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디도.빌레몬

딤전후제7강110801

아빠와 함께 2013. 5. 8. 08:18

 

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딤전후(교회를 잊어라!) 제7강(둘날저녁1)
 
                                                           2011,08,01  강의 이근호, 녹취 서경수

◈ 사도바울은 AD 66년경에 !!

이제 시작을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의 그 기록연대가 조금씩 다른데, 즉 디모데전서는 AD 63년, 그리고 데모데후서는 AD 66년으로 보통 보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AD 61년에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서 2년 동안을 갇혀 있다가 잠시 풀려난다는 겁니다. 

여기서 잠시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한 곳들의 지도를 그려보면, 이렇게 긴 장화처럼 생긴 이달리아(이탈리아)가 있고, 그 옆에는 아드리아 해가 있고, 그리고 그 옆에 마게도냐와 아가야가 있고, 그리고 여기에 지중해가 있으면, 여기에 키프러스 섬이 있고, 또 이쪽에는 크레타 섬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도바울은 잠시 풀려나서 디모데와 디도를 데리고 빌립보를 방문하는데, 그렇게 방문하면서 크레타 섬에 들러서는 복음을 전하면서, 디도를 그 섬에 목회자로 남겨두고, 그리고 빌립보를 거쳐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곳에는 디모데를 남겨두고, 그리고 사도바울 자신은 그만 마게도냐로 떠나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잠시 목회자가 되고 말입니다.

그리고 난 뒤 65년 7월 19일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로마가 그 모든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다 뒤집어씌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때 고린도와 밀레토스 지역을 여행하다가 체포되어 다시 투옥되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를 디모데에게 편지로 보내고, 66년쯤에 참수를 당하면서 그의 사역은 끝이 난다는 말입니다. (아, 감동!)

◈ 종말론적 관점에서 !!

그래서 디모데후서의 경우에, 이것을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고 하면,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종말론적 관점이란, 개인의 마지막도 종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시대 자체가 종말의 분위기로 흘러가는데, 그렇게 되면 종말에만 일어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어떤 현상인고 하면, 쉽게 말해서 '개판' 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모든 사람들이 시대에 대해서 신뢰성을 잃었기 때문에, 즉 "내 팔은 내가 흔든다" 라는 시대라는 겁니다. 그런 시대에서 과연 하나님에게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생활해야 되는지, 거기에 대한 것이 디모데전후서에 가득 차 있는데, 특히 디모데후서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생활을 종말론적으로 바라볼 때, 그 생활이 어떻게 나타나는고 하면, 제가 지난 시간에 응축된 주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말입니다. 그 응축된 주체에 어떤 법이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주체는 그만 도피를 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왜 도피를 하는고 하면, 자기에게는 자유가 있는데, 그 자유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유라는 겁니다. 그러한 가능성이 있는 자유가 발휘되기 시작하면, 주체는 그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면서, "역시 나는 가치가 있어" 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가능한 법이 계속해서 오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그 소박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그 엄청난 차원의 예수님의 말씀을 피해서 도망을 간다는 겁니다. 즉 전혀 성경말씀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피해서 숨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데, 즉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살아가는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제발이지 나에게 간섭일랑은 좀 하지 말아다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에 나타나는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

그게 디모데후서 3장에도 나오는데, 즉 "사람들이 자기만을 사랑한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곧 종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즉 "소박한 나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마라. 이 정도라도 누리기 위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애를 섰는데, 이것마저도 죄와 의를 따진다면, 나는 전혀 내 마음에 안식을 얻을 여지가 없게 된다. 그러면 나도 가만히 있지를 않고 반발하겠다" 라고,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딤후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인간의 행복은 그렇게 자기 자유를 발휘할 때인데, 왜냐하면 그때 자기 자유의 가치가 고스란히 남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자기가 자그마한 선행을 했는데, 그것마저도 죄로 규정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도대체 어디로 피하란 말인가?" 라고 하는데,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자는 말하기를, "피하기는 왜 피해? 주님 앞에 당연히 나와야지"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런 말이 듣기가 싫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없는 곳에서, 자기의 착함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기념물이 되는, 그런 소박함이 묻어있는 자기만의 공간을 꾸리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한데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런 자기만의 소박한 자유 속에는 무엇이 포함이 됩니까? 고난을 받고 고생하는 것도 모두 다 들어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나의 업적이나 훈장처럼 갖기를 원하기에 말입니다.

◈ '나' 홀로의 세계에서 !!

흔히들 "험난한 인생살이가 고추보다 더 맵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런 소리를 하면서 고추보다 더 매운 인생살이를 견디는 놀라운 자신의 의지와 결단에 대해서, 그런 가치를 어디서 찾습니까? 십자가 앞입니까? 전혀 아닌데, '나' 홀로의 세계에서 찾는다는 겁니다. 그런 가치는 극도의 환희와 더불어서 주어지는데, 그게 소박한 자기만의 행복이니, 그 행복을 제발 탓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원룸이나 투룸이 인기가 있는데, 그런 자기만의 공간에서 타인의 간섭을 배재한 채 패쇄적인 시간을 갖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결혼을 했어도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성도가 본 받을 많은 풍조이냐는 말입니다. 전혀 아닌데, 그래서 마지막 때는 이러한 풍조에서, 즉 "이 악한 세대에서 너희를 건진다" 라고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나와있다는 겁니다.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주님께서 그렇게 건진다고 하면, 그 건짐을 받는 응축된 주체가, 즉 자기만의 소박한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주체인 '나'를, 주님께서 십자가로 구원했다는 것을 빌미로 율법이란 엄청난 말씀을 쏟아 부으면 도대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예수를 믿는 재미도 전혀 못 느끼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세상 사람과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그만 구원을 받게 되니, 감당이 전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만날 교회에서 살아갈 수도 없고 말입니다.

