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80713b 베드로전서1장 17-20절(인생 재편)-이 근호 목사
다시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베드로전서 1장 17,18,19절에 나오는 그 너희라는 사람을 이렇게 보시면 돼요. 주님께서 이미 구원시켜놓고, 역으로 예수님이 왜 피로만, 은과 금은 안 되고 왜 피로만 구원되어야 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역으로 파고들어가야 될 대상자라고 보시면 돼요. 주님이 놓치지 않고 계속 활용하시는데, 그 활용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왜, 니 행함이 아니고 이 보배로운 피의 효과가 너한테 어떤 식으로 발휘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의 인생을 주께서 재편하는 겁니다.
재편, 또는 재편성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정리한 것을 외부에서 와가지고 그걸 다시 외부의 취지에 맞도록 재편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잖아요. 살아있는 자가 예수 피 믿고 구원받고자 할 때, 이것은 내가 편성한 거예요. 내 인생은 몇 살 때까지 교회를 안 나갔었는데, 15년 전에 교회를 나가서 예수님 피를 믿고 새사람이 되어서, 성령까지 받아서 이제는 구원으로 이렇게 인도했다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경험에 준해서 이걸 바라보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자꾸 누락된다고 했습니까? 대신 죽으심이 자꾸 누락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피 흘렸다는 그 정보를 내 덩치 안에, 내 경험 안에 임의로 받아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피 경험은 우리가 받아줄 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린다는 것은 베드로의 경험상 그런 것은 없어요. “내가 목숨 바쳐서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나를 배신하리라는 그 경험을 예수님만 알고 있는 것이지, 베드로 자신의 경험 속에서는 그런 발언이, 그런 생각이 도저히 나올 수가 없죠.
그러면 이후에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배신한 내용을 집어넣어서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베드로의 인생을 재편하는 거예요. 재편. 퍼즐게임을 다시 맞추는 거예요. 퍼즐을. 우리가 퍼즐을 맞추게 되면, 맞추는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장 18절에 나와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이래 되어 있죠. 유전이라는 말을 그냥 법이라고 보면 돼요. 법. 대대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법.
그러면 유대인들의 법의 출처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율법이에요. 율법에서 지킬만한 용도로 이걸 전환시킨 겁니다. 하나님의 법을 더 완벽하게, 철저하게 지키고 싶어서, 거기에 보조적인 법들을 계속해서 만들어서 기존에 있는 십계명부터 모든 율법과 같이 섞어서 지켜보자는 거예요. 그러면 그 취지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앞에 있는 법을 내 행함을 동원시켜서 그것을 지켰다, 실천에 옮겼다, 내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내다보고 만든 법이라 이 말이죠. 그게 인간의 희망이 아닙니까?
18절에 봅시다. 너희 조상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조상도 인간이죠. 그 후손도 인간이잖아요. 인간이기 때문에 납득이 돼요. 조상님이 하신 그 일이 이해가 된다고요.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왜 조상님이 그렇게 법들을 만들고 했는가? 그것은 자기 딴에 거룩을 위한 순수함이다. 이 말이죠. 취지가 굉장히 소박해요.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누가 기쁘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하는 그렇게 순수한 그 마음을 하나님이 내칠 리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거기다 전부 동조하죠. 인간은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그렇잖아도 잘났는데 법까지 지켜보세요. 더욱더 우수한 존재가 되겠죠. 그럼 그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우수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약속한 복도 우수한 나에게 집중해서 주어질 게 뻔하다 이 말이죠. 어디 나쁜 짓하는 저 인간에게 줄 리가 없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이성적이고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착한 사람에게는 떡 하나 더 주고 못된 놈에게는 매 하나 더 주는 것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에, 저주의 형태로 죽었을 때에 사람들은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처참하게 죽도록 아버지가 내버려둘 일이 없다는 겁니다. 욥의 친구가 욥에 대해서 오해한 것이 그거잖아요. 니가 진짜 의인이라면 혹독한 인생살이가 저렇게 한꺼번에 우르르 무너질 리가 없다는 겁니다. 분명히 니가 모르는, 극도로 나쁜 어떤 숨겨놓은 죄가 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벌을 주시고, 잘한 자에게 복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됨의 살아계심이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반대로 올 줄이라는 그런 생각은 상상도 못했죠. 의인이 고난 받고 악인이 잘 된다는 그런 것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인간은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반대의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아버지하고는 이게 비스무리, 비슷한 것이 아니고 정반대라니까요. 그래야 십자가 죽음이 빛이나요. 십자가 죽음이. 좋은 게 좋은 게 아니에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뭐로 봤느냐 하면 사탄의 영이 들어간 사람으로 봤어요. 귀신의 대장이 예수님을 작용하고 있다고 본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점잖은 사람이에요.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문제없는 사람이에요. 어떤 누구하고도 밑지지 않을 정도로 점잖은 사람이고, 이성적인 사람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에요.
