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딤전후(교회를 잊어라!) 제4강(둘날오전2) ◈ 십자가는,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유일한 지점 !! 하나님께서는 역사라는 것은 죽이고 묵시만 살리는데, 즉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유일한 지점으로 보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역사가 십자가와 만날 때는 그냥 만나지 못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명하는 속성들을 가지게 되는데, 그러니 여기에 배치되었던 모든 것들이 어디로 쏠리느냐하면, 그것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들이고 자원들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재료들, 즉 하나님의 원수들의 벌리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죽였는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죽어버린 하나님을 이 땅에 제시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죽어버리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즉 "내가 살기 위해서, 나보다 더 잘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것이 현재 죽을까 염려되는 나를 살려낼 수 있다" 라고 여긴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살아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슬아슬하다. 그런데 확실하게 살아있는 분은 도대체 누구지? 그렇지, 바로 하나님이구나. 살아있는 하나님은 죽지를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그 죽지 않는 하나님이 죽어가는 나를 살려내는 유일한 대안이다" 라고 해서, 그래서 인간들이 신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들이 아무리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쏴도 죽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허약하게도 사람의 손에 의해서 재판을 받아서 죽어버린 하나님이라고 하면,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은 아무도 믿지를 않고,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 왜 두 개의 보조 십자가인가? 그런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담긴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십자가인데, 아니 어떻게 죽은 분이, 정작 본인도 죽어가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살릴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십자가는 달랑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의 보조 십자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두 개의 보조 십자가를 장치로 해서, 바로 그 보조 십자가 위에서 하나의 십자가를 알리도록 했다는 겁니다. 이 보조 십자가는 우리가 알다시피 두 사람의 강도가 달린 것인데, 그때 강도가 세 사람이 잡혔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면 두 사람의 강도는 도대체 어디서 흘러온 자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밥이나 먹고 살아보려고 애썼던 두 사람의 강도를 두 개의 보조 십자가에다가 배치를 했는데, 이것은 역사에 관한 것으로서, 즉 그들은 역사 속에서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쳤다는 말입니다. (예? 강의를 다시 해야 된다구요? 예, 그건 저의 주특기인데, 새로 다시!) (동영상 작업 때문에, ㅋㅋ) ◈ 새로 다시, '어게인' !! 십자가는 역사와 묵시의 만남인데, 즉 모든 것을 죽이는 것이 역사고, 그것을 살려내는 것은 묵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역사의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죽이는 재료가 되고, 즉 그러한 일에 소모되는 원료가 된다는 겁니다. 즉 모든 배치와 배열들이 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원되도록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되어있는데, 즉 땅도 하늘도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죽이는 쪽으로 배치가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나님은, 사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은 하나님인데, 그런 죽은 하나님을 이야기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역사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마귀에 속했기에 죽기가 무서워서 죽지 않으려고,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살아야 돼" 라고 하는데, 물론 남이 사는 것은 소용이 없고, 자기 것이기에, "나의 것은 영원무궁해야 돼. 옆 사람은 죽으나 사나 나와는 상관없고, 내가 살아야만 돼" 라는, 그것이 인간이란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뭡니까? "나는 죽어야 된다" 라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에 있어서, "살아야만 되겠다" 라고 하는 그 인간이 죽은 하나님을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다 두 개의 작은 새끼 십자가를 장치해놓음으로서, 그 두 개의 십자가에서 모든 역사의 모델로서 두 사람이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 인간들의 행세 - '나를 살려주면, 믿겠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그동안 자기들의 역사 속에서 살아온 버릇, 즉 행세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를 살려주면, 그 사람을 믿겠다" 라는 것인데, 인간은 그런 식으로 나가는 겁니다.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면서도 자꾸 자기가 '구원자' 라고 자꾸 우기는 겁니다. 즉 "나를 믿어라. 내가 구원자이다" 라고 말입니다. 본인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구원자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진짜 구원자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즉 뭔가 납득이 될 수 있는 것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무조건 자기를 구원자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강도들이 뭐라고 합니까? "뭘 가지고? 어떻게?" 라고 하는데, 물론 본인이 살아있는 가운데서 죽은 척을 하면서 갑자기 천사를 불러내면 "아, 천사를 보니 그렇구나"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본인이 지금 같이 진짜로 죽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같이 죽어가고 있는데 구원자라고 하니, 당연히 납득이 안 되는데, 물론 나머지 한쪽의 강도도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둘 다 처음에 예수님을 부정했는데, 다 같이 한 짝이 되어서 예수님을 조롱했다는 겁니다. 즉 "우리는 강도로서 겸손한 면이라도 있는데, 저 인간은 같이 죄를 지어놓고는 스스로 구원자라고 하니, 저런 말도 안 되는 황소고집은 도대체 튀어나온 거야?" 라고 말입니다. ◈ 죽은 하나님만이 살려낸다 !!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한쪽의 강도가 그만 "오늘밤에 낙원에 가게 해달라. 당신은 낙원에서 오신 분이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은 하나님만이 살려낸다" 라는 공식이 성립되는데, 죽은 하나님만이 살려낸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렇게 죽은 하나님께서 살려내기 때문에, 이 '산다' 라는 개념은, 그 동안 우리가 역사 속에서 꾸준히 학습되어왔고 배워온 것하고는 다른 '산다' 라는 게 된다는 겁니다. 