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딤전후(교회를 잊어라!) 제2강(첫날저녁2) ◈ 너희들은 천국에 못 간다. 그런데 !!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는데, 첫 번째 시간에서 제가 두 가지 점을 이야기했는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엇을 분명히 했느냐 하면, 그 어떤 인간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너희들이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성경을 통해서 어떤 구상을 했던지 간에 상관없이, 그 누구라도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창세기 3장부터 일관되어있는 하나님 뜻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막아놨다가, 또 다시 터놨다가 하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무슨 방법으로도 인간은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을 수가 없는데, 물론 지금도 역시 따먹을 수가 없고 말입니다. 줘야 따먹지, 그냥은 전혀 따먹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제가 이야기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성령이 오게 되면 기존에 자기가 생각했던 것, 즉 "나는 나의 이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해석해서, 그 바탕 위에서 반드시 구원을 따내리라. 죽어서 좋은 곳에 가리라. 나는 편히 살리라" 라고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모든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 무슨 말인고 하니까, 십자가가 여기에 있고 부활이 있다고 하면, 이렇게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사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인간은 죽었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자진해서 죽은 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너희 스스로의 정체를 몰라. 너희 주제를 몰라. 내가 알려줄게" 라고 하면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와서 하나님과 만나는데, 물론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예수님 때문에 아버지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나타난 게 아니고, 아버지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 다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아버지로 나타나버리면 여기는 아들이 성립하는데,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는 언약이 여기에 적용이 된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만의 언약은,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생성되는 게 아니고, 역사 이전에 있었던, 즉 창조 이전에 있었던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그대로 여기에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즉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우리는 창세 이후의 존재이면서도 무슨 혜택을 입느냐 하면, 창세 전에 있었던 일의 혜택을 입는 존재로 탈바꿈이 된다는 겁니다. 창세 이전의 혜택을 입는 존재로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9장에 보면 야곱과 에서가 있는데, 이들의 운명은 어디서 결정되는고 하니, 야곱은 본인이 본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데, 물론 에서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야곱은 이미 사랑을 받기로 작정되어있고, 또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되어있는데, 그런 사랑과 미움을 누가 결정했는고 하니,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그렇게 결정해버렸다는 말입니다. ◈ 로마헬라의 신은, 인간의 성품을 그대로 !! 보통 우상들은, 즉 일반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신의 개념에는 누가 개입하는고 하니, 반드시 인간이 개입하게 되어있는데, 왜 그런가요? 인간이 섬기지 아니하면 어떤 신도 흐뭇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로마와 헬라의 신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와 헬라에 나오는 신들의 특징을 보게 되면,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인간의 성품을, 즉 성질이 조급한 것, 밝히는 것, 짜증내는 것, 질투하는 것, 술을 좋아하는 것, 그리고 변덕스러운 것 등등, 그런 것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나타날 때는 인간과 신 사이에는 공통점이 형성되는데, 즉 "하나님, 성질을 좀 죽이세요" 라고 하면, 하나님은 "내가 좀 죽일까? 내가 심했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인간은 "이것을 받으시고 성질을 죽이세요. 신이 되어서 칠칠치도 못하게" 라고 하면, 하나님은 다시 "미안허이. 내가 좀 너무 과했지" 라고, 그런 식으로 교류가 되고, 교제가 되는 신이 로마와 헬라의 잡신들이라는 말입니다. ◈ 어휴, 수고하십니다 !! 사실 로마와 헬라의 신들은 헬라 신이 로마 신으로 전환되었는데, 그런데 그것 말고 동양에서 무엇이 있는고 하니, 친숙한 마당에 기어다니는 귀신, 동짓달 떡 시루에 찾아오시는 귀신, 이사할 때에 택배회사의 트럭에 함께 실려오는 귀신, 애를 낳을 때의 귀신, 콩나물을 키울 때의 귀신 등등, 그런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여튼 아주 세세한 신들이 거기에 개입하게 될 때, 그들은 주로 뇌물을 챙기는 신들이라는 겁니다. 마치 60년대(?) 우리나라의 교통순경과도 같은데, 그들이 "어휴, 수고하십니다.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라고 하면, 그게 다 돈을 달라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신이 사실 우리 인간에게는 너무 편한데, 왜냐하면 그냥 주면 되니까 말입니다. 안 되는 것도 바치면 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냥 수돗물을 떠서 하면 안 되고, 정화수를 떠놓으면 효과가 더 있다는 겁니다. 또 그냥 양장을 입고 빌면 안 되고, 한복을 입고 빌어야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냥 대충 파마를 하고 수건을 뒤집어쓰고 빌면 안 되고, 머리를 단정하게 해서 빌면 효과가 더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시간이 있는데, 낮에는 싫고 밤중에, 그것도 열두 시 '땡~' 칠 때, 물론 탁상시계가 아닌 괘종시계 소리가 들릴 때, 바로 그때 "비나이다, 비나이다" 라고 하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빌 때도 손의 각도를 제대로 해야 하고 말입니다(ㅋㅋ). ◈ 너무나 다정다감한 신 !! 우리나라에 '성황당' 이라는 게 있는데, 강원도의 강릉, 울진 방면에서 안동으로 넘어올 때는 거기에 상인들이 반드시 비는 데가 있는데, 동전 몇 개를 던지고 말입니다. 