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헛 수고 1808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8. 13. 09:12
2018-08-11 00:48:39조회 : 93         
헛수고 180810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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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8-08-12 23:17 
서울의존강의20180810a 베드로전서1장 20-25절(헛수고)-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1장 20-25 

20절,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1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절,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 
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절,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20절을 봅시다. 20절,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이렇게 되어 있죠. 시간의 시작은 예수님으로부터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시작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시간이 끝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알죠. 그러면 시간이 끝이 있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아느냐, 시간이 끝이 있다는 것은, 처음 시간이 시작하는 것이 천지창조와 더불어 시간은 나타납니다. 창조와 더불어서. 해와 달과 별들이 시계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있는 한, 시간은 재깍재깍하고 변화를 보여준다 이 말이죠. 

근데 그러한 창조물들이 사그리 다 없어진다면, 이건 변화의 여지가 없죠. 변화의 여지가 없으면 시간도 같이 없는 것입니다. 시간은 변화를 통해서 파악이 되기 때문에. 그 변화가 없으면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시간을 만들었다는 것은, 예수님 자체가 변화가 있다는 말입니까?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까? 예수님 자체는 변화가 없어요. 예수님 자신이 변화가 없어요. 

제가 한번 써 볼 테니까 어느 것이 맘에 드는지 골라잡으세요. 자, 첫 번째 경우하고 두 번째 경우하고 둘 중에 어느 것이 맘에 드는지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일단은 여자 분은 놔두고 남자 분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예를 드는 겁니다. 우연히 카페에 갔는데, 어떤 여인이, 그냥 여자가 아니에요. 여인이에요. 마침 햇빛이 사선으로 테이블 반을 차지하면서 드리워져있는데, 여인이 앉아있는 거예요. 옆모습을 보니까, 한눈에 확 반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이 카페는 마른 꽃이 걸려있는 카페에요. 이 여인은 창가에 앉아서 뭘 마시는데, 외로움을 마셔요. 자, 이 남자가 한눈에 딱 반해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남자가 반한 이 여인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스듬히 눈부신 햇살을 받으면서 앉아있는 여인에게 반해버린 겁니다. 그러면 여자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근데 여자가 아름답지를 않아요. 다만 아름다움을 봐주는 남자가 있기 때문에, 남자의 심성 속에 그 여인은 아름다운 겁니다. 그러면 이 남자에게 이 여인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 각인된 이 순간을, 이게 만약에 2개월 전이라면, 그렇다면 이 여인을 어디서 찾을 수가 있습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같은 동네 사람이었고, 혼자 살고 있고, 혼자 사니까 작업 대상이 되겠죠. 혼자 사니까. 껄떡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길에서 만났는데, 그 여자는 분명히 그 여자에요. 이 여자가 맞는데, 이런 게 어려워요. 내가 반한 여자는 지금 길에서 만난 분명 그 카페에 있었던 그 여자가 아니에요. 내가 반해버린 그 여자는 카페에 앉아있어야 돼요. 그것도 마른 꽃이 걸려있는 그곳이어야 하고 햇빛이 비스듬히 와 비춰야 하고 그것도 똑바로 앉아있으면 안 되고 옆으로 앉아있어야 돼요. 그러면 이 남자의 이상향에 있어서 이 여인은 있어요? 없어요? 존재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나중에 한 6개월 뒤에 가보니까 그 카페가 재개발 들어갔어요. 철거되었어요. 그 상황을 재현할래야 재현할 수가 없어요. 철거당해가지고. 

그리고 그때 반했던 그 여자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요. 근데 그 다음에 보니까 그 여자가 몸빼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저히 이 남자가 반했던 이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남자는 미치는 겁니다. 왜? 존재하지 않지만 이미 자기 속에 그 여자의 아름다운 것이 쏙 들어오고 말았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동일한 여자라고 할지라도 자기한테는 성이 안 차요. 이런 경우가 바로 존재입니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이미 고정되어 버렸어요. 고정. 

두 번째 경우는 뭐냐 하면 어떤 여자가 있는데 시시해요. 별로 땡기지를 않아요. 근데 그 여자가 같은 동네에 사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한번 만났을 때는 별로였어요. 두 번 만났을 때도 별로였어요. 세 번째 만나서 인사를 하고 하는데, 이제는 그 여자에 의해서, 적극적인 그 여자에 의해서 본인이 좋아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어요. 첫 번째 경우는 본인 쪽에서 꽂힌 거고, 두 번째 경우는 그 여자가 이 남자의 정신을 변화시켰습니다. 변화시켰죠. 그러면 이 남자는 말합니다. “나는 처음에는 안 좋았는데 자꾸 보니까 좋더라!” 

자, 첫 번째 경우와 두 번째 경우에서 어느 것이 좋습니까? 물론 결혼한 사람한테는 둘 다 안 좋아져야 되죠. 예를 들어서 한 겁니다. 첫 번째, 두 번째에 있어서 정말 어느 것이 사랑이냐 이 말이죠. 사랑은 1번이겠어요? 2번이겠어요? 이게 정답내리기가 굉장히 힘든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1번은 없죠. 존재하지 않죠. 카페 재개발 들어갔으니까. 존재하려면 그 카페가 있어야 되고 그 테이블이 있어야 되고 그 햇빛이 있어야 되고... 

근데 그 여자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약간의 못생긴 친구를 데리고 왔다고 칩시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여자한테 꽂히는 순간 못생긴 이 여자는 죽어야 돼요. 못생긴 건 죽어야 돼요. 못생긴 건. 나머지기는 항상 제거해버립니다. 어디서 이쁜 것한테.. 근데 그 여자한테는 못생긴 것 때문에 이쁜 것이 더 부각이 되었어요. 그러면 이 친구는 죽으면 안 돼요. 못생긴 친구가 있어야 한조를 이루어서 부각이 되거든요. 

사람들에게는 뭐가 환상이냐 하면 존재가 환상이에요. 모든 존재가 환상입니다. 우리 애가 이뻤는데, 만약에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이쁜 애가 어디에 갔어요? 벌써 없죠. 이뻤던 그 손녀가 10년 후에 동일한 그 손녀라 할지라도 엄마에게 있어서, 그 할머니에게 있어서의 그 이뻤다는 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꽂히는 거예요. 존재는 환상입니다. 환상.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 존재로 굳혀져버려요. 존재로. 우상이죠. 우상. 

지금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면 그 변화에 우리가 따라줘야 해요. 더우면 더운 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추우면 추운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이 더운데서 못 살아!”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왜 너한테는 특별히 더워서는 안 되는데?” “나는 더운 것은 싫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나는 안 더워야 돼.”라는 그것에 고정관념이 확정돼버리면, 그게 환상인데 그걸 믿어버려요. “나는 안 더워야 될 사람이다.” 그걸 확정짓고 믿고 있어요. 환상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제 시간이 있는 이유를 알겠죠. 시간과 더불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불가능성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시간이라는 것을 투입시켜버립니다. 니는 어떻게 해도 본래의 니 모습을 찾아낼 길이 없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인간은 자기에게 꽂히고 자기가 좋았다고 하는 그것을 계속해서 없는데도 찾고 있는 거예요. 없는데도. 그런 경우가 없는데도.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볶음밥을 맛있게 해줬어요. 근데 그날따라 애가 배가 고팠는지 평소대로 그냥 해줬는데 맛있다는 거예요. 치즈가 녹아내리면서 치즈랑 같이 먹으니까 맛있었던 모양이죠. 엄마는 자식이 맛있다고 하면 연발로 한 일주일을 계속해서 먹이잖아요. 근데 두 번째 먹으니까 맛이 없는 거예요. “엄마! 맛있는 거 해줘”라고 하는 거예요. 엄마가 하는 소리가 “똑같아. 재료 똑같고 다 똑같아.” “아니야. 아니야. 그 맛이 아니야.” “어쩌라고? 그럼 어쩌라고?” 

우리 주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줍니다. 주는데, 그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하거나 감사하지 않는 겁니다. 헛바람 들은 거예요. 인간은 헛바람이 들은 겁니다. 마귀에 의해서 신이라고 잠시 착각했던, 그런 나라는 존재를 본인이 잊지를 못해요. 잊지 못하는 것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잊지 못한 것이. 점점 늙잖아요. 늙으면 수용을 해야죠. 나는 늙는다. 늙으면 나중에 죽는다. 이걸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수용하라 이 말이죠. 근데 나는 늙으면 안 돼! 나는 아프면 안 돼! 나는 더우면 안 돼! 그럼 어쩌라고? 

인간은 그 변화를 누가 줬는지는 생각을 안 하고, 내가 꽂혔으니까 내 뜻대로 모든 세상이 돌아가야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변화를 줌으로 말미암아, 니는 좀 완전히 주저앉아라 이 말이죠. 니는 좀 깨져라 이 말입니다. 내가 존재의 전부니까. 예수님만 살아있게 니는 좀 죽어 도! 이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예수님만 살아있게. 니가 살아있다고 설쳐대니까 예수님의 존재가 완전히 무가치하게 되잖아요.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베드로는 이 복음을 고발용으로 사용해요. 뭐, 열두제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창세전에 주님께서, 20절에 “그는 창세전에 이미 알려진바 되고”라고 할 때, 우리보고 뭐 지식하나 얻으라고 준 말씀이 아니에요. 고발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왜 안 먹히느냐, 이미 우리는 완고한 내 존재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완고한 내 존재가. 예수님이 뭐라고 하던 나는 관심도 없어요. 더운데 다 귀찮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라는 것을 그렇게 고집부리지 말고, 주님이 먼저 계시고, 존재는 주님으로 족해요. 그 다음에 존재에서 뭐가 나온다? 변화가 나오잖아요. 그 변화에 니가 같이 휘말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24절에 나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시고 24절을 보게 되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육체는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육체는 풀 같고, 근데 목사님 풀도 존재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건 존재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꽃이면 괜찮은데?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뭐냐 하면, 풀은 어떻게 돼요?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죠. 

