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1228a 마가복음13장 9-13절(자기 조롱)-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3장 9-13절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10절,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절,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절,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절,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가복음 13장 9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이래 되어 있죠. 상당히 문장은 굉장히 짧은데요. 이거 꺼낼 내용은 어마어마합니다. 제일 아주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나를 인하여”죠. 너 자신을 인하여 고난 받는 것은, 그거는 별의미가 없어요. 예수님을 인하여 고난 받아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인하여.
예수님을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 예수님을 증언하거든요. 증거가 돼요. 나를 인하여 고난을 받을 때만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고 고생인데, 이건 주님의 증거하고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과 인간 스스로 밥 먹고 살려고 고생하는 것과의 차이점이 분명해지려면 세상 보는 이것부터 먼저 달라져야 되겠죠.
세상 보는 기준이 두 개입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성령 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할 것이냐, 누굴 기준으로 할 것이냐. 첫 번째 성령 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봤을 때. 두 번째는 육의 사람이 기준이 될 때. 자, 육의 사람이니까 비교가 되려면, 성령 받은 사람이 기준이 된다면 이 육은 성령 안 받은 사람 또는 성령이 없는 사람이 되겠죠. 이렇게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안 받은 사람으로 기준을 나눈다는 자체가 이미 성령 받은 거죠. 이 나눈다는 자체가.
애들을 이렇게 가르칠 때 성령 받은 애와 성령 받지 않은 애로 나눈다는 자체가, 선생님 자체가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돈 있는 집안의 애와 돈 없는 집안의 애로 그렇게 나누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것과 성령 받지 않은 것 차이. 처음부터 참 어렵습니다.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받지 않은 사람과의 이 차이가 뭐냐 하면, 이 육의 사람은 공간적인 것을 양적으로 계산해요. 양적으로 분별합니다. 양적으로 판단하죠. 공간적인 사항을 양적으로 판단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성령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거든요. 성령 받지 못한 육의 사람들은 공간적인 사항을 양적, 질이 아니고 양적으로 판단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여기 지구가 있으면 오세아니아, 태평양, 쭉 이렇게 나누잖아요. 이게 공간을 양적으로 분간하는 거예요. 너 어느 나라 사람이야? 러시아 사람이야? 중국 사람이야? 스리랑카 사람이야? 뭐 이렇게 나누는 것이 양적인 판단이 되는 겁니다. 전라도야? 경상도야? 뭐 이런 것. 어느 학교 출신이야? 뭐 이런 것. 전부 다 공간개념을 양적으로, 양으로 계산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질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양적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그러면 양적으로 판단했을 때, 판단하는 이것이 뭐가 잘못이냐? 세상 현재 모든 학문도 이렇지만 과학적 학문도 이렇게 양적으로 판단하거든요. 쓰레기와 쓰레기가 만나면 거기에 새로운 창조가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냥 쓰레기의 집합에 지나지 않죠. 쓰레기와 쓰레기가 서로 만나면. 근데 사람들은 쓰레기 하나와 쓰레기 하나가 만나면 어쨌든 쓰레기 하나와 또 쓰레기 하나가 만나니까, 1+1=2가 되잖아요. 그럼 쓰레기가 한 7600개가 있으면 7600으로 계산하는 거예요. 7600으로.
질은 전혀 따지지 않아요. 양적으로 얼마나 풍부한가로 자부심을 느끼는 겁니다. 한 달 수입이 연봉으로 3억이다. 유치원 원장처럼. 그럼 3억을 벌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해야 하는지는 그거는 일단 묻지를 않죠. 돈 50,00+50,000=100,000원이 되니까. 거기에 뭐 당신은 이 50,000원을 벌기 위해서 양심을 어떻게 팔았습니까? 그런 것을 일체 묻지도 않는 거예요. 그냥 양은 무조건 보태면 늘어나는 거예요. 빼면 줄어드는 것이고. 양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줄어드는 것은 나쁜 짓이고 늘어나는 것은 축복이고. 줄어드는 것은 저주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육적인 사람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9절 가운데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어디에 넘겨주겠고? 공회에 넘겨주겠고. 공회죠. 공회. 요새 국회. 그 당시에 최고의 통치기관이거든요. 유대나라가 식민지 시대에 있었으니까. 유대 장로들의 집합소가 공회잖아요. 최고의결기관, 이거 공회입니다.
