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하나님의 작품 1807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7. 15. 18:37
2018-07-03 23:59:08조회 : 280         
하나님의 작품 180703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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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121.♡.203.222)18-07-14 15:04 
강남-요한복음 17장 13절(하나님의 작품)180703a-이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2절부터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성경에 응한다는 말은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거예요.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원칙이 우리에게 그 여파가 퍼져서 그래요. 하나님의 원칙에 우리에게 도달되어서 혜택이 미치다 하지요. 

연못에 돌덩이 던지면 잔물결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연못가에 서있는 그 신발짝에 그 물결이 와 닿아가지고 찰랑찰랑 그 신발에 물 덮치지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일으키시는 파장, 구원의 파장이 어떻게 내가 도달되느냐 이야기를 지금 하고있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되게 되면 내가 나 구원하는 모든 것은 중지가 되어야해요. 내가 나 구원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것은 그건 다 헛방이니까. 거짓됨이거든요. 이 기도자체가 예수님이 아버지보고 기도하는 거예요. 기도내용 자체가 뭐냐 하면 이미 하나님 예수님과 아버지가 알아서 다 끝냈어요. 알아서 다 끝냈다고.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끝나잖아요.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그런데 이 성경에 응하는데 인간이 관여했습니까? 관여할 수가 없어요. 관여 못하게 하시죠. 관여를 의도적으로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이 세상이 뭘로 변했느냐 하면 이 세상은 멀쩡해요. 세상은 그냥 정상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 아들 예수님을 보냄과 동시에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합시다. 


예수님 등 뒤에 아버지하고 성경이 연결됐다고 봅시다. 성경이, 말씀, 성경이 연결되어 있어요. 딴사람은 연결 안 되어 있지요. 예수님만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연결되어 있는데 이게 용수철이여서 이게 쭉 늘어나서 여기까지 도달하는 순간 세상은 뭘로 변하느냐 하면 이게 멸망의 곳으로 변해요. 멸망의 곳으로. 


멸망의 곳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제일 쉬운 것은 뭐냐 하면 방이 밀폐된 곳에 갔는데 또는 화장실에 갔는데 바깥에서 문을 잠그는 겁니다. 밀폐된 거예요. 바깥에서 문을 잠궈 버려요. 만약에 이 문이 열려 있다면 온전한 멸망의 곳이 아니예요. 문 열고 나가면 되니까. 문 열고 나가면 되니까. 이거 어렵지 않지요? 나가고 싶은데 갇혀 있는 상황이다 갇혀있는 상황이다 이 말이죠.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우리가 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그게 얼마나 실없는 소리인지. 이 갇혀 있는 이 밀폐된 공간, 밀폐된 공간이 공기가 탁하잖아요. 공기가 탁하지요. 밀폐되어 있으니까 산소가 제한되어 있죠. 탁할 때 이 탁한 공기를 더욱 더 공간을 탁하게 만드는데 누가 기여합니까? 바로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기여하고 있다니까요.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내 자신이 이 세상이 멸망의 세상일 수밖에 없는 요인을 내가 거기서 계속 가담하고 있고 거기에 협조하고 있고 그것의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구원해보자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지켜서 구원해보겠다는 것이 점점 더 이 바깥에 있는 자물쇠의 그 의미가 더 강렬해지는 거예요. 바깥에서 잠갔다니까 바깥에서. 아무리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점점 더 자기가 애쓰다 보니까 제한된 공기가 산소가 다 딸려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지금 요한복음 17장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다 이 말이죠. 아버지와 아들. 다른 사람은 끼어들지를 못해요. 베드로 기도 아니잖아요. 예수님 기도 잖아요. 아버지와 아들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냐 하면 이렇게 이렇게 해서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이렇게 할 때 이건 뭐냐 하면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 완료시킨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구원, 그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러한 열망이라든지 그런 바램같은 것은 그것은 거기에 끼어 들 수가 없어요. 끼어들어도 소용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구원을 언급하면 무엇과 같이 짝을 이루어 언급하느냐 하면 멸망에 대해서 언급한다고 12절에.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지킨 것도 성경에 응함에 의함이죠.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멸망당하지 않는 제자들이 본인이 훌륭해서 멸망 안 당한게 아니예요.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니까 성경에. 어른들 이야기 하는거로 끝났다 이 말이에요. 어른들 이야기 하는데. 어른신들 이야기 하는데 어른신들까지 어르신들 이야기 하는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버렸다 이 말이죠. 쫄따구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기여한 바가 없어요. 


그리고 나중에 구원되고 나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니까요. 어른신들 이야기가 합당하게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결과는 나온 거예요. 인간은 결과물로 먹고 삽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어른신들이 하신 그 결과 있잖아요. 그 결과로 사는거예요. 


어제 서울에 비 왔다면서요? 소나기 왔지요? 그 소나기 목사님이 만들었습니까? 목사님이 만든 것도 아니고 비 오라고 요청한 적도 없지요? 치킨집 택배 보내라고 치킨 인형 보내주고 이런거 없지요? 하나님의 소나기 오토바이에 실어가지고 윙~배달료 받고 그런 거 없지요? 그냥 왔잖아요 그냥. 우리 인간은 결과물을 받고 사는 존재. 따라서 인간 자체가 결과물이예요. 


결과물인데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거는 뭐냐 하면은 이미 하나님이 하시는 그 구원에 결과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라고 해놓고 제가 이렇게 슬래시 치는 영어로 slash 타자기에 나오죠. 옆으로 지워버리면 두 가지 나와요. 뭐냐 하면 멸망 안 되는 결과와 멸망 되어야할 결과, 딱 이 종류로 나오는 겁니다. 중요한 공식이기 때문에 나중에 혹시 뒤에 오시는 분 있으면 다시 이야기 할께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렇게 분해가 되요. 인간은 분해가 되고 인간이 분해가 되니까 인간은 없어지죠. 없어지고 남는게 뭐냐 하면 말씀에 두 가지의 양상 이것만 달랑 남아요. 내가 뭐 했다는 없어요. 말씀이 개입되면. 성경이 나로 하여금 이런 기능을 하게 했다 이렇게 되요. 지금 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인생이 힘들잖아요. 내가 있기 때문에. 


교회 가서 구원도 받아야 되겠고 직장생활 돈도 벌어야 되겠고 두 가지 다 하려고 하니 짜증나잖아요. 그리고 교회 가면 교회 봉사도 하고 이쪽은 전혀 해당되는게 없지만 집에 가면 또 애들 돌봐야 되고 굉장히 힘들다 이 말이죠. 따라서 지금 결과가 인간은 없어져요 인간은 없어졌지요? 인간은 없어지고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멸망 말씀의 두 가지 또는 말씀의 결과의 두 가지. 말씀의 두 가지 양상인데 하나는 말씀에 성경에 응하게 되면 한 쪽은 멸망되는 자와 멸망 안 되는 자로 나와버려요. 멸망되는 자와 멸망되지 않는 자. 


지금 이게 요한복음 17장에서 지금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이야기하는 그 내용입니다. 인간들을 두고서 저 사람은 멸망하고 이 사람은 멸망하지마. 예. 끝나는 문제예요. 그렇다면 주님이 아시는 이런 주님만이 아시는 이런 내용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여기에 대해서 알려고 한다면 우선 이 말씀 속에 우리가 녹아져야 되겠지요? 용암로에 녹듯이. 다니엘 세 친구는 불속에 들어갔는데 우리는 말씀 속에 들어가야 되요. 불속에 들어가도 녹고 말씀 속에 들어가도 우리는 이미 녹아있고. 


우리는 지키는게 없어요. 말씀은 지키는게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를 녹여버려요. 이런거 하려면 전부 다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에어컨 끄고 얼마나 녹는지 한번 봐야 돼요. 형체가  있어요 처음에 아이스크림 막 살 때는 형체가 있어요. 형체가 있어서 탐스럽지만 한 시간만 지나버리면 손에 물 되서 다 흘러내려요. 꼭 우리의 인생같아요. 어릴 때 젊을 때 이쁘고 귀엽고 참하고 사람같아요. 


나이 75만 넘어버리면 이게 뭐냐 뭉개지거든요. 형태가 뭉개져요. 특히 남자들이 늙은 여자보면 깜짝 놀래요. 그 이쁜 형태가 다 뭉개져서 남자이십니까? 여자이십니까? 이제는 물어봐야돼요. 기어이 연세 많은 권사님들은 거의 여자이고 싶어가지고 남자는 사용하지 않는 여자만 사용하는 그런 립스틱 짖게 바르고 온갖 것 다 해가지고 아직도 나는 여자라. 아직도 나는 여자라고 이렇게 하는데 바탕은 뭉개졌고 바깥에는 여자이고 싶고 그 괴리. 그거 어떡할거야?! 그런거 보면 참 남자로 태어난게 참 다행스러워요. 처음부터 아예 안 발랐으니까. 처음부터 아예 안 발랐으니까. 


뭉개져 버린다니까 형태가 뭉개져버려요. 뭉개졌을 때에 인간자체가 이거는 인간인지 괴물인지 분간이 안 되어 버리면 차라리 어릴 때에 그 청춘의 모습에 우리가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젊을 때 모습이 계속 유지된 줄 알고 있어요. 이미 피크가 서른 즈음 되게 되면요 인간의 두뇌발달은 29세쯤 정도 되면 완료가 되요. 서른즘 되게 되면 그 뒤는 뭐냐 하면은 서른 즈음이 되요. 점점 더 멀어져가요. 김광석처럼. 서른 즈음에. 