그러면 여기에다가, 모든 육체를 풀로 봤기 때문에, 그 풀에다가 모든 육체를 집어넣어봅시다. 우리 자신부터. 그럼 우리 자신은 어떻게 된다? 우리 자신은 마르게 되어 있고, 우리 자신은, 모든 존재는 추락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어느 존재가 우리에게 그렇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십니까? 어느 존재가? 바로 창세전부터 계신 예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그런 형벌과 처벌을 했다는, 그런 조치를 했다는 거예요. 24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이걸 가지고 25절에 보니까, 25절,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게 바로 두자로 복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 참, 사도 대단하죠. 제가 수요일에 두 번씩이나 도끼로 쪼갠다는 말을 했던 모양이죠. 나는 그냥 사람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드라마를 보고 한 이야기인데, ‘같이 살래요’에 나오는 이사장 부인이야기. 천하에 교양이 있는 체를 해가지고 말하는 것도 하여튼 얄밉게 말하는 그것. 그래서 제가 사람 죽이라고 쪼개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뭐가 들어있어서 그렇게 교만한지를 그게 보고 싶어서 쪼개라고 두 번씩이나 이야기를 했거든요. 

근데 제가 참 가혹하게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근데 제가 말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복음이 뭐냐 하면 쪼개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고갈시켜버려요. 저수지에 비 오면 저수지가 출렁거리면서 아주 풍부하게 보이죠. 근데 만약에 가뭄이 들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저수지가 바닥이 드러나 버리죠. 주님께서는 아예 벼르고 있습니다. 바닥을 드러내요. 우리 자신의 바닥을. 뭐로? 말씀으로. 무슨 말씀을 지킵니까? 말씀은 우리가 가린 모든 것을 증발시켜버리는데. 황폐죠. 고갈. 

그래서 우리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겁니다. 우리의 바닥은 결국은 그릇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담긴 게 없는 바람. 그게 헛바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헛바람. 자, 어느 정도로 헛바람이라 하면, 저의 주특기, 노래가사가 동원됩니다. 노래가사를 들어보면 여러분들이 이 노래를 아실 거예요. 옛날 이수만이 부를 때,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이게 헛바람인줄 몰랐어요. 가사가 뭐냐 하면,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헛바람! 

이 노래를 옛날 이수만이가 불렀을 때, 그래, 난 욕심 안 내겠어. 그냥 사랑하는 사람하고, 비둘기 집이 크지 않잖아요. 장미넝쿨로 해가지고, 별로 크지 않잖아요. 이 정도로 하면 욕심이 없겠지, 라고 누가 이야기를 하겠지. 헛바람! 작은 비둘기 집, 창문 하나에 얼굴 두 개 내미는, 이것마저 헛바람이라고 한다면 헛바람이 아닌 게 어디에 있어요? 다 헛바람이죠. 바짝 고갈시킨다니까요. 인생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어요. 누가? 주님이. 올해도 만만치 않지만 내년에는 45도까지 올라가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진짜 바짝 마르죠. 비도 안 오고 45도. 지금 포르투갈 45도, 스페인이 45도까지 올라갔다는데. 그 나라들 천주교 순례관광 수입으로 먹고 사는 나라인데, 지금 마리아님 뭐하고 있는지 몰라? 

사람이 망상이나 허상이 없으면 그냥 변화에 순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에. 왜? 그냥 빈 그릇에 무엇이 담기든 간에 그거는 제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죠. 아니, 그런 식으로 고백한다면 최고죠. “주께서 내 인생에 뭘 담을 지는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입니다.”라고 빈 그릇을 그냥 제공하면 되는 것이거든요. 무엇이 담기든. 빨간 것이 담기든 파랑이 담기든, 담긴 대로 살면 되는데. 그런데 뭔가 꽂힌 것, 기억들이 가동돼버리면, 그것이 결국은 자기가 뭔가 된 줄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 지금까지는 서론이고요.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봅시다. 지난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 어떤 사람이 저한테 그래요. 복음이 뭡니까? 뭐, 다 알지만, 달리 복음이 뭔지를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복음이 뭐냐 만남이에요. 근데 사람은 그 만나는 사람을 누가 정하고 싶은가 하면 내가 정하고 싶어요. 나한테 이익이 되는 사람은 만나고, 안 그러면 안 만나고 싶거든요. 그런데 진짜 복음을 만난 사람은 내가 예상 못한, 내가 원치 않은 만남이 주어지는 겁니다. 만남이. 예수님을 학수고대한 사람은 유대사회에서 아무도 없습니다. 목수의 아들을 만나려고 그렇게 고생하고 성경을 연구한 게 아니거든요.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야 상(像), 이미지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그 이미지를 어디에서 끄집어내는 겁니까? 본인들이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만남은 자기의 존재가 고정된 것처럼 자기가 원하는 메시야도 존재로서 확정되고 고정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확정되고 고정된 것. 메시야 만났다. 끝. 그걸로 천국까지 계속 이어져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근데 주님은 오셔서, 베드로전서 1장 24절의 말씀처럼 24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절,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 말씀에 준해서 예수님이 와버린 겁니다. 근데 이 말씀에 준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씀이 어디에 나옵니까? 라고 물으면 이사야 40장에 보면 나와요. 2절에 보면,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그 다음의 말씀은 쉬운 말씀이 아니에요. 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라고 되어 있고요. 5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의 말씀하셨느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여기서 제가 뭐가 어렵다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말 또는 말씀, 그냥 말이라고 합시다. 말씀이라고 하면 선입관이 있기 때문에. 말이라고 합시다. 말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정착할 수 있는 방식이 뭐냐는 겁니다. 인간은 몰라요. 

말씀이 이 세상에 정착하는 방식은, 말씀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자신들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율법을, 계명을 지키면 현실화된다. 이 땅에 온다고 된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죄사함이라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말씀대로 사는데 무슨 죄가 있어요. 말씀대로 사는데. 안 되잖아요. 지금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 뭐냐 하면 죄지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기정사실화를 시키기 위해서 메시야가 오면 죄라는 것이 뭐냐 하면 그 말씀과 말씀을 이 땅에 정착시키는 방식이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가 문제냐? 이사야 40장 5절에서 육체가 문제라는 거예요. 내가 문제에요. 내가 말씀 지켜서 알아서 죄를 없애고 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만남이 이루어져야 해요.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려면, 그 만남으로 오시는 분은 누구냐 하면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거예요. 그럼 그 다음부터는 쉬워요.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분에게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그게 말씀의 기능입니다. 말씀의 기능은 나름 내 존재를, 아까 존재이야기를 했죠. 마른풀이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시는 그 이야기죠. 

내가 내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는 그 말씀에 대해서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망상을 한다고요. 그러면 그거는 내가 말씀을 만났기 때문에, 말씀과 나하고 엮이는 방식을 내가 지금 실시하고 있는 것이기에, 내가 말씀 지키는 그 방식 말고 따로 다른 방식이 전혀 필요치 않는 거예요. 내가 좀 게을러서 못 지키면 그건 다음에 반성하면 되잖아요. 

근데 반성이고 뭐고 이게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말씀이 나하고 만나서 정착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과 엮여서 말씀이 정착이 되는 거예요. 정착이 되게 되면, 그 다른 분과 엮여서 말씀이 정착이 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정착이 되는지 알 수가 없죠. 나중에 정착되는 방식을 알려드릴게요. 미리 알려 드릴까요? 미리 알려 드릴게요. 말씀이 나 말고 다른 분과 이렇게 연결되어서 현실화되고 정착이 되는 방식은 뭐냐 하면 놀랍게도 잃어버림이에요. 잃어버림. 

잃어버리면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 존재가 날아가 버리면, 말씀이 이 지상에 가시화되고, 정착이 되고, 현실화되고, 실현되는 방식 자체가 없어진다고 우리는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아들에게 돈 오만 원을 주려고 생각했는데, “아들아! 돈 오만 원 여기에 있다.”라고 하는 이것은 자기 정착방식이죠. 오만원이 말씀이라면, 내가 돈 오 만원을 주면 아들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돈 오만원이라는 가치가 아들에게 웃음을 띠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들아! 돈 오만 원 줄게. 어디에 갔어?”라고 했는데, 아들이 벌써 가출했는데 어떡할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잃어버린 자에요. 잃어버린 자. 성경을 해석할 때에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의 정신을 받아서 그렇게 하자고 하는데, 이거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요. 정말 도끼로 이마 까라 해버려야 돼요. 그게 아니고 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가 존재라니까요. 말씀이 오기 전에 우리는 존재에요. 마귀로부터 그렇게 세뇌를 받았습니다. “잘해라. 너에게 선악지식을 폼으로 준 게 아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살라고 말씀 줬어. 니가 나태해가지고 그걸 개무시 하면 되겠어? 영광 돌리려면 니가 말씀 지켜야지.”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하고 말씀을 엮이게 하는 거예요. 니가 게으르면 못 지키고 열심히 하면 지켜진다고. 