◈ 인간들은 '개인주의'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우리가 이런 종말론적 관점을 공부하기 이전에, 먼저 이런 종말론적 관점, 즉 묵시적인 것이 찾아오지 않은 인간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개인주의'와 같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노력했는지, 그것부터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러한 것을 알아야만 교회에서 소위 윤리와 도덕이라고, 그렇게 성경말씀을 근거로 대면서 이야기한 것이, 사실은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성도의 삶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이고 도덕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런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 공자, 장자, 묵자 !!

동양철학에 보면 공자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즉 "니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너도 하기 싫어하면서 어떻게 그것을 남에게 하라고 시킬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인(仁)'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장자가 반박하고 나선다는 겁니다.

장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렇게 '니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라고 하면, 결국 '남을 평가할 때도 너와 똑같아야 만족한다' 라는 독단적인 너의 평가가 개입된다. 즉 사람들은 다들 개성이 있는데,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적을 만들면 되는가? 내가 나를 보는 그 기준을 건방지게 남에게 그대로 고스란히 적용하는 것이, 즉 남도 나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게 어떻게 '인'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오히려 폭력이다" 라는, 그렇게 주장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경우에는 "그건 공자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주면 된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양보의 미덕이고, 또한 희생의 자세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주는 것이 아닌, 남이 원하는 것을 자기가 해준다고 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는 개고기 좋아하지만 상대방은 싫어하고 짜장면을 좋아한다면, 그런데도 상대방을 보고 "이것이 맛있으니 많이 먹어라" 라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자의 논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니가 먹고 싶은 것을 나에게 먹으라고 강요하지 마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장자의 논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이 개고기를 아무리 좋아해도 상대방이 싫어한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즉 짜장면을 사주는 것이 진정한 이웃사랑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마치 십자가의 정신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 정신이 아닌, 동양철학이란 말입니다.

◈ 하지만, '종말론적 삶'이 아니기에 !!

그러니 이런 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인간들에게서도 나올 수 있는, 그런 종류 중의 하나인데,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만약에 교회에서 성령의 삶이라고 말해버린다면, 그것은 종말론적 삶에서, 즉 뭔가가 빠져 나와야 된다고 하는 근거가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야, 저렇게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제공해주면, 우리는 이 땅에서 구원을 받을 필요도 없이, 그냥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된다" 라고, 그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장자의 주장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한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그 이름도 재미가 있는데, '묵자' 라는 겁니다. 이 양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즉 "남들이 원하는 것을 해준다면,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즉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원하는데, 그렇게 남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는 풍부한 여건이 사람들에게는 없다. 그러니 그것은 국가가, 즉 군주가 담당해야 된다" 라고 주장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묵자가 주장하니까, 또 어떤 사람이 반박하기를, "개인이 남이 필요한 것을 해주지 말고, 복지정책을 펼쳐서 국가에서 정책으로 도와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냥 자기가 가진 것으로 나눠주면, 물론 폼은 나고 기분은 좋겠지만, 그러나 실제로 상대방에게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에서 선교를 한답시고 노인들이 주일예배에 참석하면 봉투에 매주 2만원씩을 넣어주는 것과, 그리고 동사무소에서 노인들에게 최저 생계비로 매달에 30만원을 주는 것 중에서, 이러한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낫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동사무소에서 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겁니다. 국가에서 하는 게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돈을 쓰지 말고, 그 돈을 세무서를 통해서 세금을 내면, 그 세금을 통해서 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게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말입니다. 즉 삼각형의 두 변은 한 변보다는 길다는 겁니다. 그렇게 긴 것을 굳이 자르려고 하지 말고, 국가를 통해서 바로 주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 아니, 귀신이 벌을 내린다고?

어떤 사람은 묵자의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을 했는데, 즉 "묵자야, 만약에 군주가 너무 욕심을 부려서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하냐?"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물으니까, 묵자는 "그때는 귀신이 벌을 내린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말이 됩니까? 귀신이 벌을 내리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래서 결국 동양철학은 신비주의에 빠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귀신이 벌을 내라는 것을 가지고 '신인감응설(신神人感應說)' 이라고 하는데, 즉 "군주가 잘하면 곡식이 잘 익고, 군주가 악하면 신이 벌을 내린다" 라는 겁니다. 이런 신인감응설이 동양에서 존재했다는 말은, 인간들이 신을 제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마지막 최후에 응어리진 복수심과 한풀이는 누구의 몫이라는 말입니까?

그러니 인간들이 "신이시여, 조물주여, 자연이여!" 라고, 그렇게 어떤 명칭을 붙이더라도, 결국 "제발 저의 억울한 것을 좀 풀어주소서" 라는 쪽으로, 미지의 신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구약적으로 말하면, 언약이 없는 이방신이 그 대상이 되겠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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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 중국 한(漢)나라의 동중서(董仲舒)가 제시한 '천인감응설'은 맹자(孟子), 추연(鄒衍) 이래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학설을 계승하고 당시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합하여 논의된 철학상의 중요한 문제로서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문제를 다룬 학설이다. 그는 천기의 변화가 인간의 신체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여 "하늘이 음우(陰雨)를 내리려하면 인간의 병고가 그것을 위해 먼저 움직인다. 이것은 음(陰)이 상응하여서 일어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천(天)과 인(人)이 서로 감응하는 것이 '천인감응설'이며, 그 기초는 천인(天人)이 동류(同類)라는 것에 있다. 즉 "류(類)로서 합하면 천과 인은 하나다" 라고 말하였다. - 다음 블로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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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가 제대로 통치하도록 백성들이 간섭해야 !!

