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8 - 경멸
18,02,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7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성의를 다해서 제사를 드리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의가 있는 제사를 받지 않는데, 제사고 뭐고 간에 아무 것도 받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드리는 것을 일체 받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하나님은 왜 받지 않으시는가?
여기 25절에서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기존의 인간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싸움을 하는데, 기존의 하나님은 인간의 성의를 받는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주는 것을 받으면 좋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주는 것을 받게 되면 그 사람에게 휘둘리게 된다는 겁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요구하지 않아도, 받은 사람이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무 것도 받지 않게 되면 그게 또 문제가 되고 마는데,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칠 때는 반드시 음흉한 노림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개인의 이익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의 것을 받지 않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즉 인간 자체가 변화가 되는데, 그 끝은 죽음이라는 겁니다. 시체가 되는데, 그런데 살아있을 때도 그 시체의 속성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 시체의 속성이 확대되면, 그것을 말릴 수가 없는데, 그런 시체 되기, 시체 닮기, 80이 넘어가면 실감이 난다는 겁니다. 90이 넘으면 귀신 수준이 되고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시체 닮기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주제에 감히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려고 하는 속성이 나온다는 말이죠. 인간이 하나님께 "이것은 저의 성의입니다" 라고 하면서 헌금을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이 과연 성의가 맞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음대로 어떻게 하지 못하면서, 그냥 "하나님, 이것은 저의 성의입니다. 정성입니다" 라고 하면서 마구 들이대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은 니 생각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인간은 자기를 괜찮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나오는데, 하지만 인간의 속성자체가 이미 확정된 것인데, 죽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설프기 짝이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인간을 받으십니까? 그것은 이미 모델이 정해져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인데, 그 아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면서 받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받고, 우리는 받지 않고, 그러면 하늘나라가 텅텅 비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들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러면 천국에 가는 자들은 뭔가요?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죽이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구원된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말이죠. 그러면 구원이 된 자와 우리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하면, 다같이 아담의 후손이고 죽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은 천국에 가더라는 겁니다. 가지 말아야 하는데, 자격이 없는데 말이죠.
아무도 천국에 가지 않는다고 하면 문제가 없는데, 예를 들어서, 입사시험을 치는데 아무도 합격자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부정이고 뭐라고 이야기를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합격한 사람을 보니 임원의 아들이고 어쩌고 한다면, 그게 문제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들어갈 자격이 없는데 왜 들어가느냐고 하면서, 사법당국에 고발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고 하니, 아브라함부터 해서 이삭과 야곱, 모세, 엘리야, 그런 구약의 사람들이 천국에 가게 되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사법당국에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받지 않고 하느냐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엘리야가 죽었을 때, 엘리야는 죽었다기보다는 떠났다고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불말과 불수레가 내려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고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다 같은 아담의 자손인데 누구는 그렇게 모셔가고 하느냐는 겁니다. 누구는 시체가 되어서 질질 끌려가든지 불에 태워지고, 누구는 모범택시를 대절해서 모셔가고 하느냐는 말이죠.
시체가 된 엘리사 !!
그런데 같은 계통에 있는 엘리사의 경우에는 어떻게 죽었는고 하니까, 그냥 시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 시체에 닿고 하니 살아나고 했는데, 정작 엘리사의 시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다른 시체들은 살아났다는 겁니다. 참으로 신기한데, 아무튼 엘리사는 이 땅에서 시체로 그냥 죽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엘리사라고 하면 엘리야처럼 불말과 불수레가 내려오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사는 그런 요구도 하지 않고 죽었다는 겁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어차피 시체가 되고, 그렇게 시체가 된 자기가 어떻게 천국에 가느냐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가 엘리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도 같이, 천국은 자기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사람 속에 합세한다는 생각을 해보자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발상의 전환인데, 굳이 자기가 올라가지 않아도 하늘에서 주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죽은 우리의 시체를 거두어서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고 하면, 그것은 엘리야의 불말과 불수레보다도 더욱 확실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올라가실 때 구름을 타고 가셨는데, 그때 제자들이 쳐다보았는데, 자기 구름은 언제 오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물론 예수님이 보내주기는 주시는데, 그것이 그런 구름이 아니라, 즉 불말과 불수레가 아니라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거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데, 예수님은 성령 안에 계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이 와서 우리가 성령 안에 들어가는 순간 누구를 만나는고 하니, 예수님을 만나고, 그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는 만나는 것이란 말이죠.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아빠 아버지 !!
그렇게 되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게 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경상도 말로 '아버지요' 라는 의미인데, 다른 지방의 분들은 이 느낌을 모르지 싶은데, 이렇게 부를 때는 분위기가 아주 좋을 때인데, 즉 친하다는 겁니다.