그러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게 되면, 마귀가 준 우리의 본성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우리의 의도가 아니에요. 자동화에요. 자동화. 자동적으로 말씀이여 오라! 지키겠다는 거예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훈시를 하는데, 선생님의 훈시를 무시하든 받아들이든 어쨌든 간에 의식을 했잖아요. 내가 ‘아니요’를 하든지 ‘예’를 하든지 어쨌든 말씀을 들었잖아요. 인간에게 말씀을 주게 되면 인간은 그걸 지키든 안 지키든 이미 자기 존재 선에서 나는 지키겠다, 나는 거부하겠다, 라고 결정을 내린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말씀이 우리를 잃어버리게 하는데요? 말씀이 오는데 우리 존재를 왜 잃어버려요?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말씀과 엮여져서 오심으로 우리를 잃어버린 자가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잃어버렸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왜 잃어버린 예수님을 가로막고 있었는가? 우리는 뭐가 잘못돼서 완전히, 주님 주셨으니까 이제는 제가 알아서 한다고 하는 자체가, 모든 말씀이 주님에게 응축되는 그 방식을, 기존의 내 방식으로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감추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합니까? 내 식으로 하겠다고 하는 것을 뜯어내야 되죠. 아파요. 정말 아파요. 뜯기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이러면 불가능하잖아요?” 이러는 거예요. “주님! 이렇게 나오면 내 구원에 불가능하잖아요? 주님께 영광 돌리는데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오늘 제일 중요한 단어죠. 불가능. 불가능을 체험을 해줘야 합니다. 불가능을. 불가능 체험을 안 하면 신자가 아니에요. 

불가능을 다른 말로 하면, “나 애초부터 잃어버린 자로 취급을 해주시는구나!”에요. 애초부터. 우리는 덜렁대면서 “말씀이여 오라!” 뭐 이렇게 지 으스대고 싶어서 환장을 했는데, 주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가리고 있는 나 덩어리, 덩어리 있잖아요? 육신의 덩어리를 긁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전에 여러 번 이야기를 했잖아요. 부산 제 3부두에 가면 왔다 갔다 하는 큰 배도 있지만, 한쪽 구석에, 후진 데에 개울가에 가면 배가 하나 있는데, 그 배는 뭐냐 하면 아주 힘든 작업을 해야 돼요. 노후 된 배기 때문에 페인트를 다 긁어내야 돼요. 근데 이건 아무나 못하죠. 긁어낼 때 암 유발 물질이 나오기 때문에 그건 또 아르바이트를 쓰는데, 얼굴에 뒤집어쓰고 땀 뻘뻘 흘리면서 다 긁어내는 겁니다. 

주님은 나라는 존재를, 말씀과 붙어있는 나라는 존재를, 녹이 슬었다는 이유 때문에, 선악적사고방식을 가지고 달라붙어있는, 조금만 뭐해도 나 잘했죠? 잘했죠? 라고 하는 그 녹을 다 긁어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잘해볼라고 하잖아요? 맨날 우리의 변명은 잘해보려고 했는데, 뭐 지금은 뭣 때문에 못했고 다음에는 잘하겠다는 거예요. 맨날 선악적인 사고방식으로 지금은 못했지만 다음에는 안 한 것까지 더 보태서 잘하겠다는 거예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너는 빨리, 속히 잃어버린 자에 합류하라는 겁니다. 예수님 가신 길은 이 땅에서 버림받은 길, 잃어버린 자에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저를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 했지, 어느 누구도 그 이야기를 했던 분이 없어요. 그 정도로 우리는 못됐어요. 정작 버림받을 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 아니고 우리가 버림받아야 하면서도 우리는 아주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거예요. 

불교에 보면 화엄경인가 뭔가에 보면, 불교경전에 그런 게 있어요. 지옥 불에 간 엄마를 구하기 위해서 극락 간 딸이, ‘신과 함께’하고 좀 비슷한데, 팔을 내밀어서 엄마가 잡으면 그 엄마의 중량을 견디는, 엄마만 돼요. 딴 사람은 삐(☓)하고 안 맞아요. 엄마만 건질 수 있는 팔을 줬다 이 말이죠. 엄마만 딸려 와야 되는데 다른 사람이 붙어있으니까, 지 떨어질까 싶어서 발길로 차다가 나중에는 다 같이 빠졌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 팔을 잡을 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부사로 할게요. 야무지게. 빡세게. 열심을 다해. 부지런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절히. 그걸 간구하고 해요. 간구. 자기마음을 비우면서. 어떤 부사나 형용사를 다 동원해도 결국 뭡니까? 내 구원은 누구 손에 달렸어요? 내 손의 힘에 달렸어요. 미리 손에 힘이 있는지 검사해가지고,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손에 힘이 없어서 팔에서 미끄러질 수가 있어요. 야무지게 주님을 붙잡고, 간절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힘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간절히 붙드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어디에 있느냐고 하면, 성경말씀에 있다는 거예요. 간절히 부르짖고 순종하라는 말씀이. 근데 성경말씀에 간절히 부르짖고 순종하라는 그 말은 녹을 벗겨내는 작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뜯겨라 이 말입니다. 그 말씀을 내가 지킨다는 그 자체가, 그 순간에 뭘 가려버렸어요? 이 말씀이 주님과 직결된다는 사실에 자기가 중간에 새치기해서 들어간 겁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새치기 하는 그것을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면, 그러면 행함은 뜯겨지고 믿음은 남겠네요? 아니요. 행함이고 믿음이고 다 뜯겨져 나갑니다. 그러면 뭐냐, 없는 존재가 돼요. 없는 존재. 애초부터 없는 존재가 돼요. 그게 뭐냐 하면 그냥 풀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마른풀, 그냥 풀이 아니고 마른 것이 합당한 조치가 되는 그 풀. 그리고 떨어진 적이 있는 꽃을 잠시 피워본 적이 있는, 나는 꽃이라고 잠시 착각해본 적이 있는, 떨어진 꽃을 피워본 적이 있는 풀. 그리고 그것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 복음. 그게 바로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 복음을 내가 가린 거예요. 내가. 성경을 보면서 다이렉트로 나 여기 있으니까 나에게 성경을 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버림받는 자리가 우리 자리입니다. 왜? 예수님마저 버림받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자리에 그냥 있어야 돼요. 그게 예수 안이고 십자가 안이에요. 거기서 껄렁대면 안 됩니다. 어깨에 힘주고 껌 씹으면서 침 뱉고 해서 후배들 갈구고 그러면 안 돼요. 옛날에 17대 1로 싸웠다고, 천국에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주제에. 다 같이 잃어버린 주제에. 

21절을 봅니다. 21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세상을 다녀가셨다고 보시면 이해가 쉽게 되겠죠. 예수님께서 다녀갔다는 그것을 다른 말로 이야기하세요. 죽었다가 살아났다. 근데 세상을 다녀갔죠. 그러면 세상 이퀄(=) 뭐죠? 죽음이죠(세상=죽음). 죽어야 사는 자. 

근데 그 죽음이 재수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응하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을 지켰는데 예수님은 죽었고, 우리가 말씀 지켰는데 우리는 살았고. 활어에요. 속초에서 올라오는 활어. 펄펄 살았어요. 죽지마라, 죽지마라, 죽지 말라고 매일같이 우리자신에게 독촉하고, 독려하고, 격려하는 것은 뭐냐, “죽지 마!”에요. 죽지 말라고 매일 자기 격려하는데 바빠요. 

그러면 목사님, 내가 죽는 방법이 뭡니까? 그 다음에 쉽게 나오는 질문이죠. 내가 나를 죽이는 방법이 불교에요. 바보들이에요. 나는 무(無)다. 나는 없다. 없는지 한번 째볼까? 아야! 하는지. 자기가 있는데 없다는 거예요. 방법 알려 드릴까요? 하여튼 불교식으로 도 닦는 것은 안 돼요. 나는 없다. 이건 안 됩니다. 그건 속임수에요. 그건 자기가 하나의 연출을 하는 거예요. 방법을 알려 드려요? 뭐 뜸들이지 말까요? 밥은 뜸 들여야 제 맛인데요.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구상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와서, 남들의 요구사항이 내 안에 채워진 것이 자아에요. 너는 이렇게 돼야 된다고 어릴 때부터 세뇌 받고 교육받은 겁니다. “엄마! 이렇게 하면 돼? 아빠 이러면 괜찮아?” 항상 우리는 누가 보란 듯이 살았습니다. 방금 지나간 애 있잖아요? 그 애도 마찬가지에요. 좀 더 크면 눈치 볼 줄 알고. 눈치 본다는 것이 뭡니까? 의식한다는 거잖아요. 지 뭐 다 쳐다보면 좋아가지고 막 웃죠. 자기 안 보고 드라마 보면 tv끄라고 하죠. 왜 엄마 아빠는 자기 안 보고 드라마만 보냐 이거에요. 그래서 지가 드라마 못 보게 방해공작을 막 해요. 그 정도로 자기를 의식한다고요. 

