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외로움,사소한 일 1805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5. 22. 16:10
2018-05-15 23:48:53조회 : 73         
유튜브 강의 (234강, 235강) 외로움, 사소한 일 180515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234강   음성        동영상


235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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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8.64)18-05-16 22:53 
234강-YouTube강의(외로움)180515-이 근호 목사 

234강, 제목은 ‘외로움’입니다. 혼자서 사는 것이 외롭다는 것은, 그거는 젊을 때 세상을 아름답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할 것은 많고, 그리고 구경할 것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그럴 때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도움을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죠. 

그래서 청소년들은 몰려다니잖아요. 뭔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눈에 들어왔는데, 청소년들은 뭐든지 하고 싶어 해요. 신기하니까. 신기한 것은 다 하고 싶어 하니까. 자기 힘으로 할 때는 상당히 불안하고 주저하게 되는데, 단체로 움직이면 위험요소가 좀 사라질까 해서 그냥 이것저것 다 해보는 겁니다. 

근데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이 시시해지고 시들해지고 식상해져요. 나이가 들면 신기한 것이 그만큼 줄어드는 겁니다. 새로운 것이 없고 자극적인 것이 없을 때는, 이제는 곁에 누가 오는 것을 귀찮아해요. 자진해서 외로워지고 싶은 겁니다. 

그런다고 해서 사람들이 외로움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여전히 옆에서 자기가  필요할 때만 타이밍 맞춰서 찾아와주고 위로해주고 경제적으로 도와주기를 바라죠. 그동안 사람들한테 뭔가 얻고자하다가, 그게 실망과 좌절로 이어질 때는 그 사람자리에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개나 고양이를 집어넣죠. 그만큼 위험요소가 적으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그렇게 감정이입이라고나 할까요?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대상,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 그런 것들을 찾습니다. 

그런데 외롭거나 외롭지 않거나, 뭘 해보자고 할 때에 그 범주, 범위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거든요. 근데 시편 8편에 보게 되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3절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이래 되어 있다 이 말이죠. 

땅을 보고, 자기 발밑을 보고, 그 세상하고 대조하고, 견주고, 비교하고, 그런 식으로 할 때는 누가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나? 누가 나의 외로움을 들어줄 사람이 없나?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나? 나하고 취미가 맞는 사람은 없나? 나하고 신앙적으로 맞아서 밤새도록 복음이야기하고, 신앙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없나? 

이렇게 찾게 되는데, 그렇게 해줘봐야 얼마 못 가서 밑천 다 떨어집니다. 대화도 밑천 떨어지고, 은근히 갈아치우고 싶고, 다른 사람하고 또 사귀고 싶고, 자꾸 그런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그걸 전도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변을 다 돌아봐도 전부 다 헛되고 헛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뭔가 새로운 게 있는가 싶어서 책도 많이 읽어보고, 그리고 이것저것 직업도 바꿔서 자격증 따보고, 온갖 갖고 싶은 것 다 가져보고, 수백 명, 수천 명의 여자를 거느려보기도 하고, 흔히 말하는 큰 과수원도 해보기도 하지만, 전도서가 내린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이 애초부터, 처음부터 헛되고 허무한 것으로 꽉 차 있었는데, 인간이 그걸 몰랐던 거예요. 헛되지 않은 것은 저쪽 구석에, 뭔가 의미 있는 것은 이쪽 구석에, 뭔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지속적으로 해왔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 시편 8편에 보니까, 아래를 보지 말고 위를 한번 보라는 말입니다. 위에 뭐가 있느냐 하면 달과 별들이 있죠. 근데 시편 이 사람은 “달 있네! 별 있네!”라는,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달과 별을 무엇과 잇느냐 하면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이라고 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 

달을 보고, 별을 보고 또 해를 볼 수 있겠죠. 그거만 보지 않겠죠. 그것만 봐버리면 달고 별과 해는, 내가 나를 물체로, 사물로 보는 것처럼, 그것도 하나의 차가운 사물로 그치고 말죠. 오늘날 과학이 사물을 그렇게 봅니다. 해와 달과 별을 보면서도 주의 손가락까지 볼 수 있는 현미경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어요.  

근데 이 사람은 주의 손가락과 관련해서 해와 달과 별을 보고 있는 거예요. 주의 손가락으로. 그러면 달보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보고 대화를 하느냐 하면, 달을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손가락을 보고, 주님의 몸체를 보고 대화를 하는 겁니다.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대목이 나오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는 지금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하고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 제목이 ‘외로움’인데, 누구하고 동행한다면 외로울 수가 있겠어요? 

광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왔을 때에, 백성들 눈에는 뭐만 보이느냐 하면 모세만 보였습니다. 근데, 모세는 늘 주님과 대화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있다는 말은, 외로울 틈이 없다는 거예요. 적적할 틈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 뭐냐, 주님의 손가락이니까, 계속 주님이 손가락이 지시하는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기능이 나와요. 그 기능을 부여받는 겁니다. 지시를 받고, 숙제를 받고, 사명을 받는 겁니다. 

