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겨울수련회 아가서 제 9강(사랑받는 법-이 근호목사)
자, 시간이 되었으므로 시작합시다. 성경을 보면서 늘 성경공부하고 난 뒤에 마음속에 생기는 갈등 같은 것이 있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 성경속의 내용이 진실일까? 또는 이게 참된 그런 현실일까? 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됩니다. 성경속의 세계하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세계하고 유사할 것 같으면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 성경안의 세계하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세계하고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어느 쪽 편에 서야 될지, 어느 쪽을 점유하고 거기에 거주해야 될지, 고민하게 되죠.
마치 성경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영화 한 편 보기 위해서 극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과 똑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 참 좋은 영화였어. 우리에게 비전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격려할 수 있는, 우리에게 죽어도 낙이 있다는 참 좋은 소식이었어.” 하지만 대부분의 생활은 성경속의, 영화 속의 생활이 아니고, 영화 바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생활이 또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영화구경할 때는 거기에 몰두하되, 영화관에서 나왔을 때는 바로 지금 내 생활에 전념해야 된다는 그런 의식이 아주 강하게 깔려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공부해도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에요. 성경공부 아무리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용인에 사는 55살 먹은 어떤 사람이 회사에 다니는데 연봉 1억이 된답니다. 많죠. 많은데, 자기 어머니가 홀로 계셔서 월100만원 보낸답니다. 그리고 25살 먹은 자기 아들이 미국으로 유학 갔기 때문에 월200만원 보낸다는 거예요. 그리고 큰 아들이 30살인데 결혼주택자금 보태라고 2억을 줬답니다. 그리고 자기 장모님이 치매에 걸려서 가까이 이사를 왔는데 10년 동안 시어머니 모신다고 고생했기 때문에 아내의 어머니도 당연히 대우를 해야 한다고 해서 월100만원 주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 현실이에요. 앞으로 3년 뒤에는 퇴직을 한답니다. 나갈 돈은 그대로인데.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 성경공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이게 체적 되는 현실 그대로입니다. 그런 현실에 있는 사람에게, 돈 나올 구석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성경이야기를 해보면 “성경책에 좋은 이야기, 희망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 현실에 발 딛고 있고 현실이 와 닿고 현실이 더 중요해”라는 생각을 절로 안 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이 아가서를 합숙훈련해서 집중적으로 공부해 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환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환상. 그냥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현실은 그냥 현실인데 어떻게 발상의 전환이 가능하냐 이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로 욥이 나오는데, 욥의 자식 열 이 다 죽었어요. 그리고 자기 몸이 아픕니다. 가장 현실 중의 현실이 눈을 감으면 모든 재산도 자식도 집도 안 보이지만, 그래도 눈을 감아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어요.
그거는 뭐냐 자기 몸이 가렵고 아픈 겁니다. 대상포진 같은 거, 치통 같은 거. ‘이거는 꿈이야. 이거는 환상이야. 이거는 성경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야. 그리스도로 새사람 되었어.’라고, 성경구절 백날 주문 외우듯이 외워봤자 이빨 아픈 것은 아픈 거고. 몸살 난 것은 몸살 난 거고. 콧물 난 것은 콧물 난 거고. 기침 나오는 것은 기침 나오는 거예요. 욥기에 보면 인간이 생각하는 그 현실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현실인가를 제대로 이야기해주는 것이 바로 욥입니다.
욥기 38장에 보면 욥이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은 자기 신체와 가장 가까운 것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하거든요. 그렇다면 그것이 자기한테 현실이기 때문에 모든 현실의 의미는 자기의 생존과 고통과 행복과 관련되어 있는 그것을 가지고 현실 장을, 필드를 형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욥기 38장 25절에 보면 그 몸이 아픈 욥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26절,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27절,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28절,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29절,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31절,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북두칠성이야기고 안드로메다이야기고 은하계이야기 하는 이야기에요. 네가 그 별을 만들 때 거기 있었는가, 염소새끼 낳을 때 네가 거기에 있었는가, 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나에게 다급하고 시급하고 나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나의 의미를 거쳐서 이것이 나한테 중요해서 이것을 현실이라고 규정했는데, 그러면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북두칠성을 만든 것을 네가 아느냐고 물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거는 내 소관이 아니죠.”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네가 무식한 거야. 네가 지혜가 없는 거야. 네가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너와 근접해서 관련된 것만 현실이라고 우기니까 그 의미에서 출발한 현실은 제한된 현실이고 너의 일방적 현실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일방적인 현실.
