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1 - 몰락의 가속도
08,03,2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83페이지입니다.
**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우리에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 죽음을 좀 더 전진시켜보면, 죽음이란 것은 언약을 빼놓고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사라지는 겁니다.
언약과 피,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 !!
여기에 "죽음이란 것은 언약을 빼놓고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라고 되어있는데, 이 언약이란 것은 출애굽기 20장과 24장에 보게 되면, 그 언약을 맺을 때는 피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제단이 있고 그 위에 제물이 놓이게 되는데, 즉 양이나 염소나 소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죠. 참 신기하죠?
노자나 맹자의 동양사상에서는 신에게 나갈 때는 정신으로 나가는데, 인도도 그렇고 말이죠. 순박하고 순수하고 청명한 정신만 있으면 신과 통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언약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은데, 우리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가축의 피가 없으면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가축의 피를 바르면 하나님께서 다 만나주십니까? 그게 아닌데,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할 때만 그렇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지시' 라는 겁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지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현대인들과는 다른데 말이죠.
오늘날은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되는데, 물론 옛날 사람들도 그러했지만,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노아나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도 그런 하나님의 지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다는 말이죠. 그게 곧 '성령의 오심' 이라는 겁니다.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성령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성도는 반응을 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지시가 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챙기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물론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겠지만 말이죠.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를 할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언약을 실시하기 위함인데, 그래서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뒤에 언약이 붙는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오실 때 빈손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가지고 오신다는 겁니다.
언약 안에는 죽음이 있다 !!
그러면 그 언약 안에 무엇이 담기는고 하니까, 방금 그것을 '제물의 피' 라고 했는데, 그것을 합치게 되면 "언약 안에는 죽음이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언약 안에 있는 죽음이 있고, 또한 언약을 빼놓고 생각할 수 있는 죽음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믿지 않는 자들의 경우인데, 그들도 죽는다는 말이죠. 그들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안타깝게 여기는데, 자기가 좋아하던 사람이 죽으면 참 슬프고, 반면에 자기가 싫어하던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특히 북한의 김정은이 죽으면 신이 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했다고 난리가 나지 싶은데, 우리나라에 그런 교회들이 제법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 자식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넘치고 넘쳐난다는 겁니다. 매일같이 찾아와서 빛을 갚으라고 독촉하던 빚쟁이가 죽어버리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반면에 자기에게 돈을 갚아야 될 사람이 그만 죽게 되면 환장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언약이 없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내가 사는 것보다도 더 다급한 문제는 없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즉 자기가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일로 급선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언약이 없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이 없다" 라는 것이고, 또한 "지시하는 사람이 없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살려고 발버둥을 치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새벽부터 일어나서 왜 설치십니까? 다들 먹고 살려고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먹고 사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다 !!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자들도 마찬가지인데, 노아나 아브라함도 이 땅에서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었는데, 그런데 언약이 덮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지시가 내려오게 되면, 자기가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노아 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렇게 살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것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잘 보여준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홍수가 나서 다 멸망을 당했다는 말이죠.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러니까 노아언약은 무엇을 부른다는 겁니까? 물을, 즉 홍수를 부른다는 것인데, 언약 때문에 홍수가 왔다는 겁니다. 이것은 언약이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노아언약이, 그것을 두 글자로 하면 '방주'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방주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전념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홍수가 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없을 때는 자기가 심판의 대상인 줄 몰랐는데, 그런데 노아언약, 즉 방주가 옴으로 말미암아서, 사람들이 무심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던 것이 바로 심판을 받을 자의 모습이란 것을 다 들추어내게 된다는 겁니다.
성경(聖經)=구약(舊約)+신약(新約) !!
그래서 언약이 중요한데, 옛날 언약을 '구약(舊約)', 새로운 언약을 '신약(新約)' 이라고 하는데, 아주 쉽지 않습니까? 그것을 합쳐서 '성경(聖經)'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성경을 이 공식에 대입하게 되면, "성경은 이 세상이 가만히 있어도 저주를 받고 있음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닌데,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라는 것도 되겠지만, 하지만 그러한 구원 이전에 "우리가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 왜 지옥에 가는 것인가?" 라는 것인데, 바로 거기에 대해서 성경이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성경을 볼지는 몰라도 나중에는 결국 성경을 덮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자기가 살아가는데, 즉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입사시험을 칠 때 주특기란에 '성경읽기' 라고 적었다고 하면, 과연 그 회사에서 좋아할까요? 오히려 회사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거부하게 되는, 즉 탈락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자기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을 버는 것에는 이 성경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지만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옥에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그것을 오직 성경만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말고 다른 책들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훌륭하게 살면 대우를 받는다" 라는 것인데, 특히 처세술에 관한 책들이 그렇다는 말이죠.
처세술에는 심판이 없어 !!
