 안에 가두어두었다" 라고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어제 오후설교를 하면서, 제가 짧은 노래를 하나 불렀는데, 죽음을 설명하면서 말입니다. "저 빠따에 누워~" 라고 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는 죽음의 바다에 누워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양쪽 다를 죽이는데, 즉 이 세상은 '내'가 살기 위해서 저쪽을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 혼자서 사는 게 아닌데, 저쪽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으면 '내'가 살 수가 없고, 그렇게 살려고 애썼던 '나'를 또 다시 등쳐먹지 않으면 저쪽이 못 살고 말입니다. 그것은 가족끼리도 마찬가지고, 이웃끼리도 마찬가지고, 그야말로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 사도바울의 움직임을 따라서 !!

사도바울에 있어서, 그는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그렇게 죽음으로 몰아넣으면 선교중심지가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 땅 자체가, 즉 대지 자체가 죽음의 바다인데, 그러니 어디에서 생명을 얻겠습니까? 생명은 움직인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움직이는 것, 그것은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즉 하늘의 벧엘과도 같은 것인데, 성령이 임하니까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성령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쉽지 싶은데, 소위 '조명발' 이라고 말입니다.

여기 앞에 무대가 있다고 하면, 먼저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다닌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는 사도바울과 실라가 다니는데, 이 실라가 어디서 추천이 되었느냐 하면, 그것을 바나바가 했는데, 하여튼 바나바가 큰일을 했다는 겁니다. 이 바나바가 유다와 실라를 데려고 오는데, 유다는 집에 무엇을 숨겨놓았는지 몰라도 그만 가버리고, 실라만 두 번째 선교여행에 동참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를 하고, 아무튼 사도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누구를 만나는고 하니까, 이번 수련회의 주인공(?)인데, '디모데'를 만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디모데는 외가 쪽에서 신앙이 좋지, 친가 쪽은 없다는 겁니다. 즉 아버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

디모데를 만난 바로 여기 루스드라에서 사도바울이 죽을 뻔한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죽었다는 겁니다. 깨어난 것은 주의 뜻으로 깨어난 것이니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는지 몰라도, 한 사람은 죽었는데 디모데는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디모데를 데리고 두 번째 선교여행을 하면서, '무시아' 라는 동네, 또한 '드로아' 라는 곳에 가는데, 이 드로아는 해변가에 있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아'자로 끝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또 있는데, 즉 어떤 초췌한(?) 아저씨가 와서, "우리 동네는 무시합니까? 여기로 건너오소서" 라고 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응, 알았어" 라고 해서, 마게도냐로 간다는 겁니다. 즉 무시아가 있는 아시아로 가려는 것을 성령께서 금지를 시키니까, 사도바울은 바다 건너편에 있는 빌립보에 간다는 겁니다. 거기 밑에 데살로니가가 있고, 베뢰아, 아테네, 그 다음에는 고린도가 있고, 또한 터키 쪽엔 에베소, 골로새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게도냐에서 어떤 아저씨가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해서는 "우리 동네에 와서 복음을 전해주세요" 라고 하는, 그런 성경대목을 보게 되면, 우리는 다음과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특히 목회자들이 더 그러한데 말입니다. 

(행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행 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행 16: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행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행 16: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그게 무엇인고 하니, 사도바울에게 주께서 그런 놀라운 일을, 즉 환상으로 나타나서 "아시아 쪽으로는 가지 말고 마게도냐로 가라" 라고 했다면,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핍박받는 일은 좀 면제시켜주는 것이, 그것이 주님하고 서로 거래하는데 있어서 원만한 계약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일해주세요. 그 대신 돈은 한 푼도 없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계약이 성사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사도바울은 왜 가는 곳마다 처참한 몰골로 !!
 
에베소에서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귀신이 쫓아내려고 하니, 그 귀신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니가 뭔데 나를 쫓아내는데?" 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귀신이 보니까 귀신보다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에게 귀신도 쫓아내고, 귀신도 인정을 하는, 그 정도의 확고한 신분적인 보장이 된다고 하면, 적어도 순교는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주께서 친히 함께 있는데 왜 죽이느냐는 말입니다. 

(행 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 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열 두 영이 내려와서 십자가 달리기 직전에, "암행어사 출도여!" 라고 해서, 변 사또를 꿇어앉히고, 그 다음에 춘향이를 데려와서 "춘향아, 고개를 들라. 수청을 들어라" 라고 하면, 춘향이가 "이게, 오는 놈마다 다 똑같은 놈이네. 어딜 감히, 저리 꺼져라" 라고, 그렇게 성공사례를 주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곳곳마다 주의 영이 함께 있고 주의 지시를 받기는 받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가는 곳마다 마지막 몰골이 나무나 처참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그 어떤 격려나 희망도 보여주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물론 주님이 그럴 힘도 없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선교를 하는 자가, 즉 성령께서 선교를 시키는데,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선교하게 하신 분의 주체는 그만 모두 날아가 버리고, 그 선교를 담당하는 심부름꾼이 선교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을, 그것을 십자가가 용납하질 않는다는 겁니다.