중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우리 관심 없어요. 왜? 중국은 내 나라가 아니니까. 그런데 그 지진이 일어난 곳에 하필 내 아들이 수학여행을 갔다. 그러면 나한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당장 눈앞에 코앞에 나의 생존의 위협을 주고 내 행복에 스크래치를 내고 상처를 내고 내가 지키고자 하는 나의 세계에, 뭔가 그것이 와해가 되는 그 순간이 왔을 때에 우리는 그게 가장 현실답다가 되는 겁니다. 이 현실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우리가 내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게 현실이라고 우리에게 쉴 새 없이 공포감을 조성합니다.
아들이 성적표를 받아왔는데 전에는 반에서 5등을 했는데 이번에는 애가 10등을 했어요. 그러면 나에게 기대를 거는 엄마와 아빠가 얼마나 나무라겠는가 하는 이것이 자기에게 현실이에요. 자기에게는 5등 떨어진 것이 현실이에요. 이것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부들부들 떨면서 집에 가면서 생각하죠. ‘오늘 엄마에게 등짝 얻어맞겠다. 앞으로 당분간 게임 못하고 pc방에 못가고 줄기차게 공부만 해야겠구나.’하고 참혹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갔더니만, 집 앞에 이삿짐센터에서 온 큰 화물차가 있어요. “엄마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바쁘다. 얼른 네 책상부터 빼라.” “왜?” “오늘 이사 간다.” 그러니까 엄마의 현실은 지금 애 성적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집 이사 가는 것이 문제였어요.
그러니까 엄마와 아들이 같이 살아도 애 성적은 엄마 쪽에서 보면 환상이 되는 겁니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5등에서 10등으로 내려간 문제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비 올라고 하는데 빨리 이사를 마무리하는 게 다급한 엄마의 고유의 현실이라는 말이죠. 고유의 자기의미인 거예요. 이처럼 인간들은 각자 자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까지? 바로 죽을 때까지. 죽기 1분 전에 죽는 사람은 말합니다. “내가 살아온 것은 나밖에 몰랐던 현실인데 그것은 제한된 현실이고 그것은 바로 환상이었다.”라고.
좁은 식견에 내 생각만, 짧디 짧은 안개 같은 내 인생만 고집하면서 그것을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던 그것이 환상이 아니고 뭡니까? 우리가 밥 먹을 때 북두칠성을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전체를 생각해요. 모두를 생각한다고요. 모두를 생각해서 이 성경책에 그 모든 내용을 담아놨다고요. 그러니까 성경속의 현실이에요? 아니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고집하는 우리의 현실이라는 게 현실입니까? 거기 성경책에 현실에 비하면 우리의 생각은 그냥 한낱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꿈에 지나지 않아요. 오늘도 환상 속에 헤매가지고 이 말씀 보다고 더 다급한 문제에 빠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성경을 본다든지 수련회에 참석할 때에 이 현실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온다면 처음부터 잘못된 겁니다. 환상를 더욱더 환상 아닌 것으로 자꾸 착오를 스스로 유도하게 돼요.
아가서 4장 16절에 봅시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창세기 2장을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그 동산에서 바람이 부는데 이거는 완전히 개방이 되었어요. 노출이 되었어요. 바람이 사방팔방에서 붑니다. 그 세계에서는 바람마저 자유로워요. 원래 바람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로운 낙원 거기에 있어서 남녀가 합일을 하게 됩니다. 동침을 하는데, 그 동산에서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한다고 했어요. 이 동산은 더 이상 금지할 실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금지 그 이후에요. 이 세계 안에서 과거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금지가 과거일로 여겨지는 새로움이 마련된, 더 이상 따먹지 말라는 규제와 명령이 전혀 없는 그런 세계 안에서 그들은 합일, 일체성을 갖게 된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가서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일체성을 위해서 아가서 6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여자 친구들이 계속해서 찾습니다. 어디 있느냐? 왜 찾습니까? “신랑을 만나서 합일을 해야지, 사랑해야지, 네가 짝이 없으면 사랑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빨리 와서 너의 짝하고 합일해서 네가 낙원에서 어떤 것도 금지되지 않은 사랑의 과실을 먹어야지.”하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게 여러분은 환상으로 보입니까? 보다 넓은 현실로, 확실한 현실로 보이십니까? 이게 바로 현실이에요. 왜? 인간의 모든 삶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금지가 생생하게 살아있고 그 법에 어긋나면 지옥가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것은 지옥 갈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 지옥은 어떤 것을 위반해서 가거든요. 위반이라는 것은 법의 금지를 의미하는 거예요. 금지가 살아있는 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우리는 그 현실을 현실이라고 보고, 그것도 유일한 현실이라고 보고 거기서 뭐냐 매일같이 벌벌 떨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벌벌 떨어요. ‘집 사놨는데 집값 내려가면 어떡하지?’ 모든 이 세상은 사람을 벌벌 떨게 하는 뉴스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끊임없이. 미세먼지 높은데 바깥에 나가면 안 되는데 이 마스크는 중국산이 아닌가? 모든 생각들이 어떻게 하면 내 현실을 내가 망가트리는 일이 없이 계속 버틸 수 있는가? 계속 버틴다는 이게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일입니까? 버틴다는 게. 다잡고 지키고 사수하고. 그런 자세로서 현실 속에 산다는 것은 무섭고, 무섭고, 무섭고, 무섭고, 모든 것이 무서운 거예요. 집안에 뭔가 좀 몇 달 간 조용하다 싶으면, 아, 내일 쯤 무슨 일이 터질 것이라는 생각. 또 조용해도 문제에요. 평화가 오래가도 문제에요. 이 좋은 평화가 어디서 문제가 와서 와장창 깨지는 것이 아닌가? 밤에 문자만 와도 이거 또 누가 죽은 거 아닌가? 하고. 전화만 와도 바쁜데 전화 또 왜 했지? 바쁜데. 현실도 아닌데 환상을 기어이 붙들려고 왜 그렇게 바쁜지. 그래서 이러한 것은 인간의 본능에 해당돼요. 이거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서 교육받아서 된 것이 아니고 타고난 것입니다.
