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통합된 고백 1804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4. 24. 06:57
2018-04-18 00:11:50조회 : 246         
통합된 고백 180417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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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121.♡.203.222)18-04-23 18:55 
강남-요한복음 16장 32절(통합된 고백)180417a-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0절. 30절에서 33절까지 딱 4절인데 이게 연결 연결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툭툭 던지는 식이기 때문에 30절 이야기가 어떻게 31절까지 연결되는지? 31절이 어떻게 32절하고 연결되는지? 32절이 33절하고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뭔가 생략한 것이 굉장히 많아 보이고 뭘 잡아내야 될지 난감할 정도로 논리가 상당히 껄끄러워요. 


여기 30절 읽어보면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믿습니다라고 이야기 했거든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면 끝나야 되거든요. 믿느냐? 그래 진작 그래야지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냐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온다’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앞에 있는 그 긍정, ‘야~ 너희들이 이제 나 믿는구나 너희들 이제 나와 흩어질 일 없지? 그렇지? 이제 우리 같이 가는거야’ 라는 것이 뭔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 가운데서 30절 31절 32절 넘어오면서 이게 엄청난 것이 여기서 생략되어 있지요. 생략되어 있는 것을 찾아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이렇게 설명, 주님께서는 모든 고백을 하나로 통합시키겠다는 의사가 있습니다. 포함이 되려면 각자 그 개인에서 예수님을 믿는 본인의 믿음은 여기서 취소라는 과정을 겪게 되요.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라는 이 모든 5명이 믿으면 믿음이 몇 종류 나겠어요? 5종류죠. 


이걸 전부 다 무효시키는 겁니다. 무효시키고 하나로 통합하려면 뭐가 나오느냐? 하나의 고백이 나와야 됩니다. 하나의 고백. 이 5명 제자들 12명 제자들이 하나의 고백이 나오려면 하나같이 동일한 경험을 해야합니다. 그 경험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 놔두고 우리는 도망쳤다는 거예요. 예수님 놔두고 도망쳤다가 자신의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본인의 고백 속에 공통 요소로 거기에 담겨야 되는 겁니다.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30절에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되어 있죠? 그러면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사전에 의논한 게 아니예요. 뭐가 다르냐면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가 되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야기 할 때에 11명이거든요. 11명을 생각할 때에 그래 2번 3번은 나를 안 떠날 것이고 6번 7번은 딱 보니까 너 나 배반할거야 이렇게 구분되어 버리면 2번 3번은 연결 될 것이고 6번 7번은 탈락할 것이니까 나중에 하나의 통합이라든지 하나의 고백이 될까요? 안될까요? 안 되지요. 안 된다 이 말이죠. 


우리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나올 때 이걸 전부 한꺼번에 하나의 절벽을 만들어 버려야되요. 단절을 일으킨다. 믿는다고 했던 너, 나, 2번 3번 7번 8번 11번 그 11제자의 전부가 한 통속이 되어서 예수님을 놔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춘천으로 가든지 영월로 가든지 전부 다. 예수님이 안 보이는 곳으로 갔지요. 예수님이 안 보이는 곳. 


예수님 때문에 뭔가 같이 엮어서 당할 이유가 없는 곳으로 도망치는 거예요. 나 예수 모릅니다. 예수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라고 도망을 치는 과정이 나중에 뭐냐 하면 통합된 고백으로 하나로 묶여지죠. 통합된 고백으로. 그러면 그 통합된 고백은 개인의 개성이나 열성이나 노력과는 무관한 것이 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연결시켜보면 ‘우리는 주님을 내가 믿었던 것은 그것은 믿음이 아니였습니다’ 라는 고백이 주께서 성령으로 주시는 믿음 안에 거기 담겨 있어야 되요. 주시는 고백 속에. ‘나는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가 믿음이 되는 것. 나에게 나오는 어떤 요소가 예수님을 놔두고 천리만리 도망치게 하는 성질이 처음부터 저한테는 이렇게 들어 있었습니다 라는 고백이예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주님이 가까이 있으니까 눈에 보이니까 늘 같이 붙어다니면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기쁘게 영광 돌리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렇게 되지요. 이것은 내 쪽에서 다가서는 것은 주님께서는 거부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연결시키면 하나의 고백이 아니면 주님께서 거절한다예요. 하나의 고백이 아니면 주님께서 거절한다.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할 때 어떤 사람 등장하게 되면 또 누구 하나 등장해서 믿습니다 하지 말고 너희들끼리 한번 서로 믿음 내놓아봐라. 내놓고 그것이 하나로 통합되지 아니하면 누가 잘못되었든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는 겁니다. 누가 되었든. 여기 한 10명이 온다면 또는 100명 온다면 동일한 고백이 100명이 동일한 고백을 내놓지 않으면 전부 다가 잘못됐든지 일부가 잘못됐든지 어쨌든간에 누가 잘못된 믿음인 것이 분명히 들어 있다는 거죠. 


왜? 주께서 원하는 것은 하나의 고백이 아니면 주님께서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기서 하나로 통합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이렇게 하나로 통합이 되면서 어찌어찌 했던 간에 11제자가 다 동일한 고백을 했다 칩시다. 치게 되면 그다음에 동일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동일한 기쁨도 동일한 고백에서 같이 기뻐해야 되요. 나로 인하여 기뻐하면 안 됩니다. 나로 인하여. 


내가 예수님 믿어서 나는 기쁘다 이렇게 되게 되면 그거는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니까 동일한 기쁨이 아니죠. 그러면 그 동일한 기쁨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33절 나옵니다.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 33절에서 나오는 이 체험, 이 체험이 이것은 10명이 오든 20명이 오든 참으로 주님의 백성이라면 주님의 제자고 주님의 성도라면 이 동일한 체험은 다같이 동일한 고백으로 생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해볼께요. 나는 믿습니다 할 때 이건 별로 어려운거 아닙니다. 지금 제가 일부러 어렵게한게 아니고요 정말 쉽습니다. 한번 적어볼께요. 나는 믿습니다 여기에 목적어가 있겠죠. 나는 예수님을 또는 주님을 뭐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의 행하심 믿습니다 천국을 믿습니다. 


어쨌든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한다면 여기서 인격적인 요소는 나 하나만 딱 달랑 들어가죠? 나 하나만. 나 하나 들어가버리면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면 이걸 우리는 뭐냐 주님을 믿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나는 여기서 우길 수가 있어요. 우긴다. 내가 나를 믿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내가 지금 주님을 믿는데 내가 이걸 아는데 어떻게 이걸 거짓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내가 믿는데 라고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 믿습니다 라는 인격자가 나만 달랑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통합의 고백은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여기 보면 여기 33절에 보면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담대하라 그 다음에 뭐가 들어가죠? 담대하라 내가(예수님) 세상을 이겼죠?! 나를 믿는 나가 아니라 여기에 나가 빠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 조건이 되는 거죠. 내가 들어가면 믿음의 조건이 주께서 인정하는 조건이 성사되지 않아요. 


주님이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세상을 이겼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이겼습니다’가 내 안에서 작용한다 이 말입니다. 내 안에서. 왜냐하면 지금 그 앞에 말이 뭐냐 하면 ‘주 안에서’라는 말이 나오죠 33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니까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이 여러 가지 사람이 있는데 여러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믿습니다가 내가 주인공이 되지 않고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습니다가 이게 믿음의 본 내용으로 일치되게 전부 다 공통적으로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고백이라는 말은 뭐냐?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체험이거든요. 이 체험된 고백은 막 해도 안돼요. 수갑 채워도 할 수 없어요. 체험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이 체험적이고 주님 안에서 또는 내 안에서 주님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어요. 그게 체험이니까. 그게 체험이거든요. 


우리가 주님 빼놓고 내가 체험할 일은 지난번에 내가 세상을 이겼지 그런데 그건 지난번에 이긴 거고 오늘 또 만약에 지게 되면 지난번 이긴 것은 그냥 이긴 걸로 취소되어 버리고 오늘 이겨야지. 또 이렇게 또 또 계속해서. 그럼 오늘 이겼지만 내일은 확정할까? 내일은 보장될까? 내일 더 센게 들어오면 더 센 골리앗이 들어오면 나는 못 이기는데 또 내일 또 걱정되는 거예요. 제일 걱정되는 것이 뭐냐? 치매 걸렸을 때. 


지금 우리 아는 어떤 분은 우리교회 잠시 오셨던 분인데 연세가 70이 갓 넘었어요. 올해 72인데 파킨슨병 진단받았어요. 아직 정신은 있어요. 아직 초기니까. 정신은 있는데 이게 점점 증세가 서서히 내려가는 거예요. 브레이크 없이 비탈길로 내려가는 거예요. 이거는 말릴 수가 없어요. 기억하라 기억하라 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파킨슨병은 약도 없어요. 


그렇다면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예수, 복음 이것은 어떻게 되느냐? 내가 가지고 갈까요? 내가 가지고 간다면 나중에는 치매라는 것은 나중에 어떤 뜻이냐 하면 치매는 동물적인 본성만 달랑 남아요. 동물적인 본성. 때리면 아프다. 먹을 것 주면 배부르다. 이 치매는 어느 정도냐면 나중 되면 내가 누구냐를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고깃덩어리 되니까. 신경세포가 살아있는 고기 덩어리니까 그냥 기계라는 말이 제일 적당해요. 툭 건드리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하잖아요. 그게 치매예요. 


지렁이가 나는 지렁이라고 막 시를 쓰고 문학 쓰고 안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 예수 믿습니까? 라고 묻는 자체가 질문이 성립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평소에 내가 한 체험 말고 평소에 제 정신이 있을 때에 내가 한 체험 말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나한테 퍼부은 체험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퍼부은 체험은 내가 치매 걸려도 괜찮아요. 왜? 처음부터 그 체험에 대해서 처음부터 나한테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너 계속 믿을래? 안 믿을래’를 나한테 다그친 적이 없다 말이죠. 왜? 일방적으로 쳐들어 왔으니까. 


치매 걸려도 괜찮고 파킨슨병 걸려도 치매 파킨슨 연달아 해도 괜찮고 당장 망해도 괜찮아요.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옆에 달린 강도가 그날 밤에 구원받은 이유도 예수님을 자기가 어디 모시려고 돈 좀 썼습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주님께서 주선한 체험 아닙니까. 이 상황이 주님께서 주선한 상황이라고요. 


