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8장 33절(두개의 세상)181016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8장 32절 한번 보겠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렇게 되어 있죠. ‘말씀에 응한다’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일도 인간의 어떤 발걸음도 어떤 생각도 말씀이라는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어떤 계획도 말씀이 허락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계획도.
예를 들면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을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한번 적어볼께요. 예수님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씨 뿌리는 자’로 이야기 했어요. 씨 뿌리는 자. 이게 뭐냐 하면 주도권이 예수님한테 있다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주도권이. 한번 상상해 보세요. 농부가 씨를 갖고 있다. 이것을 마구 뿌리는 거에요.
그런데 뿌릴 때 밭이 우리한테 던지지 마세요 라든지 듬뿍 뿌려주세요 가 성립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냥 임의로 임의로 뿌려요. 위에서 살충제를 살포하듯이 주님께서 뿌리는 자거든요. 그러면 세상은 이미 세상은 어떻게 되겠어요? 뿌린 대로 진척될 뿐이에요. 뿌린 대로 진척. 전개되는 것.
위에서 씨 뿌리는 분이 뭐를 뿌리느냐 하면 마태복음 13장입니다. 씨 뿌리는 분이 뭘 뿌리느냐 하면은 ‘말씀’을 뿌리거든요 말씀을. 말씀을 뿌리게 되면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이라는 것은 항상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할 때는 출발을 예수님의 씨 뿌림부터 출발을 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부터 시작해야 이 세상이 규정이 된다는 겁니다.
세상은 어떤 것이냐? ‘말씀대로 전개되는 것’ 간단하지요. 간단하거든요 세상이라는 것은. 말씀대로 전개된다. 그러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말씀 봐. 말씀 보라고. 거기에 보면 그 말씀대로 전개되는데 그걸 요한복음 18장 32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응한다는 것. 때가 되매 타이밍 맞춰서 딱딱 그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를 인정을 하려면 내 인생에서 내가 내 인생의 씨를 내가 못 뿌립니다 또는 뿌릴 수 없습니다. 뿌려도 소용 없습니다를 인정해줘야지요. 내 인생에 대해서. 내 인생은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 내 인생에서 나를 빼세요. 나를 빼고 인생 자체가 주님의 씨 뿌림의 전개 과정에 거기에 합류되어 있다고 봐야 되지요.
그러면 내 인생에서 내가 빠져버리면 그러면 나라는 인생은 누구에 의해서 결정된겁니까? 주님의 씨 뿌림에 결정 되지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내가 뭐를 더 얻을까를 생각 안하고 주신게 뭐냐를 생각하게 돼요. 인생을 살면서 제일 모든게 피곤하고 짜증나고 화나고 투덜대는 이유가 내가 왜 투덜대느냐 하면 내가 희망을 갖기 때문에 그래요. ‘희망’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기대를 갖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희망과 기대를 갖지 말자는 겁니다. 그러면 희망과 기대를 갖지 않으면 그럼 나는 뭐냐? 나는 이게 되요. 완결이 되는 겁니다. 이것 주세요 하지 말고 이것 주셨네요 라고 바꾸자 이 말이죠. 그것을 헬라어 문법에서는 ‘아오리스트’라고 하는데 완료형이에요 완료형. 그 완료형의 대표적인 구절이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시고’가 우리 번역에는 과거로 되어 있잖아요 그 말이 맞아요.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그 다음에 영광스럽고 또는 영화롭게 영광스럽게 하셨느니라 하는 그 번역이 뭐냐 하면 성도를 볼 때에 완결형으로 봐라 완결형. 그러니까 내가 몇 년도 태어났을 때는 때가 응해서 태어난거에요. 내가 몇 년도에 태어났다는 것은 태어났으니까 이거 가져야해 네가 이만큼 실적 업적을 남겨야해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에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는 아 태어났다는 자체가 이게 주의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태어난겁니다. 말씀자체가 완결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인생이 피곤한 이유가 뭐냐 하면 기대를 하기 때문에 피곤한거에요. 완결로 보지 않고 기대를 하기 때문에. 딸이 와서 엄마 나 수학 0점 이야 라고 할 때에 그 아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거 아니고 주께서 모르는 문제만 출제되게 하셔서 그런거에요. 아버지가 교무과장이 아니거든. 모르는 문제만 출제되서 그렇게 한거에요. 뭐 속으로 부글부글하겠지만. 그래서 엄마가 되어서 딸이 수학 시험 나 몇 점 맞았는지 알아? 이렇게 할 때는요 마치 기대를 안 한 것처럼 내가 생각도 안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세요.
