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80914b 베드로전서2장 1-5절(사랑의 메아리)-이 근호 목사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보게 되고 교회 성도들을 만나보게 되면 제가 제일 아쉬운 것이 뭐냐 하면 자기 행동을 자기가 조절하려고해요. 자기가 자기 관리를 하려고 하는데, 제가 안타까운 것은 어떤 일이 벌어졌으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나를 질책하려고 일어난 일이 아니에요. 나를 나무라려고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무랄 것 같으면 아예 십자가지지도 안 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좋아라고 해서 일으킨 일이에요. 이게.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 지금 좋아하고 기뻐한다고 생각은 안 하고, 자기가 꿀꿀하고 자기가 우울하다는 거예요. 뭐 어쩌라고? 니 기분을 거기다가 왜 집어넣느냐 이 말이죠. 기분을. 사람들의 욕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인데 나도 같이 좋아져야 하고 나도 흡족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안 돼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하나님 앞에 기쁘신 일이에요. 그러나 베드로 입장에서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연중에 지금 사탄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안 좋으니까 주님도 안 좋다고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할 일 같으면 같이 좋아들 하세요. 같이. 같이 좋아들 하란 말이죠. 기뻐하란 말이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3절에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되어 있죠. 성도한테만 해당되는 소리입니다. 성도가 아니면 이런 소리도 안 해요.
성도한테 해당되는 것이 뭐냐 하면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겁니다. 뭐가? 이 모양 이 꼴 전부가 아주 주님의 너그러우심, 인자하심, 다른 말로 사랑이죠. 늘 큰 사랑으로 너를 지금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사랑은 주님께서 흐뭇해하시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불만족스러우면 도대체 우리가 누구편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기쁘신 일을 실행했습니다. 기쁘신 일을 실행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신령한 젖, 신령한 젖이라는 것은 성령, 성령이 우리에게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죠.
그러면 성령이 내 인생을 어떻게 몰아넣던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일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같이 기뻐하면 된다 이 말이죠. 우리 인생에 대해서. 내 인생에 대해서. 주식 했는데 다 꼴아 박고, 땅 사놨는데 땅 값 내려가고, 그래도 그게 주님의 자비하심이라면 어쩔 건데요? 내가 열심히 응원한 프로팀이 지고 또 져서 9패라면?
프로야구에 NC팀이 있는데 줄곧 꼴찌를 했어요. 얼마 전에 꼴찌를 면했다고요. NC팀이 만약에 가을야구를 하게 되면 신한은행인가 농협인가 이자율이 높아요. 롯데가 5위 안에 들게 되면 부산은행의 이자율이 높아집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롯데 자이언트 팀 성적이 좋으면 그거만 좋은 것이 아니고 나도 은행이자를 더 받게 되어서 좋은 거예요.
세상에서는 내가 납득이 되는 기분 좋음을 찾고자 하는 겁니다. 왜? 나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젖을 준 것은 우리 좋으라고 준 게 아니고 주님의 자기 기쁜 일이라니까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 기쁜 일이 아니에요. 나 구원받았다, 기쁘다, 좋아하지 마세요. 주님 좋은 일이에요. 주님 좋은 일. 그렇다고 슬퍼할 일은 아니지만. 과연 우리가 날 구원하신 주님의 그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는지를 한번 돌아보라 이 말이죠. 그렇지 않죠. 그 정도로 우리의 육은 여전히 살아있고 애굽적입니다.
그걸 사도베드로는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3절에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이래 되어 있어요. 이미 과거죠. “벌써 맛 봤잖아!” 주의 인자하심을. 그럼 우리는 억지로 “예. 좋대요.” 뭐 이렇게 퉁명스럽게 하죠. 좋지도 않으면서 주님이 좋겠다고 하면 좋겠죠. 뭐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죠. 전혀 안 기뻐요.
