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9 - 나는 죽음이다
08,02,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81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아벨의 이야기는 곧 전도서의 주제가 됩니다. 아벨이라는 이름의 뜻은 허무입니다. 아벨이 전도서에서 말씀하는 허무와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지상에 허무를 남겨서, 그 허무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전략을 짜신 겁니다.
여기에 아벨 이야기가 나와있는데, 그런데 이 아벨이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라는 것이 의미심장한데 말이죠. 첫 번째가 먼저 나타났고 두 번째가 바로 아벨인데, 즉 아담과 하와의 첫째 아들이 가인이고, 둘째가 아벨이라는 겁니다. 이게 왜 그런고 하니, 하나가 있어서는 그 하나의 속성이나 내막을 알 수 없는데, 그리고 두 번째로 나타난 자가 사라진다는 말이죠.
뭔가 수상해요 !!
그러면 여기에서 어떤 결론이 나오는고 하니, 나타난 것이 수상하다는 겁니다. 뭔가 나타내 보인다는 것이 수상하다는 말이죠. 성경에서는 이렇게 '나타났다' 라고 하지만, 보통은 '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있는데 이것이 수상하게 있고 문제가 있는 것으로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어둡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둡다, 문제가 있다, 수상하다" 라는 것이 전부 부정적인데, 그러니 그것은 "나타나 있다" 라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나타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나타난 것을 가리고 있는 배후의 그 무엇을, 즉 나타난 것을 뚫고 불 수 있느냐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이렇게 접시가 있는데, 즉 접시에 음식이 담겨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접시를 존재로 보고 거기에 담겨있는 것을 소유로 보는데,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고, 그 내가 열심히 노동을 하게 되면 나의 소유가 있어서, 그것이 바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라고 하는 공식이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사유재산과 근대의 주체의식 !!
그러니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가 이렇게 있어서 열심히 일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인데, 그것을 '사유재산'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19세기 이후에는 정당하다고 여겼고, 그게 진리라고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이게 용납되지 않았는데, 사유재산이라는 것은 유럽에서도 16세기 이후에 생기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오늘날에는 법이 사유재산과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어디까지 내 것이고, 어디까지 너의 것인지, 그것을 판사가 구분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것이 법이라는 겁니다. 즉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어디까지가 형님의 것이고 어디까지가 내 것인지, 그것을 알려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유재산을 구분해주어야, 거기에서 생기는 것을 어려운 말로 '주체'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주체, 즉 '나' 라는 것은 사유재산의 결정체인데, 그렇다면 가진 것이 없으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인간도 아니라는 겁니다. 가진 것이 있어야 인간인데, 그런 것이 없으면 그야말로 거지인데, 그래서 빌어먹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여기에 '있다' 라고 하는 존재, 그리고 그 있는 것이 노력해서 얻는 소유, 그게 바로 '나'다" 라는 겁니다.
이런 주체의식이 근대에 들어오면서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러면 옛날에는 어떠했습니까? 그때는 사유재산을 왕이 건드리는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분이, 즉 양반이 그것을 건드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상놈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것이 되지 않는데, 공출이라든지 군역 등으로 해서 모두 다 빼앗기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것을 모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재산을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노동력을 그만 임금님의 밭을 가는데 다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죠. 이게 사무엘상 8장에도 나오는데, 모든 것이 왕의 소유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왕을 그냥 조직 폭력배의 두목이라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삼상 8:10)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삼상 8:11)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삼상 8:12)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양반인가? 양아치인가?
그러면 우리는 "그런 놈 밑에 왜 있는가?" 라고 하면서 답답해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오야붕이 지켜주지 않으면 지킬 자아가 없다는 겁니다. 왕 근처에 무기를 가진 자들이 있었는데, 조폭과 양아치들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죠. 농부들에게는 무기가 없는데, 그리고 농사는 짓는 것에만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이 남아도는 자들이 모여서, 그야말로 할 일이 없어서 자들이 남들을 등쳐먹으면서 살아가는, 바로 그러한 자들의 두목을 왕이라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양아치들이 양반이고 관료라고 보시면 되고 말이죠. 전혀 어렵지가 않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양아치를 조상으로 두고 있다고 하면서 자랑질을 하면서, 모여서 회비를 거두고 해서 제사를 지내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 조상은 영의정을 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영의정이 아니라 양아치라는 겁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무기만 닦고 그것을 다루는 훈련만 하는, 그렇게 해서 남들을 등쳐먹는 기술만 익힌 자들이라는 말이죠.
최초의 인간은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착을 했다고 하면 수렵을 하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그 다음이 농경시대인데, 그게 창세기 4장이라는 말이죠. 그때 왕이 생겼는데, 요즘 말로 하면 교주가 생겼다는 겁니다. 그들은 할 짓이 없어서 음악을 했는데, 쉽게 말해서 기생을 붙들고 놀았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들의 할 일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게 바로 전쟁인데, 그저 전쟁을 해서 남의 땅을 빼앗는다는 겁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땅이 많이 있었지만, 하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개간을 해야하는데, 그렇게 해놓으면 무기를 들고 와서 그 땅을 빼앗는다는 말이죠.
몽골제국 !!
미국에 제일 잔인한 인디언 종족을 '코만도' 라고 하는데, 그들은 그냥 사냥하는 것이 그들의 역사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넓은 영토를 가지 나라가 어디입니까? 유럽에서는 헝가리까지, 그리고 남쪽으로는 인도를 다 차지하고, 그리고 스리랑카, 미얀바, 베트남을 다 차지하고, 태국은 조금 남겼는데, 그리고 중국을 다 차지하고, 한국까지도, 그리고 일본은 태풍 때문에 가지를 못했는데 말이죠.
