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80810a 베드로전서1장 20-25절(헛수고)-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1장 20-25
20절,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1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절,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 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절,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20절을 봅시다. 20절,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이렇게 되어 있죠. 시간의 시작은 예수님으로부터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시작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시간이 끝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알죠. 그러면 시간이 끝이 있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아느냐, 시간이 끝이 있다는 것은, 처음 시간이 시작하는 것이 천지창조와 더불어 시간은 나타납니다. 창조와 더불어서. 해와 달과 별들이 시계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있는 한, 시간은 재깍재깍하고 변화를 보여준다 이 말이죠.
근데 그러한 창조물들이 사그리 다 없어진다면, 이건 변화의 여지가 없죠. 변화의 여지가 없으면 시간도 같이 없는 것입니다. 시간은 변화를 통해서 파악이 되기 때문에. 그 변화가 없으면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시간을 만들었다는 것은, 예수님 자체가 변화가 있다는 말입니까?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까? 예수님 자체는 변화가 없어요. 예수님 자신이 변화가 없어요.
제가 한번 써 볼 테니까 어느 것이 맘에 드는지 골라잡으세요. 자, 첫 번째 경우하고 두 번째 경우하고 둘 중에 어느 것이 맘에 드는지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일단은 여자 분은 놔두고 남자 분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예를 드는 겁니다. 우연히 카페에 갔는데, 어떤 여인이, 그냥 여자가 아니에요. 여인이에요. 마침 햇빛이 사선으로 테이블 반을 차지하면서 드리워져있는데, 여인이 앉아있는 거예요. 옆모습을 보니까, 한눈에 확 반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이 카페는 마른 꽃이 걸려있는 카페에요. 이 여인은 창가에 앉아서 뭘 마시는데, 외로움을 마셔요. 자, 이 남자가 한눈에 딱 반해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남자가 반한 이 여인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스듬히 눈부신 햇살을 받으면서 앉아있는 여인에게 반해버린 겁니다. 그러면 여자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근데 여자가 아름답지를 않아요. 다만 아름다움을 봐주는 남자가 있기 때문에, 남자의 심성 속에 그 여인은 아름다운 겁니다. 그러면 이 남자에게 이 여인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 각인된 이 순간을, 이게 만약에 2개월 전이라면, 그렇다면 이 여인을 어디서 찾을 수가 있습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같은 동네 사람이었고, 혼자 살고 있고, 혼자 사니까 작업 대상이 되겠죠. 혼자 사니까. 껄떡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길에서 만났는데, 그 여자는 분명히 그 여자에요. 이 여자가 맞는데, 이런 게 어려워요. 내가 반한 여자는 지금 길에서 만난 분명 그 카페에 있었던 그 여자가 아니에요. 내가 반해버린 그 여자는 카페에 앉아있어야 돼요. 그것도 마른 꽃이 걸려있는 그곳이어야 하고 햇빛이 비스듬히 와 비춰야 하고 그것도 똑바로 앉아있으면 안 되고 옆으로 앉아있어야 돼요. 그러면 이 남자의 이상향에 있어서 이 여인은 있어요? 없어요? 존재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나중에 한 6개월 뒤에 가보니까 그 카페가 재개발 들어갔어요. 철거되었어요. 그 상황을 재현할래야 재현할 수가 없어요. 철거당해가지고.
그리고 그때 반했던 그 여자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요. 근데 그 다음에 보니까 그 여자가 몸빼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저히 이 남자가 반했던 이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남자는 미치는 겁니다. 왜? 존재하지 않지만 이미 자기 속에 그 여자의 아름다운 것이 쏙 들어오고 말았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동일한 여자라고 할지라도 자기한테는 성이 안 차요. 이런 경우가 바로 존재입니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이미 고정되어 버렸어요. 고정.
두 번째 경우는 뭐냐 하면 어떤 여자가 있는데 시시해요. 별로 땡기지를 않아요. 근데 그 여자가 같은 동네에 사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한번 만났을 때는 별로였어요. 두 번 만났을 때도 별로였어요. 세 번째 만나서 인사를 하고 하는데, 이제는 그 여자에 의해서, 적극적인 그 여자에 의해서 본인이 좋아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어요. 첫 번째 경우는 본인 쪽에서 꽂힌 거고, 두 번째 경우는 그 여자가 이 남자의 정신을 변화시켰습니다. 변화시켰죠. 그러면 이 남자는 말합니다. “나는 처음에는 안 좋았는데 자꾸 보니까 좋더라!”