이 서른이 피크가 되어서 그 다음부터 내리막길로 내려갑니다. 아가씨들 뭐 자기가 청춘인줄 알고 돈 모아가지고 시집 갈 생각 안하고 배낭여행 유럽여행 가는데 이렇게 가다 보니까 34, 35. 선 자리도 안 들어와요. 뭐 선 자리 들어오는데 56하고 결혼하라고 56인데 아이 둘 있고. 이때는 아가씨 엄마가 참지를 못해. 이런데 시집 보내려고 내가 키운 줄 알아? 안돼요. 이것도 능력이 있는 레지던트 여자 같으면 애 하나 딸려도 나이 많은 병원의 과장이 결혼하자고 찝적대가지고 할 수도 있지요. 같이 살래요? 이렇게 하면서 드라마에 보면 나오지만. 드라마 보면 이상하게 이혼하고 이렇게 해도 시집 잘 가요. 아직 형태가 안 무너져 그런거 같애. 


인간이 편하게 예수님을 만난다 하지 마시고 예수님 가로 열고 말씀 성경의 응함. 성경의 응함과 접촉이 되어 버리면 인간은 분해 되가지고 성경의 응함의 내용이 확산됩니다. 확대가 되요. 그렇게 되면 인간은 결과물로 받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하고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하고 둘 다 뭉개진 입장에서 뭘. 둘 다 본인의 것이 없는데 말씀작용에 같이 휩쓸려 있는 입장에서 본인이 주가 아니잖아요. 센터가 아니라고. 본인이 중심이 아니잖아. 


비교한다는 것은 이거는 변두리에서 변두리 비교하는 것은 그것은 비교가치가 없지요. 그런데 제가 오늘 처음 강의할 때 제가 무슨 이야기 했습니까? 바깥에서 문을 잠궜다고 했지요? 그게 밀폐되었다 했고 그걸 요한복음 12장에서 그걸 뭐라고 했는가? 그걸 세상이 그냥 멀쩡했는데 누가 다녀갔다? 예수님의 다녀감. 이제 알았으니까 예수님이 그냥 다녀갔다 하지 말고 말씀의 응함이 다녀가 버리면 세상이라고 굉장히 괜찮은 세상 살기 좋은 세상이 졸지에 뭐로 변했습니까? 멸망의 세계, 멸망의 세계로 바뀐거예요. 


그럼 멸망의 세계로 바뀌어 버리면 그 다음 당연한 논리는 뭐냐 하면 말씀이 말씀과 멸망의 세계 이렇게 같이 연결 조인을 해버리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요소는 이 세상이 꼭 멸망되야 될 요건들을 계속해서 양산해 냈다는 논리가 되는 겁니다. 이래야 논리가 맞아요. 우리끼리 알아서 세상 멸망해야 돼 이거는 안통해요. 이미 폐쇄되었기 때문에. 문에 갇혀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끼리 알아서 멸망했다고 한다면 그중에 똑똑한 지혜로운 사람이 문고리 잡고 열고 나가면 되요. 이 세상 더럽다고 자살하던지 간에 뭘 하든지 간에 문 열고 나가면 되잖아요. 더러워서 못살겠다고. 세상 더럽다고 문 열고 나간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목사도 있잖아요. 자기만 살겠다고 자살한 사람 있잖아요. 아시아나 항공에 식사 안 된다. 비행기 타고 아무 활동도 안하는데 두 끼 굶는다고 죽지 않거든요. 꼭 두 끼 먹어야 돼요? 그런데 식사 없다고 식사 때문에 28시간 일해가지고 힘들다고 자살해버렸어요. 


그 하청업체 대표가 식사하는데 차질있었냐고 하니까 화나가지고 죽었는지 어떻게 피곤해서 죽었는지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럼 그 사람의 평소에 사는 그 목적이 뭐예요? 기대가 뭐예요? 제대로 대기업하고의 하청 제대로 해서 그 다음에 계속해서 좋은 관계해가지고 계속해서 대기업과 연결되어 가지고 내 공장이 음식공장이 잘 돌아가는거 그걸 기대했잖아요. 그런데 그 자기 공장 잘 돌아가는게 말씀에 응하는 겁니까? 사람이 내가 공장하는데 공장이 잘 돌아가면 좋겠다하는 것은 그건 뭐냐 하면 지금 이 세상이 말씀에 의해서 밀폐되어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녀감을 다녀갔다는 요소를 빼놓고 세상을 보는 거예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되니까 자살한거예요. 그 자살 중의 한 사람이 누구냐? 오늘 본문 중에 나오지요. 자살은 누가 자살했습니까? 그 중에 멸망의 자식, 누구예요? 가룟 유다지요 가룟 유다. 


자, 예수님의 생산물 12명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응하러 오신분입니다. 논리가. 그런데 12명 가운데 단 한명이 뭐라고요? 멸망의 자식이죠. 그러면 말씀에 응하게 되면 반드시 뭐가 도출돼야 해요? 멸망의 자식이 도출돼야 해요. 멸망의 자식이. 반드시 도출돼야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지옥 간 사람이 있거든 그건 말씀이 응한 효과라고 보시고 그걸 아주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우리가 수용을 해줘야 되요. 


세상 사람들이 주님께 안 나옵니다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께 나온 사람이 이상해요. 주님께 나오는 사람이. 주님께 나와서 구원 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다가가서 구원해내지요. 왜? 다가올 사람 없기 때문에. 주님께 자진해서 나올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 했잖아요. 밀폐된 공간에 제한된 산소의 양을 누가 그걸 소모합니까? 이 밀폐된 공간에서 너무 힘드니까 빨리 천국 가야돼 라고 설치는 문은 바깥에서 잠궈 놨는데 백날 설쳐봐야 설치면 설칠수록 점점 더 산소는 산소의 감소량은 줄어들 뿐이죠. 교회가 시키는 대로 십일조 하고 해봐야 점점 더 지옥에 가까이 가요. 지옥에 점점 더 가깝지요. 왜? 그 만큼 열낸게 있어 가지고 그게 아깝잖아요. 자기가 구원 받으려고 애쓴게. 


그 기도하고 열심낸게 다 누구 위해서 하는 겁니까? 성경 말씀 응하게 한게 아니고 내가 나로 출발해서 성경 말씀에 비슷한 것을 도출해내겠다는 겁니다. 내가 문고리 열고 나가겠다는 거예요. 문고리 하니까 갑자기 박근혜 문고리 생각나네. 청와대 갈 때는 세 명의 문고리를 잡아야 청와대 박근혜 만날 수 있다. 문고리 3인방이란 말이죠. 오늘 제목 문고리로 할까? 


인간은 전부 다 구원의 문고리를 잡으려고 해요. 사영리가 그렇지요. 제자훈련이 그렇지요. 다락방 훈련이 그렇지요. 이렇게 하면 문고리 잡고 여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을 바깥에서 잠갔다니까 안에서 잠갔으면 알아서 열지요. 맥가이버 왜 있습니까? 맥가이버 불러가지고 비법 거듭나는 비법, 있잖아요 그거 거듭남의 비밀 이런거 있잖아요. 박옥수. 피를 믿으라 그런거 이야기 많이 있잖아요. 그거 믿고 하면 구원받잖아. 


그런데 그거 믿으면 구원 받는 그 믿음 자체가 점점 더 멸망의 자식이 된다니까 그게. 왜냐하면 자꾸 나의 구원이 있어버리면 내가 말씀에서 분해가 안 된 상태가 되요. 분해가 안 되어 있으면 백날 열심히 해도 이게 내 구원 돼요 내 구원. 나의 구원 된다니까요. 성경 12절에서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우리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왜 배신했는가를 보다 많이 우리가 알 필요가 있어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말이죠. 


가룟 유다는 적극적으로 팔아먹고 나머지 11제자는 다 도망갔잖아요. 가룟 유다나 사람들이나 결국 가룟 유다가 제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12가운데 10명이 참여해서 예수님 배신한게 아니고 배신했다는 입장에서는 배신한 사람 가룟 유다의 그 결정에 대해서 11제자가 말릴 여력이 있었다 없었다? 말릴 여력이 없지요. 그럼 가룟 유다가 대표자지요. 어떤 이 사건이 터진데 있어서 다른 11제자가 거기에 있어서 말릴만한 여력이 없다는 말은 결국은 마지막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은 예수님과 무엇의 만남? 가룟 유다의 만남이죠. 어차피 예수님은 십자가 지셔야 되니까. 십자가 지는게 말씀의 응함이잖아요. 


자, 그러면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 배신했는가.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왜그러냐 하면 이건 흔히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교회다니면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상황이 그대로 가룟 유다 상황입니다. 만약에 아는 형님이 있다 동창생이 있다 만났다 쭉 이야기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 교회 나가 예수 믿고 나처럼 구원 받아라 라고 이렇게 해요. 그러면 그 쪽에서 하는 말이 내가 왜 교회 가야되고 내가 왜 예수 믿어야 되고 왜 그래야 되는데? 라고 묻지요. 


그 묻는 심성이 어떤 심성이냐 하면 지금 나 할 일이 굉장히 많아. 할 일이 참 많은데 내가 할 일이 없으면 그 한가지 일도 교회가는거 해주겠는데 지금 할 일이 많다 이 말이죠. 그거 아니라도 신경쓸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거 아니라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화투같으면 화투의 패를 갖고 있다가 예수님을 버릴 패로 간주한 이유가 다른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거예요. 혹시 예수님까지 믿으면 다른 패가 좀 잘될까 생각했는데 별로 이 패는 다른 것에 방해가 되요. 이 패를 버리고 다른 패를 살리기 위해서 이 패를 버린 겁니다. 


