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사랑의 메아리 1809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9. 20. 06:05
2018-09-15 00:41:16조회 : 194         
사랑의 메아리 180914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eY7dFB7hWaM"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0TrBKHwT-OY"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이미아 (IP:122.♡.170.138)18-09-20 01:31 
서울의존강의20180914a 베드로전서2장 1-5절(사랑의 메아리)-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1-5 

  

1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절,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절,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절,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절,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베드로전서 2장 1절부터 봅시다. 구원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현재 니 처지가 구원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그것을 니가 아느냐? 라고 되묻는 겁니다. 구원을 받으라는 말은 니 현 상태가 비참하다는 것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받아들일만한 인간이 아니다, 라는 그런 뜻입니다. 구원을 이야기할 때, 저 구원을 가지자가 아니라 우선 니 주제파악부터 하라는 것이죠. 니가 누군지를 니가 아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구원에 대해서 본인이 내가 이렇게 비참하구나,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구나, 라고 이렇게 생각을 했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비참하다고 여기는 그 상황에서는 인간은 어떤 구원의 방법을 강구하게 되어 있어요. 이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나름대로 자기가 어떤 계획을 잡은 것, 생각해놓은 게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방법은 소용이 없습니다. 안 통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을 언급했다는 말은 내가 형편이 없다는 말인 동시에 너는 절망적이다, 라는 것을 아울러 같이 언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고,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각하게 보느냐는 겁니다. 

  

여기 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되어 있는데, 평소에 악독하지도 않고 평소에 속이지도 않고 위선 떨지도 않고 평소에 시기하지도 않고 비방하는 말을 안 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한테는 이 사도의 이러한 지적이 해당이 안 되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봐야 하거든요. 

  

성경에서 뭔가 나열을 할 때, 이러이러한 지적의 나열을 할 때, 아무리 봐도 나한테 해당되는 사항이 없다고 했을 때에, 그럼 그 사람은 건전하고 괜찮은 존재냐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악독과 모든 궤휼은 결국 위선을 떠는 것이고, 위선은 거짓이죠.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향하여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는 인간에게 그럴 요소가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인간은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어요. 

  

근데 인간의 악독과 모든 궤휼과 거짓의 이런 기준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니가 나를 바르게 생각하는 거기서 나온 기준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비로소 우리는 악독한 사람이 되고 거짓되고 외식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그냥 구원한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신다고 하면서 그 구원에 대한 방식을 하나님 쪽에서 이미 제시했습니다. 

  

자,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하늘에서 누군가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이겁니다. 하늘에서 누군가 오시는 거예요. 니가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 봐라가 아니라 하늘에서 누가 따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이 할 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일, 하신 일을 그냥 그대로 전하면 되죠. 성도의 할 일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보내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라는 그걸 그대로 전하고 나타내면 되잖아요. 신앙생활 하기가 굉장히 쉽죠. 

  

“예수님이 오셔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라는 것을 그냥 이야기하고, 그걸 고백하고 남한테 나타내면, 그게 전부잖아요. 구원의 방식이 하늘에서 누군가 오신 것, 예수님이 오신 것이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에. 이렇게 누가 오셨다, 이런 일을 하셨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뭐 더 필요한 것이 있어요? 

  

식당을 갔는데 김밥이 먹고 싶어서 “김밥주세요.”라고 했어요. 그럼 식당에 있는 사람은 김밥을 만들면 되죠. 김밥을 달라고 했으면 김밥주면 되잖아요. 꼭 식당주인이 북한을 따라가야만 됩니까? 정상회담을 해야 돼요? 식당주인은 벤츠 타야 되고 뭐 자전거 타면 안 되고 그래야 돼요? 애기 셋 낳아야 되고 뭐 그래야 됩니까? 식당주인이. 우리 애 공부 잘한다고 식당 주인이 꼭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되겠어요? 

  

지금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 정신머리를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성도로서 이야기를 해야 될 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을 이야기하는 것! 끝! 그거다 이 말입니다. 근데 그걸 안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그거 하면 돈 벌게 해주실 겁니까? 그거 하면 행복하게 해주실 겁니까? 그거 하면 건강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자꾸 정신머리가 딴 데 가있기 때문에, 주님의 구원방식을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내가 복음 전하면 자꾸 뭐 주시렵니까? 자꾸 이거 생각하는 거예요. 정신을 엉뚱한데 팔고 있는 거예요. 

  

김밥 만드는 사람은 김밥을 만들면 되는 거지, 왜 딴 걸 신경 쓰느냐 이 말입니다. 성도가 미장원에서 머리 잘 안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러나 머리 잘 안 나왔다고 해서 주께 영광이 안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애가 공부 못 할 수도 있어요. 공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하고 관계없어요. 성도의 특이성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나 더 보태면 애 낳고. 

  

인간은 왜 사느냐, 시집가고 장가가고 애 낳고 애 키우고, 그래서? 그리고 집사고, 그래서? 서울에 집값이 비싸서 못 사고 변두리 사고,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파트 들어갔다, 그래서? 그래서 뭐? 그게 사는 거예요? 그게 성도로 사는 겁니까? 왜 그런데 신경을 쓰죠? 장사하는데 손님이 안 온다, 그래서 뭐? 남대문에서 동대문으로 옮겼는데 영 손님이 안 온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교회했는데 교인들이 다 빠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게 성도의 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게. 

  

성도의 할 일은, 전에 예수님을 알기 전에 그것은 입에 올릴 가치도 없는 것이 성도의 할 일이에요. 내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몰랐을 때에 내가 온 정신을 거기에다가 팔았던 그거 있잖아요. 내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에 집중해서 관심 가졌던 것이 뭐냐 하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사고팔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그런 것들이었어요. 남한테 우열해서 잘났다, 나는 이만큼 잘산다, 그런 것 비교하고. 등산가고 취미활동하고 그런 게 전부인줄 알았어요. 지금 불신자들처럼 말이죠. 

  

그런데 성도가 됐다는 말은 그렇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해도 구원이 되더라? 안 되더라? 이게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구원될 수 없는 거예요. 그 이유를 제가 미리 말씀드릴까요? 이 세상에서 내 자리를 주님께서 빼앗아버렸다. 누가? 주님께서. 이 세상은 원래 누굴 위한 세상이냐 하면은 주님을 위한 세상이거든요. 

  

왜 사람들이 예수님께 관심이 없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 돌아갈 자기 자리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직장 끝나고 어디로 갑니까? 집에 가죠. 집에 돌아갈 내 자리가 있다는 겁니다. 내 자리가 따로 있으니까 나는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뭐냐 하면은 내 자리에요. 내 자리. 어디에? 이 세상에서 내 자리. 

  

근데 주님에 의하면 이 자리는 시너 뿌려서 확 불을 붙여야 할 자리, 시너 안 뿌려도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져서 불살라 버려야 될 자리가 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돌아갈 내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돌아갈 내 자리가 없어요.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고 있으니까, 아침에 회사에 출근해서 자기 자리에 턱 앉아가지고 꼼지락거리면서 일을 해야 되는데, 회사에서 나가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럼 그 다음부터 뭐부터 해야 됩니까? 

  

우선 사원증 뺏어가지고 못 들어오게 만들고, 출입구 스크린 타넘고 들어왔다 칩시다. 개발부든 뭐든 가봤자 자기 자리에서 의자하고 책상하고 벌써 뺐잖아요. 그게 자리 빼는 거예요. 회사에 자기 자리 없으니까 잘린 것을 알고 집에 갔는데, 만약에 마누라하고 자식들하고 이사 갔다고 하면 어떡할 겁니까? 찬스라 해서 회사에 간 사이에 완전 등기이전하고 이삿짐센터에는 어디로 가는지는 알리지 말라하고 확 뺐어요. 집에 갔는데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때 그걸 한번 상상해보세요. 그때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어떨 것 같습니까? ‘아, 이 세상에 내가 돌아갈, 내 몸 하나 눕힐 자리가 없구나!’ 없어야 되죠. 

  

구원이라는 것은 이곳을 떠나는 것인데 왜 내 자리에 연연합니까? 사람이 복음에 관심이 없고 말씀에 관심이 없는 것은, 그딴 것 없어도 내가 몸 눕히고 푹 잘 수 있는 것은 내 자리가 확고하게 있다고, 지금 그것가지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날 보호해줄 남편이 있고, 예쁜 애들이 둘이나 있고, 뭐든지 내가 이 땅에서 슬프지 않고 위로받으면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여건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여건들을 받을만한 자격이 되기 때문에, 내가 설마 이 자리에 내 자리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잘못된 거예요. 잘못된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하면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베드로전서 1장 1절에 보면 본도, 본도는 터키 북쪽이죠. 갈라디아, 터기 중부. 갑바도기아, 터키 서부. 아시아 터키 중부. 비두니아 터키 남쪽. 이 사람들이 흩어진 그 다음에 뭐예요? 흩어진 나그네죠. 나그네. 떠돌이입니다. 떠돌이. 이 세상에서 몸 하나 누울 곳이 없도록, 우리 주님께서 그동안 내가 큰소리칠만한 든든한 내 자리가 있다고 했던 그 자리를 의자부터 해서 책상, 명찰까지 다 빼버렸습니다. 확 뺐어요. 갈 곳이 없습니다. 최백호에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없어요. 없으니까 스스로 큰소리칠 수 없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주의 이름으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이게.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하고 같은 말이 뭐냐 하면 내 이름은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내 이름은 삭제되었다 이 말이죠. 차라리 다 빼버린 거예요. 내 의자, 내 아파트, 내 앞으로 등기된 것도 없어요. 내 이름은 서울 어느 어떤 곳에도 없어요. 내 이름을 지워버렸어요. 델리트delete, 컴퓨터 용어로 삭제라고 하죠. 삭제. 

