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6장 25절(이면지)1804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6장 25절부터 보겠습니다. 25절에 보면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16장 25절부터 26절, 27절 가운데서 사람들이 그냥 너무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는 대목이 있어요.
너무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는 대목이 26절입니다. 26절이예요. 2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 대목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이는 26절에 보면 그날에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그 다음에 뭡니까? 말이 아니니라 되어 있어요. 정말 이것은 상당히 약간 충격적이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하는 말이 제자들아 나는 너희를 위해서 기도할 생각없다 그런뜻이예요. 나는 너희를 위해서 기도할 생각이 없다.
이것은 어디 말씀과 정면으로 마주치느냐 하면은 히브리서 7장의 말씀과 어긋나요. 7장에 보게되면 7장 25절에 보면 히브리서, 그냥 한번 들어보세요.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예수님이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되어 있어요.
우리가 구원되는 이유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너희를 위해서 구원에 지장 없도록 기도했기 때문에 우리는 차질 없이 지금 구원됩니다 라는 것을 히브리서 7장 25절에서 지금 분명히 밝히고 있거든요. 그렇죠?
그렇다면 그 앞에 있는 그 사도바울의 편지나 또는 예수님의 모든 그 말씀안에서 이 흔히 우리가 잘 아는 이 이야기 두자지요. 한글로 두자지요? 기도, 기도가 뭐냐는 겁니다. 기도가 뭐냐는 겁니다. 기도가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기도는 모든 종교에 다 있으니까 기도는 뭐 그냥 자기가 기도한다하면 그냥 기도하면 되는 거예요.
기도에 대해서 우리보고 기도를 맡기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맡기면 되는데 왜 우리에게 기도 하라고 했으면 그 말은 기도는 너 담당이야 니가 알아서 기도해야되. 니가 기도하게되면 그것이 너의 구원에 보탬이 될거야. 이렇게 임무를 맡겼으면 우리에게 맡겨 줘야 되는데 왜 히브리서 7장에서는 예수님이 왜 우리기도 속에 또 끼어드십니까? 예수님이 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냐 이말이죠. 아 우리가 기도가 모자라서 그런가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들은 기도해봤자 기도할바를 알지를 못한다. 그런데 누가 기도하느냐? 성령께서 친히 기도를 하는데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하는게 아닙니다. 성령께서 기도할때는 기도하는 심정이 어떤 심정이냐 하면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탄식하면서 기도해요. 탄식하면서. 이 탄식이라는 말이 로마서 8장에 왜 나왔느냐 하면은요. 참 기가찬다 이말이거든요. 그래서 그 앞에 로마서 8장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아예 너희는 기도에 관해서 기도할줄 모르는 존재로 규정을 했어요. 규정. 너희는 기도할줄 모르는 존재. 그러니까 기도할줄 모르는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할줄 모르는 사람을.
그러면 기도할줄 모른다 모르는것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될 필요가 있느냐 아니면 우리가 몰라도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또 이렇게 등장해요. 자, 교회 처음 나왔습니다. 처음 나오면 교회에서 익히 아는데로 그냥 흘러가요.
그게 뭐냐하면 처음 나온 사람에게 지금껏 여러분들은 교회 나와서 나오기전에 나름대로의 비는게 있었는데 교회는 그렇게 하는게 아니고 하나님 뜻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됩니다 라는 것을 처음에 이야기 해요. 예수 이름으로.
그러면 남묘호렌게쿄랑 똑같은 거예요. 무슨 중얼중얼 해놓고 뒤에다가 이것만 안 빠트리면 되요. 또 기억에 치매 걸린사람은 빠트릴수도 있습니다만은. 중얼중얼 해놓고 그 뒤에다가 예수 이름으로만 붙여버리면 앞에 있는 내용은 야고보서를 가지고 또 추가를 해요.
니가 기도한 것은 다 이루었다고 믿어라. 야고보서에 있잖아요. 믿으면 니가 뭘 해도 그것은 예수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예수 이름이 받침이 되어서 그건 다 이룬줄로 믿으라. 만약에 니가 그걸 안 믿게 되면 마음이 두 마음이 흔들리는 마음이 되가지고 실컷 해 놓고 헛수고 한거 밖에 안되니까 항상 끝 부분에 다 해놓고 믿습니다 라는 마음을 추가를 하게 되면 너의 기도는 응답이 된다 라고 하는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요령이죠. 영어로 하면 이게 뭐냐 하면은 skill되요. 하나의 재주를 피우는 거예요. 재주를 피우는 것. 재주를 피우는 거예요. 그러면 이 요령과 스킬을 이 바닥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여기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행함이 준동합니다. 준동이란 말 아시죠? 준동. 가만히 있는데 들썩 들썩 하는 것. 행함이 여기 준동해요.