그게 바로 '몽골제국' 이라는 겁니다. 여기 이란까지도 모두 점령했다는 말이죠. 이 몽골은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전사라는 겁니다. 그러니 말을 타고 다니면서 닥치는 것은 다 싹쓸이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로마도 마찬가지인데, 영국의 켈트족이라고 해서,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까지 말이죠. 물론 거기에는 바이킹도 섞여 있는데, 이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르는데, 완전히 해적들이라는 겁니다. 로마도 처음에는 어떻게 하지를 못하다가 나중에 다 점령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짐승과 말씀 !!
그러니 그야말로 망나니들인데, 이들을 잠재웠던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문자'였다는 겁니다. 글자가 있는 곳에 말씀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기독교가 들어왔다는 말이죠. 성경말씀으로 그들이 짐승에서 인간 비슷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아직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말이죠.
옛날 고대에는 이렇게 날뛰는 인간들이 있고, 즉 남들을 죽이는 재미로 사는 인간들이 있고, 그리고 힘이 없어서 농사나 짓는 자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항상 계급화가 되어있었는데, 그래서 힘이 있는 자가 없는 자의 것까지도 모두 다 가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존재가 어떻고, 사유재산이 어떻고 하는 것은 최근에 일어난 일이고, 옛날에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약육강식'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진화론이 먹혀든다는 겁니다. 힘이 있는 놈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는다는 말이죠.
이런 자들이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데, 그러니 '인간답게' 라는 것은 잘못된 말이고, "어떤 경우에 인간인가?" 라는 것을 규정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면 어떤 경우에만 인간이냐는 말이죠.
인간답게 살아야지 !!
그것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경우인데, 그 말씀을 '약속'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이 들어올 때만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말하는 것인데, 즉 "인간이니 인간답게 살아야지" 라고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인간은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는데 말이죠. 사유재산도 없이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데, 그러니 자기의 사유재산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협작, 혹은 협력해서 전쟁에서 나서게 될 때, 비로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게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스스로는 인간답지 못하지만 남의 것을 빼앗게 될 때만 인간다운 것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인간다운 겁니까? 인간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마답다는 말이죠. 그것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남의 것을 빼앗지 아니하면 사람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그렇다는 말이죠.
얼굴에 미소를 띤다는 것은 가진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래도 좀 산다는 겁니다. 그렇게 좀 사는 것이 인간다운 것인데,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야 인간인데, 그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 번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이죠.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말씀이 없다는 겁니다. 말씀이 없으면 흙이지 인간이 아닌데, 그러니 인간에게 기대를 걸면 안 된다는 말이죠. 믿지 않는 자라도 같이 잘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괴물과 인간이 어떻게 사고가 같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괴물들의 올림픽 !!
KBS에 아침 8시에 '인간극장' 이라는 프로가 있는데, 그야말로 괴물들의 전시장이라는 겁니다. 물론 다른 프로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요즘 강원도 평창에서 동계 올림픽을 한다고 난리인데, 전부가 다 괴물들이라는 겁니다. 썰매를 타는 괴물들,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괴물들, 쇼트트랙을 하는 괴물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런 인간들을 사용하시는데, 그렇다면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이라고 하면, 이런 인간들을, 아니 괴물들을 어떻게 활용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이런 인간들을 나타난 것으로 활용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나타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죠. 아까 이것을 "수상하다. 문제가 있다. 어둡다" 라고 했는데, 즉 나타난 것은 부정적이라는 겁니다.
접시를 깨트리는 하나님 !!
그러면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나타난 것을 뚫어야 한다는 말이죠. 접시에 음식을 담을 때 사람들은 그 접시가 단단하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담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단단한 존재에 음식을 담게 되면, 그것이 곧 인생이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존재가 일해서 소유를 가지게 되면 그게 곧 인간이다" 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엇을 깨어버립니까? 우리가 단단하다고 여기는 접시를 그만 깨어버리는데,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나타난 것을 접시로 보고, 그런데 그 나타난 것은 나타난 것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 있는, 즉 나타나지 않은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있는데, 그러니 수상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뚫고 들어오게 되면, 접시가 그만 깨어진다는 겁니다. 김국환도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접시를 깨자' 라는 노래를 불렀는데(ㅋㅋ), 그렇게 접시를 깨는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면, 그러면 너희에게 영생이 있으리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러니 '나' 라는 것은 나타난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수상하다는 겁니다. 뭔가 가로막고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진짜 생명을가로막고 있는 모습으로 나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 라는 접시가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아벨이 되어라 !!
기도할 때 주님의 뜻대로 하라고 하는데, 물론 말은 맞지만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모호하다는 겁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깨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오늘 교재 81페이지에서는 우리가 아벨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죠. 즉 우리가 허무하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 허무한 것이 바로 진리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제일 마지막에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까, 예수님이 체포되어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 두 명이 예루살렘 자체를 떠나고 마는데, 그래서 엠마오로 내려간다는 겁니다. 굉장히 실망스럽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여기서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허무를 느낀다는 겁니다.
(눅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허무를 느껴라 !!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 인생에 허무를 집어넣으신다는 말이죠. 그동안 우리가 허무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남들과 대결한다고 허무하지 않았는데, 특히 이런 허무를 연예인들과 스포츠 스타들이 많이 느끼는데 말이죠. 그들이 젊었을 때는 잘 나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됩니까? 특히 스포츠 스타들은 이제 올림픽에도 나갈 수가 없는데, 연예인들은 얼굴에 주사라도 맞고 나올 수 있지만 말이죠. 그러면서 "나도 왕년에 잘 나갔는데" 라고 하는데, 그것은 상대적으로 이제는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동안 경쟁을 하다가, 이제는 그 경쟁에서 밀리니 허무를 느낀다는 말이죠.