따라서 나를 찾는 방법은 타인의 요구 있잖아요. 남을 미워하면 돼요. 아, 이 좋은 방법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닌데. 남을 미워하는 거예요. 남을. 내가 남을 지극히 미워하면 그 사람이 나를 안 미워할까요? 괜히 가서 시비를 거는데 그 사람이 가만히 있을 겁니까? 그러면 나는 녹이 이제 벗겨지는 거예요. 나 잘난 것,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괜찮은 이미지 있잖아요. 작살나는 겁니다. 

김경수라는 사람 혹시 알아요? 뭐 킹하고 관계가 돼있는데? 드루킹. 김경수라는 경상도지사가 검찰청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팬들이 많았어요. 그 다음에 또 들어갈 때는 태극기 든 사람들이 많았어요. 장미가시에 찔려 죽으라고 장미 막 던지고. 자, 한번 생각해보세요. 팬들은 뭐냐 하면, 그대 있으매 우리가 살았다는 거예요. 김경수를 도지사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들이에요. 정치적으로 후원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대 있으매 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김경수를 미워하면 싫어하는 거예요. 촛불 집회 이후에 문재인이 있으매 내가 있는 거예요. 물론 그게 언제까지만 그랬느냐 하면 최저임금 정할 때까지만 그랬어요. 그 다음에는 골치 아파요. 최저임금 올리고 난 뒤에 엉망이 돼버렸어요. 

그런데 만약에 김경수를 싫어하는 사람이 저 인간 죽으라고 한다면, 뭐 이렇게 심지어 빨갱이라고까지 할 때, 서로가 미워해버리면 니 죽고 내 죽는 거예요. 니 죽고 내 죽는 거. 그게 내가 죽는 방법이에요. 참 쉽죠. 날마다 미워하면 되는 거예요. 근데 제 이야기를 듣고 또 되도 않는 사람이, “목사님! 저한테 너무 어려운 과제를 주셨어요?”라고 하는데, 아이고, 정말 정말로 못 보겠네. 매일 아침부터 눈 떠서 저녁까지 할 일이 그런 일을 했는데, 뭐 새삼스럽게 점잖은 체를 합니까? 눈만 뜨면 미운 놈 찾아내기 바쁜데. 오늘도 누구 좀 한번 씹어볼까? 이게 우리의 삶의 보람인데, 뭘 또 아닌 척을 하고 있어요? 세상에 남을 미워하는 것만큼 쉬운 것이 또 어디에 있어요? 드라마 보는 재미가 뭡니까? 미운 놈 나오기만 해봐라. 이야기 좀 듣자고 하는데, 욕하다가 드라마 50분 다 끝나요. 

자기 자신을 감추는 사람은 말을 해도 조심스럽게 해요. 왜? 자기 이미지 관리로 나서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러워요. 그런데 성령 받은 열두제자, 베드로 보세요. 과격의 끝이에요. 세상에! 저래가지고 목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죽었잖아요. 사울도 나중에 바울이 되고 난 뒤에 좀 심하다. 꼭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죽었잖아요. 욕 얻어먹었잖아요. 심지어 자기가 세운 고린도교회에서 미움을 받았죠. 

사도행전을 시간 가서 다 못하지만, 데살로니가 내려갔을 때 디모데가 죽어났어요. 왔다갔다 네 번. 사도바울이 디모데보고 아테네로 오라고 해서 갔죠. 고린도로 오라고 해서 왔죠. 와서 하는 이야기가 환난가운데에서 이겨냈다고 하니까, 바울이 그래, 잘했다고 하고 편지 보내고. 그런데 잘하기는 잘했는데 재림에 대해서 잘못생각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래, 또 편지 보내고. 한번 편지 보낸 것이 데살로니가전서, 두 번째 보낸 것이 데살로니가후서. 다시 또 내려와서 이제는 괜찮게 되었다고 하니까, 그래, 그러면 편지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고.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모든 일을 다 했어요. 열심히 다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인생은 힘들죠.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게 왜 어려운가 하면, 잃어버림은 내가 스스로 도 닦아서 잃어버리지 않고, 내가 상대방에게 나쁜 소리를 했을 때 그 사람이 나를 잃어버리게 하는 착한 짓을 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절대로 나는 올바르고 정당하고, 내 존재는 고귀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내 손으로 내 손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주께서는 상대방을 통해서 나를 작살내고 박살내는 겁니다. “너는 인간도 아니야.” 그게 바로 주께서 벌이신 다 잃어버림의 방식입니다. 주님이 바로 그 일을 하셨어요. 우리는 남한테 나쁜 소리를 안 들으려고, 이미지 관리한다고 얼마나 알랑방구(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더럽게 아첨하는 모양)를 뀌고 했습니까? 

자, 정착이야기를 해봅시다. 말씀의 정착이라는 것은 이미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말씀을 우리에게 줬거든요. 아까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냥 성경 덮어버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라고 했죠? 하면 되고요. 하지 말라고 했죠? 안 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조금 실수를 했으면 반성해서 잘못했다고 하면 되고. 뭐? 뭐가 말씀이 어렵냐 이거에요. 안양강의의 제목을 말씀드립니다. 역발상신학이에요. 역(거스를逆)신학.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라고 하면 하면 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되고, 또 잘못했으면 회개하고 반성해가지고 제사 드리고 잘못했다고 하면 되고. 어려운 게 있어요? 없어요? 전혀 어려운 게 없는데, 예수님은 왜 그렇게 어렵게 하느냐 이 말이죠. 그걸 잃어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고방식이 버려져야 된다는 거예요. 안 버리죠. 그렇게 해서 쌓아놓은 스펙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정통 유대인들이 복장이 이상하잖아요. 욕 얻어먹을 요량하고 사진 찍어놨잖아요. 괴상하죠. 펭귄복장도 아니고. 부림절날.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지금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무슨 노력? 그냥 순수하게. 어떤 순수? 하라고 하면 하면 되고.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하면 안 먹으면 되잖아요. 오징어 먹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하면 그들은 뭐? 우리가 뭐가 잘못됐는데? 우리가 뭐가 잘못됐느냐 이 말이죠. 할례행하라고 해서 할례 행했어요. 안식일 지켰어요. 뭐? 뭐? 뭐가? 그게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거든요. 

잃어버림? 웃기네. 절대로. 인간은 보호본능이 있는데 왜 날 잊어버립니까? 인간들은, 바리새인들은 가능하다고 여겼어요.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인간은 단절되어 있는 것을 몰랐어요. 가능으로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걸 압니까? 예수님이 보여 준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능이에요. 예수님은 니가 창세전부터 알았느냐? 우린 몰랐죠. 창세전부터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예수를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죽였잖아요. 

그러면 이미 인간에게 문제 있다고 들통이 났죠. 인간에게 문제 있죠. 근데 스스로도 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간파할 재간이 없어요. 왜 자기 문제를 파악 못합니까? 나는 구원받아야겠다는 그 욕구를 스스로 자기가 후벼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난 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나는 남 좋은 일은 하기 싫다는 거예요. 이거 평생가도 못 고칩니다. 평생가도 못 고쳐요. 

제가 지난 목요일인지 하여튼 버스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저보다 세 살이나 네 살 먹어 보이는 부부가 서있었어요. 근데 남편이 담배를 피워요. 그래서 제가 잘 걸렸다 생각하고 여기서 담배피우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죄송해요!!”하는 거예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게 아니고, 화난 투로 죄송하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를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했지만, 이 덩어리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그걸로 내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발작하듯이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그리고서는 제가 아무소리를 안 했어요. 근데 그 뒤의 말이 나를 아주 기쁘게 만들었어요. “나이도 몇 살 안 된 것이!” 나는 잃어버리기 위해서 사는데, 갑자기 나는 안 잃어버리고 싶어요. 나는 살 가치를 보존하고 싶어요. ‘내가 그렇게 젊었나?’하고 속으로 생각했죠. “나이도 몇 살 안 된 것이 어른한테!” 내가 볼 때는 나보다 한두 살밖에는 안 많은데. 나를 더 젊게 봤어요. 갑자기 나를 보존하고 싶은 충동이 확 일었어요. 큰 시험이 들 뻔 했습니다. 

사람과의 대화가 된다는 것은, 사람과의 대화는 이런 겁니다. “나는 당신이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쪽에서 “피차일반이요.” 이런 관계를 두자로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 아까 제가 잃어버리는 방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미워해야 된다고 했죠. 내가 미워해야 저쪽이 날 미워하죠. 십자가마을에서는 하지 말고. 다 아니까. 다른 동네에서 그렇게 하세요. 다른 동네에서. 시비 걸지 말고. 인간의 본성을 고치고 싶어도 인간은 원체 자기를 못 버립니다. 시키는 대로 남 미워한다고 해도 그것이 또 하나의 나의 가능성의 수법이 되거든요.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가혹하게, 에이, 니는 바짝 마른 풀이라고 욕을 해도 그건 나보고 하는 소리 아니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한계를 이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이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이미아 (IP:122.♡.170.138)18-08-12 23:18 
서울의존강의20180810b 베드로전서1장 20-25절(헛수고)-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핵심키워드는 불가능함, 그리고 잃어버림, 버림받음이었습니다. 이 땅에 말씀이 왔다는 것은 버림받는 경우만 구원되는 거예요. 버림받음이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말씀이 이 땅에 왔을 때는 버림받는 자를 생산해내는 것이죠. 버림받는 자. 왜 그러냐 하면 아무도 버림받을 의사가 없기 때문에. 아무도 버림받을 의사가 없어요. 어느 인간도 자기를 사랑하고 싶지, 자기를 미워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자진해서 나를 버려주세요.” 이게 안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욕을 해줘야 돼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이게 어디 개 주제에!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창녀가 구원을 받겠다.” 자꾸 대조되는 사건을 일으켜서 우리가 평소에 남들을 향해서 질타하는, “저건 인간도 아니야. 저건 지옥가야 돼.”라는 그 발언을 이제는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사용을 하는 거예요. 