그것을 바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4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생각한다는 말은 그냥 지켜본다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일을 시키고 이 땅에서 굴리는 거죠. 계속 활동하게 하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물론 혼자 설치고, 혼자 나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특징은 남들이 하는 똑같은 일을 해도 외롭지 않아요. 외롭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로움이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뭔가 기대했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않기 때문에 외로운 거예요. ‘저 사람하고 사귀고 저 사람하고 부부되어서 살면 참 좋겠다.’라고 하는, 그만한 뭔가를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생활이든, 사귀든, 뭔가 좀 지나면 그만 시들해져요. 왜냐하면 자기가 그 사람과 만나면서 은근히 욕망했고, 욕구했던 그것이, 이제는 그 온기가 다 떨어졌어요. 바라던 즐거움이 바닥을 드러낸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결혼을 하든, 사업을 하든, 교회 나오든, 교인들을 만나든, 인간은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접근했던 겁니다. 

심지어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누구한테 접근하느냐 하면, 예수님한테 접근하고 하나님한테 접근해요. 교회 나오다가 안 나오는 이유가 뭐냐,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한테 뭐 얻을 것이 있을까, 하나님한테 성의를 표하면 하나님이 섭섭지 않게 또 복으로 돌려주지 않을까, 이런 게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사람 사귀다가 이제는 우리 갈라서자, 헤어지자고 하는 것처럼. 이것은 교회 나와서 예수님한테 하는 것도, “뭐 얻을 것도 없고 뭐 얻을 것 다 챙겼는데, 나중에 늙어 죽을 때 돼서 다시 오겠습니다.”하고 이별을 선포하는 거죠. 

슬슬 눈치 보면서 빠지는 겁니다. 주일에 매주 나오다가, 한 달에 한번 나오다가, 육 개월에 한번 나오다가, 이년에 한번 나오다가, 그것도 사람 보러 나오는 거예요. 혹시 또 이용할 게 있을까 하고서. 혹시 내 외로움을 들어줄 내 친구 될 만한 사람이 있을까, 또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라는 것을 좋게 보면 안 됩니다. 그냥 쓰레기통이다, 이래 생각해야 되고. 하지만 그 쓰레기통에 우리도 한 몫 하잖아요? 그러니까 같은 쓰레기끼리 만나서 어디가 문제되는가를 찾아내야 해요. 정말 외로움을 덜려고 오는지, 아니면 주님이 시켜서 왔는지..., 

처음부터 외롭지 않아야 됩니다.

 이미아 (IP:122.♡.178.64)18-05-16 22:53 
235강-YouTube강의(사소한 일)20180515-이 근호 목사 

235강, 제목은 ‘사소한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 빼놓고 다 사소한 거예요. 자기가 생각하지 않는 것, 자기가 시도하지 않는 것은 다 사소한 일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세상에 항상 중앙으로, 중심으로 보죠. 

내게 좋으면 세상은 좋은 세상이고, 나를 불편하게 하면 그것은 좋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중심 잡으면, 자기 빼놓고 나머지기 모든 일어날 일들, 그리고 자연은, 나를 강화시키는 것,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가 될 것이라고, 은근히 이렇게 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러면 거기서 사람들은 중요한 일과 사소한 일을 본인이, 자기마음대로, 임의로 그걸 골라내요. 가려내는 겁니다. 자기가 판단자가 되죠.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죠. 이게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근데 사람은 눈에 띄면 다 판단합니다. 판단할 때 어떻게 판단하느냐,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판단해요. 이거는 마귀가 판단하는 것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판단을 하는 겁니다. 나를 중앙에 세울 것이냐, 아니면 나를 중앙에서 내쫓을 것이냐를 가지고 판단해요. 

내가 중앙에 서게 되면 이거는 나에게는 선한 것이고, 나를 이렇게 저쪽으로 밀어내게 되면 그거는 악한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바벨탑 아시죠?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에, 성경에 보면 우리 이름을 하늘에까지 높이 두겠다는 그런 의도가 있는데, 이게 몇몇이 동의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고, 일심단결이 되었어요. 누구 하나 여기에 대해서 토를 달고 이의를 거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뭔가 직업상 환경이 다 다르다고 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것을 추구하는바에 있어서는 이구동성으로, 전부 다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이름을 저 하늘에까지 닿게 하겠다, 높이겠다는 겁니다. 제일 높은 데 두겠다. 이 품성이 무슨 품성이냐 하면, 높이 있겠다고 하는 것은 그 높은 자리가 탐이 난다는 거죠. 