그렇게 귀신에게 빈다고 하니까, 자기들이 생각해도 너무 한심하다고 여겼는지 몰라도, 그래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군주에게 맡기기는 맡기되, 군주가 제대로 통치하도록 백성들이 간섭하면 된다" 라는 주장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분위기가 점점 민주주의 쪽으로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자연 발생적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군주를 견제할 수 있고, 또 간섭할 수 있다면, 군주는 백성들 편에 서게 되면 군주의 결단성을 백성에게 양보한 셈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생깁니까? 그렇게 해서 나라꼴이 되겠느냐고 하는 문제가 또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점점 더 조직의 문제로 가는데, 그러면 교회의 경우에 어떻게 됩니까? 교회가 커지면 "목사가 교인들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라는 조직의 문제가 당연히 생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동양철학의 고민과도 연결이 된다는 겁니다. 

◈ 손자 - '돌멩이를 항상 위태로운 곳에 두어야한다' !!

그때 손자가 다음과 같이 주장했는데, 즉 군주(군자)가 백성을 다룰 때는, 즉 지휘관이 부하를 다룰 때는 어떻게 하는고 하면, "돌멩이는 항상 위태로운 곳에 두어야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위기가 없으면 성심 성의껏 일하지 않는데, 그러니 언제나 위기를 조성해서 한 시스템으로 몰아붙여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정신을 번쩍 차리고 일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손자는 "군인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적보다 자기 지휘관을 더 무서워해야만 용감하게 싸울 수 있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군인들이 지휘관을 무서워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실전 때보다도 연습을 할 때 더욱 혹독하게 훈련을 시켜야 된다고, 아들이 아닌 손자가 그런 주장을 했다는 말입니다(ㅋㅋ).

◈ 손자가 들려주는 '임금과 궁녀' 이야기 !!

그러면서 손자가 좋은 예로서 '임금과 궁녀'의 이야기를 했는데, 즉 오나라의 임금인 합려왕이 지휘관인 손무에게 108명의 궁녀들에게 군사훈련을 부탁했는데, 그런데 궁녀들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으니, 지휘관인 손무가 그만 궁녀들의 우두머리 두 명을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임금이 엄청 사랑하던 궁녀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왜 궁녀들이 제대로 말을 안 들었는고 하니, 궁녀는 평소에 임금의 지시만 따르는데, 그리고 궁녀가 군사훈련을 한다는 것이 조금은 우습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휘관이 그만 자기들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버리니까, 궁녀들이 군사들 못지 않게 군사훈련을 제대로 잘 받았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은 임금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지휘관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궁녀들이 지휘관의 말을 듣지 않자 과감하게 목을 침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새로운 군주가 목을 칠 때는, 과거에 매였던 군주에 대한 미련과 모든 습관들은 일소에 다 사라지게 되고, 백성들은 새로운 체제 아래에서의 군주의 말을 듣고 잘 움직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카리스마가 넘치지를 않습니까? 그르면 이런 넘치는 카리스마를 교회에서 활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위대한 목사님이 되는데, 즉 날마다 교인들을 위기 속에 몰아넣고, 그리고 순종하지 않으면 한 칼에 치리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 시스템에 몰아넣을 때 능률이 오른다고 하는 아이디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육에 속한, 즉 성령을 받지 못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면면들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국가의 행정과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이고 말입니다.

◈ 그러면 구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구원은 무엇입니까? 어디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렇게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먼저 이런 악한 세대에서 통하는 윤리와 도덕에서도 역시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 넘치는 카리스마에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교회에 심어서, 멋있는 이상적인 단체를 만들 생각을 하지 말고, 먼저 세상 자체에서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상 자체에서 통용되는 윤리와 도덕, 그리고 세상의 질서, 즉 종말론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의 모든 원리와 정신으로부터도 우리는 해방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멘!)

◈ 그런 예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왔으면 !!

그러면 이런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모델이 과연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인데, 즉 성령께서 예수님을 다루어서 그 당시의 질서와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났는데, 물론 그것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마귀의 대장이라고 욕을 듣긴 했지만,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겁니다.

그런 똑같은 예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왔다면, 우리는 무엇을 구별해야 되고 하니, 이 세상을 유지하려는 윤리와 도덕과, 또한 이 세상을 벗어나려는 윤리와 도덕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그것을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차이점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당연히, 객소리가 많을 수밖에 없는데 !!

제가 이런 객소리와 같은 느낌이 드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디모데전서를 읽다가 보면, 바로 그런 식으로 된 주석과 해석이 대부분인데, 아니 100%인데, 즉 종말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교회를 잘 꾸려보자" 라는 식으로, 즉 "이런 식으로 하시면 교회가 참 잘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교회에 카리스마가 있어서, 교회질서가 안정이 됩니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해석을 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동원된 윤리와 도덕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혀 예수님이 하신 방법이 아니라, 이미 동양철학에 다 있는, 즉 인간의 내면에서 나올 수 있는 이성적인 요소들이 여기에 모두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이 말입니다.

◈ 노자 -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

말이 나온 김에 동양철학을 조금만 더 살펴보면, 노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텅 빈곳이 오히려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온다" 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바퀴가 있다면, 바퀴 안이 텅 비어있기에 바퀴가 돌아가고, 또한 잔은 그 안이 비어있을 때에 물을 담을 여지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잔으로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없는 것으로 인하여 그 있는 것이 없는 것을 뒷받침을 함으로서, 그 있는 것은 존재한다" 라는 겁니다. 말이 더 어렵습니까? 아무튼 진리는 보이지 않지만 그 진리를 담을 수 있는 경계는, 즉 존재하는 우리가 없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것이 바로 이 세상과 자연의 조화를 맞춰 나가는 참된 삶이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이런 노장사상이 굉장히 멋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김용옥 교수가 여기에 '뿅' 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장자는 "놀고 있네. 없는 게 뭐가 어떻다고?" 라고 했는데, 즉 "뭔가 현재 없는 것이 있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하는 그것이 곧 도(道)가 된다" 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눈밭에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 눈 위를 걸으면, 그것이 눈밭에 나는 최초의 누구의 길이 되는고 하니, '나'의 길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서 노자에서 말한 '도(道)'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라는 것인데, 즉 "그것이 길이라고 해버리면 더 이상 길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해석을 하지 말라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요즘 광주에서 유행인데 말입니다. 제가 광주의 대로변에 보니, 그렇게 커다랗게 써서 붙어놓았다는 겁니다. 