◈ 사도바울의 일상(日常)은, 계시가 아니기에 !!

사도바울을 통해서 계시가 만들어지는 것은 맞지만, 그러면 사도바울의 일상은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아닙니까? 결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자신이 그 복음에 의해서, 즉 그 계시에 의해서 잘릴까 염려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정말로 중요한 대목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 원칙은 아직까지도 유효하고 말입니다.

왜 그것이 유효할 수밖에 없는고 하면, 만약에 자기가 선교를 담당한다고 했을 때, 즉 그러한 선교에 대해서 주님의 지시와 명령이 있을 때, 자기는 깨끗하고 의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선교를 시킨다는 오해가, 그것이 말썽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만약에 누구에게 선교를 시키고, 전도를 시켜서,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의 말을 듣고 구원을 받을 때, 그 사람의 경우에 "내가 이러한 실적과 업적을 거뒀다는 그것만으로, 나는 저 사람을 구원시킬만한 정도의 자질과 능력이, 그것이 나에게 있다" 라고 오해를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본인이 죄인 중의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구원을 받았으니, 나는 적어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의롭고 착한 사람이다" 라고, 그렇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오해한다는 겁니다. 죄인의 괴수가 아닌, 괜찮은 사람으로 말입니다.

사실은 그 사람 안에는 큰 교회를 해서 목회에 성공하겠다는 그 야망과 야심이, 즉 하나님과 원수 될 수밖에 없는 속성이 다 들어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선교라는 이름으로 어떤 권력을 쥐겠다고 하는, 본인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본인도 미처 예상 못한 강한 악마의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그저 눈에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속아넘어가면, 그게 자기로서는 그만한 대우를 받아도 합당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 그것은 곧, 사도바울의 회개여정 !!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사도바울의 선교는 날마다 회개해야 될 자기의 '회개여정'일 수도 있는데, 즉 "아하, 이런 것도 죄구나. 이것도 하나님의 원수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남에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란 그 자리가 어디인고 하니, 그래서 성경해석에 있어서 정말로 깊이를 요하는데 말입니다. 하늘의 안목에서 볼 때, 십자가 안에 갇혀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 입장에서 보는 바탕의 자리가 하나님의 원수인데, 즉 원수니까 악마라는 겁니다. 그러니 악마가 만들어낸 주체성을 형성시키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스무 살 때 만든 주체성은 스물 한 살 때 깨지면서 다시 만들고, 스물 한 살 때 했던 주체성은 스물 두 살 때 새로운 사태를 만나면서 깨지고 다시 만들고, 군에 이등병으로 들어갔을 때는 제대만 하면 감사한다고 하다가, 막상 제대할 때가 되면 취직문제로 걱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군대에 가지 않은 여자들은 모르는데, 군대의 세월이 너무나도 긴데, 마치 남자의 눈물과 같다는 겁니다(ㅋㅋ).

아무튼 시간이 너무나 길어서 이쪽에 가면 제대가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이등병 때는 "내가 병장을 달면 이등병에게 잘해줘야지" 라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병장이 되면 이등병에게 잘해줄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니는 니 인생을 살고, 나는 지금 취직준비를 해야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때 그때마다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주체성이 형성이 되는데, 그런 주체성이 형성되도록 마귀가, 즉 하나님의 원수가 다 도와준다는 말입니다. 

제가 방금 '주체성' 이라는 어려운 말을 했는데, 결국 '내 것' 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의 것을 사수하고 지탱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동질성' 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는 '등질성' 이라고도 하는데, 또는 '자아의 연속성' 이라고도 하고 말입니다.

◈ 주체성을 가지고 십자가 속으로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러한 주체성을 가지고 십자가 속을 걸어가면서, 그것이 깨지지 않게 만드는 십자가를 따로 원한다는 겁니다. 이 마지막 코스에서 이단이 등장하는데, 즉 "내가 평생토록 애쓴 것이 깨어지지 않게, 오히려 그것을 보호해주는 십자가가 어디에 없나?"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십자가는 후딱 지나가 버리고 부활의 새 생명이 그리워지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여기서 말하는 부활의 새 생명은 예수님이 좋으라는 새 생명이 아니고, 십자가를 믿었던 자기 것이 아주 영화롭게 찬란하게 빛나는, 그런 새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상급을 받아서, 사실 지금 상이 너무 많은데, 개근상으로 공책을 두 권하고 연필 한 자루하고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나눠줘야 된다고 싶을 정도로 너무 많이 받았는데, 하지만 스데반 집사가 상급을 받으려고 돌에 맞아서 죽었느냐는 말입니다. 

◈ 잘 짓고 잘 짓세, 건물을 잘 짓세 !!