공회니까 뭐냐 하면 다수가 되는 거예요. 다수. 많다가 돼요. 하나하나 그 인간들 뒷조사하고 이런 것 없어요. 그냥 여럿이 모인 결정은 개인이 내린 결정보다 더 실효성이 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유대사회라는 공간을 양적으로 보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결정한 그것이 힘으로 효과를 내는 거고. 개인의 소소한 의견은 그냥 다수의 의견보다 힘을 받지를 못하죠. 힘을 받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육의 사람의 특징은 그냥 물리적이다. 물리적인 효과, 이것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겁니다. 물리적인 효과. 물리적인 효과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나무를 가지고 탁자를 만들 때 나무와 나무사이에 못을 박잖아요. 목수가 망치로 못을 박으면서 “나무야 미안하다. 많이 아프지?” 이렇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 가구를 만들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아주 아이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두 살, 세 살 애라고 봅시다. “이거 못이고 이거 망치고 이거 나무거든.” 그러면서 치라고 할 때 애는 뭘 느끼느냐 하면 고사리 같은 손이지만 때릴 때 어떤 에너지를 느끼죠. 치면서 나무가 반발하는 그 힘도 느끼고, 그 반발을 이겨가면서 기어이 못을 망치로 때려주는 그 에너지를, 양편으로 자기 온 몸으로 다 느낄 것이 아니겠습니까? 느끼게 되면 애는 그 망치나 못이나 나무에다가 감정이입을 하게 되죠. “나무야 미안하다. 이건 내 뜻이 아니고 엄마의 뜻이야. 많이 아프지? 하지만 니가 의자가 되게 되면 내가 예쁘게 해줄게.”라는, 애들이 인형놀이 할 때 감정이입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물에다가 뭘 집어넣은 거예요? 개인의 정신을 집어넣은 거잖아요. 사물에다가 개인의 정신을 집어넣은 겁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런 게 없다 이 말이죠. 점점 어린애 정서로부터 이 세상의 어른의 정서로 점점 더 멀어지는 겁니다. 이 말은 질적인 것보다도 정신적인 것보다도 물리적인 그것이 대세가 되어가는 사회. 이걸 다시 말하면 집단의 의사가 무조건적으로, 개인이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집단화돼버리면 그 자체가 진리로 행사되는 그러한 사회. 그걸 공간적인 영역으로 생각하자 이 말이죠. 공간적인 영역.
상당히 약간 좀 난해하죠. 이거하고 오늘 본문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있어요. 지금 육의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고 제가 이렇게 단정을 지었는데,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이렇잖아요. 이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드물지 않겠는가, 라는 그런 생각이 들겠죠. 우선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밥 먹은 지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정신차려봅시다.
자, 육의 세계는 뭐냐 물리적인 효과기 때문에, 물리적인 효과는 모든 사물을 하나의 물체로 보는 거예요. 물체로 보면, 물체a+물체b=물체ab가 되는 겁니다. 화학반응이 아니고 물리적인 반응일 때 되는 거죠. 그러면 사람 하나 있고 또 사람 하나 있으면 두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과거가 어떻고 묻지도 않고 무조건 두 사람이에요. 만약에 1500명이 있다면 이거는 1500명의 사람들의 의견이기 때문에 한명이나 두 명보다 월등하게 가치를 더 부여하는 겁니다.
여러분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몇 명이 우세해도 여러 사람, 대다수가 아니면 그거는 뜻이 관철되지 않는 겁니다. 그렇죠. 육의 사람이 공간적인 사항을 양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그냥 물체덩어리와 물체덩어리의 만남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는데, 이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성령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공간적인 사항을 양적으로 분할되고 합치되고, 분할되고 합치되고 그런 식으로 공간이 생겨지는 것이 아니고, 최초로 성령 받은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요단강에서. 그분은 개별자속에 보편자가 들어있어요. 개별자. 예수님은 한 분인데 모든 세계가 다 통일되어서 거기에 다 담겨있다 이 말이죠. 개별자속에 보편자가 들어있어요. 이거는 새로운 공간개념입니다. 새로운 공간개념이에요.
예수님 속에 계신 분이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고 더 큰 거예요. 성령을 받으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성도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뭡니까? 이거는 공간적인 양적개념으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판단 못하죠. 그 사람을 건드리면 누굴 건드리느냐면 주님을 건드리는 것이고. 더 비극적으로 이야기를 해서 어떤 성도를 핍박하게 되면 케냐 나이로비에 있는 야생 코끼리를 건드리는 것이 돼버려요.
왜냐하면 모든 세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성도 하나는 쓰레기 아니에요. 귀한 보배 같은 것이거든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나의 귀한 보배에요. 보배. 왜 보배냐, 뭐 생긴 것이, 착해서 보배가 아니라 그 안에 보배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주님이 들어있거든요.
그런데 이 육의 사람은 양적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너는 나처럼 1일 뿐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라고 봅시다. 예수님은 지난 화요일에 그런 강의를 했거든요. 요한복음 8장 16절에서 내가 혼자 있어도 아버지와 함께 있다 했다 이 말이죠.
이게 물리적 양적개념으로는 도저히 서로 연결이 안 되죠. 물리적 양은 모든 것을 물체로 봐요. 매직 하나 있고 지우개 한 개가 있으니까, 이거 1이고 이거 1이고 해서 뭐가 돼요? 2가 되죠. 근데 매직하나가 단독으로 있으면서 2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단독으로 3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성도 안에는 1이 아니고 2가 들어있어요. 주님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공간적인 차원을 양적으로 파악 안 해야 될 이유는, 그렇게 되면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가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문장으로 정립될 수 있어요. 보편자와 개별자의 관계가 양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서는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끼리 있는 단일 집단 내에 아파트 관리사무소 광고가 치고 들어왔잖아요. 복합적이죠. 중복되어 있죠. 갑자기 우리는 강의를 잠시 멈춰야 된다 이 말이죠. 부모가 나를 태어나게 해서 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여기에 이질적인 하늘나라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이게 바로 성령을 받음이에요. 성령 받은 거예요.
