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버림받은 분 1810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0. 19. 08:05

2018-10-13 00:52:27 조회 : 216         

버림받은 분 181012 이름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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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 18-10-18 23:07 

서울의존강의20181012a 베드로전서2장 6-9절(버림받은 분)-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6-9 


6절,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절,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 


자, 시작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6절에 보면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죠. 구약에 나오는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라는 이 말씀, 이런 말씀 같은 경우는 이사야 28장 16절이라든지, 시편 118편 2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보게 되면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혼선을 일으키는 요소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모퉁이 돌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면 시온에 두었다고 되어있거든요. 시온 같은 것은 지정된 장소죠. 특정 공간입니다. 지정된 장소, 특정 공간은 이게 사람이 안 찾아가도 거기에 있겠죠. 찾아가도 거기에 있겠고 안 찾아가도 거기에 있겠고 늘 그 자리에 있겠죠. 움직이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다. 이 ‘있다’가 늘 성립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시온이라는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아는 장소입니다. 시온, 예루살렘 성전의 남쪽을 시온, 또는 같은 장소라고 보면 돼요. 좁은 거니까. 


그쪽이 시온인데, 그쪽에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었다고 했을 때에 그것과 여기 5절에 보면 “너희로 산돌같이....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런데 예수님은 돌이 아니죠. 사람이죠. 사람인데, 산돌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시온에 두었다고 하면, 지금 시온이 예루살렘이니까, 그럼 예루살렘에 가면 늘 예수님을 만나네요. 예수님이 거기서 뭐 환전소하십니까? 늘 거기서 만나네요. 시온에 두었다는 말이 왜 어려운 말이냐 하면은 다른 곳에는 예수님이 있다, 없다? 안 계시다로 이해될 수밖에 없어요. 


시온에 돌을 두었는데, 딱 시온이다 이 말이죠. 텔아비브는 안 된다 이 말이죠. 뉴욕은 안 되고, 보스턴도 안 되고, 서울도 안 되고, 부산도 안 되고. 딱 시온에 두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있음이에요. 있음. 인간이 사람하고 이야기를 할 때, 거기에 있다, 없다는 것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늘 그 자리에. 그럼 찾아가면 만나겠죠. 이게 인간 대 인간의 관계잖아요. 내가 어디에 니 시계를 두었다고 하면, 거기 찾아가면 내 시계가 있을 거라 이 말이죠. 


근데 성경 구약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은 산돌인데 예루살렘에 두었다고 하면, 그러면 예수님은 거기에 늘 계시네요? 그렇죠. 그렇게 되겠죠. 구약을 자구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자구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지중해에 안 계시고 유럽에 안 계시고 시온에 있다 이 말이 됩니다. 그럼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은 어떻게 생기고 또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자, 해석을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가 찾아가면 마치 만날 것처럼 하는데, 해답적으로, 근원적으로 보게 되면 뭐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 길이에요. 예수님이 길이거든요. 길인데 어떤 길이냐 하면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이에요. 


예수님은 길은 길인데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가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가셨구나가 아니라 예수님 빼놓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갈 수가 없다. 결국 우리한테는 그 길은 없는 길이에요. 천국과 이 세상을 통하는 길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 그 길을 갔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그 길을 갈 수 없는 길이거든요. 근데 시온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하니까 뭐 만나서 “예수님이 길이시네요.” 이러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신약성경에서 전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예수님이 길이다. 아무도 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 다녀감으로서 무엇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도 하늘나라에 길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서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구원받고 싶은 사람 다 소원이죠. 천국가고 싶어요. 그런데 뭐 길이 있어야죠. 없는데 뭐. 아예 하늘나라에 통하는 그쪽이 없어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기대를 갖게 되죠. 이래 한번 뚫어볼까, 이래 하면 해볼까, 이렇게 하는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예수님 혼자만 갔어요. 


왜냐하면 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됐잖아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분이 유일한 길이라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예수님이 길이라면 어떤 사람도 길은 있다, 없다? 없지요. 길이라고 하는 사람을 밀어버렸으니까. 


길이라고 한 것을 밀어버렸으니까 예수님이 건축자의 버림받은 돌이 되죠. 버림받았다는 말은 누가 버렸다는 말입니까? 인간 쪽에서 버린 거죠. “에이, 쓸데없어.” 인간 쪽에서 버린 그 돌이 하나님의 시온의 돌이고,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면, 이미 인간 쪽에서는 그 길에 대해서 취할 태도는 다 취해버린 거예요. 


“나는 그 길을 인정하지 못하겠어.”하고 버렸잖아요. 그럼 인간은 예수님을 버림으로서 인간은 천국 가는 길이 있다, 없다? 천국 못 가죠. 못 가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천국 갈 수 없다를, 7절에 보면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천국 갈 길이 없음을 믿는 자가 보배 같다는 거예요. 천국 못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자가 믿는 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반대로 “그래도 천국 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건 믿지 않는 자에요. 


뭘 믿으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 버림받은 분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시온의 돌이라는 것을,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이 말은 인간은 천국 못 간다는 존재라는 것을 수긍한 자만이 진정한 믿는 자가 되는 겁니다. 진정한 믿는 자가 돼요. 그러면 믿음이 믿음대로 계속 유지되려면 무슨 원칙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갈 수 없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길이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 천국의 길이라는 것은 아예 주어진 적이 없고,  그건 없음을 확신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이런 확신이 있어줘야,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하면 우리에게 버림받은 분이라는 인식을 믿는 자만이 알게 돼요. 믿는 자만이.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친절을 베풀다가 내가 화가 나서 그 사람을 밀었다. 그 사람이 넘어졌다. 넘어져 삐져서 밖에 나갔다. 그러면 그 사람이 밖에 쭉 나가서 있는데, 어떤 사람이 물어요. “저 사람 어떤 사람이고?” “나한테 버림받은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그 사람에게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 “몰라.” 모르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죠.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 이거하고, “예수님이 누구지? 인간에게 버림받은 사람.” 이거하고는 완전히 하늘과 땅 차이죠.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있잖아요. 사건.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그 사건, 그 사건에 유의미, 의미가 있음을,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된다 이 말이죠.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강의 시간에 왜 그렇게 그걸 강조하느냐 하면은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버림받은 분으로 나오죠. 그러면 여기 예수님이 있고 여기에 우리가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버림받게 했을 때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버렸다는 말이 돼요. 예수님이 우리를 버린 거예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에 의해서 버림받은 겁니다. 


마치 이 세상이 내 세상이라고 여기니까, 내 세상에서 추방시키니까 추방된 사람이 버림받은 사람처럼 여겨지지만 만약에 반대로 예수님의 세계가 진리의 세계라면 우리는 뭡니까? 진리의 세계를 언급해도 우리는 그걸 매몰차게 안 받는다고 하고 내쫓아버리는 것이 되죠. 그러면 누가 누구한테 버림받은 거예요. 천국에서 우리 인간 세계가 버림받은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믿는 자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다시 보는 사람이 믿는 자에요. “아, 우리가 철딱서니 없이 까불다가 주님한테 버림받았구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렇게 알게 되면 예수님이 중요하겠어요? 내가 중요하겠어요? 예수님이 더 중요하죠. 바로 그런 자가 신자가 되는 거예요. 


맨날 찔찔 짜면서 예수님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우리 인생이 왜 이리 꼬입니까? 이러면 그건 예수님의 입장이 아니에요. 내 입장에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생각했던 거예요.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찡찡거리고 짜증내고 하는 그 자체가 뭐냐 버림받아도 합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얼마나 내가 나만 생각했기에,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칠칠맞겠느냐, 주님 생각 안 하고 자기생각만 하니까, 저런 인간은 천국에 안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 라는 예수님의 생각을 우리가 공유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변명이나 지 잘난 체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예수님 입장이라면. 예수님을 버리게 된 속성인데 뭘 잘난 체를 하겠어요. 잘난 체 안 하겠죠.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버릴 때에, 인생 조져놨을 때에 우리가 불평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동의하겠습니까? 나 같은 인간은 주님을 버릴 정도로 그렇게 질 낮은 인간이라면, 주님이 내 인생 내 뜻대로 안 해주고 완전히 엉망을 만들 때 우리는 거기에 동의하겠습니까? 아니면 불평을 하겠습니까? 동의하죠. 동의하잖아? 그지. 그게 성도의 삶이잖아요. 그게 감사한 거잖아요. 


누가 나를 알 수 있겠어요? 주님 아니면 내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신앙생활하면서, 신앙생활이고 뭐고 인생 살면서 어떤 불평이나, 불평보다 더 무서운 것이 불안이거든요. 불평은 뭐 좀 손해 봤다고 불평하는 거지만, 이 불안은 넉넉해도 불안하거든요. 불안이 더 무서운 거거든요. 너무 넉넉해도. 인도네시아 해변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인도네시아 해변가에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따뜻한 경치가 있더라도 늘 불안하죠. 거기다가 과학자들이 틀려가지고, 이거는 대수롭지 않다고 하다가 이천 명이 죽어버렸잖아요. 피하지도 안했어요. 


인간의 과학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 들통이 났어요. 인간의 과학도 믿을 것이 못 됐어요. 과학자 당신은 왜 예측 못했는가? 라고 하니까, 그렇게 급작스럽게 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렇게 말했어요. 과학은 옛날에 했던 것을 되풀이 했다는 그 조건하에 예측하는데, 땅이 올라와서 해일이 나는 경우는 있었지만 땅이 푹 꺼져서 해일이 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학자 책임이 아니죠. 처음이라는데 어떻게 해요? 처음이라는데. 초범인데 봐줍시다. 초범이잖아요. 초범인데 이천 명이 죽었어요. 과학자 말 듣다가 피신하지도 못하고. 대수롭지 않다는데 뭐. 


