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세대구원 2807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8. 1. 19:30
2018-07-17 23:59:27조회 : 278         
세대 구원 180717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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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121.♡.203.222)18-07-28 18:30 
강남-요한복음 17장 17절(세대 구원)180717a-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요한복음 17장 17절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그렇게 되어 있지요. 보통 세상에서는 진리의 반대가 뭐냐 하면 반진리 또는 비진리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요한복음 17장에서 ‘진리’의 반대를 ‘세상’으로 봅니다. 


요한복음 17장을 왜 자꾸 이렇게 더디 가느냐 진도가 나가기에 더디 가느냐 이렇게 할 수 있는데 17장이 예수님께서 기도한 내용이에요.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이 세상의 성경 해석에 성경해석에 그 함축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세상과 하나님, 이 모두를 해석하는 함축된 해석이라 하는데 함축된 해석이 여기서는 뭐냐 하면 여기서는 진리가 됩니다. 그리고 진리의 반대말이 비진리가 아니예요. 진리의 반대말은 뭐냐 하면 ‘세상’으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내 제자들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이게 말이 안 되지요. 우리가 아는 세상은 반드시 뭐를 포함하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아는 세상은 나를 포함해서 이 전체 눈에 보이는 이 대자연을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세상에 나를 보낸다고 했을 때는 나는 일단은 세상 바깥에 있는 존재인데 주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서 세상 속으로 들어와서 사는 그런 양상이 되고 말아요. 마치 예수님께서 세상 밖에서 세상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똑같이 내가 너희들을 세상 안으로 들여보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 눈에 보이는 세상 이게 전부인데 영어도 ALL인데 모두인데 그럼 세상 밖에 다른 세상이 있느냐 했을 때 그걸 다른 세상이라고 하지 않고 이걸 진리라고 합니다. 다른 세상이 아니고 진리입니다. 


다른 세상이 있으면 만약에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살다가 죽으면 다른 세상에 가면 되는데 진리라는 것은 다른 곳이 아니예요. 세상에서 말하는 그 지정된 장소, 장소를 표현하듯이 진리를 곳으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네가 몇 번지냐 동네가 어느 동네냐 어디에 사느냐 하는 것은 이 세상을 설명할 때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데카르트의 공식에 의하면 x y 그리고 하나의 z 세 가지의 변수로서 삼차원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이차원은 z가 없지요. x y 이 두 좌표 데카르트 좌표라고 하는데 수학에서 어느 지점에 있던 5,7 같으면 x5 y7해서 반드시 한 그 지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에 대해서는 이렇게 어떤 내가 특정지점을 이렇게 할 수가 없는 이유는 진리는 뭐냐 하면 우발적이거든요. 우발적. 쉽게 말해서 뭐와 같으냐 하면 바람 같다고 합니다. 하나의 그걸 사건이라고 하는데 사건은 종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종잡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디로 튈지를 몰라요. 중구난방이라고 하지요. 예상 밖으로 이끄십니다. 왜 그렇게 예상 밖으로 이끄시냐 하면 우리가 세상에 살던 그 풍습이라든지 그 습관이 그대로 우리 몸에 녹아져 있거든요. 우리가 일상에 살던 그 모습 그대로 녹아져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진리 속에서 끄집어 낼 때는 우리는 항상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사는데 좀 어렵게 해 볼까요? 


이 세상에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면 두 가지로 존재하는데 하나는 공간적으로 존재합니다. 아까 x y z 했지요. 그러면 시간적으로 또 이야기해요. 과거와 현재 미래. 이 두 가지 시공간 이걸 합쳐서 시공간이라고 하는데 이 시공간을 통해서 뭐가 생성되느냐 하면 나, 자아 또는 나 여기 있다 라고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서는 나 여기 이만큼 보내면 나 여기 늙었다 이곳에 있었는데 이만큼 세월 보내고 이렇게 있다. 나 여기 이 땅에 사는데 늙었으니까 이런 사고방식 가지고 그러면 죽으면 다른 곳에 꼭 내가 살던 식으로 아마 살게 될 걸 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만약에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있다면 우리 천국에 가서도 같은 옆 동에 살자 이런 말을 한다 이 말이죠. 그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아주 초를 쳤습니다. 남녀가 평생을 부부라고 해도 그것은 살 때 까지만 부부고 그 다음 같으면 남편 아내라는 것은 없어요. 없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럼 무슨 재미로 사나 그런 소리 하는데 천국 가면 재미 되게 없겠다. 천국에 당구장 있어요? 월드컵해요?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게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이 땅에 살던 그 사고방식이 자아를 구성한 내용이 되요. 그런데 그 자아가 수정이 되어야 되는데 그 자아가 그대로 천국 가서 연속되어서 또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 갈 때 어떤 모습으로 바뀝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답변을 주세요 한다면 간단해요. 예수님처럼 이 땅에 와서 예수님처럼 사는 사고방식이 바로 천국가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고방식은 어디 학교에서 학원에서 배웁니까? 어디서 배웁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어떻게 산 그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착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까? 바르게 사는 것을 말합니까? 경건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게 아니고 ‘~~는 아니다’ 하고 살아요. ‘~~는 아니다’ 


거룩이라든지 성경에 나오는 경건이라든지 성도의 삶이라든지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하라가 아니라 이것은 아니다가 되요. 이것은 아니다. 뭐가 아니냐? 내가 이 땅에 사는 식은 아니다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이 땅에 사는 식은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자기를 규정하는 겁니다. 규정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 있음을 계속 있음으로 고집하는 겁니다. 한번 있으니까 계속 끌고 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있음이 존재가 있음인데 있음이 주님한테 갈 때는 뭐로 바뀌어지느냐 하면 있음이 사건으로 바뀌어야 되요. 그러면 있음을 사건으로 바꾸려면 망치 가지고 자기 몸을 이렇게 해가지고 조각조각 해야 되느냐. 조각 내봐야 그 뼈조각도 존재인데요. 뼈조각 하나도 존재잖아요. 권총 가지고 자기 머리에 쏴도 그게 존재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사건은 내가 사건을 만들면 안돼요. 내가 내 사건을 만드는게 자살이라는 건데 그런 식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내가 분해 되는게 아니고 이 사건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완성시킨 사건이어야 됩니다. 


모든 말씀이 완성되는 것이 이게 우리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는데 예수님이 곧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데 이건 사실은 잘못된 말이에요. 예수님이 다 이루어 버리면 우리는 예수님 혼자 구원받아요. 우리는 구원 못 받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뭘 이루느냐 예수님 혼자 존재가 이룬게 아니고 예수님이 뭘? 언약 사건을 일으켜요. 언약 사건을 일으키면 그 사건은 단회성이 아니고 한번이지만 그 한번이 모든 세상을 세상 끝날까지 다 적용되는 한번으로 한번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예수님과 사도바울 사이에 나이 차이가 한 4살쯤 되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할 때 사도바울은 없었고 돌아가시고 난 뒤에 사도바울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할 때에 이거는 무슨 뜻인지 몰라요. 만약에 촛불집회가 눈앞에 보이거든 이러면 그러면 서울광장에 가봐야 되요? 가보면 뭐 있는데 지금? 지금 가보면 쌍용 자동차 다른거 데모한다고 바빠요 거기에. 동성애 그거한다고 엉뚱한거 있단 말이죠. 촛불집회 끝났어요. 없어요. 사건이기 때문에 끝났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몸 가지고 현재 이 세상의 존재가지고 어떤 특정 내가 예상하는 사건에 합류하려면 내 쪽에서 다가서는 방법은 없는 겁니다. 바람이 불어야 되지요. 십자가에서 불어대는 바람이 불어야 되는 겁니다. 이 바람 부는데 저해 요소가 있어요. 십자가 바람이 불어야 쉽게 말해서 성령세례 받아야 같은 말입니다. 바람이 성령이니까. 성령으로 불어오게 되면 이 성령의 특징이 뭐냐? 어디서 왔는지를 몰라요. 그리고 어디로 튈지를 몰라요.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평소에 버릇이 뭔가 얻으려면 그 지점에 공간이니까 그 지점에 그 시간대에 가서 얻고자 하는 겁니다. 기도원 앞자리 이런거. 특정 기도원 갈멜산 기도원 가면 항상 성령이 있다하면 그 버스 타든지 차타고 갈멜산 기도원 가게 되고 거기서 아이스크림 푸듯이 퍼 담으면 성령 받는 식이 되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는게 아니예요. 


왜냐하면 성령을 방해하는 것이 성령을 제일 크게 방해하는 것이 뭐냐 하면 법과 제도예요. 조직, 조직체예요. 조직체의 법과 제도의 특징은 이게 존재의 입장에서 납득이 되는거예요. 한번 장로는 영원한 장로고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고 한번 은혜 받으면 영원히 계속 갈 거라고 남들이 그렇게 짐작하고.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성령의 그 봉사를 가지고 성령의 봉사라고 하잖아요. 성령의 봉사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이게 사건적이에요. 남을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하고 봉사할 마음이 있거든 그때만 그 티를 내는 거고, 그러다가 쫌 했다 이제는 하기 싫다 하면 그러면 안해야 되지요. 하기 싫은데도 장로이기 때문에 계속해야 된다. 이거는 하면 안돼요. 