  

슬프십니까? 안타까운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슬프죠. 옛날 하던 방식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맨날 하던 이야기가 뭐냐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거예요. 왜? 애굽에 누가 있다고요? 옛날 오순도순 자기 가족끼리 살았던 행복한 그 자리가 있잖아요. 누가 어린양 피 잡으라고 했습니까? 본인들이 잡으라고 안 했어요. 모세 오라고 한 적이 없어요. 일방적으로 모세, 아론이 들이닥쳐서 이런 사단을 만든 겁니다. 좀 힘들었긴 하지만 정들었던 이웃이 있고. 

  

그러나 내가 거기서 어떤 희망과 보람을 가지고 살았던 그 자리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생소하기 짝이 없어요. 생판 모르는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언제 우리가 약속하고 뭐 관계있었습니까? 우리는 내 육과 관계가 되어 있어요. 육으로 사는 자리고, 그 자리는 뭐냐 하면 내 이름이 계속 유통이 되는, 내 이름이 계속 사람들에게 통용이 되는 장소라는 말이죠. 

  

“니 어디 살아?” “나 여기 산다.” 그게 바로 내 이름이 아직까지 유통될만한 그런 구조, 그런 체계, 그런 자리가 있다 이 말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없다~~ 이 노래가 아니잖아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잖아요. 그 산골에 나만 살았습니까? 내가 알고 있던 순이, 내가 알고 있던 복순이, 철희 내가 알고 있는 철없이 놀았던 그 친구들이 거기에 다 있다 이 말이죠. 그런 기억들이 모아 모아져서 지금의 자아를 구축하는 겁니다. 그중에 누구하나 훌쩍 떠나버리면 나는 마음이 허하죠.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에게 관심 두었던 것이 있었거든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시어머니가 훌쩍 떠나버렸다. 그럼 며느리의 마음구석은 아리다고 하죠. 막 떨리고 아픈 거예요. 빈자리를 느끼는 겁니다. 있어야 될 것이 도려내졌으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식을 잃은 사람이 있어요. 20대에. 세월이 1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요. 자식이 나고, 자식이 곧 나였습니다. 모든 것을 바쳤는데, 약의 부작용인지 자살하고 말았어요. 멀리 가서. 그것도 외국에서. 마지막 모습도 못 보고. 본들 뭐하겠어요. 

  

또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마지막 결정적인 모습을 못 봐서 왜 섭섭해 합니까? 어른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그 마지막 순간까지 포착해서 그것을 자기 자아의 구성요소로 집어넣을 때 자기 완결성이 갖추어진다는 거예요. ‘나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까지 지켰다.’ 지키면 뭐 안 돌아가십니까? 그거 지킨 게 뭐라고? 

  

인간은 세상 모든 것을 내 자리의 단단함, 내 자리의 안정성, 확고함, 거기에 자기 이름을 걸고 그걸 수집하고 그 힘을 모으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 모든 것이 내가 이 자리에 터 잡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오늘 본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악독이 되고 거짓이 되고 위선이 되고 시기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나는 나로 인하여 살겠다는 그것이, 다들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게 무슨 악독이 되겠는가 하겠지만, 주님 보시기에 그게 악독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괜찮은 사람을 뽑아가지고, 예수님께서 자기 말고 베드로를 뽑든지 야고보를 뽑든지 뽑아가지고 이 사람을 좀 본받으라고 이렇게 했다면 우리는 가능성이 있어요. 왜? 그 야고보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사람처럼 순결하고 바르게 살면 될 거예요. 왜? 단절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팔다리 두 개인데 못 할 게 뭐 있어요. 따라붙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뭐라고 했습니까? 구원은? 구원방식이 뭐라고 했어요? 하늘에서 누가 오는 거죠.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처구니없이 인간은 못하죠. 인간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이 된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할 일은 뭐라고 했습니까? 또 다시 합시다.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성도의 삶, 신앙생활을 어떻게 합니까? 라고 자꾸 묻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왜 자꾸 묻느냐 하면은 내가 나를 조작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악독이고 궤휼이고 거짓이고 외식이고 시기고. 

  

얼마든지 쉬운 일을 할 수가 있는데, 얼마나 간편한데, 그건 안 하고 자꾸 딴 거 열심히 하면서, 이렇게 하면 됩니까? 이렇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챙기던 버릇이 그대로 가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챙기던 버릇이. 내가 어느 교회에 가서 등록하면 되느냐? 그건 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새문안교회에 갈까? 말까? 새문안교회고 헌문안교회고 간에 그건 문젯거리도 안 돼요. 언제 발을 빼든 말든. 십일조를 할까요? 말까요? 교회를 두 번나갈까요? 세 번나갈까요? 아이고! 쓸데없는, 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요. 

  

“주님은 이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세요.” 왜 그 이야기를 왜 못합니까? 저 사람은 내 사람이라고 왜 말을 못해요? 저 여자는 내 여자라고 왜 말을 못하느냐 말이죠. 주님은 우리 주님이라고 왜 말을 못해요? 그 말을 못해서 어눌하게 더듬거리거든요. 뭔가 자신이 없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해서 약간 속으로 웃었는데,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는 나는 구원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면 자기한테 관심이 없거든요. 근데 지금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면 구원받습니까? 라고 하는 것은 지금 증거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면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을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중이에요. 자기한테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자꾸 예수님을 거론해봐야 그거는 소용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이렇다, 라고 하게 되면 그 말을 하는 그 다음 순간부터 여기에 나라는 것을 잊어버리거든요. 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주님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그게 주의 일이에요. 

  

그럼 나에 대해서 생각 안 하기 위해서 뭘 생각하면 됩니까? 나에 대해서 생각 안 하기를 내가 만약에 심사숙고한다면 이미 그 시작이 나에게서부터 시작한 일이 되어서 빼도 박도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냥 우연이죠. 우연. 우연입니다. 왜냐하면 계산할 필요가 없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 2절에 나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그냥 젖이 아니고 어떤 젖입니까? 신령한 젖이에요. 육과 대비가 되는 겁니다. 육하고. 

  

다시 이야기합니다. 육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주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이름으로 돌아갈 터전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구축하는데 관심이 있는 게 육이거든요. 구축할 때 돈, 아파트뿐만 아니고 내 가족, 혈육도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제가 구원방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벌써 세 번째인데, 위에서 내려오죠. 지상에 없는 거죠. 위에서 내려오니까 그게 신령한 겁니다. 신령한 것의 자리는 이 지상이 아니에요. 위에 자리가 있을 때 신령한 것이 오는 겁니다. 

  

신령한 것이 온다면, 여기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죠. 그러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랑하라는 이런 뜻이거든요. 거기에 집착하라, 거기에 관심을 가져라 그런 뜻이거든요. 그럼 위엣 것을 사모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뭘 잊어버립니까? 지상의 것을 잊어버리겠죠. 지상에는 뭐가 구축이 되어 있다고 했습니까? 자기가 아쉬우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 그런 것 하나 터 잡고 있다 이 말이죠. 근데 그걸 어떻게 하라? 잊어버리라는 겁니다. 

  

그걸 잊어버려라.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나오는 말씀 그대로에요. 위엣 것을 생각하라 이 말이죠. 그럼 위엣 것은 어디서 온다? 신령한 젖이 오잖아요. 그럼 신령한 젖이 와가지고 내 눈앞에서 스톱이 됩니까? 아니면 내 속에까지 들어오는 거예요? 신령한 젖은 내 속까지 확 들어오잖아요. 들어오게 되면 내 안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바로 신령한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내 안에서. 

  

일어난 그 변화가 뭐냐 하면은 바로 점점 더 자기에 관해서 관심을 뚝 끊어버리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끊어버리는 거예요. 자기에게 관심을 끊어버리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우연이 돼요. 우연.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가 생각이 나는데, 전부다 우연히 되는 겁니다. 필연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원인과 결과를 내가 이성적으로 이어보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행동했더니만 이런 결과가 나왔다. 내가 착하게 살았더니만 주께서 복을 주셨다. 요것도 필연이고. 내가 나쁜 짓을 했더니만 벌을 받았다. 이것도 필연이죠. 우연이 아닌 거예요.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원인이 없는 거예요. 원인이 없고 결과만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마치 광야에서 만나가 내리듯이. 광야에서 만나를 주는 이유가 너희들은 더 이상 농사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농사라고 하는 것은 애굽에서는 필히 인간의 노동이 개입이 되게 돼있어요. 니 노동에 대해서 이제는 신경 뚝! 신경 쓰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신경 쓰는 것은 니 노동이 아니고 안식일, 주님의 노동이거든요. 주님이 하신 일이에요. 

