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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의 철폐(엡2;13-14) 1903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3. 31. 18:13
2019-03-31 12:44:00조회 : 57         
   담의 철폐 190331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담의 철폐(에베소서 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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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9-03-31 13:26 
담의 철폐 

2019년 3월 31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2:13-14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사도는 진지합니다. 그는 다른 현실관을 제시합니다. 심각합니다. 기존의 인간의 몸 중심의 현실을 거짓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즉 인간들은 기존의 자기 몸을 어떻게 잘 간수했다가 그대로 천국에 올려놓을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도 여분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인간이 자신의 몸을 자신이 관리 하에 두어서는 소용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예수님의 피’에 둡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를 흘리시고 되돌아간 사건은 곧 인간의 현실관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 자신도 인간 몸 중심의 현실관에 심취한 적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 13-14에 보면,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교의 신학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으니 그 율법을 지키면 자신에게 유익이 있고 율법을 못 지키면 장래에 저주가 있다는 신학입니다. 하지만 빌립보서 1:21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기존의 자기 몸에 다른 분이 들어와 사신다고 말합니다. 

성도는 주님의 숙주가 되고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님의 나타나심만이 주님이 자기 몸에 들어온 목적에 부합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미완성이 아니라 이미 완성입니다. 원래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고 나온 몸은 성경에 의하면 흙에서 나온 몸이라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즉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 몸인 겁니다. 천국에서는 이 몸 말고 다른 몸을 요구하십니다. 그 몸은 이 땅에서 죽고 다시 살아난 몸에만 국한 됩니다. 다른 몸은 아니됩니다. 그래서 사도에게 있어 ‘죽는 것이 유익’인 겁니다. 처음에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악마에 아담 몸에 무슨 짓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개인 몸 중심으로 ‘의미 구축’을 시도하는 겁니다. 즉 내 몸과 내 인생이 그 자체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우기면서 살도록 했습니다. 그 의미는 선과 악의 지식을 가지고 짜냅니다. 그 예가 사사기 19:25-28에 나옵니다.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동틀 때에 여인이 그 주인의 우거한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누웠더라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지고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어떤 레위인의 첩이 레위인과 더불어 여행하다가 베냐민 지파의 부랑배들에게 걸려서 강간당해 살해당합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양심에 호소하고자 자기 아들의 시신을 12토막 내어 그것은 각 지파의 경찰서에다 보냅니다. 이스라엘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부 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베냐민 지파가 사라지게 된 겁니다. 이렇게 되면 12지파가 대대로 복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들의 정의감에 의해서 깨어져버린 모순이 발생한 겁니다. 즉 이들의 잘못은, 인간의 몸으로 행한 것이 무슨 긍정적 의미가 있다고 자부한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대 사회 내부에 이러한 의식이 계속 예수님 때까지 흘러오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가 되기 전에 그 사상에 편승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배척당하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에 접하게 되자, 바로 인간 내부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보고서 자신들 자체가 담의 역할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5 
-16에 보면,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고 구원에 자부심을 가진 이 유대인 속에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요 8:14) 

즉 ‘담’이란 끝까지 그 차단성을 밀어붙이는 겁니다. 인간들은 인간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감히 하나님만이 사시고 천사들이 사는 그 세계에 들어갈 처지가 아닌 겁니다. 인간들이 예상하는 천국이란 기껏 지상 생활의 연장에 불과한 겁니다. 세상에서 좋다는 것도 실은 천국에서는 무가치한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삼층천를 다녀온 사람입니다. 헛되고 헛된 세상 살아가 더 이상 자기에게 유혹거리가 아닙니다. 얼마나 천국이 좋았으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했을까요. 요한복음 8:23에서는 그 차단성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이 진정한 ‘담’입니다. 오직 주님의 진리만이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요 32) 주님의 피 앞에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더 이상 자신들의 몸의 구원은 의미가 없습니다.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피에 녹아들어가게 되면 거기서는 ‘흙에서 시작되는 몸’이 아닌 ‘피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 몸에서 거품을 빼야합니다. 의미를 쪽 빼고 무의미한 채 살아야 합니다. 의미 있는 것은 곧 오직 자기 안에 흐르는 피 뿐입니다. 즉 성도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는 혈관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몸 자체가 썩은 겁니다. 성령께서는 그 썩은 몸으로 영생을 생산하십니다.(갈 6: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무의미함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9-03-31 21:05:05조회 : 6         
19강-엡 2장 13-14절(담의 철폐)190331-이 근호 목사이름 : 오용익 (IP:61.84.208.92)
19강-엡 2장 13-14절(담의 철폐)1903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3-14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사도가 편지를 통해서 전하는 내용은 굉장히 진지합니다. 사도는 농담을 할 줄 몰라요. 진정성이 있지요. 왜 사도가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자기 입에서 내 뱉는 말이 모두 현실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내뱉는 그 말을 현실로 인정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엉뚱한 것을 현실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현실에 대해서 어떤 모습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사도를 통해서 너희가 들어야 한다는 것이 사도의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엄청난 파멸이 기다리고 있고, 저주가 기다리고 있다고 사도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도의 자신감 같은 것은 어디에 근거가 있느냐? 사도도 하나의 개인이고 개인의 사견이 있을 만한데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하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유일무이한, 이 세상 누구에게도 발생되지 않는 일이 예수님을 통해서 발생되었고, 사도는 그것을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지막 카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러한 사도의 주장은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아테네에서 설교한 내용이 나와 있는데, 그동안 많이 봐줬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참고 인내하고 그들의 죄에 대해서 묻지도 않으면서 은혜를 주셨는데 이제는 그 인내성이 한계에 이르렀고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하나의 증거를 주신 거예요. 하나의 계시지요.