그게 제가 답답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 철저화를 추구해요. 철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자기가 철저하고 깨끗하게 살았다 싶으면 막 지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야, 내가 그 정도까지 그렇게 헌신적이고 신앙적이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줄을 나도 생각 못했어.” 이러다가 무슨 일이 벌어져서, 갑자기 약간 자기가 보기에 부끄러운 일을 한 것 같으면, 이거는 완전히 또 머리 싸매고 아스피린 하나 먹어야 될 심정해가지고 골치 아프다고 어찌 내가 그런 일을... 자기 일에 울고 자기 일에 웃고 그런 거예요. 인간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주님 보기에는 원맨쇼에요. 주님보시기에는 지금 웃기지도 않아요. 여러분, 음악이 없는데 혼자 춤춰보세요. 저게 미쳤나 하죠. 왜? 공감이 안 되니까. 음악소리를 듣고 춤과 함께 연관이 되어야 보는 사람이 즐거운데, 음악은 없는데 지 혼자 팔을 흔들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좀비가? 뭐야? 이러겠죠. 주님의 인자하심 속에서 우리가 움직일 때에 그게 앞뒤가 맞는 겁니다. 아, 주님의 인자하심에 푹 젖어서 그게 좋아서, 자기 인생에 대해서 그렇게 만족스럽게 살아가는구나! 사도베드로는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어째서 인자하심인가, 그 이유가 나옵니다. 4절에,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이래 되어 있죠. 하나님께 택했다는 것 이전에 뭐가 나옵니까? 사람에게는 뭐가 되었습니까? 버림받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의 인자하심을 제대로 느끼려면 너도 사람이 버렸다. 주위에서 나를 인간취급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 거기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말라는 거예요. “나가! 너 같은 사람은 우리 집안사람 아니야.”라고 내쫓으면 안 된다는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거예요.
인자하심을 받았으면 까짓것 좀 버림받았으면 어떻습니까? 주님 앞에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인데. 사람이 나를, 내 형제나 가족이, 자식이 나를 기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람에게 버림받았어도 주께 인정받고 기뻐하심을 입었다면, 하나님의 기쁘신 일에 들어갔다면 우리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성공작이 아니에요? 개의할 필요가 없어요. 너무 눈치를 봐요. 너무 눈치를 본다고요.
그 다음 4절에 중요한 내용인데, 오늘 이거 강의하다가 끝날 수도 있어요. 뭐냐 하면
사람에게 버림받았는데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택함이라는 말은 여럿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택했다는 말이 아니고, 반드시 버림받은 자리가 성립이 될 때에만 택함이 인식이 되게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택함의 특징이라는 것이죠. 사람에게 버림받을 때, 그러면 사람에게 버림받으려면 누가 누구를 버려야 돼요? 사람 중에 누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나도 사람이 되죠.
그러면 내가 나를 쥐어야 돼요? 버려야 돼요? 나도 사람입니다. 지금 문제 쉽게 내는 거예요. 나도 사람이에요.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이 말이죠. 사람에게 버림받았거든요. 그럼 주님은 나한테 버림받을 분이에요? 내가 채택할 분이에요? 마땅히 나에게도 버림받아야 되겠죠. 그런데 그 버림받은 분이 그 자비하심으로, 기쁘신 뜻대로, 구원방식으로 우리를 건진다고 찾아왔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내가 나를 쥐어야 돼요? 버려야 돼요? 참 문제가 어렵죠. 내가 나를 버려야 됩니까? 쥐고 있어야 됩니까?
둘 중의 하나인데. 아낌없이 나를 포기해야죠. 왜냐하면 내가 나를 포기 안 하면 내가 예수를 선택한 것이 된다니까요. 선택의 반대말은 버림이라는 말이죠. 내가 나를 버려줘야, 내가 나를 버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안 버리고 택했다가 성립이 된다 이 말입니다. 뭐 자기를 버린 적이 있어야지요. 아침에 눈만 뜨면 나를 포기 안 하잖아요. 오늘도 파이팅! 이거잖아요. 싸워서 뭐 할 건데요. 오늘도 파이팅! 자기 독려, 자기 격려, 자기 부추김.
주님은 자기 성도를, 그런 성도의 자세를 주님께서는 촉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환경은 어떤 환경이냐 재촉하는 환경이에요. 니가 너에 대해서 신경 끄라고 재촉하는 환경이에요. 주어진 모든 환경이. 우리는 어떤 환경이 주어지게 되면 더욱더 그 환경이 무서워서 자기에게 밀착을 해버려요.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일찍 죽었다고 합시다. 늙어도 마찬가지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하면, 장례 치르고 주로 어디에 가느냐 하면 해외여행이나 바닷가에 가요. 드라마에 보면 그런 게 있잖아요. 뼛가루 상자에 담아가지고 호수나 바닷가에 가서 “잘가라! 이 무심한 놈아!” 하면서 날리잖아요. 하얀 소복을 입고 여자가 뿌리죠. 자기 자식이든 남편이든 뿌린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연민입니다. 때려죽여도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는 것이 아까운 자기 과거 기억이거든요. 좋았던 기억들이라는 겁니다. 좋았던 기억들을 아름다운 장소에 가서 뿌림으로 말미암아 좋은 추억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오는 모든 드라마나 모든 노래나 모든 음악이나 예술들이 전부다 자기연민과 관련되어 있어요. 산장의 여인 보세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누가 널 찾아가는가 봐라. 택배기사나 찾아가지. 외로운 이 산장에~~♬ 인생 내가 홀로 끝내겠다는 겁니다. 외로운 이 산장에 못 찾아오도록 인생 내가 끝내겠다는 거예요.