  

123456일, 이것은 누가 합니까? 내 노동이죠. 그런데 7일이 되면 자기 노동에 관심 둔 그 죄에 대해서 죄를 씻는 제사가 제 7일째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과 육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육은 죄 짓는 육, 영은 죄 짓는 그 육을 신령한 구원의 방식으로 씻어주는 그러한 주님의 노동. 주님의 하신 일.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그냥 전하면 되죠. 

  

그러면 그걸 어떻게 전합니까? 사람이 아니까 전하는 거잖아요. 제 말이 어려우면 어렵다고 하세요. 니가 어떻게 저걸 보느냐? 보이니까 본다. 제 말이 어렵습니까? 니가 어떻게 저걸 보지? 보이니까 보는 거예요. 니가 주님에 대해서 어떻게 알지? 알게 되니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무슨 신학이 필요합니까? 왜 신학을 해야 되죠? 목사하려고요?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니 신학 몇 년 했냐고 그걸 묻습니까? 

  

주님께서 마지막 묻는 질문을 내가 미리 땡겨서 해볼까요? “니가 아버지와 그리스도를 아느냐?” 이걸 물어요. “예. 압니다.” 그러면 영생이에요. 아버지와 그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니라. 이게 요한복음 17장 3절에 나오잖아요. “영생은 그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게 어려운 이유가 이게 안 보이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그러면 모르면 천국 안 가면 돼요.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 아는 것, 같은 것이라고 봅시다. 예수님을 안다, 그러면 얼마나 믿었으면 압니까? 기도를 얼마나 했으면 압니까? 그게 아니고 그냥 아니까 아는 거예요. 왜요? 우연이니까. 원인이 없으니까. 내 노동, 내 행함에서 원인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에 비해서 이 세상은 뭐냐, 필연입니다. 뭐 잘 키우고, 공부 열심히 하고, 뭐하고, 뭐하고 해도, 투자를 해야 얻는 게 있고, 돈 놓고 돈 먹기라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꼬뿌 없이는 못 마신다는 서영춘의 유행어입니다. 사이다가 있어도 병나발을 못 불고 컵이 있어야 따라 마실 수 있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돈을 타야 돈을 버니까, 야바위꾼들이 하는 멘트에요. 랩이에요. 랩. 이 세상은 뭔가 투자를 해야 얻는 것이 있어요.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는데 결과가 나올 리가 없다 이 말이죠. 팥 심은데 팥이 나고 콩 심은데 콩이 나는 거예요. 

  

누가 자기를 가라지로 심겠습니까? 그런데 이 세상은 가라지가 나와야 하고 알곡이 나와야 할 땅이에요. 왜냐하면 이미 주님이 접수한 주의 이름을 위한 세상이지 내 이름을 위해 터 잡기위한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서 터 잡으려고 교회 와서 비는 내용이 뭐냐 하면 “내가 터 잡은 자리가 잘되게 하옵소서.” “잘 돼야 될 텐데.” “주님께서는 ”잘 될 턱이 있나.” 그저 빌면서 “우리 가족, 우리 자식 잘 돼야 될 텐데. 그저 몸 건강하게 잘 돼야 될 텐데.” 아니 몸 건강하면 구원받습니까? 

  

신령하다는 말은요, 우리가 이 세상에 알던 것이 일체 포함되지 않았어요. 주님의 신령함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가룟 유다한테 배신당했다는 점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배신당해서 십자가 졌잖아요. 그럼 이 세상은 누굴 배신하는 곳이다? 주님을 배격하고 배척하고 배신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주님을 배신해요. 

  

그런데 주님 그러면 안 되는데, 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건 특이한 사람이고. 신령한 젖을 마셨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다른 안목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겁니다. 지금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보니까 1절에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은, 모든 인간이 신령한 젖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렇게 베드로가 설정해놓은 겁니다. 

  

악독이라고 하는 것은, 독하다, 악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것이 있다는 뜻이에요. 내세울만한 자기 것이 따로 있고, 나는 그걸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살겠다는 그게 뭐냐 하면 내 이름을 위해서, 내 명예를 걸고 있는 이것을 하나님이라도 흠집을 내지 마세요, 라는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진짜 악랄한 짓이라 이 말이죠. 주님보시기에. 

  

그러면 젖을 사모하는 신령하고 어린애 같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죠. ‘내가 악독 안 하고 착해야지.’ 착한 그것도 수상해요. 그것도 위선이에요. 자기생각 안 하면 된다니까요. 내 생각을 안 하면 돼요. 내 생각을 하면 골치 아파요. 

  

여러분, 구루마(손수레)압니까? 구루마. 일제 때나 옛날에 구루마가 있었어요. 구루마를 끌어서 짐이나 화물을 날라주고 품삯을 받고 사는 사람이 서울에 옛날 60년대에도 굉장히 많았어요. 서울 역에 많았는데. 그 사람이 배고파서 점심으로 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구루마를 세워놓고 국수를 먹었는데, 국수가 너무 맛있어서 구루마를 잊어버리고 그냥 맨몸으로 집에 갔다고 합시다. 

  

그럼 그 사람이 그냥 집에 간 것은 지금 어디에 도취가 된 것입니까? 국수가 너무 맛있어서 그 국수 맛에 도취가 된 것이죠. 잔치국수 맛에 도취가 된 거죠. 도취가 되니까 지금 뭘 잊어버렸어요? 자기가 지금 구루마를 끄는 직업이라든가 다 잊어버렸죠. 그렇게 등신같이 살아라 이 말이죠. 

  

주님 생각하니까, 내가 지금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여기에 목숨 걸고 승부 걸었던 내가, 이제는 그것이 그다지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 중요한 문제도 아닌 것을 본인이 알게 된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고 다른 말로 하면 자유입니다. 자유.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직장 갖지 말까요? 손님이오든 말든. 막걸리 장사를 해도 자기 입맛에 맞는 막걸리 장사. 초밥장사를 해도 전혀 맛도 없는 초밥. 그래서 백종원 셰프한테 걸려서 욕 되게 얻어먹었죠. 대전에서 장사하는 청년들. 음식에 대해서 기초도 안 되어 있어요. 이래 가지고 손님을 맞을 거냐고 추궁을 하죠. 

  

주님을 생각할 때에, 그럼 내 생각 안 하고 직장이고 식당이고 파장하고 다 말아먹느냐? 제가 그런 질문을 할까봐 우연이라고 했습니다. 우연. 우연과 필연의 관계거든요. 이걸 쓰다보니까 몇 달 전에 한 것 같은데요. 우연을 필연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게 되면 인간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젖먹이 아이가 돼요. 

  

젖먹이 아이라는 말은 자기가 장사를 하던 직장을 가든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인줄 아는 겁니다. 사람이 필연적으로 열심히 한다고 하는 것은 되게 훌륭해 보이지만, 그 열심히 할 때는 반드시 의도가 있고 목적이 있어요. 누굴 위해서 열심히 하고 애씁니까? 그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하겠죠.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다는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살았던 것 하고는 전혀 이게 같지가 않아요. 주님은 그런 식으로 안 살았거든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면 아이고 착실하다, 니 앞가림 잘하는구나, 니 할 일 잘하는구나, 애기 잘 키우면 아이고 훌륭한 엄마구나, 이렇게 하겠죠. 그러나 그것마저 주님이 보시기에는 이게 의도 아니고 선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기를 위해서가 있거든요. 자기를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주님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피조물인 나를 위해서 피조물이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죠. 누가 같은 옆집 아줌마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당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 있습니까?”라고 하면 이거는 대번에 화냅니다. “니가 뭔데? 이거는 미친 거 아냐? 니가 뭔데 내가 당신을 위해서야?” 그러니까 이 세상은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이 순간부터 이거는 누구한테 피해를 주는가 하면은, 모든 가치와 의미를 자기 쪽으로 돌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남들한테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가해자로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위주니까. 우선순위가 나잖아요. 우선순위가. 심지어 제가 그것을 새치기 하는 것을 처음 봤어요. 

