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7장 3절(인간이 없는 세계)180605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 7절에 보면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저희라고 하는 것은 제자들이죠. 지금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자들은 지금 배제된거예요. 7절에 보면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가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 온 줄을 그 다음에 뭡니까? 알았나이다. 여기 안다는 말이 나왔지요. 그럼 예수님을 안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어떤 사이인가를 아는 것을 아는 거고 또 알 때 그것이 뭐다? 영생이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 따로 알고 예수님 따로 알고 보탠다고 영생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는거예요.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일어난 어떤 일로 말미암아 영생이 생겼거든요. 그러면 인간은 영생 얻는데 자기가 기여한바 있다? 없다? 없는 것을 아는 사람. 아버지와 아들 그 두 분만 순전히 100% 다 끝냈다는 사실을 자기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두 분 사이의 관계로 인하여 영생은 두 분 사이의 관계니까 그래서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를 인정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영생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럼 영생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들 횡재했네 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지금 횡재했다는건 인간이에요. 사물되기 전의 인간이에요. 왜? 속의 것이 있으니까. 좋은 것 내가 가지려고 하니까. 이미 사물이 되고 죽은 육체가 되게 되면 내꺼라는 것은 없어요. 내꺼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횡재했다는 말이 안 되고 횡재했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되구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죠. 예수님을 영화롭게. 예수님을 높이죠. 영화롭게 한다 높인다.
새로운 인간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이미 자기는 물 건너갔어요. 자기는 뭐 이거는 썩은 뼈니까 주님께서 쓰시면 쓰시고 말려면 말고 그것은 주도권은 주님에게 가 있으니까 자기 관심사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어떻게 높일거냐 그것만 관심있다 이 말이죠. 누가? 영생얻은 사람은. 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아는 사람.
지금 그런 논리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논리를 쭉 전개하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해도 제자들은 몰라요. 하지만 나중에는 성령 오게되면 그게 이런 논리의 순서가 그대로 자기인생으로서 주입된다는 사실을 받고 감사하지요. 어쨌든 원리원칙은 인간의 개입해서 세우는게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의 기도로써 이미 끝내는 겁니다. 어른들끼리 이미 상의하고 끝내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가 들어가서 이렇게 훈수할 입장이 못 된다 이 말이죠. 내 믿음이 어떻고 내 소망이 어떻고 그런 소리 하지말라 이 말이죠. 무슨 사물인데 죽을 육체가 내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이 영생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하는 사람의 그 차이를 이야기 한다면 자기를 잃을 위험에 다가서지 않는 한 다가서지 않는 자는 영생에 대해서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 사람 영생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잃을 위험에 다가설 수 있는 사람이여야 한다 말이죠. 영생은. 다가서면 영생준다는 뜻은 아니고 이미 영생 있는 사람은 자기를 잃어버릴 위험에 그 위험에 노출된 것을 마다하지 않는 거예요. 반갑다 친구야 하면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오히려 반가워해야한다 이 말이죠. 뭐 반갑다까지는 할 사람 없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다니엘 세 친구입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무엇과 무엇을 아느냐 하면 우상에게 절했을 때의 결과와 절하지 안았을 때의 결과를 그들이 미리 알고 있었어요. IQ가 낮아서 무아지경 속에 안 합니다 이게 아니고 충분히 이성적으로 알고 있어요 이성적으로. 충분히 알아요. 절을 하지 않으면 법에 의해서 처단받아서 풀무불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또 뭐도 아느냐 하면은 풀무불이 뜨겁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경험상.
불이 뜨거워요. 피부는 단백질인데 이 단백질이 200도씨가 넘으면 이게 탑니다. 그래서 촛불 밑에서 이렇게 졸다가 머리카락 타면 고약한 아미노산 타는 냄새 나지요? 그것처럼 꼬랑내 나지요? 자기가 저 풀무불 속에 들어가면 자기는 불쏘시개 되어 가지고 탄다는 것을 누구 못지않게 충분하게 이건 뭐 과학까지 동원할 것도 없이 충분하게 납득을 하고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마약 주사 맞아가지고 정신없는 가운데서 나 절 안한다 이렇게 버티는게 아니고 생생하게 술 한잔 안 먹었어요. 생생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그 상황이 무슨 상황이냐 하면은 자기를 잃을 위험 상황이죠. 그런데 뭘 간파하느냐. 우상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는 그 하나님의 부추김, 떠밈 그렇게 되어 버리면 다니엘 세 친구는 본인 인생을 본인이 어떻게 잘 간수하거나 관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요. 왜냐하면 그 상황 자체가 내가 나의 인생을 관리한다고 내가 구원받을 세상에 우리가 태어난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땡기든 주님이 땡기든 땡기는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지 내가 내 임의대로 내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은 못 되요. 내 인생 발걸음 세는 것부터 해서 머리카락 자라는 것부터 모든 것이 내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허락한적 없습니다. 그걸 용납하지 않는 세상이에요. 부잣집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기 전에 나하고 상의해서 부모가 부자되고 이런거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에게 받은 그 DNA 때문에 그놈의 DNA 때문에 일찍이 유방암에 죽은 여자도 있어요. 얼마 전에 가수 죽었지요. 유방암에. 어떤 사람은 DNA 때문에 대상포진 걸린 사람도 있고, DNA 때문에.