전혀 같은 종류의 개념이 아닌데,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사는 식으로 그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셨던 그것이 생명이라고 하면, 그것이 생명나무라고 하면, 졸지에 우리는 평소에 살려고 한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의 형태임을 수용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스스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는 없는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십자가의 영이, 즉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만 비로소 그것을 알 수 있는데,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만약 사람의 힘으로 알았으면, 사람들이 결코 이분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 사도바울은 왜 바쁜가? 사도바울 바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터어키, 아시아, 마게도냐 등지의 가는 곳마다 전했다는 말입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뵈뢰아, 아테네, 고린도, 에베소 등등, 여기서 고린도와 에베소가 2차 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에서 양대 축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1차는 아니고 말입니다. 아무튼 여기로 갔다가, 또 저리로 갔다가, 사도바울은 되게 바쁘다는 겁니다. 에베소에 갔는데 고린도에서 말썽이 생기니까 또 그곳으로 갔다가, 다시 저쪽에 말썽이 생기면 또 저쪽으로 가고 말입니다.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또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말입니다. ◈ 제발 죽어라, 죽어 !! 그런데 그렇게 왔다갔다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전부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죽은 인간이 왜 그렇게 말이 많나?" 라는, 바로 그것이란 말입니다. 마치 미꾸라지를 잡아서 소금을 끼얹어 놓으면 가만히 있듯이, 아닌가요? 그런데 소금기가 없어지면 또 살아서 바둥바둥 댄다는 겁니다. 그러면 소금을 다시 끼얹어버리는데, "이래도 안 죽어? 좀 죽어라" 라고 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은 "니가 살려고 하는 그것이 곧 너의 구원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마귀의 최후무기다" 라는 겁니다. 즉 마귀의 최후무기는 "너, 그러면 죽어?" 라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꾸만 소금을 쳐서 "저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라는 쪽으로, 그렇게 계속 밀고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전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는 뭡니까? 자기들은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면 죽는다는 겁니까? 산다는 겁니까? "여러분, 살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라는, 그것이 유대인의 종교적 의미였다는 겁니다. 즉 "나는 율법을 지키면 살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인데, 요즘 말로 하면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으면 살 수 있습니다" 라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 그러나, 십자가를 믿고 살 수는 없어 !! 그러나 십자가를 믿고 산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이라면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되는데, 즉 "십자가는 나를 죽이고, 내가 사는 것은 십자가로 끝났고,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누가 사는고 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성경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데도 사람들이 시비를 거는데, 그러면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면 제가 성경을 지어낼까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 그대로라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행적을 '반복' !!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계속해서 율법을 동원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왜 그런고 하니, 성령께서 그것을 시켰는데, 그러면 성령께서 왜 그렇게 시켰습니까?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기 이전까지의, 여기에서 '이 땅' 이라는 것은 창세 이후를 말하는데, 물론 십자가 너머(?)는 창세 이전의 세계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창세 이후의 세계, 즉 이 땅에서 일어났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 이전까지의 그 행적을, 비단 기적만이 아니고 모든 말씀과 그 모든 행적을,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사도바울이 갔던 1차, 2차, 3차 전도여행에서 모두 다 적용시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율법의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 공격을 했듯이, 사도바울도 역시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공격할 수밖에 없고, 또한 오늘날 우리들도 현재 말씀, 즉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 공격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낼 문제가 아닌데, 서로 좋게 지내버리면 서로가 다 살기 때문에 서로 다 죽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서로 죽여줘야만 그게 사는 것인데, 왜냐하면 서로가 못났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못난 우리가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봅시다" 라고 하면서, 그것으로 끝나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두 다 죽이는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라고 하면, 상대방이 "니만 십자가를 바라보나?" 라고 하면서, 또 자기 것이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 율법은 필히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 데살로니가 등에 보낸 편지 속에 담겨있는 복음은, 사도바울이 어떤 의미에서 그 복음을 전했는고 하면, 그것은 바로 "율법은 필히 무엇을 요구하는가?" 라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행함을 요구한다" 라고 하면, 그것은 문제가 없는데, 즉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는데, 그렇게 율법이 행함을 요구할 때, 그 행함은 인간에게 요구하고, 율법자체는 선한 것이므로 하나님 쪽에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하나님 쪽에서 주어진 율법과 그 율법을 행했다고 하는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깨어지는고 하면, "이것이 바로 경건치 않은 것이고, 죄인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율법이 까발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율법과 행함의 틈 사이에서 무엇이 주어지는고 하면,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다" 라고 이야기를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반복되는 것이 곧 부활이라고 했는데, 지난 시간에 했는데, 부활은 무엇의 반복입니까? 