그러니,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이걸 환난이라고 할 수도 있고 고난이라고 할 수도 있고 뭐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죠. 결론 부분을 미리 말씀드리면 우리에게 환난을 주는 게 누구냐 하면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에요.
왜냐하면 ‘나’속에 육의 요소가, 개별자로 살고자하는 요소와 보편자로 살고자하는 요소가 있거든요. 천국백성으로 살고자하는 것은 보편적인 지위, 위치에요. 그러나 성경에서 뭐라고 하던 간에 다 귀찮고, 나는 내 배부르고 등 따시고 잠 잘 자고 나하고 관련된 사람이 아무 탈 없이 공부 잘하고 잘 뛰어놀면 더는 더 욕심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개별자의 의식이에요.
개별자의 의식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 공간을 뭐로 본다고 했습니까? 양적개념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양적개념. “아니, 뭐 북한을 퍼주던 말던 나는 몰라. 나만 안 다치면 되지.” 나만 안 다치면 된다는 거예요. 6.25전쟁 때 강원도 산골에 아가씨가 머리에 꽃 꽂고 미쳐서 뛰노는 동막골이 있죠. 동막골 주민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묻지 말라는 거예요. 공산주의가 좋으냐 민주주의가 좋으냐 그런 것 없고 우리는 우리끼리 감자 캐면서 우리끼리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우리끼리.
자, 우리끼리니까 공간적 개념이죠. 우리끼리의 공간적 개념에 있어서 이질적인 요소가 없죠. 근데 공간적 개념인데 여기에 인민군이 들어오고 한국군이 들어와서 그들에게 뭘 요구합니까? “너는 공산당을 믿을래? 자유민주주의를 믿을래?” 이래 따지는 거예요. 자, 공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강원도 동막골입니다. 동막골은, 이거는 하나의 산에 갇혀서 제한된 거예요. 제한된 것이니까, 우리끼리 행복하게 사는 것이 생의 목표가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 똑같이 갖고 태어나는 거예요. 여러분 애들의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골목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거예요. 애들은 자꾸 자기가 컸던 이 안에, 요 안의 범위로 제한적이에요. 애들은.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애들은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사람들에게서는 안심을 하지만 낯선 사람이 등장하게 되면 굉장히 무서워해서 자기엄마아빠한테 대번에 피해버립니다.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애들한테 선물을 준다고 어떤 애의 아버지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분장을 했어요. 빨간 옷 입고 하얀 수염 달고 모자 덮어쓰고 목소리 굵게 내고 “에브리바디Everbody 칠드런Children’!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드디어 왔습니다.”라는 그 동영상을 제가 받아봤어요. 멀리 독일에서.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기 딸이 자기 아버지를 못 알아봤어요. 산타클로스할아버지인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외손녀는 어떤가 하면은 산타클로스고 뭐고 없어요. 무섭다고 아빠 품에 안겨서는 선물 줄 때만 손을 내밀어서 선물을 가져갔을 뿐이에요.
애들 생각은 철저하게 개별자에요. 자기 익숙한 그것에만 안심을 하는 거예요. 물론 그 영역을 공간적인 영역으로 넓혀가겠죠. 자꾸 넓혀가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도 바깥에 나가지 않은 사람은 항상 꿈꾸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잖아요. 그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공회라는 사람이 뭡니까? 공회라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의 집합체죠. 그러면 영적세계, 천국세계, 그런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전혀 모르잖아요. 모르죠.
누가 누굴 핍박한다고요? 그 육에 속한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은 필히 자기가 모르는, 해석이 안 되는, 자기 판단이 안 되는 쪽을 공격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걸 너희는 상당히 이상히 여겨야 하고 또는 당연히 여겨야 된다는 겁니다. 이 내용이 참 어려워요. 보통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보통 이웃 같으면 친하게 지내려고 할 거예요. 그러나 주님에 속한, 그 새로운 공간에 속한 사람만큼은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극렬한 반대성향을 이상스럽게 그걸 토해낼 것이라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거예요.
그러면 이게 예수님의 예언이잖아요. 이 논리가 인간으로서 납득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납득이 안 되죠. 예수님만 알고 있는 논리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안 된다니까요. 근데 이걸 인간적으로 납득을 시키려고 한다면 이거는 엄청난 잘못된 겁니다. 지금 얼굴들을 보니까 취지가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는 얼굴들인데.