우리가 보기에 존경의 최정상을 달리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잘못에 철저하게 책임을 지고, 책임지기 전에 나쁜 짓은 될 수 있는 대로,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전에 제거하는 사람들이에요. 자기 앞길에 뭔가 거침돌이 있다면 돌을 미리 다 빼내고,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하루하루 한걸음, 한걸음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살아갔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에요.
한국의 성화 좀 한다는 사람하고 한번 붙어 봐요? 배틀battle, 싸움해볼까요? 바리새인이 센지, 한국의 신앙 꽤나 있는 사람이 센지, 배틀battle 한번 붙어보세요. 상대가 안 됩니다. 바리새인하고는 상대가 안 돼요. 금식요? 이거는 심심하면 금식하는데요. 하나님과 인간 것 구분하기? 그거 도사에요. 허투루 말 한 하고 농담도 안 해요. 웃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모였다 하면 죄인이라고 가슴 치는 사람들이에요. 내 탓이요, 내 탓이요 가슴 치는 사람들입니다. 실컷 가슴치고 지옥가고. 살인 안 하죠. 간음 안 하죠. 도적질 안 하죠. 십계명 어릴 때부터 다 지켰죠. 그랬던 부자청년이 누구하고 결별했습니까? 예수님하고 빠이빠이 했잖아요. 그 빠이빠이 할 때에, 예수님이 이해하기 쉬워요? 빠이빠이 한 부자청년이 이해하기 더 쉬워요? 그 부자청년이 더 이해하기 쉽죠.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보기 싫지만 다시 이야기해볼게요. 복음하고 돈하고 원래 공식은 복음이 더 세요(복음>돈). 근데 우리의 경험은 돈이 더 셉니다(복음<돈). 복음 없이는 살아도 돈 없이는 못 살아요. 일요일에 가게 문을 열고 하는 이유가, 문 닫아버리면 단골이 빠지기 때문에, 요새같이 장사가 안 되는데, 장사는 단골장사잖아요. 단골이 왔는데 문 닫혀있으면, 인테리어가 잘 된 옆집으로 가서 십년 단골 다 뺏기면, 교회 갔다 와서는 거지꼴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복음을 안다면 거지되기를 각오하고 가야죠. 교회 갈 때 비장한 각오를 하고 가야죠. “거지되어 굶어죽어도 좋습니다.” 이런 비장한 각오로 가야 돼요. 근데 그런 게 어디에 있어요? 교회 와서도 휴대폰 다 열어놓고, 예배 한참 드리고 있는데 띠리리~ 띠리리~♬ “예, 예, 곧 갑니다. 곧 문 열게요.” 통화가 길어서 설교 다 끝나고 들어와요. 설교 다 끝나고 난 뒤에. 축도만 받고 가면 되는 거예요.
왜, 유대인들이 전통을 지키느냐 하면 전통이 구미에 당기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 전통이 있는 자체가 인간의 그 값어치와 고귀함과 존엄성을 유지시켜주고 그것을 더욱더 윤기 있게 빛낼 수 있고,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그 저력을 또 살릴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에 그 전통을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그걸 떠났잖아요? 라고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떠나지 않았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재편하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용서 받은 사람이에요? 용서 받을 사람이에요? 용서받았잖아요. 어처구니없는 거죠. 용서받을 짓을 한 적도 없는데 용서받았단 말이죠.
그러면 남은 것은 용서 안 받아야 되는데 왜 용서 받았습니까? 라는 것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그 사람을 다루십니다. 어디에다 집어넣느냐 하면 전통과 법에다가 집어넣어요. 니 꿈이 이런 것 맞지? 니 취향이잖아?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럴 때 유전을 안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았기에 본격적으로 뭘 한다? 나는 주님의 복음보다도 전통을 더 좋아하는 그런 성향을 가진, 욕심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마구마구 티를 내도록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났죠. 왜? 막살면 되니까. 안 그래도 막살고 싶어서 환장을 했는데, 주님께서는 막 풀어놓는 거예요. 막살 때, 그럴 때 예수 믿고 부자 됐다? 질문 자체가 어폐가 있지만 예수 믿고 가난하게 된 것이 좋아요? 예수 믿고 부자 된 것이 좋아요? 묻는 내가 스데반처럼 돌 맞을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믿고 부자 된 것이 좋아요.
