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이면지 1804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4. 8. 20:58
2018-04-03 23:53:57조회 : 221         
이면지 180403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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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59.♡.64.246)18-04-08 17:58 

강남-요한복음 16장 25절(이면지)1804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6장 25절부터 보겠습니다. 25절에 보면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16장 25절부터 26절, 27절 가운데서 사람들이 그냥 너무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는 대목이 있어요. 


너무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는 대목이 26절입니다. 26절이예요. 2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 대목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이는 26절에 보면 그날에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그 다음에 뭡니까? 말이 아니니라 되어 있어요. 정말 이것은 상당히 약간 충격적이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하는 말이 제자들아 나는 너희를 위해서 기도할 생각없다 그런뜻이예요. 나는 너희를 위해서 기도할 생각이 없다. 


이것은 어디 말씀과 정면으로 마주치느냐 하면은 히브리서 7장의 말씀과 어긋나요. 7장에 보게되면 7장 25절에 보면 히브리서, 그냥 한번 들어보세요.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예수님이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되어 있어요. 


우리가 구원되는 이유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너희를 위해서 구원에 지장 없도록 기도했기 때문에 우리는 차질 없이 지금 구원됩니다 라는 것을 히브리서 7장 25절에서 지금 분명히 밝히고 있거든요. 그렇죠? 


그렇다면 그 앞에 있는 그 사도바울의 편지나 또는 예수님의 모든 그 말씀안에서 이 흔히 우리가 잘 아는 이 이야기 두자지요. 한글로 두자지요? 기도, 기도가 뭐냐는 겁니다. 기도가 뭐냐는 겁니다. 기도가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기도는 모든 종교에 다 있으니까 기도는 뭐 그냥 자기가 기도한다하면 그냥 기도하면 되는 거예요. 


기도에 대해서 우리보고 기도를 맡기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맡기면 되는데 왜 우리에게 기도 하라고 했으면 그 말은 기도는 너 담당이야 니가 알아서 기도해야되. 니가 기도하게되면  그것이 너의 구원에 보탬이 될거야. 이렇게 임무를 맡겼으면 우리에게 맡겨 줘야 되는데 왜 히브리서 7장에서는 예수님이 왜 우리기도 속에 또 끼어드십니까? 예수님이 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냐 이말이죠. 아 우리가 기도가 모자라서 그런가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들은 기도해봤자 기도할바를 알지를 못한다. 그런데 누가 기도하느냐? 성령께서 친히 기도를 하는데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하는게 아닙니다. 성령께서 기도할때는 기도하는 심정이 어떤 심정이냐 하면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탄식하면서 기도해요. 탄식하면서. 이 탄식이라는 말이 로마서 8장에 왜 나왔느냐 하면은요. 참 기가찬다 이말이거든요. 그래서 그 앞에 로마서 8장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아예 너희는 기도에 관해서 기도할줄 모르는 존재로 규정을 했어요. 규정. 너희는 기도할줄 모르는 존재. 그러니까 기도할줄 모르는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할줄 모르는 사람을. 


그러면 기도할줄 모른다 모르는것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될 필요가 있느냐 아니면 우리가 몰라도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또 이렇게 등장해요. 자, 교회 처음 나왔습니다. 처음 나오면 교회에서 익히 아는데로 그냥 흘러가요. 


그게 뭐냐하면 처음 나온 사람에게 지금껏 여러분들은 교회 나와서 나오기전에 나름대로의 비는게 있었는데 교회는 그렇게 하는게 아니고 하나님 뜻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됩니다 라는 것을 처음에 이야기 해요. 예수 이름으로. 


그러면 남묘호렌게쿄랑 똑같은 거예요. 무슨 중얼중얼 해놓고 뒤에다가 이것만 안 빠트리면 되요. 또 기억에 치매 걸린사람은 빠트릴수도 있습니다만은. 중얼중얼 해놓고 그 뒤에다가 예수 이름으로만 붙여버리면 앞에 있는 내용은 야고보서를 가지고 또 추가를 해요. 


니가 기도한 것은 다 이루었다고 믿어라. 야고보서에 있잖아요. 믿으면 니가 뭘 해도 그것은 예수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예수 이름이 받침이 되어서 그건 다 이룬줄로 믿으라. 만약에 니가 그걸 안 믿게 되면 마음이 두 마음이 흔들리는 마음이 되가지고 실컷 해 놓고 헛수고 한거 밖에 안되니까 항상 끝 부분에 다 해놓고 믿습니다 라는 마음을 추가를 하게 되면 너의 기도는 응답이 된다 라고 하는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요령이죠. 영어로 하면 이게 뭐냐 하면은 skill되요. 하나의 재주를 피우는 거예요. 재주를 피우는 것. 재주를 피우는 거예요. 그러면 이 요령과 스킬을 이 바닥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여기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행함이 준동합니다. 준동이란 말 아시죠? 준동. 가만히 있는데 들썩 들썩 하는 것. 행함이 여기 준동해요. 


그렇다면 행함이 인간의 행함은 어떤게 되느냐 하면은 행했을때와 안 행했을때를 누가 알고 있느냐 하면은 행한 내가 알고 있어요. 내가 알고 있다고요. 기도 시작이 오후2시45분이였다. 끝날때가 2시 55분이였다 그러면 이 사이를 이 사이에서 교회가서 엎드렸으면 이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기도라고 해요. 기도라는것을 시작점 알고 끝나는점 알아버리면 그걸 안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기도를 안행했 경우에는 기도가 성립되지 않았다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제가 아까 뒤에 뭘 붙이라고 했어요? 예수이름 붙이지요? 그러면 예수이름을 뒤에다가 상표처럼 예수이름을 붙여버리면 2시 45분부터 해서 2시 55분에 끝난 그 기도가 마지막에 야고보서에 의하면 니가 성취된줄로 믿으라! 믿으라! 믿으라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그 다음날 오후 4시부터 바이어 만나는 일이 잘 풀렸다면 이 어제 앞에 있는 2시 45분부터 2시 55분까지 여기까지의 행함이 효과본게 되겠죠? 효과본거. 


만약에 그 다음주일날 어떻게 교회 안나오는 조카가 교회 나오면 사람들이 이걸 가지고 무슨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중보기도라고 해버려요. 중보기도라고 한다고.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초조감을 제공하느냐 하면은 정말 기도할려고 했는데 그것도 기도를 정해진 시간에 할려고 했는데 워낙 하는게 바쁘다 보니까 시집에서 제사드리라고 오라고 해가지고 장보러 간다고 빠져버리고 했을 경우에는 어떤 점이 초초하느냐 하면은 기도 해야할시간에 그 기도라는 행함을 누락했기 때문에 믿습니다가 하는 요소가 빠졌기 때문에 그 다음 기도가 빠진 한주동안은 내내 초조와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동안 견딘것도 기도 덕분에 견뎠는데 바빠서 잊어버려서 기도를 안하게 되면 나는 이번주는 맴매 손에 매 맞을 준비를 해야되겠죠? 아니나 다를까 금요일날 차 사고났네. 그러면 이거는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결부되느냐 하면은 행함이라는 기도 행함을 안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느냐 하면은 기도시간을 늘려버려요. 기도시간을 10분 기도해서 이만큼 효과봤는데 만약 기도를 횟수를 늘린다든지 시간을 1시간 2시간 늘려버리면 이거는 조카만 아니라 조카댁부터 해가지고 시누이 올케까지 교회 다 나오게 생겼어요. 중보기도가 그만큼 양이 많아 졌으니까. 다 뒤에다가 믿습니다 라고 다 집어 넣었으니까. 


결국 이거는 뭘 믿는거예요? 믿습니다 하는 것은 뭘 믿느냐 하면은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내 인생 조졌다는 것을 믿는거예요. 내가 내 행함의 양을 행함의 양에 의해서 복의 양으로 비례된다는 사실을 내가 믿는겁니다. 


그러면 나의 믿음의 대상이 누구냐 하면은 내가 내 자신의 믿음의 대상이 되죠. 그러면 감시를 누가 해야되요? 내가 나를 감시를 해야되요. 가만 있어보자. 내가 나한테 너 오늘 성경 읽을 때 진정성 있게 읽었어? 기도할 때 산만하지 않고 집중했어? 끄트머리에 믿습니다하는 그런 마음을 니가 추가했어? 안했어? 계속해서 이렇게 해요. 계속 이렇게 하는데 에베소서보면 또 뭐라 했느냐 하면은 기도할 때 무시로 기도하라 해요. 무시로. 시도때도 없이 기도하라 했거든요. 


가만 있어봐라. 시도때도 없이 기도하는 사람. 그러면 이번에 일이 잘 안된 것은 애가 성적이 내려간 것은 내가 기도를 이렇게 얍샵하게 딱 시간 재서 했는데 이걸 무시로 해야되. 그럼 무시로 하면 길을 갈때도 해야되는가? 길을 걸어갈때는. 그다음부터는 이제는 고민이 되는 겁니다. 계속 기도에 대해서 자꾸 스트레스를 받는거죠. 


그리고 기도할 때 집에서 하는 기도는 쳐주느냐 안쳐 주느냐, 교회 뒷자리냐 앞자리냐, 그런것도 계속해서 그게 뭐냐 하면은 법에 세분화가 계속 어이지는. 기도할 때 꿇어 앉아서 할것이냐? 두손을 모을것이냐? 깍지 낄것이냐? 깍지 빼고 할것이냐? 그냥 펑퍼짐하게 양반 다리했을때는 효과가 어느정도 떨어지고 이걸 실습을 해보느냐 마느냐. 


항상 이렇게 실천이 해야되고 뭔가 원인이 있으면 그 결과가 주어 졌을 때 여기는 인과관계가 성립되고 이것을 반복했을 때 동일한 결과가 나왔을때는 이것을 진리로 이것은 반드시 효과 있는것이라고 확증지을수가 있거든요. 이게 법에 내부에 법의 세분화가 이어집니다. 그러면 이것은 바로 바리새인이 했던 기도를 닮아가요. 점점 더 닮아 갑니다. 법의 세분화. 


주님께서는 기도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오늘 이 주제가 벌써 나왔는데요. 모든 일을 단일화 시킵니다. 세상 전체를 총체적으로 단일화를 시켜서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그 일본에 지진 큰 해일 일어 났잖아요. 2011년도 몇일인가 그때 일어났을 때 파도가 조각조각해서 오는것이 아니고 파도가 큰 파도가 밀려오지요. 


