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7장 8절(맞춤 신앙)180619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7장 8절.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지금 여기 누가 누구 보고 대화합니까? 여기 예수님이 아버지 보고 지금 기도하고 있지요. 겟세마네 기도니까. 기도인데 기도 내용에서 누가 빠져있지요. 누가 빠져있죠?
예수님하고 아버지만 남고 누가 빠져있어요? 제자들은 빠져있지요. 제자들은 빠져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저희’라고 집어넣어요. 아버지하고 아들이 이야기 하는데 여기 제자들은 빠져 있다 이 말이죠. 너희들의 의견은 어떠냐 묻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도이기 때문에. 아버지한테 기도하는데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저희’가 ‘저희’라는게 들어가요.
그런데 저희가 누구입니까? 제자들이거든요. 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 이야기를 아버지한테 이야기해도 되나? 물어봤습니까? 물어보지를 않았지요.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기도하는데 일방적으로 누가 들어간다고 했어요 방금? 제자들 들어갔지요. 이 제자들한테 사전에 안 물어봤지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 일방적이죠. 일방적 조치를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기도 내용 가운데 벌써 무슨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아버지가 택한 또는 예수님이 택한 제자들의 자리가 이미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만 이미 마련되어 있는거예요. 지금 제자들은 이 기도 끝나면 제자들은 지금 배신할거예요. 도망칠거라 이 말이죠. 요한복음의 특징이 마태 마가 누가하고 다른 점이 있어요. 마태 마가 누가는 제자들과 함께 있는 그 현실을 계속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은 뭐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가 이미 나와있어요 벌써 있다고. 그걸 전제로 했을 때에 이미 했고 그다음에 제자들이 배신한걸 다 안 사이에서 다시 그 예수님과 아버지만이 일방적으로 하는 일이 뭐였을까를 지금 요한복음을 통해서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은 뭐냐 하면 누가 끼어들지 못하느냐 하면 우리가 알아서 할께요가 여기에 들어가지 않아요.
제자들이 구원 받는 것은 제자들이 어떻게 살 것이다 그런 문제는 제자들이 전혀 거기에 대해서 자기 의견타진이나 의사를 할 수 있는 기회 조차도 박탈 당합니다. 이걸 요즘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내가 구원받고 내가 천국 가는 것에 대해서 내가 조금도 거기에서 끼어들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 곳, 요한복음이에요. 전혀 주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배신하고 다시 돌아오는 그 코스 있잖아요. 그 코스도 이미 사전에 계획된 코스예요 그게. 배신하고 다시 돌아오는 코스도 사전에 계획된 거예요. 예수님이 배신할 때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육적인 본성을 그대로 발휘하는 겁니다 배신하고. 올 때는 육적인 본성으로 오지를 못해요. 다시 올 때는 성령을 통해서 다시 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4장부터 해가지고 계속 무슨 이야기 나옵니까? 계속 성령 보혜사 성령 이야기 나오는 거예요. 그래놓고 이야기 합니다. 믿느냐? 그러면 믿느냐 이렇게 했을 때에 결국 뭘 믿느냐 하면은 내 믿는 것이 날 구원한다는걸 믿는 것이 아니고 그거는 지금 요한복음에서 있을 수 없어요. 뭐냐 하면은 내치든지 받아들이던지 간에 이거는 내 소관 아닙니다 라는 사실을 결과적으로 믿게 되는 그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내가 나를 알기 이전부터 주께서는 이미 나를 알고 계셨고 알고 계셨기에 우리가 제시하는 그 구원받는 방식이나 대안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일체 거부하시고 일방적 조치에 의해서 구원하든 천국가든 조치는 일방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계획대로만 진행될뿐이었습니다 라는 것을 성령의 하신 일의 결과로서 우리가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어린아이 보고 부모를 믿느냐 믿으라는 말은 그 믿는 순간부터 믿는게 아니예요. 아이가 어머니의 아버지의 그 노고와 고생한걸 생각할 때는 그 생각하는게 만약에 15살이라면 15살 때부터 이제 믿기 시작한게 아니라 그 믿는 순간 다시 자기가 0살 때부터 1살 2살 살아온 모든 것이 자기의 수고나 자기의 노력이 아니였다는 부모의 희생이였다는 것을 소급해서 다 받아들이는겁니다 소급해서.
과거만 소급할까요? 아닙니다. 미래까지 깡그리 남김없이 미래 천국에 골인해서 사는 것까지 그게 다 내일이 아니고 나를 통한 주의 일인 것을 믿게 되는 거예요. 그걸 저는 미국 서부의 미국 남부에 부는 남부에 보면 허리케인 그 폭풍이 이렇게 오게 되면 태풍이나 폭풍이 오게 되면 이런거 있잖아요. 토네이도. 토네이도를 한번 보세요.