그게 지금 뭡니까? 마지막 붙잡을 것은 누구밖에 없다? 나밖에 없다. 내가 기댈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누굴 기댄다는 것,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누굴 기댄다는 것조차도 이거는 건방지고 악독이고 궤휼이고 외식이고 모든 비방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돼요. 세상은 왜 나를 버리느냐? 버릴만해서 버렸지. 세상이 니를 찾을 필요가 없잖아요. 사람은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이 무조건 세상은 자기가 자기를 위한 것처럼 위해야 한다는 거예요. 참, 자기 자신을 포기를 못합니다. 안 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젖으로 오신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자기를 포기를 못하면 예수도 자기를 위한 예수가 돼요. 자기를 위한 예수가 되면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은, 나 여기 있고 예수님 여기에 있는데, “예수님 사랑합니다.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꾸 그런 소리를 해가면서 자기가 예수를 붙드는 거예요. 붙드니까, 붙드는 이 당사자 나는 죽어야 돼요? 살아야 돼요? 잘 붙들어야 되고 단단하게 붙들어야 되기 때문에 자기한테 계속 힘을 주는 거예요. “정신 차려라! 이놈아!” 이러거든요.
치매 걸려서도 그런 소리해보세요. 왜 내가 정신 차려야 합니까? 차라리 정신 좀 놔야 해요. 정신 차리라 하지 말고 내 정신줄을 놔야 합니다. 한번 놔보세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아름답고 더우면 더운 대로 아름답고...,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욕심이. 노림수가 있어서 그래요. 부부싸움을 왜 합니까? 둘 다 등신 같으면 부부싸움 안 합니다. 둘 중의 하나가 똑똑하든지, 둘 다 똑똑해서 부부싸움 해요. 둘 다 똑똑해서.
그냥 사는 대로 살아도 주님보시기에 기뻐하심이 이를 데가 없어요. 우리는 등신 같이 살아도 그걸 보시는 주님의 기쁨은 변함이 없습니다. 변동이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꾸 자기의 변신을 시도하려고 하지 마세요. 또 이상한 데 가서 턱 깎고 이러지 말고. 자기가 손댄다고 해서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제발 자기를 괴롭히지 마세요. 안 그래도 괴로운데 본인마저 자기를 괴롭혀요. 자책하고 닦달내고 이래 살아야 하느냐 하고.
그렇게 안 살면 별 수가 있겠어요? 인간은 태어난 그게 다인데.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마귀가 양심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거예요. 양심을 노리고. “어찌 니가 이런 짓을 하다니!” 자꾸 양심을 가지고 파고들어온다고요. 양심을 가지고.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해요. 이 개떡 같은 양심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고요.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런 양심을 줬다고. 내 것인가요? 주님 것이지. 그 이야기를 못하고 자꾸 나와 엮입니까? 그러면 안 돼요. 그렇게 인생을 사는데, 그러면 힘들어서 괴로워요.
오늘 나온 본문 말씀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린애 같으면요. 이런 말이 어렵지 않고 순하게 우리 속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어른이니까, 다시 말해서 내 나름대로의 나를 지킬 수 있는 어떤 터전이 있다고, 내 돌아갈 자리가 있다고 우기니까 “내가 어린애가? 젖을 먹게?” 이런 식으로 되지도 못하면서 나는 지금 어른이라 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보배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겼어요. 보통 맡길 때에, 내가 넘어갈 테니까 니가 받아주라고 하잖아요. 자기가 믿을만한 사람이 있다면, 나 너한테 다 맡긴다고 팔 쭉 피고 그냥 쓰러지잖아요. 그러다 상대가 피하면 다칩니다. 시멘트에. 우리 자신을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고, 말 그대로 믿으세요. 인자하심을 믿고, 이렇게 농땡이 부려도 인자하심이라고 믿고 그냥 자기를 포기하면서 살자 이 말입니다.