저도 신학교에 가기 이전에 대학을 다닐 때는 많이 읽었는데, 즉 "어떻게 하면 사회에 나가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 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카네기의 처세술' 이라는 책이 유명한데 말이죠. 상대방에게 말을 할 때는 어떻게 하고, 또한 행동은 어떻게 하고, 그런 것들이 줄줄이 나온다는 겁니다. 깜박이도 넣지 않고 차를 그냥 돌리면 안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여기에는 무엇이 빠지고 없습니까? 이 세상에는 저주가 없고 심판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처세술에는 그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심판과 저주를 염두에 두지 않고 쓴 책이 처세술인데, "이렇게 하면 이 세상에서 당신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라고 하고,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책들은 항상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책을 읽어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읽으니 말이죠. 그러니 성경말씀에 관한 책은 인기가 없는데,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이 세상이 죄로 인해서 저주와 심판을 받는다고 하니 말이죠.
잠시 복습을 하면 !!
이제 잠시 복습을 해보면,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지시를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아주 이상한 현상인데,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의 지시가 없는 현대인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시급하고 다급한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람은, "너는 열심히 해서 출세해라" 라고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노아의 경우에는 "언약을 이루어라" 라고 하는 지시를 받았다는 말이죠. 그 언약의 내용이 노아 때는 방주였는데, 그러면 노아의 언약이 오면 그것으로 끝이 납니까?
그것이 아닌데, 그 언약의 맞은 편에 물을 부른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홍수인데, 그러니 언약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홍수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 홍수에 잠긴 사람들의 생활태도가 무엇인고 하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한다는 겁니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다 포괄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홍수가 났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시원하기 샤워를 해주기 위해서 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홍수가 오기 이전에는 심판의 대상인 줄을 몰랐는데, 그런데 노아언약이 주어지면서 이 세상은 바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언약이 투입됨으로서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는 노아를 잘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노아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노아를 통해서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서 마땅하다는 것을, 그것이 언약이 옴으로서 드디어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언약이 오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새언약과 예수님의 죽음 !!
오늘날의 언약을 무슨 언약이라고 합니까? 지금은 구약이 아닌 신약, 즉 새언약의 시대인데, 그런데 언약이란 것은 그 안에 반드시 죽음을 포함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새언약 안에는 누구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아닌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말이죠.
그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새언약 이후는 없는데, 그것이 최종적인 마감재라는 말이죠. 즉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그 한 방으로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이 세상을 어떻게 살든 간에 그 사람은 저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확정되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확정이 되었다는 것을 사자성어로 '요지부동(搖之不動)'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의 그 어떤 요소가 개입이 되더라도, 아무리 흔들어봐도 이미 확정이 났다는 겁니다. 바르게 살고, 최선을 다해서 살고, 열심히 주님을 섬겨도, 그런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가 바르게 살겠다고 나온다는 것은, 그것은 무슨 의미가 됩니까? 하나님의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고, 그게 아니라 자기가 새롭게 생산해내겠다는 것인데, 우리 인간이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겁니다.
'언약을 빼고' 이 세상에 대해서 !!
여기 교재 83페이지에 보면 "죽음이란 것은 언약을 빼놓고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오늘강의의 시작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까지 한 것은 언약을 집어넣어서 한 것이고, 물론 성도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익히 인정하게 되는데, 언약을 고려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그게 아니라 언약을 빼놓고 한 번 생각을 해보자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성도가 된 입장에서 거기에 대해서 시큰둥할 수 있는데, 하지만 그게 얼마나 일리가 있는지, 그것을 우리가 이제부터 제대로 한 번 체험을 해보자는 겁니다.
언약을 빼고 생각하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단조로운 나날들의 연속인데, 매일매일의 같은 날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경상도 말로 '지엽다' 라고 하는데, 표준말로는 '지겹다' 라는 것이죠. 물론 젊어서는 그런 것을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지겨운데, 살아가는 게 그야말로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냥 드라마를 하면 그것이나 줄줄이 연결해서 보는 것이 낙인데, 요즘은 드라마를 같은 시간대에 하지 않고, 방송사마다 다 틀려서 모두 다 볼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재미가 좀 더 있는 것을 발굴하는 것이 그만 삶의 목표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골프도 별 재미가 없는데, 어깨가 아파서 제대로 스윙이 안 된다는 말이죠. 젊었을 때는 오토바이를 타고서 전국을 다 돌아다녔는데,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재미가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죠. 밤에는 잠도 오지 않고, 물론 그때는 이근호 목사의 설교나 강의를 들으면 되는데, 최고의 수면제라는 말이죠(ㅋㅋ).
아무튼 살아가는 것이 단조롭기가 짝이 없는데, 그래서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이 현실로 확 다가온다는 겁니다. 언약을 빼놓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언약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단조로움을 어떻게 재미가 있는 것으로 바꾸는가?" 라는 것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물론 돈이 조금 들기는 하지만 해외여행이 제일 재미가 있다는 말이죠. 물론 가면 피곤하다고 하면서 집으로 가자고 하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 불평을 늘어놓지만, 막상 집에 돌아오면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겁니다(ㅋㅋ).
바람, 바람, 바람 !!
