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강-갈 6장 9-10(믿음의 가정)1810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 9-10절입니다. 신약성경 309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9-10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갈라디아서 1장부터 6장까지 오는데서 그것을 생략하고, 그것을 모르는 체 오늘 본문을 봐버리면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답게, 하나님 믿는 사람답게, 종교인답게 남들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이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부터 6장까지 있는 그 과정을 놓치지 않고 그걸 밟아서 오게 되면, 당신 것 내놓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놓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완전히 갈라진 관점이에요.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사도가 되기 전에는 착함에 대해서, 율법의 완전에 대해서 누구한테 질 의향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흠이 없는 정도였어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걸 전부 똥오줌으로 여기고 그걸 배출한다는 거예요. 사도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선함에 대해서 누구한테 양보할 생각이 없을 정도로 철저에 철저를 기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내가 행했던 이 모든 것은 다 추잡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일거에 판단을 내렸던 그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능력 없이 내가 자생적으로 부모로부터 받았던 그 윤리 도덕을 가지고 내 것을 내놓으려고, 내 솜씨를 내놓으려고 했던 거예요. 나 이 정도로 인생 철저하게 살았고, 남한테 흠 잡힐 일 없었고, 한평생 사는 게 뭐냐, 한평생 살면서 남에게 싫은 소리 안하고, 남 힘들게 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인생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일반적인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조의 원리라고 생각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 몸을 하나님께서 기대치를 갖고 있는 창조물로 생각한 겁니다. 자기가 폐기물인줄을 몰랐어요.
아담의 몸이 폐기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이 새로운 몸으로 두 번째 창조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고, 지금 조상에게 물려받은 이 몸 가지고 들이대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 행동을 늘 반성하고, 측정하고, 그것을 심사숙고해서 수정할 것 수정하고, 개선할 것 개선하고.
성경말씀 보면서 모자란 것 보충하고. 점점 자기 질을 향상시키고 더 나아가는 것, 그렇게 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옛날에 자기가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는 그렇게 했던 그것이 필요 없다, 가 아니라 그런 것들이 쓰레기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오직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것을 남한테 내놓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자체를 내놓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선한 일은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 자체가 선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외 다른 선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 믿고 착한 일이 선한 일이 아니고, 예수님 앞장 세워서 자기는 뒤로 빠지는 것이 선한 일이에요. 그게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성경 창세기부터 보면서 놓치는 것이 있어요. 너무 자주 놓치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창조한 것을 스스로 폐기한다는 그 사실을 자꾸 놓쳐버려요.
하나님이 만든 것이니까, 귀한 것이니까 설마 하나님께서 그것을 버릴 필요까지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천지 창조를 하는 것은 교체하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하는 겁니다.
하나는 폐기하고 그 폐기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짜잔, 하고 뒤에 진짜 새 하늘과 새 땅을 등장시키는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담을 보내시고 “아담은 하나의 연기자였다. 아담은 하나의 배우였다. 성경대로 하면 그냥 모형이었고 그림자였다. 비켜, 이제 네 할 일 다 했어. 나가.” 하고 여기서 인간을 치워버리니까 그 배후에 진짜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했던 참된 두 번째 아담, 진짜 아담 예수님을 내세우는 겁니다.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을 하려면 우리 안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구멍이 뚫려야 돼요. 구멍이 뚫려서 그동안 내 중심이었던 것이 이제는 그 중심부분이 빈터가 되고 그 사이에 진정 나를 창조하신 분이 그 구멍 난 사이를 통해서 우리를 통과하면서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이것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여러분이 보기에 맞다면, 동의할 문제는 아니지만, 이게 맞다면 결국 성경해석은 간단합니다. 바로 영으로 갈 수 있는 순서는 없다는 거예요. 바로 영적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제가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십자가는 부적이 아니라고요.
부적과 십자가의 차이점은, 집에다 부적을 붙여놓으면 붙여놓았다는 그것, 하나의 종이쪽지 하나가 추가된 것이지 그걸 붙여놓음으로서 그걸 붙인 주인이 달라지고 변화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전에는 교회 안다니다가 교회 온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십자가로 구원받는다 하니까 십자가를 집에 들여놓는 거예요.