교재 1페이지를 봅시다. 이제 마지막에 교재 들어갑니다. 교재 1페이지에 보면 충동, 다른 말로 하면 본능이라고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인간은 두 가지 상이한 충동의 지배를 받는다. 첫째는 감성충동(또는 감각충동)이다. 이 충동은 인간의 물리적 현존 또는 감각적 본성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자연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며, 인간을 시간의 범주, 즉 변화라는 틀로 끌어들인다. 이것은 인간을 물질로 만드는 것이다. 시간에 따라 감성충동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간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생성하는 세계와 직접적으로 마주한다.” 다시 말해서 좋았다가 기뻤다가 슬펐다가, 아버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서 우는데 마침 tv를 켜니까 마침 코미디프로를 해서 조객들이 다 깔깔 웃어서 넘어가고. 이게 뭐냐 하면 여기가 지금 장례식장이냐 그런 것을 묻지도 않죠. 시간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따라서 내 감정도 요동치고, 생성하는 세계와 직접 마주할 때 작용하는 본능, 그것을 감성충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가 중요해요. 형식충동인데 이건 감성충동과 대조가 돼요. “형식충동은 인간의 절대적 존재에서 또는 그의 이성적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시간 속에 흩어진 것을 전체로 묶어서 최종적으로 시간의 변화를 추구하고 영원한 것을 하나의 형식, 형식이니까 형식화시키는 거예요. 나는 이렇다. 나의 식은 이렇다. 모든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이 개성은 절대적이고 불가분의 통일체로서 자기 자신과 절대로 모순적일 수 없기 때문에, 혹은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개성을 고집하는 것이다.” 기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참아야 되는 거예요. 남자라는 형식본능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또 보고 싶네요. ‘남자라는 이유로’ 김순곤 작사.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말 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나 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당신 앞에 멍하니 서있네/ 이거 감성충동입니다. 감성충동인데 이게 형식충동을 자꾸 건드려요. 나는 남자기 때문에 울어서는 안 돼. 참아야 돼. 점잖아야 돼. 나는 여자와 다르니까. 순간순간 변화에 대해서 같이 촐랑 맞게 놀면 안 돼. 그래서 저 여자는 나를 믿음직하다 해서 나에게 기대지 않으면 안 돼. 그리고 나는 듬직한 영웅적인 자질을 갖추어야 되고, 나는 가장이니까 돈을 벌되 200만원 100원 나와도 되고,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하면서, 걱정하지 마! 아빠가 있잖아. 아빠 힘내세요. 그렇지 아빠가 힘내고 있어. 여러분 가정 걱정하지마세요. 이번에 어떤 일이 터져도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당신은 나만 믿어. 나만 믿으라고. 걱정하지 말고.