그것을 전도서 1장에서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경이 굉장히 고상한 동네의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단조롭고 지겨운 날들의 반복 속에서, 마치 땅에 먼지가 쌓이듯이 하나님의 진리가 거기에 쌓인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단조롭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재료로 삼아서 '전도서' 라는 계시의 말씀을, 즉 언약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죠.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바람을 잡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체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 모두가 다 헛된 짓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6절에서도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라고 하는데, 17절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고 말이죠.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전 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우리 강의에서 상투적으로 나왔던 것이 "나는 있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우리 인간은 그 '있음'을 채우기 위해서 '소유'를 한다고 했는데 말이죠. 왜냐하면 존재는 소유를 만나야 존재 값을 하기 때문에, 그런데 전도서 1장 14절에서는 그 '소유' 라는 것을 '잡는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냥 잡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잡아서 어디에 집어넣는고 하니까, '나' 라는 창고에 그만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하면 지금보다도 더 행복하고 즐거울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죠.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내가 다 해봤다 !!
그런데 솔로몬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기가 그것을 모두 다 해봤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이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로 만드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말이죠. 솔로몬은 자기보다 뒤떨어진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을 이미 다 완료를 해버렸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것을 가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라고 하는 그 레벨을, 솔로몬은 이미 그 레벨을 다 체험했다는 겁니다. 솔로몬은 그것을 최정상의 위치에서 다 해보고 나서, 밑으로 내려다보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위로 기어올라오는 자들을 보고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다 바람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보기에 이 세상이 그야말로 바람만이 휘몰아치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바람보다도 더 작은 것이 인간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그런 바람에 날려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오늘은 이리 날리고, 내일은 저리 날리고, 그렇게 계속해서 흔들리고 날려 다닌다는 겁니다.
여지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사실은 흔들리는 갈대만 되어도 괜찮은데, 그래도 갈대는 뿌리가 있어서 그 자리에 서있는데, 우리 인간은 민들레 홀씨가 되어서 그만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ㅋㅋ).
복음이 좋아서 포항에서 대구로 이사를 오신 분이 있는데, 저는 그분을 만나면 항상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아직도 그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결정한 초기의 강한 기대와 흥분이 세월이 지나고 나면 다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뭔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복음을 따라서 대구에 와도 별 재미가 없네" 라고 나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분에 대한 저의 일방적인 염려인데,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참 잘한 결정이다" 라는 생각이 들기를 원하는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인생이라는 것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데, 그리고 인생은 자기가 젊었을 때는 크게 보이지만, 나이가 들게 되면 조그마한 외부의 충격에 대해서 쉽게 넘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도 없는데, 그야말로 바람에 섞인 먼지가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40, 50대에서는 그래도 집에서 자기가 가장이라고 하면서 큰소리를 치는데, "교육이든 뭐든 모두 내가 알아서 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나이가 70이 넘어서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무엇을 알겠노?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해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들의 결혼에 대해 고집을 피우다가, 자식들의 나이가 그만 30대를 지나서 40대에 접어들면 뭐라고 합니까? "나는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이 좋으면 된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식들은 "아버지, 요즘 왜 그렇게 약해졌습니까?" 라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 경제력이 없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죠.
사라짐, '내가 사라져간다' !!
여기 교재 83페이지와 84페이지에서는 그것을 '죽음' 이라고 하는데, '꼴까닥' 하면서 숨이 넘어가는 게 죽음이 아니고 말이죠. 우리 인간은 죽기 이전부터 계속해서 죽음의 징후를 이 땅에 흩날리고 있는데, 그리고 그것을 '사라짐' 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즉 "내가 사라져간다" 라는 겁니다.
이 '사라짐'을 전도서에서는 '허무' 라고 하고, 성경이 아닌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이것을 '공포'와 '두려움'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라진다는 것이 왜 공포스러운고 하니, 자기가 젊었을 때는 자기 안에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고 본다는 말이죠. 즉 "나는 가치가 있다" 라는 것이죠.
가치가 있으면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면 그런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어디서 아는고 하니, 자기가 남들이 인정해주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게 가치가 있다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나이가 60이 넘어서 은퇴를 하게 되면 아무도 자기를 찾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그 누구도 자기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도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데, 자식들도 자기 살아가는 것이 바쁘고 말이죠.
왜 무섭고 두려운가?
그러니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억지로, 남들이 귀찮아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눌러서 앉아있는 듯한, 그렇게 눈치가 보이는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사라지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나는 가치가 있어.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야" 라고 했던, 그런 의미가 있던 가치가 그만 사라지고 마니까, 그게 두렵고 무섭다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지금도 이런 것을 보니, 내가 죽고 난 뒤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지 싶다" 라고 하시는데, 아니 죽고 나면 누가 찾아오던 말던 상관이 없는데, 그것을 왜 미리 걱정을 하냐는 겁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희들, 내가 죽고 나면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지?" 라고 하는 것과도 같은 의미라는 말이죠.
'송해'에게는 죽음의 징후가 없어 !!
그런데 나이가 90이 넘어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전국노래자랑의 사회를 보는 '송해' 라는 겁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자기를 불러주는 곳이 있으니, 그 나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완전히 장기집권인데, 러시아의 푸틴과도 같다는 말이죠(ㅋㅋ).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우리 회사에 계속해서 나와주셔야 합니다" 라고 하면, "나이가 뭐지? 죽음이 뭐지?"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음은 언제 느낍니까? 자기 가치가 예전보다 못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 사람은 죽음의 징후를 발산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닌데, 50이 되지 않았어도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을 때, 심지어 30대 초반이라고 해도 취직이 되지 않을 때, 어느 회사도 자기를 불러주지 않을 때, 원서만 내면 다 떨어질 때, 이럴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특히 여자의 경우에는 남자가 바람을 피울 때, 자기 집에 먹을 것이 다 있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어도 그만 죽고 싶다는 말이죠. 그러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닌데, 자기의 가치로 인해서 자기가 살아있음과 없음을 결정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자기가 존재하는 의미가 된다는 말이죠.
