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두 개념 1808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8. 18. 22:07
2018-08-07 23:57:58조회 : 285         
두 개념 180807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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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121.♡.203.222)18-08-18 17:48 
강남-요한복음 17장 21절(두 개념)180807a-이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7장 21절 할 차례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우리의 희망사항이 아니고 예수님의 희망사항이죠. 그러면 이 본문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우리는 평소에 어떤 상황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까?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런 상황 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평소에 그냥 무심코 하나님 나는 이렇게 내 일이 이렇게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그런게 각자 있을게 아니겠습니까.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가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뭐 이런게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소망하는 그 어디에도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지를 않겠지요. 왜냐하면 날씨가 덥잖아요. 


지금 우리는 본성상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홀로 고립적으로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해요. 나한테 일어난 모든 것이 오직 나만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로만 이렇게 내 주변에 남아있기를 모든 것. 이거는 부자가 되든 가난하든 관계없어요.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가난한 가장도 아내든 자식이든 오직 나만을 쳐다보면서 아버지 최고 당신이 최고 그렇게 되는 그런 상황. 역시 우리 아버지니까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항상 나에게 존중과 존경을 마지않는 상황. 


비록 작은 테두리지만 식구 몇 명 안 되지만 그것이 그 가운데 그 좁은 구석에서도 내가 사람으로써 인정받는거요. 대우받는 것. 무시당하지 않고 우대받는 것. 내 존재 가치가 그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는 것. 그런 것을 원하지요. 결국은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거죠. 나로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거예요. 내가 나의 최고의 즐거움에 즐거움은 도리어 셋이 귀찮아. 둘을 잘라내고 나 홀로 우뚝 설 때, 그 때 그런 보람으로 달려갑니다. 


유치원 때 운동회들 다 해봤지요?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이기 때문에 사전에 협의해서 얘야 우리 1등 나란히 손잡고 들어가자 이러지 않습니다. 공책 차이가 나요. 두 권과 세 권의 차이. 세 권 얻으려면 마지막에 그렇게 해방을 했더라도 마지막에는 가슴을 내밀어서 일등을 해야 엄마가 아주 좋아하잖아요. 셋이 나란히는 우리는 못 견뎌 합니다. 셋이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 취향에 전혀 우리 성질에 전혀 맞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한 것은 이미 틀어진거예요. 우리의 소망하고 이미 틀어져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홀로 살수 없는 존재 만들어줄게 그걸 우리에게 마지막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겁니다. 그때가면 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셋이 하나가 되는거야 기쁘지 않니? 정말 즐겁지 않아? 뭐 이렇게 우리에게 윽박지릅니다. 우리는 하나도 즐겁지 않은데. 기쁘지 않은데 이것 때문에 교회 온게 아닌데. 윽박지르죠. 내가 스스로 최고가 되고 싶은 그게 목적인데 실낱같은 목적인데. 같이 있다는 것은 버겁지요. 


그러면 여기서 좀 더 이야기를 나가봅시다. 나 혼자 이렇게 있을 때에 혼자 있다는 것은 사람은 혼자는 못 살아요. 이발 누가 해줘야 되고 양복 누가 집어줘야 되고 누가 농사 대신 지어줘야 되고 고등어 누구 구워줘야 되고 잡아줘야 되고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어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못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혼자 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은 나를 수발들어야 되요. 나에게 전부 다 봉사를 해야 돼요. 


이거는 우리가 어릴 때 태어나서 한 다섯 살 때까지 우리는 많은 이런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배고프다면 젖 주지요 밥 주지요 옷 입혀주지요. 내가 필요한 것을 다 제공하는 겁니다. 어린 아이들 이렇게 6개월에서 한 24개월 한 30개월짜리 어린 아이를 이렇게 관찰해보세요. 관찰해보시게 되면 자기가 그 집에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집안에서 자기가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설칩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으면서. 전부 다 자기 의견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해요. 싫어! 이런거요. 


애들이 제일 먼저 하는 단어가 뭐냐 하면 엄마 다음에 배우는 단어 싫어! 입니다. 독일어로 하면 nein 영어로 하면 no. 자기가 그 집 안에 부모가 둘이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하나 나았으면 ‘1’자가 작아요. 작은데 어느새 2+1이 ‘2’보다 숫자가 더 커.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아주 당당한 구성요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30개월 지나면 숙제 들어오죠 어린이집 가야 돼죠 해서는 될 것 해서는 안 될 것 이렇게 나뉘니까 ‘1’이 점점 작아지죠. ‘1’이 작아지면서 균형을 맞혀들어가는 겁니다. 균형 맞출 때 ‘2’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1’이 들어간다는 것을 유념해야됩니다. 


오늘 본문에 아까 오늘 본문 읽어봤지요. ‘3’입니다. 아버지 있고 그 다음에 누구입니까? 예수님 있고 그 다음에 성도, 제자.. 성도라고 합시다. 분명히 1,2,3이잖아요. 분명히 3인데 이 3이 그냥 3이 아니예요. 여기에 3이 그냥 3이 아닌 것이 2에다가 1을 첨가한거예요. 그럼 2가 뭐냐 하면 2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만이 두 분이 2가 되어서 하나가 된겁니다. 두 분이. 거기에 나오잖아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먼저 2가 성립이 됩니다. 


2가 성립되고 그다음에 1이 들어갈 때 이 본문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궁금한게 있어요. 내가 2안에 내가 1의 작용으로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말입니다. 어떻게 그걸 내가 파악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예수님 2+1로 해서 전체가 3이고 이 3을 뭐로 바꿉니까? 1로 바꾸는 거예요. 3을 1로 바꾼다. 이렇게 하면 기존의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은 목사님 지금 삼위일체 이야기 하는 거예요? 라고 갑자기 어떤 뭐 제자훈련 할 때 들은건 있어가지고 삼위일체에 대해서 거론할거예요. 


목사들이 삼위일체를 이야기하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자기가 계속해서 뭐로 남겠느냐 하면 스승 짓 하려고 스승 짓. 선생노릇을 계속 하고 싶어서 삼위일체를 계속 거론하는거예요. 너희 이거 모르지? 교수 아마추어야 이거 모르지? 사장님 아마추어야 이거 모르지? 그리고 판사 의사 아마추어들아 너희들 백날 해도 너희 이거는 모르잖아 삼위일체. 삼위일체 해가지고 지금 갑질 하고 있는겁니다. 삼위일체. 그럼 성경에 삼위일체가 있느냐 없느냐.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게 없어요. 삼위일체라는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라는 그 단에 자체가 용어 개념 자체가 없어요. 없는데 왜 삼위일체를 이야기 하느냐. 솔직하게 말해서 성경에 대해서 뭐가 뭔지 정리가 안 된다는 거예요. 정리가 안 되면서 마치 정리된 것처럼 소위 교회 지도자급이 교인들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은 아마추어들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이 삼위일체. 본인은 정리가 안 됐는데 또 정리가 안 됐다 하면 그 교인들은 목사님 말씀 듣고 천당 가려고 했는데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러면 그건 안되잖아요. 


그럴때는 삼위일체 알면 천당 내가 보장해줄께요 이러면 아 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거든요. 안정감을 주면 그 교회 계속 다닐 가능성이 높아져요. 그래 이 교회가 나의 영혼을 제대로 살리는구나. 그때 뭐냐 하면은 바로 다른 것보다도 삼위일체를 아시면 삼위일체가 모든 신학의 절정이고 종합이고 이게 끝판왕입니다. 삼위일체 아시면 모든걸 다 안겁니다. 이 목사도 삼위일체 아는데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이런 노하우를 제가 어찌 갖고 있겠습니까. 특별히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는 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 숨겨진 하나님의 신비로움 또 신비로움을 집어넣어야돼요. 


신비로운 삼위일체를 제가 여러분들에게 해서 삼위일체 안에 있으면 그것이 정통 보수 정통이고 삼위일체 삐딱하면 이건 이유도 없이 이단입니다. 한국의 교인들이 이단 되기 싫어가지고 이단 되면 지옥간다 하니까 벌벌 떨면서 예 삼위일체 그대로 해주세요. 설명해 주세요. 이렇게 하거든요. 문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거예요. 삼위일체 자체가 없고, 삼위일체가 성경이 어떻게 모순되는 구절들을 하나로 모을지를 몰라서 얼렁뚱땅 그냥 추상적인 있지도 않은 개념 하나를 덜렁 내놓은게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회사가면 사장님이고 집에 오면 아버지고 교회가면 장로님이고 삼위일체. 그거 삼위일체가 아니고 그거는 이단입니다. 그리고 또 햇빛은 빛이 있고 열이 있고 또 에너지가 나오고 그것도 똑같은 이야기예요. 어떤 사람은 머리가 3개인데 몸통은 하나다. 이거는 괴물이에요. 물이 얼면 얼음 되고 그 다음에 뜨거우면 수증기 되고 그냥 물이면 물입니다. 이거는 수증기 될 때 물은 없고 얼음 될 때 물과 수증기는 없어지고 수증기 될 때 물 없어져요. 


그래서 이거는 다신론이 되어 버려요. 2면 2고 3이면 3이예요. 무슨 억지를 부려서 3을 1로 만들려고 하고 1을 3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말되 안 되는 소리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은 좌우간에 없는거예요. 뭐 사도행전에 보면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아들과 아버지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아버지 이름으로 세례 줬잖아 그래. 세례 주잖아 성경에 보면 세례 주잖아. 그런데 그것이 하나고 그분이 하나잖아요. 그게 왜 삼위일체예요? 


그런데 그게 삼신이 되면 곤란하고 삼신이 되면 왜 곤란한데요? 아버지가 삼신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삼신 되면 왜 곤란한데? 하늘에서 걱정 안 하고 있는데 땅에서 걱정한다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하면요 교회가 하나님은 걱정도 안하고 있는 것을 교회가 걱정해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가 걱정을 한다는 자체가 뭐하고 뭐하고 의견이 안 맞다? 하늘의 뜻과 지금 지상의 교회의 뜻과 지금 틀어져서 안 맞는 거예요. 안 맞으면 교회 자체가 이단이 되는 거예요. 교회자체가. 