큰소리 허세 허풍을 다 떨면서 부르는 노래가 뭐냐, 그 형식충동을 유지한다고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언제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 내어/소리 내어 울어 볼 날이/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형식을 대체하는 방식이 형식충동으로서 점잖은 체하고 마치 모든 역경을 이겨낸 영웅처럼 행세하고 싶은 그 허세, 그 허풍, 이거 사기입니다. 사기에요. 마치 죽음마저 이긴 대단한 사람으로서 가정의 중심이 되어야 가정이 나를 인하여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희생정신까지 그걸 가미합니다. 그런 사람한테 묻습니다. 황무지에서 비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모르죠. 환상적인 자기 현실만 자기가 책임지고 나서니까.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형식충동을 계속 읽어볼게요. “이 충동은 자기중심적으로 시간을 없애고 변화를 없애는 것이다.” 자, 나는 한번 해병대면 영원한 해병대. 이런 것처럼. 계속 해병대에요. 시간을 없애고 변화를 없애고. 어떤 사람이 돈을 빌려줬는데 그 사람이 안 갚는 거예요. “당신은 어떻게 돈을 안 갚아?” 이렇게 하니까, 사정이 어떻다고 하다가, 군대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해병대 나와서 그때부터 사업하다가 일 잘 됐다가 당신한테 돈을 빌렸는데 지금 이렇게 됐다.”라고 하니까, 그 돈 받으러 온 사람이 “실례지만 해병대 몇 기십니까?” “나는 뭐 200몇 기다.”하니까 갑자기 “충성!” 돈 받으러 왔다가 선배 만난 거예요. “충성! 신고합니다. 전 몇 기입니다.” “고뤠!” 돈 이야기 싹 지나갔어요. 형식충동과 형식충동이 만나서 아주 좋게 해결이 됐어요. 완전히 코미디죠. 코미디.
자기가 만든 자기의 의미를 꽉꽉 채워서 만든 그 형식 안에, 자기를 거기다가 안전하게, 바깥은 변화되어도 나는 한결같다는 고집으로 거기에 딱 두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필연적이며 영원한 것을 고대하고, 근데 영원하지도 않아요. 그런데도 그것을 진리와 정의라고 믿는다. 이게 교회내의 상황이에요. 교회내의 분위기입니다. 돈도 별로 없으면서 한번 장로면 영원한 장로, 이래가지고 “내가 장로 되기 위해서 일어난 수반된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진리, 정의라고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오늘도 대표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전부 다 위선덩어리, 허세덩어리에요. 그래가지고 나중에 재정장로가 통장 몇 개 만들어서 교회 돈 빼먹을 것 다 빼먹고.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런데 이 감성충동과 형식충동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띠고 있기 때문에 서로 타협할 수밖에 없다.” 그 타협이 뭐냐 하면은 눈감고 아웅 하는 식으로, 슬픈 것은 그냥 그때그때 속 풀이 하는 식으로, 스트레스 받는 그런 식으로 풀이해서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이렇게 속상한 일 있으면 아시안 축구 보면서 잊어버리고, 안 그러면 화투치고 도박해서 그때그때마다 잊어버리고, 자기를 잊고자 하는 그것이 뭐냐 놀이충동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의 현실 속에서는 이게 주(主)가 아니고, 진짜 주인은 뭐냐 하면 자기중심인 자기 현실마당이 주인데, 그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스트레스를 주니까, 즐기는 식으로 놀아가는 그런 식의 일시적인 사랑을 때우는 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이죠. 환상을 계속 현실이라고 우기기 위한 하나의 추가되는 조건이에요.
그런 식으로 성경에 나오는 아가를 보니까, 거룩한 성경에 하나님이야기를 해야 할 성경에, 십자가 중심으로 봐야 될 성경에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왜 나오지? 라고,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아, 사랑? 그건 알지. 그거는 심심풀이 땅콩!” 심심풀이 땅콩이니까 이거는 아멘 없이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아가가 그렇게 중요한 줄 모르고. 평소에 우리의 사랑 자체가, 연애자체가 심심풀이 땅콩이니까, 스트레스 해소할 용도니까, 아가에 나오는 이 남녀의 사랑도 솔로몬이 너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다보니까 스트레스 받아서 연애하는구나! 라고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 아가6장 8절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절,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온리 유only you~~오직 당신뿐이에요. 당신뿐. 내 앞에 많은 여자가 있더라도 오직 사랑은 당신뿐. 내가 나를 잊을 수 있는, 나를 소멸해도 즐거워할 수 있는, 소멸하게 마땅하게 만드는 여인은 오직 당신뿐. 그것이 바로 여자가 남자를 예레미야 31장 22절의 말씀의 전조가 되는 겁니다. 예언이 되는 겁니다.
성경속의 현실은 예언을 던지고 약속으로 실현하고, 실현된 약속이 또 예언이 되고 약속으로 미래로 끌고 가고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피 있는 자와 없는 자, 다른 말로 하면 피로 용서받지 못해서 자기 행함을 그대로 유지하는 자와 피로 말미암아 자기가 어떤 짓거리를 했는지가 딜리트delete 삭제된, 하늘나라 정보에서 삭제된, 두 번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는 대상, 그 두 사람에 의해서 영원히 굳어집니다.