예수님의 죽음, 즉 십자가의 반복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속에서 십자가가 반복될 때, 그것은 여러분의 뜻이 아니고 성령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인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십자가가 반복해서 주어지는고 하면, 즉 25살 때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25살 때에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았다고 하면, 그런데 그 사람이 계속해서 살아야 되니 26살 때도 어떤 행함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 죄 된 행함이 아니라, 행함이 곧 죄 !! 그런데 '죄 된 행함' 이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죄 된 행함이 아니라, 그 행함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죄악 된 행함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의 모든 행함이 죄로 등장되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이 무엇으로 바뀝니까? 말씀으로 바뀌는데, 그래서 이제는 말씀이 계속해서 그 일을 해대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성경말씀은 그 배치가 어떠한고 하니, 십자가를 향해서 질주하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향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입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면 그런 고백을 22살 때 했으면, 23살 때는 고백하지 않아도 됩니까? 23살 때는 23살이 되어서 일어나는 행함이 또 있을 것이고, 그 행함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또 무엇이 되는고 하니까,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또 등장하는 겁니다. 그렇게 또 등장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과 행함의 틈 사이에서, 그것을 의가 되게 한 십자가 피를 또 바라보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의 경건치 않음을 위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십자가를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되는데, 그러면 그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인고 하면, 죽이는 십자가가 아닌 살리는 십자가가 된다는 겁니다. 죽이는 말씀이 곧 살려주는 말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살려주는 말씀으로 '살았다' 라고 하는 그 인간을 24살 때 또 죽여 버리는데, 그렇게 해서 또 살려내고, 25살 때 또 죽여버리고 또 살려내고 또 죽이고, 그렇게 해서 89살의 어느 날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오 목사님은 벌써 머리에 눈이 제법 왔는데 말입니다(ㅋㅋ). 그것이 바로 부활 속에 있는 사람이고, 즉 성령 안에 있다는 겁니다. ◈ 화평은, 십자가로만 주어지는 것 !! 그래서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라고 하는데, 그 화평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지, 자기가 말씀을 지킨 것으로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지켰다는 것이 또 다른 말씀에 의해서 죄로 지적되게 되면, 그 화평이 다 깨져버린다는 말입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자기는 분명히 말씀대로 살았다고 여겼는데, 그래서 이렇게 수련회도 참석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의 어느 다른 대목을 딱 보니까,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간식이 없다고 삐쳤는데, 그것도 죄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에는 수련회를 할 때 간식이 풍성했었는데, 그때는 어떤 분이 수고를 많이 해서 감자와 옥수수가 너무 많아서 다 처먹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런데 이제는 '휭' 하구나" 라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혹시 "주최측은 뭐하나?"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여러분들이 다 주최측이라는 겁니다(ㅋㅋ). ◈ 오직 십자가에서 '피'가 아무튼 역사라는 것은 다 죽는데, 그런데 이 역사에 묵시가 개입했다는 것이 우리를 살려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묵시와 역사의 만남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건 어디에 따르는고 하면, 구약의 제사법인데, 즉 '피' 라는 겁니다. 그 피는 부활에서 생기는 게 아니고, 오직 십자가에서 피가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즉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다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구약의 제사의 경우에는 반복이 되는데, 지난 시간에 한 것 다시 해보면, 유월절의 어린양이 있을 때 여기에서 히브리인들이 죽을 뻔(?)했는데, 죽을 뻔했다가 어린양의 피로서 장자가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죽은 어린양이 어디에 살아있습니까? 즉 "어린양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말입니다. ◈ 만나 - 원망1, 원망2, 원망3 !! 시내산에 받은 제사법에 의해서 어린양이 매일같이 죽는데, 그러니 이 사람들이 이제는 옛날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었던 그분의 세계로 이끌려 가는 겁니다. 그것이 곧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인데, 하지만 그들이 살던 버릇이 땅에서 살던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들은 땅만 있으면 살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땅만 있으면 자기들의 힘으로 개간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만 주시면 잘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약속이 광야에서 하는 말은 "그것은 사는 게 아니야" 라고 하는데, 즉 '산다' 라는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겠다는 겁니다. 즉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라는 신명기 8장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만나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 만나를 준 것은 "너거들이 이렇게 원망했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만나를 뜯어보면 "원망1, 원망2, 원망3, …" 라고, 그렇게 원망이 가득 가득히 들어있다는 겁니다. 즉 원망했고 불평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양식이 곧 '만나' 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그 양식이 말씀이라고 하면, 그러면 그 말씀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우리의 원망, 불평, 하나님에 대한 대듦 등등, 이런 것들이 포함된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 해석은 반드시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십니까?" 라는 원망이 그 안에 담겨있는 채로 해석이 되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 귀신이 나오는 곳을 소개해 드릴까요 ?? 그러니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실 때, "여러분이 교회에 오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또 죽이는 일입니다" 라는 식으로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교회에 왔지만, 그러나 여러분은 살기 이전에 이미 왜 죽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교회에 왔었어야 됩니다" 라는, 바로 그런 의미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왜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정당합니까? 정당하지 못한 겁니까? 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조치가 됩니까?" 