그리고 경북의 청도에도 있는데, 상인들이 돌아올 때는 이윤을 많이 남기고 오라고, 그것을 '상업자본주의'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장사꾼들이 멀리 타지로 가서 장사를 잘해서 이윤을 남기고 돌아오면서, 성황당의 귀신에게 몇 푼을 던져주고, 물론 나머지는 다 자기가 묵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정다운 신이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국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을 그런 잡신으로 다 바꾸어버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창세 전이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은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뭘 하려고 그러한 것을 골치 아프게 배우느냐는 겁니다. 물론 골로새서나 로마서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뭐가 필요합니까? 정성을 다하면 복이 온다고 하는 간증도 많이 들어놨겠다, 그러니 이제는 그런 간증만 적재적소에 잘 챙기면 된다는 겁니다. 성경은 보기만 하면 잠이 오는데, 굳이 왜 보느냐는 겁니다. 안 그래도 잠이 쏟아져서 난리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신, 즉 우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 즉 '내'가 투영된 것인데, 그렇게 '내'가 생각한 이미지가 투영되면, 그것이 바로 '내'가 섬기고 싶은, '내'가 정말이지 찾고 싶은,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같은 '나'에게 가장 정다운 친구와 같은, 그런 신이라는 말입니다. ◈ 언약의 신은 '이름'으로 !! 하지만 구약성경에서는 이런 우상을 '언약이 없는 신' 이라고 하는데, 즉 시내산에서의 그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지 않는 신이라는 겁니다. 이런 언약이 없는 신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저주하지 않는 신이라는 말입니다. 즉 언약이 없는 신인 우상은 저주가 없다는 겁니다. 반면에 언약의 신은 어떠합니까? 뇌물을 받지 않는 신, 인간의 그 어떤 정성도 받지 않는 신, 당연히 이미 저주를 받는 것으로 출발하는 신, 죽여놓고 다루는 신, 즉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럴 때 비로소 가장 인간답다고 보시면서 작용하시는 신이라는 말입니다. 즉 "죽은 자를 살려내는 하나님의 솜씨를 보라" 라고 된다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말입니다. (녹취자 - 강의를 약간 수정했음) ----------------------- 그러니까 광야에서 그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음의 환경에 집어넣고는 "거기서 어떻게 살려내는가 보라. 그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 이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의 특징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찾아온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됩니까? 둘로 나뉘는데, 어떤 하나님입니까? 창세 이전에 먼저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역사 속에 구체화된 하나님이, 그것이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인데, 이것을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의 하나님을 '여호와' 라고 부르라고 하시면서 자기를 계시한다는 말입니다. ◈ 여호와 - '오직 언약대로만' !! 그래서 '여호와' 라는 이름을 부를 때는, "니가 여호와 이름을 상대하라" 라는 게 아니고, "오직 언약대로만 다루겠다" 라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통고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또한 그 언약의 하나님은 장차 오실 예수님과 아버지의 창세 전에 있었던 것을, 창세 후에 생긴 역사 속에다 집어넣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언약의 하나님은 창세 이전에 있었던 그 계획을, 창세 이후의 시간과 공간 속에 집어넣는데,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기껏 생각해봐야 시간과 공간적으로 자기 존재를 파악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말입니다. ◈ 언약은, 시공간을 무시하면서 !! 예를 들자면, 오늘 오후에도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왕의 신하가 나오는데, 자기 아이가 병이 들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예수님이 오셔서 낫게 해달라 할 때, 예수님께서 벌써 나았다고 하니까, 그 신하에 집에 돌아가서 아이를 보고 "너, 언제쯤 낫느냐?"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바로 그때 나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거기에 가서 안수를 했습니까? 그러니 이건 시공간을 무시하는 것인데, 물론 '뛰어넘는다', 혹은 '초월한다' 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고상한 말이고, 쉬운 말로 하면, '무시한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시공간을 무시할 때, 그건 예수님 마음대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언약중심으로 시공간을 무시해버린다는 말입니다. ◈ 납득이 안 되고, 소통이 되지 않는 하나님 !! 또 한 가지의 예를 들면, 제자들이 갈릴리 호숫가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서 발작을 하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한 겁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인데, 그렇게 발작을 일으켜서 배를 뒤집으려고 할 때, 제자들은 배에 물이 차면 물을 퍼내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머리 속에는 전혀 바람과 바다를 꾸짖는다는 생각을 못하는데, 즉 "바람과 바다의 주인공이 오셔서 '조용히 해. 까불지 마' 라고 한 마디만 하면 조용해질 텐데, 우리 예수님은 뭐하고 계시나?" 라는, 그런 생각을 제자들이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기껏 자기들이 알고 있는 정보 내에서, 즉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그 범위 내에서 만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바깥으로 일을 해버리면, 그게 납득이 안 되고 소통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창세 후에 태어난 존재고, 예수님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알았던 분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자꾸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팔짱을 끼고, "니가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았거든.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받거든" 라고 하시니, 이것을 인간들은 감조차 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욥을 가지고 노시는 하나님 !! 욥의 경우가 그러한데, 욥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믿음이 있는 것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작정을 했는데,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밑에서 그걸 몰라서 답답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몸부림치고 말입니다. 