◈ 장자 - '물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그러니 장자의 경우에는, 물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면, 그것이 곧 자기가 개척하는 자기만의 인생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도 역시 멋있지를 않습니까? 듣는 것마다 다 멋있는데(ㅋㅋ), 즉 "왜 자꾸만 무엇을 의지하느냐? 왜 연약하게 믿고자 하느냐? 스스로 가라. 그러면 간만큼 너의 길이 되고, 그것이 너의 인생이 될 것이다"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에게 의탁하지 마라. 이 세상은 도(道)도 없고, 법도 없고, 진리도 없다. 단지 니가 하는 그것이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라는 것인데, 이런 이론을 들으면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는데, 꼭 예수를 믿어서 진리를 알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런 장자의 이론이 성경말씀보다도 더 가슴에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면서도 이런 동양철학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라고 십자가 피를 주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런 동양철학과 같은 것들이 나온다고 하면, 그것이 묵시적 존재인지, 역사적 존재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언급을 하는 겁니다.

◈ 인간은, 법이 오면 도피하기에 바빠 !!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묵시적 존재로서 이 디모데전와 디모데후서에 나오는, 이런 마지막 때의 풍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성도의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춰나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도피의 방치(?)' 라는 인데, 즉 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도망치기 바쁘다는 겁니다. 지킬 것은 지키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지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망쳐야, 그나마 있는 자기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법을 만나게 되면, 그 법은 너무 거룩하고, 우리 자신은 너무나도 왜소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법 앞에서 기가 죽는데, 즉 살아도 살맛이 안 난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로 인하여, 즉 그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는 소망 때문에 살아가는데, 마치 신데렐라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법을 주어져서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해버리면, "내가 그 헛된 것을 왜 사는데?"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입니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서 !!

그래서 우리는 법을 피하기 바쁜데, 그런데 피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피하면 응축된 주체의 자기 즐거움 밖에 되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사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바로 그런 죄책감에서 오는 불안감으로, 즉 우리 자신은 유한한 것에 대해 자유로운데, 무한한 법이 주어지면 감당할 수 없어서 오는 그 괴리감, 그러니 무엇을 해도 벌을 받을 것 같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책임을 물어서, 즉 "이번에 큰 벌을 받아도 모두가 니 탓이니, 끽 소리도 내지마" 라고 할 것 같은, 그런 뭔가 큰 사건이 터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냐, 이건 아니야. 이건 예수를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니야" 라고 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오늘도 새벽 5시에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면서 약간의 안심을 얻었는데, 하지만 돌아서면 또 어떻게 됩니까?  조금만 일이 제대로 안 풀려도, 역시 뭔가가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뒤에서 누군가가 꼭 때릴 것만 같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아예 모든 것 다 잊고 살고 싶은데, 그러면 디모데전서 1장 20절에 나오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생각이 나서 겁이 나고, 그래서 역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만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는 겁니다.

이런 딜레마에 빠지니까, 신학자들이 기껏 한다는 소리가 무엇인고 하니,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에 있다" 라고, 정작 자기들도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면서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들 밥값은 했다고 하고 말입니다.

◈ 그러니, 법이 아닌 '사랑으로' !!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우리 자아 속에서 이미 사랑이 있는데, 그런 사랑이 나온다는 겁니다. 즉 법으로 오게 되면, 그게 멀리서는 법으로 보이는데, 그런데 사랑이 방출이 되면, 도피가 아닌 방출되면, 그 멀리서 오는 법이 법이 아니고, 이미 '나'에게 주어진 사랑과 같은 동질의 사랑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랑 앞에서는 무엇이 없습니까? 즉 사랑은 이미 무엇을 극복한 상태라는 말입니까? 법의 최종 상태가 사랑인데, 그러니 모든 것이 용납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법은 사랑으로 방출되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저기 뒤에서 오기 이전에, 먼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겁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모든 것을 용납하면서, 모든 것을 긍휼히 여기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냥 마음껏 누리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디모데후서 2장에서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딤후 2: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 계속해서 '사랑으로', '사랑으로' !!

디모데전서 3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렇게 뜸을 들이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서 3, 4, 5, 6장은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겁니다. 즉 여러분 속에 있는 사랑만 방출하면, 여기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이 굉장히 반갑다는 겁니다. 어떻게 반가운고 하면, 여기 나오는 성경말씀의 한 구절 한 구절 뒤에다 추임새를 붙이면 되는데, 즉 '사랑으로' 라고 말입니다. 뭐든지 '사랑으로'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사랑으로' 라는 것이 마중을 나가는데, 그렇게 마중을 나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나는 그만 '쏙' 빠지고, 내 속에 있는 사랑이 나를 대신해서 이 성경말씀에 마중을 나간다" 라는 겁니다. 사랑이 '나'를 대신해서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한다면, 그 사랑이 없으면 애초부터 이야기가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오직 그 사랑을 받은 자들만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그 받은 사랑이 없다고 하면, 전혀 이야기의 대상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뭡니까? 처음 사랑인데, 그러면 첫사랑이 뭡니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긴 것, 바로 그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불쌍히 여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3장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딤전 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 사랑밖에 난 몰라 !!