  

화장터에서 오는 순서대로 들어가잖아요. 보람상조 차들이 많아요. 그럼 거기서 화장하러 들어가잖아요. 그걸 새치기한다니까요. 여덟 번째로 왔는데 두 번째로 들어가요. 두 번째로. 꺼낼 때도, 재를 수습해서 꺼내잖아요. 새치기해서 나중에 온 것을 먼저 끄집어내줘요. 그걸 다른 유족들이 알았으면 어떻겠어요? 피해를 입히는 겁니다. 니 해골만 해골이고 우리 해골은 해골이 아니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기타리스트 김도균이가 아주 의미 있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이가 60가까이가 됐는데, 당신은 왜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합니까? 라고 질문하니까, 기타가 질투를 한다고 했어요. 기타가 질투를 합니다. 내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내가 그동안 쭉 사랑해왔던 기타가 질투를 한다는 거예요. 자기는 기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기타를 사랑하는 것을 어떤 여자에게도 쪼끔이라도 빼앗길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결혼을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기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러죠. 아직도 니가 여자를 못 만나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요. 딱딱한 기타를 사랑해서 뭐할 건데. 그러나 그 사람은 변명하는 거예요. 자기 소유가 될 만한, 자기를 위해서, 평소에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잖아요. 이제 여자 구하는 것도 나, 김도균 나를 위해서 전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 다 좋아해주고, 나를 우선순위로 생각해주고, 내가 맛있어하는 것 같이 맛있어 해주고, 내가 하는 취미를 같이 해줄 수 있는 그런 여자를 찾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다른 여자들한테 얼마나 큰 피해를 줍니까? 나는 나 위주를 포기하고 누가 오든 그 여자 위주로 살겠다고 하면 왜 결혼을 못합니까? 근데 자기는 안방에 양반다리하고 쫙 버티고 있으면서, 꿈쩍도 안 하고 있으면서 나를 위해서 같이 동조할 여자를 찾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가지고 누가 욕할 수 있어요? 없어요? 욕하지 못해요. “김도균씨 그러면 결혼 못합니다. 우리를 보세요. 서로를 위하여, 나를 비워주기로 약속하고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베드로전서 2장 1절에 궤휼이고 외식이고 위선이에요. 위선. 어느 인간이 남을 위해서 자기를 내줘요. 미쳤어요? 어디 구라를 떨어요? 그건 구라입니다. 그래서 김도균 그 사람은 구라를 못 떨어서 그래요. 여자한테. 자기를 위해서 하지만 좀 입을 다물어야 돼요. 일단 챙길 것은 챙기고 보자. 이래 나와야 결혼합니다. 그래서 그걸 알고 사도바울이 결혼하지 말라고 했죠. 모든 결혼은 위선이에요. 아닌 척 하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자기를 위해서 모아놓은 그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자기 자리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자, 그다음 진도를 나가봅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뭐가 내려온다? 순전하고 신령한, 이 땅에는 없다는 뜻이에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 온다 했죠. 그러면 그 젖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요? 뭐 포도당이 들어있습니까? 그 안에 바로 죽음이 들어있습니다. 죽음이 들어있다고요. 주님의 구원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구원한다고 하면 안 믿을 사람이 없어요. 공짠데요. 공짜로 이걸 받으라고 하면 왜 안 받겠어요. 

  

옆에 이사 왔다고 떡을 준다고 할 때, 그 떡 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아니, 주는 떡 받지요. 뭐. 심지어 이런 괴기영화가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만, 이웃집 누가 와서 딩동! 눌러가지고, “웬일이십니까? 못 보던 사람인데요.” “방금 이웃집으로 이사 왔습니다.” “그래요?” “떡 가져왔습니다.” 떡을 이렇게 주는 거예요. 아이고, 웬 떡이냐, 하고 있는데 그 떡 위에다가 피를 토해놓는다고요. 오늘밤 꿈에 나오겠는데요. 너무 끔찍한 일이죠. 

  

언제 우리가 하나님보고 피를 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찢겨진 살과 피를 달라고 언제 우리가 요청했습니까? 우리는 복달라고 요청했지 언제 피 달라고 요청했습니까? 한 적이 없거든요.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해요. 하나님께.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 우리는 계속해서 누굴 위해서 살겠다? 나는 나를 위해서 살겠다는 그 고집이 포기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럼 주님께서 구원을 하려면 뭘 해야 돼요? 나는 나를 위해서 살겠다를 완전히 도려내고 거덜 낼 요소가 그 신령한 젖 안에 포함이 되어야 되겠죠. 엄마 젖이 아니에요. 엄마 젖은 그 안에 피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죠. 신령한 젖은 이 땅에 없다고 했잖아요. 이 땅에서는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 살고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마다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하고 살아가는데, 거기서의 구출, 구원이거든요. 거기서 건져내는 거예요. 

  

건져낸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거기서 살면 니 죽어! 그런 뜻이라 이 말이죠. 너는 너 모르지? 너가 있는 세상은 너를 죽이는 세상이야! 지금 넓은 길로 가고 있잖아! 너를 도중에 낚아채지 않으면 너는 끝장이라는 그 이야기를 지금 계속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병고치고 예수님이 귀신 쫓아내실 때 누가 마다하겠어요. 예수님께서 풍랑 이는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의 손을 잡을 때, 베드로가 놓으소! 앙탈부리면서 손을 제쳤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했습니까? 주여! 구원해달라고 했잖아요. 구원. 

  

그럼 베드로가 구원해달라는 의미가 뭡니까? 나는 지금 퐁당 빠져갑니다. 어디에? 이 물에 빠져갑니다. 주님이 보이니까, 주여 나를 건져주소서!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자기 형편이 어떤 형편이다? 지금 빠져간다는 거예요. 지금 죽어간다는 거예요. 만약에 주님께서 이 세상을 지옥이라고 규정을 했다면, 그걸 우리가 인정하고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직장이 나를 빠트리고, 가정이 나를 빠트리고, 교회가 나를 빠트리고, 어디를 해도 그야말로 깊은 물이 되어서 발 디딜 곳이 없어요. 내가 터 잡을 적정한 내 자리가 이 땅에서는 없어요. 가정에서는 가정이 문제, 교회에 가도 교회가 문제, 직장을 가도 직장이 문제, 사업을 해도 사업이 문제, 모든 것이 전부다 마치 늪처럼 푹푹 빠져요. 단단하게 나를 받칠 수 있는 안정된 자리가 없어요. 이 땅에는. 그것은 이 세상이 나를 위해서 흘러가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흔히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부모가 자식들을 낳았는데 그 자식들 직업이 꼭 대립된 직업을 가진 거예요. 소금장수하고 우산장수하고 있는데, 그것도 먼데 사는 것이 아니고 한 동네에 살아요. 비 오면 우산장수가 잘 돼서 “형님! 나 열 개 팔았다.” 이러고 있는데, 이쪽은 소금 다 버렸죠. 축축하게 다 녹아서. 만약에 메르스가 번진다. 그리고 조류독감이 퍼진다. 날씨가 덥다. 

  

날씨가 더우면 누가 신나느냐 하면은 어름공장 공장장이 신났습니다. 그야말로 두 달간 풀가동했습니다. 돈벌이 잘 되는 거예요. 노량진 수산시장에 어물전에 어름이 모자라서 실어 나르고 뿌려도 금방 녹아버리고. 어름공장은 영하 10도에서 땀 뻘뻘 흘려가면서 일했다 이 말이죠. 만약에 어름공장 아들과 한쪽은 노량진 생선장수라면, 엄마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됩니까? 어디에 감사해야 될지. 감사헌금 따로 해야 돼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좋아라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미 우리는 우리 이름이 여기서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젖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우리의 죽음이 들어있어요. 우리의 죽음이.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18-09-20 01:34 

서울의존강의20180914b 베드로전서2장 1-5절(사랑의 메아리)-이 근호 목사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보게 되고 교회 성도들을 만나보게 되면 제가 제일 아쉬운 것이 뭐냐 하면 자기 행동을 자기가 조절하려고해요. 자기가 자기 관리를 하려고 하는데, 제가 안타까운 것은 어떤 일이 벌어졌으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나를 질책하려고 일어난 일이 아니에요. 나를 나무라려고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무랄 것 같으면 아예 십자가지지도 안 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좋아라고 해서 일으킨 일이에요. 이게.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 지금 좋아하고 기뻐한다고 생각은 안 하고, 자기가 꿀꿀하고 자기가 우울하다는 거예요. 뭐 어쩌라고? 니 기분을 거기다가 왜 집어넣느냐 이 말이죠. 기분을. 사람들의 욕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인데 나도 같이 좋아져야 하고 나도 흡족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안 돼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하나님 앞에 기쁘신 일이에요. 그러나 베드로 입장에서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연중에 지금 사탄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안 좋으니까 주님도 안 좋다고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할 일 같으면 같이 좋아들 하세요. 같이. 같이 좋아들 하란 말이죠. 기뻐하란 말이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3절에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되어 있죠. 성도한테만 해당되는 소리입니다. 성도가 아니면 이런 소리도 안 해요. 

  

성도한테 해당되는 것이 뭐냐 하면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겁니다. 뭐가? 이 모양 이 꼴 전부가 아주 주님의 너그러우심, 인자하심, 다른 말로 사랑이죠. 늘 큰 사랑으로 너를 지금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사랑은 주님께서 흐뭇해하시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불만족스러우면 도대체 우리가 누구편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기쁘신 일을 실행했습니다. 기쁘신 일을 실행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신령한 젖, 신령한 젖이라는 것은 성령, 성령이 우리에게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죠. 