예수님의 세계는 이 세상이 예수님의 세계라면 예수님의 세계는 모든 것이 이렇게 찢어져서 따로 따로 노는게 아니고 기도할거 헌금할거 선교할 시점과 기도할 몇시부터 몇시까지 기도, 몇시부터 성경보기 이렇게 오는게 아니고 저쪽에서 한꺼번에 단일화 되어서 다 와요. 단일화 되어서. 확 이렇게 덮친다는 말이 적절하죠. 이게 와서 덮쳐버려요. 


그러면 이 덮칠때는 단일화가 덮쳐요. 단일화가. 단일화가 덮치게 되면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행함이 단일화에 뭍히게 되는 겁니다. 몇시부터 몇시까지 뭘 했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왜 그 시각에 기도하게 하셨느냐 이렇게 되요. 왜 그 시각에 헌금하게 하셨고 왜 그 시각에 말씀듣게 하셨고 왜 성경보게 하셨느냐? 그 바쁜 시간에 성경 구절을 왜 보게 하셨느냐 라고 이제는 뭐냐 하면은 내가 정답을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정답을 단일화 시킨 그 분에게 질문을 되돌려주지요. 


주님이여 이러한 사태를 어떤 이유 때문에 제 인생 주변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셨습니까 라고 공을 넘기는 겁니다. 내가 정답을 미리 알아 버리면 이게 법자가 되요. 법자란 말죠. 법제처있잖아요. 법제처. 법재화의 특징은 방금 이야기 했듯이 시작과 끝을 내가 안다는 겁니다. 


이걸 제가 지난 시간에 단락이라고 했는데 단락 단락 끊어요. 끊어놓고 A라는 이 시작과 이것이 아침했다 설거지 끝 그다음에 설거지 했다 청소 끝. 그러면 이 사이는 뭔데요? 이 단락이 A고 이 단락이 B라면 이 사이는 뭡니까? 이 사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게 되요. 임의로 자기가 뭔가 빼먹는 셈이 되요. 나는 설거지 깨끗이 했으니까 A+점수. 청소는 좀 대충했으니까 B, 아침 성적은 A+, B니까 오후에 누구 만날때는 행운이 찾아 올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침에 설거지 하면서 남편과 싸웠다. 스튜핏! 그런데 이거 하면서 애하고 또 한바탕 싸웠다. 스튜핏! 그러면 오늘 오후에 하나님께서 나한테 벌 내리면 어떻게 하지? 이게 바로 인간의 선악 구조에 망에 있던 법제화입니다. 법제화의 제일 약점은 바로 단락과 단락 사이에 틈이 있다는 것. 벌어진다는 거죠. 


이러면 자아는 연속되면서도 일방적으로 자기 우수함과 잘남을 위해서 괜찮은 것만 골라서 자기한테 이걸 적용시켜서 나는 별로 나쁜 사람아니고 오늘도 착실하게 살았다고 스스로 자기한테 평가를 내려버린다 이말이죠. 그거는 단일화가 안되지요. 단일화가 안되. 


그러면 단일화는 어디서 나오는가? 아버지에게 아들은 딱 한분밖에 없어요. 아버지는 모든 일을 누구한테 맡겼는가? 아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 맡긴일이 뭐냐 하면은 제가 아까 덮친다는 이야기 하잖아요. 


요한복음대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예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어떤자에게? 나를 믿는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믿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에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인간 속에 들어온 이 단일화가 그게 사망인데 그 사망이 제자들에게 이제 파도로 밀려왔어요. 


그러면 그 파도가 자리가 예수님이 옮겨 가는 거예요. 어디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겁니다. 그러면 본인의 행함은 그 위치에 이미 포함이 되 있어요. 위치에. 위치에 포함됬다고요. 이사를 갈 때 냉장고 빼놓고 가지 않잖아요. 이사갈 때 강아지 빼놓고 안가지요? 강아지가 더 중요하니까. 어떤 사람한테는 강아지가 남편보다 중요하죠. 하여튼 강아지를 데려가잖아요. 


단일화를 쉽게 가겠습니다. 제자는 뭐냐? 예수님의 단일화를 증거해야될 재료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주장이예요. 인간은 자기 개인이 구원 받기를 소원하고 있어요. 교회다니거든요. 이게 인간의 모든 출발점입니다. 내가 잘되면 모든 만사가 원더풀이예요. 내가 잘되면. 남이야 뭐 세월호에 죽던말던 하여튼 나만 잘되면 되요. 나만 잘되면.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오직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라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는 12제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뽑는 겁니다. 그러니 그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주체예요. 


이제 예수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 무슨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그 기도 내용에 대해서 너는 일체 거기에 집어넣을 내용은 너희에게는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배가 고픈데 주님 먹을걸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는데요. 그렇게 한다면 내가 배고프다고 기도했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배고프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배고픕니다 라고 기도하게 만들었다라고 해야 옳다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단일화가 부각이 되니까 그러는 거예요. 부각이 될 때 왜 내 이름이 있는데 내가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빼고 마지막에 예수이름을 교체해서 집어 넣는가 그 이유가 증거되게 되어 있습니다.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6장 21절 한번 보겠습니다. 20절 끝에 보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제가 지금까지 기도 이야기 하면서 기도하지 말라 이야기 안하지요? 안했지요? 이제 그런데 드디어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예수님처럼 하겠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마세요. 


이 이야기가 오늘 26절에 이야기예요. 나는 너희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겠다는 이야기하고 같은 뜻이예요. 기도하지 마세요. 왜? 주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실겁니다. 왜냐면 여러분들의 기능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라고 주께서 다루시는 대상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기도할 때 기도하게 됩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러면 그 기도를 하게 되게 되면 그 기도내용은 뭐가 들어가느냐? 왜 자꾸 우리로 하여금 우리 기도 내용을 넣지 말라고 하느냐? 그럼 그 기도 내용에 우리 기도를 넣지 않으면 무슨 내용이 그럼 그 자리에 들어가느냐?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이 들어갑니다. 공식입니다. 기도는 성경말씀만이 내용이 됩니다. 그 외에는 기도의 내용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마지막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모든 성경은 누구를 증거합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거든요.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증거가 끊어진 내용은 들어가면 안되요. 모든 기도에. 예수님의 단일화에 관련된 기도만 해야된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곧잘하는 기도. 주여 넓은 길로 가지 않게 하옵시고 좁은길로 가게 하옵소서. 이거 마태복음 7장에 있는 내용이죠? 곧 잘 기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또 이런거 먹는것 입는걸로 족하게 하옵소서. 적금 사기 당하고 난 뒤에 이런기도 곧 잘 하지요? 


우리 자식이 이제 둘째 아들이 사업을 하는데 주여 욕심내지 말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게 하옵소서. 뭐 이런 자식 사업 앞두고 이런 간절한 기도 다들 해봤지요? 다들? 수능 앞두고 주여 주시는 점수만 감사케 하옵소서 뭐 이런 기도 안해봤어요? 해봤지요? 이 내용이 다 성경에 있는 내용입니다. 디모데전서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자, 이 내용을 과연 인간이 할수 있느냐 이말이죠. 이 내용을 할려면 우선되는게 있어요.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부인이 되야 됩니다. 자기 부정이 되야되요. 부정 되지 않으면 이런 내용 안나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 바로 그것을 염두해 두고 하셨기 때문에. 


그러면 성경에서 신약에서 구약을 통해서 자기 부인은 무엇을 의미 하느냐 하면은 혈육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혈육과의 관계단절. 천하 자식이라도 나보다 더 합당치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늘나라의 합당치 않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혈육을 건드리십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인간이라는 몸은 인간의 몸은 있지만 인간 속에 있는 마음은 어디서 주어졌느냐 하면은 거기에 속해 있는 그 집안에서 대대로 집안에서 주어진 것들이 자기의 정체성으로 자기의 본질로 정신세계로 그대로 다 흡수 빨아 당기고 있다 이 말이죠. 전부다. 


내가 잘되야 우리 아버지의 명예가 서고 내가 잘되야 우리 집안의 명이 선다. 그러면 내가 속해있는 이 집안은 융성하게 되고 복받는 집안이 된다라는 것을 구약때부터 계속해서 이게 줄창 그런쪽으로 그 집안 사람으로 키워져 온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마태복음 10장 이 말씀 하실 때 뒤에 말씀이 뭐냐하면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는 자여 구원받는다고 이야기 하시면서 그 앞에 있는 말이 뭐냐하면 천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자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 라는 말을 이렇게 연결시켰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구태여 그런 말씀하신 것은 예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하는 기도 내용 그 당시에 대중들이 국민들이 백성들이 민중들이 했던 기도내용을 주께서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은 혈통이예요. 혈통. 유대민족이 혈통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들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택한 민족, 자기들은 택하신 민족이기 때문에 버릴 리가 없다는 거예요. 한번 택함은 영원한 택함이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버릴 리가 없기 때문에 메시아는 누가 메시아냐? 약속대로 우리 유대인을 위한 메시아고 오실 다윗은 바로 우리의 왕이기 때문에 다윗이 오면 우리가 제사장 나라가 된다. 철썩같이 그들은 구약성경 문자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그대로 다 이야기 한거예요. 


요즘 말로하면 3대째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복을 받는다와 똑같은 사고방식이예요. 그 혈육이라는 그것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관계도 없어요. 관계도 없는 사람보고 여기 내 앞에 있는 자들이 곧 내 형제요 모친인 것을 보라 이말이죠.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을 때 그 뒤에 누가 와 있었느냐 하면은 마리아하고 그 배다른 동생들이 와 있었거든요. 그 듣는 마리아 듣는 동생들은 기분 얼마나 나쁘겠어요. 여기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모친이다. 다른말로 하면 나의 family다 나의 가족이다 이말이죠. 


그러면 가족은 어디있느냐? 가족이 어디 있느냐 하면은 가족이 먼저 성립되고 난뒤에 성립된 말씀에서 새롭게 가족이 구성이 되는 겁니다. 말씀이 먼저 있고 가족이 구성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남편이나 아내가 복음을 안들을때는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남이라고 여기라 이말이죠. 이게 기쁜 소식일수도 있고 슬픈 소식일수도 있는데 정들면 슬픈 소식이고 정 없으면 기쁜소식이고 그런데. 