DNA 때문이라 하면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거는 뭐냐 하면은 내가 잘하고 잘못하고 상관없이 내 인생은 결정났다는 겁니다. 나의 도덕적 윤리적 그 어떤 태도 관계없이 내 인생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종의 DNA가 DNA는 이것은 제가 보기에는 망상대체용이예요. 망상대체용.
무슨 말이냐 하면 망상이라는 그 정신질환은 어떤 것이냐 하면 길에 가는 모든 사람이 나를 욕한다고 생각하는 것, 망상이죠. 망상이라 하는 것은 그 안에 망상이라는 정신병 안에는 뭐가 들어있냐 하면은 영어로 ALL 모든이 모든이 다 들어있어요 모든이. 이 세상이라는 모든 것이 나하고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수군수군 한다든지 그것도 조직적으로.
그거 보니까 예전에 질문한 것과 관계된 것 같은데 뭔가 세상에 위기가 왔다. 그 위기 타파 안하면 난 죽는다는 것. 일종의 망상증 같은게 누구나 있어요. DNA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망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DNA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게 결정된다. 과학이 만들어낸 과학적 망상이에요. 왜냐하면 성경에서의 모든 일은 요한복음 17장 2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 이게 하나님의 정답이에요.
권세를 누가 갖고 있는가? 예수님이 갖고 있는데 그 권세의 사용처가 뭐냐? 이 땅에서 아들만을 증거하고 아들만을 높이는 자를 뽑아내는데 지장이 되고 그걸 걸리는 모든 것을 다 해치고 제거할 수 있는 파워 강력한 힘, 힘을 누가한테 줬다? 예수님한테 준거예요. 따라서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그 백성에게 대상포진 이라는 것을 허락하신겁니다. 아 말들어보니까 상당히 무시무시하지요? 자기 아들 자기 딸을 건지기 위해서 유방암이라는 그것을 작용하게 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세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이 예수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거예요. 심지어 마귀까지. 어떤 것도. 이것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보지 마세요. 왜냐하면 내가 있어야 긍정인데 이미 우리는 나부터 심판의 대상인데 뭐 따로 나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본다 이렇게 자기가 뭐 따로 챙길게 있는 것처럼 긍정적으로 보지마. 긍정적으로 보려면 예수님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봐야하지 내 입장에서 긍정으로 보지 마세요.
항상 모든 것이 yes가 된다는 것은 내가 yes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한테 모든 것이 yes가 되요. 예가 되고 아니요가 없어요. 예수님에게. 어떤 사람이 물을거예요. 예수님에게 모든 것이 된다면 그게 바로 개혁주의 주권사상 아니냐라고 하는데 개혁주의 주권사상은 예수님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추상명사에 이야기 하는겁니다. 그거는 모든 종교의 공통점이거든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은 신이 다스립니다. 알라의 다스림이다.
이거는 모든 인간이 다 내부적으로 그런 잠복적인 그런 요소가 다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있어서는 그거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 본인만 돋보이게 한 그 심판행위를 염두에 두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를 지옥보내는 주님이란 말이죠. 인간들이 익히 아는 것들 있잖아요.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이라는 그 추상적인 분에 의해서 지배한다. 이거는 종교를 안 가져도 상식적으로 아는 이야기다 이 말이죠. 그런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그게 뭐가 나쁜데? 개혁주의 주권사상 뭐가 나쁜데? 개혁주의 주권사상 뭐가 나빠서 이게 죄가 되는데? 이렇게 하잖아요.
십자가 앞에서는 원래 죄야. 십자가 앞에서는 뭘 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죄였어. 십자가 앞에서는.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졌기 때문에, 그 예수님은 죽고자 오신 분에게 앞에서 살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 것을 즐기세요. 자기가 죄인 것을 즐기지 않으면 사람은 몸가짐이나 모든 행동에 대해서 이게 뻣뻣해져요. 뻣뻣해지고 불안하고 장래생각하고 장래 계산적으로 하게 되요. 이런거 했을 때 어떤 복을 받을까? 이렇게 나쁜 짓을 했을 때는 계산적이 된다는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은 관심이 누구한테 가 있습니까? 자기한테 쏠리게 되고 그렇게 쏠리게 되면 예수 십자가는 가리워져요. 크게 가리워집니다.