논리성사가 되려면 두 가지에요. 하나는 그렇다면 환난을 피하는 방식. 또 하나는 그렇다면 환난을 유발하는 방식. 근데 이 두 가지 다 논리를 성사시키는 쪽에서는 둘 다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는 거예요. 환난이 있으니까 피하자. 피하는 방법은 뭡니까? 라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이참에 순교해서 빨리 천국가야지, 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환난에 끼어들 수 있는가? 환난의 폭풍에 뛰어드는 방법이 뭡니까? 라는 사람이 있죠. 두 번째가 더 까불고 있죠.
둘 다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이라는 논리를 자기가 파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예언은 논리가 됩니까? 안 됩니까? 논리가 안 되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퍼부었는데 무슨 논리가 있어요. 주님의 의지인데, 우리가 그걸 왜 알아야 됩니까? 당하면 당하는 거죠. 당하면 당하는 거예요.
아까 식당에 스테이크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죠. 스테이크가 없었다는 것을 감안했습니까? 감안해도 소용이 없죠. 그 집은 스테이크 집이 아니거든요. 그 집의 일방적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기대한 자체가 잘못이죠. 그런데 그 식당에서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은 환난을 받을 것이다, 라고 했다면 환난을 받아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환난을 피하는 방법, 환난을 적극적으로 내가 유발해 받아서 신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 이러지 말고 그냥 주시는 대로 받을 뿐이에요. 그 이야기라니까요.
그러면 환난 받으면 효과는 뭐냐, 그 효과는 우리가 바로 성령이 있는, 세상적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 그런 사람의 종류라는 것이 확인이 되고 파악이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이미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 말씀을 봐야 돼요. 자, 다시 한 번 봅시다.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벌써 ‘너희는’ 나오죠. 너희라는 이 말 자체를 설명하는데 벌써 20분 이상 걸렸어요. 물론 아파트광고 4분은 빼고.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너희라는 이 단어자체도 어려워요. 단어가. 너희라는 이 단어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단어지, 우리가 너희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방법이 없어요. 환난 받으면 신자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 말씀도 환난을 피하라고 주는 말씀도 아니에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조심할 것도 없죠. 뭐. 다만 조심하라고 하는 말은, ‘아, 이런 차원에서 환난이 왔구나!’하는 것을 짐작하고 순순히 그걸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그런 뜻이죠.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여기에서 우리가 “그러시면 아니 되옵나이다.”라고 하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있어요? 없어요? 전혀 없는 거예요. 이거는 하나의 운명 같은 겁니다.
성도가 가는 것을 라틴어로 이야기하면 아모르파티amor fati('아모르Amore'는 '사랑'이라는 뜻이다. ‘파티’는 ‘파티(Party)'로 오해 할 수 있는데 파티는 ’Fate‘ 즉 운명을 말한다. 운명에 대한 사랑,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 아모르파티는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니체가 이야기한 거거든요. 김연자씨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니체가 이야기한 거예요. 운명의 파티다. 우리는 그냥 운명 지어진 존재에 불과하다. 운명 지어진. 그 파티가 그 파티인지 그냥 내질러봤는데 일단 그렇다 치고.
주님은 두 개의 공간을 생각하는 겁니다. 두 개의 공간을 생각하는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육적인 공간은 뭐냐 하면 분할되어서 겹쳐지고, 쪼개면 쪼개지고 합치면 합쳐지는, 엮이면 합쳐지는 그런 양적인 개념의 공간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공간이라고 한 것은 무슨 개념이냐 하면 개별자속에 천국을 집어넣는 공간이에요.
우리의 신체 속에 예수님의 죽음도 집어넣고 예수님의 부활도 집어넣죠. 우리라는 신체의 공간속에 죽음의 세계, 십자가의 세계와 부활의 세계를 다 집어넣을 수가 있어요. 꼬깃꼬깃하게 해서 다 집어넣을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어떻게 들어옵니까? 라고 하면 또 양적인 개념이 돼요. 그렇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신체 속에 십자가도 들어있지만 또 뭐도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부활도 들어있죠. 그러면 우리는 부활의 운반체가 되죠. 그걸 좀 어려운 말로 부활의 형상체 라고 이렇게 할 수가 있는데, 부활의형상체잖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스마트 폰을 보면 배터리 있죠. 그걸 보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고 나면 자꾸 줄어들어 있잖아요. 그 스마트 폰 배터리 신세가 우리 신세가 아닙니까?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는 거거든요. 매일같이.
간만에 퇴직했다가 취직했다고 좋아하면 안돼요. 취직하면 뭐합니까? 계속해서 갉아먹고 있는데. 배터리가 4개 표시되어 있다가 3개로 점점 더 막대기 칸수가 줄어든다니까요. 무엇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까? 무엇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선 세상적인 양적으로 생각을 해봅시다. 목숨은 처음에 100퍼센트 있었는데 죽으면 0퍼센트가 된다. 이게 양적개념이거든요. 질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양적개념.