구애 받지 말라는 거예요. 혈육 관계에 자식과 부모관계 그리고 천하 남편관계 이런 관계에 그 어떤 책임같은거 느끼지 말란 이야기예요. 몇분도 안됐는데 벌써 기쁜 소식이 막. 왜 그 쓸데없이 책임을 질려고 하느냐 이말이죠. 도대체 그 책임감은 누가 그렇게 집어넣은 책임감이냐 말이죠? 


사람은 말하죠. 사람이 기본은 돼야지 하거든요. 그 기본 어디서 나온 기본이예요? 예? 교회는 다녀도 인간은 짐승되면 안되잖아. 인간 할 도리하고 난뒤에 그 다음에 교회 다니고 뭐 더 착해져야지 이렇게 하는데 어제 그 월요일 대구 강의 이야기 했지요. 아주 강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착한사람은 지옥에 간다고요. 


지옥은 착한 사람이 가고 천국은 못된사람만 가고. 절대로 착한 사람은 천국에 못갑니다. 착한데 왜 천국가요? 지옥가야지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가 사람들 어디로 인도하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지옥으로 인도하는거 같애. 예수 믿고 성령 받았으면 착해라. 말씀은 폼으로 있는게 아니다. 성령 받았으면 믿음으로 끝난게 아니라 이제는 영광 돌려야지. 영광돌릴려면 말씀 지켜야 영광 돌린다. 당신들 눈 있거든 성경 봐라. 성경에 다 그렇게 되어 있지. 


교인들이 아마추어니까 할말이 없는거예요. 이거 맞네! 이러거든요. 맞기는 뭘 맞아요. 로마서 3장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방법은 예수님 믿는 것 밖에 없어요. 다른 방법 없어요. 


화목제물을 믿음으로서 영광이 되지. 피를 믿음으로서 영광이 되지 인간의 행함으로 영광되는게 아닙니다. 피 믿는데 영광에 모자란다? 그래서 피 믿고 난뒤에 내가 착함으로 더 추가한다? 어디까지 추가할껀데요? 또다시 법자화되요. 얼마나 철저해야되는데? 얼마나 철저해야되요? 


32살 때 예수 믿었다. 이제 80세 까지 목표 세운다. 80쯤 되면 거룩하라는 말씀대로 너희는 거룩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수준 높이겠다 이렇게 했는데 32살되는 생일 그 다음날 교통사고 나서 죽었는데. 자기 목표 깨졌어요.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어쩔껀데? 뭐 상급도 없이 부끄러운 구원 받습니까? 보너스 못 받아요? 하나님께 영광 돌렸는데.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측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원리를 제시했느냐 하는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란 예수님의 단일화를 계속해서 그 안에 있으면 그게 영광이예요. 왜? 예수님의 단일화가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빌립보서 2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이름을 무효화 시키고 오직 주의 이름에만 굴복할 때 그 동안 주님의 희생 위에서 살아왔다는걸 아침에 밥하고 뭐 이렇게 지하철 타고 전부 다 주님의 십자가 피를 밝고 처벅처벅 밟으면서 왔습니다. 주님의 희생 덕분에 햇빛과 공기는 받고 있습니다. 또 내일 또 비온다 해가지고 단비가 오겠지요. 


봄 바람 휘날리며~ 그 전부 다 봄 바람 휘날리는 벚꽃 전부 다 이게 주님의 십자가에 은혜로 제공된거예요. 김정은이나 리설주나 전부 다 그 사람은 예수 몰라도 햇빛과 단비를 주셔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게. 


선인과 악인에게 무차별 차별없이 은혜를 주셨고 로마서 1장에 보면 나중에 계산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니가 은혜를 받아놓고 은혜 주신자를 몰랐잖아. 그때 너희가 핑계치 못하리라. 줘 놓고 이제는 끝장내는 거예요. 지옥 갈 사람 끝장내 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열심히 행했습니다는 이야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주신 은혜를 주신 은혜가 은혜인 것을 니가 알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나름 착실했습니다 라는 것은 아예 그것은 그런 문제가 안나와요. 그런 문제가. 그런 문제가 안나온다니까요. 질문을 그런식으로 하는게 아니예요. 


약속이라 하는 것은 내 살과 내 피로 끝났어요. 내 살은 이 떡은 내 살이요 이 잔은 내 피요. 이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와 계약을 한겁니다. 계약 상대자는 우리가 아니예요. 계약상대자는 이 세상에 한분밖에 없어요. 저도 아니고 여러분도 아니예요. 예수님만이 계약 상대자고 그 계약이 실패로 끝났습니까? 다 이루었어요. 뭐가 더 필요합니까? 


성도의 기쁨은요 자기 의를 누적할 필요가 없다는데서 오는 기쁨이예요. 더 이상 남하고 견줄 나만의 주특기를 따로 챙길 이 창고에 아무것도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데서 오는 그 가벼움, 그 자유함 이거 마귀에게 빼앗기지 맙시다. 


절대로 이걸 세상 어디에도 빼앗기면 안되요. 스스로 법제하면 안되요. 정신병자되고 나중에 우울증 걸려서 자살합니다. 누구처럼. 완벽의 완벽? 지금 그거는 자기 의예요. 평소에 자기 의입니다. 완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예 생각도 하지 마세요. 완벽 안해도 되요. 철저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몸하고 죄인들 가는 나라에 손들고 죄인 여기에 하나 더요. 죄인 하나 더 추가합니다. 그렇게 살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되요. 그렇게 살 때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그 취지를 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오늘 제목입니다. 이면지. 이면지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A4용지에 이미 인쇄되어 있어요. 그런데 뒷면이 비어 있잖아요. 


앞에 예수님께서 단일화 다 된 상태를 뒤에다가 갈지자로 낙서를 하게 만드는 거예요. 왜 낙서를 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하는 낙서하고 이쪽면에 있는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 그 면하고 한번 대조를 해보라 말이죠. 대조를 왜 해야되느냐. 대조를 해야 예수님만이 증거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만이 증거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를 뽑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예수님이 제자를 뽑고 여기 20절에 보면 지금은 근심하겠으나 너희는 근심이 도리어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기쁨이 되지요.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근심거리를 유발합니다. 근심거리를. 


오늘 어떤 분하고 아침에 그런 통화를 하는데 하는 일마다 다 안되요. 하는 일마다. 뭐 게을르고 농땡이 부리고 이런거 아니예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전력을 다해서 뭔가 아이디어까지 주께서 주셨다고 생각하고 다 하는데 그게 다 막혀요. 


그러면 차라리 그럴거 같으면 차라리 어떻게 되요? 차라리 죽으라고 하는게 속편하잖아요. 예? 그런데 또 죽이진 않아요. 계속 또 일을 또 꾸역꾸역 하게 만들어요. 이 원리에 대해서 지난 지난 대구강의에서 제목을 중층결정이라고 했거든요. 중층결정. 상당히 어려운 용어인데 네자 밖에 안되는데 중층결정. 


한번 풀이 하게되면 이면지하고 약간 다른 의미인데 중층결정이라고 하는 것은 결정하는데 중층, 층이 겹쳐져 있다는 거예요. 겹쳐지고 결정된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은 원인이 두가지 이상이예요. 두가지 이상의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결과가 된 우리의 모습에 있어서 원인을 두가지 이상으로 이상이니까 두가지 세가지 네가지 되니까 우리는 그 원인은 있기는 있지만  어느것이 딱히 원인이라는 것을 알수 없는 결과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결정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결과라 하는 이것이 곧 뭐냐 하면은 원인으로 작용해서 또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어제 나는 설교 듣고 은혜 받았다. 그래서 나는 구원 받는 사람맞다 라고 이렇게 어떤 결과를 생각했었다면 오늘 되게 되면 그게 원인이 되요. 그 원인이 어떤 원인이냐 하면은 이 교만이라는 원인이 되요. 


어제 분명 은혜받은건 맞는데 오늘되서는 이게 교만이 되요. 교만이되어서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면은 주여 제가 또 주님 증거할 생각 안하고 나 구원받았다는 것을 또 내 자랑질 비슷하게 증거했습니다 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주님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기를 기다렸다가 반응에다가 초치기 해버려요. 반응을 나타냈고 좋다 했는데 그거를 초를 쳐버려요. 초를 치게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님만 증거되게 주님의 단일화가 또다시 새로운 차원에 주님의 단일화가 증거되게 합니다. 


이것은 이런 일이 전에 없던 새로운 주님이 오늘 새로운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야~ 주님의 증인노릇하게 하는구나. 이렇게 하게되면 이게 오늘로 끝나요. 내일되면 이렇게 됐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고 여겼던 그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초를 쳐버려요. 


그러면 오늘은 몰랐는데 내일 되서야 비로서 아는 예수님의 새로운 깊은 뜻이 또 단면이 또 느껴집니다. 또 느껴져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이미 단일화된 구조 속에서 이 단일화의 폭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그게 풍부한지를 깨닫게 하시는 일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에베소서 3장 한번 봅시다. 3장에 보면 오늘 기도와 관련되서 그럼 사도 당신은 어떻게 기도했느냐? 사도의 기도문이 나와 있습니다. 기도문이 나와 있는데 앞에 3장 14절에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라고 해서 성령이 기본이고요. 이거는 좀 이따 이야기 할거예요. 


성령이 기본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빠지면 기도 안되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고 그 다음에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해서 이거는 개인의 기도는 없어요. 성도한테 개인의 기도는 없습니다. 우리가 있을 뿐이예요. 이거는 지난 어제 대구 강의에서 했습니다. 나 아니고 우리입니다. 내가 죽어야 우리가 생겨요. 


하고 난뒤에 하는 말이 능히 모든 성도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그 라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그 다음에 뭡니까? 


여기 충만이죠. 이 충만을 아까 제가 해일 또는 단일화 거대한 파도라고 표현한거예요. 충만함. 이 충만함을 아는 순간 우리는 충격입니다. 우리에게 왜 충격이냐하면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 모든 소소한 근심 걱정이 개인에서 나와요. 나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누가 해결하지 못한다는 개별자 의식을 갖고 있다가 이렇게 덮쳐버리면 이런 개별자 의식 자체가 무색해 버려요.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내일 살지도 모르는데 왜 걱정 미리 당겨서 합니까? 그런데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단락지어서 생각했던 것이 그것이 큰 파도가 넘치니까 이게 완전히 그 순간 다 부서지고 해체되는 거예요. 뭉개져 버리는 겁니다. 


