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딤전후(교회를 잊어라!) 제5강(둘날오후1) 이제 교재를 보겠는데, 교재 7페이지의 3번입니다. --------------------------------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사도바울은 왜 편지를 디모데 개인에게? 그런데 디모데전서를 보면 좀 이상한 것이, 편지를 보낼 때는 보통 교회에게 보내지 사람에게 보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디모데전후서는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낸다고 하는데, 디모데가 무슨 교회의 대표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목회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편지를 개인에게 보내느냐는 말입니다. (딤전 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그렇게 개인에게 보내면 사적인 편지밖에 안 되는데, 그런데 사도의 이 편지가 계시라면,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데, 그런데 디모데 개인에게 편지를 하면, 즉 "그러면 디모데 혼자서 천당에 가라는 말인가? 다른 교인들은 뭔데?"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 그런데 고린도전서 4장 17절을 보면, 친절하게도 방금 제가 거론한 문제점의 해답이 나와있다는 말입니다. 그 해답이 뭔고 하니, 4장 1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고전 4: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디모데가 사도바울에게 속한 인물인지, 아니면 예수님께 속한 인물인지를 우리가 판정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17절에 보면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노니" 라고 하고, 또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라고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쉽게 풀면 다음과 같은데,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사도바울은,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하는데,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아,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받거든,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으로 여기고,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같이' 말입니다. 사도바울, 디모데, 교회, 이러한 것은 역사에 속한 눈에 보이는 존재들인데,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라고 할 때, 그리스도는 역사에 속합니까? 묵시에 속합니까? 물론 묵시에 속하는데, 그렇다면 역사는 어디의 지배를 받는다는 겁니까? 여전히 묵시 안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런 묵시 안의 지배를 받아야만, 비로소 인간들은 자기가 죽은 것을 알고, 그러니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우에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 성령께서는,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 아까 산책을 하는데 최종훈 장로님이 저에게 요청을 했는데, "성령의 삶, 즉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역할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해 달라" 라고 말입니다. 성령을 받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시키신다" 라는 겁니다. 즉 인간으로서 해낼 수 없는 불가능성이 계속 나오는 역할이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의 역할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인데, 그렇게 사람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뭐라고 외치는고 하면, "나는 못합니다, 나는 못합니다" 라는 것이 계속 반복해서 성령을 받은 사람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나는 못합니다" 라는 게 말입니다. ◈ 나는 못합니다, 나는 못합니다 !! 그러면 그것이 반복해서 나온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역사적 존재에 불과한, 즉 역사적 존재에 속한 디모데나 사도바울이나, 혹은 교회, 그렇게 역사적 존재에 속한 것들의 "나는 못합니다" 라는 것을 가지고서, 이미 이루어진 모든 공로가 묵시적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도록 위한 방식으로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말을 하고 보니 문장이 참 긴데, 끊어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못하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는데, 그렇게 못하는 일을 맡김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으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즉 인간으로서는 할 수도 없는 일이 감히 부족한 종을 통해서 터져 나오는 방식으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땅에 나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함께 살아 계시는데, 다만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자신의 사람을 살리는 일에, 물론 나는 절대로 못하는데, 주께서 나를 철저히 사용했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주께서 하셨습니다 !!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이 앞치마나 손수건을 가지고 뭔가 해내는 일이, 그게 에베소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말입니다. 그렇게 뭔가 해내거든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하신 것으로서, 주님께서 나를 가지고 이용했습니다" 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에, 그 앉은뱅이가 낫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당혹스러웠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했다" 라고 했지만, 정작 베드로와 요한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 사람을 일으켰다. 우리는 그냥 증인이고 목격자에 불과하다" 라는 말을 계속해서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리 가운데로 보낼 때, 너희 속에 말하는 이는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께서 말하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다른 말로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제자들의 입에서 "나는 그 말을 했는데, 그건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왜 니가 해놓고 니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라고 물으면, "나는 묵시적인 존재 앞에서 죄인에 불과합니다" 라는 고백과 더불어서, 예수님을 증거하도록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 어찌 합니까 ♬ 그렇지 않고 성령의 흉내를 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마치 노래방에서 "어찌 합니까~" 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가 "누가 했습니까?" 