그러한 우리 속에 새로운 중복된, 중첩된 사랑공간이 같이 엎어져있다면 우리는 뭘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의 목숨은 삭감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게 삭감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몸은 죽으면 죽을수록 뭣이 빛난다? 다시 사는 몸이라는 것이 점점 더 그 가치가 높여지죠. 우리가 살 수 있는 몸. 물론 살 때는 고물 없애고 신상으로 바꾸어서 삽니다. 부활됩니다. 똑같은 몸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몸이거든요. 근데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고 시집도 아니 가는 그런 몸으로 되어 있어요. ‘아, 이 몸이 장가 안 가는구나!’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거는 양적으로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대들 때에 이 땅에서 결혼을 일곱 번 한 사람이 있다면 나중에 천국가게 되면 누구의 남편이 되겠느냐, 라는 그 질문을 한 거예요.
그 질문 자체가 뭐냐 하면 천국개념을 양적 공간 개념으로 생각한 겁니다. 양적 공간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 시작을 뭐로부터 했느냐 하면은, 나는 내 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오고 내가 태어난 그대로로 가득 차 있다. 그걸로 끝. 이래 보는 거예요. 내 안에 다른 요소가 안 들어왔다. 이 몸은 이 몸뚱아리뿐이라고 여길 때는 양적 개념이 되는 겁니다. 내가 그렇다는 말은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것이거든요.
여러분들이 모델이 있는 그림을 그린다. 화가가 모델을 보고 그림을 그릴 때에, 모델을 보고 그냥 베껴서 그린다고 하겠죠. 그게 아니에요. 화가가 먼저 자기생각을 모델 쪽에다가 입혀버려요. 입히고, 자기가 모델을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 생각하는 그림을 화가가 그리는 겁니다. 내가 여기 가만히 있지 않고,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덧입혀놓고, 덧입혀놓은 상태에서 그걸 그대로 가시적으로 종이위에다가, 천위에다가 물감으로 그리는 거거든요.
이게 화가만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뭐라고 할 때는 아내가 남편의 이야기를 그냥 듣지 않고, 아내가 남편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럴 때 아내는 남편이 그럴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관점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관점주의.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관점 나름이라는 겁니다.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냥 우리가 쉽게 생각해서 인간은 선입감이 있다는 것으로는 모자라요. 그 선입감이 어떤 선입감인데? 라고 할 때는 내가 나를 보는 선입감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이래보시면 되는 겁니다. 심지어 이거는 어린애가 부모를 볼 때도 마찬가지에요. 엄마보고 뭘 사달라고 하면 엄마는 “안 돼.” 애는 “그게 왜 안 돼?” 엄마는 “이게 뭐냐 하면 니가 관점주의기 때문에 그렇다.” 애는 내가 엄마라고 할지라도 그거는 허락이 될 텐데, 라고 일방적으로 자기가 생각을 하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없다?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결론삼아 이야기를 했잖아요. 환난을 누가 줍니까? 내가 나에게 환난을 주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여기 성경에서는 누가 준다? 공회가 준다고 했죠. 공회가. 이 공회라는 것이, 지금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사회잖아요. 유대사회 앞에서, 공회에서 먼저 핍박의 모델이 되신 분이 계시죠. 누굽니까? 예수님이 핍박을 받아서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잖아요.
그러니까 공회가 예수님을 공격했을 때에, 이 공회가, 우리가 공부한대로 하면 공간을 뭐로 본다? 양적 개념으로 보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공회가 모일 때 출석 체크하는 거예요. 몇 사람 왔다. 이래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인간다운 몇 사람 왔다가 아니라 무조건 몇 사람 왔다가 되는 거예요. 인간다운 사람 그런 거 따지지 않고 그냥 하는 거예요. 국회 투표할 때 표가 몇 표 나왔지, 인간다운 사람 표가 몇 표, 덜 인간다운 사람, 짐승 같은 사람 표가 몇 표, 이렇게 이야기를 안 한다니까요. 표라는 말이 그래요.
여러분 때 묻은 5만 원짜리하고 깨끗한 5만 원짜리하고 어느 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똑같죠. 때 묻은 5만 원짜리로 깨끗한 손수건 5만 원어치 사는 것이나 더러운 5만 원짜리를 가지고 깨끗한 손수건 5만 원어치 사는 것이나 나중에 보면 손수건이 이만큼 되어 있다고요. 그게 교환수단이기 때문에 그래요. 교환수단이기 때문에.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자신을 보다 더 나은, 자기 자신이 시발점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뭐냐 하면은 교환매개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그리던 나가 되기 위해서 나를 아낌없이 소모용으로 사용해서 더 큰 것을 얻고자 하는 거예요. 나를 소모용으로, 나를 매개로 사용해서.
공회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다수의 의견이 진리에 가깝다는 취지를 갖고 있는 것이 공회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몇 분입니까? 한분이죠. 일대 다수잖아요. 1 대 다수. 근데 이 공회 안에서 공격한 것이 예수님 혼자뿐이죠. 근데 앞으로는 나뿐만 아니고 나의 증인된 사람도 같이 당한다는 것을 지금 예언하고 있거든요. 그럼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럼 나는 예수님 편에 설래.’라고 생각하겠죠. 그런 인간이 없다니까요. 그런 인간이 없어요. 그럼 우리는 어느 편이냐, 공회 편에 서죠. 같은 인간이니까. 태생이 육으로 태어났잖아요. 그럼 공회 편에 선다고요. 공회 편에.