자기는 남편에게 인정받고, 즉 "나는 당신 때문에 산다" 라는 것을 서로 주고 받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었는데, 그런데 남자가 그만 "나는 이제 당신이 필요가 없어. 갈 테면 가라. 너도 바람을 피워라" 라고 한다면, 그래도 먹을 것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가 아닌데, 먹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죠.
인간은 영적 존재 !!
그래서 오늘강의가 힘드는데, 처음에 강의할 때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그것만 해결되면 인간은 자기가 살만하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좁게 생각한 것이고, 우리 인간에게는 그렇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문제보다도 더욱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그냥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인데, 물론 악한 영이지만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영적 존재이고 정신적 존재인데, 즉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조건 하에서 비로소 자기는 죽음과는 별개의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불멸을 시도하는 필멸의 존재 !!
여기서 잠시 결론을 내려보면, 인간은 영적 존재인데,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죽음과 상관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우리 인간은 영적으로 되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즉 "누구든지 나에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그 인간을 죽여버리겠다. 왜냐하면 나는 죽으면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것을 '불멸의 존재'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불멸을 시도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물론 이 불멸이라는 것은 단순히 숨을 내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자신의 가치를 말이죠.
현대에 있어서 과학이라는 것은, 그것이 상품화가 될 때 비로소 과학이 되는데, 그러니 남들이 사주지를 않으면, 즉 상품화가 되지 않으면, 그러면 그것은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공장에서 제대로 만들어주어야, 그게 상품화가 되고 돈으로 환산이 된다는 말이죠.
자본주의 시장에서 상품이 잘 팔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그만큼 남들이 원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잘 팔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의 영원한 숙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인데, 그러면 과연 여기에는 어떤 상품이 적당할까요? 그것을 4글자로 말하면 '인공지능',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뇌를 몽땅 다 정보화를 시켜서 빼내내는데, 인간의 뇌는 단백질로 되어있어서 나중에는 결국 퍼석퍼석해지고 마는데, 그래서 그것을 변하지 않는 티타늄과 같은 것으로 바꾼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거기에 다시금 정보를 넣게 되는데, 팔다리와 같은 다른 것도 역시 그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죠. 아무튼 기억만 남아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곧 기억 !!
그러니 인간의 가치는 기억에 있는데, 즉 '인간=기억' 이란 말이죠.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치매에 걸린 분들을 보라는 겁니다. 지금 저희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낮에 주무시고 밤에 일어나는데, 그런데 그렇게 일어나 보니 다른 할머니들이 자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왜 남의 집에서 잠을 자노?" 라고 하면서 다 깨운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어머니의 장기기억 속에는 "내가 있는 곳이 내 집이다" 라는 것이 들어있는데, 그래서 모두 깨워서 "여기는 내 집이다. 다들 자기 집에 가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과거에 자기 집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집에는 자기만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옆에 보니 모르는 여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나가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어머니의 인격은 곧 기억인데, 우리가 말하는 인격과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죠. 자기의 가치는 기억으로 전환이 되어서 '시냅스' 라는 두뇌세포에 담겨있을 뿐이란 겁니다.
인공지능과 지니 !!
그래서 그것을 인공지능으로 해서 뽑아내는데, 그리고 그것을 양자 컴퓨터와 같은 것을 통해서 단단하게 만들게 되면, 그런 기억이 있는 이상 자기는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내가 7살 때는 무엇을 했고, 20살 때는 무엇을 했다" 라고 하는, 그런 자기 기억이 있는 이상 자기는 영원한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이 상품이 팔리겠습니까? 안 팔리겠습니까? 당연히 잘 팔리는데, 그러면 그 중간에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요즘 나오는 '지니'와 같은 것인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다들 알죠? 그런 인공지능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기억이 모자라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지니야, 요즘 가장 뜨는 영화가 뭐지?" 라고 하면, 그것을 지니가 찾아서 알려준다는 말이죠. 그리고 "내가 요즘 잠이 잘 오지를 않는데, 무슨 음악이 좋지?" 라고 하면, "그때는 슈베르트의 음악이 좋지 싶은데, 어떻게 괜찮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단순히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 대화까지도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인공지능이 있기 이전에는 개나 고양이가 그렇게 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들은 대우를 해주면 상전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밥투정도 하고, 그리고 똥오줌도 문제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병원비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죠. 복음을 듣는 분 가운데 개를 전문적으로 하시는 분이 있어서 말을 하기가 참 조심스러운데 말이죠.