그렇다면 행함이 인간의 행함은 어떤게 되느냐 하면은 행했을때와 안 행했을때를 누가 알고 있느냐 하면은 행한 내가 알고 있어요. 내가 알고 있다고요. 기도 시작이 오후2시45분이였다. 끝날때가 2시 55분이였다 그러면 이 사이를 이 사이에서 교회가서 엎드렸으면 이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기도라고 해요. 기도라는것을 시작점 알고 끝나는점 알아버리면 그걸 안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기도를 안행했 경우에는 기도가 성립되지 않았다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제가 아까 뒤에 뭘 붙이라고 했어요? 예수이름 붙이지요? 그러면 예수이름을 뒤에다가 상표처럼 예수이름을 붙여버리면 2시 45분부터 해서 2시 55분에 끝난 그 기도가 마지막에 야고보서에 의하면 니가 성취된줄로 믿으라! 믿으라! 믿으라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그 다음날 오후 4시부터 바이어 만나는 일이 잘 풀렸다면 이 어제 앞에 있는 2시 45분부터 2시 55분까지 여기까지의 행함이 효과본게 되겠죠? 효과본거.
만약에 그 다음주일날 어떻게 교회 안나오는 조카가 교회 나오면 사람들이 이걸 가지고 무슨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중보기도라고 해버려요. 중보기도라고 한다고.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초조감을 제공하느냐 하면은 정말 기도할려고 했는데 그것도 기도를 정해진 시간에 할려고 했는데 워낙 하는게 바쁘다 보니까 시집에서 제사드리라고 오라고 해가지고 장보러 간다고 빠져버리고 했을 경우에는 어떤 점이 초초하느냐 하면은 기도 해야할시간에 그 기도라는 행함을 누락했기 때문에 믿습니다가 하는 요소가 빠졌기 때문에 그 다음 기도가 빠진 한주동안은 내내 초조와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동안 견딘것도 기도 덕분에 견뎠는데 바빠서 잊어버려서 기도를 안하게 되면 나는 이번주는 맴매 손에 매 맞을 준비를 해야되겠죠? 아니나 다를까 금요일날 차 사고났네. 그러면 이거는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결부되느냐 하면은 행함이라는 기도 행함을 안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느냐 하면은 기도시간을 늘려버려요. 기도시간을 10분 기도해서 이만큼 효과봤는데 만약 기도를 횟수를 늘린다든지 시간을 1시간 2시간 늘려버리면 이거는 조카만 아니라 조카댁부터 해가지고 시누이 올케까지 교회 다 나오게 생겼어요. 중보기도가 그만큼 양이 많아 졌으니까. 다 뒤에다가 믿습니다 라고 다 집어 넣었으니까.
결국 이거는 뭘 믿는거예요? 믿습니다 하는 것은 뭘 믿느냐 하면은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내 인생 조졌다는 것을 믿는거예요. 내가 내 행함의 양을 행함의 양에 의해서 복의 양으로 비례된다는 사실을 내가 믿는겁니다.
그러면 나의 믿음의 대상이 누구냐 하면은 내가 내 자신의 믿음의 대상이 되죠. 그러면 감시를 누가 해야되요? 내가 나를 감시를 해야되요. 가만 있어보자. 내가 나한테 너 오늘 성경 읽을 때 진정성 있게 읽었어? 기도할 때 산만하지 않고 집중했어? 끄트머리에 믿습니다하는 그런 마음을 니가 추가했어? 안했어? 계속해서 이렇게 해요. 계속 이렇게 하는데 에베소서보면 또 뭐라 했느냐 하면은 기도할 때 무시로 기도하라 해요. 무시로. 시도때도 없이 기도하라 했거든요.
가만 있어봐라. 시도때도 없이 기도하는 사람. 그러면 이번에 일이 잘 안된 것은 애가 성적이 내려간 것은 내가 기도를 이렇게 얍샵하게 딱 시간 재서 했는데 이걸 무시로 해야되. 그럼 무시로 하면 길을 갈때도 해야되는가? 길을 걸어갈때는. 그다음부터는 이제는 고민이 되는 겁니다. 계속 기도에 대해서 자꾸 스트레스를 받는거죠.
그리고 기도할 때 집에서 하는 기도는 쳐주느냐 안쳐 주느냐, 교회 뒷자리냐 앞자리냐, 그런것도 계속해서 그게 뭐냐 하면은 법에 세분화가 계속 어이지는. 기도할 때 꿇어 앉아서 할것이냐? 두손을 모을것이냐? 깍지 낄것이냐? 깍지 빼고 할것이냐? 그냥 펑퍼짐하게 양반 다리했을때는 효과가 어느정도 떨어지고 이걸 실습을 해보느냐 마느냐.
항상 이렇게 실천이 해야되고 뭔가 원인이 있으면 그 결과가 주어 졌을 때 여기는 인과관계가 성립되고 이것을 반복했을 때 동일한 결과가 나왔을때는 이것을 진리로 이것은 반드시 효과 있는것이라고 확증지을수가 있거든요. 이게 법에 내부에 법의 세분화가 이어집니다. 그러면 이것은 바로 바리새인이 했던 기도를 닮아가요. 점점 더 닮아 갑니다. 법의 세분화.
주님께서는 기도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오늘 이 주제가 벌써 나왔는데요. 모든 일을 단일화 시킵니다. 세상 전체를 총체적으로 단일화를 시켜서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그 일본에 지진 큰 해일 일어 났잖아요. 2011년도 몇일인가 그때 일어났을 때 파도가 조각조각해서 오는것이 아니고 파도가 큰 파도가 밀려오지요.