“이방인들은 할례도 없지, 이방인들은 안식일도 안 지키지, 그래서 개 같은 이방인들, 마땅히 언약이 없으니까 지옥가도 싸지.” 우리는 언약이 있기 때문에 천국 간다고 하는 그것을 의식해서 주님께서는 백부장을 천국에 집어넣으시는 거예요. 백부장을.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을 그냥 천국에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내요. 공개적으로. “봤지?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 다 나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 다 나와! 천국은 이 사람들의 것이야.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 잃어버림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데리러 오는 거예요. 근데 유대인들은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 잃어버림을 생산해내야 되죠.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기 때문에. “옳소이다. 나는 개입니다.” 잃어버렸잖아요. 세상에! 어느 사람이 자기보고 개라고 하겠어요? 주님 앞에서 비로소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잃어버린 자가 아닌데, “니나 나나 뭐 못났지. 뭐 있나?”라고 하지만, 주님 앞에서 나는 확실하게 잃어버렸어요. 아예 이름도 바꿔요. 명찰에 잃어버린 자로. 다른 것으로 하면 죄수2565번 이런 것으로. 

이게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왜냐하면 가능을 뛰어넘었잖아요. 나는 잘나고 싶어요. 왜냐하면 주변에서 그걸 요구하기 때문에. 아빠, 엄마가 요구하고 주변에서 너는 훌륭해야 된다고, 집안의 영광이라고 계속 붕 뜨게 만들었어요. 그게 나 자신의 본질인줄 알고. 나는 처참하게 망가지면 안 되는 사람인줄 알고. 주변의 가족들의 눈치를 보면서 나는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가문의 영광을 생각해서 나쁜 짓하면 쉬쉬하고, 이런 집안에는 이런 소문이 안 돌았으면 좋겠다고, 예민한 자기 관리와 민감하게 주변눈치를 보면서, 벌벌 떨면서 누가 내 죄를 들추어내지는 않는가, 늘 조바심을 가지면서 불안과 안절부절 못 하는 그런 어두운 세월을 지나죠. 

나는 니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고 하면, 아야흐햐!!하고 놀라죠. 귀신이 잡아먹자고 등장하는 것처럼. 왜, 괴기영화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잃어버리면 그렇게 안 무서운데, 귀신이 와서 내 목덜미를 물면 안 돼! 라고 하기 때문이에요. 물리면 안티프라민 바르면 되거든요. 좀 이빨자국은 나지만. 드라큘라한테 물리면 후시딘 연고 바르면 낫는다고요. 쓰레기가 안 되려고 하니까 그런 겁니다. 결국 불가능이죠.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변화를 준다고 했죠. 변화. 변화는 존재에 의해서 포착이 안 됩니다. 바람을 포착하지 못하듯이. 변화를 포착하려면 변화를 스톱시켜야 돼요. 날아다니는 새를 잡으려면, 새가 다음에 스톱하는 순간을 예측해서 총으로 쏴야 되죠. 그러나 인간은 찰나적이라도 스톱하는 순간, 그거는 내가 아니에요. 이미 그거는 변화를 존재로 왜곡되게 본 나의 모습이에요. 왜곡되게. 지금 이 순간이 고정된 나의 진짜 본질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건 착각이에요. 

그래서 착각이나마나 나를 찾을 때는 놀러가서 찍은 스냅사진밖에 없어요. 여고생 포즈 있잖아요. 옆으로 나란히 서서 찍는 것. 여고동창생들 전부 다 옆으로 서서 찍잖아요. 어른이 돼서 계모임할 때도 그렇게 똑같이 찍고, 30대에도 40대에도 50대에도 다 그렇게 찍어요. 그럼 60대는 뭐냐, 60대가 되면 자기 얼굴이 귀신처럼 나오니까 그걸 알고 전부다 사진 찍는 것을 사양합니다. “찍지 마라! 안 볼란다.” 50대까지는 찍는데 60대에는 사진 안 찍습니다. 자기 예상을 벗어나요. 이 정도로 내가 망가진 줄 몰랐다는 겁니다. 맨날 자기가 착각 속에 있기 때문에, 화장하고 포장하고 변신하니까 괜찮은데, 사진은 못 속이거든요. 

변화를 포착하는 순간, 그것은 우상이 돼버립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따라서 그 변화를 스톱시키지 말고, 저 영원하신 분이 우리에게 지정해주신 호칭이 있어요. 본질이 있어요. 그 본질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3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벌써부터 수상하죠. 변화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한번 적어볼게요. 썩어질 씨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다. 

우리가 나 자신을 변화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보기 때문에, 역으로 주님께서 변화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원래 주님은 우리 없으면 영원하신 주님의 독생자에요. 주님은 변함없는 독생자인데, 근데 변하기는 누가 변해요? 우리가 변해야 하는데, 우리가 착각을 해가지고 우리가 안 변하니까, 상대적이거든요. 우리가 안 변하니까 예수님은 우리한테 변화되는 모습으로 자신의 본질을 알릴 수밖에 없어요. 썩어질 씨에서 썩지 아니할 씨로 그 모습을, 과정을 보여주죠. 

이 과정에서 누구 때문에 생긴 변화입니까? 누구 때문에? 우리 때문이죠. 주님은 어디를 다녀갔습니까? 인간이 사는 동네를 다녀갔죠. 그러면 우리가 사는 동네는 썩어질 씨의 동네입니까? 아니면 안 썩을 동네입니까? 우리 동네가. 인간 동네가 전부다 썩어질 동네죠.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변화를 보여주니까, ‘아, 내가 썩어질 것이 마땅하구나!’라는 것을 알지, 주님이 안 다녀가셨으면 전부다 자기는 썩어질 것이 아니고 꽃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꽃 자랑하고 있다고요. 

그러나 그 꽃은 본질상 썩어질 꽃이에요. 우리의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모든 영광, 그러니까 건강한 것, 부자 된 것, 재벌된 것, 공부 잘 한 것, 애 이쁜 것, 키 크고 성격 좋은 것, 전부다 이 모든 영광은 사실은 썩는 것으로 변화될 임시적인 환각상태인 것입니다. 슬쩍 지나가죠. 옛날에는 복권 당첨 할 때 판을 돌려서 번호가 나왔잖아요. “돌리시고 쏘세요.” 스톱되면 “7번입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근데 사실은 7번이든, 2번이든, 4번이든 같은 표면에 있는 겁니다. 아이스하키 할 때 전부 다 같은 표면에 있는 거죠. 2번이 7번보다,  8번이 2번보다 4배 똑똑하고 훌륭한 게 아니에요. 그냥 기호에 불과하고 숫자에 불과하고 인쇄된 문자에 불과하죠.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한 파생된 변화가 우리 인간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늙어죽고 그 다음 우리 후손들이 태어나서 늙어죽고 그 다음 후손들 태어나서 늙어죽고... 이 모든 변화의 유발자는 오직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옵니다. 창세전에 존재에서 나와요. 20절에 봅시다.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아신바 된 자니” 그리고 “이 마지막 때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나신바 된 자니” 

주님한테는 존재가 그냥 나타난 것뿐이라면, 그 나타남을 보여주기 위한 재료들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제가 지금 60분 동안 하고 있는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논리적으로는 맞거든요. 불쑥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목사님! 60분 동안 이야기한 게 진짜입니까? 그게 진짜입니까?”라고 이렇게 물을 수가 있거든요. 

베드로는 그 증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로 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이 세상에서 부활과 살아있다는 차이점이 뭡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전에도 살아있고, 지금도 살아있고, 살아있음이잖아요. 근데 부활이라는 의미를 애써 집어넣어야 할 것은 뭐냐, 부활이라는 의미는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한때 죽었던 그 당사자의 살아남이거든요. 죽었던 그 당사자의. 그러면 죽었음을 이끌어내는 살아있음이에요.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죽은 적이 있다는 것을, 그 의미를 끄집어내기 위한 부활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의 문제는 뭡니까? 근데 그 분이 왜 죽었죠? 그 왜 죽었죠? 라는 것을 제가 60분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죽었죠? 왜 죽었습니까? 니 때문에 죽었다. 니 때문에. 니가 니 자신을 괜찮게 보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나 같이 훌륭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 자꾸 자기 자신을 좋게 보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그러면 나쁘게 보면 되지 않습니까?” 나쁘게 볼 수가 없어요. 나쁘게 본 그걸 근거로, 내가 나쁘게 봤으니까, 나는 잘났다는 것으로 전환되거든요. 그러면 어쩌라는 말입니까?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변화를 유발해요. 변화를. 