지금 어디까지 이야기 했느냐 하면은요 자기를 잃을 위험에 다가서지 않는 자는 영생을 모르는 자다. 그럼 영생 아는 자는 본의 아니게 자신을 잃을 위험에 다가서게 되지요. 다가선다. 그러면 내가 몸이 아픕니까? 이라고 하는데 몸 아프면 자아를 잃습니까? 아프면 뭐 더 심도있게 자기 지키려고 하지요. 온갖 좋은 약, 한의사 다 찾아다니면서 하지요. 자기 몸이 아픈게 아니고 몸은 건강히 멀쩡해요. 정상체형. 흔히 30살 키 170 몸무게 68kg 이정도 표준아닙니까? 이정도 괜찮아요. 해당 사항 없지만.
자기를 잃을 위험, 이 위험이 자기 몸을 다치는 위험이 아니고 또 이런다고 위험한데 가지말고 수당 더 준다고 하지말고 자기를 잃을 위험이에요. 회사에서요 교대근무하면 50만원 더 준답니다 수당으로. 매력적 아닙니까? 50만원이 어딘데. 교대근무하면. 집에 가서 편히 쉬라고 해도 못 쉬어요. 근무일시 날린다 하면 대모하고 난리납니다. 왜? 50만원 날라가니까.
인간은 자기를 잃을 위험이 아니고 자기를 얻기 위해서 자기 몸을 잃어버려요. 자기 자신을 더 곤고히 하기 위해서. 분명히 그 강화시키기 위해서. 순교한답시고 나대는 것 그거는 자기를 잃는게 아닙니다. 자기 몸을 담보로 해서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수작이에요. 그거는 마귀적이죠. 자기를 부인하려고 기도하면 기도 2시간 동안 해놓고 측정해라 내가 지금 어느 정도 자기를 부인했나? 이게 말이 됩니까? 자기를 정 부인하고 싶거든 프로포폴 맞으면 되요. 마취상태 들어가면 그 순간은 자기를 잃습니다. 그것도 기분 좋게 기분 좋게 잃습니다.
자기 잃는다는 말은 내가 없던 곳에서부터 출발하게 하는 것. 그것이 5절에 나옵니다. 17장 5절. 자기를 잃는다는 말은 자기 몸을 다치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없어지느냐. 어떻게 날라가 버리느냐예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세상의 모든 삶의 무게도 같이 날라가 버려요. 여러분 성도니까 그런 순간이 자주 자주 오지요? 순차적으로 올거예요. 자기를 잃어버리는 순간. 난데없이 기쁜 일이 일어날 때 자기를 잃어버려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자기를 잃어버리는 순간은 어떤 순간이냐? 내가 원인이 아닌데도 주어진 결과. 내가 그 일에 대해서 개입 안 했는데 주어지는 결과. 화가 났든지 너무 좋다 자빠지든 어땠든지 간에 그 순간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 그럼 5절에 봅시다. 아버지요 창세전에 나오지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영광으로써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시원. 영어로 origin 이라고 하는데 근원. 뿌리라는 말은 제가 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뿌리가 되려면 줄기하고 연결되기 때문에 뿌리는 되지 않습니다. 이게 끊어져야 되요. 끊어져야 되요. 예를 들면 바다가 이렇게 있는데 깊은 바다예요. 계속 250년 동안 계속 바다였어요 그냥 바다. 바다인데 어느 날 바다에서 섬이 하나 올라왔다. 섬이 이렇게 밑에서 융기돼서 올라왔다. 그러면 이 섬은 필히 뭐가 되느냐 이거 무인도죠. 육지가 있으면 육지가 있는데 육지에서 보면 바다였었어요. 바다가 있는데 갑자기 섬이라는게 왔다면 이 섬은 무인도가 될 것이고 없던 바다에 섬 생겼지요?
그러면 이쪽과 이쪽은 격리되었습니까? 연결되었습니까? 격리된거예요 이게. 격리라는 말 하려면 뭔가 있어야 되는데 아무것도 없이 새로 생겼기 때문에 이거는 육지에서 볼 때 격리된거예요. 있기는 있는데 어제 새로 생겼어요. 새로 생긴 섬이에요. 격리되었죠? 바로 이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 시원이고 근원이에요. 뿌리는 아니고. 시원과 근원이란 말이죠. 없는 분이 돌출한거예요. 이 세상에 나타나신거예요. 그러면서 본인이 뭐냐 하면 이것을 밑에서 솟아오르는데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나는 하늘에서 왔다는 겁니다. 나는 하늘에서 왔다.
무슨 인간의 말 하면서 이런 불온한 발언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하늘에서 왔다. 너 아버지 목수잖아. 아니야 하늘에서 왔어. 너희들 보기에는 내 아버지가 목수 요셉으로 보이지만 우리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야 라는 발언을 예수님이 쏟아냅니다. 그러면 교회에 한 60년 70년 다니고 모태신앙이고 이렇게 해도 그 마음속에 성령 안 받으면 그 마음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지금 70년 동안 60년 동안 교회 다녔는데 사실은 내가 긴가민가 할 경우지, 과연 주님이 뭐 자기 아들이고 하는데 뭐 일단은 믿어주기는 하겠지만 그다지 그게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은 안 가져요.