라고 물으면 "성령께서 불렀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아니, 성령이 무슨 임재범입니까? 지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됩니까? 그러니 반드시 "내가 할 수 없다" 라는 것이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평생을 설거지를 한 번도 안 하면서 아내가 해주는 밥만 얻어먹고 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설거지를 했을 때, "여보, 돌았어요? 육십 평생을 안 하던 설거지를 다하고" 라고 하면,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야. 주께서 하신 거야" 라는 고백을 진지하게 하는 겁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면,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파마도 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ㅋㅋ). 아무튼 성령의 열매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나오는 것인데, 그러니 성령의 열매는 말 그대로 우리 자신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께서 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의 열매' 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으로 가능하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무엇을 했든지 육의 열매가 되고, 즉 성령 없음의 티를 팍팍 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 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할 때, 그것은 곧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는, 자기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 그래서 우리를 보고 죄인이라고 단정을 짓는 차원이, 인간적 입장에서의 차원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때라는 겁니다. 그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게 수반되어야 되는데. 그것이 조금 전에 살펴본 교재 7페이지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1:9에서" 라고 하는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다같이 읽어보겠는데, 즉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구태여 이 말을 왜 자꾸만 집어넣습니까? 돌아다니면서 선교하고 전도해서 사람들을 꼬드기면 되지 말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이러한 말을 합니까? 이런 말을 해서 사람을 꼬드기는데 그 무슨 도움이 된다고 말입니다. -------------------------------- ◈ 다시, 사도바울의 선교경로를 !! 지금 디모데에게 편지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먼저 사도바울의 선교경로를 다시 보면, 여기가 아시아인데, 여기가 다소, 안디옥, 그리고 여기는 에게해이고, 바다를 건너서는 마게도냐인데, 지금도 마케도니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여기 밑에 아가야, 그 아가야에 속한 유명한 도시가 아테네, 고린도, 그 다음으로 마게도냐에서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등, 이런 도시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실라하고 2차 전도여행을 할 때, 환상을 받아서 바다건너 마게도냐로 풀쩍 건너가서 유대인들에게 쫓겨다니면서 전도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를 했다시피, 아테네에서 전도한 것이 계획을 잡아서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통해서 마구 공격해 들어와서 도망가다보니까 아테네까지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아테네에 가서 보니 신상이 너무 많으니까 놀래서, "무슨 우상을 이렇게도 섬기는가?" 라고 해서,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런 우상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서 구원받을 만한 것을 확정했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아테네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보고 놀리고 비웃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 아테네에서 고린도로 갔다가, 거기서 아굴라 브리스길라를 만났다고 했는데, 어떻게 기억이 납니까? 그리고는 다시 귀환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2차 전도여행을 할 때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데리고 가는데, 이 디모데를 데리고 실라와 더불어 가면서, 의원 누가도 같이 데려가서 활동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이 주목하는 것은 사도바울인데, 그래서 사도바울 혼자서 도망을 치고, 다른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롭다는 겁니다. 참 여기에 '디도' 라는 사람도 있는데, 이 디도는 디모데보다 선배인데, 율법문제 때문에 예루살렘까지 다녀온 소위 베테랑인데, 거기에 비해 디모데는 초짜라고 할 수 있고 말입니다. 아무튼 여기에 디도와 디모데와 실라를 남겨두는데, 정작 자신은 쫓겨서 도망을 다니면서도 이들을 남겨서 교인들을 돌보게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돌본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면, 사도바울이 전했던 그 계시를 그 기준에 맞추어서, 그들이 믿는 것이 복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절차를 계속 검토하고 관찰하는 일을 한다는 겁니다. 디도와 디모데와 실라가 남아서 그런 역할을 감당한다는 말입니다. ◈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함은? 그러니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 마음만은 벌써 마게도냐와 같은 이런 여러 지역에 이미 가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2차 전도여행뿐만이 아니라, 3차 전도여행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할 때는 굉장히 바빴는데, 한 바퀴를 더 돈다는 겁니다. 그렇게 돌면서 에베소에 갔다가, 또 마게도냐에 갔다가, 그리고 고린도에 갔다가, 이렇게 세 곳을 축으로 해서 여러 번을 빙글빙글 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돌면서 주고받는 편지가 사도바울의 서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디모데를 여기 마게도냐로 보냈다가 또 다시 고린도로 오너라고 해서 합쳤다가, 그러면서 자기는 다시 이쪽 에베소로 빠지고, 거기서 "어이, 고린도는 이상 없나?" 라고 하면, 그쪽에서 "지금 여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다시 "무슨 문제인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진행이 된다는 말입니다. ◈ '아볼로'의 등장으로 !! 그런데 3차 전도여행을 할 때는 '아볼로' 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좋게 이야기하면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고. 약간 거칠게 표현하면 조금 '나댄다' 라고 할까요? 아무튼 그런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이 자꾸만 아가야에 있는 고린도와 같은 곳에 가서 자기가 배운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아볼로가 누구에게 배웠는고 하면,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복음을 배웠다는 겁니다. 