그와 마찬가지로 성도도 이 세상을 살면서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러나 인생을 살면 살아갈수록 세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져서 몸도 내려앉는다는 겁니다. 직장에서도 정년퇴직을 하고, 이제는 자기를 사용해줄 곳이 없다는 말이죠. '존재+소유'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있는 소유마저도 갉아먹는 쥐새끼처럼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허무를 느끼게 되는데, 접시가 달아서 색깔이 변하고 금이 가고 해서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죠. 노인들이 사는 집에 가면 색깔이 다 우중충한데, 그리고 제대로 정리된 것도 없고, 대충하고는 그만 미루어놓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있는 공간만 확보되면 되는데, 그리고 굳이 치워도 올 손님도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접시라도 누군가가 건드리게 되면 발광을 하는데, 즉 아직은 깨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비록 색깔은 다 낡았지만 말이죠. 이렇게 되면 더욱 더 골치가 아픈데, 그래서 "내가 늙었다고 해서 어디 무시하나?"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ㅋㅋ).
그렇게 깨어지지 않으려고 나타난 것을 긍정으로 바꾸려고 우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 라고 하는 접시에 역사를 담아서, 즉 "내가 왕년에 잘나갔다" 라고 하면서 인간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데,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전혀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수상하고 문제가 있고 어둡다는 말이죠.
약속의 운반체 !!
그러니 여기에 말씀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 말씀이 들어가는 방법이 어떠한고 하니, 나타난 것이 가인인데, 아벨은 가인이 없으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가인이 첫째 아들이고 아벨은 둘째인데, 둘 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담+하와'는 약속의 운반체, 혹은 말씀의 운반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해변에 이렇게 모래가 있는데 여기에 파도가 몰려온다는 말이죠. 아담과 하와가 이렇게 있는데, 그러면 여기 모래사장에 파도가 왔다가 물러가게 되면, 그들이 새겼던 글자는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이게 허무라는 말이죠. 그 다음에는 가인과 아벨의 차례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왔다가 지나가면 그들은 그만 사라지고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있다고 여기는 것, 즉 나타난 것은 주님의 뜻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모두 실려가고, 그 다음에 또 새롭게 실려온 것에 의해서 이름이 새겨져있게 되고, 그러면 또 다시 파도에 실려가서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우리를 소멸시키는 파도와 같은 것인데, 왔다가 실려가고, 왔다가 실려가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유명인사들이 죽고 나면 신문에 조그마하게 나는데, 연예인들은 좀 크게 나지만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될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 있다는 겁니다. 파도가 오게 되면 쓸려서 간다는 겁니다. 나훈아가 요즘 유명하지만, 몇 년 뒤에는 죽었다고 하면서 신문에 날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해변가에 인간들이 모여있는 것과도 같은데, 그런데 그 밀려오는 파도가 어떤 취지에서 밀려오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파도가 밀려와서 늙은 노인네들을 쓸고 가면, 남은 젊은 사람들은 자기 세상이라고 우기고 있는데, 하지만 그것 자체가 다 허무한 것이란 말이죠.
영원한 아벨의 세계 !!
그러면 가인과 허무에 대해서 다시 그림으로 그려보겠는데, 첫 번째로 가인이 있고 두 번째가 아벨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가인은 무엇을 몰랐는고 하니, 가인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아벨은 파도와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존재가 아닌데, 이 전체 위에 가인이라는 한시적인 존재들이 떠있다는 말이죠. 즉 바다에 떠있는 작은 나무 조각과 같다는 겁니다. 그게 인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가인의 세계는 소멸되는 세계가 아닌 영원한 세계라는 겁니다. 그 영원한 세계가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인생사를 싹싹 쓸어버린다는 말이죠. 그것은 약속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보이는데, 하지만 가인의 눈으로 보게 되면, "아벨은 죽었고 나는 살았네. 그러면 되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영원하다고 보는데, 하지만 그런 발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가인의 시선이 아니라 아벨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면, "죽어도 살아도 아벨의 세계는 영원한 세계다" 라는 것인데, 이 아벨의 세계가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이게 교재 81페이지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 아벨을 남기고 그 노선을 따라서 예수님이 오시게 되어있습니다. 아담은 흙이 되지요. 하지만 그 허무를 하나님은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모아서 천국에 이르는 방법으로 사용했습니다.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여기에 보면 '의인 아벨의 피' 라고 되어있는데, 그냥 아벨이 아니라 '의인 아벨'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아벨 쪽에서 밀어닥친 파도가, 소위 나타났다고 여기는, 즉 자기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는 원동력이, 그게 아벨의 세계에서 온다는 것이죠. 그 아벨의 이름이 '허무' 인데, 가인은 '얻었다' 라는 것이고 말이죠. 그 허무의 세계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이긴다는 겁니다.
신앙인들의 특이성 !!
그것이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오는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신앙인들은 나타난 세계의 특이성으로,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매우 특이하다는 겁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래서 노아의 경우에는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방주를 짓는다든지, 그리고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자기 아들을 재물로 바친다는 것이죠. 자기 집에서 키우던 양을 바쳐도 되는데 말이죠. 그런 자기 아들을 잡을 때, 만약에 이런 광경을 옆집에서 보았다고 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것이 신앙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신앙은 아벨의 세계, 즉 허무의 세계와 연줄이 닿은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영원한 세계와 끊어진 것이 가인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헛된 세계인데, 아까 이야기한 조폭의 세계라는 말이죠.
