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림’의 원리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4: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이 세상에 일관된 원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안 받아드릴려고 합니다. 그저 나는 내 기분 따라 내 계획에 맞추어 나만의 생을 살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자신이 누구의 종이 된다는 것을 거부합니다. 독보적으로 독자적인, 나로 인해 즐거워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그런 세상, 그렇게 그런 식으로 살면 별 탈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편지는 이 사상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1:1에 보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다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구원받게 될 사람들만 이해될 말을 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사도 바울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제자들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들은 것은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신 결과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령을 받은 자에게만 알아 들으라는 식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창조주가 되시지만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업’이라는 단어는 구약 이스라엘 존재와 관련있습니다. ‘아버지’라는 관계는 전에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됩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즉 참으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사람은, ‘아들의 자리’에 들어서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따라서
어떤 이가 자신을 아들로 간주하려면 예수님과 비교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해하시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첫째,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세상에 대한 안목은, 에스겔 37장의 말씀처럼 ‘해골들’입니다.
‘걸어 다니는 해골’, ‘움직이는 해골’들입니다. 이것은 오늘 말씀에서는 ‘세상의 초등학문의 종노릇’의 모습입니다. 초등학문이란 ‘세상 돌아가는 기본원리’를 말합니다. 구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들’로 다루셨는데 그 결과는 바로 어느 민족이든 이스라엘과 전쟁을 했다면 사정없이 그 이방민족에게 저주가 돌아갔습니다.
이는 ‘아들이 아닌 자는 저주받는다’는 분명히 하시는 조치입니다. 이는 해골들의 집합체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입니다. 마치 소가 앉아있게 되면 그 몸체 자체가 볼록한 봉우리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머리와 꼬리 부분에서 지면과 같은 높이가 됩니다. 즉 이 세상은 마치 대단하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이곳은 다 사라집니다.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 인생만이 아니라 이 세상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반발하고 분노하는 성향을 드러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왜 내 것 지키겠다는 데 그것을 방해하느냐?”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목사가 개척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교회 키우겠다는데 복음이 이것을 부정합니다.
그러면 그 목사는 반발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분노가 유발한다는 것은,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자칭 신처럼 가동되는 자신의 본성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즉 나로 인하여 나 행함으로 내가 영광받겠다는데 왜 하나님이 나서서 훼방하느냐는 겁니다. 이러니 인간은 복음으로 인하여 ‘죄의 종노릇’하고 있음이 폭로당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해골의 무덤인 이 세상을 구태여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 속에서 ‘잃어버림의 원리’를 가동하기 위함입니다. 즉 ‘잃어버림’이란 하나님의 아들될 자라도 필히 이 세상의 통용되는 악마 정신의 종이 되어 살아봐야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이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젊을 때, 아들 행세하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가져다 허랑방탕한 아들은, 재산 다 날리고 난 뒤에 비로소 자신이 이 세상의 ‘종’이라는 사실에 눈을 뜹니다. 여기서 다시금 언급합니다. ‘죄의 종’이란 자수성가, 자립 정신으로 무장된 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있어 자신이 최종 신(神)이기 때문입니다.
탕자는 이점을 압니다. 아버지 집의 품군이라도 족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아버지는 일방적인 조치를 탕자에게 하십니다. 즉 두 아들이 미처 예상도 못한 혜택을 탕자에게 덮어쉬웁니다. 그게 바로 아버지만이 따로 알고 계시는 ‘아들됨’입니다. 아들되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죄의 종이 된 두 아들 중 아무도 아버지의 이 방침을 사전에 알지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일을 이렇게 하시느냐 하면, 아버지께서 마련해두신 상속분이란, 오직 예수님을 위한 나라입니다.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들이 이 아드님을 영화롭게 해야 되는 조건 하에 준비해 두신 나라, 곧 ‘아들의 나라’입니다.(골 1:13)
따라서 종의 종노릇 하에서 넘볼 나라가 아닌 겁니다. 세상에서 꿈꾸는 그런 천국 아닙니다. 세상 다 살고 또 살기 위해 상상하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이 악마의 종노릇에서는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에게 난 것이 아닌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겁니다.