너 나 따라서 교회 나오라고 하면 한 몇 년 뒤에 갈께 지금 바쁘다. 굉장히 편하잖아요. 이건 뭐 예수 죽여라 촛불집회 하는거 아니잖아요. 굉장히 편하게 생각하지요? 거기에 비해서 가룟 유다는 진짜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는 성경의 말씀대로 정말 양심적인 사람이에요. 교회 나와도 안 나올 수 있잖아요. 그게 자연스럽잖아요. 목사도 아니고 교회에 미쳐가지고 살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예수라는게 그다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닌겁니다. 가룟 유다에 있어서. 그건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고. 거기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모여서 멸망이라는 도성이 됐다는 것은 분명이 확실히 드러났지요? 처음에 이야기 했잖아요. 세상이 있는데 아주 정상적이에요. 세상은. 새 짹짹 거리고 무지개 있고 아름답기 짝이 없어요. 시간과 돈만 있으면 여행다니고  산다는게 그렇게 평화롭게 사는 것이 삶의 보람이잖아요. 


문제는 거기에 누가 다녀갔습니까? 예수님이 다녀갈 때 그냥 다녀간게 아니예요. 예수님의 성경 말씀 응하고 다녀간 순간 그 아름다움, 어떤 변화도 없어요. 예수님이 갔다 왔다 해서 요란스럽게 달라지는 거 없어요. 그 아름다운 세상이 무슨 세상? 졸지어 멸망 그 자체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 말이죠. 그럼 이런 인식을 예수님만 갖고 있지 일반인들은 그걸 가질 수가 있어요? 없어요? 가질 수가 없어요. 열두제자가 다 그걸 안 갖고 있었던 겁니다. 가룟 유다만 예수님께 도망친게 아니고 다 도망쳤잖아요. 


의인이 한명만 있으면 되요. 그런데 한명도 없어요. 쉽게 말해서 이 세상 전부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병들었다 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니까요. 외부에서 다녀갈 때 이 세상 망했어  라고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고 예수님도 그냥 내뱉는 말이 아니고요 말씀에 전체 말씀의 완료의 입장에서 보니까 세상은 빈틈없이 폐쇄된 공간, 밀폐된 공간이다.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이 악마의 멸망에서 기어 나올 인간은 없어요. 인간 그 자체가 멸망에 기여했고 보탰고. 


그래서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게 없다 이 말이죠. 거기에다가 예수를 전해봤자 그래 나는 시간 있으면 관심 가져볼게 이것 뿐이에요. 말씀의 응함에 관심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결과물을 내는데 바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결과물을. 그럼 결과물을 낳게 되면 누구의 영광입니까? 본인의 영광이죠. 본인의 영광, 본인을 가치 있는 본인으로 만드는데 지금도 한 시간 시간이 아까워요. 


52시간 일해도 안 된다니까요. 52시간 일해도 월급 확 깎이는데 68시간 일해야 겨우 세 식구 먹고 살 그런 판인데 어디 뭐 예수 이야기. 언제 그런데까지 신경써요 그런데까지. 52시간 일해도 안 될 판인데. 월급 다 깎였어 지금 문재인 때문에. 수당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교회는 나와주지요. 교회 중간쯤 되다보면 아 예예예 곧 문 엽니다. 아 예예 곧 문 갈께요. 가게 문 여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 없어요. 교회는 그냥 혹시 갔다오면 벌 안 받는가 싶어서 자기 보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요. 


여전히 가룟 유다는 우리의 대표자예요. 오늘날 21세기에. 모든 교회의 대표자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의 입장은 그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좋은 분이지만 우리에게는 나보다 더 귀하지는 않다. 나보다 더 귀하지는 않아요. 시간 짬 내서 말씀 지켜주겠습니다. 그 자체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은 귀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지킬 필요도 없어요. 예수님 자체가 구원의 완료이기 때문에. 성경이 응했기 때문에. 


뭐 예수님한테 뭘 받치고 뭘 이렇게 재롱을 부린다 말입니까? 그런거 없어요. 결국 예수님 앞에 나올 때 가룟 유다는 예수님 앞에서 본인을 하나의 인간으로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멸망의 요건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타났는데 자기는 인간으로 나타난거예요. 그러면 그 인간의 형태는 말씀완성의 형태가 무너져야 되고 뭉개져야 되요. 


제가 아까 동영상 240강인가 했잖아요. 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제목이 하나님의 지령이죠. 하나님의 지령. 지령을 받은 사람은 외로울 틈이 없다고 했지요? 007이 외로워합니까? 지령이에요 지령. 지령이라고 하는 말은 암약이라는 말 알지요? 남의 나라에 가서 몰래 숨어서 있는 것 암약하는 것. 스파이들 암약한다고 하잖아요 암약. 어두운데서 엎드려가지고 안 들키게 하는 것. 하나의 우리는 지령을 받은거예요.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그것이 오늘 본문 16절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예수님이 007 제임스본드예요. 그러면 그 멸망 받은 자도 제임스 본드예요. 007은 무슨 번호를 갖고 있어요? 살인범. 강도도 구원받았잖아요. 앞뒤가 이상하게 안 맞는거 같은데. 사람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런거. 사람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 말은 나를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 말입니다. 


사람이나 나나 똑같은 존재예요. 그럼 나부터 나를 인간으로 취급을 안 하는겁니다. 내가 무슨 인간입니까? 안 뭉개지려고 애쓰는 이런. 주님의 십자가의 앞에서 내가 무슨 인간이에요. 나는 무너져야 되지요. 주님은 말씀을 응했는데 우리는 새삼스럽게 내가 말씀을 지켜서 내 구원을 따로 챙기려고 하는 이 멸망의  몸짓, 멸망의 몸짓을 하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사람 대우를 받으려고 하고 사람으로 취급받으려고 그렇게 건방을 떱니까? 


예수님께서 멸망의 오심으로서 말미암아 세상이 졸지에 갑자기 까만 어두운 멸망의 도시가 되었다면 오늘날 예수님의 성령을 받는 그 순간부터 내 주변의 나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은 새까매야 되요. 새까만 연탄같은 재가 되야 돼요. 새까만 재가 되야 돼요. 그야말로 먼지가 되야 돼요. 오늘 김광석이 많이 나온다. 새까맣게 되야 돼요. 새까만데 무슨 자존심이 있고 그 화장빨을 받고 왜 합니까? 같은 숯덩어리 가지고 숯덩어리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숯덩어리 가지고 저울질 해가지고 무게 달 일 있습니까? 둘 다 숯덩어리인데 올라가는건 숯덩어리 올라가는데. 


숯덩어리인데 왜 자살해요? 이미 죽었는데. 간단해요. 죽었다 살았다 이것을 이 구분을 우리가 하면 안돼요. 여기에 장벽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지고 와버리면 정말 죽은 자는 아무리 죽어도 살았다 영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이 예수님이라는 펜스 장막을 통해서 비로소 알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살았기에 모든 인간은 다 죽은거예요. 모든 인간은 죽은 겁니다. 


사도행전이 이번 수련회에 하겠지만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거예요. 이거는 뭐를 의미 하느냐 하면 불가능성을 이야기 하는겁니다. 불가능성. 불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와야 돼요. 죽었다가 살았다 하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해서 예수님이 죽었다 살았다 함으로서 모든 인간은 영생에 가는데 있어서 자동적으로 할 수 없는 어떤 펜스가 쳐있다는 베를린 장벽보다 더 심한거예요. 장벽이 쳐 있다는 거예요. 


장벽을 모르게 되면 예스그리스도의 가치라 하는 것은 아주 똥같은 가치밖에 안돼요. 시시한 가치밖에 안돼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장벽을 율법으로 뚫으려고 했잖아요.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가지고 말씀 지켜서 십일조 10계명 지켜서 뚫으려고 하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이 장벽이 더 확실해졌다 이 말이죠. 


너희들이 구원하고자하는 구원의 시도와 열심이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거예요. 그러면 영생의 나라는 물 건너 간거예요. 예수님이 왜 오셨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오늘 그 주제를 이야기 하라면 이거예요. 간단한거예요. 격리예요. 격리인데 갈라짐 격리인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격리, 격리를 시키는 거예요. 


격리를 시켜놓고 이걸 뭐냐 연결되었느냐 끊어졌느냐를 이야기 하는겁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요.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안 갑니다. 지금 땅에 있습니다. 격리된거죠. 떨어져있지요. 떨어져 있으나 연결되어 있지요. 그러나 멸망된 자들은 이게 예수님께 끊어진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센터 예수님이 중심이에요. 연결되었느냐 끊어졌느냐가 문제예요. 지금 네가 얼마나 고생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영생과 끊어졌느냐 영생과 연결됐느냐 그걸 묻는겁니다. 연결되었을 때는 무엇과 연결되었느냐 하면은 성경의 말씀에 응한 것이 연결되야 돼요. 우리가 지킨거 말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성경의 완성 말씀의 완성이 비록 격리되었어도 격리된게 아니고 연결되어 있고 예수님말고 자신들이 뚫으려고 하는 것은 끊어진거예요. 


그 이야기하면서 지금 제가 가룟 유다 쪽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왜 출발했느냐 가룟 유다 같은 이 속성이 오늘날 이 세상을 펜스 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중에 우리도 일부도 우리도 거의 보탬이 되었고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다시하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떠한 사람이냐? 가룟 유다는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것은 구태여 예수님이 절대적 요인은 아니다 내 인생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 예수님도 귀하지만 여러 가지 패들이 다른 귀한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다. 이렇게 보게 되면 그게 가룟 유다 심정이잖아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가룟 유다가 멸망했다고 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감 잡아야 되냐 하면 정말 우리가 멸망되지 않았다면 어떤 심성이 어떤 사고방식이 멸망의 사고방식이냐를 가룟 유다를 통해서 도망친 제자를 통해서 확실하게 정리가 되어있어야 돼요. 정리가 되어있어야 돼요. 


