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중층결정 1803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3. 18. 17:26
2018-03-18 16:07:45조회 : 1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0 - 중층결정이름 : 구득영 (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0 - 중층결정

08,03,1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언약이 먼저 !!

오늘은 교재 83페이지의 '언약의 결론'을 하겠는데, 우리 인간이 있고 난 뒤에 언약이 있는 게 아니라, 언약이 먼저 있었는데, 그때 인간은 없었다는 겁니다. 언약이 우리 인간보다도 먼저 있다는 것이 신기한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운명은 우리보다도 먼저 있는 것에 의해서 결정이 되기 때문에 말이죠. 즉 언약에 의해서 인간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있기 이전에 이미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는 야곱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야곱이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이 있다고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인간이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다는 말이죠.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그 말씀은 인간보다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기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니가 최고다 !!

자기가 있다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고, 그 다음에 자식이고, 그렇다는 겁니다. 태초에 자기가 절대자인 것처럼 여기는, 그러한 이상한 버릇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물론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즉 "니가 최고다!" 라는 겁니다. 자기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는 것인데, 물론 거짓말이란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면, 야곱이 있기 이전에 언약이 먼저 있는데, 그리고 그 언약 안에서 언약을 이루는 주인공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말씀이고 예수님이고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야곱이 있기 이전에 먼저 야곱을 사랑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자기 사랑을 표현해내기 위해서 야곱이라는 인물을 나중에 만든다는 겁니다. 

관계성과 신앙 !! 

물론 우리도 같은 입장인데, 그러니 성도의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있기 이전에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차원에서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까?" 라고 하는 그 연결성, 즉 관계성,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 라는 것이 있기 이전에 먼저 계신 분이 어떻게 '나'와 연결이 되어있는지,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그 점이 왜 중요한고 하니, 나중에 생긴 자기가 어떻게 행동을 하더라도 그 연결성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운명은 바뀌지 않는데, 자기보다 먼저 있는 그 언약의 결정을 후차적인 자기가 어떻게 바꾸고 할 재주가 없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그 어떤 나쁜 짓을 하더라도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나쁜 짓을 하는 '나' 라는 것이 나중에 등장하기 때문인데, 즉 결과가 원인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말이죠. 

인간은 '없음'이 !!

방금 이야기한 것이 '존재' 라는 것인데, "인간이 존재한다. 혹은 있다" 라고 했을 때는 인간만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있다" 라고 할 때는 인간은 '없음'이 된다는 말이죠. 이 언약의 있음의 파급효과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근원적으로 있는 자가 아니라 없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야곱이 없을 때 언약의 있음이 그 없음을 대신하게 된다는 말이죠. 자꾸만 자기가 있다고 우기면 안 되는데, 우리는 소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있다고 하는 것이 없어지고, 그게 안약 안에서, 즉 예수 안에서 자기 백성을 예정하사 택하셨다는 것이죠. 그게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러니 그 있음은 예수님에게만 있음이지 우리에게는 없음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없어져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말이죠. 말씀이 먼저 있고, 그 태어난 모든 것은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말이죠. 

왜 인생이 비극적인가?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그 출발을 '나'로부터 하려고 하는데, 즉 "내가 여기에 있다" 라고 하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철학이고 과학이라는 겁니다. 어제 오후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있다는 것에서 자꾸만 시작을 하려고 하니, 거기에서 "나는 비극적인 삶을 사면 안 된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래서 벌벌 떨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비극인지 아닌지, 그것을 누가 결정을 합니까? 왜 없음이 비극을 이야기하느냐는 겁니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간에 그것은 언약이 결정할 문제인데, 예수님이 말이죠. 그런데 왜 자기가 그런 것을 걱정하면서 "내 인생은 망했다" 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내 인생은 성공했다" 라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있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부질없는 사탄의 세계와 그만 한 통속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가 있다" 라는 것을 없애버리고, "주님이 계신다" 라는 것으로 시작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있음을 없음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곧 '죽음' 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너희는 이미 죽었고, 너희는 다른 곳에 가 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러니 그게 이쪽세계에서 보니 감추어진 것인데, 그래서 오늘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 세상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위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하, 그렇구나" 라고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니 있는 것을 왜 없다고 하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면 됩니까? "너는 이게 있다고 하는데, 그게 과연 영원한가? 니가 오늘밤에 죽으면 낙원에 갈 수 있는가?" 라고 받아치면 되는데, 그러면 그만 입이 쑥 들어가고 만다는 겁니다. 있다고 하는 그 인간도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처음부터 우리는 없어져야 하는데,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모든 감정들, 즉 슬픔과 기쁨, 분노 등등, 그 모든 것들이 다같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사랑과 미움과 질투, 그런 것들이 자기가 없어지는 순간에 같이 다 없어지는데, 그러면 그게 아까운가요?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왜냐하면 언약만 영원하면 된다는 겁니다. 

산 자의 하나님 !!

그 언약의 나라가 아들의 나라이고 곧 천국인데, 지금 12제자들이 없는데, 그들이 어디에 가있습니까? 엘리야와 모세는 어디에 가있습니까? 천국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이라고 하시면서, 죽어야 될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야 하는, 즉 '산 자의 하나님' 이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그러니 다같이 살아있는 자들의 모임이지, 이 땅에 있는 없어질 인간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인간들은 지옥에 가서 살아있는데,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살아있다고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저주라고 하고, 죽음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주받은 상태를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지금 우리의 피부가 이렇게 쭈글쭈글한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라는 겁니다. 