그런데 위에서는 사탄과 하나님이 즐기고 있는데, 마치 벌레를 툭 건드려놓고는, "여기 이 벌레가 몇 바퀴를 돌겠나? 나는 세 바퀴, 니는 네 바퀴. 이제 차보자. 음, 네 바퀴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을 가지고 노는 것인데, 그런데 이 땅에서는 인간의 인격성이 어떻고 존엄성이 어떻고 하는데, 진짜로 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뭐 하나님 형상이라고요? 형상 같은 소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모양 그 꼴을 하고 있는 것이, 그게 과연 하나님의 형상입니까?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참새 한 마리라도 안 떨어진다" 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면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참새가 떨어지게? 안 떨어지게?" 라고 하면서, 자기들의 손에 들고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은, 단순히 인간들의 호기심의 기적이 아니고 그 중심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중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향하시는 언약의 핵심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모든 천지만물이 그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친다는 말입니다. ◈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 그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는,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다" 라고 해서, 모든 만물은 교회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 다 투자되어있고, 배치되어있고, 배열되어있고, 그렇게 모든 것이 각기 제 자리에 정돈이 되어 있으면서 그리스도 몸을 하나인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만물은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교회는 몸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니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 본인을 두고 이야기하고 말입니다. (엡 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흔히 교회라고 할 때,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데, 하지만 성경에서 교회라고 할 때는 항상 그 머리 부분이 누구이냐는 것이 중요한데, 즉 예수님이 머리가 되신다면 그것이 교회고, 그런 예수님의 교회라고 하면,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게 그 머리에 종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머리에 종속이 되어있으면, 모든 은총과 혜택과 지시와 명령은 모두 누구에게 쏟아지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쏟아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차후적으로 그렇게 해석이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설명을 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갖고 있는 언약인데, 그 언약중심으로 언약이 어디에 개입된다고 했습니까? 창세 전의 언약이 창세 후에 만들어진 인간세계에 개입될 때, 여기서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기는데, 바로 그 충돌이 생긴 분화구에 교회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 대충돌이 생기게 되면 !! 마치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 하나가 멕시코의 우카탄 반도를 직경 2키로짜리로 쳐버리니까, 그 여파로 공룡이 모두 멸망했다고 진화론자들은 주장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 다음부터 빙하기가 생기고 하는 이론이 있는데, 어쨌든 간에 계산을 해보면 엄청난 에너지 파워가 온 지구상을 덮어서, 그렇게 대기권을 뒤덮고 있으니, 공룡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완전히 몰살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때 사람은 죽었을까요? 안 죽었을까요? 공룡시대에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ㅋㅋ). 제가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세계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한 엄청난 충돌을 발생시킨다는 겁니다. 충돌을 말입니다. 그 흔적을 '피'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혹시 '피' 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지금부터 '피'의 흔적을 !! 그것을 창세기 4장부터 시작해보면,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 물론 가인은 이 언약을 모르는데, 그렇게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창세 후에 가인이 갖고 있던 나름대로의 하나님 개념이 있었다는 겁니다. 즉 바치면 좋아하고 입이 째지고, 그러나 안 바치면 시큰둥하니 성을 내는, 그런 신이란 말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래서 장마철이 끝났는데도 비가 계속해서 올 때는, "이것은 뭔가 신이 성질이 더러워서 시큰둥하니, 우리가 처녀를 공양을 하든지 해서 뭔가 해야만 한다" 라고, 그렇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6세기부터 멕시코의 마야문명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했는데, 사람을 제단에다 바쳤다는 겁니다. 그것은 완전히 도박인데, 그렇게 바쳐서 비가 오면 왕과 제사장은 환영을 받고, 만약에 처녀공양을 했는데도 비가 오지 않으면 그들은 몰살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야문명이 망하고 말았는데 말입니다. ◈ 목사의 목이라도 쳐라 !! 그들은 진지했는데, 장난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한국교회처럼 십일조로 장난이나 치고, 즉 돈이 나오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게 아닌데, 무조건 믿는다는 겁니다. 십일조를 하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이 나온다고 하면, 실제로 장부에다 십일조로 돈 계산을 하고, 그래서 몇 달 후에는 그 돈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안 나오면 목사의 목을 쳐야 되는데, 목사가 "다른 걸로 복을 줄 겁니다" 라는 따위의 소리로 변명을 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현찰박치기인데, 이쪽이 현찰을 냈으면 저쪽도 현찰을 내놔야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영 돈이 없으면 로또를 사던지 뭘 하던지 해서 내놔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과 함께 있었는데, 그래서 자기와 함께 있는 그 신이 틀린다고 하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쉽게 말해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들에게는 신이 있기 때문에, 그 신을 믿는 민족은 반드시 승리하고 축복을 받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마르둑 신이 여호와를 이겼을 때, 그 바벨론 왕이 그 얼마나 자만심이 대단했는지 모르는데, 그렇게 '여호와' 라는 신을 이겼기 때문에, 성전에 있던 제구와 기구들을 자기들의 전리품으로 여기고 자기들 창고에다 가득하게 채웠다는 겁니다. 