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만드신 결과물(엡2;10) 1903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3. 21. 17:16
2019-03-17 12:41:57조회 : 668         
   만드신 결과물 190317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만드신 결과물(에베소서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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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9-03-17 13:26 
만드신 피조물 

2019년 3월 17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2:10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이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은 옛날 사회에서는 상식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자연은 자기 자신은 결코 인간의 솜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을 만들고 해와 달을 만든 신에 대해서 섬기는 것이 마땅하며 제대로 복받고 살려는 삶의 요령이기도 한 것입니다. 잘못 보이면 자기만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이 깨어지거나 달라지지 않은 채로 그대로 성경 내용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피조물 가운데 자신을 좋은 쪽에 속했다는 의식을 견지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을 신이 버린 패에 속했다고 여기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즉 신을 믿고 찾는 이유가 다 자기 잘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같이 사도의 편지 속에서는 인류를 두 패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 모든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라서 동일한 운명을 지닌 자로 봅니다. 그리고 천국 가게 되는 자는 이 아담 가운데에는 없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오늘 본문대로 하면 ‘예수 안에서’ 새로 지음받은 사람에 해당됩니다. 결과적으로 봐서 인류가 두 종류가 된다는 것은 ‘없던 자’들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새로 생겨난 자들로 인한 겁니다. 기존의 인간이 아니라 ‘없던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발생된 자들입니다. 

기존의 인류에게 있어 “내가 신을 믿든지 혹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논리로 일관합니다. 이런 배경에는 공포심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믿어서 구원’ 아니라 ‘구원을 이미 받았기에 예수 믿게 된다’입니다. 즉 천국 못가는 사람은 줄곧 자기 행위에 관심을 둡니다. 

내가 나에게 뭔가를 작용해야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아무 것도 안하고 손 놓고 있으면 나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반면에 믿는 자는 외부에서 누가 자기를 건들려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매일의 삶이 연속적으로 주님에 의해서 건드림을 당하는 생활입니다. 

반면에 행하는 식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자기에게 줄 행위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늘 죽음이 가져는 공포심에 노출되어서 뭐라도 해야만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립니다. 이 공포심 또한 연속입니다. 따라서 ‘연속’이란 곧 어떤 공간이 따로 구성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마치 비빔밥 밥그릇이 따로 있고 그 안에서 무얼 넣고 비비든지 그 밥은 밥그릇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예수 안’이라는 밥그릇입니다. 반면에 불신자는 알 수없는 공포심이 조성되는 밥그릇입니다. 그 안에서 불신자들은 사투를 벌립니다.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릇을 다합니다. 자신을 남들에 비해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복받기 위한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실은 남들과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수모를 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의지가 투철합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같은 인물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동생에게 졌다는 의식으로 동생을 없앱니다. 이는 아담이 선악과 과실 자체를 따먹음으로서 더 이상 누구로부터 통제받지 않겠다는 반항심과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이미 ‘이름’이 주어져있습니다. 이름이란 단지 부르는 호칭에 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이름을 지어준 분의 조치가 담겨 있습니다. 필히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대로 이 세상에서 펼쳐지게 됩니다. 아담의 이름은 흙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마땅이 이 땅에서 고생해야 합니다. 

사연 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모두들 나름대로 다 고생하면서 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러한 형편을 벗어나서 행복의 세계를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행함을 자기에게 퍼붓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성도의 경우는 다릅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멸망 사실에서 보듯이 롯은 사실상 하나님으로부터 강제로 철거당합니다. 

하나님의 강제성의 대상으로 롯은 구원된 겁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아담의 후손들 나름대로 각자 자기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은 모두 그들의 죽음과 더불어 삭제된 임시적 호칭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에녹의 7대 손인 노아는 하나님의 언약(약속)과 선이 닿은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인데 그의 이름은 ‘안식’입니다. 

즉 노아는 ‘안식해야만 하는 ’자로서 하나님 언약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이 붙여준 그 이름에 하나님 자신이 자신에게 충실하신 겁니다. 성도의 매일의 삶은 이처럼 매일 주어진 ‘학습지’ 같습니다. 인간은 풀지 못하고 친히 하나님께서 풀어내시는 학습지입니다. 성도는 이미 답을 얻은 자입니다. 그 답에 근거해서 질문을 수정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가 아닙니다. 여기에 관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달린 두 강도의 논쟁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지옥가게 된 강도의 주장은 십자가 밑에 있던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여기에 대한 구원받은 강도의 고백은 이러합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2-43) 즉 이 구원받은 강도는 지금껏 살아온 노선에서 갈아탄 겁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자신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겁니다. 아는 사이에는 질책하지 않습니다. 탓하지 않습니다. 정죄하는 것이 악마의 질투난 심보입니다. 성도는 자기와의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이미 실패자인 것을 알고 그것을 즐깁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이처럼 법에서부터 사랑으로의 구원입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에서 도리어 ‘감사로 찬양하는 자’로 바뀌는 겁니다.(롬 7:24-25)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 내 은혜에 내게 족하다(고후 12: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 더 이상 속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3-17 18:53 
17강-엡 2장 10절(만드신 결과물)19030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0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짧은 문장인데 담겨있는 내용은 무한합니다. 어마어마할 정도입니다. 우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여기부터 획기적입니다. 보통, ‘인간은 누가 만들었겠는가? 만드신 신이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 지옥 가는 사람이 있고 하나는 천국 가는 사람이 있다.” 피조물을 그런 식으로 둘로 나눕니다. 