저 시커먼 먹구름 와가지고 이렇게 큰 범위 내에서 상층부에서 흑먼지를 일으켜도 그 지면에 닿는 것은 어떻습니까? 꼭 레코드 침 같아. 급작스럽게 여기 좁아지죠. 좁아지고 이것이 심지어 만약에 현장에 안 가봤지면 동영상 보게 되면 사람이 있는데 바로 옆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요. 마지막 닿는 면이 좁아요. 위는 큰 범위지만 난리도 아니예요. 집도 왔다갔다하고 전봇대도 왔다갔다하고 차도 왔다갔다하지만 이 막상 훑고 지나가는 접점 지점은 굉장히 좁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원대한 계획이 아버지와 아들의 원대한 계획이 우리 자기 택한 백성한테는 굉장히 협소하고 굉장히 섬세하고 세밀해요. 굉장히 섬세하고 세밀합니다. 그래서 믿음 있어도 아는 것은 3초밖에 안 된다 하는 이유를 그 많은 24시간 있더라도 3초라면 거기에 비해 굉장히 협소하고 짧잖아요. 짧아도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창세 전부터 있던 계획이 그 시간에도 얼마든지 다 담길 수가 있는 거예요. 얼마든지. 이게 신앙을 유지하는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 오래 간다 해서 좋아하지 마세요. 오래 가는 것은 토네이도 아닙니다. 뭐 수상한거예요. 그건 자기가 공들인거예요. 맘 먹고 은혜 받겠다고 작심한 자기 공작입니다. 하나의 연출이고 연기에 불과해요. 연극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점을 시간론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카이로스. 카이로스를 마태복음 그런데 요한복음에 이야기하면 이걸 번역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때, 때는 몇 초입니까 하는게 없어요. 때라고 하는 것은 점은 몇 센티 입니까? 원래 점은 면적이 안되요. 공간적으로 점은 면적이 없는 것처럼 시간적으로 때는 간격이 없어요.
아주 짧은 시간 스쳐 지나가지만 내가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일 수가 있다는 생각이 후딱 드는거예요 이게. 지금 이 순간만 주의 일이 아니고 내가 태어난 것도 주님의 계획이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상의 일도 주님의 계획의 토네이도 안에서 휘감아 돈다는 사실을 그걸 순간적으로 아는 겁니다. 이걸 주일 낮 설교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했냐 이거를 바로 언약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움직이는거.
언약이라 하는 것은 오늘 요한복음 아버지와 누구 사이의 이야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아버지는 아버지죠. 아버지 아들, 이걸 구체화한게 아브라함 언약이잖아요. 아브라함 언약이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버릴 때 그냥 저 깊은 산속에 버리고 오는 겁니까? 버림 받는게 뭐예요? 묶어놓고 아예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을 뭘로? 제물로 바치는거잖아요.
숨겨진 창조의 비밀이 언약이라는 것을 통해서 그렇게 레코드 침처럼 이렇게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 방주 나오고 난 뒤에 정결한 짐승을 같이 동승했던 정결한 짐승을 불결한건 놔두고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주께서 흠향 하시는 그 방식, 그 방식에서 피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노아 언약보면 피를 강조해요. 그 때부터 피.
출애굽기 24장이든지 20장에 보게 되면 언약이라는 것은 바로 피를 양푼에 담아서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게 돌판이잖아요. 말씀. 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게 아니예요. 말씀에 뭔가 덮쳐요. 우리같으면 소스, 카레 같으면 카레가 덮치듯이 소스가 덮친다고요. 뭐가 덮쳐요? 양푼에다가 뭘 담아? 피를 담아서 하나님이 만든 돌판에다가 하나님이 제시한 방식, 피를 거기다가 뿌려버리죠. 그렇게 하는 그 장소를 제단이라고 해요 제단.
그게 제단이고 그 제단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레코드 침처럼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반드시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이름에 해당되는 실체가 있다는 말이에요. 이름에 해당되는 실체가. 아무것도 없으면 이름 못 짓잖아요. 뭔가 분명히 뭔가 있기 때문에 이름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언약을 완성시키는 그 현장에 다른 데는 안계시고 언약과 관련된 그 장소에 그 사건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말은 어떤 하나님이다? 반드시 언약을 던져놓은 언약을 반드시 이루는 그 하나님 외에는 절대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은 우상에 불과하니까. 그런 뜻입니다. 별로 어렵지 않지요?