자, 첫 번째 경우와 두 번째 경우에서 어느 것이 좋습니까? 물론 결혼한 사람한테는 둘 다 안 좋아져야 되죠. 예를 들어서 한 겁니다. 첫 번째, 두 번째에 있어서 정말 어느 것이 사랑이냐 이 말이죠. 사랑은 1번이겠어요? 2번이겠어요? 이게 정답내리기가 굉장히 힘든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1번은 없죠. 존재하지 않죠. 카페 재개발 들어갔으니까. 존재하려면 그 카페가 있어야 되고 그 테이블이 있어야 되고 그 햇빛이 있어야 되고...
근데 그 여자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약간의 못생긴 친구를 데리고 왔다고 칩시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여자한테 꽂히는 순간 못생긴 이 여자는 죽어야 돼요. 못생긴 건 죽어야 돼요. 못생긴 건. 나머지기는 항상 제거해버립니다. 어디서 이쁜 것한테.. 근데 그 여자한테는 못생긴 것 때문에 이쁜 것이 더 부각이 되었어요. 그러면 이 친구는 죽으면 안 돼요. 못생긴 친구가 있어야 한조를 이루어서 부각이 되거든요.
사람들에게는 뭐가 환상이냐 하면 존재가 환상이에요. 모든 존재가 환상입니다. 우리 애가 이뻤는데, 만약에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이쁜 애가 어디에 갔어요? 벌써 없죠. 이뻤던 그 손녀가 10년 후에 동일한 그 손녀라 할지라도 엄마에게 있어서, 그 할머니에게 있어서의 그 이뻤다는 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꽂히는 거예요. 존재는 환상입니다. 환상.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 존재로 굳혀져버려요. 존재로. 우상이죠. 우상.
지금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면 그 변화에 우리가 따라줘야 해요. 더우면 더운 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추우면 추운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이 더운데서 못 살아!”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왜 너한테는 특별히 더워서는 안 되는데?” “나는 더운 것은 싫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나는 안 더워야 돼.”라는 그것에 고정관념이 확정돼버리면, 그게 환상인데 그걸 믿어버려요. “나는 안 더워야 될 사람이다.” 그걸 확정짓고 믿고 있어요. 환상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제 시간이 있는 이유를 알겠죠. 시간과 더불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불가능성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시간이라는 것을 투입시켜버립니다. 니는 어떻게 해도 본래의 니 모습을 찾아낼 길이 없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인간은 자기에게 꽂히고 자기가 좋았다고 하는 그것을 계속해서 없는데도 찾고 있는 거예요. 없는데도. 그런 경우가 없는데도.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볶음밥을 맛있게 해줬어요. 근데 그날따라 애가 배가 고팠는지 평소대로 그냥 해줬는데 맛있다는 거예요. 치즈가 녹아내리면서 치즈랑 같이 먹으니까 맛있었던 모양이죠. 엄마는 자식이 맛있다고 하면 연발로 한 일주일을 계속해서 먹이잖아요. 근데 두 번째 먹으니까 맛이 없는 거예요. “엄마! 맛있는 거 해줘”라고 하는 거예요. 엄마가 하는 소리가 “똑같아. 재료 똑같고 다 똑같아.” “아니야. 아니야. 그 맛이 아니야.” “어쩌라고? 그럼 어쩌라고?”
우리 주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줍니다. 주는데, 그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하거나 감사하지 않는 겁니다. 헛바람 들은 거예요. 인간은 헛바람이 들은 겁니다. 마귀에 의해서 신이라고 잠시 착각했던, 그런 나라는 존재를 본인이 잊지를 못해요. 잊지 못하는 것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잊지 못한 것이. 점점 늙잖아요. 늙으면 수용을 해야죠. 나는 늙는다. 늙으면 나중에 죽는다. 이걸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수용하라 이 말이죠. 근데 나는 늙으면 안 돼! 나는 아프면 안 돼! 나는 더우면 안 돼! 그럼 어쩌라고?
인간은 그 변화를 누가 줬는지는 생각을 안 하고, 내가 꽂혔으니까 내 뜻대로 모든 세상이 돌아가야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변화를 줌으로 말미암아, 니는 좀 완전히 주저앉아라 이 말이죠. 니는 좀 깨져라 이 말입니다. 내가 존재의 전부니까. 예수님만 살아있게 니는 좀 죽어 도! 이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예수님만 살아있게. 니가 살아있다고 설쳐대니까 예수님의 존재가 완전히 무가치하게 되잖아요.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베드로는 이 복음을 고발용으로 사용해요. 뭐, 열두제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창세전에 주님께서, 20절에 “그는 창세전에 이미 알려진바 되고”라고 할 때, 우리보고 뭐 지식하나 얻으라고 준 말씀이 아니에요. 고발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왜 안 먹히느냐, 이미 우리는 완고한 내 존재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완고한 내 존재가. 예수님이 뭐라고 하던 나는 관심도 없어요. 더운데 다 귀찮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라는 것을 그렇게 고집부리지 말고, 주님이 먼저 계시고, 존재는 주님으로 족해요. 그 다음에 존재에서 뭐가 나온다? 변화가 나오잖아요. 그 변화에 니가 같이 휘말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24절에 나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시고 24절을 보게 되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육체는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육체는 풀 같고, 근데 목사님 풀도 존재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건 존재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꽃이면 괜찮은데?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뭐냐 하면, 풀은 어떻게 돼요?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죠.