모든 종교에서 그렇습니다. 잘못된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뭘 빠트리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를 빠트린 거예요. 이 세상에는 단 한 종류의 인간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만든 인간, 그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두 종류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천당 가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 이렇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인간입니다. 똑같은 운명이지요. 그런데 그 바탕위에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그 다음에 새롭게 등장한 예수님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이러한 구분은 기존의 모든 종교에서 등장하는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모든 종교를 전부 다 배제하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장차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어디 갈 거냐를 이렇게 결정합니다. 살아 있을 동안 선한 일을 한다든지, 예수 믿는 일을 한다든지 해서 천국 간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아담이 하는 일거리밖에 안돼요. 아담에 의해서 나온 것밖에 안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는 그걸 배제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원 받았으니까 예수 믿는 거예요. 예수 믿고 구원 따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고 구원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았으니까 예수 믿음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는 겁니다. 여러분, 누가 건드려줘야 우리가 자극을 받을 것이 아닙니까? “누가 건드렸어?” 예수님이 건드려줘야 “누구야? 난 내 식대로 살아가는데 누구야?” “나다 왜!” “이것은 나한테는 예상도 못한 일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상도 못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내가 예수 믿으려면 내가 예수를 자꾸 상상해야 돼요. 영화에 나오는 그 예수 모습, 그리고 성화에 나오는 수염 난 예수, 그 예수는 인자하다, 착하다, 고귀하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자꾸 계속해서 내가 조작을 해 내야 됩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최면을 걸듯이. 

억지로 그 예수를 내 쪽에서 쥐려고 하는 거예요. 그거 한다고 힘들어 죽겠어요. 교회 다니는 것이 힘들어죽는 일이에요. 살려면 할 수 없어서 억지로 하기는 하는데, 죽어서 천당 가려면 하기는 해야 되는데 이게 자연스럽지가 않은 겁니다. 태어나기는, 출신은 아담에서 태어나서 죽어서는 천국에 가려고 하니까 터무니없는,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 교회 목사들, 사기꾼들이 동원되고, “당신 이렇게 하면 천당 갑니다.” 그런 유혹자들은 차고 넘치고요. 

그것은 남 욕할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뭔가 속이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본성은 뭐냐 하면, 남하고 싸운다고 되어 있거든요. 홉스라는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고. 그거 잘못된 거예요.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와 자기가 싸우는 겁니다. 자기와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남한테 안지고자 하는 것은 내가 나한테 안 지려고 하는 거예요. 나는 남에게 수모당하는 것을 용납 못하겠다는 거예요. 남한테 지기는 싫다는 겁니다. 모든 범죄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 거예요. 오늘의 삶은 과거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 어제에 대한 집착이 오늘날 범죄를 낳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면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싸우는 것이 없으면 남에게 패배자가 된다는 의식이 강해요. 오늘 본문 문장이 아주 대단히 어려운 것이 10절 끝에 나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예비하사” 그 다음에 어려운 것이 “우리가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이 설명이 필요한 문장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문장이에요. 

왜 어려운가 하면,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일상은 행함입니다. 행함은 무엇에 갇혀 있느냐 하면, 죽음이 주는 공포에 늘 쫓기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내몰리듯이 살아가면서 ‘그래도 착한 사람은 봐주겠지. 선한 일을 하면 복주겠지. 오늘의 선행이 내일의 보상으로 주어지겠지.’라고 자꾸 쫓깁니다. 

계속 공포심의 연속이지요.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날마다 매일의 삶이 늘 신기한 겁니다. 우리 일상은 뭐냐 하면, 주님이 주신 매일의 학습지 같아요. 계속해서 주께서 학습지를 보내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학습지는 우리가 푸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결과물을 내는 학습지입니다. 