그러면 주 안에서 이렇게 된다면 결국은 이걸 하나의 글로 생각한다면 십자가 강도하고 똑같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옆에 강도 둘이 있었고 제자들은 도망갔습니다. 이걸 예수님이 홀로인 혼자만의 체험을 성경을 통해서 이걸 계속 확장시켜 버리고 확장시켜 버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뚝 섰고 거기에 예수님의 11제자가 이렇게 있다면 의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체험에 그들은 본의 아니게 여기 이 체험에 주님의 강한 체험 때문에 이거는 덮쳐질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이게 강도가 됐든 제자가 됐든 이 체험은 본인 담당이 아니잖아요. 본인이 책임질 체험이 아니잖아요. 일방적으로 주어진 체험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주어진 체험이기 때문에 본인 담당이 아니잖아요. 본인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니까요. 세상에 이런 기쁜 소식이 어디 있어요? 


그동안 예수 믿으려고 얼마나 정신통일 했습니까? 정신통일을 믿음이라고 그렇게 배웠거든요. 그러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돼. 내 체험을 내가 유지를 해야 될 체험을 추가적으로 더 부과 받게 되는 겁니다. 나 체험했잖아요. 그 체험을 내 힘으로 계속 지탱을 안하면 타협된다는 이 무서움이 더 배가적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마귀가 얼마나 갖고 놀기 쉽겠습니까? 마귀가. 마귀한테 완전히 벌벌 떨면서 살아온 겁니다. 


주님의 일방적 체험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거는 내가 이 체험을 내가 구성해야 된다고 마귀로부터 그렇게 가르침을 받아 놓으니, 주님 새벽에 은혜 받았으니까 이 체험은 됐는데 오후 2시반 되어 가지고 또 누구하고 또 싸워가지고 아침에 새벽에 은혜 받은 거 다 쏟아버렸으니까 지금 이 순간 주께서 재림하시면 주님 만날 수 있겠습니까? 휴거 됩니까? 지금 혼자서 온갖 걱정 다하고 있는 겁니다. 


본인이 남을 용서하는 그 타이밍에 맞춰서 주님이 재림하시면 얼마나 신납니까? 그런데 항상 지금 멱살 잡고 싸우고 있는데 주님께서 오셔서 딱 오셔서 하는 말이 참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두 사람이 맷돌을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이렇게 나오면 갈릴리 그 옆에 박물관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맷돌이 옛날 맷돌이 나오는데 한국 맷돌은 혼자서 가는 거잖아요. 갈릴리 맷돌은 두 사람이 조가 안 맞으면 맷돌이 갈리지가 않아요. 그만큼 맷돌이 커요. 둘이 조 맞추다가 한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사람은 놔둔다 이 말이죠. 


그리고 두 사람이 잠을 자다가 한사람은 데려가고 한사람은 놔둔다 할 때에 거기다가 주께서 또 뭐라고 합니까? 깨우라 하거든요. 그러면 그 시와 때도 모르는데 깨어 있으면 종일 잠들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도적같이 온다니까. 그럼 도적이 어느 시점에 도적이 미리 예고하고 가는 도적이 없잖아요. 그러면 늘 깨어 있어야 되요. 그럼 성냥개비 가지고 여기 눈에 꽂아야 됩니까? 눈 감지 말라고? 


아 기름은 옛날부터 주유소에 가서 기름 준비 했지요 옛날부터. 기름 준비하라 해서 기름은 기본적으로 있지요. 그럼 기름 준비하는게 뭐가 어려워요? 단지에다가. 갈릴리 보면 단지도 많이 있어요. 단지도 크지도 않아요. 거기에다가 기름 담아가지고 놔두면 신랑 언제와도 괜찮다 이래도 괜찮은데 중요한 것은 기름만 준비하면 된다고 했는데 문제는 기름만 준비하는게 아니고 깨어있으라고 하니까 이것도 지켜야 되고 저것도 지켜야 되고 이것도 내 체험 저것도 내 체험 체험을 한 두 개 지키는게 아니고 수십 개 체험을 성경 나온 체험을 다해야되요. 성경 나온 체험을 다 해야돼요. 


그거 어떻게 다 감당하시려고요? 율법도 10개 다 못 지키는데 그 체험을 다 유지하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흩어짐이라는 너무나 멋진 체험을 한 거예요. 믿었는데 어떻게 됐다? 도망쳤다는 체험. ‘내가 믿습니다’라고 방금 제자가 이야기 했잖아요. 


잘 들어보세요. 내가 믿습니다 했지요? 내가 믿습니다가 이 내가 믿을 수 없는 나를 여기에 박아 놓도록 네가 할 수 있는 체험을 네가 다 보여주고 그걸 끊어버리는 겁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체험 너한테서 나올 수 있는 ‘믿습니다’ 라는 체험을 온갖 다 털어서 내놓게 해놓고 결국 그것이 너와 내가 이별해도 네가 할 말이 없는 사태가 일어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모든 걸 다 내놓았어요. 그 믿습니다 조차도 내가 믿습니다 조차도 아무 짝도 소용없다는 거. 그게 슬픈 소식이 아니고요 그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내 쪽에서 내놓은 모든 열성과 성의와 흔히 말하는 순종과 그리고 순전한 믿음이라고 하지요? 순전한 믿음 다른 말로 하면 겨자씨만한 믿음, 온갖 그 모든 것도 내 쪽에서 시작한 그 모든 것은 그것은 주께서 안 받습니다. 


주께서는 통합된 고백만 남아요. 그 통합된 고백은 너와 나의 차이도 그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똑같아. 나 놔두고 도망치는 그 성질은 너라도 할 거 없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성질이고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에 그 본성에 요소가 가미된 믿음은 나는 믿음으로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 


그런 일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바리새인이 초정했을 때 평판이 안 좋은 그 마을에 소문난 어떤 여인이 울면서 향수를 딱 깨면서 울면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잖아요. 씻길 때 그 옆에 있는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이렇게 평론을 합니다. 평을 해요. 그 믿음에 대해서 평을 합니다. 원래 인간은 남의 믿음 평하기 좋아하잖아요. 평을 하는데 뭐냐 하면은 더러운 여자로부터 출발해서 지금 내가 초청한 거룩한 선지자 예수님에게 나아가는데 그것이 과연 더러움이 거룩을 오염시킨다는 그 사실을 예수님은 왜 당신은 모릅니까? 이렇게 된거예요. 


적어도 깨끗하려면 나같이 깨끗해야 한 사람이라서 예수님하고 이렇게 연결되는 것은 인정되는데 평판이 좋지 않은 더러운 짓에 소문난 그 더러움이 그대로 유지된 채 그 더러움이 예수님 발 앞에 깨끗한 신체에 묻힌다는 것이 그것은 예수님은 메시아 아닐 수도 있다 의심을 드러내죠. 


그런데 예수님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여자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먼저 용서 받은 사랑이 그 여자에게 나로부터 나갔기에 그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왔기에 어떤 빚도 탕감해 준다는 그 정보로서 많이 용서 받았기에 나를 많이 사랑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는 나한테 물 한 그릇 떠줬느냐? 너는 나한테 발 씻을 물을 떠 줬느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너는 생판 너에게서 출발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용서받은 자의 모습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 여자의 것이 아니고 그 죄와 그 더러운 죄와 예수님의 용서가 결합된 모습으로 예수님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자기가 스스로 회수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여자의 체험은요 여자가 의도한 체험이 아니고 주께서 유발시킨 체험인데 놀라운 것은 그 체험을 전혀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그걸 행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극한 대조가 일어나는 겁니다. 극한 대조.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은 빛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그 모든 사랑 이것은 그냥 맨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둠이라는 그 배경 속에서 그걸 발휘시킵니다. 


그게 뭐냐하면 바로 모든 예수님께서 잡힐 때 너희들 각각 전부 다 가버리죠. 가버리면 여기 32절에 보면 가버리면 누가 남습니까? 누가 남는다고 되어 있어요? 다 제 갈 길로 가니까 누가 남지요? 예수님 혼자 남지요. 예수님 혼자. 예수님 혼자 남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뜻이 분명해 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전에는 예수님 곁에 혼자가 아니고 누가 있었습니까? 제자들이 옆에 붙어 있었지요. 자기가 예수님과 가까이 있다고. 이럴 때는 아버지의 뜻이 분명치 않아요. 


아버지의 뜻은 뭐냐? 대조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우리냐? 아니면 예수님 혼자와 그리고 각자 흩어진 우리 모습인가?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룰 때 예수님의 진가가 나타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예수님의 ‘유일성’이라 해요. 오직 예수 이름만. 거기에 곁다리 우리 행함을 보태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건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건지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네 체험 말고 예수님이 홀로 남았다는 그 체험, 그 체험이 너한테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러면 그 체험 안에서 우리는 부끄러울까요? 자랑스러울까요? 심히 부끄럽지요. 왜? 인간의 속성은 자기 자랑 안하고서는 못 배기니까. 눈만 뜨면 자기 자랑, 눈만 뜨면 자기 행한 것 계산하거든요. 이것밖에 할 줄 모르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그걸 익히 아시고 그걸 벌써 알아요. 알고 함께 있다가 혼자 딱 단독으로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함께 있다가. 


그리고 함께 떨어져 나갈 때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 이제는 믿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아버지와 함께 있는 줄 알겠습니다’ 해놓고 떨어져 나가버리는 겁니다. 이제야 우리가 주님이 아버지께로 온 줄로 믿사옵니다 해놓고 자기가 드러낼 수 있는 것 다 드러내게 하고  떨어내죠. 그러면 체험은 예수님의 혼자 남았던 그 체험, 그 체험 있을 때 구원받는데 혼자 남았다는 것은 그냥 처음부터 혼자였는데 혼자 남았다가 아니라 처음에는 웅성웅성웅성 소위 예수 믿어볼까? 이렇게 깔짝대면서 시도했던 모든 것을 주께서는 먼지털이로 전부 다 떼어내는 그 체험. 


