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7장 13절(하나님의 작품)180703a-이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2절부터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성경에 응한다는 말은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거예요.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원칙이 우리에게 그 여파가 퍼져서 그래요. 하나님의 원칙에 우리에게 도달되어서 혜택이 미치다 하지요.
연못에 돌덩이 던지면 잔물결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연못가에 서있는 그 신발짝에 그 물결이 와 닿아가지고 찰랑찰랑 그 신발에 물 덮치지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일으키시는 파장, 구원의 파장이 어떻게 내가 도달되느냐 이야기를 지금 하고있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되게 되면 내가 나 구원하는 모든 것은 중지가 되어야해요. 내가 나 구원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것은 그건 다 헛방이니까. 거짓됨이거든요. 이 기도자체가 예수님이 아버지보고 기도하는 거예요. 기도내용 자체가 뭐냐 하면 이미 하나님 예수님과 아버지가 알아서 다 끝냈어요. 알아서 다 끝냈다고.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끝나잖아요.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그런데 이 성경에 응하는데 인간이 관여했습니까? 관여할 수가 없어요. 관여 못하게 하시죠. 관여를 의도적으로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이 세상이 뭘로 변했느냐 하면 이 세상은 멀쩡해요. 세상은 그냥 정상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 아들 예수님을 보냄과 동시에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합시다.
예수님 등 뒤에 아버지하고 성경이 연결됐다고 봅시다. 성경이, 말씀, 성경이 연결되어 있어요. 딴사람은 연결 안 되어 있지요. 예수님만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연결되어 있는데 이게 용수철이여서 이게 쭉 늘어나서 여기까지 도달하는 순간 세상은 뭘로 변하느냐 하면 이게 멸망의 곳으로 변해요. 멸망의 곳으로.
멸망의 곳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제일 쉬운 것은 뭐냐 하면 방이 밀폐된 곳에 갔는데 또는 화장실에 갔는데 바깥에서 문을 잠그는 겁니다. 밀폐된 거예요. 바깥에서 문을 잠궈 버려요. 만약에 이 문이 열려 있다면 온전한 멸망의 곳이 아니예요. 문 열고 나가면 되니까. 문 열고 나가면 되니까. 이거 어렵지 않지요? 나가고 싶은데 갇혀 있는 상황이다 갇혀있는 상황이다 이 말이죠.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우리가 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그게 얼마나 실없는 소리인지. 이 갇혀 있는 이 밀폐된 공간, 밀폐된 공간이 공기가 탁하잖아요. 공기가 탁하지요. 밀폐되어 있으니까 산소가 제한되어 있죠. 탁할 때 이 탁한 공기를 더욱 더 공간을 탁하게 만드는데 누가 기여합니까? 바로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기여하고 있다니까요.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내 자신이 이 세상이 멸망의 세상일 수밖에 없는 요인을 내가 거기서 계속 가담하고 있고 거기에 협조하고 있고 그것의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구원해보자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지켜서 구원해보겠다는 것이 점점 더 이 바깥에 있는 자물쇠의 그 의미가 더 강렬해지는 거예요. 바깥에서 잠갔다니까 바깥에서. 아무리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점점 더 자기가 애쓰다 보니까 제한된 공기가 산소가 다 딸려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지금 요한복음 17장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다 이 말이죠. 아버지와 아들. 다른 사람은 끼어들지를 못해요. 베드로 기도 아니잖아요. 예수님 기도 잖아요. 아버지와 아들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냐 하면 이렇게 이렇게 해서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이렇게 할 때 이건 뭐냐 하면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 완료시킨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구원, 그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러한 열망이라든지 그런 바램같은 것은 그것은 거기에 끼어 들 수가 없어요. 끼어들어도 소용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구원을 언급하면 무엇과 같이 짝을 이루어 언급하느냐 하면 멸망에 대해서 언급한다고 12절에.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지킨 것도 성경에 응함에 의함이죠.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멸망당하지 않는 제자들이 본인이 훌륭해서 멸망 안 당한게 아니예요.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니까 성경에. 어른들 이야기 하는거로 끝났다 이 말이에요. 어른들 이야기 하는데. 어른신들 이야기 하는데 어른신들까지 어르신들 이야기 하는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버렸다 이 말이죠. 쫄따구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기여한 바가 없어요.
그리고 나중에 구원되고 나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니까요. 어른신들 이야기가 합당하게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결과는 나온 거예요. 인간은 결과물로 먹고 삽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어른신들이 하신 그 결과 있잖아요. 그 결과로 사는거예요.
어제 서울에 비 왔다면서요? 소나기 왔지요? 그 소나기 목사님이 만들었습니까? 목사님이 만든 것도 아니고 비 오라고 요청한 적도 없지요? 치킨집 택배 보내라고 치킨 인형 보내주고 이런거 없지요? 하나님의 소나기 오토바이에 실어가지고 윙~배달료 받고 그런 거 없지요? 그냥 왔잖아요 그냥. 우리 인간은 결과물을 받고 사는 존재. 따라서 인간 자체가 결과물이예요.