존재와 인식 !!

방금 이야기한 것을 존재, 즉 '있음'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이 있음도 어려운데, 그런데 그 다음이 더 어렵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라고 하는 문제인데, 그것을 두고 '인식'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안다' 라는 문제에 들어가게 되면 무지무지하게 복잡해진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라고 하면, 그것은 언약이 알게 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언약이 알게 하신다" 라고 하게 되면 이게 상상도 못할 어려운 문제가 되고 마는데, 그것이 바로 '중층결정' 이라는 겁니다. 

알튀세르의 '중층결정' !! 

무슨 말인고 하니, 결정이 되는데 중복되는 층이 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원인이 두 개 이상이라는 겁니다. 알튀세르가 프로이트에게 힌트를 얻어서 이런 주장을 했는데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방금 존재 이야기를 했을 때는 매우 깔끔했는데, 즉 "우리는 없고 언약은 영원하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은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야곱을 먼저 생각하신 것은, 그 야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을 위해서 야곱이 태어났고, 그래서 야곱은 어떤 짓을 해도 사랑을 받기로 작정이 되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야곱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을 위해서 그렇게 된 것인데, 그래서 야곱은 그 어떤 짓을 해도 사랑을 받기로 작정이 되었고, 반면에 에서는 미움을 받기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깔끔한데, 그리고 그런 권리와 권한은 하나님에게 충분히 있다는 말이죠. 

피조물이 거기에 대해서 토를 달면 안 되는데, 즉 만들어진 것이 만든 분에게 대항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투항을 해야지 말이죠. "저는 졌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놓아야 하는데, 자기 의미를 자기가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TV를 보기가 무서워요 !!

시인들, 작가들, 영화 감독들, 전부가 공통점이 있는데, 근래에 들어서 보니 말이죠. 여자를 건드려서 그야말로 패가망신을 당하는데, 그런데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목사와 신부는 거기에 왜 끼어 들어서 같이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아마 요즘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목사들이 제법 많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이들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의 의미를 자기가 만들어내는데, 시나 소설을 쓴다든지, 아니면 영화를 만들어서, 그렇게 자기 의미를 자기가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은 기행, 즉 기이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상식적인 것을 돌파하려고 말이죠. 

김기덕 감독의 경우에는 저 예산으로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틈새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래서 그의 영화는 기이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계 영화제에 나가서 호평을 받았는데, 인간 이성을 넘어서는 인간욕망, 그런 성적욕망을 건드리는 영화들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런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여자를 건드렸을 수도 있는데, 시인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그렇게 예술로 돌파구를 찾는데, 이성의 상식으로 둘러 쌓인 그 답답함에서 말이죠. 

계속해서 반복되는 직장생활 !!

직장생활이 왜 힘이 듭니까? 그것은 일 자체가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 교사의 경우에도 어떻습니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천직이라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몸에서 나온 자식을 먹여 살려야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힘든 반복되는 일을 계속해서 한다는 겁니다. 여자 약사도 그렇고 말이죠. 그 좁은 공간에 갇혀서 자식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남자들의 경우에는, 조금만 일을 하고 나면 갑갑하다고 하면서 놀러 다닌다는 겁니다. 그리고 집안에 돈이 좀 있다 싶으면 회사를 조금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마는데, 그런 반복되고 뻔한 일을 하기에는 자기 청춘이 너무 아깝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 사업을 하는데, 그러면 하나를 계속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방을 하다가 그만 말아먹고 당구장을 하고, 그러다가는 다시 식당을 하고, 그래서 이제는 말아먹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는 겁니다. 장사가 안 되도 말아먹고 잘 되도 말아먹는다는 말이죠.

미국의 이상현 목사님이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까, "사람이 돈에 미치지 않으면 한 직장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장사를 오래하는 것은 돈에 미쳤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손님을 대하고 하는 것이 재미가 있는데, 그런데 1년이나 2년만 지나고 나면 하기 싫어서 환장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남자들은 "굶어 죽어도 더 이상 이런 짓은 하지 못한다" 라고 하면서 나오는데, 왜냐하면 남자에겐 자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즉 그냥 자기 즐거움밖에 모른다는 말이죠. 그것을 두고 '보헤미안 기질' 이라고 하는데, 그냥 떠돌아다닌다는 겁니다. 

물론 여자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놈의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부지런히 참고 참으면서 또 하게 되는데, "이제는 이 집 귀신이다" 라고 여기면서 말이죠. 하지만 인간이 상식적으로 살고 이성적으로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뭔가 돌파구가 없다고 하면 결코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두 가지 원인 !!

그렇다면 이 증층결정, 즉 어떻게 우리 인간이 천국을 알 수 있는고 하니, 언약은 이런 우리 인간의 존재에게 곧 바로 들어오지를 않는데, 그러면 어떻게 천국을 알게 된다는 겁니까?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원인을 제공하신다는 겁니다. 

첫 번째 원인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의 자기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결과를 낳는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의 원인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원인이란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이 원인이다" 라는 것이죠. 그러니 처음은 인간이 원인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원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 두 가지 원인을 가지고서 이 세상에 언약이 있음을 알리고자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이 원인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원인이라는 것,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서로가 상충이 되는데, 즉 서로가 반대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셨습니다" 라고 한다면,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주권사상'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주권사상은 모든 종교에 다 있다는 겁니다. 이슬람이나 힌두교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죠.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말이죠. 마치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것과도 비슷한 늬앙스를 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의 생각입니까? 마귀의 생각인데, 왜냐하면 그 원인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말이죠. 즉 되어진 일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우에는 원인이 두 개 이상인데, 그것이 바로 중층결정, 즉 중복이 되어서 결정이 된다는 말이죠. 