참 주님께서는 참 야속하지요. 주께서 예수 믿으면 예수님께서 받아주시고 기특하다 착하다 이렇게 등짝 두드리면서 좀 더 힘을 내 그래 조금만 더 하면 너 더 잘할 수 있어. 이렇게 독려하고 격려해줘서 아 나는 주님과 한 편이구나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면 얼마나 외롭지 않고 좋겠습니까? 그러나 너무나 차가워요. 그걸 차도남? 너무나 냉탕. 떨어지고 내가 부를 때 오라는 이야기예요. 네가 알아서 기어오지 말고. 아이고 우리가 잘못했구나 회개하자. 회개해서 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주님 믿는 그 믿음 안에 뭐냐? 나는 회개했다. 내가 알아서 회개했다가 포함이 되니까 이거는 구원 못 받습니다. 내가 반성한 것 회개한 것 섞이면 안돼요. ‘불러주시니까 왔습니다’가 되어야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제목으로 삼을까 말까 고민인데 ‘관계적 수동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관계적 수동성. 대표적인 것이 ‘선악과 따먹지 말라’입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할 때 ‘말라’라고 명령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나 자유가 전제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안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말라 명령했다는 말은 네가 따먹을 수 있고 안 따먹을 수도 있다는 그 자유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답변하기 곤란하다. 


그런 자유의지가 갖추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유의지는 나는 바나나 먹을래 라고 할 수 있는 자유는 없어요. 나는 그 선악과 안 따먹고 바나나 먹을래 딸기 먹을래 할 수 있는 자유는 없어요. 왜냐하면 지정해 줬으니까. 명령을 하되 지정된 것을 제공하는 것은 이것은 뭐냐 하면은 관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적인 수동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관계적인. 


그냥 수동성이 아니고 먼저 환경을 누가 만드냐? 환경 조성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해주고 먹을래 말래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예요. 결국은. 상황을 우리 인간에게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악과 가운데 꽂아놓고 따먹지 마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이게 무슨 우리한테 사전 의논 없이. 바나나 나무 심어 놓고 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인간아 중앙에 좋은 나무 있는데 괜찮은 나무 있거든 추천해봐라. 무슨 나무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 해야되는데? 이렇게 사전에 의논한적 없지요? 


일방적으로 선악과 심어놓고 그다음에 먹어라 따먹지 마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절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그 자유는 주님과 관계를 맺은 하에서 수동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예수님께서 그러면 일방적으로 우리를 구원하면 우리가 로봇이냐? 많이 들었죠? 우리가 기계냐? 우리에게도 자유의지 있다. 라고 이렇게 우기는 것은 지금 엉뚱한 소리 하고 있는거예요. 


모든 무대장치는 우리가 마련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 마치 우리보기에 마음껏 자유를 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과와 똑같은 거예요. 왜 그렇게 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복음과 상관없는 고백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늦게 오신 분들 많아가지고 강의를 새로 다시 해야겠습니다. 이거는 제 자유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30절에서 33절까지 뭔가 연결이 그냥 봐서는 연결이 안 되어 있죠. 안되는 이유가 처음에 우리가 또는 내가 지금에야 예수가 아버지께로 온 것을 믿습니다 할 때에 그 때는 누가 믿음의 주인공이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거든요.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면 끝까지 믿습니다가 계속 나가야 되는데 31절에 뭐냐 하면 보라 너희가 32절에서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가지요. 


제 곳으로 간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가지치기를 해버린다.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다 할 때 이 붙어 있는 상황인데 그걸 의도적으로 떼놓는 겁니다. 떼어놔 버리죠. 떼어놓게 되면 누구만 남는다 했어요? 오직 예수님만 남지요.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이 말입니다.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 쪽에서 불러주지 아니하면 어떻게 주님께서 불러 주지 아니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다 떨어져 나갔으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만약에 다 불러주게 되면 각자 믿는다는 것이 이게 인정을 못 받지요. 왜냐? 다 믿습니다 하는 상태에서 다 떨어져 나갔으니까.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전부 다 다시 불러 모은다면 통합된 고백이 되요.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가 성립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불러주신 분이 한 분이기 때문에. 불러주신 분이 한 분일 때 주님께서는 그 믿음의 내용이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체험을 담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경험했던 체험을 담아요.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은 나를 버렸다 떠났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너희를 불렀다가 믿음의 내용으로 이게 담기게 되는 겁니다. 담기게 되면 우리는 수동성이 되요. 수동성이 되고 주체는 누가 되느냐? 예수님이 주체가 되죠. 


그러면 믿음의 내용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를 볼 이유가 없어요. 볼 필요도 없어요. 왜? 더 이상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떨어진 기정사실화된 우리는 떨어져 나갔던 사람이라는 기정사실화된 입장에서 우리한테 어떤 책임도 인생을 살면서 어떤 일도 우리에게 책임을 물어요? 안 물어요? 안 묻지요. 왜냐하면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행했던 모든 것은 일단 책임을 안 묻습니다. 착하게 살았든 성실했든 주 앞에 순교했든 그런 건 아예 보지도 않아요. 통합된 고백이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 인정을 안 합니다.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주께서 불러주게 되면 통합된 고백이 나오는데 너 어떻게 왔어? 너는 어떻게 왔어? 너는 어떻게 왔어?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주님께서 찾아주셨다는 전부 다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고백이 나올 때만 주께서 인정하신다 이말입니다. 같은 고백이. 그 고백이 나올 때에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주인공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주님이 주인공이 되기 때문에 주님에게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은 33절에 보면 보라 내가 세상을 어떻게 했어요? 이겼지요. 


그러면 우리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믿음의 내용이 뭐냐 하면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 세상을 이겼다가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뭐가 계속 살아 있어요? 주님이 세상을 이겼다. 어제도 오늘도, 오늘도 주님이 세상을 이겼다. 그럼 내일도 주님이 세상을 이겼지요. 그러면 자신의 자기 인생 남은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빠져있지요? 


빠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파킨슨병이나 치매에 걸려서 하나의 짐승이 된다 할지라도 처음부터 빠져 있었으니까 치매 걸리든 안 걸리든 빠져 있었으니까 주님이 우리 안에서 세상을 이긴 증거가 되는 치매 걸리든 간에 주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체험에 내용에 치매 걸리든 안 걸리든 주님께서는 세상을 이겼으니까 그 혜택은 누구한테 와요? 우리한테 오잖아요. 


말은 길었습니다만 별로 논리가 어렵지 않지요? 하나만 생각하면 되지요. 우리는 전부다 주님 곁을 떠나서 각기 제 갈 길로 흩어 졌다 각기. one two three four five six ~ nine ten 각기 제 갈 길로 갔다 그 각기가 나중에 부를 때는 one two three four 가 아니고 전부 다 하나가 되겠지요. 그 하나의 예수님의 체험을 우리에게 제자들에게 줄 때 넘겨줄 때 주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바로 성령의 오심, 성령세례입니다. 성령세례예요. 


놀라운 사실은 요한복음 1장부터 그게 나온다는 사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물 세례주고 있었습니다. 세례라는 것을 여기서 한번 정리하고 깔끔하게 정리해야 되죠. 세례라는 것은 물세례 세례요한에 의하면 덮침이예요. 그냥 덮치는 겁니다. 그 포도밭도 있고 뭐 옥수수밭도 있고 산등성이에 밭이 많잖아요. 밭이 많은데 쓰레기장도 있고 또는 닭 양계장도 있고 많다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그 지역에 큰 폭설이 왔습니다. 


폭설이 오면 양계장이든 포도밭이든 관계없이 전부 다 어디에 파묻힙니다. 똑같이 눈 속에 파묻히죠. 통합된 고백이죠? 그러면 통합된 고백을 구성할 때 우리는 동일한 주님의 성령 받았다 나만 이야기 하지 말고 짝대기 가지고 그 눈밭을 한번 쑤셔보자. 뭐가 나오는지. 쑤셔 보니까 쓰레기통 나오고 쓰레기 나오죠. 그러면 그 쓰레기 나오는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쓰레기였는데 주님의 세례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고백이 나오겠지요? 그럼 저쪽은 나는 의사였는데 의사여서 구원 받는게 아니고 주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 동일한게 나오겠죠. 


그래서 일단은 전부 다 뭔가 눈처럼 눈밭처럼 덮혀야 해요. 덮힌 사람, 성령으로 덮힌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 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다툴 이유가 없지요. 그걸 가지고 요한복음에서 뭐냐 하느냐 하면은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관계적 수동성이예요. 사랑하라는 말은 결국엔 사랑이라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상태를 내가 설정해 줄게. 왜? 예수님의 세상을 이긴 체험이 너희에게 눈처럼 내리기 때문에 그게 사랑이 성립되는 거예요. 


사랑이 성립 안 될 경우는 누구냐 하면 눈이 내린 적이 없이 내가 주님 사랑하는 걸 독자적인 내 사랑 가지고 네 사랑 끄집어 내가지고 그걸 맞출려고 하니까 이게 맞춰집니까? 안 맞춰집니까? 이게 안 맞춰지는거예요. 너는 뭐 십일조 얼마했어? 기도 몇 시간? 이건 뭐 맞아 떨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너는 한 달에 헌금 얼마해? 한 달에 오천원 한다. 에게~ 그런데 오천원해도 구원 받았다. 나는 얼마했지? 나는 만원해도 구원받았다. 그러면 만원짜리가 아~ 아까워라 나도 오천원 할래. 


이렇게 되어 버리면 지금 무엇에 주목하다가 갑자기 주목이 어디로 바뀝니까? 돈에 주목해버리죠. 그러면 통합된 체험이 아니라니까요. 또 어떤 사람은 한달에 이천만원 헌금했는데 나는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또는 성령으로 구원받았다 하게 되면 그 말투를 봐야해요. 나는 이천만원밖에 안했는데도 구원받았다 아이고 횡재했어. 이렇게 나올 사람 거의 없지만 이 논리에 따르면 논리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나 이천만원해도 구원받았어. 오천만원 안했는데도 이천만원밖에 안했는데도 구원받았어. 나 너무 신다. 글쎄 그런 사람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잘 없지요. 