걱정 근심 한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쓸데 없는 것 가지고 걱정했구나. 날마다 파도 속에 있으면서 갈증을 일으키다니 이게 말이되? 하여튼 그냥 깨끗한 물 속에 있으면서도 물을 못 마시는 셈이 되었다 이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뭐냐하면은 행해라가 아니라 니가 있는 그 소속된 그 현위치가 니가 생각하는것보다 월등하게 지금 풍부한데, 그 풍부한 그 은혜를 니가 지금 족히 못 누리고 있다는 것까지 지적이고 질타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일들이. 


모든 일들이 감사 감사 감사가 뭡니까? 입을 다물면 할말이 없지요. 그정도로 감사해도 시원찮은 우리가 도대체 우리는 그동안 시선을 다른 사람은 저렇게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이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것과 대질하고 맨날 비교하다 보니까 주님이 증거한 것을 그만 까먹어 버리고 감사대신 불평과 걱정과 근심과 반항과 반발만 분노와 울분만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저는 안그러는데요 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그 사람은 뭐를 몰랐기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은 주께서 주신 이 은혜가 이 제자들도 몰랐어요 사실은 제자들도. 이 은혜 구원이 실은 내용이 뭐냐 하면은 심판입니다. 껍데기는 구원인데 안에 내용은 뭐냐 하면은 심판 이예요. 심판하시는 겁니다. 


저주고 몰락이고 타락이고 그런거예요. 몰락입니다. 심판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이암아 우리로 하여금 심판에서 건져냈다는 이 위상이 내가 잘 들어보세요. 내가 생각했던 그 위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말이냐 하면은 이세상이 있잖아요. 이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어디 간다 했습니까? 보통 상식으로 말하면 어딥니까? 


저 세상 간다 또는 저 세상 가는 것처럼 우리는 천국에 간다고 하지요.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 세상의 관심사는 나 구원에 관심이 꽂혀 있어. 나 구원. 개별적 구원에만 관심히 꽂혀서 교회 갑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이 구원을 원활하게 하고 뭐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행함, 행동, 신학적 행동, 경건한 행동, 거룩적 행동에 아예 여기에다가 신경을 많이 쓰겠지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착하다. 여기는 그냥 넘어가고 또 착하다 그러니까 복 받겠지 하는 식으로 개인적으로 되돌아 오는 개인적으로 회수가 되는 그 결과가 복일 때 나는 구원받은 사람 맞다는 생각에 계속 갇혀 있는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구원의 내용을 가지고 구원한다 하기 때문에 그 구원의 내용이 마치 애드발룬이란 큰 풍선처럼 붕붕 떠가지고 천국에 가뿐하게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에서의 구원은 내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구원이 아닙니다. 심판이예요. 다 죽은자다. 다 죽은자다 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이걸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육 그대로 예요. 성령 못 받은 사람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죽어야 될 자를 늘 유지하도록 성령께서 지금 원하고 있어요. 내가 죽을자 인 것을. 


여기서 십자가 복음 하면서 제일 수십년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대목이 이제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이미 우리가 죽었고 라는 그 대목에서 우리는 납득이 안되 납득이. 납득이 알지요 납득이. 납득이 안되요 납득이. 


만약에 진짜 우리가 생각하는 죽는 죽음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누워있어야 되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그러면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겠다는데, 바쁜기는 너무 바쁘고 하루 스케쥴 빡빡해. 


계속해서 설치고 운전하고 온갖 간섭하고 전화하고 전화했다하면 3시간씩 전화하고 온갖 그렇게 했는데 이렇게 하는게 이게 어떻게 죽은자의 모습 모양세 입니까? 이렇게 죽은게 다 있어요? 남 집안 가서 또 하고 교회 걱정 다 하고 교회 걱정 미리 다하고 그래도 또 나라 걱정까지 하고 또 세월호 걱정까지 다 하고 박근혜 재판까지 하고 류현진 공 던지는것까지 계산 다 해야되고 이놈 북한 예술단 무사히 귀환하길 온갖 이런데 어떻게 우리가 죽은자 입니까? 이게 생생히 살아도 보통 살아있는게 아니잖아요. 


죽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기존에 있던 이 세상이 예수님의 단일화로 말이암아 이쪽이 예수님과 마중나오는 저쪽이 하나로 규정되요. 하나. 세상이 착한사람 나쁜사람 이렇게 규정되는게 아니고 그걸 통합합니다. 통합해서 예수님쪽에서 하나 나왔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대상이 전체가 또 하나예요. 


요한복음에서 그래서 뭐냐 하면은 세상은 뭐다? 어둡다. 세상은 악하다가 아니고 한통속으로 묶어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날려 버립니다. 너는 괜찮고 얘는 이게 아니고, 한 드럼통에 집어 넣어 놓고 한꺼번에 날려 버려요. 


그래서 이 세상은 이미 심판 받았다고 되 있어요. 심판 받았다 이렇게 되 버리면 그걸 말로 하면 심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가 얼마나 착한데 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땅에 와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이 땅에 와서 죽으십니다. 


그러면 이땅은 뭘 유발하는 세상이냐 하면은 결국은 죽음으로 전부 다 시체를 만드는 그런 힘이 작용하는 세상이예요. 예수님도 죽고 예수님 마저도 죽고 모든 사람도 죽고 좀 살았다 하지만 나이 90살 되면 100살 되면 다 죽어요. 죽고 난뒤에 자식 낳았지만 자식은 내가 아니잖아요. 결국은 나는 언젠가 죽는다 이말이죠. 


그럼 죽는것만 죽음이냐 할때에 그게 아니고 죽기 전에 일어났던 모든 것이 죽음으로 달려가게하는 요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 작용이 뭐냐 하면은 죽음 또는 죽음 활동이예요. 이 세상은 죽음 활동으로 보는 겁니다. 


이 죽음 활동을 봐버리면 살아있더라고 죽는 순간만 죽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죽음활동이 되어버리면 여기서 태어난것부터 포괄 합해서 이게 죽음활동으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죽음 활동으로. 


동사하고 명사 차이가 뭐냐 하면은 동사는 계속 움직이는 것을 이야기해요. 그런데 명사는 확정된 겁니다. 규정된 겁니다. 여기있는 컵이 좀 지나도 컵이예요.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배고프다는 것은 배고프면 밥 먹으면 또 다시 배 안고플수가 있고 좀 덜 고프다 이럴수 있잖아요. 동사는 움직인다고요. 명사는 확정적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명사로 이렇게 규정해버려요. 규정해버린다고요. 죽음이라고 해놓고 실제로는 뭐냐 이 안에 들어가게되면 죽음 아니고 죽음과 관련된 활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죽음의 활동이 된다면 예수님 자체가. 어디 종이 없습니까?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뭐라고 하는냐 하면 예수님은 생명이거든요. 생명인데 이거 정말 쉬운거예요. 생명인데 이 세상이 잉크로 이렇게 시커먼 잉크로 되어 있잖아요. 생명도  이렇게 들어오니까 이게 뭘로 보이냐 하면 이게 죽음활동으로 보이는 거예요. 


사실은 이면지는 생명인데 생명이지만 이 세상 산다는 이유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게 죽음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요한복음이 다 풀립니다. 물 이렇게 여섯동이를 갔어요. 제가 안가보고 이야기하는거 아닙니다. 얼마전에 가봤어요. 가나안 혼인잔치에. 물동이 여섯 개 딱 걸려져 있어요 벌써 거기 가면. 


분명히 물이예요. 물인데 물 맞아요. 그런데 그거는 이미지를 본거라니까. 물인데 누구 손에 달렸느냐? 이 물을 누가 명령했어요? 주님이 명령하면 이게 뭐가 되느냐? 이게 포도주가 된다고요. 그런데 인간들은 물로써 물로만 이해할뿐이예요. 뒤에 포도주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지요. 


주께서 때가 되매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때가 되매 왜 물이 포도주 됐는지 때가 되매 알게 될 것이다. 그때는 뭐냐 하면은 그때는 성령이 오실때가 아니고, 참 어렵다. 성령이 오실때가 아니고 성령이 내주할때예요. 성령 나름대로의 때가 따로 있어요. 


우리 인간의 때는 과거 현재 미래로 하잖아요. 이게 세상의 때라고 하잖아요. 자꾸 역사적으로 연대기를 만들어요. 시간을 직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은 원이예요. 원이거든요. 성령이 내주하게 되면 그 하나님의 때가 같이 여기 내주해 가지고 어떻게 살아도 그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때 안에서 놀고 있습니다. 


너희는 죽었고 내 안에서 살았고가 될려면 우리가 이면지 아니고서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생명이 오게 되면 주님의 용서가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이땅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맞아요. 죽는거 맞아요. 


하지만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상태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성도는 좀 억울해요. 이미 살았는데 다른 사람보기에는 당신 기미가 좀 낀다. 보톡스 맞아야 되지 않겠나? 아이고 갱년기야? 요새 얼굴 굉장히 않좋네. 곧 죽겠네 이러거든요. 억울해 죽는거예요. 우리는 이미 살았는데 살았는데 갱년기래. 


그런데 문제는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게 화가 나고 약오르는데 성령 안받은 사람은 납득이 되네 이게. 그래 좀 죽으면 그래도 천당간다고 죽어서 가는게 아니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지금 인간이 사용하는 때를 사용하기 때문에 죽으면 천당간다고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게 아니고 죽어서 천당가면 이미 늦었어요. 


살았을 때 이게 살았을 때 이면지로 바뀌어져야 되요 살았을 때. 그때는 성령이 오게되게 되면 우리는 기존의 했던 것도 알고, 세상이 뭐라고 하는것도 알고, 그리고 세상이 모르는 이야기도 알고. 10분쉽시다.

 홍민희 (IP:59.♡.64.246)18-04-08 17:59 
강남-요한복음 16장 25절(이면지)180403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20절에 근심이라는 말을 한 것은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는 거예요. 떠날 때 아버지한테 맡기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대한게 있을거예요. 그 기대한 것을 예수님의 심판이라는 그 성격속에 다 집어 넣어버려요. 


이거는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생각했던 예수는 없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없다. 따라서 나를 위해서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기도해주고 보탬이 된다는 생각은 그것은 니가 단절의 의미를 이해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 단절을 첫째시간 끝에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주께서 오실 구원은 심판이였다는 겁니다. 


모조리 다 전부 다 심판하는 거예요. 심판하기 때문에 심판하지만 그 뒤에는 구원이 있다는 그런 생각을 니가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심판 다음에 구원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이게 아직도 한다리는 심판에 걸쳐 놓고 한 다리는 구원에 걸쳐놓은 꼼수가 되는 거예요. 꼼수가. 