반면에 '아버님' 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며느리가 그렇게 부르는데, 그 이전까지는 아버지가 아닌데 시집을 와서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이죠. 물론 조금은 억지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바 아버지' 라고 하는 것은, 쉽게 '아빠' 라고 보면 되는데, 즉 "당신이 나를 낳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없을 때도 먼저 계셨고, 그 먼저 계심이 이어져서 자기가 있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며느리의 경우에는 '아빠' 라고 하지 않고 '아버님' 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딸은 얼마든지 '아빠'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법적 관계상 그렇게 불러야 하는데, 그러니 호칭만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조금은 거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아니지만 억지로 아버지로 부르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고 하늘에 계신 분을 아버지로 상정하고,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즉 며느리가 '아버님' 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그러니 억지인데, 굉장히 어색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항상 도망갈 준비를 하고 부른다는 말이죠. 아버님은 언제든지 아저씨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어색함과 억지를 메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성의를 표하고, 그것이 바로 예배, 헌금, 기도, 봉사, 헌신, 선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한 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해서 한 가족처럼 되면, 혹시나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노림수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한 패밀리 !!
그런데 "아빠 아버지가 저를 낳았잖아요" 라고 하는 순간 어떻게 되는고 하니, 예배, 헌금, 기도, 봉사, 그런 것이 다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예배를 드려서, 헌금을 해서, 기도를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한 가족'이 되니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처음부터 가족이었는데 자기만 몰랐다는 겁니다. 왜 막장 드라마에 보면 그런 것이 많이 나오는데, "그 집에 며느리가 되어서 '아버님'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버님이 과거에 자기를 버렸던 아버지였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자기가 평소에 불렀던 그 하나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고, 주님께서 성령을 주시니 자기가 그렇게 부르지 않더라도, 진짜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를 찾아내었다는 겁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우리를 찾아내어서 한 패밀리가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는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라고 하면서 데리고 가신다는 겁니다.
언약의 사람 !!
이런 사람을 두고 구약에서는 '언약의 사람'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언약은 창조이전의 언약인데, 즉 창조이전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런 자들에게 주님이 계속해서 알려주시는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에게 준 내용이, 그것은 너희들이 없을 때 이미 있었던 것을 들려주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미 다 만들어놓았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식을 만들어놓고는, 그 자식이 있기도 이전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시는데, 그게 바로 언약이라는 겁니다. 즉 "니가 있기 이전에 태초에 이런 일이 있었단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하는데,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새로운 패밀리가 만들어지는데, 그렇게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로, 그것을 이미 창세 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을 다 잡으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시해오셨다는 말이죠.
그것을 조곤조곤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쪽에서는 어색하게 억지를 부릴 필요가 없는데, 이것을 어제오후에 "하나님께서는 일체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말이죠. 책임을 물어서 자식을 만드는 것이 아닌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어설프기가 짝이 없고 하찮은 우리를 귀한 존재로 보시고 천국에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죠.
창세 전의 원초적 사랑 !!
이것이 바로 창세 이전의 원초적인 사랑인데, 이것은 언약에서 나온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도 이전에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거기에서 예수님의 몸을 확대시키면서 자기 패밀리에게 그 사랑을 그대로 전달하신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보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의 피를 바쳐서 알려주는 사랑이기 때문에, 것이게 창세 이전의 사랑으로서, 그게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구약의 아가서의 경우에는, 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고 하니, 죽음과 사랑을 비교하면서 죽음 쪽이 큰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죽음보다 더 크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를 늙어서 죽게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사랑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프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아픈 것도 역시 죽음에서 파생된 것인데, 그러니 그런 아픔보다도 사랑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환란과 곤고와 핍박의 경우에도 역시나 그렇고 말이죠. 그 모든 것을 우선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아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해도 치매에 걸리고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관된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성도의 고민거리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주님을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게 해/결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인식'의 문제라고 하는데, 자기가 뭔가를 이해하고 안다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러면 부부싸움을 한다든지 해서 그만 성질이 나서 "나는 주님을 모릅니다" 라고 했는데, 그 순간에 주님이 재림을 하시면 구원에서 탈락이 되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특히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의 경우에, 그만 다른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사려고 간 사이에 신랑이 오고 만다는 겁니다. 하필이면 그때 말이죠. 그런데 그 처녀들이 왜 기름을 사러 갔습니까? 신랑 때문에 갔다는 겁니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기름을 사서 오면 "그래, 수고했다" 라고 하면서 받아주면 되는데,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제일 난처한 경우인데, 자기는 주님을 안다고 하는데 주님은 모른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얼마나 당황스럽겠느냐는 겁니다. 교회에 60년을 다녀도 다 헛방이라는 겁니다. 안다고 치고 억지로 열심과 어색함을, 즉 '아버님' 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대는 어디서 온 색시인고?" 라고 나오면, 정말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나의 인식과 구원문제 !!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내가 인식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구원이 되는가?" 라고 하는, 거기에 대해서 해보겠는데, 이것을 하게 되면 의외의 사태를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을 이어서 해보겠는데 말이죠.
우리가 올라가는 게 아니라 우리를 죽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 창세 전에 있었던 언약이 우리를 파고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평소에 주님에게 잘 해드려야 하는데, 그런데 그만 뇌세포가 썩든지 해서 주님을 부인하게 되면 자기 인생은 어떻게 되느냐고, 그렇게 걱정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생각자체가 잘못인데, 왜냐하면 실제로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우리게는 '즉각적'이고도 '충동적'인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제 오셨습니까?" 라고 하면서 반길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강력하게 반발하게 된다는 말이죠.