그 당시 사도바울은 안디옥에 있을 때였는데, 아무튼 이 사람이 고린도 지역에 갔는데, 그런데 이 사람이 방금 말한 것처럼 이 사람이 나대는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거기 고린도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파벌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나온 파가 놀랍게도 이 '아볼로파' 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바울파', 그리고 그 다음에는 베드로가 수제자니까 '게바파',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을 모두 다 통합하는 '그리스도파'가 나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4가지 분파가 등장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4가지 분파를 잠재우는 방법으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아까 제가 고린도전서 4장을 읽었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역사적인 흔적을 통해서 복음을 받으면, 즉 성령을 받아서 묵시로 나아가야 되는데, 그런데 묵시로 나아가지 못하고 항상 역사에 머물고 만다는 겁니다. ◈ 아하, 전도는 영역의 확장이 아니구나 !! 아볼로가 처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기 이전까지는 요한의 세례만을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요한의 세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역사적인 흔적을 말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 요한의 세례를 이야기하면서 그만 성령세례를 말해버렸다는 겁니다. (행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렇게 성령세례를 이야기하니까 "아하, 우리가 지금 전도하는 이것이 영역의 확장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왜 영역확장이 아닙니까? 묵시적 입장에서 영토라 하는 것은 확장되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데, 어떤 영역을 많이 차지한다는 것은 나폴레옹이나 좋아할 문제이지 말입니다. 왜냐하면, 땅 자체가 이미 죽음으로 인해서 부정당한 상태에서, 그런 쓰레기장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땅을 많이 확보한다고 해서 재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쓰레기 하치장이나 하나 더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지 말입니다. ◈ 역사적 인식에서 묵시적 인식으로 !! 그러니 역사적 인식에서 묵시적 인식으로 전환을 해야되는데, 제가 첫 번째 강의한 것이 기억납니까? 불과 만 하루도 안 되었는데, 그때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여기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갭이 있는데, 건너뛰는 것이 무엇밖에 안 된다고 했습니까? 성령밖에 안 되는 겁니다. 육은 이 십자가에서 '그만' 인데, 즉 여기 십자가 앞까지밖에 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육이 여기 십자가까지만 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죽어서 마땅하다" 라는 것으로 정리되는데, 그 다음에 죽어 마땅한 인간 중에서 "누가 여기서 건너는가?" 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몫이란 겁니다. 성령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의논된 바를 그대로 여기에 적용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 건너올 수는 없고, 오직 누구에게만 허락이 됩니까? 아버지에게 택함 받은 자만, 즉 창세 전에 예정된 자만이 건너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묵시적 사실을 그대로 전도하는 형국이니, 그런 판에 '내 구원'나 '내 영역' 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땅이 넓어도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고, 아무리 땅이 좁아도 성령을 받은 사람이 열 명이 있으면, 그것은 북적거리면서 바쁘다는 겁니다. 어떤 특정교회가 그렇다는 말은 하지 않겠는데, 그렇게 말하면 또 시기가 나기 때문에 말입니다(ㅋㅋ). ◈ 묵시가 어떻게 역사를 이겼는가? 그러니 다음과 같이 보면 되는데, 항상 사도바울은 자기 밑에 디모데와 디도와 실라를 달고 다닌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항상 그들로부터 보고를 받는데, 그 보고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 "묵시가 어떻게 역사를 이겼는가?" 라는, 그 문제에 대해서 보고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묵시가 역사를 이기면 "아, 믿음이 좋구나" 라고 하고, 반면에 역사가 묵시를 밀쳐내면 "이런, 그것은 망했네" 라고, 그렇게 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묵시가 역사를 이겼다" 라는 말은 뭐냐 하면,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 나오는 것, 즉 역사적 존재에서 묵시가 뿜어져 나오는 것, 즉 "항상 묵시가 뿜어져 나오는가?" 라고 하는, 그 보고를 듣는다는 겁니다. 누가 말입니까? 물론 사도바울인데,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예수 안'을 고집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는, 그 예수 안 자체가 역사적으로 확인이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묵시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지만 묵시와 역사가 만나게 되면, 거기서 나오는 것은, 비록 역사 속이지만 역사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묵시가 파급되고 발산된다고 하는, 바로 그 소식을 듣고 싶다는 겁니다. 괜히 선교지역을 많이 넓힌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 그들은 사단에게로 돌아갔다 !! 그러한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이런 것이 좀 어려운데 말입니다. 역사와 묵시가 만났을 때, 즉 성령과 육이 만났을 때, 육은 육대로 자기의 본색을 아주 여과 없이 드러낸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고린도 교회에 파당이 있는 것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교재에도 나와 있는데, 수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포기하고 돌아갔는데, 즉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을 거부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들은 사단에게로 돌아갔다" 라고 지적해버린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사도바울을 버리고 간 사람들을 다시 한 자리로 주워 모으자는 말입니다. 모아서 각자 각자에게 인터뷰를 해보는 겁니다. 즉 "뭣 땜시로, 무엇 때문에, 어떤 게 장애가 되어서, 어떤 게 거부감을 느끼게 했기에, 제가 전한 복음에서 나가셔야만 했습니까?" 