우리가 가룟 유다보다 더 나은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더 나은거 없지요. 없는데 우리가 만약에 구원된다고 한다면 결국은 이것은 뭐냐 하면은 우리 공로가 아니고 주님께서 말씀에 응하는데 보니까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멸망 안 될 요소가 있고 말씀이 응한 그 결과물이 또는 멸망되야 될 요소가 있는거예요. 인간이 둘로 분해되니까. 


결국은 구원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성경말씀이 완성했다는 차원에서 이것은 구원되어야 하기에 구원된거예요. 구원되는 것이 우리 뜻이 아니라니까요. 이 점을 또 분명하게 해서 가룟 유다를 정리해봅시다. 간단한 정리를 할 수 있어요. 가룟 유다는 자기 앞 길을 개척하는데 불확실성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핵심인 것은 제가 빨간 걸로 치겠습니다. 뭐냐 하면 이것 불확실성. 불확실성. 


왜 사람들이 말씀에 관심이 그렇게 없고 주저 합니까? 불확실성 때문에 그래요. 왜 불확실성을 논합니까? 자기 앞가림은 본인이 나서서 개척해야 희망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불확실성 요소라면 그 불확실성을 메꾸기 위해서 보조하기 위해서 인간은 뭐를 보충하느냐 하면 바로 제도와 법을 동원시킵니다. 제도와 법을 동원시키면 거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자기 의로움이 발생돼요. 변명이죠. 자기 변명과 자기 의로움 자기 가치성 이런 것을 마저 채울 수 있다는 거예요. 


쉬운 예가 뭐냐 하면 교회가 복음만 전하면 되잖아요. 예수님의 완성만 전하면 되지요. 그렇지요? 말을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응한 성경에 응한 상태가 그게 교회입니다. 그게 교회예요. 그런데 그 교회가 자신의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서 이게 확실치 않다는 생각이 막 드는 거예요. 복음만 전해도 됩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복음만 전해서 교회 안 될 때 어떻게 하느냐. 그걸 온 교인들을 한데 삼손을 묶었던 일곱 밧줄처럼 교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여기서 교회법과 교회제도를 거기다가 마구 집어넣는 거예요. 프로그램을 프로젝트를 막 시도하는 거예요. 어떤 조직에 속한 소속감을 주기 위해서. 소속감을 주기 위해서. 이게 평소에 인간이 자기 것 지키는 습관적인 방식이었습니다.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묶는겁니다. 빠지지 말라고. 치아교정할 때 묶어버리잖아요. 뭐 하나 이탈하지 말라고 가지런히. 


그 가지런히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자기 영광이라고 하죠.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기도는 초장부터 뭡니까? 이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영광을 받는다. 예수님이 영광 받는 것은 예수님이 모든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말씀이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 사실을 인지 하는거 그게 영광이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가치와 그 어떤 가치도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그걸 주님께 몽땅 드리는 것, 그게 가치입니다. 


제가 그 얼마 전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얼마나 아프냐고 묻지 말고 내가 지금 왜 화를 내느냐 물어보세요. 남편이 아프다. 주여 남편 몸을 건강하게 해주세요 라고 아까 그 동영상 강의에 의하면 그걸 부탁하지요. 부탁하는데 그걸 왜 부탁합니까? 누구 좋으라고. 어디 주님하고 같이 거래할 일 있습니까? 이거 낫게 하면 돈 헌금 드리겠다. 거래할 일 있어요? 그게 전부 다 뭐냐 하면 지금껏 유지했던 내 가치를 주님께서 좀 훼손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거예요. 


내 영광은 내 영광보다 더 센 게 없고 내 영광 있어야 내가 이 땅에 살 보람이 있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그게 바로 네가 멸망의 땅에서 계속 멸망된 채로 살겠다는 가룟 유다의 심보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우리가 내 영광을 취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의 영광은 날라가 버렸어요. 날라가든지 우리가 두 팔로 주님의 영광을 가려버리든지. 


목사가 복음을 전할 때는 뭘 전하느냐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거예요. 그런데 전해가지고 그 사람이 내 교회의 교인이 되면 이건 뭐냐 하면 나의 구원이 된다니까. 그 교인 숫자와 더불어 목사 더불어 하나 묶어서 이게 나의 성과가 되어 버려요. 나의 결과가 되어버리고 결국 그것은 내 영광으로 돌아온다니까요. 내가 해서 얻어낸 예상된 내 결과물이다 이 말이죠.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주님이 이미 이루어져서 자연적으로 파생된 그 결과가 이게 주님의 구원이고 진짜 구원이거든요. 오늘 본문이 그렇잖아요 오늘 본문이. 지금 제자들 빼고 이야기하잖아요. 제자들 지금 자고 있어 자고 있다니까. 나중에 성령을 통해서 알게됐지만.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이야기 하는거예요. 아버지하고. 어르신 두 분이 이야기 하면 됐지 뭐 우리가 왜 끼어야 됩니까. 


세상이 그렇게해서 멸망될 자와 멸망되지 않을 자를 제대로 주께서 제대로 일하실거라 이 말이죠. 미션임파서블이잖아요. 그 불가능한 일을 제대로 실수없이 다 해내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내가 뭉개지면 됐잖아요. 내가 분해되면 됐잖아요. 나로 살다가 주의 말씀에 응함에 호구로 살면 되잖아요. 주의 말씀에 덩어리에 있는 혹. 멍게에 보면 혹 많지요? 멍게가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혹이라고 혹. 툭툭 튀어나온 혹같이 부풀어진 혹으로 살면 되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안 보이잖아요 물론 격리된거 맞아요. 격리되었지만 주님의 솜씨가 뭐냐 하면 떨어져 있어도 하나다. 이게 주님의 솜씨란 말이죠. 이걸 자랑스러워하고 싶은거죠. 세상 사람들 보기에 멸망될 사람들 보기에 어디든지 있으니까 주님 보기에 완전 결별될 줄 알고 그쪽에서 오해하는 거예요. 왜? 그쪽에는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주님과 제자의 이미 약속된 관계를 몰라요. 


쉬운 예를 들어 봅시다. 아주 쉬운 예에요. 벨기에하고 일본하고 축구를 하는데 이미 주님은 알고 있어요. 3:2로 벨기에가 이기게 된다는걸. 후반전 7분전까지 일본이 2:0으로 이겼어요. 좋다고 일본 난리났거든요. 2:0으로 이겼으니까. 아무리 강해도 2:0에서 비기든지 지든지 둘 중에 우리가 역으로 질리는 없다 하는 거예요. 주님은 알고 있었어요. 3:2로. 


우리가 격리되어 있을 때에 격리되어 있으니까 너무 떨어져 가지고 주님 아무도 안 도와주고 이러다 지옥가는거 아닌가 하지만 격리되어 있지만 나중에 3:2가 됐다니까. 격리된 이것이 주님의 응하기 위해서 가장 합당한 조건이 된다면 2:0이 아니고 5:0 뭐 얼마가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느긋할 필요가 있어요. 정말로 느긋할 필요가 있다고 세상 사는게. 어차피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대로 가야 하기 때문에. 성경에 응한대로 가야돼요. 


나란 인생은 별로 필요치 않습니다. 아까 제가 갸롯 유다 살면 뭐가 동원된다고 했습니까? 법과 제도가 동원되지요. 그게 지금 문제가 되는 거예요. 법 동원되지요. 성경에 하라 하지마라 동원되지요. 그러면 그 동원할 때 그게 이제 멸망의 자식들한테는 예수님을 예수님과 진짜 결별할 수밖에 없는 요건이 되요. 왜? 바르게 살려고 해도 바르게 못 사니까. 뭐가 뭉개집니까? 내 의 내가 쌓아놨던 모든 자존심과 체면과 명성이 무너지잖아요. 그거는 무너져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멸망될 사람은 무너져야 된다가 아니라 무너지면 안돼가 된다니까. 오늘 제목을 안돼로 하고 싶다 안돼. 안돼!!! 나 안 볼란다. 안돼! 무너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이들면 결국 다 무너질 것을 왜 안 되는데? 그럼 결국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국은 뭡니까? 자기 영광 더 쌓기 위해서 하여튼 노림수란 것이 들통나버린거예요. 갸롯 유다가 예수를 왜 팔아먹었습니까? 내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제 버릴 때가 됐다고 해서 버린거예요. 나머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제자들 도망간 것도 마찬가지고요. 도망 왜 갑니까? 잡혀가면 되는데. 


강도처럼 같이 죽었으면 그날밤 같이 낙원갈텐데 괜히 오래 살아가지고. 2:0으로 이길 때 일본사람들의 방법은 뭐냐 하면 그때 TV를 끄고 자야돼. 그래야 그 기쁨이 아침까지 남아 있을거 아닙니까. 괜히 2:0으로 이길 줄 알고 3:2로 지니까 잠도 못 잤어요. 치킨 먹은거  다. 다시 정리합니다. 정리하기 전에 인간은 말씀에 의해서 분해가 되면서 딱 두 종류 멸망될 자와 멸망되지 않을 자 이렇게 갈라집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 (IP:121.♡.203.222)18-07-14 15:04 
강남-요한복음 17장 13절(하나님의 작품)180703b-이근호 목사 



자, 지난 첫째 시간 끝에 격리한다 했습니다. 이 격리를 예수님만 격리하는게 아니예요. 인간도 격리합니다. 그 제가 어느 강의에서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지요.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먼저 일을 해 놓고 모방해서 그게 아니다라는 식을 일을 하신다 했지요.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이 인간은 자기 자신을 격리해요. 