결과물인데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거는 뭐냐 하면은 이미 하나님이 하시는 그 구원에 결과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라고 해놓고 제가 이렇게 슬래시 치는 영어로 slash 타자기에 나오죠. 옆으로 지워버리면 두 가지 나와요. 뭐냐 하면 멸망 안 되는 결과와 멸망 되어야할 결과, 딱 이 종류로 나오는 겁니다. 중요한 공식이기 때문에 나중에 혹시 뒤에 오시는 분 있으면 다시 이야기 할께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렇게 분해가 되요. 인간은 분해가 되고 인간이 분해가 되니까 인간은 없어지죠. 없어지고 남는게 뭐냐 하면 말씀에 두 가지의 양상 이것만 달랑 남아요. 내가 뭐 했다는 없어요. 말씀이 개입되면. 성경이 나로 하여금 이런 기능을 하게 했다 이렇게 되요. 지금 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인생이 힘들잖아요. 내가 있기 때문에.
교회 가서 구원도 받아야 되겠고 직장생활 돈도 벌어야 되겠고 두 가지 다 하려고 하니 짜증나잖아요. 그리고 교회 가면 교회 봉사도 하고 이쪽은 전혀 해당되는게 없지만 집에 가면 또 애들 돌봐야 되고 굉장히 힘들다 이 말이죠. 따라서 지금 결과가 인간은 없어져요 인간은 없어졌지요? 인간은 없어지고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멸망 말씀의 두 가지 또는 말씀의 결과의 두 가지. 말씀의 두 가지 양상인데 하나는 말씀에 성경에 응하게 되면 한 쪽은 멸망되는 자와 멸망 안 되는 자로 나와버려요. 멸망되는 자와 멸망되지 않는 자.
지금 이게 요한복음 17장에서 지금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이야기하는 그 내용입니다. 인간들을 두고서 저 사람은 멸망하고 이 사람은 멸망하지마. 예. 끝나는 문제예요. 그렇다면 주님이 아시는 이런 주님만이 아시는 이런 내용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여기에 대해서 알려고 한다면 우선 이 말씀 속에 우리가 녹아져야 되겠지요? 용암로에 녹듯이. 다니엘 세 친구는 불속에 들어갔는데 우리는 말씀 속에 들어가야 되요. 불속에 들어가도 녹고 말씀 속에 들어가도 우리는 이미 녹아있고.
우리는 지키는게 없어요. 말씀은 지키는게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를 녹여버려요. 이런거 하려면 전부 다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에어컨 끄고 얼마나 녹는지 한번 봐야 돼요. 형체가 있어요 처음에 아이스크림 막 살 때는 형체가 있어요. 형체가 있어서 탐스럽지만 한 시간만 지나버리면 손에 물 되서 다 흘러내려요. 꼭 우리의 인생같아요. 어릴 때 젊을 때 이쁘고 귀엽고 참하고 사람같아요.
나이 75만 넘어버리면 이게 뭐냐 뭉개지거든요. 형태가 뭉개져요. 특히 남자들이 늙은 여자보면 깜짝 놀래요. 그 이쁜 형태가 다 뭉개져서 남자이십니까? 여자이십니까? 이제는 물어봐야돼요. 기어이 연세 많은 권사님들은 거의 여자이고 싶어가지고 남자는 사용하지 않는 여자만 사용하는 그런 립스틱 짖게 바르고 온갖 것 다 해가지고 아직도 나는 여자라. 아직도 나는 여자라고 이렇게 하는데 바탕은 뭉개졌고 바깥에는 여자이고 싶고 그 괴리. 그거 어떡할거야?! 그런거 보면 참 남자로 태어난게 참 다행스러워요. 처음부터 아예 안 발랐으니까. 처음부터 아예 안 발랐으니까.
뭉개져 버린다니까 형태가 뭉개져버려요. 뭉개졌을 때에 인간자체가 이거는 인간인지 괴물인지 분간이 안 되어 버리면 차라리 어릴 때에 그 청춘의 모습에 우리가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젊을 때 모습이 계속 유지된 줄 알고 있어요. 이미 피크가 서른 즈음 되게 되면요 인간의 두뇌발달은 29세쯤 정도 되면 완료가 되요. 서른즘 되게 되면 그 뒤는 뭐냐 하면은 서른 즈음이 되요. 점점 더 멀어져가요. 김광석처럼. 서른 즈음에.