오늘이 분명이 수학시험 발표 날인데 이게 학원 끝나고 5시에 들어오겠지. 5시에 들어오면 내가 물어야지. 너 시험 몇 점 맞았어? 이 자체가 이미 기대잖아요. 이 자체가. 이 자체가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인생 사는게 피곤해요. 가만히 있어도 피곤한데 피곤을 가중시키고 있는겁니다. 뭘 새롭게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뭐를 얻고 살았나를 생각하라 이 말이죠 뭐를 얻고 살았나. 그게 바로 그렇게 될 때 범사에 감사라는 말씀이 현상이 나타나고 그게 말씀에 응하는 거에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뭐로 봅니까? 씨 뿌리는 농부로 봤지요. 씨 뿌리는 자. 씨를 뿌렸거든요. 어디에 뿌리는가 보니까 ‘마음’에 뿌렸어요 마음에. 그게 13장에 보면 나와요. 마음에 뿌린다고. 그런데 이 마음은 수동적입니다. 뿌리면 뿌리는 대로 그냥 결과물을 낼 뿐이에요. 씨 뿌렸는데 마음이 정신 차려라 이 놈아 해서 내 마음이 내 마음을 원하는 마음이기를 포기하라 이 말입니다.
주시는 씨와 마음이 거기서 반응을 나타내는 이 반응은 주께서 이미 익히 아시는 반응이기 때문에 이 반응을 내 마음이 조작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우리는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 같아요. 산성에 들어가면 붉은색깔이 파랗게 변하고 그렇지요? 붉은 산은 불난다 하는 공식이 있잖아요 화학시간에. 산성은 리트머스 시험지를 붉은 것을 파랗게 변하게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그게 리트머스 시험지가 오기 전까지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예를 들어서 내가 하나의 씨를 뿌린다고 들을 때 그 말씀이 전혀 생각이 안 날 때 이거 마귀가 와서 낼름 물고 도망친 겁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예시에서 악마를 뭐로 표시했느냐 하면 말씀을 빼가는 존재로 봐요. 그만큼 악마에서는 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악마는 이미 알고 있어요. 악마를 말씀을 낚아채는데 악마의 모든 힘은 영향은 거기에 모아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악마의 복수극을 벌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복수심이 있어요.
왜냐하면 선악을 아는 일에 있어서 자기도 한 몫 하는데 악한 천사가 선악을 알고 있거든요. 하는데 주님께서는 선악을 아는 그런 주로써 자기 아들 예수님을 자기 대신 내세웠습니다. 소설 이야기 아니에요. 이거 요한계시록에 다 나오는 이야기인데. 악마의 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악마의 적은 예수님이 적이에요. 욥기에 보면 악마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구약이니까 신약은 또 예수님이 등장하지만 예수님 오시기 전이니까 그 시키는대로 욥에게 가지요.
욥에게 갈 때에 욥이 장차 올 성도의 그 모습을 욥이 잘 보여줍니다. 욥기 13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로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이런 대목이 나와요. 하나님이 신앙인에게 다가섰는데 신앙인 왈 하는 말이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로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라는 반응을 나타난 겁니다.
대단히 중요한 대목인데 욥기 13장 24절 대단히 중요한 대목인데 이게 뭐냐 하면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신앙을 가지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신앙의 ‘보관자’로서의 인간이 신앙인이에요. 주님이 주신 신앙을 보관하고 있는 사람. 그걸 유지하고 있는 사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신앙을 ‘선물’이라고 하거든요. 내가 신앙을 공장에서 만들어 낸 것이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택배로 보내준 신앙을 고이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신앙인이에요.
왜냐하면 그 신앙인 속에는 그 신앙 속에 내용을 쪼개보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신앙’이 거기에 담겨있어요. 예수님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야기 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도 포함되어 있고 ‘주께서 나를 살리셨나이다’도 포함되어 있고. 그 중간에 ‘주께서 모든걸 다 이루었다’도 포함되어 있고. 이해 되십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이 없는 신앙을 예수님이 오셔서 생산해 내는거에요. 그 생산해 낸 것을 성도를 통해서 보관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보관했던 그 성도의 입에서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로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라는 그러한 반응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반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때 나온 반응과 반응을 그대로 복제를, 복사를 한거에요.