여기에 '감독'이 나오는데, 이 감독된 사람은 첫사랑을 유지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 감독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보여줄 주님의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결단코 감독, 즉 목사 자신의 고난이나 그 목사직이라는 소유가 거기에 끼여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보여줄 것은 그 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 라는 애틋한 노래가 있는데, 물론 그 노래에서 말하는 사랑은 "나는 받는 사랑 외에는 몰라" 라는 뜻인데, 그런데 성경에서의 사랑은 뭡니까? 방출하는 사랑이란 말입니다. 즉 "주님께서 내게 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셨다는 것, 그 사랑 밖에 난 몰라" 라는 겁니다.

◈ 나는 사랑이 없는데요 ??

그러니까 "나는 목사로서 내 사랑을 끄집어낼 테니까, 너는 집사로서의 니 사랑을 끄집어내라" 라고,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김 집사가 "나는 사랑이 없는데요" 라고 한다면, 그러면 더 이상 이야기가 안 되는 겁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인데, 그러한 사랑이 없다면 전혀 하나로 뭉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사랑을 내놓아라" 라고 하는 말은, 사실은 "목사 너의 사랑을 내놓아라" 라는 말이 아니고, "너로 하여금 너를 죄인이 되게 만드는 그 위대한 사랑을 내놓아라" 라는 겁니다. 우리를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만든 그 위대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사라는 겁니다. 물론 그게 또한 집사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3장의 해석도 끝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등등", 그런 말씀들을 일일이 다 해석해서, "그것을 지켰는가? 안 지켰는가?" 라는 것을 따지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다섯 개는 지키겠는데, 다른 하나를 못 지키면 목사입니까" 아닙니까?" 라는, 그런 문제가 생기고 만다는 겁니다.

◈ 감독과 집사의 경우에 !!

여기 3장 2절에 이하에 보면, 감독은 어떠해야 된다고 합니까? 그게 나열되어 있는데, 즉 "1)책망할 것이 없으며, 2)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3)절제하며, 4)근실하며, 5)아담하며, 6)나그네를 접대하며, 7)가르치기를 잘하며, 8)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9)구타하지 아니하며, 10)관용하며, 11)다투지 아니하며, 12)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12)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 13)새로 입교한 자는 안 되고, 14)외인에게 선한 증거를 얻은 자" 라고, 겨우(?) 14개가 나온다는 겁니다.

(딤전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딤전 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딤전 3: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딤전 3: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딤전 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딤전 3: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딤전 3: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딤전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딤전 3: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그러면 이제 집사를 보겠는데, 집사의 경우에는 어떠해야 하는고 하니, 즉 "1)단정하고, 2)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3)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4)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5)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라고, 그렇게 5개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딤전 3: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딤전 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딤전 3: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 먼저 감독, 즉 목사의 경우에 !!

그러면 14개의 감독보다 5개의 집사가 훨씬 더 쉽습니까?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집사의 5개가 훨씬 더 힘들어 보이는데 말입니다(ㅋㅋ). 그런데 어떤 감독, 즉 목사가 13개를 지키고 1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13개가 무효가 됩니까? 그것은 바로 "14개, 혹은 5개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 라는, 바로 그 문제라는 겁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교인들에게 "목사는 이렇다" 라고 하기 이전에, 먼저 목사 자신부터 박살내고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견딜 수 있는 목사는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14개의 항목 중에 그 어느 것도 하나라도, 항상, 늘, 언제나 지킬 수 없는,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지킬 수 없는, 그런 자격이 전혀 없는 놈입니다" 라고 할 때, 그 목사는 물러가게 되고, '목사됨' 이란 디모데전서 3장의 말씀만 전면에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무엇을 생각합니까? "아하, 주님께서 목사가 되게 하시는구나" 라고 여기는데, 어떻게 말입니까? 그 목사가 날마다 말씀을 보고 "나는 목사 값도 전혀 못합니다" 라고, 주님께서 그렇게 활용하는 그 모습이 진정으로 목사답다는 겁니다.

말을 하고 보니 그야말로 강물이 굽이굽이 흘러가듯이 그렇게 논리의 굽이가 많은데, 그래서 그 어느 누구라도 "저는 부족합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말입니다. 흔히 부흥사들이 써먹는 그런 구라 멘트가 아닌, 정말로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나그네를 잘 대접합니까? 그러면 온 동네 거지들이 다 모이지 싶은데, 그러니 '나그네 대접'을 지키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 말을 안 들으면 구타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구타한 것은 사랑인가? 아닌가?" 라는 문제가 또 다시 생기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새로운 항목을 추가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즉 "15)나그네를 대접하다가 때리는 것은 괜찮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때리는 것이 폭력인데, 그런 폭력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그런 문제가 또 생기고 말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항목이 늘어난다는 겁니다.

◈ 중요한 것은, 목사의 '자리' 그 자체 !!

그러니 기본은 이것인데, 즉 "주의 말씀은 살아있고, 목사가 된 사람은 늘 말씀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주께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목사를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말씀, 즉 계시를 성도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목사 값도 전혀 못하는 사람을 뽑아서 말입니다.

물론 다 못하지만, 하지만 그런 못하는 인간들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서 말씀 앞에 대면하도록 해서, "이 말씀 앞에서 어느 인간도 못합니다" 라는 말을 함으로서, 그렇게 목사를 하도록 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누가 말입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를 보는 것이 아니고 디모데전서 3장 말씀을 보는데, 즉 "아하, 주께서 원하는 감독자인 목사는 저런 모습이구나" 라고 깨닫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라는 자리가 중요한 것이지, 목사라는 인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것을 이 연사가 힘주어 외칩니다(ㅋㅋ).