성령께서 '경멸'하는 모양새로 !!
왜냐하면 그 오시는 방식이 어떠한고 하니, 그게 바로 '경멸' 이라는 겁니다. 즉 개무시한다는 것인데,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고상한 가치와 품격과 품위, 그런 것들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생각해서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고도 충동적으로, 쉽게 말해서 자동적으로 반발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즉각적'이고도 '충동적'인 반발 !!
이런 것이 부부사이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30년이나 40년을 살게 되면 숙성이 되어서 웬만한 일은 그냥 넘어갈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말 한마디를 그만 잘못하게 되면, 그만 미사일이 날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이런 것이 즉각적이고도 충동적인 반발인데, 그런 것이 유발된다는 말이죠. 아무리 숙성이 되고 삭아도 인간의 충동이란 것은, 즉 경멸에 대한 반발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경상도 중년부부의 대화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 A : 당신은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 B : 지난번에는 가만히 있더니만, 지금은 왜 그래? * A : 그때는 참았잖아. * B : 그러니 지금도 좀 참지. * A : 니가 말하는 버릇을 고쳐라. * B : 이 나이에 내가 어떻게 고치노? * A : 그래도 고쳐라. * B : 그것은 안 된다. * A : 진짜로 못 고치나? * B : 정말 그것은 안 된다.
그런데 나중에 자식들이 와서 왜 싸우는지를 보니, 개에게 밥을 주는 문제 때문에 그렇게 싸우더라는 겁니다. 북한의 핵 문제가 아니고 말이죠. 말투가 이상하고 태도가 이상하다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우리의 하루일과를 보라는 겁니다. 우리의 태도가 한결같습니까? 항상 파장이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자기가 응원하는 롯데자이언츠가 이겼다고 하면, 그러면 집안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데, 그것을 '변수'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외부적인 변수에 항상 유도리가 있는데, 그것을 어제 '자극과 반응' 이라고 했는데, 마치 세포처럼 자극을 주면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반응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성령이 오셔서 조근조근 말씀을 해주셔도, 즉 "내가 너희들의 진짜 아빠다. 내가 너희들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고 해도, 우리 인간은 어떻게 반응을 하는고 하니,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어디 가짜가 와서 진짜 행세를 하려고 합니까?" 라고 하면서 그만 밀어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왜 그 모양세가 항상 우리를 경멸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말씀은 우리를 경멸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위인은 없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배후에는 경멸되어야 마땅한 힘이 있는데, 그게 인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악마의 성질을 대변해주는 현상으로서의 인간 !!
그러니 우리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오시면 성의를 다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마무리지으려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배후에 다른 세력이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인간은 그것의 표면, 혹은 표현력이 된다는 말이죠.
이 말이 어려운데, 뭔가 뿌리에 엄청난 힘이 있고, 우리는 그 힘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는데, 그것을 표면, 표현, 표상, 혹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구분하면 할 수도 있는데, 같은 의미라고 보자는 겁니다. 그런 일종의 현상상태인데, 즉 우리는 악마가 활동하는, 악마의 성질을 대변해주는 현상으로서의 인간이란 말이죠. 그래서 건드리면 '욱' 하는데, 그것은 본래의 우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법과 정당성 !!
이게 바로 힘인데, 이것을 크게 정치적으로 권력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가정에서는 권위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 힘의 특징은 항상 법을 매개로 하는데, 그러면 여기에서는 정당성이 보장되고, 이 정당성은 언제나 상대적인데, 그래서 '나만의 의' 라는 겁니다. 자기보다 더 질이 떨어지는 짐승과 같은 존재, 술을 먹고 개지랄을 피우는 인간보다는 자기가 낫다는 말이죠.
그렇게 항상 상대적인데, 즉 "저 사람보다 나으니 나는 착하다. 훌륭하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법적으로 의가 성립되면, 그 의는 거기에 합당한 보상을 요구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착하니까 복을 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냥 복을 달라고 하면 미안하니 말이죠. 달리 말하면, "착하니까 이 정도로 살아왔다" 라는 것인데, 인간은 그것을 자부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법으로 모든 것을 장악하는 법의 힘인데, 그게 권력이고 권위라는 말이죠. 이렇게 장악되어있으니 우리 인간은 그냥 표피적일 수밖에 없는데, 표피에 나타나는 현상이고 표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가 악마를 보호하고 있는데, "제발 악마를 다치게 하지 마세요" 라는 식으로 말이죠.
이것이 개인적일 경우에는, 자기 주장과 의지를 얼마든지 천명할 수 있는데, 그리고 "이것은 선이다. 악이다" 라고 구분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집단적으로 있을 경우에는, 가족이나 회사의 경우처럼 말이죠. 그렇게 되면 과도하게 그 집단을 보호하려는 속성을 발휘하게 된다는 겁니다.
집단적인 '폭력성'의 발휘 !!