하나의 증거를 줬는데 그 증거가 뭐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보내시고 그 분을 죽었다가 다시 사흘 만에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더 이상의 주님의 자비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현실과는 너무나 상충되지요. 기존의 현실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에 대해서 모든 사람에게 다 인터뷰하면서 물을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산 속에서 홀로 자살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한 증거가 예수님의 죽으심이거든요. 그래서 인간들은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예수님의 죽으심에 근거해서 따져보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현실이 아니라는 쪽으로 이미 인간의 정신세계는 그 누구로부터 장악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내 몸을 추스르기 위해서, 나는 내 몸 관리하게 위해서 산다. 이것이 강력하게 인간세계의 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 몸 중심이니까 내 중심이지요. 몸으로 태어나서, 인간은 몸으로 짊어지고, 몸에 묻혀 살다가 몸의 소멸과 함께 결국은 소멸되고 상실되는 인간. 태어날 때도 몸으로 태어났다고 죽을 때도 몸으로 죽는다.

이게 우리가 아는 인간의 현실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흙으로부터 만들어져서 흙으로 간다. 그게 하나님이 주신 현실이라는 거예요.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 챙기는 그 몸, 그거 어디에 쓸모 있다고 생각하느냐? 인간들의 가장 큰 실수가 뭐냐 하면, 이 몸 가지고 그대로 천국을 뚫어내겠다고 하는 것이 실수인 거예요. 

이 몸 가지고 교회 나오면 교회에서는 이 몸을 그대로 구원해주겠다고 교회가 그렇게 약속을 하는데 그것은 계시도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천국을 뚫는 몸은 이 몸이 아니고 몸이 따로 있는 겁니다. 그 몸을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야기해요. 기존의 그리스도 몸을 사람들은 생각 안하고 사람들은 태어나기를 이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줄곧 이 몸만 붙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몸, 이 몸 가지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예배참석하고, 기도하고, 이 몸만 무조건 잘되면 뭔가 만사가 잘되고 그 끝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나도 옛날에 그렇게 알았다는 거예요. 자기도 그렇게 알았어요. 그런데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찾아오고 난 뒤에는 현실을 보는 안목이 달라져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죽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다. 죽는 것이 나에게 실익이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이 세상에서 챙기고 또 챙기고 남에게 손해 보는 짓 안하고 이익만 챙겨왔는데 내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좋은 이익은 뭐냐? 내가 죽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챙기려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이 몸을 포기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이익 되는 일이 되는 거예요. 죽는 것이 유익함이라.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가 자라고 살고 활동하는 숙주가 되기 때문에. 하나의 운반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몸은 그대로인데 알맹이가 바뀐 거지요. 속이 바뀐 거예요.

내 몸은 항상 미완성에서부터 미완성으로 시도를 해야 되지만 내 몸에 그리스도가 들어온다면 그리스도는 이미 완료에요. 손댈 것도 없고 보탤 것도 없습니다. 내 몸을 가지고 천당 가려고 한다면, 갑자기 제가 아는 노래가 생각나요.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래에요. 죽은 김수환 추기경이 제일 좋아한다는 노래. 인생은 미완성.