보통 ‘피조물’이라는 말을 기독교에서 하는데 피조물이라는 말 대신 다른 것으로 바꿨으면 좋겠어요. 피조물이라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고, 성령 받지 못한 성도 아닌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이 만들었으니까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데 저는 그 말을 ‘결과물’로 바꿨으면 좋겠어요. 왜 ‘결과물’이라는 말로 바꾸기를 제안하느냐 하면, 10절 끝에 나오는 말씀, 우리도 그 가운데서 행한다는 이것 때문에 결과물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리가 숙제를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 안에 결과물을 낳으니까 행하는 그 주체가 바로 주님이 자기가 만든 것을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인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결과물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계속 주님의 행하심이 드러나도록, 우리가 그런 입장에 놓여 있는 겁니다. 표정들 보니 무슨 말을 하는지가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제가 구약에 근거해서 하는 거예요. 구약에는 언약이 있고 언약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나타날 때에 반드시 언약, 약속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약속을 통해서 나타날 때는 반드시 “네 이름이 무엇이냐”를 물어요. “야곱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가 되거든요. 사울아, 이름을 불러요. 아담아, 이름을 부른다고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그 이름을 그냥 이름만 붙여주고,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런 것이 없어요. 이름 안에는 뭐가 응축되어 있느냐 하면, 앞으로 네가 할 일이 아니고 주님이 하실 일을 계속 네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하나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너를 통해서 내가 담아낼 거야. 그게 이름 안에 함축되어서 이름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름을 부여받은 사람은 평생토록, 영원토록 그 이름의 범위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이름을 부여받은 겁니다. 아담이라면 그 아담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때 아담은 흙입니다. 창세기 3장 19절의 말씀에 보면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고집이에요. 하나님의 양보 없는 고집입니다. 모든 인간은 흙에서 태어났으면 흙으로 돌아가야 돼요. 산다는 것 자체가 고생이어야 하는 겁니다. 고생 안하고 사는 사람은 없고 사연 없는 가정은 없어요. 가정마다 다 사연이 있어요. 한 달 수입이 1500인데 갑자기 1200으로 줄어보세요. 얼마나 고민이 많은지요. 

‘1200 가지고는 못산다.’ 고민이 많아요. 고생이 맘고생이라니까요.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다 사연이 있어요. 내가 받게 된 주님이 주신 이름의 내용물이 뭐냐, 라는 생각을 안 하고 그냥 ‘하나님 앞에서 내가 선악 동원해서 바르게 살면 좋은 것 보상 주시겠지.’라는 자기고집으로 자기실패를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것밖에는, 자기고집밖에는 없는 거예요. 

인간의 고민과 하나님의 고민거리가 달라요. 인간의 고민은 내가 어떻게 파괴되지 않느냐의 고민인데 주님의 고민은 저 인간을 어떻게 파괴시켜서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해야 되고 책임져야 된다는 그 사고방식을 어떻게 깨뜨리느냐가 고민거리에요. 내 이름을 내가 지은 것이 아니잖아요. 주님이 주신 이름이 있다 이 말이지요. 

아담에게는 아담이고 주님에게는, 그리스도 몸에는 주의 이름이라는 이름이지요.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이제는 내 이름이 된 거예요. 창세기 19장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져서 다 몰살당했다는. 지금의 위치가 대충 잡아서 사해바다 남쪽의 복판에 있다는 겁니다. 제가 거기 가봤어요. 소돔과 고모라가 거기에 안보여요. 

미리 이야기합니다. 사해바다에 제발 안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짜서 나중에 몸이 괴롭습니다. 그걸 감수하려면 몸이 뜨는 체험을 해도 괜찮아요. 그러나 항상 후회합니다. 힘들어요. 이미 짠 소금기둥이 되고 소금바다가 되었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거기서 롯이 구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면, 강제로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가 그 강제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일상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강제로 빠져나와야 되는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도 하루하루의 삶이 지금 이 세상에서 강제로 빠져나오는 중이에요. 어떤 모습으로? 다 놔버리라는 말이지요. 네가 꾸준히 추진했던 모든 계획과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다 놔버리라는 말이지요. 

그걸 놓게 되면 그것은 실패자지요. 그 실패자 되는 즐거움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실패자라고 보는 그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저는 표현을 실패자라고 했지만 성경대로 하면 위반자가 돼요. 율법의 위반자. 같은 말이에요. 율법의 위반자나 실패자나.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실패자로 당하는 수모를 대단히 싫어하는 겁니다. 