왜 이런 것은 용납이 안되는 이유가 세상이 심판되는데 있어서 나도 거기에 기여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이 심판받을만한데 있어서 나는 착한데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아주 엉망이라서 세상은 심판받는다 라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심판 받는데 있어서 나도 일조를 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남한테 해를 입히는 거예요. 산다는 그 자체가. 착하게 산다는 것은 성립이 안됩니다.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남의 것을 빼앗는 조건하에 사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여기 살기 위해서는 모든 몸짓과 태도와 모든 말씨 톤 하나 하나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너의 행복을 나한테 양보할 의사가 없느냐는 소리예요 그게. 나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방의 행복을 강요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웃을 사랑하라 할때는 반드시 조건이 뭐냐 하면은 반드시 이걸 만나야되요. 강도 만나지 아니하면 이웃은 없습니다. 강도 만난자가 있을 경우에만 비로서 자기자신이 다 틀렸을 경우에만 비로서 이웃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가 강도한테 당하는 전적인 피해자라는 것이 과연 인간이 아담의 몸에서 성사될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인간은 없어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반항합니다. 그거 전적인 피해자 아니예요. 반응했잖아요 방금. 방금 반응했잖아요. 


애들도 태어나가지고 한 고집들 합니다. 김치 먹으라고 따라 다니면서 숟가락 줘도 안먹겠다고 합니다. 엄마가 조건 걸지요. 이거 해주면 인형하나 사줄게. 그러면 김치 담긴 밥 먹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서 엄마한테는 에너지 낭비가 발생된거예요. 효율 낭비. 빨리 먹이고 이거 해야되는데 김치 안 먹겠다고 하는 바람에 지금 자기 계획에 차질이 일어 났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계획에 차질이 일어나면 인간은 고요하다? 아니면 열불난다? 열불나지요. 열불난다는 말은 이거는 새로운 그 열불을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대상을 찾는데 마침 들어오는것이 공부 못하는 둘째 아들 들어왔다. 그러면 그날 또 분위기 안좋습니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한쪽을 누르면 그냥 쑥 들어가는게 아니예요. 그거는 옆자리로 잠시 이동한 거예요. 누적되게 됩니다. 그래서 한번에 터트리게 되게 되어 있어요. 그거 안터트리면 그거 정신병자 되지요. 


필드에 나간다든지 뭐 수가 있어야되요. 안그러면 빠라빠라 빠라밤을 하든지 뭐 있어야되요. 도저히 그냥 못 넘어가요. 안그러면 새로운 그 밥사발 영국제 사발을 사든지 쇼핑을 하든지 뭔가 뭘 해야되요. 안그러면 미장원에 가가지고 생머리를 다시 볶던지 해야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우리는 이 세상이 심판받는데 일조하고 있는 중입니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범죄예요. 살아있다는 자체가 범죄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문학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의미라고 하지요. 의미. 누구 의미? 누구 좋아라고? 나를 위한 의미. 나를 위한 의미가 이게 문학이거든요. 문학에서 이게 윤리하고 나오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의미가 이게 가치가 되요. 나의 가치가 되요. 


나의 가치가 이게 정신과에서 뭐가 되냐면 나의 자존심이 되는 겁니다. 이게 신학으로 하면 뭐냐하면 나의 영광 나의 의가 되요. 예수님께서 로마서 10장에 뭡니까?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위하여 누구 의를 거부한다? 그리스도의 의를 거부하지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기 의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내가 여기 존재한다. 존재할때는 그냥 존재하는게 의미 있게 존재해야되. 왜? 나니까. 


그 다음에 나는 그냥 의미가 아니라 가치있는 의미있어야되. 왜? 나니까. 그냥 가치 있기 때문에 그다음에 뭡니까? 가치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 더 살아야되. 왜? 귀하니까. 귀한건 살아 남아야지. 훌륭하니까 자존심이죠. 자존심이 자기 의,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자기 갖고 있는 자기가치의 투쟁의 현장, 자기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는 그런 경쟁의 장. 이게 이 세상 이라는 겁니다. 그 세상에 와서 예수님은 완전히 자신의 가치와 자기 의미를 놔버리죠. 그리고 제자들에게 요구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의미를 찾지말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십자가 지지 않고서는 나에게 올수 없다는 거예요. 나에게 올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근심 다음에 기쁨을 제공한 것은 너너너 제대로 해라 하고 개인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제자들 너희라고 이야기 해버렸어요. 너희.  너희라고 한 것은 너희들끼리 경쟁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는 거예요. 


나는 기도 좀 더 했습니다. 나는 선교 더 했습니다. 같이 경쟁하는 것은 도토리 키 재기 밖에 안되요. 둘다 못난 인간들끼리 못나 봐야 뭐가 되겠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잃어 버렸다가 다시 와야되요. 자, 여기서 아까 제가 첫 번째 어려운걸 했는데 심판밖에 없다. only 심판, 심판뿐이예요. 


왜? 우리는 이 바깥에 있는 관람자가 아니기 때문에 관찰자가 아니예요. 관찰자 관람자 어디서 통하냐 하면은 이것은 과학에서나 해요.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때, 만원경으로 들여다 볼 때, 우리는 그걸 분석해서 미래를 예측합니다. 이것은 과학과 관찰이예요. 


자기는 멀쩡하고 과학과 관찰해가지고 나에게 저 벌레의 존재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지금 암 걸린 내 남편에게 저 구더기에게 혹시 특수 약이 나올수 있겠느냐? 나올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어떤 계속 기대를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의미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떤 사태를 넣고 나와 있는 겁니다. 나와 있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관이라고 하고 밖에 있는 대상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객관이라고 해요. 주관과 객관이 있는데 주관, 객관 다음에 나온게 지배가 나옵니다. 지배. 


모든 것은 보기만 하는게 아니예요. 총각이 지나가는 아가씨를 본다. 그냥 봅니까? 누가 봐요? 내가 보죠. 주관이죠. 내가 봐요. 누굴 봐요? 아가씨를 보죠. 객관이죠. 그 다음에 뭐가 나온다고요?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지배지요. 갖고 싶다는 겁니다. 지배. 


지배 할려면 여기서 뭐가 필요하다? 권력이 나오는 겁니다. 권력. 내 권력이 나와요. 개인적으로 어떤 경우라도 이런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게 티격태격 경쟁할 수밖에 없어요. 경쟁하게 되면 의미와 가치와 결국은 자기 의죠. 의와 의의 경쟁이 되게 되면 나는 주관은 주관적인 나는 상대를 뭘로 보느냐 나보다 못한 죄인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이세상은 뭐냐 하면 의와 죄는 이미 결정난거예요. 내쪽은 무조건 의가 되요. 내쪽은. 우리 교회는 무조건 천당가는 교회예요. 내가 소속된 것은 무조건 가치가 긍정적 가치를 주고 우리에게 반대하는쪽은 무조건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거는 천하 죽일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쪽에 있는 사람이 이쪽으로 시집왔다. 그 다음부터는 갑자기 죄인이 의인이 되버리는 거예요. 일종의 귀순이니까. 지배관계니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구조속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이쪽에 자기 주관쪽에서 뭘 하느냐 하면은 기도를 하고 헌신하고 금식하고 선교하고 예배 참석하고 성경공부 한다. 결국 이거는 뭘 노리는 겁니까? 이 논리에 의하면. 내가 이렇게 하나님 이렇게 할테니까 나한테 어느하나 내 마음에 드는거 걸려들게 하옵소서. 


내가 원하는 객관이 있고 그 객관이 나에게 들어와서 내 영역이 확장되게 하옵소서 라는 노림수 가지고 이렇게 이 행동을 시도한거예요. 그동안. 그래서 우리 교회 부흥됐다고 이야기 하는거예요. 힘이 모아졌잖아요 힘이. 


힘이 모아지고 그 힘은 허술한 나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되는 거예요. 이미지. 사람은요 현대는 이미지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는 그 이미지가 좋으면 그 이미지와 같이 묶어 주는 겁니다. 집에 뭐 꼬라지 엉망이라도 바깥에 아는 사람 많고 자기 이미지 괜찮으면 살만한 세상이라는 겁니다. 


이미지를 어떻게 키우기 위해서 그 제거대상. 백수로 있는 동생 이거는 동생도 아니다. 왜 니가 태어나가지고 내 이미지에 손상을 끼친다 이 말이죠. 니가 태어나서. 드라마에 그런거 많잖아요. 어디 근본도 없는 것이 시집와가지고 어떻게 아들도 아닌게 DNA조사하니까 아들도 아닌게 아들 만들어놓고 어디서 우리 재산 다 훔쳐 갈라고. 같이 살래? 같이 못살아요. 쫓아내어 버리죠. 잉잉울고 자기 구두집하는 자기 아버지랑 같이 살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드라마 초반부라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세상은 모든게 의미 중심이예요. 모든게 의미. 나는 울었다. 은혜 받았다. 왜 우시지요? 왜 은혜 받았지요? 이유대라면 이유 나와요. 자기를 저주 했기 때문에 웁니까? 자기를 심판받을 해서 웁니까? 아니죠. 격려해주니까 울잖아요. 좋아서. 너무 좋아서 울잖아요. 격려해주니까. 


나의 평소부터 나의 가치가 의미가 있고 싶었는데 옆에서 북돋아 주니까 비로서 살만한 세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게 전부 다 가짜라는 거예요. 그건 니가 시작한 예수다. 가짜 예수라는 겁니다. 


그게 오늘 오늘 본문은 십자가 지기 직전이예요. 십자가 지기 직전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못알아 듣는 비사, 계속 비유를 던지는 겁니다. 십자가 질때까지. 그리고 십자가 직전에는 뭐냐? 지금까지 비유로 이야기 했는데 그냥 대충대충해서 함축된 의미로 이야기 했는데 이제는 너희하고 나하고 잠시 빠이빠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자들은 또 여기서 오해합니다. 심판 +구원에서 여기서 플러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제자들은 이해를 할 때 그때 제자들은 이 심판에 자기가 같이 참여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는 심판 받을 대상이 아무리 봐도 예수님 따라 다닌 죄밖에 없는데 내가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이상해 이상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 예수님은 심판받고 그 덕으로 우리가 구원받는구나라고 오늘날 교인들처럼 그렇게 생각을 한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그것마저 끊어버려요. 왜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 잡힐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입으로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고 이야기해요. 그마저도. 