그러면 여기에다가, 모든 육체를 풀로 봤기 때문에, 그 풀에다가 모든 육체를 집어넣어봅시다. 우리 자신부터. 그럼 우리 자신은 어떻게 된다? 우리 자신은 마르게 되어 있고, 우리 자신은, 모든 존재는 추락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어느 존재가 우리에게 그렇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십니까? 어느 존재가? 바로 창세전부터 계신 예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그런 형벌과 처벌을 했다는, 그런 조치를 했다는 거예요. 24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이걸 가지고 25절에 보니까, 25절,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게 바로 두자로 복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 참, 사도 대단하죠. 제가 수요일에 두 번씩이나 도끼로 쪼갠다는 말을 했던 모양이죠. 나는 그냥 사람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드라마를 보고 한 이야기인데, ‘같이 살래요’에 나오는 이사장 부인이야기. 천하에 교양이 있는 체를 해가지고 말하는 것도 하여튼 얄밉게 말하는 그것. 그래서 제가 사람 죽이라고 쪼개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뭐가 들어있어서 그렇게 교만한지를 그게 보고 싶어서 쪼개라고 두 번씩이나 이야기를 했거든요.
근데 제가 참 가혹하게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근데 제가 말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복음이 뭐냐 하면 쪼개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고갈시켜버려요. 저수지에 비 오면 저수지가 출렁거리면서 아주 풍부하게 보이죠. 근데 만약에 가뭄이 들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저수지가 바닥이 드러나 버리죠. 주님께서는 아예 벼르고 있습니다. 바닥을 드러내요. 우리 자신의 바닥을. 뭐로? 말씀으로. 무슨 말씀을 지킵니까? 말씀은 우리가 가린 모든 것을 증발시켜버리는데. 황폐죠. 고갈.
그래서 우리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겁니다. 우리의 바닥은 결국은 그릇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담긴 게 없는 바람. 그게 헛바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헛바람. 자, 어느 정도로 헛바람이라 하면, 저의 주특기, 노래가사가 동원됩니다. 노래가사를 들어보면 여러분들이 이 노래를 아실 거예요. 옛날 이수만이 부를 때,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이게 헛바람인줄 몰랐어요. 가사가 뭐냐 하면,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헛바람!
이 노래를 옛날 이수만이가 불렀을 때, 그래, 난 욕심 안 내겠어. 그냥 사랑하는 사람하고, 비둘기 집이 크지 않잖아요. 장미넝쿨로 해가지고, 별로 크지 않잖아요. 이 정도로 하면 욕심이 없겠지, 라고 누가 이야기를 하겠지. 헛바람! 작은 비둘기 집, 창문 하나에 얼굴 두 개 내미는, 이것마저 헛바람이라고 한다면 헛바람이 아닌 게 어디에 있어요? 다 헛바람이죠. 바짝 고갈시킨다니까요. 인생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어요. 누가? 주님이. 올해도 만만치 않지만 내년에는 45도까지 올라가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진짜 바짝 마르죠. 비도 안 오고 45도. 지금 포르투갈 45도, 스페인이 45도까지 올라갔다는데. 그 나라들 천주교 순례관광 수입으로 먹고 사는 나라인데, 지금 마리아님 뭐하고 있는지 몰라?