라고 하는, 그런 이유를 알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러면 아무도 안 나오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여행사를 찾는 이유가 신혼여행을 가듯이 즐겁게 놀러가기 위함인데, 그런데 여행사에서 "귀신이 나오는 곳을 소개해 드릴까요?" 라고 하면, 그게 장사가 되겠습니까?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상품을 개발해야 고객들이 만족해하는데, 왜냐하면 고객이 왕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마귀가 왕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닌 것처럼, 그것을 알아먹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성령의 힘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아먹지 못하도록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 여기에 몇 명을 채울까 ??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목회자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런 사람들을 찾으려고 하면 장사가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몇 명이 되지 않기에 말입니다. 문제는 자기 그릇을 따로 만들어놓고, "여기에 몇 명을 채울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 그릇자체가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그릇이란 겁니다. 거기에 몇 명을 채우는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어쨌던 간에 다섯 명을 채웠다고 한다면, 다섯 명을 채웠다고 하니까 녹매교회가 생각나는데, 그런데 이 교인들이 언제 어디로 갈지, 즉 언제 청매로 갈지 말입니다(ㅋㅋ). 언제 이사를 갈지 모는데, 그런데 이게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나의 것' 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을 왔다갔다하면서 깨닫게 하시는 축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것이 축복에 해당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왔다가갔다가 하면서, 그렇게 때려치우고, 또 왔다가갔다가 때려치우고 하는, 그런 것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나의 것'이 자체가 하늘나라에서 전혀 쓸데없고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 아하, 내 가정이 아니구나 !!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고 가정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자식도 그렇고 말입니다. 자기 스케줄대로 제대로 가주어야 그래도 자기 자식이라고 여기겠는데, 그런데 왔다갔다하면서 그렇게 경계선을 마구 타넘어 다니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너무나 왔다갔다해서 어지러운데, 즉 "아하, 가정도 내 가정이 아니구나"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나 전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고 하는 그 말씀이 무엇을 지적합니까? 자기는 자식 번듯하게 잘 키워내면, 그것은 죄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런데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을 보면서 "아하, 이것도 죄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어떤 사람은, 자기 아버지가 죽었을 때 너무 슬퍼서 운 것은 죄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런데 마태복음 8장을 보면서 "아하, 내가 아버지가 죽어서 장례를 치른다고 신경을 쓴 것도 역시 죄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벌이고 있는 모든 행함은, 이 행함의 원리에서 죽을 때까지, 즉 애굽과 같은 행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더욱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굳히기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유도에서 상대선수에게 굳히기에 들어가듯이 말입니다. ◈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 그러므로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그 동안 이 세상에서 했던 그 행세를 그대로 되풀이해야만 되는데, 그러면 주님은 같이 따라붙어서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그렇게 계속해서 살리는 겁니다. 아무튼 계속 살려준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쩌 빠따에 누워'처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늘 공급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니가 지난 여름날에 한 짓을 나는 알고 있다" 라는 것과 같은데, 즉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아니까, 그것을 잘했다고 가지고 나오지 마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용서했던 그리스도의 역사와 묵시의 만남의 초점인 십자가만 있으면, 즉 구약의 모세언약대로 피만 있으면 용서함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기가 용서하는 그 자체를 만끽하고 싶어하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탕자가 반드시 필요하고, 또한 죄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역할을 우리가 해줘야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탕자가 안 되려고 하고, 죄인이 안 되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것은 전혀 남의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인이고 탕자라고 하는 관점은 뭐냐 하면, 이 지상의 관점이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하늘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탕자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같은 인간들끼리 서로 죄라고 하는 그 의미를, 그런 뉘앙스는 믿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아무리 "니가 죄인이다" 라고 해도, 거기에 전혀 기죽지 말라는 겁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에서만 우리가 죄인이지, 다른 사람들이 지적하게 되면 그것은 죄라고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때는 "니나 잘하세요" 라고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 왜 멘토를 두려워하는가? 제가 주일 오전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이 부러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있다고 말입니다. '위대한 탄생' 이라는 프로에 보면 '멘토' 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서 멘토는 무엇인고 하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게 해주는 멘토라는 겁니다. 제가 직접 TV를 본 것이 아니고, 이게 다 듣고 하는데 말인데 말입니다(ㅋㅋ). 그러니 노래를 잘 부르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은 전혀 멘토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 아무리 멘토가 "아저씨, 제가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도록 해드릴까요?" 라고 해도, 상대방은 "저리 가소. 내가 노래를 잘 불러서 뭐할 건데? 그냥 저리 가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는 전혀 멘토의 카리스마가 먹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카리스마가 먹힌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상대방이 가지고 있을 때, 즉 "내가 부러워하는 것을 저쪽이 갖고 있으니까, 저 사람의 것을 갖기 위해서 내가 저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이면, 언젠가 저 사람의 것이 내 것으로 되겠다" 라고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부러운 동시에, "내게 없는 것을 어떻게 저 사람은 가지고 있지? 