이 서른이 피크가 되어서 그 다음부터 내리막길로 내려갑니다. 아가씨들 뭐 자기가 청춘인줄 알고 돈 모아가지고 시집 갈 생각 안하고 배낭여행 유럽여행 가는데 이렇게 가다 보니까 34, 35. 선 자리도 안 들어와요. 뭐 선 자리 들어오는데 56하고 결혼하라고 56인데 아이 둘 있고. 이때는 아가씨 엄마가 참지를 못해. 이런데 시집 보내려고 내가 키운 줄 알아? 안돼요. 이것도 능력이 있는 레지던트 여자 같으면 애 하나 딸려도 나이 많은 병원의 과장이 결혼하자고 찝적대가지고 할 수도 있지요. 같이 살래요? 이렇게 하면서 드라마에 보면 나오지만. 드라마 보면 이상하게 이혼하고 이렇게 해도 시집 잘 가요. 아직 형태가 안 무너져 그런거 같애.
인간이 편하게 예수님을 만난다 하지 마시고 예수님 가로 열고 말씀 성경의 응함. 성경의 응함과 접촉이 되어 버리면 인간은 분해 되가지고 성경의 응함의 내용이 확산됩니다. 확대가 되요. 그렇게 되면 인간은 결과물로 받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하고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하고 둘 다 뭉개진 입장에서 뭘. 둘 다 본인의 것이 없는데 말씀작용에 같이 휩쓸려 있는 입장에서 본인이 주가 아니잖아요. 센터가 아니라고. 본인이 중심이 아니잖아.
비교한다는 것은 이거는 변두리에서 변두리 비교하는 것은 그것은 비교가치가 없지요. 그런데 제가 오늘 처음 강의할 때 제가 무슨 이야기 했습니까? 바깥에서 문을 잠궜다고 했지요? 그게 밀폐되었다 했고 그걸 요한복음 12장에서 그걸 뭐라고 했는가? 그걸 세상이 그냥 멀쩡했는데 누가 다녀갔다? 예수님의 다녀감. 이제 알았으니까 예수님이 그냥 다녀갔다 하지 말고 말씀의 응함이 다녀가 버리면 세상이라고 굉장히 괜찮은 세상 살기 좋은 세상이 졸지에 뭐로 변했습니까? 멸망의 세계, 멸망의 세계로 바뀐거예요.
그럼 멸망의 세계로 바뀌어 버리면 그 다음 당연한 논리는 뭐냐 하면 말씀이 말씀과 멸망의 세계 이렇게 같이 연결 조인을 해버리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요소는 이 세상이 꼭 멸망되야 될 요건들을 계속해서 양산해 냈다는 논리가 되는 겁니다. 이래야 논리가 맞아요. 우리끼리 알아서 세상 멸망해야 돼 이거는 안통해요. 이미 폐쇄되었기 때문에. 문에 갇혀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끼리 알아서 멸망했다고 한다면 그중에 똑똑한 지혜로운 사람이 문고리 잡고 열고 나가면 되요. 이 세상 더럽다고 자살하던지 간에 뭘 하든지 간에 문 열고 나가면 되잖아요. 더러워서 못살겠다고. 세상 더럽다고 문 열고 나간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목사도 있잖아요. 자기만 살겠다고 자살한 사람 있잖아요. 아시아나 항공에 식사 안 된다. 비행기 타고 아무 활동도 안하는데 두 끼 굶는다고 죽지 않거든요. 꼭 두 끼 먹어야 돼요? 그런데 식사 없다고 식사 때문에 28시간 일해가지고 힘들다고 자살해버렸어요.
그 하청업체 대표가 식사하는데 차질있었냐고 하니까 화나가지고 죽었는지 어떻게 피곤해서 죽었는지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럼 그 사람의 평소에 사는 그 목적이 뭐예요? 기대가 뭐예요? 제대로 대기업하고의 하청 제대로 해서 그 다음에 계속해서 좋은 관계해가지고 계속해서 대기업과 연결되어 가지고 내 공장이 음식공장이 잘 돌아가는거 그걸 기대했잖아요. 그런데 그 자기 공장 잘 돌아가는게 말씀에 응하는 겁니까? 사람이 내가 공장하는데 공장이 잘 돌아가면 좋겠다하는 것은 그건 뭐냐 하면 지금 이 세상이 말씀에 의해서 밀폐되어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녀감을 다녀갔다는 요소를 빼놓고 세상을 보는 거예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되니까 자살한거예요. 그 자살 중의 한 사람이 누구냐? 오늘 본문 중에 나오지요. 자살은 누가 자살했습니까? 그 중에 멸망의 자식, 누구예요? 가룟 유다지요 가룟 유다.
자, 예수님의 생산물 12명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응하러 오신분입니다. 논리가. 그런데 12명 가운데 단 한명이 뭐라고요? 멸망의 자식이죠. 그러면 말씀에 응하게 되면 반드시 뭐가 도출돼야 해요? 멸망의 자식이 도출돼야 해요. 멸망의 자식이. 반드시 도출돼야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지옥 간 사람이 있거든 그건 말씀이 응한 효과라고 보시고 그걸 아주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우리가 수용을 해줘야 되요.