즉 "어디, 감히 사이비 신이 진짜인 우리 마르둑 신을 이기려고 까불기는 까불어!" 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 가인아, 나는 안 받겠다 !! 이처럼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제새를 드리는 신은 이미 주어진 기존의 하나님과 결속되어 있으니, 즉 "하나님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까,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라고 해서 바치는 제사라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추수감사절에 드리는 예물이나 감사헌금과도 같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번에 경찰대 특차인데, 거기에 합격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순수한 마음에서 하는 것이니 보답을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보답은 챙겨놓고서 시작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보답을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헌금을 했으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냥 받으시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용하는고 하니, "나는 안 받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고 하면, "일체 인간의 것을 받지 않는 하나님이 곧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라는 것을 믿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징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받지 않는데, 그러니 "역시 제 것은 안 받는군요" 라고 나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어, 안 받아? 니가 나의 것을 안 받아?" 라고 나오면, 그것이 바로 저주를 받는 것이란 말입니다. ◈ 그런데 왜 아벨의 것은 받으시나요? 물론 모든 것을 다 받지 않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동생이 바친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형이 그만 동생을 머리로 받아버린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지상에 두 개의 파가 생겨나는데, 즉 하나님이 개입을 안 했으면 절대로 형제간에 싸울 리가 없는데, 그런데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기준을 만들어서 갈라지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 아벨을 죽임으로서, '나도 죽는다' !!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창세 전의 언약이 창세 후의 세상에 개입될 때, 모델이 되는 하나의 케이스를 만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델이 되는 케이스는 아벨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 손에 의해서 아벨을 죽여 버린다는 겁니다. 즉 아벨에게서 피를 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오실 메시야는 사가랴와 아벨의 피를 따라서, 즉 "그 노선 따라서 나도 죽는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까, 이처럼 가짜 하나님을 진짜라고 우기는 인간들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인데, 그 피가 바로 십자가의 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해서 죽은 분만이 제대로 아버지를 알고, 그 외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등은 전부가 아버지를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사실 모르는 정도가 아니고 필히 가해자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가 말입니다. ◈ 아들의 영을 받았으니 !!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그때는 너희가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아들의 영을 받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이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인데, 즉 예수님의 영을 받아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영을 받아버리면,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자기를 쳐다보지 않고 누구를 보는고 하면, "아들이 될 수 없는 인간이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이 모든 혜택과 공로는 맏아들이 되시는 예수님 덕분이구나. 그래서 내가 아들의 영을 받게 되었구나" 라고 하면서,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것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즉 철저하게 예수님에게 종속이 된다는 말입니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창세 전에 이미 계획했던 하나님의 교회인데, 그 창세 전에 보관해 놓았던 교회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는 어떤 차질이 있을 수가 없는데, 완벽하게 계획대로 되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전혀 차질이 없다는 말은, "신이여, 나에게 오시옵소서" 라고 해서 신이 달려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친히 침투하고 개입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공수부대와도 같은데, 그냥 적진에 깊숙하게 투입되어서 적의 후방을 마구 교란한다는 말입니다. 즉 "제군들, 우리 특수부대의 임무는 적의 후방교란이다. 동사무소에서 도시락만 까먹는 게 우리의 전부가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바로 그 임무를 사도행전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으로서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았던 그 코스를 그대로 되풀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되풀이되는 것을 '부활의 흔적' 이라고 하는데, 즉 부활되었기 때문에 되풀이가, 즉 반복이 된다는 말입니다. ◈ 부활은, 예수님의 삶이 지상에서 되풀이되는 것 그러므로 이 '부활' 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동네 말고 다른 동네에 가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를 되풀이 되게 만드는, 그러한 상태를 두고서 하나님의 나라, 즉 부활의 나라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항상 되풀이되는 것을 두고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으면 여러분이 아는데, 뭔가 늘 되풀이되는 어떤 초점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십 년을 믿던, 이십 년을 믿던, 계속해서 되풀이가 되면서 마지막 증인이 되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이 뭡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 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 7월 22일이라면, 22일 후에는 몰라도 됩니까? 7월 23일에도 무엇이 보입니까? 