즉 절대적으로 단절을 유지하시겠다는 겁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포도원에 품군들을 불러 일을 시키면서 노동한 시간과 상관없이 주인이 똑같은 품삯을 줍니다. 당연하게 오랜 시간 동안 일했던 일군이 반발합니다. 그럴 때, 주인이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즉 하나님의 아들되기에 개입되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 눈에는 부당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이미 ‘죄의 종’이 된 안목을 장착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조심스럽게 경건한 행함의 누적으로 의의 나라인 천국에 입성하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신이 곧 ‘악마의 정신’이다는 사실을 복음을 듣기 전에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을 살기 위해 힘을 자기 주변에 모읍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을 ‘힘의 실재성’으로 파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 속에 ‘죄사함의 실재성’을 집어넣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이 세상에 복음을 빨아들이는 장치가 장착된 자를 찾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이 나를 위한 나라가 아님을 명심토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8-04-30 09:38:13 | 조회 : 2 | 286강-갈 4장 1-3절(잃어버림의 원리)180429-이 근호 목사 | 이름 : 오용익 (IP:121.149.39.243) | | 286강-갈 4장 1-3절(잃어버림의 원리)1804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4장 1-3절입니다. 신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4:1-3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사도바울의 편지에 ‘우리’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 우리라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언급을 하면서 어떤 우리인가 하면, 1절에 보면 “유업을 이을 자”라고 되어 있어요. 유업을 이을 자, 라는 것은 누가 상속을 하신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라 하는 것은 상속 받을 자 일 때 우리가 되는 겁니다.
상속을 해준다는 이러한 정황은 스스로 자기가 자수성가하는 그런 식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상속하는 사람과 상속받는 사람이 같이 있다는 말은 한 가족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상속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앞에서 보게 되면 바로 하나님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는 사람이 본문에서 우리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될 때에 무엇이 가장 방해거리가 되느냐 하면, 우리가 독자적으로 나름대로 결혼해서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이 사도바울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4장에 보면 나오겠지만,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민족에게는 다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피조물이 돼요.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면 그게 천국백성이냐?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될 때 제일 방해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 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성씨가 같은,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아버지가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면 무엇부터 처리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평생토록 이 몸 가지고 같이 가족관계를 유지했던 아버지와 그 자식관계가 제거되어야 되는 겁니다.
지금껏 아버지가 나를 보호하는데 이제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서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서 나를 자식처럼 다루면서 보호해 준다는 거예요. 그리고 전에 세상적이고, 혈육적이고, 가족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보호라는 것, 그러한 돌봄 같은 것은 이제는 잊어버려야 된다는 말이지요.
기존에 있는 아버지가 나를 자식으로 삼아서……, 여러분 다 아버지가 계시잖아요. 돌아가셨어도 어쨌든 아버지가 계신데 우리는 그 아버지 덕분에 내가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덕분에 아버지 품안에서, 또는 부모님 품 안에서 우리는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살았다.’를 변경시켜야 된다는 겁니다.
육신의 아버지 덕분에 내가 살았다, 하는 것은 잊어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육신의 아버지가 나를 자식으로 키운 그 키움을 유지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무엇이 무시되느냐 하면, 정작 우리를 영원히 살려준다는 그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아들 취급해서 살리시는 그 살림이 완전히 우리에게 무가치하게 되는 거예요.
별로 좋아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게 귀하게 여겨지지도 않고 그게 심각하게 여겨지지도 않아요. 세상이 부모와 자식관계에서는 어느 정도, 군대에서 제대하고 대학졸업 할 때까지 어느 정도 키워주게 되면 결혼을 하게 하면서 밀어냅니다. 이제는 네 스스로 살아라, 라고 돼요.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키울 때 마지막 도달지점은 뭐냐 하면, 홀로 사는 것이 정상인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계속 강요를 해주는 겁니다. “이젠 혼자 살아라. 네 노동으로, 네 애씀으로, 네 행함으로 네가 사는 거야. 내가 자수성가 한 것처럼 너도 자수성가해.”
은연중에 그렇게 압박을 가하지요.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그게 큰일 날 문제입니다. 계속 아버지만으로, 그것도 아버지가 상속으로, 유업으로 주신 그것만으로 좋아져야 되기에 세상에 살면서 자수성가하고 내 힘으로, 내 행함으로 얻었다는 이것은 도리어 방해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버려야 돼요.
세상부모들은 ‘자식이 어서 커서 자기 힘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나도 나이 들어서 이젠 더 이상 못 도와준다.’ 결혼해도 손 내밀고, 또 결혼도 안 해서 문제고, 애 셋 낳아서 키워달라고 하면 그것도 골치 아프고. 벌써 둘 낳았는데 아들이나 딸 더 낳고 싶다고 해서 또 임신해서 있고 골치 아파요. 언제까지 돌봐줘야 되느냐.