  

그러면 성령이 내 인생을 어떻게 몰아넣던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일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같이 기뻐하면 된다 이 말이죠. 우리 인생에 대해서. 내 인생에 대해서. 주식 했는데 다 꼴아 박고, 땅 사놨는데 땅 값 내려가고, 그래도 그게 주님의 자비하심이라면 어쩔 건데요? 내가 열심히 응원한 프로팀이 지고 또 져서 9패라면? 

  

프로야구에 NC팀이 있는데 줄곧 꼴찌를 했어요. 얼마 전에 꼴찌를 면했다고요. NC팀이 만약에 가을야구를 하게 되면 신한은행인가 농협인가 이자율이 높아요. 롯데가 5위 안에 들게 되면 부산은행의 이자율이 높아집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롯데 자이언트 팀 성적이 좋으면 그거만 좋은 것이 아니고 나도 은행이자를 더 받게 되어서 좋은 거예요. 

  

세상에서는 내가 납득이 되는 기분 좋음을 찾고자 하는 겁니다. 왜? 나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젖을 준 것은 우리 좋으라고 준 게 아니고 주님의 자기 기쁜 일이라니까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 기쁜 일이 아니에요. 나 구원받았다, 기쁘다, 좋아하지 마세요. 주님 좋은 일이에요. 주님 좋은 일. 그렇다고 슬퍼할 일은 아니지만. 과연 우리가 날 구원하신 주님의 그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는지를 한번 돌아보라 이 말이죠. 그렇지 않죠. 그 정도로 우리의 육은 여전히 살아있고 애굽적입니다. 

  

그걸 사도베드로는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3절에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이래 되어 있어요. 이미 과거죠. “벌써 맛 봤잖아!” 주의 인자하심을. 그럼 우리는 억지로 “예. 좋대요.” 뭐 이렇게 퉁명스럽게 하죠. 좋지도 않으면서 주님이 좋겠다고 하면 좋겠죠. 뭐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죠. 전혀 안 기뻐요. 

  

그게 제가 답답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 철저화를 추구해요. 철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자기가 철저하고 깨끗하게 살았다 싶으면 막 지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야, 내가 그 정도까지 그렇게 헌신적이고 신앙적이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줄을 나도 생각 못했어.” 이러다가 무슨 일이 벌어져서, 갑자기 약간 자기가 보기에 부끄러운 일을 한 것 같으면, 이거는 완전히 또 머리 싸매고 아스피린 하나 먹어야 될 심정해가지고 골치 아프다고 어찌 내가 그런 일을... 자기 일에 울고 자기 일에 웃고 그런 거예요. 인간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주님 보기에는 원맨쇼에요. 주님보시기에는 지금 웃기지도 않아요. 여러분, 음악이 없는데 혼자 춤춰보세요. 저게 미쳤나 하죠. 왜? 공감이 안 되니까. 음악소리를 듣고 춤과 함께 연관이 되어야 보는 사람이 즐거운데, 음악은 없는데 지 혼자 팔을 흔들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좀비가? 뭐야? 이러겠죠. 주님의 인자하심 속에서 우리가 움직일 때에 그게 앞뒤가 맞는 겁니다. 아, 주님의 인자하심에 푹 젖어서 그게 좋아서, 자기 인생에 대해서 그렇게 만족스럽게 살아가는구나! 사도베드로는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어째서 인자하심인가, 그 이유가 나옵니다. 4절에,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이래 되어 있죠. 하나님께 택했다는 것 이전에 뭐가 나옵니까? 사람에게는 뭐가 되었습니까? 버림받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의 인자하심을 제대로 느끼려면 너도 사람이 버렸다. 주위에서 나를 인간취급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 거기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말라는 거예요. “나가! 너 같은 사람은 우리 집안사람 아니야.”라고 내쫓으면 안 된다는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거예요. 

  

인자하심을 받았으면 까짓것 좀 버림받았으면 어떻습니까? 주님 앞에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인데. 사람이 나를, 내 형제나 가족이, 자식이 나를 기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람에게 버림받았어도 주께 인정받고 기뻐하심을 입었다면, 하나님의 기쁘신 일에 들어갔다면 우리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성공작이 아니에요? 개의할 필요가 없어요. 너무 눈치를 봐요. 너무 눈치를 본다고요. 

  

그 다음 4절에 중요한 내용인데, 오늘 이거 강의하다가 끝날 수도 있어요. 뭐냐 하면

사람에게 버림받았는데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택함이라는 말은
여럿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택했다는 말이 아니고,
반드시 버림받은 자리가 성립이 될 때에만 택함이 인식이 되게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택함의 특징이라는 것이죠.
사람에게 버림받을 때, 그러면 사람에게 버림받으려면 누가 누구를 버려야 돼요?
사람 중에 누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나도 사람이 되죠.
 

그러면 내가 나를 쥐어야 돼요? 버려야 돼요? 나도 사람입니다. 

지금 문제 쉽게 내는 거예요. 나도 사람이에요.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이 말이죠. 사람에게 버림받았거든요. 

그럼 주님은 나한테 버림받을 분이에요? 내가 채택할 분이에요? 

마땅히 나에게도 버림받아야 되겠죠. 

그런데 그 버림받은 분이 그 자비하심으로, 기쁘신 뜻대로, 구원방식으로 우리를 건진다고 찾아왔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내가 나를 쥐어야 돼요? 버려야 돼요? 참 문제가 어렵죠. 

내가 나를 버려야 됩니까? 쥐고 있어야 됩니까? 

둘 중의 하나인데. 아낌없이 나를 포기해야죠. 

왜냐하면 내가 나를 포기 안 하면 내가 예수를 선택한 것이 된다니까요. 

선택의 반대말은 버림이라는 말이죠. 내가 나를 버려줘야, 

내가 나를 버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안 버리고 택했다가 성립이 된다 이 말입니다. 

뭐 자기를 버린 적이 있어야지요. 아침에 눈만 뜨면 나를 포기 안 하잖아요. 

오늘도 파이팅! 이거잖아요. 싸워서 뭐 할 건데요. 오늘도 파이팅! 자기 독려, 자기 격려, 자기 부추김. 

  

주님은 자기 성도를, 그런 성도의 자세를 주님께서는 촉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환경은 어떤 환경이냐 재촉하는 환경이에요. 니가 너에 대해서 신경 끄라고 재촉하는 환경이에요. 주어진 모든 환경이. 우리는 어떤 환경이 주어지게 되면 더욱더 그 환경이 무서워서 자기에게 밀착을 해버려요.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일찍 죽었다고 합시다. 늙어도 마찬가지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하면, 장례 치르고 주로 어디에 가느냐 하면 해외여행이나 바닷가에 가요. 드라마에 보면 그런 게 있잖아요. 뼛가루 상자에 담아가지고 호수나 바닷가에 가서 “잘가라! 이 무심한 놈아!” 하면서 날리잖아요. 하얀 소복을 입고 여자가 뿌리죠. 자기 자식이든 남편이든 뿌린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연민입니다. 때려죽여도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는 것이 아까운 자기 과거 기억이거든요. 좋았던 기억들이라는 겁니다. 좋았던 기억들을 아름다운 장소에 가서 뿌림으로 말미암아 좋은 추억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오는 모든 드라마나 모든 노래나 모든 음악이나 예술들이 전부다 자기연민과 관련되어 있어요. 산장의 여인 보세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누가 널 찾아가는가 봐라. 택배기사나 찾아가지. 외로운 이 산장에~~♬ 인생 내가 홀로 끝내겠다는 겁니다. 외로운 이 산장에 못 찾아오도록 인생 내가 끝내겠다는 거예요. 

  

그게 지금 뭡니까? 마지막 붙잡을 것은 누구밖에 없다? 나밖에 없다. 내가 기댈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누굴 기댄다는 것,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누굴 기댄다는 것조차도 이거는 건방지고 악독이고 궤휼이고 외식이고 모든 비방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돼요. 세상은 왜 나를 버리느냐? 버릴만해서 버렸지. 세상이 니를 찾을 필요가 없잖아요. 사람은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이 무조건 세상은 자기가 자기를 위한 것처럼 위해야 한다는 거예요. 참, 자기 자신을 포기를 못합니다. 안 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젖으로 오신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자기를 포기를 못하면 예수도 자기를 위한 예수가 돼요. 자기를 위한 예수가 되면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은, 나 여기 있고 예수님 여기에 있는데, “예수님 사랑합니다.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꾸 그런 소리를 해가면서 자기가 예수를 붙드는 거예요. 붙드니까, 붙드는 이 당사자 나는 죽어야 돼요? 살아야 돼요? 잘 붙들어야 되고 단단하게 붙들어야 되기 때문에 자기한테 계속 힘을 주는 거예요. “정신 차려라! 이놈아!” 이러거든요. 