사람이 망상이나 허상이 없으면 그냥 변화에 순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에. 왜? 그냥 빈 그릇에 무엇이 담기든 간에 그거는 제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죠. 아니, 그런 식으로 고백한다면 최고죠. “주께서 내 인생에 뭘 담을 지는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입니다.”라고 빈 그릇을 그냥 제공하면 되는 것이거든요. 무엇이 담기든. 빨간 것이 담기든 파랑이 담기든, 담긴 대로 살면 되는데. 그런데 뭔가 꽂힌 것, 기억들이 가동돼버리면, 그것이 결국은 자기가 뭔가 된 줄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 지금까지는 서론이고요.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봅시다. 지난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 어떤 사람이 저한테 그래요. 복음이 뭡니까? 뭐, 다 알지만, 달리 복음이 뭔지를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복음이 뭐냐 만남이에요. 근데 사람은 그 만나는 사람을 누가 정하고 싶은가 하면 내가 정하고 싶어요. 나한테 이익이 되는 사람은 만나고, 안 그러면 안 만나고 싶거든요. 그런데 진짜 복음을 만난 사람은 내가 예상 못한, 내가 원치 않은 만남이 주어지는 겁니다. 만남이. 예수님을 학수고대한 사람은 유대사회에서 아무도 없습니다. 목수의 아들을 만나려고 그렇게 고생하고 성경을 연구한 게 아니거든요.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야 상(像), 이미지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그 이미지를 어디에서 끄집어내는 겁니까? 본인들이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만남은 자기의 존재가 고정된 것처럼 자기가 원하는 메시야도 존재로서 확정되고 고정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확정되고 고정된 것. 메시야 만났다. 끝. 그걸로 천국까지 계속 이어져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근데 주님은 오셔서, 베드로전서 1장 24절의 말씀처럼 24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절,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 말씀에 준해서 예수님이 와버린 겁니다. 근데 이 말씀에 준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씀이 어디에 나옵니까? 라고 물으면 이사야 40장에 보면 나와요. 2절에 보면,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그 다음의 말씀은 쉬운 말씀이 아니에요. 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라고 되어 있고요. 5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의 말씀하셨느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여기서 제가 뭐가 어렵다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말 또는 말씀, 그냥 말이라고 합시다. 말씀이라고 하면 선입관이 있기 때문에. 말이라고 합시다. 말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정착할 수 있는 방식이 뭐냐는 겁니다. 인간은 몰라요.
말씀이 이 세상에 정착하는 방식은, 말씀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자신들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율법을, 계명을 지키면 현실화된다. 이 땅에 온다고 된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죄사함이라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말씀대로 사는데 무슨 죄가 있어요. 말씀대로 사는데. 안 되잖아요. 지금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 뭐냐 하면 죄지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기정사실화를 시키기 위해서 메시야가 오면 죄라는 것이 뭐냐 하면 그 말씀과 말씀을 이 땅에 정착시키는 방식이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가 문제냐? 이사야 40장 5절에서 육체가 문제라는 거예요. 내가 문제에요. 내가 말씀 지켜서 알아서 죄를 없애고 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만남이 이루어져야 해요.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려면, 그 만남으로 오시는 분은 누구냐 하면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거예요. 그럼 그 다음부터는 쉬워요.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분에게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그게 말씀의 기능입니다. 말씀의 기능은 나름 내 존재를, 아까 존재이야기를 했죠. 마른풀이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시는 그 이야기죠.
내가 내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는 그 말씀에 대해서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망상을 한다고요. 그러면 그거는 내가 말씀을 만났기 때문에, 말씀과 나하고 엮이는 방식을 내가 지금 실시하고 있는 것이기에, 내가 말씀 지키는 그 방식 말고 따로 다른 방식이 전혀 필요치 않는 거예요. 내가 좀 게을러서 못 지키면 그건 다음에 반성하면 되잖아요.
근데 반성이고 뭐고 이게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말씀이 나하고 만나서 정착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과 엮여서 말씀이 정착이 되는 거예요. 정착이 되게 되면, 그 다른 분과 엮여서 말씀이 정착이 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정착이 되는지 알 수가 없죠. 나중에 정착되는 방식을 알려드릴게요. 미리 알려 드릴까요? 미리 알려 드릴게요. 말씀이 나 말고 다른 분과 이렇게 연결되어서 현실화되고 정착이 되는 방식은 뭐냐 하면 놀랍게도 잃어버림이에요. 잃어버림.
잃어버리면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 존재가 날아가 버리면, 말씀이 이 지상에 가시화되고, 정착이 되고, 현실화되고, 실현되는 방식 자체가 없어진다고 우리는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아들에게 돈 오만 원을 주려고 생각했는데, “아들아! 돈 오만 원 여기에 있다.”라고 하는 이것은 자기 정착방식이죠. 오만원이 말씀이라면, 내가 돈 오 만원을 주면 아들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돈 오만원이라는 가치가 아들에게 웃음을 띠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들아! 돈 오만 원 줄게. 어디에 갔어?”라고 했는데, 아들이 벌써 가출했는데 어떡할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잃어버린 자에요. 잃어버린 자. 성경을 해석할 때에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의 정신을 받아서 그렇게 하자고 하는데, 이거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요. 정말 도끼로 이마 까라 해버려야 돼요. 그게 아니고 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가 존재라니까요. 말씀이 오기 전에 우리는 존재에요. 마귀로부터 그렇게 세뇌를 받았습니다. “잘해라. 너에게 선악지식을 폼으로 준 게 아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살라고 말씀 줬어. 니가 나태해가지고 그걸 개무시 하면 되겠어? 영광 돌리려면 니가 말씀 지켜야지.”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하고 말씀을 엮이게 하는 거예요. 니가 게으르면 못 지키고 열심히 하면 지켜진다고.