우리교회 장로님 장로하다가 힘들어서 못하겠다 해가지고 성령의 뜻이라고 생각해가지고. 성령의 뜻이었다. 왜냐하면 봉사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자기 위신 챙기고 이거 해서 수입 얻고 이런게 아니거든요. 시작할 때도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했다면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고 안했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이 스스로 하고 싶어서 봉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없다는 것도 주의 뜻이잖아요. 그러면 안하면 되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를 30년 했는데 어느 날부터 하기 싫어 그러면 안해야지요. 하기 싫은데 왜 섭니까? 봉사인데. 봉사라는 말은 내 소유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 교회가. 내 존재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에 반복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 나한테 설교하기 싫다 이렇게 되면 그 사건에 순복해야지요. 십자가 사건에 순복해야 되요. 내가 이 교회와서 30년 해서 교인이 20명 되는걸 500명 됐으니 가만있어 보자 이 교인들 가운데 십일조하는 머릿수가 양수가 150명이니까 한 달 수입이 얼마니까 퇴직금 3억 줘야 되고 이렇게 계산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런 계산을. 내 후임자 올래? 그러면 5600만원을 줘야 내 후임자리 줄게. 권리금 받는거요. 자기가 궁중족발입니까? 뭡니까? 왜 자릿세 받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건을 방해하는 것은 존재예요. 어느 교회가 있다는 겁니다. 어느 교회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건물이 있겠지. 부동산이 있겠지 부동산이. 부동산이 있겠지요. 더 나아가서 봅시다. 말 잘해야돼요. 어떤 사람이 젊은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을 했어요. 했단 말이죠. 결혼을 왜 했느냐? 좋아서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결혼한지 몇 년 됐어? 16년인가 예를 들어서 20년됐다 합시다. 지금 좋아? 안 좋아. 그럼 왜 안 헤어져? 왜 안 좋은데 왜 안 헤어집니까? 억지로 산다. 아니예요. 무슨 이익이 있어요. 자식 때문에 산다. 그럼 자식도 없는데 왜 사나? 자식도 없는데 왜 사느냐 하면은 바로 자기 의 때문에 살아요. 자기 의. 


이게 과거의 시간이잖아요. 과거 한 것에 지금 내가 책임지는 면을 보이겠다는 거예요. 그럼 왜 보이는데? 책임지는 면은요 예수님이 다 보여 줬어요. 예수님이 한 걸 자기가 왜 그걸 깎아냅니까. 예수님이 모자랍니까? 뭐 구원은 되겠지만 인간으로서 자기 책임을 다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만들 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나 밖에 없어요. 이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느냐 안 되느냐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율법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이 영광이에요. 그리고 화목제물을 받아들이는게 영광이고 다 이루었음을 받아들이는게 영광이에요. 그거 외에는 다른 영광은 없어요. 다른 영광은 없어요. 봉사한다고 영광 되는거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희생한다고 영광 되는게 아니예요.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안 되는걸 내가 안 되는걸 내 존재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 것을 성령께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을 저한테 덮쳤다는 그 사실을 그 사실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거룩이라고 하는겁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분리되는 겁니다. 어디와 분리되는거? 세상과 분리되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걸 진리 안에 있는거예요. 진리 안에 있는 것, 세상에 살면서도 진리 안에 있는 것이 이게 거룩이에요. 이 진리가 너희를 거룩하게 한다 나오지요 오늘 본문에 17절.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 거룩이 그 개념이란 말이에요. 세상에 속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에 살면서 사는데 사실은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고 진리 안에 사는 모습이다. 사건 안에 사는 모습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남들 보기에는 그냥 세상 안에 평범하게 같이 사는 존재의 군상으로 보이지요. 지지리 궁상으로. 배고프면 밥 달라 하고 그것도 없으면 라면 끓여 먹고. 사는건 똑같은데 더우면 잠 못자고 똑같은데, 똑같은데 진리 안에서 움직여요. 


그래서 지난 오후설교때 제가 했잖아요. 지중해 크루즈 여행가도 그게 주의 일이라고. 골프 쳐도 주의 일이라고. 지중해 크루즈 여행이 1인당 2500쯤 될걸요? 엄청 비싸요. 가려하다가 못 간사람 내가 알고 있거든. 골프 쳐도 그게 진리예요. 그게 거룩이라구요. 주의 일이다 이 말이죠. 조건이 붙어요. 주여 골프 치면서 후딱 죽게하옵소서 이런거. 어쨌든 간에 이 세상과 떼어놓는 방식이 골프라면 허리 아프도록 치겠다는 거예요. 크루즈 여행이 이 세상에 미련두지 않는 거라면 따라라라라~~~이런거 하면서 세상 빨리 떠나고 싶다면 그게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은 쉽게 말해서 주의 일은 이런거예요. 세상 떠날 생각 없거든 남 만나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마세요. 세상을 떠날 생각 없거든. 세상 떠날 생각 없거든 설교도 하지 말고요 전도도 하지 말고 부부간에 말도 하지 마세요. 더울 때 잘됐다. 잠자리 더운데 너는 저쪽에서 자고 시원하니. 삼베 깔고 하면 되지. 뭐가 죄냐 하면 이 세상에 하루라도 더 살려고 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자꾸 존재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우연성 우발성을 내 존재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과 제도가 이게 잘못이라고 했지요. 주님이 하신 일이라고 했지요. 법과 제도에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그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은 나의 생존이에요. 내가 이 법과 제도를 주장하는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는가? 나라는 덩어리가 들어 있어요. 덩치가. 나라는 괴물이 들어있다고요.  그러니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자기 의가 나오는 거예요. 자기 의, 자기 평가, 자기 잘남 그리고 자기 연속성, 자기 지속. 세월호 아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몇 년째 우려먹고 있는지 몰라. 몇 년째. 4억 받았잖아요. 왜 그렇게 그걸 가지고 못 잡아 먹어서 그렇게 괴롭히냐 말이죠 왜. 


존재의 연속성이에요 존재의 연속성. 누가 죽였습니까? 유병우가 죽였습니까? 구원파가 죽였어요? 누가 죽였어요? 아무도 죽인 사람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존재예요. 하루라도 들풀이 태어날 때부터 주께서 키워줘야 되듯이 참새도 키워주듯이 주님의 공로라는 것을 그 사람들은 몰라요. 주님의 은혜도 모르고 주님의 공로도 모르고. 은혜 모르고 공로 모르고 그러면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속한거죠.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 그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이미 죽었어요. 


죽은 자가 뭐 구원받겠다고요? 죽었으면 죽었다 하는 그게 자기 그 본성에 부합되는 거예요. 살려주는 것은 바람이 불어야돼요. 바람이 불면 법과 제도는 가지고 자기를 살려낼려고 아둥바둥 애를 씁니다. QT할거 다하고 교회 가가지고 열심히 장로 목사 집사 다 되고 뭐 할건 다해요. 흉내는 다 내. 시키는대로 다 하고 구역 권찰회에다가 물론 취직하면 못하지만. 취직 안하고 집에서 노니까 자꾸 불러내는 겁니다. 그렇게 해봤자 자기의 과거에 그렇게 공들였던 것이 아까워서 공들인게 아까워서 본인을 점점 더 본인을 놓치를 못해요. 아까워서. 수십년 오십년 육십년 살아온게 그게 얼마나 공들인겁니까. 먹을거 안 먹고 쓸거 안 쓰면서 그렇게 아껴서 십일조 냈는데 십일조 없다 해보세요. 헛짓이다 하면 진짜 격분할거예요. 분노할겁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재림’입니다 재림. 이 재림이라는 이 주제가 오늘 본문과 관련되지 않으면 재림이라는 그것이 풀리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는데 재림이 왜 필요하냐. 다시 오실 이유가 하등 없어요 다시 오실 이유가 주님께서. 재림이 만약에 다 이루었다 되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거짓말 한거예요. 새 언약이 재림이 새 언약의 핵심이 되어야하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새 언약 되면 안돼요. 


새 언약이 뭐냐? 새 언약의 완료는 뭐냐? 내 살과 내 피가 새 언약이 되요. 거기 재림이야기 일언반구도 재림이야기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뭐냐? 다 이루었지요. 살과 피를 흘렸기 때문에. 다 이루었으면 그 다음부터는 재림이라는게 또 다른 순서가 없어야돼요. 에피타이져입니까? 뭐 다른게 없어야돼요. 만약에 십자가 믿는데 재림 안 믿는다 탈락이냐? 이런 문제가 또 생겨 버립니다. 


구원을 사람들이 구원을 생각할 때 딱 두 가지 밖에 생각 못해요. 나의 구원. 나의 구원을 생각합니다. 종교 기존의 종교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자기 존재만 살면 그만이니까 내 존재 죽어서 좋은 나라 가면 그만이니까. 나의 구원이 우선이에요. 이게 이천년 교회 역사가 전부다 나의 구원입니다. 거기서 파생된게 구원파가 나오지요. 박옥수나 뭐 유병언이나 나오는데. 구원파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기존 교회에서 나오잖아요. 우리 기존 교회에서 나온거예요 구원파가. 그거나 그거나 신천지나 구천지나 다 같은 이단천지예요. 


구원만 들어가면 전부 나의 구원이에요.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하면 천국간다. 이걸 상품으로 미끼 상품으로 내세운 겁니다. 그래서 양떼같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니까 구원받았습니다. 도망치거든요. 도망치면 또 잡아요. 구원 해줬는데 그냥 가면 안돼지. 십일조 하고 가야지. 이건 뭐 손님 미끼 상품이에요 구원이.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주께서 십자가 피 줬는데 당신은 뭐 줬습니까? 피 드릴까요? 아니 돈 주세요. 이건 뭐. 


나의 구원은 그리고 또 뭐냐 하면 교회 구원. 또 교회 구원을 이야기해요. 나의 구원보다 이게 버전이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에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있잖아요. 나의 구원 여러분 너무 하지 마세요. 이거는 잘못된 겁니다. 교회 구원해야 됩니다. 이게 말리는 시누이라. 더 미워. 더 미워요. 