그런 인식을 보여주지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면 반대에요. 언제 너는 너 스스로 지킬 것이 없어지겠는가, 그걸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행함으로 얻은 제 것입니다, 하는 그 사고방식이 언제 없어질 것이냐는 거지요. 언제 그걸 구겨버리겠느냐 그 말입니다. ‘에이, 이런 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그 고귀함을, 그 소중함을, 내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이런 타고난 육신 때문에 그동안 철저하게 가려왔구나.’ 그걸 느낄 수밖에 없지요.
사도바울이 아버지와 아들, 그 사이에서 유업, 상속분, 이런 개념을 거론하는 것은 유대나라, 구약은 의식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아들이라 칭하면서 등장된 최초의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아버지가 있어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 신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에는 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아들 만들기 계획이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은 이스라엘이 처음이고 그게 마지막이지요. 가시적인 민족단위로서의 유대 이스라엘, 그게 유대교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집중적으로 관여했는데 결국 그 이스라엘을 아들 만드는데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사야에 나오잖아요. 소도 주인을 알건만 너는 네 애비 어미도 못 알아본다는 말이지요. 그 아비를 잊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들이 아니니까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하는 것은, 아들의 경우와 아들이 아닌 경우와 하나님께서 어떤 처벌을 내리는지, 어떤 대우를 하는지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확실하게 보여줬습니다.
아들일 경우에는 바다와 강도 쫙쫙 갈라지지만 아들이 아닐 경우에는 저주만 주어져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아들 되는 이스라엘과 아들이 아닌 일반적인 신을 믿는 이방민족과의 전쟁이 벌어질 때에 사정없이 이방민족이 전쟁방식으로 처벌을 받게 되어있지요. 그들은 신을 믿어도 소용없어요.
구원이란 말은 신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되어야 됩니다. 아들이 되지 아니하면 아들의 나라, 하나님 아버지가 계획 잡아 마련해준 그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천국 못 들어가면 지옥 가는 거지요.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천국 못가면 지옥이에요.
그런데 천국은 아들의 나라가 되어서 아들 자리에 들어와야 천국 가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아들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자수성가하는 것을 용인하는 자리가 아니에요. 내가 이만큼 애써서 이만큼 키워왔고 이거 하나 내가 장만했습니다, 이렇게 자랑질 하는 그것은 아들이 아니고 그것은 마귀의 가현체입니다.
아들 됨을 거부하는 쪽에서 모델로 삼은 인간상이 뭐냐 하면, 자수성가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거예요. 내가 내 힘으로, 내 것으로 사는데 신이 좀 후원해주고 도와주기를 바라서 교회 다니게 되는 거예요. 그 인간성은 전혀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 있어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아예 작심하고 들어갑니다. 이 편지가 그래요.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니까 일반사람들이 못 알아먹지요. 마치 예수님께서 이야기해도 주위 사람들, 제자들도 못 알아보듯이 사도바울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그러면 못 알아보지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사람의 지혜를 끌어 모아 행함으로 얻어진 것도, 역사와 전통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주 작심하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이 말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갈라디아서 4장까지 왔잖아요. 4장에서 1장, 2장, 다 잊을까 걱정이 돼요. 제가 걱정할 문제도 아니지만.
이 4장도 사람으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에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신네들 믿음 없다는 것 끝까지 다 까발릴 거야.” 그런 뜻이에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찾고 예수 찾는데 이건 백 프로 수상하다는 겁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거예요. 이건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 4장을 통해서 한번 추적해 봐? 내가 작대기를 가지고 그 속을 들쑤셔 볼까요?” 이런 투라니까요. 목회성공 같은 것은 없어요. 교회부흥, 사도바울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교회 잘돼서 예수님 잘되게 하는 방법이 없어요. 계속해서 쑤시는 작대기입니다. “믿음 없을 걸? 아마 없을 거야. 있을 리가 없지.” 이런 식이라니까요.
왜? 사람에게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미 예수님도 인간을 알아요. 그리고 사도바울도 인간을 압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아요.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 믿고, 나 잘되기 위해서 교회 다니고, 나 잘되기 위해서 천국가고, 전부 다 나 잘되기 위해서예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도 똑같은 반응입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복음을 거부하는 겁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자기 편한대로 살아가요. 내가 한평생 이룬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걸 사수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이 자존심, 체면을 집어넣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내 것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복음적 내용에 대해서 인간은 분노를 갖고 있습니다. 분노를 나타내요.