마치 냉장고나 가스렌지 하나 들여놓는 것처럼 십자가를 하나 집에 들여놓으면 십자가 들여놓은 그것으로 추가해서 지금보다 질 좋은 내가 되고 죽어서는 천국 간다고 믿는 겁니다. 내가 들여놓은 그 십자가가 나를 죽이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거지요.
나 안 다치고 추가해서 물건 하나 들여놓으면 그걸로 인하여 부적 같은 효과를 보듯이 내가 구원받는다, 천당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귀신영화에 보면, 악마가 등장하게 되면 마늘 종류라든지 나무 십자가를 들고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 마귀는 십자가를 거꾸로 돌리고, 그쪽도 바빠요. 괴기영화 보면 그런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신과 함께>라는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그런 영화의 특징은 뭐냐? 나는 구원될 자격이 애초부터 없었다, 나는 폐기물이다, 라는 생각을 어떤 주인공도 안 갖고 있는 것이 문제가 돼요. 아마 그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영화 보러 안갈 거예요.
그런데 그게 영화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 교회의 문제와 같아요. 교회 왔으니까, 착한 일 했으니까, 오늘 본문대로 선한 일 했으니까, 하나님께 영광 되는 일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이 착한 일을 근거해서 나를 구원하겠지, 그러고 교회 오는 겁니다.
자기가 폐기물이라는 사실을 갖고 있지를 못하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육에서부터 시작하세요. 영으로 하지 말고. ‘십자가 고를까, 부적 붙일까? 십자가가 낫겠지.’ 이런 선택의 중앙지점은 우리에게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한 번의 선택이 날 구원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선택한 자체의 의도를 물어요. “뭣 때문에 십자가 믿었지? 뭘 얻기 위해서? 뭘 손해 안 보려고 십자가 믿었어? 집안의 행복? 평화? 무엇 때문에? 네 미래? 장래의 운명?” 그 의도 자체가 이미 있다는 것은 여전히 나는 나를 못 놓겠다는 거거든요. 그게 십자가의 원수에요. 그게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를 모를 때는, 주님하고 우리 사이는, 하나님하고 우리 사이는 건전한 관계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지요. 나에게 별 이상이 없으니까 추가적인 착함으로 주님을 믿어주게 되면 얼추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낚싯대로 건집니다. 십자가라는, 비참한 피흘림이라는, 살인사건이라는 그런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키지 않아요. “너 올라와.” 하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님께서 직접 사람이 된다는 것은 평소에 너희들이 알았던 하나님과 직접 너희 눈앞에 당도한 하나님이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목격하라는 말이지요.
목사가 신학교 나와서 교회 세울 때의 그 교회와 성경에 나오는 교회가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지를 한 번 보라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그것은요,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업이에요. 모든 인간의 만남에서 사업적인 관계없이, 그런 노림수 없이 만나는 관계는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만났든 자연적으로 만났든 마찬가지에요. 자연적인 만남이 뭐냐 하면,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겁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만남이거든요. 그렇게 만났더라도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사이는 이것은 사랑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업적 관계에요.
제가 어느 날 꿈을 꿨어요. 꿈 이야기 잘 안하는데. 제가 학교 교사로 있는데 아침에 출근을 하니까 교장선생님이 불러서 오늘부로 그만두라는 거예요. 꿈 이야기입니다. 꿈에 오늘부로 직장 그만두라는 거예요. 그 꿈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해석은 육에 먼저 들어서야 돼요. 육을 통해서 영을 안다고요. 신학을 하든지 예외가 없어요. 매일같이 육으로 들어가야 돼요. 영으로 바로 들어가는 지점이 없다고 했지요. 반드시 육의 지점이에요. 육으로 딱 들어갔을 때 예수 믿는 교사, 하나님 믿는 교사, 말씀 사랑하고 주님 사랑한다고 우겼던 그 교사, 그 모든 입 발린 그 이야기가 교장선생님이 불러서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그 한 마디에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교회에서……, 우리 교회는 그런 것이 없지만 만일에 큰 교회, 500명 모이는 교회다. 사찰집사 두 명에다 전도사 한 세 명이나 네 명이 있다 합시다. 그들은 전부 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열심히 청소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주일학교 교사하고, 다 할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당회장 목사가 그냥 부를 때는 조용히 부르는 것도 아니에요. 아주 종용히 불러요. 종용히 불러서 “우리 장로님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데 두 달만 하고 목사님은 사표 내세요.” 하고 부목사에게 말했을 때 그동안 자기가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주의 일 한다고 그게 주의 일이겠어요? 그게 사랑이겠습니까? 직장이었던 거예요. 직장.