근데 문제는 우리의 매일의 삶이 초범이라는 겁니다. 10월 10, 11, 12, 13... 매일의 삶이 초범이라는 거예요. 이게 처음이라는 겁니다. 매일 매일이 처음이에요. 어제했던 것 오늘 못 써먹습니다. 며칠 전에 했던 것 어제 못 써먹고. 지금까지 한 것을 간추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아예 내치고 버린다 할지라도, 우리 뜻대로 안 되고 엉망이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쪽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을 내친 전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 우리 뜻대로 안 해준다고 해서 우리 입이 당나귀처럼 나올 수 있는 어떤 권한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려준 것만도 고맙게 여기세요. 이게 신앙의 기본이잖아요. 뭐 했다고 살아왔습니까? 뭐 잘났다고 살아왔습니까? 뭐 살만큼 잘한 짓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근데 버리신 분이 우리를 매일같이 살려내고 있으니까, 여기서는 우리의 착함이라든지 우리의 애씀과 주님에 대한 충성이 내가 사는 것하고는 상관없음을 우리가 파악해야 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한테 잘 보이려고 애를 쓴 그 대가로, 그 열심과 그 공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그것을 우리는 받아줘야 해요. 애가 뛰어놀고 예쁘게 잘 크는 것은 그만큼 주께 충성했기 때문에 준 보상이 아닙니다.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전혀 상관없습니다. 혹시 애가 감기 걸렸을 때, “하나님! 왜 저를 버리십니까?” 이러지 마세요. 그럴 때 지금까지 건강하게 해주고 살게 해 준 것 그것은 안 버린 것이 되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인생 어떻게 살든지 간에 우리 인생의 총합은 예수님을 버리는 쪽으로 결론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어떤 인생을 살든, 험하게 살든, 착하게 살든, 편안하게 살든 간에, 어떤 인생이든 모아놓으면 그것은 그 자리에는 예수님이 필히 추방될 수밖에 없는 원칙이 그 안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백인들 식구가 한 여섯 명이 되는데 흑인 하나가 거기에 입양되었다. 1살 때 입양되었는데 나이가 14세, 15세, 16세.. 쭉 자라잖아요. 같은 형제자매간에 그만큼 16년, 17년이 흘렀으니까, 근데 피부색이 까만 것이 하얗게 됩니까? 그렇지 않죠. 


그러면 같은 형제인데, 왜 아빠엄마가 백인인데 흑인이 있어? 라고 어떤 이웃이 물으면, 다시 과거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거든요. 입양했다는 과거. 근데 우리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항상 주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문제 삼는 거예요. 니 출발지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줄곧 살아왔는데, 그 살아온 것은 니가 노력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고, 버려진 분 예수님이 도리어 너희들을 계속 살려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왜 자기를 버린 분이 살려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그 성전은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이 버림받았다는 그 원칙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은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했다는 그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보좌는 어린양의 보좌라고 해요. 어린양하면 어감이 어떻습니까? 어린양 하면 희생물, 죄 때문에 희생되었던 그 제물이 어린양이에요. 예수님의 별명이 뭐냐, 어린양이에요. 


그러면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나는 사람에게 당했다는 그러한 흔적과 그런 근거가 예수님 안에 계속 지니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고요. 그를 찌른 자.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도마가 예수님한테 “당신이 예수님 맞습니까?” 라고 할 때에, “스승님 맞습니까?” 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보여준 것이 뭐예요? “자, 인물 봐라!” 뭐 이랬습니까? 


어디를 봤습니까?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 창자국을 보여줬잖아요. 창자국, 못자국을 보여준 거예요. 그 창자국. 못자국이 어디에 나있는 겁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던 그 부활체에 나있는 거죠. 그 부활체에.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찾아왔으니까. 부활체에 뭐가 있다? 창자국이 그대로 있고 못자국이 그대로 있다는 것은 뭘 뜻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는 인간에게 버림받았다는 요소를 절대로 삭제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믿는 사람은 뭐냐 하면 “저는 개입니다.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라는 생각이 계속 쭉 영원토록 이어질 때,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그 천국을 지금 살아있을 때, 죽기 전에 이 세상에 있을 때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교회에서나, 시장통로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늘 그게 살아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 가정을 살려내신 분이 사실은 우리 죄 때문에 우리에게 싫어버린 바 되신 분이 살리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콩 내놔라 팥 내놔라 하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그러면 그 가정은 천국이 되는 겁니다. 뭐, 온 식구 교회 나와서 고마워라 임마누엘~~ 등록한다고 해서 그 가정이 천국가정이 아닙니다. 


아이가 성적표를 들고 와서 “엄마 나 수학시험 쳤는데 빵점 맞았어.” “빵점 맞은 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돌아가셨단다.” 엄마하고 딸하고의 대화가 이렇게 된다면, 주변에 있는 낯선 사람들이 희한한 가정이라고 할 거예요. 애가 공부 안 했으면 나무라든지 해야 되는데, 뭐 공부 안 했다고 하니까 “공부 안 했다고 해서 섭섭하지만 공부 안 한 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었어. 니가 공부 잘 했으면 얼마나 교만하겠느냐? 주께서 낮추고 낮춰 이제는 빵점까지 낮추고, 마이너스까지 내려가지 않고 빵점까지 낮춰서 니 마음을 교만하지 않게 하신 것을 주께 감사드려라.”라고, 이렇게 진정성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어요. 물론 신앙 티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겠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죠. 


자, 진도 나가 봅시다. 지금까지 한 것 여러분들이 아시겠죠. 예수님이 버림받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버리고 그냥 우리끼리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없는 곳에 사는 거예요. 예수님 없는 곳이 뭡니까? 지옥이잖아요. 우리가 아예 지옥을 좋아해요. 우리는 천국을 싫어합니다. 나 때문에 누가 희생되었다는 그것이 우리의 약점인양 그렇게 여기고 있어요. 나 같이 완벽한 사람한테 어떤 사람이 내 다리 내놔라 하면 좋겠습니까? 전설의 고향처럼. 내 다리 내놔라 하면 안 좋잖아요. 


내 약점을 쥐고 있는 분이 우리 집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나한테는 큰 부담이 되잖아요. 왜? 나의 완벽함과 잘남을 누가 자꾸 질책하면 죽이고 싶을 거예요. 어떤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전혀 남자의 과거를 모르고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결혼을 했다면, 왕진진하고 낸시랭인가, 만약에 그 대단한 사람하고 사는 친구 분이 “야, 니 잘난 체 하지 마! 니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내가 알고 있다.”라고 한다면, 입 막기 위해서 봉투 좀 줘야 되죠. “쉿! 가만히 있어. 다른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존재로 알고 있어. 하지 마! 니 다시 발설하면 흙에 파묻히는 수가 있어.” 이렇게 협박할 수도 있겠죠. 


내 약점이 남한테 노출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천국은 반대에요. “영원히 약점을 가진 사람이 되어라. 니가 끽소리 못하도록. 세상이 너를 칭찬한다 할지라도 너는 세상 앞에서 부끄러운 죄인인 것을 오히려 감사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라.” “주님은 제가 버렸습니다. 내 인생, 내 설계, 내가 주인공이 된 세상을 설계하여서 주님은 아무 짝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믿었습니다.”하는 그런 식의, “내가 예수를 밀쳐내고 버렸습니다.”하는 자가, 이게 신자가 되는 거예요. 희한하죠. 이게 신자에요. 


그걸 흔한 보편적인 공식에 의하면 “내가 천국 가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이게 우리가 흔히 아는 공식이 그 공식입니다. 내가 천국 가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을 내가 쫓아냈다가 되겠죠. 자, 그러면 이걸 제가 이야기하면서 그로 인하여 우리가 예수님 없는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우리의 본성이 들통 났고 그렇다면 오히려 주님이 우리를 버리심이 되는데, 우리를 주님이 버릴 때 뭘 버림을 당했는가, 그 이야기를 해봅시다. 


좀 더 진도를 나가서 우리가 주님 앞에 버림받을 때 어떤 것을 버림받았는가? 우리의 약간의 자존심, 명예, 뭐 그런 것을 버림받은 거예요? 뭐 어떤 것을 버림받았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다 버림받았어요. 시간과 공간을 처음에 강의할 때 했죠. 시온에 산돌이 있다고. 이런 인식, 이런 개념, 있다고 하는 것은 공간적으로 어떤 특정 지점에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이런 인식 자체가 버려져야 될 인식이에요. 


우리가 아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에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흘러가는 것,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지점에 거기 있는 것. 거기에 있고 시간이 흘러간다는 이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걸 파악하는 조건으로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고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특정시간이나 특정 공간으로 주님께서 이야기를 하시되, 우리가 아는 그 뜻이 그 뜻이 아니라면 바로 우리는 주님 앞에 버림받은 거예요. 


주님께서 이야기한 그 말씀, 이사야나 시편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될 때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몽땅 다 버림받은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 그러면 예를 들어서 2003년도에, 15년 전이죠. 


2003년 7월 4일에 그 자리에서 어떤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나에게 친한 친구라고 할 때에, 우리가 버림받으면 뭐도 버림받은 거예요? 2003년 7월 4일에 친구 만났다는 이 기억도, 이거는 버림받아야 마땅한 추억에 불과한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엮인 시간과 공간은 다 버림받은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이 말씀을 딱 하실 때에, 예를 들면 여기 7절에 보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이거는 시편 118편 22절에 나온 말씀인데, 그 말씀을 딱 봤다고 합시다. 자 이 말씀을 보고, 여기가 만약에 신학교라면, 교수가 있다면, 제가 만약에 교수라면, “여러분 가운데서, 학생들 가운데서, 또는 전도사님들 가운데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손들어보세요.”라고 이렇게 하게 되면 사람들은 피식 웃을 수도 있어요. 