십자가라는 겁니다. 24일도 십자가, 25일도 십자가, 그래서 다 합하면, "토탈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 외에 너희들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 십자가 마을의 비밀이 되어야 하고 말입니다. (고전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창세 전이 창조세계에 침투했던 결과가, 곧 '피' !! 바로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창세 이전의 아버지와 아들만 알았던 계획이, 창세 이후의 설치되어있는 창조세계에 침투했던 결과라는 겁니다. 그것이 이 '피' 라는 한 글자에서 모두 다 드러난다는 겁니다. '피' 라는 한 글자에서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 강도란 이유 때문에 지옥에 갑니까? 이건 하나의 퀴즈인데 한번 맞춰보세요. 즉 "강도란 이유 때문에 지옥에 갑니까? 안 갑니까?" 라는 것인데, 쉽지요? 강도란 이유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닌데, 그러면 강도는 다 천국에 갑니까? 물론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강도라고 해도 지옥에 가는 강도가 있고, 또한 천국에 가는 강도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강도라는 직업이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데 영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매우 간단한 문제인데, 창기 중에서도 천당에 가는 창기, 또 지옥에 가는 창기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창기라는 직업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 그러면, 성령의 열매란 뭘까요? 그러면 성령의 열매란 게 뭘까요? 성령의 열매란 바로 방금 이야기한 겁니다. 즉 "내 행함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구원은 십자가로만 이뤄진다" 라는 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 열매가 있을 때, 다른 쪽에서 볼 때 그게 온유하게 보이고, 자비롭게 보이고, 양선으로 보이고, 또 형제우애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함이나 자신의 직업이 무시되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반대로 자기가 행한 것을 무시하지 아니하면 그게 육의 열매가 된다는 겁니다. 시기와 질투와 같은 것을 사실 우리 십자가 마을에서 많이 보게 되는데(ㅋㅋ), 질투와 당을 짓는 것과 조롱과 미움 등등,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를 무시하지 말라. 이래도 성도다" 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성도가 명사로 해서 목적어(?) 구실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성도의 주체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기와 성도가 그만 동급이 되어버리는데,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성도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에게 가있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전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성도 된 나이다" 라는 겁니다. 즉 성도가 먼저고 그 결과물로 '내'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기 이전에는 "나는 천국에 갈 거야" 라고 하다가, 이제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뭐라고 합니까? "천국에 간 사람이 바로 나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성도는, 동사가 아닌 'to부정사' !! 문법이 또 나와야 하는데, 이왕 한 것 계속해서 해보면(ㅋㅋ), 즉 "나는 무엇무엇을 한다" 라고 하면 동사가 되는데, 창세 이후의 인간들은 이것밖에 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즉 "내가 무엇무엇을 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하지 않으면 그런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 라고 본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기도를 하지 않은 게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만약 참새라고 하면, 즉 "내가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라는 것이 곧 참새의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참새님, 그 말이 맞아요? ㅋㅋ)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예수님께서는 "내 뜻이 아니면, 즉 내 허락이 없으면 참새도 떨어지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이 주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것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무엇을 한다" 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행해야 되는 것이 곧 나다" 라고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to부정사' 라고 하는데, 즉 동사가 아닌 명사나 형용사의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to부정사'에는 뭐가 없는고 하니, 시제가 없다는 겁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이 없고, 전부가 다 완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완료의 성격을 말입니다. 이 'to부정사'를 굳이 번역을 하면 "무엇무엇을 한 것" 이라고 되는데, 즉 "무엇무엇을 한 것은 성령에 의해서 내가 되게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준비한 성도가 바로 '내'가 되도록 그 중간에 성령께서 개입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부활로 가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 부활의 세계에서 준비된, 즉 창세 전에 준비된 것을 창세 후에 있는 역사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입혀주는 것도 누구의 몫이라는 말입니까? 역시 성령이 오셔서 "너는 창세 전에 예정된, 그 택한 놈이 맞아"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준다는 말입니다. ◈ 드디어 '충돌'이 !! 그렇다면 거기서 어떤 충돌이 일어납니까? 평소에 "내가 잘 알아서 구원을 받겠다" 라는 자기 의도와, 성령께서 오셔서 이미 통보하는 의도와는 충돌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하여튼 구원해줘도 문제인데, 그렇게 구원을 해줘도 자기의 가치를 무시했다고 삐치는 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내성' 이라고 하는데, 즉 자기 속에 잠재되어 왔던 성품이나 성격인데, 그리고 주변에서 가르쳤던 것, 또한 주변에서 압박을 가했던 것, 그렇게 법적으로 구축된 것들이 있어서, 코앞에 갖다 줘도 "내가 먹어야만 내 것이 된다" 라는 인식이 가득하다는 겁니다.