부부싸움의 경우에, 오늘 자주 싸우는데 말이죠(ㅋㅋ). 그것도 공원에서 남들이 보는 곳에서 부부싸움을 하는데, 그런데 그만 너무 심하게 싸우니까 다른 사람이 말렸다는 겁니다. 남자가 손찌검을 하려고 하니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때부터 둘이 한 편이 되어서 그 사람에게 달려들더라는 겁니다. 특히 여자가 "당신이 뭔데 내 신랑에게 함부로 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개인적인 싸움이 갑자기 집단화가 되면 선과 악의 기준이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개인적인 싸움일 때는 적이었는데, 그게 집단화가 되면 한 편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런 대표적인 것이 치맛바람인데, "당신이 뭔데 내 자식을?"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조건 자기가 소속되어있는 공동체, 그 집단을 위주로 '폭력성'이 발휘가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알 수 없는 폭력성이 놓여있다" 라는 겁니다. 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라고 하는데, 아무리 쥐가 고양이에게는 밥이지만,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놓이게 되면, '톰과 제리'를 보면 어떻습니까? 쥐도 얼마든지 고양에게 달려든다는 말이죠. 이런 폭력성에 인간은 휘둘라고 있다는 겁니다.
그 폭력성이 곧 십자가 사건으로 !!
이런 세상에 대한 폭력의 대변자가 누구인고 하니, 그게 바로 우리 개인인데, 이 정도면 주님이 우리를 경멸할만하다는 겁니다. 개무시를 할만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진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시는고 하니, 폭력사건으로 나타나시는데, 이것을 세 글자로 '십자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천주교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신체에 있는데,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참으로 착하신 분이 여러분을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게 천주교의 십자가인데,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의 신체를 작게 만들어서 십자가에 매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개신교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신체는 없고 십자가라는 나무만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감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폭력성은 어떻게 됩니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끼리 동정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 좋은 관계가 되고 마는데, "아이쿠, 불쌍해라. 내가 도와주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럴 때는 폭력성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폭력성이 나타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모든 것에, 일체 공통점이 없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나' 위주의 폭력성 속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을 옹호해줄 경우에만 신을 믿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조건이 형성된다는 겁니다.
영화 '신과 함께'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해주면, 나도 하나님을 사랑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온 영화가 바로 우리나라의 '신과 함께' 라는 것인데, 물론 마귀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그 영화를 본 사람이 저밖에 없는 것 같은데, 무려 1,400만명이나 봤다고 하는데 말이죠.
거기에 착한 귀인이 나오는데, 그 귀인을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죄인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그 귀인이 아무리 착해도 자기를 보고 경멸한다고 하면, 그 귀인이 언제까지 착함을 유지하겠습니까? 전혀 안 되는데, 즉각적으로 반발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제가 계속해서 즉각적이고 충동적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 이유를 아셔야 하는데, 이것은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이 바로 "나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로켓트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따져서 "내가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은 자기 문제인데, 그러니 그것을 따지기 이전에 자기는 어떤 존재냐는 말이죠. 과부가 흰옷을 입고 은장도를 들고서 "참아야 하느니라" 라고 하는 것말고, 물론 그것도 참는 것이 아닌데 말이죠.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면 은장도를 숨기기에 급급하다는 겁니다. 옛날에 그런 코미디 프로도 있었는데 말이죠.
아무튼 인간은 즉각적이고 충동적일 때 폭력성을 나타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폭력성이 있음으로서 십자가 사건이 의미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을 반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해서 도발적으로 공격하는 속성의 표현력, 그런 폭력의 대변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겁니다.
부흥집회에 참석했는데, 목사가 회개를 하라고 하니, 어릴 때 오줌싼 것부터 해서 최근에 과속한 것까지도 다 회개를 한다고 하면,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식의 회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에게 따지는 것이고 자기 자랑이라는 겁니다. 자기를 깨끗케 해서 주님을 반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다 하겠다는 말이죠.
마르다와 마리아 !!
예수님을 반겼던 자들 중에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녀들의 집에 오니까, 그것이 바로 죽었다가 살아닌 나사로의 집인데 말이죠. 언니인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한다고 정신이 없는데,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 바로 앞에서 턱을 고이고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겁니다. 아무튼 언니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말이죠.
물론 언니도 말씀을 듣고 싶지만, 자기를 희생시켜서 음식을 마련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동생은 냄새만 맡고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자 언니가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반발을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에게 뭐라고 합니까? "저 철없는 동생을 꾸짖어서 제가 하는 일을 좀 도와주게 하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언니에게 지적질을 하시는데, "니가 지금 왜 바쁘지? 지금 동생은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잖아?"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 때문에 지금 자매가 서로 한바탕 싸울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눅 10: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눅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눅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강의 처음에 이야기한, 즉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않으신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 이유를 이제 알았지 싶은데 말이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 전혀 모르는데, 아무리 '본인이' 라고 하면서 폼을 잡아도 그 본인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본인' 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감출 것은 다 감추고 나타난 본인인데, 즉 주님에게 칭찬을 받을 것들을 앞장세우면서 위장한, 그런 위선 덩어리의 '나' 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것을 '나' 라고,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죠.