왜? 그 좋은 나를, 복음보다도 돈을 더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잖아요. 그 대신을 살려내는 겁니다. 살리고~ 살리고~ 그 대신을 계속 살려내는 거예요. 얼마나 신나요. 내가 모르는 죄를 계속해서 발굴해내는 주님의 솜씨에 경탄합시다. 그리고 찬미합시다. 진즉에 우리는 굶어죽어야 마땅한데, 이미 우리의 모든 전권이 주님한테 넘겨줬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빈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전통과 역사 지 자랑하면서 고맙습니다. 왜? 그게 죄인 줄 알았으니까. 남한테 자기 자식자랑 실컷 하면서, 자식자랑하면서 웃으면서 평가해요. ‘이게 바로 죄였구나! 이게 죄였구나!’ 전에는 그게 죄인 줄 모르고, 열심히 기도했더니만 하나님께서 보너스 줘가지고 자식이 잘 된 줄 알았죠.
근데 이미 용서받고 난 뒤에는 이것마저 죄가 된다는 그 룰루랄라~♬하는 그 신남이 있어야 돼요. 또 너무 신난다고 BMW몰고 김해공항 앞 도로에서 속도 밟지는 마세요. 거칠 게 없죠. 주저할 게 없어요. 내가 죄를 적게 지어서 복을 받으려고 하면 모든 게 주저하게 돼요. 이게 죄인지 아닌지 해서 내가 죄를 안 짓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벌 안 받기를 원하고 있거든요. 저주받는 것, 책벌 받는 것이 겁이 나기 때문에 행동에 조심하게 돼요.
근데 그게 뭐냐 하면, 그런 것을 아주 철저하게 기계적으로, 그걸 아주 고-난이도의 기술로서 체계화시킨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조상의 유전입니다. 조상의 전통입니다. 딱 우리 입맛에 적합해요. 적합합니다. 철저하게 우리로 하여금 재편합니다. 우리는 내가 지켜서 보람을 얻을 것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반대급부로 아직도 나는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고, 믿음 있는 사람이고, 저주는 나한테 해당사항이 없고, 내가 이만큼 된 것은 기도 많이 한 덕이고, 남보다 잘 사는 것도 헌신을 많이 한 덕이다. 하나님께서는 눈 부릅뜨고 살아계시니까, 살아계신 주님께 성의를 표하면 주께서 그냥 입 싹 닦고 섭섭하게 계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몸소 이렇게 복을 받음으로써 내게 증거 한다는 이 사실이 이제야 죄 덩어리인 줄 알았다.
뒤에 이 문장을 놓치면 안 됩니다. ‘죄 덩어리’라는 것을 이제 알았다는 거예요. 죄라는 것을 언제까지 알았습니까? 오늘 며칠입니까? 7월 13일까지 안 거예요. 내일 되면 13일까지 몰랐던 새로운 죄가 14일에 새롭게 발굴되면서 또 감사와 기쁨을 또 제공해요. 13일까지 안 죄가 다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있어요. 이거는 뭐 누룽지도 그런 누룽지가 또 없어요. 긁어도, 긁어도 또 나와요. 화수분이라고 하죠. 화수분. 퍼내도, 퍼내도 계속 나와요. 계속.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시고 몰아세우기 때문에.
그래서 갈수록 점점 더 신나는 일만 남아있어요. 나중에 가다 가다보면 나는 인간도 아니에요. 정말 동굴에 갇혀가지고 굶어죽어야 돼요. 누가 구해주면 안 돼요. 17일 동안 갇혀있어도 마땅해요. 쥐도 새도 모르게 박쥐의 먹이가 되어도 마땅해요. 17일 만에 전원 구출된 태국의 아이들을 보고, “아이고 다행이다.”라고 하는데, 다행이 아니에요. 진작 갔어야 돼요. 그게 그 애들한테 맞아요. 불교 애들이니까 그리스도에게 감사한다는 말은 없죠.
성도가 만약에 갇혀서 구출되게 되면, 내가 이렇게 살고자 하는 이 본능이 평소에는, 동굴에 갇히기 전까지는, “아이고, 살다 죽지 뭐.” 하여튼 제가 만나는 십자가마을 사람들의 인사가 그거에요. “목사님! 그냥 빨리 데려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교회에 한 둘이 아니에요. 근데 그런 사람들이 동굴에 한번 갇혀봐야, 아! 내가 얼마나 죽기 싫어하는 존재인지를 동굴에 갇혀봐야 알아요. 동굴까지 갈 것도 없어요.
갑자기 정전이 되고 벼락만 쳐도 살려달라고 하죠. 살려주세요! 큰애도 무섭다고 그러고 둘째애도 무섭다고 벼락만 쳐도 베개 들고 엄마한테 다 달려가죠. 완전히 사운드 오브 뮤직입니다. 선생님한테 번개 칠 때 일곱 명의 애들이 다 달려들죠. 어른 되어도 무서워요. 갑자기 우르릉 꽝! 해보세요. 어른들은 번개는 별로 안 무섭지만 유리창 흔들리는 것. 포항에서 강도5.2 지진이 일어났을 때 대구가 흔들렸거든요. 우리 집 빌라 유리창이 고장 났어요. 지진에 흔들려서 안 맞았어요.