아마도 하나님의 특수한 능력과 어떤 끼가 있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그 사람 앞에서는 기가 죽고 무서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하려거든 여기에 나오지도 마세요" 라고 하면, "아이고,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이제, 당신은 합격입니다" 이라고 하면, 너무 좋아서 또 줄줄 울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뭡니까? 노래방에 가서 한 곡 뽑으면 확 풀리는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조수미에게 가서 물어보라는 겁니다. 그게 정말 노래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거기에 매여서, 인생을 거기에 걸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운다는 겁니다. 물론 떨어지면 욕을 하고 삐치고 말입니다. 그러니 분명히 그 사람은 뭔가 자기가 노리는 바가 있는데, 그것이 성취가 안 되니 화풀이를 해대고 말입니다. ◈ 예수님을 멘토로 ??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들이 그 얼마나 착하고 의로운지,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멘토로 삼았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자들을 제자로 삼은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로 삼은 사람들은 전부가 어떤 자들입니까? 고기를 잡는 사람들, 죄인인 사람들, 나중에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를 팔아먹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멘토로 등장한 것이지, 이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세리와 창기는 용서하시고,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하늘나라에 못 가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근원적인 것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즉 "주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건의사항마저도 물리쳐 버린다는 겁니다. ◈ 그 성질머리를 버려 !!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데, 즉 "니는 아직도 니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라. 모르기 때문에 '이것은 부족한데, 저것은 괜찮습니다' 라는 식으로, 스스로 부족한 것과 괜찮은 것을 골라내겠다고 하는 그 성질머리를 버려야 돼"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처럼, 몽땅 다 합쳐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그렇게 말하라는 겁니다. "십일조를 했습니다, 금식을 했습니다, 구제를 했습니다, 봉사를 했습니다" 라는, 그 따위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말입니다. 죄인들이 성전에 나와서 그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니가 의인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주님께서 멘토로서, 즉 스승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제자들에게 특별히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즉 "열심히 해서 노래를 잘해" 라고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가만 있거라. 내가 다 해줄게" 라는 것이란 말입니다. ◈ 사랑하는 사람 품에서 !! 시편 몇 편인지 당장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제가 약 10년 전에 은혜를 받은 대목이 있는데 말입니다. 즉 "너무 높은 곳에다 마음 두지 말고, 진짜 성도라면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서 잠자고 있는 것처럼, 듬직한 어미의 품에 안겨서 잠잘 수 있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성도다" 라고 말입니다. ----------------------------- 요즘 유행하는 '죽기 전에 해야될 20가지' 라는 것 중에서, 제일 마지막이 뭐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 품에서 죽는 것인데, 왜 김선아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몰라요? (ㅋㅋ) 아무튼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죽으려고 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본인이 선택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와야 되는데, 하지만 그 찾아오는 방법이 너무나도 과격하다는 겁니다. 꼭 김을수 집사님 같은데 말입니다(ㅋㅋ). 사람 이름이 나와도 괜찮은데, 원래 디모데전서에도 보면 사람 이름이 여럿이 나오는데, 알렉산더도 있고 말입니다. 아무튼 그런 이름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 여러분, 교회에 와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사도바울은 마치 '여호와 증인'과 같다고 했는데, 즉 남의 영업장소에 가서 "여러분, 율법은 여러분의 가치를 높이는 용도가 전혀 아니고, 율법은 왜 예수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가는 곳마다 하니, 율법에 매여 있던 그들이 그냥 둘 리가 만무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인데, 즉 "말씀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의 구원욕구를 들어주는 것이 말씀이 아니고, 그 말씀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구원받을 자격도 전혀 안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진 겁니다. 그러니 그냥 집으로 가서 계시면, 구원이 될지 안 될지는 성령께서 찾아가셔서 다 알아서 하십니다. 그러니 백날 교회에 와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들이 격분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격분을 합니까? 즉 "내가 완벽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내 과거를 돌아보면 나쁜 것이 많다. 하지만 전적으로 나쁜 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를 믿는 것, 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잖아"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데, 다른 것은 나쁜 것인 줄 알지만, 예수를 믿고, 복음을 전하고, 또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감사함으로 헌금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앞에 성령이 붙고 은혜가 붙었으니까, 그건 죄가 아니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성령도 '나'는 건드리지 않아 !! 그러면 이게 어디서 문제가 되었는지를 살펴보겠는데, 의외로 간단한데 말입니다. 제가 한 번 적어보겠는데, 즉 "성령의 은혜를 받고, 교회에 감사헌금을 한 것은 죄가 아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죄가 아니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된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주장을 하는 그 사람의 자리가 어디에 놓여있습니까? 은혜를 받고 감사하는 그 노선 안에 들어와 있습니까? 아니면 바깥에 나가 있습니까? 바깥에 나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렇게 자기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이 와서 건드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헌금을 들고 와서는 "얘야, 내 대신에 교회에 내라" 라고 하면, "감사합니다. 대신에 저의 가치는 건드리지 않지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안 건드리지. 