그런데 이제 오늘 본문에 들어가면 17장 8절에 들어가면 좀 어려워요. 지금까지는 어렵지 않습니다만 지금부터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 이게 어려우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오늘 본문이 겟세마네 기도예요. 아버지와 아들만이 기도하는 기도내용인데 우리가 누가 지금 이 성경책을 보고 있느냐 하면은 우리가 보고 있잖아요. 우리가 보고 있으면서 이 기도말씀을 우리가 해석하려고 한다 이 말이죠. 해석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본래 아버지와 아들만 있는 현장에 누가 주제넘게 끼어든다는 말입니까? 내가 끼어드는 셈이 되요. 자동적으로. 내가. 인간이.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인간이 끼어들 때는 그냥 빈손으로 끼어들지 않아요. 맹탕으로 끼어들지를 않습니다. 뭐를 생각하느냐 하면은 모델을 생각해요. 모델을 염두해두고 끼어들어요. 모델을 염두해두고.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이렇게 기도를 했다면 그 기도해서 나왔던 상황이 기도의 응답이 된 상황이 어떤 상황일까를 인간이 미리 예상을 하고 상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이렇게 기도 해가지고 기도하게 되면 뭔가 기도했으니까 뭔간 실적 업적 있지 않겠습니까. 그 실적 업적 실적 업적을 성경 보는 우리가 미리 예상을 한다니까요 예상을. 저는 어제 축구 하나도 안봤습니다만은 십자가를 가리기 때문에 안봅니다만은 어제 몇 시부터 시작한지 몰라. 한국하고 스웨덴하고 축구할 때 축구를 그냥 봅니까? 예상되는 결과를 예상하고 봅니까? 1:0으로 이겼으면 좋겠다. 강팀이니까 0:0으로 해도 성공이다. 반드시 예상하고 보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보다가 신경질 나서 껐다는 사람 있는데 그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예상을 하는 거예요 예상을.
글을 쓴다. 복음적인 글을 쓴다. 예상 안하겠어요? 예상 안 하겠어요? 그 예상한 어떤 모델이 있다니까요. 예상한 어떤 모델이 있어요. 이렇게 쓰게 되면 이렇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고 사람들은 얼마나 어떤 은혜를 받을 것이고 그걸 예상한다니까요. 그 예상이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와 아들만 있는 현장에서 본인이 그냥 곱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예상을 가지고 들어가게 되게 되면 성경 말씀을 끼워넣기 식이 돼요. 끼워넣기 식. 이게 문제예요 이게 문제.
성경에 나온 모든 말씀은 나를 위해서 나 구원하라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천국 간다 라는 그것을 미리 예상해요. 내가 원하는 상황을 하나의 모델로 삼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옳다는 것을 우기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적당한 성경말씀을 거기에 전부 다 집어넣는 그 짓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지금 제자들은 지금 배신하는데 우리는 배신할 마음이 없어요. 정말 그 현장에 있다면 이 말씀대로 우리는 어디 가야합니까? 내가 예수 믿으면 개다 뭐 이렇게 돼야 된다니까요.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가는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고생했던가. 그래 주님 말씀 잘 들어서 내가 이 말씀 은혜로 가슴에 담아야지. 이러고 시작을 이렇게 시작하거든요.
벌써 요한복음 17장 8절 9절 이 말씀을 가지고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미 구원받은 나를 상정을 하고 미리 상상을 한다 이 말이죠 구원받은 나. 이거 반칙이죠. 이거는 그 현장성과는 완전히 위배되는 겁니다. 분명히 현장에 제자들은 없고 예수님과 아버지 밖에 없었고 제자들은 자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제가 무슨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길게 이야기 하면 어렵다 해가지고 또 중간에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거예요.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하라 이 말이에요. 산 채로. 살아있는 내가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7장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것을 잘 마음에 간직해서 내가 구원받겠다 이런 생각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오해예요. 얍샵한 짓이지 얍삽한 짓. 오늘 제목을 얍삽한 짓이라고 할까. 정말 얍삽하기 짝이 없어요.
예수를 만나도 하나님을 만나도 성경을 봐도 자기 살 궁리부터 먼저 챙깁니다. 자기 본인이 모델이에요 어디? 이 세상의 모델은 예수님이 모델이지 예수님 외에는 모델이 없어요. 제자들도 모델이 아니예요.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한다 이 죽음은 우리가 죽어도 경험하지 못하는 죽음을 경험해야 되요. 이 죽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에 의해서 발생된 그 죽음을 우리는 살아있는 그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해야돼요. 왜?