저는 그때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몰랐거든요. 난리도 아니에요. 무섭다고. 무섭다고 하는 그 사람이 평소에 뭐냐 하면, “목사님! 저는 빨리 죽고 싶어요.”라고 했던 그런 사람들이라니까요. 본인이 얼마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안 죽이는 거예요. 그냥 사세요. 주께서 때로는 지진, 때로는 폐렴, 온갖 것으로 다 하게 하시면서 계속 묻는 것은 이겁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다 넘기라고 했잖아.”라고.
내가 뭔가 쥐고 있기 때문에, 말이 씨가 된다고, 쥐고 있는 것을 마귀가 노리고 계속해서 니 그러면 실패한다고 계속 협박공갈을 하는 거예요. “니 이러다 망한데이~ 벌 받는데이~ 졸지에 니 집안 거덜 나~” 그러한 것들이 나중에 막 꿈으로 나타나잖아요. 아까 했죠. 목사가 설교 못했다고 꿈속에서 당황스러워하는 것.
사람이 좀 배부르니까 휘파람을 불고 있지, 급해보세요. 급하면, 급할 때 돈 찾습니까? 복음 찾습니까? 묻는 내가 나빠요. 급할 때 돈 찾죠.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에 있어요. 돈으로 안 되는 게. 다 되지. 그럼 돈이 얼추 되니까 복음 찾는 거예요. 좀 살만하니까. 죽기를 대비해서 그래도 아부는 하잖아요. 아부도 하고 재롱도 부리고 하잖아요.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럼 인간을 어떻게 한다? 재편한다고 했죠. 뭐로 재편합니까? 인간이 만든 그 전통, 그 전통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망령된 행실이라고 했죠. 망령된 행실을 감추기 위해서 만든 그 전통에 얼마나 인간이 친근한 존재인지를 이미 용서받은 자를 재편해버리는 겁니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러면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용서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뭡니까? 신자입니까? 신자 아닙니까? 신자 아니죠. 용서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신자 아니죠. 신자 아닌 사람이 어떤 성경말씀을 새겨 지키려고 할 때, 그것을 망령된 인간의 전통으로 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겠다는 아주 순결한 신앙의 자세로 봅니까? 어느 쪽입니까? 순결한 신앙의 자세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17절을 배척하는 겁니다. 거부하겠죠.
용서를 못 받았고 자기 경험의 연장선에 자기 구원을 두는 사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곳에 있거든요. 근데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것이 계속 끊어지지 않고 연속되는 그 끄트머리에 천국이라는 것이 있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야무지게 믿고 또 믿고, 나쁜 것은 버리고 착한 것만 채택을 하게 되는 그것을 모으고 모아 누적이 되어서 천국에 도달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꼭 대학교 동아리에서 성경공부 하는 젊은 애들처럼. 간사가 그렇게 가르쳐줘요. 간사가. 간사하기 짝이 없어요. 대학교에서 성경그룹으로 애들을 가르칠 때에 항상 희망을 줘요. 니가 지금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하게 되면 도달한다는 거예요. 그냥 하면 믿음이 아닌가 싶어서 추가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주께서 동행하시고”에요.
뭐 들은풍월은 있어가지고 좋은 것은 다 동원해요. “성령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성령이 뭔지도 몰라요. 지금 모르는 그 문제는 문제도 아니고. 지금 니가 착실해야 세상 부럽지 않고 천국에 간다. 그쪽으로 계속 희망을 주는 거예요. 행함의 희망을 주는 거예요. 행함을 격려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대학생들은 자기가 자체한테 4대강 공사를 벌여야 해요. 내가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손든다든지. 이 몸이 목사가 되어서 아골 골짜기에 가겠다고 한다든지. 요즘은 아골 골짜기 없어요. 전부 다 평지 만들어서 시멘트로 주차장 만들었어요. 가겠다고 하는데, 자기 딴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동원했을 때 상상되는, 십자가의 가장 극한의 낮아짐을 들은풍월을 가지고 전부 다 구성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한 선배가 있습니다. 누굽니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왔기 때문에 너희들은 조상이 만든 전통을 지킨다고 지적을 받았지, 예수님께서 그런 지적을 안 했으면 그들은 그게 전부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그들은 만들어놓고 그 전통이 굉장히 고귀한 전통이라고 계속 전달하는 겁니다.