세상 사람들이 주님께 안 나옵니다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께 나온 사람이 이상해요. 주님께 나오는 사람이. 주님께 나와서 구원 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다가가서 구원해내지요. 왜? 다가올 사람 없기 때문에. 주님께 자진해서 나올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 했잖아요. 밀폐된 공간에 제한된 산소의 양을 누가 그걸 소모합니까? 이 밀폐된 공간에서 너무 힘드니까 빨리 천국 가야돼 라고 설치는 문은 바깥에서 잠궈 놨는데 백날 설쳐봐야 설치면 설칠수록 점점 더 산소는 산소의 감소량은 줄어들 뿐이죠. 교회가 시키는 대로 십일조 하고 해봐야 점점 더 지옥에 가까이 가요. 지옥에 점점 더 가깝지요. 왜? 그 만큼 열낸게 있어 가지고 그게 아깝잖아요. 자기가 구원 받으려고 애쓴게.
그 기도하고 열심낸게 다 누구 위해서 하는 겁니까? 성경 말씀 응하게 한게 아니고 내가 나로 출발해서 성경 말씀에 비슷한 것을 도출해내겠다는 겁니다. 내가 문고리 열고 나가겠다는 거예요. 문고리 하니까 갑자기 박근혜 문고리 생각나네. 청와대 갈 때는 세 명의 문고리를 잡아야 청와대 박근혜 만날 수 있다. 문고리 3인방이란 말이죠. 오늘 제목 문고리로 할까?
인간은 전부 다 구원의 문고리를 잡으려고 해요. 사영리가 그렇지요. 제자훈련이 그렇지요. 다락방 훈련이 그렇지요. 이렇게 하면 문고리 잡고 여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을 바깥에서 잠갔다니까 안에서 잠갔으면 알아서 열지요. 맥가이버 왜 있습니까? 맥가이버 불러가지고 비법 거듭나는 비법, 있잖아요 그거 거듭남의 비밀 이런거 있잖아요. 박옥수. 피를 믿으라 그런거 이야기 많이 있잖아요. 그거 믿고 하면 구원받잖아.
그런데 그거 믿으면 구원 받는 그 믿음 자체가 점점 더 멸망의 자식이 된다니까 그게. 왜냐하면 자꾸 나의 구원이 있어버리면 내가 말씀에서 분해가 안 된 상태가 되요. 분해가 안 되어 있으면 백날 열심히 해도 이게 내 구원 돼요 내 구원. 나의 구원 된다니까요. 성경 12절에서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우리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왜 배신했는가를 보다 많이 우리가 알 필요가 있어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말이죠.
가룟 유다는 적극적으로 팔아먹고 나머지 11제자는 다 도망갔잖아요. 가룟 유다나 사람들이나 결국 가룟 유다가 제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12가운데 10명이 참여해서 예수님 배신한게 아니고 배신했다는 입장에서는 배신한 사람 가룟 유다의 그 결정에 대해서 11제자가 말릴 여력이 있었다 없었다? 말릴 여력이 없지요. 그럼 가룟 유다가 대표자지요. 어떤 이 사건이 터진데 있어서 다른 11제자가 거기에 있어서 말릴만한 여력이 없다는 말은 결국은 마지막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은 예수님과 무엇의 만남? 가룟 유다의 만남이죠. 어차피 예수님은 십자가 지셔야 되니까. 십자가 지는게 말씀의 응함이잖아요.
자, 그러면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 배신했는가.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왜그러냐 하면 이건 흔히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교회다니면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상황이 그대로 가룟 유다 상황입니다. 만약에 아는 형님이 있다 동창생이 있다 만났다 쭉 이야기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 교회 나가 예수 믿고 나처럼 구원 받아라 라고 이렇게 해요. 그러면 그 쪽에서 하는 말이 내가 왜 교회 가야되고 내가 왜 예수 믿어야 되고 왜 그래야 되는데? 라고 묻지요.
그 묻는 심성이 어떤 심성이냐 하면 지금 나 할 일이 굉장히 많아. 할 일이 참 많은데 내가 할 일이 없으면 그 한가지 일도 교회가는거 해주겠는데 지금 할 일이 많다 이 말이죠. 그거 아니라도 신경쓸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거 아니라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화투같으면 화투의 패를 갖고 있다가 예수님을 버릴 패로 간주한 이유가 다른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거예요. 혹시 예수님까지 믿으면 다른 패가 좀 잘될까 생각했는데 별로 이 패는 다른 것에 방해가 되요. 이 패를 버리고 다른 패를 살리기 위해서 이 패를 버린 겁니다.