'나'와 '나의 것' !!
어제 낮 예배시간에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는데, 인간은 '나'가 먼저가 아니고 '나의 것'이 먼저라는 겁니다. 즉 '나의 것'이 먼저 있고, 그 '나의 것'에 대해서 '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것'이 망가지면 그 '나'도 같이 사라지고 마는데, 즉 자살로 이어진다는 말이죠.
그 '나의 것'이 돈만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명예라는 겁니다. 그래서 돈이 없는 노숙자들보다도 연예인들의 자살이 더 많다는 겁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면 건강이고 말이죠. 연세가 많은 분들 중에서 건강을 잃어서 자살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죠.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말이죠.
'황금빛 내 인생' 이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아버지가 무엇인데 자식들의 인생에 관여하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들의 질병과도 같은 것인데,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자식이 부모를 이용해먹는다는 겁니다. 부모가 되어서 그만 무한책임을 뒤집어쓰고는 암에 걸렸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상상암이라는 말이죠. 그런 암이 있는 게 아니고, 상상해서 걸리는 암이라는 겁니다(ㅋㅋ).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느냐는 것인데, 그래서 결국 자식들이 아버지가 있는 강원도의 정선까지 찾아와서 위로를 해주는데, 그러니 아버지가 되어서 얼마나 철이 없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철이 드는 것이 아닌데, 그냥 "니나 잘하세요!"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이미 이혼한 상태에서의 결혼 !!
부부가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겁니다. 부부는 서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어느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말이죠. 이미 이혼한 상태에서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이 결혼이 아니라는 겁니다. 얼마든지 즉각적이고 충동적으로 이혼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각자가 서로를 이용해먹으면서 살아가면, 그게 행복한 가정이라는 겁니다. 서로 도와준다고 하면서 생색을 내지 말고 말이죠.
남편이 아내를 생각하고 아내가 남편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런 것은 이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망상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남편이 월급을 가져다주면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편은 마누라에게 들키지 않고 틈틈이 취미생활을 즐기면 되고 말이죠(ㅋㅋ).
그러니 인생이라는 것은, 두 개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냥 편리해서 같이 살아가는데, 특히 경제적으로 말이죠. 처음에는 욕정인데, 즉 끌려서 했다는 겁니다. 미남이고 성격도 좋고, 돈도 많고, 그것으로 끝인데, 신앙은 그 조건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사건과 사물 !!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모든 욕정과 욕망은 마치 바람과도 같아서, 날아가 버리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현장에 없는데, 그것을 '사건'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사물과는 다른데, 사물은 다음날에 가도 그 자리에 있는데, 사건은 일어난 것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육체는 사물인데, 그러니 사건에 종속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데,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없는 것이 현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즉 사물전체를 지금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죠.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사건이 통제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중심이기에 !!
그것을 골로새서 1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물, 즉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는 않는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실제로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산과 들과 집과 자동차, 그리고 사람들만 보인다는 겁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런데 그 보이는 것을 통합시켜서 하나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설명이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게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은, 혹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통괄하는 사건과 자기가 연결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는 '통일' 이라고 하는데, 물론 우리나라의 통일교는 이 통일이 아니고, 그것은 기독교가 아닌 불교라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토속종교를 기독교로 색칠한 것이 통일교라는 말이죠.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좀 공부를 했는데, 이 통일교는 가정중심이라는 겁니다. 즉 "가정이 잘 되어야 행복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통일교가 세운 학교가 '선문대학교' 라고, 거기에 우리나라의 유일한 과가 있는데, '순결학과' 라고, 여자는 결혼을 하기 전에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
이렇게 "가정이 잘 되어야 행복하다" 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토속종교인데, '신과 함께' 라는 영화에 나오는 내용과 똑같다는 말이죠. 그 영화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부모에게 효도하면 죽어서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환생해서 괜찮게 또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지금 그것이 대만과 필리핀과 같은 곳에서 대히트를 친다고 하는데, 그러니 눈에 보이는 가정중심의 사고방식이 유교중심의 동양권에 퍼져있는데, 소위 효도악마가 말이죠. 특히 대만과 같은 곳은, 집집마다 향을 피워서 무엇을 기원하는고 하니, 그저 자기 가정이 잘 되게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저기 베트남이나 스리랑카와 같은 동남아권은 불교와 힌두교인데,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이고 말이죠. 하지만 그 어떤 종교가 되었던 간에 전부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이라는 것인데,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육이라는 말이죠.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겠다 !!
그렇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과연 어떨까요? 역시 다르지가 않는데, 인간의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마귀의 표현력인데, 즉 마귀가 인간을 장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것은 다 건드려도 되지만 자기 자식만큼은 안 된다는 것인데, 만약에 그렇게 하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자기는 자기 속에 그런 것이 있는 줄 모르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하십니까?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다고 하니,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즉각적이고도 충동적인 반발이 나오지 않으려고 해도, 도저히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나의 범주의 확정 !!