아버지께서는 그야말로 성경 그대로입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서 일 하시잖아요. 아버지께서 옆에 예수님 계시고 아버지 옆에 오른쪽이라고 하는 것은 심판의 자리입니다. 원래 그 저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그 예수님이 어느 자리에 올라가냐 아버지의 자리에 올라가냐 예수님이 아버지의 옆자리에 올라가죠. 옆자리는 뭐냐 오른손의 자리  아닙니까 그 옆자리에 올라가야 요엘이 완성돼요. 요엘이 뭐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요. 


하늘에 불이 떨어진다는 것은 뭐냐 불심판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 구약에서 불심판 날 때 유일하게 불심판 받은 도시가 어디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죠.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 몇 명 등장했어요? 두명 등장했잖아요. 오순절날 예수님 승천할 때 천사 몇 명 등장합니까? 두 명 등장하는거예요. 수상해요. 작살난거예요 이제는. 그러고 난 뒤에 베드로가 전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거예요. 불이 떨어진다는 말은 불이 떨어지는 위치에 누가 가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셔가지고 지금 본격적으로 구약의 예언대로 이 세상을 전면적으로 전반적으로 불심판을 하시기 위해서 거기 지금 거기 계시고 있는 겁니다. 심판주가 되시는 거예요. 


심판주가 된다는 그 소식 심판의 소식을 불의 언어로 이야기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뭐로 왔다? 불의 혀같이 온거예요. 혀의 기능이 말하는 기능이거든요. 그 불의 혀. 전반적인 전체적인 심판입니다. 뭐 판사 의사 소용없어요. 목사 장로 소용 없어요. 불 살라버리겠다는데 뭐. 집에 혹시 과수원 하십니까? 과수원하든 뭘 하든 의미 없다니까 의미 없어요. 불심판 앞에는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베드로나 사도바울이 이야기 한 것은 딱 이거 이야기 한겁니다. 회개하라. 끝이에요. 회개하라. 회개하라가 반성하라가 아닙니다. 주제파악을 하라 이 말이죠. 네 본성을 파악하라. 


내가 어쨌길래? 너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너희들이 죽은 예수를 누가 살렸다란 말이죠?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렸다는 말은 죽은 예수님을 근거로 해서 전면적인 이 세상에 대해서 끝장내겠다는 것이 마지막 때의 아버지의 뜻이에요. 그러면 그 아버지의 뜻과 하나가 됐다는 말은 우리는 똑같은 뜻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가담시켜준거예요. 우리 한편이다. 한 편 먹은거예요. 한 편 먹은거예요. 아버지 뜻과 예수님 뜻이 우리 한 편 먹어서 하나라는 말을 한겁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된 것처럼. 


존재로 삼위일체로 표현하는게 아니고 기능적으로. 존재가 아니고 기능적으로 움직여요. 존재 있음이 왜 아니냐 하면 이미 인간들이 자기가 여기 있음을 가지고 확정지었잖아요. 개념이 있음이라고. 있다라는 개념을 인간이 사용하고 있잖아요. 있다라는 개념을 사용하게 되면 인간이 이걸 사용하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이 개념을 사용을 안 해요. 인간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삐딱선이에요. 항상 하나님은 인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삐딱하게 나와버려요. 하나님의 계심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 계심은 이방인들도 아는거예요. 


로마서 1장에 있잖아요. 너희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이 계신걸 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잘 아는 사람이 야고보서 2장에 누가 나옵니까? 누가 하나님이 한 분인걸 누가 아십니까? 귀신들도, 귀신이 귀신같이 알지요. 귀신이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귀신이 뭐까지 아느냐 하면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귀신이 예수님 아는거야 우리가 상식인데 우리가 깜짝 놀란만한 것은 바로 사도바울을 안다는 겁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을 맞먹으려고 했잖아요. 우리와 똑같은데. 그런데 귀신나라에서 사도바울이 유명하다는 말은 사도바울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에요. 사도바울이 보통내기가 아니다 귀신나라에서. 보통내기가 아닌거예요. 


그래서 오늘 그 강의 내용이 지금부터 복잡해지는 겁니다. 왜 복잡해지느냐 하면은 마귀나 예수님이 아는 안목으로 성경을 다시 봐야 되기 때문에. 그걸 하려면 우리는 성경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가를 거쳐서 올라가야 되요. 이 작업이 정말 힘든 작업입니다. 힘든 작업이지만 해야죠 뭐. 해야죠. 


자, 아까 제가 언급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출발은 뭐부터 한다고 했습니까? 있음부터 시작해요. 있음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어떤 결과를 기대했을 때 뭔가 소망할 때 이 소망에서의 나란 있음이 빠질까요? 여기 포함될까요? 반드시 포함되지요. 기도할 때 기원이나 기도를 할 때 내 문제 빠지고 기도합니까? 반드시 기도의 응답 속에 내 것이 들어갑니까? 내 것이 반드시 들어가잖아요. 반드시 내 것이 들어갑니다. 내 것이 들어가서 내가 이정도 되면 좋겠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는거예요. 어떤 결과에 대해서 내가 여기서 이동하는 거예요. 이 소망 속에 내가 근사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있음과 있음 사이에 여기서 무엇이 필요하느냐 하면 여기 시간이 소모가 되요 시간이. 시간이 소모가 되거든요. 시간이 소모가 되면 이 결과 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초조하게 한 이틀을 기다렸다고 합시다. 이 2일 동안 우리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 과도기로 봐요 과도기. 뭔가 내가 되고자하는 꿈, 그리고 그 꿈을 프로젝트 했던 나 그 사이에 지금 중간과정 과도기로 봐요 과도기.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는 겁니다. 아주 소망이 코 앞에 있다고 확신하고 믿습니다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무엇이 여기에 개입됐느냐 하면 시간이 개입되는 거예요. 시간이 개입됩니다. 


시간이 개입되면 아까 우리가 봤던 본문 아버지 안에 예수, 예수 안에 나 이야기에는 뭐가 빠지느냐 하면 시간 자체가 거기는 성립이 안돼요. 시간은 들어갈 자리가 전혀 없어요. 아버지하고 아들관계가 시간 흐른다고 해서 아버지가 삼촌되고 조카되고 이런 법은 없잖아요. 관계라는 것은 족보관계는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서로 처음관계가 계속 갑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뭐 오촌이 육촌 되고 칠촌이 팔촌 되고 그런거 없지요. 삼촌 되고 이런거 없지요. 


물론 막장 드라마 보면 그런거 있지만. 시누이가 엄마되고 엉망진창이 되고 출생의 비밀 때문에 혼선이 일어나고 그렇게 하겠지만. 자기하고 자기 사랑하는 여자가 아이가 있는데 보니까 나중에 보니 자기 딸이다. 원수. 기가 차지요. 그것도 의사 몰래 자기 정자 가지고 시험관해가지고 아기 낳아가지고 우연히 만나가지고 자기 딸을 만난거예요. 족보 완전히 이상하게 되어 버렸는데. 주님께서 하나라고 했을 때는 뭐를 빼느냐 하면 하나가 되려면 이 시간이 둘둘 감겨있는 이 시간을 나에게서 이걸 빼고 집어넣는 겁니다 시간을 빼고. 그러면 원래 알던 족보대로 가는 거예요. 우리가 몰랐던 족보. 양자지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그래서 원형이 뭐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그 관계를 2라고 했잖아요. 아버지와 아들 2잖아요 둘이니까. 이 2를 어디다가 적용시키느냐 하면은 새로운 3번째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들어올 때 이 3번째에다가 이 2의 여기에서 성립된 관계에다가 그대로 이걸 설치해 버려요. 이 관계를 그대로 설치해 버립니다. 설치해 버리면 성도가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살면서 유지했던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그대로 여기서 재현되어야 해요. 그대로 재현됩니다. 이게 구원의 방식 구원의 공식이에요 구원의 공식. 언약의 공식 구원의 공식입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세 전에 이미 이야기가 끝난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다 하거든요. 예수 안에서 예정된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 예정된 것을 그것을 그대로 성도에게 적용을 시켜버립니다. 그럼 우리는 그냥 들어가면 되겠네 하지만 그냥 들어가면 되는데 여기로 들어가면 되는데 문제는 우리라는게 없어요. 들어갈 우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대로 관계대로 이 세상에 와서 어떻게 됐습니까? 죽으셨잖아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죽은 인간이 나는 아버지하고 예수님 끼어들어야지 들어갈 수는 없는겁니다. 


옛날 60년대 지금도 생각납니다 60년대 많이 나왔을 때 그냥 아이들을 양육이 아니고 그냥 방목하듯이 그렇게 키울 때에 방 두 칸도 옛날엔 부자였지요. 부자라 치고 방 한 칸에 이렇게 주무시고 나머지 방 한 칸에 세 명 네 명 잤잖아요. 한 방에 잤다고요. 그러면 춥다하면 머리 좋은 애들 중에 머리 좋은 요령 부리는 애들 같으면 이불 하나 주면 이게 3인용인데 3인용이니까 분명 하나는 발길에 차여서 새벽 두 시 반에 그러면 걔가 머리 나쁜 애 같으면 그냥 억지로 형들 안에 끼는데 머리 좋은 애 같으면 베개 들고 옆방에 가가지고 끼어 들어가면 돼요. 아빠 엄마 가운데. 그걸 내칠 가혹한 부모는 없거든요. 그 사이에 중간에 꼭 끼어서 따뜻해놨겠다 자면 된다고요. 


성경을 보는 우리 인간은 성경을 보면서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 계시니까 우리가 그 사이에 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살아있는 내가. 뭐 어떻게? 산 채로. 60년대 어디 뭐 그런 처지가 아니예요. 우린 그런 처지가 아니예요. 낄 사람이 없어요 여기에.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없는데서 없어도 마땅한데 없어도 되는데 없는데서 있게 만들겠다는 것이 작전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만드는 것. 없는데서 있게 만들려면 소위 없는 것을 무엇으로 바꿔야 돼요? 모든 있음을 모든 없음으로 다 바꿔야 되겠지요? 존재를 다 죽은 자로 만들어야 되요. 