아마 죽을 때까지 미완성일 거예요.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합니까? 완성을 보지도 못하고 미완성을 가지고 작업을 해보려고 그렇게 천주님 섬기고, 성당 다니고, 교회충성봉사 했는데 결말은 미완성에서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을, 흙에서부터 흙으로 가는 것을 왜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나는 사느냐 죽느냐의 이 둘 가운데서 선택하려면 나는 죽는 것을 선택한다. 이것이 나의 남아 있는 유일한 욕망이다. 

오늘 본문이 난해하기 이를 데가 없지요. 에베소서 전체가 다 난해하지만 오늘 본문도 못지 않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여기서 두 사람이 가까워질 때는 커피 집만 있으면 돼요. 

편지나 메일 보내면 가까워집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다는 것은 서로 아는 사이가 된다는 뜻인데 아는 사이가 될 때에 그저 식사같이 하고, 이야기 나누고, 친하게 지내고, 늘 자주 만나는 것, 우리가 아는 가까워짐은 그 가까워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가까워졌다고. 그렇게 편하고 생각하고 싶지요.

중간에 뭐가 빠졌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가까워진 것이 아니고 여기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가까워지려면, 중재가 되려면 제 3자가 와서 서로 악수 먹고, 이제부터 친한 친구라고 하고, 이제 서로 나쁜 말 안하고 좋은 말만 하기, 이렇게 중간에 제 3자가 끼어들어서 중재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재자 본인의 피가 왜 거기에 끼어드는지, 피가 있는데 두 사람이 딱 들러붙어 있다는 것이 이게 과연 성립될 문제냐 이 말입니다. 이게 어려워요. 그냥 훅 지나가지 마세요. 예수님이 알아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했겠지. 이렇게 하지 마세요. 예수님 때문에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겠지. 그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그리스도 피, 피가 들어가는 거예요, 피가. 그것은 현재 우리가 인간의 몸을 가지고 세상을 현실이라고 우기면서 살아갈 때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문제점을 피 가지고 지적을 해내는 겁니다. 주보 뒤에 보면 이번 주 설교요약이 나와 있는데요. 거기 보면 인간들이 평소에 몸을 가지고 어떤 논리의 사고를 하느냐를 약간 언급했어요. 

중간에 보면, 보통 인간들이 생각하는 논리구조는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린다는 논리에요.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니까 바람이 불었구나. 이게 인간의 논리구조, 원인과 결과의 구조입니다. 몸이 아픈 것은 어떤 바이러스가 들어와서 그렇겠지. 네가 공부를 잘하는 것은 열심히 준비를 해서 그렇겠지. 

모든 이 세상의 현실을 볼 때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나온다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뭔가 네가 잘된 것은 네가 기도를 빡세게 해서 기도발로 네가 잘되었다고 자꾸 원인과 결과를 따지게 되어 있어요. 교회에서. 헌금을 하게 되면 네가 30배, 60배, 100백의 복을 받는다, 라고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자꾸 인간의 논리로 사용하는데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서 어떻게 이방인인 저쪽과 이스라엘인 내 쪽, 또는 반대로 이방인인 우리 쪽과 이스라엘인 저쪽과 어떻게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가까워질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이 뭘 놓치고 있는데 인간의 몸 자체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는 이해될 사람들이 아니지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나름대로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에요. 논리에 있어서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채택했던 세상의 현실에 대한 논리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어디서 나왔느냐? 

유대인이 갖고 있었던 그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거예요. 그 논리대로 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여호와하나님과 영원히 사는데 하등 하자가 없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걸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4절에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자기가 유대신학에 의해서 열심을 냈는데 유대신학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말씀을 지켜야 영광이 되고 구원받는다는 그 논리입니다. 하나님은 법을 줬고 인간이 그 법을 지키기만 한다면 지킨 자에 한해서만 천국이, 영생이 보장된다는 그 논리가 유대논리에요.

왜 그러냐 하면, 착한 사람에게만 그만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마땅하고 그 말씀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는 벌이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로움에 부합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지요. 우리의 상식에 합하잖아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5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이 자기가 유대인이면서도, 전에 유대교에 심취하고 있었음에도 복음을 알고 난 뒤에는 유대인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살아 있는 하나님을 대적해서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을 금하기까지 했으며 그로 인해 자기 죄를 항상 채우고 하나님의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아주 악담을 늘어놓아요.