내가 원인이다 !!

그게 무엇인고 하니, 시작을 이렇게 하는데, 즉 "내가 원인이다" 라고 우리가 시작을 하면, 하나님이 여기에 개입을 하시는데,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시작한 결과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을 하시게 되면, "인간의 결론에 하나님이 상처를 받는다" 라고 하는, 그런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상처를 받는다 !!

우리 인간이 자기 성질대로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데, 그런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상처를 받는다는 말이죠. 즉 "너로 인해서 상처를 받는 분이 있는데, 그것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나오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무식해서 뭐라고 합니까?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뜻이겠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자기가 한 것이 원인이 되어서 천국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하겠다는 것인데, 즉 "모든 것은 내 하기 나름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결코 그런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23장 35절을 보겠는데, 누가 읽어보세요.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벨과 사가랴의 피 !!

아벨은 창세기 4장에서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인데, 아벨은 자기가 의도한 것이 전혀 없는데, 그런데도 아벨을 죽인 가인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가인이 하는 짓의 결과가 아벨의 죽음이라는 겁니다. 즉 가인이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 결과가 아벨의 죽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말이죠. 

아벨의 죽음과 비슷한 사례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 나오는 '사가랴' 라는 인물인데, 그는 요아스 왕 때 죽은 선지자라는 겁니다. 요아스는 사가랴의 아버지인 여호야다 덕분에 왕이 되었는데, 그런데도 왕이 되고 난 다음에 그의 아들인 사가랴를 그만 죽이고 말았다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스가랴' 라고 하는데 말이죠. 

(대하 24: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그렇게 해서 아벨과 사가랴의 피가 연결되는데, 바로 그 노선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이죠. 지금 인간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러면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막상 하늘의 징조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땅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땅을 보게 되면, "이것이 하늘의 일이구나" 라고 하면서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일을 저질러야 비로소 그 현장에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의 징조라는 겁니다. 즉 자기가 저지른 죄악된 일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죽었던 결과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보인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중층결정인데, 그러니 자기가 한 일이 따로 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따로 있고, 그렇게 그 결과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저지른 모든 것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는 분이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죄를 짓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할지 몰라도,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죠. 먹든지 마시든지 그 모든 것이 죄라는 겁니다. 

누구를 위한 커피인가?

그것이 왜 죄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그 행위를 죄로 규정하시고 전환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알려진다는 겁니다. 즉 "누구를 위한 커피인가?" 라는 것인데, 우리는 "나는 행복해야 한다" 라고 하는데, 그게 과연 누구를 위한 행복이냐는 말이죠. 

처음에 존재론을 이야기할 때 했는데, 즉 "언약을 위한 행복인가? 나중에 후차적으로 태어나는 나를 위한 행복인가?" 라는 것인데, 우리는 자기를 위한 행복이라는 겁니다. "고등래퍼의 예선을 통과하는 것이 누구를 행복인가?" 라는 것인데, 다들 무슨 말인지 모르지 싶은데 말이죠. '고등래퍼' 라고, 고등학생들을 모아놓고 래퍼들의 예선전을 치르는 TV프로가 있다는 겁니다(ㅋㅋ).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인식론' !!

그런 그들의 행동에 주님이 상처를 받은 몸으로 개입하게 될 때,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서, 그것을 가지고 그게 죄라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인식론'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나로 인해서 죽었다" 라는 사실을, 그렇게 자기 행위와 마주치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높은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을 봐야하는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낮은 곳을 말이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거기에 우리의 모든 건방짐, 촐랑댐, 오도방정, 이런 모든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다 필요한 재료로 가지고 오셔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건방을 마구 떨어야 하는데, 래퍼를 하든 그 무엇을 하든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죄라는 것을 말이죠. "이게 모두 나에서 나와서 나를 위한 것인데, 그러니 그게 바로 죄가 아니고 무엇이냐?" 라고, 그렇게 직감을 하는 것, 목회를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그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말이죠. 그게 바로 중층결정인데, 즉 두 개 이상의 원인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알아서 내가 한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은 앞으로 반성해서 그런 짓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원인이 하나밖에 없는데,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하는데, 자기의 그 신앙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는 신앙대로 했으니 제대로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이는데, "성령의 의해서 믿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누구를 위한 구원인가? 

그런 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데, 그러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구원이라는 겁니까? 정말로 예수님을 위한 구원이라고 하면, 자기의 그런 신앙조차도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데,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죄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을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중층, 즉 두 개의 원인을 작용시키는데, 그래서 서로 맞닥드리게 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오미자차가 있는데, 그러면 이게 주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마시게 되면, 그러면 원인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라고 이런 오미자차를 주셨구나. 그러니 마시고 열심히 봉사해야지" 라고 하는, 그것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종교인데, 즉 "이것이 신의 뜻입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인샬라!" 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오미자차를 주신 것은, 그게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런 것을 주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마심으로서 자기가 마치 제대로 사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요인을 유발시킴으로서, "아하, 내가 이것을 마시고 그 죄값으로 죽으라고 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한데, 그게 바로 '중층결정' 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인데, 그렇게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모든 죄를 다 폭로시키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낮은 곳으로 오셔서, 아벨의 피와 사가랴의 피까지도 다 말이죠.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누가 있는고 하니, 그야말로 힘없이 돌아가신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 노선이 곧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높은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래서 하늘의 뜻은 하늘에는 없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일을 벌리는 현장에 있다는 말이죠.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이 먼저 계시고 그 다음에 우리가 태어났지만, 하지만 인식론으로 보면, 우리가 먼저 일을 벌리고, 그 현장에 상처를 받는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개혁주의 자체가 이단이라는 말이죠.