보이지 않는 허무의 세계와 끈이 그만 끊어졌으니, 결국 산다는 것은 남을 등쳐먹는 것인데, 그리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고 말이죠. 이것에만 신경을 쓰면서 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겁니다. "너는 얼마나 가졌나? 나는 얼마를 가졌다" 라고 하면서, 온통 사고방식이 그렇다는 말이죠. "나는 너에게 이겼다" 라고 하면서, 그게 바로 허무의 세계와 단절된 이 세상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가인에서 아벨로 넘어갈 수 있는가?
지금부터는 조금 어려운 것을 하겠는데, 첫 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어떻게 가인에서 아벨로 넘어갈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고민할 문제가 아닌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고민을 허용하신다는 겁니다. 아벨은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없는데, 그냥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뿐이라는 말이죠. 아벨은 "하나님,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갑니까?" 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아벨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천국에 갈 걱정을 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천국의 사람으로 사용이 되어질 때 천국에 가는 것이지, 천국에 가지 위해서 이런 저런 사도를 하는 사람은, 그것은 마치 가인이 천국을 노리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이 사회에서는 구원할 수 없는데, 그래서 구원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더 이상 자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사용을 합니까? 주님께서 모두 알아서 다루어 주신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아버지와 아이가 등산을 하는데, 위험한 곳에 가게 되면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아준다는 겁니다. 그런 경우에 아이는 겁이 나서 손을 놓지 못하는데, 그런데 아버지는 뭐라고 합니까? 손을 놓으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이 제대로 느껴지고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는 자기가 살아온 버릇이 아버지를 붙드는 것인데, 하지만 아버지는 아이의 손을 강제로 놓게 만든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이는 "으악, 사람 살려!" 라고 하면서 비명을 지르는데, 사람도 아니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때 무엇이 보입니까? 아버지가 자기 손을 꽉 잡고 있다는 것이 비로소 보인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 게 전혀 아닌데, 그런 것은 치매에 걸리면 끝이라는 겁니다. "나는 믿는다. 오후 2시에도 믿고 4시에도 믿는다" 라고 하다가 그만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한 것이 전혀 소용이 없는데, 그것으로 그냥 끝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뭔가 일을 해야 자기 것이 된다는 것이 그만 버릇이 되다가보니, 하나님도 붙들고 예수님도 붙들고 성령님도 붙든다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붙들고 부탁하고 한다는 말이죠. 그 부탁을 다른 말로 기도라고 하는데, 그렇게 떼를 쓴다는 겁니다. 하루에 커피 한 잔만 먹고 살아도 그 커피를 누가 준 것입니까? 주님이 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벨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아벨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주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해서 제사를 드렸고, 제물을 분리하라고 해서 분리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주체가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말이죠.
그리고 가인은 주님께서 죽으라고 해서 죽었는데,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는 것도 전혀 자기 책임이 아닌데, 자기가 행동을 올바로 하지 못해서 하늘의 저주를 받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아벨은 결코 하늘의 천벌을 받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 천벌은 누가 받습니까? 그것은 가인이 받게 된다는 겁니다.
손을 놓아도 괜찮습니다 !!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전도서의 주제가 허무인데, 그게 기쁜 소식이란 겁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 것이 복음이고, 그것을 전하는 것이 전도라는 말이죠.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손을 놓으세요. 놓아도 괜찮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십일조를 하다가 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그렇게 목사들에게 하도 협박과 공갈을 당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정말 그러한지 십일조를 스톱해보라는 말이죠. 과연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그만 하늘로 날아가는지를 살펴보라는 겁니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면 그 자체가 저주인데, 기도해서 응답이 없어야 그게 축복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기도해서 응답을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협박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보고 "너, 오늘 기도를 했어? 안 했어? 안 했다고? 너는 오늘 죽었어. 벌을 받을 거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자기에게 협박을 가한다는 겁니다.
가인이 아벨로 넘어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데,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면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천국에 가야하는데" 라고 나오는데 말이죠. 그러면 "걱정 말아요, 그대여!" 라고 할 수 있는데(ㅋㅋ), 우리에게는 친절한 하나님의 종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누구인고 하니, 바로 가인이 있다는 말이죠. 그 가인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준다는 것이죠. 참으로 고마운 불신자들인데, 그러니 절에 다니는 사람들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고마운 재벌들, 고마운 속물들, 그야말로 자기 자랑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들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다준다는 겁니다.
여기서 시편 119편을 보겠는데, 90절과 91절입니다.
(시 119:90)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시 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
여기 90절에서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라고 하는 것은, 주의 성실하심이 대대로 땅 위에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땅을 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91절에서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라고 하면서,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라고 하는데, 즉 만물은 주님의 종이라는 겁니다.
가인이든 아벨이든 태양이든 구름이든 간에, 모든 만물이 다 주님의 종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 어떤 것도 주님의 계획에 어긋나게 움직이는 법이 없는데, 북한의 김정은도 마찬가지란 겁니다. 얼마 전에 죽었던 그의 형인 김정남도 그렇고, 그렇게 태어나고 죽고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인간은 가상존재 !!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데, 이렇게 모든 것이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알려고 하면 우리가 어느 영역에 들어가야 하는고 하니, 죽음이 본래 우리의 바탕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겁니다. 죽은 것이 실제이고 살아있는 것은 가상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가상적인 존재라는 말이죠. 있다가도 없어지는 존재라는 겁니다.
이 가상존재를 창세기 4장에서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범죄의 가장 원초적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만물을 통해서 일으키시는데, 그게 바로 '살인' 이라는 말이죠. 형이 동생을 죽이는데, 그 동생의 이름이 무엇인고 하니, 그가 아벨인데, 그것을 우리말로 하면 허무라는 겁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것이 과연 허무할 수 있습니까? 살아있는 것은 허무하지 않는데, 그런데 살아있다는 것이 진짜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게 가상이란 것을 알려고 하면, 그러면 어떤 사건이 뒷받침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건이 말이죠.