조직에서 배신한 자가 조직에 대해서 더 심하게 공격하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악담은 유대사회에 대해서, 유대교에 대해서, 유대신학에 대해서 악담하는 동시에 사도바울 본인이 본인 자신에 대해서 악담하는 것과 동일한 거예요. 왜냐? 자기가 거기에 푹 젖었던 그 몸이기 때문에. 자기 몸의 속성과 유대신학이 부합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사고방식과 합치가 된다는 것을 자기 몸이 증명하는 겁니다. 성령이 새롭게 개입되지 않았으면 나는 그게 옳은 줄로만 알았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성령으로 나를 손대지 않았으면 나는 끝까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착한 사람 천당하고 나쁜 사람 지옥 가는 그것이 합당한 일이지. 그래야 진짜 하나님답지’라고 지금까지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도는 지금 농담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성경에 농담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창세기 19장에,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야한다고 할 때 두 사위가 그걸 농담으로 여겼다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에 불심판이 온다는 그것을 농담으로 여긴 거예요. 사위가 농담으로 여긴 것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고 이해를 해줘야 됩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불로서 멸망한다는 그것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드문 신자에요. 정말 사람이 아닌 거 같아요. 천사 같아요.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사도바울의 에베소서 이야기를, 이것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이 21세기에 아직도 있어요, 라고 반문할 정도로 우리는 사도의 이야기에 대해서 귀담아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이 현실이 바로 몸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실이기 때문에. “너는 네 몸 갖고 있느냐? 잘됐네. 나도 내 몸 있어. 어느 몸이 잘되는지, 어느 가정이 잘되는지, 어느 가족이 잘되는지 한 번 해볼까?” 이게 현실이에요. 이걸 현실로 알고 있습니다. 몸의 현실이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현실은, 몸의 현실로 인하여 축출된 그분의 피의 현실이에요.

이 땅이 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스도 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사도의 주장이고 오늘날 현실은 뭐냐? 인간의 몸 중심으로 돌아간다. 결국 천당 가는 것도 이 몸, 이 몸이 천당 가면 되잖아, 라는 것이 이 현실의 주장입니다. 교회 가는 것도 마찬가지고 성당 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몸 중심이에요. 예수의 피 중심이 아닙니다.

몸은 하드웨어라면 악마가 뭔가 소프트웨어를 입혀놨어요. 악마가 아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어떻게 살려고 난 이 몸이 흙이고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까? 악마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하나님은 거기에 합당한 조치를 해서 그렇게 붙들려고 하는 이 몸이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하나님은 이야기합니다. 선악을 알아서는 안 되는데 네가 선악을 알았다. 다시 말해서 네 몸이 지향하는 바와 하나님이 지향하는 바가 서로 상충돼요. 몸은 하나님 것인데 우리의 마음은 악마의 마음이거든요. 악마의 마음을 가진 우리는 이 몸을 가지고 의로운 몸이 되고 싶어 하는 이런 우리의 마음이 있고 이것은 잘못된 마음이에요.

그런데 이 몸은 이미 하나님이 들어올 수 없는 마음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이 몸은 내가 천국에 못 넣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어떤 인간도 몸으로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결국 하나님이 주신 몸과 악마의 마음이 부합되지 않으니까 인간이 어떻게 잘 먹고 잘살고 아무리 행복을 추구해도 내부적인 모순 때문에 평생을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몸 주인 따로 있고 맘 주인 따로 있으니까 이게 부합이 될 리가 있어요? 기도를 해도 내 몸 잘되고 내 가정 잘 되라고 하고, 뭘 해도 우리 교회 부흥되라고 하고, 뭘 해도 전부 다 내 것, 내 것, 아까 기도하신 내용처럼 전부 다 내 것 잘되기를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내 것. 몸은 하나님 것인데 말도 안 되게 우기는 거예요. 이 몸도 자기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몸을 네 맘에 부합되도록 한 번 해 봐라. 되지도 않아요. 아무리 많이 벌어도 욕심이 생기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아무리 안정적인 생활을 해도 불안정이 찾아온다는 그 위협과 공포심을 어떻게 처리할거예요?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피를 언급하는 이유,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가까워지는데 그리스도 피를 언급하는 것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이라고 뭔가 설정은 했지만 그 자체를 이방인의 몸이라고 보고 이스라엘 몸으로 보자는 말이지요.