이 세상에서 상품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꼭 필요한 것을 만들어야, 그게 비싸더라도 많은 돈을 내고 구입을 한다는 겁니다. 요즘 우리 인간의 몸은 아직 인공지능은 아니지만 보철 수준에는 왔는데, 그래서 다리가 부러지고 하면 인공관절로 대체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아예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 편집을 하기도 하는데, 아이큐도 높이고, 키도 더 키우고, 못생긴 아버지가 아닌 엄마를 닮게 만들고, 그런 상품을 지금 마련해놓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불치병에 관련된 유전자는 다 빼버리고, 건강하고 잘 생기고 머리가 좋은 아이로 말이죠. 처세술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죠.
죽음에 쫓기는 인간들 !!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은 무엇에 쫓겨서 그런 겁니까? 그것이 모두 죽음 때문인데, 그러니 인간들이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고 하니까, 죽음이 있다고 하면 그 반대방향으로 달아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런 종류의 것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을 막대한 돈을 주고라도 기꺼이 구입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 것들을, 즉 죽음의 반대방향으로 갈 수 있는 상품들을 연구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국가산업이 살아난다는 것이죠. 고용이 증대되고 국력이 신장된다는 말이죠. 군인들 로봇으로 바꾸어서, 이제는 군에 가지 않아도 되는데, 전쟁도 드론으로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라크의 경우가 그러한데, 드론을 하늘에 띄워서 직접 이라크에 가지도 않고,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는 식으로 이라크를 박살내었다는 말이죠.
그런 세계에서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고, 언약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언약이 없이 생각을 해보자고 했는데, 그렇게 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언약이 없다는 말이죠. 언약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 십자가, 그게 전혀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교회에 가는 것도 하나의 교양을 쌓기 위해서, 그리고 남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는 것인데,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전도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전부가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현대과학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바람이라고? 웃기지 마라. 우리가 그 바람을 실체로 만들고 말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솔로몬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헛된 것도 헛되지 않은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인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인데,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다는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
강의를 다시 해보겠는데, 성경에 나오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지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러한 언약이 없으면 인간대 인간의 지혜를 공유하게 되는데, 그 지혜는 인간의 기억 속에 담겨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데, 그것을 '도제제도(徒弟制度)'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게 나만의 노하우인데, 너에게만 알려주겠다. 다른 곳에는 이런 기술이 없어. 우리 공장에 와서 일을 하면, 너에게만 이 특수한 기술을 알려주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가죽을 연마한다든지, 혹은 강철을 담금질하는 경우에는, 책에는 나오지 않는 자기들만의 비법과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 것은 도제제도라고 해서 특별히 인정을 받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코카콜라의 성분이고 말이죠. 그리고 식당에서 주방장이 자기 보조에게만 특별히 알려주는 것, 신당동의 떡볶이가 그러한데, 며느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억의 누적에 의한 정보의 전달이라는 말이죠.
아무튼 이것은 인간인데, 그리고 그 인간이 죽어도 또 인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 대 인간'의 교류를 통해서 문명은 발달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역사라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수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다는 것인데, 인간이 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이라는 말이죠.
선악과에 숨겨진 비밀 !!
여기에 반해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지시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인간대 인간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아까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불멸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불멸의 존재가 되고싶어하는 것이 곧 인간의 욕망인데, 그게 바로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여기서 잠시 창세기 3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3절입니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알다시피 이 선악과는 열매인데, 이렇게 열매가 있다는 것은 몸체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열매를 따먹으면 몸체와 열매의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그만 끊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열매를 따먹은 자가 새로운 몸체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원래 있던 몸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게 하나님 쪽인데, 당연히 심판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는다는 것을 인간이 오해하기를, 자기가 불멸의 존재가 되면 죽지 않는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렇게 불멸의 존재이고 싶어하는 것을 두고서 '죽음' 이라고 하시는데, 물론 현대인들은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3장 22절을 보겠습니다.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기에 생명나무가 나오는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게 되면 영생이 완성단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따먹고 따먹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 속에 계속해서 들어있는데, 아까 '잡는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러니 주님께 붙어있어야 하는 선악과와, 그리고 주님을 알려주는 생명나무가 어디로 이전이 되었다는 겁니까? 이제는 그만 인간에게로 가게 되는데, 그리고 그것을 악마가 부추겼다는 겁니다. 즉 "너도 신이 될 수 있다" 라고 말이죠.
인간은 몰라, 아무 것도 몰라 !!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작전은 무엇인고 하니, 열매를 다시 원위치를 시키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인간대 인간인 세상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본래 위치의 상실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다들 오래 살고 싶어하지만, 그렇게 오래 살고자 하는 자기는 도대체 어디서 만들어졌고, 누가 자기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거기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일단 태어났으니 무조건 살고 보자" 라는 식인데, 자기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지, 거기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성도로서 그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모른 척을 하면 안 되는데, 제가 약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친절히 알려드리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로마서 9장을 보겠는데, 10절에서 13절입니다.
(롬 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태어나기도 이전에 이미 !!