나는 건강하다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나는 건강하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는 건강하고 싶다" 라는 것과도 같은 의미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죠. 그런데 명절에 시댁에서 일을 너무 많이 했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권사님은 그런 군번은 지났지 싶은데, 그래도 자식들이 찾아오면 청소도 해야하고,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평소에는 건강한데, 그런데 명절과 같이 무엇인가가 밀려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강력한 반말과 저항이 생기는데, 자기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게 건강도 지키고 체면도 지키고, 그렇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피곤이 누적되는데, 제 아무리 복합 비타민을 먹고 난리를 쳐도 해도 안 된다는 말이죠. 일을 많이 하면 반드시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겁니다. 아벨은 건강한데, 허무하지가 않는데, 그런데 누가 도와줍니까? 그 이름에 합당하게, 고맙게도 가인이 있다는 말이죠.
점성이 큰 액체 !!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이 움직여 주어야, 그것을 점성이 큰 액체라고 하는데 말이죠. 액체 속에 같이 놓여있을 때, 뭔가 흔들어 주어야 비로소, 즉 자기 혼자 있을 때와, 그리고 자기 주변이 마주치게 될 때, 언제 자기의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까? 뭔가가 마주치고 부딪치게 될 때 일어난다는 겁니다.
혼자 집에서 복음을 듣고 "나는 이제 복음을 안다" 라고 하면서 폼을 잡고 있다가 드디어 교회에 나왔는데, 그런데 교회생활을 하면서 자기 주위에 가인과 같은 인간들에게 의해서 포위가 되어서, 마치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듯이 빨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도 그 누구 못지 않은 가인이었음이 들통나게 된다는 말이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그러니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데,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듯이 말이죠. 자기는 죽고, 정작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과 관련이 된, 새롭게 생성이 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안에서 누가 산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사신다는 것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시 말해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라는 겁니다. 제가 어렵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대상화가 되면 그만 가짜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진짜 예수님은 그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 속에 있는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해야지 예수님을 자랑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자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고전 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게 예수님이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수님이 사건을 유발시키시는데, 그 사건은 바깥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만물은 주님의 종이니 말이죠. 예수님이 뜨지 아나하면 인간은 각자 각자의 존재인데, 누구의 종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다발, 꽃다발, 먹다발 !!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사건을 유발시키게 되면 이들은 한 묶음이 된다는 말이죠. 꽃을 모아놓으면 꽃다발인데,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을 모아놓은 것을 먹다발이라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그러니 모든 것이 주님의 종이 되려고 한다면, '너'와 '나' 사이에 사건이 주입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벨이 되어야 하는데, 즉 허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나타난 것은 허무한데, 가상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서 "나를 건드리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자기가 엄연히 여기에 있는데, 그러니 그것이 왜 가상이냐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죽음으로 이끌고 가시는데, 그래서 아담의 이름은 '흙' 이라는 말이죠. 허무하다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
이제 정리를 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천국에 가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와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끼리 부딪치게 만들고 만나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리산에서 혼자 도를 닦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죠. 사실 혼자서 도를 닦을 수도 없는데 말이죠.
왜냐하면 산에서 약초를 캐서 근처의 5일장에서 팔려고 하면, 함안 근처에 가면 마천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말이죠. 거기 5일장에서 지난번에는 10만원을 받았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5만원밖에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산에서 도를 닦았다고 하면, 10만원이든 5만원이든 감사하게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따지는데, "지난번에는 10만원인데 이번에는 왜 5만원입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면 "요즘은 중국산이 많이 들어와서 시세가 별로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기도 깜짝 놀라게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잊으려고 지리산에 왔는데, 그런데 경제시세에 마구 휘둘리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장날이 되어서 산에서 내려왔으면 특별식으로 배를 채워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중국집에 들어갔는데, 지난번에는 3,000원을 하던 짜장면이 이번에는 4,000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원리에서 누가 빠져 나올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지리산보다 더 깊은 곳으로 가야하는데, 우리나라에 그런 곳에 있습니까? 강원도로 갈까요? 요즘 동계 올림픽을 한다고 난리인데, 그런 곳은 더 이상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되고 말았는데, 즉 돈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돈밖에 모르는 세상이 바로 가인의 세상인데, 왜냐하면 가상이면서도 아닌 척을 하기 때문에 말이죠.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을 누구를 만나는고 하니, 아벨을 만나기 이전에 누구를 만나는데, 우리가 보면 아벨밖에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여기 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라고 하는데, 지금 가인이고 아벨이고 간에 자기가 존재이기 때문에 가상이 아니라고, 즉 허무가 아니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기에 작용을 하셔서, 가인으로 하여금 열불이 나게 만든다는 겁니다. 가인은 평소에 동생 죽이는 것을 취미로 한 것이 아닌데, 그런 형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말이죠. 오늘 강의제목은 '열불' 인데, 아무튼 그렇게 열불이 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사람은 언제 화를 내는가?
장로님은 언제 화가 나던가요? 전도를 할 때 방해를 하면 화가 납니까? 이게 참 재미있는 것인데, "나는 가상 존재다. 나는 헛되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천만번을 외쳐도, 누가 건드리게 되면 그 순간 가상이라는 것은 다 날아가게 되고, "누구야? 나를 건드리는 놈이!" 라고 하게 되는데, 바로 그 '나' 라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열불이 나고 분노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나'를 직관적으로 보호하고 나설 때, 그때 열불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열불은 일종의 보호본능이라는 겁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아무리 마음을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고 해도, 밟으면 꿈틀하게 된다는 말이죠.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 순간 그만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아버지 장사를 지내고 나서 따르겠다고 하니,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아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는 제자를 밟으신 것인데, 즉 지렁이를 밟았고, 그리고 제자는 꿈틀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아라" 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수정해서 열불을 내지 않고 따를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그럴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정말 실망입니다 !!