그러므로 지금 사람들이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자기의 이득을 보기 위해서 나온 것이고, 그 이득은 "나의 것이 어떻게 안전하게 보존되면서 더 영광스럽게 찬란하게 하늘나라에서도 빛날 수 있습니까?" 라는 소비자들, 그런 고객들을 위해서 교회는 십자가를 지붕 꼭대기에 달고, 그리고 밑에다가 건물을 지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뭐냐 하면, 십자가는 꼭대기에 잘 붙어있는 것이고, 목회의 중심은 밑에 있는 건물을 얼마나 잘 짓느냐는 것인데, 특히 부산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지으면 되는데(ㅋㅋ), 즉 자기 것이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는 것 말입니다.

만약에 여기에 사도바울이 와서 선교를 한다고 하면, 그가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이 십자가는 들러리네. 너거들의 속셈과 노림수는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 거기에도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내 것을 십자가가 어떤 식으로 보호해줄지, 바로 거기에 있었구나"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흠집이 있는 것을, 자기가 먼저 따로 뽑아서 !!

하지만 자기가 자기의 것을 유지하는데 문제점이 뭐냐 하면, 혹시 여기에 죄가 있을 수 있고, 또 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씻습니까? 오 목사님은 설거지할 때 무슨 세제를 사용합니까? 퐁퐁인가요? 사람들은 십자가를 그런 퐁퐁으로 본다는 겁니다. 즉 죄를 씻는 퐁퐁으로 말입니다. (요즘은 퐁퐁을 안 쓰는데, ㅋㅋ)

그러니 완전히 깨는 게 아니고 씻어주는 것인데, 씻어줄 때 그렇게 씻어주는 것이 예수님에게 너무 수고를 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기가 먼저 흠집이 있는 것을, 즉 자두나 사과나 수박과 같은 과일을 팔 때 흠집이 있는 것을 상인들이 먼저 골라서 빼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흠집이 있는 것을 따로 뽑아서 회개하는 시간에 따로 모아서 "주여, 이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은 "그것을 씻어줄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제 흠이 없다고 여겨서 자기 창고에 저장하는 겁니다. 이게 모든 종교에 다 있는 내용인데, 기독교에도 있고, 이슬람교에도 있고,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는 말입니다.

◈ 심지어, 중국철학의 경우에도 !!

심지어 신이 없다고 하는 중국철학도 마찬가지인데, 그것도 바로 이러한 구조라는 겁니다. 중국철학의 특징은, "신은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여기에 잡티가 끼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즉 움직이는 연못은 사물을 깨끗이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 달의 영상을 깨끗하게 비출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사고방식이 중국철학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캄다운, 마음을 정숙하게 하고, 흔들지 말고, 침착해야 돼" 라고 하는데, 그것은 곧 자기 안에 살아있는 자연의 신이 자기를 복 되게 만들어줄 것이고, 만약 흥분해버리면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복이 달아난다는 겁니다. 그것이 중국, 일본, 한국 그리고 동남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는데, 바로 그게 어느 날 우리의 제2의 속성이 되고, 본질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말씀 보더라도, 기존의 바탕이 이런 선입관이 깔려있는 상태로 성경을 보니까, 십자가라는 것이 거침돌이고 걸림돌이란 겁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즉 "십자가가 뭐꼬?" 라고 해서,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은 것이다" 라고 하면, "아니, 왜 죽지? 참 이상한 양반이네. 우리에게 좋은 소리를 하면 얼마든지 마음을 평정시켜서, 그 말씀대로 살면 되는데, 죽기는 왜 죽나?"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죄를 씻게 주기 위해서 죽었어" 라고 하면, "그러면 이해된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씻지 말고, 퍼먹어 !!

그러니 자기에게 있는 흠집을 퐁퐁으로 약간 씻어주면 된다는 것인데, 그런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퐁퐁은 그릇을 씻는 용도이지, 국물용 퐁퐁, 음식용 퐁퐁, 여기는 하이타이, 또 여기는 옥시크린 등등, 그렇게 해서 그것을 퍼먹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니 마음 밭을 씻지 말고, 이것을 퍼먹어라" 라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뭐라고 반박을 합니까? 마음에 문제가 있으면, 그렇게 약간 흠집이 난 것은 퐁퐁으로 씻으면 되는데, 그러니 십자가는 그만 치워버리고, 이제는 부활의 새 생명으로 자기 마음을 유지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동양철학인데, 인간의 사고방식이 전부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금 흥분하면 안 되는데, 흥분하면 달이 잘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ㅋㅋ).

그런 의미에서 10분을 쉽시다.
 
 
                                                    2011,09,28 오후 9시에 재정리함 - 녹취 '구'

                                 왜 강의를 정리하면 하면 할수록, 교회가 잊혀지기는커녕 더 선명해지지?

 첨부파일 : 11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딤전후(교회를 잊어라)(강의정리)-재정리(3).hwp (52.2K), Dow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