그러면 나라는 인간을 통해서 뭡니까? 공회의 여러 사람의 말이 옳다는 그런 성향을 내가 갖고 있어요. 육이니까. 근데 성령이 와버리면 예수님이 옳다는 예수님 편이 생기죠. 그럼 내 안에서 누가 누굴 공격해요? 공회 쪽에 서있는 나가 예수님 편에 서 있는 나를 공격하면서 뭐가 일어났습니까? 이게 바로 환난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봅시다.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죠. 매질당하면 다 순교자입니까?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 예수 믿는 사람인데, 마가복음 13장 9절처럼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예수 이름으로 내가 공회로부터, 안 믿는 사람으로부터 매를 맞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든지 혹은 ‘내가 중국에 와있는데, 북한에 와있는데 예수이름 믿는 사람으로서 핍박을 각오해가지고 성경책 다 째이고 나는 교도소에 가고 결국 사형당하는 일이 있구나. 이것이 주께서 주시는 환난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이 마가복음 13장 9절의 말씀을 이룬 겁니까? 안 이룬 겁니까? 안 이룬 거예요.
왜냐하면 이거는 내가 공회에 속한, 육적인 나로서는, 육적인 인간은 주님의 계획을 사전에 눈치 챈다? 못 챈다? 못 채죠. 주님의 일은 뭐든지 우발적이고 사건이기 때문에. 내가 미리 그걸, 북한에 가고 중국에 가면서 은근히 내가 신자이고 싶어가지고, ‘이거 보안부에서 좀 나를 안 잡아가나’라는 것을 했다가 ‘옳다구나. 잡아가는구나. 드디어 마가복음 13장 9절의 말씀이 계시되었구나.’라고 생각을 하다면, 순교하고 싶은 나를 설정해놓고, 이미 성경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하는 내가 그걸 소모시켜서, 그걸 매개로 해서 내가 되고 싶은 거룩한 순교의 모습, 상상한 순교의 모습이 되고자 하는 것으로 지금 수작을 부린 거예요.
아니, 이 대목을 가지고 하는 주석이나 어느 설교를 한번 들어보세요. 지금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수작을. “마지막 때 환난을 여러분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뭐예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 주께서 너를 신자라고 인정해줄 것 같아? 택도 없는 소리에요. 내가 나를 핍박해야 이게 순교자에요. 핍박하는 나와 핍박받는 나가 둘 다 있어줘야 이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애가 20대 중반도 아니고 20대 초반인데 벌써 결혼하겠다고 설친다. ‘자, 저걸 패버릴까?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할 때, 그 아들이 하는 말이 “어머님, 아버님 이것도 주의 뜻입니다.” 그게 더 미워. 좀 젊을 때 즐기지, 결혼하면 갑자기 행복이 절로 오고하는 것인 줄로 아는 것처럼. 이게 아까 관점주의라는 거예요. 아들을 보면서 또는 딸을 보면서 나를 보면서 자기가 생각했던 생각대로 되기를 은근히 강요하는 겁니다. 그게 내 속에 뭐가 있기 때문에? 내 속에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기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억을 뭐로 하느냐 하면은 망각의 존재로 바꿔야 돼요. 근데 우리는 기억한 것을 망각할 수가 없어요. 차라리 우리는 내가 기억한 노선 말고 다른 노선이 난입하고 침범해야 돼요. 그 다른 노선이 뭐냐 하면은 주님만 알고 있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 그 길이죠. 그게 생명의 길이고. 내가, 일본말 써서 죄송합니다. 겐또けんとうkentou, 겐또가 우리말로 뭐라고 하죠? 어림잡아서. 내가 어림잡아서, 내가 겐또잡아서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님한테는 안 통합니다.
주님은 주님의 공로만 가치가 있지 거기에 섞이는 것을 싫어해요. 예를 들어서 주님께서 뷔페식당에 가서, 맛있는 거 있잖아요. 포테토하고 오뎅하고 이런 것. 맛있는 거 이런 거 쭉 접시에 담아왔는데, 앞에서 그걸 보고 서글프다고, “주님 이것도 잡수세요.” 해가지고 마음대로 집어넣고 이렇게 하면 주님이 저리 탁 치워 버리죠. 주님의 모든 세계는요, 주님의 원대로 뜻대로 해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끼어들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어요. “나가 있어!” 구원할 때만 건질 뿐이지 우리가 내 구원에 내가 관여할 게 일체 없다니까요. 일체 없어요. 오늘 제목을 겐또라고 할까? 그런데 마가복음 13장 9절을 가지고 자기가 지금 겐또 잡는 거예요. 자기가 구원된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서 조작에 들어가는 거죠. 일종의 시나리오를 쓰는 거예요. 이 대목의 모든 설교가 다 그래요.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겠고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라.