그렇다면 제자들의 역할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실망하는 것인데, 그것도 예수님에게 말이죠. 예수님도 자기들처럼, 그리고 같이 계시는 분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만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떻게 나옵니까? "이제 손을 털고 집에 가자" 라고 하는데, 예수님에게 실망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부러 죽음으로 빠지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은 모두가 가상이다"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이 보시기에 제자들이 그렇게 지키려고 하고, 그리고 아등바등하는 살려고 모든 것들이 다 가상이고 가상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가상과 가상이 생존경쟁에서 서로 붙다가보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둘 다 똑같다는 말이죠. 어느 누구의 손을 들어줄 수가 없는데, 똑같은 놈들끼리 싸운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닌데, 성격이 좋다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둘 다 똑같은 강도인데, 그런데 한 쪽은 천국에 가고 또 다른 한 쪽은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손을 놓으라는 것인데, 물론 손을 놓는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닌데, 손을 잡던 놓던 똑같다는 말이죠. 다만 주님 쪽에서 붙잡아줄 때만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가상이 가상에게 !!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그런데 여기에 똑같은 족속인 가인족속이 그렇게도 협조적이라는 말이죠. 비협조적이 아니고 말이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것이 좋다고, 서로 친하게 지내면 참 좋은데, 그런데 여기에 돈이 관여하게 되면 틀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면 참 좋은데, 예를 들어서, 한 쪽은 집주인이고 다른 쪽은 세입자가 되어서 같이 산다는 말이죠. 그런데 세입자가 월세를 잘 내지 않는다고 하면, 그래서 집주인이 "집사님, 두 달치가 밀렸습니다" 라고 하면, 그쪽에서는 "같은 교인들끼리 그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하십니까? 같은 형제끼리 어디 떼먹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때는 말을 할 때 꼭 치면서 하는데 말이죠(ㅋㅋ).
그래서 집주인이 성경말씀을 찾아보는데, 그러면 "돈을 빌려주지 말고 아예 주어라" 라고 하고,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라는 말씀이 마구 나오는데, 그러니 성경에서는 그 어떤 것도 참고할 마음이 없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가상이기 때문에, 가상을 실제로 바꾸어주는, 그런 거짓말을 해주는 성경구절은 없다는 말이죠. 성경은 헛된 것을 헛되다고 하는 것밖에 없다는 겁니다.
돈만 아니면 서로가 참으로 친하게 잘 지낼 수 있는데, 그런데 그만 돈이 가운데 끼어서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 집사님이 나중에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까짓 것 얼마나 된다고, 나는 집사님이 그렇게 쫀쫀한 줄 몰랐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상대방을 완전히 인간 말종으로 만들고 마는데, 그것도 자기가 전도해온 사람에게 그렇게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죠(ㅋㅋ).
그래서 말씀이 어려운데, 실제로 인간관계에 있어서, "너는 가상이고 나는 진짜다" 라고 하니까 인간관계가 어렵게 되는데, 둘 다 가상인데 말이죠. 그런데 남들은 가상이고 자기는 진짜이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끼리라도 돈을 빌려주고 할 때는, 가상이 가상에게 빌려주었다고 여기면 되는데, 그러니 돈을 떼였다고 여기고서 빌려주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가상적인 존재에게 맞다는 말이죠. 그래서 결혼할 때도, 이혼을 했다고 여기고 결혼을 하시면 된다는 겁니다.
돈을 빌려주는 순간, 주님보다도 돈을 갚지 않을까 싶어서, 거기에 더 신경을 쓰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자아에 대한 강력한 방어본능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진짜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수시로 터져 나오는 것이, "내 것을 내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랴?"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이게 실패가 아니고 성공이라는 겁니다. 제일 큰 실패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신자라고 우기는 것인데, 그러니 성공이라는 것은 "나는 무엇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 그게 곧 성공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교회가 아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교회이고, "나는 신자가 아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신자라는 겁니다.
나는 죽음이다 !!
왜 그런고 하니, '나' 자체가 가상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아닙니다" 라는 것이 적절하다는 말이죠. '가상'은 '아님'과 서로 합치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구라고, 가짜고, 있다가도 없어질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진짜는 무엇입니까? "나는 죽음이다" 라고 하는 것, 그게 진짜라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죽음이다" 라고 하는 것, 이게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나는 죽는다" 라는 것을 증거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또 다시 살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나는 지금 죽어있다" 라고 하는 것, 이게 곧 부활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갈 생각을 하지 말고, 지금 일찍 죽음을 당겨서 천국에 가자는 겁니다. 그것이 제가 교인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인데 말이죠. 지금 천국에 가지를 못하면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 곧 죽음인데, 이 죽음은 자존심이 없다는 말이죠. 체면도 없고 위신도 없는데, 설령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유재산, 가족관계, 그런 것들도 다 인정해주지 않는데, 의료보험, 연금, 그런 것도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 의료보험도 되고, 연금도 받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이 주셨다는 겁니다. 죽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통보해주시기 위해서 그런 것을 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으로 연명한다는 겁니다. 한 달에 3,500정도로 겨우 연명한다는 말이죠(ㅋㅋ). 주말마다 골프를 치면서, 매달 해외여행을 하면서, 그렇게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연명하든 이건희가 연명하든 똑같이 연명하는 것이란 말이죠.
성령은 죽은 자에게서 !!