두 몸이 하나로 합해져야 하나님께서 받는다는 그 말은 두 몸이 내 몸이라고 여기는 한, 이스라엘은 내 몸이고 이방인도 내 몸이라고 하는 한 두 몸을 아무리 합쳐 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에요. 둘이 합쳐서 뻥 하고 터져요. 양쪽 다 네 몸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금속이 황산에 녹는 것처럼 이방인 몸도 피 속에 녹아야 되고 이스라엘 몸도 피 속에 녹아야 되고, 주께서 새로 만든 몸은 흙에서 만든 몸이 아니고 예수님 피 사건, 십자가에서, 피에서 새로운 몸이 나와야 그 몸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새로운 몸을 생각해 볼 때 이방인이 뭐 의미가 있으며 이스라엘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에요.

둘 다 내 몸이라고 쥐고 있는 한 그 몸은 예수님의 피 앞에서 녹아지고 없어져야 될 몸이에요. 주님의 마음에 부합된 몸은 주께서 따로 설정한 거예요. 따로 마련해서 주신 거예요. 그 몸은 반드시 죽었다가 살아나는 몸에다가 하나님의 마음이 비로소 거기에 합치가 되어야 돼요. 그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이 몸 천당 못가요. 이 몸은 없어져야 돼요. 아까 했잖아요.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내 몸이 사라지는 것이 내 몸에 마지막 유익이라고. 이 몸을 버리는 거요. 그동안 이 몸 때문에 얼마나 골치를 앓았습니까? 이 몸 때문에! “이번에 투표 누구 찍었습니까?” 이것도 “당신의 몸 가지고 어느 후보의 몸에 투표를 했습니까?”라는 소리잖아요. “한일전 축구에서 누굴 응원할 것입니까?” 이것도 내 몸이 대한민국 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하는 이야기에요.

내 모든 근심 걱정이 뭐가 있다는 거예요. 뭐가 있는가? 내 몸이 여기 있음을 사수하기 위해서, 버티기 위해서, 이 몸 지키려고,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죄인데 애써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선악을 알았으니까 잘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예수 믿고 착하게 살면 될 것 아닙니까?” 맨 날 이 주장이에요. 그 배후에는, 그래서라도 내 몸을 내가 좀 지키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를 너무 무시했습니까? 아담의 몸에 악마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그것은 거기에다가 의미를 부여한 거예요. 악마가 하는 일은 의미부여였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그 의미부여를 중지시키는 거예요. 네가 하는 어떤 행동, 네가 사는 어떤 인생도 의미 없다. 무의미하다. 교회에서 얼마나 봉사하고, 교회에서 얼마나 주를 위해서 선교하고 뭘 해도 의미 없어요.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해도 의미 없어요.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요.

의미 있음이 너를 망친 거예요. 그 의미를 확대하고 사수하기 위해서 악마로부터 계속 공격을 당하는 겁니다. 우리가 바보같이 스스로 악마의 표적이 된 거예요. 세상이라는 현실은 뭐냐?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공유하고 내 의미를 따로 가지려는 움직임 그게 세상이에요. 주님은 이미 무의미로 처리하고 불심판을 내려버렸는데 인간은 고집이 있어서, 그래도 약간의 의미는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기는 거예요.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몸에 대해서 이렇게 의미 없다고 그리스도의 피와 대조하는 반면에 사람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주님의 뜻을 안 받아서 모르니까 세상적인 의미에다 승부를 겁니다. 이 세상이 현재 21세기에 들어와서 전 세계적으로 청년실업률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어요. 몸의 현실이 뭐냐? 이 세상 현실이 뭐냐? 

전 세계에서 가장 실업률이 높은 나라, 52퍼센트의 실업률을 갖고 있는 나라가 있어요. 남아프리카 공화국입니다. 청년실업률이 52퍼센트. 2등이 그리스. 48퍼센트. 3등이 이라크. 44퍼센트입니다. 한국은 13퍼센트. 실제로 보면 25퍼센트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미 연금 받고 계시는 분들은 ‘너희 고생 좀 하고 욕 좀 봐라.’ 하지만 이제 20대 청년들에게는 이게 유일한 현실이에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에 나오는 대사같이 심각한 문제에요. 취직을 해야 결혼을 하지요. 그들에게는 이 사도바울의 에베소서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안보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현실관이 달라서 그래요. 내가 살아야 좋은 현실이에요. 나를 힘들게 하면 나쁜 현실로 보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죽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는 말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아저씨, 대체 무슨 말이에요?”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사도는 굉장히 진지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 있어서 그들은 나름대로의 어떤 지독한 현실관에 입각해서 살았습니다. 제가 임의로 뽑은 대표적인 사건중 하나가 사사기 19장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 볼 테니까 여러분이 이 가족이라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 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동틀 때에 여인이 그 주인의 우거한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누웠더라 그의 주인이 일찌기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지고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레위인에게 첩이 있었는데 그 첩이 베냐민지파의 불량배들에게 걸려서 밤새도록 돌아가면서 강간을 당해서 나중에 죽었어요. 그래서 레위인이 너무 분해서 첩의 시체를 가져다가 12지파의 경찰서에 다 보내는 거예요. 시체를 열 두 토막을 내서 택배로 다 보내요. 