그러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게 되면, 마귀가 준 우리의 본성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우리의 의도가 아니에요. 자동화에요. 자동화. 자동적으로 말씀이여 오라! 지키겠다는 거예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훈시를 하는데, 선생님의 훈시를 무시하든 받아들이든 어쨌든 간에 의식을 했잖아요. 내가 ‘아니요’를 하든지 ‘예’를 하든지 어쨌든 말씀을 들었잖아요. 인간에게 말씀을 주게 되면 인간은 그걸 지키든 안 지키든 이미 자기 존재 선에서 나는 지키겠다, 나는 거부하겠다, 라고 결정을 내린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말씀이 우리를 잃어버리게 하는데요? 말씀이 오는데 우리 존재를 왜 잃어버려요?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말씀과 엮여져서 오심으로 우리를 잃어버린 자가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잃어버렸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왜 잃어버린 예수님을 가로막고 있었는가? 우리는 뭐가 잘못돼서 완전히, 주님 주셨으니까 이제는 제가 알아서 한다고 하는 자체가, 모든 말씀이 주님에게 응축되는 그 방식을, 기존의 내 방식으로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감추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합니까? 내 식으로 하겠다고 하는 것을 뜯어내야 되죠. 아파요. 정말 아파요. 뜯기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이러면 불가능하잖아요?” 이러는 거예요. “주님! 이렇게 나오면 내 구원에 불가능하잖아요? 주님께 영광 돌리는데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오늘 제일 중요한 단어죠. 불가능. 불가능을 체험을 해줘야 합니다. 불가능을. 불가능 체험을 안 하면 신자가 아니에요.
불가능을 다른 말로 하면, “나 애초부터 잃어버린 자로 취급을 해주시는구나!”에요. 애초부터. 우리는 덜렁대면서 “말씀이여 오라!” 뭐 이렇게 지 으스대고 싶어서 환장을 했는데, 주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가리고 있는 나 덩어리, 덩어리 있잖아요? 육신의 덩어리를 긁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전에 여러 번 이야기를 했잖아요. 부산 제 3부두에 가면 왔다 갔다 하는 큰 배도 있지만, 한쪽 구석에, 후진 데에 개울가에 가면 배가 하나 있는데, 그 배는 뭐냐 하면 아주 힘든 작업을 해야 돼요. 노후 된 배기 때문에 페인트를 다 긁어내야 돼요. 근데 이건 아무나 못하죠. 긁어낼 때 암 유발 물질이 나오기 때문에 그건 또 아르바이트를 쓰는데, 얼굴에 뒤집어쓰고 땀 뻘뻘 흘리면서 다 긁어내는 겁니다.
주님은 나라는 존재를, 말씀과 붙어있는 나라는 존재를, 녹이 슬었다는 이유 때문에, 선악적사고방식을 가지고 달라붙어있는, 조금만 뭐해도 나 잘했죠? 잘했죠? 라고 하는 그 녹을 다 긁어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잘해볼라고 하잖아요? 맨날 우리의 변명은 잘해보려고 했는데, 뭐 지금은 뭣 때문에 못했고 다음에는 잘하겠다는 거예요. 맨날 선악적인 사고방식으로 지금은 못했지만 다음에는 안 한 것까지 더 보태서 잘하겠다는 거예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너는 빨리, 속히 잃어버린 자에 합류하라는 겁니다. 예수님 가신 길은 이 땅에서 버림받은 길, 잃어버린 자에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저를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 했지, 어느 누구도 그 이야기를 했던 분이 없어요. 그 정도로 우리는 못됐어요. 정작 버림받을 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 아니고 우리가 버림받아야 하면서도 우리는 아주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거예요.