모든 조직단체에는 매뉴얼이 다 있어요. 대대로 내려오는 매뉴얼이 있다 이 말이죠. 표준행동지침이 있어요. 교회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고 병원도 그렇고 모든 것은 매뉴얼대로 해요. 한의학이 뭡니까? 한의학은 전부 다 전통이에요. 묻거나 따지지 마라. 이런 증세가 있을 때는 이런 약을 쓰니까 되더라. 이걸로 끝이에요. 묻고 따지고 뭐 없어요. 뭐, 원리라는 것이 없어요. 팔 이쪽을 쑤시면 허리 이쪽이 낫더라. 왜? 묻지 마! 그냥 경락이야.
서양의학은 뭐 째고, 분석하고, 수소이온농도가 어떻고, 호른몬 균형이 뭐 어떻고. 한의학은 그거 뭐 골치 아파요. 딱 보면 딱 아는데. 서양의학은 계속 검사하고 돈 되는 CT촬영에다가, MRI에다가, 비-급여라서 의료보험이 안 된다고 하고, 충격파 이거는 3만 원짜리라고 하고. 주사 놓고, X레이 찍고, 찍은 데 또 찍고. 철저에 철저를 기하죠.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실수를 줄인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나의 실패를 자존심 상해서 용납 못하겠다는 거예요. 제 이야기는 그 자존심을 넘겨줘라 이 말입니다. 그 자존심을. 자존심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겠는데, 그 자존심을 넘겨줘라 이 말이죠. 안 넘겨줘요. 자존심 넘겨줘버리면 자기는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나는 무슨 재미로 살아요?” 이렇게 나와요. 아니, 세상에 재미있게 살라고 이 세상에 있습니까?
자, 여기서 정리하면 두 번째 시간에 여기까지 한 것이 뭐냐, 넘겨줘도 넘겨 줄 수 있는 역량이나 그런 마음은 우리한테는 애초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넘겨줘야 감사가 나오는데, 안 넘겨주고 내 소원대로 될 때에만 그 조건하에 감사하겠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내 뜻에 감사할만하면 감사하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복음 알고 가정이 평안해지니까 그 다음부터는 얼추 교회에 안 나옵니다. 내 배부른데 뭐?
그런 가운데서 교회 가겠다는 것은 지 욕심 많다는 소리밖에 안 듣잖아요. 그러는 자기는 뭐냐, “나는 이 정도로도 됐으니까 더는 욕심 안 낸다.” “그래서?” “그래서 교회 안 간다. 기도 안 한다. 기도 자체가 욕심인데, 나는 인간성이 됐기 때문에 더 이상 욕심 안 부리겠다.” 그래서 기도 안 해요. 물론 성경 안 보고 말씀 안 보죠. 밖에 나가 골프치기 바빠요.
그게 무슨 성도의 삶입니까? 어디서 꼬인 거예요? 뭐가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이 답변해보세요. 뭐가 잘못됐죠? 배부르고 뭔가 잘 될 때, 갑자기 성경 안 보고 기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이유가 뭐냐, 느긋하게 되고, 여유 부리게 되고, 왜 그렇습니까? 뭐 챙길 것 챙겼다 이 말이거든요. 그리고 하는 말이 괜히 있는 하나님을 나 하나가지고 또 괴롭힐 필요가 뭐 있느냐고 이럽니다. 또 하나님 생각까지 해주네. 마음이 얼마나 넓은지 또 하나님까지 생각해줘요.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돌봐주세요. 저는 알아서 합니다.” 이런 식이라.
도대체 어디서 잘못 된 거예요? 누가 답변을 해보세요. 어디서 잘못 된 겁니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이야기합니다. 이게 빠졌어요. 이게. ‘대신 죽으심’ 이게 빠진 겁니다.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내 대신 누가, 살아있는 내 허락도 없이 일한다는 자체가, 우리 안에 있는 자존심이 분노를 유발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아주 못났으면 못난 나를 대신하는 것은 굉장히 고맙겠는데, 아직 나에게는 열 두 척의 배가 남아 있잖아요. 내가 보기에 내가 그렇게 못났다는 생각이 1도 안 드는 거예요. 조금도 들지를 않는 거예요. 비록 나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내가 하기 나름으로 어떤 소기의 성과를 이루는데 자신감이 만만한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자신감이 있다 이 말이죠. 내가 사람들에게 욕 얻어먹을 짓을 할 정도로 막 가는 일은 안 했다는 자신감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약간만 도와주게 되면 얼마든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영광 돌릴 자신감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자신감을 지금 넘기기 싫다는 겁니다.
나중에 내가 폐인이 돼서, 정말 막가고 자살직전에 가서나 넘기지. 지금 나만의 고귀한 것을, 절대적인 것을 그렇게 비겁하게 “나는 못합니다. 주님 알아서 하이소.”하고 나자빠지면서 넘겨주기에는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용납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주님의 사랑까지 또 거론하네.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러니까 엄마한테 모든 것을 넘기기 싫어서 내가 할 일은 내가 한다는 착한 딸의 심정으로 돌아와서, 주님께서 이미 대신 졌다고 하는데, 뭐 그렇게 할 것까지 뭐가 필요하냐고 대드는 거예요. 은근히 효녀행세하면서 마귀 짓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9절을 봅시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첫째 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해봅시다. 논리상 이게 우선이에요. 창세전부터 계획된 작업입니다. 논리상 뭐가 우선입니까? 예수님이 보배로운 피를 흘린다. 그것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신다는 계획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로 이미 이야기가 끝났죠.