우리가 죽고 우리가 천당 가는 것은요, 복음이 아니에요. “목사님! 우리가 죽으면 천당 가죠?” 그거는 복음에 끼어들면 안 돼요. 그거는 결국은 “안 버림받았잖아.”라는 내 원초적인, 악마적인 본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나에 대한 관심사가 아니고, 누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련회 때 많이 했으니까 여기서는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만.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 질문은 당연한 거예요. 그 괜찮은 분이 왜 죽었습니까? 니 때문에 죽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때서요? 우리가 스스로 너를 잃어버리게 할 재주가 없고 그러한 능력이 없고 무능한 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버림받은 세상에 살면서 버림 안 받았다고 고집부리고 있는 거예요. 어쩌면 좋죠? 주제파악이 안 되니까. 그래서 주님이 대신 주제파악을 하신 거예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니들이 이미 죽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까요? 라고 할 때에, 그게 바로 어떻게 살까요? 라는 생각을 갖는 그것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러면 살까요? 라는 말을 안 하고 속으로 새기겠다고 하는데, 속으로 새기는 그것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러면 어쩌라고요? 그냥 사세요. 그냥. 하던 행세대로. 성질들 있잖아요. 성질. 그냥 막 사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본질입니다. 막사는 게. 그게 잘 하는 짓입니다. 막살면서 미워하잖아요? 미워하세요. 그러면 내가 말씀을 못 지키잖아요? 말씀을 처음부터 못 지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막살라는 거예요. 

막살면 말씀을 못 지키는 방식으로 말씀을 못 지키고, 못 지키니까 열심히 잘 지켜보자는 식으로, 오히려 말씀을 틀어막는 식이 되어 말씀을 못 지키게 되는, 그 둘 다를 보여줘야 돼요. 말이 길었다만 알아들으세요. “내가 이러면 안 돼. 이렇게 막가면 안 돼. 내가 말씀 지켜야지.”하는 그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과 거리가 없다는 사실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때로는 막가지 않고 가족도 돌보고 자기가 희생하고 그런다고요. 주님께 충성하고. 

그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닌데, 그나마 라도 해야 자기 마음이 편하다는 거예요. 그놈의 양심 때문에. 나 때문에 남이 아프면 막 가슴이 아프고 동정심이 있죠. “나 때문에 저렇게 고난 받는구나. 내가 도와줘야지.” 그런 막사는 것도 있어요. 진짜 도끼 들고 막사는 것도 있지만. 아프리카에 봉사하고 선교하고 그렇게 막사는데, 그건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지 성질대로 사는 거예요. 그냥 성질대로 살면 돼요. 착한성질이면 착하게 사세요. 어차피 그거는 구원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자, 그렇다면 이제 그 다음의 문제가 뭐냐, 말씀을 정착시킬 때 아까 이야기한 대로 예수님께서 썩어질 씨와 썩지 아니 할 씨라고 했죠. 썩음이 필연적인 세상과 그 다음에 주께서 준비한 세계는 아무리 오래가도 안 썩는 세계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 과정을, 베드로는 썩었다, 안 썩었다라고 했는데, 저는 이것을 층으로 만들겠습니다. 

뭐냐 하면 말씀을 육으로 해석하는 것과 그 다음에는 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둘 차이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알면 이 문제가 풀립니다. 육으로 해석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육을 기정사실화시키는 거예요. 열심히 해봐라가 아니라 육을 육 되게 도출시키는 식으로 인간의 해석을 허용하는 거예요. 인간이 해석하는 것을.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썩어가는 유대인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했어요. 대표로 제대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잘 와 닿지를 않으니까 제가 갈라디아서 6장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이 이야기를 딱 들으면 썩어지는 것은 나쁜 거잖아요. 그러면 나쁜 것은 사전에 안 하면 되겠죠. 그러면 사전에 안 하려면 앞에 있는 것,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결과가 나왔다면 원인을 한번 바꿔보자는 겁니다. 

뭐냐 하면 자기 육체를 위하지 않고 살면 되겠죠.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육체 빼버리고 나를 위해서 안 사는 삶. 나를 위해서 안 사는 삶이 없습니다. 그게 성립이 안 돼요.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나라는 자체가 타인으로부터, 타인이 먼저 있고 타인에 의해서 내가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하지 않는 것은 뭐냐 하면 남에게 호응받기 위해서, 남의 요구에 따라서 사는 것이 돼요. 

그러니까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곧 누구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남을 위해서 살아도 썩어질 것을 거두고 나를 위해서 살아도 썩어질 것을 거두고.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거예요. 아무리 해도 이게 안 되는 겁니다. 선한사마리아인 이야기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타인을 위해서 사랑해도 그것은 내 사랑이 돼버려요. 안 되는 겁니다. 마른 꽃 걸려있는 그 여인을 생각하거든요. 존재기 때문에. 

육체의 해석은 아까 말씀한 대로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데 뭐가 도움이 되고 어떤 아이디어를 얻을까를 내다보면서, 성경말씀을 들여다보는 그러한 태도, 육의 해석입니다. 이 해석을 함으로써 해석자인 내가 이 해석의 결과에 어떤 이득이 주어지는 것을 감안해서 해석이 주어지는 거예요. 

예수 믿는 그것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득이 누구한테 옵니까? 누가 구원받아요? 뻔히 알잖아요. 누가 구원받아요? 내가 예수 믿는데 안 믿는 옆 사람이 구원받아요? 아니죠. 내가 구원받잖아요. 그래서 이게 육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예수 믿고 천당가자가 육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아니, 성경에 보면 그런 구절이 많잖아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이거는 보너스인지 너뿐만 아니고 니 집이 공짜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말씀대로 지키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믿으라고 명령을 한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걸 믿으라고 명령을 함으로 말미암아 평소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를 들통 내는 순간을 맞이하는 겁니다. 그게 믿음입니까? 아니죠. 제가 강남강의에서 두 개념이라는 제목으로 했는데, 두 개의 개념이 나와요. 두 개의 개념이. 

믿는다 개념이 두 개고, 구원 받는다 개념이 두 개에요. 믿으라의 개념이 다르다니까요. 내가 주체가 되어서 믿는 개념이 있고, 주님의 선물로 준 믿음의 개념이 있고. 그리고 구원이라는 개념도 나 좋아라고 하는 구원의 개념이 있고, 나를 잃어버리게 만들어서 주님의 구원에 합류되는 구원, 구원은 주님의 구원이에요. 내 구원이 없어요. 

그래서 나의 구원 같으면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데,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순간 뭐가 탈락이 되느냐, 뭐가 잘라지느냐 하면 내 이름으로 했던 결과들을 전부다 자르는 조건하에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생각한 천국을 포기하는 조건하에 천국가요. 내가 생각하는 구원의 의미를 잘라내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에게 소유되는 대상이 아니고, 그 구원 때문에 내가 달라지는 겁니다. 어떻게? 옛날에 생각한 것과 다른 나 자신이 점점 더 달라지고 바꾸어지는 거예요. 나를 위한 예수님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면류관을 기꺼이, 즐겨 반납할 정도로 달라지는 겁니다. 천국은 죽어서 골라잡는 데가 아니에요. 지금 살아있으면서 새로운 변화가 나한테 일어나게 하는, 미리 땡겨서 와야 천국에 가는 겁니다. 그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이득을 챙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게 바로 내가 미워져야 되죠. 그럼 내가 미워지게 되면 뭘 얻습니까? 아니요. 내가 미워지는 것은 그냥 그거고, 예상 밖의 사랑이 오는데, 그 사랑은 바로 내가 잃어버림이라는 것을 체험하는 가운데 비로소 그때 눈에 처음으로 들어와요. 내가 잃어버림을 통해서. 절망이죠.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절망할 때, 비로소 그동안 내가 헛바람, 헛짓했다는 것이. 구원도 아닌 것을 구원인줄 알고 내가 농락당하고, 나한테 농락당하고 교회 목사들한테 농락당하고. 이근호 목사한테 농락당하고. 저 말 들으면 이익이 있을까 싶어서. 구원은 주님의 소관이지 이근호 목사가 주는 줄로 착각한 거예요. 

주님이 나에게 이미 구원을 줬는데, 내가 이해가 되고 내가 납득이 되는 구원을 따로 챙기려고 하니까 우왕좌왕이에요. 안절부절. 사자성어를 막 남발하죠. 안 해도 되는데 뭔가 막 해야 된다는 생각이 왜 듭니까? 안 잃어버리겠다는 거예요. 이미 잃어버렸는데,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물러있어야 되는데, 안 잃어버리겠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뭔가 꼼지락거리고 뭔가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썩어질 씨, 썩어졌으면 그냥 썩어진 채로 있어야 돼요. 썩어진 채로 있어야 되는데, 뭔가 희망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썩어진 가운데서 뭔가 안 썩은 부분을 따로 떼 내어가지고 그걸 가지고 새롭게 시도하는 거예요. 보통 천주교에서 낙태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생명이라고. 왜 기성어른들이 하는 말이 지는 태어났는데, 왜? 막 태어나는 것을 밟아버리느냐는 거예요. 근데 주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낙태되고 난 뒤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거듭났다고 하는 거예요. 낙태당해야 돼요. 누가 나에게 메스mes, 칼질을 해야 돼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태어난 적이 없습니다. 죽음에서 죽음으로 가는데 무슨 태어난 거예요? “생일 축하합니다!” 태어났죠. 그 태어난 공간이 죽음의 공간이죠. 60년 살았습니다. 그 공간이 죽음의 공간이죠. 태어난 적이 없네요. 언제 태어났어요? 태어난 것은 성령이 와야 그때 제대로 생일 축하한다고 해야 되는 거예요. 안 태어났어요. 

