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강-YouTube강의(사는 게 중독)20180605-이 근호 목사
236강, 제목은 ‘사는 게 중독’입니다. 사는 게 중독이라는 말은, 살면서 중독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사는 것 자체가 곧 인간에게 중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왜 사느냐? 이유도 없어요. 그냥 중독되어서 사는 거예요.
그럼 이 중독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뭔가 벗어나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제자리를 반복하는, 그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중독이라고 하죠. 벗어나야 하는데, 뭔가 다른 인생이라는 것이 있을 건데, 다른 방식의 인생이 있을 것인데, 지금 사는 것이 이미 과거에서 꾸준히 살던 대로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그 중독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나라의 생활이고 삶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어요. 어떤 의미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를 제일 먼저 합니다. 뱀 저주, 그 다음 여자저주, 남자저주,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4절에 나오는 뱀에 대한 저주가 왜 중요한가 하면은, 뱀, 악마가 천사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에요.
피조물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같이 노닥거릴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 어떤 짓을 하게 되면, 그것조차도 충실히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 그런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충분히 이용하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한테 상대한다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뱀부터 출발하는 게 아닙니다. 현재 이 세상은 인간부터 출발합니다. 남자가 어떠니, 여자가 어떠니, 여자가 어떠니, 남자가 어떠니, 이렇게 해버립니다. 그러면 뱀을 추가했을 때와 뱀을 추가하기 전에 사람부터 출발할 때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은 악마부터 시작이 안 되죠. 인류사가 어떻고, 지구가 어떻고, 우주의 역사, 이 모든 것은 거기에 악마가 없어요.
악마가 없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겁니다.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악마부터 이야기를 해볼게요. 악마부터 이야기를 하면, 악마는 어떤 저주를 받았는가 하면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배를 땅에 밀착시켜서 다닌다는 말은 그가 볼 수 있는 것, 얻을 수 있는 것, 눈에 보이는 환경은 땅이라는 그 범주를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뱀의 생활이 그래요. 악마의 생활이. 그러면 악마의 생활은 줄곧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이 눈에 보이는 땅에 대해서, 거기다가 항상 모든 것을 다하도록 악마는 인간을 조종하고 인간에게 말을 건넵니다. 마음속으로.
자, 오늘날 자본주의의 인간들을 봅시다. 인간들은 하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관심이 있는가 하면 땅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요. 따라서 악마가 하나님께 저주받는 그 마음이나 정신, 그걸 그대로 누가 따르는가 하면 남자와 여자, 인간들이 그걸 그대로 따라가요. 그래서 인간들이 끄집어내는 모든 아이디어와 생각들은 전부 다 땅의 일들입니다.
배를 깔고 땅에 밀착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배를 깔고 땅에 밀착해서.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배를 깔고 땅에 밀착해서 땅만 바라보면서 그냥 가는 거예요. 평면적 삶으로, 땅위의 2차적인 평면적인 삶으로 그냥 기어가는 거예요. 구더기처럼, 바퀴벌레처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땅 말고, 땅과 관련되어서 땅보다 높은 하늘, 그 하늘을 생각합니다. 기본은 땅이에요. 기본은 땅이고,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있는 땅부터 출발하는데, 인간들이 땅부터 출발하는 이 사고방식이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뱀에게 준 저주라는 것을 인간들은 아무도 모르죠. 도통 알 수가 없죠.
인생 성공했다, 실패했다는 것은 어떤 판정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땅에서 니가 얼마나 잘 됐느냐로 판정이 나잖아요. 인생의 성공을. 땅의 밀착형이라니까요. 땅 밀착형. 그 땅 밀착형이 하나님이 마귀한테 준 저주라니까요. 그게.
배를 땅에 대고 살아라 이 말입니다. 근데 악마만 땅에 배를 대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배를 땅에 대고 산다? 바로 인간들도 배를 땅에 대고 사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인간의 이것이 하나님이 악마한테 준 본성, 악마가 수용해야 될 그 운명이라는 것을 인간들이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 악마하고 인간하고 같은 운명에 속하는 겁니다. 땅밖에 몰라요.
그 다음에 악마가 뭘 먹습니까? 흙을 파먹는다고 했죠. 흙 역시 땅에 속한 거예요. 땅에 것을 캐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도 어떻게 산다? 땅에 것을 먹고 살고, 그 땅의 것을 먹고 살면서, 나는 행복했노라! 나는 잘 살았노라! 나는 출세했노라!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피조물인 인간들이 어떻게 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재료가 된다고요. 뱀과 인간들 전부 다 한통속이 되어서 배를 땅에 밀착하고, 깔고, 여러분 한번 배를 땅에 깔아보세요. 눈에 보이는 것이 뭐 밖에 안 보입니까? 지평선밖에 안 보이잖아요. 그러면 인생 설계라든지, 내 미래상이라든지, 뭐만 보이겠어요? 지평선만 보이는 거예요. 지평선만.