구원해주세요 천국보내주세요 랄랄라 입 다물어! 다 없애요 전부 다 입 다물어 전부 다. 그래서 전부 다 그걸 다 해골로 만들어요. 에스겔 30장 전부 다 해골로 만들어요. 이중에 해골 안 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가까운 사람도 있고 먼 사람도 더러 있지만은 모르지요. 순서야 모르지요. 전부 다 죽어줘야 되요. 그럼 죽기 6초전에 주여 사도신경 외웁니다 주여 구원해주소서 벌써 내가 오년전부터 예수 믿은거 아시지요? 이 주둥이는 나불나불 아직 살아있어. 그러면 그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죽기나 해라. 죽기 5초전에 아멘 아멘 아멘. 그냥 죽어 그냥 제발 나대지말고 죽어 나대지말고. 나 여기 있습니다 땅땅 티내지 말고 그냥 죽어. 진작 티내지 말고 죽을걸. 꼭 끝까지 뭐 하나 붙들려고 하는 거예요 붙들려고. 


지금 돌아가시려고 정신도 없는데 주기도문 외우십니까? 외우시면 합격이다 하고 옆에 목사는 구라를 떨고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중 염불하는 것처럼 찬송가 틀어놓고 해보세요. 치매 걸리면 찬송가 틀어놓으면 대번 끄라고 합니다. 정신없어요. 정신없으면 장기기억에 남기 때문에 기억 안나요. 인간은 끝까지 물에 빠질 때 또는 모래 늪에 빠질 때 처음에는 몸이 들어가면서 점점 머리카락이 마지막에 나오잖아요. 사람은 머리카락에 기대건다니까요. 머리카락은 보이겠지. 보일랑 말랑. 빨리 집어넣어~!! 없애버려요.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구원 받을 사람 있다 없다?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걸 한마디로 이야기해요. 이걸 ‘육’이라고합니다 ‘육’. 이걸 육이라고 합니다. 육은 요한복음에 육은 육이고 육은 육이다란 말은 절대로 하늘나라에 갈수 있다? 없다? 없다. 있어도 인간에게서는 없는 나라로서 찾아오는 겁니다. 이미 인간 나라에 종교 백화점에 너무 많아요. 각양 입맛대로 취향대로 모든 하늘나라가 구비되어있어. 어떤 골프장 분수 오르는 하늘나라는 이슬람 쪽이에요. 골프장은 여호와의 증인, 맨션아파트는 개혁주의 장로교. 맨션아파트. 그래도 맨션아파트 못살아서 환장해요. 층간소음 얼마나 심한데. 관리비 나오는데 그게 뭐가 좋다고 맨션아파트. 남진 같으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그런 식으로 천국을 그리면 사람은 인간은 뭘 보느냐 하면 내가 존재할 때 내가 살 때 사람은 혼자 사는게 아닙니다. 그리운 사람 좋아하는 사람 내 새끼 내 자식과 엮인 채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자아입니다. 그런데 자기만 혼자 덜렁 천당가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기가 목숨 바친 하나밖에 없는 딸은 지옥가고 거기 천국가도 천국이 재미있겠습니까? 천사가 찾아와가지고 김성도님은 왜 이렇게 시름에 잡혀 있습니까? 천국은 좋기는 좋은데. 천국 뭐 불편한거 있습니까? 돈까스 시켜 드릴까요? 그게 아니고 내 딸이 지옥에 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내가 양파 뿌리 하나 줄테니까 파뿌리 줄테니까 일단은 기회줄테니까 파뿌리 가지고 지옥갔다 올라오시기 바랍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 입니까? 불교 이야기 아닙니까. 그게 불교에 나오거든요. 불경은 인간이 엮였다는 것은 그냥 엮인게 아니고 인연에 의해서 모든게 엮여있다는 거예요. 저 사람 죽으면 따라 죽겠다는 말은 혼자 몸만 있다고 내가 아니예요. 그동안 울고 웃고 싸우고 다투고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내용물로 꽉꽉 차있습니다. 만두는 그냥 밀가루 덩어리가 만두 아니잖아요. 안에 속이 차 있잖아요. 그 속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평생동안 계속해서 누적된 기억들이 있어요. 그게 자아란 말이죠. 그러니까 천국 간다는 것은 단체로 간다는 거예요. 나 좋아하는 사람, 나한테 잘해줬던 사람, 나한테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 나 부도 났을 때 도와줬던 사람, 그런 사람이 가지. 


만약에 가고 있는데 같이 천국 가고있는데 보니까 나한테 욕했던 사람, 나 비난했던 사람, 나 뒷담화했던 인간들 저런 인간들 천국 가면 나 안 간다 차 돌려라 씨. 같이 못 살겠다. 인간은 천국을 본인이 구상을 해요. 누가 주인공이다? 자기 본인이 자기 행복이 주인공이 되어서 천국 만드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 장사가 되요 교회라는게. 천국에 대해서 사람들이 몰라요. 그냥 천국 간다만 이야기해요. 무슨 나라입니까? 본인도 몰라요. 너보고 나 보고 일이 잘된 편이예요. 왜? 죽어도 모르고 있으니까. 무슨 구라를 쳐도 다 통하니까. 


천국은 아무도 못 갑니다. 구원의 기회는 애초부터 없어요. 없으니까 포기하면 돼요. 안가면 돼요. 모르고 안가면 되고 죄 지었다 하면 지옥가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이제 두 번째 어려운거 나옵니다. 첫 번째 어려운거는 뭐냐 하면은 인간에서 시간을 빼버린다는 겁니다. 시간을 빼버리면 기억도 빠지지요. 시간을 빼버리면 나라는 존재는 존재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왜? 시간을 통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시간 자체가 존재가 없어요. 그러면 나는 뭐냐?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하나의 순간이죠. 시간이 아니고 순간이죠. 90년 살아도 순간이에요. 


90년 사니까 오래 산 것 같지만 죽고 난 다음에 그 다음날 생각해보세요. 나 살았나 싶어요. 후딱 가버렸어요. 뒤 보면 내가 살아온 것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루 살면 하루가 삭제되어 버려요. 하루 진격하면 어제 살았던 하루치가 또 삭제되어 버리고 남는 것은 우리 기억만 남아 있어요. 기억은 허구라니까요. 기억 어디 써먹을라고. 아무 소용없어요. 실제로는 내가 이미 사라졌는데 이미 30대 40대는 이미 사라졌는데. 열 몇 살 때 이뻤던거 그거 없어요. 기억할 뿐이지요. 그렇잖아요. 


남편들이 40년 50년 살고 아내보고 너 처음에 결혼할 때 그렇게 이쁜데 그 이쁜 너 어디 갔어? 이렇게 하면 아내가 그러죠. 당신도 만만치 않아. 결혼했다는 것은 기억이고 기억만 남아있지 실제로는 그 이뻤던 아가씨 멋있던 총각은 지금 옆에 있잖아 옆에. 이럴거 같으면 결혼 안했다. 그건 지금 생각이지 지금 생각. 그러니까 사람들이 남자가 이혼하고 난 뒤에 꼭 30세 이하.... 미안합니다. 


존재에서 시간 빼는거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처음부터 다시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다음에 성도가 들어갑니다. 들어갈 때 이상하게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 들어갈 때 여기 이상하게 여기에 성령이 안 나오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여기에 누가 들어가냐 하면 성령이 들어가요? 성령이. 그러면 성령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요? 성령의 자리에 성도가 들어가는 겁니다. 성령의 자리에 성도가 들어가게 되면 성도라는 것은 아까 있다 없다 했어요? 성도 자체는 없어요. 없으면 이거는 하나의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의 기능이 된다고요 기능이. 


그 기능은 어디서 나오느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여기에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여기서 뭐가 결과물이 나와요. 이 결과물이 뭐냐 하면 바로 없는데서 나온 결과물, 곧 ‘성도’입니다. 곧 성도예요. 성도는 성령이 임해야 성도가 되요.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사람이 여기 있고 성령이 있어 이게 합치면 성도된다는 말이 아니예요. 그런데 이쪽에는 사람이 있다 없다? 없는거예요. 없는데 성령께서 성도 자리에 누굴 집어넣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육체를 집어넣어요. 예수님의 몸을 집어넣는다고요. 


왜냐 처음에는 그 요단강에서 성령 받을 때는 예수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한테 있어요. 성령이 예수님을 부린다 할 수 있어요. 아버지의 뜻대로 활용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아버지 오른쪽에 있고 부터는 거기서 예수님께서 이제 성령을 부리시는 거예요. 보내시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세례 요한이 자기가 알아요. 하나님께 음성을 들었어요. 성령을 받으신 그분이 그다음에 성령을 주시는 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누가 바쁘냐 하면은 성령님이 바빠요. 왔다갔다 왔다갔다 성령님이 바빠요. 


성령님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대로 언약을 완성케 하시고 완성한 것을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과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는 뭐냐 하면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이렇게 했어요. 예수 안에서. 기능이 이 기능이 나중에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가시화되고 실체화 됩니다. 기능이 존재가 등장하는데 이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쉬워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셨잖아요. 자기 뜻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그러면 십자가 지실 때 아버지가 예수님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훌륭하다 잘했다 이랬습니까? 아니면 아버지한테 버림 받았어요? 버림 받았지요. 그거는 예수님의 육신에 뭐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잖아요. 죄를 짊어졌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아버지의 태도는 단호합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또는 내어버렸다고 다른데는 내버렸다고 되어 있어요. 내어버렸다면 거기서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죄’라는 것이 성립이 되요. 최초로. 어렵더라도 그냥 들으세요. 


그러면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죄라는 것이 성립이 되면 지상에 있는 이 인간사회에서의 죄의 개념은 따로 있겠어요? 없겠어요? 인간들끼리 소통되는 죄의 개념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지요. 있다 하세요. 있지요? 그런데 그 인간들의 죄의 개념은 뭐냐 하면 선악 지식에 준해서 죄의 개념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선악지식의 죄의 개념과 선악이 선악과를 따먹지마라란 그 취지도 모르는 채 진짜 원래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라했던 그 차원에서의 죄의 개념이 이 지상에서 두 개가 생겨버린거예요. 인간들이 인간들끼리 윤리, 도덕적으로 죄라는 것과 주님께서 아버지하고 창세전에 아버지하고 관계에서 완전하게 까발려진 그 죄의 개념이 두 개가 되어 버린겁니다. 