근데 고지식한 전도사가 “교수님!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그래, 전도사님이 한번 이야기해보세요.” “건축자들이 건축하는데 돌이 안 맞는다고 해서, 건축 짓는데 돌이 필요 없다고 해서 그 돌을 버렸습니다. 버렸는데 그 돌이 옆에 있는 신축건물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교수가 “하나님께서 건축업자를 위한 계시를 주셨네요? 건축업자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말씀이 건축업자, 이런 업자가 있다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계시를 주셨습니까?”라고 물으면, 전도사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 그러네요.”라고 하겠죠. 


왜? 방금 설명한 것이 그거잖아요. 건축자가 집 짓다가 돌이 이건 안 맞는 거예요. 안 맞으니까 쓸데없다고 버렸잖아요. 쓸데없는 그 돌을 다른 업자가 건축할 때 모퉁이 돌로 세웠다. 그래서? 끝. 그래서 뭐? 그게 무슨 뜻인데?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농부인데 씨를 뿌렸다. 그래서 뭐? 이게 우리가 아는 시간과 공간이잖아요. 농사가 씨 뿌리는 거잖아요. 씨 안 뿌리는데 무슨 농사가 됩니까? 씨 뿌리는데 돌밭에 뿌려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런데 옥토에 뿌렸는데 열매 맺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 빤한 이야기.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나쁜 고기 좋은 고기를 그물로 잡아가지고 상품가치가 있는 좋은 고기는 그물로 잡고 나머지기는 다시 바다에 버렸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게 무슨 뜻이냐 이 말이죠. 뜻을 모른다니까요. 왜? 버림받은 자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버림받았고, 우리가 버렸고,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를 버린 입장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버린 입장에서는 예수님이야기, 하나님이야기가 버림받은 우리는 알아듣지를 못해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요. 사도행전 때 했는데, 사도행전에서 제가 핵심으로 내세운 것이 뭐냐 하면 사도들의 설교입니다. 사도들의 설교가 뭐였습니까? 그때 참석하셨으니까 기억이 납니까? 사도들의 설교의 요지가 뭐였습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죠.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있다. 살아났다는 말은 보통 어떻게 이해합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살아계시잖아요. 그분 어디계십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굉장히 간단해요. 


예수님이 살아계시죠. 근데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 예수님이 살아 있잖아요. 예수님이 살아있든지 내가 살아있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해요. 예수님이 살아있으면 우리는 뭐다? 우리는 죽었고. 우리가 살아있으면 예수님은 죽은 분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한쪽이 한쪽을 죽였기 때문에 둘 다 살아있다는 개념 안에 둘 다 써먹을 수는 없어요. 


예수님이 살아있으면 예수님이 사는 방식으로 우리는 안 살아있고, 우리가 사는 방식 같으면 예수님이 안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사도의 설교는 바로 예수님이 살아있는 그 층, 새 공간과 인간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현실공간과 이렇게 층이 몇 개다? 두 개다 이 말입니다. 층이 두 개에요. 하나는 영이고 하나는 육이에요. 영에서 육은 갈 수가 없어요. 아까 했잖아요. 땅에서 하늘로 가는 길은 없다고. 십자가가 완전히 끊어놔 버렸어요. 


교회가 소용이 없어요. 교회 30년, 40년, 50년 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배당 짓고 하는 것 아무 소용없어요. 목동에 유명한 교회 많이 있데요. 제자들 교회도 있고. 소용없습니다. 괜히 해본 짓이에요. 괜히 해본 거예요. 그게. 예배당 지어놓고 거기 출석하면 천당 가는 것처럼. 그렇게 느끼고 싶어서 해보는 거예요. 여기 신월동 사거리도 교회들 있잖아요. 행복한 교회도 있고. 바로 옆에도 중부교회도 있고. 소용없어요. 요가학원하고 같다고 보면 돼요. 요가학원하고. 건물 지어놓고 여러분들 유익이 되도록 가르치는 거예요. “여러분 이거 원하잖아요. 이거 채워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길이 없는데 뭐. 길이 없어서 못 가요. 길이 있으면 여기로 가시면 된다고 하면 되는데, 아예 길이 없다니까요. 아니 예수님이 길이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그거는 예수님이야기잖아요. 그거는 예수님이야기죠. 예수님이야기의 특징은 우리는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 거예요. 못 알아들으면 이거는 거짓으로 진리를 위장할 길밖에 없죠. 거짓인데 마치 알아들은 냥, 행세하는 그 사기밖에 내놓을 게 없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래도 목사님 천국 간 사람이 있잖아요? 있죠. 있는데, 간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어떤 식으로든 내 식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었다는 것을 믿는 거예요. 예수님을 붙들면 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붙드는 쪽이 아니고 버리는 쪽이잖아요. 붙드는 쪽이 아니라 버리는 쪽이다 이 말이죠. 


저는 화투를 잘 모르는데요, 피사리는 별로 안 좋다고 합니다. 화투치는 사람의 견해에 의하면. 광이에요. 1월광, 3월광, 8월광, 비광, 똥광, 뭐 광이 좋다 이 말이죠. 그럼 화투를 쥐고 있다 이 말이죠. 광이 들어오면 신나죠. 광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광을 뽑기 위해서는 뭐 하나를 내보내야 하잖아요. 예수님을 뽑아서 내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가짜 예수는 채용하고, “야, 이거 광땡이네!” 진짜 예수는 피사리로 여길 수밖에 없는 속성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잘하면 되지! 이게 안 돼요. 예수 믿고 잘하는 것은 뭐냐 하면 가짜 예수만 자꾸 손에 모으는 것이 되는 거예요. 교회 충성하고, 목사 섬기고, 선교회비 내고, 청소하고, 십일조 꼬박 내고, 애들 선도해서 하나님 믿으라고 하고, 사도신경 다 외우고. 이게 다 가짜들입니다. 길이 없다는 데 참. 길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이 살아있는 순간 우리는 죽은 거예요. 죽은 놈은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죽은 자가 몸부림쳐봐야 죽은 것 외에는 나올 것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요. 죽은 인간이 몸부림친다고 삽니까?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 쪽에서는 죽었는데 왜 살려냅니까? 이 말이에요. 나는 백날 해봐야 죽은 것밖엔 없는데 왜 주님께서 이런 나를 살려내십니까? 하는 거예요. 이런 나를 왜 살려내십니까? 베드로전서에서 구약의 이사야하고 시편을 계속 집어넣는다고요. 그러나 백날 집어넣고 백날해도 이사야, 시편본문 그대로 보게 되면 아무 의미가 나올 수가 없어요. 8절 봅시다.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이거 뭐 어디 군화신어야 되겠네요. 자칫하면 발톱 나가겠어요. 그러면 돌 없는 곳으로 피해가면 되죠. 


하나님께서 니 가는 길에 이만한 바위를, 거친 바위를 니 앞에 딱 꽂아 놨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이게 포크 레인 운전하는 사람들은 생각할 거예요. ‘내가 지난 어제 작업하는데 어디 큰 돌이 있다고 했는데, 아, 그 돌이야기구나.’ 이렇게 하지만, 포크 레인 운전하는 사람이 아니고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제 병원 한 가운데서 이만한 돌을 만납니까? 주님께서 언제 돌을 했습니까? 반석들을 언제 깔아놨습니까? 그렇다면 간호사가 ‘아, 이게 진짜 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생 꼬이는 그걸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남자친구하고 헤어진 이걸 반석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지가 또 지 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지가 지 맘대로. 


여기에 돌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에요. 십자가인데 십자가의 특징은 뭐냐,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십자가를 준 게 아니에요. 한번 봅시다.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에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부적이 아닙니다. 부적은 갖다가 붙이면 돼요. 여긴 교회니까 부적붙이면 안 되고, 부적을 붙였다 치고, 이상한 붉은 글자 있잖아요. 내가 가면 붉은 글자가 나와서 내 목덜미를 잡습니까? 그렇지 않죠. 부적을 붙여놔도 나는 안 다치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으면 우리는 늘 안 다칩니까? 부적 같은 십자가는 안 다치잖아요. 십자가 믿으면 되니까. 부적은 붙이면 되니까. 나는 멀쩡하게 있잖아요. 


근데 진짜 예수님이 찾아온 십자가는 내 인생 자체가, 예수님을 나한테 쓸데없는 거친 돌로 볼 수밖에 없는, 원리원칙이 통하는 인생으로서 자기 인생을 파악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난 낮 설교했죠. 자기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죠. 근데 어떤 인간도 자기가 썩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슨 썩은 존재가 이렇게 이뻐!”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고소영이 썩었어요? 유명한 탤런트가 썩었습니까? 한지민이 썩었어요? 썩어도 뭐 그렇게 이쁘게 썩었나? 소지섭이 썩었어요. 뭐 그렇게 키 큰 것도 썩은 것이 있나? 송재원이라는 유명한 일본순회공연 하고 온, 썩었나요? 