우리가 아는 신앙과 너무나 다르죠. 우리가 아는 신앙은 뭐냐? 믿습니다.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 주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떠나지 않겠습니다. 잘못했을 때 회개하겠나이다. 우리가 줄줄이 꾀고 있는 신앙의 그 면면들은 굉장히 고상하고 성스럽고 거룩하게 보이잖아요. 그런데 정작 욥이라는 신앙인이 보여주는 진짜 신앙은 주께서 어떻게 얼굴을 가리시고 저를 외면하시고 어떻게 저를 주의 원수로 만드십니까가 신앙의 그 내용이 된다 이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쳤던 그걸 그대로 보여주는 거에요. 우리의 상식을 밥상 엎듯이 엎어버립니다. 우리의 상식을 엎어버려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처음부터 다시 할께요. 씨 뿌리는 분, 씨 뿌리는 농부로서 예수님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세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씨 뿌리는 이의 ‘연쇄작용’이죠 연쇄작용. 연쇄작용으로서 저는 이걸 ‘전개’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있는 것이 아니고 전개되어 가는 거예요. 씨 뿌리는데 그 씨 뿌리는게 뭐냐 하면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이라는 씨를 뿌려주게 되면 여기에 세상에는 없는데 씨가 뿌림으로서 말씀이 있음으로서 말씀이 말씀되게 말씀의 내용을 더 전개하는 전개과정 속에서 부채살처럼 펼쳐지는 것이 이게 바로 세상이라 이 말이죠 세상. 이게 바로 창조 아닙니까 창조. 이게 세상이다 세상. 세상 있다면 이 세상 속에 인간의 마음도 인간의 몸과 마음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수동적이라서 내가 내 마음을 못 바꿔요. 못 바꾸니까 바꾸지 마세요. 내가 내 마음을 바꾸지 마세요.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 있는 마음으로 바꾸지 마세요.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데 그 소관은 말씀의 소관인데 마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마음 안 고치면 너 지옥 가 라는 식으로 협박을 한거에요.
협박을 하니까 이 협박은 뭐냐 하면 악마가 와서 농부가 씨를 뿌릴 때 돌짝밭에 떨어진 씨의 특징을 해석하면서 뭐냐 하면 악마가 와서 그 떨어진 씨를 씨 채로 몽땅 물고 갔다는 거예요. 씨 없다. 여기 씨 없다 하는 식으로 물고 갔다는 말은 악마가 정말 싫어하는 것 악마가 정말 반대하는 것은 뭐다? 세상 역사를 전개하는 기초되는 그 말씀 전개 시키는 힘의 원동력을 아예 차단시키는게 악마의 역할이에요.
말씀 자체 씨 뿌리는 분 예수님이죠. 씨 뿌리는 분과 차단시키고 이걸 아예 말씀이 없으니까 예수님도 없겠지요. 없는 걸로 하게 되면 이 세상전개는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바로 인간들 손에 달린거예요. 그럼 내 인생 전개 내 인생 운명과 미래는 누구 손에 달렸단 말입니까? 나한테 달렸다. 내가 얼마나 순종하고 믿고 착실하고 헌금하고 나한테 달렸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악마의 복수극’이에요. 악마의 복수극.
선악을 아는데 있어서 왜 나도 악마도 아는데 주님께서는 따로 주를 나 말고 제끼고 하나님 아들에게 줬습니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서 악마는 자기 인간들을 볼모로 잡아 버리죠. 그렇게 해가지고 복수극을 하게 만들어서 총을 악마한테 겨눌 총부리를 누구한테 겨누게 만드느냐 하면 예수님한테 겨누게 만드는 거에요.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너무나 예수 믿는 내가 내가 보기에 너무나 대견스럽고 훌륭하고 착하기 때문에. 주여 그럴리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야 라고 베드로를 통해서 12제자를 통해서 그렇게 보여줘도 그건 베드로가 신앙이 없어서 그렇지 저 몰라요? 저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우기는데 욥기 13장 24절에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거에요.
욥기 13장 24절 네번째한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로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라고 이야기 한거에요. 누가? 욥의 친구가 아니고 욥이. 하나님이 자랑질하려고 내세운 그 신앙인이 이런 고백을 하는거에요. 이 고백은 놀랍게도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하신 고백이에요.
그렇다면 주께서 신앙인에게 네가 믿음을 만들라는 이야기 아니고 내가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이 네 안에 보관이 되고 장착이 되게 되면 그 말씀이 스스로 안에서 움직이면서 이게 주름 겹쳐진 것이 펼쳐요. 마치 영화 자동차 됐다가 로봇 되는거 있잖아요. 트랜스포머처럼 1,2,3,4 까지 나온 트랜스포머처럼 스스로 이렇게 구겨진 것이 펼쳐지는 겁니다. 펼치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나와요.
그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믿음이에요. 그 과정을 밟게 하는겁니다 그 과정을.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주를 배신하는 당사자가 나라는 그 자리부터 시작해야 그게 신앙이에요. 이게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 찾아왔을 때 똑같은 반응으로 나타났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 반응이 뭡니까? 나? 네가 핍박하는 나. 네가 핍박하는 나.