적어도 내 목숨보다는 덜 중요해요. 내 목숨보다는. 나보다는 덜 중요해요. 내가 있고 예수가 있어야 예수를 믿어주는 내가 있어야 믿어준다는게 성립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일종의 예수 믿는데 공로자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만 나타나면 ‘시원’이예요. 우리가 없을 때 계신 분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없을 때 계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시는 그 시점에서 우리는 없는 자가 되어야 돼요. 오늘 표정들 보니까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없는 자예요. 없는 자. 있어가지고 믿고 뭐 주님 찬양한다 감사한다 그거는 필요없어. 아예 없는 자일 때 가장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거예요. 우리가 없는 자였다는 것. 가장 예수님을 높이는 방법은 예수님을 시원으로 대우해주는 방법은 내가 여기 없는 자다 이 말이죠. 없어도 되는 자고 없었던 자고. 오히려 있는게 이상해. 이게 기적이다. 왜 태어났지? 왜 태어났지?
유주용이라는 가수가 있어요. 유주용. 나이가 지금 그 사람 죽었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한 80되었을텐데. 그 사람이 불렀던 노래가 부모라는 노래가 있어요. 외국 노래를 번안해서 했는데 옛날에 그 사람이 윤복희하고 사귀었는지 뭐 그 이야기는 필요 없고, 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할 때 부모가 하는 말 네가 나중에 부모 되면 안다는 그 제목이 부모예요. 부모 되도 몰라요. 내가 왜 태어났는지를 인간은 탈출구가 없기 때문에 그냥 자기 자신의 뿌리를 자기 힘으로 찾아낸다. 중독되듯이. 성경 본문 보기 중독, 기도하기 중독, 읽기중독, 쓰기중독.
뭔가 양적으로 되풀이 하면 질적으로 도약 점프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법칙에 의해서. 양이 많아지면 언젠가 질로 바뀐다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촛불집회. 숫자 많이 모이니까 대통령 그만 두잖아요. 이게 마르크스의 유물적 변증법입니다. 물질과 정신은 따로 있지만 물질이 때가 되매 정신 새로운 정신으로 생산된다는 겁니다. 기원은 물질이 기원이고 물질에서 그걸 충실하게 되면 그 영적이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여기 이게 무슨 동입니까? 이쪽이? 대치동 학원 오래 많이 다니면 성적 오른다하고 똑같은 거예요. 서울대학 간다고 하고 똑같은 겁니다. 애 학원 와서 노는데 집에서 못 노니까. 소용없어요. 되려면 학원가서 되는게 아니고 집에서 혼자공부해서도 돼요.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게 그것 밖에 없어요. 지금 내 행동을 건전한 행동 경건한 행동을 억지로라도 반복하는 거예요. 기도할 때 그냥 하는게 아니고 꿇어 앉아서 기도하고 뭔가 뿌리 뽑듯이 기도원에 가서 나무뿌리 뽑듯이 기도원 근처 나무뿌리 다 뽑힐거야. 외치고 외치면 정성을 주여~주여~~ 정성을 다하면 언젠가는 개과천선 되듯이 성령 받는다는 겁니다. 양이 쌓이면 새로운 질이 출몰한다는 거예요. 몸부림 치고 있어. 아주 환장을 해요 환장을.
교회는 뭐냐 하면 장소제공하는 겁니다. 자기들 무속신앙의 자리제공 장소제공한 것이 교회입니다. 뭐 교회마다 넓은 장소제공한 것도 있고 강남에 제공하는 것도 있어요 강남에. 강북에 제공한 것도 있는데 어떤 장소제공하게 되면 다담이 방에 손님들 많이 오잖아요 넓게 되면.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여럿이 기도하면 은혜가 더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기타 반주랑 피아노 반주 하나만 반주하는거 보다도 합주해서 반주하는 거 보세요. 노래가 막 살잖아요. 그렇죠? 맞지요? 노래 막 살잖아. 여럿이 합주하게 되면 거기에 막 자기가 막 거기에 휩쓸려가지고 자기 노래가 막 살지. 고독인가 독백인가. 막 살잖아.
주님께서 주기도문에 주님께서 하신 기도에 이런게 있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인간은 하늘이 다 거짓말이야. 인간이 만든 하늘은 땅에서 연장된 상상한 하늘이거든요. 그런데 진짜 하늘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하늘 된다는 그것을 치워버리고 실제로 너무나 땅에라도 그렇게 땅 다울 수 없는 그런 양상으로 하늘이 여기서 그 창세전에 뿌리가 땅에 출발하게 됩니다. 그 순간 애들은 가라예요. 내 밑에 다 꿇어앉아 이거하고 똑같은 거거든요. 내 다음에 나온 인간들 다 꿇어 앉아 예요.
주님만이 기원과 근원이에요. 주님만이 창세전에 있었던 유일한 아버지의 대화 상대였습니다. 언약의 상대였고. 그래서 교회의 이런 이야기를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게 되면 이상하게 맞는 거 같거든 본인은. 이상하게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 맞는거 같은데 그런데 그 말이 왜 그다지 안 좋아지느냐 이 말입니다. 안 좋아지는 이유가 뭘까요? 그래 그게 맞아 그게 옳았어. 내가 목숨 걸어야지 이런 생각이 전혀 안 들어요.