하나님 믿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했으니까 우리가 거기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라고 “여러분이 아직도 하나님의 정의, 율법의 정의를 믿는다면 여러분이 믿는 사람답게 정의로움을 보여주세요.”라고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면서 열 두 지파에 시체를 조각내 택배로 보낸 그 사건입니다. 

사사기 19장의 사건은, 그들에게 왕이 없으므로 본인의 심정에 좋을 대로 행동한 중의 하나의 사건이 이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고 인간에 내재되어 있던 정의감이 이 정도로 나온다는 뜻이에요. 이게 제가 아까 말한 의미부여입니다. 내 아내가 욕보여 죽었으니까 이것은 나에게 중차대한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강간한 사람한테는 아무 의미 없어요. 자기야욕만 채웠을 뿐이에요. 그러나 당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의미 있는 겁니다.

의미 있기에 여기는 선과 악이 뚜렷하고 거기에 대해서 강력한 처벌을 함으로서 처벌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 여기고 그런 처벌을 부탁해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결과로 12지파가 있는데 그 중에서 베냐민지파가 완전히 작살납니다. 그런데 열 두 지파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에 위반돼요.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모순점에 도달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너희가 왕이 없음으로 너희에 내장되어 있는 소견에 의해서 인간이 이성적으로 가장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 결국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 조치였고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몸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에요. 사람들 보기에는 정말 정의로운 행동을 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견을 왜 안 묻습니까?

여기 14절에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담을 헐었다. 지금 사도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계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계시 안에 담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딱 들으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나님께서 일부러 담을 만들었다는데 담을 만들고 난 뒤에 철폐하지 말고 애초부터 담을 아예 안 만들었으면 더 좋은 하나님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은 저만 드는 생각인가요? 선악과 따먹었다고 죄지었다고 하지 말고 아예 선악과를 안 만들었으면 더 좋은 하나님이고 자비로운 하나님이 아닙니까? 

선악과 심어놓고 따먹었다고 닦달내지 마시고 아예 처음부터 죄지을 가능성을 없애버리면 하나님 좋고 인간도 좋고 다 좋은 것이 아니겠어요? 이게 인간은 좋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안 좋은 거예요. 그 이유가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복음 8장의 이 말씀은 이미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는 담이 형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담이 없는 세상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천국 간다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에요. 인간은 인간세계에 살아야지 하나님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입장이 안 됩니다. 특별히 넣어주시는 거예요. 원래 천사가 계시고 하나님만 계시는 그 나라에 천사 외에는, 피조물인 인간은 끼어들 수 없는 그 나라에 특별히 인간들은 거기에 넣어주시는 거예요. 

하늘나라는 원래 우리가 들어갈 나라가 아닙니다. 많이 봐주신 거예요.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이 있잖아요. 보물을 땅에 쌓아주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그 말이거든요. 땅은 공격의 표적이 되고 악마의 노림수가 되지만 이미 이 땅을 떠나서 담 넘어 저쪽에, 하늘에 들어가 버리면 더 이상 아픈 것도 없고, 쇠한 것도 없고,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고, 거기는 하나님만이 누려야 될 그 영광을 우리가 같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주시는 거예요.

그것은 그쪽 하늘 쪽에서 와서 데려가야 되지 본인이 착하게 산다고 털레털레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이 땅의 삶이 그대로 지속되는 삶인데 그 지속되는 천국의 삶은 지옥이지 천국의 삶이 아니에요. 천국은 우리가 상상도 못한 세계고 예상도 못한 낯선 세계에요. 낯선 세계, 기대하는 세계가 아니고 기대조차도 되지 않는 낯선 세계가 천국입니다.