어떻게 자기 자신을 떼어 놓느냐 하면 지금의 나, 지금의 나와 점점 미래의 나로 떼어 놓고 지금의 나보다 더 성공적인 나 성공적인 나를 이렇게 격리시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뭐가 작용하냐 하면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불확실성이 여기 작용해요. 불확실성을 확실로 메꾸기 위해서 자기 현재의 나하고 미래의 나하고 자신이 본인이 그렇게 갈라놓게 하는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에게 희망이라고 해요. 희망. 희망이라고 이야기하고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걸 자아 이상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말로 하는데 그냥 쉽게 해서 꿈, 희망. 지금의 나도 만족스럽지만 나는 내 욕망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보다 항상 더 나은 나. 지금 만약에 한 5억 있다면 5억 있는 그 순간에 벌써 10억이 탐이 나고 10억이 있어야 100억이 탐이 나게 되어 있지 처음부터 100억 탐내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안 되거든요. 


뭐가 있다하는 것은 이제는 더 큰 것을 가질 수 있는 그런 확실성이 더 강렬해졌다고 기대를 하게 마련이다 이 말이죠. 블로흐라는 독일의 철학자가 이야기한게 바로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희망의 철학 인간은 희망 없이는 못 산다 희망의 철학. 인간은 희망 때문에 사는 거예요. 


교인이 50명 있을 때 100명 원하고 100명 되면 1000명을 원하고 처음부터 5000명 원하는게 아니고 조금 되니까 아 내가 주의 종인 모양이다. 주의 사자인 모양이다. 진짜 나 아니면 주의 일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럼 하나님이 나를 키우겠지. 동업자니까 키우겠지. 하청업자니까 하겠지. 안되면 결국은 또 자살하고. 


이 불확실성을 하는데 있어서 이 불확실성을 메꾸기 위해서 예수도 찾고 하나님 찾고 기도하고 성령 받는다고 주시면 부르짖으면 성령 받는다 해가지고 열심히 전도하려고 하고,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이 구조, 현재 나와 미래의 나의 격리구조가 유지되는 한 이것은 계속해서 악마의 시험이 되는 겁니다. 가룟 유다 되는 거예요. 


이것도 시도해보고 저것도 시도해보고 좋다는 것은 다 시도해보는 거예요 좋다는 것은. 살 빼려고 온갖 것 살 빼려고. 다이어트 약 너무 먹어서 배불러. 온갖 것 공에 엎드려 봤다가 천장에 매달려 봤다가 요가해 봤다가 황제 다이어트 고기도 먹어봤다가. 오후 5시 식사하고 아침 6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마세요. 옛날 이거 해가지고 53kg 됐어요. 


옛날에 우리 할머니하고 제가 살았는데 부모님은 장사나가고 할머니랑 살았는데 할머니가 귀찮잖아요 나이가 많으니까 손자 밥 해주기가. 그러니까 빨리 해치우고 주무시려고 오후 5시에 저녁주고 아침 6시에 밥 먹었어요. 몸무게가 53kg. 그때는 슬펐어요. 남자가 몸이 이래가지고.. 지금은 그리워요. 지금도 이 방법을 한번 사용해보니까 효과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효과있다는 말은 또 내가 기대한거예요. 보장확실성으로 메꾸려고 한겁니다.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말은 이게 표적고 악마의 표적이고 계속 악마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겁니다. 너 그러면 인간 망한다. 끝장나는 거야. 너 되고 싶은거 있잖아. 여기서 실패하면 안 되잖아. 성공해야지. 남자가 칼 뽑았으면 뭐가 되든 되야지 이런 식으로. 자꾸 남들이 보잖아 남들이. 너에게 하는 기대가 가득인데 여기서 주저하면 안 되잖아. 너는 할 수 있어. MY WAY. 윤태균의 MY WAY. 이거는 몰라도 되. 나중에 찾아보세요. 아저씨들 좋아하는 노래. 할 수 있어. MY WAY 팝송 아닙니다. 우리나라 노래 있어요. 트로트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격리를 할 때 어떻게 격리를 하느냐 하면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경계를 떼어 버립니다. 기어이 격리를 해버려요.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불확실성이 아닙니다. 뭐가 일어나냐 하면 십자가 + 부활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을 거쳐가면서 경험했던 아버지의 구원을 아버지의 구원을, 아버지로부터 구원받은 예수님 자기 경험을 이 땅에 제자들에게 이 멸망되는 세상 이 캄캄한 세상에서 남겨둠으로서 제2의 제3의 예수그리스도를 이들을 통해서 표출을 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왜? 예수님이 가신 빠져나가신 코스가 십자가와 부활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 멸망의 이 세상이 예수님의 이런 불확실성이 아니고 예수님은 확실성이거든요. 확실한 것을 믿으라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 그 자체가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자체가 완전품이 되는 거예요. 믿음으로 끼어들 수 없어요. 그냥 경험하면 되는 겁니다 경험. 내 구원 말고 내가 열심히 해서 얻은 구원 말고 하나님이 다 이룬 구원을 매일같이 그것을 경험하면 되는 거예요. 


여기 송파에 가면 석촌호수 있지요? 석촌호수에 이렇게 가면서 물 같은거 발에 닿으면 바람 살랑살랑 불면 석촌호수가 호수니까 물기가 일어날게 아닙니까. 그런데 바람을 내가 후후 붑니까? 아니죠? 부는 바람에 발만 집어넣었을 뿐인데 신발 끝에 물이 적셔 오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은 뭐냐? 이 세상은 전부다 바람 바람 바람이다. 주님의 완성된 말씀에 응한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뭘 경험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 몸소 체험했던 그 경험, 얼마나 미움 받았어요. 그 경험 그 아버지의 구원을 이제는 격리된 채로 하나가 된 우리 멸망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대로 주어지는 겁니다. 여기 14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14절.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참 세상이라는 것이 가만있으면 누가 날 안 건드리는데 우리가 분해되어서 우리가 멸망되지 않는 순간부터 세상에 모든 변화에 성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모를 때는 저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하느냐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지요. 사람 대 사람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한다면 내 쪽에서 어떻게 하면 되요? 친절하게 해주고 친근하게 해주고 그 사람에게 맘 안 상하도록 잘해주면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서로 정으로 주고 받는건데 그렇게 섭섭하게 나한테 안 대할 것이라는 그런 계산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복음에 의해서 멸망에서 해소되어서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이 나에게 미워하고 시비거는 것은 그러한 윤리적 도덕적 차원이 아니예요. 악마의 작용이 되는 겁니다. 악마가 흔들게 하는 작업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럴 경우에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바로 이 격리를 나에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자, 어떻게 적용시키냐 하면 아까 격리했을 때 공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뭐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 + 부활이죠. 그러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예수님을 버리신거죠. 아버지가 예수님을 버린다는 말은 죽인다 이 말이죠. 왜 죽입니까? 죄 있음을 보고 죽였잖아요. 예수님 지은 죄는 없지만 대신 짊어진 죄 때문에 아버지가 예수님을 버리잖아요. 


그래서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미워하면 되잖아요. 철저하게 미워하는 것 우리 자신을. 남이 나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 미워하는 거예요. 남이 나를 미워하는 것보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오류는 자기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요 오류입니다. 착각이고 오류예요. 사람이 왜 남들 앞에 벌벌 떱니까 본인이 본인을 철저하게 안 미워해서 그래요. 자꾸 본인을 살려내려고 애쓰다 보니까 점점 더 군대귀신 다 끌어모으는 거예요. 길 가는 모기까지 다 무네. 파리 날파리까지 다 달려들어. 


자,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의 저 범종, 범종 알죠? 아주 큰 종. 선덕여왕 신라의 박물관 가면 흔히 말하는 전설에 의하면 에밀레종 있잖아요. 아이 삶아서 했더니 에밀레~하는 전설. 범종이 있단 말이죠. 범종에서 치면 범종에서 은은하게 뭐가 나옵니까? 웅~~~하고 이렇게 점잖은 소리가 쭈욱 나오지요? 범종. 치면 댕~~~하면 웅~~~~하고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 근처에 있던 풀숲에 있던 날파리 다 기어들어가 여기 다 붙어 있다. 세상은 뭐냐 하면 날파리예요. 하나님의 성경의 완성이 구원~~~~~주님이 다 이루었다~~~이렇게 나오니까 온갖 날파리 다 끌어온거예요. 해봐야 그 소리가 죽습니까? 그 날파리 청동 쪼가리 딱딱한데 날파리 붙어봐야 소리 줄일 수 있어요? 이 대범한 소리를. 


사람이 왜 세상을 무서워하느냐 하면 이 범종이 아니고 그 카페에 보면 손님 오면 딸랑딸랑 조그마한 종. 이 불확실성 때문에 너무 옹졸하게 살다보니까 딸랑 딸랑 하는데 이거는 아무나 날파리가 다 건드려. 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맨날 어떡하지. 아침 눈만 뜨면 어떡하지 어떡하지. 염려 걱정해요 자기 것 지킨다고. 거대한 종이 아니고 개 목에 있는 강아지나 개  목에 있는거. 촐랑댈 때마다 딸랑딸랑 촐랑대는거 있잖아요. 그 얍삽하죠. 돈도 안 비싸. 문방구에 가면 한 개에 천원만 주면 사는 그런 종. 이런 종은 수억 줘도 못 사. 천원짜리 종 있잖아요. 촐랑대는 종. 그러니까 네 종이 크냐 내 종이 크냐 교회와서 자랑한다고. 