그러면 죄의 개념이 두 개지요. 죄의 개념이 두 개라면 무슨 개념이 두 개냐면 죽음 개념도 두 개예요. 이 땅에서 죽음이라하는 것은 숨 끊어진게 죽음이죠. 그러면 아버지 앞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죽음의 개념은 뭐냐 하면 아버지로부터 관계가 끊어지는 것. 예수님만 아는 내 말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만 아는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 바로 죽음이에요. 이렇게 하면 그럼 어느 놈이 알겠습니까? 아무도 모르지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죽은거예요. 예수님만 아는 아버지를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그게 죽음이 되고 죄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는 해골이 되어야죠. 늙어 죽어야 되요. 직업이 목사인 것과 관계 없이 죽어 마땅한거예요. 이걸 이런 사실을 알게된 것을 기뻐해야 됩니다. 자기가 죽어가는 것을 기뻐해야 돼요. 아 당연한거구나. 착한 일하면 더 살 줄 알고. 그게 착한 일 하면 산다는 것은 선악 인간들이 소통하는 선악입니다. 선악구조에서 나온 죄의 개념과 이 죄값에 죽는다는 개념, 이거 전부 엉터리거든요. 죄에 대해서 저주 받아 죽는다는 겁니다. 아닙니다.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 죄라는 것이 개념이 추가적으로 주입된거예요. 너 죽는다. 왜요? 죄. 이렇게 되는거예요. 


만약에 죄 때문에 죽는다면 착하게 살면 안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 것은 인간세계에 하나님이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진리가 아니예요. 다시 정리합시다. 죄의 개념은 몇 개다? 두 개라고 했어요. 죄의 개념은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버림받는게 그게 예수님만 아는 죄의 개념이에요.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죽으리라 했던 그 본래취지도 그거예요. 십자가 때문에 선악과 생명나무도 있다. 그 다음에 죽음 개념은 뭐냐? 멀쩡하게 살아서 운동하고 탁구 쳐도 이미 그건 죽은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죽은거예요. 십자가 예수님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인가 나오잖아요. 14절인가. 


이미 죽은거예요. 제가 수련회 때 했잖아요. 죽은 부모가 죽은 자식을 잘 키운다고. 성공해봐야 죽은거예요. 부모가 나이 60먹어서 가슴 아픈 것이 자기 늙은 것은 가슴 안 아픈데 자식이 늙은 것이 그렇게 가슴이 아파요. 그것보다 더 가슴 아픈게 자식이 늙어서 장가를 못 갔다든지. 늙어서. 시집 장가 못 간게 가슴이 더 아파요. 엎친데 덮친 격. 아이고 이 철딱서니 없는 것 더 늙으면 너 안 된다 안 팔린다. 나 혼자 살면 되잖아. 아이고 저 철딱서니 없는거 봐라. 이태리 남자하고 좀 살다가 나오고 프랑스... 


자, 첫째 시간 끝나기 전에 죄에 두 종류가 있어요.

뭐냐 하면 선악에서는 뭐냐 하면 나쁜 것이 죄가 되요. 나쁜 것을 죄라고 해요. 선악구조에서는.
이 자체가 틀린거예요. 선악을 선이 뭐고 악이 뭔가 아니까 나쁜 것은 죄다.
그럼 선한 것은 죄 됩니까? 선한 것은 죄가 안 되어 버리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뭡니까. 선악을 알았다는 자체가 이걸 전체 합쳐서 죄인데
인간은 고집도 그런 고집이 없어요. 꼭 이 선을 아는데 착한일 하는데 죄가 된다고? 
이 말도 안 되게 우기면서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야기 하는 것은 두 번째입니다. 뭐냐 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첫째 해봅시다. 잘못된거거든요. 나쁜 것이 죄라면 예수님께 우리는 뭘 갖다줬다? 의를 갖다주기 때문에 이제 의를 받은 한 나는 나쁘지 않다 이런 논리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1번의 경우. 거의 모든 교회가 이거지요. 여러분들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말티아’ 알아? 꼭 모르는 것들이 꼭 프로인 것처럼 아마추어 기 죽일라고 앞에 아마추어들 있잖아요 돈 많은 장로들 기 죽일려고. 하말티아는 과녁을 쏠 때 양궁 나옵니다. 해가지고 표적을 빗나가는게 하말티아라고 하여튼 참 구라도 구라도 그게 바로 죄예요 그게. 


표적을 맞추는게 그게 죄라니까. 표적을 맞추겠다고 활을 제대로 맞춘게 그게 죄예요. 왜냐하면 이미 선과 악을 안다는게 죄이기 때문에. 하말티아 그걸 아는게 죄예요. 그게 구원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더욱 더 지옥으로 굳혀지지요. 주님께서 원하는 죄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나쁘다는게 아니고 네가 별 볼 일 아무것도 아닌거예요. 아무것도 일단 이것을 제로로 보세요. 0. 사실은 제로가 아니고 사실은 마이너스예요. 실제는 마이너스인데 일단은 나쁜 것을 안다 존재를 1로 치고 아무것도 아니다 0예요. 없음. 내가 아무것도 아닌거예요.

어제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였어요. 왜? 지나갔으니까.
내일되면 오늘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왜?  내일되면 오늘이 없으니까.
우리는 매 순간 매 순간 아무것도 아니예요.

오늘 방송을 보니까 62살 남자인데 하루에 딸국질을 13000번 하는 사람이 있답니다. 13000번. 딸국 딸국. 하루에 13000번 그것도 9년 동안. 우리는 매일같이 딸국질하고 있어요 매일. 아무것도 아니야 딸국. 아무것도 아니야 딸국.
 

그런데 우리의 기억은 있어가지고 그걸 연결시키는 거예요. 아무 것도 아닌데 아무 것도 아니지만 여기 있으니까 뭐가 된 냥. 그러니까 누가 와서 졸음운전 해서 박아가지고 내가 죽게 되면 아이고 그 사람 죽었는데 아깝다는거예요. 아니예요. 하루치 인간 박은거예요. 사람은 주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도 목숨을 살수 없습니다. 하루살이를 죽인거예요. 50년 짜리를 죽인게 아니고 하루살이를 죽였다 하루. 하루살이를 죽였으니까 우리는 오늘 살고 잠잘 때 아휴 오늘 치는 다 했어요. 오늘 치를 더 이상 욕심내지 맙시다. 잠잘 때 오늘 운명한다 생각하고 그냥 주무시면 되요. 그걸 또 새벽 1시에 깨 가지고 운명했는지 안했는지 또 쳐다보고 천사 오는지 그것도 감시해가지고 또 나 안 갈란다 그런거 하지말고 지금 아직 때가 아니다 버티지 말고 그냥 오늘 염려는 오늘 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 염려해요. 내일 염려해요. 


그날의 염려는 뭡니까? 그날에 족하다는 거예요. 지금 하루살이 보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루살이 보고. 주께서도 억울해. 본인이 키웠는데 인간들은 자기가 어제부터 내가 나를 키웠데. 월급 받아가지고 자기가 갈비 먹고 살 쪄가지고 잘 먹어가지고 오늘도 통통하게 살았데. 그러니까 주님 모든 영광을 누가 뺏어갑니까? 인간이 다 뺏어가요. 자기가 모든 영광과 찬송과 찬양을 자기가 아주 강탈해 버립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 찬양과 영광이 되려면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인간을 1을 뭐로 바꾼다? 0로 바꾸고 세워놔야죠. 너는 없던 자야. 사실은 없던 자가 죄인이지만 일단은 없던 자로서 딱 서게 됩니다. 없던 자가 세워지면 나는 없기 때문에 누구만 있습니까? 주님만 계시잖아요. 


주님만 계시기 때문에 나는 그 앞에서 나는 없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주님의 기능의 결실물이 되거든요. 그 다음에 있는 것은 바로 주님에 의해서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바로 성령의 자리, 성령께서 원했던 자리. 성부 + 성자 + 성령 이 성령의 자리에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로로 성령의 자리에 없던 자가 성령의 자리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없던 자로 이렇게 들어가는데 들어가면서 이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있음에서 주께서 있음을 뭐로 바꾼다고 했습니까? 


없음을 하면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악마의 반발이 나옵니다. 그동안 인간을 있다고 계속해서 세뇌 시킨게 있거든요. 그게 반발이 뭐냐 하면은 선악적으로 잘하면 되지 않느냐. 선악적으로 착한데 착한 존재를 죽여버리면 그것은 선의 존재를 죽이는 거니까 아깝지 않습니까? 이게 천주교 이론인데 그렇게 하는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선악 자체가 따먹지 마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발악이 나온다는 겁니다. 선악 자체를 없애려고 하는데 악마는 나쁜 것만 안하면 되잖아요. 기어이 선과 악을 함께 있는 존재, 그걸로 버티려고 배후에서 누가 조종해요? 악마가 계속 조종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그렇게 조종하는 거예요. 


예수 믿었으면 바르게 살아야지 계속해서 내 존재에 대해서 손을 놓지 말고 너 선해서 영광 돌려야지 하나님께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자는 거예요. 주님께서 여기서 뭘 줍니까? 율법을 주지요. 율법을 주면서 율법대로 사는지 한번 해 봐라 네가 율법을 선악 가지고 지켜내는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다 나가 버렸어요 주님 앞에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나간게 아니고 도망갔어요. 치료 받기를 거절하고 나아버린게 악마라고 했잖아요. 치료 받으면 제가 바로 간음한 이러면 되는데 짱돌 놓고 피하기 바빠요. 나오면 되잖아요. 나오면. 안 나오고 예수 없는 곳으로 피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죽음이란 죄란 예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 10분 쉽시다.

 홍민희 (IP:121.♡.203.222)18-08-18 17:49 
강남-요한복음 17장 21절(두 개념)180807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3이란 것은 2+1, 예수님과 아버지 그리고 그다음에 성도가 여기 들어가는데 원래 성령의 자리에 성도가 여기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이제 성령께서 부지런히 활동을 해요. 그래서 성령이 보혜사라고 하잖아요. 활동을 하는데 이 구조에서 한번 풀이해보겠어요. 2라는 것은 아버지하고 예수님의 관계가 2잖아요 이게 2. 플러스 성도인데. 