이 말은 "한 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다" 라는 것이 성립이 전혀 될 수 없는데, 즉 목사가 목사 자리를 소유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목사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결코 목사는 영원한 목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가 언제 목사 값을 하지 못합니까? "난 이것을 지켰다" 라고 나설 때, 그것은 목사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나는 한시도 못 지킨다" 라고 나와야 말씀이 나오는데, "나는 오늘도 2개를 지켰다" 라고 나오면, 그것은 주의 증인이 아니고 목사 본인의 목사 됨의 증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아까 말한 것처럼 노자나 묵자나 손자의 경우처럼, 하나의 권력으로서 그 교회의 질서를 잡으려고 하는, 그러한 동양 철학적인, 즉 세속적인 사고방식이 그대로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된 모습으로 튀어나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 권사는 없고, 집사의 경우에 !!

그렇다면 권사는 없습니까? 물론 없는데, 왜냐하면, 이 권사라는 직분은 인간들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목사 욕은 그만하고, 이제 집사 욕을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1절에서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옷을 어떻게 입어야 단정한 것입니까? 즉 이 '단정'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치마는 무릎에서 어느 정도까지 와야 합니까? 그리고 파마는 어떻게 합니까? 과거에는 한국교회에서 실제로 파마를 못하게 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단정한 것의 기준이 없다는 말은, "우리는 늘 단정할 수 없는 인간이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나는 단정하다" 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그 순간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단정하라' 라는 말씀은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미 자기는 단정해서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이, 즉 법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 사랑과 사랑으로의 마주침으로 !!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만, 사랑이 다가올 때는 법으로 오는데, 그래서 사랑이 없는 사람은 법에서 도망치고 싶은데, 하지만 사랑이 있는 사람은, 즉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그 어떤 법이 오더라도 "이 죄인을 용서한 주님의 말씀이구나" 라는 것으로 받게 되는데, 즉 그러한 사랑과 사랑으로의 마주침이 곧 성도가 보여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욕은 그만 하고 그냥 넘어가고 싶은데, 그래도 말씀에 있으니 봐야 되겠지요? 11절에 보면 여자 집사에 대해서 나오는데, 즉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 특히 여자들이 안 되는 것만 골라놓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ㅋㅋ).

그리고 12절에서는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여자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라고 하는데, 그러면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집사직분을 못합니까? 결혼을 하지 않으면, 당연히 남편도 없고 아내가 될 수 없는데 말입니다.

◈ 사랑이 있기에, 간 큰 집사로 !!

13절에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라고 하는데, 즉 사랑이 있기 때문에 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못난 인간을 사랑해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즐겁게 어떤 경우도 감당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믿음의 큰 담력'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라고 하는데, 여기서 '살아계신' 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살아있다" 라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이제 4장인데, 1절에서 3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 감사했는가? 감사치 않았는가?

여기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음식은 먹으면 안 됩니다" 라고 했을 때, 그러면 고기를 먹지 않으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그게 아니라면, 고기를 먹으면 영광이 됩니까? "무엇이든지 하지 말라" 라고 했을 때,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 그 말대로 하지 않고 반대로 하게 되면 영광이 되는 겁니까?

예를 들어서, "동으로 가라" 라고 했을 때, 동쪽으로 가지 않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많은데, 서쪽으로 갈 수도 있고, 남쪽으로 갈 수도 있고, 북쪽으로 갈 수도 있고, 물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수도 있고, 또한 마이클 잭슨처럼 뒤로 갈 수도 있고 말입니다(ㅋㅋ). 그렇게 여러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뜻은 이것인데, 즉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할 때, "과연 감사했느냐? 감사치 않았느냐?" 라는 것을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딴 사람은 했지만, 나는 그것 안 했거든" 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주체의 응축이 나오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식으로 하는 것이, 그 어떤 법이 오더라도 "이런 법도 지키지 못하고, 그 법을 통해서 다시 한번 저의 마음을 낮추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때에 개인 플레이만 즐겨하는 로마의 개인주의적 이방풍속과도 차이나는 모습이란 겁니다. 주 예수님께 감사하고, 그 용서하심에 감사하는 모습이 말입니다.

◈ 거룩의 실체는 하나님으로부터 !!

그 다음에 5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 자신의 기도행위와 말씀을 읽는 행위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룩의 실체가 누구에게 있다는 겁니까?

그러므로 거룩의 실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인데, 전혀 '나'의 기도행위로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살아계시니 기도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으니 말씀으로 우리가 거룩해 진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해석하면서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그러면 이제 7절을 보겠습니다. 

(딤전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 경건, 일주일만에 할 수 있다 ??

무슨 뜻인고 하니, 육체로 인한 경건한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는 경건의 차이점을 알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이미 폼 나는 경건, 즉 형식화가 된 경건이 많이 유행을 했다는 말인데, 에베소를 비롯해서 마게도냐, 고린도 등지에 말입니다. "경건, 일주일만에 할 수 있다" 라는 식으로, 그런 연습으로 된다는 경건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경건과 성도의 종말론적 모습의 경건은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여기서 '종말론적' 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종말은 어떤 힘으로 오는데, 즉 성령의 힘이 아니라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는 결코 종말이란 의식이 생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종말이 언제입니까? 2050년입니까? 아니면 2130년입니까? 우리는 시간을 보지 말고 질(質)을 봐야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전부가 개인주의인데, 즉 하나됨은 없고 모두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풍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종말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말론적 삶에서 '경건'은 무엇입니까? "아하, 이 세상이 종말이구나" 라고, 그렇게 느끼면서 사는 게 바로 종말론적 경건이라는 말입니다.