어떻게 교회와서 예수 믿고 자기 맘대로 살려고 합니까.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하고. 여러분들이 구원받고 예수 믿는다하고 구원받고 끝, 나는 구원받았다고 집에서 나태해져버리면 그러면 여러분 후손에 여러분 다음 사람들에게 불쌍한 이웃사람에게 어떻게 복음 전합니까? 여러분이 소속된 교회가 여유만만하게 이렇게 유지가 되어야하고 풍성하게 되어야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될 때 마귀는 물러가고 하나님의 일은 계속돼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이렇게 교회구원하는거예요. 또 구원보다 밉상인 시누이가 있어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 그 시누이보다 맞장구치는 더 못된 시동생 또는 시누이 친구라고 합시다. 


이런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한국교회는 썩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 어떻게 교회는 이렇게 됐는데 사회는 흥왕이냐. 우리 스스로 반성하자. 뭐냐 하면 너무 교회가 양적팽창에 추구했다. 개인구원이라 해서 양적팽창했는데 양적팽창은 주의 뜻이 아니다.  뭘  해야되느냐 교회를 어떻게? 공동체 운동해야된다. 공동체운동. 진짜 말씀으로 돌아가서 복음학교인가? 김용의. 이거는 더 미워요 이거는. 


공동체 운동하고 있어요 공동체운동. 진짜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에서 원하는 것은 떡을 떼며 뭐 그런 것만 해요. 뭐 떡 떼며 서로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이번 수련회 할 때 다 설명할거예요. 얼마나 엉터리인지 그 해석들이. 떡을 떼며.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 안에  전부 다 나라는 존재가 들어있어요. 남 공동체 도와줍니다. 소속이 자기 소속이라. 


교회구원 이 공동체 운동하면서 뭔가 공동의 실 내용이 있어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공동체 운동했다 그러면 교회는 나한테 해줄게 뭐가 있나? 또 이렇게 나오면 장사 안 될 수가 있어요. 교회만 도와주시면 교회는 또 이런걸 도와줍니다 라는게 뭐냐 하면 행복한 부부되기 이런거. 착한 남편 되기 10계명 이런거 있잖아요. 아내 십계명은 없어요. 남편 십계명만 있지. 하도 남편이 말 안 들어 문제니까. 남편 10계명. 행복한 가정이 우선 돼야 하늘나라가 된다 이런거. 하늘나라는 가정부터 시작되야지 이런거. 전부다 그 안에는 나라는 존재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구원은 뭐냐? 세대구원입니다. 없는 세대가 새로 만들어져서 세대 자체가 그냥 통으로 구원받습니다. 세대 자체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했잖아요. 세대 자체가 구원해버리면 이거는 뭐로 구원이 몇 명이냐든지 누가 구원받았느냐가 아니라 너는 소속이 이 새로운 시간대에 소속되냐를 물어요. 어느 단체 어느 공동체에 속했느냐 묻는게 아니고 어떤 세대에 소속되어 있느냐? 십자가와 재림이라는 그 세계에 구성된 세대, 시간대에요. 그 시간대는 앞뒤를 뭐로 막느냐 하면 예수님의 약속으로 막아버립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그리고 다시 오심, 그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이 이 세대예요. 오늘 본문도 이 세대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의 구원아니예요. 교회 구원아닙니다. 공동체 운동 아닙니다. 세대구원이에요. 이 세대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대구원이 이 세대구원이라는 것이 그동안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초대교회 때 예수님의 재림이 곧 일어날 줄 알았어요. 초대교회 때.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오잖아요. 


그리고 에베소서도 나오고. 깨어있으라 도적같이 온다. 그렇게 했는데 백년 지나고 이백년 지나도 오지를 않아요. 오지를 않으니까 많이 당황했어요 교회가 많이 당황을 했어요. 당황하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만든게 뭐냐? 교회사가 나옵니다. 교회 역사가 나와요. 교회역사는 메뉴얼 만들기 메뉴 만들기 매뉴얼 만들기거든요. 앞에서 했던 그 매뉴얼을 그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겁니다. 앞에서 단계를 계급을 세단계로 했어요. 하나는 주교 그 다음에 주교 장로 부주교 그걸 주교라고 다른 말로 하면 장로 집사 평신도 뭐 이렇게. 계급을 계급으로 해서 예배인도는 제일 요즘 말로 하면 사제라 하는데 또는 목사는 개신교니까 사제가 하고 나머지는 부사제는 요새 말로 하면 집사, 그 다음에 일반 평교인 해서 그들 내에 뭐를 만드느냐 하면 법을 만들어요. 그 법은 뭐로 만드느냐 하면 신앙고백으로 만들어 지는 겁니다. 신앙고백. 굉장히 건전해보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신앙고백으로 만들어 지는데 구체적으로 뭐냐 신앙고백서가 되어버려요. 신앙고백서. 제일 처음에 나온 신앙고백이 사도신경이거든요. 처음에 이렇게 여러가지 있다가 나중에 굳혀진 것은 A.D 한 4세기경이 굳혀졌지만 그전부터 있었어요. 사도신경같이 신앙고백 그 전통을 16세 가기 개신교, 루터 칼빈하면서 신앙고백서가 스물몇가지의 신앙고백서가 마구마구 나오기 시작한겁니다. 


신앙고백서 하나 될 때마다 나라 하나가 다 떨어져 나가요. 네덜란드가 독립했지요. 스위스 독립했지요. 독일도 독립했지요. 전부다 신앙고백서 따라서 한거예요. 신앙을 묻는게 아니라 신앙고백서를 네가 읽을 줄 아느냐? 그래서 싸인하느냐 그래서 싸인만 하면 돼요. 신앙고백서.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게 영국에서 나온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8년. 그거 인정 안하면 장로 안돼요. 개신교에서 장로교에서 장로 안돼요. 목사도 물론 안 되고. 


내가 그 신앙고백서를 건드렸습니다. 어떻게 건드렸냐? 이렇게 건드렸거든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게 되면 나보고 하는 말이 당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선서해서 목사되었는데 지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아직도 인정하느냐? 인정안하면 당신을 면책시키겠다 이렇게 나왔어요. 내가 그랬어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뭐냐 하면 성경이 최종 권위가 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 보면. 


그러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최종 권위예요? 성경이 최종 권위예요? 그 사람들 답변하기 곤란하게 되었어요. 그들 말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최고라면 그걸 지켜야될게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대로 산 사람이 되어 버렸네. 왜? 성경보다 웨스트민스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 했으니까. 성경보다 항상 위라고 이야기 했으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안식일 언급했지만 주일 언급했지만 성경은 뭐냐 하면은 어떤 율법으로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가 안에 들어 있어요. 


결국은 이것은 개신교 신앙고백서는 결국은 뭐냐 하면 프렌차이즈 가게의 계약서예요. BBQ, 처갓집 통닭, 파리 바게트. 사람을 죽이겠다는 건지 사람을 천국 보내겠다는 건지 보낸 사람을 짓밟겠다는건지 모르겠어요. 에스겔에 있지요. 살리려면 죽이고 죽이려면 살린다고. 누가? 이 세상이 이 세대가, 이 세대가 반드시 그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 끝나고 난 뒤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그들이 제대로 파악을 못했느냐 하면 개인구원 위주거든요. 내가 개인구원이니까 재림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인존재는 뭐로 보느냐 하면 시간상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돼요. 과거는 이미 지나간거 현재는 지금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재림은 뭐냐? 아직 오지 않았다의 거기에 포함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세대는 그게 아니예요. 세대는 재림이 아직 오지 않았다가 아니라 재림 자체가 이미 박스 세대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약속을 믿을 때 주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이것을 한꺼번에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입장에 서 있지 않고 나의 입장 나의 존재 입장에 서버리면 나는 몇 일 전에 예수 믿었다 지금은 내가 성령을 받았다. 남아 있는게 있네? 그 재림이 있는데 만약에 내가 도적같이 되지 않고 만약에 잠을 잔다든지 기름을 준비 하지 않는다든지 주유소 가까운데 이렇게 된다면 나는 아무리 성령 받고 내가 예수 믿어도 재림하는 순간 깜빡 졸아 버리면 두 사람이 밭을 갈다가 한 사람만 데려가고 두 사람이 맷돌을 갈다가 한 사람만 가게 되어 나만 손해잖아 정신 바짝 차리라 이 말입니다. 정신 바짝 차려라. 


그럼 정신 바짝 차리려면 차릴 수 있는 어떤 자극제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 자극제가 뭐냐 하면 마지막 때의 징조 파악하기예요. 마지막 때의 징후 파악. 마지막 때의 징후 파악이 뭐냐 하면 바로 이슬람하고 이스라엘하고 중동하고 제 3차 전쟁 이런거. 황금돔 성에 이스라엘 군대가 침공한다든지 이제 성경에서 그 정보를 찾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숫자를 알아냈어. 1998년 10월 18일 이장림은 알아냈어요. 하얀 옷 입고 전부 다 하얀 옷  입고 그때 한복 대목봤습니다. 전부 하얀 옷 입는다고. 그리고 이장림 자신은 실은 12개월째 계속 적금 넣고 있었어요. 어차피 목회는 장사니까. 


왜냐하면 그 이장림이나 목회자가 양심의 가책 안 느끼는 이유가 내가 하는 말로 위로 받았잖아요. 그러면 그 값 했잖아요. 십일조 한 값 했잖아요. 인간은 자기 소망 미래에 대한 소망가지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지고 우울증도 나았고 그러면 목사가 돈 챙기든 말든 네꺼 얻었으면 됐지 뭐. 약사가 약 지어줬으면 됐지 뭐 약사가 바람 피우고 뭐 그거 왜 신경쓰는데 약만 타가면 되지. 어차피 돈 먹고 돈 먹는 장사인데. 아이고 우리 속았습니다. 속은 본인이 잘못이지요. 속은 본인이 누구 탓 합니까. 지금 와서 다시 이야기 하지만 속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똑같은 한통속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주님의 뜻인 것을 아시길 바랍니다. 