욥이 그렇게 바랐던,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주의 은혜로 그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어요. 그냥 죽은 태 안에서 죽은 채로 살다가 그냥 죽어버리면 잠깐 왔다가 사라지죠. 태어나려면 영원히 살아야 태어났다고 할 수가 있어요. 그게 뭐냐, 썩지 아니할 씨가 우리를 방문하신 겁니다. 

근데 그 만남은 예상한 만남이 아니고, 예상하면 안 돼요. 예상하게 되면 내가 그 만남에 기여했다고 자꾸 착각하게 된다고요. 이렇게 기도했으니까 만나게 해줬다고 한다고요. 이렇게 성령 달라고 기도하니까 성령이 왔다고 자꾸 착각들 한다 이 말이죠. 그냥 평소에 사시는 대로, 죽은 채로 그냥 살면 안 되겠어요? 유난떨지 말고, 유별 떨지 말고 그냥 살면 안 되겠습니까? 왜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무슨 근거로 그게 안 된다는 생각을 왜 갖습니까? 그냥 살면 되는데. 

안 하기가 힘들죠. 누가 그런 못된 성질을 갖다가 줬어요? 마귀가 했죠. 안하면 되는데 안 하기가 힘들어요.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 “왜?” “몰라.” 뭔가 기도했을 때 더 가치 있는 일을 했다는 뿌듯한 느낌이 들고,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이 내가 용서가 안 돼. 더 자세히 보면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나는 착하기 때문에. 복음을 30년 듣고 나중에 돌아서는 것은 나는 착하다는 거예요. 여전히 죽어있어요. 쓰레기라는 그런 이야기는 또 듣기 싫어. 착한데 예수 믿어 더 착해서 천당 간다. 이러고 싶어요. 썩어질 그 용어를 나한테 안 썼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마귀가 계속 우리한테 바른 소리를 해요. “정신 차려라! 그런데 현혹되지 말고, 평소에 니 잘하잖아. 하라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될 거 아니야. 믿으라고 하면 믿으면 되고. 믿음 없으면 믿음 달라고 하면 될 건데. 뭐가 그렇게 어렵냐?”라고 마귀가 계속 니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아이캔두잇(I Can Do It), 하면 할 수 있다고 계속 그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라. 걱정할 것 없다.  

21절에 봅시다.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죠. 사실 제가 오늘 준비한 멘트는 이 문장이었어요. 이 멘트를 이야기하려고 긴긴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주님의 일은 뭐냐, 줘놓고 빼앗아가요. 주님은 다 주셔놓고 빼앗아갑니다. 애한테 맛있는 거 줘놓고 빼앗아 가보세요. “할머니 나빠!”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죠. 애는 “아, 원래 내 게 아니구나. 드리자.” 이게 없어요. 애가 우리의 원형 아닙니까? 우리는 이중삼중오중십중으로 자꾸 애의 이런 본성을 감추고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걸 뜯어내게 되면 본성은 뭐냐 하면 줬으면 됐지, 왜 도로 빼앗아 가느냐 하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금고로 생각합니다. 우리한테 줬잖아요. 내 것인 줄 착각하잖아요. 금고 비밀번호 0707707열어가지고 계속 줘놓고 계속 빼가요. “그만! 그만! 그만하란 말이에요.” 그래도 계속 빼가요. 우리를 자기의 개인적 금고로 사용합니다. 주님은 빼가는 재미로 살고. 우리는 안 빼갔으면 좋겠다고 하고. 몸도 늙어가고 그리고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이건 내 건데 왜 가져가느냐 하는 식으로. 그냥 십일조나 받고 떨어지라고, 우리는 계속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주님은 꾸준히 빼앗아갑니다. 다 빼앗아갑니다. 원래 우리는 다 빼앗겨야 될 잃어버린 자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를 우리가 몰라요. 그리고 잃어버린 자가 난줄 모르고 우리는 괜찮은 사람인줄 알기 때문에 주께서 하시는 방법은 뭐냐, 듬뿍 줘요. 듬뿍 주고 하나둘 빼가면서, 니가 생각하는 니 자신과 주님이 너를 다루는 방식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질이 나서, “가져라! 다 가져라! 감질 난다 감질나. 몇 달간 안 빼앗아가서 좋다고 했지.” 근데 몇 달 뒤에 차사고 나서 오십만 원 물어주고. 이거 뭐. 

우리는 이유는 알아요. 주의 뜻이라고. 근데 그 태도가 화난 투로 미안해요! 라고 한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어요. 왜 빼앗아 가느냐 이 말이죠. 빼앗아 갈 거면 아예 주지를 말든지. 줘놓고 빼앗아가야 우리의 주제파악이 되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성질이 못된 인간인지. 주님 거라고 이론으로는 이야기를 해놓고 빼앗아 가면 화내고. 이거 뭐 앞뒤가 안 맞아요. 앞뒤가. 주님의 금고. 우리에게서 주님은 아무 때나 빼앗아갑니다. 

욥도 반발했잖아요. 욥도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간 자도 하나님이라고 해놓고 막상 진짜 빼앗아가니까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니는 잃어버려도 싸잖아. 마땅하잖아. 근데 왜 니가 니 자신을 지키려고 그렇게 니 자신에 집착하느냐 이 말입니다. 뭐 너한테 의로움이 있다고? 뭐 바르게 살았다고? 덜 빼앗겨봤어요. 더 빼앗아보세요. 으악~하고 물죠. 손가락을 물 거예요. 

겨울수련회 아가서를 미리 할게요. 사랑이란, 사랑의 시작은 미움입니다. 아가서의 주제가 뭐냐, 실패한 사랑이에요. 제목도 정했어요. 실패한 사랑. 아가서의 마지막을 보세요.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였다는 대목이 없어요. 남자는 집요하게 사랑을 하는데, 끝대목이 이거 뭐 아가2를 제작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전편이 이상하게 끝나버려요. 사랑한다고 하고 끝나버려요. 

모든 인간에게 주님의 사랑은 실패로 끝납니다. 인간이 그다지 좋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합니다. 사랑에 실패한다면 나올 것은 눈물밖에 없죠. 여기에 동원되는 가요는 열 개도 넘습니다. 아가서 하면 밋밋하잖아요. 아주 애타도록 잃어버린 사랑. 애원. 김광진의 편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다 줬는데 배신당하는 것. 데이트폭력이 일어날만하죠. 

다 줬는데 여자는 사랑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사랑에 실패했는가? 그래서 아가는 신약에 있지 않고 구약에 있습니다. 그거는 다음 시간에...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그것도 마지막 때에. 아가자체가 예언이거든요. 이스라엘은 아가를 해석하면 나와요. 이스라엘은 아가서 해석을 아주 좋아합니다. 은유적 해석의 선두주자가 아가입니다. 

아가에 나오는 하나하나가 전부 다, 온리유Only You 오직 우리만을 사랑해서 사랑을 준 거예요. 아가서가 있는 한 구원이 이방인에게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독점적이니까. 이방인들을 주께서는 질투하듯이 미워했어요. 오직 나에게. 다른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보고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근거를 대라고 할 때, 이스라엘은 큰소리를 칩니다. 할례, 안식일. 바로 그거다 이 말입니다. 

할례를 행한 민족은 누구밖에 없다? 오직 우리민족밖에 없다는 거예요. 할례는 몸에 새긴 사랑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할례 받은 자는 움직이는, 주님의 사랑을 싣고 다니는 매개체가 돼요. 주님의 사랑은 할례입니다. 특별히 사랑한 거예요. 모세가 할례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모세처럼 할례를 행했던 모든 사람은 모세가 받았던 모든 예언의 수혜자가 되는 겁니다. 수혜자. 혜택 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할례 받은 사람은 창세기 15장에서 거룩한 사람이에요. 아브라함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누구한테 다 흘러간다? 아브라함 자손에게 흘러갑니다. 근데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또 시비를 걸어요.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이 말이죠. “저요!”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너희 애비는 악마다. 아니, 우리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이고 모세 율법을 지키는데, 왜 우리 아비가 악마입니까? 그렇게 되죠. 

이게 뭐냐 하면 실패한 메시야를, 진짜 메시야를 알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실패했어요. 사울이 교회 부수는 혁명에서 실패했습니까? 실패했죠. 실패한 사울. 실패한 사울 안에 성공한 교회가 거기에만 있어요. 성공한 예루살렘 교회는 실패했고,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가 실패하기를 독려하고,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았던, 그 실패를 요구했던 그 인간 속에 세상에! 진짜 교회가 숨어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래서 실패한 메시야로 인하여 성도한테는 실패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성공작입니다. 짜증이나 불평내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는 일은 전부 다 성공한 사례에요. 성공한 거예요. 제가 간음을 했습니다. 성공하신 거예요. 제가 살인을 했습니다. 성공하신 거예요. 성도 입에 실패라는 말을 입에 담지 마세요. 주님이 싫어합니다. 