라고, 그렇게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물어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물어보는 것 자체를 두고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사단에게 돌아간 사례들을 모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사단에게 돌아간, 사례1, 사례2, 사례3 등등, 그런 것들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모아놓아야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런 사람들이 그런 속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 가실 분들은 일찌감치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복음을 전할 때의 원칙과도 똑같은데, 즉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를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를 못한다" 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요한복음 12장에서 하신 말씀이기도 한데, 바로 그것이 사도행전의 마지막에 또 나온다는 말입니다. (행 28: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왜 그런고 하니, 그 원칙을 준수해줘야만 계속해서 묵시와 역사가 혼합이 안 되고, 묵시는 묵시대로 역사 속에서 또렷하게 빛을 발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 안' 이란 위력이, 결국 마지막 심판 이전에 이미 심판이 개시되었다고 하는 종말론적인 현상을 충분히 반영해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 물어봤을 때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등의 모든 성경구절에 다 들어있는데, 즉 사도바울은 자기를 배반하고 도망갈 때 나타나는 현상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편지 속에 다 심어놓았다는 말입니다. ◈ 결국 '행함'으로 가는 그들 !! 지금부터 그들이 사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겠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행함' 이었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행함' 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거기에 권면과 명령과 지시가 굉장히 많은데, 사도바울이 "모두가 다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이다" 라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무엇 무엇을 하라" 라는 것이 많았는데, 즉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많은 명령과 지시를 했을 때, 그것을 두고 행함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사단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어떤 명령이 왔을 때, 행함으로 마중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실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해낼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주님께서 명령하고 지시를 내릴 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내세운다면, 결국 그 사람은 사단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 그런데 주님의 지시와 명령이 왔을 때, 인간이 전혀 해내지 못하는 고백이 터져 나올 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지시와 명령을 내린 본래의 묵시의 효과를 지금 제대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행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로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그야말로 엉뚱하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백이 튀어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행하라' 라고 하면 행하면 되는데, 그런데 행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십자가의 고백으로 튀어나올 때, 이 사람은 지금 사도바울의 명령과 지시를 그냥 역사적 존재로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 이라는 묵시 안에서 지시와 명령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예수 안에서, 그것을 중간에서 전하는 디모데도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받는 진짜 교인들도 예수 안에서, 그렇게 되어서 우리는 모두가 다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고 '한 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박윤진 씨가 그리워지는데, 이번에 참석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겼는지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 묵시가 지나간 곳에, 역사의 먼지가 !! 아무튼 묵시적 모습들이 사단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유발시키면서 묵시적 현상이 오는데, 예를 들어서, 들판이나 산길에서 오토바이 난폭하게 "빠라바빠라밤" 라고 하면서 몰아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데, 그와 같이 묵시가 지나간 곳에 역사의 먼지가 온통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먼지를 버리지 말고 하나하나를 다 주워 모으면, 그 먼지를 모은 것이 곧 뭐가 됩니까? "우리는 행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의 열매는 뭡니까? "이것은 도저히 나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안경이 여기에 있다고 하면, 그런데 그만 다른데 신경을 쓰다가 안경을 떨어뜨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옆에 있던 집사님이 보고 "목사님, 안경을 떨어뜨렸네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아이쿠, 내가 왜 그랬지?" 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다른 생각을 하다가 떨어뜨린 겁니다. 그것은 자기 의지가 없는 것인데, 즉 주께서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아까 그 집사님이 또 왔는데, 그래서 관심을 끌기 위해서 살짝 안경을 떨어뜨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가 한 것입니까? 내가 한 것인데, 즉 "한 번 해봤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을 자주 보면 볼수록 점점 묵시는 날아가 버리고 무엇만 남습니까? 성경말씀이 역사적으로 해낼 수 있는 문장들로 이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즉 "이것은 내가 해낼 수 있다" 라는 겁니다. ◈ '예수 안'과 '예수 밖' !! 그러면서 그 앞에 무슨 말을 붙이느냐하면, '성령의 힘으로',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 라고 하는, 이런 말들을 붙이면서 자기가 해낼 수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행할 수 없는 사람이 갑자기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안다. 나도 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인다. 다 안다" 라는 것은, 더 이상 사도바울에게 머물 수가 없고 어디로 가겠다는 말입니까?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바로 그 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의 자리는 계속해서 무슨 자리입니까? '예수 안' 이라는 자리인데, 그것이 어떤 자리라고 했습니까? 