너 나 따라서 교회 나오라고 하면 한 몇 년 뒤에 갈께 지금 바쁘다. 굉장히 편하잖아요. 이건 뭐 예수 죽여라 촛불집회 하는거 아니잖아요. 굉장히 편하게 생각하지요? 거기에 비해서 가룟 유다는 진짜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는 성경의 말씀대로 정말 양심적인 사람이에요. 교회 나와도 안 나올 수 있잖아요. 그게 자연스럽잖아요. 목사도 아니고 교회에 미쳐가지고 살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예수라는게 그다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닌겁니다. 가룟 유다에 있어서. 그건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고. 거기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모여서 멸망이라는 도성이 됐다는 것은 분명이 확실히 드러났지요? 처음에 이야기 했잖아요. 세상이 있는데 아주 정상적이에요. 세상은. 새 짹짹 거리고 무지개 있고 아름답기 짝이 없어요. 시간과 돈만 있으면 여행다니고 산다는게 그렇게 평화롭게 사는 것이 삶의 보람이잖아요.
문제는 거기에 누가 다녀갔습니까? 예수님이 다녀갈 때 그냥 다녀간게 아니예요. 예수님의 성경 말씀 응하고 다녀간 순간 그 아름다움, 어떤 변화도 없어요. 예수님이 갔다 왔다 해서 요란스럽게 달라지는 거 없어요. 그 아름다운 세상이 무슨 세상? 졸지어 멸망 그 자체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 말이죠. 그럼 이런 인식을 예수님만 갖고 있지 일반인들은 그걸 가질 수가 있어요? 없어요? 가질 수가 없어요. 열두제자가 다 그걸 안 갖고 있었던 겁니다. 가룟 유다만 예수님께 도망친게 아니고 다 도망쳤잖아요.
의인이 한명만 있으면 되요. 그런데 한명도 없어요. 쉽게 말해서 이 세상 전부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병들었다 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니까요. 외부에서 다녀갈 때 이 세상 망했어 라고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고 예수님도 그냥 내뱉는 말이 아니고요 말씀에 전체 말씀의 완료의 입장에서 보니까 세상은 빈틈없이 폐쇄된 공간, 밀폐된 공간이다.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이 악마의 멸망에서 기어 나올 인간은 없어요. 인간 그 자체가 멸망에 기여했고 보탰고.
그래서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게 없다 이 말이죠. 거기에다가 예수를 전해봤자 그래 나는 시간 있으면 관심 가져볼게 이것 뿐이에요. 말씀의 응함에 관심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결과물을 내는데 바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결과물을. 그럼 결과물을 낳게 되면 누구의 영광입니까? 본인의 영광이죠. 본인의 영광, 본인을 가치 있는 본인으로 만드는데 지금도 한 시간 시간이 아까워요.
52시간 일해도 안 된다니까요. 52시간 일해도 월급 확 깎이는데 68시간 일해야 겨우 세 식구 먹고 살 그런 판인데 어디 뭐 예수 이야기. 언제 그런데까지 신경써요 그런데까지. 52시간 일해도 안 될 판인데. 월급 다 깎였어 지금 문재인 때문에. 수당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교회는 나와주지요. 교회 중간쯤 되다보면 아 예예예 곧 문 엽니다. 아 예예 곧 문 갈께요. 가게 문 여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 없어요. 교회는 그냥 혹시 갔다오면 벌 안 받는가 싶어서 자기 보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요.
여전히 가룟 유다는 우리의 대표자예요. 오늘날 21세기에. 모든 교회의 대표자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의 입장은 그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좋은 분이지만 우리에게는 나보다 더 귀하지는 않다. 나보다 더 귀하지는 않아요. 시간 짬 내서 말씀 지켜주겠습니다. 그 자체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은 귀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지킬 필요도 없어요. 예수님 자체가 구원의 완료이기 때문에. 성경이 응했기 때문에.
뭐 예수님한테 뭘 받치고 뭘 이렇게 재롱을 부린다 말입니까? 그런거 없어요. 결국 예수님 앞에 나올 때 가룟 유다는 예수님 앞에서 본인을 하나의 인간으로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멸망의 요건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타났는데 자기는 인간으로 나타난거예요. 그러면 그 인간의 형태는 말씀완성의 형태가 무너져야 되고 뭉개져야 되요.
제가 아까 동영상 240강인가 했잖아요. 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제목이 하나님의 지령이죠. 하나님의 지령. 지령을 받은 사람은 외로울 틈이 없다고 했지요? 007이 외로워합니까? 지령이에요 지령. 지령이라고 하는 말은 암약이라는 말 알지요? 남의 나라에 가서 몰래 숨어서 있는 것 암약하는 것. 스파이들 암약한다고 하잖아요 암약. 어두운데서 엎드려가지고 안 들키게 하는 것. 하나의 우리는 지령을 받은거예요.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그것이 오늘 본문 16절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예수님이 007 제임스본드예요. 그러면 그 멸망 받은 자도 제임스 본드예요. 007은 무슨 번호를 갖고 있어요? 살인범. 강도도 구원받았잖아요. 앞뒤가 이상하게 안 맞는거 같은데. 사람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런거. 사람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 말은 나를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 말입니다.