중층결정은 원인과 결과를 서로 주고 받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원인을 제공하시고, 그러면 우리는 그 원인을 자기의 원인이라고 우기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치시면서 "내가 너 때문에 죽는다" 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십자가로 일깨워주신다는 겁니다. 

김정은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

어제 오후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트럼프와 김정은이 평화협상을 했다면 놀라운 것이다" 라고 한다면, 요즘 방송에서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복음적으로 이해를 해야한다고 했는데, 아직은 기억이 나지요? 

그렇게 "트럼프와 김정은이 평화협상을 해서 이제 한반도에는 전쟁이 없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왜 그것이 거론이 되고 주목을 받는 이슈로 등장하느냐는 겁니다. 그 바탕에는 "나는 죽지 않고 더 평화롭게 살아야한다" 라고 하는, 자기를 위한 자기 인식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전쟁이 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또 무엇 중심인고 하니, 존재론적으로 보면 또 자기 중심인데, 즉 "여기에 있는 내가 불행하면 안 되고, 행복해야한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이런 것이 기쁜 소식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복음적으로 보면, 즉 중층결정으로 보면, 이런 것들이 서로 협상을 해서 우리 속에서 무엇을 일으키는고 하니, "나는 평화롭게 살아야한다" 라는 것을 들추어내시는 주님의 작용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평화협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김정은을 시켜서 핵폭탄을 더욱 많이 만들게 하신다면, 그러면 서울의 부동산 값이 내려가게 되고 불안에 떨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 대구도 불안하게 될 것이고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평소에 얼마나 자기를 위해서 살았는지, 그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김정은을 활용하셨다는 말이죠. 

나는 참을 수가 없어 !!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지 싶은데, 야곱이 야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에게 모델이 되는데, 즉 "남에게 지고는 살 수 없다" 라는 겁니다. 남들에게 진다면, 아무리 먹을 것이 있다고 해도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데, 즉 "너에게 졌다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누나가 침대를 고친다고 뚝딱뚝딱하니, 이제 방금 군에서 제대를 해서 옆방에서 자고 있던 24살 먹은 아들이 그만 시끄럽다고 하면서 죽이고 말았다고 하는데, '욱' 해서 죽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신병이 아니라 정상인데, 우리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이 그러하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자기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그게 아버지와 누나를 죽인 그 24살 먹은 자식의 모습만이 아니라, 과연 우리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겠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참고 있고 눌리고 있는데, 그러니 그게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이 더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딴에는 참는다고 하면서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요즘은 여자들도 남자들 못지 않다고 하는데, 이 세상이 더럽다는 것에 대해서는 남녀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방금 배운 것을 써보면,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누가 침대를 고친다고 시끄럽게 했느냐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니고 누나가 아닌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우리 속에 무슨 괴물이 들어있는지, 그것을 바깥으로 틀어내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성질을 돋우었다는 겁니다. 

우리의 성질을 건드리는 예수님 !!

예수님이 기능이 바로 그것인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성질을 돋우고 건드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죠. 즉 "내가 하나님이다. 나를 죽여라"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니 구원해주세요" 라고 하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 바로 위선이고 불신앙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러니 그런 종교적인 행위가 통할 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하는 성경공부가 하나의 인포메이션, 즉 정보가 되면 안 되는데, 유적지에 가면 안내를 하는 분이 있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인포메이션을 전달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유적지의 정보를 제대로 안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집니까?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야곱과 에서는 달라지지 않아 !!

존재론을 다시 이야기해보면, 야곱이 무엇을 하든 말든 이미 운명은 결정이 되었는데, 야곱이 달라져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야곱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지옥에 갔다는 말이죠.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게 자기를 달라지게 할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달라지지도 않고 또한 달라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늘 달라지는데, 그게 바로 증층결정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아무리 "나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해도, 어떤 상황이 닥치게 되면 이때는 이런 행동을 하고, 저때는 저런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도둑질을 할 때는 하더라도 길을 가면서 거지에게는 동냥을 해준다는 말이죠. 그런 경우가 있는데, 자기의 악을 그런 선으로 매울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인간은 그렇게 달라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달라지지 않는다" 라는 것을 달라짐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증층결정을 하신다는 말이죠. 즉 두 개의 원인이 작용한다는 겁니다. 두 개의 숨겨진 모르는 원인이 작용하는데, 즉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럴 때 이런 행동을 했다" 라고 하는 원인이 있는 반면에, 그 나타난 일에 대해서 다른 원인이 작용하는 것을 두고 중층결정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니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은 죄다" 라고 하는, 그런 또 하나의 원인이 있어서 그렇게 결정이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원인은 자기가 나쁜 짓을 하기 이전까지는 나타나지를 않는데, 그래서 나타나기 이전에 우리가 하는 "하나님이여, 영광을 받으소서" 라고 하는 것들이 다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그 원인이 나타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평소에 "오늘도 찬양을 열심히 하니 목도 아프고 땀이 나네. 그러니 이번 토요일에 시험을 치는데, 잘 되게 해주시겠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러니 토요일에 시험과 대비가 되면서, 자기가 열심히 찬양한 것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다 기억나게 되어있는데, 정말로 그렇다는 말이죠. 