예수님의 세계는 이 세상이 예수님의 세계라면 예수님의 세계는 모든 것이 이렇게 찢어져서 따로 따로 노는게 아니고 기도할거 헌금할거 선교할 시점과 기도할 몇시부터 몇시까지 기도, 몇시부터 성경보기 이렇게 오는게 아니고 저쪽에서 한꺼번에 단일화 되어서 다 와요. 단일화 되어서. 확 이렇게 덮친다는 말이 적절하죠. 이게 와서 덮쳐버려요.
그러면 이 덮칠때는 단일화가 덮쳐요. 단일화가. 단일화가 덮치게 되면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행함이 단일화에 뭍히게 되는 겁니다. 몇시부터 몇시까지 뭘 했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왜 그 시각에 기도하게 하셨느냐 이렇게 되요. 왜 그 시각에 헌금하게 하셨고 왜 그 시각에 말씀듣게 하셨고 왜 성경보게 하셨느냐? 그 바쁜 시간에 성경 구절을 왜 보게 하셨느냐 라고 이제는 뭐냐 하면은 내가 정답을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정답을 단일화 시킨 그 분에게 질문을 되돌려주지요.
주님이여 이러한 사태를 어떤 이유 때문에 제 인생 주변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셨습니까 라고 공을 넘기는 겁니다. 내가 정답을 미리 알아 버리면 이게 법자가 되요. 법자란 말죠. 법제처있잖아요. 법제처. 법재화의 특징은 방금 이야기 했듯이 시작과 끝을 내가 안다는 겁니다.
이걸 제가 지난 시간에 단락이라고 했는데 단락 단락 끊어요. 끊어놓고 A라는 이 시작과 이것이 아침했다 설거지 끝 그다음에 설거지 했다 청소 끝. 그러면 이 사이는 뭔데요? 이 단락이 A고 이 단락이 B라면 이 사이는 뭡니까? 이 사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게 되요. 임의로 자기가 뭔가 빼먹는 셈이 되요. 나는 설거지 깨끗이 했으니까 A+점수. 청소는 좀 대충했으니까 B, 아침 성적은 A+, B니까 오후에 누구 만날때는 행운이 찾아 올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침에 설거지 하면서 남편과 싸웠다. 스튜핏! 그런데 이거 하면서 애하고 또 한바탕 싸웠다. 스튜핏! 그러면 오늘 오후에 하나님께서 나한테 벌 내리면 어떻게 하지? 이게 바로 인간의 선악 구조에 망에 있던 법제화입니다. 법제화의 제일 약점은 바로 단락과 단락 사이에 틈이 있다는 것. 벌어진다는 거죠.
이러면 자아는 연속되면서도 일방적으로 자기 우수함과 잘남을 위해서 괜찮은 것만 골라서 자기한테 이걸 적용시켜서 나는 별로 나쁜 사람아니고 오늘도 착실하게 살았다고 스스로 자기한테 평가를 내려버린다 이말이죠. 그거는 단일화가 안되지요. 단일화가 안되.
그러면 단일화는 어디서 나오는가? 아버지에게 아들은 딱 한분밖에 없어요. 아버지는 모든 일을 누구한테 맡겼는가? 아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 맡긴일이 뭐냐 하면은 제가 아까 덮친다는 이야기 하잖아요.
요한복음대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예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어떤자에게? 나를 믿는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믿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에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인간 속에 들어온 이 단일화가 그게 사망인데 그 사망이 제자들에게 이제 파도로 밀려왔어요.
그러면 그 파도가 자리가 예수님이 옮겨 가는 거예요. 어디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겁니다. 그러면 본인의 행함은 그 위치에 이미 포함이 되 있어요. 위치에. 위치에 포함됬다고요. 이사를 갈 때 냉장고 빼놓고 가지 않잖아요. 이사갈 때 강아지 빼놓고 안가지요? 강아지가 더 중요하니까. 어떤 사람한테는 강아지가 남편보다 중요하죠. 하여튼 강아지를 데려가잖아요.
단일화를 쉽게 가겠습니다. 제자는 뭐냐? 예수님의 단일화를 증거해야될 재료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주장이예요. 인간은 자기 개인이 구원 받기를 소원하고 있어요. 교회다니거든요. 이게 인간의 모든 출발점입니다. 내가 잘되면 모든 만사가 원더풀이예요. 내가 잘되면. 남이야 뭐 세월호에 죽던말던 하여튼 나만 잘되면 되요. 나만 잘되면.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오직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라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는 12제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뽑는 겁니다. 그러니 그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주체예요.
이제 예수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 무슨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그 기도 내용에 대해서 너는 일체 거기에 집어넣을 내용은 너희에게는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배가 고픈데 주님 먹을걸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는데요. 그렇게 한다면 내가 배고프다고 기도했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배고프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배고픕니다 라고 기도하게 만들었다라고 해야 옳다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단일화가 부각이 되니까 그러는 거예요. 부각이 될 때 왜 내 이름이 있는데 내가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빼고 마지막에 예수이름을 교체해서 집어 넣는가 그 이유가 증거되게 되어 있습니다.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6장 21절 한번 보겠습니다. 20절 끝에 보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제가 지금까지 기도 이야기 하면서 기도하지 말라 이야기 안하지요? 안했지요? 이제 그런데 드디어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예수님처럼 하겠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마세요.