교회가 직장이었고 교회는 사업장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월급 안줘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권사님이 있는데 “권사님이 우리 교회 말썽 일으켜서 안 되니까 나오지 마세요.” 할 때 돈 주고 안주고가 문제가 아니고 기분 더럽잖아요. 기분이 더러운 거예요. 하나님 뜻이 뭘까요?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불러요. 불러놓고 “이제는 이 땅에서 그만 살아.”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그걸 ‘아멘’ 하고, 아멘이 나왔습니다만, 그걸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그동안 살아온 것도 내 덕이 아니었잖아. 이제 그만 살라고 하는구나.’ 하고 은퇴를 해야지요.
인생사는 것 뭐 있어요? 어거지에요. 인생은 어거지로 사는 겁니다. 억지로 사는 거예요. 뭐 예배고, 교회고, 성경이고 다 걷어내세요. 바닥을 긁어내세요. 산다는 것은 억지로 사는 겁니다. 당하면 당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인생은 평생을 투덜대며 살아요. 투덜투덜투덜, “류현진이 4회까지 2점이나 내주고 말이야.” 투덜투덜투덜, “완봉승할 걸 말이야.” 투덜투덜투덜. “롯데 자이언츠 연봉 최고로 해놓고는 이번에 가을야구도 또 못하고 말이야.” 투덜투덜.
매사 한 시도 안 투덜댈 때가 없어요. 집값 오르면 오른다고 투덜대고 내려가면 내려간다고 투덜대고, 가게 비우라고 하면 비우라고 한다고 투덜대고, 오래 있으면 권리금이라도 안 올려준다고 투덜대고. 이거 못 고칩니다. 고칠 것 같으면 고치라고 했겠지요. 성령 받아서 새 인간되라고 했으면 했겠지요.
이것은 고치지를 못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폐기물로 도장을 찍은 겁니다. 주께서는 이왕 폐기될 것 야무지게, “너 더러운 것 그대로 원 없이 살아라. 나중에 천당 가면 못산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너 잘하는 그 이기주의 있잖아. 너밖에 모르는 그것.” 발휘하나 안하나, 반성하나 반성 안하나 구원받기는 마찬가지인데 그걸 왜 조심스럽게 살아갑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창조를 하는데 이 창조는 우리가 예상 못한 것을 창조해요. 미리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무엇을 창조하고 어떤 상태로 우리를 창조하느냐 하면,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킬 필요가 없는 나로 인식하도록 창조합니다. 감탄을 해도 내 것으로 감탄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찾아온 것으로 감탄하는 매일매일이 되도록 그렇게 창조해요.
나를 잊어버리는 거지요. 나를 놔버리는 겁니다. 자유낙하거든요. 완전히 손을 놔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안 될 때는 억지로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얼마 전에 인도네시아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2천 5백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죽었어요. 어떤 지역은 5천명이 한꺼번에 다 매몰되었어요.
그것은 해일이 일어나서 매몰된 것이 아니고 지진이 일어나니까 땅 밑의 지하수가 지진 때문에 땅이 찢어지니까 밑에서 다 올라온 거예요. 물이 올라오니까 땅과 물이 섞여서 그 자체로 홍수가 되어서 1킬로미터를 좍 미끄러져 내려갔어요. 마을전체가.
그걸 지반액상화이라고 해요. 지반자체가 액체로 변합니다. 그렇게 5천명이 휩쓸려 버렸는데 인도네시아 정부에서는 그걸 발굴하지 않고 집단무덤으로 지정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흙과 사람을 일일이 분리해내지 못할 만큼 다 죽어버렸으니까.
그걸 저는 세자로 이야기합니다. 무채색. 인생자체가, 국회의원이다, 장관이다, 판사니 의사니 해도 인간은 전부 무채색이에요. 색깔이 없어요. 색깔을 제공하지를 않습니다. 빨강, 노랑, 그런 차이를 하나님께서 둔적이 없어요. 지반액상화작업을 해버린 거예요. 이미 아담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을 다 죽게 만든 겁니다.