세상은 상대할 가치가 없어요. 그렇게 알려면 내가 멸망 받을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철저하게 자기를 개무시해야 합니다. 자기를 개무시해야돼요. 내가 나를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상대는 전혀 겁나지 않습니다. 화분 던지고 과일 던지고 해도 나부터 화분 던져 놨는데 뭐. 기내식에 두 끼 안 나와도 괜찮아요. 그 쿠폰 삼만원짜리 두 개 얻으면 되니까. 아까 그 기내식 하청업자 자살했다고 했지요. 왜 죽습니까? 겁이 나서 죽은 거예요. 왜 겁납니까? 딸랑 딸랑 나는 당신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 딸랑 잔종이죠 잔종. 오늘 제목을 잔종이라고 할까? 신규어다 이거. 


철저하게 자기를 밟고 군화발로 진흙에다가 뭉개야돼요.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상대방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상대방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미워 안 하게 되면 세상을 부러워해요. 나는 언제 저 사람처럼 되나. 부러워져요. 밀폐된 공간 문을 바깥에서 잠궜는데 그것도 모르고 같은 제한된 산소 나눠먹게 하면서 그게 많이 산소 먹었다고 살쪄있을 때 인생 성공입니까? 갇혀있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갇혀있기는 마찬가지란 말이죠. 빠져 나오려고 문고리 교회가 문고리인데 문고리 백날 해봐야 열리지도 않아요. 


다시 말하지만 주님의 다 이루심이 찾아와야 돼요. 주님의 범종이 찾아와야 돼요 범종이. 우리는 그 범종 때문에 에밀레~ 죽은 아이처럼 되야 돼요. 아이 하나 잡아서 갑자기 불교신화가 됐네. 우리 아이 하나 죽어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완성됐다는 범종이 되어버린 거예요. 격리구조를 시킨 이유가 이미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나름대로의 어떤 목표가 있어요. 


아까 지금의 나와 그 다음에 소망의 나가 있다고 했지요? 그 소망을 천국으로 바꾸고 하늘나라로 바꾸고 바꿔도 그 구조는 똑같아요. 이미 나를 위한 소망이라면 그것은 이미 그 구조는 악마가 사주한 인생체계입니다. 인생살이예요. 하지만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구조를 메꿀 수 있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요. 확실하게 메꾸지만 또 불안해요. 지금 내가 하루에 성경 3장, 기도 한 두 시간하는데 이래가지고 되겠어? 세상이 점점 더 어려워 가는데 한 두 시간 4시간으로 더 하고 성경 7장 읽고 본인이 본인을 스스로 만들어요. 


아까 했잖아요. 법과 제도가 왜 투입된다고 했습니까? 확실치 않으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의 패 가지고 모자라니까. 다른 괜찮은 패들을 전부 다 쥐고 있는 거예요. 손가락이 모자라. 화투 46장 다 쥐고 있어가지고 막 빠질 참이야. 나중에 막 잃어 버려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 갇혀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거예요. 진짜 우리가 기도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한다 이런 얘기가 아니고 갇혀있다는 그것 아까 어디 갇혀있다고 했습니까? 멸망의 세상에 다 한 동기생이에요. 멸망의 세상에 갇혀있는 이상은 갇혀있는 자로 보지 멸망될 자로 보지 우리를 고유의 우리 사적인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어떤 인간도 가치 없어요. 


따라서 말씀이 와서 우리를 가지고 녹여버려요. 분해시켜 버려요. 분해 시켜서 한쪽은 천국으로 한쪽은 지옥으로. 그러면 영생 얻는 사람은 어떤 장벽을 통과했습니까? 장벽이라고 했는데 그 장벽이 죽었다와 영생 살았다 영생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가 장벽이 되지요. 왜 인간들이 장벽을 스스로 힘으로 뚫을 수 없느냐 하면은 인간이 예수님을 내쳐서 만들어진 장벽이기 때문에. 뭐가 들어있어요? 나는 당신이 꼴보기 싫어! 라고 내쳤다 이 말이죠. 내쳤고 이쪽 편에 있는 아버지는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여버렸지요. 자기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죽여버렸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십자가를 해가지고 이쪽은 뭐냐 하면 마땅히 죽어 마땅한 멸망될 자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 예수님이 다 보여준거예요. 이거 보여준게 성공한게 뭐냐 하면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성경해석을 할 때에 반드시 이렇게 나와야 돼요. 우리는 멸망해도 마땅하다. 어떤 행함도 소용이 없다. 우리는 불가능함 속에 갇혀있다. 이것이 계속 나와야 됩니다. 


예를 들면 에스더 4장 같은데 보면 그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나오지요. 자, 그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칩시다. 그 설교하고 난 뒤에 나중에 목사님 우리가 죽으면 죽으리라 해서 죽으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이거는 성경 해석이 잘못된 거예요.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우리끼리는 알지요. 우리끼리는 알잖아요. 공경 대상입니까? 식사하는 사람은 알지요. 공경 대상이에요? 


인간은 이미 누구를 공경하고 있습니까? 나를 공경하고 있지요. 나를 공경하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이미 절대적 공경 대상이 있는데 누구를 공경해요? 부모요? 공경 못 합니다. 어떻게 해도 잘 해줘도 못하고 못해주니까 더욱 더 못 할 뿐이고. 왜? 이미 공경대상이 나다 이 말이죠. 공경대상이. 그러니까 에베소서에 나오는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는 말은 결국은 뭐예요? 너는 멸망되어도 싸다. 따라서 뭘 나한테 기대하고 뭘 어디를 가? 구원을 받아? 주제파악도 못한 채 어디서 하느냐 이 말이죠. 


우리는 격리되어야돼요. 격리된 상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해야되요. 범종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구원을 만끽해야 되고 경험해야 됩니다. 내가 만들어낸 구원말고 하나님의 구원을. 그러면 성령이 와서 결국 쓰레기를 치우는 식으로 걷어내지요. 하나님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을 이끼 끼듯이 곰팡이 끼듯이 자꾸 뭐가 낍니까? 하나님의 구원 예수님의 영광은 뭐로 자꾸 녹이 슬어요? 무엇의 영광 때문에. 내 영광 나의 잘남 나의 가치 있음 나 포기하고 싶지 않아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는 녹이 자꾸 끼겠지요. 그걸 가지고 제가 지난 주일 낮설교에 이걸 가지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이걸 인간의 자유라고 했잖아요. 


인간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과 인간의 결정된 사항을 인간은 자유라고 해요. 나 하고 싶은대로 내가 결정하고 구애받지 않고 내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성령께서는 이 자유를 다 삭감한다고 했잖아요. 제거한다고 했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주여 이거 할 수 있습니다 저거 할 수 있습니다가 아니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살아. 다른 군소리 하지 말고 내가 지령한 대로 살아 너는 나만 쳐다봐. 너의 주인이 네가 아니야. 주인은 따로 있고 우리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주인이 밥 먹을 때 우리는 신발끈 맬 가치도 없어요. 세례요한이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내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해서 내가 신발 끈 풀거나 신발 받들 그런 입장도 안 된다고요. 


그렇게 격리가 됐으니까 그렇게 격리가 될 때에 다른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얼마나 비웃고 놀리겠습니까. 네가 교회가고 난 뒤에 수입이 얼마나 늘어나고 네 몸은 얼마나 더 건강해지고 네 가정은 더 화목해졌느냐고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을 자꾸 날파리가 와가지고 들러붙으면서 흔들어 대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가룟 유다의 말을 제가 대변하는거예요. 


자,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탬이 된다고 생각해서 내 자유를 가동시켜가지고 내 선택으로 예수를 믿었다 이 말이죠. 믿고 난 뒤에는 뭘 찾아야 되요. 믿고 난 뒤에는 우리는 어떤 격리구조가 있어요. 예수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내 모습은 얼마나 성공적으로 변화됐는가 우리는 기대하고 있는거예요. 기대하고 있는데 기대하고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보다 내 기대에 부응하는 확실성이 있기를 원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분석하고 주께서 어떤 복을 줬나 따져보니까 그 확실성이 갈수록 점점 질이 떨어지는 거예요. 목사님 교회에 젊은 사람들 많이 왔다 갔잖아요. 왔지만 간 사람도 많이 있잖아요. 왜 왔다가 갈까요? 올 때 그냥 빈 마음으로 온게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소망을 가지고 온거예요. 소망을 가지고. 


다시 말해서 확실한게 없어요. 다만 확실하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불확실성을 가지고 온겁니다. 그렇게 왔는데 오고 난 뒤에 가족 깨져버리고 자기 몸은 아프고 멀쩡한 것도 아파버리고 자식은 가출했고 가출해서 잘 살면 다행인데 가출해서 문제 일으켜가지고 합의금 달라고 하네. 하여튼 어릴 때 마음의 상처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긴 곤란하지만 갑자기 연락이 온다든지 하여튼 내 인생이 개판되버린거예요. 


이게 뭐냐 성경에 의해서 내 인생이라는 것 내 인생 자체가 이게 형체가 이게 아이스크림 녹듯이 형체가 무너져버리고 없는거예요. 곽을 짜가지고 이것이 내 인생이다 라고 정해놓은게 있는데 말씀이 오니까 완전히 이걸 주께서 쥐포 뜯듯이 뜯어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꿰매죠. 주워서 풀 붙인다고요. 완전히 풀 붙일 때에 이게 또 반칙이 있다고요. 


날마다 찢겨지는 내 인생 말씀에 의해서 내 인생이라는게 없고 말씀에 의해서 녹아져야 되는데 쪼가리가 이렇게 끊어져 있으니까 이 쪼가리를 우리가 억지로 붙이는 거예요. 이 붙이는게 뭐냐 하면 왜곡된 편집 있지요? 그걸 편집하는 것 동영상 편집하는 것. 왜곡된 편집을 이게 괜찮은 건전한 자기의 자아상이라고 이게 우기게 되는 겁니다. 이게 벌써 뭐냐 하면 오류예요 오류. 