여러분이 지금 분노를 안 하고 있으니까 수상하다. 내 것을 지킨다는 것은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겁니다. 사도바울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를 우습게 만드느냐, 이런 식이지요.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네가 아들이야? 네가 아들이야?” 아들 같으면 내 것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것을 확정할 수 있느냐? 예수님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믿음 없음을 누구하고 비교하느냐 하면, 예수님 살아가신 것과 비교하는 겁니다. 믿음이 좋은 누구하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바울 본인하고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하고 비교할 때 두 가지 특징을 잡을 수 있는데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봤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고 아버지로부터 온 것으로 봤어요. 그러면 욥과 똑같지요. 주신자도 하나님이고 가져가려면 가져가세요, 라는 식이에요. 모든 것이 은혜니까, 내 것이 아니니까. 내 것이 없을 때도 내 것이 아니듯이 내게 도달해도 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보는 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면 그것은 예수님처럼 믿음 없다고 본 거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잖아요. 예수님만 아들이에요. 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님하고 비교해서 비로소 밝혀지는 겁니다. 아바 아버지야 말은 못할까요. 아바라는 그룹도 있는데요. 아바, 아빠, 그런 것은 흉내도 못내요? 입 뒀다 뭐해요? 맨 날 아바아버지라고 부르지요. 기도할 때마다 아부지~, 아부지~, 경상도 같으면.
그런다고 아들 되는 것 아니거든요.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안목과 동일한 안목으로 보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세상을 어떻게 봤는가? 모든 인간을 어떻게 봤는가? 걸어 다니는 해골로 봤어요. 해골로 봤다니까요, 해골. 미스코리아 진선미, 해골 진선미에요. 윤기 나는 해골인가? 키 큰 해골이겠지요.
두 정상이 만난다. 뚱땡이 해골하고 60대 해골하고 만난 거예요. 여기에 또 태극기가 있는가는 모르겠다만. 두 해골이 만난 거예요, 두 해골이. 둘 다 아들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좋아하지요? 대한민국 잘되면 내가 지키고 싶은데 내 것 지키는 것이 원활하게 돌아가니까.
이 대한민국 부동산 값이 올라갈 수 있는 문제니까. 내가 사놓은 주식이나 펀드가 수익을 낼 수 있으니까. 내 것은 내가 지키니까. 왜 그걸 내가 지켜야 하는지. 그게 내 자존심이기 때문에. 광주강의에 중학교 학생이 왔었어요. 제가 물었어요. “왜 돈이 있어야 되지?” “돈이 없으면 못사니까요.” “왜 못살면 안 되는데?”
제가 너무 심한, 짓궂은 질문을 한 거 같아요. 지금 사도바울은 작심합니다. 우리 교회 부흥되었다. 그게 뭐예요, 결국? 내 것 지키겠다는 것이거든요. 내 것을 지키겠다. 교회를 빙자하지만 사실은 내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것밖에는 안돼요. 누구한테 그렇게 배웠습니까? 육신의 부모한테 그렇게 배운 거예요.
3대째 기독교 가정, 5대째 기독교가정.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큰 교회 갔는데 그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어요. 특별혜택으로 들어가서 뒷면도 봤고 옆면도 봤는데 아무리 교회 내부는 들어가서 볼 수 있어도 그런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까지 들어가는 것 아니잖아요.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교회 안에 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등록했느냐 아닌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가 하고 묻는 거예요. 예수 안에 있다면 예수님의 세상 보기하고 동일하게 보는 안목이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옛날 이스라엘이 대실패를 한 거예요.