사람이나 나나 똑같은 존재예요. 그럼 나부터 나를 인간으로 취급을 안 하는겁니다. 내가 무슨 인간입니까? 안 뭉개지려고 애쓰는 이런. 주님의 십자가의 앞에서 내가 무슨 인간이에요. 나는 무너져야 되지요. 주님은 말씀을 응했는데 우리는 새삼스럽게 내가 말씀을 지켜서 내 구원을 따로 챙기려고 하는 이 멸망의 몸짓, 멸망의 몸짓을 하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사람 대우를 받으려고 하고 사람으로 취급받으려고 그렇게 건방을 떱니까?
예수님께서 멸망의 오심으로서 말미암아 세상이 졸지에 갑자기 까만 어두운 멸망의 도시가 되었다면 오늘날 예수님의 성령을 받는 그 순간부터 내 주변의 나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은 새까매야 되요. 새까만 연탄같은 재가 되야 돼요. 새까만 재가 되야 돼요. 그야말로 먼지가 되야 돼요. 오늘 김광석이 많이 나온다. 새까맣게 되야 돼요. 새까만데 무슨 자존심이 있고 그 화장빨을 받고 왜 합니까? 같은 숯덩어리 가지고 숯덩어리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숯덩어리 가지고 저울질 해가지고 무게 달 일 있습니까? 둘 다 숯덩어리인데 올라가는건 숯덩어리 올라가는데.
숯덩어리인데 왜 자살해요? 이미 죽었는데. 간단해요. 죽었다 살았다 이것을 이 구분을 우리가 하면 안돼요. 여기에 장벽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지고 와버리면 정말 죽은 자는 아무리 죽어도 살았다 영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이 예수님이라는 펜스 장막을 통해서 비로소 알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살았기에 모든 인간은 다 죽은거예요. 모든 인간은 죽은 겁니다.
사도행전이 이번 수련회에 하겠지만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거예요. 이거는 뭐를 의미 하느냐 하면 불가능성을 이야기 하는겁니다. 불가능성. 불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와야 돼요. 죽었다가 살았다 하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해서 예수님이 죽었다 살았다 함으로서 모든 인간은 영생에 가는데 있어서 자동적으로 할 수 없는 어떤 펜스가 쳐있다는 베를린 장벽보다 더 심한거예요. 장벽이 쳐 있다는 거예요.
장벽을 모르게 되면 예스그리스도의 가치라 하는 것은 아주 똥같은 가치밖에 안돼요. 시시한 가치밖에 안돼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장벽을 율법으로 뚫으려고 했잖아요.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가지고 말씀 지켜서 십일조 10계명 지켜서 뚫으려고 하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이 장벽이 더 확실해졌다 이 말이죠.
너희들이 구원하고자하는 구원의 시도와 열심이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거예요. 그러면 영생의 나라는 물 건너 간거예요. 예수님이 왜 오셨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오늘 그 주제를 이야기 하라면 이거예요. 간단한거예요. 격리예요. 격리인데 갈라짐 격리인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격리, 격리를 시키는 거예요.
격리를 시켜놓고 이걸 뭐냐 연결되었느냐 끊어졌느냐를 이야기 하는겁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요.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안 갑니다. 지금 땅에 있습니다. 격리된거죠. 떨어져있지요. 떨어져 있으나 연결되어 있지요. 그러나 멸망된 자들은 이게 예수님께 끊어진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센터 예수님이 중심이에요. 연결되었느냐 끊어졌느냐가 문제예요. 지금 네가 얼마나 고생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영생과 끊어졌느냐 영생과 연결됐느냐 그걸 묻는겁니다. 연결되었을 때는 무엇과 연결되었느냐 하면은 성경의 말씀에 응한 것이 연결되야 돼요. 우리가 지킨거 말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성경의 완성 말씀의 완성이 비록 격리되었어도 격리된게 아니고 연결되어 있고 예수님말고 자신들이 뚫으려고 하는 것은 끊어진거예요.