어떤 인간도 자기가 썩었다는 생각을 안 해보죠. 썩었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제 요양병원에 들어갈 때, 내가 약간 썩었나? 이제는 맛이 갔지. 맛이 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치매가 아닙니다. 이미 치매 걸리면 맛이 간 것도 몰라요. 지금 우리의 상태가 그런 상태에요. 악마에 휩쓸려서 이미 정신이 갔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이 완전히 엉망진창인데도  나름대로의 자기 자신을 좋게 보는, 악마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지금 우리 상태가 그 정도로 썩었습니다. 썩은 것은 주께서 안 받습니다. 천국에서 받지를 않아요. 


그런데 평생 살아온 것이 뭐냐 하면 썩을 수밖에 없는 것에 충성하면서 살아왔어요. 이걸 자기 헌신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 헌신 말고 뭐가 있어요. 자기 자존심과 자기 명예와 자기 이름에 헌신하는 것. 하루하루 하는 것이 전부 다 내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아주 희생적인 자기 헌신을 하고 있잖아요. 자식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자기 헌신이다 이 말이죠. 자기 헌신의 결과가 뭐라고 했습니까? 썩었다. 


그러면 안 썩으려면 뭘 포기해야 합니까? 자기 헌신을 포기해야 하잖아요.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나는 누구를 위하라는 말인가? 대책 없죠. 주님을 위해서라고? 나를 놔두고? 미쳤어요? 주님한테 헌신해도 결국은 그 수익은, 이득은 누구한테 돌아와야 해요? 나한테 돌아오는 조건 같으면 내가 주님을 섬길게. 이게 우리 인간이 타고난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썩음을 향하여 질주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어떤 데에도 영생은 없습니다. 그러면 영생이 있는 자의 특징은 뭐냐, 지가 썩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썩은 인간을 통해서 영을 끄집어내는 솜씨가 주님 솜씨라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주님을 버렸는데 천국 간다. 이게 누구 솜씨냐 하면 내 솜씨가 아니고 주님의 솜씨에요. 이걸 베드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 이걸 믿는 자가 천국 간다.”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제가 방금 빨리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앞뒤를 아시겠습니까? 썩었다고 하는 데에서는 솜씨가 나올 수가 없고, 썩은 자가 천당 가는 것은 주님의 솜씨죠. 주님의 솜씨를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가 구원받는 것은 니 솜씨가 아니고, 이사야나 시편의 말씀을 주님께서 니한테 적용시킨 그 결과가 뭐냐, 버림받았지만 오히려 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솜씨로 니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그것을 믿는 자가 된다는 것이 곧 성도다 이 말입니다. 그게 주님의 일방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주님의 솜씨거든요. 


그래서 나의 일은 없고 주님의 일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죽었기 때문에. 사도의 설교가 뭐냐 하면 주께서 죽었다가 살아났죠. 죽을 때에 주님이 자살했습니까? 아니죠. 온 인류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살았다 했을 때는 자동적으로 모든 인류는 이미 죽은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내가 실시하는 것이 아니고, 믿는다는 것은 결과적 생산물이에요. 믿는다는 게. 이 결과적 생산물을 두자로 하면 은사, 다른 말로 하면 이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는 겁니다. 선물에 대해서 우리가 더 보태고 빼고 할 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선물은 선물 값을 고스란히 그대로 노출시켜야 되는 겁니다. 그게 가장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백퍼센트 선물이에요. 


우리 인생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 인생이 과거에 동창생을 만나고 하는 그런 게 있었잖아요. 그런 것들은 다 주님 살아있음으로 해서 한꺼번에 밀물에 쓸려 내려가요. 아무 의미 없어요. 과거에 잘난 것, 과거에 에베레스트 산 등반한 것, 거기 왜 올라갑니까? 산소도 희박한데. 산소 많은데 놔두고 왜 올라가는지 모르겠어요. 산이 있기에 간다고요? 산이 있어서 간다면 바다는 왜 안 뛰어 들어가요? 바다도 있는데 바다에 뛰어 들어가지. 뭐든지 있으면 다 기어들어갈 것이 아닙니까? 연못이 있으매 연못에 빠집니다.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물귀신 되는 것. 


무슨 핑계될 것이 없어가지고 그런 핑계를 대요. 자기 살아있다는 것을 존재증명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는 겁니다. 왜 그리 감추는지, 아니면 무식한건지. 아마 감출 거예요. 나 이만큼 잘났다 해서 산에 올라가는 겁니다. 저 뒷산에 가봐야 안 알아주거든요. 사실은 50미터 뒷산에 올라가도 되는데 안 알아주거든요. 그게 돈이 안 되고. 산소통 없이 올라가야 그게 돈이 된다 이 말이죠. 그 돈 가지고 내가 안 죽었다고 우기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자인데, 나는 아직 더 살고 싶다는 거예요. 


주님만 살아있으면 돼요. 왜냐하면 주님만 살아있으면 우리는 삽니다. 요한복음 1장 한번 봅시다. 신앙이 되게 간단하죠. 들어보니까. 그죠. 뭐 내가 하겠다는 자체가 신앙에 방해되잖아요. 하겠다는 자체가. 여기 요한복음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믿습니까? 이거 뭐 북한의 김정은이든 트럼프든 누가 지었어요? 모든 만물은 누가 지었어요? 코끼리고 퓨마고 누가 지었어요? 예수님이 지었어요.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이 빛이라” 그러면 성도는 뭐냐,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빛이 되어서 들어오면 우리는 졸지에 그 빛 때문에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뭐냐 하면 이거에요. 풍등이에요. 풍등. 우리는 날아다니는 풍등에 불과합니다. 풍등, 애들이 하는 것 문방구에서 팔잖아요. 안에 등 들어있고 비닐로 된 것. 날아다니는 풍등. 여러분들은 신월동 풍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어두움밖에 없는 인간에다가 예수님이 뭘 집어넣어요? 생명을 집어넣게 되고 그렇게 되면 빛이 돼요. 빛의 자녀가 돼요. 그 빛은 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빛이라고 우기면 어떻게 됩니까? 뭐가 죽어요? 예수님의 빛 되심이 가리어지겠죠. 그래서 이런 말씀을 주는 거예요. “말씀 똑바로 봐라!” 


말씀 똑바로 보게 되면, 누가 우리를 구원하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요. 모든 말씀은 누가 지킵니까? 예수님이 지키는 거예요. 내가 지킨다고 하면 예수님의 공로를 가리는 것이 돼요.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의도가 있어요. 내 가치와 내 자존심과 내가 더 살고 싶어서 예수 믿어요. 이것도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가리는 것이 돼요. 


우리가 살라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맘대로 살았고, 내 맘대로 사는 것을 주께서 계속 살려주니까 계속 사는 거예요. 아무리 살고 싶어도 차 타다가 이만한 타이어가 트럭에서 떨어져서 정면으로 날아오면 죽어버립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인과관계를 우리가 다 알 수 없어요. 그 일이 일어난 원인의 변수가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우리가 파악을 못해요. 


이거만 하고 첫째시간을 마칩시다. 우리는 그냥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는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어요. 뭘 살았어요? 우리는 그냥 당한 거죠. 하늘의 별을 따지도 않고 하늘의 달도 따지도 않았어요. 그냥 당하면 당하는 겁니다. 죄용서 받으면 그것도 당한 거고, 용서 안 해주면 그것도 당한 거예요.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 18-10-18 23:08 

서울의존강의20181012b 베드로전서2장 6-9절(버림받은 분)-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시편에 나오는 말씀이나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을 누가 친히 이루시느냐 하면 예수님이 친히 그걸 이루는 차원에서 우리 속에다가 집어넣죠. 그러면 성도는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주께서 이루신 그 말씀,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그 내용자체가 성도 안에 쑥 들어와 버립니다. 아까 어두움에 빛이 들어온 것처럼. 


그러면 성도는 뭘 파악하느냐 하면, 내 안에서 뭐가 계속 작용하느냐 하면 그 말씀이 말씀대로 계속 작용해요. 왜냐하면 성경말씀이 한 구절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말씀이 내 안에서 작동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듭났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그것이 크게 잘못됐죠. 거듭나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거듭난 순간부터 말씀이 내 안에 계속해서 성도답게 만들어가는 겁니다. 성도답게 계속 만들어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어느 말씀을 쥘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뭘 쥐어요? 주님이 쥐고 있기 때문에 내 안에 주님께서 계속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요리 집에 가면 짬뽕이나 짜장면을 만들 때 웍wok에다가 해물 넣고 야채 넣고 볶다가 술을 부으면 불이 확 올라오죠. 뜨거운 불로 인해서. 웍이 성도라면 성도에게 말씀을 집어넣고 주께서 불질러버린다 이 말이죠. 맛있는 짬뽕, 짜장면 만든다고. 


우리 인생을 통해서 주께서 주의 말씀의 완성됨을, 현재 주님의 말씀이 분명히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증명해주는 겁니다. 우리를 가지고 사용해서 그걸 보여주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에 어떤 말씀대로 되는가 하면,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8절에 나와 있죠. 자, 두 번째 시간에는 뭘 하느냐 하면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는 이 말씀이 이사야 28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시온에 한 돌을 세웠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느 대목에서 이 말씀이 살아있음의 티가 나고 표가 날까요? 이것이 제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우리 안에 살아있다면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어떤 경우가 이 경우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까? 라는 것이 제가 던지는 질문이에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말씀이 우리 속에 살아있다면. 그걸 제가 답변해드리겠습니다. 


거치는 반석, 걸거치다(걸리적거리다), 걸거치다는 표준어가 아닌 것 같은데. 또는 부딪히는 돌. 거추장스러운 돌. 걸거치다는 경상도에서 하는 말 같은데요. 무슨 뜻입니까? 경상도 출신 아니죠? 맞아요. 그럼 우리끼리 방언이 통하겠네요. 거치는 그것이 어떤 경우에 나오느냐 하면은, 원리가 있어요. 원리를 잘 알아야 돼요. 