날마다 '내'가 죽고, 그 '내' 안에 누가 사는 자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자리, 그 자리가 곧 예수 안의 자리라는 말입니다. ◈ 안다, 안다, 다 안다 ??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나는 다 안다.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내 자리로 돌아간다" 라고 하면서 돌아간 자리는 무슨 자리라는 말입니까? 사도바울이 경험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이 아닌 다른 자리로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안'이 아닌 그것을 무슨 자리라고 합니까? 당연히 '예수 밖' 인데, 참으로 간단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놀라운 사실인데, 예수 안이 아니고 예수 밖이란 것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 밖은 누가 지배를 합니까? 사단이 지배하는데, 그러니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이 됩니까? 당연히 사단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 인간은, 왜 되풀이를 하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계속 요구하듯이, 그렇게 말씀을 주신다는 것이 부담이 되신다면, 처음에 했던 것도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사실 가만히 보면 본인이 엉겁결에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본인이 했기 때문에, 그 다음 번에 또 하라고 하면 자기가 한 것을 꾸며서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고 할 때, 어떤 경우에는 그게 너무도 은혜스러워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맞아, 내가 돈을 너무 사랑했구나" 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는 말씀에 대해서, "이제 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게 아니라, 그 묵시적 해답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야, 오른 편에 던지니, 대~박 ?? 예수님께서 "배의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라고 베드로를 보고 이야기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야, 오른 편에 던지니, 대박이다" 라고,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게 아닌데, 그러면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 같은 인간은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나올 때,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배 오른편에 던지라" 라는 그 문장을 가지고, "오른편에 던졌다. 오른편에 또 던졌다. 참 재미있네. 또 던지자" 라고 하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만약에 로또를 샀는데 생각지도 않게 5등에 당첨이 되었다고 하면, 그것을 진짜 묵시적으로 느낀다면 그 다음에 뭡니까? "주여, 로또를 괜히 샀습니다. 이런 것을 사서 그만 주님을 시험하는 기회가 되어버렸으니까, 이런 것으로 한몫을 보겠다는 자체가 죄라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라고, 즉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로또를 샀는데 대박이 났네요. 주의 은혜입니다. 한번 더 사소서. 형제여!"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한번 더 사서 기도를 빡세게 하면, 지난번에는 3등을 했는데 이번에는 2등으로 승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데, 그렇게 나올 수 있는 것이 뭔고 하면, 그 사람은 첫 번, 두 번, 세 번째의 경우에도 뭔가 신비로운 것을 자기 손으로 해낼 수 있다고,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해낼 수 있으면, 그 다음부터 '내 안'에 사는 것이지, '그리스도 안' 이라는 것은 따로 떨어져 나가버린다는 겁니다. 즉 주님이 아니라도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는데, 굳이 무엇 때문에 귀찮게 그런 시어머니와 같은 양반과 함께 사느냐는 말입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며느리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 시어머니와 잡채 !! 어제 오전이지 싶은데, 제가 잡채 설교를 언제 했습니까? 시어머니와 잡채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것도 세월이라고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인데(ㅋㅋ), 아무튼 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음식을 못한다고 구박을 했는데, 5년이 지나자 이 며느리가 자기도 잡채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성껏 준비해서 시어머니에게 드리니, 그 시어머니가 "이것도 잡채라고, 이게 내가 원하는 그 맛이야?" 라고 하면서, 며느리의 면상에다 잡채를 던져버렸다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망측한(?) 이야기를 드는고 하니, 교회에 십여 년을 다녔다고 "주여, 나도 내가 알아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이것도 기도라고, 지금 니가 하는 기도와 예수님이 하는 기도하고 같다고 보나?" 라고 하면서 그 기도를 던져버린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그러니 그게 뭐냐 하면, 어느새 우리는 묵시적 그것을 '나'를 긍정하기 위한, 즉 '나'의 역사적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 그게 이미 변질된 채로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는 끝이 나고, 그 다음은 육의 열매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도 여러 번을 해버리면, 그것이 묵시가 아니고 역사의 되풀이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 예랑아, 사랑해 !! 다시 말해서, 하나의 종교적인 기술이 된다는 겁니다. 즉 '사랑한다' 라는 말을 마누라에게 너무 자주해도 실없는 남편이 된다는 말입니다. 가끔 타이밍을 맞춰서 해줘야 하는데,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해버리면, 그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아무튼 그렇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선물도 너무 자주 하게 되면, 나중에는 그게 그만 일상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니 주의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십 년 동안 아무런 선물도 하지 않던 사람이 줘야 감격을 하게 되는데, 그게 욕망체감의 법칙이라는 겁니다. 서 목사님, 제 말이 맞지요? (ㅋㅋ) 이제 디모데전서 1장 9절과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딤전 1:9)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 왜 이런 법적 조항들이 있는가? 여기에 보면, 이렇게 항목들이 줄줄이 나와있는데, 왜 이런 말씀이 있는고 하니, 에베소에서 변론이 생겼다는 겁니다. 왜 변론이 생겼는지 이야기를 해드렸지 싶은데, 즉 항상 묵시가 역사를 만나게 되면 역사는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그동안 자기 위주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수고롭게 했던 법적조항들을 가지고 맞서 싸우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묵시는 행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의롭게 된다고 하면서, 역사의 그것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왜 행함으로 의인이 될 수가 없는가? 