교회 이용해서 내 구원 챙기겠다는 것, 지옥가도 마땅한걸 왜 구원을 챙깁니까? 지옥 가도 마땅한데 왜 구원을 챙겨요? 그냥 살던대로 지옥가지. 뭐 어떤 희망있다고. 희망 없어요. 하는 행세 보세요. 본인이 본인 행세봐도 이 모습 천당 가겠습니까? 주 예수 보다 더 좋은게 없다고 그렇게 노래 노래 불러놓고 막상 남편이 여보 이번 주일날 놀러가자 하면 가정행복위해 놀러갈거면서. 뭐가 주 예수 보다 귀한게 없어요. 우리 가정이 더 귀하지. 그래가지고 천국 가면 잘 할께요. 천국가면 그때서 잘하는게 아니예요.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세대에 속하지 아니하면 끝났습니다. 


요한복음 5장 한번 보겠습니다.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과연 그런지 한번 들어보세요. 요한복음 5장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곧 이 때라. 곧 이때라. 지금 말하는 이때라. 곧 이때라. 더 놀라운거 말씀드릴께요. 마태복음 10장 23절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언제 왔는데? 언제 왔는데요? 안 왔는데. 왜 성경에 빼지 이거. 안 맞으니까 수정하지요. 이스라엘 동네 다 다니지 않아서 내가 오리라 했습니다. 언제 왔습니까? 안 왔는데. 아직도 안 왔는데 벌써 이천년 지났는데. 이천년 더 지났다. 주님이 구라하신거예요. 지금 거짓말 하신거예요. 


근원적인 문제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을 이해 못해서 그래요.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해서 로마서 6장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그리스도와 합하게 되면 이미 우리는 죽었어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했어요. 그러면 죽을 때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 죽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던 자가 어떤 모습으로 죽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대에서 살면서 우리가 형성된 시간과 공간 개념을 품고 죽어요. 시간과 공간개념. 


나는 어디 있다 가 남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어떤 고정된 장소에 내 자리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존재적 표현이 가능하고 시간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몇 년도고 몇 일인 것을 과거가 있기 때문에 현재가 되요. 2018년도가 뭡니까? 2018년도라고 하는 것은 2017년도가 있다는 조건하에 2018년도가 된다고요. 그래서 옛날에 일본이나 동양의 왕들은 뭐냐 하면 자기가 왕 되고 난 뒤에는 년도가 어떻게 됩니까? 년도가? 다 저로 시작하죠. 일본도 마찬가지고 중국도 마찬가지고 한국도 마찬가지고 고종5년. 이렇게 하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새 시대다 이 말이에요. 시간을 자기 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떠냐? 출애굽기 12장 봅시다. 출애굽기 12장, 이거는 쉬는 시간에 찾아야겠네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나오면서 이스라엘 첫 달이 되요. 이게 원래 4월달에 나왔거든요. 이게 첫 달이 되요. 첫 달. 이 근처에 있을겁니다. 첫 달이 되요. 왜냐하면 기존의 애굽의 세월은 과거는 옛 세대에 속해요. 새 세대라고 하는 것은 인간보다 시간이 우의를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무엇을 모든 시간과 공간은 어떤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사람의 움직임 따라서 시간과 공간이 새롭게 창출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레코드 판에 침 같아 가지고 침을 이렇게 레코드 판에 침을 놓는 순간 음악이 나오잖아요. 그냥 다이아몬드 침이 닿지 않으면 음악이 안 나와요. 그냥 판이에요 그냥 판. 피자 판 같은 판이라고. 거기에 그 레코드 판 침이 다이아몬드 침이 딱 닿을 때는 거기서 음량이 나오잖아요 음량이. 하나님의 뜻이 나온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이 세대에서 무빙, 움직일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오고 하나님의 영광이 속속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마무리 사건 지어지면서 그걸 그 가운데 폭을 세대라고 해요. 새로운 세대예요. 로마서 12장에 보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지요. 마태복음도 거기에 마태복음 12장 3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했지요. 세대 자체를 하나님의 그냥 세상이라고 하면 하는데 요한복음은 세상인데 마태복음은 이걸 세대라고 해요 세대. 예수님께서 새로운 세대를 옛 세대 가운데서 새롭게 창조하고 다니시는 거예요. 


새로운 새대가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있다 없다? 없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면 언약의 완성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세상 끝날 일을 미리 이 땅에 세상 끝나지도 않았는데 미리 아는 그게 바로 새로운 세대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에요. 세상이 끝나지 않았는데. 끝나기 전에 이미 끝을 아는 사람이요. 그게 베드로후서 아닙니까. 마지막 때에 모든 지구가 불탄다 이미 알고 있잖아요. 노아보세요. 노아가 홍수 오기 전에 방주 만들었잖아요. 빗방울 떨어질 때 방주 만들었습니까? 빗방울 떨어질 때? 아이고 급해가지고 빗방울 떨어질 때 방주 만들면 물 다 새가지고. 참 창창한 비 올 김새가 안보일 때 했어요. 


방주 만드는 자체가 너희들이 모르는 너희 세대가 끝나고 난 뒤에 이 세대가 어떻게 끝이 나느냐를 방주 뚝딱뚝딱 방주 만드는 그 소리가 들려주는 겁니다. 그 소리가 말해주는 거예요. 노아 방주는 잣나무로 만든 방주가 언약 내용이라면 오늘날의 내용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살과 피예요. 누구든지 살과 피가 없으면 영생이 없느니라 그 말씀입니다. 그럼 살과 피라 하는 것은 뭐냐? 그럼 살과 피를 어디 선지국이라도 어떻게 몸보신 하듯이 정육점 가가지고 삼겹살이나 사태살이나 먹어야 되느냐. 


그게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우리 몸 자체 시공간 의식하는 우리 몸 자체가 나 어디 산다 나 몇 살이다 자체를 죽은 몸으로 생각하라 이 말이죠. 죽은 몸으로. 아까 동영상할 때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아담의 몸이거든요 제가 아까 강의 했잖아요. 몸이 아프세요? 본인 책임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내 몸이면 내가 잘못해서 아프겠는데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아담의 몸을 물려 받았기에 아플 때는 아파야 돼죠. 왜? 아담이 받은 벌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 여자로 태어나기 싫어 그럴 수 없어요. 그건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내가 바꿀 수 있는 몸이 아니잖아요. 키 작고 크고 이런 것도. 그래서  인간의 몸이 아담의 몸으로 끝. 이 세상은 이걸로 끝 이것은 언약적 관점에서 못 본거예요. 


언약적 관점에서 보게 되면 아담과 하나님과 아담의 언약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인정한다면 그 사람 눈에는 언약이 그것뿐이냐 이렇게 하겠지요? 언약이 어떻게 그것뿐입니까? 사는 몸이 있는 반면에 살려주는 몸이 있는데요. 그게 두 번째 아담 아닙니까? 그게 예수님의 몸이란 말이죠. 성령 받아야 알 수 있는거예요. 성령 받아야. 성령 안 받아도 잘 아는데. 잘 알지요. 잘 알지만 그건 지식으로 아는거고. 성령 받게 되면 이 고물단지는 고물단지 가지고 쓸모 있는 것은 뭐밖에 없느냐 하면 누굴 만나고 뭘 이야기해도 나는 죽은 몸이다 그렇게 될 때만 쓸모가 있어요. 그래서 죽었다고 생각 안 하면 설교하지 말란 말이에요 그런 뜻이에요. 설교뿐만 아니고 누구 만나지도 마세요. 죽은 몸이라고 생각 안 하면 선도 보지마. 


선 보면서 그런 이야기하지 말고요. 선볼 때는 아이고 어머님께서 참 훌륭하십니다. 남자가 왜요? 이런 훌륭한 아들을 이렇게 잘 키워줬는데 그 어머니가 훌륭하지요. 본인을 칭찬하지 말고 우회해가지고 칭찬하는게 더 커요. 데미지가 더 커요. 그럼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거지요. 거기서 뭐 첫 번째 아담이 어떻고 그런 얘기 개한테 진주 던지는 거예요 왜 그런 이야기를 왜 거기서 합니까? 그러면 아이고 또 받았으니까 남자가 예의상 그쪽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쪽 어머니도 이렇게 이쁜 딸을 키웠는지. 사실은 이렇게 이쁘다 하지만 사실은 죽었다 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식으로. 아이고 겸손까지 하시네요. 이러면 성사되는 거죠. 그 심각하게 선 본다고 간단하게 그러면 되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홍민희 (IP:121.♡.203.222)18-07-28 18:32 
강남-요한복음 17장 17절(세대 구원)180717b-이근호 목사 



왜 성경에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같이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인간적인 시간 하루와 천년이 같다는 뜻이 아니예요. 인간들이 사용하는 모든 시간론 자체를 하나님이 만드는 세대에서는 세상에서는 그걸 안 받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그 시간. 그걸 받아주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의 시간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인간의 몸에서 나왔고 그 몸은 아담의 몸에서 나온거예요. 아담의 몸에서 나온 시간과 공간개념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시간과 공간개념과 달라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같이 우리가 이해하고 노력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어 버리면 뭐가 날라가 버리느냐 하면 새 언약을 구성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 살과 피죠? 살과 피는 어디서 생깁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살 좀 떼어주고 뭐 피 좀 짜주고 이렇게 생기는 겁니까? 누가 막 달려들어서 예수님을 밟아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유발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는 이 말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공간이 예수님이 말씀하는 그 새로운 세대에 동의 못하겠다는 표시가 바로 십자가 사건, 피 흘린 사건이에요. 교회 지붕에 십자가 왜 꽂아있는데요? 그 사람들도 꽂아 놓은 사람도 의미를 몰라요 그게. 십자가의 원래 뜻은 뭐냐? 저희 행함으로 구원 안돼요 하는 뜻이에요 그게. 