예수님을 우리 인간이 죽였습니다. 죽일 때 어떤 경우에 죽였느냐 하면은 내가 살기 위해서, 앞에 집어넣는다면 내가 멋있게 살기 위해서, 내가 건강하고, 대단하고, 멋있게 살기 위해서, 이거는 앞에다가 형용사를 계속 붙일 수가 있어요. 어쨌든 내가 건강하고, 대단하고, 멋있고, 잘난 체 하고, 최고고, 내가 절대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그런 자로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였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거치는 반석은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그 현장에 이 말씀이 등장해버려요. “나는 꼭 살아야 돼! 남은 죽더라도 나는 꼭 살아남아야 돼!”라는 이유를 거론하는 순간, 그 순간에 말씀이 그대로 이게 튀어나와버립니다. 거치는 반석이. 예를 들어볼게요. 


어떤 교회가 있는데, 교역자가 없어가지고 뽑습니다. 세 명이 왔다고 칩시다. 세 명 다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 당회장이 되어야 할 이유는, 설교자가 되어야 될 이유는...라고 하면서 나오죠. 설교자가 된다고 하는 말은 자기가 그 교회를 해서 거기서 계속 살겠다는 뜻이잖아요. “내가 이 교회에 당회장이 되어야 할 이유는 이러이러합니다.”라고 내세울 때에, 그게 바로 성도의 눈으로 볼 때는 거치는 반석에 다 엎어진 인간들이에요. 


왜냐하면 어떤 이유를 통해서 내가 꼭 살아야 되겠다는 자기 정당성을 내비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번에 유은혜가 장관되었죠. 교육부장관. 그런 사람이나 항상 어떤 일이 터지면 자기가 후보감이다, 꼭 되어야 된다고 할 때, 그 전제가 뭐냐 하면 “그러니까 나는 죽으면 안 돼! 후보감 안 된 사람은 죽더라도 나는 죽으면 안 돼!”가 밑에 깔려있어요. 


노벨상을 받는데 발표되고 난 뒤에 기뻐하다가 졸도해서 죽었다. 참 아깝다고 이야기를 하죠. 그러면 아예 노벨상이 없었다면 아까운 것도 없겠죠. 노벨상 때문에 갑자기 아까운 존재가 됐으니까, 노벨상 없었으면 아깝지는 않겠죠. 야구대표팀 감독의 자리가 있기 때문에 선동렬이 욕을 얻어먹는다. 그럼 아예 그 야구대표팀이 없었으면 선동렬 감독이 욕을 얻어먹을 이유가 없겠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냥 등장할 때, 사건이 일어날 때, 거기에 확 달라붙습니다. “저 자리는 내 자리다. 내가 적임자다. 나는 살아있어야 돼.” 만약에 재벌3세 가운데서 혼처를 찾고 있다. 그러면 뭐 중매쟁이들이 이 나라의 우수한 아가씨들 전부 다, 스펙 좋은 아가씨들 다 들어오잖아요. “난 복음적인 글을 잘 씁니다.” 이런 것은 스펙에 들지 않죠. 여자 변호사들 쭉 나오겠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가만히 있으면 자기가 건전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일이 자기에게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할 때는 갑자기 나는 죽으면 안 돼! 꼭 살아있어야 된다고 본색을 드러내죠. 그것이 뭐냐 하면 그 인간 자체가 이미 예수님이 다스리는 세상을, 예수님을  거치는 반석으로 확인시켜주는 그런 부정적인 요소가 되는 겁니다. 부정적인 요소가. 


그렇게 보면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거치는 반석이 되는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 행동을 로마서 9장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행동이라고 하지 않고 행위라고 이야기를 해요. 


로마서 9장 봅시다. 33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32절에 보면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믿음이라는 것은 행위자가 예수님이라는 뜻이고요. 살아계신 예수님이 행해서 결과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선물이니까. 선물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행위라고 하는 것은 행위의 주체가 예수님이 아니에요. 누구냐 하면 살아있는 내가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행위 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보는 거예요. 살아있는 놈이 아무것도 안 하면 이상하잖아요. 살아있다는 것은 그냥 살아있지 아니하고, 의미 있는 행위를 내놓을 수 있다는 조건하에 내가 살아있는 겁니다. 


살아있는 사람 팔목 잡아보세요. 이게 죽은 놈이죠. 그렇잖아요. 살아있다는 것은 그냥 곱게 살아있는 법이 없어요. “내가 할까요? 내가 할게요.” 이런 식으로 살아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살아있는 인간을, 인간들을 골라내기 위해서, 구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말씀에 준해서 예수님께서 그런 분으로 오신 거예요. 


그래서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는 말은 어떤 인간을 다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냐 하면, 내가 뭘 해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전부 다 넘어뜨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뭐냐 하면 넘어진 것을, 넘어짐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사람,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안 넘어진 사람은 없어요. 다 넘어져요. 그게 믿음이에요. 왜? 자기의 행함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거치는 돌과 부딪히는 반석이라는 것으로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2장의 내용입니다. 이제 좀 정리가 됐죠. 그냥 믿으면 될 건데, 왜 이리 거치는 돌, 부딪히는 반석이라고 하느냐, 니가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은 지 잘난 체 하는 겁니다. “야, 예수 십자가 믿어줄게. 예수 믿어줄게.”라는 이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지는 멀쩡해요. 자기는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훌륭해요. 예수까지 믿어줬으니까 보통 훌륭한 게 아니에요. 


그거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살았는데 자기도 같이 덩달아서 살겠다고 설치는 것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냥 예수님만 살게 하셔요. 우리는 죽은 자라도 괜찮아요. 그냥 예수님만 살게 하시고 나는 살아도 죽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그 관계가 믿음의 관계입니다. 죽은 자가 뭘 더 희망을 걸고 기대를 하겠습니까?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힘들게 사는 이유는 다 이것 때문입니다. 기대감. 


기대감 때문에 그래요. 자꾸 뭘 노려요. 자꾸 뭘 노린다고요. 이번 가을야구에 롯데 올라가는 건데. 뭐 이런 거. 롯데가 가을야구에 5등 안에 못 들어가지고 부산 전체가 짜증나고 있어요. 여러분, 하루를 살면서 여러분의 마음에 일기예보를 한번 해보세요. 언제 짜증나고 구름이 이렇게 끼고 하던가요. 기대가 없는데 구름 낄 이유가 없습니다. 꼭 기대했는데 그게 안 됐을 때에 나머지기 이게 잘 되더라도 짜증스럽죠. 인생이. 


그럼 기대를 왜 했느냐 이 말이죠. 왜? 기대를 하기는 왜 했어요? 기대를 하는 이유는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예요. 내가 기대한 바를 이루었을 때, 나는 비로소 살아있다는 것을 나는 느끼겠다 이거거든요. 내가 살아있음을, 그것도 아주 보람 있게 살아있음을, 내가 계획한 일이 성취될 때 비로소 나는 살맛이 난다는 겁니다. 살맛나지 마세요. 살려주는 맛만 있으면 돼요. 본인이 왜 살아야 됩니까? 


아담은 산영이 되었지만 주님은 뭡니까? 죽은 인간을 살려주는,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 하잖아요. 주님만 살아있으면 되잖아요. 제 말 틀렸어요? 지금 주님만 살아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있을 때, 말씀으로 자기 백성에서 말씀을 집어넣는 식으로 살아있다 이 말이죠. 우리가 행하지 않더라도 주님은 지금 바쁘게 행하십니다. 주님의 행하심은 말씀대로의 행하심이거든요. 버린 돌을 모퉁이 돌이 되게 하시고, 거기에 자기 백성을 모으고, 새로운 성전 되게 하시고, 그렇게 하신다고요. 


낮에 안양강의를 했는데, 안양강의에서 제가 언급한 것이 뭐냐 하면은 이거였습니다. 제목을 ‘마귀대적’이라고 정했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그 만남의 장소를 인간이 정한 것이 아니라는 그것이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인간 쪽에서 만남을 주선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만나는 장소를 만들어요. 그 장소가 뭐냐 하면 ‘우리’라고요. 우리.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 되는 겁니다. 


내일 새벽에 올려놓을 테니까 들으시든지. 새벽에 올려놓으면 정말 감사한 일이 있어요. 설마 이거 올려놨는데 보겠나? 하면 새벽 두시고 세시고 네시고 관계없이 올라오죠. 한국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외국에서 보는 것 같아요. 이때쯤이면 올라올지 싶은데 해서 딱 보죠. 그것도 일등으로. 그렇게 하시는 분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만남의 장소는 누가 한다고요? 우리 인간 쪽에서 뭐 택지 개발한 것이 아니죠. 주님이 친히 만나는데 그 만나는 장소는 이 세상에 없는 장소라는 것이 안양강의의 핵심이었습니다. 없는 장소를 만들어요. 있는 장소는 주께서 안 받아주십니다. 없는 장소를 만드는데 그 없는 장소는 뭐냐 우리에요. 다른 말로 하면 교회에요. 교회. 


자, 그 말이 또 나와요. 오늘 본문 9절에 봅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이게 어디에 나오는 이야기냐 하면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의 소유된 뭡니까? 개인이라고 되었어요? 백성이라고 되었어요? 백성이죠.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집단입니까? 개인입니까? 집단이죠.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이 살아갈 때 집단이 우선입니까? 개인이 우선입니까? 개인이 우선이죠. 우리 인간들이 말하는 집단은 뭐냐 하면 개인 개인을 모아서 집단으로 보는 거예요. 주님은 개인을 죽여서 만든 것이 집단이고. 오늘날 현대인들의 집단은 개인이 살아있으면서 집단이 되는 거예요. 달라요. 