그걸 제가 어느 설교에서 했죠. 제발 여러분 자신을 낭비하라고 했죠. 낭비하라고. 낭비한다는 말은 어떤 뜻을 갖고 있느냐 하면은 너무 계산하지 말고 살아가자 이 말입니다. NC는 5강에 들어가야 하고 롯데자이언트도 꼭 그래야 되고, 그런 것들. 에비앙 골프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꼭 우승을 해야 되고. 이런 것까지 다 신경써가면서. 장미희는 안 아파야 되고. 드라마 걱정까지 다 해야 되요. 드라마 걱정까지. 우리나라 남자들이 장미희 때문에 <같이 살래요> 드라마를 봤답니다. 온갖 걱정을 다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생각을 제발 하지 말라는 것. 내가 이 땅에서 세상 살았고 예수님 자신도 세상에서 살았잖아요. 세상사는 방법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거예요. 그게 주님의 선택입니다. 간단해요. 그런데 그 버릴 때 나도 나를 필히 버리세요. 나에 대해서 그다지 기대하지 마세요. 빨간불인데 스톱하고 파란불인데 건너가잖아요. 건너가고 난 뒤에 기뻐하세요. 내가 이런 것도 지킬 줄 아나? 깜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깜짝 놀랄 정도로 모든 걸 자기한테 기대하지 말아야 돼요. 너무 기대하니까 자기 자신이 자기한테 마음이 안 드는 거예요. 그건 내가 나를 학대하는 거죠. 내가 이 정도는 돼야지. 뭐 그 정도 해서 구원받습니까? 구원방식은 주께서 알아서 하는데, 왜 이 정도 해야 구원받는다고요? 이 정도 해야 사람 구실한다고요? 원래 사람이었어요? 아니었어요.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모든 인간 속에 귀신 들었습니다. 귀신은 변신의 귀재에요. 귀신을 보고 싶어요? 길에 가서 보세요. 모양새도 각가지에요. 뚱뚱한 아줌마, 빼빼 마른 아줌마, 모든 귀신들이 다 다양해요. 전부다 귀신이 들어있어요. 귀신이. 악마의 졸개가 들어있다고요. 전부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요. 자기한테 집착하고, 땅에서 성공하려고 하고, 위에서 오는 것은 관심도 없어요.
자기 터 평생 살아서 이만한 자리 하나 마련했다고 그걸 자랑질 하면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럼 그거만 자랑합니까? 또 그걸 잃을까봐, 깨질까봐, 주식 한 100주 샀는데 그거 또 내려 갈까봐, 펀드 넣었는데 브라질 펀드라 다 날아 갈까봐, 아파트 대출받아 샀는데 또 아파트 규제해서 안 팔릴까봐 걱정이고, 팔리면 팔린다고 걱정이고 안 팔리면 안 팔린다고 걱정이고. 걱정 안 할 구석이 없어요. 뭐든지 걱정이에요. 뭐든지. 차타면 차 말릴까봐 걱정이고.
그래서 4절 끝에 봅시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자, 사도베드로가 이렇게 순순하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뭘 전제로 하느냐 하면 제발 너를 잊어라 이 말입니다. 제발. 원맨쇼하지 말고. 원맨쇼 하던 안 하든 마찬가지에요. 하는 것은 좋은데, 원맨쇼 하는 그것도 잊어버려라.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저분은 내 사람이다! 저분은 나를 구원하잖아!” 그렇게만 이해하면 되는 거예요. “니가 어떻게 아느냐?” “아니까 알지.” “어떻게?” “몰라. 우연이야.” 그게 바로 신령한 사람이 살아가는 굉장히 가벼운 인생입니다.
모든 것이 필연이 아닙니다. 필연이 되게 되면 기다리게 돼요. ‘내가 이만큼 투자를 했으니까, 이만큼 성의를 표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뭔가 좋은 일을 주겠지.’ 자꾸 기다리면 사람이 피곤해진다니까요. 주께서 성도에게 기다리는 것은 안 주고, 안 기다리는 것은 주세요. 여러분 살다보면 그런 경험이 없던가요? 예상하지도 안했는데 먼저 좋은 소식이 오는 거예요. 예상하지도 안했는데. 그리고 예상한 좋은 소식은 계속해서 안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성도와 밀당 하는 겁니다. 밀고 땡기고 밀고 땡기고 하는 거예요. 너 자신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이렇게 끊어버리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악마를 보냅니다. 마귀를 보내요. 실컷 시달리게 만듭니다. 혼자 도 닦고, 혼자 성질내고, 내가 이 정도로 좋은 사람인데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인데 하고 혼자 했다가 혼자 우사당하고 그런 겁니다. 그만큼 원맨쇼 하는 거예요. 원맨쇼.
자, 그 다음 5절을 봅시다.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자, 산돌, 살아있는 돌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관심사는 너희에게는 없고 우리 주님께만 있다. 그러니까 구원방식을 아는 사람들이여, 예수님은 저에게 이렇게 하셨어요. 이렇게 구원하셨습니다. 그것만 기쁘게 관심 두고 살면 인생 살만합니다.
어차피 뭐 떠나겠다는데요. 방랑자 아닙니까? 방랑자여~~방랑자여~~♬ 어차피 돌아다니는 방랑자거든요. 이 땅에 머물 곳이 없어요. 나그네잖아요. 사람이 집착을 하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왜 화가 나는가? 뭔가 집착한 게 있고, 지키려고 애쓴 게 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겁니다. 그 화가 화병이 되고 나중에 그걸 복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자, 4절을 봅시다.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나아와, 어딘가 나올 때는 내 모습이 안 보여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앞에 나갈 때는 그 사람만 보이는 거예요. 그 사람만. 애가 이쁘잖아요. 그러면 애가 이쁜 것만 보이는 거예요. 내 모습이 어떤지, 내 옷에 단추가 풀렸는지 관심이 없어요. 저쪽만 관심이 있어요.