왜 우리의 행함을 무시하고 모독하는가?" 라고 하면서 서로 싸움이 붙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이미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하고 붙었던 그 싸움을, 성령께서 그대로 가져다가 이제는 누구에게 주어지게 한다는 말입니까? 사도바울에게 주어지고, 즉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다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이 여전히 부활해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했던 일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주어지고, 또 주어진다는 겁니다. ◈ 우리의 인생은 예수님의 복사판 !!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복사판인데, 그렇게 인생자체가 예수님의 복사판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똑같이 물위를 다 걷는다는 뜻이 아니고, 우리는 똑같이 믿음이 아니면,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점에서,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복사판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국화빵을 찍어내듯 그렇게 계속해서 찍어내는데, 오직 믿음으로 구원, 피로 구원, 그렇게 계속 찍어내고, 반면에 사단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자는 식으로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고 말입니다. 그것을 계속 반복하는데, 즉 그때 그때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갖가지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아무튼 축약을 해보면, 그렇게 매듭이 지어진다는 말입니다. ◈ 그러면 율법이 필요 없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즉 율법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물로 받아들임으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율법무용론'으로, 즉 "그러면 율법이 필요 없지 않는가?" 라고 하면서 나온다는 겁니다.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율법이 필요 없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역사적 존재에서는 인간들이 천국이라든지, 그렇게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기 위해서, 즉 그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유대인들이 먼저 설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물론 유대인들 가운데서 간 사람도 많지만, 또한 헬라인들 가운데서도 간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을 모두 다 알아야 되는데, 즉 사단에게 돌아가도 그 종류가 다르다는 겁니다. 유대인으로 간 사람, 헬라인으로 간 사람, 그렇게 종류가 다들 다르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율법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다고 할 때,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고 누가 율법을 쥐고자 합니까? '나' 자신이 율법을 쥐고자 할 때는, 여기서 무엇이 발생되는고 하니, 율법에 대한 행함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럴 때 율법은 죽어있는 무생물이 되는데, 이렇게 죽어있는 무생물을 가지고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문자'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 인간이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되면 'COMPACT'한 현상이 !! 그런데 여기서는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율법을 무생물로 보지 않고 무엇으로 봅니까? 마치 꿈틀거리는 생명체와 같이 보는데, 그렇게 생명체로 보면 율법이 누구를 지배하는 겁니까? 우리가 율법을 지배하려고 손을 내미는 그 이전부터, 율법이 누구를 지배한다는 말입니까? 먼저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는 겁니다. 율법이 우리를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율법이 우리의 주체에 압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그러면 여기서 주체의 수축현상이 일어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응축현상' 이라고 하는데, 즉 'COMPACT' 라고 말입니다. 지금 서 목사님 사모님이 여기 없지요? (ㅋㅋ) 왜 여자들 화장품 가운데도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얼굴에 두드리는 압축이 되어있는 그 납딱한 것 말입니다. (딱분?) 그렇게 주체가 콤팩트가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고 하니, 도망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덩치를 줄였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법의 화살이 '퓽', '퓽' 하고 날아와도, 이미 주체가 응축되어서 작기 때문에, '싹', '싹', 그렇게 잘도 피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형과 동생의 경우를 보면, 형과 동생의 차이점이 뭡니까? 다같이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들어도, 형은 경험상 응축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매끄럽게 피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어리한 동생은 부모님의 잔소리를 혼자 다 맞고 아파서 엉엉 울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무슨 당나라 장수도 아니면서 날아오는 화살을 혼자서 다 맞는다는 겁니다. 반면에 형은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오늘 어깨를 좀 주물러 드릴까요?" 라고 하면서, 즉 뺀질이가 되어서 자기 주체를 살리면서 날아오는 화살을 다 피해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동생은 그것도 모르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라고 하면서 엉엉 울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미련한 곰탱이와도 같은데, 즉 주체가 뺀질뺀질 하지를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체가 수축되면 간편하게 가지고 도망을 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주체의 응축으로, 시원적 휴식이 !! 그렇게 주체가 수축이 되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가는고 하면, '시원적(始原的) 휴식'이 여기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이 주신 휴식인데, 그것이 뭔고 하니, "나는 나다" 라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방치한 상태인데, 즉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더라도, '내'가 현재 갖고 있는 '나'의 것만으로도 편안하게, 즉 "이 세상은 참으로 살기가 좋아" 라고 하면서 편히 쉴 수 있는 휴식, 그런 시원적인 휴식이 주체가 있을 경우에만 보장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접근하느냐 하면, 강력한 혜성과 같은 것이 접근하는데, 그러면 주체는 그만 도망치기 바쁘다는 겁니다. 