  

치매 걸려서도 그런 소리해보세요. 왜 내가 정신 차려야 합니까? 차라리 정신 좀 놔야 해요. 정신 차리라 하지 말고 내 정신줄을 놔야 합니다. 한번 놔보세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아름답고 더우면 더운 대로 아름답고...,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욕심이. 노림수가 있어서 그래요. 부부싸움을 왜 합니까? 둘 다 등신 같으면 부부싸움 안 합니다. 둘 중의 하나가 똑똑하든지, 둘 다 똑똑해서 부부싸움 해요. 둘 다 똑똑해서. 

  

그냥 사는 대로 살아도 주님보시기에 기뻐하심이 이를 데가 없어요. 우리는 등신 같이 살아도 그걸 보시는 주님의 기쁨은 변함이 없습니다. 변동이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꾸 자기의 변신을 시도하려고 하지 마세요. 또 이상한 데 가서 턱 깎고 이러지 말고. 자기가 손댄다고 해서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제발 자기를 괴롭히지 마세요. 안 그래도 괴로운데 본인마저 자기를 괴롭혀요. 자책하고 닦달내고 이래 살아야 하느냐 하고. 

  

그렇게 안 살면 별 수가 있겠어요? 인간은 태어난 그게 다인데.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마귀가 양심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거예요. 양심을 노리고. “어찌 니가 이런 짓을 하다니!” 자꾸 양심을 가지고 파고들어온다고요. 양심을 가지고.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해요. 이 개떡 같은 양심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고요.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런 양심을 줬다고. 내 것인가요? 주님 것이지. 그 이야기를 못하고 자꾸 나와 엮입니까? 그러면 안 돼요. 그렇게 인생을 사는데, 그러면 힘들어서 괴로워요. 

  

오늘 나온 본문 말씀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린애 같으면요. 이런 말이 어렵지 않고 순하게 우리 속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어른이니까, 다시 말해서 내 나름대로의 나를 지킬 수 있는 어떤 터전이 있다고, 내 돌아갈 자리가 있다고 우기니까 “내가 어린애가? 젖을 먹게?” 이런 식으로 되지도 못하면서 나는 지금 어른이라 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보배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겼어요. 보통 맡길 때에, 내가 넘어갈 테니까 니가 받아주라고 하잖아요. 자기가 믿을만한 사람이 있다면, 나 너한테 다 맡긴다고 팔 쭉 피고 그냥 쓰러지잖아요. 그러다 상대가 피하면 다칩니다. 시멘트에. 우리 자신을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고, 말 그대로 믿으세요. 인자하심을 믿고, 이렇게 농땡이 부려도 인자하심이라고 믿고 그냥 자기를 포기하면서 살자 이 말입니다. 

  

그걸 제가 어느 설교에서 했죠. 제발 여러분 자신을 낭비하라고 했죠. 낭비하라고. 낭비한다는 말은 어떤 뜻을 갖고 있느냐 하면은 너무 계산하지 말고 살아가자 이 말입니다. NC는 5강에 들어가야 하고 롯데자이언트도 꼭 그래야 되고, 그런 것들. 에비앙 골프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꼭 우승을 해야 되고. 이런 것까지 다 신경써가면서. 장미희는 안 아파야 되고. 드라마 걱정까지 다 해야 되요. 드라마 걱정까지. 우리나라 남자들이 장미희 때문에 <같이 살래요> 드라마를 봤답니다. 온갖 걱정을 다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생각을 제발 하지 말라는 것. 내가 이 땅에서 세상 살았고 예수님 자신도 세상에서 살았잖아요. 세상사는 방법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거예요. 그게 주님의 선택입니다. 간단해요. 그런데 그 버릴 때 나도 나를 필히 버리세요. 나에 대해서 그다지 기대하지 마세요. 빨간불인데 스톱하고 파란불인데 건너가잖아요. 건너가고 난 뒤에 기뻐하세요. 내가 이런 것도 지킬 줄 아나? 깜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깜짝 놀랄 정도로 모든 걸 자기한테 기대하지 말아야 돼요. 너무 기대하니까 자기 자신이 자기한테 마음이 안 드는 거예요. 그건 내가 나를 학대하는 거죠. 내가 이 정도는 돼야지. 뭐 그 정도 해서 구원받습니까? 구원방식은 주께서 알아서 하는데, 왜 이 정도 해야 구원받는다고요? 이 정도 해야 사람 구실한다고요? 원래 사람이었어요? 아니었어요.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모든 인간 속에 귀신 들었습니다. 귀신은 변신의 귀재에요. 귀신을 보고 싶어요? 길에 가서 보세요. 모양새도 각가지에요. 뚱뚱한 아줌마, 빼빼 마른 아줌마, 모든 귀신들이 다 다양해요. 전부다 귀신이 들어있어요. 귀신이. 악마의 졸개가 들어있다고요. 전부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요. 자기한테 집착하고, 땅에서 성공하려고 하고, 위에서 오는 것은 관심도 없어요. 

  

자기 터 평생 살아서 이만한 자리 하나 마련했다고 그걸 자랑질 하면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럼 그거만 자랑합니까? 또 그걸 잃을까봐, 깨질까봐, 주식 한 100주 샀는데 그거 또 내려 갈까봐, 펀드 넣었는데 브라질 펀드라 다 날아 갈까봐, 아파트 대출받아 샀는데 또 아파트 규제해서 안 팔릴까봐 걱정이고, 팔리면 팔린다고 걱정이고 안 팔리면 안 팔린다고 걱정이고. 걱정 안 할 구석이 없어요. 뭐든지 걱정이에요. 뭐든지. 차타면 차 말릴까봐 걱정이고. 

  

그래서 4절 끝에 봅시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자, 사도베드로가 이렇게 순순하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뭘 전제로 하느냐 하면 제발 너를 잊어라 이 말입니다. 제발. 원맨쇼하지 말고. 원맨쇼 하던 안 하든 마찬가지에요. 하는 것은 좋은데, 원맨쇼 하는 그것도 잊어버려라.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저분은 내 사람이다! 저분은 나를 구원하잖아!” 그렇게만 이해하면 되는 거예요. “니가 어떻게 아느냐?” “아니까 알지.” “어떻게?” “몰라. 우연이야.” 그게 바로 신령한 사람이 살아가는 굉장히 가벼운 인생입니다. 

  

모든 것이 필연이 아닙니다. 필연이 되게 되면 기다리게 돼요. ‘내가 이만큼 투자를 했으니까, 이만큼 성의를 표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뭔가 좋은 일을 주겠지.’ 자꾸 기다리면 사람이 피곤해진다니까요. 주께서 성도에게 기다리는 것은 안 주고, 안 기다리는 것은 주세요. 여러분 살다보면 그런 경험이 없던가요? 예상하지도 안했는데 먼저 좋은 소식이 오는 거예요. 예상하지도 안했는데. 그리고 예상한 좋은 소식은 계속해서 안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성도와 밀당 하는 겁니다. 밀고 땡기고 밀고 땡기고 하는 거예요. 너 자신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이렇게 끊어버리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악마를 보냅니다. 마귀를 보내요. 실컷 시달리게 만듭니다. 혼자 도 닦고, 혼자 성질내고, 내가 이 정도로 좋은 사람인데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인데 하고 혼자 했다가 혼자 우사당하고 그런 겁니다. 그만큼 원맨쇼 하는 거예요. 원맨쇼. 

  

자, 그 다음 5절을 봅시다.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자, 산돌, 살아있는 돌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관심사는 너희에게는 없고 우리 주님께만 있다. 그러니까 구원방식을 아는 사람들이여, 예수님은 저에게 이렇게 하셨어요. 이렇게 구원하셨습니다. 그것만 기쁘게 관심 두고 살면 인생 살만합니다. 

  

어차피 뭐 떠나겠다는데요. 방랑자 아닙니까? 방랑자여~~방랑자여~~♬ 어차피 돌아다니는 방랑자거든요. 이 땅에 머물 곳이 없어요. 나그네잖아요. 사람이 집착을 하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왜 화가 나는가? 뭔가 집착한 게 있고, 지키려고 애쓴 게 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겁니다. 그 화가 화병이 되고 나중에 그걸 복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자, 4절을 봅시다.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나아와, 어딘가 나올 때는 내 모습이 안 보여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앞에 나갈 때는 그 사람만 보이는 거예요. 그 사람만. 애가 이쁘잖아요. 그러면 애가 이쁜 것만 보이는 거예요. 내 모습이 어떤지, 내 옷에 단추가 풀렸는지 관심이 없어요. 저쪽만 관심이 있어요. 

  

주님께 나온다는 말은 신령한 젖이, 성령이 그렇게 이끄는 거예요. 존재의 무게를 계속 줄여나가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어? 없어? 있는지 없는지도 못 느끼게 만드는 거예요. 언제든지 가볍게 살 수 있는데 자꾸 남하고 비교한다고요. 귀신들린 것하고 비교해서 뭐할 건데요? 귀신들린 것하고. 니 귀신인데 머리띠하고, 나도 귀신이다. 둘 다 미친 것들끼리 붙어가지고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자, 5절에 보면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머릿돌이 되는 그 집뿐입니다. 그것을 성전이라고 하죠. 자, 예수님이 머릿돌이 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예수님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타인에게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미안하다고 사과할 필요가 없어요. 타인에게.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을 키우지 않았으니까. 어떤 상대에 대해서 은근히 기대한 것이 있다고요. “니 나중에 착하고 훌륭하게 살아라.” 이렇게 기대한 것이 있잖아요. 