행함이라는 것은 생각에서 나와야 되는데 이 생각과 결부될 수 있는 주님의 언약은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언약 같으면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지요.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보낼 이유도 없어요. 보낼 때 협상하라고 보냈습니까? 타협하라고 보냈습니까? 아니예요. 세상 죄를 지라고 보냈거든요. 


그러면 세상은 뭐냐? 죄뿐이어야 해요. 그래서 어떤 공통점도 없어야 돼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공통점도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정 짓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란 말이죠. 사도바울은 말했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고요. 아는 것에다가 십자가 하나만 더 갖다 보태면 추가하면 구원받는거 아니예요.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는데도 사도바울은 말을 하지 말라를 집어넣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라, 하지 말라 남을 용서하듯이 너를 용서해라 이것 먹는 걸로 족한 줄 알라 뭐 이런 그런 모든 말씀은 다 어디로 가느냐 하냐면 이건 하는 말이고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되었습니다를 이걸 통해서 다시 확인하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십자가 안에 있고 세상은 내 바깥에 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나는 십자가 안에 있고 나머지는 십자가 밖에 있다. 내가 자랑할 것은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사도 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자랑할 것은 뭐 밖에 없다고 했어요? 오직 십자가 밖에 없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가 십자가를 믿는다가 아니라 나는 내가 살아있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아담의 몸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매일 날마다 죽는 양식으로 있는데 살아있다고 이야기를 붙인다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고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나는 살아있다 이렇게 되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살아있으니까 이 몸이 누구꺼예요? 내 몸이 아니지요. 그리스도 것이잖아요. 그리스도 것이니까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는 능력 주시는 자 그 한계 내에서는 못할게 없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내가 지금 안 하고 있어도 그게 안 하고 있어도 주의 일이다 이 말이죠. 골프 쳐도 주의 일이고 크루즈 여행해도 주의 일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 19절 한번 봅시다. 17장 19절.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까 첫째시간에 했듯이 진리의 반대말을 뭐라고 했던가요? ‘세상’ 세상이 진리한다면 이미 진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제자들이 계시다는 말은 그들은 이미 어디서 분리되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격리된 상태예요. 세상에서 격리되다 보니까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격리되었다고 이야기하려면 두 개의 세상으로 설명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두 세대로 설명하던지 해야돼요. 


그런데 세상은 두 세대로 설명한게 이것은 두 세대로 설명하죠. 마태복음에 아까 봤던 마태복음에. 모든 세대가 세상이라는 그 개념을 치워버리고 두 세대로 설명하잖아요. 그리고 옛 세대와 새 세대 로마서 12장처럼. 그렇게 설명하자 이 말입니다. 그리고 옛 세대가 거기에 결집해서 정신이 결집되어서 하나의 방향으로 이렇게 치는게 있는데 그게 뭐냐.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를 죽이겠다는 십자가의 의지, 예수님의 살해의지예요. 살해의지. 남을 죽이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진리에 빠져나오려면 이 세상에 걸맞는 자랑거리가 날아가 버리고 뭐만 달랑 남아야 되느냐 하면은 이 살해의지로 똘똘 뭉쳐진 괴물의 모습으로 진리 쪽으로 빠져나와야 돼요. 이 살해의지라는 것 남을 죽이고 싶다는 의지는 질투 또는 미움 이런 것이죠. 육체의 열매라 하는 것. 질투와 미움 이것은 전부다 아담의 몸+악마의 의지가 결합되서 이런게 나오잖아요. 


그럼 이 살해의지가 이 세상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는 증거로서 최초의 난 사건이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을 가인이 죽이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해서 그렇게 만들어요. 가만히 둘이 붙여놓으면 절대로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벨의 제사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받음으로써 저쪽에서 잠복되어있는 들키지 않는 살해의지가 발작을 일으킨겁니다. 


서해안 고속도로에 온도가 높으니까 어떻게 되요? 도로가 평평한 도로가 어떻게 됩니까? 도로가 불쑥 튀어나와가지고 4명 부상당했지요? 불쑥 튀어 나왔잖아요. 평평한 도로가 날씨가 더우니까 밑에서 열기 오르니까 이게 터져가지고 올라오듯이 주님께서는 평평한 이 인간세상 악마와 더불어 인간세대를 장차 오실 십자가의 잠복된 그 힘을 가지고 밀어부쳐 버리면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것이 숙성되게 되면 예수그리스도를 살해 하나님을 죽이겠다는 악마의 본래의 지향점, 악마의 본래의 노림수를 인간이 대변해서 마구마구 발휘하게 되어있는 구조가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아담의 몸을 받은 사람치고 이 살해의지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살해의지를 다 갖고 있는거예요. 최초의 범죄가 살인입니다. 최초의 범죄가 살인.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평소에 취미가 그래서 동생 죽이는게 취미라서 그런게 아니고 취미가 아니고 약이 올랐거든요. 약은 왜 오르지요? 약이 왜 올라요? 약 안 오르면 되잖아요. 약이 왜 오릅니까? 뭐 자기 인정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생각되겠지만 살인을 일어나게 한 가인의 이유가 사람이 의외로 간단해요. 


사람이 이렇게 있으면 주변에 있는 모든 세상 되어진 세상의 모습은 항상 뭐냐 하면 내 위주로 어떤 세상관이 정립되어 있습니다. 내 위주로.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버리니까 이거는 뭐냐? 내가 생각한 그 세상관에 없는 거예요. 여기에 허점을 노출시킨게 되요. 허점을 노출시킨게 되는데 말을 한꺼번에 하려니 어려운데 쉽게 합시다. 


제가 주일 낮설교 제일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이런 이야기 했거든요. 사도바울이 그 할례 이야기를 할례언약이 모든 율법의 확장되었다고 한 이야기는 한 가지의 이야기를 가지고 저 모든 사실을 설명이 가능하다고 사도바울은 이야기 한거예요. 한 가지 가지고 모든 변화를 다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왜 사도바울의 말을 듣는 사람에게 왜 화를 돋우느냐 하면은 평소에 인간들이 세상을 분석하고 판단할 때는 누구의 이익부터 먼저예요? 내 이익부터 먼저 챙겨요. 나한테 유리하냐 계산 이해타산 해가지고 나한테 유리하면 좋은 세상 나한테 불리하면 이민 가자 이런 것이거든요. 나한테 유리한 구조를 해가지고 제발 하나님께서 기도 빡시게 해줄테니  기도 빡시게 할테니까 내가 생각하는 그 세상대로 좀 흘러가게 해달라 세상이 돌아가게 해달라 얼마나 헌금 들이대고 간절히 기도하고 봉사하면서 제발 내 인생관에 하자 없음을 제발 확인 좀 해달라고 했는데 그게 그 인생관 뜯어보면 누가 잘되는 거예요? 내가 죽어서 천당 가는거고 우리 가족이 복 받는거고 전부 그런거란 말이죠.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제시한건 뭐냐? 할례 언약이라는 것 하나 가지고 다 설명, 할례 언약이란 것은 누구 이야기냐 하면 이건 내 이야기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은 뭘 갖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세상 보기를 사도 바울은 알고 있고 우리는 나만 챙기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만 챙기는 것이 속 편해요. 왜? 공부하는 것도 귀찮고 성경보는 것도 귀찮고 그때그때 마다 내 이익되는 것만 그때그때마다 챙기면서 가족들 단란하게 살아가는 것. 뭐 있어? 그게 다죠. 그게 행복 아닙니까? 


뭐 하늘에 별 따서 뭐할건데요? 하늘의 달이나 별을 생각하는 사람은요 미국에 NASA에 근무하는 사람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관심없어요. 몰라 농사짓는 사람이나 고기 잡는 사람이나 가끔은 보지만 그건 자기 필요한 것만 할 때 필요한 거예요. 그거말고 모든걸 딱 하나로 딱 응축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납득이 안 되지요. 그게 사도 바울이 밉상받는겁니다. 


가인은 자기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추수감사제를 드렸잖아요. 곡식해서 바쳤다 이 말이죠. 그러면 뭘 예상하겠어요? 내가 드린거 하나님이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고마운건 사실이지만 내가 현재 구축되어 있는 세상관과 미래관 그리고 내 앞으로의 장래와 운명 이거는 얼추 건전하고 정상적이라 하는것을 내가 알 때 내 인생은 안정감을 얻습니다. 교회 간 이유가 자기 인생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가잖아요. 


그런데 우발적 사건 벌어졌어요. 내가 바친거 안 받는건 좋아요. 그러면 다음에 또 정성스레 바치면 되니까. 그런데 이미 정답이 내가 아니란 것이 확정이 되어 버린거예요. 내가 정답이 아닌 것. 내 제사 안 받는건 나는 너와 안 논다는 말 아닙니까. 확정이 되어 버렸어요. 이 확정된 운명은 누구의 운명이냐 하면 바로 악마의 운명입니다. 악마는 예수님 만날 때 악마는 이미 알았어요. 우리가 멸망할 때가 안 됐는데 왜 미리 왔습니까? 이런단 말이죠. 확정된 멸망은 악마에게 속했는데 이 악마의 마음이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 있는거예요 모든 인간에게. 


왜? 우리 조상이 악마와 계약했기 때문에 그래요. 괴테가 지은 책 있잖아요. 파우스트같아요 파우스트. 악마와 계약했어요. 부부도 악마와 계약인가? 그 반지 뭐한다고? 인간은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여지없이 악마든 누구든 다 계약 다 해버립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사람하고 안 만났어요. 누구하고 만난줄 알아요? 악마하고 만났잖아요. 만나가지고 인간이 왜 못 벗어난 이유가 나와요. 세 가지. 사람은 떡, 돈 없으면 못살고요 물질 없으면 못살고 사람은 외로우면 인기 없으면 못 살아요. 내가 여기 있다 인정 받아야돼요. 