한쪽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그리스도의 피의 글씨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피와 더불어서 그 사람은 피의 효력, 그리스도의 의의 효과를 보면서, 혜택을 보면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고. 왜냐하면 천국보좌에 보면 어린양의 피거든요. 어린양의 보좌. 죽임을 당하신 보좌에서 생명나무가 흐르고. 저쪽에서는 뭐냐 하면은 그냥 생생하게 홀로 살았으니까, 독자적으로 살았으니까, 네가 죽었어도 너의 독자적인 것은 네가 책임을 져야 돼야 돼요.
그래서 어제 마지막에 성도는 더 이상 자기 인생에 의무를 지우지 말라고 했거든요. 주께서도 법을 적용 안 시키는데 왜 네가 건방지게 우리에게 법을 적용시킵니까? 자칫하면 실제적으로 인과응보의 공포에 말려드는, 죽음의 벨트, 저주의 벨트에 말려들어요. 그걸 벗어나는 것은 율법에서 벗어나고 내 양심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에요. 그냥 벗어날 때 쉽게 한 마디 던지면 됩니다. “나는 뭘 해도 맨날 환상만 생각하는 그런 죄인입니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내 주특기가 환상 만드는 것이 주특기고 나만의 현실 만드는 것이 내 주특기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죄 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되잖아요. 참 쉽죠. 참 쉬운 거예요. 왜냐하면 홀로 살기로 작정 안 했기 때문에. 어디 나 혼자 삽니까? 그러면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되죠. 그런데 이거 아가 6장을 보세요. “너의 사랑하는 자는 어디로 갔느냐?” 계속 찾고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아가서를 다 끝내고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딱 하나를 잊지 말아야 됩니다. 제발 여러분들 누구를 사랑하지 마시고, 사랑하려고 하지마세요. 우리 성도가 되어서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마시고 사랑받는 법을 배워야 돼요. 사랑할 줄도 모르는데 계속 누가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찾아와 그냥 사랑만 남기고 떠나간 그대여!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사랑을 해줬어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화장을 고치고’라는 가사에 나와요. 어떻게 나 같은 여자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그런데 그 화장고치는 여자는 뭐냐 하면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게 아니고, 사랑하는 법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사랑받는 법만 사랑하시는 분으로 인하여 배운 거예요. 그럼 인간이 뭐로 달라져야 하느냐 하면은, “나도 남을 사랑해야지. 사랑해야 복을 받으니까. 천국 가니까.” 이런 인간에서 어떻게 달라졌느냐 하면은 이거는 염치불구하고 그냥 받기만 하는 사랑으로 달라진 거. 그거 거듭난 겁니다. 그게 성도에요. 그게 성도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내 하는 것은 저지레만하니까, 내 하는 것이 백퍼센트 율법을 어기는 것을 저지레 만한다면 그 사람은 어디서 빠져나온 사람이냐 하면은 착해야 복 받고 나쁜 일 하면 저주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순회구조에서, 이미 그 벨트에서, 화력발전소 벨트에서 빠져나온 사람이에요. 뭔가 착한일 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거예요. ‘교회 와서 기도했으니까 앞으로 자식들이 잘 될 거야.’ 자꾸 그렇게 하니까 스스로 그 악마한테 나를 지옥 보내달라고 고개 숙이는 짓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리의 현실은 너무 소규모에요. 너무 근접한 겁니다. 몸에 파스를 붙이고 다녀보세요. 다른 사람이 다 압니다. “어디서 파스냄새가 나는 것 같다.” 다 알아요.
아가 4장 16절에 보면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향기를 날리라, 파스냄새를 날리라.” 주님께 얻어걸린 사랑의 향기가 뿜뿜~~ 뿜뿜 막 날아오는 거예요. 걸그룹 모모랜드가 부른 뿜뿜BBoomBBoom이죠. 계속 사랑의 향기를 날리는 거예요. 나를 염치없지만, 나는 사랑할 줄 아는 것은 손톱만큼도 없고, 나의 주특기는 날름 챙기는 것, 사랑받는 것밖에 몰라요. 그 모습을 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느냐 하면은 원래 부모 앞에 자식의 태도가 그래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식이, 자기가 태어날 때 태어난 인간이 아무 기여한 것도 보탠 것도 없잖아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그것이 순수한 거예요. 그 순수함이 계속 유지되는 겁니다. 오늘도 부모님 은혜로, 덕분으로 하는 것처럼.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나는 삽니다. 좀 낯짝이 두껍지만 그 은혜로만 살았습니다. 제가 내놓을 것은, 내가 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세상에 살다보니까 더럽고 더러운 것만 배웠는데 그래서 저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제 것은 내세우지 않겠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 북두칠성 만드는 것과 지금 내가 사는 것과 관련성이 있지요? 황무지에 비 내리는 것과 내가 존재라는 것과 관련성이 있지요? 나는 그 내력을 잘 모르지만, 염소새끼 내는 것과 살고 하는 것을 모르지만 그것 몰라도 다만 그것이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압니다.”