이 '연명' 이라는 것은 "나는 죽음이다" 라는 것인데, 그 죽음을 증거하라고 성령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성령은 죽은 자에게서 왔는데, 산 자에게서는 성령이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있는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낼 수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세례요한이 요한복음 1장에서 이것을 몰랐다는 겁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세례요한의 고민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이 분명히 어린양인데, 그런데 세례요한은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데, 관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몸 따로, 세례요한의 몸 따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연결고리가 없다는 겁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런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뭐라고 합니까? 그분이 성령세례를 주게 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입장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이죠. 어린양이 무엇입니까? 제단에 올라간 제물인데, 즉 죽은 자의 모습에서만 살아있는 성령이 나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세례요한은 살아있는데, 그러니 살아있는 자와 살아있는 자가 직접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것은 가상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셔야 성령이 나오신다는 겁니다. 지금 이야기가 좀 어려운가요?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죽어있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데, 세상적으로 볼 때 죽은 자와 함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서 '십자가 안'에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는 이 세상에 대해서 죽어있다는 겁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가상의 특징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 !!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가상인데, 그런데 이 가상의 특징은 율법에 매이지 않는데, 율법이 쏘는 것은 죄라는 말이죠. 이미 죽은 자에게 화살을 쏴봐야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은 순간 모든 율법에 저촉을 당하는 대상자가 되기 때문에, 간음을 했던 것도 자기이고, 살인을 했던 것도 자기라는 말이죠.
그러니 "도대체 이런 짓을, 이런 해꼬지를 누가 했습니까? 누구입니까?" 라고 하면, "바로 저입니다" 라고 하면서 손을 드는데, 즉 "십자가 안에서 모든 저주는 제가 받아야 합당합니다" 라는 것을 기쁘게 손을 들고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한국교회의 성공적인 목회방법은 협박인데, "그렇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목사들이 협박을 한다는 말이죠. 더 심한 목사는 거기에다가 "삼대가 작살난다" 라고 하는데, 자식까지 들먹이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교회에 모이게 했는데,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너는 가상이다" 라고 지적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가상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옹호해주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남들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기만 출세하면 된다고 하는 하나님을 기도해서 모시고 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불교의 연장선인데, 교회가 아니라 절간이라는 겁니다.
기존의 "제사를 지내면 삼대가 복을 받습니다" 라는 것을, 교회에서는 거기에 제사를 빼고 하나님을 집어넣었다는 말이죠. 시골교회에 가서 물어보라는 겁니다. "장로님은 교회에 왜 나오십니까?" 라고 하면, 복을 받기 위해서 나온다고 하는데, 물론 도시교회도 마찬가지만 말이죠.
그리고 그 복을 누가 받습니까? 자기가 받는데, 옆집이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교회에 다니니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이기주의인지 모르는데, 그러면 그 복이 무엇입니까? 자기 손자가 카이스트에 들어간, 그런 것을 복이라고 여기고는, 그런 것을 다 끄집어서 자랑한다는 겁니다.
여름에는 똥파리, 겨울에는 찬바람 !!
요즘 홈쇼핑을 많이 이용하는데, 그리고 그게 기존의 시장보다도 거기가 값이 싼 것은 맞는데, 그래서 홈쇼핑을 이용하면 개인적으로 보면 선한 일을 한 것인데, 가정살림에 돈을 절약해서 도움을 주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재래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줌마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아도 손님이 없는데, 그렇게 되면 완전히 망한다는 겁니다. 여름에는 똥파리, 겨울에는 찬바람,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점성이 있는 액체인데, 즉 서로 얽히고 얽혀 있다는 겁니다. 한 쪽이 잘 되면 다른 쪽은 망한다는 것이죠. 우리동네에 빵집이 딱 하나 살아남았는데, 파리바케트는 말고, 그것은 조폭이고 말이죠. 가게를 차리면 30퍼센트가 1년 안에 문을 닫는다고 하는데, 그러니 3년이 지나면 다들 살아남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범인입니까? 알뜰하게 살아가는 착한 가정주부들이 범인이고, 맛이 좋다고 하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우리가 바로 범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민센터 앞에 있는 황태집은 장사가 안 되는데, 새로 생긴 냉면집으로 손님을 다 빼앗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무엇이 착합니까? 남들을 망하게 해놓고 착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남의 집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해꼬지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착실한 자기의 행동이 남을 망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얽히고 얽혀 있다는 말이죠. 모든 것이 가상인데, 하지만 가상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으니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그러니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성령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다치게(?) 하지 않는데, 우리는 가상이란 말이죠. 물론 전에도 똑같은 가상인데, 그때는 가인이 아벨을 공격하도록 허락을 했다는 겁니다. 창세기 4장 7절에 보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준비상태로 있다가, 죄가 확 덮친다는 겁니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과정 자체가 중요해요 !!
그렇게 덮치면 가만히 있는 아벨은 어떻게 됩니까? 가인의 배후에서 무엇이 작용하는고 하니, 죄가 덮치는데, 그렇게 죄가 가인을 밀면 가인은 아벨을 밀고, 그러면 아벨은 죽게 되는데, 그러면 허무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벨은 자기 힘으로는 찾을 수 없는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런 행운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벨이 구원을 받았는가?"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런 과정 자체를 굉장히 소중하게 뽑아내시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흘러가는가?" 라는 것을, 그렇게 해서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 그것을 이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하심으로서, 그것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꼼지락 꼼지락 !!
아까 시편 119편에서 "만물은 주의 종이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이 세상 만물이 종노릇을 하게 되면, 그러면 종노릇을 하게 하는 주인인 주님의 주되심이 나타난 변화를 통해서 결국 누구에게 돌아간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내가 만물의 주인이잖아"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꼼지락 꼼지락,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일에 관여하신다는 겁니다.