예수님은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심으로서 그들을 산자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미 죽은 자로 바꿔요 죽은 자로. 성령을 받게 되면. 이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잖아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로 간주하면서 그러면 남들 보기에 본인 보기에 자기가 거울 보면서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자인데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이게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살아있는 채로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예수님만이 경험했던 그 죽음을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어느 인간도 사전에 미리 상상한 이야기가 아니예요.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예수님 말씀 듣고 지금도 살아있지만 더 살겠다 이런 이런 생각이지. 그래 나는 죽어야 돼 이런건 없는거예요. 왜 인간은 그런 생각, 나는 죽어야 돼를 왜 못하느냐 하면 그것도 성경에서 나와야돼요. 우리가 뭐 못 되서 그렇다 이런 말 하지 말고 성경에서 찾아야돼요.
예수님께서 내가 죽는다 고난 받고 죽는다 이렇게 했을 때에 베드로가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16장에서 내가 고난 받고 죽는다 이렇게 하니까 베드로가 나서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럴수 없나이다 그럴수 없나이다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베드로한테 뭐라고 했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했지요.
이걸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 예수님과 이 12 모임이 조건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사시고 또 사시고 또 살아있다는 그런 조건하에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예요. 계속 살아있어줘야 12 모임이 유지가 된다니까요. 본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따를 수 있는 그런 여지가 계속 돼요. 예수님이 살아있는 한. 그런데 그 중심 되는 스승이 죽어버리면 이 모임이 파토난다니까요. 다 깨지잖아요.
한진그룹이 살아있는 이유가 뭡니까? 그 재벌가 이름이 뭐예요? 조양호 입니까? 하여튼 그 재벌가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중심으로 모였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재벌총수가 나는 앞으로 일주일 내에 죽습니다. 우리 가족 다 죽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충성했던 사람들은 결국은 닭 쫓던 개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지금껏 총수님이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이만큼 열심히 했는데 죽어버리면 나중에 내침을 당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이야기가 이게 무리한 이야기가 아니예요. 오늘날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당한 이야기를 한겁니다. 아버지가 그 회사에 승진해가지고 뭐 하나 부장쯤 임원 되가지고 연봉이 1억쯤 되는데, 아이고 여보 오늘 고생했다 여기 홍삼차 이거 먹고 열심히 일해가지고 가족들한테 월급 많이 갖다 줘. 뭐 이렇게 하게 되면 가족들 모여봐라. 내가 오늘 저녁 죽으련다. 이렇게 되면 그 부인부터가 여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렇게 그런 말 하지마세요 하잖아요. 그런데 그 앞에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이게 대화 자체가 대화 자체가 이게 어울리지 않는다니까 대화 자체가.
사람은 그 베드로가 예수님 살아야 된다는 말이 예수님 위해서 하는 이야기처럼 들리지요?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살아있어야 될 이유는 베드로 본인이 지금 자아가 망치지 않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꼭 필요한거예요. 그걸 대구강의에서 제가 두자로 그걸 뭐라고 했느냐 그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
우상은 무슨 이미지라 했습니까? 아버지 이미지라고 했지요. 내가 비빌 언덕, 기댈 여지, 그게 우상이에요. 신, 예수, 삼위일체 전부 다 우상입니다. 왜? 본인도 본인이 누구 인지 몰라요. 나 좋아라고 믿는 거예요. 부처하고 예수하고 차이점이 없어 그렇게 되면. 나 좋아라고 나한테 유리하도록 나한테 도움 되도록 나한테 필요하도록 믿는거예요.
아니 글을 쓰면서 저를 죽여 달라고 글을 씁니까? 사람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정말 겁 없이 이 성경 보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 다 기도할 때 저만치 본인 기도하든지 자든지 하고 왜 따로 기도하십니까? 이거는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 있을 자리입니다. 약간 늦게 오신 분들 위해서 다시 이야기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만 있는 자리를 마련한 이유가 먼저 강의 들은 사람들 답변해 보세요. 뭐 때문에 그렇다 했던가요? 뭐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뭐 때문에 제자들을 내치고 아버지와 아들만 이야기 한다고 하던가요 제가. 세자로 이야기 했는데 일방적. 일방적입니다. 일방적. 주의 일에 방해 받지 않는 방법은 뭐냐? 일방적으로 우리를 내치는 방법이 오직 ‘주의 일’ 다워요. 우리가 같이 협조하면 주의 일이 안 돼요. 나사로가 죽은지 4일 됐잖아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 되지 않았습니까. 그 무덤가에 예수님 갔다 이 말이죠. 예수님하고 유대인, 사람들 다 갔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딱 들어보니까 그 돌문 뒤에서 나사로가 살아보려고 손톱가지고 거기서 돌문 갑갑한 그 베옷입고 돌 문 이렇게 막 굵었습니까? 거기서 간절히 주여~기도하고 있었습니까? 거기서 헌신했습니까? 거기서 가슴 두드리면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이러고 있었어요? 그랬습니까?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는 거기에 어떻게 있었어요? 그냥 죽어있었지요. 죽어 있었는데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그냥 아무개야 나오너라 하니까 거기서 나왔잖아요. 얼마나 힘이 없었으면 돌문도 본인이 자동으로 나온게 아니고 외부에서 돌문도 열어줘야 나왔고 베옷도 본인이 풀지를 못하고 외부에서 풀어줬어요. 그게 그걸 가지고 그게 믿음사항이에요 그게. 그게 흔히 말하는 믿음사항이라니까. 믿음사항이라는 것은 할 수 있는 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 기도 이 정도 헌금은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도 이거는 영 아니야 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것도. 그런데도 자기 나와바리가 있어요. 그런데도 자기 나와바리가 있어요. 살아있을 경우에는 자기 영역이 있어요. 그런데 이미 죽은 자라면 죽은 자는 일체 자기 그림자 자체도 없어져야 되지요. 성도로 하여금 산 채로 나는 이미 죽었소 하는 그 것을 보여주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 성령이 찾아오는 겁니다. 성령 오시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다. 이게 믿는 자야.