이것이 바로 북풍, 남풍이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고 향기를 날리는, 모든 것이 금지할 법이 전혀 없는 그 동산에서 우리는 그동안 나에게 은혜주신 그분과 합일, 일체성을 갖추는 겁니다. 금지가 이 세상에서 끝이었는데, 금지 그 이후의 세계가 아가를 통해서 약속되고 예언되고 소개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아가의 내용에서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를 했던 것, 이 대자연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장에서 한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거기에 인간이 나서서 협조하거나 도와준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빠지는 거예요. 오직 주님이 주님 홀로 하셨기에 보기 심히 좋은 거예요. 그러면 그 대자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심히 좋았다고 하는 것에서 출현된 대자연의 의미가 담겨있죠.
그것이 대자연이 늘 움직이면서 보여 줄 생산입니다. 이 생산을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예언의 완성은 인간을 통해서 완성되기 때문에, 어떤 특수 인간에게, 특정인간에게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등록이 돼요. 등록이. 생산된 것을 여기 등록하는 겁니다. 등록하게 되면 이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서 여기에 작용 또는 적용이 되죠.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고 했잖아요. 비록 무좀이 걸려도 괜찮아요. 발톱 다 나가도 괜찮아요. 외모적인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가를 볼 때에 하나님의 의미를 경유해서 아가를 봐야 하는데, 평소에 우리가 아름답다고 하니까 내가 평소에, 내 현실 속에 연애라는 놀이를 하기 위해서, 스트레스 풀기 위한 그런 안목을 가지고 보니까, 여자 중에 최고 아름답고 남자 중에 최고 멋있다고 하니까, 도대체 어떻게 아름다고 멋있는지 이게 접근이 잘 안 되는 거예요. 그 이미지가.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잖아요. 남자가 멋있는데, 입술이 백합화 같다고 하는데 별로 뭐. 남자 입술이 백합화가 뭐가 멋있어요? 남자 입술은 갈비만 잘 뜯으면 되지.
자, 그래서 이번 시간에 할 것은 뭐냐 하면은 등록할 때 등록된 그 사람은 어떤 기능을 하기위해서 등록이 되었는가? 아가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분리한 이유가 나옵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의 인간을 만들지 않고 남자, 여자를 분리해서 했는가? 하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둘을 만들어놓고 그걸 하나라고 읽는다.
그래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뭐가 필요하다? 둘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사람은 범죄 한 인간을 가지고 하나라고 하고 둘이 있으면 둘이라고 하는 겁니다. 뭐를 상실한 거예요? 뭘 놓쳐버린 거예요? 합일을 놓친 거예요. 하나가 품고 있는 그 본질을 그냥 존재적인 차원에서 보기 때문에, 본질적 차원을 파악하지를 못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금지이후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여자를 만들고 남자를 만드는데, 아가서의 여자는 뭐로 보느냐 하면은 여기서 샘으로 봅니다. 아가 4장 11절을 보고 14절을 보겠습니다. 11절,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내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뭔가 포도주나 맥주나 스팸 통조림이나 뭔가 신선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봉해져야 해요.
그리고 그걸 딱 딸 때 그 안의 내용은 처음 내용의 그대로로 신선감이 유지가 되잖아요. 유지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상태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기에 심히 좋았다는 상태가 되려면 여자의 역할은 뭐냐 동산의 샘이 되는 거예요. 샘이 되고 생수의 우물이에요. 생수의 우물. 그렇다면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가서에서 예언된 내용이, 약속이 성취가 되어야 하는데, 그 성취된 내용이 신약 어디에 나옵니까?
물으시면 아가서의 내용과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성취가 됩니다. 1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절,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여기에 강 있고 실과가 맺히죠.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에 강 있고 각종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맺었습니다. 처음이요 나중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도 그렇게 끝났는데.
여기 이 세상에서, 그 요한계시록에 이르기 위해서 이 지옥 같은 이 세상에 남자와 여자에다가 생수, 신선한 물이 흐르는 샘이고, 그 여자는 그 샘에서만, 물속에서만 자라나는 식물로 묘사를 했습니다. 그걸 백합이라고 한 거예요. 백합. 어떤 번역에 보면 나리(백합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 나리 아시죠? 화투에서 5월. 어떤 곳에서는 연꽃. 어쨌든 간에 샘과, 샘의 물이 넘쳐있기에 풍부하게 자랄 수 있는 식물로 본 겁니다.