인간 대 인간을 비교한다는 것은 지금 자기체험을 따로 적립하겠다는 수상한 시도입니다. 비슷한 예를 한번 들어볼께요. 일기예보에 보면 지난 1월달 2월달 지난 12월달부터 내 평생에 그렇게 추운 겨울 처음 겪었습니다. 진짜 힘들었어요. 좀 쉴 틈을 안줘요. 추운데. 사람을 좀 견디게 해야지 춥고 춥고 또 춥고 약간 덜 춥고 또 춥고. 아 너무나 힘든거예요. 할 건 다 해야되고. 


그런데 기상대에서 춥다 왜 추운 것을 이야기하는데 추운 것은 찬 공기가 덮어서 춥다는 거예요. 아 이게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찬 공기가 덮여서 춥다는 거예요. 왜 춥냐? 찬 공기가 덮여서 춥다는 겁니다. 말이 내용이 더 추가된 게 아무것도 없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추가된 것 같아요. 뭐가 추가됐는지 한번 보세요. 


춥다 두 자 잖아요. 춥다. 이때는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은 내가 춥다예요. 내가 춥다. 맞지요? 내가 춥다. 그런데 찬 공기의 대기권이 한반도를 덮어서 춥다 할 때는 갑자기 관심이 나에게 관심이 떠나서 내 위에 포괄적으로 전면적으로 덮고 있는 덮은 데에 다가 치중을 하니까 마치 새로운 내용처럼 느껴지죠. 동일한 결과인데도 불구하고. 이렇다고 덜 춥고 이런거 없잖아요. 동일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관심사가 뭡니까? 아이고 내가 옷을 덜 입었나? 내가 감기초기 아닌가? 그게 아니고 찬 기후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덮었기 때문에 추운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그 체험이 어디로 파생됩니까? 내가 춥다로 파생되듯이 주님께서 하신 승리했다가 어디로 파생되요? 나도 세상을 승리 매일같이 이기는 체험 속에 내가 지금 죽듯이 지금 그 찬 공기에 눌려있다는 거예요. 운전하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은 그냥 통과하는데 나는 걸려서 신호위반했습니다. 해가지고 갑자기 벌점에다가 오만원짜리 하나 끊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승리한거예요? 패배한거예요? 그날. 이 이야기에 의하면 승리했지요. 오만원짜리만 걸렸으니까. 20만원짜리인데 5만원짜리만 걸렸으니까. 


나의 과거의 체험에 의하면 경찰한테 안 걸리는 것이 그날의 승리로 알고 있는 체험이. 주님으로 전환되니까 내가 춥다 옷 껴입으면 되는 줄 알았지만 옷을 껴입어도 소용없어요. 주님께서 찬 기운을 덮어주는 이상은 내가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것은 세상을 이긴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승리한게 아니고 주님이 승리한 거예요. 


거봐 오만원 짜리 걸려도 네가 평안하잖아. 잘못하면 주님 지금 약을 올리십니까? 하는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아 내가 너무 돈 사랑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라는 그 성경말씀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기 위해서 생돈 오만원이 나가게 하시는 그러한 승리의 구조에 다시 한번 그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거예요. 그런 승리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오만원 날라가겠습니까 잘못하면 부도날 수 있어요. 


어쨌든간에 주님께서는 평소에 우리는 이런걸 못 느끼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는가? 짝대기 들고 쑤십니다. 이 쓰레기야 눈 덮힌 곳에 쓰레기 보면 아 우리가 이렇게 쓰레기인데 눈 덮여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본인이 쓰레기라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자기가 예수 믿었다고 예수 성령 받았다고 잘난체하는 그 옹호함이 또다시 그게 계속되거든요. 그때마다 주께서 이렇게 쑤십니다. 너는 뽕밭이네. 뽕가지고 구원받으려면 뽕 따가지고 천국 가봐라. 다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갖고 있는 전문직업이나 내 직장 내 가족으로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요건이었다는 겁니다. 


현재 내가 치중하고 있는 내 삶과 내 청춘 내 인생 과거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억의 집대성이 결국 나로 하여금 지옥가게 만들지 천국가게 못 만들었다는 겁니다. 나는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계속 그쪽으로 세상 사람과 똑같이 나는 이런 전문직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간다 그걸로 줄기차게 줄창 그걸로 내칠 수밖에 없는 자였는데 중간에 브레이크 걸어서 눈 내리게 해가지고 구원 받았습니다라는걸 그때그때 마다 깨닫게 하는 거예요. 한 번씩 쑤셔 줘야된다니까요. 쑤셔주면 아파요. 


아프면 안 아프기 위해서 우리는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걸 반발해버립니다. 주여 지난번에 십일조 냈잖아요. 그런데 오늘 왜 내 뜻대로 안해줍니까? 반말이 나와요. 지난번에 두 명이나 전도했잖아요. 교회 보냈잖아요. 그러면 이번 그 매매건은 잘 성사되어야 하는데 왜 지난번에 두 명이나 전도했는데 왜 집주인이 집세 올려달라고 합니까? 이런 식으로 반발다 있어요. 짝대기가 쑤시는 순간입니다 지금. 고이 덮었던 나의 더러운 속성이 쭉 덮어둬요. 그렇게 경제적으로 나가면 가슴 아프니까 경제적 손해 안 보는걸로 이야기할께요. 


그렇게 주께 잘했는데 같은 교회 김집사가 와가지고 시비거네? 머리 꼬라지하고 뭐 이런 식으로. 갑자기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려. 성질난다 이런 식으로. 옆에 꼭 짝대기 있어줘야되요. 짝대기가 없으면 안되요. 짝대기 있어줘야 다시 그때그때 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지. 짝대기가 없으면 자기가 천하에 신자로 착각한다니까요. 


눈안에 있는 것은 뭐냐? 결국 주님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요소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주님께서 커버함으로 말이암아 니가 무슨 짓을 해도 이미 내 안에서는 너는 어떤 인생을 살아도 내가 보장할게. 너는 세상을 이겼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세상을 이겼다는 것을 조금 더 이야기 해봅시다. 그럼 세상을 이겼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여기에 어떤 바위가 있는데 옛날 유적지가 있어요. 글씨가 있어요. 뭐 한자로 글씨가 쓰여있다. 이걸 고고학자가 발견했어요. 이걸 가만히 놔두면 훼손되니까 박물관 지어놓고 바위를 뜯어내겠죠 바위를 뜯어내겠죠. 뜯었는데 여기에 암석이 있다. ‘암석아 암석아 니가 알아서 뜯겨져 나오너라’ 이러면 암석이 ‘알았습니다’ 하고 뜯겨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어떻게 합니까? 강제적으로 뜯어내야겠죠. 


뜯어낸다. 뜯어낸다는 말은 관계적 수동성에 포함되어 있지요? 외부에서 뜯어내야 되니까 강제로. 뜯어낸다. 여러분 여자들 싸움할 때 가까운게 뭐냐 하면은 머리 쥐어 뜯잖아요. 머리가 알아서 빠집니까? 잡아 당겨야 빠지지요. 뜯어낸다 또는 국에서 건더기 건질 때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들어낸다하지요. 들어낸다는 말은 기존에 속해있던 환경이 따로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환경에서 우리는 이미 푹 스폰지처럼 그 환경뿐인줄 알고 그게 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푹 세상에 젖어 살았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빠져나갔잖아요. 와서 빠져나갔지요. 이 세상이 지옥 아니라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지옥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은 착하고 어떤 사람은 악하다면 알아서 오면 되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부러 오셨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내가 손대지 않으면 누구도 현재 기존의 이 어두운 세상에서 뜯어질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들어낼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니까 제자들이 주님 반긴다고 제자들 오니까 봐봤자 기존에 젖어 있는 이 의식과 이 사고방식 가지고 이 더러운 손으로 가지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높습니까? 뭐 예수님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이것은 뜯어진게 아니고 기존에 암석 덩어리가 통째로 주님 앞에 다가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뜯어지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걸 도려낼 필요가 있어요. 이걸. 


도려낼 때 이 도려낼 때 칼로 도려내는 것도 아니고 전기톱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뭐로 도려내느냐 하면은 바로 나랑 같이 죽자. 죽음으로 도려내요 죽음으로. 내가 너 죽게 만들어 줄게. 마르다 마리아 오빠처럼. 죽고 난 뒤에 몇 일만에 살아났습니까? 나흘 만에 살아났지요. 그럼 예수님은 죽고 난 뒤에 몇 일만에 살아났습니까? 사흘 만에 살아났지요. 예수님의 죽음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이 누구의 능력이죠? 누구의 능력이죠? 두 자. 성령의 능력이죠. 그 능력이 바로 성도에게 주는 겁니다. 


그러면 로마서 8장에 예수 죽은 자까지 살리시는 영이 그 다음에 너희 속에 있으면 주님을 뜯어낸 그 영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이게 기쁜 소식이 아니고 뭡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성령이 오니까 우리는 다 도망친 인간인데. 그냥 쓰레기장이예요. 그런데 주께서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면 그 뜯어낸 몰골이 희한하지요. 잘났습니까? 개판이죠. 그 개판을 박물관에 전시할 때 그 전시된 그것을 교회라고 이야기해요 교회. 