주님께 나온다는 말은 신령한 젖이, 성령이 그렇게 이끄는 거예요. 존재의 무게를 계속 줄여나가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어? 없어? 있는지 없는지도 못 느끼게 만드는 거예요. 언제든지 가볍게 살 수 있는데 자꾸 남하고 비교한다고요. 귀신들린 것하고 비교해서 뭐할 건데요? 귀신들린 것하고. 니 귀신인데 머리띠하고, 나도 귀신이다. 둘 다 미친 것들끼리 붙어가지고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자, 5절에 보면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머릿돌이 되는 그 집뿐입니다. 그것을 성전이라고 하죠. 자, 예수님이 머릿돌이 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예수님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타인에게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미안하다고 사과할 필요가 없어요. 타인에게.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을 키우지 않았으니까. 어떤 상대에 대해서 은근히 기대한 것이 있다고요. “니 나중에 착하고 훌륭하게 살아라.” 이렇게 기대한 것이 있잖아요.
착하고 훌륭하게 살라고 기대한 것이 있는데, 그러면 착하고 훌륭하게 살라고 기대는 했지만, 애가 밤에 잠을 잘 때 산소호흡기 꽂아서 산소공급하고 이랬습니까? 산소호흡을 누가 주십니까? 호흡은 코에 있나니, 호흡을 누가 주십니까? 주님이 주셨죠. 그러면 누가 키웠어요? 주님이 그만큼 키웠잖아요. 이만큼 키웠고 저만큼 키웠다 이 말이죠. 그럼 내 사람이 아니잖아요. 내가 키웠어요? 그럼 내가 그 사람한테 사과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말이 어려워서 이해 못하겠습니까?
내가 남한테 사과할 필요가 없고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잠자는데 꿈까지 관리한 적이 없어요. 상당히 냉정하죠. 상당히 냉정한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남한테 사과할 때 그건 결코 사과가 아닙니다. 나 이만큼 우수한 존재라는 것을 지금 과시하고 있는 거예요. 사과하는 계기를 통해서. 인간이 자기의 가치를 포기하고 사과할 리가 없어요.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를 한다면 사과도 할 필요가 없어요. 미안해할 것도 없어요. 길에 가다가 서로 부딪혔다면 주의 뜻이네! 주께서 그렇게 키우시네!
아니, 남편을 내가 키웠습니까? 아내를 내가 키웠어요? 자식을 내가 키웁니까? 나를 통해서 자식을 낳았지만 자식을 내가 키웠어요? 애를 키우면서 한번 보세요. 애들이 하는 동작 하나하나가 주님께서 시킨 거예요. 막 움직이는 거 있잖아요. 주께서 시킨 거예요. 주께서 시킨 거 그게 보기 좋으니까, 엄마가 방금 그 동작 다시 해보라고 하니까 애가 또 인위적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나 모든 움직임, 머리 쓰는 것, 모든 발걸음을 누가 키우는가 하면 주님이 직접 키웁니다. 주님이 직접 키워요. 이것만은 우리도 우리한테 해당이 되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나를 누가 키운다고요? 주님이 키우잖아요. 왜 주님한테 사과를 합니까? 우리가. 우리가 뭐 우리한테 행한 게 뭐가 있다고. 내 인생을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하죠? 가만 보니 화나네.
왜 내가 괜찮은 인생이 돼야 됩니까? 지금 죽으면 왜 안 되는데요? 내가 지금껏 살아오는 데에 기여한 것이 뭐가 있다고 나는 왜 꼭 내일까지 살아야 하고 모레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뭡니까? 뭐 주의 종이라고요? 니 아니면 종이 없어요? 뭐 복음 전한다고요? 니 아니면 복음 전하는 사람이 없어요? 집이 아무리 크고 벽돌이 아무리 있더라도 하나님의 관심은 신령한 돌에 있습니다. 그 돌의 영향력이, 효과가 성전 전체 구석구석 다 스며들어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참 이건 과학이나 철학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못해요. 그들은 몰라요. 자, 그럼 과학철학이야기를 해봅시다. 과학과 철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여기에 있고 누가 또 여기에 있는데, 서로가 한맘이 되려면 여기에 공감이 되는 사항이 있어야 된다. 공통점이 있어야 된다. 그 공통점을 할 때는 뭐로 하느냐, 수단이 언어나 말이나 글로 이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언어나 말이나 글로 공감을 일으키게 되면, 둘은 친구사이가 되고 하나가 되어 친하게 지내서 하나가 있을 때보다 둘이 있을 때의 효과가 여러 가지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철학이나 과학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근데 철학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런데 냉철하게 이야기를 해서 인간과 인간에게서는 이게 끊어져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도 저 사람 심정에서 내가 이해를 못해요. 왜?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요. 부부사이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둘이 한 마음이 될 수가 없고,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거예요. 그러면 왜 부부가 됐는가? 서로가 많이 양보를 했거든요. 왜 양보했는가, 착각을 해서 그래요. 뭔가 착각한 거예요. 나중에 들어보면 착각인줄 아는데. 서로 양보했다고 하는데, 그 양보 한만큼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양보해줬으니까 너도 나만큼 해줘야지 라고 하는, 그런 효율성, 경제원리가 거기에 작용하고 있다고요.