그렇다면 오늘 요한복음 17장 8절 봅시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라고 되어있지요? 지금 이걸 기도할 때 아까 이야기 했지만 기도할 때 제자의 자리가 있었다? 없었다? 제자의 자리는 없어요. 일방적으로 아버지와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걸 완전히 확정짓지요. 확정짓는 거예요. 그리고 6절에 봅시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다는거예요. 지켰는데 왜 배신하고 그래요.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 지켰다는거예요.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기도한 모든 내용은 이게 전부 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그림 다시 한번 그려보겠어요. 토네이도 그림. 위에서는 이렇게 넓지만 이 끝 접전 지점 지상의 접전 지점에서는 아주 레코드 침처럼 아주 좁다 했지요. 어느 정도 좁아요? 그야말로 점 찍은 것처럼 좁고 한때, 때죠. 때는 면적을 따지는게 아니고 왜냐하면 이거는 하나의 사건이 되기 때문에.
사건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 바람과 같아요. 바람을 잡을 수 없잖아요.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가보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공기는 그래요. 머물러 있지 않아요. 가버리죠. 그런데 이게 접전지점에서는 그렇게 유동성이 많고 우발적이고 한시적이지만 이 토네이도 큰 면적은 이미 창세전에 확정된거예요. 이미 정해진거예요.
그러면 이 안에 들어오려면 그들은 그냥 못 들어 오고 주의 말씀을 지켰나이다가 성립된 조건하에 이 안에 들어올 수가 있어요. 주의 말씀을 지켰나이다. 그러면 제자들은 주의 말씀을 지킬 수가 있어요? 없어요? 못 지킨다 했지요. 왜 못 지키느냐. 인간은 이미 베드로가 그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 죽는다 하니까 뭐라 했어요? 지금 죽으면 파토 다 나게 스승 죽으면 뭐가 되겠습니까? 너무나 상식적이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한겁니다.
예수님 죽을 때 예수님 죽으시면 안 됩니다 할 때 베드로 본인은 죽었다고 생각합니까? 자신은 살았다고 생각합니까? 자기는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밉상이고 그게 마귀의 시험들 수 밖에 없는 요인인겁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말씀을 다 지켰을 경우가 살았을 경우에요? 십자가 달려 죽었을 경우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안 달리고 아버지 말씀 다 지킬 수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아버지의 말씀 아버지의 언약을 지킨다는 말은 결국은 무슨 뜻입니까? 이 땅에 접점지점에서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 아버지의 말씀에 입각해서 죽는 죽음, 그 죽음 안에서는 예수님이 말씀을 지킨 자가 되요.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희들 예수님이 택한 백성들, 백성들이 어느 자리에 와야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말씀을 다 이룬 그 자리에 그 자리 안에 들어와야 되잖아요. 그 자리 안에 들어와야 되겠지요.
그 들어올 때 뭐가 되느냐 하면 17장 4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그 다음에 5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해놓고 오늘 본문 6절 7절 8절 보면 아버지가 날 영화롭게 한 그 영화로움을 아버지가 하셨다는 그걸로 마감 되는게 아니고 누구도 그렇게 하느냐 하면 아버지가 정해놓은 아버지가 주신 저희들, 예수님이 택한 백성들도 예수님 나를 영화롭게 하게 됩니다를 지금 기도로서 하고 있는거예요. 그럼 어렵지 않지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영화롭게 하신 그 영화를 이제는 아버지만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까지 한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도 이제는 아버지가 영화롭게 하신 것처럼 저들도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아버지의 영화로움이 주제가 아니예요. 누가 주제냐 하면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게 주제가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할 말이 굉장히 많아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힘들어하면 곤란합니다.