그러니까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고 나는 너의 핍박을 받는 자 나. 핍박받는 자가 핍박하는 자를 찾아오는 방식의 구원이에요. 구원은 그 방식 외에 다른 방식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핍박했다는 인식 없으면 그 사람은 지금 자기 믿음을 조작하는 사람이에요. 모든 하는 일이 주님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왜 날 힘들게 하느냐 이 말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내 인생 왜 이렇게 꼬이게 하십니까. 맹장 꼬이면 수술하면 되지 인생 꼬이면 수술 할 그것도 없어요.
그렇다면 말씀이 세상 전개하면서 신앙의 본색을 한꺼풀 두꺼풀 벗겨낼 때에 그 과정을 그 과정에 어떤 원칙이 있는데 다른 이방민족은 원칙을 몰라요. 구약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그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은 간단하게 이렇습니다. ‘시간에서 공간으로, 공간에서 인물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어떤 계명을 줬냐 하면 ‘안식일을 지켜라’했죠 안식일을. 안식일은 공간입니까? 시간입니까? 시간이죠. 특정 시간을 엄수하게 만들었어요. 특정 시간을 엄수하게. 인간세계의 어떤 특정 시간을 들어와 버렸습니다. 제가 대구 강의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오실 때 그냥 오신게 아니라 특정 시간을 요구하면서 들어 왔다는 말은 평소의 인간들의 모든 시간은 뭐냐 하면 자기 생계와 삶의 보탬에 대해서 시간 스케쥴이 짜였다는 것을 염두해 두는거예요. 내 몸 살리기 위해서 나는 시간관리에 나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안식이라는 것을 강제로 이야기 해버려요 강제로. 강요해 버려요 안식일을.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잖아요. 날. 안식이 뭡니까? 쉬는 날 이잖아요. 누구 쉬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 쉬는 날이에요. 하나님이 쉬는 날을 반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너 이스라엘아 너는 택하신 백성이거든요. 택하신 백성 출애굽기 19장에 나오지요. 너는 택한 이 세상에 많은 민족들 가운데 유일하게 너를 택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많은 민족들을 일부러 들추어내요.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너만 유독 택하여 세웠나니 지금부터 너는 뭐를 지켜야 되는냐 하면 언약을 지켜야 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언약이란 강매에요 강매. 언약 강매라고요.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청한게 아닙니다. 우리 그것 지킬께요 자기들이 짜낸게 아니에요. 그냥 쳐들어온거에요 언약이라는게.
쳐들어와버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6일동안 7일동안 열심히 살아도 안식일을 누락하게 되면 작살나게 되어있어요.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삶과 죽음은 본인의 노동여하에 달린게 아니고 어디에 달려있습니까? 주께서 규정한 그 틀, 주의 안식일 틀에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면 안식일 잘 지키면 되지 않느냐. 안식할 시간이 또 뭐로 변하느냐 하면 안식하는 땅으로 변해요. 시간이 뭐로 변한다고 방금? 시간이 뭐로 변합니까? 공간으로 봐요. 이걸 가지고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시간이 공간으로 변해요. 안식이 이렇게 완료되는 것. 마무리 되는 것. 계속해서 안식되는 땅, 그게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누가 사느냐? 성경에 보면 약속의 땅에 누가 사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게 하기 위한 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조건은 본인이 본인을 위해서 있는 시간이에요. 인간들을 고려한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본인을 위한 시간이고 약속의 땅 요새 말로 천국이죠 천국도 하나님 자신을 위한 땅이에요.
여기서 뭐가 배제됩니까? 인간을 위한 땅은 아니에요. 그래서 이 땅을 신명기 12장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땅’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땅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천국은 주의 이름을 위한 땅이에요. 우리를 위한 땅 없어요. 여기까지는 구약에서 우리가 조금 이해되고 쉽다고 하는데 그 다음에 어려운게 뭐냐 하면 안식의 땅이라고 하는 것 누가 봐도 ‘땅’이죠 땅. SIO2 물질성분인 땅. 시간.