서로 사랑할 수 없어요 전부다 개판이니까. 너 의사해서 개판 판사해서 개판. 전부다 개판이다. 개판인데 그 개판을 그리스도 거룩한 몸 되게 하셨으니까 이게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뭐겠어요? 누구만 자랑하겠어요? 주께서 뜯어나갔던 십자가에 그 능력만 우리는 고백하는 그것이 오늘의 교회입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 (IP:121.♡.203.222)18-04-23 18:56 

강남-요한복음 16장 32절(통합된 고백)180417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32절에 보면 제자들은 다 떠났는데 예수님 혼자 남았다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함께 있다고 했지요?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세계는 예수님만의 세계가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있는 세계죠. 그러면 그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자리, 그 자리를 확장시켜 나갑니다 그 자리가. 그 자리를 확장시켜 나가면 그 예수님만 아버지하고 예수님만 그 자리과연 인간이 끼어들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내칠 때는 언제고 다시 들어오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그 자리는 인간 몫의 자리가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된다 이말이죠. 사람은 떠났다. 예수님 혼자 남은 줄 알았더니만 거기 아버지가 같이 계시다. 그러면 아버지하고 아들만 있는 세계, 그게 좋은 세계냐? 그게 하나님께서 생각했던 이상적인 세계가 달랑 아버지와 아들만 달랑 있는 세계가 전부냐? 아니면 뭔가 자기 백성들도 으쌰 으쌰 이렇게 있어야 될 세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면 예수님 있다 아버지 있다 인간들 추가해서 보태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되느냐? 이렇게 할 때 그건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어느 신학자가 이야기 했거든요. 하나님도 인간 없이 심심해서 못산다고 그렇게 이야기 한다 이 말이죠. 마치 인간이 하나님 재미있으라고 보태주는 것처럼. 아이 참 같이 놀아주자 놀아줘. 아 참 더러워서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인간이 슬쩍 끼어들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아니라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또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꼭 자기 백성이 집어넣어야 될 당위성. 난 너희들 없으니까 아쉬워 죽겠더라 정말 난 너희들 필요해. 꼭 그렇게 주님께서 인간 쪽을 향하여 아쉬운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거든요.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만 남기려면 처음부터 보내지를 말지. 대충 알아서 잘 키워서 너희는 내 백성이야 이렇게 하면 되는데 다 내쳐놓고 두 분만 달랑 남아놓고 좋단 말이죠. 그게 뭐가 좋아요. 다시 부르러 오신다 성령을 통해서. 뭔가 빠져있다는 느낌. 주님의 일관성에서 뭔가 빠졌다는 느낌을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게 어디서 문제인가? 그것은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거기 안에 하나의 힌트가 나와 있어요. 마태복음 22장은 유명한 혼인잔치입니다. 임금님께서 아들의 혼인잔치를 마련하고 소도 잡고 음식도 준비했어요. 그럴 때 거기서 개별성이 나옵니다. 나는 소를 샀기 때문에 참석 못합니다. 나는 밭을 샀기 때문에 참석 못합니다. 나는 장사하러 가기 때문에 참석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시간에 누가복음에 나오지요. 그 시간에 나는 내가 본인 결혼식 때문에 내가 장가가기 때문에 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해서 종들을 보냈더니만 이렇게 그냥 변명만 하는게 아니고 그 종들을 때렸다고 되어 있어요. 초청하라는 임금님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청하라는 그 종을 그냥 마구 때렸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화가 나서 길거리 사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오라 했어요. 아무나. 아무나 데리고 왔다. 그러면 이 참석한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너,나가 아니에요. 전부 다 한 바구니에 담을 수가 있습니다. 그 바구니 이름은 뭐냐 하면은 ‘아무나’에요. 아무나. 


개인의 개성은 전혀 이거는 살리지 못합니다. 아무나 왔어요. 아무나 왔으니까 개인적인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나란 말은 너와 나 사이에 이렇게 본드처럼 연결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주께서 인정하지 않았던 거예요. 에라이 아무나 걸려라 해서 아무나가 이 사람과 이 사람으로 하여금 혼인잔치에 참석케했던 거예요. 그러면 아무나는 누구의 대타입니까? 처음에 초청한 자의 대리로서 여기에 들어가지요. 


그러면 초청한 이것을 아무나와 대비해서 이것도 하나로 묶어 버립니다. 묶는다. 하나로 묶어 버려요. 하나로 묶는 이것도 하나로 묶고 이것도 하나로 묶을 때 묶는 방법이 뭐냐하면 예복을 입혀 버리면 됩니다. 유니폼을 입혀 버리는 거예요. 유니폼을 입어버리면 처음에 애초부터 혼인잔치는 유니폼 입도록 되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처음에 거절한 사람들은 뭐가 없어요? 유니폼이란 것은 생각도 못하고 이 몸 그대로 참석이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겠지요. 이 몸 그대로. 


그 가능하다는 생각이 어떤 사태를 낳았느냐 하면 임금님이 보낸 종들을 때려죽이는 사태를 낳게 된겁니다. 바쁜데 어디서 네가 와서 그런 남의 혼인잔치에 내가 왜 가야돼?! 그냥 감정적으로 때려버렸다 이 말이죠. 상당히 그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거죠. 임금님한테. 그래서 그 화풀이가 뭐냐 하면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그 다음에 그야말로 군대가 와서 완전히 싹쓸이 한다는 그게 나와요. 


아주 이상하게 이야기가 이상하게 전개되요. 아무나 왔잖아요. 그러면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없잖아요. 그러면 그냥 본래 자리로 되돌아 보내면 되는데 그 예복 안 입었다고 혼을 내는 수준이 아니고 아예 그 사람이 있던 원래 자리를 완전히 파괴시켜버립니다. 누가? 임금이 군대를 보내가지고. 완전히 모든걸 파괴시켜 버리죠. 


그러면 남는 것은 파괴되지 않은 장소는 딱 한 장소밖에 안 나와요. 그거는 뭐냐 하면은 혼인잔치 벌리는 그 잔치집 외에는 전부다가 거기만 소복하게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가 생산되었다 하느냐 하면은 이것이 바로 평안의 생산입니다. 평안의 생산. 큰 난리가 없으면 평안이라는 것이 없어요. 이 말은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평안이 있다 없다? 처음부터 인간은 평안이 없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평안은 평안이 아니고 큰 난리를 저주를 받을 대기상태죠. 


아직까지 누가 자기를 친다는 것을 전혀 생각 못한 상태에서 잠시 고요한 찻잔속에 고요. 순간적 고요 이 세상 지금 잘 돌아가고 우리나라 잘 돌아가고 있잖아요. 한순간의 고요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모든 정치적인 행위가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잖아요. 김정은과 트럼프하고 회담한다고 하니까 사람들 좋아합니다. 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그런데 시리아는 난리,난리에요. 미국 치고 오늘은 또 이스라엘 치고 영국치고 프랑스치고 난리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의 기준에 있는 평화는 뭐냐 하면은 본인의 가치를 계속 살려주는 조건하에 평안, 그 평안 속에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가 꾸준히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누리는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화는 아니고 지옥이죠. 이거는 지옥이라고 할 수 있어요. 33절에 봅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내 안에서. 


그러면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인간들이 진짜 예수님 말씀 평화, 평안 다 같은 말이에요. 안식 다 같은 말이에요. 이걸 몰랐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고 아들만 있으면 그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더할나위없는 평안이 되요. 천국이 되요. 그래서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이 아니고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를 빛내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초청받은 거예요. 참여하게 된겁니다. 


그러면 참여하면서 뭐를 버려야되요? 내가 원했던 나 위주의 평안과 화목과 화해와 안식은 이것은 여지없이 밟혀야 되고 포기해야되죠. 그러면 여기 오늘 본문에서의 하나의 공식을 제시하겠습니다. 평안이란 평안을 방해하는 것은 평안이죠. 내가 평안을 방해하는 것은 평안이죠.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은 평안 또는 평화라고 하는 것은 우리게 생각하는 평화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환란 속에 환란을 우리는 평화라고 잘못 오해하고 있는겁니다. 이 환란을.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가 뭘 당하나? 환란을 당하죠.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이렇게 되어있단 말이죠. 이 공식을 집어넣으면 우리가 지금 바나나 먹고 평안하잖아요. 이게 환란이에요. 우리는 이것을 먹고 마심으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앞으로 더 살아야지 바나나 먹고 피부 좋아져야지. 내가 나 위주의 평안을 계속 고집해나가는 겁니다. 자, 그러면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뭘 원합니까? 환란을 원해요? 평안을 원하죠. 


집안의 우환, 또는 내 인생의 암담한 인생, 그것을 교회와서 예수님의 은총을 받아서 이 세상에 받는 환란이 심리적으로 평안하기를 바리지요. 그러면 그것은 이거는 환란을 더 키웁니다. 점점 더 그 떼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바닥에서 그대로 환란을 더 키우는 셈이 됩니다. 마귀의 시험 들어서. 더 키우는 셈이 되지요. 


제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냥 환란 가운데 있으란 말이죠. 환란 가운데 있으면 그럼 내가 누리는 환란은 뭡니까? 너가 살아질 때 니가 사라지고 내 눈앞에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나타날 때. 지금 내가 있는 한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합니까? 내가 제일 중요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나’라는 것이 잊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제가 말로 이렇게 해가지고 뭐 그런 사람 있겠나 하지만 있어요. 스데반 집사가 그랬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잖아요. 돌에 맞으면서 뭐가 확인됐느냐 하면 지금 내가 설교 뽑아내고 한게 이게 내 뜻이 아니고 내 속에 성령께서 그들 앞에서 짱돌 들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해댄거에요. 누가 했다고요?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누가 했다? 성령 충만 받아 성령이 그렇게 하신거에요. 성령이 그렇게 했으니까 내 생각해도 돼요? 안 해도 돼요? 내 생각을 구태여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내 생각을 안 하니까 내 환란을 구태여 따로 뽑아낼 이유가 없어요. 


수면내시경. 수면내시경입니다. 내가 프로포폴 맞고 내가 이 침대 저 침대 옮겨야지 라고 이렇게 계산하지 마세요. 마취만 딱 받으면 눈 깨보면 벌써 침대가 이쪽으로 옮겨져 있어요. 평안입니다. 그런데 침대에서 깨어나가지 아이고 이래가지고 운전하겠나? 벌써 환란이 시작됐어요. 왜냐하면 내가 또 뭐 해야되니까. 주께서는 원천적으로 우리 태어날 때부터 네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태어나게 했다 계속 주인공을 원천적으로 성령받고 난 뒤에서 처음부터 소급해서 주인공이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태어난 것도 네 뜻도 아니고 네 부모도 네가 골라잡아서 부모가 아니고 쌍꺼풀 없는 엄마에다가 쌍꺼풀 없는 아빠, 그러면 내가 쌍꺼풀 없지요. 그런데 갑자기 내가 쌍꺼풀 생겼다? 두 가지에요. 수술했거나 안 그러면 유전자 조사를 해봐야되겠죠. 주어진 이 모든 것이 목사님 주어진 모든 것이 본인이 기여한게 뭐가 있어요? 본인의 의가 가미되어서 어떤 요소가 있습니까? 의가 가미되어서 원했던 어떤 요소가 있습니까? 없지요? 머리 아픈건 좀 나았어요?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팠습니까? 