싫어해서 자꾸 버티는 식으로, ‘내가 나를 실패자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너를 성공의 자리로 끄집어낼 거야.’ 이런 식이에요. 옛날 영화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것이 있지요. 우리 일상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건지기 위해서 내가 내 인생에 뛰어드는 거예요. 하여튼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실패자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 지구상에는 불이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거기서 강제로 끄집어내려면 날마다 내가 빠져나왔다는 그 신기함이 날마다 주어져야 되고, 그게 우리가 주님이 스스로 문제를 푸는 결과물이고 학습지 같은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합시다. 행함은, 내가 실패자 되지 않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애쓰는 공포심의 연속이 아담에게 속했다면 예수님에 속한 사람은 날마다 신기함이 연속되는 거지요. 둘 다 매일같이 연속되는 겁니다. 그 연속이 연속으로 되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공간화라 합니다. 연속의 연속이 어떤 영역 속에서 뺑뺑이 돈다는 식으로 표현이 가능해요. 

그 연속성으로 이렇게 정리가 되어줘야 본문 10절에 보면 “그 가운데서”라는 공간개념이 비로소 우리 눈앞에 느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어느 공간속에 있다는 거예요. 공간속에서 백날 해도 못 빠져 나오도록 순환한다는 말이지요. 유명한 cf에 그런 것이 있잖아요. 왼손으로 비비고, 오른손으로 비비고. 그 결론이 뭐였던가요? 아무렇게나 비벼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비빔밥 같아서 그 그릇 안에 들어 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아담 안에 있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꼴이라는 겁니다. 한쪽은 오늘 본문대로 예수 안에 갇혀 있고, 저쪽은 예수 언약 밖에 갇혀있고. 

그쪽은 주님 주신 이름의 이야기를 모르고, 본인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자기 이름에 부합되도록 그리스도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 예수 이름이 품고 있는 그 내용으로 그 안에서 주님 자신의 명예를 걸고 그 사람을 자신의 결과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매일같이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내 이름이 아니라니까요. 아담의 이름이 아니에요. 부모가 붙여준 이름이 아닙니다. 성경보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창세기 5장의 경우를 보면, 아담의 자손이 죽 나오는데 아담이 셋을 낳고 셋은 에노스를 낳고, 계속해서 낳고, 낳고, 계속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부여는 결국은 이름의 소멸로 이어져요. 

인간사회에서 붙여준 이름은 일시적이고 이게 한시적이라는 말이지요. 그 이름은 삭제당할 이름이에요. 버텨도 결국은 죽음 앞에 녹아져야 될 이름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아담이 품고 있던 이름의 연속가운데서 진짜 언약과 매치되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게 노아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붙여준 이름이에요. “내가 이제야 만족스럽다. 이제는 땅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영원한 도착지점에 도달한다.” 

그 도착지점에 자기백성이 도달했을 때의 상태, 창세기 5장 지나고 6장에서는 그걸 가지고 언약 안에 있는 자는 영생이 보장된다. 그것이 ‘방주 안’이라고 표현돼요. 방주 바깥쪽에는 심판이고 방주 안에는 영원한 안식이고. 그래서 노아이름이 대표이름으로 안식이라는 이름을 얻은 겁니다. 그 노아의 이름이 노아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되면서 지금 예수 이름 안에 안식이라는 이름이 이미 옵션으로 들어 있어요. 

여러분 이름을 최 아무개, 이 아무개, 김 아무개, 하지만 사실은 어떤 이름이냐 하면, 김 안식, 박 안식, 최 안식, 이렇게 되는 겁니다. 뭐 너무 기분 좋은 말을 해서 안 믿어지는 것도 같고요. 어떤 경리사원이 있는데 신입이에요. 신입이니 일 잘하는지 선배 직원들이 유심히 보고 있었어요. 

어느 날 경리직원이 선배의 지갑도 훔치고 장부를 자기가 갖고 있어요. 그래서 선배인 직원이 ‘잘됐다. 이 아가씨를 쫒아내야겠다.’ 싶어서 “너 전과 있지? 그런데도 또 그런 짓을 했으니 널 고발할 것이다. 어떻게 선배의 지갑을 훔치느냐?” 하니까 그 신입경리직원이 못 견뎌서 사표를 냈어요. 

그 다음날 그 선배의 동료가 하는 말이 “당신이 그 경리직원 사표 내라고 부추겼지! 전과자라고 하면서!” “그래, 도둑질을 하기에 그렇게 했다.” 하니까 “그 직원이 내 동생이야.” 그렇게 된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나하고 아는 사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더 큰 복음이 있을까요? 마귀는 계속 우리를 정죄하거든요. 로마서 8장에 보면 계속 마귀는 율법 가지고 정죄한다고요. 

살인 했니, 간음 했니, 어떠니, 저쩌니, 매일같이 우리는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제 이런 짓이 오늘 힘들게 사는 원인제공이 되었구나.’ 하면서 계속해서 시달리는데 주님이 나서서 하는 말이 “그 사람 건드리지 마라. 그 사람은 나하고 아는 사람이다.” 주님하고 아는 사람이에요.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은 예수 안에서 용납이 되는 행동이라는 말이지요. 