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왔는데, 우리는 손으로 집으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모든 구원, 믿음, 율법은 환상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 속의 율법, '우리' 속의 구원, '우리' 속의 부활, '우리' 속의 성령, 그렇게 되어야 되는데, 즉 전부 다 '내'가 이것을 잡아야만 된다는 겁니다. '우리' 속의 예수님인데 '내'가 믿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침 9시에 믿으려고 하고, 11시가 되어서 또 다시 믿으려하고, 그야말로 완전히 미쳤다는 겁니다. 주님이 어디 나비입니까? 잡는다고 해서 잡히느냐는 말입니다. ◈ 하나님은, 친절하게 이스라엘이란 선배님들을 통해서 !! 이런 우리 인간의 모든 실수와 오류를, 그게 실수며 오류며 잘못된 것이라고, 정말 하나님께서 친절하게도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들의 실패담을 통해서 똑똑하게 우리에게 "너거 선배들이 이렇게 까불다가 다 멸망했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데, 즉 "아하, 이해서 망했구나. 아하, 저래서 망했구나. 저렇게 말씀을 지킨다고 하다가, 그 말씀을 지키는 것 때문에 망했구나" 라고 말입니다. 구약의 사울의 경우에, 사울은 자기에게 왕이 주니까, 자기가 진짜 왕인 줄로 알고, 즉 "준비된 왕이 너다" 라고 하니까, 사울은 "나는 왕이다" 라고, 그렇게 바뀌어 버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게 했다는 의미에서 "너는 왕이다" 라고,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그만 하나님은 빼버리고, "내가 왕이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나도 목사다 ?? 이게 디모데전후서에도 보면 나오는데, 그게 목사의 경우인데 말입니다. 즉 주께서 목사가 되게 하시니까 "나는 목사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혼자 목사를 하라는 겁니다(ㅋㅋ). 그게 아니고, "목사는 이런 것이다" 라고 할 때는, 그게 조건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교회다", 혹은 "이것이 목사다" 라고 할 때는, 특정한 인간을 두고서 목사라고 하지 않고, "목사 됨은 이것이다" 라고 해서, 그 목사 됨에 부합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만들어서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목사를 전부 다 탐을 내는데, 특히 여자들이 말입니다. 여자들이 왜 목사가 되려고 그렇게 안달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는데, 기존에 있는 목사들도 때려 치워야할 판인데 말입니다. 무엇이 그게 그렇게 부러운지 말입니다. ◈ 하지만, 인간이 삼킨 것은 곧 괴물 !! 무릇 자기 것을 가지지 않으면 자기 주체성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 인간들의 육적인 모습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면 그것을 자기의 소유화를 할 때 비로소 안심을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들어온 것들이 그냥 무생물이 아니고, 뭔가 물컹물컹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게 조금은 흉측한 비유지만 해야만 된다는 겁니다. 즉 어떤 갓난아이가 현관에서 울고 있으니까, 너무나도 불쌍해서 데리고 와서 열심히 키웠는데, 그런데 어느 날 그만 새벽 2시에 괴물로 변해서 안방에서 자고 있는 자기 양부모를 잡아먹었다고 하는, 그야말로 '전설의 고향3'에 나올 법한 내용인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소유라고 여겼던 것이 괴물로 변하는데, 이것은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상식인데 말입니다. 즉 어릴 때의 그때 그 자식인 줄 알았더니만, 그 자식이 집안을 말아먹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난처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지 싶은데, "우리가 괴물을 키웠어. 괴물을!" 라고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ㅋㅋ). ◈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주도권이 없어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 세상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주도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물론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주도권은 예수님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도 "내 몸을 내 것이다" 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겁니다. ◈ 성령충만도, 역시 '되풀이' !! 그런 입장에서 사도행전의 성령충만을 생각해보면, 즉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모든 스케줄과 그 모든 것이 무슨 모델을 따르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한 그 코스를, 그것을 이제는 교회 자체가 그대로 되풀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병을 고치고 해도 말입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의 손수건 만져도 살아나고 했는데, 세 번째 전도여행 때에 소아시아 북쪽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앞치마나 손수건과 같은 것을 만져도 살아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누가 놀랐겠습니까? 살아난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도바울입니까? 사실 사도바울 본인이 놀랐는데, 즉 "주여, 이건 아니잖아요. 이건 오바입니다. 제가 납득되게 해줘야 하는데, 이렇게 앞서 가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라는 겁니다. 그 말은 무엇이냐 하면, 무엇이든지 주님은 항상 앞서가신다는 말입니다. ◈ 바울아, 너는 로마에 가야만 된다 !! 사도바울은, 자기는 재판을 그냥 좋게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기어이 주님께 꿰어서 "너는 로마에 가야만 된다" 라고 되는데, 그가 로마에 왜 갑니까? 로마의 휴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거기에 어여쁜 공주가 있습니까? 로마에 왜 가느냐는 겁니다. 도대체 로마에 가는 게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그것은 바로 창세 전의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창세 후에 태어난 사도바울은 자기 계획에 없던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들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부술 때 우리는 고마워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일이 그렇게 진행이 되면, 우리는 "아하, 주께서 깊숙이 개입하시는구나" 라고 여기면 되니 말입니다. ◈ 십자가가 없이 부활로 가는 법은 없어 !! 그것은 바로 아들이 아닌 자, 또는 율법의 종이 된, 여기 '율법의 종'은 마귀의 종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아들이 아닌 자를 무엇으로 바꿉니까? 아들을 만드는데, 이미 그 모델이 있다는 겁니다. 