그렇게 안 드는 이유가 뭘까요? 이미 중간에 마귀가 높여야 될 대상을 마귀가 점지해 줬습니다. 삼신할머니가 점지하잖아요. 보통 태어날 때. 이미 점지해줬어요. 우리가 영광 높여야 될 것을. 중심을 이미 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우리 자신, 우리 자신들. 마귀는 우리와 마귀가 한통속인 이유가 마귀의 그 욕구와 요구 사항이 우리 속에 이미 와 버렸어요.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무슨 존재냐 하면 영적인 존재예요. 인간은 영적인 존재예요.
이걸 철학적으로 아무리 분석하고 DNA하고 뭐 시냅스 두뇌 파악 헤치고 인공지능 해봐도 인간은 무엇이냐에 대해서 그들은 갈수록 점점 더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그대로 만들고 싶어도 세포하나 못 만들어요. 거기는 인간이 인간을 만드는 것을 인간이 인간을 만드는 것을 누가 용납하느냐? 마귀가 용납을 안 하고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마귀가 이미 인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세계는 이미 영적으로 다 다루어집니다. 영적으로.
인간은 말하기를 내가 주인공이다. 그러면 내가 주일 오후에도 그런 이야기 했는가 인간이 내가 주인공이라면 새벽에 달은 왜 떠 있습니까?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 그 달 왜 떠 있는 거예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떴잖아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달이 떠 있다는 말은 달은 내 권한에서 일단은 벗어나는 거예요. 그렇죠? 이 성경책은 내 것이고 이 시계도 내꺼다. 이것은 내 권한 안에 있어요. 그러면 달은 내 것입니까? 달은 내 것 아니지요. 내 것이 아닌게 뭔가 눈에 보이는 세계에 앞에 있다는 말은 나에게 미흡함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내가 추스르고 내가 다듬는 인생에 항상 오류가 항상 언제든지 사단이 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강의하는 사람들 보게 되면 강의 하는 사람들 다 일단 강사의 말을 신임해서 모였는데 여기서 저 뒤에 다른 신천지에서 왔는지 해가지고 누가 또 내 욕하고 싶어서 뒤에 왔다면 그 사람들은 감시하러 온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면 강의하는 사람이 불안한거예요. 말 그냥 농담해도 알아주는데 뭐 이 목사 유행가 밖에 아니면 설교 못하나 이런 식으로 뒤에서 궁시렁 할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왜? 나한테 포섭이 안 되니까. 뭐든게 포섭이 안 되니까. 다르면 나한테 포섭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나는 무식한 자가 되어버려요. 내가 달이 왜 있는지 모른다 무식하다는 말은 내 인생을 분명하게 내가 보장하거나 확신할 수 없는 누락되는 요소들이 내가 확보한 요소보다 더 많이 산 죄가 있는겁니다.
그러면 인생을 살아도 이거는 헛 산 것이 되요. 뭐가 진리인지를 이거는 모르겠다. 결국은 모르겠다가 정답이 되요.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처럼 모르겠다는 겁니다. 목사님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인생이 뭐예요? 모르겠다는 겁니다. 모르는데 왜 합니까? 그냥 해보는거다 이 말지요. 뿌리를 몰라요. 뿌리도 모르고 출발점이 뭐냐 하면은 내가 알아야 되겠다. 아는 것이 나를 살리는 것이다. 나부터 출발하니까 이게 잘못된거예요.
예수님은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예수님 자신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 잘됐네.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뭐로부터 바꾸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으로 바꾸면 될게 아닙니까? 그런데 바꿀 방법이 없네요. 이 나를 어디다 처리합니까? 음식쓰레기 할까요? 아니면 분리수거 할까요? 나를 어떻게 내가 처분할 수 있어요?
그래서 불트만이란 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처분불가 존재라고 했습니다. 불트만이 볼 때 제일 골치 아픈 것이 뭐냐 하면 아무리 도를 닦고 아무리 신앙생활 해도 내일 내가 어떻게 나락에 떨어지고 어떻게 될지를 내가 보장 못 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달라 질지를 내가 보장 못하겠다. 인간은 날마다 내가 나를 붙들 수 있는 입장이 못 되고 내가 아무리 마음먹고 싶어도 마음은 그렇게 먹어도 주변환경이 나를 그렇게 가만두지 않는다. 주변 환경이.