그 세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얼마나 좋으면 죽는 것이 유익함이라 하겠어요. 얼마나 좋으면. 사도바울이 삼층천 본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그 세계를 맛봤기 때문에 이 땅의 맛 집 별로 맛 집 같지도 않아요. 이 땅에서 출세하고 성공해서 좋다고요? 그것은 천국가면 거지도 그런 것 안 좋아합니다. 아까 했잖아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요. 기쁨도 행복도 무의미한 거예요.

사도바울은 지금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언제까지 바보처럼 네 몸이 매여 있겠느냐? 왜 네 몸에서 네가 못 떠나고 이 세상에 대해서 네가 왜 마음을 버리지 못하느냐는 말이지요. 우리의 몸에 그리스도가 들어오면요 우리는 풍선의 바람 빼듯이 몸에 거품을 빼야 돼요.

우리 몸으로 내가 하는 행함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그것은 거품이고 그것은 바람바람바람이에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죽어도 넣어준다니까요. 그런데 왜 악착같이 살려고 합니까? 지금 목이 가도 이야기하고 싶다 정말. 죽어도 넣어주는데 왜 자꾸 악착같이 살려고 해요. 그것도 복 받으려고, 30배, 60배, 그거 받으려고 왜 그 짓 합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말은 뭐냐? 타인의 존재는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 타인의 존재가 의식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몸이에요. 두 차가 길 가는데 아무 관계없어요. 서로 모르는 사이에요. 저 차에 누가 탔는지 내 차에 누가 탔는지 나도 그 사람 모르고 그 사람도 나 몰라요. 

그런데 둘이 박아보세요. 그 다음부터 명함 교환하고 아는 사이 되어버립니다. 남에게 피해를 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나에게 존재감으로 의식되게 되어 있어요. 그 타인이 누구냐? 죽음입니다. 죽음의 대표자가 피, 예수님이에요. 그분이 우리를 죽이고 그분이 우리를 지옥 보내는 거예요. 

이 땅에서 유일한 행운이 있다면 지옥 보내는 사람을 미리 앞당겨서 만나는데 나는 그분에 대한 가해자로 만나고 그 분은 나로 인한 피해자로 피를 앞장세워서 찾아올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상대하는 인간이 아니라 나는 그동안 주님과 상대해 왔군요, 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게 성령의 임합니다. 이게 성령의 임함이에요.

의미도 없는 것 가지고 자기 잘난 체하고 의미도 없는 것 가지고 울고불고. 나 혼자 tv보고, 나 혼자 책을 보고 울고불고. 그런 노래가 있지요.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 아무 의미 없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분이 의대를 졸업해서 둘 다 의사로 있는데 둘이 서로 연애하고 있었어요. 둘이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던 모양이지요. 

의사들이 의학공부만 해서 세상물정 잘 모르지요. 그런데 남자가 좀 늦게 나가고 여자 분이 먼저 도착해 있었어요. 남자분이 “어딘지 못 찾겠는데 혹시 큰 간판이 없는가?” 하니까 여자 분이 “간판이 있네.” “뭐라고 되어 있는데?” “채널이라고 되어 있는데?” ‘채널이라는 간판도 있었나?’ 나중에 남자가 보니까 채널이 아니고 샤넬이었어요.

두 분 결혼해서 지금 우리교회 나옵니다. 샤넬이라는 명품도 모르고 그냥 의학공부만 한 거예요. 프랑스어를 영어로 읽으신 거예요. 세상물정 모르는 겁니다. 샤넬 그거 그 사람에게는 의미 없어요. 무의미한 겁니다. 사도는 정말 진지합니다. 사도는 지금 심각해요. 진정성 있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이 몸은 이미 피 앞에서 의미 없는 몸으로 되어 있는데 그동안 이스라엘에게 뭐가 있느냐?

아까 본 사사기처럼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유대신학자체가 율법을 주니까, ‘아, 우리는 이 몸 가지고 하나님의 천국에 간다. 율법 잘 지키자.’ 구약성경에는 그런 구절이 한 두 개가 아니니까. 율법을 지키면 축복받고 율법을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고 하니까 이 몸 복 하나 받기 위해서 열심히 율법 지키자, 하니까 율법이 없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 사람들이 이방인들이었어요.