예수님 심판받고 난뒤에 우리는 구원받는다는 그 사고방식까지 인간들이 자기 멋대로 임의로 조작한 자기 의미를 살리기 위한 조작된 가짜 복음이였다 하는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그래서 일체 인간을 위한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0절에 보면 그래서 그들은 근심하는 거예요. 근심하는 이유가 대책이 없어요. 대책이 없기 때문에 근심하는 거예요. 평소에 나는 나를 지켜야 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게 근심이 된다는 말은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지킬 사람이 떠나버리는 겁니다.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보람이예요. 제가 연세 좀 된 사람에게 이렇게 제가 조언하는게 있어요. 다른거 생각하지말고 사랑하세요. 지금 사랑을 안하기 때문에 사는게 그렇게 재미도 없고 힘든 거예요. 사랑을 하세요. 사랑을 할 거야 했지요. 


왜 사랑을 하느냐 하면은 사랑을 할 경우에는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은 주관이 없어져요. 주관이 없고 내 주관은 누가 대체하느냐 하면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주관을 대체하기 때문에 뭐가 없느냐 하면은 지배 관계가 형성이 안되고 자발적으로 나를 잡아먹어라 하는 식으로 자발적으로 상납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건 예속이거든요. 예속보다 더 행복한 사람 나와보라고 그래요. 없습니다. 예속된 것이 가장 행복해요. 예속 안되서 불행해요. 예속할 때 빈틈없이 온전하게 예속 되어야 되요. 못 사는 집에 찬바람 부는데 제대로 비닐 뜯어 가지고 제대로 했다 했는데 저녁되니까 뭔가 서늘해. 보니까 이게 제대로 안했어. 샛어. 그러면 우풍나오잖아요. 완전히 다 막아버려야되. 


완전히 다 막아서 당신 것이 곧 나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이 있는 그 전부가 곧 나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내것은 따로 챙길 필요도 없고 챙길 마음도 없습니다 하는 이것을 가지고 요한복음 8장에서는 이것을 자유라고 해요. 진리가 너희를 지배하면 너희는 자유케 되리라. 진리가 나를 다스릴때는 따로 내가 진리를 행사할 이유가 없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말까요? 이것은 제가 들은 반박 가운데 수천번들았던 이야기죠.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안해도 됩니까 라는 그 말을. 거기에 대한 답변도 똑같이 수천번 해왔어요. 주께서 하게 하십니다. 제가 수천번 이야기 할 때 주관, 객관, 지배 이거 해서 하거든요. 본인이 주관이 된걸 가지고 아무리 괜찮은 사람 아무리 만나봤자. 


예를 들어서 어떤 총각이 있는데 괜찮은 여자를 만났다 그래서 사랑한다 사랑한다 100번을 이야기 했어요. 그 사랑은요 이 주관이 살아있는 한 이것은 나중에 뭐가 되느냐 하면은 횟수가 되고 횟수가 안되면 이게 보복이 들어가고 데이트 폭력되요. 


해줬는데 선물사주고 놀러갈 때 차비 다 대주고 식당 짜장면집 사줬는데 여자가 하는 말이 니가 말씨가 좀 그러니까 우리 헤어져 이렇게 나왔다 이말이죠. 그동안 밑천이 2645만원 들어갔는데 한마디로 우리는 성격이 안맞는거 같애 헤어져. 


주먹 나오겠어요 주먹 안나오겠어요? 내가 너 잘된 꼴을 보는가 함 보자. 그 다음부터 뭐합니까? 복수가 들어가는겁니다. 이거는 평소에 사랑한게 아니였다. 사랑한게 아니였어. 하나의 자기의 정복욕이예요. 그게 정복욕이지 정복욕 또는 욕정이라 하지 그거는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남자의 테스토스테론은요 정복욕이예요. 거기서는 사랑이 안나와요. 사랑은 도파민이 나와야되요. 그 도파민은 언제 나오느냐 하면은 수면내시경할 때 나와요. 보통 수면 내시경하면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요. 그게 죽음이예요. 그게 예수안에 죽은거예요.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 그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얼마나 예속되고 싶었으면 얼마나 사랑받고 싶었으면 (심리학에서는 이걸 메조키스트니즘이라고 하지요. 어둠 많은 곳에서 쾌감을 느낀다.(?) 그런걸 이야기하는데 그건 심리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한거고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설계를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똑똑하게 아주 쌩쌩하게 자기 주관을 그대로 끝까지 극단화 시켜버립니다. 


제자들아 너 한 고집하잖아. 내가 십자가 질 순간에 너희들 본색을 내가 보여주마. 쫙 하고 그걸 끌어당겨서 그들의 본색을 절정에 이르게 만듭니다. 절정에 이르게 만들어 놓고 누가복음에서는 뭐냐 하면은 사탄이 베드로 너를 넘어트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서 제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내쪽에서 주님쪽으로 건너가는 길은 삐! 없어요. 


이게 성령 받은 사람만이 아는 특징입니다. 헌금 교회 집안 대대로 교회 집 전세 옮기고  다 돈 교회에 바치고 하늘나라 확장한다고 전부 다 거기다 때려 바쳤는거 백날 해봐야 그거 다 헛짓한거예요. 보이스피싱 당한겁니다. 보이스피싱이예요. 그거. 


자기 의미 챙기기 위해서 거기에 말려든거예요. 아까 그 첫시간에 우리 성도를 뭐라고 했습니까? 이면지라고 했지요 이면지. 이미 주께서는 뒤에 정답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정답을 정답이기 위해서 정답과 대조되는 그냥 낙서를 하신거예요. 우리 인생은 우리가 보기에 주님 보시기에 낙서 같은 거예요. 낙서같은거. 


낙서인데 우리는 주관을 죽을 때 까지 버리지 않기 때문에 낙서로 보지 않아요.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여기 객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객관을 추상화 시킨게 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역사라고 하는겁니다. 자기 일대기. 자기 일기장이예요. 일기장. 자기 일기장. 


역사는 뭐냐? 깨어나기 위한 악몽이다. 성도한테는 깨어나기 위해서는 악몽같은게 역사입니다. 왜냐하면은 아무리 성령받고 은혜받아도 돌아서면 뭐가 무슨 본전이 챙깁니까? 내 역사의 본전이 자꾸 생각나요. 


내가 이런 행동하게 되면 내일 무슨 벌 받지 않을까? 또는 지금의 내가 이렇게 사고 많은것은 과거의 내가 나쁜짓을 해서 지금 그 결과로 주께서 징계 내려 가지고 이렇게 사업이 어렵게 되는게 아닌가? 반드시 자기 역사를 이렇게 하게 되요. 


그런데 성령받게 되면 그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뭐라고 했지요? 악몽이죠 악몽. 악몽은 여러분 그걸 악몽이라고 하지않고 잠잘 때 뭐라고 합니까? 가위눌렸다 하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 가위눌렸어요. 롯데백화점 가위눌리고, 온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부 우리로 가위 눌림으로 요소로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게 뭉쳐져서. 


자식에게 내가 제대로 말한적있나. 남편을 내가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가. 아내에게 아내 생일인데 반지 선물해줘야 되는데 반지 선물할 때 얼마짜리 선물해야되는지 이 주변 눈에 들어오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가위눌림의 재료가 되요. 왜? 그것이 차곡차곡 선반에 쌓이면 이게 역사가 되기 때문에. 그런데 역사라 하는 것은 낙서거든요 낙서. 이면지 뒷면에 낙서라고요. 


주님께서는 그 낙서짓을 우리에게 허락을 합니다. 마귀한테 마귀한테 시켜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육이니까 마귀가 다루는 방식이 있거든요. 그 다루는 방식대로 우리는 어쩔줄 모르고 내 역사 깔끔하게 이렇게 나한테 나 보일만한 자랑질 할만한 역사만들기 위해서 그냥 몸부림을 치게 만들어요. 우리가. 


절제하고 자제하고 인생을 살 때 조심조심 살아요. 역사에 흠짓 안나게 하기 위해서. 한번 일을 할때도 이게 주의 뜻일까? 아닐까? 한번 행동해놓고 단락 지어 놓고 내가 방금 한일이 착했을까? 선했을까? 혹시 나로 인해 피해자가 있을까? 없을까? 있으면 내가 사과해야지. 10년전에 몰라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내가 모르고 우리 스텝한테 모르고 내가 사과했는데 그래도 해도 지금 뭐 와장창 스튜핏 다 떨어져 나가버렸어요. 


모든걸 그러니까 이걸 기회삼아 항상 온고지신 과거에서 배운다는 것 그렇게 옛날에 나쁜짓 했기 때문에 두 번다시 하면 나는 개다 나는 짐승이다 나는 인간도 아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그래서 보다 더 역사가 보다 진전된 거룩을 닮아가는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삶. 에베소서의 5장에 나오는. 그런 말 어디서 들은 구절은 있어가지고 그런거 다 갖다 붙여가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주님의 몸을 이루고 온갖 것 비슷해 보이는거 다 동원해가지고 점차점차 자기 성적표 내신 성적을 나아가는 거예요. 


벌벌 떨면서. 벌써 교회 나오면서도 중풍 들렸어 벌벌 떨어. 기도할때도 벌벌 떨고. 대표기도할 때 벌벌 떨고. 대표기도 해가지고 녹음 방송하면 안합니다. 무엇 때문에 떠는지 평소에 무슨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갔기에 대인기피증이 있는 이유가 뭔지. 


대인 기피증은 있어도 주님 기피증은 없어요 또. 왜? 주님을 만난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제자들이 못난 제자들이 극단까지 절정 올려버려요. 사단의 시험을 받아가지고 결국은 제자들이라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건널 다리가 끊어져 있음을 만천하에 보입니다. 이 제자들의 삶을 어디에 담는가? USB에 담아요. 


성도는 USB입니다. 정보를 운반하는 작은거 있지요. 작은거 물건. 쪼만한거. 15GB 있잖아요. 담아서. 이 USB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그들이 가는 곳이 천국이 되게해요. 죽어서 가는게 아니고 이미 이 땅에 이 저주 받고 심판받는 이 세상에 와서 이 USB작용을 해요. 복음을 전파하면서 뭐냐 하면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복음을 이렇게 되요. 