제가 어제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저의 예가 약간 극단적인 것이 있긴 있어요. 그러나 다시 극단적인 예를 들게 되면 음주운전해서 비틀거려서 경찰한테 걸렸거든요. 근데 경찰이 하는 말이 “아이고, 어르신 음주운전 하셨네요. 조심히 운전해가지고 가서 가족 품에서 주무세요. 안녕히 가세요. 조심히 가세요.” 이렇게 하게 되면 그 음주운전자가 어떻습니까? 굉장히 기분이 좋죠. 그렇죠.
그 예를 제가 화요일에 들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한테 좋게 이야기하면 다 점잖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음주운전을 해도 “아유, 잘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이 있었으면 한잔 걸쳤겠습니까? 어르신, 한잔만 했죠?” “(큰 잔으로)한잔만 했어요.” “조심히 가서 주무세요. 혹시 사고 나더라도 우리가 책임질게요.” 이래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좋게 해주면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더더더더.... 불라고 하니까 이만큼 화딱지가 나서 숨기려고 도망치는 겁니다.
성도가 골프 치다가 캐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캐디한테 한 잔소리하니까, 옆에 있던 신문기자가 그걸 알아가지고 사진 찍어서 갑질한다고 했을 때, 그게 뭐가 돼요? 그게 환난이 되는 겁니다. 주님을 위한 환난. 환난의 조건은 뭐다? 예상 못한 거예요. 우발적인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환난은 다 비켜가요. 내가 생각한 환난. 시집갔는데 시어머니가 아주 독실한 불자라서 교회 간다고 머리채 다 뜯어가지고 앞에만 남고 위에는 완전히 소갈머리처럼 다 빠졌다. 이게 환난이다. 환난. 이래가지고 간증집회하고. 그런 짓하면 안 돼요.
환난은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누구한테? 내가 나한테 환난 하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 믿고는 못 살겠다.”하고, 마귀가 구원받은 내 사람을 붙들고 그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니 예수 믿고 난 뒤에 수입이 얼마나 늘어났나? 니 예수 믿고 난 뒤에 집구석 얼마나 잘 됐는지 한번 봐라. 니가 이래도 예수 믿을래?”라고 계속 쥐어뜯는데, 내가 나를 쥐어뜯어요. “니 예수 믿고 난 뒤에 얼마나 건졌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승진을 했습니까?” 또 탈락. 그렇게 복음을 아는데 왜 안 되지?
예수그리스도는 뭐냐, 우리가 성장하는데 있는 게 아니에요. 발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껍데기 쓰레기에다가 예수님의 고귀함을 거기다가 그냥 담아버리는 거예요. 아이스크림 과자 컵 있잖아요. 거기다가 그냥 아이스크림을 담는 거예요. 아이스크림 스코프로 뚝 떠서 툭 그냥 담는 거예요. 담을 때 그냥 거기 담기는 거지. 창녀라도 괜찮아요. 세리라도 괜찮아요. 강도라도 관계없어요. 무엇이 담기냐가 중요하거든요. 무엇이 담기냐가.
주님의 환난이 담겼다는 말은 주님이 담겼다는 말이고 성령이 거기 계셨다는 뜻이에요. 이거는 “아이스크림 담아주세요. 빈 통 가져왔습니다.” 이래가지고 담아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 통하고 아이스크림하고 둘 다 주님의 환난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의 자식이에요. 주님의 환난의 확대, 연장선입니다. 주님의 확대의 연장선이에요.
그럼 공회는 뭐냐 그거 들러리죠. 들러리. 공산당은 뭐냐 들러리라니까요. 북한에 지하교인들이 있다고는 저는 믿지를 않아요. 극동방송 들었는지. 혹시 성도가 있다면 요덕수용소에 갇혀가지고 예수 믿는다고 핍박받는다면 그거는 요덕수용소 소장부터 해서 못돼먹은 김정은이까지 이거는 전부 다 하나의 주님의 환난을 꾸미는 연극배우들이에요. 엑스트라들이에요. 엑스트라들.
왜?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환난이라는 드라마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들, 자기만 있으면 안 되거든요. 자기가 물론 주인공이지만 자기만 있으면 안 되거든요. 거기에는 나쁜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간사한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왔다 갔다 우왕좌왕하는,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그런 간신배도 있어야 되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세상에서 많이 만나지 않습니까?
여기 환난이란, 내가 나를 예상 못한 인생 또는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주님의 일관된 작업입니다. 내가 생각한 내가 아닌. 정말 이거는 말씀에 준해서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을 다루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3장 9절을 우리에게 제공하신 겁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 당시에 회당이 있고 공회가 있는 그 시대에만 해당이 되겠어요? 아니면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겠습니까?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갑질하는 사람이냐, 아니 갑질 을질이 문제가 아니고, 공간을 양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뺑뺑 포위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그게 성도라 이 말입니다. 공간을 양적으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라고요?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게 뭐냐 하면 개별자 속에 보편자가 담기는 겁니다. 지극히 작은 자, 뭐 대수롭지 않고 뭐 웃기나 하는 그런 인간인데 그 안에 그리스도가 담겨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한테 물 한 컵 대접하는 것은 누구한테 한 것이다? 주님한테 한 거예요.