매일 우리가 생각하는게 뭐냐 하면은 괜찮은거 끌어 모아가지고 자기 재구성. 자아 재편성하는 거예요. 자아의 재편성. 마치 프로야구할 때 에이스라고 던졌는데 에이스라고 해가지고 여자분들은 야구 잘 모르잖아요. 내가 무시하나? 투수 가운데서 제일 잘 던지는 투수. 던졌는데 돈 수십억 줬는데 이미 지금 몇 월달이야? 6월달 3개월 지금 전반기 끝나가는데 적어도 한 10승 투수 이래줘야 되는데 2승 8패. 2군으로 내려가 이러겠죠. 팀하나 잘되기 위해서는 못하는 선수를 계속해서 방출하고 새로운 팀을 트레이드 바꾸고 이렇게 하잖아요. 야구팀도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자아 구성하는데 매일같이 실제는 그거예요. 


건전한 것 안 놓치고 쓸데없는 것은 무책임하게 내 편 아니다. 방출해버리고 계속 건전한 것 건전한 것. 살만한 가치를 하나님 보시기에 이쁘다하고 아이고 착하다 이렇게 소리 듣도록 매일 자기 관리하는 거예요. 그게 가룟 유다가 했던 겁니다. 패를 쥐고 계속 패 관리 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또 이렇게 하면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죠? 하는데 그러는데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 아닙니다. 그러지말고 아니고 이렇게 생각해버리면 자기의 결정과 나의 선택이 또 나오겠죠. 


주님께서는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이게 녹이다 녹. 먼지거든요. 주님이 주님의 자기의 의를 하나님의 의를 지키는데 우리보고 하라고 하지 않아요. 성령이 알아서 이걸 뜯어내요. 깎아낸다고요. 오래된 녹 낀 어선같은 것 페인트칠 다시 하려고 갈르잖아요. 성령께서 그걸 갈르는데 너무 아파요. 이빨 할 때 아픈 것처럼 아파도 너무 아파요. 들쑥날쑥 들쑥날쑥 난 것을 가지런히 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아파요 그래. 이렇게 된걸. 이거 억지잖아요 억지. 


우리 본성은 뭐냐 악마예요. 그런데 악마를 악마의 요소를 끄집어 내 버리면 이건 우리 전부거든요. 내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전부 아닙니까? 미래의 성공을 보는게 전부잖아요. 이걸 무참히 긁어내버리니까 우리가 얼마나 아픕니까? 욥 같은 경우에 또 제자들이 가는 길이 그래요. 그 아픈게 뭐냐 하면은 바로 주님이 죄도 없으면서 죄를 주님이 소유하고 있을 때에 아버지가 보시기에 그 위치가 아파야 될 위치인 것을 우리에게 경험케 하시는 겁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드라마 다모에 보면 그게 나와요. 아프냐? 나도 아프다. 뭐냐 하면은 같이 아파야 이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은 좋은 것만 같이 나눠야 사랑이 아니고 아플 때 같이 아파하는게 사랑인겁니다. 갑자기 다모 이야기 했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십자가 하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십자가 지는게 아니고 자기 십자가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그 주의 말씀 있잖아요. 그 말씀을 이미 우리는 이 범종 안에 완성되어 있어요. 완성되어 있는데 완성된 이 웅~~하는 완성되서 나와서 뭐라고 하느냐. 


십자가 갈 길과 그리고 뒤에 영생의 배경이 된 십자가 길에서 이게 나오게 되는 거예요. 나올게 될 때에 성도의 주변에 어디에 포위되어 있습니까? 어디에 휩싸여져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멸망의 세계에 그대로 녹아져 있는거예요. 이태리 풍듀인가 퐁듀라는거 있지요? 치즈 녹인데다가 빵을 찍어 먹는거 이런거 있잖아요. 우리의 삶은 성도의 삶은 뭐냐 하면은 멸망이라는 소스를 날마다 찍어먹는거예요. 날마다 멸망이라는 것. 


백날 해도 문 열고 나오면요 우리는 혹독하게 현장성을 경험할 수밖에 없어요. 그 현장성이 뭐냐 하면은 바로 나한테 이익되는 이익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찾아 다녀서 찾아 가려면 내가 결정해야 되겠죠. 나의 결정과 내 선택이 한시도 쉴 틈이 없어요. 내가 결정해요. 지하철을 탈것이냐 버스를 탈것이냐 그것도 결정해야 되요. 


사소한 것도 다 해야되요. 고양이하고 개 키우는데 고양이 먼저 사료를 줄 것이냐 개한테 줄 것이냐 아주 사소한 이것. 2:8로 할 것이냐 3:7로 할 것이냐 모든지 선택이에요 선택. 그런데 그 선택을 할 때 그냥 선택하는게 아니예요. 이 선택했을 때 뭘 기대한다? 내가 옳은 선택이 되가지고 나한테 유리한 선택이 되서 좋은 결과가 나올 때 미리 땡겨서 나는 즐거워하겠다는 그런 마음의 결심이 있는거예요. 그게 바로 가룟 유다의 심보라니까요. 그게 멸망받을 심보예요. 이거는 죽을 때까지는 이거는 계속해서 녹이 끼는거예요. 


그렇게 하게 해놓고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성령이 와놓고 그걸 뜯어내고 그걸 긁어낼 때 많이 아파? 좋은걸 기대했는데 남들이 놀리잖아요. 미워할 때 그냥 미워하는게 아니고 아이고 교회다니더니 꼴 좋다. 교회와서 예수 믿어서 챙긴거 뭐가 있나? 손가락으로 한번 해봐라 뭐 이런 식으로 얻어 챙기기는 지금 있는 것도 완전히 다 망가졌는데. 그럴 때 남들이 나를 비웃고 그 다음에 누가 비웃고? 내가 나를 비웃고.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확실하냐? 다시 또 다시 무슨 성? 확실성을 또 따지게 되요. 내가 지금 확실히 구원받았는가. 확실히 구원받으면 그 다음에 갈등이 뭐냐 하면 주님의 확실성을 갈등을 시키는게 아니예요. 


참 인간이 이렇게 나약해요. 주님이 확실하냐를 따지는게 아니고 주님은 완전한데 나와 주님사이에 믿음이 혹시 어설픈 믿음이 아니냐 이 말이죠. 이 흔들 다리에서 줄 두 개 다 끊어져가지고 한 번 더 건들면 와장창 다 끊어져 가지고 25년동안 예수믿고 지옥가는거 아닌가? 믿음이라는 것을 자꾸 상정하는 거예요. 이게 없는데 이게 없거든요. 


내 자유의 선택에 의해서 예수를 골라 잡은게 아니잖아요. 이거는 마귀가 시켰다 이 말이죠.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신거예요. 주님의 자율권이예요. 주님이 자기가 원해서 이렇게 범종안에 집어넣었는데 마귀는 뭐냐 하면은 우리를 똑똑하게 인식시켜 가지고 네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가 보라 하는거예요. 


고린도후서에 나오지만 너한테 믿음이 있는가 확신이 있는가 너 믿음이 있는가 돌아보라 성경 말씀 나오는데 그 성경말씀을 보면서 또 뭘 따지느냐 하면은 그걸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해요. 그래 확실한 믿음. 고린도후서 한번 봐야되겠다. 고린도후서 마지막에 13장 5절에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무슨 자니라?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이 말씀을 내가 지켜버리면 이건 나의 선택과 결정이 가미가 되요. 그러면 우리는 뭘 기대하느냐 하면 이 말씀을 지킨 상태에서 믿음의 성공을 내 모습을 그리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은 내가 나와 나를 뭐합니까? 격리시킨거예요. 그리고 그 사이에 나의 믿음으로 아주 잘못된 다리를 건설하는 겁니다. 불안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격리시키는가. 우리를 둘로 격리시켜 버려요. 하나는 멸망될 나와 이미 구원받은 나를 합니다. 멸망될 나를 뭐라고 하느냐 사도 바울은 육이라고 하고 구원받은 것을 영이라고 해요. 그러면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고 겉사람은 후패해야 되지요. 이렇게 격리하는 이유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효과예요.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없으면 십자가 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었다면 십자가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누가 느껴져야되요? 내가 죄인이것을 느껴져야 되겠지요? 그 죄를 느껴지는 것을 누가 담당했어요? 바로 내가 구원받으니까 내가 담당해야지요. 내가 바로 죄인이에요. 그리고 내가 뭐다? 의인이에요. 이게 말씀의 십자가 부활에 의한 나타난 두 가지의 양상이잖아요. 


아까 세상적으로 봤을 때 두 가지 양상이 뭐라고 했습니까? 멸망당할 자와 구원될 자 있고 개인적으로도 이미 격리되어 있으니까 우리의 육은 날마다 죄고 그 죄를 십자가 피로 끊어서 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육을 쓰시도록 마귀가 와서 육을 흔들도록 주께서는 허락해요. 허락해놓고 성령이 오게되면 이런 육이라 하는 것 에잇 육! 육 이라하는 것을 알게되면 우리 자신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미워하지요. 미워하는 그게 영적이라니까요. 남이 나를 미워하기 전에 먼저 내가 선점해서 선수쳐서 내가 나를 밉다 이 말이죠. 내가 나를 미우니까 세상에 두려울게 하나도 없네요. 그럼 우리의 희망은 더 미워지는거 밖에 없지요. 


어떤 아가씨가 남자와 사귄다. 결혼을 복음 안에서 결혼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지금 결혼하는 내가 밉잖아요. 그럼 남자를 만나서 본인이 더 미워지도록 하게 되면 복음적으로 결혼한거예요. 복음적으로. 왜냐하면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오면 오늘 저녁 뭐야? 오늘 저녁 라면 끓인거야 하면서 라면 끓이고 파 다지면서 막 우는 거예요. 양파를 잘라서 그러나 왜 울고 있어? 아니야. 라면 끓이는 내가 너무 미워. 