아무도 성공한 사람이 없고 심지어 열 두 제자도 아무도 성공한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같이 세상보기에 아무도 성공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지요.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의 배불뚝이, 또는 소가 있을 때 나타나는 산등성이 같은 소의 등짝, 이런 것을 연상하면 돼요. 이 세상이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인데 소의 등짝처럼 잠시 봉우리를 형성하다가 다시 없어지는 거예요. 이 세상이라는 게. 있다가 다시 없어진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사람은 어디 있느냐? 잠시 있는 세상을 구성하기 위해서 있을 때 잠시 태어난 거예요. 그리고 곧장 이 세상 사라지고 그 다음은 이 세상과 같이 사라지는 겁니다. 예수님 안목은 그 시작과 끝을 다 보고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 시작과 끝을 다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일시적이라 하는 것을. 일시적인 겁니다. 한시적이에요.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인생이라 하는데 인생만 그런 게 아니에요. 이 세상 자체도 잠시 부풀었다가 다시 수그러들어서 없어져버려요. 그게 마지막 때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이 말하는 컨셉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영원한 아들의 나라를 만들고자 계획을 했고요, 그 계획을 위해서 자기백성을 모집하는데 어떻게 모집하느냐? 잃어버린 자를 찾는 형식으로 모집해요. 잃어버린 자를 찾는 형식으로.
그러니까 누가 잃어버렸는가 하는 것은 아버지만 알지 아무도 몰라요. 잃어버렸다가 찾는 형식인데 잃어버렸다가 찾을 때 어떻게 잃어버렸느냐 하면, 죄에 팔렸다고 봐요. 죄의 종이 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죄의 종에 팔린 자를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서 다시 되찾아서 아들 만드는 컨셉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천국은 채워진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정말 사도바울처럼 성령 받은 사람은 뭘 아느냐 하면, 아버지, 아버지, 한다고 아들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자리에 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죄에 팔린, 죄의 종으로 팔린 경험이 있어야 돼요. 이 경험은 이 세상에서 해요. 이 세상을 하나의 경험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뱀으로, 악마로 하여금 인간을 유혹하게 허락했어요.
유혹하게 허락했고 인간은 악마의 유혹으로 인하여 스스로 모든 출발점을 ‘네가 신처럼 되리라.’ 했으니까 자기가 신이라고 간주하고 나부터, 나의 절대적인 성향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부터 모든 것을 자기가 납득이 되는 것을 행함으로 끄집어내서, 자기 행함에 의해서 얻어진 결과물을 다 수집해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기대하는 천국이다, 이게 구원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이 돌아가도록 하신 겁니다.
로마서 4장 4-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일하지 아니한 자, 경건치 아니한 자라는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실제로 실컷 일을 하게 만들어요. 일을 하게 만들어서 그 일한 것이 그냥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나의 자존심으로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 이게 바로 아들이 아니고 마귀의 가현체, 악마의 가현체, 나는 나로 인해서 산다는 그 악마의 제 2, 제 3의 등장으로서 자기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혹독하게 느껴져야 돼요.
‘아, 이게 아들이 아니구나.’ 그것을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거울을 보고 알아가는 거예요.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저게 악마다 그 말이지요. 악마가 뭐냐 하면, 내 것 지키지 못하도록 질타하고 방해하는 그것에 대해서 분노를 품고 분통을 터뜨리는 그 모습이 악마의 모습이에요. 내가 선악과를 따먹겠다는데, 내가 따먹겠다는데 하나님 네가 뭔데 그걸 방해하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따먹겠다는데 내가! 출발점이 나에요. 내가 따먹겠다는데.
“내가 내 힘으로 내가 살겠다는데 누가 방해해? 엄마나 교회 다니세요. 나는 안다닙니다. 왜? 나는 내 힘으로 내가 살 거니까. 그래서 내 영광을 취할 테니까. 결혼했으니 나나 엄마나 따로 살고 이제는 피차 독자적인 존재입니다.” 이거잖아요. 그걸 우리는 누구한테서 배웠습니까? 우리 부모한테서 배웠어요. 또 세상에서 그렇게 배웁니다. 세상이 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세상이 임시적인 그저 배불뚝이라니까요. 이 세상이라는 동네의 그런 방식은 바로 잃어버림이라는 것이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는가를 혹독하게, 똑똑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잃어버림이 없이는요, 아들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아버지, 아버지, 교회 나와서 아버지 부른다고 아들 되는 것이 아니에요.