아가 2장 1절에 보면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백합으로 봐요. 그러면 남자는 뭐로 보느냐, 아가 2장 3절에 보면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이거는 선악과나무를 대체한 나무죠. 다시 말해서 모든 따먹을 수 있는 과실의 대표인, 그게 남자에요. 먹으라! 먹지 마라가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이라면, 지금에 와서는 먹으라!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생명나무는 따먹으라고 있는 거예요. 따 먹으라! 여자가 남자를 따먹는 거예요. 먹으라 이 말이죠. 그게 합일이에요. 남자는 여자한테 따먹혀야 되고 여자는 따먹고.
그렇게 해서 이 대자연에 생산된 주님의 본래의 의미가 여기 아가의 남녀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겁니다. 아까 아가 4장 12절을 읽어봤죠. 다시 읽어보면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물이 많다는 것은 생명이 넘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다 죽었고 지옥인데, 하나님의 약속이 도달되고, 약속은 하나님의 징후고 증상이니까, 하나님의 징후와 증상이 있는 그 현장에서는, 그 약속 안에서는 전부 다 썩고 살벌하고 황폐하고 사막 같고 메마르고, 우리가 말한 이 현실 속에서는 싸워야 되고 경쟁해야 되고 더 빼앗아야 되고 그것도 또 뺏기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 이것도 내가 쟁취하고 따먹으려고 노력해야 근근이 이어졌던 그 얻은 거.
하지만 그것은 전부 다 오히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많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시달리고, 또 얻어놓고 그것도 빼앗길까봐 얻은 공포. 그것뿐이죠. 넉넉함이 없어요. 넉넉함이. 거저 주는 것도 없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러한 샘물 같은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여자가 바로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여자가. 여자가 모든 마르지 않는 샘의 역할, 예수님의 의미가 담기는 거예요. 여자한테. “나는 샘입니다. 나는 그 샘에서 피어나는 하나의 백합화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비너스의 그림 같아요. 최상의 여인이 바다에서 나체로 올라오는 조각상,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림을 아시겠죠. 그런데 제가 아무리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인의 그림이 아름답다고 해도, 아프로디테가 최고의 미인이라고 해도, 아유! 이상해요. 왜 내 타입이 아닌지 별로 이쁘지가 않아요. 균형은 잡혔어요. 황금률로. 1:1.618로. 황금률로 균형은 잡혔는데, 스타일은 사는데, 뭐 온갖 좋은 장점들은 거기다가 다 집어넣어서 이미지화 시켜놓은 거예요. 가슴도 풍부하고 뭐 엉덩이도 크고 스타일도 그렇게 균형은 잡혔는데, 이상하게 저한테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 이유가 제가 복음적 안목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이거 딜리트delete, 삭제해야 됩니다. 그거 뭐야 그래. 특히 거기다가 가미하는 것은 아무리 예뻐도 20대가 끝이다. 천하의 송혜교도 30대 넘어가니까 박보검이하고 안 어울리더라.
그러니까 세월에 따라서 인간이 썩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향기가 날 그 몸에서 악취가 풍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낙원에는 바람이 불어요. 바람이 뭘 몰고 오는가, 향기를 몰고 옵니다. 샤넬 NO.5를 팍팍 몰고 와요. 발삼향을 몰고 옵니다.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오는 거예요. 왜? 여기 계시록 22장에 나온 종결된, 최종적인 나라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이게 과연 망상일까요? 소설일까요? 진짜 현실, 영원히 우리가 꿈도 꾸지 못한, 그러면서도 우리를 기다리는 현실이 있는데, 그 현실을 누가 가로막고 있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방적인 좁은 시견의 현실의 공포스러움이 이러한 넉넉함과 자유함을 지금도 악마의 술책에 의해서 전부 다 훼손당하고 있습니다.
남자라는 것은, 여기 4장 16절에 봅시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남자는 계속해서 사과나무입니다. 아가 8장 5절을 보겠습니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여전사라고 했죠. 여전사.
여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최초의, 그리고 최종적인 의미를 가졌기에, 하나님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여자는 이 세상의 어떤 남자, 어떤 권력에 굴하지 말고, 굴할 필요가 없어요. 주눅들 필요가 없어요. 고개를 들고 똑바로 세우고 당당해야 되고, 마치 적들을 지켜 겨냥하고 있는 다윗의 망대처럼. “오기만 와봐라. 작살내줄 테니까.” 아주 곱게 선 그 다윗의 망대처럼. 여인의 목덜미는 당당함의 상징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춥다고 너무 마후라가지고 감고 다니지 말고 목을 내놓고 당당함을 보여야 돼요. 이상하게 적용이 돼버렸는데.