왜냐하면, 너는 착하니까. 그리고 내면서 성령의 은혜로 감동해서 냈다고 해라" 라고 하면, 그러면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 자기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란 말입니다. ◈ 나는 뭘 해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 !! 그렇다면 진짜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면, 성령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알다시피 묵시세계인데, 그러한 묵시세계는 무엇을 앞장세운다고 했습니까? 반드시 무엇을 앞장세우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앞장세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온 땅을 무엇으로 바꾼다고 했습니까? 죽음의 도탄의 세계로 바꿔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망할 백성 중의 한 사람이다" 라고 했는데, 그것을 누가 이야기를 했습니까? 바로 이사야 선지자인데, 그게 이사야서 6장의 내용이란 말입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렇다면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앞장세우게 되면, '내'가 앞으로 전도를 하든, 헌금을 하든, 그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이 무엇이 된다는 겁니까?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죄가 되면, 그러면 '나'는 뭐가 됩니까? "나는 뭘 해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겁니다. 뭘 해도 말입니다. 바로 그 '뭘 해도' 라는 것 중에서 하나가 헌금이라는 말입니다. ◈ 헌금의 경우에 !!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은 관찰자의 노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갑니까? 여기 이 안으로 들어와 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안에 들어와 버리면, 돈을 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내는 겁니까? 즉 하나님께 "돈 받으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저를 받아주옵소서" 라고 해서, 본인이 헌금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어떤 헌금인가요? 착한 헌금인가요? 그게 아니고, "이 죄인을 받으옵소서. 지금 헌금을 내는 이 순간에 벼락이 쳐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저는 스데반 집사님처럼 주 안에서 죽으니까,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습을 보고 제3자가 뭐라고 합니까? "야, 저 양반은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헌금한다" 라고 하는데, 제3자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정작 본인이 그런 이야기를 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본인이 어떻게 제3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지금 어렵다는 얼굴들을 하고 있는데, 이 논리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어렵습니까? 본인은 돈을 바친 것이 아니고, "이 죄인을 받아주옵소서" 라는 식으로 자기 몸을 드렸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서 "야, 저 양반이 저렇게 헌금하네. 참 은혜롭다" 라고, 그렇게 제3자가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제3자가 무엇을 봅니까? 그 사람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 누구를 칭찬합니까? 그 사람을 저렇게 죄인으로 몰락시킨 그 누구를 칭찬하고 있는데,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성령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묵시적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헌금을 하는데, 20원을 하네. 동전 두 렙돈을 헌금했네" 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감격한다는 말입니다. (??) 무슨 말인고 하니까, 목사가 설교시간에 "여러분, 어느 혼자 사시는 분이 20원을 헌금했는데, 그분은 자기의 전 재산을 모두 다 바쳤습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교인들이 듣고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부자가 헌금을 많이 한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저게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헌금이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뭐라고 합니까? "저 어때요? 헌금을 괜찮게 했지요? 제가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했어요. 이번에 헌금이 잘 나왔지요?" 라고, 그런 소리를 본인이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본인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보호해줍니까? 죄인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보호를 받는 본인이 짜증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죄를 느끼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주의 복음을 잘못 전했나? 내가 헌금을 잘못했나? 내가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했나? 나는 헌금을 한 것이 아니고 내 죄를 고백했을 뿐인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헌금을 했다고 하니까, 내가 헌금을 잘못했는가? 아니면 저 사람들이 문제일까?" 라고, 오히려 의아해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헌금하세요" 라고, 즉 목사가 그런 설교를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경우에 !! 이 문제를 조금 더 몰고 나가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굴라(남)와 브리스길라(여)의 경우인데, 이들 부부는 이탈리아에서 천막장사를 하던 사람인데,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은 다 나가라고 영을 내리니까, 그만 쫓겨나서 고린도로 와서 사도바울을 만나서 천막을 만드는 일에 동업자로 참여했다는 말입니다. (행 18: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그리고 나서 수리아로 갔다가 갔다가, 나중에는 에베소에 가서는 사도바울이 "당신은 내가 없을 때 책임을 지고 이곳을 맡아라" 라고 해서, 사도바울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에베소에서 남아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라는 겁니다. 제가 그 당시에 그들과 같이 살지 않아서 조금 헛갈리는데(ㅋㅋ), 아무튼 그들은 사도바울이 어려울 때에 많이 도와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바울을 도와줬다 ?? 그러면 성경을 보겠는데, "아굴라와 부리스길라는 내가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줬다" 라는 부분이 성경에 나오는 본문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뭐가 됩니까? "감사헌금을 하세요" 라는 말과 똑같은 것인데, 즉 "내가 어려울 때 헌금으로 도와줬습니다" 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복음에 필요할 때 감사헌금을 하세요"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성경에 나온다는 말입니다. (롬 16: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렇게 성경에 있기 때문에, 어떤 목사가 "여러분, 복음에 필요할 때는 헌금을 하세요" 라고 하면, 그 설교가 과연 맞는 성경해석이냐는 말입니다. 그게 성경에 있다고 하면,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까? "성경에 '행하라' 라는 것이 있어서, 내가 '행하라' 라고 했는데, 그것이 도대체 뭐가 잘못인가?" 