그 내용대로, 그 프로젝트를 창조를 통해서 이제 실시하면 되죠. 그렇다면, 이게 우선이라면 그 뒤에 인간들이 만들어지고, 뭐 선악과 따먹고 하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고 안 되고 하는 그건 주류가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 이야기에 이거는 테마로, 주제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보조밖에 안 돼요. 테마는 뭐냐, 보혈의 피가 테마입니다. 피 흘리기 위해서 인간은 죄 지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은 그냥 시다바리입니다. 악마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주가 되는 것이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입니까? 그게 그렇게 역겹고 나는 듣기 싫다고 귀 막을 일이에요? 그게.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돈보다 복음이 더 우선이라는(복음>돈) 이 이야기가 그렇게 싫은 거예요? 돈을 생각하지 않을 때는 복음이 정말 귀하다는 것을 알아요.
근데 그 복음과 경쟁상대에서 돈이 나왔을 때는 갑자기 이 갈매기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론상 이게 맞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복음을 위해서 존재하거든요. 아는 지식에 의하면. 그러나 인간의 체험에 의하면 정말 이렇게 될까봐 겁나는 거예요. 이렇게 될까봐(복음>돈). “니한테 복음 줬으니까 이제는 가난해도 괜찮지? 그지? 가난하게 해줄게. 있는 돈 다 빼앗아버릴게.” 욥처럼 그렇게 될까봐 겁나는 거예요.
그래서 슬며시 이제는 복음도 알았겠다. 슬며시 이 갈매기표시(<)가 돈 쪽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등식표가 이쪽으로 가는 겁니다(복음<돈). 돈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찬송가 가사를 속으로 막 바꾸는 거예요. 현찰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 주 예수가 아니라 현찰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왜 노골적으로 안하느냐 하면 또 벌 받아서 귀한 돈이 사라질까봐 그게 겁나가지고 돈 좋아하면서도 복음 좋아한다고 위선적인 행동을 취하는 겁니다.
주님은 이렇게 합니다. 자꾸 주저하지 말고, 니 돈 좋아하잖아? 가서 돈 벌어! 누가 뭐래? 그게 니 타고난 본성에 맞는데, 왜 자꾸 돈보다 복음을 좋아한다고, 니가 억지를 부리느냐 이 말이죠. 돈을 좋아해! 그리고 대신 죽으심을 잊지 말고! 참 쉽죠. 정말 쉽죠. 돈이 한 이 만원, 오 만원, 십 만원 같으면요, 아이고 뭐 복음이 좋다고 합니다. 단위가 십억, 이십억으로 들어가 보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복음보다 이십억이 더 좋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면 복음보다 이십억을 더 좋아하잖아요. 그럴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이십억을 좋아하는 상태에서 내가 전에 알았던 복음은 복음이 아니었고, 돈만 아는 인간에서 비로소 새롭게 부각되는 복음, 내가 돈을 안 좋아했으면 나타나지 않을 복음이 진짜 복음입니다. 나를 천하의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들어내시는 그 위력과 병행해서 만들어내는 복음. 그건 바로 보배로운 피, 예수님의 피 흘림이에요. 대신 흘리신 피 흘림이에요.