(시 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그게 바로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치게 만들고, 그것은 가인이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인 배후에 있던 보이지 않는 힘이, 즉 점성이 있는 액체가 치게 만드는데, 그러면 이쪽이 저쪽을 치고, 저쪽은 또 이쪽을 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무엇인고 하니, "아하, 나는 죽음이구나" 라는 것을, 즉 "처음부터 나는 가상이고 허무고, 내가 죽는 것이 내가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 이전까지는,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고 죄가 많아서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원래 가야되는 곳이라는 것을, 그것을 미리 당겨서 가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죽음 이후의 세계 !!
이제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는고 하니, 이 죽음의 두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죽기는 다 죽는데, 그런데 한 쪽은 천국이고 다른 한 쪽은 지옥이라는 말이죠. 즉 죽음의 세계를 두 동강을 내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겁니다. 이 죽음의 세계가 영적세계이고 살아있는 세계가 육적세계라는 말이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까, 그러니 살아있는 인간이 아무리 해도 죽기 이전까지는 그 영적인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의 세계에서 누가 오는고 하니까, 성령이 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살아있어도 이미 죽음의 요소가 포함이 되면, 살아있어도 죽음 이후의 결정이 난 세계의 일원으로서, 그것을 천국의 종, 의의 종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을 구분할 때, 그 기준이 어디서 마련이 되는고 하니, 이 세상에서 마련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철저히 주의 종인데, 이 세상에서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 중에서는 천국의 일이 있고, 또한 지옥의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는데, 그러니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그냥 모든 것은 인간의 일로서 통일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아하, 저것은 천국을 보여주는 일이고, 저것은 지옥을 보여주는 일이구나" 라고, 그렇게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예수님에서 복음서에서 말씀을 하실 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시면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그 말씀을 제자들이 알아듣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왜냐하면 예수님은 천국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래서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즉 죽음을 맛보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천국의 기준과 지옥의 기준을 예수님은 한꺼번에 묶어서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바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라는 것인데 말이죠.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리고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여기에 어린아이와 천국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려고 하면 어린아이가 된 상태에서 가야하는데,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때, 거기에 어린아이가 있었습니까? 없었는데, 그렇게 어린아이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그러면 천국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에 갈 사람은 이 땅에서 어린아이의 있음을, 그것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그러니까 나중 된 자는 어린아이가 되고, 반면에 먼저 된 자는 천국의 반대인 지옥에 갈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런 이야기가 성령을 받은 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주어진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너의 손을 놓아라" 라는 것인데, 주님이 그렇게 되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무엇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어린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그냥 주는 대로 받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우리는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말이죠. 자기 방어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십니까? 가인과 똑같은 패들을 보내서,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시는 축복을 주신다는 말이죠. 매사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려고 하면 누구를 만나야 하는데, 그래서 부부가 되었다는 말이죠(ㅋㅋ). 그래서 부부사이를 '웬수' 라고 하는데, 그렇게 웬수가 되어야 자기가 허무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을 자인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는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아아도 다 봐주면서, "당신은 드라마나 보고 놀러 다니면 된다" 라고 하는 남편이 있을 때, 그렇다면 아내가 "주여, 나 같은 여자는 그냥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인생이 너무나 허무합니다" 라는, 그런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제가 이런 호강을 다 하다니, 그래도 나름 괜찮은 인생입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게 어린아이가 아니라 먼저 된 자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아니면, 나중 된 자가 아니면 천국에 갈 수 없는데, 그것을 성령이 오셔서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마지막 결론으로, 예수님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어린아이로 살았고, 그야말로 제일 낙후된, 죽기까지 십자가에 복종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의 그 십자가 형벌을 스스로 받으신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 천국에 올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아이가 되어라" 라고 하신 것은, 그 누구도 어린아이가 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어린아이가 되어서,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일어난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가인처럼 지옥에 가야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이 땅에서 마구 당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더러워서 이 세상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라고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될 때, 그리고 "내가 한 평생을 살면서도 정말로 나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라고 하게 될 때, 갑자기 어린아이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어린아이라는 말이죠.
그동안 자기가 붙들고 있던 그 사유재산, 바로 그것을 붙들고 있는 손을 놓으라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손으로 놓으면 죽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죽으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너무 오래 살지 말고, 100살 정도만 살고 손을 놓으라는 말이죠(ㅋㅋ).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라면 우리는 매일같이 마귀에게 협박과 공갈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너는 이번에 명절 보너스를 얼마나 받았노?"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게 매일같이 남들과 경쟁을 하게 만들고 비교를 하게 만드는데, 그런 것을 이제는 좀 지겨워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 이혼해 !!
그런데 그게 과연 경쟁이 되겠습니까? 둘 다 가상적인 존재인데 말이죠. 그렇게 가상들끼리 그렇게 협박과 공갈을 받을 일이 있느냐는 말이죠. "당신이 이렇게 밥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그만 이혼을 하자" 라고 하면, "그래, 얼마든지 이혼하자"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제는 그런 배짱이 있어야지, 그것이 아니라 "여보,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밥도 잘할게"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래, 그만 이혼해. 하지만 연금은 반으로 나누는 거야" 라고, 그렇게 좀 나오라는 겁니다.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매달리고 하느냐는 것이죠. 그렇게 가인에게 당해놓고 말이죠.
우리는 가상존재인데, 그러니 파도가 치면 우리 이름 석자는 지워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쓸려서 가면, 그 다음의 대기조가 나와서 또 쓸려서 가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전도서에서 말씀하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살아가면서 만물이 다 주님의 종이고, 주님께서 친히 다루신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그러니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다 우리의 주제파악을 위해서 일어난 일인 줄 알고, 언제나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2,27 오전 11시에 마침. 마누라의 협박과 공갈에 넘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