불교에 보면 화엄경인가 뭔가에 보면, 불교경전에 그런 게 있어요. 지옥 불에 간 엄마를 구하기 위해서 극락 간 딸이, ‘신과 함께’하고 좀 비슷한데, 팔을 내밀어서 엄마가 잡으면 그 엄마의 중량을 견디는, 엄마만 돼요. 딴 사람은 삐(☓)하고 안 맞아요. 엄마만 건질 수 있는 팔을 줬다 이 말이죠. 엄마만 딸려 와야 되는데 다른 사람이 붙어있으니까, 지 떨어질까 싶어서 발길로 차다가 나중에는 다 같이 빠졌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 팔을 잡을 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부사로 할게요. 야무지게. 빡세게. 열심을 다해. 부지런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절히. 그걸 간구하고 해요. 간구. 자기마음을 비우면서. 어떤 부사나 형용사를 다 동원해도 결국 뭡니까? 내 구원은 누구 손에 달렸어요? 내 손의 힘에 달렸어요. 미리 손에 힘이 있는지 검사해가지고,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손에 힘이 없어서 팔에서 미끄러질 수가 있어요. 야무지게 주님을 붙잡고, 간절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힘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간절히 붙드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어디에 있느냐고 하면, 성경말씀에 있다는 거예요. 간절히 부르짖고 순종하라는 말씀이. 근데 성경말씀에 간절히 부르짖고 순종하라는 그 말은 녹을 벗겨내는 작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뜯겨라 이 말입니다. 그 말씀을 내가 지킨다는 그 자체가, 그 순간에 뭘 가려버렸어요? 이 말씀이 주님과 직결된다는 사실에 자기가 중간에 새치기해서 들어간 겁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새치기 하는 그것을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면, 그러면 행함은 뜯겨지고 믿음은 남겠네요? 아니요. 행함이고 믿음이고 다 뜯겨져 나갑니다. 그러면 뭐냐, 없는 존재가 돼요. 없는 존재. 애초부터 없는 존재가 돼요. 그게 뭐냐 하면 그냥 풀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마른풀, 그냥 풀이 아니고 마른 것이 합당한 조치가 되는 그 풀. 그리고 떨어진 적이 있는 꽃을 잠시 피워본 적이 있는, 나는 꽃이라고 잠시 착각해본 적이 있는, 떨어진 꽃을 피워본 적이 있는 풀. 그리고 그것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 복음. 그게 바로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 복음을 내가 가린 거예요. 내가. 성경을 보면서 다이렉트로 나 여기 있으니까 나에게 성경을 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버림받는 자리가 우리 자리입니다. 왜? 예수님마저 버림받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자리에 그냥 있어야 돼요. 그게 예수 안이고 십자가 안이에요. 거기서 껄렁대면 안 됩니다. 어깨에 힘주고 껌 씹으면서 침 뱉고 해서 후배들 갈구고 그러면 안 돼요. 옛날에 17대 1로 싸웠다고, 천국에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주제에. 다 같이 잃어버린 주제에.
21절을 봅니다. 21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세상을 다녀가셨다고 보시면 이해가 쉽게 되겠죠. 예수님께서 다녀갔다는 그것을 다른 말로 이야기하세요. 죽었다가 살아났다. 근데 세상을 다녀갔죠. 그러면 세상 이퀄(=) 뭐죠? 죽음이죠(세상=죽음). 죽어야 사는 자.
근데 그 죽음이 재수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응하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을 지켰는데 예수님은 죽었고, 우리가 말씀 지켰는데 우리는 살았고. 활어에요. 속초에서 올라오는 활어. 펄펄 살았어요. 죽지마라, 죽지마라, 죽지 말라고 매일같이 우리자신에게 독촉하고, 독려하고, 격려하는 것은 뭐냐, “죽지 마!”에요. 죽지 말라고 매일 자기 격려하는데 바빠요.
그러면 목사님, 내가 죽는 방법이 뭡니까? 그 다음에 쉽게 나오는 질문이죠. 내가 나를 죽이는 방법이 불교에요. 바보들이에요. 나는 무(無)다. 나는 없다. 없는지 한번 째볼까? 아야! 하는지. 자기가 있는데 없다는 거예요. 방법 알려 드릴까요? 하여튼 불교식으로 도 닦는 것은 안 돼요. 나는 없다. 이건 안 됩니다. 그건 속임수에요. 그건 자기가 하나의 연출을 하는 거예요. 방법을 알려 드려요? 뭐 뜸들이지 말까요? 밥은 뜸 들여야 제 맛인데요.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구상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와서, 남들의 요구사항이 내 안에 채워진 것이 자아에요. 너는 이렇게 돼야 된다고 어릴 때부터 세뇌 받고 교육받은 겁니다. “엄마! 이렇게 하면 돼? 아빠 이러면 괜찮아?” 항상 우리는 누가 보란 듯이 살았습니다. 방금 지나간 애 있잖아요? 그 애도 마찬가지에요. 좀 더 크면 눈치 볼 줄 알고. 눈치 본다는 것이 뭡니까? 의식한다는 거잖아요. 지 뭐 다 쳐다보면 좋아가지고 막 웃죠. 자기 안 보고 드라마 보면 tv끄라고 하죠. 왜 엄마 아빠는 자기 안 보고 드라마만 보냐 이거에요. 그래서 지가 드라마 못 보게 방해공작을 막 해요. 그 정도로 자기를 의식한다고요.