이 이야기가 오늘 26절에 이야기예요. 나는 너희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겠다는 이야기하고 같은 뜻이예요. 기도하지 마세요. 왜? 주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실겁니다. 왜냐면 여러분들의 기능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라고 주께서 다루시는 대상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기도할 때 기도하게 됩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러면 그 기도를 하게 되게 되면 그 기도내용은 뭐가 들어가느냐? 왜 자꾸 우리로 하여금 우리 기도 내용을 넣지 말라고 하느냐? 그럼 그 기도 내용에 우리 기도를 넣지 않으면 무슨 내용이 그럼 그 자리에 들어가느냐?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이 들어갑니다. 공식입니다. 기도는 성경말씀만이 내용이 됩니다. 그 외에는 기도의 내용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마지막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모든 성경은 누구를 증거합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거든요.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증거가 끊어진 내용은 들어가면 안되요. 모든 기도에. 예수님의 단일화에 관련된 기도만 해야된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곧잘하는 기도. 주여 넓은 길로 가지 않게 하옵시고 좁은길로 가게 하옵소서. 이거 마태복음 7장에 있는 내용이죠? 곧 잘 기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또 이런거 먹는것 입는걸로 족하게 하옵소서. 적금 사기 당하고 난 뒤에 이런기도 곧 잘 하지요?
우리 자식이 이제 둘째 아들이 사업을 하는데 주여 욕심내지 말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게 하옵소서. 뭐 이런 자식 사업 앞두고 이런 간절한 기도 다들 해봤지요? 다들? 수능 앞두고 주여 주시는 점수만 감사케 하옵소서 뭐 이런 기도 안해봤어요? 해봤지요? 이 내용이 다 성경에 있는 내용입니다. 디모데전서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자, 이 내용을 과연 인간이 할수 있느냐 이말이죠. 이 내용을 할려면 우선되는게 있어요.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부인이 되야 됩니다. 자기 부정이 되야되요. 부정 되지 않으면 이런 내용 안나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 바로 그것을 염두해 두고 하셨기 때문에.
그러면 성경에서 신약에서 구약을 통해서 자기 부인은 무엇을 의미 하느냐 하면은 혈육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혈육과의 관계단절. 천하 자식이라도 나보다 더 합당치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늘나라의 합당치 않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혈육을 건드리십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인간이라는 몸은 인간의 몸은 있지만 인간 속에 있는 마음은 어디서 주어졌느냐 하면은 거기에 속해 있는 그 집안에서 대대로 집안에서 주어진 것들이 자기의 정체성으로 자기의 본질로 정신세계로 그대로 다 흡수 빨아 당기고 있다 이 말이죠. 전부다.
내가 잘되야 우리 아버지의 명예가 서고 내가 잘되야 우리 집안의 명이 선다. 그러면 내가 속해있는 이 집안은 융성하게 되고 복받는 집안이 된다라는 것을 구약때부터 계속해서 이게 줄창 그런쪽으로 그 집안 사람으로 키워져 온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마태복음 10장 이 말씀 하실 때 뒤에 말씀이 뭐냐하면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는 자여 구원받는다고 이야기 하시면서 그 앞에 있는 말이 뭐냐하면 천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자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 라는 말을 이렇게 연결시켰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구태여 그런 말씀하신 것은 예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하는 기도 내용 그 당시에 대중들이 국민들이 백성들이 민중들이 했던 기도내용을 주께서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은 혈통이예요. 혈통. 유대민족이 혈통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들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택한 민족, 자기들은 택하신 민족이기 때문에 버릴 리가 없다는 거예요. 한번 택함은 영원한 택함이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버릴 리가 없기 때문에 메시아는 누가 메시아냐? 약속대로 우리 유대인을 위한 메시아고 오실 다윗은 바로 우리의 왕이기 때문에 다윗이 오면 우리가 제사장 나라가 된다. 철썩같이 그들은 구약성경 문자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그대로 다 이야기 한거예요.
요즘 말로하면 3대째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복을 받는다와 똑같은 사고방식이예요. 그 혈육이라는 그것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관계도 없어요. 관계도 없는 사람보고 여기 내 앞에 있는 자들이 곧 내 형제요 모친인 것을 보라 이말이죠.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을 때 그 뒤에 누가 와 있었느냐 하면은 마리아하고 그 배다른 동생들이 와 있었거든요. 그 듣는 마리아 듣는 동생들은 기분 얼마나 나쁘겠어요. 여기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모친이다. 다른말로 하면 나의 family다 나의 가족이다 이말이죠.
그러면 가족은 어디있느냐? 가족이 어디 있느냐 하면은 가족이 먼저 성립되고 난뒤에 성립된 말씀에서 새롭게 가족이 구성이 되는 겁니다. 말씀이 먼저 있고 가족이 구성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남편이나 아내가 복음을 안들을때는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남이라고 여기라 이말이죠. 이게 기쁜 소식일수도 있고 슬픈 소식일수도 있는데 정들면 슬픈 소식이고 정 없으면 기쁜소식이고 그런데.