세 번째는 그걸로 욕망이 멈추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것이 되지 못하면 사람은 허덕입니다. 교회 이천명 아니 오천명 되야돼 오천명이 이만명되야돼요. 악마의 마음. 어쨌든지 시험 잘 쳐서 선생님한테 좋은 학생 되고 싶은 마음. 그게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느냐 하면 악마가 알고 있어요. 악마가 알고 있어요. 인간은 몰라요. 다만 마음은 악마의 마음이지만 결국 그걸 하다하다 안되면 악마의 마지막 모습은 가룟 유다가 보여줬지요? 자살. 자살이든지 남을 죽이던지 이게 뭐냐 하면은 끝까지 내가 불합격된걸 내가 용납 못하겠다는 발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수시로 강의할 때 했잖아요. 날 건드리지 마라. 날 건드리지 마라 그 존재의 본심은 날 건드리지 말아라. 불교가 그거예요. 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니까 날 건드리지 마라 내가 부처니까 날 건드리지 마라. 지옥가도 누가 위로해줘요? 내가 나를 위로해줘요 내가 나를. 지옥가도. 괜찮아 뜨끈뜨끈하니 살만해. 이런 식으로. 지옥가면서도 스스로 자기를 위로해요. 약간 범위 넓히면 누가 위로해줍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이 위로해 주지요. 혼자 위로 받는거 좀 심심하니까 여러분 하고 다 찾는겁니다. 그래서 교인수 많은 교회 사람들이 찾는 이유가 여러분이 많아서 그래요. 


성도란게 딴게 없어요. 내 안의 살해의지 있다 이걸 자랑하는 겁니다. 성질은 변하지 않아요. 인간성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점은 뭐냐 하면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나 때문에 예수님 죽었다는 거예요. 내 살해의지 때문에 예수님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내 피해자로 인하여 가해자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용서’라는게 성립이 됩니다. 용서는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게 용서예요.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는 말은 다른 말로 ‘나는 너 때문에 죽은 피해자야’ 그런 이야기예요. 


날마다 용서 받는 즐거움이 있어야돼요. 날마다 용서받는 즐거움이 있으려면 날마다 살해의지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하루 종일 느낄 필요가 있어요. 뉴스 보면서 오늘도 몇 놈 죽이는가. 오늘 몇 놈 죽여야돼 뉴스 보면서. 김정은이 죽여야되고 일본 그 수상 죽여야되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지금도 김정은을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사실. 햇빛과 공기 주시고 심장을 뛰게 하시고 주께서 계속 살린다는 겁니다. 


좀 이렇게 나쁜 놈 죽었으면 좋겠는데 나쁜 놈은 안 죽고 당대 의인 불났는데 4명 구하고  이런거 있잖아요. 세월호의 그 아내는 미쳐서 조울증 걸려서 돌아다니고 신문에 났지요. 사람 구하고 그 아내는 미쳐서 돌아다니고. 세상이 공평해야 된다는 이 발상은 악마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세상은 공평하면 안돼요. 세상은 살인의지로 가득 차야돼요. 출렁여야 됩니다. 왜? 그래야 피가 나오니까. 예수님의 언약이 이루어져요. 


자, 그렇다면 죄인이라는 것이 과연 이 세대의 형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누가복음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 누가복음이 이번에 수련회 할 때 누가복음 해야 될 이유가 바로 사도행전을 지은 저자가 누가 입니다. 누가가 두 번째 전도라 할 때 그때 마게도니아 사람이 환상 속에 나타난 그 순간에 누가가 ‘우리’라는 말을 처음 했어요. 그게 뭐냐 사도 바울과 우리가 그때 한 짝이 되었거든요. 그전에는 누가가 안 나와요. 마가가 나오지. 누가 안  나와요. 마가는 왔다가 비겁하게 돌아가요. 그래서 누가복음을 누가 썼는지 추적해보면 2년 동안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 갇히게 되는데요 그때일 가능성이 있다. 3차 전도 끝나고 난 뒤에 베스도라는 총독한테 갇혔을 때 그 때 썼다는 그런 썰이 그런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쨌든 누가복음 9장에 27절에 보면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나라를. 재림도 안했는데 재림도 안했는데 본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재림이란 것을 다시 설명하자면 예수님의 재림이란 것은 인간이 죽어 마땅한 인간의 아담의 몸에서 나온 시간적 개념 가지고 재림을 설명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몸을 가지고 재림이 설명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몸에는 어떠한 시간의 절차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은 어떠한 시간이 아니고 예수님 보면 어떠한 사건이 나와요. 시간이 아니고 사건이 나온다는 말은 사건이 순서를 하더라도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적용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걸 묵시세계라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면 이런거죠. 지난 오후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는데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만 맞이했을 뿐이에요. 그럼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여리고성 저 앞에 있어요. 아직 침범하지를 않았어요. 아직 침공하지를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기생 라합은 자기에게 이미 침공당한 현재로 보는 겁니다 인식이. 


올 때 잘하지가 아니라 그걸 효과라고 하는데 효과라고 하는 것은 일은 저쪽에서 벌어졌는데 그 파장이 이미 이쪽에 퍼진거예요. 신의 파장이 이만큼 파장이 퍼진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에 이 세대에서는 아직 미래가 남아 있어요. 아직까지 오늘까지 2018년도 하겠지만 묵시 세계에서는 새로운 세대에서는 이미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그 일에 반복만  있을뿐이에요 반복만. 


옛날에 제가 할머니하고 같이 살았는데 할머니가 아주 살림을 잘 했어요. 그래서 설날쯤 강정하잖아요. 쌀 강정 이렇게 집에서 직접 만들고 했는데,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쌀강정을 창고 다락에다 탁 숨겨놔요. 그러면 보통 설날 때는 많이 먹지만 설날 끝나면 설날 때 먹는 음식이 다 떨어지잖아요. 그러면 할머니 강정 하나만 주세요 하면 제일 첫마디가 없다예요. 없어요. 없는데 뭐 동생이나 뭐 공부 잘하고 있으면 없는 강정이 생겼어요. 우리는 어디서 나오는지를 몰라요. 그다음에 누가 와가지고 곶감 달라고 하면 또 누가 곶감 달라고 하면 이쁜짓 할 때는 곶감을 줘요. 분명 곶감은 이미 설날 때 수효가 마감되었어요. 시중에 물건이 안 나옵니다. 끝났어요. 안 나오는데 이상하게 할머니는 4월달 되도 곶감 계속 나와요. 


십자가 사건 끝났습니다. 십자가 새 언약 아니면 구원 못 받아요. 왜냐하면 그게 가해자의 피해자 쪽에서 주는 용서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용서가 안 되거든요. 피해자 입장에서 용서가 되기 때문에 그 용서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그 용서예요. 어떤 짓을 해도. 살인과 도둑질 십계명에 나오는거 있잖아요. 간음 거짓말 어떤 것도 용서가 되요. 그런데 그걸 찾으려면 찾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게 바람 부는 사건이기 때문에. 이 30년 40년 교회 시키는대로 다 하다가 어느날 설거지 하다가 성령 받아버리면 내가 지금 그동안 교회 놀이 했나. 교회놀이 했구나 소꿉놀이 한거예요 소꿉놀이. 그냥 하면 할수록 내가 잘나지는, 내가 점점 더 멋있어지는 이런 착각에 빠지는 환상을 유발시키는 그런 놀이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어느날 성령이 와버리니까 야 이거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교회 놀이 이것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교회놀이 전문가들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하세요. 어떻게 하면서? 이것 때문에 돌아가신줄 아시면서 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걸 알면서 하면 그렇게 열심 낼 수 없지요. 할 필요 없지요. 체면 슬슬 보면서 할 수밖에 없는데. 어쨌든 간에 그게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인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그러면 여기 누가복음 9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얼마 안 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했잖아요 그 뒤에 나온 이야기가 이런 쪽의 이야기가 마태 마가 누가 세 가지 다 나오는데 세 가지 나오는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런 이야기 하고 반드시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변화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 가지 다 마찬가지. 마태복음 17장도 마찬가지고 마가복음 9장 누가복음 9장 다 마찬가지예요. 변화산. 


변화산 또 이스라엘 갔다 온 자랑질을 해야 되겠네. 약간 저녁 늦게 변화산에 도착했어요. 산이 꼬불꼬불한데 아이고 세상에 오후 5시가 넘었네. 딱 가니까 변화산 그 성전 성당이 있거든요. 문을 닫아 버렸어요. 할 수 없이 밖에서 기념사진 찍고 내려왔는데 이 변화산에 그 성당이 뭐냐 하면 예수님만 기념한게 아니고 옆에 누가 있느냐 모세와 엘리야가 있어요. 자, 인간적인 아담의 몸에 의해서는 모세하고 엘리야하고 같은 동기생이 아닙니다. 모세는 1400년이죠. 엘리야는 850년 사람이에요. 이거는 맞먹을 입장이 아니예요. 그런데 이 세대는 어떤 세대이기에 시간을 우습게 보고 이렇게 같이 모여 있어요. 하나님 나라를. 


지금 우리가 이 더운 날에 강남에 있잖아요. 강남에 있으면서 아까 했던 시공간입니다. 어디 있다? 강남에. 시간은? 지금 몇시 됐다. 그런데 이거는 뭐냐? 죽은 자들이나 신경 쓸 그거란 말이죠. 정말 우리 성도가 진리 안에 있으면 이렇게 변동 많은 변화 많은 이거 말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주식 가격 올라갔다 이거 말고 이거 이거. 예수님과 모세 함께 있는 이거 있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함께 있는 이 동네. 이 동네에 가야 돼요 우리가. 