인간은 자기에 대한 관심사를 절대로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한 사람이 죽었은즉 다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 한 사람이 아프면 다 아프겠네요? 그래! 이러거든요. 우리가 이걸 논리로 따져서 믿을 내용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다, 그것도 못 믿겠고. 예수님의 피가 용서를 한다, 그것도 못 믿는 마당에.
아담 하나가 범죄 함으로 우리가 다 같이 죄를 지었다는 이게 믿어집니까? 아담은 아담이고 우리는 우리잖아요. 우리가 언제 아담을 구경이나 했습니까? 아담을 본적이 있습니까? 아담이 같이 있어도 아담은 아담 동네에 있고 나는 내 동네에 있다고요. 접촉할 수 있는 여건이 아무것도 없어요. 몸은 유기체 세포 자체가 다 따로따로 독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게 같이 될 수가 없어요.
마음을 하나로 하자! 그거는 그냥 희망사항이죠. 손에 손잡고 어깨동무할 때는 하나가 된 거 같죠. 나중에 하나는 전라도고 하나는 경상도면 서로 싸우고 삐지고 난리난다고요. 어떻게 인간이 순수하게 니와 나가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까? 없어요.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가 되고 안 되고는 니가 판단을 못하고, 이미 아담이 죽음으로서 니는 이미 죽은 자고, 아담이 범죄 함으로써 이미 너희들은 아담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 범죄 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느냐 하면 이 이야기를 알아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죄 사함을 얻는 것의 논리가 성립이 돼요. 성립이 됩니다.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하나가 안 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 안에 들어오지를 못해요. 우리가 여기에 있고 예수님이 여기에 있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에게 다가옵니까? 예수님이 어디에 있다고, 어디 대구에 살아요? 아무리 옆에 붙어있었던 제자들도 예수님하고 남남이었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예수님 속에 들어갑니까? 이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성경을 보시면서. 그냥 믿은 거예요? 그냥 믿는다고 했습니까? 우리 쪽에서 예수님에게 다가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쪽에 다가설 수 있어요.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님에게로 올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 쪽에서 뭘 준비했느냐 하면은 우리가 예수님 쪽으로 다가설 수 있는 여건을 예수님 쪽에서 준비를 하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언약구조, 언약체계입니다.
언약체계의 특징은 언약을 미리 깔아놓아요. 미리.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 자리에다가 미리 깔아놓아요. 여기에 이름이 쭉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기 이 이름은 내 이름이죠. 내 이름이기 때문에 남의 이름이 안 되죠. 그 사람은 그 사람 이름이 따로 있고 내 이름은 내 이름대로 따로 있으니까 안 되잖아요. 그럼 이 바탕을, 모든 이름의 바탕을 자기들 이름 말고 주의 이름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됩니까?
주의 이름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되느냐, 내 이름 안에는 뭐냐 내 행함이 내 이름의 내용을 형성해요. 내 행함이. 내 이름으로 했던 그것이 내 이름 안에 이렇게 모아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름으로 행했던 것은 어디에 모아지겠어요? 주의 이름이 적용되는 곳에는 주의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것에 적용이 되겠죠. 여기에 방해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내 이름이 방해가 되는 거예요. 내 이름이.
그러면 주님이 하신 방식은 뭐냐 하면, 내 이름을 제거해야 되겠죠. 제거하는 방식이 내 이름으로 살던 것을 죽음으로 보는 겁니다. 죽음이 뭘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죠.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 다음에 뭐냐 마귀와 더불어 있는 거예요.
쉽게 합시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살았어요? 죽었어요? 지옥에서 죽으면 안 되죠. 살아있어서 고통을 받아야 될 게 아닙니까? 그죠. 그러면 지옥에 있는 사람이 살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고통 속에, 저주 안에 있죠. 그러면 언약에서 뭘 얻느냐 하면은 언약이라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실시됩니다. 주의 이름에서 한쪽은 축복이 주어지고 한쪽은 저주가 주어집니다. 축복이 주어지고 저주가 주어져요. 언약 안에서.