구애 받지 말라는 거예요. 혈육 관계에 자식과 부모관계 그리고 천하 남편관계 이런 관계에 그 어떤 책임같은거 느끼지 말란 이야기예요. 몇분도 안됐는데 벌써 기쁜 소식이 막. 왜 그 쓸데없이 책임을 질려고 하느냐 이말이죠. 도대체 그 책임감은 누가 그렇게 집어넣은 책임감이냐 말이죠?
사람은 말하죠. 사람이 기본은 돼야지 하거든요. 그 기본 어디서 나온 기본이예요? 예? 교회는 다녀도 인간은 짐승되면 안되잖아. 인간 할 도리하고 난뒤에 그 다음에 교회 다니고 뭐 더 착해져야지 이렇게 하는데 어제 그 월요일 대구 강의 이야기 했지요. 아주 강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착한사람은 지옥에 간다고요.
지옥은 착한 사람이 가고 천국은 못된사람만 가고. 절대로 착한 사람은 천국에 못갑니다. 착한데 왜 천국가요? 지옥가야지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가 사람들 어디로 인도하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지옥으로 인도하는거 같애. 예수 믿고 성령 받았으면 착해라. 말씀은 폼으로 있는게 아니다. 성령 받았으면 믿음으로 끝난게 아니라 이제는 영광 돌려야지. 영광돌릴려면 말씀 지켜야 영광 돌린다. 당신들 눈 있거든 성경 봐라. 성경에 다 그렇게 되어 있지.
교인들이 아마추어니까 할말이 없는거예요. 이거 맞네! 이러거든요. 맞기는 뭘 맞아요. 로마서 3장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방법은 예수님 믿는 것 밖에 없어요. 다른 방법 없어요.
화목제물을 믿음으로서 영광이 되지. 피를 믿음으로서 영광이 되지 인간의 행함으로 영광되는게 아닙니다. 피 믿는데 영광에 모자란다? 그래서 피 믿고 난뒤에 내가 착함으로 더 추가한다? 어디까지 추가할껀데요? 또다시 법자화되요. 얼마나 철저해야되는데? 얼마나 철저해야되요?
32살 때 예수 믿었다. 이제 80세 까지 목표 세운다. 80쯤 되면 거룩하라는 말씀대로 너희는 거룩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수준 높이겠다 이렇게 했는데 32살되는 생일 그 다음날 교통사고 나서 죽었는데. 자기 목표 깨졌어요.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어쩔껀데? 뭐 상급도 없이 부끄러운 구원 받습니까? 보너스 못 받아요? 하나님께 영광 돌렸는데.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측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원리를 제시했느냐 하는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란 예수님의 단일화를 계속해서 그 안에 있으면 그게 영광이예요. 왜? 예수님의 단일화가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빌립보서 2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이름을 무효화 시키고 오직 주의 이름에만 굴복할 때 그 동안 주님의 희생 위에서 살아왔다는걸 아침에 밥하고 뭐 이렇게 지하철 타고 전부 다 주님의 십자가 피를 밝고 처벅처벅 밟으면서 왔습니다. 주님의 희생 덕분에 햇빛과 공기는 받고 있습니다. 또 내일 또 비온다 해가지고 단비가 오겠지요.
봄 바람 휘날리며~ 그 전부 다 봄 바람 휘날리는 벚꽃 전부 다 이게 주님의 십자가에 은혜로 제공된거예요. 김정은이나 리설주나 전부 다 그 사람은 예수 몰라도 햇빛과 단비를 주셔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게.
선인과 악인에게 무차별 차별없이 은혜를 주셨고 로마서 1장에 보면 나중에 계산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니가 은혜를 받아놓고 은혜 주신자를 몰랐잖아. 그때 너희가 핑계치 못하리라. 줘 놓고 이제는 끝장내는 거예요. 지옥 갈 사람 끝장내 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열심히 행했습니다는 이야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주신 은혜를 주신 은혜가 은혜인 것을 니가 알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나름 착실했습니다 라는 것은 아예 그것은 그런 문제가 안나와요. 그런 문제가. 그런 문제가 안나온다니까요. 질문을 그런식으로 하는게 아니예요.
약속이라 하는 것은 내 살과 내 피로 끝났어요. 내 살은 이 떡은 내 살이요 이 잔은 내 피요. 이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와 계약을 한겁니다. 계약 상대자는 우리가 아니예요. 계약상대자는 이 세상에 한분밖에 없어요. 저도 아니고 여러분도 아니예요. 예수님만이 계약 상대자고 그 계약이 실패로 끝났습니까? 다 이루었어요. 뭐가 더 필요합니까?
성도의 기쁨은요 자기 의를 누적할 필요가 없다는데서 오는 기쁨이예요. 더 이상 남하고 견줄 나만의 주특기를 따로 챙길 이 창고에 아무것도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데서 오는 그 가벼움, 그 자유함 이거 마귀에게 빼앗기지 맙시다.