여러분 영지주의란 말 들어보셨지요. 영지주의란 말 들어봤습니까? 영지주의 특징이 딱 세 가지예요. 영지주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가 왔던 곳이 있는데 지금은 그걸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한번 적어볼께요. 인간이 살던 곳이 있다. but 그러나 지금은 거기서 엉뚱한 동네에 있다. 영지주의 핵심은 이거예요. 살던 곳이 있는데 엉뚱한 동네에 있으니까 그 동네로 돌아가자 이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만 살던거예요. 우리는 산적도 없어요. 예수님만 살던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향이 아니예요. 우리의 고향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게 우리의 고향입니다. 내 고향이 아니고 남의 고향이에요 남의 고향. 나의 살던 고향은 이 세상이에요. 이곳은 예수님 것이에요. 예수님 있는 곳에 가려면 여기에 인간은 못 들어 갑니다. 목숨 바쳐도 못 들어가요. 여기에서 주님께서 뭘 만드느냐? 처소를 만들어야돼요. 


그 만드는 방법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누가복음 9장 31절에 모세 엘리야가 나타났잖아요. 신기하지요. 신기하다고 하지 마시고 이제는 뭐 이거 당연한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세요. 오히려 이 강남이 날씨 더운게 신기해요. 여기 남의 땅이니까. 여기 31절에 보면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그 다음에 뭡니까? 별세해야돼요. 그 세계는 눈으로 볼 자가 있는데 눈으로 봤지요. 이제 모세 엘리야 베드로 야곱 요한이 봤잖아요. 봤지만 그 세대에 들어가려면 단서가 있어야 되요. 그 단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베드로가 보는 것처럼 그대로 우리가 봤으면 봤다는 이유 때문에 쑥 넣어 줬으면 좋겠어요. 신기한걸 봤으니까. 그런데 본걸로 들어가지를 않아요. 봤기 때문에 들어가는게 아니예요. 심지어 거기에 들어갔던 모세 엘리야도 아 여기 좋습니다 이렇게 끝나는게 아니고 주님 아직 하실 일 남아있잖아요. 지금 이런 식이에요.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 누구 했습니까? 제자들이 이야기 했어요? 모세 엘리야가 이야기 했습니까? 모세 엘리야가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은 뭐냐? 모세 엘리야가 이야기 한다는 것은 지금 예수님이 하실 일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재림이 아니예요. 십자가 죽음입니다. 복음은 언약은 재림이 언약의 중심이 아니예요. 십자가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 옛 세대, 옛 세대의 형편을 그대로 공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온다는걸 이야기해버리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리는 것은 할 수 있어요. 뭐 기다리지 뭐. 구름타고 오는걸. 목사님도 할 수 있지요? 기다리는 것. 나중에 목 디스크 오면 이렇게 좀 찜질 좀 해가면서 기다리지 뭐. 


그러나 기다리는건 할 수 있어도 때려죽어도 못하는게 있어요. 어떤 인간도 못하는 것 베드로도 못했고 아무도 못한게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나의 살해의지를 끝까지 파헤치는 사건 십자가 사건은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걸 믿으려면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일부러 그 관계를 주께서 엮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놈팽이들이였습니까? 강도들이였습니까? 세리 창기였습니까? 아니예요. 경건에 경건을 거룩의 거룩을. 수직적으로 저 높은 사다리를 세워서 저 높은 곳에 가면 곧 얼마 안 있으면 우리 하나님과 손을 터치할 지경까지 한 그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그들에게 뭐가 문제냐 하면 자기가 가인의 요소 가인의 후예라는 사실을 잊어버린거예요. 모든 인간에게 가인적인 요소가 있다는 걸 잊어버린 겁니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예요. 아담에 의해서 그게 이미 다 퍼져있었던 거예요. 이 본성상. 인간의 모든 행동 하나 움직일 때마다 살인의지가 살인의지에 뒷받침되어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고아원에 내가 앞집에 고아원 있는데 아이들 보니 불쌍해 죽겠다. 쌀 두 가마 밀가루 두 포대 해서 갖다줘야지. 굉장히 착해 보입니다. 


갔는데 가인하고 똑같아요. 내가 거기다가 혼자 갔으면 가인이 살인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는 날 마침 간 그때에 쌀 10가마가 왔고 밀가루가 22가마가 왔고 MBC  KBS기자 다 따라왔고 나 두 포대 준건 이거는 티도 안 나고 저 쪽에 플래쉬 터트리고 난리도 아니예요. 사진 찍고 어떻게 이렇게 동정심이 많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왔습니까? 난리하는데 나는 돈 줘도 푼돈이고 고맙다는 인사도 대충하고 저쪽에서는 정신없이 고아원 관계자들이 다 저쪽에 다 몰려들어가가지고 내 두 포대는 뭐 할 때 이럴 때. 주여 이렇게 봉사하게 해서 감사합니다 그런 맘이 들까요? 아니면 내 잠재 기억 속에 죽어버려라 죽어버려 저 인간들. 


차라리 그런 일 없었으면 나는 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쪽 오른손이 더 커. 내가 낸 오른손보다 저쪽이 더 큰 거예요. 며느리가 하나 밖에 없으면 늙은 시어머니 모시고 설날 때 음식 뭐 전 구울 수 있어요. 그런데 며느리가 세 명 동시에 이거는 명절날 기분 나빠 못 가겠어요. 라이벌 때문에. 시어머니도 답답한거예요. 그냥 인사치례로 했을 뿐인데 왜 편애하느냐라는 식으로 튀어나오고 왜 편애하느냐 했고 그 편애가 편애로 끝나면 괜찮지만 그 편애가 유산 문제로 이어져 가지고 지분 문제로 이어질까봐 내가 제일 걱정하고 있어요. 저렇게 사랑받는데 두 배 주겠지. 큰 아들은 집하고 너는 빚이나 갚아라 이런 식으로. 뭐 하나 삐끗 잘 못 보였을 경우에는 유산 안 떨어지게 되면 부모 효도할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 


왜 부모 효도합니까? 뭐 부모 늙어가는 얼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시어머니 얼굴? 아니예요. 돈 때문에 그렇잖아요 돈! 나만 그런가요? 아니 혼자 있으면요 정말 우리 딸이 어릴 때부터 하는 이야기예요. 엄마 나 걱정 없어. 왜? 엄마 아빠꺼 나 내꺼야 왜? 혼자 밖에 없으니까. 만약에 내가 강아지 키우면 강아지 구박할거예요. 혹시 강아지한테 유산 남겨줄까 싶어서. 


이번 겨울수련회를 뭘 하려고 하느냐 하면 이걸 할 예정입니다. 아가서. 건드리면 안 되는 건데 한번 건드려 봅시다. 아가서의 주제는 뭐냐 하면 ‘만남이 없이는 사랑이 없다’ 만남이 없이는 진리를 모른다. 만나서 둘 다 얼마나 개판인줄을 알아야 돼요. 혼자 도 닦는다고 천당가는거 아니예요. 반드시 만남이 있어야 가해자 피해자 구조가 형성되는 겁니다. 만나봐야 욕 얻어먹어봐야 남한테 신자 아니라는 소리 들어봐야 정말 그런 신앙 생활하는 보람이 있어요. 아이고 믿음 좋아 목사님 이렇게 착하고 젊은 나이에 권투만 하지 뭐 이렇게  복음까지 알아가지고 이렇게 하면 신앙 전혀 늘지도 않아요. 늘지도 않아요. 수련회 참석해가지고 누구한테 걸려가지고 너는 이단이다 라는 소리 한번 들어봐야 아!! 


너 십자가 마을 오지마라 소리 한번 들어봐야 야~~ 그래 그래 이거였었어. 너 그렇게 이야기 하면 죽여버린다. 바로 그거예요!! 나를 험담하고 뒷담화하는 그걸 죽여버린다가 없으면 그거는 아직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 사랑 깨져야 비로소 사랑을 알아요. 사랑은 헤어질 때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사랑이 아니겠지만. 그냥 같이 놀은거겠지만. 


사람이 뭔가 예상 그래서 하나님께서 항상 예상 밖의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뭐냐? 네가 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아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죠. 너 어디서 나왔느냐를 계속 이야기 하죠. 네가 욕하는 그 지옥이 그게 네가 살던 고향이다. 네가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봉숭아 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지옥을 천국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교회 다니면서 노력했습니까? 


남한테 좋은 소리 듣고 세상에서 인정 못 받는다고 교회가서 봉사하니까 목사님 엎어져가지고 교회 고객하나 더 붙들라고 고객 만족 시키려고 온갖 알랑방구 이사갈 때 도와드릴까요? 감사헌금가지고 세 번 울궈먹으면서 설교시간보다 감사헌금 기도시간이 더 길어요. 그저 알랑방구 껴가지고 격려해가지고 경쟁시키고 보라 이 말입니다. 너희들 너는 뭐하는데 이런 식으로. 경쟁 도발해가지고 뽑아내려고 뽑아내야 능력 있는 목사거든요. 내가 그렇게 안 되니까 내가 질투심에 하하.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목회라 하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모래를 움켜쥐는 것이다. 많이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버립니다. 50명 40명 30명 다 빠지는 것과 같아요. 다 빠져버립니다. 그게 다 빠져야돼요. 빠져야돼요. 그래야 선택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 나라를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바로 봤던게 보는게 아니예요. 왜? 보는 당사자는 날마다 자기 중심의 인생관을 하기 때문에 이게 다른게 들어오면 먼저 본 것이 시시해져 버려요. 