◈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

제가 예전에 어느 책을 서평을 한 적이 있는데, 참된 인간이 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는 단체들을 순회하면서, 거기에서 행하는 수행이나 참선에 대해서 기록한 책인데 말입니다. 7,8년 전에 쓴 것이라 책제목을 기억하지 못하겠는데(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아무튼 이 책에 보면 여러 방법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연습하면 되는 경건의 방법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 단체의 공통점이 있는데, "지금이 종말이다" 라고 말하는 단체는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 10개 이상의 단체가 나오는데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이 "지금이 마지막 종말이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개판으로 막살게 되는데, 즉 어떤 처자가 이제 죽을 날이 6개월 밖에 안 남았으면, 자기가 죽기 이전에 해야 할 일 20가지를 기록하는 겁니다. 그 가운데는 자기를 괴롭히고 미워한 자를 위한 복수도 있고, 물론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자의 품에 안겨 죽는 것' 이라고 적어놓는데, 그게 바로 불신자들의 종말론적 삶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무튼 자기가 복수할 것은 복수를 하고 죽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종말에는 그 진짜 복수를 누가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복수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감해졌고, 우리는 이미 용서를 받은 상태가 아닙니까? 복수를 당해도 너무나도 마땅한데 용서를 받았으니, 바로 그 감사하는 모습이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이고, 이것이 곧 유일한 경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 우리 영혼의 무게는 0Kg !!
 
따라서 주의 말씀과 주님과의 교제를 우리는 늘 고맙게 여기게 되는데, 즉 자기 존재의 무게를 아주 가볍게 가지는 겁니다. 우리 육신의 무게는 70Kg이라도, 우리 영혼의 무게는 0Kg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배가 이렇게 나온 입장에서, 저도 말을 해놓고 보니 너무나 쉽게 한다 싶은데 말입니다(ㅋㅋ).

그건 그렇고, 아무튼 텅텅 비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텅텅 비지를 못하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웃, 즉 타인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타인의 목소리인데, 즉 타인의 욕망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놈의 정 때문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적어도 이런 수준은 되어야만 될 인간이야" 라는 타인의 기대가 있으면, "주님의 말씀은 종말인데, 나는 죄인인데, 내가 그렇게 너무 기죽어 살 필요가 없어. 그러니 당당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위치에는 올라서야 돼" 라고 하는 생각이 들고, 그 때부터는 갈등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때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그러한 우리 욕망과 성경말씀의 차이를 깨닫게 하셔서, 항상 살아가면서 새롭게 우리의 자리를 확인하도록 하시는데, 즉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데" 라고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감사가 넘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의 경건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 장로회는, 하나의 매개체 !!

여기에 보면 '장로의 회'가 나오는데, 거기서 디모데가 안수를 받았는데, 그렇다면 이 장로회의 권리는 누가 준 겁니까? 보통 '대한예수교' 다음에 '장로회' 라고 되어있는데 말입니다. 합동측에서는 그것을 성령께서 주신 카리스마, 즉 권위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권위가 교단마다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슨 그런 권위가 다 있느냐는 겁니다. 성령께서 종류별로 주셨습니까? 골라잡으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은사' 라는 것은 장로회가 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장로회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지나가는 하나의 매개체인데, 거기에는 단 조건이 있는데, 그때 장로회의 모임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안수를 받게 되는데, 그러면 그 안수를 준 사람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아까 말한 14가지의 감독에 대한 것 중에서 한 가지가 미흡했을 경우에, "그 사람이 주는 안수는 유효한 것인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거쳤다고 해서 무효로 끝나는 은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은, 즉 그 어떤 장로도 죄인이기에 말입니다. 즉 죄인을 통과해서 은사가 주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장로회가 은사를 줍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이 은사는 우리가 주는 게 아니고 주께서 주십니다. 우리는 그냥 도구에 불과합니다" 라는 멘트를 그 장로회에서 날려야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데, 자기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를 안수하면서, "오른 손으로 하느냐? 왼 손으로 하느냐?" 라는 것을 가지고 다투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비빔밥을 만들 때 어떻게 합니까? 왼손으로 비비든 오른손으로 비비든 간에, 잘만 비비면 맛있게 먹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 너랑 나랑, 똑같아 !!

그러니 성경말씀에 죄인들이 동원되어서 죄인은 어디까지나 죄인일 뿐인데, 즉 "너랑 나랑 똑같이 다 죄인이니,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 못 살아" 라고, 그렇게 서로를 고백하면서 주의 은사가 드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마지막 종말의 때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쓰러진 사람도 있는데(ㅋㅋ), 10분을 쉬겠습니다.


                                              2011,10,04 오후 5시 30분에 재정리함 - 녹취 '구'

                                                       사랑타령만 하고 있으면 밥은 누가 먹여주지?
68.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조연현 저.  한계레신문사,   서평 이근호

진지함을 잃고서 경박함으로 생활하는 현대인들의 풍조는 교회까지 파급되었다. 모든 것을 가볍게 처리하려는 태도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이 예수라는 존재까지 추상적인 대상으로 취급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진지함은 열광을 통해서 얻어지지는 않는다. 도리어 열광을 잠재워야 한다. 산만하고 떠들썩한 삶을 제거하고 진정 마음 밑바닥에서 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본 책은 이것을 시도한 각가지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얻은 진리는 과연 무엇인가?

1. 정토수련원

이곳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해서 평소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무너뜨리는 작업을 수행하는 곳이다. 그렇게 해서 기존에 행했던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 사고가 빚어낸 제한적인 것이고 보다 깊고 넓게 세상을 보니, 너 나 모두가 한 몸이며 한 몸이기에 더불어 살아야 될 처지에 놓여 있음을 깨달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자기 편익 위주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게 되면 자신과 남과 세상을 왜곡되게 바라보게 되고 이것은 모두를 힘들게 한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순간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 때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2. 인천 용화선원 시민선방

참선하는 곳이다. 일단 모든 생각 자체를 끊어보는 것이다. 일종의 사고(思考)의 스위치를 내리는 식이다. 그렇게되면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걱정과 번뇌도 같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다음은 순간적으로 의식의 스위치를 올린다. 그렇다면 이 때부터 무심의 경지의 들어가서 예상치도 못한 놀라운 큰 능력과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게 해 주는 것이다. 자기와 바깥 세계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하나가 될 때만 이런 능력이 나온다. 모든 흐름을 끊을 때, 오직 청정한 마음만이 남게 된다. 고통에 집착하지 않으면 원래 고통이란 없는 법이다. 이러한 참선 체험 프로그램은 불자뿐만 아니라 신부, 수녀, 목사들까지 참여하고 있다.