내 인생에 중요한 일은 없어 !!

자기 인생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그런데 존재론에 있어서 우리 인생에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중요한 일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언약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다 죄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 딸만 시집을 보면 다 끝이다" 라고 하는데, 그만 자기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면 동남아를 놀러 다니고 한다는 말이죠. 성경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 쪽은 잘 가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고생도 심하고 돈이 많이 든다는 겁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자기 인생을 꾸려나감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 있다고 여길 때,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과거의 자기 착한 일을 다 동원시킨다는 말이죠. 즉 "내가 지난 주에 한 시간 동안 찬양을 하면서 남들에게 봉사를 했는데, 그런 착한 일을 했으니, 이번 토요일에 공무원 시험을 치는데 인센티브를 주시옵소서"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복음을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3년 전에는 내가 예수도 모르고 복음도 몰랐는데, 그런데 이제는 알았으니 드디어 내 인생이 펴질 것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전혀 복음을 알았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구원은, 탈출이 아닌 몰락 !!

어제 낮에 뭐라고 했습니까? 구원은 탈출이 아니라 몰락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같이 몰락한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몰락을 해봐야, 자기 인생이 애초부터 자기 인생이 아니었는데, 그런데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몰락의 원인을 제공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 인생은 언제나 행복해야하고, 웃음이 넘쳐야하고, 남들에게 놀림감이 되면 안 된다" 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자기 인생을 그만 조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는데, 사도바울도 역시 그러하고 말이죠. 그런데 왜 그런 것은 본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왜 자기의 행복만 염두에 두느냐는 겁니다. 

잠시 이스라엘 땅을 !!

제가 이번에 이스라엘 땅에 가보았는데, 그것을 소위 성지순례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유적지를 가본다는 것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과 같은데, 거기서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데,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쓰레기통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 속에 들어감으로서 성경말씀이 생각나게 되는데, 오늘 이 귀한 시간에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좀 미안한데 말이죠. 

지금 여리고는 경우에는 적색지역이 되어서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데, 그런데 저는 "이때가 아니면 언제 가보겠노?" 라고 하는 순교의 마음으로 들어갔다는 겁니다(ㅋㅋ). 같이 간 제 아내는 벌벌 떨고 있고, 미국에 계신 이 목사님은 "언제 빠져 나가겠노?" 라고 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거기는 이스라엘의 구역이 아니기 때문에, IS와 같은 자들이 항상 관광객들의 몸값을 노리고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들이 관광객들을 납치해서 사고라도 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은 관광객들이 감소하게 되는데, 그러면 정말로 곤란해진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관광객으로 엄청난 수입을 벌고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그런 곳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적색구역으로 정해놓고 있다는 겁니다. 

하여튼 이런 적색지역은 다 가난한 지역인데, 기존 이스라엘 지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비참하기까지 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동네는 전혀 변화가 없는데, 그곳을 조금 벗어나면 산이 있는데, 그 산이 예수님이 시험을 받은 산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의미가 없는데,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다 만들어놓고, 거기에 수도사들이 폼을 잡고 앉아있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3번 받는데, 먼저 첫 번째는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게 하라는 것이고, 그리고 세 번째로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자기에게 경배하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다 주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에게는 이게 시험이 되지만,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게 우리가 추구하는 일상이라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자는, 예수님이 꽂히지 않는 자는 이런 자기 일상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는데, 이게 바로 중층결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시기 전까지는 그렇게 사는데, 그게 삶의 목적이고 보람이라는 말이죠.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게 인생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로또라도 당첨이 되면 금상첨화이고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시비를 걸었는데, 그게 바로 중층결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에게는 두 개 이상의 원인이 작용하는데, 성도는 이것을 안다는 말이죠.

이것이 삭개오의 뽕나무입니다 !!

거기서 주차를 하니 친절하게 다가와서 안내를 해주는데, 그러면 그게 벌써 수상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차를 하고 올라가서 구경하고 내려오니, 또 돈을 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거기가 여리고이니 삭개오의 뽕나무를 보려고 했는데, 지도에는 그게 시내의 한 복판에 나와있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찾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장사를 하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그 뽕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니까, 그게 교회당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나무를 보고 "이것이 삭개오의 뽕나무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가는데, 그 할아버지가 파는 것을 하나 주면서 공짜라고 한다는 겁니다. 영어로 'free' 라고 하면서 주었는데, 장사에 필요한 영어는 할 줄을 안다는 말이죠. 

관광객들에게 서비스로 주는 줄 알고 받았는데, 그래도 미안해서 10세겔을 주었는데, 그런데 돈을 더 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워낙 돈이 없는 동네라서 그게 이해는 되었지만 기분이 좀 쓸쓸했는데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얼른 차를 몰고 여리고를 빠져나왔다는 겁니다. 우리가 무슨 정탐꾼도 아닌데 말이죠(ㅋㅋ). 