이거는 정말 우리가 똑똑한지 바보인지를 봐야 되요. 우리는 똑똑한 줄 알지만 등신도 그런 등신이 없습니다. 이중에 내 것이 하나도 없는데 또 마귀가 그래 마귀가 자꾸 네 거니까 네가 알아서 잘 챙겨야 된다고 교회가도 그런 소리 하고 집에 가도 그런 소리 하고 어린애들도 부모들이 그런 식으로 양육했고 우리는 또 우리 자녀한테 그런 거짓말 또 자식들에게 강요합니다. 네가 지금 공부하는 것에 따라서 네가 앞으로 얼마나 예쁜 아내를 만나느냐가 지금  결정된다고 계속 또 아들보고 하지요. 딸한테는 네가 지금 하면 괜찮은 남자 만나고 아니면 결혼도 못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우리가 본인이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할 수 있다고 인식하는 우리는 또 뭐예요? 나의 정체가 뭡니까? 수상해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식이 바뀌는 그런 지점을 할당을 한겁니다. 배당을 해줘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나를 가위표치는 그런 자리를 우리에게 배분해주지요. 배분이 뭡니까? 양식없으면 나눠주는게 배급이예요 배급. 배급해주는 거예요 배급. 영화 볼 때 배급사 나오지요 배급. 영화 네가 안 만들었다는 거예요. 딴데서 만들어 놓고 영화관마다 전부 다 집어넣어 줬다는 말입니다. 배급하잖아요. 


뭐를 배급하느냐 하면은 아버지와 아들만 있어도 저는 없어도 괜찮습니다 라는 평안을 우리에게 공급해주는겁니다. 공급이 좋으네. 공급. 공급해주면 거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자리. 인식의 전환이. 공급이 되어 버리면 육을 갖고 있는 우리는 계속해서 옛날에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자, 하나 예를 들게요. 롯데호텔 있잖아요. 앞에 호수가 있어요. 무슨 호수겠어요? 석촌호수지요. 석촌호수에 벤치에 앉아서 바로 볼 때 이 세상은요 어느 장면을 봐도 보는 순가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은 추억이 생각나요. 추억은 기억에 다발입니다. 자, 앞에 바라보니까 개나리가 피었어요. 개나리. 개나리 처음 보지는 않았을거 아닙니까? 나이 60이 되어서 석촌호수에 앉아서 개나리를 보았다. 그러면 내가 개나리를 본 게 언제였더라? 내가 개나리를 본 게 기억나는 것이 그때는 초등학교 없었어요. 국민 학교. 국민 학교 5학년 학교 학교는 담벼락이 없었어요. 그냥 개나리 그게 담벼락이 담이었어요. 개나리 본 것이 떠오르겠죠. 


떠오르면서 그 때 불렀던 동요가 떠오르면서 동요를 가르쳤던 선생님의 얼굴이 같이 떠오르면서 같이 노래하지도 못하면서 했던 갑자기 그 옆에 있던 순이가 생각나고 순이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며 누구하고 옥경이처럼 희미한 등불 밑에 어떻게 그게 또 생각나면서 이 전체가 뭐냐 하면은 개나리 보는 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로이트처럼 개나리를 보는 순간 잃어버린 시간이 그 짧은 순간 튀어나오는데 그게 어디서 튀어나오느냐 하면은 나, 자아가 그 순간에 형성됩니다. 


그러면 그 짧은 순간. 10초 내지 15초 그때 그 자아는 괜찮은 지금의 육신의 자아가 아니라 열두살 먹었던 그때 자아로 잠시 변신되는 겁니다. 이게 ‘자아의 생산’이라는 거예요. 봤던 기억이 나에게 기억이 내 두뇌에 공명현상을 일으켜서 잠시 동안 옛날의 기억의 창고에 잠자고 있던 그 때 그 자아가 다시 떠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5초 내지 10초 밖에 안되는 이유가 눈은 지금 그 시대가 아니고 다른 시대이니까 빨리 그것이 오버랩 되어 버려요. 아쉬워요. 오버랩 되는 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때 그 동료도 같이 나와야 되고 그 때 먹은 빵 맛이 혀를 자극해야 되고 그때 있었던 그 냄새라든지 그런 풍경도 같이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요. 


좋은게 아닙니다 미친거다 이게. 좋은게 아닌데 정신차려야돼요. 좋은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때 그 모습이 잠시 생각하지만 무척이나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행복한 것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무의식속에서. 원래 짜증나는 것은 ‘플래쉬’라고 해가지고 억압이 되요. 정신분석학에서. 꽉 눌려있어요. 그게 트라우마가 되거든요. ‘나오지마’ 꽉 눌려있고 괜찮은 것만 편집되어서 나타납니다. 


특히 그 때 있던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 음악이 점점 더 나로 하여금 생각나겠죠. 밥 딜런 불렀던 천국에 노크하라고 하면 갑자기 밥 딜런 활동하던 시대에 기타 쳤던 그 내 모습과 사람들 같이 놀러가서 엠티 갔던 그때는 엠티가 없었어요. 그냥 친구들 같이 그 당시 김민기 노래부터 해가지고 이런게 한꺼번에 확 밀려오지요. 그때 그 자아가 등장한다면 지금 옛날 이야기 하는게 아닙니다. 한다면 지금의 내가 자아라고 할 때 이걸 믿을 수 있습니까? 내일 되면 지금의 내가 또 변신하는데. 왜? 내일 몫의 체험이 또 주어져요. 


그러면 12살 때 잠시 행복했으니까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평안’이라고 해요. 평안.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아이가 차가운 물에 빠져 죽고난 뒤에 잠수함이 지나갔던 간에 박근혜가 미용을 했던 간에 빠져 죽고 난 뒤에 그 아이가 마치 옆 방에 공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느껴질 때 나는 누구예요? 애가 없는 내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잠시나마 있는 나잖아요. 그런데 문 열어 보니까 그 아이는 죽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들어왔을 때에 그 때 아이가 있어서 행복했던 나를 내가 붙잡을 수 없다는 나의 자괴감. 누가 보상해줍니까? 4억? 청와대에서 보상해주면 그 때 다시 나를 찾을 수 있습니까? 그 때 그 애만 있는게 아니예요. 


이런게 참 어려운데 내 방엔 내가 있고 애는 공부하고 있잖아요. 지금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가기 전에 공부하고 있다고요. 내가 그 애를 생각하면 그 아이만 생각하는게 아닙니다. 그 아이가 서울대학 들어가고 공부도 잘하니까 안산에서 제일 공부잘하니까 서울대 법대 나와서 사법고시 합격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이 침대 있는 방에 있으면서 상상을 했거든요. 그럼 내가 죽었다는 말은 뭐냐? 그 아이가 죽음으로서 생길 상상마저 그 아이가 죽음으로서 이것이 한꺼번에 날라갔다는 그 절망감. 그거 누가 보상해 줄거에요? 4억? 4억오천? 이게 보상됩니까? 술로 달래야지요. 술로 달래요. 


여자 애인 헤어지고 절대로 맨 정신으로 안 옵니다 남자들은. 꼭 한 잔 걸쳤을 때에 그 자기 옆자리가 허전해질 때에 정문으로 안 들어오고 창문으로 와가지고 술 한잔 먹고 와가지고 너 누구하고 사귀니? 다시 시작하자 이러면서 또 와요. 그것도 술 먹고 와요. 이게 내가 체험한건 아니지만, 있어요. 너 나하고 그렇게 헤이지면 되나?! 데이트 폭력까지는 안 나가지만 그거 왜 그래요? 그 여자가 있던 내가 지금은 없으니까 미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인간이 지금 술 먹고 그런 옛날 여자친구가 안 찾아 올 때가 언제입니까? 새로운 자아가 생산될 때죠. 그 때가 누구냐 하면 새로운 여자를 새로 사귈 때. 안 찾아옵니다. 그때 여자 쪽에서 또 헤어졌네. 저 쪽도 뭐 카톡카톡 해가지고 만날까? 이렇게 나와요. 미쳤나 너랑 만나게?! 그러니까 이게 결국은 본인이 있어요? 없어요? 본인이 없어요. 본인은 어디서 만들었느냐? 지금까지 수집된 모든 기억들이 그때 그 순간마다 자아를 새롭게 생산해냅니다. 


자, 그러면 다음 주일날 교회갈 때 앉아있는 자아는 누가 만든거죠? 지금까지 내가 만든 허구죠. 허구적 자아가 몸은 몸이지만 허구적 자아가 앉아 있겠죠. 앉아 있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금껏 내가 주를 위해서 많이 했기 때문에 주님 저 인생 천국 가는거 보장하겠지요? 라고 이야기 한다 이 말이죠. 지금 엉터리 자아를 두고 내가 이 자아 가지고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봉사했기 때문에 그것을 봐서라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피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해달라고 내밀겠지요? 주께서 그 인간 구원합니까? 구원 안하지요. 있어야 구원하지요 있어야. 뭐 자아가 있어야 구원하지요. 자아가 있다고 지금 우기고 있으니까. 내일이면 또 변할 자아인데. 없는 자아거든요. 


그럼 주님은 자아를 구원하는게 아니죠. 뭘 구원합니까? 몸을 구원하는 거에요. 몸을 구원합니다. 몸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늙어 죽게 만들어서 구원하는 거에요. 주님의 구원은 지금 벌써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해달라고 안 해도 점점 늙어요. 여기 70대도 계시지만 늙은것을 아쉬워한다는 말은 뭐냐? 아직도 우리는 옛날 자아상에 기초하게 되면 늙는게 아쉬워요. 20대때 이뻤는데 뭐 40대때 잘났는데 뭐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주께서 내가 늙어가는 것도 내 일이 아니고 내 자아의 일이 아니고 주께서 지금 나를 손대고 있는 일이거든요. 그렇다면 연세가 많을수록 주님과 가깝겠어요? 멀어지겠어요? 점점 더 가깝지요? 그러면 자랑해야돼요. 아이고 이 젊은것들아 고생 좀 해라. 