세상이 보기에 세상 보기에 보이는 쪽은 어느 쪽이냐 하면 아버지는 안보이고 목수의 아들 예수님과 성도와 제자들 이렇게 보이겠죠. 이게 보이는 겁니다. 이 구조는 무슨 구조하고 똑같으냐 하면 세상에서도 동일하게 3의 구조로 되어 있어요. 뭐냐 하면 아버지 자리에 눈에 안 보이는 누가 나오느냐 하면 악령이 있어요 또는 악마 뱀 악마가 있고 성도의 자리에는 보통 인간들이 들어가는 겁니다. 인간들 보통 인간들. 인간들 아까 있음이라고 했지요. 


성도의 특징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거는 있음이 아니고 없음 본인도 몰라 본인도 예상 못 한 내가 구원받을 줄 본인도 예상 못했어요. 본인이 예상하고 구원받는 것은 그것은 종교지 그건 구원받은게 아니예요. 그거는 뭐냐 하면 아까 존재가 괜찮은 존재로 하기 위해서 자기가 열망한거예요. 열망 너무 간절히 바랬던 거예요. 된다 된다 하면 된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천번 천오백사십번 해보세요 믿어지지.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방언 터집니다. 방언 터지거든요. 너무 간절해서. 


그런데 그 간절의 내용에 누가 들어갔습니까? 간절의 내용이. 본인이 들어가 있으니까 이거는 존재 밖으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존재를 제로로 돌릴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없어요. 있음에서 그냥 있음으로 가는거예요. 인간들에 있어서 이 예수 자리에 누가 들어가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체포하고 십자가에 죽였던 바로 권세, 권력, 세상 권세. 


여기에 누가 기 죽었느냐 하면 바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런 12제자도 이 권세가 무서워서 베드로 하는 말이 나 예수 모른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관계가 예수 + 성도 관계에서 이 플러스 관계에서 베드로 하고 12제자들 사이에 관계가 떨어져 있는 거예요.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이 관계가 이어지질 않습니다. 이미 이 자리는 없는 자리예요 없는 자리.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성도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자기는 이 쪽에 악마 쪽에 있었지 이 쪽에 없기 때문에 없던 자리에서 권리를 주장한다는건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돼지요. 김기춘이라는 전 대통령 비서실장인가 그 사람 나왔잖아요. 그 사람 나올 때 거기 태극기 들고 있는 사람이 김기춘 도로 집어 넣어라 죽여라 난리 났거든요. 이거 뭐 아는 사람이에요? 김기춘하고 자기하고. 관계 없지요. 관계 없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난. 왜 오지랖 넓게 남의 일에 왜 나섭니까? 어지간히도 할 일 없어. 어지간히도. 뭐 일당 주는가? 태극기 쪽에서? 요새 돈도 없을건데 돈줄 막혔는데 돈도 없을건데. 


예수님 아버지고 이거는 어떤 인간도 예수님 아버지하는 일에 토 달수 없어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요. 내 온도가 45도가 되든 38도가 되든 아버지가 하는 일에 우리가 왜 토 답니까? 우리는 죽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죽어서 흙이 되면 되요. 우리는 아주 착실하게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늙고 있습니다. 주름살 다 있고 보톡스 맞아도 소용없어요. 일은 지금 만사형통이라 지금. 전부다 쭈굴쭈굴 해가지고 만사형통이에요 지금. 잘 되고 있어요 지금. 주의 일에 지장 없습니다. 북극이 숲이 되고 온난화 때문에 북극에 숲이 난다는 거예요. 숲이 되든 밀림이 되든 무슨 상관입니까? 옛날에 맘모스 북극에 살았는데 옛날로 돌아가면 좋지 뭐. 


우리는 지금 어디에 지금 농락당하고 있느냐 하면은 이 권세 이 세상 권세에 농락 당하고 있어요. 세상 권세에. 왜냐하면 힘이 없으면 우리는 못산다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돈 없으면 못 살잖아요.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되는게 엄마 나 돈 없으면 못살아 그러면 엄마가 딸  보고 이야기해요. 죽어 그러면 죽어! 그거 뭐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돈 없으면 안 먹고 죽으면 되는 거예요. 고독사 있잖아요 고독사. 고시원에서 2달째 아무 기척 없어서 들여다보니까 벌써 시체가 있잖아요. 


아이고 그래도 우리 식구가 그렇게 죽으면 안 되지요. 왜 안 되는데요? 이래 죽으나 거지 나사로 어떻게 죽었는데요? 땡볕에 죽었는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게 왜 안 되는데? 그래도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이러거든요. 보세요. 어떤 집안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이죠? 그리고 역사지요? 역사 전통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기존에 있는 권세에서 나온거예요. 


이미 우리는 이 권세에 이 사회라는 공동체 사회 국가 민족 집안 가정 가문 뼈대 이거 전부다 여기에 전부 다 여기의 산물이에요. 육신적으로 자식을 낳았다가 아니라 육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신적으로 우리는 어디서 지금 자아의 내용물을 어디 정신세계에서 전부다 공급받고 있습니까? 여기서 다 공급받고 있는 거예요. 


결혼 하는데 병원 이사장 되어 가지고 자기 하나밖에 없는 딸이 남자 만나가지고 남자가 뭐하는데? 어느 회사 뭐 개발부에 개발2부의 직원인데요. 이게 근본도 없는 것이 어디서 감히 내 딸하고 결혼하려고 이렇게 나오잖아요. 어디 드라마에 보면 그런게 나와요 드라마에 보면. 어디서 이사장하고 하느냐. 근본도 없는 것들이. 뿌리도 없는게. 도대체 뿌리가 뭔데? 뼈대 있는 집안이 이게 뭐예요? 도대체?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악령이 있지요. 왜냐하면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을 공중에 들여다 보니까 세상 전부가 이미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던 악마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겁니다. 여기서 보니까. 그래서 악마가 짐승, 짐승을 보내서 세상의 모든 권세를 영웅들을 보냈고 그것이 인간이 아는 현실의 전부라고 여기고 거기에 얽매여 있었던 겁니다. 그 악마가 히브리서 2장 15절에 악마가 이 인간에게 협박 공갈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 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종노릇하지요 종. 


이걸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 인간은 누구의 종이냐 하면 인간은 자신의 종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괴롭힙니다. 제가 주일날 설교했듯이 인간의 양심과 그 자책감이 자기를 죽여버려요.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누구냐 하면 가룟 유다 아닙니까. 가룟 유다가 마귀 들렸지요. 귀신 들렸지요. 귀신 들려가지고 가룟 유다의 마지막 행동 보세요.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자살했잖아요. 끝까지 나를 이 악마님이 이 대악마님이 주신 것을 내가 지키겠습니다 하는 충성심으로 죽은거예요. 


악마님이 님자 붙이면 안 되지만 그 뱀님이 나한테 넘겨준 너는 너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못 지킨다는 것. 네 자아는 네가 끝까지 책임져야 해. 너의 가치와 너의 존엄성과 품위와 인격은 네가 안 지키면 누가 지켜주느냐? 아무도 못 지켜 라는 그 위대한 사주를 받아서 그것 지킨다고 자살하잖아요.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방법이에요. 과음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술 왜 먹습니까? 자기 가치를 보존하려고. 이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이게 연속성입니다. 쭉 끊어지고 이어져 가는겁니다 연속성. 


그런데 여기서 성도가 된다는 것은 여기서 여기로 가는 거거든요. 그러면 여기 연속성입니까? 비연속성입니까? 비연속성해도 되고 어쨌든 간에 이거는 끊어져 있지요. 끊어져 있다고요. 끊어졌다는 말은 아버지와 예수님만 알기 때문에 이 땅에는 아버지는 어떤 인간도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이 관계를 못 보게 짙은 먹구름 안개로 거두어져 있거든요. 이 두껍게 드리워진 이 안개 악마가 쳐둔 이 두꺼운 벽을 only you 오직 예수님만 뚫고 지나간거예요. 뚫고 지나갔으니까 성령이 오는 자리가 성령께서 예수님을 부추겨서 뚫고 지나가게 했다면 성령이 우리에게 왔다면 성령은 어느 길만 이야기 합니까? 오직 이 십자가 길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십자가 길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성령 받은 목사는. 뭐 훌륭하게 됐습니다. 이제 성령 받았으니까 이제 말씀대로 삽니다 그런 되도 않는 자기 존재만 계속 이야기 해. 


여기서 이 존재를 뚫고 갈 때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갔잖아요. 십자가를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첫 시간에. 십자가는 버림받음이죠. 쉽게 말해서 할 말 없음이죠. 다른 말로 하면 영어로 하면 nothing 이죠. 아무 것도 아니지요. 아무 것도 아닌게 왜 반항하고 아무 것도 아닌게 왜 불평하고 아무 것도 아닌게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대드냐 이 말 입니다. 아무것도 아닌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게 아직도 존재구실 하려고 하는 것은 비로소 배후에 누가 있다? 악령이 계속 사주하고 끝까지 이 존재를 안 놓는거예요. 


그래서 절박할 때 악마가 자신의 본 모습이 나오지요 절박할 때. 나 이제 예수 안 믿는다. 그래 진작에 그게 바로 악마의 마음이에요. 악마의 마음. 악마를 품고 악마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갑자기 노래가 생각나네. 꽃보다 뭐 사람이 아름답다 그건가? 뭐 품고 가는거 있던데. 사랑을 품고 가는나? 그건 딴소리고. 인간이 절박하고 정말 이 뭔가 내가 예수 믿었는데 뭔가 잘못됐다 내가 이러다 나 죽겠네 할 때는 본색을 드러낸다니까요. 본색을. 


목사가 교회 개척하면서 나는 아골 골짝 가겠다고 신학교 때 약속했습니다. 잘 들으세요. 빈들이나 뭐 아골 골짜기 복음 들고 가겠습니다. 이렇게 갔는데 아니 그랬더니만 교회에 교인에 10명 오다가 20명 30명 50명 100명 됐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보니까 저쪽 교회 1000명 목사가 당회 잡혔다고 오라고 하거든요. 가니까 쓱 나가면서 내가 와가지고 교회 해가지고 그것도 십일조 하는 교인 25명 만들어 놨으니까 머리수 계산해가지고 후임자에게 권리금 받아야 되요. 요새 서울종로 바닥에 권리금 안줍니다. 장사 안 되가지고. 