절대로 이걸 세상 어디에도 빼앗기면 안되요. 스스로 법제하면 안되요. 정신병자되고 나중에 우울증 걸려서 자살합니다. 누구처럼. 완벽의 완벽? 지금 그거는 자기 의예요. 평소에 자기 의입니다. 완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예 생각도 하지 마세요. 완벽 안해도 되요. 철저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몸하고 죄인들 가는 나라에 손들고 죄인 여기에 하나 더요. 죄인 하나 더 추가합니다. 그렇게 살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되요. 그렇게 살 때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그 취지를 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오늘 제목입니다. 이면지. 이면지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A4용지에 이미 인쇄되어 있어요. 그런데 뒷면이 비어 있잖아요.
앞에 예수님께서 단일화 다 된 상태를 뒤에다가 갈지자로 낙서를 하게 만드는 거예요. 왜 낙서를 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하는 낙서하고 이쪽면에 있는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 그 면하고 한번 대조를 해보라 말이죠. 대조를 왜 해야되느냐. 대조를 해야 예수님만이 증거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만이 증거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를 뽑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예수님이 제자를 뽑고 여기 20절에 보면 지금은 근심하겠으나 너희는 근심이 도리어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기쁨이 되지요.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근심거리를 유발합니다. 근심거리를.
오늘 어떤 분하고 아침에 그런 통화를 하는데 하는 일마다 다 안되요. 하는 일마다. 뭐 게을르고 농땡이 부리고 이런거 아니예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전력을 다해서 뭔가 아이디어까지 주께서 주셨다고 생각하고 다 하는데 그게 다 막혀요.
그러면 차라리 그럴거 같으면 차라리 어떻게 되요? 차라리 죽으라고 하는게 속편하잖아요. 예? 그런데 또 죽이진 않아요. 계속 또 일을 또 꾸역꾸역 하게 만들어요. 이 원리에 대해서 지난 지난 대구강의에서 제목을 중층결정이라고 했거든요. 중층결정. 상당히 어려운 용어인데 네자 밖에 안되는데 중층결정.
한번 풀이 하게되면 이면지하고 약간 다른 의미인데 중층결정이라고 하는 것은 결정하는데 중층, 층이 겹쳐져 있다는 거예요. 겹쳐지고 결정된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은 원인이 두가지 이상이예요. 두가지 이상의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결과가 된 우리의 모습에 있어서 원인을 두가지 이상으로 이상이니까 두가지 세가지 네가지 되니까 우리는 그 원인은 있기는 있지만 어느것이 딱히 원인이라는 것을 알수 없는 결과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결정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결과라 하는 이것이 곧 뭐냐 하면은 원인으로 작용해서 또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어제 나는 설교 듣고 은혜 받았다. 그래서 나는 구원 받는 사람맞다 라고 이렇게 어떤 결과를 생각했었다면 오늘 되게 되면 그게 원인이 되요. 그 원인이 어떤 원인이냐 하면은 이 교만이라는 원인이 되요.
어제 분명 은혜받은건 맞는데 오늘되서는 이게 교만이 되요. 교만이되어서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면은 주여 제가 또 주님 증거할 생각 안하고 나 구원받았다는 것을 또 내 자랑질 비슷하게 증거했습니다 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주님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기를 기다렸다가 반응에다가 초치기 해버려요. 반응을 나타냈고 좋다 했는데 그거를 초를 쳐버려요. 초를 치게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님만 증거되게 주님의 단일화가 또다시 새로운 차원에 주님의 단일화가 증거되게 합니다.
이것은 이런 일이 전에 없던 새로운 주님이 오늘 새로운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야~ 주님의 증인노릇하게 하는구나. 이렇게 하게되면 이게 오늘로 끝나요. 내일되면 이렇게 됐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고 여겼던 그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초를 쳐버려요.
그러면 오늘은 몰랐는데 내일 되서야 비로서 아는 예수님의 새로운 깊은 뜻이 또 단면이 또 느껴집니다. 또 느껴져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이미 단일화된 구조 속에서 이 단일화의 폭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그게 풍부한지를 깨닫게 하시는 일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에베소서 3장 한번 봅시다. 3장에 보면 오늘 기도와 관련되서 그럼 사도 당신은 어떻게 기도했느냐? 사도의 기도문이 나와 있습니다. 기도문이 나와 있는데 앞에 3장 14절에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라고 해서 성령이 기본이고요. 이거는 좀 이따 이야기 할거예요.
성령이 기본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빠지면 기도 안되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고 그 다음에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해서 이거는 개인의 기도는 없어요. 성도한테 개인의 기도는 없습니다. 우리가 있을 뿐이예요. 이거는 지난 어제 대구 강의에서 했습니다. 나 아니고 우리입니다. 내가 죽어야 우리가 생겨요.
하고 난뒤에 하는 말이 능히 모든 성도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그 라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그 다음에 뭡니까?