아는 사이. 오늘 제목 바꿔야 돼요. ‘아는 사이’로. 아는 사이에요. 무슨 교회가 필요하고 무슨 성경읽기, 헌금이 필요 있습니까? 아는 사이라는데. 동생이라는데. 여러분, 주님하고 아는 사이 아니에요? 모르는 사이 같으면 여기서 예배 그만둡시다. 모르는 사이 같으면 예배 드려도 소용없어요. 헌금을 얼마 냈니, 예배 참석이 소홀하니.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독감 걸려서 못 오게 하신 거예요. 아는 사이에서는 지적질이 없어요. 주께서는 법으로부터 사랑으로 구원입니다. 20년, 50년 교회 다니는 것, 목사나 장로가 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 건데요. 주님께서 용납해주시려고 십자가 피를 흘린 거예요. “최선을 다해라. 천당 갈 것이다.” 이런 마귀 말에 이제 그만 벌벌 떠세요. 

남들이 나보고 지적질 한다고요? 남들이 아니고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을 지적질 하고 있는 거예요. 매일같이 못살게 구는 겁니다. 내가 행동 개차반으로 해서 오늘날 이렇게 산다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아는 사이 된 것. 

롯이 장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하겠어요? 주님께서 강제로 훌쳐 보낸 거예요. 강제입니다, 강제. 강제로 빠져나오게 하신 거예요. 자기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주님의 자신의 결과물이에요. 피조물이라고 하면 존재적인 개념이 강하지만 결과물이라 하는 것은 행함의 의미가 강해요. 나는 주께서 만들었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행하고 계시는 거예요. 

행함의 결과물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주님의 행함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신을 실패자로 본다는 것, 그것도 아주 즐겁고 고맙고 감사하게요. 실패 안하려고 하기에 인생이 그야말로 걱정되고 고민되는 겁니다. 실패 안하려고 하기에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꼭 자신이 늘 나서게 되어 있어요. 

자기가 주도적으로 했다는 것을 자꾸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자랑질 하고 싶은 겁니다. 사람이 계속 실패를 해줘야 주님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실패가 없는 인간은 자기자랑을 하게 되어 있어요. 아까 제가 예배 전에 파리를 잡았어요. 파리가 날라 다니면 저쪽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심난할까, 라는 목사의 목회의 심정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파리를 좀 미리 잡아줘서 늦게 오신 분들이라도 깔끔한 환경 속에서 예배하게 하자는 심정으로 잡아요. 

파리잡기 힘들거든요. 파리가 아주 재빨라서. 그런데 제가 잡았어요. 그러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이 잡은 것이 아니고 파리가 기운이 없어서 잡혀줬겠지.” 파리가 기운이 없어서 잡혀줬다는 거예요. 1회전이 끝나고 2회전이 남았어요. 파리를 또 잡았어요. 이제는 내가 잡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두 번째는 내가 잡았다.”고 하니까 뭐라고 하냐면 “또 들어오는데?” 또 들어와요. 

당신이 잡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계속 또 들어오는 그 결과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항상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내가 했다는 것이 우선이 되면서 갑자기 승리했다는 도취감에 빠지는 겁니다. 사람의 인생이 힘든 것은 자꾸 싸움을 하고, 누가누가 이겼느냐, 누가누가 잘났느냐 하고 그 잘난 사람을 찾고 싶어요. 

이걸 세습제숭배주의라 하는데 계속 두고두고 숭배할 대상을 찾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하는 일은 뭐냐? “또 들어올걸?” 잠시의 성공은 온전한 성공이 아님을 계속해서 밝혀주는 겁니다. 오히려 성공했다는 기억 때문에 다음에 실패의 좌절감은 한없이 크기 마련이에요. 주께서 우리 인생을 성경말씀에 비춰볼 때 온갖 짓을 다 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의 변신은 무죄에요. 어떤 변신도, 살인을 하든, 간음을 하든 무죄입니다. 하나의 그릇이니까. 그 이야기가 위로 삼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 42절에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하고 예수님을 희롱하고 조롱하는 대목이에요. 

“남은 구원하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구나. 이 한심스러운 양반아.”라고 예수님을 욕보이는 대목이에요. 십자가에서.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그 십자가의 현장을 가봐야 돼요. 본문이 있으니까 우리는 답습을 해야 됩니다. 같이 주님을 조롱할거냐? 예수님이 그 당시 실패자의 전형이었거든요. 저 실패자를 내가 받아들여서 나의 구원자로 할거냐, 아니면 그 실패자를 조롱하는 소위 성공한 자의 편에 설거냐, 자기를 비춰봐야 돼요.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양 옆에 강도가 있었어요. 제가 보기에 상당히 재미있는 것은 그 강도와 강도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구원이 뭐냐에 대해서, 어떻게 너는 구원받았느냐에 대해서. 