갑자기 복음들고 나가놓고 현찰들고 나가요. 복음들고 온다고 해놓고 현찰 들고 나간다고요. 값없이 한다고 해놓고 나중에 값 쳐서 받아내네. 그런데 그걸 목사가 이야기면 목사도 나쁘지만 더 나쁜 사람이 있어요. 사실은 우리 목사님은 뭐 이런 퇴직금 이런거 참 나한테 그런거 필요 없다고 했는데 내가 우리 그동안 꼭 그런 앞잡이 하는 장로가 있어요. 해가지고 받아내 가지고 자기 얼마 받아먹고 몇 프로 떼고. 이미지라는게 있잖아요. 목사 이미지. 


후임자가 그 교회 홀하고 전포. 전포하고 할 때 그 계산 안하겠어요? 단골 손님인데 단골 할 때 그거 할 때 권리금 안주겠습니까? 2500가지고 인수해라. 그게 나온다니까요. 요새 다 그래요 교회. 2500이면 나은 편이죠 1억5천주고 인수하는데. 목 좋겠다 프랜차이즈 괜찮겠다. 대한예수교장로회니까 프랜차이즈 괜찮죠. 죽는게 무서워서 목회하는 거예요. 죽는게 무서워서. 그리고 죽은 목숨보다 더 귀한게 뭡니까? 


자신의 자존심이고 그걸 어제 제가 대구강의에서는 그걸 뭐라고 이야기 했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인간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망신 당하는 것. 망신, 이 세상에 망신보다 더  무서운게 없어요. 아이들한테는 호랑이 보다 곶감이 더 무섭지만 어른들한테는 망신 당하는게 제일 무서워요. 망신 당하는 것. 망신 안 당하려고 수만 사람들이 자살했습니다. 망신 당하는 것. 아이고 부끄러워라. 


로마서 1장도 몰라요. 복음을 아는 자는 무엇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복음을 아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 세상에 악마가 뭐라고 세뇌를 줬냐 하면은 네가 망하는 것은 죄를 졌기 때문이고 네가 잘 되는 것은 네가 복을 받아서 그렇다. 잠언서 읽어봐라. 네가 말씀대로 살게 되면 왼손에는 장수고 오른손에는 부귀라. 쥘 거 다 쥐었네. 조건이 있어요. 무슨 조건? 말씀대로 지키면. 


이거 말씀대로 지킨 사람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뿐이에요. 왜? 왜 예수님이 말씀 지킵니까? 아버지를 유일하게 알거든 아버지를.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 본인이 출제위원입니다. 출제위원이 정답 모르겠어요? 출제위원이 본인이 문제 냈는데 정답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이 출제했으면 모르지요. 모르니까 정답도 모르는거예요. 하나님이 문제를 냅니다. 다음 중 정답을 괄호에 써보세요. 죄를 지으면 네모다. 


그럼 사람들 쉽다~로마서 6장에 나오는거네. 죄의 값은 사망이요 옳지! 이거 맞추면 천당 간다. 사망이다. 주님께서 땡! 제가 글씨 쓸 때 사망이라고 썼는데 왜 틀렸다 합니까? 너 쓸 때 고린도전서 16장을 적용을 안했어 23절.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했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 태도로 쓰는 거예요. 저는 주를 사랑하는데요? 주를 사랑할 때는 요한복음 12장이 적용됩니다. 


뭡니까? 반드시 주를 사랑할 때는 누굴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나를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나를 미워하지 않는 채 사망 썼어요. 탈락입니다. 시험 쳐서 못갑니다. 이미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하는 주인공 나를 인식을 해야 돼요. 의식 한다는 자체가 이게 미워할 수가 없어요. 예수 믿는 나를 미워할 수는 없다 이 말이죠. 왜? 예수 믿으면 곧 천당인데 그 천당을 어떻게 미워하겠어요. 그러니까 탈락인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전부 다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3은 2+1이죠. 그런데 2가 먼저 있고 1은 나중에 생겨났죠. 마찬가지입니다. 악령이 있고 악령이 아담을 찾아와서 엉망진창의 아담과 그 자손과 그 자손 플러스 만든거예요. 2가. 이 세상권력의 세상권력을 가지고 아담을 만든겁니다. 악마한테는 권력이 있어요. 악마의 권력이 권세자를 만들잖아요. 다니엘서 보세요. 다니엘에 있는 일곱 금신상있지요. 그 금신상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인류 역사가 다 들어 있어요. 


그 금신상이 넘어진다는 것은 세상 끝날에나 가능한일이지 그 금신상이 있는 이상은 금신상을 섬겨라의 취지가 악마로부터 계속 모든 지도자급 독재자, 독재가 아니라도 모든 대통령 왕들에게 전부다 김정은이에게 전부 다 그게 들어간다 이 말이죠. 다 들어가요. 김정은이만  들어가는게 아니라 한 가정의 가장, 가장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다 들어가요. 심지어 엄마는 돈 벌고 아빠는 살림하고 애들 키우면 그럼 가장의 영이 누구한테 들어가겠습니까? 엄마한테 들어가는거예요. 


엄마한테 들어가가지고 자식이 누구 좋아서 연애하면 너 엄마 말 들어. 엄마가 너 키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안 그럴 수가 없어요. 인간이 자기의 행함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예수님께서 아쿠아리움 수족관에 들어올 때 이 수족관은 선악체계니까 잘 났다 못 났다 있지요. 들어올 때에 들어오면서 주께서 원하는 요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그냥 빼내주는게 아니고 아쿠아리움에 있는 사람에게 그냥 빼내주는게 아니고 네가 어디에 발목 잡혔는가를 그동안 어떤데 발목 잡혀서 마치 구원 안 받았는데도 구원 받은 것처럼 행세했느냐를 보는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일이 나는 남들은 안 하는 착한 짓을 내가 했다라는 그런 의미로 예수 믿는 자부심을 계속 지속시키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되면 천국과 이 땅과의 연속성이 되어 버려요. 연속성은 안 됩니다. 연속성은 도저히 안 받아줘요.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기 때문에 이게 단절되어 있어요. 단절이 되어야 성령이 와서 구원받는 거예요. 성령은 그냥 오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저 사람입니까 그거 물어보고 오는거예요. 아무한테나 오는게 아니고.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만 예수님이 구원해요. 그리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렇다면 그걸 여러분들이 믿는다면 나는 내가 구원받은 것은 누구 뜻입니까? 이건 아버지 뜻이고 예수님 뜻이고 모든 내가 손댈 것도 없고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어요. 그냥 막 살면 된다니까요. 산다 앞에다가 뭐만 집어넣어요? 막 자만 집어넣으면 되요. 막 막. 막 살면 돼요. 막 살면서 한번 지켜보세요. 


주님 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드러나는 그 존재의 가벼움. 얼마나 그게 가벼운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살 필요가 없다니까.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바로 왜 싸우냐 미래 때문에. 십자가마을 이러면 되겠느냐 하는 미래성. 그러니까 이게 갑자기 십자가 마을조차 존재해버렸어요. 십자가 마을이 존재해가지고 존재는 뭐를 끄집어 당깁니까? 시간성을 되지요. 시간은 연속성이예요. 차근차근 끊어지지만 연속적이라고. 연속되면서 뭘 합니까? 기대를 하게 되요 기대를. 


키우자. 키우자 하든지 또는 이러다가 깨지는거 아닌가 이런거. 이걸 제가 아까 첫 시간에 중간을 뭐라고 했습니까? 세 자로 ‘과도기 상태’. 이 과도기에서 인간이 추진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자아혁신체계. 다가오는 세계에 적합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지금 내가 이 식으로 살면 안 되고 날마다 나를 창조적으로 혁신해가는 것 자아혁신 해도 되고 창조적 혁신을 계속 시도하는겁니다. 교회서 하는걸 이걸 성화라고 하지요 성화. 경건 훈련 이렇게 하는겁니다. 창조적 혁신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천국 못가고 가더라고 상급 없이 간다 이런 논리가 여기서 도입되는 겁니다. 


그럼 뭘 지키는 겁니까? 계속해서 비연속성이 아니고 계속 연속성 연속성을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이만큼 올라올 때까지 나는 이정도로 교회에 십일조내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했다. 따라서 이 교회는 곧 자기의 자존심이예요. 교회가 망가지든 누가 오든 간에 못 나가요. 안 나갑니다. 그게 바로 악마가 주는 뭐다? 악마의 뒤에서 배후에 조종하고 있는 권세의 맛에 들린거예요. 권세의 맛에. 권세의 맛에. 


제가 그 옛날에 그런 이야기 들었는데 대구에 있는 대구에 저 남산동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가니까 무슨 교회지? 교회 이름도 잊어버렸다. 교회 갔는데 당회실에 딱 들어갔어요. 깜놀  깜짝 놀랬어요. 나는 검찰청에 온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역대 당회장 사진이 다 걸려있어요 역대 당회장 사진. 아니 세상에 쭈욱 있고 제 친구되는 목사님 사진은 맨 끝에 있어요. 다 있어요. 목사님 이런 교회하기 싫다고 태국 들어갔지만. 세상에 이게 뭐예요 이게. 김재규 사진 걸릴 판이에요 김재규 사진. 김정일 사진. 안기부에. 안기부 아니지 기무사에. 


이게 만약에 어떤 후임자가 와가지고 이거 다 걷어내세요 하면 이거는 뭘 의미하냐 하면 권세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 권세에 대한 도전이에요. 그래서 교인이 150명인데 어떤 당회장이 교인 아니라고 하면 이 150을 구성한 추상적인 개념, 다시 말해서 이 150명을 집합체가 교회라는 추상적인 개념인데 이 개념자체에서 권세가 작용하고 이 권세에 도전하는거예요이 후임목사가. 복음을 못 전해요. 기존 교회 안건 들고 복음 전한다는데 그런 일은 없어요. 


어떤 지나가는 아이가 내 어린 아이를 때렸다. 때리면 안돼죠 그냥 툭 건드렸다. 그래도 엄마는 기분 나빠요. 내 새끼거든요. 우리 가족이라는 권세에 속한 그 아이를 건드린 것은 날  건드린거예요. 그럼 왜 자기를 건드리면 왜 안 되는데? 자기는 권세의 맛을 들였어요. 그동안 이 가정 하나 건사하기 위해서 얼마나 비바람치고 바람 부는 새벽까지 시장에서 일했어요. 공장에서 일하고 시장에서 일하고. 그렇게 해서 이만큼 일궈낸 것 이만큼 일궈낸거예요. 우리 미아 성도집 집 하나 장만하는데 그렇게 애 많이 썼지요? 아파가면서. 돈 들여 가면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런데 누가 그 집을 발로 툭 차보세요 기분 나쁘지. 