여기 충만이죠. 이 충만을 아까 제가 해일 또는 단일화 거대한 파도라고 표현한거예요. 충만함. 이 충만함을 아는 순간 우리는 충격입니다. 우리에게 왜 충격이냐하면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 모든 소소한 근심 걱정이 개인에서 나와요. 나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누가 해결하지 못한다는 개별자 의식을 갖고 있다가 이렇게 덮쳐버리면 이런 개별자 의식 자체가 무색해 버려요.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내일 살지도 모르는데 왜 걱정 미리 당겨서 합니까? 그런데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단락지어서 생각했던 것이 그것이 큰 파도가 넘치니까 이게 완전히 그 순간 다 부서지고 해체되는 거예요. 뭉개져 버리는 겁니다.
걱정 근심 한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쓸데 없는 것 가지고 걱정했구나. 날마다 파도 속에 있으면서 갈증을 일으키다니 이게 말이되? 하여튼 그냥 깨끗한 물 속에 있으면서도 물을 못 마시는 셈이 되었다 이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뭐냐하면은 행해라가 아니라 니가 있는 그 소속된 그 현위치가 니가 생각하는것보다 월등하게 지금 풍부한데, 그 풍부한 그 은혜를 니가 지금 족히 못 누리고 있다는 것까지 지적이고 질타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일들이.
모든 일들이 감사 감사 감사가 뭡니까? 입을 다물면 할말이 없지요. 그정도로 감사해도 시원찮은 우리가 도대체 우리는 그동안 시선을 다른 사람은 저렇게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이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것과 대질하고 맨날 비교하다 보니까 주님이 증거한 것을 그만 까먹어 버리고 감사대신 불평과 걱정과 근심과 반항과 반발만 분노와 울분만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저는 안그러는데요 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그 사람은 뭐를 몰랐기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은 주께서 주신 이 은혜가 이 제자들도 몰랐어요 사실은 제자들도. 이 은혜 구원이 실은 내용이 뭐냐 하면은 심판입니다. 껍데기는 구원인데 안에 내용은 뭐냐 하면은 심판 이예요. 심판하시는 겁니다.
저주고 몰락이고 타락이고 그런거예요. 몰락입니다. 심판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이암아 우리로 하여금 심판에서 건져냈다는 이 위상이 내가 잘 들어보세요. 내가 생각했던 그 위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말이냐 하면은 이세상이 있잖아요. 이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어디 간다 했습니까? 보통 상식으로 말하면 어딥니까?
저 세상 간다 또는 저 세상 가는 것처럼 우리는 천국에 간다고 하지요.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 세상의 관심사는 나 구원에 관심이 꽂혀 있어. 나 구원. 개별적 구원에만 관심히 꽂혀서 교회 갑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이 구원을 원활하게 하고 뭐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행함, 행동, 신학적 행동, 경건한 행동, 거룩적 행동에 아예 여기에다가 신경을 많이 쓰겠지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착하다. 여기는 그냥 넘어가고 또 착하다 그러니까 복 받겠지 하는 식으로 개인적으로 되돌아 오는 개인적으로 회수가 되는 그 결과가 복일 때 나는 구원받은 사람 맞다는 생각에 계속 갇혀 있는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구원의 내용을 가지고 구원한다 하기 때문에 그 구원의 내용이 마치 애드발룬이란 큰 풍선처럼 붕붕 떠가지고 천국에 가뿐하게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에서의 구원은 내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구원이 아닙니다. 심판이예요. 다 죽은자다. 다 죽은자다 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이걸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육 그대로 예요. 성령 못 받은 사람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죽어야 될 자를 늘 유지하도록 성령께서 지금 원하고 있어요. 내가 죽을자 인 것을.
여기서 십자가 복음 하면서 제일 수십년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대목이 이제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이미 우리가 죽었고 라는 그 대목에서 우리는 납득이 안되 납득이. 납득이 알지요 납득이. 납득이 안되요 납득이.
만약에 진짜 우리가 생각하는 죽는 죽음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누워있어야 되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그러면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겠다는데, 바쁜기는 너무 바쁘고 하루 스케쥴 빡빡해.
계속해서 설치고 운전하고 온갖 간섭하고 전화하고 전화했다하면 3시간씩 전화하고 온갖 그렇게 했는데 이렇게 하는게 이게 어떻게 죽은자의 모습 모양세 입니까? 이렇게 죽은게 다 있어요? 남 집안 가서 또 하고 교회 걱정 다 하고 교회 걱정 미리 다하고 그래도 또 나라 걱정까지 하고 또 세월호 걱정까지 다 하고 박근혜 재판까지 하고 류현진 공 던지는것까지 계산 다 해야되고 이놈 북한 예술단 무사히 귀환하길 온갖 이런데 어떻게 우리가 죽은자 입니까? 이게 생생히 살아도 보통 살아있는게 아니잖아요.
죽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기존에 있던 이 세상이 예수님의 단일화로 말이암아 이쪽이 예수님과 마중나오는 저쪽이 하나로 규정되요. 하나. 세상이 착한사람 나쁜사람 이렇게 규정되는게 아니고 그걸 통합합니다. 통합해서 예수님쪽에서 하나 나왔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대상이 전체가 또 하나예요.
요한복음에서 그래서 뭐냐 하면은 세상은 뭐다? 어둡다. 세상은 악하다가 아니고 한통속으로 묶어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날려 버립니다. 너는 괜찮고 얘는 이게 아니고, 한 드럼통에 집어 넣어 놓고 한꺼번에 날려 버려요.