여기 13절을 보면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은 아직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이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11절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때 이미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서 모든 것이 다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면 선한 일을 할 기회도 아직 없었고, 물론 악한 일을 할 기회도 없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그때 이미 "야곱은 이러해야 한다. 또한 에서는 이러해야 한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이미 확정이 나버렸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의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또한 교회에 다닌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일단 '나' 라는 것이 먼저 태어나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게 아니라고 하는데, 일단은 인간이 태어난 이후에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것, 그런 식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 중심적이라는 겁니다. 너무나도 비성경적이라는 말이죠. 그런 것은 철저하게 인간이 만든 종교중심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종교라는 것은 불멸하기 위해서, 즉 자기가 더 살기 위해서, 지금도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천국에 가서 더 살기 위해서 종교가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전혀 인정해주지를 않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마음, 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내가 구원을 받겠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미 버려진 몸인데,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 "나는 누구를 믿어서 천국에 가지?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갈까? 착한 일을 해서 갈까?" 라고 하는,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미 틀려먹은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정신자체가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는데, 그 망한 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천국에는 누가 갑니까? 그것은 이미 태어난 인간이 결정할 문제가 아닌데, 누가 사랑을 받고, 누가 미움을 받을지는, 사랑은 천국이고 미움은 지옥인데 말이죠.
그것은 니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 !!
예를 들어서, 주님이 여기에 계시고 이근호가 여기에 있다고 하면, 그래서 제가 주님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주여, 누가 천국에 갑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손가락으로 저를 꾹꾹 찌르면서 "너는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저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면, 그것도 역시 "그것은 니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우리 자식은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해도, "그것도 니가 신경을 쓸 문제가 전혀 아니야. 알겠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세 전에, 즉 아무도 없을 때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서로 의논해서 결정된 사항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왜 교회에 다닙니까? 우리가 교회에 다님으로서 그야말로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 다니게 하시고, 성경말씀을 보게 하신다는 말이죠.
주님은 일부러 그런 식으로 유도하시는데, 우리가 하는 짓들이 우리 자신의 운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해봄으로서 제대로 체험하고 느껴보라는 겁니다. 즉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자신의 불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죠.
여러분, 내 인생이 주저앉고 있습니다 !!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렇게 우리는 망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부러 망하려고 할 필요는 없는데, 그런 것은 너무 오버이고, 자기가 망해가고 있는 우리는 중계방송을 하면 된다는 말이죠. 중계방송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인데, 즉 "여러분, 나는 내가 하는 짓으로 인해서 내 인생이 이렇게 망해가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그 어떤 짓을 해도 기쁜데, 왜냐하면 자기는 그 어떤 해도 망하고, 그 망해가는 모습으로 인해서, 자기 기억에서 가려졌던 결정, 즉 "창세 전에 이미 너는 구원이 되었다" 라는 것을 환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야말로 어설픈 짓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주저앉아야 한다는 겁니다.
'A' 라는 스크린, 'B' 라는 스크린 !!
그러니 우리의 '인생' 이라는 것이 하나의 스크린이 아니고 두 개였는데, 'A' 라는 막이 있었고, 또한 그 뒤에 가려진 'B' 라는 막이 있었다는 말이죠. 먼저 'B' 라는 막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로마서 9장이라는 겁니다. 즉 "니가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너를 사랑했다" 라는 겁니다. 물론 불신자의 경우에는 "너를 미워했다" 라는 것인데, 이미 그렇게 결정이 되고 확정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그동안 누가 막나놓았습니까? 악마의 힘에 빠져서 인간이, 그게 바로 'A' 라는 스크린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한다" 라는 것인데, 즉 "내가 교회에 가면 구원을 받고, 가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라는 겁니다.
그런 막이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교회도 가지를 못하고, 자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 남아있는 것은 "여기는 내 집이다" 라고 하는 기억밖에 없다고 하면, 그래서 병원에서 새벽 2시에 "집에 가라" 라고 하면서 자고 있던 사람들을 쫓아낸다고 하면, 물론 더 나이가 들면 그렇게 해도 하지 못하는데, "저것들이 왜 여기서 자노?" 라고 하면서 숨만 내쉰다는 말이죠.
인생이란, 그 자체가 죽음의 중력 !!
그렇게 모든 것이 중력에 의해서 내려앉고 주저앉는, 그래서 "인생이란 그 자체가 죽음의 중력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태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서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주저앉고 내려앉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망해야 하는 육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세월이 곧 인생인데, 그렇게 주저앉을 때, 사실 그렇게 추락하게 되면 기분이 좋은데, 왜냐하면 힘을 빼니 말이죠. 그래서 복음을 알게 되면 매사에 싱글벙글하게 되는데,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 무엇을 해도, 심지어 이스라엘에 여행을 가도 그게 헛되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데, 잡히지 않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꾸역꾸역 기쁨이 되고자 했던 그 시도가, 물론 그게 일시적으로는 매우 기쁜데, 하지만 그 기쁨만큼 허무하다는 겁니다. 그러한 기쁨이 없었으면 허무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인데, 너무 기쁘기 때문에 너무 허무하다는 말이죠.
사랑할 때와 헤어질 때는, 부담 없이 !!