그 이야기하면서 지금 제가 가룟 유다 쪽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왜 출발했느냐 가룟 유다 같은 이 속성이 오늘날 이 세상을 펜스 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중에 우리도 일부도 우리도 거의 보탬이 되었고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다시하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떠한 사람이냐? 가룟 유다는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것은 구태여 예수님이 절대적 요인은 아니다 내 인생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 예수님도 귀하지만 여러 가지 패들이 다른 귀한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다. 이렇게 보게 되면 그게 가룟 유다 심정이잖아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가룟 유다가 멸망했다고 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감 잡아야 되냐 하면 정말 우리가 멸망되지 않았다면 어떤 심성이 어떤 사고방식이 멸망의 사고방식이냐를 가룟 유다를 통해서 도망친 제자를 통해서 확실하게 정리가 되어있어야 돼요. 정리가 되어있어야 돼요.
우리가 가룟 유다보다 더 나은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더 나은거 없지요. 없는데 우리가 만약에 구원된다고 한다면 결국은 이것은 뭐냐 하면은 우리 공로가 아니고 주님께서 말씀에 응하는데 보니까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멸망 안 될 요소가 있고 말씀이 응한 그 결과물이 또는 멸망되야 될 요소가 있는거예요. 인간이 둘로 분해되니까.
결국은 구원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성경말씀이 완성했다는 차원에서 이것은 구원되어야 하기에 구원된거예요. 구원되는 것이 우리 뜻이 아니라니까요. 이 점을 또 분명하게 해서 가룟 유다를 정리해봅시다. 간단한 정리를 할 수 있어요. 가룟 유다는 자기 앞 길을 개척하는데 불확실성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핵심인 것은 제가 빨간 걸로 치겠습니다. 뭐냐 하면 이것 불확실성. 불확실성.
왜 사람들이 말씀에 관심이 그렇게 없고 주저 합니까? 불확실성 때문에 그래요. 왜 불확실성을 논합니까? 자기 앞가림은 본인이 나서서 개척해야 희망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불확실성 요소라면 그 불확실성을 메꾸기 위해서 보조하기 위해서 인간은 뭐를 보충하느냐 하면 바로 제도와 법을 동원시킵니다. 제도와 법을 동원시키면 거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자기 의로움이 발생돼요. 변명이죠. 자기 변명과 자기 의로움 자기 가치성 이런 것을 마저 채울 수 있다는 거예요.
쉬운 예가 뭐냐 하면 교회가 복음만 전하면 되잖아요. 예수님의 완성만 전하면 되지요. 그렇지요? 말을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응한 성경에 응한 상태가 그게 교회입니다. 그게 교회예요. 그런데 그 교회가 자신의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서 이게 확실치 않다는 생각이 막 드는 거예요. 복음만 전해도 됩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복음만 전해서 교회 안 될 때 어떻게 하느냐. 그걸 온 교인들을 한데 삼손을 묶었던 일곱 밧줄처럼 교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여기서 교회법과 교회제도를 거기다가 마구 집어넣는 거예요. 프로그램을 프로젝트를 막 시도하는 거예요. 어떤 조직에 속한 소속감을 주기 위해서. 소속감을 주기 위해서. 이게 평소에 인간이 자기 것 지키는 습관적인 방식이었습니다.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묶는겁니다. 빠지지 말라고. 치아교정할 때 묶어버리잖아요. 뭐 하나 이탈하지 말라고 가지런히.
그 가지런히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자기 영광이라고 하죠.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기도는 초장부터 뭡니까? 이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영광을 받는다. 예수님이 영광 받는 것은 예수님이 모든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말씀이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 사실을 인지 하는거 그게 영광이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가치와 그 어떤 가치도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그걸 주님께 몽땅 드리는 것, 그게 가치입니다.
제가 그 얼마 전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얼마나 아프냐고 묻지 말고 내가 지금 왜 화를 내느냐 물어보세요. 남편이 아프다. 주여 남편 몸을 건강하게 해주세요 라고 아까 그 동영상 강의에 의하면 그걸 부탁하지요. 부탁하는데 그걸 왜 부탁합니까? 누구 좋으라고. 어디 주님하고 같이 거래할 일 있습니까? 이거 낫게 하면 돈 헌금 드리겠다. 거래할 일 있어요? 그게 전부 다 뭐냐 하면 지금껏 유지했던 내 가치를 주님께서 좀 훼손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거예요.
내 영광은 내 영광보다 더 센 게 없고 내 영광 있어야 내가 이 땅에 살 보람이 있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그게 바로 네가 멸망의 땅에서 계속 멸망된 채로 살겠다는 가룟 유다의 심보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우리가 내 영광을 취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의 영광은 날라가 버렸어요. 날라가든지 우리가 두 팔로 주님의 영광을 가려버리든지.