그래서 나서 제가 이 목사님에게 또 물었는데, 또 들어갈 볼 적색지역이 남아있는지를 말이죠. 그래서 일반 관광객들을 태운 차는 그런 곳에 가지 않는데, 그래서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겁니다. 베들레헴도 적색지대인데, 하지만 여리고보다는 조금 더 안전하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들을 태운 차들이 가기는 한다는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

이제 정리를 해보면, 하늘의 징조가 존재론적 의미에서는 어떠합니까? 언약이 이미 있고, 그 언약에 의해서 우리는 창세 전에 태어나기로 이미 결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심지어 일반 종교들도 비슷하게 흉내를 낸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중층결정에 의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여기에 있고, 하나님은 저기에 계신다" 라는 것은 되는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은 그것을 모를 뿐만이 아니라, 강력하게 거부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구원을 받잖아" 라고 나오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만 들어오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들어와서는 우리가 하는 행위를 마음껏 하게 하고 그 전부를 죄로 지적해주시는데, 그 역할을 누가 하는고 하니, 성령이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즉 이 세상자체를 책망하신다는 말이죠.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러니 하늘의 뜻은 저기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우리 곁에, 아니 우리 안에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구원의 원인을 제시하신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여러분,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노래솜씨가 중요합니까? 곡이 중요합니까? 곡이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곡만 좋으면 다른 가수가 불러도 된다는 겁니다. 즉 가수는 여러 명인데, 곡은 하나라는 말이죠.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을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칠 수는 있어도, 그 곡은 하나라는 겁니다. 

그렇게 노래솜씨보다 곡이 더 중요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언약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기는 사는데,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중심이 아니고 말이죠.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그렇게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적질을 하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물론 그게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최후에는 마지막으로 결국 누구와 비교를 해야하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다름이 아닌, '나' 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행복, 자기 인생, 그것보다도 주 예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늘 변할 수밖에는 없는데, 이제 그 의미를 알겠지요? 언약이 변하는 것도 원인이고, 변하지 않는 것도 원인인데, 즉 중층결정이라는 겁니다. 

변치 않는 언약, 변하는 인간 !!

그러니 언약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언약을 믿는 인간은 늘 변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언약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조차도 이 땅에서는 죄가 되기 때문에 말이죠. 즉 "내가 이 언약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라고, 그렇게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난 가을부터 겨울까지 우리 집에 딸과 외손녀가 같이 살고 있었는데, 독일로 돌아가려고 해도 주님의 중층결정으로 가지 못했는데, 그만 독감에 걸려서 일주일 동안 지체가 되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또 딸이 그만 계단에서 넘어지고 해서 그렇게 지체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요즘은 보고 싶으면 그동안 찍어놓은 동영상을 보곤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한 가지 미흡한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제는 전화로밖에는 서로 대화가 안 된다는 말이죠. 같이 있을 때 외손녀가 좋아한 것이 있었는데, 어느 분이 저에게 샤넬스킨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 냄새를 아이가 참 좋아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냄새를 그 아이에게 맡도록 해줄 수가 없다는 말이죠. 

향기인가? 악취인가?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고린도후서 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복음은 향기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라고 하는데, 물론 망하는 자들에게는 악취가 되는데 말이죠. 

(고후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렇게 성경은 '망하는 자들' 이라고 규정을 하고 있는데, 자기 행동을 어떻게 나쁘게 해서 망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망해야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부부라도 마찬가지이라는 겁니다. 그게 악취인데, 그런데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향기라는 말이죠.

그게 똑같은 냄새인데, 사람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한 쪽은 악취가 되는데, 즉 "이제 그만해라. 많이 들었다" 라고 하는 나오는데, 그런데 다른 한 쪽은 "이 좋은 소식은 진작에 이야기를 해주지, 왜 이제 이야기를 하는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특이하고도 기적적인 경우인데 말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사도바울이 보기에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이렇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복음에 대해서 향기로 받는 자들, 그리고 악취로 받는 자들,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바로 그 인간의 인격이나 행동과 전혀 상관이 없이, 그 인간의 운명은 이미 그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인데, 결정된 것은 이 땅에서 다양하게 변화한다는 것인데, 이게 바로 중층결정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 원인이 자기 행동과 결과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할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복음을 악취로 여긴다는 것, 즉 예배참석과 성경읽기와 기도하기와 예수믿기, 그 모든 것이 다 죄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유발하는, 그것을 악취로 여기는 자들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헌금을 해도 죄고, 범사에 감사해도 죄라는 것을 악취로 여기는 자들이 분명히 있는데, 그들은 과연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지, 그것을 지금부터 살펴보자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라는 겁니다. 

인격의 이중성 !!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성령이 없는 사람, 즉 종교생활을 하는 자들인데, 교인이라고 봐도 무방하고 말이죠.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인격의 이중성을 강조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을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로 나눈다는 말이죠. 물질의 풍요가 인간의 행복이 아니고, 정신의 풍요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겁니다. 

이 정신의 풍요는 언행일치가 되어야 하는데, 즉 자기가 말을 했으면 그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말한 대로 행동에 옮겨야, 그게 정신세계에 합치가 되는 훌륭한 인격자가 된다는 겁니다. 물질세계는 정신세계를 파괴하고 방해를 하기 때문에, 여기에 너무 몰두하지 말고 정신세계에 들어가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정신세계의 그 평화를 찾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 다니기, 기도하기, 혹은 명상이나 은둔생활, 그런 다양한 것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중성인데, 즉 물질세계에서 벗어나서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그것을 선하고 의롭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쿰란 공동체 !!

이런 경우가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인데, 제가 이번에 갔던 곳들 중에서 '쿰란 공동체' 라는 것이 있었는데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나중에 의로운 자들이 등장해서 메시야를 만난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의롭다고 하는 것은 분리인데, 즉 더러운 이 물질세계와 분리되어서 정신세계에 푹 빠져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고생길을 가는데, 외부의 그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말이죠. 이 쿰란 공동체는 제사제도를 일체 거부하는데, 다 썩었다는 겁니다. 그들에 의하면, 구약에 의하면 기존의 제사장들이 정통 사독계열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실 리가 없는데, 그래서 제사제도를 거부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제사제도를 거부한다는 것은 성전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리고 성전을 거부한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권력을 거부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기존의 유대교로부터 잘린 자들인데,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벗어나서 사해바다 근처까지 왔다는 말이죠. 