그러면 그럴 경우에 사도바울이, 기회 있는 대로 선을 행하라고 한 이 말은 뭐냐 하면,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개인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개인을 다 헐어버리고 거기서 뭘 만드느냐? 이제는 개인을 구원하지를 않습니다. 개인구원은 없어요. 무슨 구원이냐 하면, 오늘 본문대로 하겠습니다. 가족구원을 해요.
그걸 저는 집단구원이라 하는데 이 말이 구약에 맞아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전체를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집단개념으로 사용했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너 잘났나, 못났나?’ 하고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한 묶음으로 묶는 핵심이 있어요.
그게 뭐냐? 모든 절기자체가 다 안식일인데 그 안식일에 드리는 어린양의 제사 드리는 장소를 중심장소로 삼고 그 주변에 포진된 형태로서 움직이도록 했습니다. 사적으로 개인구원을 위해서 개인이 내세울 것은 일체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주께서 십일조 안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헌금을 안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개인이 드리는 돈이기에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모형이나 그림자를 받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착함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지 않아요. 집단기도를 받고요, 집단헌금을 받고, 집단봉사를 받습니다. 그러면 개인이 여럿이 모이면 집단화가 되는가? 개인에서 집단으로 옮겨갈 때는 개인은 죽어줘야 돼요.
개인이 모여서 집단 되는 수는 없습니다.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모여서 꽃다발 되잖아요. 성경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하나가 모여서 다수가 되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집단화시키지 않습니다. 중앙에 있는 제사에 하나하나의 개인이 죽고 집단으로 되살아나야 돼요. 개인으로 죽고 집단으로 되살아납니다.
구약에 개인이 하는 헌금, 헌물, 이런 것을 드리면 그것은 어린양을 드리는 헌금과 헌물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개인용도로 드렸다 할지라도 개인의 이름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헌물과 헌금과 십일조를 대신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라 하는 것을 스펙트럼으로 다시 되돌려봅시다. 비디오테입을 거꾸로 돌려봅시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완성했다. 일점일획이라도 다 완성했다고 했을 때 도대체 어떤 법이 그 안에 들어있었어, 라고 필름을 거꾸로 돌려버리면 거기에 십일조, 안식일 지키기, 십계명 지키기, 모든 것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요. 헌금하기 등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고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예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것을 이제는 분배하고 분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주시는 분이에요. 여러분도 오늘 살았다는 것을 분배받았기에 이 자리에 오신 겁니다.
여러분이 힘들여서 여기까지 오신 것이 아니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류현진이 던지는 야구 보고 그렇게 힘들여서 오신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힘주셔서 오게 하신 거예요. 여러분의 속을 짜개 보세요. 여러분의 공로와 노력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공로와 노력, 십자가의 희생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게 새 창조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항상 나타날 것은 “내가 했습니다, 또는 우리가 했습니다.”가 나오면 안돼요.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보 뒤에 요약 해놓았잖아요. 제가 이걸 읽어보리라고 기대하고 쓰지는 않았으니까 이거 안 읽어봤다고 할 것은 없어요. 저도 기대 안합니다. 그냥 써봤어요.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보면 마태복음 12장의 말씀을 인용해놓았습니다. 47절에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그러면 아까의 그 원칙을 적용시켜 봅시다. 모든 해석의 원칙은 어떻게 한다? 육에서부터 시작하지요.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육으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당신의 모친과 당신의 동생들이 밖에 있습니다. 육이에요. 혈육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하니까 주께서 48절에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주의 말씀은, 영은 반드시 육을 전제로 하고 그 다음에 영이 뒤에 찾아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저, 주님의 형제고, 주님의 모친이고, 주님의 패밀리입니다.”라고 하지 말고 먼저 이렇게 해야 돼요. “이분이 제 모친이고, 이분이 제 동생이고, 이분이 제 부친이고, 이 분이 제 올케고 시누이인데 그들은 저의 가족이 아닙니다.” 너무 진솔하게 이야기해서 제가 웃었습니다만 그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그렇게 되면 자기가족번영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자체가 반칙이 되어버렸지요. 왜냐하면 남의 가족이 아니고 내 혈육적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기도하는 그 자체를 주께서 받을 리가 없지요. 육에서부터 그 다음에 영이 나와야 되는데 육에서부터 육으로 가버린 거예요.