주변사항이 가만 두지 않고 특별히 내 몸이 내 몸은 지금 건강하니까 정신은 맑아 보이지만 만약에 내 몸이 아프다면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원망과 불평을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가 사전에 그 상태를 미리 짐작조차 못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입에 풀칠하고 밥이나 먹고있는데 만약에 진짜 내가 밥 못 먹고 몸 아프고 가정 다 깨어졌을 때에 내가 스스로 자살 안한다는 보장 있습니까? 자살은 왜 합니까? 부끄러워서 하거든요. 왜 부끄러워합니까? 살아온 것과 지금 모습이 현저하게 차이 나니까 더 이상 살 용기가 없어서 죽는거예요. 뭐 자살할 때 바람이 춥고 물이 차서 못 하는게 아니고 아직은 버틸만하다는 뜻이에요. 자살 안 하면 아직은 버틸만해요.
사람들 뭐라고 하면 도망치면 되니까 지리산에 가든지 어디 가든지 도망치면 되니까. 도망쳐도 따라온다 그러면 그때 죽든지 해야지. 방금 이야기 한 1분 동안 이야기한게 뭡니까? 인간은 뭐다? 내 몸인데 내가 처분 못하니까 답답하다 이 말입니다. 왜 내꺼라고 평소에 내꺼라고 우기면서 그리고 나에게 봉사하고 나에게 굴복하고 나에게 절하고 나만 치장하고 거울보면서 거울보면서 나만 내 관리 나서면서 왜 내 몸은 내가 처분을 못하냐 이 말이죠. 모르겠다 불트만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대체.
출발점을 우리가 모르면 정답을 내야 되는데 정답은 뭡니까? 처분할 필요도 없는데 왜 내가 처분해야 되냐 이 말입니다. 우리는 처분이 되든 안 되든 나는 내 문제는 내 문제 아니잖아요. 내 문제는 주님의 문제지 왜 자꾸 내 문제를 내 문제라고 합니까? 이 말이 이상하다만은. 내 문제라고 착각한 문제를 가지고 오지 마세요. 진짜 믿음이 얼마나 없었으면 자꾸 내 문제를 내 문제라고 여기는게 그게 믿음 없는거거든요. 그게 무슨 믿음이에요? 행함이지.
주는대로 맡기면 되잖아요. 그냥 주는대로. 영어로 lean 이라고 하는데 기대면 된다고 기대면 맡기면 된다고요. 죽을 육체인데요. 어떻게든 살리려면 살리겠죠. 죽은 육체를 살리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만 높이면 됩니까? 예수만 높이면 돼. 예수님만 높이면 돼요. 제가 이렇게하면 아 그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렇게 대꾸 하는데 이게 어려운 문제입니까? 이게? 이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정신을 다른데 판 문제예요. 이거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거울 보면 내 모습만 보이는데. 저는 거울 보니까 주님의 모습만 보이는데요. 이 몸이 주의 것이잖아요. 이 남방 입은 몸이. 주님이 남방 주신거 입었어요. 왜? 싫어요? 옷 다른거 입을까? 주님의 몸이잖아요 주님의 몸. 다른데 갔으면 벌써 나갔어요. 인상 쓰면서 나갔어요. 지금 많이 참아주고 계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는 사물입니다. 인간이 아니예요. 인간 대우 받을 필요도 없어요. 사물로 해준 그것이 영생을 아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이미 새 인간 입장에서 보니까 내가 사물로 보이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요 사물로 안 보인다니까요. 창세기 3장에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할 때에 인간 입장에서는 백날 그 대목 봐도 인정 못해요. 무슨 흙이야 나 인간이지.
복음을 이야기해도 아까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누가 옆에서 복음을 해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게 진지하지 않고 그다지 고맙지도 않고 소중하게 느껴지지도 않아요. 왜냐 이미 섬기고 높여야 할 대상을 마귀가 시키는대로 나로 확정지었어요. 여러분들은 안 그렇겠지만 여러분 식구들은 특히 20대 아들 보세요. 천하 지정에 빠져가지고 차타고 돌아다니죠. 오토바이 삐리삐리 이거는 천하 뭐 어머니 효도해드리겠습니다. 성공한 나를 바라보세요. 기다려보세요 어머니 정말 아들 잘 나았다 아마 그런 호강하며 살 겁니다. 그 말이나 안하면 밉지나 않지. 그러니까 누구 하나 또 만나면 거기에 빠져가지고 다 주고 난 뒤에 연애 빠져가지고 헤어지자 하면 또 때려가지고 데이트 폭력 걸려가지고.
애들은 인간은 땅에 배로 엎드려 밀착되어 살잖아요. 보이는 것이 시선이 나이가 어리고 인생을 오래 안 살면 보이는 것이 이 앞에 것이 보여요. 그러면 눈 앞에 자극적인 것만 전부예요. 멀리 살아야 뭘 멀리 보지. 살아도 멀리는 안 보지만. 하여튼 코 앞에 있는 것, 술 모임 담배 피우는 것 뭐 이렇게 SNS해가지고 방탄소년단 하여튼 그런 노래 코 앞에 있는 것 밖에 안 보인다 이 말이죠. 그 앞에 복음 이야기 하면 어 그래그래 어 그거 참 좋으네 시답지 않게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 왔다 갔습니까? 목숨보다 안 중요해요. 자기 이미 섬기는 자로 확정되었다니까요. 나와 내 가족과 내 명예와 체면이 최고 중요해요. 최고 중요해요. 우리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뭐라고 하면 너만 인간이냐? 나도 인간이다. 어디를 봐서 인간입니까? 주님께서는 이 무인도를 쑥 올려놓고 예수님만 계셔요. 이제 남은 것은 저 육지의 인간의 세계, 버림받은 땅이죠. 버림받은 땅, 약속의 땅 아닙니다. 버림받은 땅에서 주님께서 성령으로 그들을 시체로 만들어서 이 무인도에 데리고 옵니다. 데려와요. 이 기도를 한거예요.