자, 아버지가 영화롭게 하려면 예수님은 아버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잖아요.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그동안 예수님을 영화롭게 못한 방해요소가 제거되어야 된다고요 제거. 사람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처럼 알아서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지를 못해요.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그 십자가를 예상하거나 그걸 찬송한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인간들 중에. 아무도 없지요. 그러면 아버지만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아무도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했잖아요. 앞으로 영화롭게 하실 사람이 등장할거예요.
그러면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못했습니까? 본인들 살 생각을 하니까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했지 진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그 언약, 진짜 그 언약만을 목표로 인간들은 살아가지를 않아요. 뭔가 아는 것 있으면 자기 유리하도록 하는 거지요. 자기 완전히 박살 나는 것을 안 좋아한다 이말이에요 인간은. 개망신 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누구하고 비교당하는 것도 싫어요. 그건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손해보는 일.
그래서 사람을 의식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사람을 의식한다는 것은 뭐냐? 내 가치는 내가 알아서 지키겠다는 그 고집이다 이 말이죠. 문제는 사람들한테는 그게 상식인데 그게 예수님 영화롭게 하는데는 방해가 되었던 거예요. 왜? 베드로가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 붙들고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살아도 같이 살자는 겁니다. 뭐 때문에? 우리는 살고 싶은데 예수님은 죽고 싶어합니까? 이게 납득이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게 죽을라고 믿습니까? 살라고 믿습니까? 아 나 자살하는데 그냥 자살하면 안돼 예수 믿고 자살해야돼. 뭐 이러고 싶어서 예수 믿습니까? 주께서 이 힘든거 좀 살려 날마다 이렇게 돈도 벌게 해주시고 가정도 살만한 이 세상을 좀 살만하게 해가지고 이왕 사는거 좀 보람 있고 살 맛 나게 좀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잖아요. 그게 주님을 모독하는 일이라니까. 그게 바로 주님을 모독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 이야기 하면서 자기가 상상한 모델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예수 믿으면 예수님 얼마나 기뻐할 것이고 그 기뻐하게 되면 아이고 이 귀한 놈 내가 너 안 죽일께 너 건강하게 해줄께 해가지고 갑자기 건강이 생기고 다 낫고. 오늘 아침에 보니까 어떤 분은 대상포진 걸렸다고 소식 들려왔어요. 저 멀리 캐나가 켈거리에서 소식이. 목사님 뜻대로 대상포진 걸렸습니다. 내 뜻도 아닌데 무슨. 뜻이 아니고 목사님 말씀대로 그렇게 걸렸습니다 하는데 얼마나 아프겠어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고 소식이 왔어요. 얼마나 아픈지 허리가 끊어진다. 두 동강 나듯이 아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입장에서 이런 인간 입장에서 그런 입장에서 이왕 죽일거 건강하게 죽지 아파서 죽이냐 그런 원망이 왜 안 나오겠어요. 누가 살라고 합니까 주를 위해서 죽겠다잖아요. 죽겠다는데 왜 아프게 죽이십니까? 그게 또 짜증나는 일이예요. 그러니까 하나하나 마음에 안 들어. 매사가 마음에 안 들어. 누구 사는게? 내가 사는게. 매사가 마음에 안들 때는 인위적으로 마음 들게 만드는 방법은 뭡니까? 나보다 못살고 나보다 고생 더하고 취직도 안 되고 나 보다 더 어설프게 사는 인간들을 자꾸 비교하는 거예요. 자꾸 비교하는 거예요. 그러면 약간은 숨통 트이고 약간은 위로 받지요.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이 말이죠.
이런저런 생각난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의 뜻하고는 아무 상관없는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잖아요. 인간은 그냥 빈 마음으로 오는게 아니고 뭔가 노림수 가지고 계획가지고 이 성경 본다고요. 주님의 계획은 단순합니다. 아버지가 아들 영화롭게 해서 아버지가 아들 죽였잖아요. 이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뭐 복잡한건 없어요. 우리 인간들이 지금 엉뚱한 생각해서 문제지.