내 가족 잘되기 위해서 교회 온 겁니다. 용납 못하지요. 그런데 이 가족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아까 말한 꿈 이야기를 계속 해 보면, 오늘 당장 직장 그만두라고 했을 때에 ……, 이것은 그냥 지어낸 것이 아니고 주께서 꿈으로나마 체험을 하게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목사고 없어요.
당장에 그만두면 직장이 없는 거예요. 갈 데가 없는 거예요. 누가 받아주겠어요? 육의 가족이 받아주는 거예요. 교회가 중요합니까, 여러분의 가족이 중요합니까? 여러분에게 물어본 내가 나쁜 놈이지요. 이 세상에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어요? 나의 안전판이고 안전핀인데.
절벽이 등장하잖아요. 그 사람들이 믿는 안전핀에 밧줄 걸어놓고 그거 뽑히면 다 죽는 거예요.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꽂아놓은 것이 있는데 꽂아놓은 그것이 교회가 아니에요. 예수도 하나님도 아니고 그것은 내 아버지와 엄마라니까요. 유력한 내 형제고. 형제보다 아버지 엄마가 더 중요하지요.
그게 뽑혀버리면 다시 아버지 엄마 품으로 기어들어가야 된다니까요. 설마 내치겠어요? 부모인데. 이미 가족종교가 확립된 상태에서 그게 무슨 새창조고 무슨 천국 가는 백성이겠습니까? 혈육의 종교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십자가가 집안에 붙여놓는 하나의 부적처럼 된 거예요.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하이고, 가장이 직장 그만 둬야 돼. 가장이 그만 사업이 망하든지, 부도가 나든지 직장을 그만두면 두 번 다시 그 찬송 안할 거예요. 그 찬송 부르기 뜨끔할 거예요. 육과 육 사이에는 고무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잡아당겨도, 은혜 받았다, 기도원에 간다 하지만 탁 놓으면 도로 쫙 하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도로 자기 집구석으로 쏙 들어가 버려요.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가족끼리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경제적효율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제적효율성이에요. 가족이 중요하지만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도 돈한테는 못 이겨요.
이것을 우리가 지금 안 죽는 한 주께서 90까지, 좀 더 늘입시다, 95세까지 사는 동안 이걸 생생하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꿈에서 직장 그만두는 꿈을 꾸듯이 이 세상이 꿈입니다. 아슬아슬한 꿈, 늘 투덜댈 수밖에 없는 그것이 바로 지금의 옛 모습이라는 것, 그리스도가 찾아오기 전에 나는 늘 투덜댈 수밖에 없고, 항상 나는 하나님께 원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혹독하게 절감해야 돼요.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느냐 하면, 여러분이 언제 화가 나고 언제 낙담이 되던가요? 도대체 내가 화를 낼 때 무엇 때문에 화를 내던가요? 가정주부는 화가 날 때 어떤 때이던가요? “남편 때문에 화가 나요.” 그러면 남편하고 갈라서면 될 것이 아닙니까? “남편 사랑하십니까?” “아니요.” “그러면 누굴 사랑합니까?” “남편 있음에 내가 살기 때문에.”
결국 본인 사랑하잖아요. 본인사랑. 그게 육의 절정이잖아요. 가족이 있어서 가족의 일원이 아닙니다. 내 가족이지요.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족일 때 가족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나 자신을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 안에 어떤 새로움이 창조되느냐 하면, 내가 다 주고 싶은 사람을 주께서는 만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게 요한일서 4장 8절에 나와요. 4장 8절과 12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목사님, 성도라는 것이 어떤 티가 날 때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이 본문에 근거해서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혹시 사랑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제가 물었으니까 사람들은 이야기하겠지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것 말고요 사랑하는 분이 있습니까?”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데요.” 그러면 자식한테 다 주고 싶어요? 그렇지는 않지요. 미쳤어요? 자식은 도둑이라는데, 다 가져가는데. 안줘도 가져가는데 다 주게 되면 안 되지요. 결국 성도냐 하는 것은, 당신 있음에 나는 죽어도 좋아요, 하는 그런 타인을 만났으면 성도고 못 만났으면 성도 아니라는 것이 요한일서 4장 8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라,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는 대상이 있다는 거예요. 그 대상에게 하나님이 피를 줬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살과 피를 줬다는 것은, 나는 너를 너무나 지독하게 사랑하기에 줄 수 있는 것 다 줬다는 이야기에요. 그게 영생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생명나무니까. 그 영생의 나무인 과일을 줬다는 거예요.