그러면 저주가 살아있어요? 인간이 살아있어요? 지옥에서. 저주가 살아있는 상태가 그게 지옥이에요. 지옥에서 사람은 안 죽어요. 안 죽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거예요. 죽으면 차라리 편하죠. 누구 맘대로 죽어요? 요한복음 5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죽은 자를 다 살려내는데, 선한 자는 의인의 부활로 악한 자는 악인의 부활체로 살려줘요. 살려줘서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지옥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내가 살아있다고 하면 안 돼요. 사실은 그것을 여러분들과 내 맘대로 약속을 하고 싶은데, 내가 여기에 살아있다고 하지 말고 내 안에 축복이 살아있다고 하든지, 안 그러면 불신자 같으면 내 안에 저주가 살아있다고 해서, 살아있다는 주체를 내 안에 두지 말고. 주님이 집어넣어준 자비가 살아있다고 하든지, 자비의그릇이니까. 아까 자비했잖아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3절), 자비가 살아있는 것을 내 살아있는 것으로 대신하자 이 말입니다.
이게 지금 오늘 본문 내용이 그거거든요. 본문 내용이 주님한테 관심이 있어요. 지금 모든 말씀이 우리한테는 관심이 없어요. 내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권투를 잘하고 돈을 버는가, 아무 관심이 없어요. 니 안에 지금 자비가 살아있는지 아니면 저주가 살아있는지를 보자 이 말입니다. 예수 안 믿는데 검사고 총각이다.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대단한 신랑감이라고 하죠. 신랑감 한번 쪼개보자 이 말입니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그 사람이라는 신랑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신랑이라는 껍질에다가 그 안에 뭐가 살아있습니까? 저주가 살아있는 거예요.
저보고 과도하게 이야기한다고 하지 마세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3장 끝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5-36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살아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왜 그렇게 마귀한테 시달렸느냐 하면 자꾸 내가 잘 살아야 된다. 내가 착한 일 많이 하고 내가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자꾸 살아있는 주체를 내 이름에다가 혼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은 거예요. “우리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다. 야! 똑바로 해! 당신도 똑바로 하고!”
자꾸 개개인을 똑바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하려고 하는데, 주께서는 우리 이름을 안 봐요. 우리 가정이 주의 이름으로 성전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에 뭐가 살아있어요? 예수님의 자비를 맛보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의 돌로 성전을 지으면 뭐가 살아있겠어요?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있는 거예요.
여러분 큰 강당에 갔을 때 애들이 놀이삼아서 하잖아요. 강당에 들어갈 때 우연히 친구가 입구에서 말을 하니까 강당에서 막 울리잖아요. 막 울린다 이 말이죠. 재밌거든요. 애들이 어릴 때 강당 한복판에 서가지고 오오오~~~ 이렇게 타잔 흉내를 내잖아요. 그러면 막 왕왕왕~~~ 울리죠. 타잔 흉내 바깥에서 해봐야 재미없어요. 오오오~ 하면 그냥 끝이에요. 근데 큰 강당에 가서 하면 울리잖아요. 그러면 우리 성도가 사는 목적과 기쁨이 어디에 있어요? 사랑과 자비가 와우~~ 자비비비비~~~ 사랑랑랑랑~~~ 그거 울리는 재미로 살아가잖아요.
왜 자기한테 관심을 둡니까? 그거 마귀의 꼬임에 빠진 거예요. 평생을 마귀한테 시달리려면 그렇게 사세요. 평생을. 교회 갔더니만 목사가 “똑바로 하란 말이야! 말씀이 폼으로 있는 줄 알아? 지키란 말이야! 모든 악독과 궤휼과 위선이다. 이제부터 예수 믿었으니까 그런 것 하지 말아야지.” 니나 하지 마! 우리는 어느 집에 들어왔어요. 왕왕왕~~~ 울리는 집에 들어왔다고요. 그 집이 뭐냐, 예수님을 보라고 있는 집이에요. 예수님의 자비의 출처가 어디고, 사랑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 예수님을 보라고 있는 거예요.
그 예수님은 자비를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와 함께 같은 공간에 있어요. 내가 살아있으면 안 돼요. 내 안에 자비가 살아있고 용서가 살아있도록, “나 죄인인데 용서받았어.” 주님의 구원방식을 그냥 아는 대로 이야기하면 돼요. “나 이런 인간인데 주께서 오셔서 날 구원했어.” 그것도 못합니까?