그 아들의 모델로, 즉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살았던 것을 모델로 아들이 아닌 자를 바꾸는데, 여기에 필히 고난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결국 십자가로 데려가서 부활에 이르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러니 그냥 십자가도 없이 부활로 바로 가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도 고난이고, 이것도 역시 고난이라고 하면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의 고난은, "고난을 받는다" 라는 것이 되지만, 여기서는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그러면 그것은 몇 살 때의 십자가입니까? 몇 살 때가 아니라, 날마다, 즉 매일같이 십자가라는 겁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즉 "날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 라고 되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매일같이 그렇게 하는데,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자은, ㅋㅋ)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리고 고린도후서에 보면,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죽음 가운데 넘기운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 안에서 죽음에 넘기는 그 능력은, 죽이는 능력이 아니고 살려주는 능력인데, 그것이 지상에서는 죽는 모습으로 온다는 겁니다. 죽음으로 말입니다.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게 죽는 것이 물론 불교에서는 '자기 부정'이지만, 하지만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더욱 더 감사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나, 죽는다. 나, 죽는다" 라고 하는 것은 화병이고, 혹은 "더는 못 살겠다. 차라리 죽여라" 라는 것은 한이 맺혀서 하는 짓이고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성령에 의해서 나온 것이란 말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아테네의 전도를 위해서 !!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항상 다음과 같은 말로 마감을 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즉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3주 동안을 있으면서 아주 혼이 났다는 겁니다. 빌립보에서 옥에 갇혀서 디모데와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는데, 그때 실라가 와서 풀려나서 데살로니가로 갔는데, 그들이 거기까지 따라와서 애를 먹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아테네로 빼돌렸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유대인들이 나쁜 놈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루빨리 사도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사태를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데살로니가는 이 정도면 되었고, 이제 슬슬 아테네로 한번 가볼까? 내가 가야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전도의 주체가 성령이 아니고 그만 사도바울 본인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도가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하는 그만 예수 사업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그런 사업을 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괜히 누구처럼(?) 고생만 죽도록 하지 말입니다. ◈ 여기에 두 개의 매트리스가 있는데 !! 창세 전의 계획이 창세 후에 있는 세상을 덮어야 된다고 했는데, 그것을 덮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 위에 침대의 매트리스가 있는데, 그 밑에 또 하나의 매트리스가 오게 되면, 여기 밑에서 번쩍번쩍 정전기가 일어나듯이, 이와 같이 창세 이전의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면, 여기 밑의 창세 이후의 세상에서는 불꽃이 튄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질적'이니 말입니다. 즉 성질이 다른 세계가 마주치니까 이질적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현상을 '종말론적 현상'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니고, 신학계에서는 종말이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을 종말론적 현상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땅은, 육을 드러내기 위한 필수환경 !! 다시 말해서, 창세 이전의 내용이 아래 창세 이후의 것과 부딪치게 되면 번쩍번쩍할 때마다 틈 사이에서 십자가 복음이 계속해서 전파가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십자가 복음이 전파가 된다면, 여기에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땅이라는 게 무엇이냐는 겁니다. 이 땅이 무엇인고 하니, 육을 육이 되게 드러내기 위한 필수환경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육은 무엇과 친화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육은 땅 없으면 살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처음에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대지, 펄벅의 유명한 소설 '대지'가 생각이 나는데 말입니다. 즉 넓은 땅과 육과의 만남이었는데, 여기에서 인간은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 땅과 육에 대한 개념을 가진 사람은? 이러한 땅과 육에 대한 개념은, 종말론적인 안목에서 볼 때는, 이렇게 육이 되어야 되고 또한 땅이 된다는 안목을 가졌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미 이러한 것에서 벗어난 인물만이 육과 땅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건 육이다. 이건 땅이다" 라고 하면, 그렇다면 육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육을 육으로 고칠 수 있습니까? 육은 육으로 못 고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육인데, 즉 제 아무리 도를 닦고 성화가 되어도 육에서 난 것은 육이라는 겁니다. 즉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인데, 즉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상스러운 말로 해서, 그야말로 지랄을 하는데, 하지만 만날 그렇게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까불고 찢고 지랄을 해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겁니다. 소용없는 짓이란 말입니다. 헌금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성질대로 하라는 겁니다. 하여튼 육의 성질이 모두 다 나오는데, 그러니 그냥 사는 것이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 왜 자기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는가? 