오늘날 현대인들은 꽃다발을 만들 때,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살아있을 때 꽃다발이 되잖아요. 그것처럼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살아있을 때 살아있는 것끼리 모아서 그걸 살아있는 꽃다발로 보는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모든 인간을 죽이고,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써 그것이 백성 만들기에 나서는 겁니다. 백성 만들기에. 


이미 다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혼자 떡하고 살아나셔가지고, “야! 나 예수다. 여기 붙을 사람 손들어봐!” 이러면 아무도 없어요. 왜? 다 죽어있기 때문에. 아까 첫째시간에 했잖아요. 못 알아본다고요. 주의 말씀을 못 알아봐요. 왜? 예수를 버린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주님이 “니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통보해주는 사람.” 그 사람이 뭐냐 하면 주의 소유된 백성이 돼요. 


백성 앞에 뭐가 붙습니까? 소유된 백성이죠. 그러면 소유된 백성일 때, 제가 정리해보겠습니다. 자, 주님께서 일을 하실 때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은 주님만이 존재가 돼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인간들은 인간들 자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존재+존재+존재+존재+... 이게 집단이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누구만 존재입니까? 예수님만 존재죠. 살아있죠. 예수님만 살아있다 이 말이죠. 다른 사람은 죽었으니까. 움직여도 소용없어요. 


예수님만 살아있는데, 존재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게 운동이 나와요. 운동.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의 취지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럼 기존의 세상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를 해봅시다. 자, 어떤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 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는 거듭나서 구원받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럼 지금 뭐가 멀쩡합니까? 나 자신이 멀쩡하죠. 멀쩡하니까 믿는 것도 누가 믿고? 내가 믿고. 구원받아 챙기는 것도 누가 챙겨요? 자기 소유가 되어서 자기 저장고 지하실에다가 천국 티켓을 거기다가 놔둔다 이 말이죠. 구원을 누가 소유합니까? 내가 소유한 구원, 천국을 내가 소유하는 거예요. 게다가 성령까지 온다니까 성령도 누가 소유합니까? “잘 왔다 성령!”이라고  해가지고 성령도 지가 받아 챙겨서 지 소유가 되는 거예요. 


백화점에서 이벤트하고 있는데 풍선을 나눠준다 이 말이죠. 애가 둘이 가는데 어떤 애는 풍선을 세 개 받았어요. 이 애는 여섯 개를 받았어요. 누가 풍선을 풍성히 받았어요? 여섯 개를 많이 받았다고 치죠. 이런 거예요. 나만 멀쩡하고 받아 챙기면 되는 거예요. 기존교회에서는. 예수 믿으면 뭘 한다? 의를 얻고 그 다음에 영생을 얻고, 그 다음에 천국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 하잖아요. 전부 다 얻는 거잖아요. 얻는 거. 


그럼 얻는 본부가 어디입니까? 나라는 거잖아요. 나. 나만 멀쩡히 살아있어 가지고 많이 끌어 모으는 거예요. 이게. 나는 안 다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받아 챙기기 위해서 하는 운동은 이게 누구 운동이냐 하면, 이건 나의 운동이죠. 나의 운동. 나의 움직임이 돼요. 나의 움직임이. 교회에서 목사들이 닦달 내는 것이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움직여야 교회가 부흥이 된다고 하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이 교회를 무슨 교회라고 합니까? 죽은 교회라고 하잖아요. 죽은 교회. 가만히 있으면. 


교회가 죽을 수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교회가. 교회의 머리는 누굽니까? 주님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어요? 살았어요? 사도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죽었다가 살아났죠. 그러면 주님이 살아 있잖아요. 주님이 살아있으면 교회가 어때요? 교회가 살아있어요? 죽어있어요? 살아있죠. 음부의 권세, 악마의 권세가 못 이기죠.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뭐가 못 이긴다? 악마의 권세가 이기지를 못하잖아요.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뭣이 터치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뭣이 힘을 행세하지 못합니까? 악마가 가져온 저주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이게 해당사항이 없어요. 왜 무서워합니까? 세상사는 것을. 왜 두려워해요? 왜 죽는 것을 그렇게 겁냅니까? 성경대로 안 보고 기존교회에서 가르친 대로 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내가 교회 만들고, 내가 뭐하고, 전부 다 지가 안 뒈지려고, 지가 안 죽으려고 좋다는 것은 전부 다 긁어모으는 거예요. 어디 보약입니까? 온갖 것 다, 로얄제리에다가 더블엑스에다가 콜라겐에다가 종합비타민에다가 너무 많이 먹어서. 


서울시내에 교회가 예를 들어서 열 군데가 있는데, ABCDEFGHIJ까지 열 군데가 있는데 A교회는 교인수가 세 명. B교회는 교인수가 두 명, 사모님하고 목사하고. C교회는 애를 둘 낳아서 네 명. D교회는 지나가는 노숙자까지 붙어서 다섯 명. 그런데 이쪽에 있는 J교회는 열두 명. 열두 명이 제일 많아. 그럼 열두 명이 있는 교회는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큰 교회죠. 큰 교회. 왜? 전부 다 한 자릿수인데 자기는 두 자릿수잖아요. 아, 그 대단한 자부심. “우리는 열두 명이야! 열두 명!” 다른 교회에서 깜놀! “세상에! 무슨 교인이 열두 명이나 돼?” “주의 기적이야.” “아, 부흥됐네.” 이렇게 하겠죠. 


보세요. 얼마나 우리가 세상을 보는데 상대적입니까? 주님께서는 열둘을 해놓고 인간들을 모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택했다고 했어요. 택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교회 이전에 선택이 먼저다 이 말입니다. 선택된 자만 주님이 세운 교회에 올 수가 있어요. 교회오고 안 오고가 아니고 교회가 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선택한다는 것은 무슨 선택을 거부한다는 것입니까? 내가 교회되겠다는 나의 결심과 선택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주님의 선택을 선택답게 하기 위해서는 뭘 빼야 돼요? 나의 선택, 나의 결정을 다 후려가지고 다 찢어가지고 갖다 버려야 되겠죠. 


자, 9절 봅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라고 되어있죠. 자, 택하신 족속이 족속답게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운동이 필요합니까? 내가 기대한, 내가 구상한 교회 다 무너져야 돼요. 그걸 위해서 인간은 뭔가 기대한 것, 인간은 기대만 하는 게 아니고 기대에 맞추기 위해서 뭔가 노력을 하기 마련이에요. 주님의 노력과 내 노력이 상충되는 겁니다. 우리의 노력, 인간의 노력은 목표가 이미 정해져있어요. 열두 명. 


근데 지금 열한 명이다. 그러면 열두 명에서 한명이 빠지죠. 그 다음 주에 한명이 왔습니다. 와우!! 난리가 아니에요. 목표가 열두 명이니까. 근데 목표가 십이만 오천 육백 명인데 현재 열한 명. 그런데 그 다음 주에 다섯 명이 왔어요. 와우!! 안 합니다. 왜? 와도 목표에 한참 멀었기 때문에. 인간의 기대가 문제에요. 기대가. 이 기대가 인간의 의지에서 나왔고, 이 의지는 인간의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을 포기 못하겠다는 자기 결심과 선택에서 나온 거예요. 


이것을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여기에다가 거치는 반석과 부딪히는 돌을 마주치게 해가지고 이 자체를 날려 보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운동이에요. 상당히 어렵죠. 예수님의 운동은 따로 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것을 부수는 것이 예수님의 운동입니다. 나의 기대와 나의 소망과 나의 희망을 부수는 것. 


그러면 희망을 부순다면, 희망을 두 개 세웠는데 한 개를 부수면 한 개는 남는다는 이런 꼼수를 쓰는데, 희망을 부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 자신을, 니가 죽어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키기 위해서 우리 희망을 부수는 것입니다. 콩나물에서 콩이 올라오는데 이게 시들시들하다면 콩이 문제가 있죠. 우리에게서 올라오는 그 기대감 희망이 비실비실해서 하나님이 안 받는다는 말은 우리 자체가 이게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고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솜씨는 뭐냐 하면 죽어있는 데서 영생을 뽑아내는 것이 주님의 솜씨에요. 그런데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썩은 내가 썩은 것을 내세우면서 마치 이게 영생인양,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인양 우기는 겁니다. 자, 지금 이집에 애가 둘이 있잖아요. 둘이 있을 때 말은 안 했지만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늘 기도했겠죠. 특히 아플 때는 곱빼기로 기도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앞일까지 생각해서 기도하죠. 


그러니까 기도에다가 직접 투자를 하는 겁니다. 투자를 했는데, 기도할 때 기도내용을 보게 되면 반드시 기도 안에 기대가 들어있어요. “저는 욕심은 없습니다. 주님. 그러나 이 정도는 해주셔야지요. 독감예방은 맞춰야 될 거 아닙니까?” 기본적인 것은 해달라는 거예요. 기본적인 것은. 


근데 왜 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거 왜 해야 하는데? 니가 그런 기도를 하는 이유가 뭐냐? 라고 닦달내시면서 물으시면 우리의 답변이 뭡니까? “우리는 주님의 종의 가정이잖아요.” 누구 맘대로? 내가 나를 선택했어요. 마치 성도인 것처럼. 내가 주의 종인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성경에 뭔가 멋진 것이 있으니까 그걸 전부 다 일번으로 갖다 붙였어요. 