잠시 지도를 그려보면, 이렇게 지중해가 있으면 이스라엘이 여기에 있는데, 여기에는 갈릴리가 있고 사해바다가 그 아래에 있고, 그리고 제일 위쪽에는 높이 5,000미터의 헐몬산이 있는데, 정상에는 눈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도 이번에 찍어서 동영상으로 올려놓았는데, 여기에는 요단강 발원지가 있는데, 이 눈들이 녹아서 갈릴리 호수에 이르고, 그게 사해바다로 흘러가면서 요단강이 된다는 말이죠. 

이 요단강은 그 길이가 약 100km에 이르고, 사해바다는 갈릴리 호수보다 5배 정도는 크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요단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얍복강도 있고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었다는 강도 있는데, 그런데 여기는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 아니라 요르단 지역이라서 가지 못하는데, 즉 다른 나라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아무튼 여기 요단강 끝 부분의 사해근처에 예루살렘이 있고, 여기서 10km 떨어진 곳에 베들레헴이 있다는 말이죠. 유다광야도 사해근처에 있는데, 이것이 사막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 사막 한 가운데에 쿰란 공동체가 있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따로 떨어져있다는 것이죠. 가기서 자급자족을 하는데, 비가 오면 그것을 따로 받아서 저수지를 만들고 말이죠. 

자신을 정화하는 수도원 생활 !!

이 쿰란 공동체의 사고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의로운 생활을 하는 것인데, 그들의 생활일정표까지도 다 나와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양치기 소년이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는데, 양을 찾기 위해서 동굴에 돌맹이를 던졌는데, 거기서 무슨 소리가 들리자, 그래서 들어가 보니 항아리들이 있었고, 거기에서 쿰란 공동체에서 사용했던 두루마리 문서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가 사막지역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썩지도 않고 보존이 잘 되었는데, 이것을 일명 '사해문서'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게 그 당시까지 알려진 성경책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이것이 바로 쿰란 공동체의 동굴 안에서 발견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엄청난 발견이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신학계에서는 긴장을 했는데, 왜냐하면 지금 보고 있는 맛소라 본문과 다르면 그야말로 곤란해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사야서 비교해보니 정말로 딱 맞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보고 있는 성경책이 과거에 보던 것과 전혀 다르지가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신학자들이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들은 그 이사야서의 성경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즉 이 세상과 분리가 되어서 살아가지 아니하면 메시야를 만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쿰란 공동체인데, 그런데 그들이 그만 AD 70년경에 로마의 디도장군에게 그만 작살이 나고 마는데, 물론 그때 예루살렘도 그렇게 되었고 말이죠. 

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자기를 정화해서, 즉 이 세상과는 단절이 되어서 살아가자는 것인데, 그래서 노동을 통해서 자급자족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성경말씀을 보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했는데, 그러니 일종의 수도원 생활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에는 여자와 아이들은 없었는데, 그들은 물이 나오는 오아시스로 보내서 생활하게 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거기서 운영하는 모텔에서 묵었는데, 그것이 '키부츠' 라고 해서, 이스라엘이 1948년에 독립을 하고 난 다음에 만든 일종의 협동농장이라는 겁니다. 아직도 일부가 남아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묵었던 곳은 다 좋은데, 아침에 축사냄새로 견디기가 좀 힘들었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향기가 아니라 악취였다는 겁니다(ㅋㅋ). 

언행일치야말로 최고의 인격이다 !!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말하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분리, 즉 '이중성'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서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지 못해서 벌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일치를 주장했다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물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최고의 인격다운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람이 말을 했으면 그 행동도 같아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특히 정치인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데, 그러니 "여성을 인격을 보호합시다" 라고 해놓고, 정작 자기는 뒤에서 엉뚱한 짓을 하면 되느냐는 겁니다. 

안희정이 왜 그렇게 욕을 듣습니까? 마을의 이장이라고 하면 그렇게 욕을 듣지 않는데, 그래도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언행일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윤리나 도덕적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긴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요구를 하는고 하니, 높은 자리에 있으면 그런 유혹이 더 많다는 말이죠. 

인격의 이중성을 믿지 말자 !!

하지만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돈이 더 많이 들어오는 것이 이 세상의 구조라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격의 이중성을 믿지 말라는 것인데, 왜 그렇습니까? 인격의 이중성이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존재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즉 "'나' 라는 존재를 빛내자" 라는 것인데, 인격적으로 대단한 존재로 만들자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말과 행동이 일치되면 존경해주겠고, 그렇지 않으면 존경해주지 않겠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우리도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고상한 인격' 이라고 하는 세상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이중성을, 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과 잣대를 말이죠. 그것을 우리는 부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 이렇게 인격의 이중성을 언급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직도 여기에 머물러있다고 하면,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여리고 근처에 있는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그 산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수도사들이 그야말로 대단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는데, 최소한의 양식으로만 자급자족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들이 말이죠. 

여기에는 또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그것까지 이야기하면 너무 길어지고, 아무튼 고상하게 전통을 이어가는 그들의 경건함을 볼 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데, 하지만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탄의 적나라한 모습인데, 즉 인격의 고상함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말이죠. 