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사가 설교시간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사도바울을 도와줬기 때문에, 여러분도 나를 도와줘야 됩니다" 라고, 그렇게 성경에 나오는 글자 그대로 설교한 것이 과연 맞느냐는 겁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맞습니까? 틀립니까?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물어보겠는데, 제가 아까 원칙이 뭐라고 했습니까? 성경말씀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을 모두 다 보라고 했는데, 먼저 하나는 육으로, 즉 문자로 보는 해석이 있고, 다른 하나는 뭡니까? 묵시로 보는 해석이 있다는 겁니다. 묵시로 보면 어떤 행동을 해도 무엇이 됩니까? 모든 것이 다 죄가 된다고 분명히 언급했는데, 물론 30분도 지나지 않은 지금 다 잊었겠지만 말입니다(ㅋㅋ). ◈ 성경대로 하는 설교가 죄인가? 그러면 성경대로 하는 설교가 죄입니까? 죄가 아닙니까? 그게 죄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고, 그 십자가는 드러난 역사적 해석과 숨어있는 묵시적 해석, 그 양쪽을 다 보여준 사건이 사건인데, 그 십자가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어떻게 된다구요? 되풀이되는, 그것이 부활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목사가 "나는 성경에서 '하라' 라고 해서, 그대로 했다. 그런데 그것이 뭐가 잘못인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사실 성경문자를 그냥 읽어줄 것 같으면 설교라는 것이 필요가 없는데, 아나운서와 같이 발음이 좋은 사람을 골라서 성경을 읽게 하고, 그냥 내려가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하는데도 있는데, 즉 "성경을 읽고 아무소리 하지 말고 그냥 내려가요" 라고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성령에게 맡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게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성당에 갈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집에서 '베들레헴' 이라는 성경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집에서 보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공짜로 주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성당에 무엇 때문에 갑니까? 떡은 왜 주는 겁니까? 왜 가운을 입고 앞에서 설치고 난리를 칩니까?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오늘날 성령이 임한 사람은 하나의 사도가 되고, 또한 부활의 증인으로서, 십자가 증인으로서 활동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이 바로 마지막 죽음의 땅이니 말입니다. 그 땅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반드시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 설교는, 반드시 십자가의 뜻을 집어넣어서 !! 그렇다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바울을 도와줬다" 라는 본문을 설교할 때는, 반드시 무엇을 집어넣어야 됩니까? 십자가의 뜻을 집어넣어서 설교시간에 풀어내 줘야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설교하는 본인이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 이 본문을 평소에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말씀에 "일하는 자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라는 대목이 있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주라는 겁니다. 즉 일을 하는데 망을 씌워서 일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곧 망의 값 내라는 말입니다.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그것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육적인 해석에서, 곧 살기 위해서 사람들이 이것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는지를 먼저 이야기해주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이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해석할 때 어떤 요소가 가미되면서 이 본문이 해석되는지, 이러한 두 가지 다를 설명을 해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녹취자 - 그렇게 두 가지를 다 설명해주어도 죄가 아닙니까?) ◈ 분류 - 역사에 속한 사람, 묵시에 속한 사람 !! 그렇게 설명을 해줘야만, 그 말씀으로 역사에 속한 사람과 묵시에 속한 사람이 분류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냥 성경 읽기는 성경 외우기에 불과한데, 그런 성경 외우기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선교단체에서 많이 하고 있는데, 하지만 외운다는 것은 하나의 습관이고 그냥 반복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건 마치 야구선수가 장마가 져서 경기가 자꾸 취소가 되다보면 타격감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타격감은 계속 게임을 하면 살아난다는 겁니다. 특히 롯데의 이대호 선수를 보면, 장마기간에 슬럼프에 빠져서 홈런이 21개에서 멈춰 있다가, 어제 두 개 몰아 때려서 23개가 되었다는 겁니다. 몰아치는 게 이대호 선수의 주특기이기도 한데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 몸에 습관을 들인다는 것은 자기 몸의 가치를 높인다는 것인데, 즉 "나는 이만한 재주가 있어" 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 재주가 하늘나라에 합당한 것입니까? 성경구절을 많이 외우는 그 재주가 하늘나라에 과연 합당한 재주냐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성경구절을 외우고 뭘 안다는 것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성경구절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이용하는지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계속 살아있는 말씀으로, 즉 묵시적 말씀으로 다가와야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을 외워서 선교에 써먹겠다는 발상자체는, 그것도 어디에 포함된다는 겁니까? 모든 죄악 된 행함에 포함되는데, 바로 그 이유를 자기가 외우는 성경말씀 속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아멘!) ◈ 묵시적, 생명의 실 !! 그래야 자기부인이 되는데, 즉 설교하는 것도 죄가 되고, 전도하는 것도 죄가 되고, 이 모든 것들이 죄가 된다는 겁니다. 집안에 그냥 있어도 죄가 되고, 또한 바깥에 나가도 죄가 되고, 그렇게 전부가 다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죄' 라고 하지 말고, 그것이 죄가 되는 이유를 아는 그 바늘귀에 무엇이 있는고 하면, 우리를 구원해내는 실, 즉 묵시적 생명의 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교회에 안 나가도 구원을 받는다면서?"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막 산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이 됩니까? 그것을 십자가 마을에 크게 쓰고 싶었는데, 즉 "막 살아도 구원이 안 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막 살아도 구원이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막 사는 것이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끝에 달린 실이란 말입니다. 그 실이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실은 잘라버리고 달랑 바늘만 손에 쥐고서 "나는 막 살지 않으니까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반드시 끈이 있어야만 되는데, 즉 하늘나라에 달린 끈이 말입니다. 