그런데 우리가 진정한 성도라면 어떻게 돼요? 내가 성도라고 하는 것과 주님이 성도되게 하는 것과의 차이를 발견해야 되죠. 자, 예를 들겠습니다. 이 애 이름이 뭐죠? 강하린이요. 하린이를 위해서 엄마가 기도를 두 시간 했는데, 한 열 시간 동안 애가 잘 놀더라. 근데 열 시간이 넘은 후에는 아프더라. 두 시간 너무 많이 줬다. 사실은 이렇게 기도 안 하는데. 그러면 두 시간 오 분을 더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두 시간해서 열 시간 건강했다가 열하시간 째 약간 문제가 있으니까 좀 더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루는 스물 네 시간이잖아요. 이 계산을 하면 기도를 네 시간정도를 해야 해요. 네 시간. 인간이 생각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한 양만큼 주께서 그만큼 내 기대에 부응한다는 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선택의 의지입니다. 인간이 자기 행동을 할 때 선택의 의지에요.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서 기도를 하나도 못했어요. 아침에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시간에 무슨 일이 있어가지고 기도를 깜빡하고 못했어요. 못했는데 애가 놀아도 너무 잘 놀아.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기도 안 했는데 애가 너무 잘 논다. 쑥쑥 더 큰 거 같아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깜빡하고 못했던 기도를 주님이 대신해줬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내가 깜빡한 기도를 주님이 대신 두 시간 했다는 거예요. 무슨 공식을 포기를 못하느냐 하면 두 시간 한만큼 애가 잘 큰다는 이 공식을 내가 결정했기 때문에, 내 결정을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배짱 좋게 기도를 안 해보는 겁니다. 배짱 좋게. 어차피 인생은 도박이니까 기도를 안 해보는 겁니다. 


기도를 안 한 이유가 뭐냐, 기도를 안 해도 주께서는 다 키운다는 것을 기대했죠. 기도 안 하고 난 뒤에 애가 아파. 어떻게 할 거예요? 기도를 안 하고 난 뒤에 애가 더 아파. 기도할 때보다 더 아파요. 그러면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그러니까 내가 기도할 때가 좋았지. 기도 안 하니까, 아픈 것을 보니까 기도할 때만큼은 주께서 봐줬다는 내 공식이 맞잖아.” 이래 나와요. 그걸 이겨내야 하는 겁니다.  


기도를 안 했는데 더 아프다. 더 안 해보는 거예요. 그러면 더 아파요. 더 안 해보는 겁니다. 애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그 과정 속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은 내 선택밖에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선택이 내 마음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어요. 주님의 선택이 어떤 이유가 있는데 나는 내 결정이 너무 강해가지고, 내 결정에 주께서 후원을 해줄지언정 내 결정을 무시할 정도로 주께서 들어오는 것을 내가 원치 않았어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것은 뭡니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고 소유된 백성이라고 이렇게 다룰 때에 그 근거가 있을 거예요. 그 근거가 뭐냐, 그 근거가 너는 이미 죽었다가 근거가 돼요. 너는 이미 죽었다. 너가 죽었음을 인정한다면 애가 아프던 안 아프던 간에, 어떤 애든 간에 이미 너의 소유는 아니죠. 내 소유는 아닌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시험하실 때에 어떻게 시험했습니까? 자식 이삭을 죽이라고 시험했죠. 그러면 이삭의 존재의미가 뭐냐 하면은 아브라함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이삭이 주어졌다는 것을 아브라함 니가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행해서 이삭을 낳았다면, 차마 죽이겠어요? 못 죽이겠어요? 이삭을 죽이는 것은 곧 누구를 죽이는 것이냐 하면 나의 결심과 선택을 죽이는 것하고 똑같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포기를 못하거든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습니다. 이거는 제 자식이 아니고 누구 자식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된 자식입니다. 이거는 이삭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하는 순간 아브라함 본인이 약속의 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된 겁니다. 약속의 사람인 것을. 그러면 애 키우는데 기도하지 말라는 말인가? 기도를 할 때 이렇게 해야 돼요. 항상 감사의 기도를 해야 돼요. 감사의 기도. 


왜냐하면 자식과 부모사이에 여기 누가 개입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양쪽 다 친히 기르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모를 통해서 자식을 기르시는 것이 아니고 자식을 친히 기르고 부모를 친히 기릅니다. 존재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존재에서 운동이 나오죠. 이 운동을 찾아내는 겁니다. 어떻게 찾아내는가, 인간의 존재를 통해서 운동을 찾아내요. 인간의 존재를 통해서. 


이번 수련회에서 아가서를 하거든요. 아가의 핵심이 그거에요. 인간의 사랑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겁니다. 인간의 사랑을 통해서. 교재를 다 썼어요. 다 쓰고 이제는 11월 초가 되면 1차로 발표할 겁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단어들이, 아가서에는 하나님이란 단어가 8장 6절에 딱 한 번 나와요. 그게 아주 모호해요. 


우리말로는 여호와라고 되어 있지만, 본문에는 야훼 불꽃이라고 되어 있는데, 야훼가 너무 축약된 단어라 해서 우리 성경에는 여호와라고 되어 있어요. 딱 한 번 나오고 그 다음에는 안 나오거든요. 안 나오고 그 대신 그냥 사랑만 계속 나와요. 사랑하는 행위만 나옵니다. 사랑하는 행위.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노골적으로 사랑하는 행위가 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이게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움직이고 있잖아요. 운동하고 계신 거예요. 운동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은 그거는 결국은 하늘보고 엉터리 하나님을 내놓으라고 하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살아있으면서 뭐가 나와야 하느냐 하면 감사가 나와야 해요. 죽은 자가 움직이잖아요. 죽은 자가 여기서 움직인다는 말은 여기서 뭐가 나왔다? 주님의 존재가 우리 인생에 개입해가지고 주님이 스스로 우리를 가지고 운동하고 있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거예요. 자식이든 부모든 간에. 


근데 인간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보고 기도를 안 해요. 자기의 기대감, 자기의 소원, 자기가 정말 귀하게 여기는 것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기도해요. 그게 누굽니까? 부모한테는 자식이라니까요. 자식이 아프면요, 기도 안 하다가도 절로 기도할 수밖에 없어요. 또 잘 돼도 감사의 기도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 주변에 있는 여러 가지 소중히 여기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님이 개입해버립니다. 주님이 개입해가지고 지금 니가 이걸 했느냐, 아니면 예수인 내가 했느냐를 분명히 우리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매순간. 물어보는데, 정답은 딱 나와 있어요. “니는 나한테 소유된 백성이니까, 결국 결론이 뭐냐 하면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사실을, 자식뿐만 아니고 너 자신도 기르신다는 사실을 니가 고백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러면 이 택하신 족속이라는 이 원칙의 움직임에 대해서 다른 움직임이 여기에서 방해를 놓아요. 뭐냐 하면 내가 기대해서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했다. 자꾸 우리 육신이 있으니까 그걸 끄집어낸다고요. 주께서 그것을 이렇게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그 제거한 것 중에 아까 예를 들었던 것이 뭐냐 하면은 내 기도 덕분에 내 자식이 잘 된다는 것은 제거대상입니다. 그게 마귀의 시험이 되는 겁니다. 


좀 더 나가볼까요? 윤리적으로 어떤 착한 일을 해놓고 인간은 반드시 뭘 기대합니까? 보상을 기대하죠. 그 원칙이 잘라져야 해요. 너무나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목사 같으면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했으니까 이번 주는 교인 두 명 더 올걸.’ 이런 거요. 그럼 그 목사는 뭘 기대하느냐 하면 교인수가 많아지고 헌금 많아지는 것을 늘 기대하겠죠. 교회가 자기 자존심하고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주님께서 그 목사를 구원하신다면 그 기대가 어떻게 됩니까? 좌절되겠죠. 그 기대가. 기대가 좌절돼서, ‘아, 내가 참 나쁜 놈이구나. 이거는 주님의 교회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내 교회를 만들었구나.’ 하는 순간, 남아있는 교인이 아직도 안 떠난다는 것에 대해서 갑자기 말할 수 없는 감사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동안 20명이 목표였는데 12명밖에 안 와가지고 누구한테 닦달을 냈느냐 하면, 현재 12명 있는 사람한테 닦달을 낸 거예요. “전도 좀 하시라고요. 전도. 우리 올해 목표가 20명인데 뭐하노? 달랑 당신만 오면 돼요?”라고 했는데, 근데 제대로 그 목사가 당하고 나고 나서는 “세상에! 열두 명인 당신들은 왜 안 나가십니까?” 이런 식으로. 고마워지고 감사가 되는 겁니다. 


왜? 자기는 죽은 자인데, 죽은 목사한테 신자를 열두 명이나 줬으니까,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는 거예요. 이런 기적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죠. 이런 기적이. 지금 나는 죽어야 되는데 열두 명 때문에 계속 살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힘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봉사하라고 계속 살려주니까, 이게 뭐냐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아있는 겁니까? 주님이 살아있는 거죠. 항상 주님이 살아있다는 그것이 감사의 내용이 되어야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감사의 내용에서 누락이 되고 빠져야 돼요. 안 빠지면 주님의 살아계심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그 구체적인 내용이 뭐냐,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게 출애굽기 19장 5-6절에 나오죠. 그렇게 나왔던 그들이 어떤 역사를 보여줬습니까? 작살나는 역사를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출애굽기 19장을 보면서 우리가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들이고 거룩한 나라고 소유된 백성이라고 얼마나 자랑질을 해댔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적들아 물러가라! 이렇게 했잖아요. 