이 땅이 뭐로 변한다고 했습니까? ‘인물’로 변해요 인물로. 이것은 엄청난 도약입니다. 엄청난 비약이거든요. 땅하고 인물하고 이게 매치가 안돼요. 이 인물로 변하는 것을 가지고 사도바울 편지에서 인물로 변해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 진짜 어려워요. 예수 안, 다른 같은 말로 ‘성령 안’, 다른 같은 말로 ‘십자가 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특히 십자가 안이라는 것은 더 어려운 말이죠. 왜? 십자가라는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안팎이 없어요. 제가 여러분한테 질문할께요. 묵 파라핀 비누 공통점이 뭡니까? 묵, 메밀묵하는 묵, 파라핀 비누 특징 딱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이 뭐죠? 안과 밖이 없어요. 안과 밖.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파라핀 덩어리 양초, 양초 덩어리 비누 덩어리 묵 덩어리는 안과 밖이 따로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그 자체가 전부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들어온다는 말은 예수님과 한덩어리 되는걸 말해요. 내 손이 아니고 주님 손 이렇게 된다 말이죠. 내 목숨이 아니고 주의 목숨 이렇게 된단 말이죠. 이게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려요.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예수님하고 나하고 사이에 둘 중 하나를 양보를 해야돼요. 예수님 살면 나는 죽어야 되고 나는 내가 살면 예수님이 죽어야 돼요.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대표자를 누가 정하느냐 둘 다 대표자가 될 수 없어요.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메밀묵인데 이게 도토리묵하고 섞이고 그러면 안돼요. 인삼비누인데 다른 아카시아 비누 이런거 안돼요. 동질이에요 동질. 그걸 요한복음 17장에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17장 여기에 22절에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요한복음 17장 22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된다 못 빠져 나온다. 예수 믿었으니까 따로 나라는 것을 끄집어 낼 생각을 아예 하지 마라 말이죠. 끄집어낼 생각을 하지 마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하는 말씀이 그 말이거든요. 나는 죽고 누가 산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왕 말 나왔는데 고린도후서 한번 봅시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 자구적으로 누가 봐도 누구보고 여러분 설명해보세요 해도 동일한 이야기 나와야 되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 고린도 후서 4장 10절의 말씀을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예수님 따로 나 따로가 된다? 안된다? 이게 따로 국밥이 안된다니까요. 그냥 밥만 줘서 국에 밥 말아 먹던지 이렇게 해야지 이게 따로 나오질 않아요. 둘인데 안되잖아요. 성령이 그렇게 해줘요 성령이. 성령이 그렇게 해주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쪽에서 주님께 할게 없어요. 신약시대는 이후에는 십자가 이후에는. 내 쪽에서 주님께 할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주시는 분이지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사도행전 17장의 말씀처럼. 주께서는 일체 안 받습니다. 아무것도 안 받아요. 돈이고 정성이고 안 받습니다. 기도도 안 받아요. 아무것도 안 받아요. 기도할 줄 알아야 받지요. 중언부언 하는데요. 맨날 달라는 기도 하는데 그 기도 안 받습니다.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죽은 놈한테 아무것도 안 받고 이미 죽은 놈한테 뭘 받아요.
그러니까 드리고자 바치고자 하는 것은 아직 덜 죽었다는 뜻이에요. 이게 안 믿어진다는 겁니다. 안 믿어지게 때문에 기도하는거예요. 안 믿어지기 때문에 아주 애가 타는거예요 애가. 내가 애가 타는 것은 씨 뿌리는 자를 완전히 가려버리는 거에요. 이거 해주면 주께서 이거 해주면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보다 더 한거 해드리겠습니다 한단 말이죠. 그건 나와 타자, 나와 타자가 분리될 때나 하는 소리에요.
나 여기 있고 바깥에 남이 있을 때 이게 하나가 아니고 뭡니까? 하나가 아니고 둘이죠? 둘이 될 때는 내가 저쪽으로 다가가려고 접근하지요. ‘approach’라고 하는데 영어로 접근하고 접근하고 가까이 더 가까이. 경상도 말로 가차이 더 가차이. 천로역정처럼 좀 더 높은 곳을 행하여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또는 선교단체 같으면 버리고 또 버리고 완전히 불교에요.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어디까지 기어들어가는지 한번 보자 어디까지 기어들어가는지 한번 보자. 나를 버리고 또 버리고. 좋아 머리까지 깎아라. 어디까지 들어갔는데? 퍼주고 더 퍼주고 가난한자 도와주고 원수를 사랑하고 좋다 더 해보자. 어디까지 하는지 한번 보자.
내가 누구한테 드린다는 것은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주는게 아니에요.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지 주는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헌금을 할 생각을 하지 말고 감사히 받아 챙기세요. 애들 피아노레슨 돈 들어가고 쓸 거 많지 않습니까 침대 바꿔야 되고 라돈 침대는 주의해야 되고요. 가스렌지 고장난거 해야 되고.
왜 주신 것을 쓰는 그것이 영광이에요. 사람이 뭔가 남한테 주게되고 바치게 되면 갑질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그거 자기 기대한 예상대로 안하면 복수하게 되어 있어요. 총부리를 주님 앞에 쏠 준비하고 있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에게 정성을 얻고자 오신게 아니고 “아이고 철딱서니 없는 것 네가 뭘 알아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 다 이루었다.” 그거 하러 오신 거에요. 받아 챙기려고 교회 받으려고 온게 아니에요.