그래서 이것을 '나의 범주의 확정', 혹은 '나의 확정'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바로 이런 '나' 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장시켜서 어디까지 나아가겠다고 한다는 겁니까? 천국까지 한 번 이어보겠다고 하는데, 물론 이런 노림수는 바로 사탄의 것이고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노림수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문제가 없다" 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어때서?" 라는 것인데, 한 글자로 "뭐?" 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죠. 그래서 "뭐? 뭐? 뭐? 뭐?" 라고 한다는 겁니다. 4글자로는 '부부싸움' 인데, 아마 이러한 노래도 있지 싶은데 말이죠.
------------------------------------- 나는 문제 없어 / 황규영(1991)
이 세상 위엔 내가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 나의 사람들과 나의 길을 가고 싶어 많이 힘들고 외로웠지 그건 연습일 뿐야 넘어지진 않을꺼야 나는 문제없어 -------------------------------------
그러면 이러한 육을 어디까지 가지고 가야하는고 하니까,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가지고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에 이야기했던, 즉 "한 패밀리다. 창세 전에 언약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언약에 의해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창세 전부터 사랑하기로 하셨다. 그런 한 가족이다" 라고, 그렇게 성령께서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악마라는 바위에 피어난 이끼이기 때문에, 즉 표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주님에 대해서는 반발을 하고, 반면에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아버지여, 아버지여!"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 쪽에서 접근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은 아무 것도 받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것은 우리를 경멸하는 말이라는 겁니다.
주는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발길로 차버리는 것과도 똑같은 것인데, 그러니 준 사람은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자기 인생에 대해서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면 안 되고, 절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위로해주어야 하는데, "당신은 사랑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이라고 하면서 노래를 불러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반발을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리고 형님 !!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이런 반발을 극복해서, 즉 "어디서 이게 까불어?" 라고 하면서 딱 쥐고 잡아당겨서 가지고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욥기에 나오는데, 욥이 당할 때 욥의 주위에는 욥의 친구들 3명이 포진되어있었는데, 엘리바스, 빌닷, 소발인데 말이죠. 그들은 욥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들의 세계관으로 해석을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여기에 집을 나간 탕자가 있고 그의 형님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형이 자기 동생인 탕자에 대해서 해석한 구절이 있는데, 그가 뭐라고 합니까? 30절에 보면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러니 자기가 보기에 자기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에게 다 말아먹은 놈이라는 겁니다. 이제는 갈 때가 도저히 없어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그야말로 인간 말종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누구의 편인고 하니, 형이 아니라 탕자의 편에 섰다는 겁니다.
욥도 마찬가지인데, 욥이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하나님께 저렇게 지독한 벌을 받느냐는 말이죠. 물론 욥이 죄를 짓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저렇게 벌을 받는 것을 받는 것을 봐서는 거기에 비례해서 지은 죄의 양도 많다는 겁니다. 톨스토이의 '죄와 벌' 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는데, 즉 죄가 있는 곳에 벌이 있다는 말이죠.
무(無)와 벌(罰), 즉 고난만 있어 !!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철폐해버리시는데, 그러니 없는 곳에 벌만 있는데, 즉 고난만 있다는 겁니다.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고난만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누군가가 죄가 없는데 천벌을 받는다고 하면, 과연 그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 인간은 악마에게 붙어있기 때문에 선악체계라는 한 통속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악체계에서는 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즉 죄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악한 일이 없는데도 벌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이 선악체계가 무산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 선악체계 자체가 그만 악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인간이 선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그럴 수준이 되지 못하는데 선을 생각하니, 그것 자체가 그만 악이 된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천국에 갈 수도 없는 인간이 구원을 시켜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곧 악이 된다는 겁니다. 살아서 고생을 했지만 죽어서는 좋은 곳에 가겠다고 하는 것, 그것 자체가 바로 악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인간은 악마의 대변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버림을 받은 이유를 아무도 몰라 !!
그래서 욥처럼 오신 분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는데,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말이죠. 그래서 뭔가 하나님에게 지은 죄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죽을 때 나무에 달리셨는데, 그런데 신명기 21장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말씀이 맞는데, 예수님도 나무에 매달려서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저주를 받은 것이 틀림이 없다는 말이죠.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라고 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야하는 그 내력을 모른다는 말이죠. 그것을 설명하려고 해도 앞뒤가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령이 오시게 되면 무엇을 알게 되는고 하니, 예수님은 자기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바로 너희들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을, 바로 그것을 전하는 것이 성령이 전하는 소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인데, 너희들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고, 그렇게 좋게 좋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은 자기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고 싶은데, 마침 구원자인 예수가 왔다고 하니 믿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경멸 대 경멸 !!