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봤는데 그 다음부터 내 몸이 아프다. 그러면 이것은 생각도 안나요. 현재 내 몸이 아픈 것이 더 심각한 문제지 예수 십자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십자가까지 믿어줬는데 내 몸이 왜 아픕니까? 아픈게 논리구조가 연결이 안 된다니까요. 왜 연결이 안 되느냐? 내가 봤고 내가 아프기 때문에. 동일한 나인데 왜 서로 내가 원하는 다른 것을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연결이 안 되는걸 줘가지고 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드느냐 이렇게 되어 버려요.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보든 뭐 예수님의 얼굴을 보든 관계없이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에요. 피를 유발시킨 당사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과 엮어져야 이게 언약이 구성됩니다 언약이. 언약은 예수님 충성할께요 언약이 아닙니다 언약이. ‘피’입니다 피. 너 때문에 흘린 피를 네가 받아들이겠느냐 이겁니다. 네 안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짊어지겠느냐? 네 십자가 말고 내 십자가를 짊어지겠느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러면 십자가 지면 고생해야되니까. 고생하는게 아니고 네 본색있잖아. 너 잘하는거 있잖아. 


목사님 뭐 잘해요? 시기 질투 이런거 잘하잖아요. 남의 교회 교인수 많고 나는 적고 불 나버려라 씨 불 나버려라. 내 설교 조롱했던 인간 앞에 나와서 유리창에 받쳐버려라. 그거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해요. 심지어 24개월 아기도 너무너무 잘해. 그리고 애 하나 있을 때는 천사 같은데 동생 나오면 천사 아니고 악마가 되어 버려요. 괜히 화내고 질투하고 동생 꼬집고 밥그릇 빼앗고 엄마 없을 때 무슨 난리를 치고 말이죠. 그리고 내가 안 했다고 이야기하고. 우리 다들 그렇게 살아왔는데 지금 잊어버렸죠? 다들 그렇게 살아왔는데 잊어버리잖아요. 


지난 그 화요일날 그런 이야기 했죠. 악마의 정신은 다른게 아니고 독자적입니다. 독립으로 아 주일날했구나. 다윗이 인구조사 한 것처럼 나는 나로 인하여 충분해 나는 이 정도만 살아 독립해서 테두리 선 그어서 이걸로 그만 됐다 여기는 것 자립심 나는 신이다.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 악마의 마음입니다. 그게 점잖아도 악마고 점잖은 악마 인간성 좋은 악마 배려심 넓은 악마 백날해도 악마는 악마지요. 나는 누구한테 피해준적 없고 나는 누구한테 해코지 한적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사람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인입니다. 


새삼스럽게 죄 지을 필요 없어요. 존재만 하세요. 존재만 하면 시기와 질투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기와 경우는 주께서 알아서 탁탁 앞에 눈앞에 붙여줍니다. 우리가 아무 탈없이 탈 없이 산다고 하는 것은 뭐냐? 성질 돋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지금 점잖은척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성질 돋울 일이 어디서 생기는지 그거는 우리 예상을 빗나갑니다. 참 이게 사도행전 수련회 때 하겠지만 생각해보세요. 사도 바울의 수건만 덮어도 나았어요. 그 정도 능력 같으면 옥에는 안 갇혀야지요. 그 정도 능력 같으면.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렸지요. 그 정도 능력 같으면 바리새인 면상 한번 때려버리면 파워레인져 해가지고 지구 밖으로 튀어 나가야 되요. 얼마나 힘이 센지. 그럴 능력이 주님한테 있습니다. 지금 천사들 와서 나를 빌라도 앞에서 풀어줄 수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은 힘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병고침 부자 되기 교회 목회 하늘나라 확장 그게 기도응답이 아니예요. 기도응답은 뭐냐 하면 세대를 뜯어내는 겁니다. 이 세대에서 내 진리를 뜯어내는 것 그걸 지금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내용으로 포함하고 있어요. 진도가 더디 나갈 수밖에 없어요. 함축되어 있으니까 이 진리가. 스윽 보면서 내가 기도했나 주님이 알아서 기도했지 하면서 끝날 문제가 아니예요. 이것은 우리가 구원 받고 난 뒤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주님께서 얼마나 주님의 일에 하자가 없고 실수가 없다는걸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할 일은 뭐가 있습니까? 20절 봅시다. 17장 20절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아니요 나왔지요.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이것은 뭐를 의미하느냐 하면은 사람은 구원받고 난 뒤에는 자기가 챙길거 다 챙겼다고 입 싹 닦아 버립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 믿는데 예수님이 나 구원했다는데 내가 두 번 힘쓸거 뭐가 있겠어요. 그래서 자기는 자기 생각 하는거죠. 나만 생각하는거죠. 


그러면 주님께서 이 기도 했잖아요. 너희만 아니라고 기도했지요. 우리가 부탁한겁니까? 부탁한거 아니라니까요. 지금 아버지한테 기도해요. 우리보고 당부하는게 아니예요. 아버지한테 기도했다는 말은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말은 네가 하기 싫더라도 너뿐만 아니고 남들까지 챙기도록 주께서 그렇게 시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사람 낚는 어부예요. 본인을 낚는 어부가 아닙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예요. 누구나 사도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사도 너희들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그런 사명을 주는데 그 사명에 본 내용은 예수님의 하신 일의 연속성을 말합니다. 


그게 뭐냐? 댓가 없이 봉사하는 것. 이게 은사로 고린도전서에 보면 성령의 은사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성령의 은사의 특징이 뭐냐 모든게 말이에요. 말의 은사가 우선입니다. 말하는 은사가 제일 위에 있어요. 그건 왜냐 바로 오순절날 불의 혀, 혀의 기능은 말하는 기능이에요. 말하는 기능으로 승리하는 이유가 비폭력이라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고 패고 이러지 말라는 겁니다. 코란이냐 칼이냐 이러지 말란 말이죠. 예수 안 믿는다고 보복하지 말라는 이 말입니다. 전하고 손 떼라 전하고 손 떼야돼요. 


사도들이 폭력행사 했습니까? 아니지요. 말만 했을 뿐이지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지요. 협박하지 마세요. 교회 안 나오면 돈 5만원 안 준다 이런거 협박하지 마세요. 교회 안 나오면 5만원 안 준다 돈도 안준다고 협박했지만 교회 나와주면 휴대폰 사줄게 그것도 협박이에요. 그냥 말만 하면 되요. 말만 하면 돼요. 말로도 안 먹히는데. 말해도 안 먹히지요? 기분 좋던가요? 말하는 것도 노동인데 에너지 소비돼요. 밥 먹은 것도 말하느라 다 소비돼요. 다 소비되는데 저 백화점 점원이 3시간 동안 이야기 했는데 물건 안사고 다른데 가서 사면 화  나지요. 마찬가지예요. 말했는데 안 먹히잖아요. 그 다음에 나오는게 뭡니까? 죽어버려라. 살인의지가 나오잖아요. 


백날 복음 전해도 살인의지는 그대로 남아있어요. 내 행동 하나가 또 다른 살인의지를 또 하나 생산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왜 죽습니까? 우리 죄로 죽어요. 영지주의 특징은 뭐냐 하면 첫 번째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뭐 8개의 문이 있고 이런거는 다 시시한거고 기본적인 것은 왔던 고향은 이쯤이 아니고 왔던 고향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은 더럽기 때문에 깨끗하게 올라가자 하는거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은 이미 모든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나는 악하지 않다 나는 죄인 아니라는 것이 영지주의의 두 번째 특징이에요.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이것은 여기서 얼마나 지식으로 획득하냐에 따라서 구원이 되고 안 되고 한다는 겁니다 지식으로. 그러니까 이 세 가지가 결국 뭐냐?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이 바로 개인구원론이에요. 영지주의가 개인구원론. 영지주의가 개인구원이라는 말은 오늘날 모든 교회가 영지주의란 뜻이에요. 구원받고 싶지요? 구원해줄께요. 이거잖아요. 혼자 구원받지 말고 가족도 구원해야지요. 가족도 데리고 교회 나오라 이 말이죠. 인원수 늘어나니까. 그 다음에 했으면 진짜 여러분이 믿는지 안 믿는지 궁금하지요? 여러분 소원대로 부자되면 구원 받은거고 부자 안 되면 여러분들이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없어서 순수한 믿음이 없어서 이런 협박 공갈 들어가는 겁니다. 


협박 공갈 하지 말고 이러면 벌 받습니다 이런거 하지 말고 당신은 이렇게 된다 하지 말고 주님은 이렇게 하셨습니다 라고만 하면 돼요. 그게 예수님의 증거예요. 성령 받아야 주님은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지금 그걸 믿는데 집 꼬라지가 이렇습니다. 내가 예수  믿은지 20년 됐는데 믿고 난 뒤에 나 돈 받은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랬는데 이 꼬라집니까? 이렇게 한다면 그 꼬라지가 가장 적절한 꼬라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가장 적절하기 때문에. 


왜 적절해? 자기 예수님 만나면 죽일 거야 예수님 살해의지가 집구석이 개판 되어야 살해의지가 더 확실히 나오기 때문에. 용서보다 더 귀한 우리 입장에서 용서보다 더 귀한 것은 없지요. 물론 용서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이에요. 예수님이 용서했음을 십자가 피로 받아들일 때 율법으로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 아버지는 자기 아들 보낸 보람을 찾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이 세대에 살면서 다른 세대에 있음을 진리라는 세대에 있음을 몰랐습니다. 그저 내 한 몸 잘되면 그것으로 족한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광 주님의 뜻은 바로 우리가 이 세대에 물들지 않는 것이고 이 세대에 안에 있으면서 다른 세대에 있음을 십자가 피안에 있음을 주님을 증거하라는 그 사명인데 저희들 우리 마음대로 안 되지만 주께서 우리를 시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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