그리고 하는 말이 아가 8장 5절,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너는 사과나무로 나에 의해서 새롭게 잉태되어야 한다.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31:22). 샘에서, 백합화 같은 그 샘에서, 백합화 그 속에서 뭐가 생산이 되었는데, 그것은 뭐냐 잃어버린 나무, 다 먹을 수 있는 나무의 대표자를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생산되는 겁니다.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죠. 선악과만 못 따먹은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쫓겨남으로 인해서 나머지기 나무도 못 따먹게 되었어요. 생명나무는 물론 못 따먹고. 이제는 그저 따먹을 수 있는, 우리가 어디로 추방이 되었는가, 죽을 때 죽더라도 살 때까지는 죽음을 향하여, 그 죽음의 공포를 만끽하면서 기어이 죽음의 저주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할 운명만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요. 죽음을 체험하라고 계속해서 꺼이꺼이 수명이 연장되는 겁니다. 산소호스 꼽고. 이게 자식의 효도가 효도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를 아주 고문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여, 지금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의 죄를 생각하면 더 살아서 고생 더 해야 돼요.” 지금 이거에요. 이거. 병원에 돈까지 갖다 주면서. 의료보험 적용시켜가면서. 얼마나 무식한지.
저는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거든요. 반대하는 입장이에요. 왜? 사형하는 권한이 인간에게는 현재 인간의 법제도를 하나님의 주신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하나님의 법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죽인 자를 죽이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정치적인 이유밖에는 없어 반대하는데. 그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뭐냐 하면은 사형이 너무 자비롭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남을 죽일 때는 너 죽고 나 죽자고 찔러 죽은 거예요. “네 인생 내가 파괴할 테니까 너 나한테 잘못 걸렸어. 재수 없이 걸렸어. 내 인생 그냥 죽으려고 하니까 억울해서 안 되니까 네 인생 파괴하고 내 인생 파괴하고 우리 그리하자.”
그래서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사람을 찔러 죽였는데,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죠. 고통스럽게 사람을 계속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또 살리는 거예요. 자기는 죽고 싶은데 안 죽이는 거예요. 세상에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어요. 살고 싶은데 사는 것은 그것보다 덜 잔인해요. 죽고 싶다 하잖아. 내가 죽고 싶다 하잖아. 못 죽게 만들어요. 사형수에게는 특히 자살방지 혜택이 아주 잘 되어 있어요. 절대로 못 죽게 했어요. 안 죽는 것이 이토록 치욕적인 삶인 줄을 생각도 못하죠.
차라리 지금 죽으면 어릴 때 고향으로 돌아가서 꿈속에서 보죠. 톰 존슨이 불렀던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Green Green Grass Of Home, 내용이 마지막 사형수에 대한 내용입니다. “내가 오늘밤 마지막인데 죽고 나게 되면 그린 그래스 오브 홈, 푸른 초원이 있는 내 고향에 묻어줘.” 유튜브에 들어가면 가사 다 번역해서 나옵니다. 사형수에도 희망을 줘야 되는데 사형수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제가 그것을 찬성하는 겁니다. 남 죽여 놓고는 그런 잔인함 정도는 받아줘야지. 그래서 찬성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려서 남자, 여자가 새로운 인류의 대표자들이에요. 그들이 합일을 함으로서 앞으로 오실 예수님께 아가서의 내용대로, 그대로 적용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여자가 되고 예수님이 남자가 되는 거예요. 어떤 여자도 대표적인 여자가 못되고 어떤 남자도 대표적인 남자가 될 수가 없어요. 이거는 왜냐하면 구약은 그림자니까. 하나의 모형이니까. 모형에서 완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모형이 실체되는, 하나님이 진짜 보시기에 기쁘신 내 아들, 그 분이 하는, 하나님의 의미가 완전히 등록된 작용과 활동에 의해서 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 이룹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자, 남자로부터 자기의 과거를 딜리트delete, 지워버리는 거예요. “더 이상 너에게는 어떠한 죄에 대해서도 묻지 않겠다.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그 용서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서 피를 흘림으로서, 피를 흘렸다는 십자가사건으로서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이야기할 것은 신약, 구약 어떤 내용이라도 그걸 압축해서 너희들에게 말한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왜 너희는 악마한테 꼬임을 당해서, 교회가 어떠니, 하늘나라 선교가 어떠니, 그런 데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오직 십자가를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여자, 그분의 남자로 이 아가적인 기능을 하도록 이 땅에서 의미를 부여받고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예언서 아가를 보았습니다. 식견 없는 우리의 좁은 의미를 담고 현실이라고 우기지 않게 해주시고, 더 크고 더 깊고 더 완료된, 완성된 의미의 사람으로서, 이제는 내가 주님을 사랑했다는 소리를 하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는 사랑한 적 없지만 주께서 화목제물로 사랑했사오니, 이제는 사랑하는 법만 저희들이 간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