그 친목단체 만나면 뭐합니까 맨날 놀러가고 버스타고 놀러가고 버스 출발할 때 기도하고 들어올 때 교회 올 때 8명 죽어 돌아오고. 버스 운전사 졸음운전 해가지고. 교회 권사들 놀러가 8명 죽고 돌아오고. 기도해도 소용없네. 지금 이 문제 풀어야돼요. 시간에서 공간, 공간에서 인물로 전환될 때 충격적입니다.
이 인물은 구약에서는 내가 여기 있고 여호와 하나님 있잖아요. 물론 여기 모세 선지자들 있지만. 안식일을 지켜라. 예. 안식일날 나무하지 마라. 예. 십일조 해라. 예. 뭐 이렇게 헌물을 바쳐라. 예. 제사해라. 예 알겠습니다. 나 따로 있고 하나님이 타자로 또는 남이 되어서 나에게 지시하게 되면 이걸 받아들여요.
그런 식으로 순종하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쉐마’라고 합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신명기에 나오죠? 들으라. 쉐마 쉐마 쉐마 쉰 소리 하는거 많이 들었죠? 쉐마 쉐마. 못 들었어요? 순종 안하면 너희 저주 받는다 이런거 있잖아요. 말씀을 들으라. 우리는 순종만 하면 된다. 옛날엔 순종 못했는데 성령 받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다. 이런 구조로 가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있는 이상 나와 나 사이에는 항상 건널 수 없는 개입이 항상 존재하게 되어 있어요. 항상 존재해요. 한 발짝 다가가면 또 한 발짝 떨어지고 또 한 발짝 다가가면 또 떨어지고. 꼭 님 그림자 님 그림자 달 그림자. 달 잡으려고 하면 달은 저만치 가잖아요.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사실은 타인 예수님이 나의 타인 자리에 있다는 것이 사실은 예수님을 위장한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만든겁니다. 여러분 수녀 신부들 보세요. 복장 꼬라지 한번 보세요. 수녀 신부 복장. 복장 봤어요? 수녀 신부 교황. 아직 교복 안 벗었어요. 유아적인 퇴행적 자질을 보여줍니다. 유니폼을 입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인위적 소속감을 준다 인위적 소속감. 뭔가 인위적으로 우리는 한 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선교단체들 어떤 수련회 참석하면요 JESUS 빨갛게 해가지고 이거 왜 입는데? 이거 왜 입어요? 죽어도 하나 살아도 하나 같이 간다 이 말이거든요.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다 교회에서 그렇게 안 놀았어요? 어디서 노셨군요. 교회에서 노신 사람은 그런 모습에 그런걸 가지고 어떤 소속감을 느끼고 마음의 안정을 얻고 그래요. 내가 참 세상에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같은 형제 자매와 더불어서 이렇게 찬송하고 내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눈물을 팍 흘리고 하잖아요.
성경에서 인간들은 잠잠해야 됩니다. 인간들은 잠잠하고 말씀 자체가 어떤 식으로 전개 되는가 시간에서 공간에서부터 인물로 가요. 그렇다면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마음이 있는데 마음이 4종류의 마음이 있지요. 4종류의 마음이 있는데 나는 어떤 종류인지 본인은 몰라요. 본인도 몰라야 되고 알 필요도 없어요.
내가 만약에 4가지의 마음밭 중에서 골라라고 하면 전부다 막 머리 쥐어뜯고 여기에 30배 60배 100배 여기 다 가려고 줄을 서시오 해서 전부 줄 다 서야 돼요. 그러니 이거는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한다는 자체는 뭐냐 하면 결정을 선택을 내가 했다는거예요. 내 결정 내 선택이 바로 악마의 악마가 그걸 유지하라고 말씀을 제껴버린거에요. 말씀하게 되면 무조건 뺏어 가는 이유가 그 말씀 안에 주님의 선택과 결정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걸 못 듣도록 못 보도록 뺏어가는거에요 악마가.
남아있는 것은 내 결정과 내 결심은 나의 기대감과 나의 희망과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현재 마귀 세상이 이런 세상이에요. 상당히 주님 보시기에 정말 불편한거에요. 이거 나만 불편한가? “나만 불편해요?” 백일의 낭군에 나오는 대사 아닙니까. 심히 불편하구나. 말씀이 스스로 알아서 전개하라고 요한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있습니다. 성경 왜 있는데요? 응하게 함이라, 응하게 함이라.