줄 거 다 줬다는 겁니다. 그것도 천하의 죄인에게. 하나님의 원수 된 자에게 다 준 겁니다. 로마서 5장 10절의 말씀. 원수 된 자에게, 경건치 않은 자에게 다 준 거예요. 강도에게 다 준 거예요. 세리에게, 창녀에게 다 준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내놓은 그것을 사랑해요. 자기가 내놓았는데 그 내놓은 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뭐냐? 믿음의 가정이라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한 거예요. 육의 가정부터 출발해서 그 육의 가정의 실체를 다 드러내서 이제는 육의 가정은 잊어라. 육의 가정에 집착하고 그걸 붙잡는 것은 육적인 본성에 불과해요.
이것은 예수고 하나님이고 못 말려요. 교회를 몇 년을 다녀도 소용이 없어요. 목사가 되어도 소용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 가족을 놓지를 않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고하고, 고생고생하고, 더러운 소리 다 들어가면서 돈 한 푼 버는 것, 자기가족에게 다 갖다 붓습니다.
욕을 하면서도. “아이고, 자식 꼬라지!” 이렇게 하면서도 다 갖다 부어요. 절대로 자기 가족을 포기 못합니다. 이걸 9십 몇 세까지 살면서 철저하게 체험하라고 계속 여러분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거예요. 네가 어디서부터 천당 왔는가를 똑똑하게 보라는 말이지요.
네 힘으로 천국 갈 수 있거든 한 번 발휘해보라는 말이지요. 불가능함, 그 불가능함을 철저하게 체득해야 돼요, 우리는! 교회 봉사하고 교회에 땅 바치고. 소용없어요. 땅 바치면 뭐합니까? 다 자기자식 잘되라고 하는 짓인데요. 또 교회에 바쳐도 문제에요. 교회에 목돈을 내다보니 자기교회가 되어버렸어요. 그 교회주식을 많이 보유한 사람이 돼요. 갑자기 대주주가 돼요.
우리교회는 그런 사람이 없어서 천만다행입니다마는, 만약에 우리교회에 재벌 2세가 들어왔다. 제일 먼저 목사부터 따지는 것이 뭐냐? 계산기 놓고 십일조부터 따져 봐요. ‘저 사람이 수입이 얼마이니 십일조를 얼마 내겠나?’ 미쳤나요? 요새 십일조를 내게. 요새 십일조 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도 막 기대한다고요.
이게 자기교회거든요. 자기교단, 자기교회, 자기종교.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지진이 아니라 천지가 개벽해도 나는 나를 못 놓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아니 사랑할 줄을 몰라요. 왜냐? 사랑의 대상이 이미 결정 났어요. 나 외에는 사랑할 수가 없어요.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부라도 따로 논다고요. 다만 붙어 있는 것은 경제적이익 때문에 붙어 있지 그 외에는 없어요. 따로 놀아요. 그동안 투자한 것이 아까워서 미련을 갖지요. 20여년 잘 살다가 하루 험담해 보세요. 갈라설까, 그렇게 되어버려요.
그 정도로 인간은, “너는 나하고 헤어지지 마. 왜?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가 너에게 투자한 것이 한두 푼인가? 그러니까 너는 절대로 내 곁에 붙어 있어. 떠나지 말고.” 나를 싫어하는 것은 좋은데 다른 여자한테는 가지 말라는 식으로. 드라마 대사 중에 나와요.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창조가 계속 우리 속에 살아 있으려면 우리는 여지없이 육이 되어야 됩니다. 더 심하게 육의 본색을 계속 발휘해야 돼요. 그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따로 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여러분이 잘하기 때문에. 그것은 누가 시킨 적도 없어요. 너무나 잘해요.
점잖은 영적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태가 터져버리면 대번 본색이 확 드러납니다. 나한테 어떤 손실이 왔을까를 따지는 거예요. 나한테 어떤 이득과 손실을 따지는 겁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가 없어요. 사랑할 줄도 몰라요. 요한 일서 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창조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한다면 비로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나에게 온 사람에게 다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돼요. 요한일서 3장 16절이 그 말씀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제가 지금 지어낸 것이 아니지요. 성경 요한일서 3장 1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3장 16절에 중요한 것이 많이 있어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뭐라고 합니까? 이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겠지요. 그러니까 설교를 헛 들은 거예요.