그러면 이 인간들이 뻣뻣해가지고 오겠어요? 자기 잘난 체하고 똑같은 한통속인데.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들에게 예수님이 심판 당하심을 이들의 심판 당함으로 대체해버립니다.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 내 인생을 끝났다. 쫑났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 내 인생을 쫑났어요. 내 인생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색종이 풀리듯이 프로그램이 풀리면 그것이 나를 휘감으면 그게 내 인생이에요.
십자가에서만 나오는 그 새 언약의 원리가 나로 하여금 안개가 이렇게 휘몰아치듯이 나를 휘몰아쳐서 문어발처럼 나를 감아가지고 낚아채 가지고 가버리면 가는 곳이 바로 주님의 처소예요. 지금 이 기도가 지금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그 기도내용입니다. 그 순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문어이야기 하니까 생각나는데 사람이 있는데 여러분 옛날에 킹콩영화 보신적 있지요? 킹콩이 여자 이렇게 손으로 감싸잖아요. 문어라고 합시다. 문어에는 뭐가 있어요? 빨판이 있지요? 빨판. 문어는 다리가 8개 입니까? 문어본체 이걸 머리고 다리 쪽을 지체라 해요. 졸지에 예수님이 문어됐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리에 통하는 원리가 지체 끝까지 통한다는 거예요. 같은 피가 흐르니까. 해가지고 이걸 휙 감아버리죠 우리를. 여기서 휙 감아서 우리를 뭐라 하느냐 하면 압살해버려요. 압살. 압축을 해가지고 부셔버려요. 부셔버리죠.
우리는 꼼짝을 못하는거예요. 숨이 막힐 정도로. 이러려고 복음 알았나? 이러려고 십자가 알았나?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해요. 그럼 싫어? 그럼 나가려면 나가라 이 말이죠. 나가려면 나가라. 나가는데 성공한 사람 이거는 문어발 속에 없는거예요. 괜히 문어발 옆에 구경만 한거예요. 아무리 빠져나갈래도 못 빠져나온 못 빠져나올 판에 그거는 어떻게 됩니까? 못 빠져나온 판에 뭐예요? 즐겨야지요. 복음을 즐겨야돼요.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결과로 인하여 내 인생이 진척되도록 진행되도록 맡겨야 되지요. 내가 하지 않은 것 세상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라고 했지요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그걸 모델로 보여주신 거예요. 이 관계를 아버지와 무슨 관계? 아버지와 아들 관계예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
영생은 아버지와 아들로 끝나는 겁니다. 따라서 영생 얻을 자에는 반드시 아들이 되어야 되요. 그래야 아버지와 아들로 끝나는 그 범주가 계속 유지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아들만 구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디모데전서 2장에 이야기하지요. 목사님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는데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왜 여기는 모두라고 되어 있습니까? 라고 하길래 제가 데살로니가 3장 이야기 하면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모든이라는 것은 인간이 생성된 위계질서 직업 이런 인간이 정해놓은 구분구분을 주님께서는 그걸 돌파해버리고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에서의 모든, 모든 뜻이 되요 모든.
북한 사상이라든지 직업이라든지 수입이라든지 출신이라든지 남녀라든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관계없이 모든 계층에 주님의 문어빨은 다 투입되게 되어있습니다. 야간 근무하든지 주간 근무하든지 상관없이 전부다. 계약직이든지 정식이든지 관계없어요. 놀아도 놀든지 직업 있든지 관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오게됩니다. 오게 되면 그 사람의 갖고 있던 인간들이 정해놓은 모든 그 계급이라든지 구분지음 질서 그것은 주님한테는 일체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 중에 하나가 삭개오 이야기죠.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그 삭개오가 그 당시 세리인데 세리는 모든 권리가 박탈되었어요. 하도 로마 편에 서가지고 유대인을 뜯어 먹으니까 유대인에서 왕따시켜버린거예요. 유대민족이 왕따시킨 그 세리를 돈만 아는 세리를 세리는 돈만 알아요. 납작 엎드려 있으니까 배로 깔고 사니까 인생이란 원래 그런거죠. 뭐 인간은 돈이 최고죠 뭐가 있어요?