재림의 뜻이 뭐냐 하면은 재림은 만난다는 뜻이예요. 헬라어 원문에 보면 뜻이 그래요 만난다는 거예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재림. 그래서 이 재림은 어떨 때 용어가 중요하냐 하면은 이 땅에서 환란 중에 있을 때에 세상이 지긋지긋할 때에 나 자아를 만나는게 아닙니다. 이 몸을 변화된 주의 변화된 몸으로 바꾸어주기 위해서 작업 들어오시는 작업하시는 그 보이지 않는 손길 그 손길 위해서 옛 사람은 후패하고 새 사람은 만들어 내는 작업 중에 있어요 우리가. 이 고물 몸을 새 몸으로 교체한다고 지금 주님은 되게 바빠요. 되게 바빠요. 


그래가지고 뭐 신장 고장나고 일찍 돌아가시면 그거는 땡 잡은거고. 병원비 안 나가서 좋지요. 가족들 신경 안써서 좋지요. 나는 일찍 죽어서 좋지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있어요. 성경해석은 어떻게 한다? 살려고 하지말고 죽으려고 해석하면 해석 안 되는게 없습니다. 죽으려고 해석하면. 주여 우리 교회 다 죽게 하옵소서.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될 해석이 없어요. 


어쨌든간에 이 교회 살려주옵시고 부흥시켜 주옵소서 이러면 성경해석이 개판이 됩니다. 주여 내가 이 교회 당회장인데 일찍 죽게 하옵소서. 교회고 뭐고 나는 내 평안함, 이 교회 붙드는게 내 평안이 아니고 교회 부흥되는게 내 평안이 아니고 나라는 이 지긋지긋한 허상이 계속 생산되는 것 이 지독한 이 귀신 있잖아요. 내가 나를 만들어 낸다는 것. 곤지암인가? 공포영화도 이런 공포영화 없잖아요. 자고 나면 또 내가 기억가지고 기억의 뭉치가 그것도 수상한 엉터리 기억, 괜찮은 기억만 뭉쳐가지고 또 나라고 우겨야 될 이런 고집스럽게 근사한척 괜찮은척 위선 떨어야 될 이 부담감, 이 위선적인 연기를 언제까지 해야됩니까? 


기도를 해도 주여 주여 시계를 보면서 오늘 5분만 더하자. 이게 무슨 기도예요. 참 마지막 잊어 버렸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거 빠질 뻔했다 이래가지고 이게 엉터리지 이게 무슨 기도입니까. 기도를 해도 어설프고 헌금을 해도 가만있어보자 내가 만원짜리를 낸다는게 오만원짜리 잘못 넣은거 아냐? 확인해보고 이게 무슨 헌금이에요? 전도해도 꼭 자기가 좋아하는 이쁜 것 전도하고 못생긴 것은 저리가 지옥가라. 이쁜 것만 전도 ‘혹시 사영리 아십니까?’ 이게 무슨 전도예요? 자기 마음에 드는 것. 


모든게 나 괜찮지요? 저 이러니까 더 살아야 될 가치있지요? 이걸 전제로 해서 설교하고 복음 전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우리 가정 손대지마세요. 남의 가정은 어떻게 되든 우리 가정은 우리 아이는 공부 잘해야되고 이런걸 가지고 그것도 기도랍시고 헌금이랍시고 전도랍시고 하니 이 엉터리 어디서 나왔습니까? 나 위주의 평안을 내가 포기를 못해서 그런거에요. 포기를 못해서. 


여기 오늘 본문을 보면 환란을 당하나 이렇게 하니까 뭐를 이렇게 또 연출을 하느냐 하면 평화를 얻기 위해서 인위적 환란을 조작해 냅니다. 나 공산당이 싫어요 똑같은 거하고 아이가 철이 없으니까 그런 소리 하는거에요. 공산당이 왔는데 자기가 공산당이 싫다는 것을 그렇게 나댈 필요가 없습니다. 이름이 뭐더라? 이승복 어린이. 아마 동상 있을걸요. 공산당이 싫다 해가지고 순교당한 아이잖아요. 


순교는 다른게 아니에요. 내가 봐도 나는 오늘치 허구라는 것을 인정하는게 그게 순교입니다. 왜? 그게 죽음이잖아요. 순교에 성경의 뜻이 뭐냐 하면은 잠 잔다예요. 잠 잔다. 잠 잔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잠 잔다 하는거냐면 일을 많이 했을 때 주께서 일을 많이 했을 때 주께서 시킨 일이 있을 때 주께서 안식케하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일하는 것은 이것은 안식에 참여 못합니다. 지옥갑니다. 내가 알아서 하는게 아니고 선교하든 전도하든 내가 알아서 하면 안돼요. 


주께서 일을 맡길 때 비로소 그럼 나는 뭐냐? 나는 죄인이예요. 죄인의 자아가 되요. 죄인의 자아가. 죄인의 자아가 되고 주께서는 이 죄인의 자아를 주님의 임의대로 구원받는 몸이 되도록 그 작업이 나타날 때 그때 우리는 주의 일을 지금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진행 중이요. be동사 +ing예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알 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죄인 것을 알 때 그 죄인인 것을 안다는 것이 어떤 뜻이냐하면 내 나름대로의 평안과 몸이 아니고 이 자아의 위신과 체면과 자존심에 대해서 나는 양보없다가 강렬하게 일어날 때 그게 바로 성도한테는 주의 일을 시작한거예요. 짝대기 가지고 눈밭을 지금 쑤시고 있는 중입니다. 너는 이런 인간이였어. 너는 백날 하나님해도 너는 너 자존심 외에는 아무것도 안 챙기잖아. 그렇잖아. 그게 너의 본래 모습이야. 


그러면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고 무엇을 부르러 왔어요?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그럼 죄인 여기 있습니다라고 주께서 쑤셔주면 그냥 죄인 아니고 방긋 웃는 죄인. 들켰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여기! 주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분이니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여기 있네요. 죄인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떤 처녀가 동전하나 잃어버렸잖아요. 온 집안 다 뒤집어서 동전 얼마 한다고 그걸 찾고 난 뒤에 얼마나 좋은지 친구 불러서 파티 열었습니다. 비용이 더 나왔을거예요. 


그게 뭐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큰 아들 있었잖아요. 미리 돈 챙겨 가지고 다 떨어 먹은 아들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 탕자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에요. 이 말은 뭐냐 기존적으로 성도라 하는 것은 기존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헛깨비 같은 자아만  붙들고 그것 가지고 그걸 집어넣겠다고 시도하는데 그로 인하여 잘못된 개념 잘못된 용어들을 쓰기 시작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 환란을 당하나 내가 이겼다 하니까 의도적으로 환란 받을 짓거리를 하는거에요. 기도할 때 꿇어 앉아서하면 더 환란되고 몸이 아픈데도 일부러 감사헌금하는 겁니다. 일부러. 그런 사람들 참 많아요. 몸이 아픈데 봉투에 제가 체험했다니까요. 일부러 몸이 아프지만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 올라와있어요. 이게 위선 아니고 뭡니까? 몸이 아프면 집에 가서 약 먹어야지 감사가 왜? ‘이거 받아먹고 빨리 낫게 하라’ 무언의 압력을 하나님께 하고 있는 것인지. 왜 그런 위선적인 누가 봐도 위선적인 그런 행동을 왜 합니까? 


그리고 감사헌금할 때 그 감사를 꼭 돈으로 해야 됩니까? 그 마음으로 하면 감사 아닌가요? 감사를 돈으로 낸다는 말은 이미 돈 안내면 감사가 아닌 엉터리 감사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너무 따진다 정말. 그냥 눈감고 지나갈건데. 저는 눈감고 못 지나가겠어요. 진짜 돈 안내면 감사를 못 견딜 때 감사헌금하란 말이죠. 돈 안내고도 감사하려고 하니까 감사가 들쑥들쑥하니 막 가만있질 않고 자꾸 들썩여요. 


그렇게해서 돈 조차도 내 돈이 아니고 감사케하신 주님의 돈입니다라는 것을 표시하는 거에요. 나는 감사도 안했는데 주께서 이렇게 감사케 하셨습니다. 나는 시키는대로 할 뿐입니다. 저게 뭐 제 돈입니까 주님 돈이지. 이런 식으로 하라 이 말이죠. 뭐든지 하든지간에 먹든지 마시든지 누구를 위해 하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이 말이죠. 그것은 누가 하게 하십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 대목은 이렇게 넘어가겠는데요 


결론은 뭐냐 하면은 환란을 임의로 조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자체가 환란이예요. 환란 가운데서 어떤 경우에도 평안하느냐 하면 그 환란 가운데서도 환란인 이유가 바로 내가 있음에 기쁘거든 그게 환란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스데반 집사처럼 내가 어떤 때는 내가 생각이 안날 때가 있어요. 그러면 그 자체가 평안이에요. 


그럼 평소에 성도는 평안 가운데 살아있어요. 그런데 누가 와서 건드리게 되면 갑자기 나가 성립되면서 온갖 또 상상 다하고 이만큼 하니까 어떤 결과가 오겠지라고 할 때 골치 아픈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 했지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들을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하면 빠질 것이라’ 했지요.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계속 인간의 자아를 자극해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려면 그 믿음을 가진 소유자가 등장해야 되겠죠. 그 소지자가 누구여야 됩니까? 바로 나지요? 그게 너라면 진짜 그게 너라면 네가 그게 믿음의 주인공이 나라면 그래 좋다 그 믿음 가지고 내가 기준을 제시할게. 적정 기준을 제시할게. 이 산을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 하는 것을 내 앞에서 보여봐라는 겁니다. 돼요? 안돼요? 안되지요. 


거기다 뭐를 또 추가하느냐 하면 기도와 금식 외에는 나갈 자가 없다고 하니까 나는 그대로 두고 내가 기도와 금식을 막 추가시키는 거예요. 추가시키면 그 추가시킨 기도와 금식을 어느 정도 얼추 많이 들어왔다, 안 들어왔다를 그걸 누가 측정해야 됩니까? 내가 측정해야 한다고요. 이만하면 겨자씨만큼 조금 커졌겠지. 그 겨자씨가 이제는 강냉이 씨만큼 커졌겠지. 그만할까 이제? 금식을. 이걸 누가 스탑 걸어요? 누가 판정 걸어요? 내가 판정하니까 그 판정한 입장에서 기도와 금식은 이거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금식과 똑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모든 말씀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예수님 본인의 기도와 본인의 금식 없이는 절대로 산이 뽑혀서 바다에 안 빠집니다. 그러면 내 기도를 어떻게 해요? 내 기도를 가져야돼요? 포기해야돼요? 나 자아에서 헛깨비 같은 자아의 믿음과 소망과 믿음을 포기하면 됩니다. 포기하라고 주님께서 죽여버리죠.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 살게 되면 그건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고 주님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뭔가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그게 요한복음 16장에 쭉 나옵니다. 