지금 연속성은 불연속성을 우리 힘으로 바꾸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막 살란 말이죠. 이걸 고쳐야한다 목사님 이야기 했으니까 고쳐야한다. 고치지마세요. 고친다고 연속이 불연속되는거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는 일은 너는 그대로 죽으란 이야기예요. 죽을만해서 죽기 때문에 너무 억울해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새록새록 나오는 너의 행위를 봐라 이 말이죠. 예수 좋아해? 너는 너 가진 것 평생 일궈낸 것 그거 뭐 찬송할 때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어디서 입에 발린 거짓말을. 


무슨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요. 예? 시집 못 갔다가 새로 온 사위가 더 귀하지. 나와 관련된거 이게 귀한거예요. 그것도 사위라도 우리 가정에 힘을 보태주는 사위. 백수 말고 랩가수 말고 보태주는 힘. 돈 막 벌어주는 힘. 왜? 내가 추진하던 이 가정이 집안 일굴수 있는 그런 사람. 주 예수보다 더 귀하지요. 주 예수보다. 그러면 목사님 그 찬송하지 말까요? 하라니까요. 하면서 바로 체크하면 돼요. 그게 정답이에요. 왜? 자기를 그 찬송하면서 자기를 미워할 수 있는 찬스가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봐도 참 웃긴다 정말. 이거는 나는 진짜 진작에 죽었어야 해. 산다는게 이게 말이 안돼. 사니까 덥다고 짜증내잖아요. 어제 죽었으면 오늘 짜증 안 냈을텐데. 오늘 살아있으니까 덥다고 짜증내는 거예요. 덥다고.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그런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와 주께로 돌아간다 그런 것도 귀에 안 들어와요. 평생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어떤 연속성을 보여주느냐 하면은 마귀의 사주를 받고 삽니다 하는 연속성을 보여주는 그것이 성도를 통한 프로젝트입니다. 이 이유가 뭐냐 이유가 여기 있어요. 


성도가 들어가는 자리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성령이 계시지요. 성령은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이지요.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고 주신 영이예요.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우리에게 올 때는. 오기 전에는 안 그렇지만. 일단 오고 나신 후에 성령 안에 뭐가 있다? 다 이루신거예요. 다 이루신거. 다 이루심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죄에 대해서 그 다음에 뭡니까 어린양을 제물로 받쳐서 성공했어요? 성공 안했어요? 성공했잖아요. 성공했지요. 구원 성공 했지요. 


그럼 우리는 어느 자리에 이 성공에 누가 이바지 했습니까? 성령이 이바지 하셨잖아요. 그러면 성령이 하는 임무 중에 이 구조가 계속 유지되어줘야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느 자리에 가야 됩니까? 죄의 자리에 들어가야 되는거예요. 죄의 자리에 들어갈 때 우리는 죄를 알아요? 몰라요? 모르지요. 왜냐하면 선과 악으로 죄를 알기 때문에 몰라요. 조폭도 양심이 있어요. 조폭도 돈 뜯어내면 그 중에 만원은 길가에 있는 거지 노숙자에게 담배하나 사서 피우세요. 기부한다니까요. 자기가 한 일을 얼마나 자기가 뿌듯하겠어요. 비록 조폭이지만. 우리 어머니 기도 못 잊어 양심은 살아있다는 거예요. 


선악은 상대적이에요 상대적. 나쁜 사람들 모인 곳에 조금만 착해도 되게 착해 보여요. 그런데 착한 사람들 있는 곳에 조금만 이렇게 해도 굉장히 악해 보입니다. 수련회 갔는데 저녁 식사시간에 몇시지요? 식사시간이 8시죠? 8시인데 전부다 8시 이전에 왔는데 한사람이 8시 2분에 왔다. 아주 악랄해 보이지요. 악해 보입니다. 어느 정도 악하냐 하면 나머지 100명이 있다 하고 한 명이 99명 있고 한명이 8시 2분에 왔다 지각했다. 그러면 99명이 어느 정도로 이 사람 하느냐 하면 우리가 봐줄게 속으로. 1분 늦은거 봐줄게 다 같이 이렇게 생각해요. 그게 더 미워. 


늦게 오는 순간 내가 밥 먹고 있다가 나 착한 부류에 속하는구나를 순간적으로 덤으로 얻는 행운을 누립니다. 나 안 늦었잖아 하는 것. 덤으로. 이게 선악구조예요. 그래서 제가 쿠자누스라는 독일 15세기 철학자 예를 들었잖아요 설교시간에. 선은 극과 극이 만나면 같다. 선은 뭐가 되고? 악이 되고 악은 곧 선이 되는 거예요. 선악구조와 다 그래요. 선이 악이고 그리고 악은 또 그냥 악이에요. 그렇게 되는겁니다. 연속성에 이르지 못해요. 


따라서 여기서 이 죄 + 어린양 하기 위해서는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뭡니까? 우리가 미처 모르는 죄를 죄인의 자리로 만들어내시는데 성령께서 동원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 중에 괴수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성령의 역할이에요. 그러면 죄수 되게 하시는 성령을 어떻게 하느냐? 뭐 그거야 쉬워요. 눈감고 성경에 아무부분 눈감고 아무데나 펼쳐 보세요. 아무데나 펼쳐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사도바울 편지 부분 나오지요. 뭐 대부분 편지니까. 편지 딱 해가지고 방금 아무데다 했어요. 


아무데다 딱 했는데 여기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런즉 이와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로 인해 나온다고. 이 말은 뭐냐 하면 항상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되지 않고 은혜로 남자고 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뭘 하고 있어요? 행위 안 하고 있습니까? 행위를 할 뿐더러 내가 하는 행위는 잊지를 못하지요. 잊는 정도가 아니고 부풀어버려요. 대단해요. 


그러면 주께서 성령께서 이 말씀 주신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우리가 아무리 뭘 해도 우리가 행함에 불과하다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겁니다. 그냥 노골적으로 에베소서 4장 끝을 보겠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도적질 하는 자는 도적질 하지 말고 그런 이야기 나오죠. 32절에 보면 앞에 분을 품되 그러면 우리는 해 지는거 보고 분을 조정하면 되요. 빨리 빨리 정리하면 되거든요. 해 졌으면 안 하면 되니까 시계 보고 해 보고 하면 돼요. 


그 다음에 도적질은 뭐 별로 어릴 때부터 별로 궁핍하지 않은 이상은 엄마 서랍은 훔쳤지만 가게 서랍은 안 훔쳤잖아요. 가게 문방구는 안 훔쳤거든요. 그러면 큰 도둑 되니까. 엄마 서랍이야 뭐 이렇게 눈치보고 해가지고 도둑질한 적은 많지만 뭐 자기 주머니인데. 엄마 주머니 내 주머니 아닙니까. 그건 별거 아닌데 문제가 그걸로 해서 구원되는게 아니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5장 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이렇게 나오지요? 


행하라 나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하냐 하면 나 성령 받았어. 성령 받기 전에는 못 지키는데 성령 받았으니까 지킬 수 있어 하고 덤벼들거다 이 말이죠. 그게 성령이 하신 미끼예요. 그게 이제는 미끼에 걸려든거예요. 해봐라 이 말이죠. 해보니까 또 성경에 나옵니다. 해보니까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아요? 몰라요? 우리가 오른손이 하는걸 우리는 알지요? 아니까 걸려든거예요. 아니까 걸려든거예요. 


사랑은 하되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오른뺨을 쳤습니다. 그 다음에 아는 순서가 뭡니까? 왼뺨을 돌려대야 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해보세요. 더 맞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모독했다고. 때렸을 때는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이러라고 때렸는데 때려봐 때려봐 이런거 외에는 다른거 해석이 안돼요. 오리를 가자했는데 십리를 가주면 상대방은 화냅니다. 내가 그걸 농담 삼아 내가 오리 가자고 했는데 지금 네가 뿔나서 십리 가주는데 너 지금 개기는 거야? 이렇게 된다니까요. 


그다음에 겉옷 달라는데 속옷까지. 속옷 그 더러운걸 누가 입습니까? 더욱더 더 난감한 상황은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오른손을 잘라버려라. 성한 지체 없습니다 우리는. 발가락 문제나면 발가락 잘라야되고요. 어느 나라에서 음주운전에 대책이 나왔는데 저는 그것이 음주운전 대책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뭐냐하면 음주운전 하면 어느 나라인지 모르겠습니다. 유럽 어느 나라인데 음주운전을 했을 경우에 차를 그 자리에서 폐차 시켜버립니다. 후~부세요 부세요. 됐어요. 음주운전입니다. 그냥 집에 가세요 집에 가시고 차는 폐차장에 가서 다 분해 부숴버려요. 차 못 타도록. 차 못타면 음주운전 없을건데. 이게 우리나라에서 진작에 도입해야 되요.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나쁜 짓 했잖아요. 우리를 폐차시켜버립니다. 하나를 어겨도 너는 폐차다. 모든 율법을 어긴거예요. 그런데 왜 삽니까? 사는게 아니고 살려주는거죠. 죄가 남아 있기 때문에. 지을 죄가 남아 있기 때문에. 뭐를 포기할까요? 뭐를 포기할까요? 이 모든 말씀이 나로 하여금 입을 막게 만들어요. 입을 막게 만들어 버리면 우리는 뭐를 쳐다봐요? 다시금 그럴 때마다 십자가 사건의 의를 어느 안목에서? 주님의 안목에서 십자가 사건을 볼 수 있는 눈이 성령이라는 불연속성을 통해서 계속 우리에게 새겨주고 반복해서 또 새겨주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피가 복음이에요. 십자가 피 가지고 행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 자체가 복음이라니까요. 우리는 자꾸 뭔가 말씀을 지키려고 하고 지키는 우리가 말씀 앞에 가리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성령께서 가리고 있는 우리를 끌어내리는 거예요. 주여 저 이 정도 까지 했습니다. 콱 커튼 벗기듯 벗겨내버려요. 벗겨낼 때 그건 성령이 와서 불연속적으로 벗겨내는겁니다. 하나의 사건입니다. 어떤 식으로 하느냐? 