그런 사람이 누굽니까? 파악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걸 왜 파악해요. 그거는 관점주의라니까요. 관점주의. 파악 안 해도 돼요.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환난으로. 골프 치는 환난, 복권에 당첨되는 환난, 일찍 결혼하는 환난, 공부 잘하는 환난, 모든 게, 되어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겁니다. 합력하여 모든 일에 하자가 없을 거예요. 하자가.
9절을 다시 봅시다. 이 9절을 얼마나 해야 되는지 몇 시간을 해도 모자라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자, 너희는 조심하라고 했으니까 조심할 자도 나고, 조심이라는 꺼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나고,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환난을 유발하고, 내가 나에게 유발한 그 환난에 대해서, 그 내가 주는 환난 속에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래서 성도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것도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주께서.
그래서 비케어플be careful, 조심하라. 니나 조심해. 니가 니한테 괴물이야. 최후의 적은 누구다? 너 자신이에요. 너 자신. 핑계대지 마! 공산당이고 뭐고 핑계대지 마! 니 자신이, 가장 가까이 있는 니가 너의 최후의 적이다. 영화 석양의 무법자 보면 총 쏘고 하는데, 자기 배에다가 총 쏴버려요.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누가 11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11절,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보세요. 지금까지 한 게 이제는 이해가 되시죠.
개별자속에 뭐가 들어있다? 보편자에요. 아니, 개별자속에 개별자가 들어있는 게 아닙니까? 성령은 보편자에요. 성령은 모두에게 다 준 거예요. 나의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성도에요. 성령 받았으면 전부 다 한 몸이 되는 거예요. 한 몸이 된다. 주님에 의해서 전부 다 한 몸처럼 다루어지는 거예요.
일곱 교회를 전부 다 주님의 오른손에 쥐듯이. 내 교회 네 교회가 없어요. 전부 다 한 교회가 되는 것처럼. 성령 받았으면 전부 다 한 형제고 한 지체고 한 몸이고. 세례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근데 그걸 누가 반대합니까? 내 믿음이 반대하고 내 세례가 반대하고 내 소망이 반대하는 거예요.
내가 그 보편적인 나를, 개별자 내가 반대하고 나서는 겁니다. 왜? 나는 나만 기억하기 때문에. 내 잘남만 기억하고 남한테 뒤떨어지지 않고 내가 우수하다는 그것을 보람으로 삼고 싶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 고맙게도 주께서 다른 사람, 육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핍박을 해주죠. 고맙게도.
그러면 어? 나는 그만큼 핍박받을 짓은 안 했는데? 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내 안에 다른 보편적인 주님의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도록, 이 세상 육의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를 위해서 충실하게 봉사해주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봉사를 잘해요. 성도에게 봉사하라고 안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도의 파급효과라고 합니다. 파급효과. 파급효과라고 하는 말은 어떤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이게 우물에 돌멩이가 하나 뚝 떨어지면 그 지점에서 파동이 전 사방으로, 우물 전체로 퍼지겠죠.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떴다. 만들어졌다. 이스라엘 때문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 보면 옆에 있는 나라가 다 멸망해요.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들의 예언들이 그거에요. 이스라엘에만 관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파급효과를 언급한 겁니다. 예언서가.
“에돔아 너희들은 저주받아라.” 이게 말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저주가. 왜? “너희는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속였기 때문에.” 이래 되어있죠. 전에 여호수아 설교할 때도 그게 나오죠. 민수기 같은 경우에 그들이, 모압과 암몬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한다(신23:3). 왜 그러냐면 그들은 이스라엘이 광야 있을 때 그들에게 대접을 잘 못했기 때문에(신23:4). 이게 이스라엘이 없었으면 그들은 저주받을 일도 없어요. 그들이 저주받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밑도 끝도 없이 복 받은 민족이라고 덜렁 등장해야 됩니다. 등장해서, 등장함과 동시에 저쪽에서는 뭡니까? 저주되어야 돼요.
여러분 동영상 봤죠? 이거만 하고 쉽시다. 인도네시아 해일이 일어나는 동영상. 밴드가요, 뭐 기타치고 드럼치고 노래하고, 뭐 천막 같은 거 만들어가지고 열심히 했어요. 지가 퀸도 아닌 게 공연한다고 랄랄랄~~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무대가 무너지면서 그 일곱 명이 다 죽었어요. 무대에서 다 죽었습니다. 해일이 등장하니까 그 파급효과가 죽음으로 되잖아요. 진즉에 인간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죽어가면서 이유를 몰랐는데 이스라엘이 등장하면서 알게 되고, 신약에는 바로 성령 받은 성도의 등장으로 그들이 죽는 이유를 알아야죠.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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