3. 위빠사나

이것은 석가모니가 부처(깨달은 자)의 경지가 될 때 행했던 그 수행법을 그대로 전수 받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호흡할 때 들쑥날쑥하는 자기 배를 한 시간동안 뚫어지게 보는 것이라든지, 혹은 10m 거리를 10분 동안이나 걸리도록 서서히 걸으면서 자기 발을 집중 바라보는 수행법이다. 현재의 실제상태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되면 실제라는 것은 자기가 생각해 놓은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순간부터 번뇌는 물러간다. 모든 현상이란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지관(止觀), 즉 정신통일로서 하는 관찰 수행법으로 일체의 모든 것이 붙잡아 둘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심지어 마음마저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번뇌가 스며들면 그 번뇌에 집중하므로서 번뇌를 소멸시켜버린다.

4. 천도교 시천주수련

'시천주 조화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주문을 되풀이하게 되면 강령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심하게 울게 된다. 그리고 난 뒤 상대가 누가 되었던 겸손하게 큰절을 하게 된다. '그동안 나 자신도 모르고 기고만장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상대를 이제부터 섬기는 상전으로 모시려는 것이다. 부부끼리 배우자나 부모나 자식 같은 가까운 식구부터 시작하게 된다. 근본을 안다는 것은 세상 만물 , 즉 사람과 동물과 식물과 천지만물이 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한울님의 주파수와 자신의 주파수가 딱 맞으면 통하게 되어 있다.

5. 아봐타(Avatar)

미국의 교육가인 해리 팔머가 창안한 의식개발 프로그램이다.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창조력을 극대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창조력을 막는 것은 자기 속의 저항이다. 원치 않는 창조인 이 저항을 제거하므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원하는 삶을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이 창조를 선언하는 것이다. 마치 모세가, "바다야! 갈라져라!"라고 선언할 때 바다라도 갈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다.

6. 의식혁명 -데이비드 홉킨스 박사의 워크숍

의식은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식은 그 스스로 존재한다. 질문이 진실이며 근육에 전류가 들어가고, 거짓이며 근육에 전류가 꺼진다. 이것으로 우리 몸 자체가 좋지 않는 감정에는 약한 반응을 보이고 반면 좋은 감정에는 강한 반응을 보이게 한다. 이 진실 됨을 감지 의식 능력을 그는 수치로 표현했다. 수치심은 20, 죄의식은 30, 무기력은 50, 슬픔은 75, 두려움 100, 욕망은 125, 분노는 150, 자존심은 175, 용기는 200, 중용은 250, 자발성은 310, 포용은 350, 이성적 태도는 400, 그리고 인류가 자랑하는 지성인인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는 499이다. 그런데 500부터가 깨달음의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된다. 사랑은 500, 기쁨은 540, 평화가 600, 깨달음은 700∼1000이다. 예수님 1000이지만 실제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2세기 때에는 930, 6 세기 때는 540, 11세기 초 십자가 운동 때는 498로 떨어진다고 한다.

6. 아리랑 풀이

이종헌 성장상담연구소에서 내 놓은 수련 프로그램이다. 신나는 북소리에 맞추어 몸 가는 대로 흔들어 보므로서 순수한 느낌을 느끼는 방식이다. 이러한 춤 명상이 끝나면 욕 명상이 시작된다. 둘 씩 짝이 되고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욕설로 푸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지탱한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몸과 마음이 치료가 되는 것이다.

7. 원불교 마음공부

아동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함으로서 마음 공부가 시작된다. "나는 원래 훌륭한 사람입니다"그 다음부터는 이 훌륭함과 훌륭치 않음의 경계선을 아동들 스스로가 지키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자기 마음이니 자기가 스스로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자각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짜증'이 일어날 때, '짜증' 직전의 마음의 그 후의 마음의 경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또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컴퓨터 방으로 들어서려다, "앗 경계다"하고 생각하고서는 즉시로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렇게 마음공부를 하게 되면 나중에 경계마저 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8. 동사섭(同事攝)

딸기, 노을, 달님이란 생소한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 말을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대화를 나눔으로서 마음속의 응어리진 것과 사슬을 다 풀게 하는 수련법이다. 동사섭이란 고통받는 중생과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는 가지는 것을 말한다. 특히 요타 스님이 제창한 '나지사' 명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랬구'나'하고 일단 긍정하고 둘째로,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라고 상황을 이해하고, 셋째로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을 감'사'하자는 것으로 이 세 글자를 따서 '나지사'라고 하는 것이다.

그밖에 자기 장례식 거는 영정 사진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바라보게 하는 천주교에서 하는 '예수살이공동체 배동교육'이라는 것도 있고, 깨달음에 대한 욕심조차 버리라는 천주교 영신수련을 담당하는 '천주교 예수회 말씀의 집'도 있고, 또 '성령께서 상상을 사용해 기도자와 성서적 사건을 중계한다'고 가르치는 장신대 경건 훈련원도 있다.

* 평가 : 생명이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메시야 언약에 준해서만 주어질 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진리를 거부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채찍 맞음'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채찍을 따로 가지려고 한다. 그만큼 교묘하게도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악마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도 지옥으로 가게 한다.

 첨부파일 : 11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딤전후(교회를 잊어라)(강의정리)-재정리(7).hwp (59.8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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