죄와 의의 이중성 !!

그러니 "인격이 출중하다" 라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데, 그러면 무엇의 이중성인고 하니까,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다" 라는 겁니다. 즉 '죄와 의의 이중성' 이란 말이죠.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인데, 그런 죄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고상한 인격이라는 겁니다. 도를 닦는 고급스러운 죄라는 말이죠. 

우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하는 성경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나는 평생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 라고 하면, 그것은 능력이 없든지, 아직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중층결정이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의 선에서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말씀대로 살면 사람들이 얼마나 존경할까?" 라고 하는, 그런 상식적인 이야기는 개나 줘버리라는 말이죠(ㅋㅋ). 

언약은 변동된다 !!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오늘강의에서 중요한 것은 "언약은 변동된다" 라는 것인데, 그때 우리는 언약이 변동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언약은 단 하나밖에 없지만, 이 땅에서 수 천 수 만 가지의 변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가 그 언약의 변동을 유발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유발시키는 분은 주님이라는 겁니다. 

상황에 따라서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좋아하다가도, 돌아서서는 지옥에 갈까 싶어서 절망한다는 말이죠. 하루에만 수 천 번도 더 바뀌는, 그런 것이 바로 인식론 때문에 그러한데, 존재론이 아닌 인식론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지키려고 하는, 그런 무모한 짓들을 하다가보니, 그게 억지가 되고 위선이 되고 가식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를 붙잡아서 다듬고 해서 기어이 천국에 보내려고 자기 행동에 있어서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다는 겁니다. 절제에 절제를 더하고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그게 자기 양에 차지 않는데, 조금 전에 이야기한 수도사들처럼 여리고의 그 산에 가서 동굴을 파고 살아도, 그러면서 관광객들이 오면 삥이나 뜯으면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그것이 결코 양에 차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겨우 이 정도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라고 나온다면, 그게 바로 마귀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냥 살면 되는데, 자꾸만 이상한 것을 상상한다는 겁니다. 인격의 고상함과 같은 것을 말이죠. 왜냐하면 그게 남들이 보는 눈 때문에 그러한데, 거기에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이제 새로운 집으로 !!

이제 이것만 이야기하고 마치겠는데, 우리는 어차피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물론 이 세상에 살아갈 때는 정도 참 많이 들고 했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온 정성을 여기에 모두 다 쏟았으니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뜻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세상 자체가 집인데, 그러니 우리는 그런 옛집을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옛집을 버리고 깔끔하게 청소가 다 되어있는 새집으로 이사를 가면 되는데, 도우미도 전혀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완벽하게 다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사를 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냥 가면 안 되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더러워진 것은,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래서 시작도 자기 자신이고 끝도 자기 자신인, 그렇게 마무리까지 자기가 하겠다고 하는 되지도 않은 객기, 오기, 교만, 그런 것이 이 세상을 더욱 더 어렵게 하고 지저분하게 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겁니다. 

주저하지 말고 죄를 지으면서 !!

물론 우리가 그것을 믿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더럽게 하는 것 외에 달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없는데, 우리는 자기가 죄인이란 것 외에 더 보탤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평소에 살아가면서 죄만 지으면 되는데, 그것도 주저하지 말고 말이죠. 

그리고 그런 점에 대해서 기쁘게 부담 없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이미 언약의 결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나는 변해도 언약은 변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성령을 받은 자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평소에 무슨 짓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남들이 보기에 그럴싸해보는 신앙인처럼 보이기 위해서 연극을 하면서 살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면서도 아닌 척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오히려 그것이 죄라고 지적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의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즐거움을 동시에 간직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3,17 오후 7시에 마침.
ME T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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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층결정(重層決定, Overdetermination)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작업에서 나온 말로, 하나의 상징이 몇 개의 독립된 또는 관계된 원인들의 결과라면 그것은 중층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상징이 중층결정된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것에 대한 온전한 설명은 단순히 하나의 의미(meaning)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상호연관된 자료와 의미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꿈 중에 하나에 대해 쓰면서, 프로이트는 어떤 요소들은 '결정점'처럼 보이는데, "그 위에 수많은 꿈의 생각들이 모아지고, 그것들은 꿈에 대한 해석과 연결되어 여러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약간 다른 용어를 제안한다. 즉 꿈의 내용의 각각의 요소는 '중층결정'된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꿈의 생각이 여러 번에 걸쳐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용어는 1960년대에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그의 에세이 '모순과 중층결정'에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진다. 알튀세르에 의해 선도된 이 용어의 사용은 보다 더 역사-정치적인 것이었다. 즉 일련의 다양한 사회적 힘들이 결과적으로 정치혁명과 같은 하나의 중층결정된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용어는 조야한 경제 결정론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층결정은 일련의 학제에서 보이는 단순한 인과관계에 대한 경고로서 쓰이는 것이다.
하나의 원인이 별 문제없이 하나의 독립된 사건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상호연관된 대립적인 힘들의 작용과 관련된 중층결정의 경우, 이러한 작용의 결과는 예측할 수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연속적이고 복잡한 중재에 의해 부과된 변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엘리엇(T. S. Eliot)은 "역사는 수많은 교활한 통로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문학적 상징에 대한 분석은 정신분석학에서의 꿈의 분석과 달리, 인과적·발생론적 요인들에 초점을 두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연구에 중층결정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문학작품 또는 문학작품의 단면들을 문제없이 '기원들'에 연결시키려고 하는 투박하고 단순한 시도들을 배제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김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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