그래서 주님은 정반대로 오셨는데, 우리가 잘났다고 여기는, 정당하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을 경멸하려고 오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이 먼저 인간을 경멸했기에, 그래서 인간도 주님을 가만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야말로 경멸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고등학생이 선생님에게 덤벼들다가 한 대 얻어맞으면 그것을 경멸로 여기지는 않는데, 맞을 각오를 하고 덤볐으니 말이죠. 그런데 어느 고등학생이 초등학생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고 있는 것을 보고 꾸짖었는데, 그만 얻어맞았다는 겁니다. 그것도 초등학교 여학생들에게 말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경멸, 즉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주님은 로마군인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귀싸대기를 맞았는데, 그러한 희롱을, 즉 경멸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으로 보는데, 그게 약속이라는 말이죠. 예수님 자신이 마실 '쓴 잔'으로 본다는 겁니다.
(마 27: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마 27: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마 27: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쓴 잔인가? 종교생활인가?
그러니 우리 주님은 로마군인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귀싸대기를 맞았는데, 그러한 희롱을, 즉 경멸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으로 보는데, 그게 약속이라는 말이죠. 예수님 자신이 마실 '쓴 잔'으로 본다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성질도 부리지 못하는데 말이죠. 잘못하다가는 고혈압으로 그만 돌아가시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참아야 하느니라 !!
그렇다고 해서 참을 인간이 아닌데, 우리는 참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만약에 참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참는다는 것이 무엇이 되는고 하니, 그것이 그만 구원의 조건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25년 11개월 6일을 참았는데, 어떤 일이 있어서 '욱' 하면서 성질을 내었는데, 그때 예수님이 재림했다고 하면, 그러면 탈락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끝인데, 아무리 회개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그것을 과학에서는 '임계점(critical point)'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참는다는 것이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데, 꾹꾹 눌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종의 스프링이니까, 참다가 참다가 터지고 만다는 것이죠. 이미자는 그게 여자의 일생이라고 노래를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는 것이지, "이것은 당연합니다" 라고 하는 감사의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참는다' 라고 했을 때, 그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주변의 상황에 따라서 참는 것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만약에 초등학생이 자기에게 까분다고 하면, 그것은 참을 수가 있는데, 굳이 상대할 가치가 없으니 참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회사에서 상사인 과장이 자기를 옥상으로 불러내서 따지는데, 자기가 그만 들이박았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 통쾌하다는 겁니다. 전도사의 경우에는 부목사에게 덤벼드는, 그런 것이 쾌감이라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인간은 참아도 무엇을 보는고 하니, 마치 사이다와 같은 통쾌함이 주어지는지 않는지, 그것을 구분해서 참으니까 그 참음이 일관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 정도로 비겁한데, 참으려고 하면 계속해서 참든지, 아니면 터지든지, 그것을 자기가 알아서 판단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참았다가, 말았다가,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운전을 할 때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자기가 소나타를 몰고 가는데, 앞에서 아줌마가 모닝을 타고 가다가 끼어들면 참는데, 자기는 남자니까 말이죠. 그런데 벤츠를 몰고 가는 사람이 끼어들면 참지를 못하고 내려서 한 소리를 하는데, 그러면서 자기는 쾌감을 느낀다는 겁니다. 벤츠를 이겼다는 말이죠. (녹취 구 - 목사님, 실제로는 비겁하게도 그 반대가 더 많습니다. ㅋㅋ)
그러니 참는 경우에는 일관성이 없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정당성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참으면 자기가 즐겁다는 말이죠. 그러니 쓴 잔이 자기에게 왔을 때, 그것을 가지고 "힘이 드니까 참자"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커피 한 잔의 향기 !!
어제 낮 시간에 천벌의 예를 들었는데,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시간에 아파트의 베란다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데, 그러면 잠이 저절로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천국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될 정도인데,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주위에는 방해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말이죠. 서문시장에 파는 홈드레스를 입고 폼을 잡고 설교를 듣는데, 커피도 한 잔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하늘에서 내린 천벌인데, 왜냐하면 천벌은 자기에게 얼마나 쾌감이 있느냐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어디에 놓여있는지, 즉 "여기가 천국인가? 아니면 이 세상인가?" 라고 하는,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있다면, 그게 아무리 편안하게 여겨진다고 해도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죠.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로 인해서 벌을 받고 있는 중인데, 그런데 이런 천벌 가운데 감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커피향이 마구 피어오르는데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주여, 이런 천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제가 이번에 제 딸인 진주에게 뭐라고 했는고 하니, 지금 팔을 다쳐서 기브스를 하고 있는데 말이죠. 자기가 다친 것 때문에 걱정을 할까 싶어서,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그렇게 다치게 되면 힘이 많이 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번에 밀양 세종병원에서 불이 난 것을 예로 들었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다가 무사히 탈출을 했는데, 그만 마지막에 넘어져서 팔을 조금 다쳤다고 하면, 과연 그것을 가지고 불평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딸이 하는 말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라고 하는데, 그러자 졸지에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는데 말이죠(ㅋㅋ).
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아무리 겨울에는 폼을 잡고 있지만 여름이 되면 녹아서 다 없어지고 마는데, 우리 인생도 역시나 그러하다는 겁니다. 즉 주기적 게임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 전체가 악마의 암석 위에 놓여있는데, 산부인과에서는 아이가 태어나고, 요양병원에서는 사람이 죽고,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 배후에 있는, 악마의 정체 !!