한 강도는 말하기를, “실제로 결과를 봐라. 우리가 예수를 믿고자 해도 이 사형집행에 대해서 못 벗어나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예수 믿어도 당신인생이 달라질 것이 없고 바뀔 것도 없어.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착각에 불과한 거야.”라고 한쪽 강도는 계속해서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어야 돼요. 쉽게 말해서, 교회 5십년 다녔는데 내 인생 펴진 것은 전혀 없다는 그쪽 이야기를 충실하게 심사숙고하며 들을 수 있어야 돼요. 이게 어쩌면 우리 아담에 속한, 육에 속한 우리한테는 낯설지 않아요. 왜냐? 평소에 내가 나를 설득할 때 그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지난주에 교회 갔는데 이번 주에 계약 깨지는 것 봐라. 예수 믿어도 소용없잖아. 그런 식으로 불안정하고 흔들리는데 예수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이야기를 남이 하기 전에 이미 내가 나에게 매일같이 쏴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한쪽 강도는 뭐라고 하느냐? “내가 내 구원에 실패했기에 주님이 관여하셨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은 뭐냐 하면, “나 같은 꼬라지 보고, 허접한 인간이 감히 천국을 내다보는 것은 내 양심에 비춰도 이것은 용납되지 못한다. 내가 나를 용납 못해.” 그런데 그 용납을 넘어선 거예요. “주여, 저 같은 인간도 어떻게 되겠습니까?” 할 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천국에 있을 것이다.” 

높이뛰기 허들을 뛰어넘은 거예요. 그게 아까 말한 대로 신기함인 거예요. 본인이 생각해도 본인의 달라짐에 대해서 놀라운 거예요. 남이 지적하기 전에 그것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나를 충분히 지적할만한 인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뛰어넘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실패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수용한다는 거예요. 

더 이상 나는 나하고 토닥거리고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옛날에 유명한 7080 노래가 있어요. <나는 못난이> 또 어떤 죽은 가수가 있습니다. <난 참 바보같이 살았군요>라는 노래. 마땅히 실패자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구원받기 위한 사전요령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누가 건드려주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여기 나라는 것은 노선을 갈아탄 거예요. 옛날 아담에 속한 피조물에서 이제는 예수 안에서 내가 상상도 못한, 아담에 속한 인간이기 때문에 도저히 예상도 못하고 상상도 못한 새로운 나가 노선갈아타기를 해서 주님의 자기이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까 기도하신 집사님처럼 자기 이름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자기결과물을 낳은 거예요. 내가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잘났다는 겁니다. 

우리가 좀 그럴 용의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뭘 잘났다 하겠어요? 사도바울이 몸이 아플 때에도 이런 신기함이 계속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몸이 아파서 세 번씩 기도했는데요.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제발 약해라는 그 말이지요. 

성공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기 시작한 거예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아주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 인생 실패했노라.” 전 같으면 “내가 이만큼 성공하기까지 너도 성공해봐라.” 이렇게 나오다가 이제는 반대가 된 거예요. “나는 성공을 지향하는 인간이었는데 주의 은혜로 이제는 내가 실패자인 것을 감사하게 되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실패를 하게 되면 약이 올라서 인간의 본성상 남에게 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자꾸 보상을 하려고 하는 시도를 계속해요. 그러면 그것은 과거에 집착한 인생일 뿐입니다. 과거에 자꾸 집착하는 거예요. 어떤 30초반의 여자 분이 오랜만에 제주도에서 어떤 남자친구를 만났어요. 나중에 그 남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 여자는 이미 결혼했어요. 자기보다 서른 살이 많은 어떤 늙수그레한 남자하고 결혼을 했는데 젊을 때 한 때 사귀었던 남자친구를 만나고 난 뒤에 몰래 그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요. “오랜만에 만나서 놀랍게도 변하지 않았다는 당신을 보고 내가 편지를 씁니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스물세 살 때 혼자 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기고 남자를 사귀었다. 처음에 사귄 남자는 너무 잘생긴 남자라서 모든 여자들이 다 사모했고 자기도 지기 싫고 그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하여 사랑했다는 겁니다. 내 쪽에서는 죽을힘을 다해서 사랑했는데 그쪽에서는 사랑을 안 해요. 그래서 날 안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헤어졌는데 남자 콧등 하나 잘생긴 것 가지고 남들 좌지우지 하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자기 쪽에서 접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 남자는 내가 원하는 남자, 상대적으로 나보다 착한 남자 만나서 내 말 잘 듣고 매일같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면서 두 번째 남자를 만났는데 그런 종류의 남자 두 명을 사귀었다. 하나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다 좋았는데 너무 무능력해서 매일같이 자기를 미치도록 괴롭게 해서 싫다는 거예요. 다른 한 남자는 진짜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내가 그 사람 옆에 있는 것이 무의미해져서 헤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자기보다 나이 서른 살 많은 양 선생님 만났는데 그 사람은 내가 무릎 꿇을 수 있는 면이 있어서 좋았고 비록 나이는 많지만 아직 어린애 같은 요소가 있어서 귀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편지에 하는 말이 “절 다시 보고 싶다면 아래의 전화번호로 연락주세요. 아직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다면 그 인연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라는 편지를 보낸 겁니다. 