오늘 18장 32절처럼 주님께서 죽으신 것도 알아서 죽으신거에요 알아서. 말씀에 응하게 하심 타이밍 맞춰서 때가 되매 죽으신거에요. 그러면 성령오신 것도 때가 되매 오시는 거에요. 그러면 그렇게 전개된 것은 그 전개된 모습이 주님의 실적이고 지금 이 모습이에요. 이 모습인데 우리 안에 딱 들어오니까 ‘주여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되는 겁니다.
공간에서 인물로 되기 위해서 공간 자체에서 공간이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눠져야 되겠지요. 첫째는 뭐냐 하면 사람 잡는 공간, 사람 죽이는 공간 있어야 되죠. 주님께서 오셔서 요한복음 특히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거의 없는데 요한복음에는 있어요. 내가 이 세상에 왔다고요 이 세상에. 내가 이 세상에 왔다는 이야기를 요한복음에 굉장히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많은데.
‘내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이 세상에 있다는 뜻이 아니지요. 나는 다른 세상에 있었는데 이 세상에 왔다가 되는 겁니다. 공간이 두 개입니다. 그럼 공간이 두 개라면 어떻게 인물이 되느냐. 이 공간에 왔다는 이유 때문에 이 공간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습니다. 죽어버려요. 죽어 버리면 이 세상 자체는 말씀에 이 공간 자체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공간은 나쁜 공간이 되겠지요. 주께서 일체 아무것도 없는 폐기될 공간으로 확정되는 겁니다. 그리고 주께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다시 성령을 통해서 또는 그냥 주님을 통해서 그냥 오시는 거에요.
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여기 오셨습니다. 우리가 상황극을 한번 해볼께요. 여러분하고 제가 같이 있는데 제가 갑자기 여러분들 그냥 조용하게 있는데 갑자기 ‘주여 누구십니까?!’ 이러면 다른 사람들이 미쳤나?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뭐 번개치는 그런 소리 밖에 안 들렸어요. 그런데 사울은 이게 번개가 아니고 어떤 돌멩이가 떨어진게 아니고 어떤 분이 귀신처럼 어떤 분이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본인만 알았던거죠. 본인만 알았으니까 그 분은 어떤 분이냐 하면 대화가 가능한 분으로 오신거에요.
그걸 ‘현존성’이라고 하는데 인물의 현존성. 실제로 안보이지만 와 계신거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하니까 대화가 가능하니까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하고 대화를 주고받는 거에요. 신앙이 이것부터 출발한다고 한다면 이거는 교회 10년 20년 50년 다녀도 소용없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사도바울과 동일한 체험 동일한 경험을 가졌다 이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현존성’ 예수님의 현존성이죠 현존성.
만약에 어떤 청년이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면 식구들하고 이렇게 밥상에서 TV보다가 주여 누구십니까?!! 이렇게 하면 아버지가 “밥 먹다가 이거 무슨 짓을 하는거냐 밥 먹다가 이게 버르장머리 없이 이게 무슨 짓이야.” “아버지는 제 3자니까 가만있어요. 주여 어쩌라는 겁니까.” “뭐 이런게 다 있어 야야 병원 예약해라.” “아버지는 몰라요.” “내가 뭘 몰라 내가 뭘 몰라. 내가 제일 아는데.”
이 대목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육에 속한 것 영에 속한 것 이렇게 구분해서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진짜 계룡산에 귀신 안 씌이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이 쫙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럴 때 너는 좋겠다 너는 박수무당 되서 좋겠다. 그게 아니고 정작 온 사람은 마치 십자가에 온 강도처럼 내가 주님 앞에서 자동적으로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거에요. 자동적으로.
이거는 이유불문하고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났으니까. 태어난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그런 관점에서 이명직 목사님 조카가 10월 3일날 돌 됐다면서요. 그러니까 목사님 복음적으로 보는 거에요. 속으로 해야지 겉으로 하면 안 되지만. ‘아이고 조카야 너 왜 태어났니 이 더러운 세상에’ 이렇게 되요. 이 더러운 세상에 왜 태어났니? 고생이 훤하다 이렇게 된다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그걸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버림받은 파선된 배에 우리가 승선해서 있거든. 완전히 버린 폐기처분된 배에 우리가 올라탔으니까.
그게 바로 뭐냐 하면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같은 묵, 같은 동질 그리스도 안에 또는 그리스도 비누 안에 또는 파라핀 양초 안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제가 왜 묵 파라핀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한번 안에 들어온 사람은 자기의 실력으로 들어온게 아니기 때문에 못 빠져나가요. 빠져나가려고 해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 안에 우리가 들어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나라는 것은 없어지고 예수님이 규명한 ‘새로운 나’, 예수님 보시기엔 너죠. 너가 여기서 만들어내십니다. 만들어내시는데 나의 구원을 위해서 새삼스럽게 구원받기 위해서 만들어내시는게 아니고 예수님의 하신 구원의 완성 완료, 완료와 그 전개 과정을 우리의 몸을 통해서 보여주기 위해서는 ‘너’라고 불러주는 겁니다 너. 그리스도 안에서 너라고 불러주는 거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너라고 불러줄 때 우리는 아까 욥이 한 말씀처럼 우리는 주의 원수가 되고 얼굴을 가리게 되는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 역할을 우리가 담당하게 되요. 그 역할이 뭐냐 말씀에 응하는 상태가 인물이니까 인물 속에 시간은 그 자체가 아까 했지요. 이미 다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완료상태에 들어가요. 완료상태.