  

착하고 훌륭하게 살라고 기대한 것이 있는데, 그러면 착하고 훌륭하게 살라고 기대는 했지만, 애가 밤에 잠을 잘 때 산소호흡기 꽂아서 산소공급하고 이랬습니까? 산소호흡을 누가 주십니까? 호흡은 코에 있나니, 호흡을 누가 주십니까? 주님이 주셨죠. 그러면 누가 키웠어요? 주님이 그만큼 키웠잖아요. 이만큼 키웠고 저만큼 키웠다 이 말이죠. 그럼 내 사람이 아니잖아요. 내가 키웠어요? 그럼 내가 그 사람한테 사과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말이 어려워서 이해 못하겠습니까? 

  

내가 남한테 사과할 필요가 없고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잠자는데 꿈까지 관리한 적이 없어요. 상당히 냉정하죠. 상당히 냉정한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남한테 사과할 때 그건 결코 사과가 아닙니다. 나 이만큼 우수한 존재라는 것을 지금 과시하고 있는 거예요. 사과하는 계기를 통해서. 인간이 자기의 가치를 포기하고 사과할 리가 없어요.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를 한다면 사과도 할 필요가 없어요. 미안해할 것도 없어요. 길에 가다가 서로 부딪혔다면 주의 뜻이네! 주께서 그렇게 키우시네! 

  

아니, 남편을 내가 키웠습니까? 아내를 내가 키웠어요? 자식을 내가 키웁니까? 나를 통해서 자식을 낳았지만 자식을 내가 키웠어요? 애를 키우면서 한번 보세요. 애들이 하는 동작 하나하나가 주님께서 시킨 거예요. 막 움직이는 거 있잖아요. 주께서 시킨 거예요. 주께서 시킨 거 그게 보기 좋으니까, 엄마가 방금 그 동작 다시 해보라고 하니까 애가 또 인위적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나 모든 움직임, 머리 쓰는 것, 모든 발걸음을 누가 키우는가 하면 주님이 직접 키웁니다. 주님이 직접 키워요. 이것만은 우리도 우리한테 해당이 되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나를 누가 키운다고요? 주님이 키우잖아요. 왜 주님한테 사과를 합니까? 우리가. 우리가 뭐 우리한테 행한 게 뭐가 있다고. 내 인생을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하죠? 가만 보니 화나네. 

  

왜 내가 괜찮은 인생이 돼야 됩니까? 지금 죽으면 왜 안 되는데요? 내가 지금껏 살아오는 데에 기여한 것이 뭐가 있다고 나는 왜 꼭 내일까지 살아야 하고 모레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뭡니까? 뭐 주의 종이라고요? 니 아니면 종이 없어요? 뭐 복음 전한다고요? 니 아니면 복음 전하는 사람이 없어요? 집이 아무리 크고 벽돌이 아무리 있더라도 하나님의 관심은 신령한 돌에 있습니다. 그 돌의 영향력이, 효과가 성전 전체 구석구석 다 스며들어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참 이건 과학이나 철학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못해요. 그들은 몰라요. 자, 그럼 과학철학이야기를 해봅시다. 과학과 철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여기에 있고 누가 또 여기에 있는데, 서로가 한맘이 되려면 여기에 공감이 되는 사항이 있어야 된다. 공통점이 있어야 된다. 그 공통점을 할 때는 뭐로 하느냐, 수단이 언어나 말이나 글로 이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언어나 말이나 글로 공감을 일으키게 되면, 둘은 친구사이가 되고 하나가 되어 친하게 지내서 하나가 있을 때보다 둘이 있을 때의 효과가 여러 가지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철학이나 과학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근데 철학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런데 냉철하게 이야기를 해서 인간과 인간에게서는 이게 끊어져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도 저 사람 심정에서 내가 이해를 못해요. 왜?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요. 부부사이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둘이 한 마음이 될 수가 없고,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거예요. 그러면 왜 부부가 됐는가? 서로가 많이 양보를 했거든요. 왜 양보했는가, 착각을 해서 그래요. 뭔가 착각한 거예요. 나중에 들어보면 착각인줄 아는데. 서로 양보했다고 하는데, 그 양보 한만큼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양보해줬으니까 너도 나만큼 해줘야지 라고 하는, 그런 효율성, 경제원리가 거기에 작용하고 있다고요. 

  

인간은 자기에 대한 관심사를 절대로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한 사람이 죽었은즉 다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 한 사람이 아프면 다 아프겠네요? 그래! 이러거든요. 우리가 이걸 논리로 따져서 믿을 내용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다, 그것도 못 믿겠고. 예수님의 피가 용서를 한다, 그것도 못 믿는 마당에. 

  

아담 하나가 범죄 함으로 우리가 다 같이 죄를 지었다는 이게 믿어집니까? 아담은 아담이고 우리는 우리잖아요. 우리가 언제 아담을 구경이나 했습니까? 아담을 본적이 있습니까? 아담이 같이 있어도 아담은 아담 동네에 있고 나는 내 동네에 있다고요. 접촉할 수 있는 여건이 아무것도 없어요. 몸은 유기체 세포 자체가 다 따로따로 독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게 같이 될 수가 없어요. 

  

마음을 하나로 하자! 그거는 그냥 희망사항이죠. 손에 손잡고 어깨동무할 때는 하나가 된 거 같죠. 나중에 하나는 전라도고 하나는 경상도면 서로 싸우고 삐지고 난리난다고요. 어떻게 인간이 순수하게 니와 나가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까? 없어요.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가 되고 안 되고는 니가 판단을 못하고, 이미 아담이 죽음으로서 니는 이미 죽은 자고, 아담이 범죄 함으로써 이미 너희들은 아담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 범죄 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느냐 하면 이 이야기를 알아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죄 사함을 얻는 것의 논리가 성립이 돼요. 성립이 됩니다.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하나가 안 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 안에 들어오지를 못해요. 우리가 여기에 있고 예수님이 여기에 있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에게 다가옵니까? 예수님이 어디에 있다고, 어디 대구에 살아요? 아무리 옆에 붙어있었던 제자들도 예수님하고 남남이었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예수님 속에 들어갑니까? 이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성경을 보시면서. 그냥 믿은 거예요? 그냥 믿는다고 했습니까? 우리 쪽에서 예수님에게 다가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쪽에 다가설 수 있어요.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님에게로 올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 쪽에서 뭘 준비했느냐 하면은 우리가 예수님 쪽으로 다가설 수 있는 여건을 예수님 쪽에서 준비를 하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언약구조, 언약체계입니다. 


언약체계의 특징은 언약을 미리 깔아놓아요. 미리.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 자리에다가 미리 깔아놓아요. 여기에 이름이 쭉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기 이 이름은 내 이름이죠. 내 이름이기 때문에 남의 이름이 안 되죠. 그 사람은 그 사람 이름이 따로 있고 내 이름은 내 이름대로 따로 있으니까 안 되잖아요. 그럼 이 바탕을, 모든 이름의 바탕을 자기들 이름 말고 주의 이름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됩니까? 

  

주의 이름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되느냐, 내 이름 안에는 뭐냐 내 행함이 내 이름의 내용을 형성해요. 내 행함이. 내 이름으로 했던 그것이 내 이름 안에 이렇게 모아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름으로 행했던 것은 어디에 모아지겠어요? 주의 이름이 적용되는 곳에는 주의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것에 적용이 되겠죠. 여기에 방해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내 이름이 방해가 되는 거예요. 내 이름이. 

  

그러면 주님이 하신 방식은 뭐냐 하면, 내 이름을 제거해야 되겠죠. 제거하는 방식이 내 이름으로 살던 것을 죽음으로 보는 겁니다. 죽음이 뭘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죠.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 다음에 뭐냐 마귀와 더불어 있는 거예요. 

  

쉽게 합시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살았어요? 죽었어요? 지옥에서 죽으면 안 되죠. 살아있어서 고통을 받아야 될 게 아닙니까? 그죠. 그러면 지옥에 있는 사람이 살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고통 속에, 저주 안에 있죠. 그러면 언약에서 뭘 얻느냐 하면은 언약이라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실시됩니다. 주의 이름에서 한쪽은 축복이 주어지고 한쪽은 저주가 주어집니다. 축복이 주어지고 저주가 주어져요. 언약 안에서. 