아까 했던거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죄란 1번에 뭐라고 했습니까? 1번? 나쁜 짓 나쁜 짓. 나쁜 짓이 뭐냐고 저는 안 묻습니다. 왜? 우리는 근본적으로 나쁜 짓이 뭔지 알아요. 알아요. 나쁜 짓이 뭔지 알아요. 양심의 가책이라든지 뭐 남한테 피해 입히는 것 알아요. 그러나 정작 나쁜 짓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나도 아무것도 아니고 싶어요. 


그런데 성경말씀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든지 딱 들어오면 할 것 같애. 이거는 내가 지킬거 같애. 그러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게 말씀 지키는 권한이나 있는 것 처럼 행세하게 되는 겁니다. 행세하면서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성령의 열매라면 우리는 거기서 골라잡습니다. 온유와 자비 이거는 날 때부터 자기 아버지 자기 어머니 성격 좋으면요 이거는 그냥 먹는거예요. 그냥 먹는거. 


우리 아는 사람 우리 십자가 마을에 아는 사람 있는데 아이가 있는데 20개월 안 됐는데 애를 보는데 어른 같애요. 얼마나 점잖은지 뭘 줘도 아무소리 안하고 입을 쫙쫙 벌리면서 다 잡숴요. 이거는 어르신이 아닌가 할 정도로. 너무나 어르신이에요. 온유와 화평은 그냥 확정 먹고 애한테 그냥 들어가요. 그게 성령의 열매입니까? 성격이지 성령의 열매아니지요. 


사람이 이걸 하라 하니까 뭔가 하라 또 하지마라 나오니까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공경하자 하는 순간 뭐냐 하면  내가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닌게 아니라 뭐가 된냥 여기면서 설칩니다. 해가지고 부모 공경했는데 부모가 돌아가셨다. 갑자기 여기서 뭐가 생깁니까? 내가 평소에 3번 찾아갈 걸. 한 번 더 찾아가지. 뭐 돈 아깝다고 10만원 드릴걸 봉투에 5만원 드린게 아깝고 그러면 뭐가 생기죠? 내 안에 뭐가 생기죠? 자책감 생기죠. 자책감은 = 누구의 마음? 악마의 심정이죠. 이거 연장되면 자살합니다. 아버지 죽었으니까 나도 같이 따라 죽고 싶어요 이런 마음 든다니까요. 드물지만. 


자책감 생기는거예요. 자책감은 뭐를 가립니까?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불연속성과 이런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완전히 박살내는 겁니다. 좀 잘하지 진작 잘하지. 살아있을 때 부모한테 잘하지 죽고 난 뒤에 울면 무슨 소용 있나. 이게 죽고 난 뒤에는 부모한테 미안해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밥맛도 안 먹히고. 도대체 부모한테 효도 못한 것은 그렇게 죄책이 되고 주님 십자가 달린 것은 전혀 죄책이 안 되고. 왜? 부모하고 나는 엮였거든. 부모의 존재가 나의 자아의 내용으로 채워졌거든. 결국 부모한테 효도하겠다는 것은 누구한테 충실하겠다? 내가 나 다움에 완전과 완벽을 추구하겠다는 악마의 정신 외에는 달리 설명 할 길이 없어요. 


보다 내가 완전할 걸 보다 내가 완벽할 걸. 이게 선악구조에서 못 빠져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들이 구원 못 받는 이유를 우리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잖아요. 교회를 통해서도. 얼마나 시달리고 주눅 들었습니까? 교회는 협박과 공갈하는데잖아요 협박과 공갈. 귀한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받아놓고 돈 한 푼 안 내고 이게 협박 공갈이지. 이게 협박과 공갈이에요. 피서해서 외국에 놀러가는 것은 좋고 교회에 에어컨 안 놓나 지금. 너희 집 짓는건 잘 짓고 성전 짓는 것은 그렇게 인색하냐 학개서. 학개, 스가랴 부흥사 오면 단골 아닙니까? 교회 지을 때 되면 부흥사 불러다가 학개 딱 엽니다. 너희들은 사적으로는 잘 짓고 이러면 나와요.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귀족들 살던 사회 계급사회죠. 그것이 자본주의의 발달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발달은 무역의 증가예요. 무역의 증가로서 건축업에서 시작해서 돈의 축적이 토지의 비용보다 많아지니까 토지 가진 귀족보다 현찰가진 금융업자 이들이 더 대우받는다. 돈이 바로 진짜 힘이다라는 것을 알기 쉽게 자본주의예요. 그걸 부르조아라고. 부르조아. 돈을 가진 사람들. 이게 자본주의거든요. 


자본주의 되면서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과학기술이 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전까지는 과학기술이 하나의 오락이었습니다. 마법 같은 오락이었는데 이게 기술이 돈이 되는 거예요. 돈이 되려면 이 기술을 대량 생산해서 대량 소비를 유도하고 돈 없는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 빌려줘가지고 구매하기 시작했어요. 청소기 하면 되는데 희한한 청소기 로봇 청소기 나오잖아요. 소비가 계속 나오면서 공급을 부추겨서 투자를 해서 그래서 경제가 살아나는 겁니다. 


이 경제가 살아나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 경제가 살아나게 되면 우리의 정신도 발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어요. 경제가 발달하면 돈이 많이 벌리게 되면 우리가 그만큼 남한테 구제와 기부를 많이 하기 때문에 정신세계가 복지세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최초의 복지는 유럽에서 시작된거예요. 영국의 법, 프랑스 법, 독일에서 2차 대전 이후로 복지했지만 그전에 복지정책 있는 겁니다. 


그런데 돈이 생기면 정신이 발달되던가요? 돈을 더 벌기 위해서는 국가의 체제가 하나같이 움직여야 되는거예요. 인간자체가 숫자가 되는 겁니다. 제가 수련회 때 했지요. 빅데이터에 하나의 대량 숫자의 하나의 숫자로 취급한다고요. 기계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경제의 발전이 정신의 자유가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두 가지 흐름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리얼리즘’이고 하나는 ‘모더니즘’이라고 하는데 이건 뭐냐 이건 문학에서 나온건데 이게 뭐냐 하면 세상이 경제가 돈이 힘이니까 돈 힘 되는대로 우리는 여기서 북 치고 장구 쳐주면 된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 되면 어떠냐. 에어컨 없는 세대 우리는 에어컨 있는 이게 더 좋은 삶이 아니냐 이렇게 하는거고 인간의 자유는 그렇지 않다. 인간의 자유는 돈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말고 거기서 그걸 능가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인간의 정신에서 나온 것은 도피예요 도피. 도피고 폐인 되는거죠 결국은. 도망치는거예요 사회에서. 도망친 대가가 자유고 도망안친 대가가 굴욕이고. 과일 던지고  화분 던지고 맞는거예요. 던질 때마다 잠시 참으면 4식구 산다. 조현아 때릴 때마다 욕할 때 마다 이걸 참으면 우리 4식구 사는 거예요. 더러워서 이거 아니면 직장 없나 때려치우면 그 다음 부터는 뭐 내 얻어맞을 때는 전쟁이지만 나올 때는 지옥이에요. 전쟁할래 지옥할래? 남자들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애 없을 때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지옥할래. 내 취미생활.  애 놓고 그 다음부터는 그 다음부터는 전쟁할래. 애가 불쌍해서. 안돼요. 이게 뭐냐 인간은 여기서 인간은 유토피아를 바랍니다. 


내 정신도 자유롭고 구애받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 없을까? 점점 더 그걸 바로 세속화 되는 거예요. 그게. 세상은 종교를 빠이빠이 예수 빠이빠이 다 빠이빠이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한국은 왜 아직까지 예수 빠이빠이 왜 안했나? 유럽은 다 빠이빠이 했는데 한국은 왜 그러냐? 한국은 내용이 달라요. 교회 와서 빌면 자본주의 자본가가 될 수 있어요. 복음 대신에 복음 아닌 것을 집어넣는거예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했더니만 교회 봉사했더니만 복 받았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돌아가면서 강단에 반복 교환학생만 있는게 아니예요. 교환강사를 바꿔치기 하면서 이쪽도 강사료 받고 둘 다 다 챙기니까 자기 돈 내는 거 아니니까 바꿔가면서 계속해서 그 체제를 유지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바로 종교의 힘이에요. 힘 뒤에 뭐가 있다? 악마가 있는 겁니다. 


그 악마를 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느냐? 속아 넘어가는게 아닙니다. 내 존재를 내가 챙기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못하리. 하나님이면 하나님한테 빌고 절이면 절에 가서 빌고 하여튼  비는건 다 열심히 비는거예요. 우리 내 새끼하고 나라는 이 소규모 권력체만 잘된다면 내가 무슨 짓을 못하리. 엄마가 되어서 그런 희생도 못하겠습니까? 엄만데. 엄마가 뭔들 못하겠어요. 바로 인간은 이 총체성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세상의 3은 1이예요. 세상의 삼위일체예요. 세속의 삼위일체예요. 세상은 바로 악마와 권세와 내가 하나가 돼요. 세상의 삼위일체입니다. 하나입니다. 내가 들어갔는데 못 벗어납니다. 


이 총체성 속에 뭘 집어넣느냐? 주께서는 구제성. 너는 없고 네 안에 내가 살아있다고 보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의 탱크 병사가 모는 탱크 같은 거예요. 나의 원래 지금 주인은 뭐냐? 성령이 주인이고 주님이 주인이고 이걸 가지고 두 자로 성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령을 모시는 전을 성전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을 구약에서는 성전이라고 했거든요. 너는 성전이다. 어떻게 빛이 어둠과 같이 짝 하겠느냐.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가 네가 아는 죄 말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경험한 그 경험한 죄를 알기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아직도 육신의 욕심 가진 채로 우리로 하여금 마음껏 네가 벌리고 싶은 악마의 속성을 마음껏 벌리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걸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게 해서 그럴 때 우리는 다시 되돌아오면서 아버지의 영광과 주 예수의 영광만을 그때부터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자기는 못 나고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고 강도가 구원받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고 죄인, 그 죄인이라는 죄를 알기까지 주께서는 우리를 평생을 같이 동행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인 된 걸 이렇게 기뻐할 경우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색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소리가 우리의 망나니 같은 짓 속에서도 그 소리가 사라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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