그래서 이 세상은 이미 심판 받았다고 되 있어요. 심판 받았다 이렇게 되 버리면 그걸 말로 하면 심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가 얼마나 착한데 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땅에 와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이 땅에 와서 죽으십니다.
그러면 이땅은 뭘 유발하는 세상이냐 하면은 결국은 죽음으로 전부 다 시체를 만드는 그런 힘이 작용하는 세상이예요. 예수님도 죽고 예수님 마저도 죽고 모든 사람도 죽고 좀 살았다 하지만 나이 90살 되면 100살 되면 다 죽어요. 죽고 난뒤에 자식 낳았지만 자식은 내가 아니잖아요. 결국은 나는 언젠가 죽는다 이말이죠.
그럼 죽는것만 죽음이냐 할때에 그게 아니고 죽기 전에 일어났던 모든 것이 죽음으로 달려가게하는 요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 작용이 뭐냐 하면은 죽음 또는 죽음 활동이예요. 이 세상은 죽음 활동으로 보는 겁니다.
이 죽음 활동을 봐버리면 살아있더라고 죽는 순간만 죽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죽음활동이 되어버리면 여기서 태어난것부터 포괄 합해서 이게 죽음활동으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죽음 활동으로.
동사하고 명사 차이가 뭐냐 하면은 동사는 계속 움직이는 것을 이야기해요. 그런데 명사는 확정된 겁니다. 규정된 겁니다. 여기있는 컵이 좀 지나도 컵이예요.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배고프다는 것은 배고프면 밥 먹으면 또 다시 배 안고플수가 있고 좀 덜 고프다 이럴수 있잖아요. 동사는 움직인다고요. 명사는 확정적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명사로 이렇게 규정해버려요. 규정해버린다고요. 죽음이라고 해놓고 실제로는 뭐냐 이 안에 들어가게되면 죽음 아니고 죽음과 관련된 활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죽음의 활동이 된다면 예수님 자체가. 어디 종이 없습니까?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뭐라고 하는냐 하면 예수님은 생명이거든요. 생명인데 이거 정말 쉬운거예요. 생명인데 이 세상이 잉크로 이렇게 시커먼 잉크로 되어 있잖아요. 생명도 이렇게 들어오니까 이게 뭘로 보이냐 하면 이게 죽음활동으로 보이는 거예요.
사실은 이면지는 생명인데 생명이지만 이 세상 산다는 이유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게 죽음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요한복음이 다 풀립니다. 물 이렇게 여섯동이를 갔어요. 제가 안가보고 이야기하는거 아닙니다. 얼마전에 가봤어요. 가나안 혼인잔치에. 물동이 여섯 개 딱 걸려져 있어요 벌써 거기 가면.
분명히 물이예요. 물인데 물 맞아요. 그런데 그거는 이미지를 본거라니까. 물인데 누구 손에 달렸느냐? 이 물을 누가 명령했어요? 주님이 명령하면 이게 뭐가 되느냐? 이게 포도주가 된다고요. 그런데 인간들은 물로써 물로만 이해할뿐이예요. 뒤에 포도주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지요.
주께서 때가 되매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때가 되매 왜 물이 포도주 됐는지 때가 되매 알게 될 것이다. 그때는 뭐냐 하면은 그때는 성령이 오실때가 아니고, 참 어렵다. 성령이 오실때가 아니고 성령이 내주할때예요. 성령 나름대로의 때가 따로 있어요.
우리 인간의 때는 과거 현재 미래로 하잖아요. 이게 세상의 때라고 하잖아요. 자꾸 역사적으로 연대기를 만들어요. 시간을 직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은 원이예요. 원이거든요. 성령이 내주하게 되면 그 하나님의 때가 같이 여기 내주해 가지고 어떻게 살아도 그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때 안에서 놀고 있습니다.
너희는 죽었고 내 안에서 살았고가 될려면 우리가 이면지 아니고서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생명이 오게 되면 주님의 용서가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이땅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맞아요. 죽는거 맞아요.
하지만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상태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성도는 좀 억울해요. 이미 살았는데 다른 사람보기에는 당신 기미가 좀 낀다. 보톡스 맞아야 되지 않겠나? 아이고 갱년기야? 요새 얼굴 굉장히 않좋네. 곧 죽겠네 이러거든요. 억울해 죽는거예요. 우리는 이미 살았는데 살았는데 갱년기래.
그런데 문제는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게 화가 나고 약오르는데 성령 안받은 사람은 납득이 되네 이게. 그래 좀 죽으면 그래도 천당간다고 죽어서 가는게 아니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지금 인간이 사용하는 때를 사용하기 때문에 죽으면 천당간다고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게 아니고 죽어서 천당가면 이미 늦었어요.
살았을 때 이게 살았을 때 이면지로 바뀌어져야 되요 살았을 때. 그때는 성령이 오게되게 되면 우리는 기존의 했던 것도 알고, 세상이 뭐라고 하는것도 알고, 그리고 세상이 모르는 이야기도 알고. 10분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