이십억은 이십억대로 챙기고, 복음에 감사해서 눈물 흘리는 거예요. 남들이 오해하든 말든, “니 돈이 좋아서 눈물 흘리는구나.”라고 하든지 말든지 듣지 말고. 돈 이십억은 이십억대로 챙기고, 그게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지만, 어쨌든 그런 짐은 또 감수해야 되니까. 주신 거니까 그 무거운 벌을 받아야 되거든요. 부자 되는 벌을 받아야 되거든요. 벤츠 타는 벌을 받아야 되거든요. 콜call! 받고. 그 다음에 그걸 받음으로써, “아,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쓰레기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십억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주지마세요. 그것은 반칙입니다. 이십억을 가지고 그걸 굴리는 죄를 또 범해야하지, 그것을 다 줘버리면 그것을 주신 주님의 취지가 살아나지 않아요.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7절,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절,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래 되어 있죠.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돈을 더욱더 껴안아야 돼요. 왜냐하면 이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이 계속해서 두고두고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넣는 그 말씀으로 살려야 돼요. 살아나야 돼요. 만약에 이 말씀의 취지를 모르고, 돈이 한 오십 만원이 들어왔는데 오십 만원을 고아원에 기부해버리면, 그 사람은 졸지에 뭐가 됩니까? 복음보다 고아원에 오십 만원을 준 나에게 비중이 들어가 버려요. 나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대신 피 흘려 죽었다는, 쓰레기를 위하여 죽었다는, 이 쓰레기 취지에서 이탈해버립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착한 일을 못했지만, 예수 믿고 난 후에는 이렇게 착할 수 있는 저력이 생겼는데, 이 저력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이 저력을. 그럼 이 저력을 붙든다는 말은 누구를 증거 한다? 자기 자신을 증거 하는 거예요. 디모데전서 6장은 그것 때문에 있는 거예요.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아무리 퍼줘도 우리는 이웃에게 사랑을 나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원판이 나를 더 중요시여기는, 나를 쓰레기로 취급 안 하는 그런 본성이, 내가 행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도록 주께서 재편해놓았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제목을 ‘인생 재편’이라고 해야 되겠습니다. 한 이십억 기부했다. 그 다음부터는 디모데전서 6장을 보지 말까요? 아니면 디모데전서 6장을 보면서 흐뭇해할까요? 그렇게 해서 건방져 보이면 이 말씀을 더 보탤까요? “나는 죄인인데 주께서 은혜로 하게 하셨다.” 그 말을 보탤까요? 백날 보태도, 성령으로 했다고 백날 보태 봐도 그건 전부 다 위장술이에요. 위장술입니다. 아무리 백을 갖다 줘도, 뭘 갖다 줘도 우리는 디모데전서 6장을 못 지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고, 할 수 없다는 것을 하게 하시고 디모데전서 6장을 실시시킵니다. 실천에 옮기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은 주께 주신 말씀, 그 말씀이 나를 덮치죠. 그럼 나는 그 말씀에 움직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디모데전서 6장처럼 살지 못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그걸 느끼게 만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디모데전서 6장을 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고, 이 죄인을 구원해주신 보배로운 피가 디모데전서 6장을 통해서 더욱더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죠. 그러니까 구원의 능력은 구제가 아니고 뭐가 구원의 능력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복음은 바로 십자가에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성령 때문에 구제했다, 말씀 지켰다, 이게 복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디모데전서 6장은 계속 살아있어야 해요. 그리고 심지어 남한테 한 푼 안 줘도, 불신자한테는 내가 디모데전서 6장처럼 산다고 우길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서 나이 60이 되어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돈 한 푼 안 벌고 집에서 맨날 TV보고 낮잠 자는 그런 남자가 있다고 칩시다. 생활은 여자가 시장에 가서 장사해가지고, 갑자기 누구보고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해당 없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장사해서 생활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왜 만날 노냐?”라고 할 때에, 자식이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는 놀지만 화투는 손 안 댄다. 다른 아버지들처럼 화투는 손 안대고 마누라 패지는 않는다. 얼마나 알뜰하다고.” 자기 딴에는 구제한 거예요. 자기 역량에 맞춰서. 아끼는 것이 구제하는 거예요. 쓸데없는 데 돈 안 쓰니까. 아끼는 것이 구제와 동등하니까. 정량적 태도에요. 저울을 달아서 나쁜 짓 한만큼 착한일 하게 되면 퉁 치는 것이 돼요. 샘샘same same이가 돼요.
그래서 어떤 성경말씀도 변명해요. 어떤 경우라도. “지난달에 구제 많이 했잖아. 앞으로 70이 되면 내가 많이 할 거거든.” 이런 것. 어떤 경우라도 대신 죽으셨다는 것. 오죽 못났으면 대신 죽으셨겠어요. 그 오죽 못남이라는 그 자체가 인간의 경험상 그거는 들어올 수가 없고,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로서 이미 용서라는 링거주사가지고 들어와야 비로소 내 경험이라는 것은 죄인 됨의 경험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20절,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아까 이야기했죠. 그 앞에 있는 모든 계획은 창세전부터 된 것이라고 했죠. 아까 십자가 피 흘림이 죄 짓고 난 뒤에 임시 땜빵 식으로 한 것이 아니고, “아이고 어쩌지, 어쩌지 피 흘려줘야지.” 이런 식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이미 창세전부터 된 거예요.
창세전부터 되었고, 그 창세전부터 십자가 지게 되면 그때부터 말세가 되는 거예요. 그럼 이 시간의 구분은 이건 누가 정한 겁니까? 인간이 정한 거예요? 주님께서 정한 거예요? 주님께서 정했죠. 그러면 보세요. 주님께서 정한 그 재편 속에서 우리는 일방적으로 놓여있는 것이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큰 그림 봐야죠. 내 위주의 작은 그림을 보지 말고 큰 그림을 봐야죠. 큰 그림.