따라서 나를 찾는 방법은 타인의 요구 있잖아요. 남을 미워하면 돼요. 아, 이 좋은 방법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닌데. 남을 미워하는 거예요. 남을. 내가 남을 지극히 미워하면 그 사람이 나를 안 미워할까요? 괜히 가서 시비를 거는데 그 사람이 가만히 있을 겁니까? 그러면 나는 녹이 이제 벗겨지는 거예요. 나 잘난 것,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괜찮은 이미지 있잖아요. 작살나는 겁니다.
김경수라는 사람 혹시 알아요? 뭐 킹하고 관계가 돼있는데? 드루킹. 김경수라는 경상도지사가 검찰청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팬들이 많았어요. 그 다음에 또 들어갈 때는 태극기 든 사람들이 많았어요. 장미가시에 찔려 죽으라고 장미 막 던지고. 자, 한번 생각해보세요. 팬들은 뭐냐 하면, 그대 있으매 우리가 살았다는 거예요. 김경수를 도지사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들이에요. 정치적으로 후원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대 있으매 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김경수를 미워하면 싫어하는 거예요. 촛불 집회 이후에 문재인이 있으매 내가 있는 거예요. 물론 그게 언제까지만 그랬느냐 하면 최저임금 정할 때까지만 그랬어요. 그 다음에는 골치 아파요. 최저임금 올리고 난 뒤에 엉망이 돼버렸어요.
그런데 만약에 김경수를 싫어하는 사람이 저 인간 죽으라고 한다면, 뭐 이렇게 심지어 빨갱이라고까지 할 때, 서로가 미워해버리면 니 죽고 내 죽는 거예요. 니 죽고 내 죽는 거. 그게 내가 죽는 방법이에요. 참 쉽죠. 날마다 미워하면 되는 거예요. 근데 제 이야기를 듣고 또 되도 않는 사람이, “목사님! 저한테 너무 어려운 과제를 주셨어요?”라고 하는데, 아이고, 정말 정말로 못 보겠네. 매일 아침부터 눈 떠서 저녁까지 할 일이 그런 일을 했는데, 뭐 새삼스럽게 점잖은 체를 합니까? 눈만 뜨면 미운 놈 찾아내기 바쁜데. 오늘도 누구 좀 한번 씹어볼까? 이게 우리의 삶의 보람인데, 뭘 또 아닌 척을 하고 있어요? 세상에 남을 미워하는 것만큼 쉬운 것이 또 어디에 있어요? 드라마 보는 재미가 뭡니까? 미운 놈 나오기만 해봐라. 이야기 좀 듣자고 하는데, 욕하다가 드라마 50분 다 끝나요.
자기 자신을 감추는 사람은 말을 해도 조심스럽게 해요. 왜? 자기 이미지 관리로 나서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러워요. 그런데 성령 받은 열두제자, 베드로 보세요. 과격의 끝이에요. 세상에! 저래가지고 목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죽었잖아요. 사울도 나중에 바울이 되고 난 뒤에 좀 심하다. 꼭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죽었잖아요. 욕 얻어먹었잖아요. 심지어 자기가 세운 고린도교회에서 미움을 받았죠.
사도행전을 시간 가서 다 못하지만, 데살로니가 내려갔을 때 디모데가 죽어났어요. 왔다갔다 네 번. 사도바울이 디모데보고 아테네로 오라고 해서 갔죠. 고린도로 오라고 해서 왔죠. 와서 하는 이야기가 환난가운데에서 이겨냈다고 하니까, 바울이 그래, 잘했다고 하고 편지 보내고. 그런데 잘하기는 잘했는데 재림에 대해서 잘못생각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래, 또 편지 보내고. 한번 편지 보낸 것이 데살로니가전서, 두 번째 보낸 것이 데살로니가후서. 다시 또 내려와서 이제는 괜찮게 되었다고 하니까, 그래, 그러면 편지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고.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모든 일을 다 했어요. 열심히 다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인생은 힘들죠.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게 왜 어려운가 하면, 잃어버림은 내가 스스로 도 닦아서 잃어버리지 않고, 내가 상대방에게 나쁜 소리를 했을 때 그 사람이 나를 잃어버리게 하는 착한 짓을 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절대로 나는 올바르고 정당하고, 내 존재는 고귀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내 손으로 내 손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주께서는 상대방을 통해서 나를 작살내고 박살내는 겁니다. “너는 인간도 아니야.” 그게 바로 주께서 벌이신 다 잃어버림의 방식입니다. 주님이 바로 그 일을 하셨어요. 우리는 남한테 나쁜 소리를 안 들으려고, 이미지 관리한다고 얼마나 알랑방구(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더럽게 아첨하는 모양)를 뀌고 했습니까?