복음 전파는 딱 두자입니다. 맞다. 하나님의 심판은 옳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말은 합당하다는 거예요. 그걸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모든 것이 OK, OK. 모든 것이 YES가 된다고 했어요. 고린도후서 1장에서. 모든 것이 OK라고 했어요. 1장인가 2장인가 헛갈리는데 1장입니까? 2장입니까?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1장입니다. 1장 21절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니오가 아니고 예스가 되요. 이걸 로마서 8장에 뭐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우리 개별자는 없어요. 개별자는 이미 어디 뭍혀 있느냐 하면은 이미 통째로 개별자는 통째로 단절되게 되어 있습니다. 저주 속에 있어요.  


따라서 이 저주받은 우리를 USB로 담았다는 자체가 성령이 왔다는 뜻이고 성령이 와가지고 한말이 주님의 모든 조치는 심판이고 모든 한일은 무조건 이것은 이것은 옳은것이고 맞고 그리고 합당하고 그래도 일이 그래도 추진된다는 겁니다. 싫으면 말고예요. 싫으면 말고. 사도들이 전도 방법이 뭐냐 하면은 싫으면 말고예요. 실적같은거 전도 실적 같은거 그런거 묻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나와요. 


아무리 봐도 아닌데 왜 오시죠? 가시죠. 밀어내요. 밀어내도 밀어내도 온다면 그건 진짜고 밀어냈다고 삐져가지고 안오게 되면 진짜 밀려야 될 사람이고. 통배짱이예요. 배짱이라니까요. 배짱장사 배짱장사. 모든 것이.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게 능력주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 빌립보서 4장에 나오지요.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 어떤 근거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있잖아 빌립보서 4장 초반에 이야기 하면서 뒷부분에 그렇게 합니다.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뭘 한다 말이고? 뭐 에베레스트 올라가고 한 100명 전도 한단 말입니까? 아니예요. USB는 뭐냐 하면은 꽂히면 그곳이 바로 꽂힌 그 장소가 이미 그게 OK가 된 장소예요. 머무는 곳이. 원래 USB가 이동용이잖아요. 꽂히면 거기에 당연히 거기 정보가 흘러나오죠. 


사도가 죽어도 예수가 나오고 살아도 예수가 나오고 사나 죽으나 예수그리스도가 나오는 USB가 되는 거예요. 오늘 첫째 시간은 이면지, 두 번째 시간은 USB 여러분 꼭 기억하라는 말 안합니다. 저는 차라리 오히려 악몽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이 세상 전체가 헤쳐나올 악몽같은 겁니다. 얽히고 설킨 가시덤불 같은 거예요. 


사도바울의 소원은 빨리 죽는거였습니다. 제발 이 내가 갖고 있는 아담의 몸이 뿜어내고 있는 나의 주관, 나의 의미, 나의 가치 이것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는 거예요. 너 때문에 못살겠다가 아니라 나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는 겁니다. 


다른말로 하면 내가 나의 구원을 훼방하는 자요, 방해하는 자요. 내가 포행자요, 내가 살인자요, 내가 죄인이라는 겁니다. 나 때문에 내가 뿜어내야될 주의 증거를 내가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그런 속성이 계속 발휘되고 있습니다. 


무슨수로 그걸 뭐 조심한다고요? 절제한다고? 뭐 성령의 열매는 절제고 온유와 화평 백날 해봐라 안된다. 성령의 열매는 제가 여러번 했는데 성령의 열매는 단번이예요.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죽었다. 죽은자로 보는 겁니다. 


뭐냐 하면은 이 USB에 갇혀 있으면 이미 이거는 죽은자예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저주 받았음에 한 무리 뗀 것이 이거예요. 바깥에는 저주고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는 겁니다. 저주받은자를 앞장 세워서 저주 받은 세상에서 생명을 전파하겠다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전도 방법이예요. 


훌륭한 사람 있어야 하지요. 훌륭한 사람은 없어요. 천하의 죄인들을 가지고 묶어 놓고 너나 나나 똑같은 죄인이잖아. 그러니까 십자가 피만 바라보자 라고 하게 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전도 방법입니다. 이거 예수님이 증거한것이고 오직 복음은 부활이 아니예요. 십자가가 복음이지. 


부활은 왜 복음이 아니냐 하면은 부활 속에는 나의 부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십자가를 생각해야되는데 십자가 부활 이렇게 해버리면 사람들은 눈이 십자가로 갔다가 어디가 좋아서 마음이 어디로 호호 거리면서 부활에다가 마음이 좋아해요. 


이러면 자기는 십자가와 함께 죽은게 아니고 자기는 십자가에 안죽고 탱탱하게 살아 있어요. 살아있는 상태에서 어디를 골라볼까? 뭣을 골라볼까? 십자가 보다 부활이 괜찮네. 부활은 십자가 이후니까 앞에 것을 포함하겠지. 그러니까 이걸 가지면 십자가 믿음셈이 되니까 나 부활믿겠어. 부활이 새생명. 이렇게 나온다 이말이죠. 이런건 없어요. 


이미 십자가에 함께 죽었으면 무엇이 부활이냐 하면은 주께서 살아 있음이 부활이예요. 십자가 안에있는 자를 주께서 살아 있어서 가지고 주님의 몸으로 지체로 사용한다는 그 능력자체가 부활의 능력입니다. 


하나 예를 들면 노아 방주 있었지요. 노아 방주 바깥에 노아가 있었습니까? 방주 안에 노아가 있었습니까? 방주 안에 노아가 있었잖아요. 방주안에. 애들도 아는 이야기인데 방주안에 있었지요. 그러면 바깥은 뭐냐? 바깥 생각하면 바깥은 지금어디 지금 전부 다 물 안에 지금 다 갇혀 있지요? 이걸 가지고 노아가 언약안에 있다. 언약안에. 


그걸 새언약으로 바꿔봅시다. 예수의 피 안에 십자가 안에 있다는 말은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바깥에 죽은자로 보이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만 보이니까 십자가는 죽은 거잖아요. 죽은자로 보는거예요. 


너는 왜 세상을 자꾸 죽은자로 니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느냐? 바깥 사람은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둘이 연결되면 안되겠나? 연결이 안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있는 거예요.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가 연결이 된다 안된다? 안되는 겁니다. 되지를 안해요. 


그 뒤에 봅시다 29절 봅시다. 28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어디로 갑니까? 제곳으로 다 뭐 됩니까? 흩어 지지요? 착각하지 마라 이것들아 이말입니다. 지금은 왜 이들이 착각하느냐 하면은 20절에서 근심하겠으나 기뻐한다 할때에 사람은 근심할때에 이성적으로 뭘 받아드리느냐. 


근심 잠시 끝나면 기쁨이 오겠지 여자가 애를 임심했는데 임신할 때 고통이 있지만 다시 태어나게 되면 그 고통이 없애니까 기쁨만 있으니까 우리는 그걸 이미 눈치챘으니까 그 비유의 의미를 아니까 우리는 이제는 기쁨이 줄곧 되겠지라고 생각한거예요. 주의 말씀은요 우리가 주의 말씀은 제 3자가 거기에 바깥에 서서 제 3자가 알아채라는 말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그 말씀속에 경유를 함께 해야되요. 그 과정속에 섞여 들어가야되요. 그 말씀속에. 


근심하면 근심해야해요. 근심할때는 기쁨이 있다? 없다? 1도 없어요. 근심할때는 하나도 없어요. 그냥 근심 뿐이예요. 조진거예요 인생. 끝장난거예요. 깜놀이예요. 충격이예요 정말. 왜 인간이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 말씀이 있는데 제 3자의 관찰자가 되지 못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있으면 우리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나에 이익이 되는 의미를 가지고 성경말씀을 보기 때문에 이게 나는 주관이 되고 성경은 객관이 되가지고 귀한말씀 뽑아낼거 다 뽑아내요 여기서. 


좋은거 십자가도 뽑아내고 언약도 뽑아내고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어떻게 복음적으로 행함없이 구원받았다 온갖것 다 끄집어 내고 주관이 살아 있는한 소용 없는 겁니다. 정말 행함 없이 구원받을려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속에 가서 우리의 행함 때문에 누가 죽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이 관계가 철저히 체험되야 되요. 체험될려면 우리 안에서 뭐가 나와야 됩니까? 울분과 분통과 그리고 주님에 대한 실망과 그리고 주님에 대한 분노 이게 나와야 되요. 이게 이게. 이게 나와야 되요. 아직 안나온다고요? 아직 덜 건드려서 그래요. 


뭐 돈 부도 나도 울분 안난다고요? 부도보다 더 중요한게 있어요 제가 첫째 시간에 했지요?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은 뭘 끊을수 없다? 혈육이죠. 자식. 자식 건드리면 다 나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바치라고 했습니까? 자기의 그것도 그냥 미운자식이 아니고 이스마엘 바치라는게 아니예요. 


이스마엘 잡는게 아니고 누굴 잡는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시키신 주님의 방식대로 앞으로도 자기의 아들을 보내시는 방식으로 오심으로 그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구원 복음은 심판을 전하는 거예요. 심판에 합당합니다 라는 것을 전할 때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속에 우리를 체험케 하는 거예요. 


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 또 마음에 심히 또 이제는 기쁨이 근심이되요. 왜냐하면 실제로 이렇게 되면 어쩌지? 어떡하지 할건데. 이걸 이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망한다 라고 울때는 아직 안망했어요. 


왜냐하면 울게 있다는 것은 아쉽다 미련있다가 있잖아요. 그런데 정말 망해버리면 망한줄도 몰라요. 그 망한상태를 주께서는 망하라고 은사를 선물을 줍니다. 선물 은사. 선물을 줍니다. 그 선물이 뭐냐하면은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어느정도 망하는지를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옵니다. 


사랑은 미워하지 않아요. 성내지 아니합니다. 김사랑이 불렀던 노래 알지요? 사랑은 언제나~ 사랑은 한때 하루에 두 번 온유한게 아니예요. 어떻게 온유합니까? 언제나. 남편이 술먹고 들어와도 온유해요. 자식이 세 번 재수해도 기뻐요. 심지어 둘째딸이 베트남 남자랑 사귀어도 온유해요. 


여러분 그게 가능합니까? 내가 제일 미운자가 우리 회사 상사가 되서 스카웃되서 들어왔어요. 그러면 그 사람 미쳐버립니다. 특히 여자한테 제일 정신 미쳐버리는게 뭐냐 하면은 남편한테 여자 있다 이런 경우. 그때는 노래가사처럼 똑같이 됩니다. 할말을 잊었지만 무슨 말을 하리요. 할말을 잊어 버려요. 할말을. 