그래서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그렇게 사는 것이 영광이고, 그게 곧 예배인데, 그런데 사는 것 중에서 따로 분리해서 예배라고 끄집어내면 그야말로 지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걸 왜 끄집어내는지, 그 의도가 뭐냐는 겁니다. 육에서 육을 분리하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게 분류하는 그 인간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육이 육을 분류해봤자, 그게 곧 육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예를 들어서, 축구선수도 바보고, 상대방도 바보고, 심판도 바보고, 채점하는 사람도 바보고, 그러면 그게 축구가 아니라는 겁니다. 옛날 한자말로 '축구' 라고 하는 것은 바보라는 뜻인데,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축구를 한다고 얼마나 놀리셨는지 모르는데, "바보짓을 하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영구, 없~다" 라는 것을 축구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ㅋㅋ). 아무튼 육 가운서 고상한 육과 무슨 우아한 육이 있어요? 육도 우아한 육이 있고, 또 지저분한 육이 따로 있느냐는 겁니다. 사람이 몸의 컨디션이 좋으면 우아하지 말라고 해도 우아하게 되어있는데, 즉 여자가 몸이 건강하면 화장발을 잘 받고, 반면에 몸이 피곤하면 루즈도 옆으로 삐쳐 나오고 입술도 튀어나와서, 그만 광녀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성질이 나서 화장을 하다보니 말입니다(ㅋㅋ). ◈ 육은 육이고, 땅은 땅이다 !! 그러니 육을 육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렇다면 육이니 포기하라는 말인가요? 그게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육을 육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포기를 했다고 해서 성령을 받은 게 아니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아, 저건 육이구나"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육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영은 무엇입니까? '영' 이라는 것은 땅을 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 영이라는 겁니다. 즉 "땅은 땅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간단합니까? 어떻게 성령을 받은 티가 팍팍 나지 않습니까? 아니면 침만 팍팍 티고 있습니까? (ㅋㅋ) 하박국서에 보면, "성전에 있는 자는 잠잠할지어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흔히 목사들이 하는 말이, "여러분,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잠잠할지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 목사가 더 시끄럽다는 말입니다. 괜히 음성 에너지 더 포함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즉 "니가 더 시끄러워!" 라는 겁니다. ◈ 사도행전은 항상 종말을 확인시키기에 !! 그러니 사도행전은 항상 종말을 확인시키기 때문에, 사도들을 동원해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게 하는데,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거룩한(?) 대지를 땅으로 바꾸기 위해서, 즉 모든 인간을 육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통해서 시킨다는 겁니다. 땅으로 바꾸기 위해서 말입니다. 즉 그들에게 대지를 땅으로 바꾸게 하고, 그러니까 저주받은 땅인데, 그러한 인간을 육으로 바꾸는 것이 곧 새 언약이고, 바로 여기에 일하시는 것이 곧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곧 말씀인데, 복음 또는 말씀이 사도행전에 개입해버리면, 이런 땅이 생기고, 육이 생기는데, 그런데 무엇도 생기느냐 하면, 말씀의 개입으로 인해서 창세 이전의 예정된 자가, 즉 육도 생기지만 놀랍게도 기적적으로 영적 존재가 생겨버린다는 겁니다. 그 누구라도 십자가 복음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이 십자가를 인간의 힘으로 과연 믿을 수가 있고, 또한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까? 창세 전에 이미 선택이 되었다는 것을 인간 힘으로 알아들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 '내'가 아닌, 주께서 선택했다 !! 다시 하겠는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선택했다" 라는 것을 믿어지는 사람이 곧 선택된 사람이란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한 육적인 선택론인데, 자기밖에 모르는, 즉 자기의 구원밖에 모르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구원론으로 대기하고 있다가, "성경말씀에 어떤 점이 나를 구원할까? 순종해야 되겠구나. 이걸 채택하면 되겠다" 라고 해서, 자기가 그것을 채택해서 자기 마음대로 반창고를 붙이듯이 붙여놓으니, 바람이 부니까 다 떨어져나가고 만다는 겁니다. 즉 성령의 바람이 불게 되면 인간들의 반창고는 다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믿습니다' 라는 반창고도 그렇고 말입니다. 우리교회도 사건이 한번 발생하게 되면, 그런 반창고들이 다 떨어져나간다는 겁니다. 지금 반창고가 교회 창고에 엄청 쌓여있는데, 그 반창고마다 이름이 다 붙어있는데, 누구에게서 떨어진 것인지 말입니다. 투표하다가 삐쳐서 떨어져나간 반창고도 있고, 아무튼 반창고가 수북하게 쌓여있다는 겁니다. 떨어진 반창고가 붙어있는 반창고보다 훨씬 더 많은데, 교회가 오픈한지 10년이 되니 말입니다(ㅋㅋ). ◈ 잉태되지 못한 사람 !! 다시 하겠는데, 뭔가 하늘에서 개입되어버리면, 성령에 의해서 나온 사람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것이 율법의 노선이 아니고 성령의 노선인데, 그러니까 그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잉태되지 못한 사람' 이란 겁니다. 그렇게 잉태도 되지 못했는데 아이가 어디서 생긴다는 말입니까? 전혀 말이 안 되는데, 그러니까 십자가를 믿는 것이 놀라운 기적이란 말입니다. 누군가가 "실례합니다. 어디서 잉태했습니까?" 라고 하면, "저는 잉태된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건 뒤통수를 맞을 일이라는 겁니다. 즉 "어느 산부인과 출신입니까?" 라고 하는데, "잉태된 적 없는데요" 라고 하면,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게 믿어지지 않는다면, 당신이 십자가를 믿는 것도 거짓말이야" 라고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육으로 난 그 어떤 죄도 육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육으로 해결하지 못한 그 죄를 예수님의 영적인 육, 즉 예수님 몸의 대신 피 흘리심으로 이미 게임오버인데, 즉 끝나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 더 이상 자기 육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게 되는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씀이 거기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내일 봅시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니 이층침대가 복음적이라는 말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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