잃어버림이 있어야 돼요. 누가복음 15장에 유명한 비유가 나오지요. 탕자의 비유라 하는데. 그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돌아오면서 결국 무엇을 고백하느냐 하면, 종이라는 것이 뭔가를 이야기해 줍니다. 누가복음 15장 15-17절에 보면,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여기서 ‘품군’이라는 것, 종의 자리죠. 머슴의 자리죠.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탕자, 가출하지 않은 맏이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분노하느냐 하면, 왜 아버지는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한 아들에게 주십니까, 라고 한 거예요. 지금 큰 아들은 분노를 품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방식에 분노를 품고 있어요. 분통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처음에 나갈 때는 자기가 아들인 줄 알았어요. 나갔다 오고 나니 아들이 아니에요. 종이라도 만족해야 될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것은 탕자 생각이고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버지 생각은 아들이 알고 있는 그 생각과는 전혀 생소해요. 낯설어요.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고방식을 적용시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오히려 아버지 재산을 날려버린 그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우고, 소를 잡고,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아들이 오니까 얼싸안고, 새 옷을 입힙니다. 그게 바로 아버지로부터 시작하는 아버지다움이고 그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지 아니하면 아들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아들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아요.
아버지로부터 개시해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 땅에 아들 자리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 아들 자리가 형성될 때 그 아들은 뭐냐? 잃어버렸다가 얻은 거예요. 잃어버림, 잃어버림이 없는 것은 아들이 아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다, 와 똑같은 거예요. 잃어버림이 없으면 아들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왜 복음을 싫어하느냐 하면, 안 잃어버리려고 그동안 계속해서 마귀로부터 훈련을 받은 거예요. 안 잃어버리기 위해서. 눈만 뜨면 손해 안 보려고, 자존심 안상하려고, 체면 안구기려고. ‘내가 어떻게 살아온 한 평생인데. 흠집이 나면 안 되지. 내가 어떻게 다듬어왔고 조심조심하면서, 절제절제하면서, 경건경건하면서, 얼마나 나 자신을 빛내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살아왔는데 이것이 망가지다니. 그것은 내가 용납 못하지.’
이런 식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까? 마귀의 종이지 그게 믿음이에요? 그게 아들입니까? 잃어버려도 된다는데 우리가 우리를 용납안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신앙입니까? 자기 행함을 믿는 거지요. 그거 신앙 아니지요. 지금 사도는 작대기가지고 팍 쑤시는 거예요. 모든 교회를 향하여 확 쑤셔버리는 겁니다.
믿음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제발 좀 실패하고 제발 망가지라는 겁니다. 제발 네가 너한테 실망 좀 하라는 거예요. 평생을 살았는데 탕자도 이런 탕자가 없어요. 아들, 내가 아들 된다고요? 꿈도 커. 아들 같은 소리. 주여, 지옥 보내주옵소서, 그게 절로 나와야지요. 지옥 보내달라고. 그게 절로 나와야 될 것이 아닙니까?
십일조를 했고, 교회 충성을 했고, 새벽기도를 했다고. 특새? 특별새벽기도. 새로운 용어를 배웠네요. 도대체 뭐하고 사는지를 모르겠어요, 뭐하고 사는지를! 지금 뭐하고 살아요. 사고방식을 대체 어디에 두고 살아갑니까?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어요. 질문이 상당히 간결하고 노골적이에요. “목사님, 술 먹는 사람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이지요?” 질문이 아주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답변해야지요. 성령 받은 사람은 술 먹는 짓이 나쁜 짓인 줄 압니다. 제 답변이, 성령 받은 사람은 술 먹는 짓이 나쁜 짓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5십년 동안 술을 끊었다 해도 그 다음날 술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또 압니다. 5십년을 술을 끊었는데 그 다음날 화가 나서 술을 또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왜? 우리는 죄에 팔렸으니까. 죄가 우세하니까. 나의 절제력보다 죄가 더 우세하니까.
야곱은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뭘 알았느냐? 땅의 요소 속에 하나님의 요소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야곱은 하나님 만나기 전에 얼마나 복의 근원되기 위해 애썼습니까? 자기가 복의 근원이라고 우겼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말짱 다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야곱은 목숨을 내놨습니다.
목숨을 내놓고 자기 안에 밤의 흔적을 붙잡으려고 했어요. 낮은 하늘의 요소가 없어요. 인간의 노동의 현장이니까. 그 밤이 되어서 떠나는 그 사람의 흔적을 자기 속에 담고자 자기 목숨을 내놓으려고 했습니다.
야곱은 그 밤의 요소로 인하여 야곱은 죽고……, 이젠 죽어도 좋은 거예요. 자기 육신은 다리를 절었고, 이제는 밤의 요소, 하늘의 요소가 담긴 채, 장착된 채 움직이는 이스라엘로 달라졌습니다. 야곱에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니라,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지금도 그 세상을 외부에서 지키고 있는 밤의 요소, 밤이 되면 떠나야 될 천사의 요소, 천상의 요소가 야곱에게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이 복음을 빨아들이는 장치가 장착된 사람이 혹시 있어요?”라고 묻는 거예요. 이것을 쫙쫙 빨아들이는 사람. 이 이야기를.