남편이 있다가 “살림하는 꼬라지하고는, 이것도 밥이가?”라고 할 때, 듣고 있다가 “그런 나를 주께서 구원하셨어.” 왕왕왕왕왕~~~ 내 자존심을 위해서, 내 명예를 위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남들이 나한테 요구하는 거예요. 저 귀신같은 것들의 요구를 왜 들어줍니까? 귀신들의 좀비 요구를 우리가 왜 들어줘요? 주님이 뭐라고 보는가가 중요하다니까요.
자, 5절에 보세요. 그 이야기가 5절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 신령한 젖이죠. 신령한 젖을 받은 우리가 뭘 한다? 신령한 제사인데 어디가야 제사를 드릴 수 있어요? 왕왕~~ 울리는 곳에 들어가야 돼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야 그 제사가 돼요.
성전이 없는데 바깥에서 제사를 드리면 안 됩니다. 그 안에 들어가서 우리의 사랑이 울리는데, 그 사랑이 울리는 조건이 뭡니까?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포기한다. 내 행동에 대해서 관심 뚝! 남한테 사과하지 않는다. 남한테 책임지지 않는다. 아까 이야기했는데 궁금해서 묻습니다. 책임지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남편, 아내, 자식들을 책임지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안 키웠잖아요.
내가 안 키웠단 말이죠. 도와줬을 뿐이지, 밥 달라고 하면 밥 줬을 뿐이지, 내가 키우지는 않았어요. 키우는 것은 주님께서 키우신 거예요. 왜? 주님의 피조물이니까. 주님이 노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밥도 안 주고 놀까요? 라고 하지만, 주께서 나를 부추겨서 밥 해주라고 주께서 나를 촉구하겠죠. 아까 했잖아요. 우리의 환경은 어떤 환경이다? 촉구하는 환경.
그러면 계속 밥해주면 착한 겁니까? 밥해주는 동시에 내가 너한테 밥을 해줬으니까 너는 내 말 들어야 돼! 라고, 또 내 위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버림받았다는 이유를, 4절의 말씀이죠.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4절의 말씀을 계속 우리에게 되새기면서 우리가 어느 자리에 놓여있는가를 반복해서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말씀이.
자, 오늘 말씀을 이렇게 정리하면 사실상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은데, 인생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가 뭐냐 하면 주님이 기뻐하는데 내가 따로 내가 기뻐할 것을 찾아서 그게 사단이 나는 거예요. 그냥 이대로도 기쁜데, 주께서 기뻐해서 구원했는데, 내가 기뻐해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고 그 가운데 뚫고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기대가 크면 실망이 커요. 나한테 너무 기대를 하지 마세요. 나한테 실망이 너무 크게 되면, 주께서 나를 기쁘게 보는데 내가 나를 너무 슬프게 봐서 자살할 수가 있어요. 자기 학대를 할 수가 있다고요. 여러분들 얼굴을 보니까 다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왜? 전부 살쪘으니까. 배짱 편하게 사시네요.
끝으로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것은, 우리를 받는 것이 아니에요. 니가 지금 누구하고 함께 있는가, 우리의 솜씨를 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아는, 신령한 젖, 예수님이 속에 들어온 그 모습 그대로 주께서는 받으시는 겁니다. 5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너 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뭐로 말미암아 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누구 앞에 나갈 때는, 그리스도 앞에 갈 때는 자기를 잊으세요. “아이고, 나는 너무 초라해서. 나는 죄만 짓고. 나는 나쁜 짓만 하고.” 이러지 마세요. 그냥 나가세요. 그냥 예수님에게 나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최고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차피 죄인이에요.
주께서는 죄를 용서했잖아요. 우리는 환자 아닙니까? 환자가 환자다워야지. 오늘 제목은 ‘사랑의 메아리’입니다. 꼭 유행가 가사 같은데. 그러니까 이 환자를 내가 손대면 안 돼요. 왜? 못 고치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못 고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내가 스스로 손 댈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돼요.
왜? 마귀의 속임수한테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동안 마귀가 얼마나 닦달 냈겠습니까? 손대라고. 니 인생 책임지라고.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그 일로 나 안 돌아갈 거야! 정말 그 세계로 안 돌아갈 거야! 그냥 순전한 어린애같이 젖이나 먹고 사세요. 그냥 주시는 젖이나 먹고, 예수님의 피나 먹고, 그거만 감사하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몇 십 년 믿어도 무슨 소용이 있고, 성경을 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 가지고 또 자기 인생 책임지려고 하고, 남한테 사과하려고 하고, 자기 우수함을 드러내려고 하고, 언제까지 마귀한테 시달릴 겁니까? 주여, 신령한 어린애같이 되게 해주시고, 그저 주께서 키워주시는 대로 그 기쁘심을 담뿍 담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