살아있는 내내 그리스도 안에 우리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점차 점차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라도 식빵이 있다면 식빵은 어떤 통에 찧어도 식빵인 것처럼 어떤 시간을 쪼개도 쪼갠 시간 속에서는 우리가 주님의 주님 앞에서 주님이 주되게 하는 너의 역할은 거기서 다 보여주는데 그 역할은 바로 ‘말씀에 응하게 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럼 이 말씀에 응하게 한다는 이 의미가 뭐냐 하면 바로 나가 아니고 ‘육이라는 기능을 하기 위한 너’로 부름을 받은거예요. 육이라는 기능. 구원받지 아니하면 우리가 육이라는 것을 인식을 못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뭐로 보느냐 하면 육으로 보지 않고 자기를 인간으로 보고 사람으로 보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이천년 교회 역사의 신학이 여기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인간 사랑.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을 사랑한다. 사람이 들어가요. 만약에 사랑이 안 들어가고 죄가 들어가면 하나님은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순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셨는데 인간이 어찌 실수해서 선악과를 따먹으니까 그걸 불쌍히 여겨서 주님께서는 죄를 만회할 수 있는 옛날의 에덴동산을 다시 들어갈 수 있는 방안을 빨리 빨리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뭐냐? 차라리 너희들 하지 마라. 내가 와서 대신 해줄게. 그러니까 네가 할 것은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십자가질테니까 너는 나를 믿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겁니다.
믿고 그냥 믿었다고 입 딱 닦지 말고 믿었으니까 이제는 성령 받고 믿었으니까 이제는 그동안 못한 숙제 있잖아요 숙제. 거룩하게 되는 것.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한 것처럼 이제는 성경말씀 폼으로 준 것 아니니까 그걸 다 지켜야 된다는 거에요. 지킬 수 없다고 하지 말고 지킬 수 있다고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뭐 이상하지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이천년 신학에서 뭐가 빠졌어요? 이게 빠졌지요. 이미 ‘우리는 죽었다’는 것을 계속 의도적으로 빼버리지요. 죽은 놈한테 뭘 요구합니까. ‘바짝 마른 뼈’인데. 뼈다귀야 뼈다귀야 바짝 마른 뼈다귀야. 뼈한테 무슨 헌금을 요구하고 무슨 전도를 요구합니까 뼈인데.
뼈에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키는 육이 돼요. 사람으로 죽고 뭐로 태어난다? 육의 관계로 태어나고 주님께서는 육을 구원하신 구원자의 관계 속에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해요. 무엇을 소유하는게 아니고 역할을 한다니까 ‘역할’. 어떤 ‘기능’을 하는거예요 기능을. 어떤 기능? 말씀이 과연 주님의 희생으로만 구원됐다는 것을 보여줄 정도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역할을 다하는 거에요.
이거 따져보면 이거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36절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내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는 어디에 속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제자들은 어디 나라에 속합니까? 어느 나라에 속하지요? 예수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져야 되니까 어디 나라입니까? 그냥 인간들 사는 나라지요. 인간들 사는 나라에서 인간은 자기를 육으로 보지 않아요. 그냥 사람으로 본다니까요. 가능성이 있는 사람, 메시아 영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
그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 그냥 사람들이에요. 가르치기만 하면 새롭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사람. 말씀만 하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본다니까요 자기 자신을. 스승을 배신하지 않고 스승이 원한다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베드로 같은 그런 사람으로 봐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육 자체가 하나의 팥죽이 되어서 세상 자체를 꼼짝마라 하거든요. 그런데 그걸 몰라요. 악마가 전부 다 각자 권총을 가져 가지고 네 인생을 네가 알아서 살면 그만한 업적을 이룬다고 그런 식으로 가르쳤던 거예요. 악마는요 주님이 왔을 때만 등장하지 인간 속에 그냥 인간만 풀어놓고는 악마는 뒤에 빠져버리는 거에요. 악마가 어디 있어요 인간밖에 없지 현실은. 그래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악마는 응집이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역량을 다해서 예수 쫓는 일에 거기에 전력을 다한 겁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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