그것은 누구를 사랑해도 마찬가지인데, 누구를 지독히 사랑했다는 것 때문에 헤어지는 아픔이 그만큼 크다는 겁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차라리 몰랐다면 그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훈아가 명언을 남겼는데,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사랑은 없는데, 죽어서 영혼 결혼식을 할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런 것은 그야말로 헛된 망상이고, 그래서 "그 모든 것은 허무와 눈물로 끝났다" 라는 것이 곧 전도서의 결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마땅하다는 것인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해야하는데, 어떻게 말이 좀 이상합니까? 이제 허무를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부담 없이 사랑을 하고, 또한 부담 없이 헤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20대에 이것을 알면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하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그러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는 고맙게 여기고 사랑을 하면 되고, 나중에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때 미워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미리 걱정할 이유가 없는데, 어차피 우리는 망가져서 주저앉고 있는 커튼의 무늬와도 같다는 겁니다. 얼룩덜룩, 그렇게 채색된 무늬와도 같다는 말이죠.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다가 무너지고, 그 앞의 대통령도 또 무너지고, 줄줄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그것은 전부가 다 커튼에 얼룩덜룩하게 색을 칠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의사, 판사, 목사, 교사, 농부, 주부, 그런 것도 다 색칠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무너지고 있는 과정인데, 그래서 인생이란 죽음의 징후이고 징조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
그래서 전도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러니까 재미난 일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놀러갈 때는 가라고 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포도주도 마시라고 하는데, 잠언서는 마시지 말라고 하는데 말이죠. 아껴도 주저앉고 아끼지 않아도 주저앉는데, 그러니 놀 수 있을 때 놀라는 겁니다.
이번에 이스라엘에 가보니, 북유럽의 노인네들이 단체로 관광을 하러왔는데, 다들 뚱뚱하게 배가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성에 올라가는데도 힘이 들어서 제대로 가지 못하는데, 걷는데도 너무 힘이 들어서 말이죠. 그러니 노는 것도 젊어서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헛되다고 하면서 마구 찡그리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밝고도 명랑하다는 겁니다. 또한 그런 인생에 대해서 감출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들통이 다 났으니, 그러니 감추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이죠.
몰락의 가속도 !!
아무튼 이렇게 무너지게 되면 가속도가 붙게 되는데, 자기가 바르게 산다고 해서 그 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인생은 그 무너지는, 즉 몰락하는 속도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미 확정이 되었기 때문에 말이죠.
오늘의 강의제목은 '몰락의 가속도' 인데, 그게 우리의 마음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얼마나 빠르게 몰락하는지 모르는데, 그렇게 몰락하게 되면 드디어 뒤에서 빵빠레가 울리는데, "인생은 이미 확정이 되어있었는데, 그것을 몰랐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것을 두고 '예수의 증인' 이라고 하는데, 즉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모두 다 결정하셨습니다" 라는 겁니다. 물론 아무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임한 자만이 가능한데,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이죠.
무너질 때는 화끈하게 !!
그러니 무너질 때 화끈하게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빚을 내서 크루즈 여행을 가라는 게 아니고, 무리하지 말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젊었을 때는 즐겁게 살 것에 대비해서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 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젊어서 돈을 벌고, 늙어서 놀자"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세속적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전혀 그게 아닌데, 그러니 우리는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잘 놀고 잘 먹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몸을 튼튼하게 잘 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그 무너지는 가속도는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확정되었기에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마지못해 하는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만, 감사하면서 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 실제로 이렇게 한 번 해보겠다는 시도한 사람이 있는데, 그래서 아름대로 열심히 놀아보겠다고 했지만, 물론 처음에는 재미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이게 너무 시시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놀다가 그만 헛되고 헛되다는 것으로 돌아오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너무 헛되면 안 되니까 재미있게 놀다가, 그렇게 하다가 또 다시 헛되고 헛되다는 것으로 돌아오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 전도서의 내용대로 헛된 것에, 즉 허무에 갇혀있음을 깨닫게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런 단조롭고 고된 인생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우리가 일찍이 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하는 것이 제일 좋은데, 그냥 일찍 가려고 하면 자살이 되니 안 되고, 언약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에 의해서 데려감을 당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을 주의 일을 하는 것인데, 이것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라는 말이죠. 자기는 이미 죽은 자인데, 하지만 복음에 빚진 자로서 온 동네를 다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말이죠.
억지 시오니즘 !!
사도바울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 돌아다니는데, 이 팔레스타인을 성경에서는 블레셋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이 유대지역을 로마가 AD 70년에 멸망시키고 난 다음에, 이 지역의 유대인들을 다 쫓아내고 마는데,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이 지역이 팔레스타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시온주의에 의해서 1948년에 전 세계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다 모이게 되는데, 그러니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땅이 여기에는 한 평도 없다는 말이죠. 자기들이 거기에 살아도 거기는 팔레스타인 지역인데, 유대인들의 땅이 아니란 겁니다. 그들은 이미 2,000년 전에 거기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쫓겨났는데, 이집트로 많이 갔고, 그리고는 전 세계로 다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난 뒤에 그들이 다시 모였을 때는, 그들은 유대가 아니라 블레셋, 즉 팔레스타인 땅에 모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억지' 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역사를 초월해서 무시하고 이 땅을 자기들 유대 땅이라고 하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 땅에는 유대인들만 살아야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나가달라고 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들이 곱게 나갈 리가 없는데, 그래서 추방을 시키게 되는데, 그래서 일어난 전쟁이 '6일 전쟁' 이라는 겁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야금야금 땅을 다 점령을 했는데, 아직도 베들레헴 지역, 세겜 지역 등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도 유대인들을 정착시키게 되는데, 모든 비용은 국가에서 대고 말이죠. 그렇게 남의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됨으로서, 은연중에 그곳도 역시 자기들의 땅이라는 것을 시위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그곳에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분쟁이 생기면, 그것을 빌미로 해서 그곳 사람들을 그만 쫓아내어 버린다는 겁니다.