계락 톡 파 송송 라면 끓이는 이 라면 밖에 못해주는 내가 너무 미워. 걱정 하지마 내가 있잖아. 아니야 나는 그럴 자격도 그런 보호받을 그런 여자 안돼. 흑흑. 이런 여자 미친 여자. 거의 없겠지요. 결혼해서 네가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어 이런게 보편적인데 모든 걸 하면서 나같은 이렇게 못난 여자인데 당신같이 이렇게 남자를 만나게 해 주신 당신 앞에 별 면목이 없어. 아들 하나 낳아가지고 또 우내. 쌍둥이를 낳아야 할 걸 한명만 낳아서 미안해. 왜이래. 자꾸 미안하게. 그러면 한쪽은 다독거려주고 한쪽은 울기 바빠가지고 싸울 새가 없어. 뭐 자기 주장이 있어야 싸우지. 


남편이 아내가 미워서 가락지를 해주니까 아내는 그 가락지 팔고 머리카락 짤라가지고 나같은 여자는 백발되서 괜찮아 나 절에 갈 거야. 이렇게 나온다면 좀 과한 이야기지만 이건 뭐 싸울 이야기가 없지요. 극단적인 이야기에서.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면 그렇게 해야돼요. 나같이 이렇게 고린도후서 13장 보세요. 믿음이 있는가 보라. 있어야 믿음이 있지. 주여 나 같은건 믿음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육을 통해서 네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십자가가 표출된다니까요. 십자가의 공로가 부활의 능력이 너를 통해서 이렇게 표출되게 되면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범종 안에 들어있는 우리의 역할이고 우리의 할 일이 되는 겁니다. 


참 오늘 본문이 보통 어려운게 아니예요. 15절 16절 봅시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보세요 이게 바로 우리 조지는거 아닙니까. 왜 주님은 후딱 좋은데 가버리고 우리는 남겨두고 뭡니까 이게. 스승님은 좋겠다 제대하고 우리는 고생하고. 이게 뭐냐 이 말이죠. 그게 아니고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격리될 수 없는 관계. 


악마가 아무리 쑤시고 세상의 어떤 환란과 곤고나 어떤 권세나 이 권세는 악마를 보면 되요. 어떤 권세. 어떤 법적이고 제도적인 권세라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에서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기 위해서 철저하게 우리를 이용하는 거예요. 이미 구원시켜놓고. 이미 구원 시켜 놓고. 그럼 거지 나사로는 왜 죽었는가? 그건 그 용도가 그 용도니까 그렇게 했고. 거지 나사로와 12제자 다르잖아요. 12제자는 죽을 때 되어야 죽어요. 그런데 그게 죽음이 아니라니까요. 이미 장벽을 넘어버리면 죽는 것도 영생이에요. 영생의 일부가 영생이란 것은 우리와 끊어지지 않는 관계가 영생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관계가 유지되는 한 우리가 돌에 맞아 죽으나 어디 굶어 죽으나 그 자체가 영생에 표현입니다. 영생의 징후가 되지요. 증거가 되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세상 사는게 무섭다니까요. 철저하게 자기를 밟아야 되요. 자기를 밟을 때 요령을 알려드립니다. 밟는 요령은 아까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고 했잖아요. 자유가 우리에게 뭐 한다고 했습니까? 선택과 결정이잖아요. 이 선택과 결정은 항상 육에서 나와서 육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내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하지 않는거예요. 어떤 기대를. 


기도했다 뭐 헌금했다 내가 예수 믿는다 거기 그거 하면서 동반되서 나오는 어떤 기대함 희망 내가 이걸 함으로서 지금보다 더 잘된다는 어떤 성과를 아예 우리가 포기하는 겁니다. 생각하지 않는겁니다. 그러면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이 미래 자리는 주님의 몫이에요. 주께서 그냥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주시는 의의 열매들을 줘요. 그러면 우리는 아까 제가 인간은 결과만 받고 사는 거예요. 


그냥 소나기 오면 소나기 맞는 거예요. 소나기 오라고 기대하지 말고. 오면 태풍오면 태풍 받고 소나기 오면 받고. 우산 준비 하지 마세요. 우산을 준비하는 그 순간에 갑자기 가스 불 키다가 그냥 나올 수가 있어요. 우산 준비 해야지 하는것 조차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우산을 손에 못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손에 가졌더라도 전철 타다가 놓고 내린다 이 말이죠. 지하철은 비 안 오니까 그냥 다른거 하다가 전철 떠났는데 아차! 우산. 또 두리번 거리죠. 도둑질 할라고. 정신 나간 노인네가 그냥 놓고 갔다 싶어서. 흠뻑 생쥐처럼 비 맞는 것은 내가 원한게 아니잖아요. 


모든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 무시하고 주의 말씀에 응하는 차원에서 주께서 그렇게 한걸음 두걸음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경험이예요. 온 몸으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겁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우리가 내침을 받아요. 그 가운데 우리는 알아요. 이게 내 죄를 아는 것과 주님의 이 죄인을 용서가 섞여 있는 체험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완성을 위해서 지금 우리가 주님 앞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그 즐거움이 있다는 것. 감사가 있다는 것. 이렇게 이야기해도 세상가면 또 무서워해요. 또 무서워해요. 만약에 지금 546번을 타려고 하는데 지금 성경공부 했으니까 착한일 했잖아요. 그러면 가자마자 15초 내에 도달하면 주께서 또 오늘 주의 일 한다고 은혜 주셨네 이러는데 그 가자마자 15분 만에 온 차가 가버렸어요. 에이 씨....성경공부해도 소용없어요. 안 도와줘. 성경공부 한 후에 어떤 효과 같은걸 은근히 기대했는데 자기가 기대했는지도 몰랐죠. 차가 떠나니까 기대했구나가 들통난겁니다. 


우리의 소망은 세상을 떠나는 거예요. 이게 주님의 소망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되는게 이 땅에 있으면서도 떠난 것과 같은 관계와 효과를 우리가 맘껏 여기서 나타내고 발산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그다음에 15절 봅시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라고 되어 있지요.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아까 강의 처음에 한 이야기예요.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정상적이에요. 그런데 그 분이 왔다 다녀감으로서 세상 자체가 악이죠. 나쁜 짓 해서가 아니라 그냥 세상 악이고 악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악이에요. 


그 기능과 역할을 주님께서는 누굴 통해서 하느냐? 오늘날 세상에 남은 우리 성도를 통해서 그대로 그걸 하게 하세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자유적인 결단과 의지에 의해서 구원의 문고리 쥐었다고 좋아하는데 우리는 그딴거 필요 없이 구원됐다는 그 차이점, 그 차이점이 저쪽에서 완전히 저쪽에서 악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체험하고 목도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이해 못하니까 우리가 이해합니까? 그 사람들 하는 행동을. 전부다 이해하지요. 같은 속성이니까. 성령께서 와서 긁어내니까 우리가 딴 사람이지 우리가 평소에 사는 것과 똑같아요. 안 다치려고 하고 나를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 전혀 우리는 달라질거 없고 앞으로 달라지지 않을거예요. 80, 90되도 마찬가지예요. 성령께서 늘 이렇게 십자가의 구원을 감사케 하시는 겁니다. 


한 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세상은 악입니다. 그리고 계속 악이다 악이다 하는 것을 누구를 통해서 제자들을 계속해서 남겨둠으로서 분명히 하시는 거예요. 16절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이 말은 뭐냐? 너희들은 세상과 비교하거나 상대할 필요 없다. 그들은 범종에 붙어 있는 날파리들. 쓸데 없는 날파리예요. 뭐 귀농하겠다고요? 날파리 어떻게 하려고? 잡초 어떻게 하려고? 


도시 생활은요 세 끼 후딱 밥 먹고 난 뒤에 여가할 수 있지요. 농촌생활은 아침 먹고 잡초 뽑고 점심 준비하고 점심 먹고 날파리 쫒아내고. 하루 종일 그야말로 가장 동물에 가까운 밥먹고 자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여지의 여분의 시간이 남아있지 않아요. 제일 좋은 것은 귀촌하는 것이 아니고 돈 벌어서 도시에 사는 것. 병원 가까운데 사는게 최고지. 촌에 가서 여름철에 벌레한테 진드기한테 물려가지고 병 걸려가지고 인간은 이 세상은 아무것도 우리와 비교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 자신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에게 덮친 것은 예수님의 의고 예수님의 구원이고 하나님의 구원이지 내가 엮어낸 내가 영글어낸 나의 구원이 따로 없기 때문에 우리는 나만 그러면 는데 나만 그런게 아니고 세상도 별것도 없으면서 허풍덩어리 허세 덩어리거든요. 개뿔도 아무것도 없어요. 전부다 갇혀 있잖아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펜스 저 쪽에 생명이 있잖아요. 우리는 이미 십자가 펜스를 넘어서서 부활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상대할 가치가 없지요. 


호날두하고 메시라는 세계적인 선수가 동네축구 아저씨하는 조기축구에서 한골 못 넣었다고 그렇게 애통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놀 때를 같이 놀아야지. 놀 대상을 보고 놀아야지. 세상하고 맞설 이유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다고 우리 가결합시다. 안 믿는 식구들 안 믿는 가족들 무슨 소리해도 그 허세고 허풍인줄 알고 그냥 싱긋이 웃지요. 천지도 모르면서 날파리가 어디서 범종에 붙어가지고 웅~~웅~~~에밀레하고 그렇게 삽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에 말려든 것을 감사합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구원받으려고 나름대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얼마나 마귀한테 속아 넘어 갔습니까. 그것조차도 우리가 마귀와 한통속이기에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이제야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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