근데 나중에 그들이 어떻게 됐습니까? 멸망했죠. 교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택하고 거룩한 백성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제자들이 몇 명입니까? 열두 명입니다. 열두 명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현재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아니다?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라는 것부터 먼저 구약을 통해서 보여주고, 이게 왜 아니냐를, 그게 혈통이거든요. 혈통으로 자동적으로 민족 되는 그것은 아브라함 자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밀치고 혈통과 상관없이 여기에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이 왕 같은 새로운 이스라엘로 돌아오되, 그 원칙은 옛날 구약 때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합니다. 구약 때 원칙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려운 환경가운데 몰아넣더라도 이것이 주님의 정당한 뜻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돼요. “우리 망하려고 하셨구나.” 이렇게 원망하면 안 되고. 구약에 했던 사람들은 “우리 망하게 하려고 하셨구나.”라고  해서 더 달라 들었죠. 


신약의 성도는 그게 아니에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어떤 환란이나 곤고가 온다고 할지라도 과거 이스라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돼요. 과거 이스라엘도 그런 일을 당했거든요. 이스라엘 그들이 왜 망했습니까? 누굴 의지하지 않아서 망했습니까? 택하신 족속, 소유된 백성, 왕 같은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선지자의 말씀을 안 믿어서 그렇습니다. 모세의 말을 안 믿어서. 


신약에 있는 성도들은 뭘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믿죠. 왜? 예수님은 말씀을 지키는 전문이기 때문에. 그걸 믿는 사람한테는 어떤 환란이나 곤고를 당할지라도 그게 큰일이 아니에요. 소유인데요. 오히려 소유됨을 더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흔들어대는 작업이라 이 말이죠.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내 공식, 내 원칙, 이거 전부 다 박살나야 됩니다. 나는 아침에 나와서 이런 일을 한다. 그거 박살나야 해요. 반드시 집에 오면 이렇게 한다. 그거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런 일을 하니까 굉장히 일이 잘 풀리더라. 그런 거 다 무너져야 해요. 나의 착함과 윤리적인 도덕적인 착함 그것을 넘어서야 해요. 이런 윤리도덕의 그런 층을 돌파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거 성도 아니에요. 그놈의 윤리도덕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죽었잖아요. 


예수님을 죽게 했던 그 바리새인들의 윤리도덕, 성스러움, 거룩, 왜 이걸 돌파하지 못하고, 이걸 돌파하지 못하면 우린 바리새인이 돼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뭐예요? 현재 구축되어 있는 질서가 혼란스럽다는 거예요. 교회, 다시 말해서 유대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한 사람을 죽이자 해서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오늘날 교회에 적용을 시켜봅시다. 우리가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냈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교인 하나가 미꾸라지처럼 들어와서 교회를 혼란케 하면 한 사람을 쫓아냄으로써 교회 살리자 이렇게 나오겠죠. 그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기대감을 갖는 것,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뭐예요? 주님이 지키게 하는 것하고 달라요. 


아까 한 것 잊어버렸습니까? 주님이 하신 일은 어떻게 움직인다고요? 인간이 이것만큼은 안 내놓겠다고 하는 그걸 제거한다니까요. 왜냐하면 인간이 갖겠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살고 싶은 이유가 거기에 담겨있기 때문에. “나는 이것 때문에 죽으면 안 돼요.”라는 이유가 담겨 있잖아요.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고 우리의  결정한 동기, 모티베이션motivation동기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는 그걸 손대버립니다. 이미 죽은 놈이 어떤 딴소리를 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죽은 놈 살려놓으니까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네.”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항상 더 살고자 하는 것, 난 자식을 위해서 아직 죽으면 안 된다는 그런 생각, 일곱 번 넘어져도 내 새끼들 생각해서 여덟 번 일어나야 된다는 그러한 아주 갸륵한 희생정신이라든지 용기, 다 쓸데없는 겁니다. 내 하나 몸 던져서,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논개 있죠. 내 몸 바쳐서 나라 사랑하자. 그거 다 쓸데없는 겁니다. 우리가 지킬 게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런데 가정이 있어요. 이거 누구 솜씨입니까? 주님의 선물이에요. 주님의 선택에 의한 결과입니다. 이걸 왜 감사 못합니까? 이걸 내가 쥐려고 하니까 감사보다도 불만이 나오는 거예요. 나는 이것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희생을 했는데, 주님께서는 애걔! 손톱만큼 주는 거예요. 아이고, 짜기도 얼마나 짠지. 자식 공부 떨어져서 철야를 40일 했는데 성적표를 보니까 수학이 2점 올라갔어요. 그러면 4점 올라가기 위해서 철야를 80일 해야 해요. 


결국 인간이 쏟아 붓는 그 원리원칙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 좋아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좋아라고? 내 좋아라고, 내 자존심과 내 명예 좋아라고 만든 거예요. 그것 성령에 의해서 다 부서져야 해요. 그게 있으면 있을수록 여러분들은 인생 힘듭니다. 불평 외에는 할 게 없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불만 불평, 주둥이 튀어나오는 것. 하루 종일 불평불만이 나와요. 


그걸 가지고 제가 강의에서 앵그리버드라고 했잖아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같이 항상 화난 얼굴이에요. 뭐가 불만인지. 꼭 경상도 남자같이. 퇴근해가지고 구두 벗으면서 “아는(애는 뭐해)? 밥도(밥 먹자)! 자자!” 요새는 자자고 하지 않아요. “따로 자자!”에요. “리모컨 도! 가을야구 누가하나 보자. 롯데 잘한다. 기아 져라.” 뭐 이런 식으로. 남자들이 사는 게 그렇게 피곤해요. 왜 피곤한지 알아요? 


아침에 출근할 때 기대감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일 좀 편하게 해보자.’ 편하게 해보자고 하는데 사고가 났어. 더 골치 아파. 퐁등 날아가서 뒤에서 터져버렸어. 세상에! “주여 내가 얼마나 더 해야 내 뜻대로 됩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주님께서 니 뜻을 왜 들어줘야 하는데? 왜? 그놈의 기대감, 소망, 비전, 꿈. 범사에 감사하라고 그렇게 말하지만 지독하게 말을 안 들어요. 조건을 맞춰서 감사하겠다는 거예요. 조건 맞춰서. 


여기 9절에 그의 소유된 백성이죠. 그 다음에 뭡니까? 이는 너희를 어디에서 불러내어서 어디로 들어간다? 어두움에서 불러내서 빛으로 들어가죠. 그러면 우리가 사는 모든 기대감은 뭡니까? 어두움의 일종이죠. 어두움의 변신이죠. 어두운 것밖에 우리는 소망을 할 줄 모를 정도로 이미 썩었어요. 하나님의 영광 그거는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내 영광이 최고라는 거예요. 왜? 아까 처음 강의할 때, 우리가 누굴 버렸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누가 버렸어요? 우리가 버렸죠. 


그때부터 사단이 난 거예요. 필요 없어서 버린 거예요. 건축자들이 보기에 이건 쓸모없는 돌이라고 빼서 버린 거예요. 쓰레기통에 버린 거예요. 버린 쓰레기통에서 새로운 소유된 백성이 등장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어디로 이동한 거예요. 주님 움직임에 따라서, 그렇게 좋던 이 세상에서 빠져나와서, 세상이 싫다는 그 동네에 가서 천국백성이 되는 겁니다. 움직임이 그 움직임이에요.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곱게 나가지를 않죠. 왜? 세상의 한패기 때문에. 우리는 고집스럽게 내 자존심과 내 가치, 남에게 자랑할 것, 이거 없다고 인생 자체가 투덜대고 있는 인생이에요. 제목이 갑자기 생각이 나는데, 투덜대는 인생이라고. 우리는 매일같이 투덜대요. 매일같이. 남편이 어떠니, 아내가 어떠니, 자식이 어떠니, 주식 값이 어떠니, 매일 투덜대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투덜대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투덜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주께서 투덜대는 상황을 매일 주세요. 


그러면 뭘 알아야 되는가? 투덜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가 우리 구원에 한 게 있다, 없다? 일체 우리 구원에 첨가한 게 아무것도 없이 평생을 주둥이 튀어나와가지고 앵그리버드처럼 화만 내고 살아온 그것이 바로 접니다.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입니다. 그렇게 자기 죄를 아는 움직임이 주님이 구원하신, 살아계신 주님이 일부러 우리 본색을 다 드러내는 겁니다. 


바나나를 먹을 때 그냥 먹지 않죠. 껍질을 벗기잖아요. 주께 할 일은 뭐냐 우리의 껍질에다가 훈장을 붙이는 이 작업을, 아예 껍질 채로 갖다가 떨어트리면 그동안 쌓아놓았던 훈장이고 상장이고 뭐고 트로피고 간에 전부 다 떨어져버려요. 날마다 우리를 다 끄집어냅니다. 우리 김명현 목사님이 잘 하잖아요. 속살이라고, 우리의 속을 다 들춰내는 겁니다. 들추어내면, 여름에 옷을 벗으면 시원합니까? 덥습니까? 여름에. 시원하죠. 그게 바로 주의 은혜로 인한 감사입니다. “와 이리 시원하지. 왜 이렇게 가볍지.”이 존재의 가벼움! 주님이 성도에게 주신 혜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겁게 살았습니다. 쓸데없는 짓하고 살았습니다. 고집부리면서 살아왔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우리가 이것이 잘 산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한 꺼풀 두 꺼풀 벗겨주시니, 남아있는 것은 시커먼 죄밖에 없음이 들추어질 때에 이것이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오신 하나님의 작전인 것을 우리가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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