어디로 도망을 칩니까? 이 주체가 깨어지지 않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손쉬운 법들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면서 큰 덩어리로 오는 법들에 대해서는 낯을 피해버린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이 강의를 왜들 이렇게 정신을 집중해서 잘 듣는지 모르겠는데, 모두들 지금 자기들 이야기로 여기고 듣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아니면 제가 지금 오해를 하는 겁니까? (예, 오해입니다. ㅋㅋ) ◈ 인간들은, 콤팩트한 주체를 계속 유지를 !! 무슨 말인고 하니, 성경 말씀 가운데서 큰 덩어리로 다가오는 것은 피하면서, 자기가 쉽게 행할 수가 있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등을 지키면서 큰 덩치의 말씀에 대해서는 '쉭', '쉭' 하면서 피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계속 응축된 주체, 즉 콤팩트한 주체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이 주체가 변비가, 그야말로 꽉 막힌 똥처럼 너무 딱딱해지면 자기도 감당을 못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도 미치는데, 이놈의 주체가 그만 어떻게 되고 말았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나에게 우상이 되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태를 !!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준비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이 올 때, 율법이 문자로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문자를, 즉 무생물을 생물로 전환하는 방법을 동원하시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체에게 주어진 환경을 이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게 하는데, 그러한 사태가 벌이지게 되면, 좋게 좋게 지내다가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응축된 본성으로 가게 되는데, 이 응축된 본성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까, 어려운 말로 태고적, 혹은 시원적 휴식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즉 안식, 또는 평화와 같은 것들을 말입니다. 하다보니 말이 어려워졌는데, 이것을 쉬운 말로 하면, 예를 들어서,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 500만을 학살한 나치전범인데, 이 양반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 남미에 숨어서 한적하게 낚시를 즐기고 있다가 붙잡혔다는 겁니다. 전쟁 중에 유태인들을 죽인 학살주범을 잡으러 다니는 유태인들의 조직에게 붙잡혔다는 말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잡아주지 않으니 이스라엘 스스로가 그런 조직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게 '뮌헨' 이라는 영화에도 잘 나오는데 말입니다. ◈ 사람들이 낚시를 하는 이유는? 그렇다면 이 낚시의 표상이 뭡니까? 휴식인데, 다른 말로 하면 피스(PEACE), 즉 '평화' 라는 겁니다. 아는 단어가 몇 개 안 되어서 그 정도로 밖에 표현밖에 할 수 없는데(ㅋㅋ), 그리고 안식, 바로 그러한 내면의 청정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낚시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고기를 낚기 위함이 아니라, 시간을 낚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물론 낚시꾼들이 하는 소리인데 말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남자들이 낚시를 갈 때는 집구석에 문제 있을 때, 그 모든 문제를 마누라에게 다 맡기고 자기 혼자서 도망칠 때 낚시를 가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아무튼 평화, 안식, 휴식 등등, 그런 것이 뭐냐 하면, 태고적이고 시원적인 휴식인데, 인간들은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최후의 마지막 노선을 형성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것이 깨어지면 안 됩니까? 그것마저도 깨지게 되면, 그동안 그것을 응축하기 위해 수고한 모든 것이 헛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다른데서 '나'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미 '나'는 그리스도 밖으로 나와 버렸고, 그렇게 그리스도 밖에 나왔으니까, 이제 시원적 휴식이나 안식이 자기 것으로만 응축될 때, 그 안에서만 휴식을 즐기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것마저도 공격을 받아버리면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윤복희? 도대체 누구입니까? 도대체 누가 '나'를 위로해준다는 말입니까?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 자기에 대한 지독한 동정인데, 자기가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나같이 불쌍한 놈이 어디에 있다고, 왜 나를 건드리십니까?" 라고 나오는데, 하여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말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불쌍하다고 하는데,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물으신다는 겁니다. ◈ 뭐, 니가 불쌍해? * 주님 : 니가 지금 누구하고 비교했는데 니가 불쌍하다는 거야? 아니, 젊었을 때 공주가 아닌 여자가 누가 있고, 왕자가 아닌 남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괜히 동화책을 많이 봐서, 어디서 말 탄 왕자가 와서 자기에게 뽀뽀해주고 결혼해 주기를 원하는 공주인데 말입니다. 진짜 그런 공주를 원하려고 하면, 독이 사과를 먹든지, 아니면 계모를 만나든지, 일곱 난쟁이와 사귀든지, 그런 것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신데렐라처럼 일부러 신발 한 짝을 벗어놓고 도망치고, 미팅에 가서 그런 짓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튼 너무 많이 봤는데, 동화를 말입니다. 그러니 동화를 보여주는 그것도 죄악이고, 행함이라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면 괜히 꿈을 꾼다는 겁니다. 갑자기 엄마에게 와서 "엄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려줘" 라는 소리나 하고 말입니다. 본 것은 있어 가지고 말입니다. 만약에 지금 엄마가 친 엄마라고 하면 이런 구박은 있을 수 없다고 오해를 해서, 즉 신뢰성이 깨져서 미국에 있는 양부모에게 다시 가고 말입니다. TV방송에 그런 내용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들 돌았는데, 여기서 '돌았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인고 하면, 사실은 주체가 응축되어 있다는 것인데, 자기가 자기를 깰 수 없는 정도로 응축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 주체가 완전히 응축되어서, 그 응축된 자기 안에다 자기를 집어넣으려고 하니, 자기가 얼마나 왜소해지냐는 겁니다. 왜소해지고, 폐쇄되고, 그야말로 자폐증 환자처럼 자꾸만 자꾸만 기어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태, 곧 '피' !! 그렇게 자꾸 기어 들어가니까 주님께서 사태를 일으키는데, 어떤 사태입니까? "말씀의 본뜻이, 응축된 주체인 니가 이해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이 모든 율법의 말씀 앞에서는 율법의 완성이 죽음이라는 겁니다. 즉 '피' 라는 겁니다. 