이방인과 이스라엘사이에 그동안 담으로 작용한 거예요. 이스라엘자체가. “너희들은 율법 없지? 우리는 율법 있어. 우리는 영원히 택함 받아서 천당 가고 너희는 지옥 가는 거야. 왜? 하나님의 언약이 그러하니까. 우리 탓 하지 마. 하나님의 계시가 그거야.”라고 우기면서 이스라엘은 담 자체로 역할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피가 누구에게 피해를 입었는가? 직접적으로 유대인사회에게 피해를 입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거든요. 그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조차도 더 이상 주님의 담 역할을 할 수가 없음이 마지막 때 공개된 거예요. 

요한복음 8장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이스라엘 전체가 자기는 이방인과 비교할 때 자기들은 택한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니까 아들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곧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과 담으로 밀어붙인 거예요. 예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예수님자체가 담이 되어서 이스라엘은 예수의 나라인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몰랐던 겁니다. 이스라엘뿐만이 아니고 어느 누구도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천국에 그 몸 가지고는 못 들어간다는 것으로 확실하게 주께서 담 역할을 하신 거예요. 그 피를 가지고 성령을 통해서 찾아오게 되면 그 때는 아까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몸, 허접한 몸, 무의미한 몸이지만 이 몸에 누가 사는가? 

그리스도가 살아버리면 우리는 흙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에 의해서 새롭게 진짜 의미 있게 만들어지는 새 몸으로, 우리 몸은 죽고 성령의 부활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시 환생하는, 다시 부활되는 혜택을 그리스도 피 안에서 누리게 될 겁니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의 진지한 복음이에요. 죽어야 산다는 거예요.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죽은 자였음을, 앞으로 죽게 될 사람인 것을 나에게 통보해주는 그것이 너의 주인이 되어야 되고 너의 소프트웨어 이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몸의 소프트웨어는 예수님의 성령, 십자가 복음이 소프트웨어가 되어서 우리 몸을 이끄는 원리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성도가 이 세상의 새로운 담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새로운 담이 또 생겨버렸어요. 이제는 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와 이 복음을 이해하는 자의 사이에 담이 형성되고 말았어요.

갈라디아서를 우리가 오랜 세월동안 했는데 인간의 몸은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6장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도가 담대하게 그리고 아주 조금도 혼돈 없이 똑바로 이야기합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둔다는 말은, 너는 지금 썩어질 것을 생산하는 그 몸을 못 버려서 아등바등 그걸 쥐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썩은 것만, 쓰레기만 계속해서 나오는 이 몸이 뭐 그리 좋다고 이 몸 키우려고, 이 몸, 내 가정, 내 식구, 이것 키우려고 얼마나 간절히 금요철야기도하고, 헌금하며, 얼마나 신에게 아부에 아부를 떨었습니까? 이웃사랑 해가면서. 여러분, 이웃사랑은 정말 나쁜 짓이에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인간의 몸으로서는 이웃사랑이 안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은 그리스도의 피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몸에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피가 들어오면 그 다음부터 인간은 혈관이 돼요. 혈관과 혈관이 이어지는 겁니다. 너에게 준 내 사랑, 네 사랑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좋게 지내자. 이것이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피가 흐르는 것을 혈관이라 하거든요. 피가 흐르는 파이프와 저쪽 파이프가 연결되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피만 쫙쫙 통하고 흐르게 되는 거예요. 피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피 이야기를 달리 하면 나 못났다는 이야기만 죽죽 하는 겁니다. 동맥경화증 걸리면 안돼요. 중간에 막히면 안돼요.

우리는 다 못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쓰레기 같은 이 몸도 받아준대. 주께서 영광스런 그리스도 몸으로 바꾸기 위한 재료로서 우리를 버리지 않도록 우리를 계속 인도하시는 거예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 나의 무의미만 자랑하면 돼요. 

“이번에 우리 애가 서울의대 들어갔거든. 코디 안 쓰고도 들어갔는데 서울의대 들어갔어도 그런다고 천국 가는 보장이 어디 있겠어?” 이게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그게 무의미하다는 거예요. “이번에 청와대 대변인하고 같이 땅 하나 사놨는데 개발된다는 소식에 땅값이 50배가 올랐다던가?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 의미 없어.” 이런 이야기. 이렇게 약 올리는 이야기 있잖아요.

이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제발 남은 생애, 무의미한 인생 그런 재미로나 살아야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똑바로 보게 하옵소서. 아무것도 아닌 게 남에게 안 지려고 연출에 조작을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주께서 아시오니 이 시간 이제는 내 무능함만, 아무 의미 없음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