마태복음 24장 40절에 보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자, 데려감을 당할 때, 그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은 어디서 어디로 데려감을 당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있는 이 장소에서 데려감을 당한다는 것은 옆 동네로 가는 것을 이야기해요. 옆 동네로 납치당한다. 북한에 납치당한다는 것은 남한에 있다가 북한에 납치당하는 것을 말하죠. 옆 동네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갈 때는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할 때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는 겁니다.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그 데려가는 장소가 없다는 사실이에요. 어디 눈에는? 땅에 배를 깔고 있는 인간에게는 이 하늘나라가, 데려가는 그 나라가 이 세상에는 없어요.
그래서 이 복음이라는 것이 어려운 겁니다. 복음이 샹그릴라 호텔처럼 싱가포르에 있으면 뭐 배를 타고 가든 비행기를 타고 가든 가면 되잖아요. 여러분 인간에게 간다는 말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해요. 옆 동네에서 옆 동네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데려감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데려감을 당할 때는 방금 이야기했듯이 없는 동네에요. 사람이 어떤 길을 갈 때에 목적지가 있으면 애를 쓰더라도 갈 수가 있어요. 근데 없는 동네에 무슨 수로 갑니까? 그 동네가 없다면 가는 방법도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구원받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냥 사는 게 중독이에요. 사는 게 중독입니다. 없어요.
없기 때문에, 구원은 뭐냐 그냥 주님께서 데려가시는 거예요. 어떻게? 홀연히.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을 때, 엘리야가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사람들은 엘리야가 죽었다고 이야기를 하죠. 그러나 성경에서는 엘리야가 죽은 게 아닙니다. 데려감을 당하잖아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성도라면, 우리는 죽었다고 표현해야 돼요? 데려감을 당했다고 봐야 됩니까? 데려감을 당했다는 표현을 해야 돼요. 근데 그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도 못 알아듣죠. 그래서 쉽게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데려감을 당하지 죽지 않습니다.
237강-YouTube강의(왜 안 믿어지는가?)20180605-이 근호 목사 237강, 제목은 ‘왜 안 믿어지는가?’입니다. ‘안 믿어지는 이유’입니다. 보통 믿는다는 말을 할 때는 어떤 식이냐 하면, 지금 그 사람을 안 믿어도 내가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 때는 믿든 안 믿든 그게 상관없지만, 뭐 하나 추가적으로 더 믿어볼까? 할 때는, “믿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면 믿지요?”라는 말을 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아쉬울 게 없어요. 지금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예수를 믿으라고 하니까, 지금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데, 보험하나 드는 식으로 예수 하나 믿어놓으면, 지금 사는 것도 괜찮지만 뭔가 더 보탬이 될 것이고, 나한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고 싶은데 어떻게 믿을까요? 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 말이죠. 어떻게 믿을까요? 지금 가진 것도 내 것이지만, 거기다가 예수님마저 내 것 만드는 방법을 저한테 알려달라고 하는 이것을 편하게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너는 못 믿어!” 너는 예수를 니 능력으로 믿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을 못 믿는다는 말이 아니고, 지금 니 보기에 정상적인 생활이라고 하는 이 자체가 정상적인 생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뭐, 지옥 가는 생활이죠. 니가 지금 잘못되어 하나님이 원하는 생활이 아니고 엉망진창이라는 거예요. 엉터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믿으라고 하면 지금 있는 것도 괜찮은데, “어릴 때는 교회 갔었는데 지금 커서는 교회에 못 나갔으니까, 그래, 이제는 좀 살만하니까 교회 나가서 예수 믿어볼게.” 지금 사는 것도 괜찮지만 거기다가 예수 믿는 것까지 보태면 나중에 안전빵이 되는 거죠. 안전망을 형성하는 거죠. 진짜 나중에 죽어서 천국 쥐고 있다가 좋은 데 가야 하니까. 지금도 정상이지만 그 정상에다가 하나 더 보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본인은 느긋한 거예요. 여러분, 저의 취지를 여러분들이 다 아실 거예요. 주위 사람들한테 “복음 믿으세요.”라고 자주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럴 때, “그래, 나는 비정상이야. 나 이렇게 살면 망하는 길이지.” 이렇게 생각 안 하고, “그래, 그게 뭔지나 듣기는 들어나 보자. 지금 사는 것도 정상이지만, 지금 내가 말레이시아에 가서 사는 것도 정상이지만, 그거 뭐 복음 하나 더 챙기면 더 낫겠지.”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 성령께서 뭐라고 해야 됩니까? 안 믿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게 전도거든요. 왜 못 믿었느냐 하는 방식. 그게 구약 이스라엘 역사고, 예수님이 유대 바리새인에게 주었던 이유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들이미는 것은 그들이 가장 가까운 자리에, 열 두 제자의 가장 가까운 자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눈앞에 있던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겁니다. 이거는 여러분들이 다 아시죠? 왜 가까이 있었고, 눈으로 목격했고, 사진 찍어도 사진 찍히는 그러한 대상인데, 왜 죽음으로 돌려보냈느냐 이 말이죠. 이것은 그들에게 믿으라가 아니라 너희들 자체가 못 믿는 이유로 가득 차있다는 겁니다. 철벽이죠. 