아버지의 생각은 간단해요.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잡는게 그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거예요. 그 외에 딴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예수 믿고 비리비리하게 살까요? 또 이렇게 나온다고. 맨날 예수 믿고 안쪽에 독약 청산가리 넣어 놓고 살까? 이렇게 나오는데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산채로 뭘 경험한다? 남들은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경험한다는 거예요. 누구의 죽음?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을 미리 안고 내가 어떻게 죽는다는 것을 미리 산 채로 경험하는 거예요. 왜 죽어야 됩니까? 주님의 영화로움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주님의 영화로움에 방해되니까 누가? 내가. 왜? 내가 자꾸 상상하기 때문에. 멋있는 나, 괜찮은 나, 남한테 욕 안 얻어먹는 나 자꾸 상상하거든요. 행동이 그렇게 나온다고 행동이. 어떤 행동할 때. 손해보는 짓을 미쳤다고 하냐? 이런 식이라니까 나 행동할 때. 오늘 갑자기 열이 나네. 하나하나 연결 다 되네.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로움 그걸 못 놓는 거예요. 인간은요 반드시 결국 안 놓으려는 마지막 패가 있어요.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딴거는 하나님께 다 빼앗겨도 마지막 패, 그게 조커인지 모르겠어요. 조커인지 스페이스A인지 모르겠는데 마지막 그, 그거는 고상한거고 안 고상하면 마지막 단풍을 쥐든지 난초를 쥐든지 반드시 뭐 쥐고 있는 마지막 패가 있어요 마지막 패. 그 패를 철학자들이 연구를 했어요. 인간들의 마지막 패가 뭔지를. 연구를 해보니까 결론은 이렇게 났어요. 결론은 이겁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쥐고 있는 패가 있다. 그 패가 뭐냐? 결론은 이거예요. X입니다.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겠다는 겁니다. 진짜 그들은 심오하게 파악했어요. 심오하게 파악했는데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를 수밖에 없지요. 왜? 마귀니까. 마귀는 인간의 이성에서 포착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 자체가 마귀가 계속 계속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바닷가에 가보신적 있지요? 바닷가에 가면 뭐가 있습니까? 해변이 있지요 해변. 자, 해변 봅니다. 여기 해변가입니다. 여기 모래사장 있고 여기는 바닷물이에요. 여러분들이 여기 모래 언덕이 있고 바닷가에 바로 붙어 있는 모래사장이 있다면 해운대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언덕에 봅시다. 집에서 떠날 때 뭐를 상상합니까?
보고 싶다 바다 하거든요. 차타고 영동 고속도로 가가지고 차타고 강릉이나 경포대쪽 오게되면 경포대 바다에 한 500m 정도에 주차장에 차 댔다. 문을 열었다. 갑자기 뭐가 튀어나옵니까? 다시마 냄새 미역 냄새 바다 냄새 짠 내 확 나오지요? 바다에 가까이 온 실감 나지요? 그런데 그 주차장이 바다 끝이에요? 아니지요. 창문 열고 점점 더 들어갑니다. 아직 시멘트예요. 주차장이 시멘트인데 30분에 천원입니다 그거 보고 주차장 나오면 튜브하고 호객행위하면서 가지요. 점점 갑니다. 점점 가요. 점점 갑니다.
마지막에 보면 정말 이거는 어떤 순간에 보면 바다가 되고 어떤 순간에는 모래가 되는 유동적인 어떤 선이 나와요 유동적인 선. 그 선 생각할 수 있지요? 이게 주로 경상도 같으면 날 잡아봐라 선이예요. 날 잡아봐라 하는 선. 잡히면 죽인다 하는 그 선이예요. 마지막선.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이성에서 뭐가 나오냐면 윤리가 나와요. 윤리 도덕을 계속 확장 시켜 나갑니다. 더 완벽하게 더 착하게 더 선하게 더 거룩하게 경건하게 계속 계속 가보면 계속 가보면 바다 물속 10cm 들어갈 수 있어요. 발을 20cm. 하지만 그 발을 딛는 그것은 여전히 모래예요.
모래사장이 확장되고 바닷물도 확장된 그 중복 중첩된 그 지점. 여기에서 자기는 바다의 끝을 그리고 육지의 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 모래 열개 중에서 어디가 바다인지 못 정했으니까. 계속해서 계속해서. 인간이 인간의 철학자들이 과학자들이 연구했어요. 끝까지 가봐요 끝까지. 인간이 밝혀낼 수 있는거 끝까지 가보면 결국은 남는 것은 뭐냐? 모르겠다입니다. 모르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바로 그렇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이 당사자가 안 죽고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살아있는 한 예수여 죽으면 안됩니다 라는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죽지 말라고 한 것은 예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누구를 생각해서 그렇다? 본인을 생각해서. 인간이 경건하고 거룩하고 윤리 도덕하고 바르게 사는 것은 누구 생각해서이다? 예수님 생각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생각하고 본인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에. 본인을 영화롭게 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아버지한테 묶여서 제단에서 그냥 번제로 받쳐져야 마땅한거예요 그게. 그런데 인간은 그러고 싶지 않아요. 기어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눈은 뜨고 싶어. 어떻게 죽이는가. 지금 칼이 5cm, 3cm 보고 싶어. 기어이 살아있는 내가, 내가 구원받는 그 마지막 경계선을 내 눈으로 목격하고 싶어요.