것이게 바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빼앗는 수법인데, 남의 땅에 들어가서 철조망을 치고 자기들의 땅이라고 하는데, 그리고는 자기들의 땅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른 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유대인들이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이미 죽은 자 !!
물론 이것은 현대에 들어와서 일어난 일들이지만, 아무튼 이 지역에 사도바울은 5차례에 걸쳐서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가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미 자기는 죽었다는 겁니다. 자기는 죽었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말이죠.
자기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지 못할 일이 없는데, 사도바울은 인생을 그렇게 보냈다는 겁니다. 자기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자기는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있었다는 말이죠. 그게 사도바울의 인생이고 일생이라는 겁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물론 그가 직업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천막을 만드는 자였는데, 그게 어떤 직업이든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직업도 커튼의 무늬와 같은 것인데, 그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미 자기는 죽었다는 말이죠. 허무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그게 교사라도 괜찮고 가정주부라도 괜찮은데,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까지 갔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오늘 강의제목을 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기억이 나지를 않는데, 지금 제가 무너지고 있는 순간인데(ㅋㅋ), 참 '몰락의 가속도' 라고 했지요? 사도바울은 허무한 것을 이미 아는데, 즉 자기 죽음을 자기가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자기 시체를 운반하는 영구차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즉 "죽음이 내 안에 들어있다" 라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자신만만하게 살아간다는 말이죠.
일찍 찾아온 천국 !!
이것을 제가 '일찍 찾아온 천국' 이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미리 천국을 맛보게 되는데, 자기는 날마다 죽고, 자기 안에는 예수님이 산다는 겁니다. 그렇게 일찍 찾아온 천국, 즉 그렇게 일찍 찾아온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내 운명은 내 행함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죽은 놈이 무슨 행함이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전도를 하든 헌금을 하든 봉사를 하든 그게 의미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인생이 결코 변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운명은 이미 창세 전에 확정이 되었는데, 이미 완료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 완료된 것을 안고, 우리의 몸은 미완료로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거운 자기 몸을 어서 벗어버리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병원에 입원해서 산소호흡기를 하면서 연명치료와 같은 것은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 죽음을 반기면서 맞이를 했는데, 왜냐하면 죽음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이 있었기에 말이죠.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혹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잇는데, 겉에는 육인데, 속에는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는 죽은 자 같지만, 자기는 산 자라는 말이죠.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영적 송해가 되자 !!
그러한 성령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역시 일어나기를 소원하는데, 죽음을 반기자는 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되었는데, 그러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찍 죽자는 말이죠.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죽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송해가 되는데, 나이가 90이 되어도 여전히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이죠. 물론 송해는 주(主)가 아니라 주(酒)에 매여있지만 말이죠(ㅋㅋ).
그러니 육적 송해가 아니라 영적 송해가 되자는 것인데, 즉 "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겁니다. 지금 자기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 주의 일인데, 감사함으로 주의 일을 하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 자신은 죽은 몸이라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
이제 오늘강의를 정리해보면, 언약이 없으면 기억만 남게 되는데, 그 기억 속에는 '나의 가치'가 고스란히 살아있다는 말이죠. 그 가치는 자기가 불멸하기를 원하는데, 그래서 자기 기억 속의 불멸을 추구하기 위해서 행동에 나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착하게 살고 하는데, 그 모든 것은 불멸하기를 원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그 자체가 오류인데, 왜냐하면 이미 망해버린, 이미 성질이 더러워진 인간인데, 그런 인간에게서 나온 수법이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더러운 몸인데, 그런데 그런 몸을 가지고 뭔가 잘되어보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종교' 라는 수법이란 말이죠. 하나님을 믿고 헌신하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다 가증하고 더럽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대로, 뭔가 자기 기억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렇게 자기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그것은 전도서의 말씀에 의하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잡힙니까? 잡히지 않는데, 그래서 매일같이 실패하게 되는데, 그래서 허무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죠.
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주님께서 '나' 라는 커튼을 무너뜨리는데, 주저앉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주님께서는 근원적인 해결을 하시는데, 즉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 라는 것은 선악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네가 정녕 죽으리라" 라는 법칙에 의해서, 선악을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그 어떤 시도도, 그 선악을 아는 것과 더불어서 같이 뭉개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고맙고도 감사한 몰락인데, 우리는 그렇게 무너지면서도, 즉 죽어가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의 결정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말이죠. 별로 복잡하지 않은데,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인데, 그러니 너무 억지로 무리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죠. 다만 주어진 일에 대해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러면 그것이 바로 일찍 주어진 천국의 삶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허무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허무한 이 세상에서, 오히려 그 허무로 인해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예수님을 증거하기를 소원합니다. 허무한 몸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가지만, 성령을 통해서 감사가 이어지는 천국생활을 미리 시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4,3 오후 4시에 마침. 내 나이 50에 천국에서 부르거든, 이미 갔다고 전해주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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