갑자기 뭐가 생각난다. 자기 역사가 쫙 흘러가지요. 역사가. 여고때 이뻣던 여고때부터 해가지고 철없이 연예할때부터 해가지고 아이 둘낳고 기뻐했던 남편 이뻐서 같이 캠핑갔던거부터 해가지고 쭉 해서 캠핑가서 오징어 구워먹던 이야기....차악~~~ 


자, 그때 뭐가 나온다고요? 이게 나오죠. 그런데 그 심판이 사랑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너는 니 주제 파악을 안하니까 주께서는 주제파악 하라고 남편에게 바람을 피우게 했습니다. 지금 내 시나리오가 너무 독하다 정말. 이건 내가 미안합니다 미안한데, 이거는 어쩔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 예 말고 그러면 로마시대 때 사자에 찢겨 먹는거 그거 할까요 그러면? 


이번에 오늘 두 번째 유투브 동영상 10분짜리 했는데 두 번째가 뭐냐 장벽을 했어요. 장벽을 할 때  여리고 성은 무너뜨렸지만 그 무너진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내부에 마음속에 들어갔다 했어요. 그래서 아이성에 모인거예요. 인간의 성은 무너뜨릴수 있어요. 남편 바꿀수 있고 아내 바꿀수 있고 다 있어요.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이 펜스를 이 저주받을 펜스를 내손으로 어떻게 이걸 망치로 부순다고 부숴집니까? 안부셔지는데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부숴주니 고맙다 소리해야되요 정말 이거는. 나는 처음부터 바람이고 뭐고 처음부터 나는 결혼할 자격도 없고 자식은 있을 자격도 없고 나는 태어날 자격도 없는 인간이였음을 비로서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하면서도 내가 참 못땠다 정말. 이런 사람 없는데 이런 사람 없어요. 없는데 성경은 그걸 이야기 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제가 이 말하는 것은요 여러분 보고 신앙생활 하지 말라는게 아니고 행함으로 유사 복음 받았다는 흉내를 낸다는 것은 결국은 주께서 만들어 주신 한계에 다 결국은 본색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하는거예요. 


분노와 울분과 분통과 이거는 뭐 하나님 보고 노골적으로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 별을 보고 이야기 하고 저 갈대 보고 이야기 하고 괜히 가는 남의 개보고 발차고 쓰레기통 차고 이런식으로 그것도 하루이틀 아니고 매일같이 합니다. 그것도 뭐 집안에 문제 있어서 되는거 아니고 사소한 문제 때문에. 사소한 문제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 왜 북한 가서 춤추고 있나? 쓰레기통 차는거 그런것도 울분이거든요. 왜 내가 꼴보기 싫어하는 탤런트가 왜 저 드라마에 주연으로 왔는지 나 안본다 하면서 또 다 보거든요. 그런것들 아주 사소한 모든 것이 왜 내 중심으로 안돌아가느냐 이 세상이. 이 세상이 왜 내 중심으로 왜 안돌아 가지요? 왜 안돌아 갑니까? 


예수님과 내가 일대일 대적관계가 있어줘야 그 틈에서 십자가가 날마다 반복되서 부곽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십자가 뿐인데 그 십자가를 이론으로 알아버리면 그 깊이와 높이가 안나와요. 십자가 알고 있는 내 자랑하기 바빠요. 나 십자가 안다 해서 남한테 자기 증거 하기 바빠요. 주님 증거 하는거 아니고.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걸 알때에 주께서 뜻에 따라서 아까 했잖아요. 낙서라고 낙서. 뒷면에. 우리는 필름 막이예요. 오늘 용어가 비싼거 너무 많이 나온다. 우리는 필름입니다. 필름이라는 폭을 갖고 있지 않아요. 하나의 막이예요. 이면지라니까요 이면지. 


이렇게 보면 내 역사 나오지만 세로로 들면 폭이 없잖아요. 인간은 하나의 경계선이예요 경계선. 인간이 아니고 성도는. 성도는 이쪽은 천국이고 이쪽은 지옥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예요. 이쪽이예요. 이거는 베드로도 사도바울 요한 전부 다 그랬어요. 


들은 자기를 증거하지 않아요. 나는 십자가 지지도 않았다고 자기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 하기를 이런데 우리는 이렇게 보지않고 이렇게(정면으로)본다고요. 이렇게 보니까 거기 자기 역사가 나오고, 자기 잘남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일으킨 사건이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낙서예요 낙서. 갈지자. 이게 낙서라니까 낙서. 낙서를 왜 하느냐? 낙서 믿지 말라는 겁니다 이거. 육에다가 낙서 해놓고 그러니까 육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거예요. 


오늘 강의는 쉬워요. 내일 아침부터 낙서질하면 되요. 세상에 나가서. 낙서처럼 살면 되요. 낙서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좀 진지하게 이야기 해야지 왜 낙서하고 합니까? 이러면 만약에 우리가 내일부터 진지하게 살아 버리면 그게 뭐냐하면 새로운 결과와 목적을 기대하는 원인으로 작용해 버립니다. 


주님이여 이렇게 내가 착실하게 원인 집어 넣으니까 input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output. input에 제대로 암호 비밀번호 집어 넣었으니까 드드륵드르륵 오만원짜리가 계속 쏟아지기를. 그런 자동 현금 인출기를 우리는 하나씩 가지고 있는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말합니다. 그 햇빛과 공기는 니가 뭘 집어 넣어서 햇빛과 공기 오느냐? 우리는 할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침 몇시에 해 뜹니까? 물어보자. 아침 몇시에 해뜨지요? 뭐 대충 이야기 하면 아침 7시라고 합시다. 이게 잘못된거예요. 아침 7시에 해뜨는게 아닙니다. 해뜰때가 인간적인 시간으로 7시예요. 


자연은 인간말을 안들어요. 그냥 해뜹니다. 해뜨는데 해 뜨는 것을 우리는 해뜨니까 일과 시작해볼까 라고 그걸 이용하지요. 해는 주님이 뜨게 하시고 우리는 그걸 내 주관이 해를 객관으로 봐가지고 내가 이용할려고 하는 거예요. 나 해뜰 때 나는 쿠쿠밥솥에다가 밥 안친다. 이게 이용한다고 하는거예요 이용하는거. 


그럼 밥안치다가 다음날 죽어버리면 어떻할건데? 죽으면 그 다음날 해뜹니까? 안뜹니까? 해뜨잖아요. 보세요. 우리가 죽든말든 해뜨잖아요. 그럼 해는 누굴 위해 뜹니까? 저 해는 누굴 위해 떠요? 우리를 위해 뜨지않고 주님을 위해 뜬다 하지 마세요. 우리를 위해서 뜨지 않지요. 왜 우리를 위해서 해가 뜨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뭘 해도 우리는 엉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심판받기 마땅하기 때문에 해는 우리하고 결부하지 않습니다. 해뜨는 것은 죄인 이지만 주께서 주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노아 언약이 오면 은혜는 항상 희생이 나와요. 은혜가 그냥 나오는게 아닙니다. 


은혜가 아벨의 피에서 나오든지 노아의 제사에서 나오든지 모세의 제사에서 나오든지 다윗의 희생에서 나오든지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덕분에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때까지 핑계치 못할자를 유보하는 식으로 모든 대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보면 해나 피조물이나 모든 산천 초목이나 다 누굴위해 증거한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이 만들어졌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근심이 우리가 당연한데 근심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예상못할 기쁨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상못할 기쁨이. 강의 시간에 이렇게 분위기 다운되는 이유를 알아요. 제가 예를 이렇게 잘못 들어서 제일 건드리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렸어. 진짜 그렇게 되면 곤란합니다. 예수고 진짜 버릴겁니다. 너무 근심이 너무 깊어 졌어요. 


다윗이 밧세바를 사랑했지요. 다윗이 왜 밧세바를 왜 사랑했습니까? 물어봅니다. 왜 사랑했어요? 제가 묻는 내가 잘못이다. 주께서 사랑하게 하셨어요. 왜? 사랑했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중에 태어난걸 알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언약이라 하는 것은 언약의 자리는 주님의 자리는 용서의 자리고 그 맞은편의 자리는 죄인의 자리여야되요. 죄인의 자리인데 인간들이 자기가 의미를 주다 보니까 죄냐 의냐를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은 본인이 스스로 판단해가지고 본인이 죄인것만 죄라고 여기고 근원적으로 죄인 것을 인정을 안하는 거예요. 


주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근원적으로 모친의 죄중에 태어나게 하신 것을 주께서는 밧세바를 사랑하게 하신겁니다. 사랑만했습니까? 그 남편을 어떻게 했습니까? 죽였지요. 자, 누가 죽이게 했습니까? 그 죽이는 과정이 뭐냐 하면은 그 죽이는 과정 속에서 다윗이 나는 안죽였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을 보여주면서 죽여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은 적의 화살은 아무나 쏜다고. 그 우리아 장군으로 하여금 자기가 쏘는게 아니고 자기가 죽여 버리면 자기는 살인자가 되버리잖아요. 그런데 슬쩍 이렇게 제일 위험한 지역에다가 던져 넣어서 뭐를 빼느냐 하면은 나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아는 정도까지 거기까지는 아니까 전적으로 죄인인 것은 아니다. 


나는 비록 조폭이지만 거리에 불쌍한 사람 있으면 마약 판 돈중에서 만원은 줄정도로 내가 양심이 그렇게 망가진 놈은 아니다 라는 식이 가장 최절정에 있는 죄입니다. 내가 이렇게 엉망이지만 교회 나와서 주님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믿을 정도는 나는 착하다가 최정점에 있는 사탄의 악마의 모습이예요. 


나는 그렇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신학교 내 몸을 헌신해서 신학 교육받아서 목사 되서 남에게 복음 전할정도만큼은 된다. 그러니까 나는 전적인 죄인 아니다. 이것이 악마의 가장 근접한 모습이예요. 악마의 가장 근접한 모습. 


나의 인자함이 교인들로 하여금 마음을 교회에 붙들게 만들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 계속 다녀서 복음을 듣게 하니까 나는 주의 일에 일조했다는 그 사고방식.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목사가 강의하는 것 설교하는 것 그게 바로 죄입니다. 들을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인을 가지고 마음대로 활용해주시는 그 주님의 의가 자기 백성을 건진다는 사실, 이제 다시한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살면서 온통 근심밖에 없습니다. 잠시 기쁘더라도 돌아서면 또 근심이 찾아올 밀물처럼 들어닥치는 그러한 악몽같은 세상에 살지만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그것이 생명인 것을 생명활동인 것을 참여된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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