우리는 악마의 종이고 죄의 종이라서 이 땅에서 이 몸 가지고서는 빠져 나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자기로부터 출발하다 보니까 악마가 배후에서 뭐라고 시키는가 하면, 힘을 길러야 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힘을 기르는 방법은 뭐냐? 힘을 기르는 방법은 계속해서 자기가 의롭게 될 때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원칙을 가동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법을 지키려면 법이 있어야 되거든요. 자기가 이렇게 정당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치밀하고 조밀하게 법을 계속해서 찾아다녀야 되고 그것을 자기에게 걸쳐야 되겠지요. 그 법을 지킨다고.
제가 이렇게 하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 비유가 나와요. 포도원비유에 두 종류가 나옵니다. 하나는 포도원 주인 나오고, 또 하나는 직원들이 나와요. 마지막 대목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의 조치는 부당하다는 겁니다. 아침에 일찍 와서 일한 사람과 늦게 온 사람, 8시간 일한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이 어떻게 동일한 품삯을 받느냐, 이것은 부당하다는 거예요.
그럴 때 주인이 하는 말이, 내 방식 내가 적용하는데 네가 왜 부당하다 하느냐. 하늘의 방식을 적용시키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요. 자기가 납득이 되는 방식을 자기가 둘러치고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정당하게 일한 만큼 정당한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천국은 마치……”라는 말을 던지면서 마태복음 20장을 이야기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5절에 보면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지금 포도원주인에게 “어떻게 일 많이 한 사람과 일 적게 한 사람에게 동등한 품삯을 지불합니까?”라고 화를 내면서 이야기를 하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라는 말은, 천국은 네가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거예요.
왜? 원래 놀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천국 갈 수도 없고, 쉽게 말해서 구원되지도 않을 사람이고 구원이라는 것이 없는데 구원은 예수님인 내가 개시할 때 구원이 생기는 거예요. 아, 정말 이거 빨아들이는 장치가 있어야 될 것인데.
천국이라 하는 것은 주님 마음대로 하시는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선하고 의롭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안 하면 우리는 자기가 죄의 종이 아닌 줄 알았는데 막상 그런 복음이 들어올 때는 강력한 분통과 분노가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그것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더.
주님, 그것은 부당하다는 거예요. 평생토록 교회 다니고 십일조 한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는 거지요. 뭐 특새? 특별새벽기도 다니고 한 이 모든 것은 뭐가 됩니까? 그게 바로 죄의 종이 되었던 거예요. 오늘 본문에 초등학문이라는 것이 뭐냐? 이 세상을 운영하는 기초적인 원리, 논리를 초등학문이라고 해요. 원어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원리를 초등학문이라 한다고.
초등이란 용어가 번역이 좀 이상한데 기본적인 세상 돌아가는 원리, 그것은 죄의 통치하에, 죄의 지배하에 돌아가는 원리를 이야기한다 그 말이지요. 그 원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자칭 자기가 작은 신이거든요. 그냥 신으로 사는 거예요. 나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누가 건드리느냐? 예수님이 건드려버린 겁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더 줄줄 알았는데 일부러 주인이 제일 늦게 온 사람에게 먼저 품삯을 줬어요. 한 데나리온을. 하루치를 줬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뒤의 사람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거예요. 야, 우린 곱빼기다, 혹은 우린 세배다, 네 배다, 이런 식으로 본색을 드러낸 겁니다.
그런데 그 본색을 드러낸 순간 무엇에 포착되느냐 하면, 그동안 태어나기 전부터 악마의 종이 되어서 살아왔다는 것, 악마의 종이 되어서 살아왔다는 것을 유감없이 발휘한 거예요. 사탄은 주의 하는 일의 모든 것에 반대합니다. 그 반대하는 안목, 반대하는 성깔을 거울 앞에 선 우리 자신도 그대로 지금 발산하고 있는 거예요.
열심히 사는데 주께서 내 인생 왜 이렇게 꼬이게 하십니까, 이런 거요. 주님이 보면 같잖지도 않아요. 웃기지도 않아요. 하나님은 얼마나 잔혹하고 잔인한 분인지 가인과 아벨에서 아벨을 죽게 하시고 가인은 안 죽입니다. 안 죽인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이 잔인한 분이라는 이야기에요.