목사가 복음을 전할 때는 뭘 전하느냐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거예요. 그런데 전해가지고 그 사람이 내 교회의 교인이 되면 이건 뭐냐 하면 나의 구원이 된다니까. 그 교인 숫자와 더불어 목사 더불어 하나 묶어서 이게 나의 성과가 되어 버려요. 나의 결과가 되어버리고 결국 그것은 내 영광으로 돌아온다니까요. 내가 해서 얻어낸 예상된 내 결과물이다 이 말이죠.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주님이 이미 이루어져서 자연적으로 파생된 그 결과가 이게 주님의 구원이고 진짜 구원이거든요. 오늘 본문이 그렇잖아요 오늘 본문이. 지금 제자들 빼고 이야기하잖아요. 제자들 지금 자고 있어 자고 있다니까. 나중에 성령을 통해서 알게됐지만.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이야기 하는거예요. 아버지하고. 어르신 두 분이 이야기 하면 됐지 뭐 우리가 왜 끼어야 됩니까.
세상이 그렇게해서 멸망될 자와 멸망되지 않을 자를 제대로 주께서 제대로 일하실거라 이 말이죠. 미션임파서블이잖아요. 그 불가능한 일을 제대로 실수없이 다 해내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내가 뭉개지면 됐잖아요. 내가 분해되면 됐잖아요. 나로 살다가 주의 말씀에 응함에 호구로 살면 되잖아요. 주의 말씀에 덩어리에 있는 혹. 멍게에 보면 혹 많지요? 멍게가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혹이라고 혹. 툭툭 튀어나온 혹같이 부풀어진 혹으로 살면 되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안 보이잖아요 물론 격리된거 맞아요. 격리되었지만 주님의 솜씨가 뭐냐 하면 떨어져 있어도 하나다. 이게 주님의 솜씨란 말이죠. 이걸 자랑스러워하고 싶은거죠. 세상 사람들 보기에 멸망될 사람들 보기에 어디든지 있으니까 주님 보기에 완전 결별될 줄 알고 그쪽에서 오해하는 거예요. 왜? 그쪽에는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주님과 제자의 이미 약속된 관계를 몰라요.
쉬운 예를 들어 봅시다. 아주 쉬운 예에요. 벨기에하고 일본하고 축구를 하는데 이미 주님은 알고 있어요. 3:2로 벨기에가 이기게 된다는걸. 후반전 7분전까지 일본이 2:0으로 이겼어요. 좋다고 일본 난리났거든요. 2:0으로 이겼으니까. 아무리 강해도 2:0에서 비기든지 지든지 둘 중에 우리가 역으로 질리는 없다 하는 거예요. 주님은 알고 있었어요. 3:2로.
우리가 격리되어 있을 때에 격리되어 있으니까 너무 떨어져 가지고 주님 아무도 안 도와주고 이러다 지옥가는거 아닌가 하지만 격리되어 있지만 나중에 3:2가 됐다니까. 격리된 이것이 주님의 응하기 위해서 가장 합당한 조건이 된다면 2:0이 아니고 5:0 뭐 얼마가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느긋할 필요가 있어요. 정말로 느긋할 필요가 있다고 세상 사는게. 어차피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대로 가야 하기 때문에. 성경에 응한대로 가야돼요.
나란 인생은 별로 필요치 않습니다. 아까 제가 갸롯 유다 살면 뭐가 동원된다고 했습니까? 법과 제도가 동원되지요. 그게 지금 문제가 되는 거예요. 법 동원되지요. 성경에 하라 하지마라 동원되지요. 그러면 그 동원할 때 그게 이제 멸망의 자식들한테는 예수님을 예수님과 진짜 결별할 수밖에 없는 요건이 되요. 왜? 바르게 살려고 해도 바르게 못 사니까. 뭐가 뭉개집니까? 내 의 내가 쌓아놨던 모든 자존심과 체면과 명성이 무너지잖아요. 그거는 무너져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멸망될 사람은 무너져야 된다가 아니라 무너지면 안돼가 된다니까. 오늘 제목을 안돼로 하고 싶다 안돼. 안돼!!! 나 안 볼란다. 안돼! 무너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이들면 결국 다 무너질 것을 왜 안 되는데? 그럼 결국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국은 뭡니까? 자기 영광 더 쌓기 위해서 하여튼 노림수란 것이 들통나버린거예요. 갸롯 유다가 예수를 왜 팔아먹었습니까? 내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제 버릴 때가 됐다고 해서 버린거예요. 나머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제자들 도망간 것도 마찬가지고요. 도망 왜 갑니까? 잡혀가면 되는데.
강도처럼 같이 죽었으면 그날밤 같이 낙원갈텐데 괜히 오래 살아가지고. 2:0으로 이길 때 일본사람들의 방법은 뭐냐 하면 그때 TV를 끄고 자야돼. 그래야 그 기쁨이 아침까지 남아 있을거 아닙니까. 괜히 2:0으로 이길 줄 알고 3:2로 지니까 잠도 못 잤어요. 치킨 먹은거 다. 다시 정리합니다. 정리하기 전에 인간은 말씀에 의해서 분해가 되면서 딱 두 종류 멸망될 자와 멸망되지 않을 자 이렇게 갈라집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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