그런데 그 아까운 돈을 뭐 어떻게 했다? 4배나 갚겠나이다 라고 내놨다는 말은 이렇게 엎드려 살다가 이 지상에 오는 창조 전에 시원을 내가 나 있게 하신 그 분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러면 그 복음의 가치보다 무슨 가치가 적겠습니까? 돈의 가치 돈이 자기 자존심을 인정하니까 받쳐주니까. 이 돈에 가치보다 예수님이 더 귀한 거예요. 따라서 그까짓거 하고 4배나 갚겠나이다. 4배 갚아야 구원받는다는 뜻 아니잖아요. 그렇죠? 돈이 더 있어도 관계없어요.
그러나 무엇이 중요하면 무엇이 더 중요한걸 알게 된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삭개오가 변할 때에 삭개오가 예수님을 초청한게 아니라는 점이예요. 누가 먼저 누가 누굴 초정했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나라에 삭개오를 초청한겁니다. 예수님의 집에 삭개오가 간거예요. 그러나 남들 보기에는 너희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되어 있어요. 너희 집에 삭개오의 집에. 그럼 삭개오의 집에 삭개오의 집은 날라가버리고 삭개오 집이 그 순간 예수님이 오는 순간 그 집은 누구 집이 됩니까? 예수님의 집이 되고 삭개오가 오히려 손님으로 초대받은게 됩니다.
자기 생각안하지요. 할 필요가 없지요. 즐기면 되니까. 이 주님과 함께 있음, 전에는 나 혼자 살았는데 지금은 나 있던 자리에 주님이 시원적으로 원초적으로 오리지널적으로 계신분이 내 자리를 내 엉덩이를 차버리고 그 자리에 앉았다는 그것만으로 그게 바로 그분에 의해서 내가 마음껏 처분되어도 자기는 상관없다 이 말입니다. 삭개오 이야기가 왜 성경에 나왔겠습니까? 이게 구원의 모델이기 때문에 구원의 원전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뽑아서 그 사람을 자기 집에다가 초청한겁니다.
그걸 제가 대구강의에서 뭐라고 했냐 하면 불러냈다는 겁니다. 불러낸거예요. 주께서 어두운데서 불러낸거예요. 어두운데서 불러냈으니까 불러내고 난 뒤에 한번 뒤돌아보세요. 내가 있던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어두운 자리죠. 그 어두운 자리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교회 다니고 성경보고 기도하고 목사 하라는 데로 다 했고 복음 믿으라 하면 다 적고 요한복음 13장 적어가지고 영생은 그 노트 이만한 노트 한권씩 가 가지고 있지요? 전부 다 옛날에 제자훈련할 때. 그 노트에 1단계 그 다음에 2단계 3단계 아이고 나 언제 12단계 올라가냐 해가지고 결국 12단계는 돈 내는게 문제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공부하면 되는 줄 알고 전부 그게 얼마나 내가 나를 살처분하기 위한 탈출구였다 이 말이죠.
누리지를 못했어요. 그냥 누린다는 게 뭐냐 하면은 남 씹는 재미, 산 위에 올라가가지고 이제 자기는 이제 중견간부 된거예요. 5단계니까. 자기보타 밑의 단계 초보단계 온 사람보고 얼마나 씹어댔겠습니까. 저 기도 꼬라지 봐라 저거 10초하고 끝난거 봐라 저거. 나는 벌써 처음에는 10초 했지만 지금 했다하면 25분 한다고. 저 위에 있는 사람은 25분도 기도냐? 난 했다하면 두 시간이다. 아이고 음매 기죽어 음매 기살어. 이런 재미로 살아요 교회가 이런 재미로.
그런데 이게 어두움이거든요 이게. 이게 나 홀로 사는거 아닙니까 나 홀로. 크리스마스 때 맨날 틀어주는거예요. 아이가 악! 하는거 이거 면도하다가. 나 홀로 집에 3,2,1 진짜 인간은 나 홀로 집에 나 홀로 집. 자기 혼자 살아요. 자기 혼자. 누리는게 없어요. 즐기는게 없고. 또 뭐해야 되고 뭐 해야 벌 안 받고 또 뭘 해야 나중에 내 자식까지 복을 받고 맨날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자기를 처분하려고 탈출구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 원칙은 그게 아니예요. 아버지여 내가 아들된 것처럼 저들도 아들 되게 하옵소서. 그런데 아들 된다고 아들한테 맞먹으면 안 되고 예수님을 그들 자신을 높이다가 이제는 예수님을 높이는 자 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그들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는 기도가 이 기도내용이에요. 아들을 영화롭게 해서.
자, 기도내용 봅시다. 기도의 모든 내용의 중심은 뭐다? 예수님을 높이는 것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게 끝이에요. 뭐 수능 앞두고 기도하고 시험 잘 치고 전방 가지말고 후방 빠지게하고 그게 아니예요. 몸이 아파서 유방암에서 낫게 해주고 그게 아니예요. 대상포진 낫게 하면 또 아픈데? 아픈 채로 예수님 높이는 것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평소에 내 소식만을 잘 되기를 기대했던 우리에게 주님의 소식은 심판이요 곧 그것이 구원이요 영생의 절차인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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