이게 홍 상수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나오는 대사의 일부분이에요. 그러니까 이 여자 분의 이야기를 들을 때 흔히 세상에서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보잖아요. 낯설지 않잖아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의 관심사가 자기 인생 행복하기 위해서 몰입하는 것, 거기에 자기의 전부를 다 바치는 거예요. 

이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고 ‘사람은 원래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야? 사람 사는 게 전부지. 내 인생 행복하려고 살지 남 좋으라고 사는 인간이 어디 있어?’ 충분히 그러한 시도를 용납해 줄 수 있는 거예요. 전통적으로 약간 용납되지 않더라도 결국 내 인생 내 행복은 내가 알아서 챙겨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될 때 관심이 어디에 꽂혀 있느냐 하면, 자기 자신에게만 꽂혀 있는 거예요.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만약에 교회를 다녔다. 예수를 믿습니다, 할 경우에 결국 이건 뭐냐? 장차의 내 행복을 위해서 살던 일상의 버릇을 그대로 나중에 천국 가서도 행복하려는, 나만 행복하려는 헛된 시도에 불과한 거예요. 그걸 지난 시간에 행함이라고 한 겁니다. 인간의 일상이 곧 내 행복을 추구하는 자기시도뿐이에요. 

죄라는 것은 이미 거기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죄지으면 안 되겠다는 그 자체가 이미 죄 속에 있는 거예요. 따라서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사도바울의 말은 어려울 수가 있는데 이것은 뭐냐? 먼저 하나님께서 결과물을 제시합니다. 답을 줘요. 답을 먼저 주고 난 뒤에 답을 통해서 나에 대한 질문자체를 바꾸기를 요구하시는 겁니다. 

내가 파리 잡은 것이 아니고 진짜로 파리가 나에게 잡혀준 겁니다. 왜냐? 그렇게 해줘야, 내가 뭘 해야 내가 뭘 얻는다는 보통 아담에 속한, 인간에 속한 노선이 바뀌어 지기에 그렇습니다. 이미 답을 얻었어요. 이제는 그 답이 뭐냐를 계속해서 우리를 통해서 주께서 이끄시는데, 너는 이런데 관심 뒀잖아, 저런데 관심 뒀잖아, 자꾸 이렇게 우리를 데리고 다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데리고 시장통에 가서 죽 다니면서 온갖 시장에 있는 물건을 보게 하는 겁니다. 그 후에 집에 와서, 네가 먹는 음식과 네 입는 옷, 이 모든 것은 부모가 친히 사랑으로 해 준 것이다. 돈으로 한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했다는 것을 이미 아들인 고로 우리로 하여금 시장구경하게 만드는 거예요. 

저 사람들이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 자기를 의인 만들기 위해서, 자기가 죄인 안 되기 위해서, 자기 안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이런 부질없는 짓을 한 거예요. 자기와의 싸움을 다 보게 하는 겁니다. 자기하고 싸웠던 그 예가 성경에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다 말씀 못 드리지만 두 가지만 말씀 드릴게요. 

하나는 가인과 아벨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형이고 동생은 아벨이죠. 사이좋게 지낸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어요. 죽였는데 그 죽인 것이 누가 죽이게 했느냐 하면, 죽음의 제공자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자존심을, 자존감을 건드린 거예요. 사이좋게 아벨은 양치고 가인은 농사짓고 그대로 살면 되는데 주님께서 일부러 분란을 일으키신 겁니다.

둘 다의 제사를 안 받았으면 죽일 일이 없어요. 한쪽은 안 받으시고 한쪽은 받으시는 거예요. 질투심을 유발시킨 겁니다. 다시 말해서 “가인아! 너는 실패자요 아벨은 성공자다.” 이렇게 주께서 노골적으로 하신 거예요. “예, 예. 주님 드러내기 위해서 실패자로 만든 것을 감사합니다.” 이러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생 너 때문에 내 사는 모습이 아주 우스운 꼴 났다고 해서 갑자기 속에서 지기 싫어하는 본능, 복수심, 이게 작동해서 동생을 죽여 버린 거예요. 