성경말씀을 준 것은 나라는 이 인간은, 이 작자는 성경의 어떤 경우에도 한 구절도 지킬 수 없는 폐기물인 것을 확인하라고 준 말씀이에요. 기뻐해야 됩니다. 또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지시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러면 사랑하라는 말은 빈말인가? 헛말인가? 이 말이 하나마나 한 말이었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주시는 사랑은 우리가 골라잡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이미 원수라는 개념자체가 날라 간 상태가 되기 때문에. 원수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원수가 없는 상태에서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어요.
원수는 계속 원수여야 되거든요. 그 말씀자체도 우리가 못 지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어떤 분이 오는데 그 분이 그냥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목적 없이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가 쌓아올린 제국, 이것을 다 부수는 것, 내가 생각하지 못한, 예상 밖으로 모든 것을 다 없애면서, 그 없애는 작업을 고마운 줄 알라고 오시는 그 분을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분으로 오시는 거예요.
말을 쉽게, 짧게 하게 되면, 불가능함을 그냥 두고 그 할 수 없는 것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없는 우리를 향하여,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랑마저 세트로, 사랑하는 능력까지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을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그분이 원인으로 오셔서, 그 원인이 되셔서 온 결과를 우리 속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분이 오시지 않았으면 이런 결과가 안 나올 수밖에 없는 분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냥 빈손으로 털털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집에 십자가 걸어놓았다. 그거 부적이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십자가가 벽에만 붙어 있지 않고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 십자가는 뭐냐? 할 수 없는데 하게 하시는 능력까지, 사랑할 수 없는데 사랑하는 능력까지 이미 다 택배로 집어넣어 놓고 뽑아내는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이 바로 선한 일이에요. 설교 처음에 갈라디아서 1장부터 6장까지 빼지 말라고 했지요. 이것은 가까우니까 한번 찾아봅시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입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우리 어머니라.
따라서 하늘의 어머니가 아닌 아담의 몸인 육의 어머니 되는 우리의 육신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 그것이 바로 선한 일입니다. 어머니가 위에 계시기 때문에 그 위에 계신 분의 자식이라는 조건에 맞추라고, 그 조건에 부합하라고 우리에게 일으킨 사건, 그 사건이 바로 선한 일이고, 그 선한 일의 열매가 도로 다시 내가 했다는 것으로, 나로 돌아올 수 없는, 나로 건너올 수 없는, 다리를 부숴놓아서 단절이죠, 내가 하려고 안했는데도 주께서 하게 하셨다면 그 다음부터는 다시 ‘이것은 내가 했어.’라는 지점으로 못 돌아오도록 우리라는 집단, 새로운 가족끼리 한 것으로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옆에 있는 집사님이 좋은 말로 이야기를 했지만 어제 집에서 부부싸움을 해서 상당히 예민해 있었어요. 옆에서 집사님이 시비를 거는 것 같으니까 갑자기 욱, 하고 화가 났다는 말이지요. 성질이 났어요.
그걸 오늘 갈라디아서에 그대로 적용시켜 보면 육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보통 기분 좋을 때는 그냥 웃으면서 농담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데 안 그래도 집안에 우환이 있어서 약간 신경질이 나 있는데, 육이지요, 95세까지 뻗쳐나가는 육이지요, 육인데 턱 건드리니까 “왜 이야기를 그렇게 합니까?”라고 했을 때 이게 육이라는 말이지요.
이미 육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뭐냐?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의 일을 열매로 거두기 위해서 주께서 작업을 개시했다고 보시면 돼요. 육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사님이 돌아서서는 찔찔찔, 울더라는 말이지요. “나는 그런 뜻이 아닌데.” 하고 울더라는 말이지요. 그걸 보면서 뭘 느끼냐 하면, 내가 또 희한한 짓거리를 했구나.
등 두드리면서 “죄송합니다. 제가 그 때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가지고요. 참 미안합니다.” 이렇게 반성하면서 사과한다고 삐진 것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 와중에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이 골칫거리라는 거지요.