내 구원위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주님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의 협의 없이 수면내시경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다 이루었다는 그런 관계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다시 비춰봐야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없고 주님께서 재편한 인생만 주어지는데, 그 재편한 인생이 뭐냐, 죽을 때까지 니가 죄가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밟아나가는 겁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알면 알수록 이미 그 죄를 대신 처리해주신 주님의 보혈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되게 된다면, 여기서는 복음과 돈이 비교가 되지 않고, 돈 자리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죄가 들어가는 거예요(복음<죄). 죄라고 하는 것은 뭐냐, 복음에 눈 돌리지 않는 것이 죄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죄란 인간을 의식하는 게 죄에요. 인간을 의식하거든 죽어라 이 말입니다. 사람을 의식하거든 그거는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또 불신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근데 사람인이상 의식 안 할 수가 없잖아요?”라는 엉뚱한 질문을 해요. 반박을 해요. 자꾸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을 의식하는 게 죄라고 하면, 나는 진즉에 죽을 자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아주 굉장히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새삼스럽게 잘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이제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의식 안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말세는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에요. 말세는 이미 창조 전에 말세가 정해져있어요. 다만 창조 전과 말세 사이에 모든 필요한 조치는 우리 쪽에서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쪽에서 내립니까? 그건 예수님 쪽에서 꽉꽉 채우는 거예요. 오징어순대나 순대를 잘라보세요. 빈틈이 없죠. 꽉꽉 채워져 있죠. 지금 이 상태가 주님보시기에 가장 적절해요.
오늘 예상 밖에 갑자기 부활절도 아닌데 달걀 삶아서 왔잖아요. 우린 예상 못했어요. 빵만 나오는데 삶은 달걀이 나왔다 이 말이죠. 왜 나왔느냐, 주님보시기에 적절한 거예요. 적절한 것을 받을 때는 어떻게 받으면 돼요? 따지지 말고 감사히 먹으면 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행동이 적절했어요. 소매치기하는 것, 강도 짓하는 것, 이런 것. 아주 적절했어요.
근데 강도짓이 나쁜 짓이라고 하잖아요. 나쁜 것은 뭣 때문에 나쁜 겁니까? 누굴 의식해서 그렇습니까? 인간을 의식해서 그래요. 내가 강도짓을 해서 피해본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내가 한 행동 때문에, 음주운전해서 사람들이 다쳤을 때에 나는 얼마나 미안할까? 나는 남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그 사람에게 할 말이 없다, 양심에 가책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주의 뜻입니까? 아니면 마귀의 뜻입니까? 이거 동의 안 하면 오늘 강의 아무 소용이 없어요.
주의 뜻입니까? 마귀의 뜻입니까? 마귀의 뜻이에요. 타고난 우리의 마귀의 본성입니다. 양심에 걸려서 죽은 사람이 있죠. 스승 팔아먹었다고 양심 때문에 죽은 사람이 누굽니까? 가룟 유다라고 하지 말고 그냥 사탄이라고 하세요. 사탄이 들어가서 그렇게 일을 한 거예요. 인간의 최고 극한의 한계가 가룟 유다입니다. 어떤 누구도 가룟 유다 안에 다 갇혀있어요. 백날 착해봐야 가룟 유다를 못 벗어나요. 최고입니다. 스승 버렸다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자살한 사람이에요. 근데 그게 뭐냐, 악마의 정신, 윤리도덕의 한계가 그거에요.
주의 뜻은 뭐냐 하면 처음부터 너는 그러려고 태어난 거예요. 그러려고. 적절한 거예요. 적합한 거예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따라서 이성적으로 따져서는 믿음이 없어요. 우리가 따지면 믿음이 없어요. 믿음은 어디서 생기는가? 따짐의 그 바깥에서 난데없이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겁니다. 따지면 못 믿을 건데, 믿어졌기에 따진다는 이 자체가 바로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 푹 놓고 이제부터는 따지는 죄를 지으시기 바랍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시고, 피해자에게 사과하시고, 우리가 그거 잘해요.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양심에 가책된 내가 부담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미안한 사람에게 보상을 해줌으로써 상대방을 위함이 아니라 내가 보상해줬다는 것, 나쁜 것도 내가 스스로 인식한다는 이 대견함. 그 대견함을 나의 착함으로, 자기의 과거역사에다가 그걸 보태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이, 성도 같으면 죄를 지었기에 이런 행세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이 나라는 것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뻔뻔하다고 탓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이 성도를 다루시는 재편입니다. 대신 피 흘리심, 고귀한 피를 흘리심에, 우리로 하여금 철저하게 그 길로 가게 하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세상에서 뭘 알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고귀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 세상은 그 피 중심으로 재편되어간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고 위선적인가를 깨닫는 동시에 그 사실을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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