정신분석학 아무리 공부하고, 아무리 심리학 공부해도 인간의 심리라는 것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현재 세상에 있는 심리학을 비롯한 과학들은 자꾸 인간이 인간을, 만물을 다루려고 하니까 문제가 더 악화되는 거예요. 그냥 실패자로 살면 되는데 이걸 못 견디는 거예요. 어떤 근거라도 만들어야 돼요. 아주 실패는 아니라는 것. 

여러분, 아주 실패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보조발전기 만들지 말라고요. 아주, 아주 실패자에요. 아직 우리가 그 경지에 못 이르러서 그래요. 그래서 감사가 없고 고마움이 없는 겁니다. 실패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 대조하라고 주님이 제자들하고 한통속으로 다니신 거예요. 

“너희들의 진짜 모습은 내가 보여줄게.” 예수님이 남들이 가지 못한 찌질이 인생을 사신 거예요. 제가 이스라엘에 간 것은 주님의 그 찌질한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노선 바꾸기 위해서. 그 찌질한 모습을 나에게서 발견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자꾸 ‘이 말씀 지켜야 돼. 저 말씀 지켜야 돼.’ 한다는 말은 여러 군소리 하지 마세요. 딱 하나입니다. ‘아주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남에게 이길 구석은 하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최후의 무기 같은 것이.’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은 아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졌다. 내가 악에게 졌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곤고함에서 벗어나게 하랴.” 그 다음에 “내가 찬양하리로다. 내가 예수 안에서 이미 의인되었다.” 혼자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 하나를 두고 양쪽 이야기를 다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 안에 십자가의 양면성을 과제물로 계속 활용시키고, 십자가의 현장을 계속 양성해 내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몰고 다니면서, 여기서부터 구원되었고, 저기서부터 구원된 거야. 잘난 인간에서 구원되었고, 자기의 우기는 인간에게서 구원되었고, 내 인생 착실하게 살아서 지금 이만큼 산다고 하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찬양하리로다.” 이 실패자를 실패자 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드러내는데 성공하는 재료로 사용하신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내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행함의 열매로서 계속 드러나는 거예요. 가인과 아벨이야기 말고 또 한사람 예를 들면 부자청년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부자청년. 부자청년은 자기와 자기의 싸움에서 아주 맹렬한 사람이에요. 

계속해서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켜가면서, “하면 된다. 주께서 지킬 수 있는 말씀을 줬기에 이것은 안 지켜도 된다고 하지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지킬 수 있기에 주신 말씀이기에 지켜 내야 돼.” 그래서 결과는 뭐냐? “나는 선하다.” 그 선한 꼼수 하나 더 배우겠다고 주님한테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자체 내에서 근심거리를 제조하고 생산했다는 것을 본인이 까마득하게 몰랐습니다. 내가 선함을 만든 것이 아니고 근심거리만 계속해서 키워왔다는 거예요. 여기서 삐딱하게 나가면 그래서 내가 낭떠러지에 떨어진다고. 무슨 낭떠러지가 있습니까?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지요. 여러분이 가끔 꿈속에서 낭떠러지에서 막 떨어지잖아요. 

아직까지 그만큼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진즉 떨어져서 완전히 오징어포가 되어 있어야 되는데. 자꾸 기어 올라가니까 떨어지는 거예요. 꿈은 위기감에서 온 거예요. 이것은 제 이론이니 믿지 마세요. 꿈은 뭔가 아슬아슬 위기일 때 꿈이 생생하게 살아나게 되어 있어요. ‘아이고, 큰일 날 뻔 했다. 간 떨어질 뻔 했다.’ 간 떨어져야 돼요. 큰일 날 것도 없어요. 

바닥에 있는데 뭐가 떨어질 것이 있고 뭐가 걱정근심이 있습니까? 자기 실패를 누리세요. 오늘도 실패를 찾아서. 오늘도 실패한 맛 탐구. 걸어서 실패까지, 그런 것. 실패의 여정. 휘파람 불면서. 

누가 너를 꾀던가요. 누가 너를 속이던가요.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 “십자가와 네가 아는 사이잖아. 네가 십자가 안 믿나? 십자가 믿으면 그것은 아는 사이야. 내가 너에게 손댔어. 네가 거기서 눈 뜬 거야.” ‘아, 내가 이미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을, 흙인 것을.’ 눈 뜬 거예요. 두 가지 이름, 아담이름, 또 하나는 주의 이름, 이 두 가지 이름이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속아야 우리가 덜 속겠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속아왔습니다. 마귀에게 속아왔습니다. 교회에 속아왔습니다. 주변 사람에게 속았습니다. 그 속은 것도 주의 뜻인 줄 알고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