그러니 주님은 우리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데, 눈사람과 같은 인간과 무슨 상대를 하겠느냐는 말이죠. 다만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이것을 건드리는데, 우리 배후에 있는 악마의 정체, 이것을 주목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거기에 말려들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대해서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감사할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 거부한 흔적을 십자가라는 사건을 가지고, 그것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풀이해서 찾아들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성질이 어디로 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는 희생자가 되시는데, 우리의 짜증을 다 받아내시고, 우리의 분노를 다 받아내시고, 우리의 반발을 다 받아내시고, 그러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이 그 어떤 소리를 하더라도, 나는 너희들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주님은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묻지 않는데,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와는 상대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처음에 이야기한 것과도 같이,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하나님께서 일체 우리의 것을 받지 않는 이유를 알겠지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자신의 피 흘림, 즉 쓴 잔의 자리를 넣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에게 경멸을 당해도, 그렇게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우리의 경멸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지 않아도 되시는 주님께서 당하신 그 경멸이, 그게 우리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고통보다 더 강렬한 주님의 고통 !!
그게 바로 구원의 능력인데, 자기의 고통보다도 주님의 고통이 훨씬 더 강렬하다는 말이죠. 초등학교 여학생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는 경멸보다도,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든 피조물인 인간에게 귀싸대기를 맞는 것이 더 큰 경멸인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을 보면, 모든 경멸은 거기에 다 나타나있는데, 인간이 인간을 경멸해도 기분이 나쁜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경멸을 당하셨는데, 주님은 그것을 감내하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주님의 인내가 늘 반발하는 우리에게 침투하시는데, 그게 바로 주님의 사랑이고, 그 능력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왔는데, 그런데 우리가 너무나도 강렬하게 반발을 하니, 주님께서 "너는 도저히 안 되겠다" 라고 하시면서 그냥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서, 우리가 그 어떤 반발을 한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그런 악마의 고리를 모두 다 완벽하게 끊어버리고,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다 데리고 가시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경멸을, 모든 수모를 주님이 모두 당하셨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죠.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구약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될 수 없는 우리의 자리에 주님께서 자기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것이 구약이라고 하면, 신약은 그 약속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인데,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구유에 태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죄밖에 모르는 우리 몸 안에 장착되는 식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고 하니, 그런데 이 인식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곤란해진다는 겁니다. 우리는 눈사람인데, 눈이 녹으면 인식도 같이 녹아 내리고 만다는 것이죠. 그래서 너무 인식을 너무 강조해서는 안 되는데,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라고 했을 때, 이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말이죠.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 구성이 되어있는고 하니, 이것이 훗설의 현상학에 나온다는 겁니다. 먼저 아는 주체가 있고, 그 다음에 대상이 있다는 것이죠. "내가 안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을 누가 눈치를 채는고 하니, 먼저 '나' 라는 것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게 중요한데 말이죠.
대명사가 아닌, 동사 !!
우리는 '나' 라는 것은 없고 신체만 있는데, 그런데 뭔가 대상을 있을 경우에는 임시적으로 '나' 라는 것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 차를 누가 마셨지요?" 라고 했을 때, "내가 마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는데, 처음에는 차가 있으면, 그것을 마시는, 즉 동사가 있는데, 명사가 아니고 말이죠. 즉 행동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런데 '나' 라는 대명사인데, 우리는 동사로 살지 대명사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길을 걸으면 "나는 걷고 있다" 라고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냥 걷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발자국 소리는 누구의 겁니까?" 라고 하면, "예, 저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나'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죠. 누군가가 물을 때 말이죠.
그러니 대상 중에서 누군가가 지목할 때 '나' 라는 것이 나오고, 그렇게 지목하기 이전에는 대상을 대상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믿는다" 라는 것이 하나의 대상이 되어버리면, 여기에 '나' 라는 것이 선정이 되고 만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네가 믿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주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다" 라고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능력으로, 그렇게 주님이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붙잡으려고 한다면 의식적으로 3초인데, 그게 사건이니 그만 다 날아가 버리고,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즉 "나에게 그러한 일이 있었다. 그러니 나는 신자가 맞잖아?" 라고 하면서 자기가 그만 자기를 믿어버리는, 그런 오류가 생기게 된다는 겁니다.
언제나 감사함으로 살면, 그게 복된 인생 !!
그러니 "나는 무엇을 믿는가?" 라는 생각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 그냥 감사히 여기고 살면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믿는지 믿지 않는지, 그런 것을 따지게 되면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가 누구지?" 라고 하면서 돌아다닌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서, 자기 대상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자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늘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고백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치매에 걸려도 어떻다는 겁니까? 어차피 눈사람은 녹게 되어있는데, 즉 인생이라는 것은 풀이나 꽃과 같아서 어차피 다 사라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말씀은 영원히 서는데, 그러니 우리는 "말씀대로 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눈사람과 같은 존재인데,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마치 이 세상이 자기를 위한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하시는 그 무대에 같이 엮여서, 주님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2,7 오후 2시에 마침. 경멸을 당하지 않음을 감사히 여기지 말게 하소서 !! |