자, 정착이야기를 해봅시다. 말씀의 정착이라는 것은 이미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말씀을 우리에게 줬거든요. 아까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냥 성경 덮어버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라고 했죠? 하면 되고요. 하지 말라고 했죠? 안 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조금 실수를 했으면 반성해서 잘못했다고 하면 되고. 뭐? 뭐가 말씀이 어렵냐 이거에요. 안양강의의 제목을 말씀드립니다. 역발상신학이에요. 역(거스를逆)신학.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라고 하면 하면 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되고, 또 잘못했으면 회개하고 반성해가지고 제사 드리고 잘못했다고 하면 되고. 어려운 게 있어요? 없어요? 전혀 어려운 게 없는데, 예수님은 왜 그렇게 어렵게 하느냐 이 말이죠. 그걸 잃어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고방식이 버려져야 된다는 거예요. 안 버리죠. 그렇게 해서 쌓아놓은 스펙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정통 유대인들이 복장이 이상하잖아요. 욕 얻어먹을 요량하고 사진 찍어놨잖아요. 괴상하죠. 펭귄복장도 아니고. 부림절날.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지금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무슨 노력? 그냥 순수하게. 어떤 순수? 하라고 하면 하면 되고.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하면 안 먹으면 되잖아요. 오징어 먹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하면 그들은 뭐? 우리가 뭐가 잘못됐는데? 우리가 뭐가 잘못됐느냐 이 말이죠. 할례행하라고 해서 할례 행했어요. 안식일 지켰어요. 뭐? 뭐? 뭐가? 그게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거든요.
잃어버림? 웃기네. 절대로. 인간은 보호본능이 있는데 왜 날 잊어버립니까? 인간들은, 바리새인들은 가능하다고 여겼어요.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인간은 단절되어 있는 것을 몰랐어요. 가능으로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걸 압니까? 예수님이 보여 준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능이에요. 예수님은 니가 창세전부터 알았느냐? 우린 몰랐죠. 창세전부터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예수를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죽였잖아요.
그러면 이미 인간에게 문제 있다고 들통이 났죠. 인간에게 문제 있죠. 근데 스스로도 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간파할 재간이 없어요. 왜 자기 문제를 파악 못합니까? 나는 구원받아야겠다는 그 욕구를 스스로 자기가 후벼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난 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나는 남 좋은 일은 하기 싫다는 거예요. 이거 평생가도 못 고칩니다. 평생가도 못 고쳐요.
제가 지난 목요일인지 하여튼 버스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저보다 세 살이나 네 살 먹어 보이는 부부가 서있었어요. 근데 남편이 담배를 피워요. 그래서 제가 잘 걸렸다 생각하고 여기서 담배피우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죄송해요!!”하는 거예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게 아니고, 화난 투로 죄송하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를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했지만, 이 덩어리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그걸로 내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발작하듯이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그리고서는 제가 아무소리를 안 했어요. 근데 그 뒤의 말이 나를 아주 기쁘게 만들었어요. “나이도 몇 살 안 된 것이!” 나는 잃어버리기 위해서 사는데, 갑자기 나는 안 잃어버리고 싶어요. 나는 살 가치를 보존하고 싶어요. ‘내가 그렇게 젊었나?’하고 속으로 생각했죠. “나이도 몇 살 안 된 것이 어른한테!” 내가 볼 때는 나보다 한두 살밖에는 안 많은데. 나를 더 젊게 봤어요. 갑자기 나를 보존하고 싶은 충동이 확 일었어요. 큰 시험이 들 뻔 했습니다.
사람과의 대화가 된다는 것은, 사람과의 대화는 이런 겁니다. “나는 당신이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쪽에서 “피차일반이요.” 이런 관계를 두자로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 아까 제가 잃어버리는 방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미워해야 된다고 했죠. 내가 미워해야 저쪽이 날 미워하죠. 십자가마을에서는 하지 말고. 다 아니까. 다른 동네에서 그렇게 하세요. 다른 동네에서. 시비 걸지 말고. 인간의 본성을 고치고 싶어도 인간은 원체 자기를 못 버립니다. 시키는 대로 남 미워한다고 해도 그것이 또 하나의 나의 가능성의 수법이 되거든요.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가혹하게, 에이, 니는 바짝 마른 풀이라고 욕을 해도 그건 나보고 하는 소리 아니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한계를 이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이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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