그 끈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수밖에 없는, 피를 흘리게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강도와 같은 종류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땅에서의 우리가 믿는 아이디어는 하나밖에 없는데, 즉 "어떻게 하면 나를 살릴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죽어서도 좋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런 아이디어만을 잔뜩 쏟아내는 것이 이 땅에서의 모든 종교생활이란 말입니다. ◈ 모든 것은 오른편에 있는 주님 소관 !! 그런데 그 자체가 십자가에서 막혀버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다 막혀있기 때문에, 살고 안 살고 하는 것은 누구의 소관이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누구의 소관입니까? 주님의 소관인데, 바로 그것 때문에 오른편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른편에 있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오른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자리인데, 그런데 정작 우리는 원수 속에 있으면서 우리의 원수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른편에 계신 분이, 그게 원수인 줄로 알고, "너는 죄악으로 달려가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는다" 라고 이야기를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피로 죄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하면, 즉 입으로 시인하면 무엇을 얻는다는 겁니까? "니가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즉 로마서 10장 10절 말씀인데, 그렇게 선교단체에서 수백 번 외웠던 그 말씀, 학생 시절에 수련회에 가서 짜장밥을 하나 먹기 이전에 외웠던 바로 그 말씀이란 말입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런데 목사가 "성경말씀에 '하라' 라고 해서 나도 그대로 '하라' 라고 했는데, 그것이 뭐가 나쁘냐?" 라고 하면, 그것은 실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평소의 그 버릇, 즉 "나는 뭐해서 밥을 먹고 살지?" 라고 하는 그 버릇이 그만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는 말입니다. ◈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시나리오 !! 이미 사도바울이 1차, 2차, 3차 전도를 통해서, 아무튼 여기에 터키가 있는데, 그리고 여기 드로아에서 무엇을 받았습니까? 환상을 받았다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 대목에서는 저도 하나님께서 너무 심하다 싶었는데 말입니다. 사도바울에게 환상까지 줄 것 같으면 그가 좀 아프지 않게 하고, 선교하는데도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해주면 되는데, 그런데 환상은 줘놓고 시키는 데로 가서 보면 고생이 기다리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생을 직사하게 하는데, 사실 그것은 아예 처음부터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뒤 아나니아를 통해서 "이 사람은 복음을 위해서 숱한 고난을 받아야만 돼" 라는 것, 그것이 주님의 시나리오였다는 말입니다. 왜 시나리오에 보면,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가지 마세요" 라고, 그렇게 되어있듯이, "이 사람은 많은 환난을 받아야 된다" 라는 시나리오가 창세 전에 이미 작정이 다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 시나리오에 맞춰서 사도바울을 태어나게 했고, 그 시대에 살도록 하신 겁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이해하게 되는데, 이해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루빨리 이 땅에서의 생을 끝장내는 것이란 말입니다. 즉 "시나리오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모르겠는데, 빨리 끝장내고 나도 좀 쉬자.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다. 하지만 너희들 같이 남아있는 자들 때문에 주께서 나에게 일을 시킨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1차, 2차, 3차로 전도하고, 그리고 난 뒤에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거기서 참 잘 했다는 말입니다. 로마에서 인기가 좋았는데(?), 5년 동안 투옥이 되고 말입니다. 그야말로 감옥이 자기 안방이었는데, 그렇게 가운데 '옥중서신' 이라고 해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에베소서를 쓰고, 그 다음에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쓰고, 그 다음 죽기 직전에 디모데전후서를 쓰고, 그리고 나서 목이 잘려 죽었다는 말입니다. ◈ 성도는, 이동하는 쓰레기 인생 !! 그러므로 이 땅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인데, 평소에 결혼을 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후손을 이어줄 애새끼라도 하나 있습니까? 자기 교회가 하나 있습니까? 그렇다고 천막기술을 배워서 '고린도 천막협동조합회'의 조합장을 지내본 적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쓰레기도 그런 쓰레기 인생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것을 자인하는데, "나는 어디를 가도 쓰레기로서 이동하고 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여러분은 흉내를 내면 안 되는데, 즉 "애들은 가라" 라는 겁니다. 절대로 따라서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즉 젊었을 때 선교를 한답시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큰 일이 나는데, 그건 괜한 헛바람이라는 겁니다. 황수관은 돈이 되는 신바람이지만, 이것은 헛바람이라는 말입니다(ㅋㅋ). 그러니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그런 일에 휘말려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목사님, 나의 시나리오는 뭡니까?" 라고 하시면, 즐겁게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본인의 시나리오는 전도서에 다 나오는데, 즉 "더 착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고, 책을 많이 쓰는 것도 피곤하고, 책을 많이 읽어도 소용없고, 그러니 포도주나 마시면서 마누라와 함께 실컷 즐겨라" 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딩동댕!' 이라는 말입니다. (전 9: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왜냐하면, "이빨이 날아가기 전에, 귀가 안 들리기 전에, 눈에 녹내장 와서 희미하게 되기 전에 실컷 즐겨라. 왜? 어차피 인생은 헛것이니" 라는 겁니다. 아마 실감이 나는 분들이 있지 싶은데, 그야말로 인생은 헛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래서 "헛되고 헛되니, 니 원대로 살아라"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역시 결론은, '막 사세요' !! 그것을 네 글자로 표현하면 "막 사세요" 라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또 나오는데(ㅋㅋ), 그러니 여러분, 즐겁게 막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죄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또 이 대목만 싹둑 잘라서 시비를 거는 인간들이 분명히 있는데, 십 분을 쉬기 이전에 했던 이 마지막 대목, 즉 "막 사세요" 라고 한 것만 오려내어서 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주님의 말씀 자체가 언제나 우리의 행함에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 이유는 바로 십자가 때문인데, 즉 십자가로 이미 규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슨 짓을 하든지, 테레사 수녀가 아니라 별별 것이 되어도, 이미 그 자체로 죄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의 피로 받는다는 겁니다. 이제 점심을 먹고 합시다.
죽을 준비하세요 !!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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