반면에 사람들의 응축된 주체는 뭐냐 하면,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아서 재벌이 된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지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성취는 무엇인고 하면, '대신 죽음' 이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곧 율법의 완성인데, 바로 그렇게 주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십자가 사태를 일으켜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는데,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울과 같은 사람은 깨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데, 하지만 이렇게 자기가 죄인인줄 안다고 할 때, 응축된 주체가 아는 죄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시원의 휴식을 깨지 않기 위해서,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왕 어려운 것이니 더 어렵게 해보자는 겁니다. ◈ 아, 현기증 나는 자유 !! 이 응축된 주체에서는 뭐가 나오는고 하면, '가능성'이 나온다는 겁니다. 가능성이란 자유인데, 그런데 자유를 자기가 다뤄보니까, 이 자유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고, 그 자유는 '유한한 자유' 라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현기증 나는 자유' 라고 하는데, 즉 꿈은 너무나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 그것을 다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현기증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기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나는데, 그렇게 현기증이 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높이만큼 자기가 채울 수 있는 능력이 못되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새가 현기증이 납니까? 독수리가 날다가 "아, 너무 어지러워요" 라고 합니까? 그게 아닌데, 왜냐하면 독수리는 아무리 높이 날아도 그 높이를 다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절망하면서 현기증이 나는 이유는, 그 높이에서 아래도 떨어지면 응축된 주체가 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응축된 주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물론 자기가 뛰어내릴 자유는 있지만, 그것이 안 되니, "나중에 낙하산 타고 내리지 뭐" 라고, 그렇게 미루어버린다는 겁니다. 즉 자유는 있기는 하되, 그 자유의 목적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사용되는 자유라는 말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감당이 불감당 !!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즉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것보다 더 심한 자유는 뭐냐 하면,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나무를 뽑아라" 라고 했을 때, 물론 나무를 뽑는 것은 자유인데, 나무를 뽑으면 뭐합니까? 바다에 심어야 되는데 말입니다. 설령 나무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바다에 옮기는데 너무 힘이 든다는 겁니다. 즉 옮기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렇게 더욱 더 자기의 왜소함을 자극하니까, 그런 성경말씀은 치워버리는 겁니다. 그런 것은 치워버리고, 온유와 화평을 가지고서 자기가 겨자씨 만한 믿음도 없는 것을 대체하려고 시도한다는 겁니다. 즉 응축된 주체가 갖고 있는 시원적 휴식과 평화와 안식은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심보를 발휘하게 된다고, 이 연사가 이렇게 힘주어 외친다는 말입니다(ㅋㅋ). ◈ 그래서, 성경말씀도 골라서 !! 쉽게 말해서, 성경말씀을 믿기는 믿는데 골라잡아서 지키고 골라잡아서 믿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하철역에 엎드려 있는 불쌍한 노숙자에게 천 원을 도와줄 수는 있는데, 하지만 요한일서 3장 16절에 나오는 "형제를 위해서 내 목숨을 바쳐라" 라는 말씀은 도저히 안 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아는 친척이든지 이웃의 누군가에게 자기의 간을 일부 내어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자기 목숨만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3장 16절에 뭐라고 합니까? "사랑을 알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라고 하고 나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당연하다', 또는 '마땅하다' 라고 되어있다는 됩니다. '억울하다' 라고 되어있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다치면 아프고, 아프면 사는 게 힘들어요 !! 그러니 그런 커다란 덩어리와 같은 율법을 우리는 피하고 싶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현기증이 나니 말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이 평화, '내'가 '내' 안에서 만족하는 이 평화를 더 이상 다치기가 싫다는 겁니다. "다치면 아파요" 라고, 즉 '트라우마' 라는 겁니다. 정신적인 상처가 아픈데, 그렇게 아프면 사는 것이 힘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욕심을 내지 않기로 작정하고 현재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을 하면서도, 자기 안에서 평화는 유지되어야 하겠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떤 새로운 사태를 발견하면,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밀치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항목들이 디모데전서 1장 9절에 나오는 말씀이란 겁니다. 도둑질을 하는 것이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남들처럼 살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물론 사기도 마찬가지인데, 사기를 치는 것이 결코 재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들처럼 차를 타고 싶어도, 아무리 고물차라도 사기를 쳐서라도 돈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젊은애들의 경우에, 남들은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을 먹고 재미있게 놀면서 남녀간에 미팅을 하는데, 남들은 있어 보이니 미팅도 잘되고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돈이 없어서 허름하게 보여서 그런 것도 안 되니까, 거기에 열을 받아서 "나도 언젠가 한번 사기라도 쳐서 돈을 좀 뿌려봤으면 좋겠다" 라고. 그렇게 다짐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 지발, 니 분수와 주제를 좀 알아라 !! 그런데 그런 환경들을 누가 조성한 겁니까? 하나님께서 일일이 그런 환경들을 다 만들어서, 우리들에게서 사기나 탐욕과 같은 것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발 니 분수와 주제를 좀 알아라" 라는 것인데, 이제 그 아는 기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십 분만 쉬겠습니다.
목사님, 진짜 살아가는 게 현기증이 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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