그때는 네가 이야기할 거 없이 쉽게 말해서 딱 보면 네가 알겠다. 만약에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더 이상 궁시렁 궁시렁 이야기 할 필요 없이 그때는 밝히 알리라. 그때는 네가 밝히 알리라. 뒤에 보면 나와요. 25절에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성령을 통해서 딱 보면 아는거죠. 남들에게 설명은 안 되요. 설명은 안 되는데 본인은 알아요. 


주께서 일 저질렀지요. 주께서 하셨습니다. 기도하도록 하셨잖아요. 유도했잖아요. 금식하도록 하셨지요. 이렇게 모든 것을 주의 일에 합류되도록 이렇게 하는겁니다. 그것을 뭐냐 하면 26절에 ‘그날에 너희가 누구 이름으로 구하겠느냐.’ 내 이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혀를 놀려서 이름을 부르는게 아니고 진짜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서 나 아니에요 하면서 나오는게 뭐냐 함께 계신 주께서 나를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는겁니다. 


어쨌든 이 몸은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께서 이미 자기의 자신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빌려가신 몸이거든요. 이걸 차압해가신 몸이기 때문에 어쨌든 우리 몸은 우리 몸이 아닙니다. 아니고 하루 잠자고 일어난 것도 주의 몸이니까 알아서 살아있어야 될 때까지 계속 살려주십니다. 취직을 시켜주시던지 누가 일을 하던지 월급 받게 하든지 하여튼 어떤 경로로든 우리로 하여금 계속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살게 하신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뭐냐 하면은  늘 자아를 죽게 하시는 방식으로 우리 몸을 주님이 다루십니다라는 말입니다. 늘 자아를 죽게 하시는 방식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다루시죠.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그걸 몇 시간 동안 알아야 합니까? 하는데 이거는 몇 시간동안 아는게 아니에요. 이거는 소급해서 몇 달이 지나든 몇 년이 지나든 그때는 기억나지 않더라도 어느 한순간에 깨닫게 되면 어느 한순간에 소급해서 다 알게 되는겁니다. 소급해서.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꾸준히 해왔거든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한 집안에 있는 부모나 아버지를 만날 때, 만날 때마다 아버지 이거 해주세요 아버지. 이렇게 하면 아버지가 귀찮아해요. 그냥 무심코 하게되면 아버지가 다 받아 넘기고, 뭐 나 누구지? 아버지입니다. 그때만 아버지하지 보통 아버지 아버지 이야기 안하지요. 그냥 이거 이거 하지 주어 호칭을 별로 안하잖아요. 


그처럼 함께 살고 있어도 주님을 의식할 때가 따로 있어요. 평소에는 뭐냐하면 아버지 주신 은혜 가지고 평소에 자기 일 하는거에요. 자기 일 하다가 야 여기 너희 집 아파트 넓은데 이거 누가한거야? 아니 아버지가 한거야 라고 아버지라는 이름이 나올 그 타이밍을 아버지 쪽에서 조성해 주십니다. 그 타이밍을. 그러니까 사도들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것을 관계적 뭐라고 했습니까? 수동성. 관계적 수동성. 그리고 우리가 받은 자리는 우리가 마련한 자리가 아니고 주님께서 할당해준 자리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모든걸 하신 그 자리에 우리는 그냥 참여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되는거죠. 


그 다음에 진도 나가 봅시다. 17장 조금만하고 마칠게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의 이 겟세마네에 계실 때에 기도 주제가 뭐냐 하면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 영화롭게 한다면 제자들의 구원에 대한 내용은 여기에 없습니까? 조건부로 있어요 조건부로. 뭐냐 하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조건에 파생되어서 아들을 영화롭게하는 자로서 구원되죠. 


그러면 누구 구원이 빠집니까? 자아의 구원은 여기서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으면 누가 영화롭게 되요? 현재 내 자아가 나 구원받았다 하고 까불까불 대면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지요. 그런 구원은 주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어요. 예수님을 영화롭게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뭐냐? 예수님을 모든 것을 예수님이 홀로 다 하셨습니다. 심지어 나의 구원도 나의 몫이 아니고 주님의 몫이었습니다 라고 사후에 고백하는 형식으로 우리가 같이 관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의 우리가 구원해야 될 몫은 그럼 없습니까? 없어요. 그럼 우리는 기도 안해도 됩니까? 그런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걸 자꾸 생각한다는 자체가 믿음이 없는거에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떻게 구원받아요? 이게 그 발상이 뭐냐 하면은 평소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추억 속에 꾸준히 내가 나를 이만큼 지켜왔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있었다는 기존의 내 추억의 다발들이 지금의 자아를 성질을 그렇게 드럽게 만들어 놓은겁니다. 


제가 이렇게 강의하게 되면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그러면 이목사님 말대로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면 되겠네요 이러거든요. 여러분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요 지금.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안한다는 것이 아무것도 정말 믿음 좋으면 뭘 해도 아무것도 안한게 해당되거든요. 왜냐면 주께서 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게 혼자 있으면 주님이 없고 혼자 있으면 바로 그런 질문이 나오는거예요. 


왜 혼자 있느냐? 평소에 혼자서 살았기 때문에. 참 혼자 사는 사람들 보게 되면 누구를 소개 해줘도 결혼 못해요. 버릇이 혼자 사는 버릇이 되가지고. 자기밖에 몰라. 당신 나한테 해줄게 뭐있는데 이렇게 나와요. 혼자서 했기 때문에 나는 거뜬히 나 혼자 살아왔는데 구태여 네가 끼어들 이유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네가 나하고 결혼하려면 현재 내가 꾸준하게 내 방식 있잖아요. my way. 내 방식대로 사는데 거기에 기여한다는 조건하 같으면 내가 봐줄게. 내 머슴으로 취직시켜줄게 이런 경우에만 혼인이 성사됩니다. 하되, 혼인신고는 안 된다. 안 되고 그냥 동거는 될게. 이런 식으로 또 찢어져야 되니까. 요새 얼마나 약았는지 미쳤다고 혼인신고 해요? 법적으로 골치 아프니까. 통장도 따로 쓰는 마당에 뭐 때문에 결혼을 합니까? 그렇게 딱 한단 말이죠. 


그런 버릇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를 구원한다 하면 제가 뭐한게 있습니까? 혼자 사는 버릇이 있어가지고. 예수의 피를 믿습니다 아! 저 손들고 믿겠습니다. 이런다고요. 그런 행세 혼자 사는 행세가 예수 믿어도 그 행세가 달라지지 않아요. 누구 자리입니까? 꾸준히 자기 추억의 다발이에요. 자아를 굳히기, 자아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100% 가짜입니다. 


죽기 싫어요. 지금껏 나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해 왔는데 죽기 싫어요. 뭘 포기 못해? 내 영광을 포기 못해요. 내 위신과 내 체면과 내 자존심을 포기 못합니다. 내 자존심 안에 뭐가 포함됩니까? 내 새끼 내 남편 내 아내 다 들어 있어요. 이거 내 바운더리예요. 이거 건드리면 하나님이라도 용서가 안돼요. 남의 이야기하는거 아니죠 지금? 지금 우리 이야기 하는거죠? 


주께서 말씀을 볼 때 바로 주께서 모를 때는 우리는 주의 은혜라고 하지만 주께서 막상 짝대기 가지고 눈밭을 헤치게 되면 내가 몰랐던 이러한 나 위주의 근성이 꾸준히 죽을 때 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주께서 죽이시는 거예요. 


자,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자 주께서 어떻게 죽입니까? 몸을 늙게 하면서 서서히 죽음으로 서서히 죽게 하시는데 몸만 늙으면 뭐도 같이 변화될까요?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뭡니까? 자아도 같이 거기에 자기 늙는데 정당하다는 식으로 자아의 변신이 일어납니다. 지금은 내가 70이 돼서 아무것도 안하지만 옛날에 참 주의 일 봉사 많이 했다 해가지고 하여튼 노년에 가면 주로 하는 이야기가 과거 이야기해요. 내가 자식 둘 있는데 하나 의사 만들고 또 하나 의사 만들고 쌍의사 만들었다. 둘이 의사되니까 며느리도 의사 우리 집에 의사가 4명이다. 이게 자아가 구성하는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돌팔이라고 하면 화내지요. 


왜냐하면 이 자아를 자아가 성립되게 되면 여기에 내가 우리가 죄인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옵니다. 죄인은 뭐냐? 나는 나로 인하여 사는 거예요. 나의 자존심과 나의 명예와 위신과 체면과 의미와 내 모든걸로 살지요. 이걸 우리가 싫어하지 마세요. 주께서 지금 짝대기로 눈밭을 쑤시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는 이걸 거쳐야 비로소 우리는 그 때 떠났고 주께서 찾아오심이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니 이런 더러운 육이 얼마나 감사한지 마지막에 기쁜 소식 나오는데 성질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고치지 마세요. 고치면 마귀에 시험들어요. 


이게 우리가 손도 못 댈 우리의 본성이니까 본성 그냥 가고 손을 대도 누가 대야 되요? 성령님이 손대는 대로 하세요. 그럼 성령 안 받았다고요? 안 받으면 할수 없지. 안 받은 그거는 나한테 묻지 말고. 성령께서 여러분 성깔대로 막 산다는 복음이 또 나오는데 그냐 막 사세요. 주께서 성령받은 사람 이 모든 구조가 구성을 이 구성이 나올겁니다. 구성하니까 홈쇼핑같은데 이 구성 날마다 오는 구성아니에요. 이 완판됬어요 이 구성. 이 구성 그대로 유지하셔서 죽을 때도 나 죽고 난 뒤 자식들 해라! 이러한 치매현상 맘껏 보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책임질 필요도 없고 책임지지도 않는 날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천하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를 십자가 피 아니면 왜 구원될 수 없는가를 오늘도 앞으로도 확인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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