끝까지 주님 홀로 하셨다가 그걸 안 믿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주님 홀로 하신걸 내가 구경했다가 하고 싶어요.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이 하신말씀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했잖아요. 요한복음 20장에 나오지요 제자들. 참 성경에 보면 참 어떤 면에서는 무섭다고 할 수 있어요. 어떤 점이 무섭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했잖아요. 분명히 돌아가실 때 이런 말했다고요. 내가 너희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 했잖아요. 분명히 그런 말 하셨잖아요. 분명히 그런 말했거든요. 왜 안 갔습니까? 왜 40일 동안 안가고 머뭅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사흘만에 왜 승천을 안 하고 왜 부활을 했느냐 이 말입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왜 40일 머물다가 가시냐 이 말입니다 왜 머물다가. 40일. 그것도 있으려면 2년하든지 3년하든지 그것도 아니고 딱 40일 머물고 사도행전 1장에 보면 구름타고 올라가잖아요. 왜 처음부터 안 올라갔느냐 이 말입니다. 부활하셔가지고 그 다음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돌아가셔가지고 막달라 마리아한테 나타나셔 가지고 그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이야기 했잖아요. 봤다 부활의 주 봤다 하니까 제자들이 안 믿었어요.
너 미쳤구나 실성했구나 얼마나 사모했으면 네가 세상에 죽은 자를 살았다고 하느냐. 아니야 봤어 그러고 있는데 예수님이 문 열고 안 들어오지요 그냥 문 닫혔는데 그냥 들어왔잖아요. 제자들 무리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입니까 하고 있는데 딱 한 사람 도마가 뭐라고 합니까?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보면서도 나 안 믿는다. 왜 안 믿느냐 하면은 본인이 예상한게 있어요 본인이. 도마 본인이 예상한게 있어요. 못자국 창자국 없으면 이것은 예수가 아니라고 본인이 그렇게 생각 본인의 무엇이? 본인의 이성이 본인의 판단력이 본인이 상상력이 예수님은 못자국 창자국 있어야 돼.
예수님께서는 맞춤 양복있죠? 맞춤구두. 딱 거기에 맞춰서 도마한테 이야기 했습니다. 그게 제가 아까 이야기 하는 레코판의 핀이예요. 거대한 토네이도가 지면에 접점지점에 자기 백성 걸릴 때는 그 사람의 의심 자기 백성의 그 죄, 자기 백성의 그 맞추도록 주께서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왜그러냐 하면은 왜 도마가 예수님 못자국 창자국 없으면 안 믿는다고 했느냐 하면은 이게 도마가 마지막 쥐고 있는 조커 마지막 패거든요. 마지막 패.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지금 진짜 대상포진 걸렸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다 믿는다 하지만 지금 와서 이렇게 나 아픈게 봐서 내가 진짜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나의 대상포진을 낫게 하시면 진짜 주님 살아계시고 안 그러면 꽝입니다. 내가 그냥 남들처럼 그냥 상상의 신을 믿는거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 말이죠. 기드온도 그렇게 했으니까. 솜을 두고 새벽에 솜에만 물이 있고 나머지는 마른 땅이라면 믿겠습니다. 해가지고 진짜 그러니까 그 다음은 또 변경이 마음이 얼마나 또 후다닥 변경됐는지 이번에는 땅에는 물이 있는데 솜은 바짝 마른 이렇게 했지요? 맞춤이다 맞춤.
오늘 제목을 맞춤신앙이다. 딱 맞춰서 딱 한다고요. 그런데 도마가 그것을 알고 난 뒤에 역시 나는 마지막 패 하길 잘했어 뭐 이렇게 나옵니까? 뭐라고 나옵니까? 나는 3년 동안 따라 다녔는데 그 보람이 있구나 이렇게 나왔어요? 어떻게 나왔어요? 3년 따라다닌건 전부다 그거 예수님 방해물이었어요.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척하니까 방해가 더 된거예요.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주의 지시대로 움직였고 귀신 쫓아내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믿음이었다? 전혀 믿음이 아니였다? 전혀 믿음이 아닌거예요.
보고 믿는 것도 믿음이 아니였던 겁니다. 왜냐? 믿음은 내가 갖고 있는 패로부터 나오는게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나는 패 가진 채 뭐가 되느냐?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죽은 자. 산 채로 예수님의 손자국 보고 믿겠습니다 라는 그 짓을 해야 되는 사람이에요. 그 짓을 해야 돼요. 그 짓을. 내가 예상한 예수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못자국 나 죽었고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요.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는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를 보여주는 것 제자들의 할 일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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