실패는 누가 실패했는가? 주님이 실패했어요. 주님이 실패한 것보다 더 큰 실패는 없어요. 추가되는 실패는 없어요. 그 실패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실패했기에 비로소 인간은 자기분수를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었어요. 실패한 것 때문에 성도는 실패는 실패가 아닌, 실패 자체가 성공인 것을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실패했기에 성공한 거예요. 실패했기에. 아주 역설이죠. 

더 이상 성공을 더 기대할 필요조차 없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성공적인 인생입니까? 안절부절 할 필요가 없거든요. 조바심내고 협박, 공갈 할 필요가 없다고요. 더 이상 실패할 구석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보다 더 큰 성공한 사례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이번 달 실패해서 수입이 700만원 들어왔다. 다음 달에 또 실패해서 1500만원 벌고. 궁중족발해가지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거보다 더한 실패가 없기에. 그 자체로 만족하니까. 마귀가 속아 넘어 갈 수밖에 없어요. “졌다!” 

마귀는 항상 이걸 협박하거든요. “너 그러다 실패한다.” 그러면 이 말은 뭡니까? “아직은 실패 아니야. 아직도 얼추 성공적이야.”라는 것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독려하고, 긍정적인,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세뇌를 준 거예요. 세뇌라고 하면 너무 식상하니까 말을 바꾸겠습니다. 우리한테 주사를 놓는 겁니다. 주사를 딱 놓아요. 

남한에서 파견된 그 간첩이 김정일을 만나는데, 김정일한테 병균을 퍼트릴까 싶어서 기업가로 변장한 간첩에게 주사를 딱 놓습니다. 그 주사가 뭐냐 하면 정신을 나가게 만드는 주사에요. 주사 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녹음기를 틉니다. “너는 어디 소속이야?” 무의식 가운데 본인이 이야기를 하겠죠. “너는 왜 평양에 왔어?” 근데 세상에, 흑금성(황정민)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남한에서 파견한 기업가 간첩은 무의식가운데서도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이 되었든지, “니 상급자가 누구야? 간첩하라고 누가 너한테 지시했어?”라고 물으니까, 약물에 취했는데도, 황정민이 하는 소리가 “내가 사업가인데 무슨 상사가 있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거 진짜구나!” 그래서 통과한 거예요. 이 영화 이름이 ‘공작’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뼛속까지 버림받았어요. 뼛속까지 실패자에요. 주께서 성령으로 마취제를 꾹 놓는 거예요. 니가 성공해도 풀의 꽃같이. 풀꽃이 아름다워요. 박수쳐요. 성공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뭘 압니까? 말세는 역사가 마무리되거든요. 말세는 모든 역사를 사라지게 하는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는 마지막 때에 그 모든 것이 풀의 뭐가 됐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고 하는 그것이, 우리 본질에서 피어난 꽃이나, 그 꽃을 피게 하는 그 원천이나 그놈이나 그놈이 다 똑같은 거예요. 

썩어질 것에서 핀 꽃은 썩어질 것이잖아요. 그대 이름은 장미! 장미든 뭐든 간에 썩어질 장미에요. 그대 이름은 장미니 백합이니 백날 해도 썩어질 것이라 이 말이죠. 그동안 우리는 그 장미를 위해서 얼마나 먹을 것 안 먹고 혼신의 노력을 하면서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갔습니까? 한 순간에 주께서 주신 이 말씀, 너는 썩어질 인간이고 너는 죽었던 인간이라고 하는 순간에 우리가 생각했던 믿음, 소망, 사랑, 이 모든 개념은 그동안 썩어질 육의 해석에서 도출된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거거든요. 

육의 해석에서 윤리도덕이거든요. 온유와 화평, 베드로후서 1장에 나오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5-7). 이러한 단어들이 뭘 거쳐야 된다? 육의 해석을 거쳐서 영의 해석에 도달할 때 뭐가 부각이 됩니까? 그 과정, 주님께서 변화했던, 주의 존재가 우리에게 이런 변화를 나타날 때, 주의 그 변화가 담긴 채 이렇게 이동하는 겁니다. 썩어진 인간을 주의 개입으로 변화가 될 때, 그게 뭐다? 그게 형제우애고 그게 온유고 화평이고 사랑이고 겸손이고 덕이 되는 거예요. 모든 일에는 뭐가 나와야 됩니까? 영적해석이 나와야 됩니다. 영적해석. 

영적해석의 특징이 뭐냐, 육은 창조되었지만 영적해석은 창조가 없어요. 이미 창조 전부터 준비된 겁니다. 그 준비된 것이 우리를 통해서 분출되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계속 남에게 분출돼요. 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그것에 짝을 이루어서, 조를 이루어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남들은 “아이고, 온유하네. 저렇게 겸손하고, 가만히 있어보자 겸손에 덕을 더하네. 아! 거기에다가 형제우애를...” 근데 본인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근데 그게 형제우애고 덕이 되는 거예요. 

실컷 주님이 시킨 대로 남도와 줘놓고, “아이고, 집사님 고맙습니다.” 이러는데,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요? 내가 그렇게 한 기억이 있나? 내가 흑금성인가?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게 내 무의식인데.” 이게 영적해석입니다. 만약에 육적 해석에서 겸손을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게 무의식이 의식이 돼버리죠. 자, 누가 나를 도와달라고 해서 오만 원을 도와줬다. 그러면 무슨 부담이 되느냐 하면 나중에 십만 원을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줄까? 말까? 이게 부담이 돼요. 걱정이 된다는 말은 결국 뭡니까? 육적 해석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내가 뭐했지?” 이러면 “오만 원 빌려줬잖아.” “언제? 내가 언제 그랬는데?” 근데 돈 빌려주고 잊어버린 적은 별로 없죠. 돈 갚는 것은 잊어버려도. 

그래서 늘 우리는 육적해석, 영적해석의 변화에, 주님의 주시는 변화가 매일같이 돼요. 매일같이. 5년 전에 그렇게 했던 것이 계속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존재가 돼버리고. 매일같이 주께서 해가지고 육을 뭐로 바꿔준다? 영으로 바꾸어서, 육으로 할 때는 다음에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까, 말까 조마조마한데, 영적해석으로 은혜를 받아버리면, “내가 뭐 했는데?” “도와줬잖아요.” “내가 도와줬는가? 그래서 뭐?” “얼마나 착하다고요.” “뭐가 착한데? 지금 이상한 이야기를 하네.” 이렇게 되죠. 

다시 말해서 육적 해석은 자기가 성공했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또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라는 것을 마귀로부터 부여받지만, 이미 영적해석으로 들어와 버리면 나를 드러내기 위한 존재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느냐? 실패한 자가 되죠. 실패한 자기 때문에 실패라는 어떤 일도 실패가 아닌 거예요. 

만약에 내가 육적해석 같으면 어떤 일에 실패했잖아요. 그러면 뭘 추적하느냐 하면 원인을 추적합니다. 다음번에는 그런 실패를 두 번 다시 안 하기가 돼요. 목사님들은 알아요. 심방 갈 때 친한 사이인줄 알고 농담을 한마디 했더니만, 갑자기 얼굴색이 확 변했어요. 수습이 안 돼요. 뒤늦게 알랑방구로 수습을 해보려고 해도 이미 바뀌었어요. “목사님 안 바쁩니까? 볼일 보세요.” “집사님! 그런 뜻이 아닙니다.” “됐습니다. 아이고, 옆에 전도사 있고 하는데 됐다고 하면 목사 체면이 뭐가 됩니까?” “(비꼬는 투로)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주의할게요.” 태도가 벌써, 톤 자체가 맛이 갔어요. 잠언서가 훅 떠오르죠. 성을 빼앗는 것은 쉬운데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은 더 어렵다고. “아, 어떡하나?” 

만약에요, 진짜 자기가 실패함을 알 것 같으면요, “막 했는데 어쩌라고!” 삐져가 다른 교회에 간다고 해도, 다른 교회에 가는 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나도 이 교회가 내 교회가 아닌데, 다른 교회에 가든 내가 왜 신경을 쓰는데? 나 원래 실패했어! 근데 실패했다고 해서 교인 하나 또 붙들려고 하는, 실패를 우회해서 또 노림수가 있죠. 그러니까 모든 하는 일이 합력하여 이게 선한 거예요. 근데 누가 선하지 않다고 우깁니까? 육적인 해석을 맨날 되풀이하는 내가 주님의 하는 일을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못돼 처먹었어요. 우리가 알아야 돼요. 우리가 얼마나 못된 지를. 근데 주께서 못됐다고 하는 것 자체도, 주께서는 최고여~라고 합니다. 갑자기 전라도 방언을 하는데. 니가 못됐다는 것을 이제 알았느냐? 그게 내가 보기에는 성공한 것이라는 거예요. 잃어버렸고, 그저 잃어버렸고 못됐다는 것.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세요. 왜? 풀 값을 합시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채로 넉넉하게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은 예수님을 겨냥하는데, 우리는 괜찮은 내가 되기 위해서 억지를 부렸습니다.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린다고 착각했습니다. 주여, 그것이 바로 썩어질 모습이라는 것을 또 다시 표출한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날마다 주님에 의해서 성공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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