  

그러면 저주가 살아있어요? 인간이 살아있어요? 지옥에서. 저주가 살아있는 상태가 그게 지옥이에요. 지옥에서 사람은 안 죽어요. 안 죽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거예요. 죽으면 차라리 편하죠. 누구 맘대로 죽어요? 요한복음 5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죽은 자를 다 살려내는데, 선한 자는 의인의 부활로 악한 자는 악인의 부활체로 살려줘요. 살려줘서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지옥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내가 살아있다고 하면 안 돼요. 사실은 그것을 여러분들과 내 맘대로 약속을 하고 싶은데, 내가 여기에 살아있다고 하지 말고 내 안에 축복이 살아있다고 하든지, 안 그러면 불신자 같으면 내 안에 저주가 살아있다고 해서, 살아있다는 주체를 내 안에 두지 말고. 주님이 집어넣어준 자비가 살아있다고 하든지, 자비의그릇이니까. 아까 자비했잖아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3절), 자비가 살아있는 것을 내 살아있는 것으로 대신하자 이 말입니다. 

  

이게 지금 오늘 본문 내용이 그거거든요. 본문 내용이 주님한테 관심이 있어요. 지금 모든 말씀이 우리한테는 관심이 없어요. 내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권투를 잘하고 돈을 버는가, 아무 관심이 없어요. 니 안에 지금 자비가 살아있는지 아니면 저주가 살아있는지를 보자 이 말입니다. 예수 안 믿는데 검사고 총각이다.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대단한 신랑감이라고 하죠. 신랑감 한번 쪼개보자 이 말입니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그 사람이라는 신랑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신랑이라는 껍질에다가 그 안에 뭐가 살아있습니까? 저주가 살아있는 거예요. 

  

저보고 과도하게 이야기한다고 하지 마세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3장 끝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5-36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살아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왜 그렇게 마귀한테 시달렸느냐 하면 자꾸 내가 잘 살아야 된다. 내가 착한 일 많이 하고 내가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자꾸 살아있는 주체를 내 이름에다가 혼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은 거예요. “우리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다. 야! 똑바로 해! 당신도 똑바로 하고!” 

  

자꾸 개개인을 똑바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하려고 하는데, 주께서는 우리 이름을 안 봐요. 우리 가정이 주의 이름으로 성전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에 뭐가 살아있어요? 예수님의 자비를 맛보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의 돌로 성전을 지으면 뭐가 살아있겠어요?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있는 거예요. 

  

여러분 큰 강당에 갔을 때 애들이 놀이삼아서 하잖아요. 강당에 들어갈 때 우연히 친구가 입구에서 말을 하니까 강당에서 막 울리잖아요. 막 울린다 이 말이죠. 재밌거든요. 애들이 어릴 때 강당 한복판에 서가지고 오오오~~~ 이렇게 타잔 흉내를 내잖아요. 그러면 막 왕왕왕~~~ 울리죠. 타잔 흉내 바깥에서 해봐야 재미없어요. 오오오~ 하면 그냥 끝이에요. 근데 큰 강당에 가서 하면 울리잖아요. 그러면 우리 성도가 사는 목적과 기쁨이 어디에 있어요? 사랑과 자비가 와우~~ 자비비비비~~~ 사랑랑랑랑~~~ 그거 울리는 재미로 살아가잖아요. 

  

왜 자기한테 관심을 둡니까? 그거 마귀의 꼬임에 빠진 거예요. 평생을 마귀한테 시달리려면 그렇게 사세요. 평생을. 교회 갔더니만 목사가 “똑바로 하란 말이야! 말씀이 폼으로 있는 줄 알아? 지키란 말이야! 모든 악독과 궤휼과 위선이다. 이제부터 예수 믿었으니까 그런 것 하지 말아야지.” 니나 하지 마! 우리는 어느 집에 들어왔어요. 왕왕왕~~~ 울리는 집에 들어왔다고요. 그 집이 뭐냐, 예수님을 보라고 있는 집이에요. 예수님의 자비의 출처가 어디고, 사랑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 예수님을 보라고 있는 거예요. 

  

그 예수님은 자비를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와 함께 같은 공간에 있어요. 내가 살아있으면 안 돼요. 내 안에 자비가 살아있고 용서가 살아있도록, “나 죄인인데 용서받았어.” 주님의 구원방식을 그냥 아는 대로 이야기하면 돼요. “나 이런 인간인데 주께서 오셔서 날 구원했어.” 그것도 못합니까? 

  

남편이 있다가 “살림하는 꼬라지하고는, 이것도 밥이가?”라고 할 때, 듣고 있다가 “그런 나를 주께서 구원하셨어.” 왕왕왕왕왕~~~ 내 자존심을 위해서, 내 명예를 위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남들이 나한테 요구하는 거예요. 저 귀신같은 것들의 요구를 왜 들어줍니까? 귀신들의 좀비 요구를 우리가 왜 들어줘요? 주님이 뭐라고 보는가가 중요하다니까요. 

  

자, 5절에 보세요. 그 이야기가 5절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 신령한 젖이죠. 신령한 젖을 받은 우리가 뭘 한다? 신령한 제사인데 어디가야 제사를 드릴 수 있어요? 왕왕~~ 울리는 곳에 들어가야 돼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야 그 제사가 돼요. 

  

성전이 없는데 바깥에서 제사를 드리면 안 됩니다. 그 안에 들어가서 우리의 사랑이 울리는데, 그 사랑이 울리는 조건이 뭡니까?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포기한다. 내 행동에 대해서 관심 뚝! 남한테 사과하지 않는다. 남한테 책임지지 않는다. 아까 이야기했는데 궁금해서 묻습니다. 책임지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남편, 아내, 자식들을 책임지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안 키웠잖아요. 

  

내가 안 키웠단 말이죠. 도와줬을 뿐이지, 밥 달라고 하면 밥 줬을 뿐이지, 내가 키우지는 않았어요. 키우는 것은 주님께서 키우신 거예요. 왜? 주님의 피조물이니까. 주님이 노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밥도 안 주고 놀까요? 라고 하지만, 주께서 나를 부추겨서 밥 해주라고 주께서 나를 촉구하겠죠. 아까 했잖아요. 우리의 환경은 어떤 환경이다? 촉구하는 환경. 

  

그러면 계속 밥해주면 착한 겁니까? 밥해주는 동시에 내가 너한테 밥을 해줬으니까 너는 내 말 들어야 돼! 라고, 또 내 위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버림받았다는 이유를, 4절의 말씀이죠.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4절의 말씀을 계속 우리에게 되새기면서 우리가 어느 자리에 놓여있는가를 반복해서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말씀이. 

  

자, 오늘 말씀을 이렇게 정리하면 사실상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은데, 인생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가 뭐냐 하면 주님이 기뻐하는데 내가 따로 내가 기뻐할 것을 찾아서 그게 사단이 나는 거예요. 그냥 이대로도 기쁜데, 주께서 기뻐해서 구원했는데, 내가 기뻐해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고 그 가운데 뚫고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기대가 크면 실망이 커요. 나한테 너무 기대를 하지 마세요. 나한테 실망이 너무 크게 되면, 주께서 나를 기쁘게 보는데 내가 나를 너무 슬프게 봐서 자살할 수가 있어요. 자기 학대를 할 수가 있다고요. 여러분들 얼굴을 보니까 다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왜? 전부 살쪘으니까. 배짱 편하게 사시네요. 

  

끝으로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것은, 우리를 받는 것이 아니에요. 니가 지금 누구하고 함께 있는가, 우리의 솜씨를 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아는, 신령한 젖, 예수님이 속에 들어온 그 모습 그대로 주께서는 받으시는 겁니다. 5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너 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뭐로 말미암아 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누구 앞에 나갈 때는, 그리스도 앞에 갈 때는 자기를 잊으세요. “아이고, 나는 너무 초라해서. 나는 죄만 짓고. 나는 나쁜 짓만 하고.” 이러지 마세요. 그냥 나가세요. 그냥 예수님에게 나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최고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차피 죄인이에요. 

  

주께서는 죄를 용서했잖아요. 우리는 환자 아닙니까? 환자가 환자다워야지. 오늘 제목은 ‘사랑의 메아리’입니다. 꼭 유행가 가사 같은데. 그러니까 이 환자를 내가 손대면 안 돼요. 왜? 못 고치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못 고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내가 스스로 손 댈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돼요. 

  

왜? 마귀의 속임수한테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동안 마귀가 얼마나 닦달 냈겠습니까? 손대라고. 니 인생 책임지라고.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그 일로 나 안 돌아갈 거야! 정말 그 세계로 안 돌아갈 거야! 그냥 순전한 어린애같이 젖이나 먹고 사세요. 그냥 주시는 젖이나 먹고, 예수님의 피나 먹고, 그거만 감사하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몇 십 년 믿어도 무슨 소용이 있고, 성경을 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 가지고 또 자기 인생 책임지려고 하고, 남한테 사과하려고 하고, 자기 우수함을 드러내려고 하고, 언제까지 마귀한테 시달릴 겁니까? 주여, 신령한 어린애같이 되게 해주시고, 그저 주께서 키워주시는 대로 그 기쁘심을 담뿍 담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서울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언자 181109 이근호  (0) 2018.11.13
버림받은 분 181012 이근호  (0) 2018.10.19
헛 수고 180810 이근호  (0) 2018.08.13
인생재편 180714 이근호  (0) 2018.07.25
필연 180608 이근호  (0) 2018.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