이 땅에서, 이 썩어질 세상에서 악마의 종이 계속 되라는 뜻이에요. 계속 살되 너는 너로 인해서 산다는 그 악마의 종으로 계속 한 번 살아봐라. 그게 혹독한 벌입니다. 호스 뽑으면 되는데 뭐가 좋다고 호수 꽂아가지고. 의료비 다 까먹어가면서 호수 꽂는 것, 그거 빼면 되잖아요. 빼지도 못하고. 그거 확 빼면 되는데. 좀 더 살겠다고. 그게 하나님의 혹독한 저주인데 그게. 이 땅에서 더 살겠다는 게.
우리 아버지가 그랬고, 엄마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내 자식도 그렇고, 모든 것이 사는 이바구(이야기)만 해요. 명절에 모이면 사는 이바구밖에 안 해요. 돌 되어서 포동포동 잘 살았다고. 전부 다 사는 이야기에요. “뭘 잡았노?” “실 잡았다.” 징역 2백년 잡아라. 실 잡고, 아나운서 되라고 마이크 잡고, 부자 되라고 돈 잡고, 축구 하라고 공 잡고, 성경책은 아예 테이블에 놓아두지도 않아요.
분노의 대상이니까. 내 힘으로 내가 살겠다는데 왜 복음은 반대하느냐? 타고난 태생입니다. 이거 죽을 때까지 못 고칩니다. 이것이, 이 몸 자체가 악마에 완전히 빠진, 악마에 한통속이 된 대변인이라는 사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아직도 이런 질문 하게 되면 참 섭섭하지요. 교회 안 가면 안 됩니까, 이런 질문. 어제 32일 만에 아프리카 서해안 가나 근해에서 해적에게 잡혔던 선원들이 돌아왔다는 뉴스를 보면서 이런 생각했습니다. 32일 만에 돌아온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요? 그 사람들 어디로 갑니까?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겠지요.
가정이 뭔데요? 가정이 얼마나 허술합니까? 돌아갈 데가 없어요. 그 사람들 가정에 가면 가정에 충실합니까? 몰라. 잠시나마 그럴 수 있겠지만 또 튀어나가요. 그 사람은 갈 데가 없어요. 인간은 갈 곳을 몰라요. 최백호 같아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갈 곳도 없으면서 그냥 내가 신이다, 이런 큰 소리를 치면서 밤거리를 헤매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인간은 자기일 밖에 몰라요. 주의 일을 모릅니다. 주의 일은 아버지의 계획대로, 컨셉대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요. 아무나 찾지 않습니다. 복음 가지고, 복음의 작대기 가지고 혹시 이 말 알아듣는 사람, 그런 장치 받은 사람이 있어요, 라고 기웃거리면서 사도바울은 찾습니다. 보내심이 없으면 복음이 안 전해지니까 보내셨기 때문에 자기 백성, 잃어버린 자를 찾습니다.
잃어버린 자의 특징이 있어요. “우리가 종이었습니다.” 종인데 그 종의 모습이 뭐냐? 온갖 법들은 다 동원시켰어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법은 곧 저주를 유발하지요. 율법은 저주를 유발하는 거예요. 법을 지키려고 하고, 법대로 살았기에 정당하다고 우기는 그것이 바로 죄의 종의……, 법이 없었다면 죄의 종인 것이 들통 안 나다가 “이제는 법대로 했으니까 나도 당당하고 정당합니다. 그러니까 주님 하는 방법은 옳지 않아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그것이 바로 악마의 손가락질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실제성과 죄사함의 실제성을 현실 앞에 대결시킵니다. 힘의 실제성, 인간은 힘없이는 못산다는, 내가 힘을 모아야 산다는 그 실제성과 그 모든 죄를 십자가 피로 용서했다는 그 실제함을 대결시켜서, 어느 것이 너에게 기쁨이고 어느 것이 너의 목숨보다 귀한 것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묻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 다니든 안다니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고, 나오든 안 나오든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저 살아가는 것이 괴물로 살아가는데 하나의 해골에 불과하지만 온갖 것으로 자기체면치레 하듯 꾸미면서 살아가는 것, 마지막 흙이 될 때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진즉 몰랐습니까? 잠간 있을 세상 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깨닫는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