자,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에게 사소한 일과 사소하지 않는 일은 뭐냐, 나를 높여주는, 변두리정도가 아니라 나를 아예 하늘까지 높여주는 일은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고, 반대로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고 낮추게 한다면 그거는 사소한 일에 해당이 됩니다. 기피하고 싶은 일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과 동등 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반대의 길로 가셨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 이 말이죠(빌2:6-8). 이거 아시죠?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생명의 길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준 그 길은, 그 노선은, 버스노선 같으면 어디로 가는 거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을 가면서 아주 좋아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 사람이 결정한 중요한 일이 아니고, 주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자기 자신을 전폭적으로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은 제대로 뭔가를 아는 사람이에요. 왜? 세상에 남자든 여자든 자기 길이 뚜렷하게 확정된 사람만큼 자신만만한 사람이 없어요. 내가 어디로 갈까를 모르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뭘 해도 항상 초조해요. 

그러나 내 가는 길이 저쪽이다, 라고 이미 정해져있는 사람 같으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꼬부랑꼬부랑 가더라도, 그쪽이 내 길이라는 것으로 정해져있다면 뭐 그다지, 오히려 그 길 빼놓고 주변에 있는 다른 길로 빼돌리는 모든 것을, 자기는 시시한 일로, 사소한 일로 본다 이 말이죠. 

사소한 일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미 정말 중요한 일은 결정 났다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거지가 된다 할지라도 내가 가는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을 너무나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감지덕지하게 생각한다.
주님께서 나 같은 인간에게 어떻게 주님가신 길을 허락해주셨는가?”

오히려 주님에게 고맙게 여기는 거죠.
 

근데 반대로 내가 결정하고 내가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높아져도 이게 불안, 불안합니다. 언제 이 자리에서 쫓겨날지, 밀릴지, 검사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도, 언제 어떤 일로 국세청에서 연락이 와서 그 자리에서 쫓겨나가지고 관악산에 가서 나무에다 목매고 죽을지도 모르고. 예를 들어서 나는 훌륭한 가장이 되겠다! 이거 주님 가신 길이 아닙니다. 내가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 이거 주님가신 길이 아니에요. 나는 훌륭한 장로가 되겠다! 이거 주님가신 길이 아닙니다. 나는 훌륭한 선교사가 되겠다! 그거 주님 가신 길이 아니에요. 

주님 가신 길은 아예 내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길이 주님 가신 길이에요. 내가 굳이 각오 안 해도 되는 길. 주께서 가신 그 길이 주님 가신 길이죠. 그러면 그 주님 가신 길은 우리가 공부를 한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욥기 39장에 보면 인간하고 하나님하고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그런 흔치 않는 일을 기록해놨어요. 참 욥의 입장에서는, 욥은 그 당시에는 자기 몸이 아프니까 상당히 괴로워했지만. 제 3자가 볼 때에는 하나님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보통 명예로운 일이 아니잖아요. 정말 이거는 부러운 일이잖아요. 근데 그 당시에는 욥이 너무 힘들어서 불평도 했지만. 

39장에 보면 하나님이 욥에게 이렇게 합니다. 1절,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라고 물었어요. 자, 욥이 자기가 몸이 아플 때, 그에게 희망은, 옛날처럼 몸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 문제에요. 내 몸이 아픈데 살아있는 염소가 새끼 치는 것은 자기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사소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아프니까, 본인이 아픈데서 벗어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거든요. 본인이 아프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는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평소에 잠재되어 있는 그런 생각이 아픔으로써 더욱더 강화돼요. 더욱더 뚜렷하게 되고, 확실하게 되고, 현실감 있게 확 다가오는 거예요. 

성령의 열매가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그렇죠. 근데 어금니 하나, 사랑니 하나 아파보세요. 이빨 하나 아파도 온유와 화평과 자비... 이런 게 어디에 있어요. 다 사라져요. 하나님께 원망이 안 들 수가 없어요. 자기 아프니까 온 식구가 자기의 아픈 것을 감안해서 온 식구가 죽을 먹는다. 이러면 그다지 화나지 않아요. 그런데 아플 때 하필 LA이 갈비를 뜯는다든지, 하필 잔칫집에 초대를 받았다든지 할 때에 빤히 보고도 양송이 스프나 들이켜야 될 그런 입장에 있을 때 화는 더 나겠죠. 

하나님께서 욥에게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니가 아느냐, 라고 묻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든 일 속에 주님의 중요한 것이 다 들어있는데, 너는 아픈 것만 중요하고 평소에 살 때도 너는 너 밖에 몰랐다는 것을 질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아파봐야 주님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아파봐야 모든 것이 내 중심이라는 것, 내 중심으로 심각하고 중요했다는 그런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훼방했고 방해했다는 사실을, 욥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는 얼마나 사소하고 중요한 문제를, 얼마나 내 중심으로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따라서 내가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은 주님 보시기에 사소한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