백날 복음 전해도 그들에게 있는 속성은 믿음으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고, 배타적이고, 거부하고, 거절하고, 반발하는 요소로 가득 차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요소로 가득 차있는 입장으로 누가 예수를 믿는다면 백퍼센트 거짓말입니다. 백퍼센트 거짓말이에요. 지금 정상인데 복음 하나 알아서, 예수님 피 믿고 십자가 믿어서 천국 가는 그것까지 챙겼다. 이래 되면 지금 갖고 있다는 것과 새롭게 추가된 이 십자가복음이 한 자리에 같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안 된다는 것이 십자가의 의미에요. 사람들이 십자가를 안 좋아하는 이유가, 부활을 좋아하는 이유가,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잖아요. 그러면 지금은 살아난 것이 정상이고, 곧 죽을 거니까 뭐만 챙기면 됩니까? 죽더라도 살 수 있는 그 멋진 소식만 챙기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부활의 복음으로 보는 거예요. 부활복음 믿으면 뭘 안 다치느냐 하면, 지금 안 다친 내가 선택한 결정이 하자가 없는 것으로 계속 유지가 되니까, 구태여 비장한 결심을 할 이유가 없죠. 비장한 결심을. 선심만 써주면 돼요. 교회에게. 그리고 자기에게 복음 전하는 사람과 좋은 관계만 유지되게 되면, 지금도 정상이지만 더 정상적인 것이 올 테니까, 둘은 조화롭게 될 거니까, 이런 계산이 있는 겁니다. 근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믿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은 믿지 못한다는 겁니다. 어디에 그게 나오느냐, 마태복음 13장 14절, 15절에 나오죠.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이거는 이사야 6장 9절, 사도행전 28장 2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식으로, 세상과 주님 사이에 장벽이 있고 또한 너희들 입장에서도 복음은 장벽으로 느껴져야 너희들이 제대로 들었다는 겁니다. 복음에 대해서 제대로 마주쳤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거부감이 언제까지 가느냐, 죽을 때까지 계속 일어나요. 죽을 때까지. 그럼 신자는 어떤 사람이 신자냐, 죽을 때까지 불신자로 계속 발생될 때 이게 신자입니다. 죽을 때까지 내가 믿을 수 있는 어떤 내용도 주님은 나한테 넘겨준 적이 없다는 것을 명심 또 명심하게 돼요. 그러면 이 신자의 신자 관리는 내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이죠.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믿음이 내 자리에 왔을 때 나는 불신자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안 믿는 사람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나는 비정상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인간이 무슨 수를 써야 내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까요? 그것도 줄곧,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정상인 적이 없음을 무슨 수로 수용하고 수납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빨리 죽고 싶다고 했어요. 무엇이 그렇게 불만스러워서 죽고 싶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오게 되면, 죽을 육체에 생명이 오게 되면 내 죽을 육체를 죽을 육체라고 더욱더 티내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게 사도의 자랑거리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나 같은 인간은 진즉에 죽어야 된다는 것을, 지금 사도바울은 자랑삼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느냐, 예수의 생명은 내가 죽을 육체가 되지 아니하면 절대로 드러나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복음의 세계에 망해야 들어갈 수 있어요. 믿음의 세계, 내 망함을 경유해서 그 믿음의 세계가 나를 통해서 들추어지는 겁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여러분 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죠? “참, 애 다 키우고 남편 돈 벌고 이제는 평안히 살 일만 남아있네요.”라고요. 보니까 그런 사람은 없네요. 그렇게 부러워하는 눈총을 주는데, 말을 잘못 꺼냈습니다. 여기에는 해당사항이 없네요. 만약에 그런 말을 듣는다면, 그 말을 한 사람은 성도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에요. 여기 내 안에서, 내가 죽을 육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마그마처럼 뛰놀고 있고 들끓고 있다는 것을 다른 불신자가 알 리가 있습니까? 그저 여유 있고, 시간남고, 돈 좀 되면 그게 인생의 행복이고 성공이라고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사도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나는 진즉에 죽을 인간이라는 것을 매일같이 그걸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죽을 인간이기 때문에 진짜 죽어도 전혀 아쉽지 않아요. 왜? 죽을 인간이 죽는 거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도 얼굴이 참하고 이쁘다. 누구보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만, 여기 송재원이. 처음 칭찬합니다마는, 참 이쁘다 할 때는, 재원이가 이야기하기를 “뭐, 그런 칭찬들을 만하지 뭐? 원래 바탕이 이쁜데, 이쁘니까 이쁘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 그쪽은 서로 소통이 되죠. 근데 만약에 성도라면, “아이고 뭐 인물 잘 생겼네.”라고 이렇게 할 때, “잘생기면 뭐합니까? 이거 죽을 육체인데. 당신은 나를 몰라. 정말 몰라.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나도 당신처럼 몰랐었어. 근데 성령이 왔을 때, 주님께서 나를 죽을 육체로 만들어서 사용하되 그냥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죽을 육체로 만들어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죽을 육체로 만들어서 사용하시는 이유가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된 것입니다. 복음 전하세요. 못 알아듣게 그렇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