가장 사랑하는 내가 나에게 가장 골칫거리고 구원에 방해물이 누구냐? 이 쓰레기 같은 폐기물 된 내가 끝까지 나를 붙잡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게 온유와 양선과 자비와 양선과 그게 성령의 열매에요. 그게 선한 일입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주께서 건드릴 거예요. 우리의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그러나 지옥 가는 사람은 변명들을 늘어놔요. “집사님, 옛날에 내가 집사님한테 돈도 꿔주고 잘 해줬잖아요.” 자꾸 여전히 내가 괜찮은 존재인 것을 부각해서 남을 달랠 수 있다는 자신의 그 선한 행동을 보면서 본인의 행동에 본인이 감탄하는 것, 이거 전혀 사랑 아닙니다.
이것은 착각이지요. 이것은 종교인입니다. 신발 가져갔다고 화내는 종교인들. 이거 종교인입니다. 이거 교회 다니는 취미생활 하는 사람이에요. 나로 인하여 얼마나 삐까삐까, 남에게 감탄을 받는 절대적 존재인 것을, 그러니까 날 건드리지 마라, 이것이 평소의 모토가 된 겁니다.
날 건드리지 말라고. 부모라는 이름으로 날 건드리지 말고, 동생이라는 이름으로 날 건드리지 말라고요. 왜? 나는 나니까. 이거 그리스도와 관계없지요. 아담 몸이지요. 그런데 똑같은 일을 겪으면서 ‘쓰레기가 다른 것 아니야. 내가 바로 쓰레기야.’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인간은 날마다 이렇게 영적세계를 조작해요. 그렇게 조작할 때 그 이득을 누가 보는지를 계산해 보세요. 내가 교회 다녀서 그 이득이 누구한테 오는지를. 자기창고에 자꾸 모이면 안돼요. 다시 말해서 영적세계에서 다시 내 세계로 돌아오는 그런 다리, 브릿지, 그런 다리가 있으면 안돼요. 그게 끊어져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나는 계속해서 육이어야 되고,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어야 돼요. 오늘 오후에 죽어도 여한이 없어야 돼요. 미국 프로야구 누가 우승하는지 그거 안보고 죽어도 괜찮아요. 딸 시집가는 그것 안보고 죽어도 괜찮아요. 다시 내 것으로 돌아오는 것이 없어야 돼요.
사도바울이 말하는 이 모든 근거가 뭐냐? 십자가와 부활이거든요. 누구 훌륭한 그런 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낚싯대로 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구원이 도대체 누구로 인하여 방해받고, 누구 때문에 그렇게 혼탁 되었는지를?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네가!
오늘 주보 뒷면에 보면,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라고 했거든요. 주님께서 질문을 했으니 우리가 답변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아무도 답변을 못하지요. 전부 다 각자 육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뭐라고 설명했느냐 하면, 주보 뒷면에 [나의 가정으로 인하여 믿음의 가정이 모독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각자 자기 가족을 포기하라는 말인가? 이렇게 하시면 안 되지요. 육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영으로 가는 방법은 없어요.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이제는 육적가족과 상관없다. 그러니까 이제는 너는 너대로 살아라. 독립해라. 독립해서 뭘 하든지 엄마 아빠는 너 모른다. 너한테 투자할 만큼 투자했다.”라고 하더라도 또 휴대폰 띠리리, 전화 와서 “엄마, 천만 원 만 땡겨주면 안 돼?” 하게 되면 “이야기 했지? 너 장가갔으면 이제 끝났다고.”
큰 소리를 되게 치지요. “다시는 이런 전화 하지 마.” 툭, 끊어버려요. 그래놓고는 “여보, 통장에 돈 좀 있나?” 묻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육의 한계. 그럴 때 믿음의 가정이라는 것은 그러한 육밖에 모르는 우리를 예수님의 부적이 아니고 바로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에 한해서만 “주여, 어떻게 이런 인간을 천국에 다 보내주십니까?”
새삼스럽게 주님으로 인하여 감탄하는 것, 그 순간이 성령에 의해, 주님에 의해 사랑하는 순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종교에 우리가 놀아나지 않게 하옵소서. 내 신앙에 우리가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너무 모르고 그동안 종교로서 위장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껍질까지, 바나나껍질 벗기듯이 죽을 때까지 다 벗겨내셔서, 강도가 따로 없고, 세리 창기가 따로 없고, 우리가 지옥갈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주님께서 줄 수 있는 것 다 주셔서 영생주시고 천국 넣어주니 이제부터 주님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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